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몸, 교회(敎會)
최송연의 신앙칼럼 2016. 1. 19. 03:13
주님의 몸, 교회(敎會)
근세에 들어 하나님의 교회 존속[存續], 존재의 가치 자체를 부인하고 위협하는 기현상이 각 인터넷을 통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물론, 이런 기현상들은 기업화된 대형교회들이나 사명감을 저버린 일부 황당한 목사들에게 그 책임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할 것은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 자체를 부정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한 방법으로 왜곡시켜 전하고 통전 적이고도 유기적인 말씀을 앞 뒤 문맥을 살펴 총체적인 뜻을 밝혀 전하려하지 않고 한 구절만 똑 떼내어 그 구절에만 매달려 전체적인 뜻을 흐리게 하여 가르치는 데 있다.
이런 사람들이 무서운 것은 어리석은 성도들로 하여금 기성교회를 벗어나야 살길이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고 더 나아가 기성교회는 아예 구원이 없는 것 같은 속임수이건만,표면적으로는 사역자들의 비리에 항거하는 거센 목소리, 진리를 지키기 위한 정당한 목소리인 것처럼 미화시켜 내어 놓는데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말에 현혹된 성도가 교회를 멀리하고 집에 주저앉아 있는 동안 이단이나 다른 사이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들의 영혼을 사냥질 해간다.
구원 받는 백성이 줄어 들고 교회를 찾는 발걸음이 점점 사라지게 하려면, 하나님 교회의 권위를 땅에 떨어트리고 교회와 말씀을 불신하게 만드는 것 뿐이다. 이것이 바로 사단이 사용하는 가장 무서운 방법 중 하나임을 성도들이 인식해야 한다. 사단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닌다. 요즘 세계적으로, 특히 우리나라의 기독교인 수가 급격히 하강하고 있다는 통계가 그 사실을 잘 뒷받침해 주고 있는 대목이다. 그래서 오늘은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가? 교회의 중요성에 대해 좀 생각해 보자.
교회란 무엇인가? 어근(語根)부터 살펴보자:
교회(敎會)란 그리스어로는 큐리아코스(kuriakos = 주에게 속하는), 헬라어로는 에클레시아(ekklesia), 라틴어의 에클레시아(ecclesia)이며, ‘불러낸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초청받은 무리, 성령의 부르심을 통하여 거듭난 사람들, 하나님 나라의 대관식에 참예할 수 있는 거룩한 무리의 모임이란 뜻이 있다. ‘카할’은 구약에서 회중, 또는 이스라엘 공동체, 특히 종교적인 측면에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공동체를 뜻하며 스데반 집사는 사도행전에서 구약교회를 ‘광야 교회(congregation)', 그곳에 모세가 있었다고 했다(행7: 38절).
교회(敎會)의 구분:
1. 민족적으로, 첫째, 예루살렘 교회인 초대교회, 둘째, 이방인 교회다. 이방 세계의 각 나라, 각 족속, 각 지역에 세워진 모든 교회를 총칭할 수 있다 .
2. 영적으로, 첫째, 개인 교회(고전 3:16절), 둘째, 공동체로서의 교회(에클레시아, 불러냄을 받은 자들의 모임)을 말할 수 있는데, 공동체로서의 교회도 다음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 보이는(가시적인)교회: 보이는 교회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산 성도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을 말하며, 성경은 이 교회를 가르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골1: 18절),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교회(행 20: 28절, 벧전 1: 17-19잘), 또는 거룩한 무리(히 13: 12절, 벧전 1:2절)라고 말씀하고 있다.
둘째, 비가시적인 교회: 이 교회는 우주적인 교회로써, 주님의 나라를 의미한다(계 21:장 전장 참조). 지역과 인종과 역사를 초월하여 이미 하나님 나라에서 모여 있는 구원받은 성도들과 앞으로 구원받을 모든 성도를 총칭한다.
3. 교회를 영적으로도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성령을 마음속에 모시고 사는 개인이 하나님의 성전이요 영적인 교회이다. 둘째, 성령을 마음속에 모시고 사는 무리, 공동체가 하나님의 성전이요, 영적인 교회이다.
땅 위에 교회(敎會)를 세우신 하나님의 목적:
예수님께서 12제자를 택하신 후 특별히 그들에게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신 것은 그들을 통하여 이 지상에 하나님의 기관인 교회를 세우시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1.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기 위함(눅19: 10절).
2.하나님께 경배하고 지상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엡1: 4-6절).
3.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번창 되게 하기 위함( 마 28: 19-20).
4.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 요 6: 49절).
5.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기 위함(엡 3: 9-11, 3: 20-21, 5: 9).
교회를 저주해서 안 되는 이유:
a. 주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 되시기 때문이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 18절, 엡5: 23절 참조).”
b. 성경은 성도가 하나님의 집인 지역 교회에 등록하고 공동체로서 주님의 몸을 이루어 나가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 하며, 성도는 마땅히 주신바 탈란트 대로 하나님의 집에서 성도들을 섬기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 3: 15절 말씀).
c. 성경은 혼자 예배드려도 은혜받을 수 있지만 성도가 하나님의 집인 공동체를 벗어나는 것은 허용되지 않고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것을 폐하지 말라고 하신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면 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 24-25절).”
d. 교회는 주님이 함께 하시는 공동체이기에 깨어지면 안된다. “두세 사람이(큰 교회나 작은 교회나)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 20절 말씀).”
e. 성도는 믿음 안에서 친교(코이노니아)해야 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친교란 영어로 fellowship, 헬라어로는 코이노니아( koinonia)다. 여기에는 물건을 함께 쓴다의 뜻이 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초대 교회는 물건을 함께 나누었다. (행2: 44, 4: 32절 참조)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기독교 공동체의 근본적인 요소라면 다음은 회원 간의 친교이다. 왜냐하면, 성도 개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적으로 연합 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롬 12: 5, 고전 12: 27절 참조)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연합 되어진 성도들임을 깨닫는다면, 결코 '혼자만 정결하다’라고 주창할 수 없다는 것이다.
f. 보이는 성전, 성도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건물은 하나님의 집이기에 거룩하다. 예수님께서 친히 “ 내 집(가시적 교회)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 (막 11: 7절)."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가시적 교회 성전 건물을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 교회를 더럽히는 사람들을 책망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개인교회)가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그 장소 또한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술을 파는 곳을 술집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성령님을 모신 개인 교회가 모여서 거룩한 분께 예배드리는 그 장소를 거룩하다고 부르는 것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주님을 모신 곳은 초막이나 궁궐이나 관계없이 천국이요 거룩한 곳, 성전이다.
이런 것을 볼 때, 가시적인 교회(보이는 교회)와 비가시적인 교회(보이지 않는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가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에클레시아, 즉 하나님의 대관식에 초청받은 무리는 보이는 교회를 거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회(천국)으로 옮겨지게 되는 것이다!!
공동체 교회 안에는 가라지와 알곡이 함께 자라는 것은 그분의 뜻이다
1.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 12)
“His winnowing fork is in his hand, and he will clear his threshing floor, gathering his wheat into the barn and burning up the chaff with unquenchable fire.(마 3: 12)”
본문에서 (his threshing floor)이라고 소유격을 사용하셨음을 주목하자. 그 뜻은 이미 불러냄을 받은 무리(개인교회)가 그분의 소유이다.(광의적으로는 모든 세상이 다 그분의 것이지만...) 개인교회가 모여 공동체 교회(가시적 교회)를 이룬 곳을 주님께서는 (나의 타작마당)이라고 소유격을 특별히 붙여서 사용하시기 기뻐하셨다.(나의 백성, 내 백성 등등)
2.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 37-43)"
"Let both grow together until the harvest. At that time I will tell the harvesters: First collect the weeds and tie them in bundles to be burned; then gather the wheat and bring it into my barn.(마 13: 30)
마태복음 13장의 "세상"은 육신 세계를 의미하고 추수 때 교회와 분리시키실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세상이라함은, 믿는 자, 믿지 않는 불신자 모두 섞여 살아가는 육신 세계를 총칭하신 것이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불법을 행하는 자들(모든 세상 사람이 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다. (롬 3: 10절 참조) 과 의인(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개인 교회)을 양이라 하고 주께서 세상 속에서 불러내고 갈라내는 것을 의미하기에 그러하다.
마태복음 13장 한 구절만 풀이하여 “세상”에는 가라지가 있으나, 교회 안에는 모두 알곡만 있다라고 주장 한다면 모순이다. 교회(개인교회나 공동체교회), 예수님을 마음에 구세주로 믿는 자가 되면, 그 즉시로 이 세상을 떠나는 것도 아니고, 육신을 벗어나서 하늘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성령을 마음속에 모신 사람을 가리킴이라면 그 성전된 육신은 여전히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교회(육신, 가시적 교회)는 세상에 속하였으나 그 권위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주님의 피로 깨끗게 된 알곡이지만 주인의 창고에 들어가기 까지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렇듯, 주님의 때가 되기까지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섞여 서로 부대끼며 자라고 있는 들판이 세상 속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진리다. 주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열매를 맺어야 하는 사명이 알곡된 자들에게 주어졌고, 그 사명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단이 날이면 날마다 가라지를 뿌려대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개인 교회가 모여모여 이루어진 아름다운 모임인 (공동체 교회) 안에도 사단의 회가 있다고 주께서 친히 말씀하셨다.(계 2장 참조)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서도 가롯 유다가 나왔다. 가라지는 분명히 있다.
세상(코스모스)에서 교회는 제외된다고 그 누가 감히 주장할 수 있는가? 주의 피를 믿음으로 받아 거듭난 영혼은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은 귀한 무리이기에 하늘에 속하였으나, 무덤 속에 들어가기 전까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은 여전히 땅, 곧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고 있음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갈 2장 4절 그리고 고후 11장 26절에서 바울은 거짓 형제를 언급하고 있으며 거짓 형제에게서 해를 많이 당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 시대에 가라지들이 있었음을 가리킴이 아니고 무엇인가?. 물론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국교로 만듦으로써 훨씬 더 많은 가라지들이 들어왔음도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교회 안의 알곡과 가라지를 갈라낼 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주님께만 있다. 알곡과 가라지를 갈라내는 자격이 우리(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다. 가라지와 알곡을 가르고 골라내시는 분은, 농부 되신 우리 주님의 고유권한이며 그분의 주권하에 있음을 믿어야 한다.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가라지 같다고 하여도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대로 두어야 한다. 그것은 주의 명령이다. 가라지를 찾아내고 갈라내고 할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올바른 분별을 하도록 말씀의 떡을 떼는 것, 정(正, right)과 반(反, wrong)을 밝히고 논하는 그 선(line)에서 머물러야 한다.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이다. "너는 가라지" 혹은 "너는 사단의 자식"이라고 쉽게 정죄하거나 손가락질하여 알곡과 가라지를 내가 갈라내려 하는 것과 주님의 말씀이 어떠한가, 그 정신을 논하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잊지말아야 한다
내가 알곡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더욱 겸손하여 나보다 더 연약한 영혼을 섬겨야 할 것이다. 내가 참 열매인가? 그렇다면 가지 되신 주님께 더욱 바싹 붙어 있어 아름답고 선한 열매를 맺도록 하자.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죽이는 말을 하기 전, 세워주고 밀어주고 살려주는 말을 하자. 다시는 우리 주님의 몸인 교회(개인교회)를 찢지 말자.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에 상처를 입히는 말을 하여 교회에서 내어쫓는 일을 삼가야 할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찢기시고 상하신 것은,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너와 나 우리 모두를 위하심이다. 주께서 당하신 그때 그 모진 고통 한 번만으로도 족하다. 주님의 몸인 교회를 찢을까 삼가 조심하자. 말세가 가까워 옴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 12)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20: 28절 하 참조).”
글:최송연/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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