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은 왜 아벨을 쳐 죽였을까?

 

세월이 흐른 후에”라고 되어 있으니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 몇 십 년인지 몇 백 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가인은 가시덤불을 헤치며 땀 흘려 농사지은 땅의 소산을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덩달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열납(기쁘게 받으심)하셨으나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였습니다. 그 가인에게 하나님은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 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왜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을까요? 가인이 선을 행하지 않아서였을까요? 아벨은 선을 행하는 착한 자였고 가인은 행위가 악한 자였을까요? 이 문제는 성경학자들 사이에도 많은 주장과 해석, 그리고 논쟁이 있습니다.

논쟁의 핵심구절은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 하겠느냐?”입니다. 우리말 성경을 읽으면 마치 가인이 선을 행치 않았기 때문에 부끄러워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지 못 하고 제물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흘로 암 헤이티브 쓰야트...”라고 되어 있습니다. ‘흘로’ 아니, ‘암’ 만일, ‘헤이티브’, 만일 네가 바로 하면, ‘쓰야트’, 들릴 것이다. 받아들여질 것이다. 즉 ‘만일 네가 바로 한다면 왜 안 받아 올려지겠느냐?’입니다. “바로 한다면”은 그냥 “바로 한다면‘입니다. 이것을 “행동을 바로 한다면”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제사를 바로 한다면”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은 지금 가인의 행위를 놓고 말씀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제사와 제물을 놓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만일 가인이 선행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신다면 창세기 기록자가 이 대목 어딘가에 “가인은 행실이 좋지 못 하고 아벨은 선행을 하였더라.” 하는 식으로 가인과 아벨의 행실에 대한 언급을 하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제사와 예배의 의미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제사가 무엇입니까?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감사행위입니까? 복을 비는 아부행위입니까?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제사로 섬겨달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아닐 것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하여 인간에게 제사를 요구하시겠습니까? 더구나 죄인 된 인간이 제사를 드린다고 하나님이 얼씨구나 달려와서 제사를 받으시겠습니까? 제사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사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죄인이 되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게 된 인간에게 남겨주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요 방법’이었습니다. 제사란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타락하고 더럽혀진 죄인을 아주 버리지 않으셨다는 표시였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갈라놓은 죄의 구렁을 이어주는 가느다란 줄이요 다리였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죄인과 하나님을 이어주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주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구원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생명과 소망의 표였습니다. 그리고 그 제사를 가능케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제사는 먼 훗날 오실 ‘여자의 후손’의 약속을 바탕으로 하는 것입니다. '오실 예수'가 아니면 하나님께의 제사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물은 여자의 후손의 약속,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징표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물이 인간이 노력하여 땅에서 거둔 소출이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일이 있습니다. 가인이 왜 그렇게 분해 하고 안색이 변하였을까요? 왜 격분하여 동생을 때려 죽였을까요? 아벨이 착하고 행실이 선했다면 과연 가인이 하나님 앞에서 감히 그렇게 화를 낼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가인은 열심히 밭 갈고 노력하는 성실한 자였고 아벨은 빈둥거리며 양이나 치는 놈팽이 같은 나쁜 녀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랬기에 가인이 “아니, 너 같은 나쁜 놈이??” 분이 나고 참을 수 없어 아벨을 때려 죽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튼 가인은 못 나가고 아벨이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것은 제물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어린양 제물입니다. 나의 노력도, 선행도, 공로도 아닙니다. 나를 정케 하는 것은, 나를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은,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의 피입니다.

'이응한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상이 비웃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  (0) 2016.01.14
사랑의 매는 줄  (0) 2016.01.02
잘 알지 못 합니다.  (0) 2015.12.22
잘 알지 못 합니다.  (0) 2015.12.18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  (0) 2015.11.2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