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의 퍼스펙티브(Perspective)

최송연의 신앙칼럼 2014. 11. 25. 01:32



산호의 아름다운 빛을 머금고 되 뿜어내는 바다는 푸르다 못해 녹색을 띠고 작열하는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해변의 얕은 물 속에는 물과 하나가 된 꼬마들이 키득거리며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고, 세계 각 곳에서 휴가차 모여든 중.노년들이 햇볕을 즐기려고 파둔 커다란 모래찜질 통(?)속에는, 하마처럼 불룩한 배들 때문인지 이곳저곳에 작은 모래 산을 이루는 풍경이 사뭇 나른하고 한가롭기 그지없다. 젊은 청년들은 검붉게 탄 근육질 몸매를 과시하듯, 손바닥만 한 작은 판자 위에서 각종 묘기의 서핑놀이로 파도를 타는 모습은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듯 싱그럽다..

사면이 바다이기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공기와 물이 깨끗하고 맑아 어른들은 물론, 갓태어난 신생아에게마저도 수돗물 그대로를 받아 분유를 타서 마시게 해도 좋다고 의사들이 권한다고 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없이 사시사철 아름다운 꽃이 다투어서 피고 지는 곳, 제각기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각종 이름도 모를 꽃들이 풍겨내는 향기는 비행기 트랩을 밟고 내리는 순간부터 그 달콤한 향기를 맡을 수 있다며 함성을 지르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수많은 아름다운 꽃 중의 꽃, 단연 으뜸인 꽃이 있는데, 그 이름은 ‘푸루메리아’이다. 이 꽃은 생김새는 소박하고 색갈은 천사의 날개처럼 하얗고(가끔씩 붉은 색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흰 색이 많다.) 속은 노란 것이 보기에 무척 우아하고 단아하지만, 그 향기만은 단연 양귀비의 미소처럼 고혹적이며, 그 달콤한 향기는 가까이 코를 대면 아찔할 정도로 강열하다. 고운 여인의 눈망울처럼 매혹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암튼, 필자의 짧은 수사학으로는 제대로 표현하기에 역부족이다.ㅎ

밤낮으로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해풍은 고기의 비릿함이 섞인 짭짤한 바다 내음을 실어 나르고, 제아무리 태양이 이글거리는 뜨거운 여름날이어도 집이나 그늘에만 들어서면 가슴까지 시원해지는 것이 마치 청량음료수를 마신 것 같다. 혹독하고 모진 겨울 추위가 없기에, 각종 예쁜 새들이 집 앞에도, 상점이나 식당 앞에도 사람을 친구하자며 날아들어 재재거리며 노래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음식을 먹을 때면, 한 입 달라는 듯, 더욱 가까이 와서 까만 눈망울을 도르르 굴리면서 애교를 부린다. 이토록 아름다운 곳이기에, 굳이 흠을 찾아보라고 한다면, 그것은 겨울이 없기에 매일 그날이 그날 같고, 또 하얀 눈꽃 송이를 구경할 수 없다는 것, 그 정도일 것이다.

내가 사는 곳은 (러시아’ 선교사를 자원한 남편과 함께 ‘러시아’로 발길을 옮기기 전이나 지금이나) 세계에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한 관광 명소다. 한국에서 온 어느 짓궂은 여행객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곳이야말로 천당 바로 아래 999단쯤 된다.” 고 말하였을 정도라니까, 가히 그 아름다움은 짐작이 갈 것이다. (별님이 사는 곳이 어디메냐고요? 안드로메다? 꼭 집어서 말을해 달라고요? 그것은 독자님의 상상에 맡기려고 해요. ^^ 너무 열어버리면 재미가 없거든요. ㅠㅠ)

정작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내가 사는 지역의 예찬론이 아니라, 그렇게 아름다운 곳에 살고 있을 때, 내가 그 아름다움을 얼마나 즐감하면서 살았던가? 그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 얼마나 있었던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혜택을 누리고 사는 것에 대한 감사보다는 주어진 환경에서 일어나는 작은 어려움에 불평이 더 많았던 것을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고 싶은 마음 진심으로 간절하다. 그때는 내가 처한 환경이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가장 열악하고 가장 힘든 것만 같았다. 개척교회의 어려움에 시달리고 어쩌다가 부정적인 말이 들리기라도 하면, 그 한마디에 여린 성품인 나는 상처를 받고 가슴앓이를 하느라고 눈물로 지새운 밤도 수없이 많다. 그런 상태였으니까, 주위의 아름다움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라고는 전혀 가져보지 못하였다고 해야겠지…

그러다가 막상, 러시아, 그것도 시베리아에서 가깝다는 ‘우수리스크’(연회 주)에 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곳에서의 삭막함이란 이루 말로 다 형언키 어려웠다. 글자 그대로,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것처럼 척박한 땅이요, 각박한 인심에 부딪히게 되었던 것이다. 사시사철 겨울이 없는 열대 지방에서 살던 사람이 갑자기 백팔십도로 회전, 이제는 여름이 없는(있다고 하여도 아주 짧은 순간뿐) 곳에서 겨우내, 밤도 낮도 없이 몰아치는 혹한 속에 흰 눈이 무릎까지 폭폭 빠지는 곳, 내게는 낭만적이기만 하던 그 하얀 눈꽃 속에 파묻혀 동사하는 사람이 속출하고 폭설에 갇혀서 몇 날 며칠 밖에 나갈 수도 없이 집안에만 갇혀서 지내야 했던, 말만 듣던 동장군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얼마나 무시무시한 무기를 지녔는지 체험하고 전율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제야, 나는 내가 얼마나 좋은 곳에서, 행복 조건을 두루 갖춘 곳에서, 천혜의 혜택을 누리면서 살고 있었던가? 뒤늦게야 깨달았고, 주님께 눈물로 회개 자복했던 기억이 감사절을 맞아 새롭게 떠오른다. 감사를 회복하니까, 생활도 회복시켜 주신 주님, 감사보다는 불평이 더 많았던 나를 가르쳐주시고 길러주시기 위함이였음을 뒤늦게 깨달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성도의 감사를 제사로 여겨 기쁘게 흠향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시 116: )

우리 인간도 그러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불평하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신 것 같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 더 큰 것을 주고 싶어하는 인간의 마음, 이런 인간의 심리가 하나님의 성품 중 한 부분을 닮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ㅠㅠ 요즘처럼 어려운 세태 속에서 감사한 마음을 가지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이해한다. 그러나 어려운 환경 중에서, 종의 자리에 던져졌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하는 중에서라도 요셉은 어떠했는가? 우리 모두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신앙 따로, 생활 따로, 따로국밥이 아니라면 말이다.

요셉, 그는 아무리 열악한 환경에 던져졌더라도 절대 원망하지 않는 위대한 인물이다. 불평하기보다는 감사한 마음을 가졌던 대표적 인물이었고, 그런 요셉을 주님께서는 애급 제국의 대 국무총리 자리까지 번쩍 들어 올려놓으신 결과를 보면서 우리도 다시 한 번 마음속에 각인 시켜야 한다. 요셉의 감사를 배워야 한다. 욥도 마찬가지다. 욥도 최악의 상황에서 고통당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어버리라”고, 저주성 폭언에 가까운 말을 쏟아내는, 사랑하는 아내의 원망 소리에도 굴하지 않더니 결국 그도, 드라마틱한 인생 역전의 승리자로 주께서 일으켜 세워주셨던 것이다!!

추수감사 계절이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늘 듣게 되는 소리가 ‘감사하자’라고 하는 소리이기에, 우리 마음이 무디어져 버린 것은 아닐까? 형식적인 감사, 표면적인 감사 생활로 전락해 버린 것은 아닌가? 나의 감사에 대해 전반적인 ‘퍼스펙티브(Perspective)’ 가 이루어져야 한다. 감사의 본질은 무엇이던가?

기왕에 감사할 거면, 어떤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인가, 감사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니까, 나의 감사 생활을 살펴서 제대로 된 감사 생활로 업그레이드(upgraded) 시켜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감사에도 세 가지 차원의 감사가 있다고 한다.(어느 책에서 읽은 것 같은데 함께 나눈다.) 영어로 1. If (~ 만일의 감사), 2. because of (~때문에 감사), 3. in spite of (~ 그럼에도 감사)로 나눌 수 있다.
 
첫째, If의 감사. 이것은 조건부 감사다. “만약,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혹은 저렇게 해주신다면(물질을 주시면, 건강을 주시면, 내 병을 고쳐주시면 등등.) 감사하겠습니다.” 하는 조건 단서를 붙인 감사다. 이것은 가장 차원이 낮은 감사로 분류해 볼 수 있겠다.

다음, because of = “하나님께서 내게 건강을 주셨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내게 물질 축복을 많이 주셨기 때문에, 나와 내 가정의 건강을 지켜주셔서 감사하고, 내 자녀가, 내 사업이 잘되어서 감사하다.”고 하는 것, ‘때문에(Because of)감사’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상대적 감사이다. 물론, 이 때문에 감사(상대적 감사)마저도 범인인 우리네에게 있어서는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다음, 실질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영국이 낳은 유명한 성경 주석가 ‘매튜 헨리’(Matthew Henry, 1662.10.18~1714)가 도둑을 맞고 낙심 중, 범사에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생활에 적용시키는 훈련을 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여기에 옮겨 보면,

1. 이전에 도둑을 맞지 않은 것에 감사하고
2. 자신의 생명이 도둑 맞지 않은 것에 감사하고
3. 아직도 자신에게 무엇(가족, 건강, 이웃 등)이 남아 있음에 감사하고
4. 자기 자신이 도적이 되지 않은 것에 감사한다.
어떤가? 우리는 매튜 헨리의 감사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이 되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3. in spite of =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다”. 이 감사는 절대적 감사로서 인간 이성을 넘어선 감사, 환경을 초월하는 감사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서 욥이나 하박국 선지자가 드린 감사로 극한 환난이나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 한 분으로만 감사하는 것이다. 이런 감사는 인간의 지. 정, 의로 느껴서 하는 감사가 아니라, 전적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라 할 수 있다. 사실, “감사”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유카리스토우’(Ευχαριστώ)인데, 이 말은 ‘’은혜’ (Χάρης, 카리스)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를 통한 감사와 감격이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는 뜻일 것이다.

내가 아주 오래전, 한 번 들려드린 기억이 있으나, 너무도 감명 깊은 실화이기에 다시 금 들어도 좋을 것 같아서 소개한다. 절대적 감사,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는 환경에서나 느낌에서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오는 것, 실제 인물의 이야기이다.

일본에 ‘미즈노 겐조’라고 하는 유명한 장애시인이 있다. 그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심한 열병을 앓았다고 하는데 그 결과로 그는 손가락도 움직이지 못하고 발가락도 움직이지 못하며 말도 할 수가 없는, 그야말로 식물인간처럼 되어버렸다고 한다. 이렇게 그는 고통스러운 몸과 마음이 되어 하루하루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는데….

그런 그에게 이웃에 있는 한 그리스도인이 찾아와 성경책 한 권을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겐조의 어머니는 척추가 마비되어 앉을 수도 없는 사랑하는 아들이 엎드린 채라도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작은 나무받침대를 하나 만들어 그 위에 성경을 펼쳐놓아 주었다. 어머니가 나무 받침대 위에 성경책을 펴놓아 주긴 했으나, 겐조는 손가락을 쓰지 못하니까 책장을 넘길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겐조가 성경 한 장을 다 읽고 나서 눈으로 껌벅껌벅 신호를 보내면 옆에 앉아 있던 그의 어머니가 책장을 한 장씩 손으로 넘겨 주었다. 이렇게 해서 학교도 교회도 다닐 수가 없었던 겐조는 남아 있던 눈으로만 성경책을 읽고 또 읽었다고 한다.

그러든 어느 날, 그는 성경을 읽다가 그 속에서 구원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벌레보다 못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그 외아들을 보내신 것, 성부 하나님과 동등권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하늘 보좌를 버리신 것, 육신을 입고 고난을 받으시다가 종내 십자가를 지신 그 귀한 사실을 마음속 깊이 깨닫게 된 그는 울고 또 울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마음을 글로서 표현하고 싶었으나 손가락이 말을 안 들으니 글을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었고, 말을 할 수가 없으니 녹음을 할 수도 없었고… 그저 두 눈만 끔뻑거렸다고 하는데, 이것을 본 그의 어머니가 철자가 적혀 있는 종이를 한 장 그 앞에 놓아두고 막대기로 한자씩 짚어 나가면서 아들의 눈동자를 살폈다.

어머니가 들고 있는 막대기 끝이 자기의 원하는 글자에 가서 닿으면 그것이 맞는다고 겐조는 눈으로 신호를 보내었고… 그러면 그의 어머니가 그 글자를 뽑아서 다른 종이에다 옮겨 적었고, 이렇게 고통 중에서 겐조가 눈으로 한 자 한 자 모아서 적은 글이 시집으로 출간되었는데 그곳에는 아름답고 영감 있는 시가 170여 편이나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중에 한편을 여기에 소개한다. 제목은 ‘괴롭지 않았더라면…'

괴롭지 않았더라면

만일 내가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을…

만일 모든 형제.자매들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을…

만일 우리 주님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을….


정말 눈물 없이는 읽을 수가 없고 깨달은 자만이 쓸 수 있는 시, 깊은 영감이 흐르는 아름다운 글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미즈노는 그에게 닥친 환난 때문에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만났다면 장애가 더는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된 셈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닥친 고난과 역경은 그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허락된 광야는 더 좋은 곳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축복의 통로임을 믿는 사람만이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만족하며 절대적 감사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의 감사는 차원 높은 최상의 감사로 엎그레이드 되는 것이다.

필자가 좋아하는 성구를 소개하고 싶다.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외우고 또 외우는 말씀이다. 주께서 나를 선한 길로 이끄심을 믿고 입술로 고백하면 환난 중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 28) 이 말씀이 환난 가운데서 나를 지켜주시고 모든 환난으로 인해서 주님께 더욱 가까이 가게 됨을 믿을 때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감사하는 자에게는 점점 더 큰 은혜와 복을 주시고 싶어하시는 주님이심을 알 수 있다.

 

이 복된 추수감사 절기에, 풍성한 감사를 마음속에 품되, 만약(If)에, 때문에(Because of)가 낮은 차원의 감사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의 감사, 감사의 개념(concept)을 한층 더 up grade 시켜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시 116: 12-14)

**별똥별의 방을 찾아주시고, 졸글이나마 늘 격려의 박수로 응원해주신 독자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개인적으로 찾아뵙고 인사드려야 마땅하지만 여의치 못해, 지면을 통해서나마 인사를 드려요. 지난 한 해동안도 감사했어요. ^^ 앞으로 더욱 많이 기도하면서 섬기도록 하겠습니다! 가내에 주님의 은총이 넘치시기를!!**
 
"Happy ThanksGiving Dear Friends!!"
 

USA 아멘넷 별똥별/ 최송연 신앙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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