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롱진 자, 점 있는 자, 검은 자를 내게 주소서.
이응한 목사 2016. 9. 16. 00:54아롱진 자, 점 있는 자, 검은 자를 내게 주소서.
야곱이 집을 떠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네 아내와 열 한 아들, 그리고 딸 디나를 데리고 양과 소 두 떼를 이끌고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기까지 몇 년이나 걸렸을까요? 훗날 야곱은 바로왕 앞에서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 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야곱이 바로왕 앞에 선 때는 아직도 7년 흉년 중 2년이 지나고 아직 5년의 흉년이 더 남아 있을 때입니다.
창세기 37장을 보면 야곱은 노년에 얻은 아들 요셉을 특별히 사랑합니다. 그 요셉은 열 일곱 살 때 형들에 의하여 애굽으로 종으로 팔려갔고 보디발을 섬기다가 보디발의 아내로 인하여 집 옥에 갇혔다가 바로의 두 신하의 꿈을 해몽해 준 일로 인하여 풀려나 바로왕 앞에 섰을 때가 30세 때였습니다. 요셉은 바로왕의 꿈을 해몽해 주었고 이때부터 요셉이 애굽총리를 맡아 풍년 7년과 흉년 2년이 지났으므로 이 때 요셉의 나이는 40세 정도라고 계산이 됩니다. 그런데 아버지 야곱이 바로에게 자신이 130세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요셉을 낳은 때가 90세 때라는 이야기가 가능합니다. 우리는 야곱이 외삼촌 라반에게 한 "이십년 동안"이라는 말로 미루어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살았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러나 만일 야곱이 90세일 때 라헬이 요셉을 낳았고, 그 때 야곱이 라반에게 고향으로 보내 달라고 했다면, 그 후 야곱이 자신의 양떼와 소떼를 이루어 100세 무렵, 즉 요셉이 10살 때쯤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났다면,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무려 50년 세월을, 반평생을 외삼촌 라반을 섬겼다는 계산이 가능합니다.
20년인지 50년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속이고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면서 어떻게든 야곱을 붙잡아 두어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내리시는 복을 차지하려는 교활한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수십년을 이용당하며 살고 나서, 마침내 그곳을 떠나자 이번에는 형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마주 오고, 두려움에 떨며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다가 환도뼈가 부러지고, 다시 세겜땅에서는 딸이 강간을 당하고, 아들들이 세겜족속 남자들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고, 사랑하는 라헬은 아비집에 이르기도 전에 베들레헴 길가에서 베냐민을 낳다가 죽고, 다시 목숨처럼 아끼던 아들 요셉까지 잃었으니 어찌 이 모든 것이 “험악한 세월”이 아니었겠습니까? 어쨌든 야곱은 아내들과 자녀들을 아비집으로 데리고 가기 위하여 반평생을, 자신의 모든 젊음과 힘과 열정과 생명을 바친 것입니다. 아버지 집으로 데려가는 길은 이렇게도 멀고 험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오직 라헬을 연애하여 기쁨으로 이 모든 고난을 감수한 것입니다.
야곱의 이 “험악한 세월”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를 구원하여 데리고 가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당하신 온갖 고난을 예표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3)”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아내를 아비 집에 데려가려는 신랑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길은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의 신부를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가는 길은 자신의 몸과 목숨을 바쳐야 하는 험한 희생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 자신의 품삯으로 태어나는 양의 새끼 중 ‘아롱진 자, 점 있는 자, 검은 자’를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무의 푸른 가지를 취하여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그 앞에서 새끼를 배게 합니다. 하나님의 손길로 인해서이겠지만 희한하게도 아롱지고 점 있고 검은 새끼들이 많이 태어나 야곱은 심히 풍부한 부자가 됩니다.
더러 성경을 영적으로 해석해 보면 재미 있습니다. ‘아롱진 자, 점 있는 자, 검은 자’가 무슨 뜻일까요? ‘푸른 가지’는 무엇일까요? 주님께서는 자신을 ‘푸른 나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눅23:31)” 하셨지요. 야곱이 세워둔 껍질 벗긴 푸른 나무 앞에서 태어난 ‘아롱진 자, 점 있는 자, 검은 자’는 야곱의 양떼가 되어 아버지 집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흠 없는 흰 양 새끼는 라반의 집에 남게 될 것입니다. 껍질 벗기운 푸른 나무 처럼 옷을 벗기우고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임을 깨닫고 자복하며 통회하는 아롱지고 점 있고 검은 죄인들은 그 푸른 나무 앞에서 배어지고 다시 거듭 나서 아버지의 집에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흰 자가 되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 하는 자, 스스로 의인인 자는 라반의 집에 그냥 남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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