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그레이드된 감사
최송연의 신앙칼럼 2014. 12. 6. 02:42최근 몇 달 동안 나는 바다를 자주 찾게 된다. 내게 그만큼 스트레스풀한 일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내가 바다를 즐겨 찾는 진정한 이유는 따로 있는데 그것은 바다는 살아있고 바다가 내게 가르치는 교훈들이 쏠쏠하게 제법 많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서 바다는 나의 감성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스승이라고나 할까...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파도를 바라보며 인생살이의 희노애락(喜怒哀樂), 보다 깊은 삶의 여정을 배울 수 있어 좋고, 검푸른 바다를 가르며 힘차게 솟아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보는 행운이라도 얻는 날이면, 나는 시인이 아니어도 시상(時想) 비스무리한 아름다운 언어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져버리기도 하는, 제법 형이상학적 경지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기에 나는 바다가 좋다.
바다는 날이면 날마다, 때로는 거칠고 높게, 때로는 얕고 부드럽게, 파고의 높낮이는 달라도 파도가 없는 날은 단 하루도 없다. 사르륵사르륵 모래를 감싸 안듯, 다독다독 다독이듯 부드럽기 그지 없는 천사의 치마 자락 같은 파도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녀의 치마 자락에 폴싹 뛰어들어 어린애처럼 투정이라도 부리며 실컷 울고 싶을 만큼 정겨운 때도 있다. 이렇듯, 파도가 잔잔한 때면 물과 하나가 되어 물장구를 치면서 키득거리는 천진한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 비키니 수영복의 눈부신 아가씨들이 한껏 뽐내며 백사장을 활보하기도 하고 수영도 하며 물놀이를 즐기지만, 막상 집채보다 크고 태산만큼 높은 파도가 휩쓰는 때면 유약한 아이들과 여인들, 뿐만 아니라 장정들이라고 하여도 보통 사람들은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축되는 힘을 가진 것이 또한 바다의 위력이다.
바다는 이렇듯 무딘 감성을 일깨우고 건강에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은 바닷가에 매일처럼 몰려드는 많은 사람들이 파도 앞에서 모두 꼭 같은 감정이 아니란 것을 배우게 된다. 밀려오는 파도 앞에서 극명하게 다른 반응으로 대응하는 두 부류의 인생을 볼 수 있다고 해야 하나? 으르렁거리며 무섭게 달려오는 파도를 보면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더 멀리 달아나려고 도망을 치는 나처럼 유약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파고의 높이가 더해 갈수록 파도를 피해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달려오는 파도를 향해 정면으로 돌진하며 파도타기를 즐기는 근육질의 젊은이들도 많이 있다. 즉, 꼭 같은 환경에서 두 가지 다른 반응의 인생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어찌 파도 앞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겠는가? 내가 보기에 인생이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모든 분야에서 두 부류로 나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부한 자와 가난한 자, 천한 자와 존귀한 자, 약한 자와 강한 자,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사업가는 사업가대로, 교수와 학생은 그들대로, 모두 꼭 같은 능력을 소유한 것이 아니다. 능력 있는 자와 능력 없는 자로 나뉘게 된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교회 안에서 두 부류로 나뉜다고 말하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나뉜다. 알곡과 쭉정이, 가라지와 곡식, 믿음이 강한 사람과 믿음이 약한 사람, 감사의 사람과 불평의 사람 등등...
믿음이란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우리가 믿음, 믿음 하지만, 교회 안에서 진정한 믿음의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감사하는 수준과 믿음은 정비례한다고 볼 수 있다. 감사하는 수준을 봐서 그 사람의 믿음의 척도를 잴 수 있다. 신약에서 병 고침을 받은 열 문둥이 중에서 감사를 알고 예수님께 돌아온 사람만 참 믿음의 소유자로 주님께서 인정하신 것을 볼 때, 감사하는 수준은 그 사람의 믿음의 척도를 재는 시금석이라고 말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진정한 감사는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 된다
우리가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내가 받은 것이 없어서 감사치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은혜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감사치 못하는 것이 아닐는지? 우리가 쉬운 대로 부모 자식 간의 예를 한번 살펴보면, 자식이 부모에게 받은 것이 없어서 감사치 못하는 것일까? 결코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자식이 부모에게 감사치 않는 것은 받은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받은바 은혜를 깨닫지 못해서다. 부부지간도 형제. 자매도 이웃 간에도 꼭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가 깨닫기만 한다면, 설령 내가 받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해도 그저 나와 함께 있어준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감사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같이 있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몸서리치는 외로움에 떨며 울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셀 수도 없다.
이것은 육신 적인 면도 그러하지만 영적인 면도 매한가지라고 생각한다. 돌이켜 보면,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그래도 그런 와중에서 오늘까지 지켜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세계 각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재앙 속에서 여지껏 나와 내 가족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 역시, 모두 하나님의 크신 은혜다. 그렇지만 그 무엇보다도 가장 놀랍고 큰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영혼이 구원받은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 십자가의 사랑…인간 편에서 보면, 값없이 그저 받는 은혜요, 선물이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자신의 고귀한 목숨과 맞바꾸어야만 할 만큼 엄청난 대가를 지불한 것이다! 주님의 그 십자가 사랑 하나만 제대로 깨닫게 되어도 너무나 크고 놀라워 이 생명 다하는 그날까지 감사 또 감사해도 모자랄 것이다.
우리의 감사를 업그레이드 시키자
업그레이드된 감사란 어떤 것일까? 받은 것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 한 분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다!! 그렇다. 다니엘의 감사가 바로 이런 감사다. 다니엘은 주어진 환경이 좋고 잘 먹고 잘 사는 것, 가정이 안전하고 일신이 평안하거나 받은바 은혜가 커서 그 은혜에 감사한 것이 아니었다. 다니엘의 감사는 죽음 앞에서 오직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다!(단 6: 10 절 참조) 하박국 선지자 역시 하나님 때문에 감사하였다. 내게 주어진 환경이 좋아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이방인들도 그렇게 한다. 감사에도 두 종류의 감사가 있다. 주어진 환경이 좋을 때 감사하는 것, 주어진 환경이 열악하지만 하나님 한 분으로 감사하는 것이 그것이다.
은총도 “일반은총”이 있고 “특별은총”이 있다. 일반은총이란 세상사람 모두가 누리는 은총을 말한다. 예를 들자면, 햇빛과 비는 악인에게도 선인에게도 예수 믿는 사람에게나 불신자에게 동일하게 내리는 하나님의 은총이며 이것을 가리켜 신학상 술어로 “일반은총”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음으로 받아드려 지는 사람은 특별은총을 받은 사람들이다. 불가항력적 은혜로 선택된 택자들, 창세전부터 구원 얻기로 예정된 자들만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되심이 마음속에서 받아지고 확실하게 믿어진다. 마음으로 믿어지고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입술로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특별은총”을 받은 사람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개인의 구세주로 믿어지지 않는 사람은 “특별은총”에서 제외된 사람으로 분류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당신 자신이 믿어진다면 당신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총인가?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성도의 입에서, 마음에서 감사가 흘러나와야 마땅하지만, 우리의 실상이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다. 사람들은 말하기 좋아서 어려울 때 더욱 감사하라고 하지만 막상 자신에게 어려움이 당하게 되면 정금 같은 믿음으로 그 빛을 발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중 과연 몇 사람이나 될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켜 주시기만 하면 감사할 수 있을 텐데 하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네 속물이 위대한 신적 기적을 체험한다고 하여서 감사의 마음이 영원히 식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눈앞에서 홍해가 쫙 갈라지는 크나큰 기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놀라운 신적 기적이 두 눈 앞에서 실현되는 어마어마한 체험을 하였고, 낯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임재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감사는 순간적이었고,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그들의 마음과 입에서 불평이 떠나질 않았음을 우리는 보지 않았는가? 나는 예외라고 장담하지 말아야 한다. 주어진 환경에 따라 감사와 불평이 번갈아가면서 내 마음을 주장한다면 내가 세상 사람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여기서 개인의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지만, 도움이 될가 하여 잠시 나눈다. 우리가 개척하였고 지극 정성으로 섬기며 사랑하던 교회가 이번에 큰 환란을 통과하였다. 길고 캄캄한 터널 속에서 한 치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절망적인 환경에 내던져졌다.(그렇다 순전히 불구덩이 속에 내던져진 느낌이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예전의 숫자 2/3 정도가 대풍에 흔들리는 선 과실처럼,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마구 흔들렸다. 그리고 1/3정도가 가차 없이 돌아섰고, 1/3은 뿔뿔이 흩어졌다. 우리는 그저 묵묵히 입을 다물고 무대응으로 대응해 나가기로 작정하였으나 만들어진 말들, 온갖 유언비어가 우리 지역을 강타했다. 이런 일은 난생처음 겪는 일들이었기에 심히 당황이 되었고 낙심이 되려고 하였다. 그러나 “참새 한 마리도 그분의 허락함이 없이는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만날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그분은 선하시고 모든 일에 섭리하신다.” 하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통과하면서 배운 것도 많다. 돌이켜보니 그동안 내가 너무 안일하게 신앙생활을 한 것을 깨달았다. 이런 때일수록 고개를 들어야 한다. 내가 악을 행하지 않은 한, 반드시 주께서 책임져 주실 것이다. 큰 환난 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나의 일은 지금 이 자리에까지 나를 인도해 주시고 세워주신 그분의 얼굴을 다시금 바라보는 것이다! 세상이 다 나를 버려도 주님은 항상 내편이시다! 주님 한 분으로 감사하는 것만이 내가 할 나의 본분이다!
이렇게 마음을 굳게 정하니까 마음의 동요가 끝나고 하늘의 평강이 몰려왔다. 물론, 아직은 복잡하고 어렵던 문제가 아무것도 해결 된 것은 아니지만, 내 마음은 확실하게 달라져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환난 중에서 성도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목하 배우고 있는 중이다. 교회란 주님의 피로 값 주시고 산 양무리가 모인 곳이다, 그 양무리가 내 양이 아니라 주님의 양이다. 양들의 선택이 내 눈에 올바르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들의 선택을 이끄시는 분은 목자 되신 그분의 몫이지 나의 몫이 아니란 것이다. 이런 사실을 다시금 깨닫고 나니까 형언할 수 없는 평강이 몰려왔고 찬송이 입술에서 흘러나왔다..교인 쟁탈전도 아닌데 성도가 어디로 가건 얼마가 모이건, 그 모든 것은 주님의 섭리하심으로 믿으며 교회와 교회 사이에 심판하실 분도 그분이신데 우리가 서로 다툴 일이 뭐가 있는가? 우리가 해야할 일은 오직 범사에 감사하라 명하신 그분을 감사하며 그분을 따라가는 길이 있을 뿐이다!
추수감사 계절이다.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감사하자. 내 교회, 내 이웃, 내 가족,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함을 깨닫고 따뜻하게 치하해주는 말, 감사함을 나타내는 표현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특별운동이라도 벌려보는 한 주간이 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렇듯, 헤아려보면 감사할 조건이 많다. 우리는 감사할 조건이 없어 감사치 못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지 못해 감사치 못하는 것이다. 감사란….오직 깨닫는 자만 느낄 수가 있고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깨닫는 곳에 감사 있고, 감사가 있는 곳에 행복이 있다! 환란 중에서 감사하는 성도가 주를 영화롭게 하는 성도이다. 이런 차원이 높은 감사, 업그레이드된 감사를 드리는 성도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라고 나는 믿는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편50:23)
출처: USA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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