사랑 중의 사랑

최송연의 신앙칼럼 2014. 4. 22. 01:30







“사랑” 바다의 진주인 듯 해맑고 청아하며 붉은 산호초처럼 빛나고 새까만 청색 하늘의 별처럼 영롱하다. 생명의 젖줄을 입에 물고 힘차게 빨아대는 어린 아들을 바라보는 젊은 어머니의 그윽한 눈빛, 흐드러진 들꽃 한 송이 꺾어 함께한 소녀의 머리에 꽂아주고 벌겋게 상기된 얼굴을 감추려고 소나무 뒤로 달아나 숨는 까까머리 소년의 순수한 마음도 사랑이다.

“ 사랑” 모든 시인들의 가슴에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고운 시어( 詩語)이며, 영원히 노래해도 좋을 만큼 아름다운 언어이다. 언젠가 어느 책에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죽음의 침상에 누운 사람에게도 ‘사랑’은 필요한 것이라고…이토록 모든 인간이 갈망하는 것이 사랑이지만 그 사랑을 소유하기는 쉽지 않다는데 인간의 비극이 있는 것이 아닐까?

안타깝게도 모든 인간이 그토록 갈망하는 사랑, 그 사랑이란 것이 영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고 어쩌다 쟁취한 사랑이라고 하여도 사랑이란 상대적이기에 종국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만 주게 됨을 알 수 있다.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상처 주기 쉬운 것이 우리네 인간사이기도 하다. 가까운 예로 가장 사랑해야할 부부의 사랑이 그러하다. 너를 위한 사랑이 아니라 나를 위한 사랑이기에 우리는 늘 사랑을 갈망하나 얻는 것은 사랑으로 오는 행복이 아니라 미움과 원망이 더 많은 것이다. 이것이 범죄한 인간의 사랑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사랑을 정의하기를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그렇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사랑이란 실제로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오로라’일 수도 있다. 참사랑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 아가페”적 사랑, 전적 주는 사랑이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 있다면 그것이 가장 숭고한 사랑이며, 참된 사랑이라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다. 사랑하기에 풀무불 속에 자신을 내어던진다면 그 사랑은 믿을 수 있는 사랑이란 것이다. 입술의 유희가 아닌, 사랑을 증거로 확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희생의 댓가를 지불 할 수 있을 때 뿐이다!

인간은 누구나 세상을 살면서 어려움과 고통의 터널을 지나갈 때 그 다가오는 어둠을 원하지 않기에 매사에 이타보다는 이기적이 되기 쉽다. 이런 인간의 심리를 바탕으로 한 때문에, 고통도 자기 자신을 위한 고통보다 타인을 위한 고통을 당해야 한다면 그 고통의 수위는 한층 더 높아질 것이다.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고난이 더욱 가중되는 것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 아니라 온 인류, 처음부터 선(good)이라고는 한 가지도 없고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는 흉악한 무리의 죄악을 대신 지고 가는 고통이었다.

그 고통을 스스로 당하셨기에 예수님의 사랑은 참사랑이며 사랑 중의 사랑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분이 사랑 때문에 당하신 고난을 잠시 생각해 보면,

1) 예수님은 삼중 적 고통을 겪으셨다

1. 육신 적으로 당하는 고난
어떤 신비적인 사람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육신의 고통은 별로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믿음이 참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또 얼핏 들으면 그럴법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를 않다. 그는 완전한 신이심과 동시에 완전한 육체를 가지셨다. 따라서 육체가 찔리면 아프고 고통을 느껴야만 하도록 신경세포가 살아 있는 예수님이셨다. 만약, 찔러도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는 장애인이요, 중풍에 걸린 환자의 병든 육체란 말이 되기에 말이 안 된다.

마 26장 37절을 보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하셨고, 39절에는 “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찢어지는 고통이 얼마나 무섭고 큰 것인지를 미리 다 아셨기에 주님께서 이 고통을 지나가게 해달라는 간구를 하신 것이다. 그의 고통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었던 것이다.

2. 심적으로 당하는 고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군중을 사랑하셨다.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가르치시고 배고플 때 광야에서 먹여주셨고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모든 필요한 것을 다 채워주셨고 가르치시며 3년간이란 긴 시간 동안 함께 생활하셨다. 그런데, 막상, 십자가를 져야 하는 절박한 때가 되니까 하나같이 모두 배신하고 버리고도망을 갔다.

a. 가롯 유다는 은 30냥에 예수님을 팔았다.
b.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 이나 부인했고
c. 다른 모든 제자가 다 도망쳤다.
사람들이 생활 중에서 아픈 사연들이 많다. 그 많은 아픔 중에서 가장 큰 아픔을 느낄 때가 언제일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버림받거나 배신당했을 때라고 한다. 한 솥에서 함께 밥을 먹던 제자들, 수제자라고 불리던 베드로, 신임하고 돈궤를 맡겼던 가룟인 유다뿐만 아니라 모두 달아날지라도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하겠나이다 하고 큰 소리로 맹세하던 제자들이 다 도망을 가버렸다. 이 사실을 보시던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 것인가? 그렇다 육신을 입은 우리 주 예수님은 배신감 때문에 극심한 심적 고통을 겪으셨던 것이다.

3) 영적으로 당하는 고난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육체의 고통도 힘이 들고 마음의 고통, 심적인 고통도 고통이다. 그런데 가장 큰 고통은 영혼의 고통이라고 본다. 하나님과 하나로 늘 함께하시던 예수님, 갑자기 하나님과 단절되는 캄캄함을 느낄 때, 그 선을 넘어 캄캄한 흑암으로 덮인 터널 속을 지나야 하는 것과 같은 시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는 영의 세계마저 막혀버렸던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성부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려버렸기 때문이다. 그만큼 인류의 죄가 무겁고 중했던 것이다.

마 27: 45-46을 함께 읽어보자. “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9시까지 계속하더니 제9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뜻이라” 했다.

그렇게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그 한몸에 짊어지신 “흉악한 죄인”으로 처형당하셔야만 했다. 따라서 성부와 영의 교통까지 끊어졌고 캄캄함을 느끼시는 처절한 고통을 당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고통은 이렇게 삼중 적 고난을 겪으셨던 것이다.

2) 사랑 중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걸어가시는 예수님이 겪고 계시는 처절한 능욕은 어둔 구름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먹구름 아래로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지! 예수님께서 자신이 못 박히실 십자가를 친히 짊어지고 가셨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지!
이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에 비추어 볼 때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사실, 성경에서 자기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갈 고문 형틀과 사형 형틀을 짊어지고 갈보리로 걸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상징이요 표현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휘장이요 문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셨다. 그것도 가장 고통스럽고 참혹한 죽음을 죽으셨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자기의 외아들을 내어주셨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자기 자신을 내어주셨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예수님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다.

사랑! 오직 사랑만이 여호와께서 영원 전부터 구속언약(covenant of redemption) 안에서 행하신 모든 구원을 우리에게 공급해 준다. ´옥타비우스 윈슬로우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에 비추어볼 때만 제대로 이해된다고 했다.

그렇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것은 오직 “사랑” 때문이다. 자기가 지은 죄로 죽어 마땅한 죄인들이지만 그들이 죄악 중에서 고통당하며 처절하게 죽어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 긍휼의 마음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 마음이시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고 그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는가? 생각해보아야 한다. 고난주간은 경건한 모양으로 새까만 옷을 입고 금식하고 그런 외적인 나타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은 자가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죽은 위성인 별들이 찬란한 햇빛을 받았으면 그 빛을 반사하여 어두운 세상을 비추게 마련이란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삶에서 밝은 빛보다 어두운 그늘이 더 짙게 드러난다면? 이는 분명히 뭔가 잘못된 것이다.

미국의 한 대형교회 목사가 노숙인이 된 이야기가 페이스북을 비롯하여 인터넷을 크게 강타하고 있던 실화를 읽어본 적이 있다. 예레미아 스티펙이라는 목사 의 이야기다. 목사는 어느 주일 오전 자신이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될 교회 근처에서 노숙자로 변신해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하지만 교인 중에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걸어온 사람은 불과 세 명에 불과하더란다.

스티펙 목사는 교회로 향하는 교인들에게 배가 고프니 잔돈 좀 달라고 했지만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더라고 했다. 예배시간이 되어 교회에 들어간 스티펙 목사는 맨 앞자리에 앉으려 했으나 예배위원들의 저지를 받고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맨 뒷자리에 겨우 착석하게 된다. 이윽고 새로운 목사가 부임했다는 광고 시간, 맨 뒷자리의 스티펙 목사는 노숙인 차림 그대로 강단에 올라갔고 교인들은 경악 했다.

그는 곧장 마25:31-40까지를 읽어 내려갔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것을 읽고 난 스티펙 목사는 이날 오전에 겪었던 것을 말하면서 “나는 오늘 아침 교인들이 모이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교인은 아니었다. 세상에는 교인들이 많다. 하지만 제자는 부족하다. 여러분은 진정 예수의 제자입니까?” 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훌륭한 제스쳐다. 초심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어떤가?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고난주간이다. 연례 행사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지나 않은지… 표면적 겉치레와 사람의 교훈으로 가르치는 것에 만족하고 있지나 않은지…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이란 곧 그분의 사랑을 받은 그대로 나타내 보여주는 사람이 돼야 할 것이다. 수난의 주님이시여, 내 마음속에 좌정하소서, 그리하여 그 빛을 나타내소서, 영원히!!!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벧전 2: 22-24)
USA 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 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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