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에 대한 관심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다. 요즘도 교계에는 방언과 관련하여 논쟁이 뜨겁다고 한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방언논쟁은 주기적으로 제기되는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만큼 방언은 끊임없는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민감한 사안이다. 이럴 때 신약성경은 방언에 대하여 어떤 견해를 제시하는지 정리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방언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천사의 방언과 사람의 방언이다(고전 13:1). 천사의 방언(글로사)은 사도 바울 자신이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고후 12:4)이라고 정의했기 때문에 우리의 몫으로 더 이상 논의할 것이 없는 듯이 보인다. 사람의 말은 순수한 외국어와 종교적인 성격을 띤 언어로 구분할 수 있다. 잔소리를 늘어놓을 것 없이 외국어란 문법으로 정리하는 것이 가능한 언어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헬라 말과 히브리 말(디아렉토스)을 했다( 21:40). 그는 당연히 로마 말을 할 줄 알았을 것이며, 이 외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수많은 나라들을 여행했기 때문에 다양한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의 말 가운데 종교적인 성격을 띤 언어(글로사)는 타의적 방언과 자의적 방언으로 나누어진다. 타의적 방언은 오순절 날 초대교회에 발생했던 것처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언어이다( 2:4). 그런데 타의적 방언은 말함으로서의 방언일 가능성도 있고, 들음으로서의 방언일 가능성도 있다. 이 두 가지 가능성은 제자들이 여러 지방 사람들의 방언(디아렉토스)으로말했다( 2:6)는 표현과 여러 지방 사람들이 자신들의 방언(디아렉토스)으로 들었다( 2:8)는 표현 때문에 모두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아무튼지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말하는 사람들과 듣는 사람들 사이에 상호이해가 성립되었다는 점에서 이것은 문법이 있는 방언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방언을 통역한다는 것은 문법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전 12:10; 14:13,26-28).

 

자의적 방언은 사람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조어(造語)이다. 기도자가 때때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기도내용을 듣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자기만 사용하는 기도 말을 만들 수 있다. 또 어떤 경우에 기도자는 기도할 내용이 산더미처럼 많은 데 마음은 바쁘고 시간이 부족할 때 앞뒤 말들이나 가운데 말들을 생략하고 압축해서 자신만의 특유한 어법으로 기도할 수 있다. 이런 자의적 방언에는 문법이 없다. 엄격히 말하자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방언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낸 조어이다. 따라서 자의적 방언을 가리켜 구태여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강변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억지이다. 그것은 기도를 돕는 데 어느 정도 유익하다는 점에서 이미 충분한 가치를 가진다. 따라서 자의적 방언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굳이 제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방언에 관해서 논의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방식보다도 내용과 목적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방언이라면 그 내용은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는 것이어야 하며( 2:11), 그 목적은 자기를 세울 뿐 아니라(고전 14:4) 교회를 건설적으로 만들며(고전 14:5) 심지어 불신자에게도 유익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전 14:22). 이런 내용과 목적에 맞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방언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지금도 은사를 주시지만 동시에 살아계신 하나님은 지혜로시기 때문에 함부로 은사를 주시지 않는다. 모든 은사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두 속성은 사람이 감지하거나 인식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오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헬라어로 글로사는 혀를 가리키며디아렉토스는 말을 가리킨다


   조병수 교수

   총신대 (B.A.)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M.Div.) 
   독일 뮌스터 대학교 
   신학부 신학박사(Dr. theol.) 
   독일 Aachen 한인교회 목회
   독일 Wuppertal 한인교회 목회 
   염광교회 담임목사 (1995-2001)
   現 합동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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