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리키 잭슨씨가 거짓 증언으로 자신을 사형형 언도 및

39년을 교도소에서 복역하게 만든, 에디 버넌씨를 용서하다


에디 버넌씨의 거짓 증언으로 인해, 리키 잭슨씨는 18살의 나이에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리키 잭슨씨 인터뷰 중울음)


하지만, 에디 버넌씨의 회심 및 클리브랜드 재판소에서의 거짓증언 번복 및 올바른 증언을 통해,

57세인 리키 잭슨씨는 7주전에 교도소에서 석방되게 되었다. 리키 잭슨씨는 39년 동안 복역했다.

리키 잭슨씨는 그의 성인으로서의 모든 기간을 감옥에서 보냈다.


이게 제 마루 이구요, 침실 이구요, 베란다입니다” (리키 잭슨씨가 본인의 집을 소개함)

그리고, 리키 잭슨씨는 운전면허 시험을 준비하고 있고, 도서증(도서관 사용증) 신청을 했다.

하지만, 리키 잭슨씨가 다른 할 일이 있다, 바로 그를 감옥에 넣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다.


(리키 잭슨)네가 한 일(거짓 증언 번복 및 올바른 증언)은 정말 큰 용기가 필요해, 괜찮아.

우리 둘다 피해자야. 내가 너를 용서해, 그 얘기를 하려고 지금 여기 온 거야.”


(에디 버넌)이 수 많은 세월을 복역한 이후에,

어떻게 이 사람이 나를 안아주고 용서해 줄 수 있을까?
(리키 잭슨) “바로 용서할 수 있게 된 건 아니에요,
사실 저와 저희 친구들에게 한 일 때문에 오랫동안 그를 경멸 했었어요.
하지만 이 일을 해야 했어요, 왜냐하면 인생에서 계속 전진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를 용서하는  방법 밖에는 없어요"


거짓말로 인해 감옥에 같혔던 두 사람이

진실로 인해 감옥에서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대안은 없다

 

내가 태어난 모국에서보다 오래 살았던 , 그래서 2 고향이라고 있는 하와이는 사면이 바다인 탓에 싱그러운 해풍이 끊임없이 불어오는 아름다운 곳이다. 한여름, 바깥 기온이 상승하고 내리쬐는 강한 햇볕으로 땀을 줄줄 흘리다가도 일단 손바닥만 하게 작은 공간일지라도 그늘진 곳에나 혹은 안에 들어서기만 하면 너무 시원하고 흘러내리던 땀방울이 금세 가셔버리는 곳이다.

 

그래서 아무리 더운 여름이어도 우리는 밤낮으로 창문을 열어 놓고 지냈으며 바다에서부터 산을 타고 흘러내려 오는 바람, 시원함 때문에 1 12 에어 컨디션을 켜본 없이 30 년간을 지냈다.  물론 그런데도 여전히 에어 컨디션을 켜고 사시는 분도 많이 있었지만, 우리는 자연 바람이 좋았기 때문에 그랬다.

 

더운 지역에서 더운지 모르고 지내다가 이곳으로 이사를 , 가장 불편하게 느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시원한 바람이 없다는 것이다. 나무는 우거져 푸르건만 나무들마저 찜통더위를 견디기 힘들어 모두 졸고 있는 , 한여름 햇살은 쨍쨍 내리쬐는데 바람마저 없으니 숨이 턱에 닿고 여간 고통스러운 아니다. 다행히 집집이 센트럴 에어 컨디션이 있어서 바람을 대신하긴 하는데, 나는 에어 컨디션 바람이 지금도 별로다.

 

시원한 자연 바람이 없는 대신, 에어 컨디션에서 나오는 차가운 바람으로 여름을 견디는 사람들, 이런 것을 대안에 만족하는 삶이라고 해야 하겠지. 어찌 생각해 보면  세상은 아무리 어렵고 힘이 들어도 대안이 있는 사람이 살아갈 있고 문제가 있을 대안을 찾는 것은 그리 나쁘다고 수만은 없다. 그래서 각종 분야의 모든 것에 대안을 찾느라 고심하는 과학자들, 공학자들, 그리고 많은 분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기 때문에 삶의 질이 조금은 향상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런데도,  대안은 어디까지나 대안일 , 대안이란 것이 본질을 대신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자본주의의 대안은 무엇일까? 엄밀히 말해서 자본주의의 대안은 없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대안이 아니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대안이라고 생각하고 부자들의 착취 아래 고통당하는 인민을 해방한다는 명제 아래 혁명을 일으켰던 스탈린과 추종세력들, 결과는 참혹하다. 

 

기독교 역시 대안은 없다. 지금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내가 하나님이다.나를 따르라.” 하고 소리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은 중의 왕이시다. 그러하기에 모든 국가는 하나님의 통치하에 운행돼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길에서 떠났기 때문에 세우기를 좋아하고 왕의 자리에 앉았어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려 들지 않기에 수많은 죄악을 저질러 왔음을 성경이 밝히 증거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순간, 제일 먼저 해야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하심, 그분의 주권을 회복하고 인정하는 데서부터 우리의 신앙생활 여정이 시작돼야 한다. 우리가 거울로 삼아야 이스라엘 역사를 잠시 살펴보면, 그들이 얼마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는가 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70년의 노예생활에서 모세의 지도로 극적으로 애굽을 탈출하였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 가나안을 향해 가는 도중, 앞을 가로막는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는 기적을 체험하면서 광야로 들어섰다. 그곳에서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면서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약속의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신을 원하였다.

 

모세가 기도하러 산에 올라간 , 속히 내려오지 않으니, 이스라엘 백성은 이때다.’하고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아론을 무섭게 채근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는 이미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신을 경배하기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백성의 마음을 알고 있던 아론은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놀라운 것은 이때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라 불렀으며 여호와 하나님께 드릴 번제와 화목제 여호와의 절기에 금송아지에게 바친 것이다. “이는 너희를 애급에서 인도하여 너희 신이라( 32: 4).” 인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대안으로 보이는 우상을 만든 것이다! 손으로 만든 우상과 하나님이 주신 언약적 제사제도와 혼합시킨 , 이것이  혼합종교의 탄생이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신 신이시요,  인격적인 신이며, 생명의 신이시다. 인간이 손으로 만들 있는 그런 잡신이 아니다. 자기 손으로 우상을 만들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대신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가증이 여기는 헛된 행동일 ,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지시하신 그대로 예배드리지 않으면 받지 않으신다. 내가 만든 우상을 하나님이라 부른다고 하여서 하나님이 하나님이 없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으로 통하는 길이 없다고 말씀하시면 우리는 오직 말씀 그대로 믿고 순종하며 따라야 한다. 예수님 분만 구원이심을 믿어야 산다. 그런데도 수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만(Only Christ) 말을 싫어한다. 세상의 모든 神들을 통해서도 구원의 길이 있고 종국에는 하나님께로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최근에 유행처럼 번져가는 WCC 혼합종교다. 안타깝게도 우리 기독교계 유명한 목사님들도 모두 대안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은 주를 섬기는 올바른 길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생명의 길에 대안은 없다!

 

생명의 길에서마저도 대안을 추구하고 인간의 어그러진 , 넓은 길로 가다가 마지막 주님 앞에서 섰을 ,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말씀하시는 주님을 뵙게 된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여기서 우리는 불법이란 단어에 주목하자. 불법은 세상의 모든 법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세상 법보다 중요한 법은 하나님의 언약 법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언약의 법을 경시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 분만 사랑하고 예수님만 섬기며, 예수님의 길에서 살자.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분을 따르다가 앞에 서는 착하고 충성스러운 이란 칭찬과 함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야만 사랑하는 주와 함께 영원한 안식과 기쁨을 누릴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만(only savior)구원자 시다.’이것이 구원의 속성이요, 본질이다!  예수 그리스도도 구원자이다.” 라고 하는 말은 틀렸다. 개인 신앙생활이건, 단체 신앙생활이건,  생명을 살리는 일에 대안은 없다. 본질(essence) 돌아가고 본질에 충실하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보았느니라"( 14: 6-7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딤후 2: 5)."

 

 

 

 

출처: 목양연가: 글/최송연

  

진짜뉴스(Good News)에 채널을 맞추세요!

 

(킹정흠 눅 2:10,11) 천사가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Good News)을 너희에게 가져왔노라.이 날 다윗의 도시에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 시니라.

 

지난 해 10월부터 시작된 탄핵 정국과 19대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금까지 8개월간 정말 '이 나라가 어찌될꼬?' 하는 한탄과 함께 하루 하루 힘겹게 살아오고 있습니다. 이번 만큼은 하며 기대를 했지만 기도하고 바라던 것과 정반대의 일들만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렇게도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가?' 하는 하소연도 하십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 이후에 아예 TV를 안보신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TV만 보면 화가 나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일인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 TV 없이 살고 있습니다. (그 이전에는 거의 TV 중독 수준..) 요즘같이 좋은 소식에 목마른 적이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세상 살고픈 마음이 없고 형편이 허락한다면 이민이라도 가야하겠다는 분들도 적지가 않고.. 매일 화가 나는 소식에 화병이 나고... 이러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 화병으로 저희가 주님께 가게 생겼습니다. ㅠㅠ

 

엊그제 가짜뉴스 감별법이라는 동영상을 찾아 올렸는데 유튜브에 가짜뉴스로 검색을 하면 진짜 가짜뉴스를 생산해내는 바로 그 곳 좌티비시로 불리우는 그곳에서 '가짜뉴스는 이런 것이다! 가짜뉴스를 감별하라!'고 영상을 만들어 올려놓은 것을 보고 기가 막혔습니다.

 

저는 다음이나 네이버의 기사를 보지 않고 구글을 통해 뉴스를 봅니다. 구글은 해당 기사외에 다른 언론사 기사도 같이 보여줍니다. 그런데 언론사는 많은데 그 중에 그래도 신뢰할 만한 곳을 찾기가 정말 어려울 정도로 왜곡 언론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이 중 좀 객관적인 곳이 어디일까?' 가 아니고 어느 곳이 덜 왜곡 보도하고 있을까? 하고 고민을 하면서 읽습니다.

 

저희가 뉴스를 보지 않고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사태를 보면서 우리는 얼마나 이 세상이 악하고 거짓으로 가득한가? 몸으로 삶으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것이나 듣고 봐서는 정말 정말 위험한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뼛속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뉴스 다운 뉴스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뉴스를 제대로 보도해 줄 곳도 없습니다. 그러니 더이상 '세상이 좋은 뉴스를 전해줄 것이다!' 라는 기대는 져버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대신 진정한 뉴스를 우리가 접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그 출처는 100%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좋은 소식 (Good News)를 자주 접해야지 가짜뉴스로 가득한 세상에서 질식하지 않고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세상 뉴스를 아예 무시할 수는 없으니 세상 뉴스는 그냥 참고용으로 보시면 될 듯 싶습니다. 세상 뉴스라고 해봐야 데이비드 차 선교사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시리라 하신 말씀이 성취되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용도로 써야하리라 생각합니다.

 

솔로몬 왕은 이미 이에 대해 오래전에 말하였습니다.

 

(킹정흠 전 1:9) "이미 있던 것 곧 그것이 후에 있겠고 이미 행한 것을 후에 다시 행하리니 해 아래에는 새 것(News)이 전혀 없도다."

 

솔로몬 왕의 말을 빌자면 지금 우리가 기다리고 기다리는 좋은 뉴스는 더이상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성경을 완성하시면서 좋은 소식(Good New)를 발표하셨습니다. 물론 지금 우리 삶 가운데 벌어지는 일들은 전혀 좋아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거듭나지 않았고 믿음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모르거니와 우리가 분명히 하나님 편에 서있다면 우리는 이미 이긴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몇날, 몇주, 몇달, 몇년을 더 죄와 사망 권세와 싸워야 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처구니 없는 실수(배도, 성령훼방)를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최후의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우리에게 자꾸 가짜뉴스를 들려주어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우리에게 협박하여 우리로 하여금 절망하고 포기하여도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유발하고자 합니다.

 

탄핵 사태와 부정 선거로 끝난 (적어도 제 생각에는) 19대 대통령 선거로 하나님은 대한민국을 심하게 흔드셨습니다.

 

(킹정흠 히 12:26) 그때에는 그분의 음성이 땅을 흔들었거니와 이제는 그분께서 약속하여 이르시되, 내가 또 땅뿐만 아니라 하늘도 한 번 더 흔드노라, 하셨느니라.

(12:27) 또 한 번 더란 이 말씀은 흔들릴 수 없는 것들을 남아 있게 하시려고 만드신 것 가운데 흔들리는 것들을 제거하심을 표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니

 

하나님께서는 이 환난을 주심은 성도들로 하여금 쉽게 흔들리고 부서질 수 있는 땅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도록 하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계속 흔들리기 쉬운 땅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흔드심을 통해 잠자는 성도들이 깨어나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음녀의 포도주에 많이 취한 성도들은 세상 모르게 자고 있고 잠꼬대를 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최초의 가짜뉴스의 유포자가 누구일까요? . 바로 사탄입니다.

 

(킹정흠 창 3:1) 이때에 뱀은 주 하나님께서 만드신 들의 어떤 짐승보다 간교하더라. 그가 여자에게 이르되, 참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동산 모든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니

(3:2) 여자가 뱀에게 이르되, 우리가 동산 나무들의 열매를 먹을 수 있으나

(3:3)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에 관하여는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그것을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염려하노라, 하셨느니라, 하매

(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께서 아시느니라, 하니

 

이게 사탄이 처음 인류에게 퍼뜨린 가짜뉴스입니다. 좌티비시는 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를 엄청나게 욕합니다. 왜 그런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해가지고 우리를 이렇게 고생시키냐고.


그런데 우리가 지금 아담과 하와와 똑같은 입장에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 앞에 선악과를 두고 있습니다. 짐승의 표는 제 2의 선악과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이 제 2의 선악과를 두고 10,100개를 받아도 받은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고 엄청난 발언을 합니다.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했던 사탄의 가짜뉴스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요즘 WCC, 짐승의표, 탄핵 사태 등으로 인해 점점 더 명확하게 알곡과 쭉정이가 나뉘어지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평소 우리가 참으로 존경할만하다 했던 목회자들 아니면 성도들의 발언과 행동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도데체 누굴 믿어야하나?' 할 정도로 소위 멘붕 사태가 연일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는 예수님 외에 세상의 어떤 교회나 단체, 훌륭한 목사님, 선교사님, 전도사님, 장로님, 집사님, 성도님들도 의지의 대상은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 만이 우리의 의지의 대상입니다. 결국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분은 예수님이고 성령님이시지 그 분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분들이 눈이 밝은 줄 알고 따라가다가 구덩이에 빠지면 그건 예수님 책임이 아니요 우리가 사람을 의지한 책임입니다. '! 이 목사님은 잘 보시고 잘 들으시는 줄 알았는데!' 그냥 시궁창에 빠졌다가 나올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지옥 불구덩이 속에 빠진다면 그건 정말 아찔한 일입니다.

 

우리가 세상 뉴스를 무시하면 안되겠지만 세상 뉴스를 많이 보면 하늘 뉴스를 소흘히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도시에서는 '(Star) 볼 일이 없습니다' 워낙 공해도 심하고 인공 불빛이 많고 강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뉴스가 많으면 하늘 뉴스 Good News를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Good News를 잘 봐지지가 않습니다. 세상 뉴스가 워낙에 인스턴트에다 달짝지근하기 때문에 끊기도 어렵습니다. 세상 가짜뉴스의 전파가 워낙에 세서 진짜뉴스 (Good News)를 듣고자 하면 세상 뉴스를 꺼야합니다.

 

화폐 감별하시는 분들은 가짜를 연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진짜를 잘 알면 가짜는 저절로 감별이 된다고 합니다.

 

이제 세상 뉴스는 좀 덜보고 진짜뉴스를 봐야하겠습니다. 진짜뉴스 (Good News)를 보셔야지 우리의 영이 살아납니다. 어차피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이 세상은 이렇게 흘러가야 합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이 그 현실이 대한민국이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이기 때문에 인정하기가 싫고 싸우기가 버거운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현실은 북한 성도들이 당하고 있고 당했던 일들에 비해면 새 발에 피일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오게 될 적그리스도 체제에 비할 바가 못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미 전무후무한 환란이 있으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안타깝게도 이세상이 잘 될 것이다 일이 잘 풀릴 것이다! 라는 막연한 기대나 소망 보다는 이 세상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기록된 말씀이 성취되는지 지켜보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을 날이 갈수록 악해지고 음란해지고 세상에 대한 소망이 저절로 사라지고 있지만 이는 역으로 우리의 소망을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게) 하고 앞으로 펼치질 천국왕국을 소망케 합니다.

 

우리가 비록 이 땅을 딪고 살지만 날마다 이 소망을 바라보며 승리하게 되길 기도합니다.


(킹정흠 요 16:33) "너희에게 이 일들을 말하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기운을 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웃 블로그 / 고다니엘

한동대, ‘동성애 반대 선언문’ 발표

 

기독언론인들 “한동대는 이 시대 어둠 밝히는 빛과 같은 대학” 

 

한동대학교(총장 장순흥)가 최근 동성애 반대 입장을 담은 선언문을 발표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동대는 지난 25일 ‘동성애와 동성애 결혼에 대한 한동대학교의 신학적 입장’ 선언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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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대는 선언문에서 “성경의 계시와 기준에 충실하려는 복음주의 교회들과 지도자들은 교회들 안에서 일부 지도자와 평신도의 동성애 합법화 지지에 대한 큰 우려와 함께 동성애의 합법화가 반 성경적이며 반 기독교적임을 선언하고 있다”며 “성경의 계시를 중시하는 한동대학교는 이러한 복음주의 교회들과 신앙관을 같이 한다”고 밝혔다.

선언문은 △우리는 동성애 행위가 성경적 진리와 윤리관에 반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문화 안의 대세보다 성경의 계시를 기준으로 삼음을 분명히 한다. △우리는 동성애 행위가 근본에서 인간 개인과 공동체에 해와 병을 가져옴을 믿는다. △우리는 동성애로부터 치유되도록 인도하는 것이 참 인권보호 임을 믿는다는 등 4개항을 담고 있다.

 

다음은 한동대의 선언문 전문이다.  

 

[동성애와 동성애 결혼에 대한 한동대학교의 신학적 입장]

 

0. 현시대에 동성애와 동성애 결혼 문제의 심각성 

최근 현대 사회에 동성애와 동성결혼의 합법화의 강한 도전이 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기독교 교회들 안에서 일부 지도자와 평신도가 동성애 합법화를 지지하면서 그것이 기독교 윤리에서 정당하다고 가르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의 계시와 기준에 충실하려는 복음주의 교회들과 지도자들은 큰 우려와 함께 동성애의 합법화가 반 성경적이며 반 기독교적임을 선언하고 있다. 성경의 계시를 중시하는 한동대학교는 이러한 복음주의 교회들과 신앙관을 같이 하면서 다음과 같이 우리의 입장을 선언한다. 

 

1. 우리는 동성애 행위가 성경적 진리와 윤리관에 반한다고 믿는다

성경은 남자가 여자와 합하여 하나가 된다고 함으로써 성(性)의 기능이 남녀의 부부로서의 합일을 위해 준 것임을 분명히 한다(창 2:24). 그것이 성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창조질서임을 믿는다. 그래서 성경은 모호함 없이 동성애의 행위를 성에 대한 왜곡으로 단죄하며 금한다. 이러한 단죄와 금지는 구약에 명시되어 있으며(레 18:22, 20:13) 신약도 그 금지를 잇고 있다(롬 1:26-27, 고전 6:9-10). 구약의 어떤 규례는 신약에서 폐지되기도 하지만 동성애에 대한 금지의 법은 폐해지지 않았다. 

 

2. 우리는 문화 안의 대세보다 성경의 계시를 기준으로 삼음을 분명히 한다

문화 안의 어떤 가치는 성경의 가치와 충돌하지 않을 수도 있고 어떤 가치는 충돌할 수도 있다. 동성애는 성경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문화적 추세로서 비록 문화 안의 대세가 그것을 지지해도 우리는 성경의 계시에 따라 그것이 창조질서에 어긋난 것임을 선언한다.

 

3. 우리는 동성애 행위가 근본에서 인간 개인과 공동체에 해와 병을 가져옴을 믿는다

우리는 성경이 죄로 단죄하고 금하는 것은 단순히 무의미한 단죄와 금지가 아니고 그것이 인간의 개인적이며 공동체적이며 사회적인 건강과 직결된 것이기에 단죄하고 금한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나는 동성애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라는 하나님의 명에 역행한다고 믿으며 그러한 역행은 장기적 관점에서 하나님이 주신 성경적 가정제도와 그것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사회구조에 해와 병을 가져옴을 믿는다.

 

4. 우리는 동성애로부터 치유되도록 인도하는 것이 참 인권보호 임을 믿는다

우리는 동성애자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권을 가진 사람들이며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권리는 존중하나 동성애로부터 치유 받도록 인도해주는 것이 참된 인권의 회복임을 믿는다.  

 

한편 기독언론인들은 지난 23일 오전 7시 포항성시화운동본부에서 열린 성경공부 모임에서 “한동대는 또 하나의 대학이 아니다. 하나님의 대학이다. 한동대는 이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빛과 같은 대학”이라며 “한동대를 위해 계속해서 기도하자”고 입을 모았다.

   

또 한편 지난 4월 포항시기독교교회연합회(회장 임상진)와 포항성시화운동본부(대표본부장 박석진), 포항기독교기관협의회(대표회장 김원주)는 포항성시화운동본부 사무실에서 긴급 연석회의를 열고 ‘포항시 인권 기본 조례’ 입법예고와 관련 포항시의회에 반대의견서를 접수키로 의견을 모은 바 있다.

 

이들 기독단체는 이날 “동성애는 다수 국민들의 성도덕 관념에 반하며, ‘동성에 성행위는 객관적으로 일반인에게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고 선량한 성적 도덕관념에 반하는 성적 만족 행위’라는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판결과도 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지자체는 ‘동성애를 정상’이라는 윤리적 잣대를 만들어서 공권력으로 시민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면 안 된다. 다양한 개인의 윤리관은 반드시 존중되고 보장되어야 한다. 동성애를 차별금지 사유로 포함시키기 위해서는 동성애 성행위가 법적인 보호를 적극적으로 해야 할 가치가 있는 행위인지에 대한 면밀하고 신중한 검토가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길원평 부산대 교수는 “동성애자의 권리만을 옹호하고 건전한 성윤리를 가진 국민의 기본적인 권리 또는 자유는 제한 또는 금지됨으로써 법이 형평성을 잃고 역차별을 하게 한다”고 지적했다. 길 교수는 “다수의 국민들이 동성애 성행위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조례로 제정해 조장하는 것은 선량한 성윤리에 반하는 것으로 판단되며 비윤리적이라는 인식을 갖는 상당수 국민들이 법을 어기는 범법자가 된다”고 충고했다.

 

​이건오 세계성시화운동본부 상임회장은 “잘못된 인권조례의 폐해의 결과로 부도덕한 동성애가 급속히 확산되면, 심각한 보건적, 윤리적, 재정적 수많은 폐해들이 급증하며 고스란히 국민들의 세금으로 전가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

 

박석진 포항성시화운동본부 대표회장은 “반윤리적이거나 부도덕한 행위를 차별금지 사유로 삼아 법 또는 조례로 보호해서는 안 된다”며 “우리나라를 포함한 100여개 국가들은 동성애와 동성결혼을 합법화하지 않으며 대다수 국민들이 부도덕한 행위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역 기독교 교인들은 “‘포항시 인권 기본 조례안’과 시행 세칙은 국가인권위원법을 관계법령으로 두고 있기에, 동성애를 옹호 조장하는 방향으로 적용될 위험이 매우 높다”며 “실질적인 차별금지법으로 서구에서와 같이 동성애에 관한 표현의 자유 등이 제약된다”고 입을 모았다.

 

​연대벌 국내 에이즈 감염 발견현황에 따르면 감염인의 수는 2000년 이후로 꾸준하게 증가하는 추세임을 알 수 있으며, 내국인과 외국인을 포함하는 국내 누적 에이즈 감염인의 수가 2003년 2천843명에서 2015년 1만3천909명으로 증가했다.

또 에이즈 감염자 치료비용은 국민들이 납부하는 건강보험료로 치료비용의 90%를, 10%는 세금으로 전액 지원한다.(억제제의 1년간 1인당 약값만 3천600만원)2013년 에이즈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최소 4조원으로 나타났다.

 

미디어리서치의 2013년 5월 22일 조사에서 국민 78.3%가 “동성애는 비정상적 사랑”이라고 응답했고, 동아일보의 2013년 10월 31일 조사에서 국민 78.5%가 “동성애자에게 거부감이 든다”고 대답했다.

 

시민들은 “동성애자들은 ‘우리가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자신들의 ‘성적 취향’으로 인해 감염된 에이즈에 대한 치료비용과 사회적비용을 국민들에게 부담지우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동성애를 조장 옹호하는 방향으로 적용될 위험이 높은 ‘포항시인권기본조례(안)은 이 조례안을 발의한 김상민 포항시의원이 자진 철회했다.

 

포항=이수미 ⓒ 뉴스파워

 

가져온 곳: USA 아멘넷

종교개혁과 후기-종교개혁 연구에 보다 밝은 빛이 . . .


                                                         리차드 멀러 (Richard A. Muller. 칼빈 신학교)
                                                                     번역 : 이성호 목사 (고려신학대학원 역사신학)

종교개혁과 후기 종교개혁 연구는 지난 30 여년 동안 극적인 변화를 겪었는데 이 변화는 신학교 교육에 가장 적합한 연구 분야, 즉 기독교 사상과 교리의 역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 같다. 이 변화들의 근저에는 역사학 연구의 두 발전이 자리잡고 있다. 첫째, 헤이코 오버만(Heiko Oberman), 데이빗 스타인멧츠(David Steinmetz), 그리고 스티븐 오즈멘트(Steven Ozment)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과 중세의 연속성에 대한 관심의 증가. 둘째, 신정통주의의 쇠퇴와 신정통주의의 종교개혁가들과 스콜라주의(중세든 후기-종교개혁이든)의 사상에 대한, 지나치게 편향된 해석의 쇠퇴.

첫째 이슈, 즉, 중세와 종교개혁 사이의 연속성에 대한 관심의 증가는 종교개혁의 전통적이고 교회론적 특징에 대한 인식, 따라서, 종교개혁가들의 신학과 그 이전 교회사의 신학 사이의 연속성에 대한 인식이라는 말로 가장 잘 표현될 수 있다. 물론 이 인식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 인식은, 교회 내의 문제점과 오류에 대항하여 기독교의 진리를 확증하는 것을 자신의 과업으로 이해했던 종교개혁가들에게도 너무나 분명하였다. 그리고 이 인식은 종교개혁자들의 사상뿐만이 아니라 교부들의 신학, 심지어 중세의 “보다 건전한” 신학에도 의지하였던 종교개혁가들의 후계자들, 즉 16세기 말과 17세기의 개신교 정통주의자들에게도 분명하였다.

최근의 연구는 중세 후기 사상에 대한 일련의 궤적을 잘 보여준다. 그 결과 우리는 종교개혁이 반대하였던 고해성사와 공로사상을 분명히 발견할 수 있지만, 또한 종교개혁을 가능하게 하였던 어거스틴의 중세적인 “은혜 신학”도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중세 후기에 전통의 권위가 성경과 동일하다는 주장도 발견하지만, 또한 성경이 신학을 위한 절대 유일한 규범이고 전통은 종속적인 규범이라는 가르침도 발견하게 된다. 이 점에 있어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트렌트 공의회나 현대 로마 카톨릭 교회보다는 종교개혁과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현대 개신교 신학자들에게 다소 놀라운 일이다.

종교개혁사를 다시 보게 하는 또 다른 요소는 “인문주의”와 “스콜라주의”의 대립이 지나치게 과장되었으며 종교개혁에 대한 인문주의의 영향이 구 스콜라주의의 영향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재발견하였다는 데 있다. 따라서 스코라주의자들에 대항한 종교개혁 시대의 논쟁들은 종교개혁자들에 영향을 미친 중세 스콜라 신학의 긍정적인 측면들을 이해함으로써 이제는 균형을 바로 잡아야만 한다. 우리는 “스콜라주의”가 특별한 신학이나 철학이 아니라 접근 방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스콜라주의는 어거스틴적 은혜신학을 포함한 여러 신학을 운반하도록 도와주는 학문적 수레바퀴일 뿐이다. 종교개혁은 신학적 오류들과 지나치게 사색적인 신학방법에 대항하였으나 여전히 은혜의 구(스콜라적인!)신학에 굳게 서 있었다.

신학 발전의 연속성에 대한 인식이 종교개혁과 개신교 정통주의에 적용될 때에도, 역사가들은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였다. 우리는 개신교 정통주의와 개신교 스콜라주의가 종교개혁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이전 세대의 판단이 너무 단순하고 근본적으로 왜곡되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스콜라주의와 정통주의에 대한 이 부정적 견해는 종교개혁가들은 이전 시대의 거의 모든 전제들을 제쳐놓고 구 스콜라주의에 대항하여 “그리스도 중심적인” 새로운 신학 형식을 제공하려고 어떤 식으로든 노력하였다는 주장에 근거하고 있다. 종교개혁가들의 후계자들은 구 스콜라주의적 형식에 의존하여 “예정론적 형이상학”을 만들어 내었다는 주장이 종종 제기되었다. 17세기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 들 중에서 적어도 하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돌트 신경의 가르침인 “제한 속죄”와는 반대로 칼빈은 “보편 속죄”를 가르쳤다. 이 주장은 사실 상 칼빈은 알미니안주의자로 전락시키고 칼빈의 가르침과 돌트 신경의 진정한 연속성을 부인한다. 칼빈과 다른 종교개혁가들의 신학이 신정통주의가 말하는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과 어떠한 관련도 없으며 그들의 후예들도 “예정론적 형이상학”을 만들어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칼빈과 돌트신경의 연속성은 훨씬 더 분명해 진다.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이러한 재해석은 분명히 일련의 실천적 교회론적 의미를 내포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서 우리 자신의 카톨릭성을 확증하게 되며 따라서 교회사 전체와 긍정적인 관계를 맺는다. 특별히, 역사를 이렇게 읽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의 분파로 제한시키기보다는 우리자신이 보편 혹은 “카톨릭” 교회 안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전통의 자료들을 보다 많이 접하게 될 때 우리의 신학과 영성이 발전한다. 다른 한편으로, 종교개혁가들과 후기 정통주의자들 모두가 기독교 전통의 중심되는 진리를 설득력 있게 전해 주었다는 것을 고려할 때, 우리는 개혁신학의 정체성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역사적 정당성도 거의 없이 시간에 묶인 신학을 하면서 종교 개혁을 그 자신의 이미지 안에서만 재현하고, 그 결과 종교 개혁과 오늘을 분리시켜 그 배들을 역사의 정박지로부터 떠나 떠돌아 다니게 하였다는 생각에 더 이상 사로잡힐 필요가 없다.

더 나아가, 우리는 신정통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세대 들 보다 훨씬 더 존경스런 마음으로, 동시에 훨씬 덜 불안한 마음으로 우리의 전통을 바라보게 된다. 우리의 신앙 문서들은 보다 더 분명하게 시대과 장소에 자리매김을 할 수 있다. 종교개혁과 그 이전 전통과의 연속성, 그리고 종교개혁과 정통주의 시대와의 연속성을 고려할 때, 우리는 벨직 신앙고백서와 돌트 신경을 보다 발전된 개혁 전통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돌트 신경을 “스콜라적”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초점을 잃은 것이다. 종교개혁가들에 의해서 구 스콜라주의의 요소가 개신교 신학에 채택된 이상, 돌트 신경의 “스콜라적” 요소들은 종교개혁과 돌트 신경을 분리시키지 않는다. 돌트신경, 벨직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종교개혁가들의 사상을 통해 초대교회의 전통과의 연속성을 근거로 우리 개혁신앙이 카톨릭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듯이, 이 문서들은 자신들이 종교 개혁과 연속선 위에 있고 교회에 개혁 신학이 무엇인지 설명하여 준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내 생각에, 지금 대한민국에 온갖 거짓의 영들이 창궐하고 기승을 떨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중 주님의 자비가 없었으면 우리는 지금 김일성 일가의 폭정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라는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도 소수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주님의 자비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쯤 캐나다가 아니라 정치범수용소에서 고통스럽게 살며 "차라리 죽었으면"이란 생각을 하며 비참하게 살고 있을 것이라 굳게 믿는다. (자신을 우파이며 독립 운동가와 6.25 참전용사 후손이라는 어느 기독교 신자가 대한민국이 주님의 자비에 의해 세워진 나라라는 것에 모욕적인 표현을 써가며 강력히 반발하는 바람에 페친을 끊고 블락한 적도 있다.)


'이승만'이라는 사람을 주님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그가 미국 국무부 고위 관료였던 소련 간첩들의 방해를 물리치고, 대한민국이란 나라를 세우게 만드신 것이 바로 주님의 엄청난 자비였다.


나는 이러한 주님의 자비에 무한한 감사를 느끼지만, 아직도 많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이런 주님의 은혜에 충분히 답하지 못하고, 제대로 깨닫지도 못하고 있음이 안타깝다.


주님이 이처럼 엄청나게 커다란 은혜를 주셨는데 이에 대해 감사한 마음은 전혀 없이 오로지 개인적인 은혜만 더 달라고 기도하는 일을 거듭하는 이기적인 기독교인들 때문에 대한민국은 지금 어마어마한 거짓과 미혹의 영들의 공격을 받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진정 회개하지 않는다면, 이 거짓의 영들의 기세는 결코 꺾이지 않고, 오히려 더 심해질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해야, 진노 가운데 들어간 이 나라에 그나마 주님의 긍휼이 임할 것이다.




출처: William Lee님 페이스북

단 한 점의 오물도 허용할 수 없다!

 

 

앞서 말한대로 여리고성은 해발 마이너스 250 여 미터의 낮은 곳에 있고 이스라엘 백성이 진군하는 방향인 벧엘은 약 16 킬로미터 거리에 해발 400 여 미터의 높은 곳에 있습니다. 표고차 650 미터 정도의 오르막길인 셈입니다. 그런데 그리 올라가는 도중에 아이성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땅이 비옥하고 넓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며 큰 성을 이루었던 여리고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그만 성입니다. 여호수아는 늘 하던 방식대로 미리 정탐을 보내어 아이성을 탐지하게 하였습니다. 돌아온 정탐군들은 아이성이 작으므로 모든 사람을 수고롭게 할 게 아니라 이삼천 명만 보내면 능히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고 여호수아는 그 말대로 삼천 명 가량의 군사를 보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패였습니다. “아이 사람이 그들의 삼십 륙인쯤 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와서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되었습니다.

간혹 여호수아가 조그만 아이성을 우습게 여기고 전쟁에 임했기 때문에 패한 것으로 말하기도 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이 첫 절부터 명확하게 그 이유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성 전투에서 패한 것은 이스라엘의 범죄 때문이라는 것, 즉 온전히 바친 물건을 빼돌려 숨긴 범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교만하거나 자만했던 것 때문도 아닙니다. 이삼천 명의 군사가 너무 적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패배에 당황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놀라고 당혹하고 슬퍼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편을 족하게 여겨 거하였더면 좋을 뻔 하였나이다.” 하고 비통하게 고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 이는 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 그 바친 것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성결케 하고 내일을 기다리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지파대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게 됩니다. 유다 지파가 뽑혔고, 세라 족속이 뽑혔고, 삽디 가족이 뽑혔고, 아간이 뽑혔습니다. 성경은 제사장이나 여호수아가 제비뽑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 앞으로 나아오게 하였더니 뽑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치 흰 보좌 심판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같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고 철옹성 같은 여리고성을 무너뜨리셨지만 가나안 땅에서 새로이 출발하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죄에 대해서 극렬하게 분노하시는 것으로 시작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아간의 죄에 왜 이렇게 극렬하게 진노하셨을까요? 아간의 탐심과 도적질 때문이었을까요? 하나님의 것을 훔쳤기 때문에 화가 나신 것이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높은 수준의 도덕과 순종을 요구하신 것일까요? 한 사람의 죄로 인하여 이스라엘 전체를 버리신다는, 극단적인 공동체의 순결을 요구하시는 것일까요? 그렇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적으로 완전하고 거룩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었을까요? 우리는 사도행전 5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밭 판 돈 일부를 숨겼다가 죽임당하는 것도 떠올립니다. 하나님이 너무 심하신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완전무결과 거룩함을 요구하신 것도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래 패역하고 부족하고 죄많은 것을 모르셨던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빼놓고서는 설명이 안 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가나안 땅은 천국, 생명, 곧 독생자의 예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점 죄악도 흠도 없는 거룩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 독생자의 몸, 거기에 한 점의 흠도 더러움도 허용할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습게, 경홀히 여김 받게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죄인들이 감히 주님의 몸, 그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은 오직 순종함으로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입니다. 다시금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스스로 성결케 하고 내일을 기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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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은 은혜의 땅 25

기다리다 못해 기도의 골방 문을 열어젖히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당신, 기도고 뭐고 지금 당장 집어치우고 빨리 나오지 않으면 골방 문에 못을 박아 버리고 말겠어. 알아들었어?"

 

나는 그렇게 말을 마구 뱉어버리는 나를 보면서 스스로 깜짝 놀랐다. 기도하는 아내를 어떤 이유로든 이렇게 박해하는 모습이 바로 사단의 모습과 같다는 섬뜩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아내는 그날 이후 나를 대하는 태도가 더욱 냉랭해졌다. 그 리고 이렇게 말하곤 했다.

 

"막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나는 한국에 나가서 수양관에 기거하면서 전도만 하면서 살겠어요. 어차피 아이들을 위해서도 그렇고, 또 이혼은 절대로 못해 준다고 하는 당신이니까. 그렇게 때가 되면 서로 다른 곳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아내의 말은 진심이었다. 한 집에서 살림을 하면서 같이 살고는 있었지만 그렇게 가까우면서도 멀게만 느껴졌던 사람이 바로 아내였다. 이렇게 마음이 멀어지면서 하루가 멀다하고 부부 싸움을 했다. 서로 이해하는 마음은 없고 판단과 정죄만 하는 관계가 되었으니 사사건건 싸움을 하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서로의 다른 점들에만 눈이 갔다. 그래서 싸움은 계속됐다. 우리 둘은 여러 가지 면에서 달랐다. 나는 기도를 해도 통성 기도를 해야 기도를 좀 한 것 같은데 아내는 주로 묵상기도를 하고 통성기도를 크게 하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눈초리로 바라보곤 했다. 나는 직선적이고 외향적인 성격인데 아내는 수동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나는 춥고 차가운 것이 좋은데 아내는 추운 것이라면 아주 질색이고 더운 여름에도 냉면을 먹는 일이 거의 없다. 나는 싱거운 음식이 입에 맞는데 아내는 짠 음식을 좋아한다. 나는 음악을 들을 때는 좀 시끄럽게 들어야 하는데 아내는 조용한 음악을 평화롭게 듣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목소리가 무척 큰 편인데 아내는 늘 조용하게 말한다. 나는 라스베이거스식 성경 읽기를 통해 마구잡이 은혜를 사모하는데 아내는 체계적인 성경공부와 묵상을 즐긴다. 나의 혈액형은 Ab형인데 아내는 O형이다. 나는 대강 대강 일을 처리하는 스타일인데 아내는 매사에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기 위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나는 많은 경우 자기 중심으로 의사 결정을 하는데 반해 아내는 옆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비교적 깊은 편이다. 우리는 달라도 서로 너무나 달랐다. 우리 둘은 결혼생활이 길어질수록 서로 다른 점들만을 발견하면서 더욱 깊이 싫어했다. 함께 앉아 밥을 먹는 것도 싫었다. 아내는 막내가 고등학교 졸업하는 그날을 기다리는 것이 유일한 소망인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서로 다른 가운데 유일하게 일치하는 부분은 나이가 동갑이라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뿐이었다. 물론 그것도 경외하는 방법상에서는 서로 일치하지 않았지만, 마음의 중심 가운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마음은 유일한 공통분모였다. 그런데 그 공통분모는 가장 큰 것이었다. 시간이 흘러 하나님의 때가 되면서 오랫동안 끌어왔던 미움과 갈등의 시간도 하 나님의 은혜로 드디어 끝을 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고, 그분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끝까 지 복을 주신다는 그 말씀이 바로 우리 가정을 두고 하는 말씀이었다. 돌이켜 볼 때 길고 어두운 갈등의 터널을 무사히 지나 올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터널의 끝에 밝은 광명 천지가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는 가정에서는 될 수 있는   한 이혼이 없어야 한다고 믿는다. 지금 당장은 힘들고 모든 것이 괴로울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서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당신의 가정을 회복시키시고 또 그 환난과 고통의 경험을 들어 사용하신다. 부부싸움에서는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것을 요즘 와서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부부싸움에서 이기려고 해봤자 나만 힘들고, 또 설사 이겼다고 해도 별다른 의미가 없다. 오히려 "그래, 당신 좋은대로 해보자"라고 양보하면 거기서부터 길이 열린다. 자존심은 무슨 알량한 자존심인가. 부부 사이에 자존심은 하와의 사과와 같은 것이다. 괜히 건드리고 서로 상하게 하면 그로 인해서 모든 일들이 시작된다. 자존심이 상해서 서로 말을 안하게 되고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서로 용서를 하지 못한다. 자존심 때문에 물건을 집어 던지기 시작하는데 결국 집어 던진 물건에 부부가 깨지고 애꿎은 아이들이 얻어맞고 피를 흘리기 일쑤다. 부부 사이에 자존심은 서로 세워 주기만 하면 된다. 부부 간에도 서로 숨겨야 할 프라이버시, 사생활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위험천만한 것이다. 침대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만나는 부부가 서로 모르고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들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시한폭탄을 지붕 위에 얹어놓고 사는 것과 같은 것이다. 부부 사이에는 어떠한 비밀도 없어야 한다. 크리스탈과 같이 투명한 부부관계가 되어야 비로소 완전한 한 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신학공부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우선은 학력이 짧아 신학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요건을 갖추지 못했고 나는 늘 주의 종이 된다면 평신도 장로로서 교회에서 쓰임을 받기 원한다고 기도를 해왔던 터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주위에서 신학을 권유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가는 소리로 듣고 말았는데몇 번이나 같은 말을 듣고 난 후에는 '글쎄, 내가 신학을 공부해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뉴욕에 있는 신학교를 몇 곳 알아봤는데 그 중 한 곳에서 평신도 성경학교에서 만 3년 동안 필수 학점들을 모두 이수하면 신학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주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3 년! 처음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시작이 반이라는 마음으로 평신도 성경학교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성경공부를 시작해보니 정말 말씀을 배운다는 것이 이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다. 성경을체계적으로 보는 눈도 갖게되었다. 주위에서 사람들이 김태훈 전도사라고 부르면 괜히 우쭐해지는 마음도 들었다. 이제 조금만 더 참고 열심히 공부하면 나도 목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힘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마음이 들떠 있을 때 마귀는 나의 허점을 치고 들어왔다.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집사님 한 분이 주말에 바람도 좀 쐴 겸 가까운 곳에 있는 카지노를 다녀오려고 하는데 같이 가자고 권유하는 것이었다. 뉴욕에 살면서 그곳을 한 번도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냐며 그냥 관광 삼아서 한 번 다녀오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따라나선 첫 번째 카지노 방문에서 나는 거금 4백 달러를 땄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 도르트 신경과 칼빈주의 5대 교리

- 리차드 멀러 (Richard Muller, 전 미국 칼빈 신학교 역사신학 교수)


도르트 신경은 야곱 알미니우스 (Jacob Arminius, 1559-1609)의 가르침에 대한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유럽 전역 대부분의 개혁교회들에서 파송된 목사들과 신학자들로 구성된 대표단들의 신중하고 일치된 노력에 의해 1618-19년에 작성되었다. 알미니우스의 신학과, (그가 목사와 교수로 임명되었던) 개혁교회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가르침과 그의 견해의 차이점에 대한 알미니우스 자신의 공식적 주장은 그의 ‘소신 선언문(Declaration of Sentiments, 1608)’을 통해 네덜란드에 알려지게 되었다. 은혜는 저항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고; 한 번 구원받은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그것이 효과가 없게 되는 데까지 저항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에 달려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는 또한 벨기에 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특별히 구원에 절대적 토대가 되지 않는 교리적 요소들에 관해서 – 추정되기로는 그와 그의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견해들이 신앙고백적으로 수용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 정의들을 확장시키려는 목적으로 – 그렇게 주장했다. 그가 자신의 견해와 같은 관점들이 이미 일련의 교회 총회들에 의해 신앙고백적 경계 선상 내에 들어올 수 없는 것으로 거부되어 왔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알미니우스가 죽은 후, 그의 추종자들은 마흔 여섯 명의 목사들이 서명한 항의서(Remonstrance, 1610)로 자신들의 견해를 계속해서 주장했다. 이에 대한 응답, 즉 항의서에 대한 반대 견해(Contra-Remonstrance)가 뒤 따라 나왔다. 이 논쟁을 해결하기위해 네덜란드 의회는 전국 교회 총회를 1618년에 도르트에서 개최하도록 요청했다. 총회 대표자들은 네덜란드의 다양한 지역들 – 네덜란드에 거주하는 왈론 사람들의 교회들, 라이던, 흐로닝헌, 하르데르윅, 그리고 미델뷔르흐에 있는 종합대학들 혹은 학교들의 교수들 – 과 개혁주의 유럽의 도처에 있던 일련의 개혁주의 도시들과 공국들에서 임명되었다. 프랑스 대표들은 프랑스 왕 루이 13세에 의해 참석이 금지되었다. 도르트 신경은 알미니우스파 항의자들에 의해 제시된 견해에 관한 대표자들 간의 수많은 회의들과 대표자들의 보고서들을 최종적으로 비교분석한 결과물이다.


도르트 신경에 대한 일반적 오해들

하나 되는 세 고백서들(The Three Forms of Unity3]중, 도르트 신경은 가장 작게 이해되어 왔고 가장 작게 평가되어 왔다. 이것의 주요 원인은 “칼빈주의 5대 교리”라는 오히려 유감스러운 문구의 안경을 통해 도르트 신경을 환원주의적으로 읽는 것과 두문자어인 TULIP으로 이 신경을 설명하려는 심지어 더 문제가 많은 시도에 기인한다. 하지만 도르트 신경은 다섯 가지 교리적 논제들을 언급하는데, 이는 “칼빈주의”가 “다섯 가지 교리로” 축소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알미니우스파 항의자들에 의해 제시된 교리의 항목들이 다섯 가지 주요 부분들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칼빈주의” 혹은 더 정확한 이름으로 “개혁주의” 교회들의 더 폭넓은 가르침들은 벨기에 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 남아 있다. 도르트 신경은 개혁주의 교리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막기 위한 목적으로 알미니우스파 항의자들을 강력히 반대하는 이 두 주요 고백서들의 해석적 추가조항 혹은 부록으로 기능한다. 두문자어 TULIP은 근대적 시도이고 아마 20세기 초반에 기원한 것 같으며 19세기 후반 이전에는 분명히 사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환원주의적일 뿐만 아니라 종종 이 신경을 매우 잘못되고 축소되게 읽도록 인도한다. 우리가 도르트 신경을 가장 잘 사용하는 길은 어떻게 그것이 이러한 용어들에 의해 억지로 쉽게 짜 맞춰질 수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도르트 신경의 가르침

도르트 신경에는 네 개의 항목들로 나누어지는 다섯 가지 “표제들(heads)” 즉 기본적인 신학 논제들이 있다. 그것들은 각각 (1)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 (2) “그리스도의 죽음과 인간의 구속”; (3-4)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께로의 회심”; 그리고 (5) “성도의 견인”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도르트 신경의 실제적 순서가 TULIP의 순서 –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 저항할 수 없는 은혜(Irresistible grace), 그리고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 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즉시 분명해 진다. 더욱이 이 신경의 가르침에 대한 고찰은 심지어 ULTIP과 같은 두문자어의 재배열도 문제가 있음을 드러낸다. 이 용어들 중 도르트 신경에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단 하나는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이다. 그리고 무조건적 선택은 이 신경의 실제적 문구들로부터 이끌어 내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나머지 용어들은 오로지 난관과 많은 설명과 함께 할 때만 적용될 수 있을 뿐이다.

첫 번째 논제는 단순히 무조건적 선택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여기서 이슈가 되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 죄악됨; 죄의 대가, 즉, 영원한 죽음; 그리고 복음에 관한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의도이다. 예수를 믿는 모든 이들은 영생의 선물을 받을 것이고, 반면 믿지 않는 이들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머물 것이다. 도르트 신경은 특별히 불신앙을 포함하는 모든 죄의 원인이 인간에게만 귀속한다고 말한다. – 하지만, 사도 바울이 가르치듯이, 구원은 하나님의 값없이 거저주시는 선물이다 (엡 1:4-5; 2:8, 10; 빌 1:29).

그 두 번째 논제에서 도르트 신경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온 세상의 죄들을 속하기에 충분한” 속죄와 동일시함으로 구원의 은혜로운 성격을 계속해서 강조한다. 이 충분성은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는 이 신경의 선언에 기초를 제공한다. 게다가 이 신경은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 모든 이들”이 그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받는다고 역설한다. 어떻게 이러한 교리가 “제한적 속죄”로 특징 지워질 수 있는 가는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도르트 신경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은 아님을 또한 인정한다. 도르트 신경은 한편으로는 모든 구원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돌리고 하나님이 선택하신 모든 이들에게는 은혜로 믿음이 주어질 것이고 구원으로 인도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불신앙의 잘못이 인간들 스스로에게 있다고 또한 선언한다.

구원은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나 혹은 인간의 선택이 충실하기 때문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행위나 믿음에 대한] 그분의 예지에 기초하지 않는다. 오히려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성에 근거한 영원히 작정된 은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으로의 영원한 선택이다. 따라서 선택은 무조건적이고 불변한다. 반면 정죄 혹은 심판은 죄로 인해서만 발생한다. 선택이 복음의 선포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시간 속에 드러나는 것처럼, 선택에 대한 확신 또한 세상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한 양상이다. 확신은 하나님의 계획에 관한 질문에서부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 죄에 대한 애통, 그리고 의에 대한 목마름의 체험으로부터 일어난다. 유기는 어떤 사람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그들의 죄악 된 상태에 그들을 내버려두는, 그리고 그들을 그들 자신의 죄에 기반해서 최종적으로 심판하심으로 마지막 정죄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로 간략하게 언급된다. 유기를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무죄한 사람들을 거절하시는 것으로는 진술하지 않는다.

도르트 신경의 첫 번째 논제의 초반에 하나님께로의 회심에 관한 문제와 함께 소개되었던 인간의 상태에 관한 문제는 이 신경의 세 번째 부분(3-4 논제들)에서 다시 나타나고 첫 번째 논제에서 이야기되었던 기본적 문제들에 대한 더 완전한 설명을 제공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무조건성은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의 무능, 특별히 의에 대한 신적 요구를 성취할 수 없는 인간의 무능과 직접적인 관련성을 갖는다. 이것은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의 교리가 아니다. 이 신경은 모든 사람들이 도덕적 선에 대한 감각과 심지어 그것을 성취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진술한다. 오히려 이것은 자연적 이성의 빛을 통해서건 율법의 준수를 통해서건 그들 자신의 부패한 죄성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인간의 전적인 무능에 관한 교리이다. 이 모든 것들은 참된 의로움에 이르지 못한다. 구원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그리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라는 복음의 절대적으로 중요한 부름을 통해서만 유효하다. 복음을 우리가 수용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다.

도르트 신경은 또한 주장하기를, 복음이 사람들에게 마치 그들이 꼭두각시인 것처럼 말하지 않고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으며 강제적으로 구원으로 이끌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복음은 하나님께서 죄에 의해 타락한 인간을 소생시키시고 치유하시는 제1의 수단이다.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다른 수단들은 성례들과 교회의 권징, 즉 개혁신앙에서 말하는 교회의 세 가지 표지들이다. 성례들과 교회의 권징은 복음에 대한 증거들이다. 그 표지들에 대한 이러한 표현은 중요하면서도 종종 잘못 이해된다. 여기서 이슈는 교회의 삶과 활동들을 제한하는 것에 대함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의 역사가 말씀과 성례를 통해 올바르게 전해지고 집행되는 곳으로서의 참된 교회의 존재를 보여주는 구체적으로 식별할 수 있는 특성들을 확인하는 것에 대함이다.

세 번째와 네 번째 논제에 적힌 하나님의 말씀의 지속적인 선포와 성례들의 집행은 다섯 번째 논제에서 거론되는 이슈인 성도의 견인으로 바로 인도한다. 도르트 신경은 여기서 또한 오해되거나 희화될 수 있다. 그것들은 결코 죄에 대한 손쉬운 승리나 구원으로의 손쉬운 길 혹은 일단 어떤 사람이 은혜로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으면 그 사람의 삶은 성령의 사역을 반영할 필요가 없다는 가정을 암시하지 않는다. 이 신경은 중생이 그리스도인들을 죄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롭게 하는 것은 아님을 진술하는 데 신속하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많은 실패와 지속적인 회개의 필요를 포함한다. 하지만 이 신경이 가르치는 바는 구원에의 견인이 실패할 수 있는 인간의 과업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틀림없는 역사라는 점이다. 따라서 은혜의 방편들은 또한 견인의 방편들이다.


결 론

1. 도르트 신경의 전체에 걸쳐서 성경의 지속적인 인용에서 나타나듯이, 그것의 가르침은 형식적이거나, 사변적이거나, 혹은 철학적이지 않다. 그 가르침은 어쩌면 우리가 벨기에 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서 발견하는 것보다 조금 더 복잡할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이유는 이 신경이 교회의 기본적 고백이나 요리문답적 가르침이 아니라 신학적 문제에 관한 대답이라는 데 있다. 알미니우스파의 가르침에 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고 개혁 교회들은 도르트 신경에 의해 진술되는 성경적 진리를 계속해서 확신하고 있다.

2. 리차드 멀러 교수는 듀크대학의 스타인메츠 교수 아래서 “Christ and the Decree: Christology and Predestination in Reformed Theology from Calvin to Perkins”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1976년에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 논문은 1986년에 출판, 2008년에 재판되었다. 그는 풀러 신학교에서 가르쳤고(1980-1992), 칼빈 신학교에서 작년에 은퇴할 때까지 20여년 동안 존더반 석좌교수 자격으로 역사신학 분과에서 가르쳤다. 그의 저서로는 A Dictionary of Latin and Greek Theological Terms (1985), The Study of Theology (1991), The Unaccommodated Calvin: Studies in the Formation of a Theological Tradition (2000), God, Creation, and Providence in the Thought of Jacob Arminius (1991), Post 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 The Rise and Development of Reformed Orthodoxy, ca. 1520 to ca. 1725 (4 vols; 2003), After Calvin: Studies in the Development of a Theological Tradition (2003), Calvin and the Reformed Tradition (2012) 등이 있다.

3. 여기서 ‘하나 되는 세 고백서들’은 종교개혁 시대를 통해 수립된 벨기에 신앙고백,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그리고 도르트 신경을 가리킨다. 이 신앙 고백 문서들의 사상과 내용이 일치한다는 점에 이름이 연유한다. 개혁주의 신앙을 잘 표현하는 문서로 여겨지며, 개혁교회를 다른 교파들과 구분 짓는 중요한 문서들이다.


- 개혁정론 ( http://www.reformedjr.com )

출처: 안산회복교회/안상범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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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항력적인 은혜란? 조엘비키

구약성경에서 나오는 ‘은혜’라는 히브리어와 그 파생어들은 ‘친절함, 은총, 인자하심’을 뜻한다. 신약성경에서 ‘은혜’를 가리키는 헬라어는 ‘선한 뜻, 인자, 은총’을 의미한다. 이 단어가 구속 사역에서 죄인들에게 적용될 때에는 당연히 받아야 할 진노에 대한 과분한 은총을 의미한다. 은혜란 불행과 저주를 받아 마땅한 죄인들에게 내려 주신 하나님의 복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값을 치르고 수여된 복이다. 그러므로 은혜는 그리스도께서 실행에 옮기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은혜는 우리의 모든 죄보다 더 강하고 우리의 모든 역경과 인간적인 불가능을 이기는 강력이다. 은혜는 성경의 핵심이지 우리의 구원의 핵심이다.

은혜는 불행과 지옥을 받기에 마땅한 죄인들(전적 타락)을 구원하는 것이 오직 삼위 하나님의 사역임을 가르쳐 준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위격께서 이 은혜의 사역에 참여하고 공헌하신다. 칼빈주의자들이 말하는 불가항력적 은혜의 의미는, 성부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백성들을 성령께서 부르시고 거듭나게 하시며 구원하시는 일에 결코 실패하심이 없다는 것이다. 불가항력적인 은혜는 그 의도를 성취할 것이다. 구원적 은혜의 대상자들은 틀림없이 구원받고 말 것이다.

도르트 신조 제3,4교리 제11항은 말한다. “하나님께서 택자들 안에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성취하실 때, 또는 그들 안에서 참 회심으로 역사하실 때에는, 외적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실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그들의 마음을 강력하게 조명하셔서 하나님의 신령한 것들을 올바로 이해하고 분별하게 하신다. 또한 거듭나게 하시는 동일한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의 가장 깊은 곳까지 어루만지사 닫힌 것을 여시고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며 할례받지 못한 것을 할례받게 하시고, 지금까지 죽어 있던 의지를 살려서 새로운 활력을 갖게 하여 악함과 불순종함과 완고함으로부터 돌아서서 선하고 순종하고 온순하고 활기차고 강하게 하여, 마치 좋은 나무처럼 선한 행실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0장1절 역시 불가항력적 은혜를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모든 사람들, 단지 그들만을 자신이 정하시고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때에 효과적으로 부르시되 말씀과 성령으로 하시며, 그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처해 있는 죄와 사망의 상태에서 불러내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구원으로 인도하신다. 또한 그들의 마음을 영적으로 구원에 관하여 깨우쳐서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하게 하시며, 그들의 돌같이 굳은 마음을 제하시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며, 그들의 의지들을 새롭게 하시고,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이 선한 것을 결심하게 하시며, 효과적으로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신다. 그렇지만 그 은혜로 말미암아 기꺼이 나아오게 되어 있으므로 그들을 가장 자유롭게 나아오게 된다.”

불행하게도 불가항력적이라는 용어는 의지를 향한 죄인의 변덕스러운 힘이나 폭력을 암시할 수도 있다.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가 매우 강력하고도 강제적인 것을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상 예수님을 주님과 구주로 영접했던 사람들보다 더 기쁘고도 즐거우며 자원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없다.



- 조엘 비키, 『칼빈
주의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타/한아름

기독교와 윤리⑤

 

 

0d81a9612451ef397ba58a5eb9c4f861_1489420213_44.jpg인간의 행위는 다른 동물의 행위와 달라서 윤리적 평가의 대상이 됩니다. 윤리적 평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행위를 할 수 있음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윤리의 근거가 무엇인가를 밝혀야 합니다. 앞 글에서 벤담이나 밀의 공리주의를 잠깐 언급하였습니다. 공리주의는 윤리적 행위의 목적을 밝히는 이론입니다. 즉 인간은 왜 윤리적 행위를 하는가를 설명하는 이론입니다. 인간은 행복이라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 윤리적 행위를 한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공리주의를 쾌락주의와 함께 결과주의의 형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공리주의(Utilitarianism)는 사람들이 인간 복지 혹은 행복을 최대화해야 한다는 것이고, 쾌락주의(Hedonism)는 사람들이 인간의 쾌락을 최대화해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이 이론은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윤리적 올바른 선택이란 최대의 행복을 산출하는 것이고 또한 다수에 대한 최소한의 불행을 산출하는 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행위는 오직 결과에 의해서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고, 둘째, 결과 평가의 유일한 기준은 행위에 의해 생겨날 행복과 불행의 양이며, 셋째, 행복이나 불행의 양을 계산할 때 어떤 사람의 행복도 다른 사람의 행복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계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작동하는 윤리는 공리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리주의가 생겨난 시대적 배경은 영국의 시민 혁명과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새로운 시민계층이 생겨났고 그 시민계층의 자유와 평등사상이 18세기 영국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결과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영국의 시민, 산업혁명은 개인들에게 많은 이익을 가져다 주었고 그 사회를 자유로운 경쟁의 상태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 경쟁은 개인 간의 갈등뿐 아니라 개인과 사회와의 갈등을 만들어 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러한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도덕과 법의 재정비를 요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영국의 법학자요 철학자이며 변호사인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 1748. 2. 15~1832. 6. 6)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를 주창하였습니다. 벤담과 함께 공리주의 학자로 대표되는 존 스튜어트 밀(James Mill: 1773-1836)은 벤담의 제자 제임스 밀의 아들로서 걸출한 공리주의 철학자입니다. 벤담은 자유경제를 주장하였으며, 정교분리와 표현의 자유, 양성평등, 동물의 권리 등을 주장했습니다. 무엇보다 벤담은 법과 도덕은 쾌락을 늘리고 고통을 감소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보통 선거, 비밀 투표 등을 주장하여 세계 각국의 법률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벤담에 의해 제시되고 밀에 의해 정밀화된 공리주의는 18세기의 쾌락주의적 철학은 물론 고전적 철학을 기반으로 형성된 계몽사상이 얼마나 전통, 신의, 초월적 영감, 그리고 그와 같은 불명확한 관념들을 거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상이나 이념이나 철학을 공부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런 주장들이 어떤 근거에서 무엇을 지향하며 비록 명시적으로 지향하지는 않지만 어떤 결과에 도달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인간은 모든 사상이나 이론이나 철학이나 역사도 인간이 기대하지 않았고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공리주의자들은 고통을 줄이고 쾌락을 증대시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즉 모든 법률과 제도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쾌락)이라는 일반적 목표에 대한 유익성 혹은 효용성(공리주의)을 입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벤담은 그의 <도덕과 입법 원리 序說>(Introduction to Principles of Morals and Legislation: 1789)에서 “자연은 인간을 두 개의 절대적 지배자인 고통과 쾌락의 지배하에 두었다.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그것들에 달려있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세상에 현존하는 모든 체제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마련하지 못하였으므로, 도덕 및 공적 법률에 관한 모든 현존 제도는 폐지되고 행복의 증진과 영속화에 더 유용한 제도로 대체되어야 한다며 공리주의를 제시하였던 것입니다. 벤담은 다음과 같은 공리주의의 올바른 행위의 객관적 기준을 제시하였습니다. “공리성의 원리는 어떤 행동이 관련 당사자들의 행복을 증가시키느냐 감소시키는 것처럼 보이느냐에 따라, 다시 말해 행복을 촉진하는가 저해하는가에 따라 모든 행위를 시인하거나 부인하는 원리를 말한다. 나는 어떠한 종류를 막론하고 모든 행동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개인의 모든 행동뿐 아니라 정부의 시책에 대해서도 이 원리는 적용된다.”이것이 바로 벤담이 주장한 최대행복의 원리입니다.

     

공리주의의 원리는 흄의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흄은 그의『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에서 인간은 정념의 노예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합리적 이성을 따르는 존재가 아니라 정념이나 욕구에 지배를 받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자연 상태의 인간을 철학이나 과학적으로 탐구하면 그와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타락한 인간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흄에 따르면 선과 악이라는 것은 단지 우리의 감정의 쾌나 불쾌이고, 어떤 대상으로 하여금 즐거움을 얻는다면 도덕적으로 승인할 수 있고 불쾌를 얻는다면 부인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흄의 철학에는 하나님과 성경의 절대 권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절대가 부정된 상황에서 즐거움은 유용하고 유용하다는 것은 나의 쾌락을 충족시켜준다는 뜻이며 이를 근거로 벤담은 옳고 그름의 문제는 단지 효용성에 의해서 판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효용성은 자본주의의 지배적이고 핵심적인 가치입니다. 자본주의는 어떤 경우에도 효용성의 가치를 양보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효용성이 궁극적 가치인 행복에 이르게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성경도 효용성의 가치를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성경은 효용성의 가치가 절대적인 최고의 가치라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 나라 백성들도 자본주의처럼 효용성의 가치를 우선 가치로 취급한다면 산상보훈이나 수많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폐기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 교훈은 거의가 효용성의 가치와는 거리가 먼 것들입니다. 하나님 나라 원리는 받기 위해 주고 높아지기 위해 낮아지고 존경 받기 위해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현대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이러한 가르침을 효용성의 원리로 이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무엇을 명령하실 때 우리는 그 명령이 옳고 정당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이나 정이나 옳은 것보다도 높은 분이고 철학적으로 설명하면 상위개념입니다. 기복신앙이란 바로 이러한 가치의 우선순위와 질서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목적을 위해 윤리적 행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공리주의를 목적론적 윤리라고 합니다. 목적론적 윤리의 반대편에 의무론적 윤리가 있습니다. 의무론적 윤리란, 예를 들어 정의가 당위라면 어떤 목적을 위해서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 자체가 옳기 때문에 실천해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이 이론은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주창한 이론입니다. 공리주의가 행복이라는 비윤리적 가치에 도달하기 위해 윤리적 행위를 해야 한다는 것을 칸트는 이기주의라고 비판하였습니다. 공리주의나 의무주의가 다 성경의 가르침은 아니지만 공리주의보다 칸트의 의무주의가 상대적으로 성경에 더 가깝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이론이 그렇듯이 칸트의 의무론적 윤리도 그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너무 멀리 나가고 말았습니다. 의무론적 윤리는 이를테면 측은지심으로 동정을 베푸는 행위까지를 이기적이라고 비난합니다. 왜냐하면 측은지심이란 동정을 베푸는 행위를 통해서 자기의 측은지심을 만족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 이기심의 심층적 활동까지를 경계하는 것이 인상적이기는 하지만 가난하거나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까지를 이기적이라고 비난한다면 인간 감정의 순기능까지를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감정 주도적 행위를 경계하지만 감정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희로애락을 절제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성을 주셨지만 희로애락을 지나치게 통제하는 것도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슬픈 일을 만나면 슬퍼하고 기쁜 일은 기뻐하고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이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입니다.

     

칸트의 의무론을 당위론적 윤리라고 하는데 기독교 윤리도 당위론적 윤리로 분류합니다. 당위론적 윤리를 성경의 가르침과 기계적으로 일치시킬 수는 없지만 큰 틀에서 목적론적 윤리가 아니라는 면에서 그렇게 분류합니다. 기독교 윤리는 당위론 중에서도 또 다시 본체론과 신명론(혹은 신의론)으로 나누는데, 가톨릭은 본체론이고 개신교회는 신명론입니다. 본체론은 하나님 이외에 옳고 그름을 판단할 기준이 있다는 것이고 신명론은 하나님 자신이 절대적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당위론적 윤리란 이를테면 무엇을 목적으로 하여 윤리적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옳기 때문에, 즉 그것을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여러 명령들이 언뜻 보기에 어떤 목적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깊은 뜻을 심층적으로 더듬어 보면 당위론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그것을 잘 지키면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까 그 율법을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명령은 목적 지향적이 아니라 당위적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 같은 사실을 깨달은 고백들이 많습니다. 다니엘의 고백이 그 사실을 깨달은 가장 유명한 고백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 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7-18)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대학가 '전도거부카드' 등장…"지나치다" VS "오죽하면"

 

대학가에 전도거부카드가 등장했다. 학내에서 전도활동을 하는 이들에게 해당 카드를 보이면서 '전도 거부' 의사를 전달하겠다는 게 주요 목적이다. 이에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전도는 일종의 종교의 자유에 속하는 행위인데 지나친 방식 아니냐"는 반응이 있는 반면 "오죽하면 이런 것까지 만들겠느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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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개 대학 연합 모임인 '프리싱커스'가 배포할 전도거부카드.(사진제공=한국일보) 

 

"오죽하면 카드까지" Vs "종교의 자유 침해 우려"

 

서울대를 비롯한 전국 14개 대학생 모임인 '프리싱커스(Freethinkers)'는 이달 중 전도거부카드를 각 대학에 배포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명함 크기의 전도거부카드에는 '저에게는 당신의 전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4년 전에는 서울대와 카이스트 등 일부 대학에 등장한 적이 있다.

 

오용재 프리싱커스 서울대 지부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최근 대학 내 포교 행위가 학생들의 일상을 방해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며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비상식적인 의사소통이라는 것을 알려줄 것"이라고 말했다.

 

전도거부카드를 찬성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전도행위'에 대해 위협을 느낀 경우가 있었다고 답했다.

 

모 대학의 한 학생은 "모르는 사람이 기숙사에 들어와 문을 두드리거나 집까지 쫓아오며 포교행위를 해 위협감을 느꼈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또 다른 학생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중 옆에 앉아 말을 거는 종교인도 있었다"며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는 행위에 거부감을 느끼기도 했다"고 말했다.

 

반면 '전도거부카드'에 반대 의견을 내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이런 카드를 만듦으로 해서 오히려 분란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는 것.

 

대학 내에서 종교 동아리 활동을 하는 한 학생은 "무리하게 자신의 믿음을 강요하는 것은 문제가 되겠지만, 모든 전도활동을 거부하는 이 카드로 인해 종교활동의 자유가 위축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김종서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는 "전도를 의무로 느끼는 종교인도 있겠지만, 종교적 활동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수준에서 행사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홍의현 ⓒ 데일리굿뉴스

 

가져온 곳: USA아멘넷

양성평등 vs 성평등, 사소한 차이 엄청난 결과!


양성평등 vs 성평등?

글자 하나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낳는다.



세상이 혼란스러운 것은

나쁜 사람들의 폭력 때문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침묵 때문이다.

- 나폴레옹 -

“The world suffers a lot.

Not because the violence of bad people.

But because of the silence of the good people.”

― Napol?on Bonaparte - *


함께 보면 좋은 기사

http://blog.naver.com/dreamteller/221007962809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8)


위와 같이 원인과 현상을 구분하지 않고 결과만을 주목하여 스스로 만들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한번 자세히 보겠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증인은, 현장에서 직접 보고 경험되어진 것을 말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증인이 "되라고" 했나요? 아니면 "되리라"고 했나요? 글자 하나 때문에 그 뜻은 엄청나게 차이가 생깁니다. 내가 스스로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닌, 성령이 임했을 때, 그 능력에 의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영으로 성령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내가 직접 깨달아지기에, 그것을 증거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내 삶 가운데 주님이 하시는 일을 직접 경험하고 그 자리에서 내가 본 것을 증인된 삶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께 순종하는 삶은, 모든 것을 예수님이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지도 않았는데 임했다고 가르치면 거짓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내 심령에 임하는 것과 외적으로 역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순절날에 성령이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모두 예수님을 떠났다가 성령이 임한 이후 그들의 삶이 180도 달라진 것을 보며 순교의 자리까지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이 임하면 그가 하는 일로 통해 내가 변화되며 증인된 삶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돌이키는 회개를 하게 되면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십니다. 이 성령님이 내 심령에 임해야 합니다. 이걸 보고 거듭났다, 즉 다시 태어났다고 합니다. 외적으로 은혜받고 영적인 체험을 한 것과 , 나를 드려 내 심령에 성령님이 임하는 것은 다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나를 변화시키는 작업을 하시며 내안에 쓴 뿌리와 삶의 찌꺼기, 그리고 그동안 종교로 인한 생각의 견고한 진을 깨부수는 작업을 시작하십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 예수님을 원하고 내 생명보다 예수님을 소중히 여길 때,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신 성령님을 보내주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것이 모든 신앙의 첫걸음이자 마지막이며, 전부입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여러가지 은사가 같이 올 수도 있습니다. 은사만을 원하면 주시지 않지만,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그분과 교통하기를 간절히 사모하게 되면, 영의 은사들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늘의 신령한 것을 사모하고 예수님과 교통하길 원하면, 주십니다. 너무나 주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원하고 사랑하는 그 마음이 먼져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부디 그분과 연합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웃블로그/ 동동구리모

 




손잡아 준다고
넘어지지 않는 건 아니지만,
손 내미는 당신이 고맙습니다

응원한다고
삶이 힘들지 않은 건 아니지만,
힘내라는 당신이 고맙습니다

일으켜 준다고
상처가 아무는 건 아니지만,
흙 털어 주는 당신이 고맙습니다

목마르다고
당장 숨 넘어 가는 건 아니지만,
물병 챙겨주는 당신이 고맙습니다

혼자 간다고
다 길 잃는 건 아니지만,
기다려준 당신이 고맙습니다

말 한마디 안 한다고
우울해지는 건 아니지만,
말 건네는 당신이 고맙습니다


        - 담아온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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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우익과 좌익이 서로 상대 진영의 주장과 정책 때문에 법치가 무너지고 안보가 위태하며 경제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사회적 갈등과 분열이 심화되고 국격이 떨어져서 나라 꼴이 말이 아니고 그래서 살고 싶지 않은 나라라는 의미로 “헬조선”이니 “이게 나라냐?” 등의 자조(自嘲)의 말들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헬조선”이나 “이게 나라냐?”가 사실이라고 해도 외국에 나와서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런 태도가 누워서 침 뱉는 행위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그런 말을 만들어 내는지, 물리적 폭력보다 언어의 폭력이 더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되는 현 상황을 고려한다면 그런 말을 만들거나 사용하는 이들의 행위는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태도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악한 말이나 행위로 건전한 사회적 수준을 해치는 자들을 향하여 똑 같이 악한 말과 행위로 비난하거나 대응하는 것은 자기가 비난하는 대상자보다 더 나쁜 역할을 자처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왜냐하면 악한 언행을 하는 자는 그것이 나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비난하는 자는 악한 언행이 나쁘다는 평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책임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말이나 행위가 윤리적이 되려면 특정 상대나 불특정 다수를 충분히 배려해야 합니다. 거짓이나 불의에 대해 묵인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이고 합리적 설명을 통해 설득해야 합니다. 물론 거짓이나 불의가 극단적 폭력성을 띨 경우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칼이나 총을 든 강도가 집안에 침입하여 가족을 위협하는 극단적인 경우라면 폭력적 대응도 정당화 될 수 있습니다. 상황이 일반적인 경우인지 극단적인 경우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개인의 양심과 교양과 법과 관습과 사회적 통념을 따라야 할 사항입니다. 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일반적인 것을 극단적인 것으로 판단하여 폭력적 언행으로 대응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여기서 수준이 낮다는 것은 단순히 학문적 수준이 아니고 인격적 수준을 뜻합니다. 극단적인 예가 되겠지만, 상당히 많은 학자들까지도 집안에 침입한 강도에게 대처하는 방법을 문제 삼아 강도가 자기의 행위를 정당화하는데 일조를 하는 형국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대한민국 근 현대사를 이해하는 것도 그렇고, 안보 문제, 국정교과서 문제, 환경문제, 경제문제, 동성결혼 문제, 인권문제까지도 그렇습니다. 강도가 사회 정의와 민주주의를 외친다고 강도와 함께 사회 정의와 민주주의를 외치는 것은 위험한 행동입니다.

 

우리는 나쁜 사람이 옳은 일이나 좋은 일을 한다고 설칠 때 매우 사려 깊게 살펴서 판단하고 대처해야 합니다. 이와 비슷한 일은 기독교계에서도 있는 일입니다. 건전한 교회가 복음을 왜곡하고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이단에 대처할 때 이단 비슷한 자들이 극성스럽게 앞장서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단의 활동에 단호히 대처하는 일은 모든 교회가 힘써야 할 일이지만 이단 비슷한 이들이 이단에 단호히 대처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므로 자기들이 마치 교리적으로 건전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또 다른 폐해가 되고 있습니다. 정치 사회와 교계에서 볼 수 있는 극단적인 예를 들었지만 교활한 사람은 겉으로는 교양 있고 건전한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지만 사악한 목적을 숨기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국가나 한 사회가 건강하게 발전하려면 모든 구성원들이 사회적 약속을 잘 지켜져야 합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질서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 질서이고 다른 하나는 인위적 질서입니다. 자연 질서는 누구나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돌멩이가 얼굴을 향하여 날아 올 때 피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이는 자연 질서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자연 질서를 지키지 않으면 우선 자신이 손해를 보기 때문에 누구나 잘 지킵니다. 법이나 관습이나 전통 같은 것은 인위적 질서입니다. 인위적 질서는 지키지 않아도 당장 나에게 손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길게 보면 손해가 되지만 당장 손해가 없고 또한 그 손해가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지기 때문에 미미하게 느껴져서 인위적 질서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태도를 아주 어리석은 태도라고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가능한 인위적 질서를 어기면서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것이 지혜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미미한 악영향들이 누적되면 정치와 경제와 학문과 문화와 사회 모든 부분에까지 가치 질서를 무너지게 합니다.

 

새삼스럽지만 우리의 선배들이 던졌던 질문을 다시 한 번 던져 봅니다. 왜 우리는 사회적 약속과 보편 가치를 지켜야 할까요? 왜 그런 것이 존중 되어야 할까요? 그런 것을 안 지키면 사회 질서가 무너지고, 질서가 무너지면 무질서하게 되고, 무질서하게 되면 내일을 예측할 수가 없고, 예측이 불가능하면 불안하고, 불안하면 불행하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이 지표상으로는 꽤 괜찮은 나라지만 “이게 나라냐?”, “헬조선” 등으로 묘사되는 것은 또 다른 여러 지표들, 이를테면 자살, 이혼, 거짓말, 위증, 사기, 무고 등등.. 때문일 것입니다. 사회 구성원 다수가 인위적 질서를 지켜지지 않으므로 그 피해가 미세먼지나 안개처럼 미미한 것 같아서 아무도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는데 이제는 도무지 손을 쓸 수 없는 암처럼 되었습니다. 경제적 지표나 교육적 수준으로는 살기 좋아야 할 대한민국이 헬조선이 된 것은 상당한 시간 동안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결과입니다. 사회의 모든 부정적 현상은 하루아침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시계의 시침처럼 서서히 진행되어 오늘날의 부끄러운 부정적 각종 지표들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윤리학에 공리주의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선한 행위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더 나은 어떤 목적을 위해 선하게 행동해야 하고 정의를 실천해야 하고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이 이론의 대표적인 학자는 J. Bentham과 J. S. Mill입니다. 공리주의의 목적은 행복이고 그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 도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개인이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모두가 행복해 지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니까 공리주의나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공리주의란 인본주의적 행복논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복을 얻기 위해 도덕이나 윤리를 수단으로 취급하는 이론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불편한 심기를 느끼게 됩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도 행복이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행복 그 자체가 도덕적 가치는 아닙니다. 도덕적 가치는 선한가 혹은 악한가 하는 판단 기준입니다. 공리주의는 윤리나 도덕적 가치가 아닌 행복을 얻기 위해 도덕적 행위를 해야 하는 모순에 직면하게 됩니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 윤리나 도덕을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이 모순인 것은, 윤리나 도덕은 타자 지향적이기 때문입니다. 즉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윤리나 도덕의 핵심인데 윤리와 도덕을 자기의 행복을 위해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그 윤리나 도덕은 처음 전재한 윤리와 도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윤리나 도덕을 강조하는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거짓과 불의가 지배적이 되는 이유는 수단화해서는 안 되는 윤리와 도덕을 수단화하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가치를 인간의 행복에 두게 되는 모든 인본주의적 이론은 이와 같은 모순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삼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최고의 가치로 삼습니다. 인간이 행복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공리주의는 도덕 외적 가치를 위해 도덕을 수단화해야 되는 모순에 직면하였지만 그것을 해결할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였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행복하게 되는 것은 행복을 추구함으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행복이 최고의 가치가 아니지만 공리주의는 최고의 가치를 다른 것에서 찾을 수 없고 찾아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행복 이외의 모든 것은 수단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와 같은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설명을 위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즉 “왜 우리는 행복해야 하는가?, 불행하면 어떤가? 왜 굳이 행복해야만 하는가?” 여기에 대해 J.S. Mill은 설명하기를 “모든 사람이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연적으로 행복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없는 이론을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처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하기 때문에 모순에 봉착하게 됩니다. 인간이 자연적으로 행복을 추구하게 되어 있는데, 자연적으로 추구하게 되어 있는 그 행복을 얻기 위해서 당위적인 어떤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 이상합니다. 윤리란 당위적인 행동인데, 당위란 자발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인간이 자연적으로 행복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면 당위적인 행위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것을 가리켜 자연주의 오류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과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실현시키는 데 있어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와 여러 사상과 학문과 문화가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실현된다고 해서 인간이 행복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인간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만든 그 어떤 이론과 제도도 궁극적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없고 인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비로소 행복하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사실을 전재하지 않는 그 어떤 대안에 대해서도 성경은 비판합니다. 역사를 통해 그 같은 문제들에 대한 임상실험의 많은 결과들이 나와 있습니다. 인류는 행복을 기대하며 실험했지만 불행의 결과가 나온 것에 대해 매우 당혹스러워 하면서도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바른 대안의 길로 들어서지 못하고 또 다른 시행착오를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우리는 미국이나 한국이나 전 세계적으로 혼돈의 시대에 살고 있다. 사회적,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아주 혼탁한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조금만 깨어서 기도하는 목사 또는 성도라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사회가 무질서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것은 결과적으로 교회가 영적전쟁에서 패배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 패배의 원인들 중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목사들에게 있다고 볼 수 있다.


목사가 중요한 것은 목사의 생각과 영적상태가 교회와 성도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고, 그것이 악한 영향을 미칠 때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의 교회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동성결혼을 먼저 합법화시킨 것은 세상이 아니고 바로 교회였다는 사실이 아주 충격적이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교회가 없어서도 아니고, 목사가 없어서도 아니다. 오히려 목사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스펄전 목사님이 오래전에 정학하게 이런 예언의 말씀을 하셨다:

“이제 때가 이르면 교회에서는 강단에서 광대가 염소들의 귀를 즐겁게 할 때가 올 것이다.”


이 말은 마지막 시대가 되면 사람들의 귀만 즐겁게 하는 광대와 같은 목사와 진리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귀를 즐겁게 하는 말만 듣기를 좋아하는 염소들이 교회당을 메울것이라는 예언적인 말씀이다.


성경에도 예언되어 있지 않은가?

딤후 4장 3-4절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마지막 시대가 되면 바른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을 받지 않고 자신의 귀를 즐겁게 하는 허탄한 이야기를 좇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의 귀를 만족시키는 광대들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목사인가, 아니면 광대인가? 물론 나 역시도 목사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점들이 너무 많다. 그러나 참 목사라면 다음과 같은 점들을 갖추어 된다고 생각한다.


첫째, 목사는 성경을 읽고 성경을 알아야 하고 성경적이어야 한다.


요즘 목회자들은 성경을 읽지 않고 세상적인 책을 좋아하고, 참고서적은 읽는데 성경을 읽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또 목사들이 TV나 미디어에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목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세상적이고, 생각하는 것도 세상적이고 목회하는 방식도 세상적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목사는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또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생각하는 것도 성경적이고 목회도 성경적으로 할 수 있다고 본다.


둘째, 목사는 시대적 상황을 깨닫고 깨우쳐 줘야 할 의무가 있다.


목사는 정치적이면 안된다고 정치적인 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정치적인 것은 분명히 좋지 않다. 예를 들면 목사가 정치에 참여하거나 정치를 하면 안될 것이다. 그러나 정치가 바르지 못하면 목사는 바르지 못한 정치를 바르게 잡을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시대적인 상황을 깨닫고 성도들에게 말씀을 통해서 시대적으로 바르게 깨달을 수 있도록 가르치고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모세가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듯이 목사라면 정치가들이나 권력자들에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냥 성경말씀만 전하고 가르치는 것으로 목사의 직분을 다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이다. 신학교 교수는 그렇게 해도 괜찮다. 그러나 목사는 신학적으로 가르치는 직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적인 사명으로 시대적인 지팡이의 역할을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정부가 악을 행하는데, 악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은 자신의 목사로서의 직무를 유기하는 것이다. 시대를 바르게 깨닫고 분별하기 위해서는 목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어야 하고 성경 66권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주의 신학을 공부한 믿음이 없는 목사들은 시대를 바로 볼 수도 없고 따라서 성도들을 바르게 인도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목사가 성경을 가르치는 것 외에 시대적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참 목사라면 다음과 같은 면에서 절대 타협해서는 안된다.


하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용납하거나 그들과 타협해서는 안된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이념 자체가 기독교와 상반되는 것이다. 잘못된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은 마치 예수님이 혁명가라는 식으로 이단적인 사상을 가르치기 때문에 심지어는 목사들이 사회주의에 빠지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자는 참 목자라고 볼 수 없다.


예수님은 혁명가나 사회 개혁주의자가 아니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구세주' 하나님이시다. 특히 공산주의는 일당 독재를 위해서 결코 기독교와 같은 종교를 용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크리스천들을 강제수용소에 보내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따라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적인 이념을 가진 자는 바른 목사라고 볼 수 없다. 이런 이념을 용납하는 것은 이단을 용납하는 것만큼 나쁜 것이다. 오직 민주주의 체제안에서만 기독교의 자유로운 활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둘, 동성결혼과 같은 성경에서 죄로 여기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서 죄라고 하는 것을 허용하거나 죄를 죄가 아닌 것으로 용납할 때, 이미 그 교회나 목사는 하나님을 떠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이 죄로 정한 것을 어느 누가 뒤집을 수 있는가? 우리가 동성애자들도 차별없이 사랑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죄를 사랑해서는 안된다.


우리 모두도 다 죄인이지만, 그 죄를 회개할 때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듯이, 우리 모두는 동성애의 죄는 미워하되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기에 그들을 사랑하고 회개에 이르도록 기도해야 한다.


셋, 차별금지법과 같은 반 기독교적인 법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성으로 차별할 수 없다는 이유로 동성결혼을 반대하거나 거기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면 교회나 목사들은 불이익을 당하거나 벌금을 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와 교회가 역으로 차별을 당해서 핍박을 받게 된다.


차별금지법은 성경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단의 악한 수법이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이런 것을 알면서도 목사나 교회가 묵인하거나 용납한다면 바른 목회자나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


넷, WCC와 같은 종교혼합주의나 종교통합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

사단은 화합과 평화라는 그럴듯한 단어를 사용해서 모든 종교를 하나로 만들어 자신이 하나님 대신 영광을 받으려고 한다. 진정한 평화는 종교가 하나가 되는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진정한 평화는 오직 주님 안에서 살아갈 때 존재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 왜냐면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은 오직 한분 뿐이신 유일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코 다른 신에게 절하거나 다른 신을 허용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보시지 않으시고 반드시 심판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종교와 하나가 되려고 하는 노력이나 다른 종교와 함께 예배를 드리는 행위는 배교적인 행위이고 아주 큰 죄악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본주의와 세속주의를 멀리해야 한다.


특히 일부 큰 교회 목사들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지 못하고 적당히 타협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행위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적인 목회다.


목회자는 사람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한다. 또한 세상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세상 것들을 교회로 끌어 듷이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교회가 세속화 되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예를 들면 구도자의 예배와 같은 것은 결국 세속적인 문화를 끌어 들여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변질된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원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기보다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찬양과 예배를 드리려고 하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다.


참 목사라면 인본주의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가 되어야 하고, 세속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말씀 중심의 목회를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마지막을 향해가고 있는 혼돈의 시대고 어두움의 시대이다. 정신차리지 않으면 사단에게 미혹되고 속아 넘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바울사도는 고전 11장 14-15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사단이 악한 마귀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광명의 천사로 나타나고 사단의 일군들이 악한 마귀의 종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주의 종 처럼 나타난다는 것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깨어있어야 하고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 모두는 부족한 죄인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연약해서 언제든지 미혹당하고 실족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 모두가 마지막 시대에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악한 영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광대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목사들이 목회하는 교회, 자신이 듣고 싶어하는 말만 듣는 염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훈을 즐겨 듣기를 좋아하는 진실된 양들로 이루어진 교회가 될 때에 이 나라에 참 부흥과 회복이 일어나게 되리라 믿는다.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면서…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하박국 3장 2절)




글쓴이: 애틀랜타 하은교회 정윤영 목사님



http://kr.christianitydaily.com/articles/91647/20170513/마지막시대의-현상-목사와-광대-양과-염소.htm

* 김경애 사모의 간증 *

 

그런데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모든 관심이 아이들에게 집중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두아이 다 태어나면서부터 원인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서 나는 잠시도 아이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성수는 나면서부터 치루병이라는 희귀한 병에 걸렸다. 이 병은 아기의 항문 주위에 지방질이 끼면서 병균이 서식하고 고름이 생겨서 대변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드는.병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 데려가서 고름을 짜내고 대변을 받아내야만 아이가 살 수 있었다. 그런데 고름을 짜낼 때의 고통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진통제 주사를 맞히고 고름을 짜내도 아기는 울다가 중간에 졸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고통으로 인해 콧등에 진땀이 송송 맺히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무엇보다 두려웠던 것은 병균이 항문을 타고 창자까지 번지면 그때는 정말 위험한 상황이 된다는 의사의 주의였다. 그 당시를 회상할 때마다 나는 아이를 낳고도 산고가 몇 달 동안 계속되었던 것 같은 오랜 진통을 느끼게 된다. 성수는 계속 눕혀 놓으면 항문 주위에 좁쌀만한 빨간 반점들이 온몸으로 번지곤 해서 항상 팔에 안고 있어야만 했다.

아이가 예뻐서 안고 있는 것도 한두 시간이 지나면 힘든데, 아파서 칭얼거리는 아이를 하루 종일 안고 있다 보면 허리가 끊어지는 듯한 통증이 찾아오곤 했다. 병원에서는 아이가 두 살이 될 때까지는 수술도 할 수 없고 그냥 지금과 같이 정기적으로 치료를 받으면서 아이가 정상적으로 성장해 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고 했다. 병원에서는 병균이 창자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아이에게 독한 항생제를 계속 먹이도록 했다. 아이를 위해 밤이면 이불을 적시며 하나님께 치유를 간구했다.   하루하루가 너무나도 힘든 나날들이었다. 언제부터인가는 기도할 힘도 없었다. 기도할 힘이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살아 있다는 증거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기적은 일어났다. 정확히 성수가 생후 7개월 되던 날, 하나님께서는 성수의 병을 거두어 가셨다. 문둥병에 걸렸던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에 7번 몸을 담갔다가 나왔을 때 거짓말처럼 문둥병이 사라져 버린 것처럼 성수의 항문 주위가 어느 날 하루아침에 거짓말처럼 깨끗해졌다.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시던 그날, 나는 아이의 항문 주위를 손가락으로 깨끗이 닦아주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엔가 주변의 불순물들이 빠져나가는 느낌을 생생하게 느꼈다. 그리고 아이는 치유되었 다. 성수를 치료하던 의사는 하루아침에 성수가 깨끗하게 치유된 것을 도무지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유대인 의사였는데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이냐고 몇 번을 다그쳐 물었고, 나는 그저 예수님께서 치료해 주셨다는 말만을 계속 반복했다. 과학과 의술이 아무리 발전된 21세기라고 해도 인간의 의술이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의 손으로 치유해 주신 것이다. 할렐루야! 성수는 그렇게 고통을 겪으면서 컸는데도 불구하고 체중이나 신체 발육은 정상적인 아이들을 능가할 정도로 쑥쑥 자라서 우량아 선발대회에 한 번 나가보라고 할 정도로 건강하게 자랐다. 나는 성수의 질병이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견고케 하시기 위해 허락하셨던 고난이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만일 그 당시에 내가 아이를 위해 기도하지 않고 치료에 집중하지 않았다면 나는 결혼생활에 대한 불평과 실망에 젖어서 오히려 더 어려운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환난과 고통은 무엇이든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사실을 이때부터 조금씩 깨닫을 수 있었다. 막내를 임신했을 때는 초음파 검사 결과 아이가 좀 비정상적으로 자라고 있다며 순산을 해도 아이가 기형아가 될 확률이 높다고 했다. 또다시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고 나는 어찌할 줄 몰랐다. 주위에서는 당연히 유산을 시켜야 되지 않겠냐고 했지만 나는 절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그렇게 지울 수 없다고 믿었다. 기도 하며 하나님께 울부짖었다.

 

"하나님, 어찌해야 합니까. 왜 이런 시련을 제게 계속 주시는 겁니까. 하나님, 도와 주세요."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동안에도 매일밤 기도 시간을 눈물과 통곡으로 보냈다. 결국 임신 8개월 만에 아이를 조산했다. 어떤 기형 아기가 태어났을까. 모두 긴장하고 아이를 이모저모 검사했는데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모든 것이 정상인 정상아로 출산했던 것이었다. 나는 초음파 진단을 했던 의사가 오진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 아이를 출산할 때도 나로 하여금 그토록 고통 가운데 기도하게 하심으로 당신의 기적을 태중에서 이뤄 주셨던 것이다. 아이들은 내가 환난의 강을 건너가게 만들어 준 힘이었고 결혼 생활이 정말 힘들었을 때 그래도 살아가야 할 의미를 부여해준 소중한 선물이었다. *<간증 끝>*

 

둘째 아이를 출산한 후 우리 부부는 거의 10여 년 동안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았다. 살을 맞대고 살아야 하는 부부가 어떻게 그처럼 오랜 시간 동안 육적으로, 영적으로 서로를 철저히 외면하면서 살았는지 정말 이해되지 않는 일이지만 우리 부부는 하나님의 은혜로 최근 부부 관계가 다시 회복되기까지 길고 긴 빙하기와 같은 냉랭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았다. 돌이켜 보면 결혼 이후 지난 18년 동안 서로 상대방을 정죄하며 갈등과 철저한 위선 가운데서 살아온 것이 전부였던 것 같다. 그런 와중에서도 우리 부부가 이혼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정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욱"하는 마음이 치밀어 올라 이제는 끝내 버리고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비집고 올라오려고 하면 "하나님이 짝지어 준 배필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라는 말씀이 귓가에 쟁쟁하게 울렸다. 거기다 나는 호적상으로 이미 세 번이나 이혼했던 그런 전과자(?)가 아닌가. 무엇이 부족해서 또 한 번 이혼 경력을 늘려 가면서까지 이 가정을 깨겠는가. 이혼은 이제 내 목에 칼이 들어오는 한이 있어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내는 사정이 좀 달랐다.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 오면 저녁 식사를 마치기가 무섭게 곧바로 기도 골방으로 들어가서 자정이 넘는 시간까지 나올 줄 몰랐다. 자신은 골방에서 기도하며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삶의 가장 큰 낙이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그런 아내를 보면서 나는 성질이 나곤 했다.

 

"자기가 무슨 그렇게 대단한 기도의 여인이라고…. 꼭 그렇게까지 기도할 필요가 있는가."

 

하루는 샤워하고 침대에 누워서 아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교회의 종말론적 배교!

-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 -


하나님을 대적하고 살아남은

개인도.. 국가도.. 제국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지만

돌이키지 않으면 심판하시는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 안의 옛심장이 연결된 큰 대동맥, 대정맥들을 잘라내어 이제 더 이상 거침없이 뿜어대던 죄악의 굵직한 혈관들은 차단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걸로 다 끝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새심장을 이식해야 온전히 사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들을 하나하나 주의깊게 따라가며 초집중하여 심장이식수술을 따라갑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롬 6:8-9)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의 의미를 조명해 주십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것은 반드시 <옛사람의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확실하게 옛 자아가 죽어지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다는 것'이 전혀 무의미하고 도무지 와닿지 않는 일입니다.

자아가 시퍼렇게 살아 돌아다니는 상태에서는... 그리스도로 산다는 건 어불성설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었는데 그리스도로 사는 게 잘 안되는 사람이 있다면
 아직 그의 옛사람이 안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확실하게 죽는 방법은 죄 가운데 살아가는 삶의 결말이 '지옥불못'임을 깨닫고 사형선고를 받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사형선고를 받고 
살아야겠다는 영적 대각성이 일어날 때에야 비로소 '죽어야 산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확실히 옛사람이 죽어진 사람은 결코 죄의 미혹에 반응하거나 따라가지
 않습니다. 새삶의 본질되신 성령께서 우리의 영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본질을 완전히 새 것으로 바꾸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을 좋아하는 흉측한 애벌레가 빛을 좋아하는 예쁜 나비가 되듯이, 자꾸 어둠속으로 숨어들어가는 옛사람이 죽고 빛되신 주님의 보좌앞으로 자꾸 나아오려고 하는 새 사람이 우리 속에 
창조된 것입니다.

그 새 
사람의 이름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께서 내 육체를 빌려서 거주하시는 새로운 피조물!!! 이것이 바로 진정한 나의 본질이요 아이덴티티인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롬 6:10-11)

이제는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은 우리는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더이상 옛사람은 내가 아니다! 내 안에 새로이 창조해 주신 새사람이 나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난 이후에도 여전히 옛사람이 나라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사탄마귀가 교묘하게 우리 생각에 침투하여 뿌리고 간 치명적인 가라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도 삶의 변화가 없고, 여전히 죄가운데 넘어지며 실패하는 이유는, 여전히 십자가에 처형된 옛사람을 '나의 본질'이라고 믿고 살기 때문입니다.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박혀있는 상태이지만 육신이 살아있을 동안에는 목숨이 붙어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상태에서도 입만 살아서 우리에게 거짓으로 속삭이며 새사람으로 살지 못하도록 부추기고 있습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말씀을 날마다 내 육체에 선포하며 나를 미혹하는 옛사람에게 똑똑히 들려주어야 합니다. 그리고는 내 안에 새사람이 되어주신 나의 근원적인 본질이신 성령님을 믿으며,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 (롬 6:12-13)

사탄마귀는 예수님의 성령정부가 들어와 본격적으로 내 삶에 출범하여 통치하시는 기간조차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끈질긴 존재입니다. 내 삶에 합법적으로 출범한 생명의 성령정부와 말씀의 법이 버젓이 자리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불법을 끊임없이 자행하며 치고 들어옵니다.

결국 그들의 목표는 죄가 다시 
내 삶의 왕 노릇하도록 정권을 탈환하는 것이 유일한 목표입니다. 그것을 이루어 내 영혼을 영원한 지옥으로 끌고가려는 것이 사탄마귀의 필생의 소원입니다.

성경은 죄로 우리의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그리스도의 보혈의 값을 치르고 사신 우리의 몸을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주도권을 내어주지 말라 하십니다. 오직 자기 자신의 본질과 정체성이 하나님께 드려진 성령의 본질임을 인정하며 우리의 몸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롬 6:14-15)

이제 더 이상 죄는 우리의 삶에 힘을 쓸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죄의 영향력과 최종목표가 바뀌어진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죄의 목표는 우리를 영원한 지옥으로 끌고가는 것이었는데, 예수님을 믿은 후에 죄의 목표가 단지 하나님과의 일시적인 교제단절이라는 목표로 수정된 게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여전히 죄가 내 속에 이루고자 하는 유일한 목표는 반드시 내 영혼을 영원한 지옥불못으로 끌고가는 것입니다. 그 목표외에는 다른 목표가 없습니다.

이러한 무시무시한 죄의 정체를 바로 안다면... 결코 적당히 죄와 타협하여 근거없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평안하다 안전하다 안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죄와 손잡고 하나님을 등지고 걸어간다면... 주님과의 교제가 단절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돌이키지 아니하고 끝까지 고집스럽게 죄와 손잡고 나아간다면...
 그 사람의 마지막 결국은 영원한 사망, 즉 지옥불못임에 틀림없습니다. 죄가 얼마나 두렵고 끔직한 존재인지를 바로 알 때 건강한 긴장감을 가지고 끝까지 죄와의 영적 전투에 경각심을 갖고 드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롬 6:16)

이제 남은 건 <순종>입니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만약 죄에게 순종하여 죄의 종으로 살아간다면 그 마지막은 사망이고, 주님께 순종하여 순종의 종으로 살아간다면 그 마지막은 의로움과 영생인 것입니다.

성경은 확실하게 이야기합니다. 믿는 자들의
 순종이 단지 주님과의 교제 단절 여부의 문제가 아닌, 천국이냐 지옥이냐 영생이냐 사망이냐를 판가름하는 영원한 운명을 좌우하는 문제라는 것을...



출처: 곰팅이의 하늘우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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