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친구는 재산이다!
💚 친구는 재산이다!💚

내 인생의 반을
뒤 돌아보니 돈과
잘난 사람보다도
마음이 편한 사람이 좋더라.

돈이 많은 사람보다
잘난 사람보다,
많이 배운사람보다
마음이 편한 친구가 훨씬 좋더라.

돈이 다가 아니고
잘난게 다가 아니고
많이 배운게 다가 아닌
소박함 그대로가 제일 좋더라.

사람과 사람에 있어
돈보다는 마음을,
잘남보다는 겸손을,
배움보다는 깨달음을,
반성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 얼마나 있을까 ?

친구를 대함에 있어
이유가 없고 계산이 없고 조건이  없고,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은
물의 한결 같음으로
흔들림이 없는 친구는,
평생을 두고 함께 하고픈 사람이더라.

사람을 귀하게 여길 줄 알고
그 마음을 소중히 할 줄 알고
너 때문이 아닌 내탓으로
마음의 빚을 지지 않으려 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는걸 배웠더라.

친구는 세가지 종류가 있다 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 ,
나를 미워하는 사람,
나에게  무관심한  사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사랑과 자비를 가르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내게 조심성과 바른 삶을 살도록 안내해주며, 내게 무관심한  사람은 자립심과 홀로 서기를 학습해 줍니다.

여러분!
친구의 우정을  소중하게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 인생 사는거 묻지 마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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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마에 이런 힘이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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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세 이상은
              꼭 정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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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좋은 내용이라
   꼭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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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설교는 해석인가, 적용인가?

이 글은 채경락 교수가 지난 4월 22일 한국복음주의신학회 제 69차 정기논문발표회에서 발표한 논문이다.

채 경 락 교수(고신대학교)

 

Ⅰ. 들어가는 글

구속사적 설교는 설교학의 뜨거운 이슈 가운데 하나다.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바람직한 성경적 설교의 대명사로 통하지만, 반대편에서는 해석학적으로 무리가 있는 접근이라고 우려한다. 구속사적 설교 주창자는 대표적으로 Sidney Greidanus, Graeme Goldsworthy 등이 거명되는데, 그들은 신약이든 구약이든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선포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구속사적 진전 안에서 신약과 구약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그 절정에는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 혹은 구속사적 메시지에 대한 그들의 강한 확신은 은연중에 혹은 때로 명시적으로, 그렇지 않은 설교를 향해 미완의 설교 내지는 심지어 비기독교적 설교라는 압박을 가하기도 한다.

한편, 구약학자인 Walter Kaiser는 저자-지향적 해석학 원리에 기초하여 구속사적 설교에 거부감을 나타낸다. 구속사적 설교가 이슈가 되는 것은 특히 구약을 설교할 때인데, 구속사적 설교자들은 구약을 읽을 때에도 신약의 눈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속사의 진전 속에서 신약이 구약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Kaiser는 그것은 저자의 의도를 무시하는 주입(eisgesis)이라고 비판한다. Kaiser에게 저자는 우선적으로 인간 저자이며, 타당한 해석(exegesis)의 울타리 역시 인간 저자의 의도다. 따라서 인간 저자가 의도하지 않은 내용을 본문에 억지로 주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신약 저자는 구약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신약을 읽을 때 구약을 참고하는 것은 당연하고 타당하지만, 구약 저자는 신약을 미처 알지 못했다는 점에서, 신약의 눈으로 구약을 이해하는 것은 시대착오라고 주장한다.

설교자로서 우리는 Kaiser의 길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Greidanus의 길을 따를 것인가? 특히 구약을 설교할 때 Greidanus 등 구속사적 설교자들이 미완의 설교라고 우려하는 Kaiser의 길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Kaiser가 시대착오적 주입이라고 비판하는 Greidanus의 길을 따를 것인가? 이것은 설교학자들의 논의 속에서도 민감한 이슈지만, 현장 설교자들에게도 난감한 갈림길이다. 둘 모두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성경적 설교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강해설교자들은 Kaiser의 저자-지향적 해석학을 원리적으로 수용한다. 그러면서 또한 구속사적 진전에 기초한 그리스도 중심적 메시지의 가치도 충분히 공감한다. 이 둘을 동시에 포섭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본 논문은 바로 그 고민에서 시작되었다.

본 논문은 해석과 적용의 구도 속에서 구속사적 설교를 새로이 이해함으로써, 둘 사이의 조화로운 공존을 모색하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본 논문은 구속사적 설교는 해석이 아니라 적용의 영역에 속하며, 이를 통해 구속사적 설교 논의의 긴장감은 근본적으로 해소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Kaiser의 저자-지향적 해석이 말 그대로 해석의 범주에 속한다면, 구속사적 설교는 적용의 범주에 속한다. 둘의 논의 범주가 서로 다르다는 의미다. 따라서 둘은 양자택일의 대립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공존의 관계다. 구속사적 설교를 자주 구속사적 ‘해석’이라고 부르는데, 본 논문은 구속사적 ‘적용’이라고 부름이 합당하다고 주장하는 바이며, 이를 통해 Kaiser와 Greidanus 사이의 긴장감이 해소된다고 본다. 해석이 옳고 그름의 엄밀한 판단 대상이라면, 적용은 다분히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본 논문은 구속사적 설교가 실천하고 있는 고유한 적용 자산들을 정리하려고 한다. 구속사적 설교는 전통적인 강해 설교와는 조금 다른 차원의 적용을 시도하는데, 그것이 구속사적 메시지로 나타난다. 성경신학적 적용, 하나님 중심의 적용, 그리고 고백형 적용 등의 이름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기존 설교 강단에 보다 풍성한 적용의 기조를 공급한다. 또한 이미 일부 구속사적 설교자들 사이에 시도되고 있지만, 앞으로 더욱 관심을 기울일 가치가 있는 소위 실존적 적용을 구분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본 논문을 통해 구속사적 설교와 전통적 강해설교 사이의 긴장감이 다소간 해소되고, 보다 생산적인 논의로 나아가는 데 작은 보탬이 되기를 기대한다.

 

 

Ⅱ. 펴는 글

 

1. 적용으로서의 구속사적 설교

구속사적 설교는 해석인가, 적용인가? 본 논문은 해석이 아니라, 적용의 영역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이는 구속사적 설교와 전통적인 강해설교의 설교 작성 단계를 비교하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Haddon Robinson의 강해설교 작성법과 Sidney Greidanus의 구속사적 설교 작성 단계를 비교해보자. 둘은 공히 10단계 작성법을 소개하는데, 병치하면 다음과 같다.

 

Robinson의 작성 단계

Greidanus의 작성 단계

1단계. 단락 선택하기

1단계. 본문 선택하기 - 청중의 필요 고려

2단계. 단락 연구하기

2단계. 본문 읽기 - 문학적 문맥 안에서

3단계. 본문 개요 작성하기

4단계. 본문 해석하기 - 역사적 배경 안에서

3단계. 석의 주제 발견하기

5단계. 본문의 주제와 목적 기술하기

- 원독자에게...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가?

4단계. 석의 주제 분석하기

- 설명, 증명, 적용의 발전 질문

6단계. 정경과 구속사 문맥 안에서 메시지

이해하기 - 구속사적 해석의 일곱 다리 활용

5단계. 설교 주제 결정하기

6단계. 설교의 목적 결정하기

7단계. 설교 주제와 목적 기술하기

7단계. 목적 달성 방법(설교 유형)

결정하기

8단계. 설교 형식 선택하기

8단계. 설교의 개요 작성하기

9단계. 설교 개요 준비하기

9단계. 설교의 개요 채우기

10단계. 서론과 결론 작성

10단계. 설교문 작성하기

- 구어체로

주목할 대목은 Robinson의 3-5단계와 Greidanus의 5-7단계인데, 공히 석의 주제(본문 주제)에서 설교 주제로 넘어가는 과정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Robinson의 4단계와 Greidanus의 6단계에 주목하라. Robinson의 4단계를 통해 석의 주제를 현청중에게 ‘적용’한다. 석의 주제가 원독자에게 주어진 메시지라면, Robinson은 4단계 발전 질문들(적용 질문 포함)을 통해서 그것이 현청중에게 의미하는 바를 추적하는데, 그 결과물이 설교 주제(5단계)다. 다시 말해, Robinson은 석의 주제(3단계)를 현청중에게 적용(4단계)함으로써, 설교 주제(5단계)를 확보한다.

한편, Greidanus는 본문 연구의 결과물인 본문 주제(5단계)를, 정경과 구속사 문맥 안에서 이해(6단계)함으로써, 설교 주제(7단계)를 확보한다. Greidanus의 본문 주제(textual theme)는 Robinson의 석의 주제(exegetical idea)와 사실상 동일한데, 본문이 원독자에게 주어진 메시지를 의미한다. 두 사람 모두 여기서 출발하여 현청중을 위한 설교 주제로 나아가는데, Robinson이 4단계 ‘적용’을 통해 5단계 설교 주제로 나아간다면, Greidanus는 6단계 ‘정경과 구속사 문맥 안에서 이해하기’를 통해 7단계 설교 주제로 나아간다. 구도상 Robinson의 4단계와 Greidanus의 6단계는 동일 단계로서, 원독자에게 주어진 본문의 메시지를 현청중에게 적용하여 설교 주제를 확보하는 단계다. 다시 말해, Greidanus의 구속사적 설교는 본문 해석의 결과물이 아니라, 적용의 산물이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구속사적 적용을 통해 확보된 구속사적 메시지다.

 

석의 주제 ======> 구속사적 적용 =====> 구속사적 설교(메시지)

 

이로써 Greidanus와 Kaiser 사이의 긴장은 근본적으로 해소될 수 있다. 둘은 논의의 범주가 다르기 때문이다. Kaiser가 본문 해석(Robinson의 2-3단계, Greidanus의 2-5단계)을 다룬다면, 구속사적 설교는 적용의 영역(Robinson의 4-5단계, Greidanus의 6-7단계)에 속한다. 둘은 양자택일의 대립 관계가 아니라, 충분히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공존의 관계다. 물론 Kaiser가 Greidanus의 구속사적 적용을 거부할 수는 있다. 적용은 원리적으로 다양성으로 개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Greidanus가 Kaiser를 거부할 수는 없으며, 사실 거부하지도 않는다. Greidanus는 자신의 2-5단계를 통해 Kaiser가 요구하는 인간 저자-지향적 해석을 충실하게 실천하고 있다.

그런데 Greidanus와 Kaiser의 논의 사이에 다소간 긴장감이 감도는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보다 용어 사용의 혼선 때문으로 보인다. Greidanus를 비롯한 구속사적 설교 이론가들은 흔히 구속사적 ‘해석’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구속사적 해석과 구속사적 설교는 익숙하지만, 구속사적 적용이라는 용어는 지극히 생소하다. 구속사적 해석이라는 명칭을 통해 구속사적 메시지는 적용이 아니라 해석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여기서 Kaiser의 해석과의 긴장이 발생한다. 사실 둘은 범주가 다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구속사적 설교자들이 구속사적 해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다른 말로, 구속사적 설교를 적용의 범주가 아니라 해석의 범주로 이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두 가지 ‘과도한’ 확대의 결과라고 판단된다. 문학적 문맥의 과도한 확대, 그리고 역사적 문맥의 과도한 확대다. 설교를 위한 본문 해석에 관한 Greidanus의 다음 말에서, 두 가지 과도한 확대의 흔적을 발견한다.

 

이스라엘을 향한 역사적 주제와 목적을 확고히 마음에 품은 채, 이제 우리는 지평을 확대하여 그 메시지를 전체 정경과 모든 구속 역사의 맥락(context) 안에서 이해하기를 시도할 수 있다. 이러한 포괄적인 수준에서, 문학적(literary) 해석은 정경(canonical) 해석이 된다. 그것은, 이 단락이 창세기 1장에서 계시록 22장까지 전체 성경의 문맥(context) 안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묻는다. 역사적(historical) 해석은 이 수준에서 구속사적(redemptive-historical) 해석이 된다. 그것은, 이 단락이 창조에서 새 창조에 이르는 하나님의 포괄적인 이야기의 맥락(context) 안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묻는다.

 

첫째, 구속사적 설교자들은 본문의 문학적 문맥을 과도하게 확대한다. 위에서 보듯이 Greidanus는 본문(text)의 문학적 문맥(literary context)을 정경 문맥(canonical context)으로 확대하는데, 이는 과도하다. 강해설교의 문학적 해석의 대원칙은 문맥 안에서(in its context)의 연구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문맥은 좁게는 말 그대로 문학적 단위 내에서의 문맥이다. 좁게는 절별 문맥 혹은 장별 문맥, 최대로 확대해도 권별 문맥을 의미한다. 사무엘상 17장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해석한다면, 작게는 사무엘상 16장과 18장 문맥을 살펴야 하고, 크게는 사무엘상 전체 문맥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Greidanus는 문학적 문맥의 범위를 정경 문맥으로까지 확대한다. 이는 일반적인 문학적 문맥을 넘어서는 과도한 확대다.

필자는 하나의 단락을 정경 전체의 문맥 안에서 이해하는 것에 대해 전혀 거부감이 없다. 성경 내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거대한 구속 역사 전체의 일부라는 차원에서, 신약은 물론 구약 본문도 정경 전체의 맥락 안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것을 ‘해석’이라고 칭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해석이 전제하는 통상적인 문학적 문맥인 권별 문맥의 경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문맥을 충분히 고려하는 것은 지혜롭지만, 과도하게 문맥을 넓히는 것은 말 그대로 과도한 해석의 단초가 될 수 있다.

Greidanus가 문학적 문맥을 과도하게 확대하는 것은, 문맥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는 설교자들에 대한 비판적인 반동의 결과로 보인다. 그는 소위 ‘본문 설교(textual preaching)’에 대한 오해를 거론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본문 설교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주제 설교와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선택된 본문을 그것의 문맥에서 분리하여 오직 그 본문에만 설교를 제한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본문을 중시하는 설교자들이 주어진 본문 자체에 너무 골몰한 나머지, 자칫 문맥을 소홀히 할 수 있다는 우려를 피력하고 있다. 문맥에 대한 소홀은 곧 본문에 대한 오해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그는 다음 세 가지를 제안한다: (1) 본문의 원래 의미 결정하기. (2) 정경 전체 문맥에서의 의미로 나아가기. 그리고 (3) 이 의미를 오늘 우리 청중을 위해 적용하기. 청중을 위한 적용으로 나아가기 전에 먼저 본문을 정경 전체의 문맥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필자는 문맥을 소홀히 한 본문 해석에 대한 Greidanus의 우려와 비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러나 그 대안이 문맥의 과도한 확대가 될 수는 없다. 문맥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본문 해석도 문제지만, 문맥을 과도하게 확대하는 것도 건강한 본문 해석에 부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Kaiser가 우려하는 대로, 저자가 의도하지 않은 과도한 의미의 주입(eisgesis)을 초래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Greidanus의 소위 구속사적 ‘해석’은 해석이 아니라 적용으로 봐야 한다. 문학적 문맥의 경계인 권별 문맥 안에서 이루어진 본문 이해는 해석이요, 권별 문맥을 넘어선 정경 문맥 안에서의 본문 이해는 구속사적 ‘적용’이라고 부름이 마땅하다.

둘째, 구속사적 설교자들은 역사적 문맥도 과도하게 확대한다. 위에서 보듯 Greidanus는 본문의 역사적 문맥(historical conext)을 구속사적 문맥(redemptive-historical context)으로 확대하는데, 이는 과도하다. 강해설교자들은 본문 해석에 있어 문학적 문맥과 더불어 역사적 해석을 중시한다. 역사적 정황과 실존적, 문화적 상황을 감안할 때 본문의 의미를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주석서들은 저자가 살았던 시대에 대한 역사적 배경 연구를 포함한다. 그런데 구속사적 설교자들은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그 본문이 기록된 역사적 시대를 넘어 하나님의 구속사 전체로 과도하게 확대한다. 예를 들어, 사무엘상 17장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일어난 역사적 배경에 관하여, 구약의 왕정 시대라는 배경을 넘어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배경으로 상정한다.

필자는 하나의 본문 혹은 사건의 의미를 구속사 전체를 배경으로 추적하고 이해하려는 Greidanus의 열심과 방법론에 대해 전혀 거부감이 없다. 오히려 존경하는 마음으로 수용한다. 특정한 시대적 배경에 집중하는 미시적 안목이 놓칠 수 있는 깊은 의미를, 구속사의 거시적 안목이 추적하고 공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석’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정경 문맥에서의 본문 이해가 해석이 아니라 적용의 영역에 속하듯이, 저자가 본문을 기록한 특정한 시대적 배경을 초월하는 구속사적 조망 속에서 본문을 보는 것은 일반적인 해석의 범주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Greidanus의 구속사적 해석은 ‘(구속)역사적 해석’이 아니라, 오히려 ‘구속사적 적용’이라 부름이 마땅하다. 이는 Greidanus 자신이 구분한 해석과 적용의 범주에도 부합한다. 그는 “[성경] 메시지가 처음에는 한 고대 교회에 전달되었기에 설명(explication)이 필요하다면, 이제는 그 메시지가 한 현대 교회에 전달되어야 하기에 적용이 필요하다.”고 정리한다. 해석(혹은 설명)이 저자가 원독자에게 의도한 메시지를 발굴하는 과정이라면, 적용은 그것이 현청중에게 가지는 의미를 발굴하는 과정이라는 말이다. Greidanus가 강조하는 구속사적 메시지는 원리적으로 원독자였던 구약 교회가 아니라, 지금 현재의 교회에 선포되는 메시지다. 다시 말해, 해석이 아니라 적용의 영역에 속한다.

설교자들이 역사적 해석을 실천하는 이유는, 원저자와 원독자의 대화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함이다. 저자와 원독자의 대화는 특정한 역사적 정황과 문화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기에, 그 시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 사이에 주고받은 메시지를 오해할 수 있다. 그래서 저자의 시대를 역사적으로 연구하는 것인데, 여기에 구속사 전체를 끌어들이는 것은 해석의 차원을 넘어선다. 구속사적 메시지 자체가 오류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다만 일반적인 본문 해석의 차원을 넘어서는 메시지라는 말이다. 구속(역)사적 적용을 역사적 해석의 범주에 놓는 것은, 일종의 언어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적 해석이 다루는 역사와 구속(역)사가 가리키는 역사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전자가 본문이 기록된 시대적 배경이라면, 후자는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거대한 통치와 섭리를 지칭한다.

요컨대, 구속사적 설교(메시지)는 해석이 아니라 적용의 범주에 속한다. Greidanus가 구속사적 ‘해석’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본문 해석의 문학적 문맥과 역사적 맥락을 과도하게 확대한 처사다. 권별 문맥을 정경 문맥으로 확대하고, 역사적 배경을 구속사 전체로 확대하였는데, 이는 저자와 원독자 사이의 대화 지평을 넘어서는 영역이다. 이로 보건대, 구속사적 설교는 구속사적 ‘해석’이 아니라 구속사적 ‘적용’으로 칭함이 바람직하다.

 

2. 구속사적 적용의 특성

지금까지 우리는 구속사적 설교(메시지)가 해석이 아니라 적용의 범주에 속함을 살펴보았다. 이제 구속사적 적용이 가지는 고유한 특성과 의의를 살펴보겠다.

 

1) 성경신학적 적용

우선, 구속사적 설교는 성경신학적 적용이다. 먼저 논의를 위해 필자는 대(大)적용과 소(小)적용을 구분할 것은 제언한다. 대적용은 석의 주제를 청중에게 적용하여 설교 주제를 얻는 과정이라면, 소적용은 설교 주제를 청중의 삶에 적용하는 과정이다. 설교에서 적용은 사실상 두 단계를 거쳐서 이루어지는데, 먼저 원독자를 겨냥했던 석의 주제를 현청중을 위한 설교 주제로 변환하는 대적용이 이루어지고, 이어서 설교 주제를 청중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소적용이 이루어진다. 구속사적 적용은 대적용의 영역에 속한다.

구속사적 설교자들은 성경신학적인 대적용을 추구한다. 강해설교자들이 실천하는 대적용의 일반적 루트가 원리화 혹은 추상화였다면, 구속사적 설교는 성경신학적 적용을 전향적으로 도입한다. “성경신학의 통찰들은 한 본문을 그 단락과 복음 전반에 부합하도록 풀어주기를 원하는 설교자들에게 결정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는 전통적인 강해설교가 미처 깊이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새로운 적용 루트다. Graeme Goldsworthy는 강해설교 작업에 성경신학의 중요성이 충분히 강조되지 않고 있음을 안타까워한다.

 

『성경신학적 설교 어떻게 할 것인가』 를 쓰기 시작할 무렵, 나는 설교를 주제로 다루는 서적들 사이에서 성경신학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조사했다. 나는 설교에서 성경신학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징후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설교와 관련된 상당수의 서적들을 검토했다. 하지만 심지어 강해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복음주의 서적들 사이에서도 성경신학이 설교 준비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해야 한다고 제안하는 경우는 거의 찾을 수 없었다. 성경신학에 대한 관심이 크게 되살아나고 있기는 하지만, 내 생각에는 우리가 가야할 길이 여전히 먼 것 같다.

 

구속사적 설교는 곧 성경신학적 설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속사적 메시지가 생산되는 주요 (대적용) 루트가 성경신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신학적 적용은 그 신학적인 특성으로 인해 적용으로 인식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적용의 영역보다 오히려 신학적 해석의 영역으로 인식된다. 구속사적 설교가 적용을 소홀히 한다는 비판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삶의 변화를 촉구하는 구체적인 적용 대신 다분히 신학적인 선언의 설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신학은 그 자체로 (대)적용의 영역이다.

구속사적 설교가 적용이 빈약하다는 비판에 대하여 이우제는 적실성을 이끌어내는 방식이 다를 뿐, 구속사적 설교도 매우 적실한 설교라고 변호한다. 적용은 설교의 적실성을 확보하는 방편인데, 설교의 적실성은 구체적인 행동 적용에만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 필자는 대적용과 소적용의 구분을 제언하였는데, 구속사적 설교가 적용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을 때의 적용은 소적용을 일컫는다. 반면, 구속사적 설교도 적실성을 충분히 확보한 설교라고 변호할 때, 그때의 적용은 대적용을 가리킨다. 구속사적 설교는 소적용보다 성경신학에 의거한 대적용을 통해 설교의 적실성을 확보하는 설교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구속사적 설교가 소적용을 도외시하지는 않는다. 다윗과 골리앗의 전투에 관하여 Greidanus는 다음과 같은 적용을 제언한다.

 

구체적인 적용은 교회의 상황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핍박으로 고통당하는 교회라면,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니”라는 확신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는 정복하였고 또한 정복할 것이다. 만일 국가의 번영을 이기적으로 향유하는데 골몰한 나머지 우주적 전쟁의 시각을 놓쳐버린 교회라면, 설교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악을 향한 우리 시대의 전쟁에 참여할 것을 권면할 수 있다. 만일 전쟁에 참여는 하지만 자기 힘을 의지하는 교회라면, 설교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역사하시도록, 하나님이 당신의 종들에게 힘을 주셔서 싸우시도록, 초대할 것을 권면할 수 있다. 요는 구속사적 진전은 그리스도 중심적 초점만이 아니라 현시대 적용도 부여한다.

 

그런데 인용에서 보듯, Greidanus가 말하는 적용은 구체적인 삶 보다는 포괄적인 선언에 가깝다. 구체적인 삶 적용을 시도하고는 있지만, 비판자들이 바라는 만큼은 구체적이지 않다. 비판자들은 보다 구체적인 삶 적용을 기대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전쟁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참여할 수 있을 것인지, 또 삶 속에서 하나님의 전투에 참여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에 관한, 실제로 실천 가능한 구체적인 적용을 기대한다. 물론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설교의 적실성이 반드시 소적용, 즉 구체적인 행동에 제한될 필요는 없다. 포괄적인 신학적 선언만으로도 충분히 적실한 설교가 가능하다. 그러나 구체적인 실천적용에 관심을 쏟으라는 비판자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는 있다.

요컨대, 구속사적 설교는 성경신학적 적용이라는 새로운 적용 자산을 공급하였다. 본문에서 삶으로 바로 직진하지 않고, 구속사적 발전을 좇아 성경신학적인 메시지(적용)을 확보한 후, 거기서 청중의 삶으로 나아간다. 이는 전통적인 강해설교의 적용에 구속사적 설교가 선물하는 소중한 기여다.

 

2) 하나님/그리스도 중심적 적용

둘째, 구속사적 설교는 하나님/그리스도 중심적 적용(메시지)을 지향한다. 일반적으로 적용의 초점은 주로 사람에게 맞추어진다. 다시 말해 사람의 생각, 사람의 행동, 사람의 반응에 주로 초점이 맞추어진다. 말 그대로 사람에게 적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속사적 설교는 적용에 있어서도 하나님 중심성, 나아가 그리스도 중심성을 견지한다.

구속사적 설교의 주제 문장을 살피면, 대체로 “하나님은” 혹은 “예수님은”이라는 주어로 시작한다. 예를 들어, 가인과 아벨 사건을 설교하면서 Greidanus는 “그리스도가 최후의 승리를 얻으시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 계보를 그의 성실로써 보존하신다.”를 설교 주제로 잡는다. 또 창세기 12장을 설교할 때는, “하나님께서는 이 땅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준비되도록 하시려고 그의 백성들에게 이 땅을 주신다.”를 설교 주제로 잡는다. 물론 우리 인간이 주제 문장의 주어가 되기도 하지만, 그때도 메시지의 중심은 하나님이다. 예를 들어, 전도서 7장을 설교하면서 그는 설교 주제를 “하나님이 때를 주권적으로 정하셨으므로, 우리는 곤고한 날에는 그 날의 상대적 유익을 찾아야 한다.”로 정한다.

구속사적 설교의 하나님/그리스도 중심성은, 본문에 대한 하나님 중심적 해석에 기초한다. Greidanus는 하나님 중심적 해석, 즉 신중심적(theocentric) 해석을 애초에 강해설교를 위한 본문 연구의 한 요소로 포함시킨다. 강해설교자들은 통상 본문의 문법적, 문학적, 그리고 역사적 해석을 실천하는데, Greidanus는 여기에 신중심적 해석을 추가하여 역사적 연구, 문학적 연구, 그리고 하나님 중심적 연구로 구성한다. 본문을 하나님 중심적으로 이해하기까지는 본문 해석이 완료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Greidanus가 이렇게 하나님 중심적 해석을 중시하는 이유는, 성경은 곧 하나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는 성경 전체를 다음 네 포인트로 요약한다. “창조(창 1-2장), 구약 시대의 구속(창 3장-말 4장),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마 1장-계 20장), 새 창조(계 21-22장).” 네 포인트의 의미상 주어는 공히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창조요, 하나님의 구속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새 창조다. 그는 이 네 포인트가 메타 내러티브가 되어 성경 전반에 흐르고 있다고 이해한다. 따라서 정당한 본문 해석을 위해서는 “이 단락이 하나님, 그의 구속 행위, 그의 언약, 그의 은혜, 그의 백성을 향한 그의 뜻에 관해 무엇을 계시하는가?”를 지속적으로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본문 해석은 곧 하나님 해석, 즉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하나님 중심적 해석은 구속사적 적용을 통과하면서, 자연스레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가 된다. 하나님의 모든 구속역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Greidanus는 모든 본문을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해석하기를 요구한다. 강해설교는 곧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라는 Chapell의 주장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이 행하시고, 또 행하실 일을 중심에 세우지 않는 설교는 기독교적 독특성을 상실한 인간 중심적인 믿음을 창조한다.”고 우려한다. 그리스도를 비켜간 설교는 엄밀한 의미에서 기독교적 설교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는 구속사적 설교자들이 금언으로 사랑하는 “이 성경이 곧 나를 증거한다.”(요 5:39)는 구절의 설교학적 실천이다.

하나님/그리스도의 중심성이야말로 구속사적 설교가 전통적인 강해설교에 공급한 가장 소중한 자산일 것이다. 설교는 인간 선포가 아니라 하나님 선포이고, 하나님 선포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이다. Timothy Keller는 성경을 읽는 방법을 두 가지로 정리한다. 나에 관한 이야기로 읽을 것인가, 아니면 근본적으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로 읽을 것인가. 혹은 내가 해야 할 일에 관한 책으로 읽을 것인가, 아니면 그분이 행하신 일에 관한 책으로 읽을 것인가. 물론 이 둘은 양자택일의 대상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책이지만, 더불어 사람에 관한 메시지다. 요는 무게중심을 어디에 둘 것이냐에 있다. 구속사적 설교는 무게중심을 확고하게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둔다.

구속사적 설교자들은 매번 그리스도를 설교하고,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기를 요청한다. Greidanus는 『구약에서 그리스도 설교하기』를 출판한 후 창세기, 전도서 등 권별로 그리스도를 어떻게 설교할지에 관한 저작을 내놓고 있다.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설교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Keller 역시 성경의 모든 장르, 모든 부분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고, 성경의 모든 주제와 모든 주요 인물, 또 모든 주요 이미지와 모든 구원 이야기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기를 주창하며, 구체적인 방법론을 예시한다. 심지어 본능을 통해 그리스도를 설교하기를 권면한다. 그리스도가 없는 설교는 설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양한 설교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 현장 목회자들에게는 다소 과한 지침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 설교가 중요하지만, 1년 52주 모든 설교를 그렇게 채우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목회적으로 편중될 수 있다는 우려도 가능하다. 그러나 작은 나무 한 그루도 전체 숲의 조망 속에서 제대로 터치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 중심적 해석에서 그리스도 중심적 적용으로 나아가라는 구속사적 설교자들의 외침은 모든 강해설교자들이 마음에 담아야 할 소중한 권면이다.

 

3) 고백형 적용

셋째, 구속사적 설교는 고백형 적용을 중시한다. 고백형은 행동화 적용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설교의 적용이 구체적인 행동 변화로 나아갈 수도 있지만, 하나님과 세상,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고백으로 구성될 도 있다. 구속사적 설교는 하나님을 향한 고백을 적용의 중심에 자주 세우는데, 이것이 강해설교의 적용에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지평을 공급한다.

적용하면 으레 행동실천 혹은 행동화를 많이 떠올린다. 적용과 행동화의 동일시는 소위 ‘관찰-해석-적용’ 구도의 영향이 크다. 개인 묵상에 자주 활용되는 이 구도에서, 관찰은 본문 읽기를 의미하고, 해석은 본문 연구를 통한 원리화를, 그리고 적용은 행동화로 인식된다. 본문을 읽어 원리를 확보하고, 그것을 실제 삶에 실천하는 것이 적용이라는 구도다. 이는 개인 묵상을 넘어 설교 작성에도 활용할 수 있는 매우 유용한 구도다. 그렇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설교의 적실성은 행동화에 국한되지 않는다. 적용은 행동화보다 크다.

적용의 본질이 청중의 실천과 반응이라면, 설교에 대한 청중의 반응은 반드시 행동에 국한되지 않는다. 적실성을 논하건대, 꼭 적용된 행동 지침이 아니더라도 복음 자체가 적실하다. 설교자가 복음을 선포하고 청중이 마음으로 받아 고백하는 자체로도 충분히 설교의 적실성을 확보한다. 더욱이 구약의 원독자에게 전달된 미완의 복음을,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완성된 형태로 선포하고 함께 고백한다면, 그 자체로 더할 나위없는 적실한 적용이다.

구속사적 설교의 고백형 적용은, 성경의 직설형(indicative) 복음의 중시에서 나온다. 성경은 다양한 표현법을 사용하는데, 대표적으로 직설형과 명령형(imperative)다. 성경에 동원되는 언어 형태 혹은 패턴을 연구한 John Carrick은 신약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가장 근본적인 패턴은 직설-명령(indicative-imperative)의 조합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전형적으로 서신서의 전반부는 직설형 교리를 선포하고, 후반부는 명령형 윤리를 선포하는 패턴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이 두 영역 가운데 구속사적 설교는 직설형 교리에 무게중심을 두고, 거기서 고백형 적용이 나온다.

물론 구속사적 설교는 명령형 적용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수용하되, 다만 직설형 복음에 철저히 기초한 명령이기를 요구한다. Bryan Chapell이 명령형 메시지에 대한 구속사적 설교자들의 입장을 대변한다.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는 그리스도인의 행위의 규범적 기준을 제거하지 않는다. 다만 그 원천을 불가항력의 은혜 안에 위치시킨다. 순종의 법칙은 변함이 없다. 다만 이유가 변했을 뿐이다.”

구속사적 설교는, 이름 하여 ‘고백적인 행동’을 요구한다. 고백은 단순 동의가 아니며, 그에 부합하는 행동을 수반한다. 구속사적 설교자들은 우리의 강단에서 자주 성경적 고백과 무관한 인본주의적 윤리가 선포된다고 우려한다. 다른 말로 복음의 동기가 아닌 인간적 열심에 기초한 윤리가 자주 선포된다고 염려한다. 선포되는 명령의 내용이 동일하다고 해서 동일한 메시지는 아니다. 표면적인 선포와 더불어 이면의 동기가 메시지의 근간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구속사적 설교는 그리스도인들의 행위는 단순 윤리적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의 복음에 기초한 고백적 행동이어야 한다고 주창한다.

소위 Do 설교, 혹은 Be 설교에 대하여 Chapell은 다음과 같이 균형을 잡아준다. “Be 메시지 자체는(in themselves) 잘못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들이 고립되면(in themselves) 잘못된 것이다.” 명령형 설교 자체가 오류는 아니라는 말이다. “이렇게 하라!” 혹은 “저렇게 되라!”는 명령형 메시지가 충분히 가능하지만, 그 가르침이 구속적 맥락에서 나왔음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온전한 의미의 기독교적 설교로 보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Keller는 다음 말로 Chapell의 정리에 공감을 표한다. “어떤 설교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만 일러주고 그 원리를 복음의 맥락 안에 연계시키지 않는 것은, 자칫 열심히만 하면 스스로 감당할 만큼 충문히 완벽해질 수 있다는 [비복음적인] 인상을 주게 된다.”

설교자에게 고백과 명령, 혹은 직설형 복음 선포와 명령형 권면은 결코 양자택일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많은 신학적인 이슈들이 그렇듯이, 이 경우도 둘 사이에 유기적인 균형이 필요하다. 설교의 이상은 본문에 충실한 설교일진대, 정창균이 말하듯이 “본문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본문은 무엇인가를 행하고자 한다. 즉 청중에게 장엄한 구속사를 설명하거나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어 진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회중에게서 어떤 반응을 창출해낼 것을 의도한다.” 따라서 우리가 추구할 설교는 하나님을 향한 고백에 기초하되,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반응을 지향하는 균형 잡힌 설교다. 행동 적용에 무게중심을 두었던 설교자는 구속사적 설교가 강조하는 고백형 적용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구속사적 설교자들은 행동 적용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3. 실존적 적용으로서의 구속사적 설교

지금까지 우리는 구속사적 설교가 추구하는 적용의 특성들을 살펴보았다. 이제 구속사적 설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늠해보고자 한다. 이른바 실존적 적용으로서의 구속사적 설교(적용)다. 일반적으로 구속사적 설교는 다분히 신학적인 설교로 알려져 있다. 성경신학의 루트를 좇아, 하나님 중심적인 고백형 적용을 중시한다. 그런데 이와는 조금 다른 차원의 접근도 시도되는데, 이른바 실존적 적용이다. 인간 실존의 문제에 대한 대답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찾는 방식이다.

대표적으로 고통의 문제인데, 고통은 신비의 영역으로 불릴 만큼 인간 실존의 풀리지 않는 난제 중의 난제다. 성도에게 고통이 찾아올 때, 설교자들은 자주 하나님의 선한 뜻을 가지고 접근한다. 섭리 신앙에 기초하여 ‘필시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을 겁니다!’라는 말로 위로한다. 그런데 일정 부분 이해의 실마리가 되기도 하지만, 고통의 깊이가 깊어지면 오히려 상처가 되기도 한다. 더 큰 신앙인으로 빚어가려는 연단의 과정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이 또한 고통의 당사자에게는 큰 위로가 되지 못한다. 이에 Bryan Chapell은 고통이라는 실존적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명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소개한다.

 

우리가 아무리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궁극적으로 선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게 하는 보증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은 십자가를 기꺼이 감당하신 분이 결코 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이 시대의 가장 극심한 고통 가운데 궁극적인 위로를 줍니다.

 

하나님의 선한 뜻을 믿을 수 있는 바탕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것이다. 고통에서 멀찍이 물러난 객관적인 고통 신학은, 고통 받는 실존에 다가갈 수도, 위로할 수도 없다. 오직 고통 중에 있는 자, 특히 나보다 더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가혹한 고통을 당한 자가 고통 받는 실존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인데, 바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모든 고통 받는 실존들의 위로와 해명이 된다. 지금까지의 구속사적 설교가 신학적인 루트를 따라 그리스도에게 나아간다면, 이 경우는 실존적인 요청으로 그리스도에게 이끌린다.

고통 외에도 Bryan Chapell은 인간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메울 수 있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인간 실존을 구멍이 송송 뚫린 스위스 치즈에 비유하는데, 이 구멍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결코 메울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구현되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메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Greidanus가 약속과 성취의 구도를 통해 그리스도께 나아갔다면, Chapell은 실존적 공백과 메움의 구도를 따라 그리스도를 초청한다. 이것이 실존적인 구속사적 설교의 매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Timothy Keller는 문화적 압점(pressure points)이라는 개념을 통해 실존적 적용을 추구한다.

 

기독교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말하자면 아픈 데가 있다. 꽉 끼는 신발을 신었을 때 발이 아파 오듯이, 그들의 세계관에서 아픔을 느끼는 데가 있다. 세상에 대해 그들이 믿는다고 공언하지만, 정작 그들의 직관이나 경험에 부합하지 않는 지점이 있는 것이다. 설교자는 이 아픈 데를 파악하고, 질문과 제안과 예화와 예들을 동원해 그곳을 눌러야 한다.

 

구속사적 설교자들이 예수님을 인간 실존의 대답으로 소개하는 루트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함께함 그리고 대신함을 통해서다. 신학적인 이름을 붙인다면, 성육신의 길과 십자가의 길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성육신적 함께함에 관해서는, 필자의 판단에 가장 현대적인 그리스도 중심적 혹은 구속사적 설교를 실천한다고 판단되는 Timothy Keller는, 그리스도를 다음과 같이 성도들의 아픔과 고뇌에 함께하시는 분으로 소개한다.

 

성도들을 돈과 관련해 후해지는 삶으로 초대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예수님을 가리킴으로써 그들의 두려움과 굳은 마음을 만져야 한다. 예수님은 가장 부요한 분이시지만 우리의 부요함을 위해 친히 가난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셨다(고후 8:9 참조). 성도들이 응답 없는 기도에도 잘 인내하도록 돕고자 한다면, ‘주님을 의지하라’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이것은 오직 그리스도인에게만 유익이 되고, 비그리스도인에게는 낯선 말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온 마음을 다해 기도했지만 거절당하신 한 분을 보게 하라. 거절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온전히 아버지를 신뢰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함께함을 넘어, 십자가에서 우리의 고통을 대신하시는 주님이시다. 구속사적 설교자들에게 예수님을 설교한다는 것은, 단지 그분의 이름을 거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십자가를 설교의 기초로 삼는 것이다. Keller는 예수님의 치유 기사를 설교할 때는 반드시 주님의 십자가를 관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수님이 귀신 들린 자를 고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이 그 사람과 자리를 바꾸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대리자가 되셨다. 예수님이 이 사람의 삶에 들어오셔서 그를 고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그를 위해 죽으셨고 죗값을 치르시고 본질상 이 모든 것을 친히 감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발가벗겨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옷을 걸칠 수 있다. 그분이 가장 깊은 좌절과 고뇌에 던져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알고 내적인 고요함을 누릴 수가 있다.

 

그는 예수님의 치유 기사에 관한 두 설교자의 설교를 비교하면서, 한 설교자는 “그저 우리 상처에 대한 치유”를 설교하였다고 다소 낮게 평가하고, 다른 설교는 “위대한 복음 주제의 빛 안에서 읽었다”고 높게 평가한다. 전자는 십자가를 우회하였고, 후자는 십자가를 관통하였기 때문이다. Keller에게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은, 단지 그리스도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을 넘어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설교 메시지의 중심에 세우는 것이다. 설교가 인간 실존을 터치해야 한다면,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우리의 실존적인 문제가 근본적인 해결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십자가는 단지 신학적인 선포를 넘어 인간 실존의 진정한 치유와 회복의 근원이다.

필자는 구속사적 설교의 미래를 위하여 실존적 적용이 강화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지나치게 실존적이고 실용적인 적용에 대한 반동으로 구속사적 설교는 다분히 신학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인 적용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도 균형이 지혜다. 설교는 하나님을 선포하지만, 인간 실존을 향해 선포한다. 기존의 구속사적 설교의 성경신학적인 기조를 유지하되, 실존의 문제에 대한 대답으로 그리스도를 소개할 수 있다면, 보다 적실한 설교가 가능할 것이다.

 

Ⅲ. 나가는 글

구속사적 설교는 여전히 뜨거운 이슈다. 성경적인 설교를 추구하는 설교자들에게 소중한 설교적 자양분을 공급하지만, 때로 진영논리의 향취를 풍기며 다른 설교의 길을 배제하는 강한 비판의 잣대가 되기도 한다. 본 논문은 구속사적 설교 논의가 보다 생산적으로 이루어지길 소망한다.

이를 위해 본 논문은 해석과 적용의 구도 속에서 구속사적 설교를 새롭게 자리매김하기를 시도하였다. 살펴본 대로, 구속사적 설교는 해석이 아니라 적용의 영역에 속한다. 해석이 옳고 그름의 판단 대상이라면 적용은 다분히 선택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전통적인 강해설교와의 공존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흔히 구속사적 ‘해석’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본 논문은 구속사적 ‘적용’이라고 부름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구속사적 설교는 기존의 강해설교가 미처 중시하지 못한 중요한 적용 자산을 제공하는데, 성경신학적 적용과 하나님/그리스도 중심적 적용, 그리고 고백형 적용이다. 전통적 강해설교는 청중의 삶의 변화를 지향하며, 다분히 실존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적용, 그리고 행동화 적용을 중시하였는데, 여기에 구속사적 설교의 적용 기조가 의미 있는 균형을 제공할 것이다. 또한 근자에 구속사적 설교자들 사이에 소위 실존적인 구속사적 적용이 시도되고 있는데, 모든 적용은 원리적으로 인간 실존을 지향해야 한다는 점에서 앞으로 설교의 중요한 적용 기조가 되기를 희망한다.

1) 한국에 구속사적 설교가 소개된 데는 화란 선교사인 고재수(N.H.Gootjes)의 입국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교수 선교사로서 학생들에게 구속사적 설교를 소개하고, 그의 제자인 권수경이 Sidney Greidanus의 박사논문을 번역함으로써 본격적으로 구속사적 설교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Sidney Greidanus, Sola Scriptura: Problems and Principles in Preaching Historical Texts, 권수경 역,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 (서울: SFC, 1995).

2) 여기에 Edmund Clowney, Bryan Chapell 등도 구속사적 설교학자로 많이 거론되고, 근자에는 Timothy Keller도 구속사적 설교를 강조한다. Edmund Clowney, Preaching Christ in All of Scripture (Wheaton: Crossway, 2003). Bryan Chapell, Christ-Centered Preaching: Redeeming the Expository Sermon (Grand Rapids: Baker, 2005). Timothy Keller, Preaching, 채경락 역, 『팀 켈러의 설교』 (서울: 두란노, 2016).

3) Sidney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Bibliotheca Sacra 161 (2004): 3. Greidanus는 자신이 구속사적 설교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한 성도의 질문을 소개한다. 자신의 전도서 설교를 들은 후 한 노신사가 묻기를, “설교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 설교라면 랍비가 회당에서 해도 되지 않을까요?” 그리스도가 선포되지 않는 설교,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도 거부감이 없는 설교는 사실상 온전한 기독교 설교가 아닐 수 있다는 뉘앙스가 느껴진다. Graeme Goldsworthy, Preaching the Whole Bible as Christian Scripture: The Application of Biblical Theology to Expository Preaching (Grand Rapids: Eerdmans, 2000), 150. 그는 구약은 그 자체로 완성된 이야기가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이르는 큰 이야기의 일부이기에 구약 자체만으로 설교한다면, “그것은 기독교적 설교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4) Jason Allen, “The Christ-Centered Homiletics of Edmund Clowney and Sidney Greidanus in Contract with the Human Author-Centered Hermeneutics of Walter Kaiser”, (Ph.D. Diss.,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2011), 18. 그는 Walter Kaiser가 구속사적 설교 주창자들에 대한 균형추(counterbalance)의 위치에 선다고 정리한다. 구속사적 설교자들이 정경 문맥 안에서 신적 저자의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면, 구약학자인 Kaiser는 본문 의미의 근본적인 좌소는 인간 저자의 의미라고 주장한다.

5) 해석과 적용의 구도 자체는 전혀 새롭지 않은 익숙한 구도이지만, 구속사적 설교를 이해하는 틀로서는 새로운 시도라고 필자는 자평한다.

6) 해석과 적용이 엄밀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지만, 원리적으로 둘은 분명히 구분된다. Sidney Greidanus, The Modern Preacher and the Ancient Text: Interpreting and Preaching Biblical Literature (Grand Rapdis: Eerdmans, 1988), 해석이 저자가 원독자에게 전하고자 한 메시지를 발굴하는 것이라면, 적용은 현청중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찾는 과정 혹은 그 결과물을 의미한다. 해석과 적용의 구분 가능성에 대한 학자들의 다양한 입장에 대해서는 Daniel Doriani, Putting the truth to work : The theory and practice of biblical application, 정옥배 역, 『적용, 성경과 삶의 통합을 말하다』 (서울: 성서유니온, 2009)을 참조하라. Robert H. Stein, A Basic Guide to Interpreting the Bible, 배성진 역, 『성경해석학』 (서울: CLC, 2011), 63-65. Stein은 해석(interpretation)과 이해(understanding) 사이를 구분하는데, “이해란 저자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고, “해석이란 독자가 저자의 의미를 이해한 것을 말이나 글로 표현한 것”이라고 구분한다.

7) Haddon Robinson, Biblical Preaching: The Development and Delivery of Expository Messages (Grand Rapids: Baker, 2001), 51-181. 명칭은 필자가 적절히 요약적으로 제시하였다.

8) Sidney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99), 279-92. 단계의 명칭은 필자가 요약적으로 제시하였다.

9) 설교는 해석을 넘어 적용이라는, 강해설교의 기본 원리가 바로 이 대목에서 구현된다. Jerry Vines & Jim Shaddix, Power in the Pulpit: How to Prepare and Deliver Expository Sermons (Chicago: Moody Press, 1999), 134-35. Vines와 Shaddix의 구도와 비교해도 결론은 동일하다. Vines는 석의 주제를 가리키는 CIT(central idea of the text)에서 설교 주제를 의미하는 proposition으로의 전환을 요구하는데, 그 과정은 CIT를 현시대 상황에 적용하는 것이다. 본문 주제를 현시대에 적용한 결과물이 설교 주제라는 의미다. CIT가 보편적인 메시지일 경우에는 proposition이 거의 CIT와 동일하고, 다른 경우에는 개인화(personalized)하거나 혹은 상황에 맞게 번역하여 proposition을 확보할 것을 주장한다.

10) 둘은 성경적이고 건강한 설교를 위한 양 기둥이다. 정창균, “구속사와 성경 인물 설교”, 「헤르메네이아 투데이」 제42호(2008, 봄): 24. “성경의 진리를 명확하게 잘 드러내고 있으나 회중과의 적용점이 분명하지 않은 설교는 설교의 적실성을 상실한 채 단순한 성경 진리의 진술이나 해설로 그칠 가능성이 있다 반면에 회중과의 적용점은 분명하나 그것이 성경의 의도와 상관없이 임의로 이루어지는 교는 설교의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공허한 외침으로 끝날 수 있다.”

11)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288.

12) Tim Keller, Preaching, 채경락 역, 『팀 켈러의 설교』 (서울: 두란노, 2016), 68. “어떤 성경 본문이든,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하려면 문맥 아에서 살펴야 하는데, 여기에는 ‘정경 문맥’이 포함된다.”

13) Robinson, Biblical Preaching, 21. 강해설교에 대한 그의 정의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강해 설교란 문맥 안에서(in its context) 한 단락의 문법적, 문학적, 역사적 연구로 유추되고.”

14)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231.

15)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231. 여기서 그는 (1)과 (2)는 해석의 과정으로, 그리고 (3)은 적용의 과정으로 이해하지만, 사실상 (2)도 적용의 범주에 속한다.

16) Walter C. Kaiser, Recovering the Unity of the Bible: One Continuous Story, Plan, and Purpose (Grand Rapids: Zondervan, 2009), 217-118. Greidanus 자신도 주입(eisgesis)에 대한 우려를 피력한다. Greidanus, The Modern Preacher and the Ancient Text, 212. “우리는 성육하신 그리스도를 구약으로 밀어넣어 읽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주입(eisegesis)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첨언하기를, “대신 우리는 신약의 문맥 안에서 구약으로부터 그리스도를 설교할 수 있는 합당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17)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288. 앞서 “역사적 해석은 이 수준에서 구속사적 해석이 된다.”는 그의 말이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다.

18) Gredanus, The Modern Preacher and the Ancient Text, 183.

19)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285-88. 4단계 본문 해석하기에서 그는 역사적 해석을 요청하는데, 누가, 누구에게, 언제, 어디서, 그리고 왜 이 본문을 기록했는가? 즉, 저자가 원독자에게 의도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것은 “주관적이고 임의적인 해석을 막는 객관적인 통제점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20)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288. 그는 반드시 “본문의 역사적 의미를 확고히 설정한 후에, 그리고 그것을 선명한 본문 주제로 담아낸 후에, 이 단락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 선포하는지를 묻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그도 스스로 직접 본문을 연구하는 본문 연구에서 적용적 차원으로 넘어간 상황임을 인지하고 있는 방증이다.

21) Haddon Robinson의 추상화 사다리(abstraction ladder)가 대표적이다. Donald Sunukjian, Invitation to Biblical Preaching, 채경락 역, 『성경적 설교의 초대』 (서울: CLC, 2009), 63. Donald Sunukjian은 “역사에서 신학으로” 나아갈 것을 제언하는데, 보편적 원리화라고 부를 수 있다. 예를 들어, “두 점 사이의 최단거리는 지그재그다.” 출애굽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이,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는 둘러가는 길이었지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는 최단거리였다고 선포한다. 보편적인 원리로 확대한다.

22) Chapell, Christ-centered Preaching, 269.

23) Graeme Goldsworthy, Christ-Centered Biblical Theology, 윤석인 역, 『성경신학』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3), 34.

24) 김재선, “적실성 있는 설교 적용을 통한 청중의 변화 방안”,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제33권 (2014): 9. 그는 구속사적 설교자들이 대체로 적용에 소홀하다고 말하며, Greidanus의 다음 말을 인용한다. “말씀은 적용되어지는 것이요, 성경은 케리그마다. 따라서 설교를 이 말씀에 대한 객관적인 설명으로 보고 그것을 적실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적용을 덧붙여야 한다고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25) 이우제, “Sidney Greidanus의 설교 연구: 현대 설교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을 중심으로”,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제27권 (2013, 봄): 353-54. 이우제는 Greidanus를 비롯한 구속사적 설교자들은 신학적인 지식에 치중한 나머지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적실한 적용이 빈약하다는 비판을 소개하면서,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논박한다.

26) Sunukjian, 『성경적 설교의 초대』, 136. Sunukjian은 적실성과 적용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적실성은 청중이 그 성경적 진리가 구체적인 상황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눈으로 ‘볼’ 때 비로소 획득된다.” 적용이 모종의 설교학적 행위라면, 적실성은 그 결과로 나타나는 설교의 성격이다.

27)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239.

28)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인 적용 루트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구속사적 적용은 또 하나의 적용 루트를 공급할 뿐, 다른 루트를 포기하게 만드는 절대적인 적용 루트는 아니다. 추상화와 원리화, 혹은 원리에서 삶으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적용 루트를 충분히 활용하면서, 여기에 더하여 구속사적 적용 루트도 적절히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29) Sidney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Genesis, 강정주·조호진 역, 『창세기 프리칭 예수』 (서울: CLC, 2010), 151.

30) Greidanus, 『창세기 프리칭 예수』, 234.

31) Sidney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Ecclesiastes, 전의우 역, 『전도서의 그리스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서울: 포이에마, 2012), 295.

32)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235.

33)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286. 그는 이 질문을 통해 소위 도덕주의적, 모범 설교를 방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34)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227. 단지 ‘그때 그 하나님’으로부터 ‘지금 여기 계신 하나님’으로의 원리적 적용을 넘어서는 듯하다. 하나님의 모든 구속 행위는 그리스도로 수렴된다는 차원에서, 보다 명시적인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요구하는 듯하다.

35) Chapell, Christ-centered Preaching, 272.

36) Chapell, Christ-centered Preaching, 279.

37) Greidanus, Goldsworthy, Chapell, Clowny 등 구속사적 설교를 주창하는 학자들이 그들 주장의 성경적 근거를 찾을 때 이 구절을 빼놓지 않고 거론한다. 누가복음 24:25-27도 자주 거론된다.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다. 강해설교자들에게 적용은 많은 경우 원리에서 행동화를 의미하지만, 구속사적 설교자들에게 적용은 하나님 중심적 해석을 통한 그리스도 설교하기를 의미한다. 설교의 중심은 하나님이요, 하나님 사역의 중심과 절정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38) Keller, 『팀 켈러의 설교』, 84.

39) Greidanus는 주제 문장에서는 대체로 하나님/그리스도를 주어로 삼지만, 설교의 목적을 진술할 때는 반응자인 청중을 중심에 세운다. 이를 통해 설교는 하나님에 관한 선포이지만, 사람을 향한 선포라는 균형을 확보한다.

40) Keller, 『팀 켈러의 설교』, 98-123.

41) 정승원, “교리적 주제를 시리즈로 설교하기”, 「헤르메니아 투데이」, 제44호 (2008, 가을): 118.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이름과 공로를 언급하지 않고 그 나라 백성인 성도들의 일상적인 삶과 모습을 주제로 설교를 한다고 해도 그 설교 역시 그리스도가 왕 되심을 인정하고 그 이름을 존귀케 한다.”

42) 행동이 중요하지만, 무리하게 행동 일변도의 적용을 시도하는 것은 오히려 설교를 경직화시킬 수 있다. 설교가 청중의 변화를 의도한다면, 그 변화는 행동 변화 이전에 믿음과 고백의 변화이며,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43) Greidanus,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 187.

44) 또한 구속사적 설교의 고백형 적용은, 앞서 소개한 하나님 중심적 적용의 중시에서 기인한다. 하나님의 일에 대한 기술은 직설형으로 이루어지고, 사람이 행할 일에 대해서는 자연스레 명령형으로 기술된다. 소위 윤리적 설교에서는 사람의 행동에 초점이 맞춰지지만, 구속사적 설교는 하나님과 그분이 하신 일을 설교의 중심에 세운다. 그래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초점이 있다면, 그것을 담아내는 언어 상자는 명령보다 고백이 될 수밖에 없다.

45) John Carrick, The Imperative of Preaching: A Theology of Sacred Rhetoric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2002), 5.

46) Chapell, Christ-centered Preaching, 302.

47) Chapell, Christ-centered Preaching, 285.

48) Bryan Chapell, Christ-Centered Sermons: Models of Redemptive Preaching, 안정임 역, 『그리스도 중심 설교 이렇게 하라』 (서울: CUP, 2015), 325-86. Chapell은 서술형(indicative) 복음과 명령형(imperative) 복음을 어떻게 다룰지를 소개하면서, 동일한 복음 설교의 이름 아래 “서술적인 면이 강조된 설교”(325-54)와 “명령이 강조된 설교”(355-86)를 각각 예를 들어 소개한다. 복음 안에서 서술과 명령은 따로 분리될 수 없고, 다만 강조하는 초점의 선택만이 있다는 실천적인 예증이다.

49) Keller, 『팀 켈러의 설교』, 84.

50) 정창균, “구속사와 성경 인물 설교”, 28.

51) 정창균, “구속사와 성경 인물 설교”, 24. “성경의 진리를 명확하게 잘 드러내고 있으나 회중과의 적용점이 분명하지 않은 설교는 설교의 적실성을 상실한 채 단순한 성경 진리의 진술이나 해설로 그칠 가능성이 있다 반면에 회중과의 적용점은 분명하나 그것이 성경의 의도와 상관없이 임의로 이루어지는 설교는 설교의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공허한 외침으로 끝날 수 있다.”

52) 욥기가 그토록 두꺼운 성경이 된 데는, 고통의 난제가 그 중심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 해답을 어디서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다. 가장 억울한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죄인들의 용서를 구하셨던 그리스도 앞에 설 때, 욥의 마음이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욥기는 기본적으로 창조주의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범접할 수 없는 주권으로 고통의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실존적인 답을 얻게 된다. 그런 점에서 욥기 역시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결말에 이르게 된다. 예수님을 지향할 때 완성도 있는 설교가 구성될 수 있다.

53) 김병년, 『바람 불어도 좋아』 (서울: IVP, 2013). 고통을 더 큰 신앙으로 나아가는 연단의 과정으로 소개하는 이들에게 김병년은 “하나님, 제가 언제 큰 성도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까? 그냥 이대로가 좋으니 고통을 제거해 주세요.” 하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54) Bryan Chapell ed., The Hardest Sermons You'll Ever Have to Preach: Help from Trusted Preachers for Tragic Times, 허동원 역, 『성도의 불행에 답하다』 (서울: 지평서원, 2014), 22.

55)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을 때, 필자도 욥기를 본문으로 위로하는 설교를 시도하는데,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56) Chapell, Christ-centered Preaching, 291.

57) John Stott, Between Two Worlds (Grand Rapids: Eerdmans, 1982), 325. 실존적 적용의 흔적은 John Stott에게서도 발견된다. “설교의 주된 목표는 성경을 신실하고도 적실하게 풀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필요에 온전히 부합함을 인식되게 하는 것이다.”

58) Keller, 『팀 켈러의 설교』, 157. 덧붙여 말하기를, “기독교는 그 열망과 이슈를 단지 설명할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성취하고 다루고 있음을 보여야 한다. 어떤 문화적 이야기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행복한 결말이 된다.”

59) Keller, 『팀 켈러의 설교』, 161.

60) Keller, 『팀 켈러의 설교』, 90.

61) Keller, 『팀 켈러의 설교』, 91.

62) 여기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추가할 수도 있다. 함께함과 대신함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식이라면, 그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그분과의 연합니다. Chapell, Christ-Centered Preaching, 387-415. 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새로운 정체성을 주고, 우리에게 새로운 사명을 준다고 선언한다.

 


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11426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영적전쟁이 시작된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는 자들은

믿음을 시험하는 여정이 시작된다.

이 치열한 영적 전쟁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고린도후서 13:5)


'차별금지법'이 통과된 영국의 현재 모습!


이 영상은 ‘차별금지법’이 실제로 적용되고 있는

영국의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작년 7월, 마이클 오버드와 두 명의 복음 전도자들은

거리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만으로 체포되었다.

이 상황은 마이클 본인의 신변보호를 위해 준비한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긴급 중보 기도 제목!


오늘의 미국:
"미국 대통령과 해고당한 연방수사국장 사이의 싸움이 시작된 지 며칠 만에 대통령 탄핵설이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에 비밀정보를 줬다는 주장보다 더 큰 탄핵사유로 사방팔방에서 공격받고 있습니다. 연방수사국의 러시아 관련수사를 끝내려고 시도했다는, 사법방해 의혹입니다.

...

대통령을 방어하는 공화당 정치인은 거의 없고, 공화당 탄핵관련 위원회에서는 탄핵과정에 필요한 필요한 자료를 관계기관에 요청했습니다.

워싱턴 포스트는 해고당한 연방수사국장이 대통령의 사법방해 의혹을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는 사설을 실었습니다.
실업자인 코미국장이 의회청문회에 출석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보입니다.

물론 지금도 해고당한 연방수사국장이 대통령에게 겨눈 권총에는 화약이 들어있지 않다면서 대통령을 방어하는 FOX 뉴스 진행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 지지자조차 돌아앉는 오늘 그 소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합니다."

트럼프를 위해 중보기도자들은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래야 탄핵없이 임기를 채울수 있습니다. 무당들은 조직적으로 트럼프 저주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지난 대선은 기적적으로 트럼프가 승리했고, 그 반대편들은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트럼프가 임기를 온전히 다마치는 날까지 은혜의 해가 연장됩니다.


하나님의 시간표.. 7년 풍년, 7년 흉년으로 연결됩니다..

 

김정환 목사 페이스북

▲ⓒ토니 데이비스 공식홈페이지 캡처
토니 데이비스 공식홈페이지 캡처

가스펠 가수 토니 데이비스(Tony Davis)가 5발의 총알을 맞고 사망한 지 30분 만에 다시 살아났다. 데이비스는 사망한 즉시 천국에 입성했지만, 아직 때가 아니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뒤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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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스는 지난 10월 12일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일을 마치고 아내를 데리러 가는 길에 갑자기 나타난 한 남성이 그에게 총을 겨눠 변을 당했다. 폭력조직 가입절차 중 하나인 '묻지마 총기난사'의 피해자가 된 것이다.

다리와 몸에 각각 1개, 4개의 총이 박힌 데이비스는 "왜 저를 버리셨나요. 내 삶을 전부 주께 드렸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인생이 끝나다니"라고 원망했다. 그러자 문득 하나님이 아니라 사단이 저지른 일이란 것을 깨달았고, 순백의 여인이 불쑥 나타나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모든 것이 다 괜찮아질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마침내 숨을 거둔 데이비스는 생전 보지 못한 고운 색감의 크고 아름다운 도시를 보게 됐다고 한다. 그곳에서 평온과 기쁨을 느꼈지만, 얼마 되지 않아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사명을 받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됐다는 것이다.

7시간의 수술을 받은 끝에 사망선고를 받은 데이비스는 영혼이 몸으로 돌아오는 느낌을 받았고, 이내 눈을 뜨게 됐다.

토니 데이비스 공식홈페이지 캡처
토니 데이비스 공식홈페이지 캡처

그러나 데이비스는 총알이 박혀 절단 위기에 놓인 다리를 보고 절망감에 "나는 선한 사람인데,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며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한다면 다리를 낫게 해줄 것"이라는 음성을 들었다. 그는 자신을 공격한 폭력조직원을 용서하기로 했고, 놀랍게도 따뜻한 기운과 함께 다리가 치유되는 경험을 했다.

데이비스에게 나타난 기적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번 사고로 인해 더는 노래를 하거나 말을 하는 것이 불가능할 수 있다는 진단을 받은 데이비스는 다음날 목을 감싼 튜브를 제거했다. 그리고 첫 마디로 "예수님"이라고 말한 뒤 "나는 노래할 수 있고, 두 발로 점프도 할 수 있다"고 했다.

이번 사고로 3번의 기적을 체험한 데이비스는 "하나님이 하나의 사명을 주시고 내 삶을 회복시키셨다"며 "그 사명은 하나님을 향한 영원한 믿음과 용서가 얼마나 큰 힘을 가졌는지 전 세계에 알리는 것"이라고 밝혔다.



출처 : 기독일보 http://kr.christianitydaily.com/articles/89973/20161122/5%EB%B0%9C%EC%9D%98-%EC%B4%9D%EC%95%8C%EC%9D%84-%EB%A7%9E%EA%B3%A0-%EC%82%AC%EB%A7%9D%ED%95%9C-%EC%A7%80-30%EB%B6%84-%EB%A7%8C%EC%97%90-%EB%8B%A4%EC%8B%9C-%EC%82%B4%EC%95%84%EB%82%98%EB%8B%A4.htm 

 

나팔소리 길게 울리거든 외치라.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곳이 사해(死海)입니다. 캘리포니아 데쓰밸리(Death Valley)의 Bad Water도 해수면 보다 85 m 정도 낮다고 하는데 사해는 바다표면보다 무려 400 미터 이상 낮습니다. 그곳은 공기가 400 미터나 더 두꺼운 셈입니다. 그래서 태양빛의 자외선이 땅에 닿지를 못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썬크림을 바를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물이 들어오기만 하고 나갈 곳이 없고 증발하여 아주 짠 소금물이 되었고 사람의 몸이 둥둥 뜹니다. 여리고는 그리로 흘러 들어가는 요단강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역시 바다표면보다 250 미터 가량 낮습니다. 여리고는 요단강이 흘러내리면서 쌓은 흙으로 너른 평지를 이루고 있으며 기름진 토질 덕분에 오렌지, 바나나, 대추야자 등 열대과일이 풍성하게 자란다고 합니다. 여름엔 메마르고 무덥지만 겨울과 봄에는 수많은 꽃들이 뿜어내는 향기로 거대한 향수 항아리에 담겨 있는 듯 하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 무너진 여리고성이 실제로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성경의 기록이 틀림없다고 믿은 고고학자들의 끈질긴 발굴작업이 1868년부터 무려 100년 동안 이루어졌고 이로써 여리고성의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여리고성은 외벽과 내벽 등 두 겹으로 되어 있으며 외벽은 5 m 정도 높이의 기초 성벽 위에 두께 2 m, 높이 7 m의 진흙벽돌 벽으로 세워졌고 내벽은 높이가 14 m 정도 되는 둑 위에 다시 높이 솟아오른 내성벽의 구조로 된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이중성벽을 이루고 있었다고 합니다. 항아리에 담긴 채 불에 탄 곡식과 여러 가지 유물도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너지지 않고 남은 성벽이 있는데 그 자리는 기생 라합의 집이 있던 성벽이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튼튼하게 쌓은 여리고성이 어떻게 무너진 것일까요? 성경은 제사장들의 나팔소리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함께 함성을 지를 때 성벽이 무너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를 여리고성의 고유진동수가 나팔소리와 고함소리가 만들어낸 진동수와 일치하여 공명현상을 일으켰기 때문일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때마침 지진이 일어나 성벽이 무너졌을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해석이 옳은지는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이 행하신 역사라는 것뿐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입구에 버티고 선 여리고성....., 성경에 기록된 이 여리고성의 의미에 대하여는 수많은 해석과 설교가 있습니다. 인생길에서 맞닥뜨리는 고난이다, 축복을 받기 위하여 넘어야 하는 시험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해결해 주실 수 있고 그래서 오직 기도로만 넘을 수 있는 고비다, 한 주일 날짜에 비추어 엿새 동안 한 바퀴, 그리고 주일에는 일곱 바퀴, 즉 하나님 앞에서 온 힘을 다해 드리는 주일예배로 하나님이 복 주시고 응답하신다, 무장한 군사가 앞서고 하나님의 말씀의 법궤가 가고, 일곱 제사장의 나팔이 울리고, 그 뒤를 백성들이 불평 없이 조용히 따르는 질서와 순종, 등등...

아무튼 가나안 땅 입구, 거기에 여리고성이 있었습니다. 그 앞에서 하나님은 백성들로 다시금 할례를 하게 하셨고, 애굽의 수치가 물러가게 하셨고, 하나님의 군대장관을 보내셔서 여호수아에게 거룩한 곳이니 신발을 벗으라 하셨고, 백성들로 하여금 나팔을 든 일곱 제사장을 따라 엿새 동안 매일 한 바퀴씩, 그리고 일곱째 날에 일곱 바퀴를 돌게 하신 다음 일곱 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함성을 지르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여리고성 가나안 족속에게는 닥쳐온 심판의 함성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여리고성 앞에 섰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례를 새롭게 하고 우리에게서 애굽의 수치가 굴러 떠나가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매일 입을 닫고 침묵과 경건으로 하나님 앞에 서며 그 말씀을 우리 안에 쌓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저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진리에 대하여, 생명의 복음에 대하여 외쳐야 합니다. 그리하면 이 어두운 세상의 견고한 진들이 무너져내릴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될 것입니다. 

하나님! 제게 관심 있습니까?

열왕기하 6장 1절 ~ 23절 배경락목사

          

살다 보면 우리 생각처럼 일이 풀리지 않을 때가 있다. 풀리기는 커녕 도리어 엉키고 꼬여서 마음이 괴로울 때도 있다. 전후좌우 사방이 꽉 막혀서 옴짝달싹 못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우리는 하나님께 불평하기 쉽다.

“하나님 나를 사랑하시는 것 맞습니까?”

“하나님 나에게 관심이 있습니까?”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의 고민도 같은 것이었다. 그들이 자랑하던 예루살렘도 무너지고 성전은 훼파 당하였다. 돌아올 가능성이 전혀 없는 먼 나라에 끌려가 종이 된 유대인은 하나님께 불평을 넘어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은 과연 살아계실까? 하나님은 과연 이스라엘을 사랑하실까? 하나님은 과연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실까? 열왕기서를 기록하는 저자는 그 점에 대한 고민을 엘리사 기적 이야기로 풀어가고 있다.


열왕기하 6장에 전래동화 ‘금도끼 은도끼’를 연상시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벧엘, 여리고, 길갈에 흩어져 있는 선지 공동체는 날이 갈수록 학생이 늘어 갔다. 그렇다고 딱히 수업료를 받는 것도 아닌듯하고 선지자의 길이 출셋길도 아닐 터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선지 생도들은 최저 빈곤층이다. 그들은 쇠도끼를 빌려서 요단 강 근처에 집을 짓기로 하였다. 도끼질하다 보면 흔히 그러하듯 도끼 머리가 쑥 빠져서 요단 강에 빠졌다. 2,500여 년 전은 철기 문화가 막 시작하던 때였다. 철은 귀금속만큼이나 가치 있는 것인데 쇠뭉치가 요단 강에 빠졌으니 큰일이 났다. 선지 생도는 울부짖었다.

“아이고, 선생님, 이걸 어쩌지요? 이건 빌려온 도끼입니다.”(왕하 6:5)

살다 보면 이런 일이 때때로 벌어진다. 어찌 보면 흔한 일이고 사소한 일이고 작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극히 개인적인 일이다. 너의 문제이니 네가 알아서 하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엘리사는 사소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기적을 보여주었다. 나뭇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 쇠도끼를 떠오르게 하였다. 이것은 엘리사의 능력이 아니라 명백히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나님께서는 국가적인 일이나, 하나님 나라를 위한 큰일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작은 일에도 관심을 가지신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139:1-4)

수억만 리 먼 나라 종 생활하는 유대인은 잊혀진 존재라고 생각하였다. 누가 나를 기억하랴? 누가 나를 불쌍히 여기랴? 그러나 열왕기서 저자는 그들에게 말한다.

여인이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49:15)

열왕기서 저자는 사소한 개인적인 문제를 이어 국가적인 큰 문제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기록하고픈 마음은 전혀 없는 듯하다.

그 때에 아람 왕이 이스라엘과 더불어 싸우며 그의 신복들과 의논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아무데 아무데 진을 치리라 하였더니.”(왕하6:8)

그 때에’라고 말하지만, 정확히 언제인지는 전혀 밝히지 않는다. 아람 왕이 누구인지, 이스라엘 왕이 누구인지도 밝히지 않았다. 더욱이 아람 왕이 진을 친 장소를 ‘아무데 아무데 진을 치리라’ 하였다. 장소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열왕기 저자는 정확한 사실보다는 기적 이야기를 통하여 말하고 싶은 다른 목적이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아람 왕은 자신이 진을 치기만 하면, 정보가 누설되어 이스라엘 왕이 대비하는 것을 보고 왕궁에 내통하는 자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신하들은 그 일이 간첩 때문이 아니라 엘리사 때문임을 보고하였다.

“이스라엘에는 엘리사라는 예언자가 있어, 임금님께서 침실에서 은밀히 하신 말씀까지도 다 알고 낱낱이 이스라엘 왕에게 고해 바치고 있습니다.”(왕하6:12)

아람 왕은 엘리사를 잡기 위하여 도단 성에 군대를 보냈다. 그저 많은 군대라고만 언급하지 몇 명이 갔는지 밝히지 않고 있다.


엘리사의 사환이 아침에 일어나 성 밖을 보니 아람 군대가 뺑 둘러 진치고 있음을 보았다. 사환은 호들갑을 떨며 뛰어들어와 엘리사에게 보고하였다.

“주인님.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좋습니까?’

“두려워하지 말아라. 우리와 함께 한 군대가 그들의 군대보다 더 많다.”

그리고 엘리사는 사환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여호와여, 이 사환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소서.”

영적인 눈이 열린 사환이 다시 성 밖을 보니 아람 군대보다 훨씬 많은 불말과 불병거가 엘리사를 지키고 있었다.


사람은 흔히 눈에 보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끌려오면서 당대 최대 제국이 자랑하는 군사력, 건축, 문화, 사회 기반 시설 등을 똑똑히 보았다. 어마어마하였다. 현실을 보는 상식이 있다면, 판단은 명백하다. 누구도 바빌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던 예루살렘도 다 무너진 마당에 이스라엘의 독립은 물 건너간 것이다. 누구라도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엘리사는 영적인 눈을 열어 보라고 권면하고 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19:26)


엘리사가 다시 기도하여 아람 군대의 눈을 가리게 하였다. 하나님께서 눈을 가리면,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보지 못한다. 언론이 말하고, 증거가 말하고, 모든 사람이 말해도 그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그저 앞에서 이끄는 대로 따라갈 뿐이다. 상식도 없고, 판단도 없다. 그 길이 죽을 길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갈 뿐이다. 엘리사는 아람 군대를 사마리아 성안에 데려갔다. 그때야 눈을 뜨니 적진 한가운데 들어와 있음을 발견했다. 이스라엘 왕은 기뻐 흥분하였다. 그는 엘리사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내 아버지여. 내가 이들을 죽일까요? 내가 이들을 죽일까요?”

그는 아람 군대를 몰살시키고 싶어 안달이 났다. 지금까지 아람 군대가 자신을 해하려고 수도 없이 아무데 아무데 진을 쳤었다. 그런 아람 군대를 생포하였으니 저들을 다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세상 사람은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힘의 논리, 칼의 논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거라 기대한다. 어마어마한 무기를 한반도에 배치하면, 한반도에 평화가 보장될 거라 생각한다. 정권을 잡고 상대편을 블랙리스트에 올려서 엄청난 불이익을 주면, 나라가 평안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26:52)


엘리사는 이스라엘 왕에게 무력보다는 사랑과 섬김으로 대접하라고 하였다.

“쳐 죽여서는 안 됩니다. 전장에서 사로잡은 포로도 아닌데 죽여서야 되겠습니까? 차라리 음식과 물을 주어서 먹고 마시게 한 다음 자기들 상전에게 돌려보내십시오.”(왕하6:23)

그들을 후히 대접하여 돌려보낸 후 다시는 아람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아람과 이스라엘의 싸움을 칼과 창으로 종식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국가 간의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전쟁이다. 무기다. 공격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평화다. 외교다. 분명 적이고 원수이고, 수도 없이 우리를 공격한 전과가 있지만, 그래도 서로 대화하고 타협하므로 평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건 국가 간의 문제뿐만 아니라 국내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언제나 그러하듯 비둘기파보다는 매파를 선호하고, 칼과 창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법대로 한다면, 이 세상에 죄인 아닌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조금은 여유를 가질 수 있고, 대화로 문제를 풀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이 사용하는 방법 - 싸움, 외교 - 보다 더 훌륭한 방법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나라의 흥망성쇠를 쥐고 계신다.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이 너무 쉽게 절망하고 포기해서는 안 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인간의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섭리하신다.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직접 간섭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시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역사 앞에서 겸손해 질 수밖에 없다. 오늘도 대한민국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쓰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대한민국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이끄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지 구원하실지 두근거리는 설렘으로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가져온 것: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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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생활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무엇일까

그게 무료
(無聊지루하고 심심함) 다.
사람은 죽는날까지
 할 일이 있어야 한다.
산송장’ 이 안되려면
자기일이 있어야 된다.

돈버는 일만 일은 아니다.
노후의 ‘자기일’ 은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텔레비전 리모콘을
쥐고 소파에 누우면
그 인생은 종친것이나 마찬가지다.
오직 늙어 죽기만을
기다리는 인생이 그것이다.



베이비붐세대가
 희망하는 노후생활은,
취미생활’ 이 42.3%로
 가장 높았다.
방향은 바로잡은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전문적인 준비’ 가 필요하다.
그 취미생활은
구체적인 것이어야 하고
그렇게 하려는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

우리모두가 꼭 명심해야 될 것은,
인간의 생애에서, 그리고 노후의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 이라는 사실이다.

 



건강이 없으면 다른 것도 없다.
돈을 쌓아놓고도 맛이라고는
하나도 없은 ‘당뇨식’ 을
배달받아 먹어야 한다면
그게 바로 비극이다.

그리고 건강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귀중한 것이기도 하다.

통계에 따르면 전체 노인의 70%가
한가지 이상의
지병(持病)을 가지고 있다.
노후생활에서 ‘치료비’ 의 지출은
 무서운 복병이다.



본인은 물론 가족전체가
큰 재앙을 만나는 것이다.
따라서 ‘건강할 때 건강관리’ 를
시작해야한다.
나이들어 시작할 수 있는
운동은 거의없다.

결국 해 오던 운동을 계속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모든 의사들,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운동이 ‘걷기’ 다.


젊어서부터
걷기운동을 하는 경우 고혈압,
당뇨, 관절염같은 대표적인
노인병-성인병에 걸리지 않는다.
걷기운동은 돈도 들지 않지만
 ‘의지’
가 없으면 실천하기 어렵다.

직장에 다니면서도
한두정류장 미리내려
직장까지 걸어가고,
퇴근때도 마찬가지로
꾸준히 걷는다면
건강한 몸으로 노후를 맞게 되며
걷기운동도 계속할 수 있다.



노년사고(老年四苦)

世上에 늙지 않는 사람은 없다.
老後-老年은
아무도 避하지 못하는
모두의 切實한 現實이다.

그것을 豫見하고 準備하는 사람과
自己와는 無關한 알고
 사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老年 四苦'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
나도 반드시 겪어야 하는 바로
나의 일이라는
事實을 알아야 한다.

 



첫째가 貧苦이다

같은 가난이라도
老年의 가난은 더욱 苦痛스럽다.
곳이 없는 老人들이
公園에 모여 앉아 있다가
無料給食으로 끼니를 때우는
 光景은 이미 익숙한 風景이다.

나이 들어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은
 解決方法이 따로 없는,
그렇다고 그대로 放置할 없는
社會問題이기도 하다.

一次的인 責任은 勿論
本人에게 있는 것이지만,
그들이 우리社會에 奇與한
努力에 대한 最少限度의 配慮는
制度的으로
 保障되어야 하지 않을까?

貧苦를 爲한 個人의 準備는
貯蓄과 保險, 年金 加入
方法은 多樣할 있겠다.

결코 老年을
가볍게 生覺해서는 된다.
지금처럼 平均壽命이
길어진 時代일수록 隱退後의
삶이 더욱 重要하게 生覺된다.

 



두번째가 孤獨苦다

젊었을 때는 어울리는 親舊도 많고
호주머니에 돈이 있으니
親舊, 親知들을 만나
機會도 만들 있다.

그러나 나이 들어
 收入이 끊어지고, 나이가 들면
親舊들이 하나, 먼저 떠나고,
나이 들면 肉體的으로
 나들이가 어려워진다.

그때의 孤獨感은
 生覺보다 深刻하다.
그것이 마음의 病이
 되는 수도 있다.
혼자 지내는 練習이
 그래서 必要하다.

事實 가장 强한 사람은 혼자서도
보낼 있는 사람이다.

孤獨苦는 全的으로
 혼자의 힘과 努力으로
克服해야 한다.
家族이라 해도 도와 없는
全的으로 自身의
 問題이기 때문이다.

 



세번째가 無爲苦이다

사람이 나이 들어 마땅히
  일이 없다는 것은
하나의 拷問이다.

몸도 健康하고 돈도 가지고 있지만
일이 없다면
苦痛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老年의 가장 무서운 敵이
 無聊함이다.

하루 이틀도 아닌 時間을
  없이 지낸다는 것은
정말 苦痛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特別한
準備와 對策이 必要하다.
나이가 들어서도
혼자 있는 ,

特히 自己의 氣質
 適性을 감안해서
 消日꺼리를 準備해야 한다.
혼자 즐길 있는 趣味生活과
聯關짓는 것은 必須的이다.

가장 普遍的이고 親和的인 것이
 讀書나 音樂감상 등이다.



그러나 이런 生活도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니다.

미리미리 時間을
 두고 準備하며
 適應 있도록 努力해야
日常生活 속에 자리 잡을 있다.

書藝나 繪畵도 좋으나 뚜렷한
目標 없이는 成功하기가 어렵다.

다른 하나는 老年층에도
 急速度로 補給되는 컴퓨터를
다루는 것이다.

生素한 分野이기 때문에 어렵다고
 지레 겁먹고 接近을
주저하는 것은 自身에
대한 抛棄라고도 있다.

初等學校 5學年의 知能과
 知識이면 컴퓨터의 組立도
可能할 程度로 體系的이고
 論理的으로 되어 있다.

專門家나 有識한 사람만이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萬人이 쉽게 使用할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아직 글도 익히지 않은 4살짜리가
혼자서 게임을 즐긴다면 믿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事實이고
 周邊에서 目擊했을 것이다.

지금은 컴퓨터를 못하면
 疎外階層이 되는 世上이다.

e-메일은 勿論, 個人 홈피나
불로그를 開設해서 運營하면
새로운 世界가 펼쳐지는 것을
 經驗하게 것이다.

 



그만큼 다른 世代도
 理解할 있고
 젊게 사는 方法이기도 하다.

불로그나 홈피에 글를
올리려면 공부도 해야 하고
많은 情報를 檢索해서
 取捨選擇하게 되므로
時間이 그렇게
  수가 없다고들 한다.

無爲나 無聊와는
거리가 멀게 것이다.

老年에 두려워하는 치매 豫防에도
이보다 좋은 方法은
 없다고 한다.

사이버 세계에는
世代差異가 없다.
모두가 네티즌일 뿐이다.

 



마지막이 病苦이다.

늙었다는 것은
肉身이 닳았다는 뜻이다.
오래 使用했으니 여기저기
 故障이 나는 것은 當然하다.

高血壓, 糖尿, 退行性 關節炎,
류마티스,心臟疾患, 腰痛,
前立腺疾患, 骨多空症은
世界 모든 老人들이 共通으로
가지고 있는 老人病들이다.

늙음도 서러운데 病苦까지 겹치니
心身의 苦痛은
이루 말할 없다.

늙어 病들면 낫지도 않는다.
健康은 健康할 지키고
 管理해야 한다.

무릎 保護帶도 健康한
무릅에 쓰는 것이지
病든 무릎에는 無用之物이다.

수많은 老人들이 病苦에
시달리는 것은 不可抗力的인 것도
있겠지만 健康할 管理를
소흘히 것이
原因中의 하나이다.

老年이 되어서 持病이 없는
 사람도 드물겠지만
體力을 積極的으로
 管理해야 한다.

나이 들어서도 繼續할 있는
 가장 效果的인
運動은 '걷기이다.

 



便한 신발 컬레만 있으면 된다.
持續的인 걷기는
 心身이 함께 하는 運動이다.
오랫동안 꾸준히 걷는
사람은 아픈 데가 別로 없다.

그건 全的으로 自己와의
 孤獨하고 힘든 싸움이기도 하다.

老年四苦는 옛날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모든 사람 앞에 있는
避할 없는 現實이다.

좋은 사람은
가지 苦痛에서
避할 있을는지
몰라도 모두를 避할 수는 없다.

그러나 準備만 하면
 最少化할 수는 있다.
準備의 程度에
따라 人間의 老年은
全혀 다른 것이 수도 있다.

"人間은 누구라도
마지막에는혼자.

오는 길이 '혼자였듯이 가는 길도
 ‘혼자이다,

 


지인에게서 받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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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대학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1636년에 기독교 목회자들을 훈련하기 위해서 목회자들이 세운 학교입니다. 학교 이름은 1600년대에 청교도들과 미국으로 이민 와서 유산으로 그의 학구적인 서적을 학교에 준 John Harvard의 이름을 따라서 하버드 대학이 됐습니다.


 

1642년 9월 26일 하버드 규칙과 수칙에 기록돼있기를 “모든 학생에게 분명히 가르쳐야 하고 고려하도록 압력을 넣어야 하는 것은 삶과 공부의 목적은 하나님을 알고 또 영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요한복음 17:3”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버드 대학에서 학교 노래인 "Fair Harvard"에 있는 기독교 뿌리를 폐지하려고 검토한다고 했습니다. 하버드 교수가 말하기를 노래 가사는 인종 차별주의적이 될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하버드" 노래는 학생이 하버드에 시작할 때와 졸업할 때 부르는 노래입니다. 노래는 이 세상의 거짓에 흔들리지 말고 진리에 서서 청교도의 정신이 죽을 때까지 빛의 전령사와 사랑을 품은 자가 되라는 가사로 끝납니다.

하버드 대학에서 “진리”와 “빛”과 “청교도”가 없는 새로운 가사를 만드는 중입니다.

하버드 영어 교수인 Stephen Burt는 노래 끝부분이 “인종 차별주의와 연루”된 것으로 풀이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한 영국 학자는 “도덕적으로 혼란스러운” 제안이라고 했고 또 사회 평론가인 Frank Furedi는 “하버드가 과거로부터 도피하는 도덕적으로 혼란스러운 시도”라고 비난했습니다.

하버드에서 역사 강의하는 Stephen Shoemaker는 역사를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하며 역사가 오늘 우리를 정의하지는 않아도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버드 학생 Kent Haeffner도 대학의 우선순위가 잘못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버드 대학을 비롯한 아이비리그 대학들이 기독교 진리로 훈련하며 열방에 선교사들을 보내기 위해 세워졌었는데 지금은 그 반대로 진리를 대적하도록 훈련하는 곳이 돼가고 있습니다. 아이비리그가 기독교 뿌리로 돌아가서 다시 열방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 바랍니다.(번역 : tvnext)


원문기사 https://goo.gl/hwcL0c 



출처: 갓톡

[경향신문] ㆍ일본서 다섯번째 방어 회의 “지구 접근 숫자 계속 늘어”

‘지구로 떨어지는 소행성을 어떻게 막을까.’ 소행성의 지구 충돌 대책을 논의하는 국제회의가 15일 일본 도쿄 일본과학미래관에서 닷새 일정으로 개막됐다.

국제우주아카데미가 주최하는 ‘행성 방어 회의(PDC)’로, 2004년 미국 애너하임에서 처음 열린 뒤 올해가 5회째다. 이번 회의에는 미 항공우주국(NASA)과 일본항공연구개발기구(JAXA) 등 24개국 우주 연구 관계자 200명이 참가했다.

 

소행성의 지구 충돌은 1990년대 말 영화 <아마겟돈>이나 <딥 임팩트>의 소재가 돼 널리 알려졌다. 1994년 목성에서 대규모 천체 충돌이 일어나자 유엔에서도 관련 논의가 이뤄졌다. 특히 2013년 러시아 중부 첼랴빈스크에서 대기권에 돌입한 소행성이 폭발해 건물 유리창이 깨지고 주민 1500여명이 다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소행성은 직경 20m 정도였지만, 피해 범위는 100㎞에 미쳤다. 지름이 100m는 돼야 지구에 피해를 줄 것으로 생각했다. 게다가 세계의 어떤 우주기관에서도 이 소행성을 사전에 관측하지 못했다. 대회 운영위원장인 요시카와 마코토(吉川眞) JAXA 부교수는 15일 강연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소행성 감시 태세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면서 “각국이 연계해 관측망을 구축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고 NHK는 전했다.

 

국제천문학연합에 따르면 인공위성 궤도인 지상 4만㎞ 이내까지 접근했던 소행성은 2004년 이후 17개다. 이 가운데 3개가 지구에 충돌했다. 지구에 접근할 우려가 있는 소행성 등 천체의 숫자도 늘고 있다. 1990년에는 130개였지만, 2000년 이후 광학망원경이 발달하면서 지금까지 약 1만6000개가 발견됐다. 이들 가운데 지름 1500m 이상이 1000여개, 150~1500m가 7500개 정도다. 하지만 100m 이하의 소행성을 발견하기는 힘들다. 요시카와 부교수는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하는 속도는 초속 20㎞가 넘기 때문에 만약 해상에 떨어지면 대규모 쓰나미를 가져올 우려가 있다”고 했다.

 

소행성의 지구 충돌을 막는 방법으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것은 인공위성을 일부러 충돌시켜 궤도를 바꾸는 것이다. 일본에선 2005년 소행성 ‘이토카와’에 착륙한 탐사선 ‘하야부사’가 이런 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한 기초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현재 별개의 소행성을 향하고 있는 ‘하야부사2’도 소행성의 궤도를 바꾸기 위한 기술 개발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할 예정이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jwkim@kyunghyang.com>

다니엘서에 예언되어 있듯이 지구상에 대부분의 공산주의 나라는 없어졌지만,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공산정권인 북한이 있습니다.


트럼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봅니다. 북한이 트럼프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거슬리게 한다면, 트럼프는 최후의 버튼을 누를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날은, 북한에게는 해방의 날이, 남한에게는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오늘 저녁을 사먹고 집으로 걸어가면서 집에 다왔을 즈음, 갑자기 성령께서 동네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고 오라는 마음을 주셔서 즉시 순종하는 마음으로 버스를 타고 기도하고 왔습니다.


나라와 민족의 때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아닌, 오직 성령을 순종하며 따라 행해야 합니다.



몇년 동안 확인했던 일과 현재 정황을 다 따져보고 진지하게 기도해보면, 더 큰 재앙이 덮치기 전에 테러집단인 북한 정권을 먼저 붕괴시키는게 맞다란 답이 나옵니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은, 아니 더 자세히 말해 대한민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마음 깊숙한 곳에 평화에 안주하려는 마음을 갖고, 십자가 지기 싫어하고 내가 피해볼까봐 죽어가는 동포를 그대로 두려는 악함과 이기심이 들어있단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과거 미국에 흑인 노예제도가 팽배했던 시절, 경제 때문에 안일하고자 노예제도 폐지에 침묵하고 방조하며 반대 했던 역사와도 겹칩니다.


악에는 공의와 심판이 따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되 거룩 그 자체이시며 공의로운 재판장이십니다. 예수를 입으로만이 아닌 진정 아는 자라면 악과 화평하지 않고 싸우며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무슨 답을 주는 지 분명히 압니다.


평화로 해결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악과의 싸움은 불가피한 것이 원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죽어가는 자들을 무시하는 평화는 평화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정의와 평화를 위해 테러집단을 붕괴시켜 북한 동포들의 해방을 이룰 수 있도록, 한국교회가 이제라도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부르짖고 행동하기를 촉구합니다.



글 출처: Esther Haejung Lee님 페이스북

* 김경애 사모의 간증 *

 

나는 매사에 조용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편이었다. 기도도 조용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도 조용히 묵상하면서 말씀 읽는 것을 사모했다. 나의 이런 신앙 전통은 올해 96세가 되신 어머니로부터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친정어머니는 기도의 사람이다. 어머니는 무슨 일이 있으면 늘 하나님께 기도를 먼저 올렸고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머리맡에 두시고 말씀대로 사시길 원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어머니에게 많은 복을 내려 주셔서 지금까지 네 번이나 죽음의 고비에서 기적적으로 다시 살려 주셨고, 이제 100세를 코앞에 두고 있는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새벽마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일정시간 동안 기도하고 말씀 읽는 생활을 매일 반복하고 계신다. 어머니는 9남매 중 막내딸인 나를 위해 특별히 더 많은 기도를 해 주셨다. 오늘날까지 내가 건강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친정어머니의 눈물어린 중보기도의 힘이라고 나는 늘 믿고 있고, 감사드리고 있다.

 

그런데 남편의 신앙생활 모습은 좀 유별난 데가 많았다. 기도할 때 고함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통성기도를 하는 것도 그렇고, 특히 매일 아침 라스베이거스식 성경 읽기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었다. 아니, 어떻게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슬롯 머신 당기듯이 요행수에 맡겨 그날 열어 주신 페이지의 말씀을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로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또한 매일 새벽마다 5시만 되면 일어나서 화장실 변기통을 붙잡고 기도하는 괴팍스런 기도 습관에 놀라기도 했다. 하루는 시어머니가 남편에게 농담처럼 하는 이야기 를 들었다.

 

"태훈아, 네가 믿는 하나님은 뭐 꼭 그렇게 시끄럽게 큰 소리로 기도해야 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시냐. 그리고 그 꼭두새벽에 왜 변기통을 부여잡고 기도하냐. 하나님도 냄새는 싫어하실 텐데…"

 

남편은 늘 불 같은 신앙생활이 올바른 신앙생활이라고 믿었다. 물론 뜨겁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부분인데, 문제는 뜨거운 신앙생활이 한결같이 계속되어야 그 가치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어떤 때는 불같이 뜨거웠다가 금방 식어버리는 모습이 있는가 하면, 특별한 장소, 상황에서는 뜨거웠다가 평상시에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면 그것은 그냥 인위적으로 뜨거운 척하면서 신앙생활의 덧칠을 입힌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남편의 신앙생활 모습 가운데 그런 불규칙한 부분을 보게 되면서 서서히 판단의 눈이 붙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 사람의 아들 성민이를 정말 내 자식으로 여기고 그렇게 잘해주고 싶었다. 열심히 성민이를 위해 기도하면서 그 아이의 영혼이 상처 받지 않고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옆에서 최선을 다해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문제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발견하게 됐다. 남편이 내가 성민이에게 그렇게 다가가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것이었다. 남편은 항상 성민이는 자신이 알아서 잘할 테니 그냥 집안일이나 잘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나는 그런 태도를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성민이에게는 관심을 주고 보살펴줘야 될 엄마가 필요하고, 나는 예수님의 사랑을 가지고 성민이에게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데 남편은 무슨 이유인지 나의 접근을 의도적으로 막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연히 성민이와 가까워지기는 점점 힘들어져 갔다. 하루는 직장 일을 마치고 지하철역을 나오는데 마침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나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우산을 들고 마중나온 성민이가 보였다. 얼마나 기쁘고 좋았던지 나는 날아가듯 성민이에게 달려가 단숨에 그 아이를 끌어안고 얼굴에 뽀뽀를 해댔다. 그런데 마지못해 내 품안에 안겨 있던 성민이는 가까스로 나를 뿌리치고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벽에 기대어 서 있 는 것이었다. 나는 좀 서먹해졌다.

 

"성민아, 이제 집에 가자."

 

"아니에요, 나는 아빠를 기다릴 테니 먼저 들어가세요."

 

성민이는 아빠에게 우산을 주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나는 뒤통수를 아주 심하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날 비를 맞고 돌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알게 되었지만, 당시 남편은 두 번 째 결혼했던 여자가 성민이를 상습적으로 구타했던 기억이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성민이를 맡기지 못했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이와 나 사이에 사랑의 다리를 만들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않았던 남편에 대한 원망과 아쉬움은 쉽게 지울 수 없는 또 다른 상처가 되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 감사한 일은 성민이가 어떤 환경에서 성장했든지간에 이제는 어느덧 결혼해서 화목한 가정을 이 루고 너무도 아름답게 잘 살고 있다는 사실에서 큰 위안을 받는다.

 

결혼 초기의 삶은 지옥과 같은 나날이었다. 결혼하기 전에 나를 적극적으로 말렸던 사람들의 말을 왜 듣지 않았을까 후회가 막심했다. 남편은 나와 많이 다른 사람이었다. 특히 신앙의 색깔에서 현격하게 차이가 있었다. 그가 말하는 자신의 신앙은 성령의 뜨거움이었지만 내가 보는 그의 신앙은 위선과 자기 기만이었다. 열심히 전도하는 것도 자신의 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였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뜨거운 신앙의 모습을 보이는 것도 바리새인과 같은 신앙적 위선이라고 판단했다. 특히 교회 안에서는 사뿐사뿐하게 대화하던 그가 집에 돌아오면 심지어 자신의 친어머니에게까지 화를 내며 소리지르는 모습을 보며 나는 완전히 위선자에게 시집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유일한 위로와 기쁨의 시간은 골방기도 시간뿐이었다. 나는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리고 아침에 시간이 될 때마다 아파트 한 쪽 구석 옷장인 골방에 들어가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그 시간 동안만은 내 주위의 모든 환경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일대일 대화의 시간이었다. 밤에 골방기도에 들어가면 나는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른 채 기도에 깊이 빠지곤 했다. 그런데 남편은 골방 문을 열어 젖히고 침대에서 벌써 한 시간 동안 기다리고 있는데 무슨 기도를 그렇게 오랫동안 하냐며 마치 불신자 남편과 같은 험악한 인상으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기도 했다. 그런 남편과 잠자리를 함께 하는 것은 고역이었다. 결혼 초기,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아직 신혼 재미에 빠져 있어야 했을 그 시기에 나는 깊은 좌절과 실의에 빠져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나에게 아들 둘을 선물로 주셨다. 결혼 초기에 아이들도 없었다면 나는 분명히 무슨 일을 저질렀을 것이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마지막을 준비하며 사는 신부들의 삶!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좇나니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 (딤전 5:24-25)

마지막 때에는 알곡과 가라지를 확실하게 가르는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관으로부터 떠나게 하는 모든 세상 가치관들과 사탄마귀의 미혹, 양심을 무디어지게 만드는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날이 갈수록 세상은 더욱 악해져가고 악을 권장하며 사랑이 식어질 것입니다. 이전에는 숨어서 짓는 죄악들을 이제는 밝히 드러내 공개적으로 지을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더욱 깨끗하고 정결한 주님의 성품들을 드러내며 용맹을 발할 것입니다.

"그가 또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하는 자를 궤휼로 타락시킬 것이나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 (단 11:32)

마지막 때의 되어질 모습들을 미리 알고 살아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이미 우리에게는 성경을 통해 마지막 때의 시나리오(요한계시록)가 손에 쥐어져 있습니다.

이 계시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면서 늘 끝을 바라보며 에녹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마지막 때의 끝자락에 서 있는 지금,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십니다.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도적같이 임하실 것입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약 5:9)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살전 5:2)

하지만, 미리미리 준비하고 신부단장을 하는 성도들은 그 날이 결코 도적같이 임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신랑을 간절히 기다리며 사모하는 신부들에게는 마지막 때에 일어날 모든 시나리오가 머리 속에 그려져 있기에, 그 시나리오대로 움직이며 행동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공중강림하시는 그 날에 홀연히 변화되어 공중으로 끌어올려 주를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전 15:51-52)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롬 13:11-12)

지금은 자다가 깰 때가 되었습니다. 밤이 깊어간다는 것은 아침이 밝아옴을 의미합니다. 이제는 어두움의 일을 과감히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을 때입니다. 대환란을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복된 자들입니다.

미리 경고하심을 받아 재림을 준비하는 신부의 삶은 참으로 복되고 복된 삶입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선명하게 구분되어지는 이 마지막 때에 한 사람이라도 더 흔들어 깨우기 위해 오늘도 복음을 들고 하루해를 시작합니다.

<기도>
사랑하는 주님, 세상은 날이 갈수록 어두워져가지만 복음의 태양은 변함없이 온 세상을 비추고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다시 오실 주의 재림 앞에 점없고 흠없는 거룩한 신부로서 단장하기 원합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고 거듭나 영원한 나라에 합당한 천국백성들로 세워지기를 원합니다.

죄를 품고는 결코 들어갈 수 없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소서. 깨끗하고 거룩하며 사랑으로 충만한 가장 아름다운 신부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기 원합니다.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오직 사랑만 하며 살아가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곰팅이의 하늘우체통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 침몰, 안산 단원고교 학생을 포함, 300명이 넘는 희생자를 낸 세월호가 구원파 이단 유병언의 청해진해운 소속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구원파 신도들의 맹신적 복종과 헌신을 통하여 온갖 교묘하고 야비한 수단을 동원, 재산을 축적해온 유병언의 파렴치한 행태가 밝혀지면서 세상을 아연하게 하고 있습니다.


구원파는 무엇인가요?

박신찬-유병언 계열, 박옥수 계열, 그리고 이요한 계열로 나누어지는 그들의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어째서 그들은 구원파에 몸을 담고 평생토록 교주 유병언에게 충성을 하게 되는 것일까요?

과연 구원파에 구원이 있기는 한 것일까요?

가급적이면 짧게, 간략하게 간추려 이 문제에 대하여 쓰고자 합니다.


1. 구원파 교리

구원파의 교리는 믿는 것만으로는 구원받았다고 할 수 없고 구원의 핵심을 깨달아야 비로소 온전히 구원에 이른다고 한다. “아하, 그렇구나!” 하고 믿음의 비밀, 죄사함의 비밀을 깨닫고 이를 입으로 시인할 때 그 사람은 진실로 모든 죄를 벗은 의인으로 거듭난다는 것이 구원파의 핵심교리이다.


2. 구원파의 교리가 먹혀드는 이유

구원파의 교리가 먹혀드는 이유는 바로 “아하!” 하고 깨달을 때 오는 충격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 죄를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한다.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이 약속을 믿는 믿음이 영생에 이르는 길이라고 선언한다. 크리스천들은 이 복음을 전하고 교회들은 이를 선포하고 가르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 구원을 받아 거듭나도 별다른 변화나 감동이 없다. 예수를 믿으면 뭔가 확 달라지고 마음이 뜨겁고 기쁨으로 펄쩍펄쩍 뛰고 삶이 뒤집어지면 좋겠는데 믿기 전이나 믿음 후에나 별 차이가 없다. 그래서 마음에 의심이 생기거나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경우가 많다.

또 어떤 이들은 예수를 믿고 나서 다시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되는가, 지금까지 지은 죄는 용서되었다 하더라도 앞으로 죄를 지으면 예수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가, 예수 믿고 다시 죄를 지으면 도로 구원을 잃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과 불안에 휩싸이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교인들이 구원파의 밥이다.

구원파가 구원의 확신이 없는 연약한 크리스천들에게 다가가서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하고 물어 혼란스럽고 두렵게 만든 다음 “죄사함의 비밀”과 “의인으로 거듭나는 감격”을 가르쳐 깨닫게 한다. 그러면 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고 “죄사함 받고 의인으로 거듭난” 그 감격에 일평생 구원파의 충성된 신도가 되는 것이다.

사실 구원파가 생겨나고 날뛰게 만든 것은 성도를 바로 세우지 못 하는 기성교회의 책임이라 할 수 있다. 구원이란 기쁨, 감동, 감격이나 확신, 징표 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만유가 없어진다 해도 없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있다는 것을, 성도가 죄를 지었다고 도로 지옥으로 끌려간다면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이 죄의 능력을 이기지도 못 한다는 말이냐, 성도가 구원을 얻지 못 한다면 예수님이 헛 죽으신 것이냐고 확실히 가르치지 못 하고, 바른 믿음 위에 확고히 세우지 못 했기 때문이다.  


3. 죄사함의 비밀, 의인으로의 거듭남

구원파가 가르치는 “죄사함의 비밀, 의인으로 거듭남”의 교리에는 교묘하고 무서운 함정이 들어있다. 그것은 “말씀 살짝 비틀기와 바꾸기”다. 그들은 죄의 해결에 있어 “안수”와 “전가”를 이용한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인류의 모든 죄가 세례요한의 안수를 통하여 세상 죄, 인류의 모든 죄가 예수님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이다(박옥수). 그리고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류의 모든 죄가 사해졌다고 한다. 그리고는 되묻는다. “이 손에 있던 죄가 안수를 통해 어린양에게 옮겨졌다면 이 손에 죄가 남아있습니까?” 그리고 답한다. “그럴 수가 없지요.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넘겨지지 않고 남는 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그러면 이제 예수님께 믿음의 코드를 꽂으십시오. 마음으로 당신의 죄를 예수님께 안수하십시오. 자, 이제 당신의 모든 죄는 한 점도 남김없이 넘어갔습니다.”

그러고서는 이어서 설명한다. “그렇다면, 죄가 남김없이 예수님께 넘어갔다면 죄인이 그냥 죄인으로 남을 수 있습니까? 없지요? 모든 죄가 넘어갔다면 죄가 없는 사람, 곧 의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자가 의인입니다. 이것이 죄사함의 비밀입니다. 당신은 의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모든 죄가 사해졌다니, 의인이 되었다니, 구원의 확신이 없던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과 감동이겠는가?


4. 교묘한 비틀기와 바꾸기

잠깐! 여기에서 우리는 구원파의 교묘한 말 비틀기(왜곡)를 끄집어내어야 한다.

과연 세례요한이 세상 죄를 예수님께 안수하였는가? 그렇다면 세례요한이 무슨 자격으로? 세례요한이 무슨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죄를 예수님 어린양에게 안수하는 대제사장? 예수님은 세상죄를 안수 받은 죄인이 되어 삼년동안 공생애?

말도 안 되는 왜곡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이 땅에 오셨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죄를 지시고’ 십자가를 지셨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구원파는 바로 ‘우리 죄를 지시고’를 이용, 세례요한으로부터 세상 죄를 안수 받은 ‘죄인’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가 해결되었다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질문해 보자.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신 죄인으로 십자가에 죽으셨는가? 아니면 죄 없으신 어린양으로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는가?

죄인 예수의 피는 더러운 죄인의 피인가, 흠 없는 어린양의 피인가?  

또 물어보자.

예수님은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어 주려고 오셨는가? 우리를 죄의 저주, 곧 사망에서 구하려고 오셨는가?

당신은 의인이 되어서 천국에 가는가, 아니면 주님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가?

그렇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 없는 몸을 속죄제물로 드렸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를 기쁘게 받으셨다. 만족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죄 없고 흠 없는 예수 어린양 제물을 만족하게 받으시고 죄인들을 향한 진노를 푸시고 용서하셨다는 증거이다. 그렇다. 모든 죄인들이 용서받은 것이다. 이것이 대속(代贖 Redemption)이다.

구원파는 이 대속교리를 “죄속함”, 아니 “죄씌움 교리”로 바꾸었다.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들어 십자가에 처형하였다. 그리고 죄인들이 의인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용서하신 게 아니라 죄인이 아닌 의인이 되고 말았으니 용서고 뭐고가 있을 수도 없다. 


5. 의인이 되었으

자, 어쨌든 구원파 교인들은 감격 속에 “죄사함의 비밀을 깨달아 거듭난 의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도 안다, 진짜로 의인이 되지는 못 한 것을. 여전히 죄인의 속성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로 ‘말(言語)’이다. 말의 능력.... 하나님은 ‘네 입으로 말한 대로 갚아 주신다.’는 것이다. 무슨 말을 하든지 그 말대로 된다는 것이다. 입으로 시인하면 시인될 것이요 부인하면 부인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말로 ‘의인 됨’을 지킨다.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죄를 죄라고 하면 죄가 된다. 그러나 죄가 아니라고 하면 죄가 아니다. 말대로 되기 때문이다. 의인이 죄를 지을 수 없다. 의인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 의인이 행하는 모든 것은 죄가 아니다. 심지어 살인을 저질러도 입으로 그것이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한 죄가 아닌 것이다.  

구원파에서 늘 다그치는 이러한 가르침이 너무하다 싶었는지 이요한이라는 사람이 구원파에서 뛰쳐나와 대한예수교침례회라는 단체를 만들면서 좀 다른 교리를 만들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영적구원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죄를 짓는 것은 육신이 아직도 사단마귀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영혼만 구원 받아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히 초대교회 때 교회를 어지럽힌 영지주의자들의 이원론(二元論)적 이단사상이다. 이요한의 그 외의 가르침은 박신찬-유병언이나 박옥수 계열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연예인 유진이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 “저희 교회는 기독교복음침레회와 뿌리는 같지만 구원파와는 무관해요. 생명의말씀선교회 홈페이지를 방문해 보세요.” 어이없고 안타깝다.


6. 구별과 종말론

이단의 공통된 행태는 자신들만이 진리에 속하고 구원을 받은 특별한 무리라고 구별하고 기성교회를 멀리하거나 심지어 공격한다는 점이다. 기성교회는 구원받지 못 한 어리석은 무리요, 타락한 종교집단이요, 그들이 구원해 내어야 할 선교의 대상이다. 거짓선지자들이 누룩을 뿌리고 사단이 가라지를 뿌린 기성교회는 심지어 바벨론이요 음녀이다. 그들은 십사만사천에 속한다. 신천지가 그렇고 구원파도 그렇고 많은 이단들이 그렇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종말론이 대단히 중요하다. 임박한 종말과 심판. 모든 교회들이 무너지고 무화과 잎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떨어지는 그 두려운 날 그들은 들림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세대주의자들의 종말론을 받아들여 유럽공동체가 단일국가로 이어지고 중동의 평화협정과 전쟁이 지구최후의 아마겟돈 전쟁과 칠년환난, 천년왕국으로 이어지는 종말론으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고 가르친다. 이러한 종말론이 압박감과 공포분의기를 조성하여 신도들이 이탈하지 못 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또한 삼위일체를 양태론적으로 해석하는 이단성도 유사하다 할 것이다.    


7. 구원파에 구원이 있을까?

구원파는 명백히 이단이다. 그런데 이단이라도 믿음과 구원의 확신이 있으면 좋은 것 아닌가, 그들의 믿음에 다소 오류가 있다 할지라도 구원을 받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 된 생각이다. 이단이 무서운 것은 아주 작은 차이, 사소한 견해차이로 보이는 것이 엄청난 차이, 삶과 죽음을 가르는 차이를 가져오는 데 있다.

아들을 죽이려는 도적이 있다. 그 아들은 어두운 광야에서 아버지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아버지와 비슷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바로 그 때 다른 쪽에 또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그 둘의 모습은 매우 비슷하나 하나는 아버지고 하나는 도적이다. 비슷하다고 해서 아버지가 아닌 도적을 따라간다면 그 아들은 죽게 될 것이다.

사단의 모습은 광명한 천사이다. 그의 말은 달콤하고 그의 모습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들의 속임수는 선악과를 따먹게 한 뱀처럼 매끄럽다.


예수님을 죄인 만들어 죽이고 자기들은 의인이 되었다고 하는 그들,

의인이 된 그들이 천국에 갈 때 예수님의 보혈이 필요가 있을까?

구원파에 과연 구원이 있을까?

 



(짧게 쓰려고 노력했는데도 길어졌네요. 아무튼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2014. 5. 9, 이응한 목사)






주님이 다시 오셔서

신부를 취해가는 날과 시를 계산할 수 없는 이유는

이미 그날과 그 시를 알 수 없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 날을 알게 되면

일상사를 포기하게 되고, 때를 모르면 무디어진다.


초림이 다니엘의 70이레를 계산하여 정확하게 성취되었다면

공중휴거의 근접한 때라도 알아내기 위해 분주하다.



7000년만에 나타나는 하늘의 GREAT SIGN



미국의 사역자들이 2017년을 특별히 주목하는 이유는

2017923일에 GREAT SIGN이 나타나는데

이는 7000년만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


계시록 12장의 예언이

2017년 9월 23일에 별자리에서 나타날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에 대한 포스팅을 한 적이 있다


http://blog.naver.com/acoloje/220617563793

(계시록 12장의 싸인이 2017년에 나타난다)


이 날은 LieKillers 유튜브 채널에서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예고(2017년 9월 23일)한 날이기도 하다.


http://blog.naver.com/acoloje/220588573142

(적그리스도 출현에 대한 징후들)


계시록 12장에 하늘에 두 번의 이적이 예고되어 있다.


①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 두 별의 관을 썼더라(계12:1)


②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계12:3)


2017년 9월 23일에 행성의 정렬이 나타나는 것은

천문학적 사실이고  같은 날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약 3년전에 올린 자들이 있는데 성경에서도

하늘에 붉은 용의 이적이 있을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이스라엘의 표적과 불법의 사람  

 

이스라엘에 대한 표적에 대한 숫자들도

미국 사역자들 사이에서 다루는 내용으로

지금 우리는 최종세대를 살고 있다고 믿는다.


이스라엘의 독립은 1948년인데,

19+48 = 67로 이는 예루살렘 회복 된 1967년이 나타난다.


앞의 두 수 19 = 1967-1948 기간의 수이며,

뒤의 두 수 48은 시편 48편에서 예루살렘 회복을 노래한다.

1+9+4+8 = 22 는 계시록 22장에서 마라나타로 마무리한다.


2017 - 1967 = 50희년

2017 - 1948 = 69로 70주년이 시작되는데 50+19 = 69로 표현된다.


1948(이스라엘 건국) - 70(예루살렘 멸망) = 70 +1878 + 69 = 2017 (한 세대 70이내)

1967(예루살렘 회복) - 70(예루살렘 멸망) = 1897 + 120 = 2017


<2017년 달력>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절기

 

 

 

 

9/20, 9/29

나팔절/신년,속죄일 

10/5~12

초막절 

 

 

 기념일

sign

5/14

이스라엘건국일

70주년 시작 ~

6/7

예루살렘 회복

50주년

 

한국 분단

70주년 시작

 9/23

Great sign(계12장) 

적그리스도 출현예고

 

 

 



적그리스도가 먼저 나타날 것이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단 9:27),

적그리스도는 7년간의 조약을 맺는데 이는 7년 환란의 시작이 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란 누구일까?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많은 사람들은 지도자로 번역도 가능하다고 한다.


만약 적그리스도가 세계인이 알 수 있게 7년언약을 맺는 것이 아니라,

(10개국)세계지도자들과 비밀조약을 맺는다면 일반인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7년 중 절반이 지나간 때쯤이면 모든 사람에게 드러낼 것이다.


"또 짐승이 마흔 두달 동안

일할(전세계를 다스릴 권세) 권세를 받으니라" (계 13:5,7)


7년언약이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맺은 것이라면

또 다시 마흔 두달 일할 권세를 다시 맺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불법의 사람(적그리스도)이 먼저 나타날 것이라는

바울의 예언(살후2:3)이 성취되지만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닐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날은

언제나 안전하고 평화로운 날 에상하지 못한 날이 될 것이다.


그 날은 불시에 들이 닥칠 것이니

항상 깨어 준비되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정해진 시간은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출처: 카이로스 / ars

생각으로 도우시는 성령님

 

승천하기 전 예수님을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기 전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성령을 받고 증인이 되고 복음을 전파하도록 명령하셨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성령님이 오셔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중심으로 계획하셨던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일을 하도록 권능을 주시려 함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도들이 아닌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님은 어떻게 보혜사의 역사를 하는지를 생각해 보고 싶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하면 생각이란 방법을 통하여 도우신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4장 26절 생각나게 하리라고 했다. 

물론 성령님은 영이신 하나님이니깐 얼마든지 다른 방법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역사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방법이 생각으로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와주는가?
첫 번째는 잘못된 생각에 따르지 않도록 마음에 신호를 보내심으로 도와준다는 것이다. 우리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은 세 가지 것에서부터 오는 것인데 첫째는 육신 둘째는 악령 셋째는 성령인데 육신의 생각과 마귀의 생각은 나를 망하게 하는 생각을 주는 것이고 성령님만이 우리를 위해 올바른 생각을 주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육신의 욕심, 안목의 정욕과 자기를 뽐내려는 이 세상 자랑들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거짓을 말하고 시기 질투 등을 할 때 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경고음을 내서 망하는 길을 가지 않도록 하신다. 로마서 8장 6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그런데 육신의 잘못된 생각은 금방 알아차리지만 정말 사단마귀로부터 오는 것은 나에게 즐거움을 주고 나를 위한 것처럼 포장하면서 찾아오기 때문에 속기 쉬운 것입니다. 하와가 유혹당할 때를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뱀이 찾아와 하와를 유혹할 때도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된다고 유혹하고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한 것은 너를 하나님처럼 되지 못하게 하려고 먹지 말라고 한 것이다. 먹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 그렇게 달콤한 유혹을 하면서 죄를 짓도록 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사단마귀의 세력들이 이렇게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사탄이 사람을 유혹할 때 네 가지로 한다고 한다. 1)"이 정도는 괜찮지 않느냐." 2)"이번에 딱 한 번만”3)"너는 아직 젊잖아 너 어떻게 그렇게만 살래?”4)"누구나 다 이렇게 사는데 왜 그렇게 특별하게 살려고 하냐? 그러면서  너도 다른 사람처럼 평범하게 살아라." 고 유혹한다는 것이다.

유혹에 넘어갔을 때 꼭, 꼭 기억할 말씀이 있다. 그것은 마귀란 놈이 유혹해 놓고도 막상 꾐에 빠져 넘어져 회개하려 할 때 이렇게 속삭인다는 것이다. ‘너 염치도 좋다. 어떻게 또 용서해 달라고 하니?’ 이러면서 우리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으면서 용서를 구하지를 못하게 방해한다는 것이다. 이런 마귀의 조롱소리를 들을 때 십자가를 붙잡고 ‘주님 용서하여 주옵소서. 죄를 이길 수 있도록 믿음을 장성시켜 주옵소서.’라고 구해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란 거다.  그러면 우리 연약함을 알고 사단의 간악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는 것이다. 

그렇게 마귀가 주는 못된 생각과 싸움을 계속하다보면 언젠가 부터는 ‘야 이놈바라 나를 또 넘어뜨리려고 못된 생각을 주고 있네.’ 그렇기에 예방기도 “주여.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고 기도한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신앙이 성장했다는 증거인 것이다. 내게 마귀란 놈이 역사하는 것만 알아차려도 초보는 벗어났다고 본다. 

결론은 성령님은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분별하게 해서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성령님은 우리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그때 조용히 말씀해주시며 용기를 주시는 것입니다.
전도서라는 성경을 보면 7장 14절에 ‘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혹은 네 삶을 되돌아보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고 하는 말씀이 있다.

우리가 천국행 기차를 탔을지라도 우리의 가는 인생길에는 형통한 때와 곤고한 일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평안하고 형통할 때는 당연히 기뻐하여야겠지만 고통스런 일, 근심되는 일 곤고한 날이 왔을 때는 생각하라 혹은 네가 살아온 길을 뒤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이 전도서 7장 14절을 업그레이드한 버전이라 할 수 있는 신약 야고보서 5장 13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그러니 곤고한 날에는 ‘주님 저에게 왜 이런 문제가 왔나요? 제가 뭘 알기를 바라고 제가 어떻게 해야 되기를 바라서 이런 문제가 왔나요? 라고 하면서 앞에서 말한 돈 한 푼 받지 않고 도와주시는 천재 변호사인 보혜사 성령님이 가르쳐주는 생각을 받자라는 것이다.

성령님의 조언 생각을 받으려면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고집부리며 살았던 자기 생각, 자기주장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정말 겸손한 마음으로 가르쳐 달라고 간청을 해야 하는 것일 것이다. 

교인들에게 보통은 설교를 듣는 시간에게 ‘너의 목사님 말씀을 들어봐라 너 들으라고 하는 말씀이잖나? 그러니 낙심하지 마. ‘네가 나를 떠나서 문제지 그러니 내게로 오라’고 생각을 주시는 방법으로 도와주시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성령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할 일을 하게 해서 상 받게 복 받게 하심으로 도와주시는 것이란 것이다. 신자들이 성경을 읽을 때 특히 설교를 들을 때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이 왜 우리를 구원한 이유했는지? 어떻게 해야 상과 복된 자가 되는 지에 대해서 고개를 끄덕이게 하며 속으로 아멘 맞는 말씀입니다 라고 생각게 하심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게 하고, 열심히 일하고 심도록 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들은 매 주 설교시간 마다 심판이 있음을 전하며 행한 대로 심은 대로 일한 대로 하나님은 갚아주실 것이라며 설교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쓰고 싶은 말은 성령 충만을 신비한 것으로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특이한 방법으로 역사할 수도 있지만 성령님은 생각으로 내 마음에 이미 계시지만 내 생각 속에 생각으로 찾아온다는 것을 안다면 성령 충만은 하나님 말씀으로 성령의 생각으로 내 마음이 꽉 차게 자리하고 있어 육신적인 생각 마귀유혹이 틈타지 못하는 상태가 성령 충만 이라고 볼 수도 있다고 하고 싶다.

성령이 어디 계시며 과연 나에게도 지금 역사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려면 1) 내 생각이 잘못되어 갈 때 경고음이 울리는가? 2) 설교를 들을 때 성령님이 ‘지금 설교는 너 들어라’고 하는 것으로 받아드린 다면 나는 그런 분에게 성령님이 역사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출처: USA 아멘넷 자게판/김정한 목사 

귀신 그리기

 

목회 생활에 연륜이 더해질수록 말씀을 준비하고 전하기가 쉽지 않다. 이제는 전과 달리 각종 매체를 통해 설교가 얼마나 빈번히 유통되는지 설교자인 나 자신도 갈피를 잡을 수 없다. 그리고 설교의 텍스트가 성경이다 보니 이 설교가 저 설교 같고 이 말씀이 저 말씀과 같을 때도 적지 않고 예화 역시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중복되기 십상이다.

그렇게 설교가 엇비슷하다보니 교회를 성장시키는 수단으로의 설교도 한 물 간듯하고 전통적 설교의 패턴에 인간적 메스를 가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언필칭 설교의 또 다른 해석이라든지 설교의 신출(神出)한 능력자나 귀몰(鬼沒)한 영력의 대가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현상을 싸잡아 비난한다는 것도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어차피 기독교 진리의 본질이 성령의 역사에 있으니.

그러나 주님은 말세의 현상 중에 하나가 믿음의 내용과는 관계없는 믿음의 형식을 지적하셨고 여기저기서 예수가 나타나고 신비로운 도사들과 요란한 이단사설을 많이 보게 될 거라고 언급하셨다.

한마디로 영적 능력을 가장한 속빈강정들이 판을 친다는 예언이다. 말씀을 중심으로 한 순수한 복음 전파에 식상한 시대적 요청이 이런 증빙할 수 없는 능력을 횡행시키고 있다 하여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지나친 영성의 강조가 빚는 부작용이다. 특히 우리 한국 사람은 다분히 감정적이어서 밋밋한 설교를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부흥회 강사도 웃기고 울려야 인기가 있고 간증도 막장 드라마 뺨칠 정도가 아니면 문안도 못 드린다. 그러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진실인지 분간이 안 가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옛날 얘기 중에 재미난 얘기가 있다. 제나라 왕이 유명 화공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림을 그릴 때 어떤 그림이 제일 어려운가?” 화공이 대답했다. “인물화도 어렵고 개나 말도 어렵습니다.”  “그러면 무슨 그림이 제일 쉬운가?” 이 질문에 화공이 웃으며 대답했다. “제일 쉬운 그림은 도깨비나 귀신을 그리는 것입니다.

사람의 얼굴은 모르는 이가 없고 개나 말 역시 사람이 그 구조를 잘 알뿐만 아니라 조석으로 보기 때문에 똑같이 그리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귀신은 형체도 없고 뚜렷하게 본 사람도 없으므로 아무렇게나 그려도 사람들은 그것을 따지지 않고 믿습니다.”  

이 말에서 “귀매최이(鬼魅最易)”라는 말이 나왔다. 말씀을 전하는 것은 누구나 잘 알 수 있는 진리를 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 보편적이고 평이하다 하여 지나친 조미료를 첨가해서는 안 될 일이다. 더 나아가 사람을 일시적으로 흥분시키는 “능력” 쏠림 현상을 경계해야 마땅하다. 양식도 일용할 양식이 구할 축복의 기본이며 요체이기 때문이다.  

부활의새빛교회 신석환목사

믿음과 순종의 상관관계

믿음 따로 삶 따로

 

믿음이 있다면서 그에 상응하는 순종의 삶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봅니다.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처럼 항상 함께 가고 분리될 수 없음에도 그들이 그 둘을 분리시키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까닭이 뭘까, 잠시 헤아려 보았습니다.

 

믿는다면서 삶은 전혀 믿는 자 같지 않은, 요즈음 소위 “개독교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라는 바울의 선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든지 오해하고 있는 것이 아닐지. 사도는 지금 첫째, 구원에 대해 말하고 있고 둘째,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로 주어지지 우리의 어떠한 행위로도 얻을 수 있는 게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인데, 아,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구나, 그러니 믿음은 좋은 것이고 행위는 안 좋은 것이다, 이렇게 단순하게 공식화한 게 아닐지.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은 어느새 ‘믿음’을 ‘믿어서’라는 행위로 대치시키고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겁니다. “나는 ‘믿어서’ 구원받았다, 그러니 너도 ‘믿고’ 구원받아라” 아마 바울 때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던지, 바울은 여기에 대해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확실히 밝혔는데도 말이지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또 다른 이유는 “행위는 자기 의를 조장한다”는 가르침에 대한 지나친 몸사림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말씀대로 살려다, 자기 의를 내세우려고 그런다는 말을 들었거나 아니면 스스로 그런 속말을 들었거나 하여 행함에 주저함이 생기는 것이죠. 하지만 그런 경우보다는, 믿음대로 살자니 귀찮기도 하고 불편한 것도 많고 손해보는 것도 많기에, 다시 말해, 내 욕심, 내 마음, 내 감정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싫어서라는 것이 더 큰 이유일 듯합니다.

 

믿음의 순종

 

이렇게 선물로 주어진 믿음은 우리에게 말씀에 대한 순종을 유발시킵니다. ‘믿음과 순종’이라고 하니까 그 둘을 분리시켜 별개의 상호독립적인 관계로 착각하기 쉬운데, 그 둘은 상호유기적인 불가분의 관계,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순종이 믿음에 의존하는 그러면서도 순종이 더 큰 믿음을 만드는 역동적 선순환의 정비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믿음이 자라면 순종도 자라고, 순종이 자라면 믿음도 자라는 그런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순종’이라는 것이 보다 좋은 표현일 것입니다. 믿음에서 나온 믿음에 근거한 순종(행동, 행위). 역으로, 순종으로 드러나고 증명된 믿음. 그래서 야고보가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내게 보이리라.” (약 2:18)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강조했던 사도 바울도 그의 서신서 곳곳에서 일관되게 순종 곧 행함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하고 시작되는 곳부터입니다. 너희는 선물로 받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그 선물을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며 살라는 것이지요. 한 군데만 보겠습니다. 빌립보서 4장 9절입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에게서 배우고 받은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과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우리 믿음의 내용이지요. 듣고 본 것은요? 그 믿음따라 사는 바울의 삶의 내용일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그 믿음을 사는지 너희가 듣고 보지 않았느냐, 너희도 그렇게 그 믿음을 살아내어라, 그렇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친절하게도, 한 마디를 덧붙이십니다.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평강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거랍니다. 왜 이 말을 덧붙였을까요? 믿음을 따라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그들에게 닥칠 어려움과 조롱과 멸시와 핍박에 대한 두려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살기를 주저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평강을 약속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평강, 평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평화와는 다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세상 평화는 한시적이고 제한적이며 그래서 언제 깨어질까 조마조마하고 두려운 것인데 반해, 하나님의 평화 곧 샬롬은 아무런 근심 걱정과 두려움이 없는 완전한 평화입니다. 거기엔 아무런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니 아무런 주저도 두려움도 없이 너희의 믿는 바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성장

 

말씀은 믿음을 자라게 합니다. 그러나 말씀만으로 자라지는 않습니다. 믿음이 자란다 할 때 우리는 두 가지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는 그 내용의 양과 질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의 견고함입니다. 전자는 말씀으로,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것만으로도 자랍니다. 그러나 믿음이 견실하게 자라는 것은 오직 말씀대로 행하고 살아 봄으로써만 가능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순종했더니, 그렇게 살아 보니까, 과연 말씀대로 되더라는 확인이 말씀에 대한 신뢰를 더 하게 되고 또 다른 순종을 이끌게 되는 것입니다. 제 개인적 체험으론,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의 순종에 응답하십니다. 순종했는데 모른 체 계시지 않습니다. 요즘 말로 쌩까지 않으십니다. 순종에 대한 즉각적인 인정이 주어집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이러한 인정만으로도 순종의 충분한 보상이거늘 이외에도 이런 저런 부상을 덤으로 얻는 경험이 쌓이다 보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점점 자라고, 하나님의 칭찬을 듣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더 자주 더 큰 순종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칭찬을 얻기 위해서도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몸바쳐 충성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칭찬을 얻기 위해 무엇을 가리겠습니까.

 

(칭찬 하니까, 제 어릴 때 기억 하나가 스치는군요. 아마 네다섯 살 때였을 겁니다. 형과 누나와 함께 밖에서 놀고 있었는데 둘 중 누군가가 제게 집에 가서 무언가를 가져 오라고 시켰습니다. 그때 제가 했던 대답이 왠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아, 착하다 하면 갔다 올게.” 물론 형인지 누나였는지가, “그래, 우리 유상이 착하다”고 말해 주었고 저는 기쁜 마음으로 심부름을 해 주었지요. 지금 생각난 건데, 엄마가 제게 무얼 시키실 때 늘 “우리 유상이 착하지” 하셨던 것 같습니다. 참고로 지금도 저는 칭찬에 무척 약합니다.)

 

말씀만으로는 믿음은 견고해지지 않음은 자주 인용되는 마태복음서 7장 24절부터 27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비유로 뒷받침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한 자의 믿음은 견고하여 심한 비바람을 견디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즉 말씀을 듣기만 한 자의 믿음은 사상누각처럼 허약하여 강한 비바람의 시험 앞에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해 주신 바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생각만으로는 이웃을 위해 대단한 희생도 할 수 있고 더우기 주님을 위해서는 지금 당장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이웃보다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라도 더 가질까 온갖 궁리에 힘과 시간을 쏟습니다. 혹시 예수 믿는 것으로 인해 어떠한 불이익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하여 예수 믿음을 감추기도 하고, 대충 믿는 척하기도 하며, 세상사람들이 황당해하고 놀리는 성경의 특정 부분들과 나아가 복음을 부끄러워 합니다. 분명히 말씀을 읽을 땐, 설교를 들을 땐 순교자의 심정이었는데 말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주님께서 행함을 강조하시는 것이 명백함에도 이 비유를 가르칠 때 혹여 행위구원을 가르친다는 말을 듣게 되지나 않나 몸을 사리는 교사들이 많은데, 그래서 심지어 박영선 목사조차, 이것은 행위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초점이 있는 비유라고 다소 무리하게 해석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집을 지은 행위는 두 사람에게 다 있었다는 것이지요, 지혜로운 자는 반석 위에, 어리석은 자는 모래 위에. 차이는 한 사람은 주님의 말을 듣고 지었고 또 한 사람은 주님의 말이 아닌 다른 사람의 혹은 자신의 생각대로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가르침은, 우리는 반드시 다른 사람이 아닌 주님의 말만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더군요. 그때는 그런 줄로만 알았고 지금도 꽤 그럴듯하게 들리긴 합니다만, 그리고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그러한 해석은 행위구원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위해 고심 끝에 내린 억지 해석이지, 바른 해석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또한 우리는 복음서의 기록을 통해, 주님과 함께 무려 삼년 반의 시간을 함께 숙식하며 주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의 믿음이 주님의 십자가 처형과 함께 무너져내린 것을 압니다. 베드로를 필두로 한 열두 제자들이 무슨 일이 있어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겠다 마지막까지 큰소리쳤으나 주님의 처형장엔 주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느꼈던 요한 뿐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라 다니는 동안 그들의 주된 관심은 누가 더 크냐, 다윗왕국이 회복되면 누가 무슨 자리를 차지할 것이냐였지,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복음서를 쓴 제자들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참 제자답게 살기 시작한 것은, 부활승천하신 예수님을 뵈온 지도 몇 달이나 지난 오순절에 그들에게 성령께서 능력을 입혀 주신 후부터입니다. 그날부터 그들은 복음을 담대히 전하게 되고, 서로가 서로를 돌아보고, 내 것 네 것 없이 필요에 따라 쓸 것을 나누는 등, 지금까지 예수님으로부터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살아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순종이 쌓여 비로소 다른 사람들로부터 크리스챤이라는 별칭을 얻는 참된 제자의 삶을 사는 데까지 믿음이 자란 것입니다. 결코 말씀만으로 그들의 믿음이 자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힘 주심

 

믿음과 순종이 정비례 관계에 있다 하여, 반드시 1대1의 관계라고 상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 그 비례의 폭은 다를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어린 믿음은 연약하여 순종을 일으킬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 믿음이라면 언젠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순종의 행위가 나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우리로 믿음의 순종을 가능케 하는 이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삼위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우리로 하여금 말씀대로 사는 사람으로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니만큼, 하나님께서는 기필코 우리를 순종의 사람으로 만들어 내실 것입니다.

 

“행하라”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 우리는 주눅이 들 수 있습니다. 특히나 저처럼 아무리 해도 제대로 잘 하는 게 없는 사람들에게는요. (제 형은 저와는 달리 제대로 못하는 게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과 신임을 듬뿍 받았는데 문제는 아버지께서 제게도 그것을 요구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전 늘상 꾸지람과 눈총을 받고 살았는데, 그래서 제가 아주 자신있는 것이 아니면 잘 하려 들지 않습니다. 괜히 손댔다가 꾸지람과 핀잔만 들을 것이 두려워서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단번에 잘 할 것을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아주 시간이 많으시고 참을성이 많으신 분이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의 시간을 주시고 잘못해도 노하시거나 꾸중하지 않으십니다. 핀잔도 비아냥도 하시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다독이시고 격려하시고 조그만 성공에도 대단히 칭찬하시는 ‘자식바보’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사도 바울인지라 앞서 빌립보서에서 “행하라”고 했을 때 그가 사용한 단어는 ‘프라쎄떼’ 영어로 ‘프랙티스(practice)’ 우리말로 ‘연습하라 혹은 익히라’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그것에 익숙할 때까지, 될 때까지 해보고 또 해보라는 말이지 지금 당장 완벽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라는 주문이 아닌 것입니다. 그 말은 틀려도 잘못해도 실수해도 괜찮다는 말입니다. 아니 그런 실수와 잘못은 당연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아무런 염려와 두려움없이우리는 될 때까지 우리가 믿는 바를 살아 보는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꾸중은 않으시나 칭찬은 작은 것에도 엄청나게 하시는 분이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도, 난 믿음이 작어서라며 주저하신다면,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3장16절에서 말한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를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할 수 있는 만큼, 아는 만큼, 믿는 만큼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 이상을 바라지도 요구하지도 않으십니다. 심지도 않은 곳에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곳에서 모으는 심지 굳은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하는 자는 “악하고 게으른” 자뿐입니다. (마 25:24-26)

 

하나님의 마음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는 우리의 마음 속에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순종의 마음이 있는지가 중요하지 실제로 우리가 얼마만큼 어디까지 순종하느냐는 그리 중요한 사안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아니, 아닐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로 순종케 하는 이는 성령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이도 순종의 마음을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기에 그 조차도 하나님께는 중요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이 중요한가? 우리가 할 일은 실상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이건 제가 글을 쓰기 전에, 아니 글을 쓰면서 조금 전까지도 전혀 의도하지도 생각치도 않았던 결론인데, ) 그런 마음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달라는 것이 아닐지요? 내가 네 안에 그런 믿음과 그런 마음을 심어 놓았다. 왜인지 아느냐? 내가 널 사랑해서란다. 너가 태어나기 전부터, 너가 네 어머니를 따라 성당에 잘 다니다가 머리 큰 다음부턴 이런저런 세상의 유혹에 빠져 성당에도 다니지 않더니, 급기야는 성경의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니라 결론짓고, 뉴에이지 사상에 빠져 자신이 신인양 교만을 떨며, 온갖 추악한 음란하고 문란한 생활을 할 때에도, 너를 불쌍히 여겨 네게 복음을 전하라 보낸 사람들의 믿음을 흔드려 하고 나를 모욕하고 욕보였을 때에도, 그리고 너가 마침내 정신을 차려 나와 함께 지내온 지금까지의 지난 시간 동안에도 널 한 시도 놓지 않고 사랑했기 때문이란다. (전 이 답을 옮기며 하나님의 사랑에 북받쳐 눈물이 왈칵 솟구쳐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눈에 눈물이 그렁한 채 이 글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순종은 내가 하나님의 그 마음을 알았노라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대답이 아닐지요? 즉, 하나님에 대한 내 애정고백이 아닐지요? 그렇게 볼 때, 순종은, 우리가 얼마만큼 어디까지 순종하느냐는 것은, 우리의 마음 속에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순종의 마음이 있는지가 중요한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한 사안이 됩니다. 제게도 하나님에게도.

 

2016.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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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한 부분처럼 기적적인 일이 발생했다. 중동에서 은밀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던 한 목사가 사자들에 의해 이슬람 테러리스트로부터 구출되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WND(World Net Daily)가 보도했다.



WND에 의하면, 중동지역에서 성경배포 사역을 담당하고 있는 기독교단체인 Bibles for Mideast 대표인 폴 시니라지 목사는 예배를 드리던 중 세 마리의 사자들에 의해 이슬람 과격파들로부터 구출되었다고 자신의 목회 사이트에서 밝혔다.


폴 목사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내생명을 구했다”며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찬송한다”고 말했다.


폴 목사는 이 기적적인 이야기는 3주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했다. 3주전 그가 몇 성도들의 침례를 막 마치려고 했을 때 이슬람 과격파들이 도착하여 그들에게 돌을 던졌다. 폴 목사는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다시 전문병원으로 후송됐다.


앞서 폴 목사에게 돌을 던져 중상을 입혔던 이슬람 과격파들은 폴 목사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강제로 병원을 떠나게 했다. 폴 목사는 무슬림에서 크리스천으로 개종한 수풀 근처에 살고 있는 동료목사 아이윱의 집에 은밀히 이송되었다.


폴 목사는 그 집에서 동료목사의 아이들, 노모와 함께 머물고 있었다. 성도들도 은밀히 폴 목사를 방문했으며 그들은 함께 기도회를 가졌다.


약 3주 후 부활절 주일에 폴의 동료 목사 아이윱이 성도들과 예배를 드리고 있을 때 갑자기 이슬람 과격파들이 무기와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들이닥쳤다. 폴 목사는 당시를 회상하며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폴 목사는 중상에서 충분히 회복되지 못하고 있었다. 예배를 드리던 모든 성도들이 희망을 잃고 그날이 생애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했었다고 폴 목사는 말했다.


바로 그때 한 마리의 사자가 숲속에서 나타나 이슬람 과격파 한 명을 공격했다. 다른 이슬람 과격파들이 사자를 공격하려고 했을 때 두 마리의 사자가 더 나타나 공격했다.


사자의 갑작스런 공격에 너무 놀란 이슬람 과격파들은 달아나 버렸다. 하지만 사자들은 폴 목사와 신자들을 그대로 남겨둔 채 떠났다. 폴 목사는 “더욱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그 숲속에 사자들이 살고 있다는 기록은 없다” 고 말했다.


이 소식을 접한 네티즌들은 사자들이 천사들이었고 하나님이 보낸 것이라며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린다고 말했다.


원문기사 https://goo.gl/Rxu9QQ

기사번역 : 뉴스앤넷


가져온 곳: 갓톡

휴거의 때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환란전, 환란후 말씀들이 섞여 있음에 당황할 때가 있고

휴거가 환란전인지 환란후인지 논란도 많다.


다니엘서를 읽다가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은 수신자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혹자는 다니엘서를 이렇게 해석하기도 한다.


"이 놀라운 일의 끝이 어느 때까지 입니까?"

다니엘이 세마포옷을 입은 예수님에게 질문하자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이렇다.

"반드시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지기까지이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끝나리라"

(단 12:5~7)


이 말씀을 근거로

휴거가 환란중이나 환란후에 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다니엘서의 수신자는 유대인이라고 처음부터 밝히고 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단 9:24)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단 12:1)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단 12:1)


성소를 더럽히고 그 이레의 중간에 제사를 폐하고

가증한 우상을 세우는 것도 모두 유대인에 관련된 내용이다.


다니엘서에 이방인 교회는 등장하지 않으며

모두 유대인에게 주신 말씀이다.


이 때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시대에 처해 있었고

다니엘이 곤고한 자기 백성을 위해 간절히 기도할 때 주신 말씀이다.


이방인교회는 구약시대에 등장하지 않으며

62이레와 마지막 이레 사이에 나타났다가

휴거사건을 계기로 유대인의 마지막 이레로 다시 넘어간다.


62이레에서 기름 부은 자가 끊겼던 유대인의 시대는

교회의 휴거와  적그리스도의 7년언약으로 다시 시작된다.


마태복음이나 계시록에서도 이런 패턴이 존재하는데

환란전은 이방인교회가 수신자이고,

환란중/환란후는 유대인이 수신자가 된다.


계시록 6장까지는 교회에게 주신 말씀이고

7장부터는 유대인에게 해당된다.


교회에게 주신 말씀은 일관되게 환란전 휴거의 말씀이다.


빌라델비아 교회에게는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시고

새 예루살렘성에 들어가게 하신다는 말씀을 주셨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계 3:10)


사데교회에게는

내가 도둑같이 이를 것이란 말씀을 주셨고

간음과 행음했던 두아디라 교회에게는

큰 환란 가운데 던질 것이라 경고하셨으며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는

열심과 회개를 통해 흰옷을 준비하라 책망하셨다.


계시록 6장에서 교회시대는 끝나고

휴거와 부활한 셀 수 없는 무리는

7장에서 하나님 보좌 앞에서 찬양하고 있고

지상에서는 유대인들의 12지파가 환란에 대비하여 인을 받고,

땅에 남은 자들은 바위틈에 숨어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울부짖고 있다.


교회는 환란에 들어가지 않으나 유대인은 환란에 들어가서

두 증인과 14만4천명의 활동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 불 때

14만4천명의 휴거가 일어날 것으로 보이는 것은

7장에서 인침을 받은 14만 4천명이 14장에서 휴거되어

보좌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고 시온산에 어린양과 함께 등장하기 때문이다.


"일곱째 천사가 소리를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 때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계10:7, 11:15~18)


그러므로 이방인교회는 환란전에 휴거가 있고

유대인의 14만4천명은 환란중에 휴거가 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수신자 : 이방인교회

수신자 : 유대인 

환란전 휴거 준비 

환란 대비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라(벧후3:10)

내가 도둑같이 오리니(마24:43)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살전5:2)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갑자기 이르리니(살전5:3)

그 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마24:36)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라(마24:15~16)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24:3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계3:10) 

반드시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지기까지이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끝나리라 (단12:5~7)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단7:25)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란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란일 것이다(단12:1)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눅21:36)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할 가증한 것을 세울때부터 1290일을 지낼 것이요(단12:11)

군대는 적그리스도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하는 가증한 것을 세울 것이며(단11:31)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다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한다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일곱째 천사가 소리를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 때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지리라(계10:7, 11:15~18)



출처: 카이로스 / ars

정치적 유대인들의 미국 이주의 역사

유럽의 유대인은 공산혁명의 실패로 인한 박해를 피하기 위해, 또 이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미국으로 대거 이주하였다. 러시아의 유대인들은 과학기술로 미국을 정복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실패하자 모든 재산을 빼내어 미국으로 망명하기 시작했다. 공산 소련이 지식층 엘리트를 너무 많이 죽였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미국에 들어가서 직접 정복하기로 하고 미국행을 감행했다.

당시 500만 내지 600만 명의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이 러시아를 탈출해서 미국으로 향했는데 미국 사람들은 이들을 대환영하며 맞아주었다. 냉전 체제 하에서 이루어진 일이었으므로 단연 자유민주주의 승리라고 착각하여 환영하면서 받아 주었던 것이다. 실상은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이 세계 최강국인 미국을 점령하려는 목적이었다.

천재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독일·헝가리·이탈리아·프랑스 등 유럽 각지에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당시 이주한 유대 지식인들의 직종을 보면 변호사가 900명, 의사가 2000명, 음악가가 1500명, 작가가 1700명, 기타 학자와 교수가 3000명이었다. 그중에는 노벨상 수상자가 10여 명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미국의 학문·과학·기술·문화·예술은 뿌리가 깊지 못했기 때문에 이들 지식인 유대인은 미국에서 크게 환영받고 미국의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 이들의 활약으로 전쟁 후 미국은 과학·기술·문화·예술 분야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핵무기 개발사업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해 원자무기를 완성시킨 두뇌들의 거의 전부가 유대인이었다. 

많은 정치인들과 사회학자들은 지금 미국이 공산화, 사회주의화되어가고 있다며 그 증거들을 제시한다.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변환시킬 것인가?” 라는 제목으로 인터넷 토론이 있었는데 74%가 그렇다 26%가 아니다고 대답했다. 그렇다고 대답한 사람들 중에는 그 상황을 긍정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다. 공산주의 시오니스트 유대인이 미국에 진출했던 오랜 계획이 잘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아슈케나지 유대인은 프리메이슨

지금껏 유대인의 권력과 역사와 종교와 사상과 미국에서의 영향력 등을 살펴보면서, 이들이 프리메이슨과 매우 흡사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이제 유대인 자신이 언급한 내용을 보면서 그 둘은 결국 한 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유대인들이 드러난 집단인 반면에 프리메이슨은 감추어진 비밀집단이다. 우리는 유대인들을 보면서 프리메이슨을 알 수 있다. 물론 정통 유대인이 아니라 아슈케나지/카발리스트/시오니스트/막시스트 유대인이다.

<그림자정부>의 저자는 이 둘이 언제부터 연합하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 두 가지 이론을 제시한다. 그 하나는 구즈노 데 무쏘Gougenot des Mousseaux, 코뺑 알방셀리Copin Albancelli의 이론이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기독교 문명국가들을 붕괴시키고 장막 뒤에서 일반 혁명을 증식시켜 이스라엘의 지배를 이끌어내기 위해 전적으로 프리메이슨 조직을 만들었다. 프리메이슨 조직은 단지 유대인 수중에 들어있는 도구이자 수단이다”고 주장한다.

유대인 랍비 아이작 와이즈(Isaac Wise) 박사가 이 이론을 지지하는데, 1866년에 쓴 논문 <이스라엘인 Israelit>에 이런 글이 나온다. “메이슨 조직은 유대인의 제도다. 그것의 역사, 계급, 문장(紋章), 암호, 의미는 처음부터 끝까지 유대인의 것이다.”

그 두번째는 웹스터윈치틀(Webster Winchtl)이 주장하는 이론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프리메이슨 조직은 원리적으로는 선하고 건전한 조직체지만, 혁명적 선동가들인 유대인들이 주로 이 단체를 비밀사회로 이용하고 있으며 조금씩 조직 안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그들은 혁명적인 목적으로 그것을 활용하기 위해 그것을 변질시켰으며, 본래의 도덕적, 박애적 목적을 바꾸어 버렸다.”

유대인 베르나르 라자르(Bernard Lazare)가 이 이론을 지지한다. 그의 저서 <반 셈족정책 Anti-semitisme>에 이런 글이 있다.

“둘의 관계는 무엇인가? … 유대인들이 반드시 메이슨 조직의 영혼, 머리, 그랜드마스터는 아니었다. 그러나 메이슨 조직이 생겨난 배경에 카발리스트 유대인들이 함께 했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가장 가능한 추론은 프랑스 혁명 이전 유대인들이 대거 비밀교단 지부에 밀려 들어갔으며 그 뒤에 그들 스스로 비밀사회들을 창립했을 거란 것이다. 그 중에는 바이샤프트와 마르티네 드 파스칼리스와 함께 일하는 유대인들도 있었다…”

유대인과 프리메이슨의 관계를 밝혀주는 글은 이외에도 많다. 1927년 <쥬이시 트리뷴Jewish Tribune>의 사설이다. “프리메이슨리는 유대교에 기반을 둔다. 메이스닉 의식에서 유대교의 가르침을 빼면 무엇이 남겠는가?”

2004년 레이 노보셀(Ray Novosel)가 쓴 글이다. “시오니스트 세계의 리더들, 도처의 메이슨 조직에서 영향력있는 사람들은 세계단일종교와 세계단일정부를 가져올 세계혁명을 위해 결탁하여 노력해 왔다. 많은 메이스닉 랏지들은 유대인들로만 구성된다. 매우 악명높고 위험한 반인종주의연맹(Anti Defamation League)을 탄생시킨 브나이 브리스 랏지(B'nai B'rith Lodges)가 그 한 예가 된다.”

1869년 구즈낫 데 모소는 <유대인, 유대주의,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유대화 The Jew, Judaism and the Judaization of the Christian Peoples>에서 말한다. “프리메이슨이라는 엄청난 조직의 명목상 우두머리가 아닌 진짜 우두머리는 유대주의의 강경 멤버와 고위 카발들과 엄격하고 복잡하게 연합되어 있다. 조직의 엘리트는 이스라엘 카발리스트의 비밀부서에 고용되어 있다.”

   
인터넷 상의 많은 자료들이 현재의 교황을 프리메이슨이라고 한다. 사진 속에서 교황은 프리메이슨 멤버들끼리 "I love  Satan"을 의미하는 손 인사를 보내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와 같은 손 인사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반박하고 있다. 

친 프리메이슨적 인기 사이트인 <유대교와 프리메이슨리>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유대인들은 미국 프리메이슨의 시초부터 참여해 왔다. 최초 13개 주 중의 7개 주에서 메이슨리를 설립한 사람들 중에 이들이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 유대인 메이슨인 모세 헤이즈는 미국에 스카티시 라이트를 소개하는 것을 도왔다... 랍비들을 포함한 유대인들은 우리 온 역사를 통해 미국의 메이슨 운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해 왔다. 지금까지 51명의 미국 유대인 그랜드 마스터가 있었다... 메이슨과 유대교의 의식과 상징 그리고 용어에는 많은 공통적 주제와 이상이 발견된다.”

1928년 7월호 프랑스의 메이슨 잡지 <르 심볼리즘>에서는 이런 기사를 읽을 수 있다. “프리메이슨리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유대인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변함없이 신성한 지혜의 기준을 간직하고 있다.”

1987년 4월호 잡지 <뉴에이지>에서 유대교 랍비인 세이무어 아다스(Seymour Adas)는 말한다. "내가 메이슨이어서 자랑스럽다." 그는프리메이슨 32도다.  이 잡지는 메이슨과 오컬트 뉴에이지 운동과의 연관을 숨기기 위해 후에 <스카티시 라이트 저널Scottish Rite Journal>로 개명했다. 프리메이슨의최고 리더였던 앨버트 파이크는 “프리메이슨의 상징들과 의식들은 모두 유대 카발라의 오컬트 철학에 기초한다. 프리메이슨의 모든 비밀은 유대 카발라의 덕택이다”고 고백했다.

1922년 4월 12일자 <유대 가디언>은 “프리메이슨리는 이스라엘에서 탄생했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고위직 프리메이슨인 루돌프 클레인 박사는 1928년 <라토미아>에서 “우리의 의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대적인 것이다. 이로부터 대중은 우리가 유대인과 실제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1929년 비콤테 폰신이 저술한 <프리메이슨과 유대교: 혁명 뒤의 비밀세력 Freemasonry and Judaism: Secret Powers Behind Revolution>은 이렇게 말한다.

“프리메이슨리는 온 세계에 퍼진 비밀 단체들이 겹쳐져 이루어진 몸이다. 이것의 목적은 기독교 원리에 입각한 현재의 문명을 파괴하는 것이며 그 자리에 - 비록 과학과 이성을 종교로 내세우지만 사실은 물질주의로 바로 인도하는 - 무신론적 이성주의 사회를 세우는 것이다. 겉모습은 종종 바뀌었지만 이 목적은 바뀌지 않고 유지되어 왔다.

이 몸부림의 본질은 영적인 것이다. 이것은 이성주의와 기독교 사상과의 충돌이며,주신Stategod에 이끌리어 신인神人이 될 인간의 권리와 하나님의 권리와의 충돌이다. 이 최종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권위와 전통의 원칙을 내세우는 군주제를 뒤엎기 시작하고 그 대신에 이를 보편적 무신론적 메이슨 공화국으로 차차 대체할 필요가 있었다. 프리메이슨의 역할은 직접 행동하는 것보다는 혁명적 정신 상태를 창조하는 것이다.”

히틀러는 "프리메이슨은 유대인의 하수인으로서 국가 마비 상태를 조장한다"고 주장하며 1935년 독일 내 모든 프리메이슨 지부를 해산했다. 비슷한 시기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도 단원들이 체포되거나 살해됐다. 히틀러가 세계대전 중에 엄청난 유대인 학살을 일으킨 것도 그들이 프리메이슨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죽은 자들의 대부분은 힘있는 아슈케나지가 아니라 가난한 정통 유대인이었다고 한다.

성경에는 이런 귀절이 있다. “자칭 유대인이라고말하는그들의 모독을 아노니그들은 유대인이 아니요오히려 사탄의 회당이니라.”(계시록 2:9) 여기서 ‘자칭유대인’은 사탄을 숭배하는 프리메이슨의 아슈케나지/카발리스트유대인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스도인들의 오해

하나님은 당신의 지시를 따라 본토를 떠난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창 12:3). 유대주의자들은 이 말씀을 인용해서, 세상이 이스라엘을 축복할 때 하나님의 복을 받고 저주할 때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이태리,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등을 예로들며, 역사상 어느 나라 든지 유대인들에게 호의적이고 기회를 주었을 때 문화가 번영하며 경제가 성장하는 복을 누렸고, 반대로 유대인들을 박해할 때는 나라가 영적인 암흑기에 빠지며 몰락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지금의 미국이 최강대국된 것도 바로 미국에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복을 주신거라고 해석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평생들어왔던 말이다. 하지만 과연 유대인으로 인해 하나님께 복을 받아 영국과 미국 등의 나라들이 강대국이 된 것일까?  다음 장부터 말하겠지만, 유럽과 미국은 프리메이슨 유대인들의 주요 활동무대가 된다. 그들이 세상을 지배하므로 그들의 활동 무대가 강대국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성경은 사탄에 대해 “정사와 권세와 어둠의 세상 주관자”라고말한다(엡 6:12). 아담이 죄 때문에 쓰러졌을 때 사탄이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얻게 되었다. 사탄을 숭배할 때 이 세상에서 권세를 받고 지배자가될 수도 있게 된 것이다. 사탄이 감히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자신의 권능과 나라를 과시했다.

“마귀가또그를데리고지극히높은산으로가서천하만국과그영광을보여이르되만일내게엎드려경배하면이모든것을네게주리라” (마태 4:8-9)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권세를 누리고 있는 일단의 그룹이 사탄을 숭배한다는 것은 5장에서 언급한다. 사탄의 권세는 비록 정해진 기간이지만, 지금은 가장 막강한 세력을 누리고 있음이 분명하다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799

글: 김수옥 목사

 

가져온 곳: 개혁주의 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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