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의 권위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사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게 하기 위해서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권능을 주셨다. 그것은 교회 그 자체을 위한 권위부여가 아니라 교회에 맡겨진 사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이 권위 이해의 요점이다. 이 점을 통해서도 권위의 부여가 교회의 기능과  어떻게 관련되는가를 분명하게 알수 있다. 즉 교회에 주신 권위는 가르치는 사명과 교회를 다스리는 사명을 위한것이다.

 

   가르치는 권위라는 말의 의미는 구원을 위해 위로부터 받은 가르치는 교리를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가르치는 사람이 취사선택의 권한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은 가르침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르치는 사람에게 권위가 있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이다. 또한 가르침에 권위가 있다는 것은 가르치는 자의 도덕의 문제가 아니며,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 받는 자의 약속도 아니다. 그것은 교회가 교회이기 위해 확정된 한 가지 사항일 뿐이다. 교회를 다스리는 권능에 있어서도 같은 경우라 할 수 있다. 교회에 바른 질서가 확립되지 않으면 직무를 완수할 수 없다. 가르치는 권위에 복종하지 않으면 교회의 일치와 질서는 유지되지 않는다. 여기서도 다스리는 사람의 권위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위임받은 직무에 권위가 부여되는 것이지, 사람에게 권위가 주어진 것은 아니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교회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분 아래 사회의 기존 질서 유지를 주장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신중하게 피해야 할 부분이다. 또 한 가지는 질서라고 할 때, 교회에서는 말씀의 직무와 연결되지 않은 질서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질서가 잘 지켜지는 교회는 평온하거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교회가 아니라, 선교와 봉사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교회라는 의미이다. 앞에서 교회의 표식에 대해 말했지만, 교회의 표식이 분명한 교회가 바로 질서 있는 교회이다.

  

   그리스도의 권능은 본래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받은 모임을 통해서 행사된다. 이러한 권능을 실수 없이 대행한다는 것은 어렵다. 아무리 영적인 은사를 풍부하게 받은 개인이라 해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단체라 해도 실수가 없을 수는 없다. 다른 단체를 통해 인간의 잘못이 확인되기 때문에, 잘못이 비교적 적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교회가 행사하는 권위는 무엇보다도 교리 또는 신앙의 조항들을 결정하는 권위이다. 이것이 결정되지 않을 때, 교회는 이른바 방향 잃은 배와 같아서 목적지인 구원의 항구에 도달할 수 없게 된다. 교리가 교회적으로 확정되지 않고 각각의 설교자의 재량에 맡겨진다면, 교회의 일치도 없게 된다. 하지만 교회의 결정은 성경에 입각한 결정이어야 한다. 이는 교회의 결정권이 성경의 권위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교리의 결정은 이미 확인된 것이다. 교회는 질서를 지켜야 하는데, 각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수행한다고 저절로 질서가 서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결정하고, 각 개인은 그 결정에 따라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법이 바른 양심을 구속해서는 안된다. 한편, 이런 권위의 행사는 회의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회의가 바른 기능을 하지 못할 때는 한사람 혹은 소수의 사람에게 권위가 집중되거나, 혹은 권위가 확산되어 어떤 것도 확정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모든 회의가 항상 올바른 것만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국의 열쇠를 베드로에게 준다고 말씀하신 것을 가톨릭 교회는 교회가 행사하는 재판권 또는 치리권이라고 해석했다. 이에 반해 개신교는 이 열쇠를 복음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면 과연 교회의 권위를 대표하고, 또 집행하는 것은 누구일까? 이러한 교회정치 문제에 대하여 『기독교강요는』 그다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때문에 교회정치의 여러 형태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칼빈을 연구해 왔는데, 결과적으로 칼빈은 장로제 교회 운영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여하튼 교회정치 형태에 있어서 문제는 그리스도가 중심이 됨을 가장 잘 드러내는 제도를 추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출처 양무리 마을/아바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