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이면 여리고성 코앞에서

 

 

40년 광야생활 끝에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섭니다. 여호수아 3장 15절을 보니까 모맥(밀과 보리)을 거두는 시기에 요단강은 물이 많아 언덕에 넘쳤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봄, 초여름이 되면 북쪽의 헐몬산 눈이 녹아내린 물이 갈릴리 호수를 채우고 계속 흘러서 사해로 흘러갑니다. 언약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메고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들어섰을 때 물이 끊어지고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그들은 강바닥에서 돌 열 두 개를 취하여 길갈에 세웠습니다. 5장 1절을 보니까 가나안 사람들은 하나님이 요단강을 말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건네셨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서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앞을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가나안 땅의 첫 번째 성 여리고, 길갈에서 여리고까지는 빤히 보이는 2마일 거리입니다. 그런데 그 길갈에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를 행하라 명하십니다. 왜 하필이면 거기서 할례를 하라 하시는 것입니까? 창세기 34장에 세겜 족속에게 할례 받으라 해놓고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차고 가서 남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립니다. 할례를 받으면 며칠 동안은 아파서 어기적거려야 합니다. 꼼짝 못 합니다. 그런데 적이 빤히 보이는 길갈에서 하나님은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하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적군이 쳐들어오면 꼼짝없이 다 당하게 될 텐데 말입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소유라는 표요, 하나님의 언약의 표입니다. 창세기 17장을 보면 아브람이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너를 번성케 하리라 약속을 하시고, 이름을 아브라함, 열국의 아비라고 고쳐 주시고, 가나안땅을 후손에게 주리라 약속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자손대대로 할례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할례가 영원한 언약의 징표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할례를 하려면 진작 광야에서 할 것이지, 여리고성을 빤히 눈앞에 두고 할례를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어떤 것보다도, 힘보다도, 무기나 군대보다도,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표시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여리고 성을 앞두고 계십니까? 어려운 일을 앞두고 계십니까? 힘든 고비, 무서운 적을 앞두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다시금 할례를 받으십시오. 마음의 할례를 새롭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라는, 주님의 소유라는 증표를 새롭게 확인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라면, 우리가 주님의 소유라면 하나님이, 주님이 우리로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유월절 이튿날, 그러니까 정월 15일에 그 땅 소산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고 만나가 그쳤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땅 소산을 먹었다면 무엇을 어떻게 먹었겠습니까? 광야에서 이제 가나안 땅에 막 들어온, 농사도 짓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두어 먹은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이 농사지은 보리와 밀을 거두어서 무교병을 만들고 또 볶아서 먹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나중에 사사기를 보면 이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고 우상숭배를 했을 때 미디안 백성들이 쳐들어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어놓은 농사를 싹쓸이해 먹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 위 굴과 바위구멍에 숨어서 떨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이처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월절이 지나자 이제 40년 동안 광야에서 안식일을 빼고 매일같이 내렸던 만나는 그쳤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스스로 싸우고 차지하고 빼앗고 탈취하여서 가나안 땅의 소산을 먹어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나안의 곡식은 주님의 살과 피, 영원한 생명의 떡입니다. 그것은 침노하는 자, 싸우는 자, 곧 믿음의 싸움을 싸우는 자들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싸우는 자로 이기게 하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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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그의 은사들을 세상의 성도들에게 다양하게 나누어 주시고, 그들에게 서로 다르게 빛을 비추어주시듯이,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선물들로 면류관을 씌워 주실 그 하늘의 영광도 모두 동등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는 날에(살전2:19)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20)고 말하는데, 이것은 모두에게 무차별하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19:28).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 땅의 성도들에게 신령한 은사들을 풍성하게 베풀어 주시듯이 하늘에서도 영광을 입히실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또한 자기의 수고에 따라서 자기를 위해서 특별한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딤후4: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맡겨진 직무의 존귀함을 말씀하시면서, 그들에게 열매가 하늘에 예비되어 있다고 가르친다(참조. 마19: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또한 다니엘도 이를 가르치고 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12:3)

누구든지 성경을 면밀하게 공부해 보면, 성경이 신자들에게 영생을 약속할 뿐 아니라

각 개인에게 특별한 상급을 약속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도 이렇게 진술한다: (딤후1:18절)

☞ 칼빈은 18절만 언급하지만 문맥을 고려해서 16절부터 18절까지 올린다.

 

(딤후 1:16)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딤후 1:17)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

(딤후 1:18) (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

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이는 또한 그리스도의 약속을 통해서 확증되고 있다:“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

간단히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은사들을 주셔서 그의 몸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또한 점점 그 영광을 증대시키듯이, 하늘에서도 그 영광을 그렇게 완성시키실 것이다.

 

출처: 개혁주의마을/lamad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동성애' 이슈에 대한 2017년 연합감리교 한인총회 입장

 

 

2017 연합감리교회 한인총회가 4월 24일부터 27일까지 캘리포니아 주 LA 힐튼 공항호텔과 LA연합감리교회(이창민 목사)에서 열렸다. 연합감리교회 공보부에 따르면, 동성애자 감독에 대한 총회 사법위원회의 결정을 앞두고 인간의 성 이슈와 관련된 논의가 이번 한인총회에서도 많은 관심을 받았다. 특히 '인간의 성' 혹은 '동성애' 이슈에 대한 2017년 연합감리교 한인총회 입장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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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 오전에 열린 주제토론 시간에는 5명의 패널 중심으로 교단에서 논의되는 인간의 성 이슈로 인한 앞으로의 전망과 개체교회의 이해와 상황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한인목회강화협의회 장학순 목사는 이슈에 관한 교단의 상황을 “어떠한 선택을 하든 난처한 지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딜레마”라고 설명하며, “장정의 입장유지”, 진보적 견해에서의 “변화”, 타협적 입장의 “잠정적 포용론”과 “지속적 포용론” 등의 예상할 수 있는 4가지 측면의 선택 가능성과 그에 따른 한인교회의 대안에 대해 참석자들에게 설명했다. 패널로 나온 홍삼열 목사, 임찬순 목사, 류재덕 목사, 박미숙 목사 등이 이 이슈에 대한 경험했던 각 개체교회들의 이해와 반응에 대해 발표했다.

 

한인총회가 끝난 다음 날 (28일) 오후 늦게 연합감리교회 사법위원회가 동성애자인 카렌 올리베토 감독선임은 위법이라는 판결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사법위원회의 제1341 판결문에 의하면 올리베토 감독은 행정절차나 사법절차가 종결될 때까지는 감독의 직위를 유지하게 된다. 4월 28일에 발표된 이 판결문에 따르면 “적법성에 관한 오랜 원칙하에, 어떤 개인이나 단체도 교회법을 위반하거나, 무시, 혹은 무효화 할 수 없다. 지역총회나 해외지역총회의 어떠한 지역감독회가 스스로 동성애자임을 밝히고 동성애의 생활하는 감독을 선임하는 것은 위법이다”라고 밝혔다.

 

이에 앞서 한인총회 수요일(26일) 오전에는 갑자기 사법위원회의 결정이 벌써 나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총회장 김광태 목사가 그에 대한 논의를 위해 예정에 없던 특별세션을 소집하기도 했다. 사법위원회의 결정에 대한 확인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부분의 논의는 앞으로의 대응에 관한 논의보다는, 한인교회의 동성애에 대한 입장만을 확인하는 데에 집중했다. 일부 목회자들은 한인총회의 입장을 교단 전체에 확실히 전달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고, 참석자들은 지난 2015년 발표된 한인총회 성명서를 재확인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인간의 성' 혹은 '동성애' 이슈에 대한 2017년 연합감리교 한인총회 입장”이라는 제목의 성명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2017년 LA에서 개최된 연합감리교회 한인총회는 최근 교단일치의 뿌리를 흔드는 '인간의 성' 혹은 '동성애' 이슈와 관련하여 교단에 속한 모든 교회의 '언약'인 현 장정이 밝히고 있는 입장을 지지한다는 2015년 한인총회의 성명서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자 한다. 아울러 이에 의거하여 현재 교단 사법위원회(Judicial Council)에서 다루고 있는 Karen Oliveto (현 Mountain Sky Area 주재감독)의 감독선출이 장정의 규정을 위반하여 진행된 위법사안이라는 입장을 밝히는 바이다.”

 

2015년 한인총회 성명서는 교단의 동성애 이슈와 관련한 10가지 입장을 밝힌바 있다. 이번 논의에서는 또한 한인총회의 정체성에 대한 재정립이 건의되었고, 임원진은 중앙위원회 등을 통해 내년 한인총회 전까지 그에 관한 논의를 하겠다고 말했다.

 

2015년 한인총회에 선언한 성명서는 아래와 같다.

 

연합감리교 한인총회 (The Korean Association of the United Methodist Church)는 2016년도 교단총회 (General Conference)를 앞두고, 교단 분열의 조짐마저 불러 일으키는 현 상황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

 

연합감리교 장정은 전 세계 연합감리교회를 하나로 튼실하게 묶어주는 끈이며, 우리들의 살아 숨쉬는 역사요, 믿음의 고백이다. 현 장정은 분명한 언어로  동성애, 동성결혼 및 주례, 동성애자 목사안수를 금지하고 있지만, 최근들어  의도적으로 장정을 거부하는 하려는 도전이 있다. 이는 장정이 개인의 신학적 입장에 맞지 않으면, 거부해도 된다는 전례를 만드는 것이다.

 

또한 장정을 각 나라 및 지역의 실정에 맞게 고치려는 움직임 역시 장정의 보편적 가치를 상대화 시키려는 시도이다. 만약 동성결혼 주례를 허용하고, 현직 목사가 동성애자 임을 공개적으로 표명해도 제재할 수 없도록 장정이 개정 된다면, 한인연합교회는 엄청난 갈등에 직면해 전도와 선교에 큰 어려움이 예견된다.   

 

이런 현 상황 속에 한인총회가 책임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한인교회를 지키는 사명’ 이다.

 

한인총회는 더 이상 ‘동성애 이슈’에 관한 소모적인 찬/반 논쟁에 휘말리는 것이 아니라, 깨어 기도하는 마음으로 한인교회의 미래를 위해 준비해야 될 때 임을 자각한다. 이에 한인총회는 전체 연합감리교회와 교단에 진정한 웨슬리 정신의 회복을 촉구한다.

 

우리는 연합감리교회가 ‘성서적 경건’으로 세상을 변화 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교단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우리는 한인 연합감리교회로서 130년 전 조선을 찾아와 복음을 증거한 선교사들의 순교적 신앙의 뿌리가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우리는 연합감리교회가 이민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미 전역에서 120 여년 전부터 교회개척 및 지원에 선구자적 역할을 감당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우리는 동시에 성서의 권위와 성결을 기반으로 한 연합감리교의 근간을 뒤흔드는 모든 시도들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

 

우리는 한인교회 미래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올 사안들에 대해서 조차 이민교회와 소수민족의 의견이 반영되기 어려운 ‘구조적 차별’에 대해 가슴 아파하며, 개선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이에 연합감리교 한인총회는 아래와 같이 우리의 입장을 밝힌다.

 

우리는 내년 총회가 ‘본질에는 일치, 비본질에는 자유, 모든 것에 사랑으로’ 의 정신을 존중하길 바란다.

 

우리는 현 장정에 기록된 동성애, 동성결혼 및 주례, 동성애자 목사안수에 대한 분명한 반대 입장을 성서적 교회의 가르침으로 인정한다.

 

우리는 동성애자들이 가지는 아픔을 이해하며, 그들의 인권을 존중한다.

 

우리는 연합감리교 공동체 안에 ‘동성애 이슈’에 대한 분열된 의견이 있음을 이해한다. 동시에 이 사안이 교단 존재의 본질이 아닌, 비본질로 인식하는 교회와 목회자들이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우리는 전도와 선교에 걸림돌이 되는 비생산적인 찬/반 논쟁이 이제 중단 되길 바란다.

 

우리는 ‘동성애 이슈’로 혼돈과 갈등이 증폭되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기지 않는다.

 

우리는 ‘동성애 이슈’로 인해 주님의 몸된 교회가 나누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교단 분열을 막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다.

 

우리의 간절한 바램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2016년 교단총회가 ‘동성애 이슈’와 관련 첨예한 찬/반 논쟁을 불러올 결정을 내릴 경우, 그 선택을 각 연회에 맡기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우리는 동성애, 동성결혼 및 주례, 동성애자 목사안수를 지지하거나 지지하지 않는 교회들에게 자유롭게 연회를 결정할 수 있는 선택권을 줄 것을 요청한다.

 

만약 한인교회가 미래를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경우, 한인 총회는  불가피하게 선교적 필요에 따라 교단 안에서 언어와 문화적인 특성을 인정받는 창의적인 구조를 마련하도록 한다.

 

연합감리교회 한인총회 총회장 이성현 목사

한인총회 미래 대책 위원회  위원장 김정호 목사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2)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샬롬!
이 글은 마지막 때에 관한 글입니다.


지난 번에 올렸었는데
사진이 있다보니 조심스러워
며칠 후에 그냥 내렸었어요.

간증은 늘 조심스럽지만
마지막 때에 관한 내용은
저만 아는 것보다
각자가 받은 신호를 나눔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서 용기내서 올리게 되었고
혹시 못 읽으신 분도 있으실 것 같아
다시 올립니다.



ㅡ 간증 ㅡ


안녕하세요?
저는 초등학교 교사(44세)이고
장로교 고신 소속이며
증조부님이 교회를 세우신
믿음의 가정에 태어났습니다.

제 삶 속에서 체험들 중
마지막 때와 관련한 간증을 나누겠습니다.

2012~2013 어느 날이었어요.

아침에 잠에서 깬 상태에서 눈을 뜨는데
ㅡ그 짧은 1초 순간ㅡ

5,6명 정도의 사람들이 버스를 타는 영상이
보였습니다.

매우 이상한 점은
사람들이 그냥 타는 거예요.

돈도, 토큰도, 카드도 없이요.
자동으로 계산되요.

영상과 동시에
경고의 메시지가 세 문장이 강하게 들렸어요.

1. 앞으로 현금이 없어진다!
2. 이렇게 된다.
3. 주의하라.

저는 너무 놀랐어요.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황당하기까지 했어요.

눈 뜨는 순간은
꿈도 아니고
현실도 아닌 순간이예요.

영상과 메시지(명령?)에
이거 뭐지? 생각하다가...

이게 사실이라면
말세의 징조???

돈이 없어지고...
짐승의 표를 받는다...
말세징조가 어렴풋이 떠올랐어요.

얼른 성경에서
마태복음과 요한계시록의 일부를
읽어보았습니다.

아시다시피
말세의 징조는 현재 다 일어나는 것이어서
더 놀랐습니다.

설마 우리 시대에 이런 일이 생길까 싶어
관심이 없다시피했는데
그 날 저는 충격적이기까지 했습니다.

그 후
궁금한 점이 생겼어요.

매매의 장소가
왜 하필 버스였을까?
버스 안 탄지도 오랜데....
15년 이상 안 탔으니...

주위에 흔히 계산하는 마트 장면을 두고 왜 하필 버스였을까?

진짜 하나님이 보여주신 게 맞을까?
계속 생각했어요

그때 쯤이었어요.
브라질 축구선수 카카의 믿음에 대해 알게 되었고,

페이스북도 안 하던 제가
카카의 페이스북에 인사말(칭찬)을 남기려고
페이스북 가입을 어렵게하고 들어가봤더니...

포르투갈어 천지인거예요.

그래서
포르투갈 인사말을 검색해보았어요.

근데
첫 창 제일 위에
'포르투갈 성경 짐승의 표 ...'
가 눈에 띄었어요

이건 뭐지?하고 들어가 보았는데
엄청 길더라구요.

온갖 포르투갈어 옛날 성경책이 나오고요.

그 중 한 부분에서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말로는 '표'인데
포어로는 sinal이래요.

sinal 아래 줄이 쳐 있고,
영어로 뜻을 15개 쯤인가 적어놓았더라구요.

근데 sinal의 뜻
동그라미 1번이
바로..
token이었어요!

token하면
여러 가지 뜻이 있겠지만
저는 버스가 떠오르는 세대거든요.

제가 본 영상이 떠오르는 거예요.

버스에 타는 사람들이 자동으로 계산된 것은
표(sinal)를 받았다는 것이고,

sinal=token 역할...

'왜 버스 장면이었을까?'
열흘 정도 궁금했던 것이 해결되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 후로도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변화하게 되었고
복음을 전하게 하셨어요.

학생들에게 복음을
못 전하게 되어 있는데도
놀라운 방법으로 전하게 하셨어요.

수많은 졸업한 학생들도
제게 보내주셨어요
약 200명 정도 됩니다.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남도 깨알같이 체험했습니다.



2년 넘게 복음을 전하던 2015년 어느 날이었어요.

"하나님 제가 바르게 알고 있는 거 맞나요?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해야 되나요?"

왜냐면 그동안 몰랐던 것들이 영의 눈을 뜨면서 알게 되니

잘못 아는 것이 있다면 학생들에게 잘못 알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요.

기도하며 고요히 간절히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렸어요.

잠시 후 너무나 놀라운 응답을 주셨어요.

눈을 감고 응답을 기다리는 제게
갑자기 마태복음25장이 나타났어요.
마치 캄캄한 영화관에서 장면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처럼요.

하여튼 너무나 놀라웠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은 마지막 때에 관한 비유로
신랑을 기다리는 열처녀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그리고 또 다른 한 장의 사진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스치듯 빠르게 지나갔는데
제 폰에 저장된 사진 중 한 장이예요.

너무 빨리 지나갔지만
마지막 학생의 파란색 옷의 잔상이 남아서
찾을 수 있었어요.

그 사진은...

저희 반 아이들이
아침마다 밖에 나와서 저를 기다리는데
하지말라고 해도 안되요ㅜㅜ

귀여워서
가끔 사진을 찍었는데 그 중 한 장이예요.

해마다 학생들 찍느라 저장된
5천장이 넘는 사진 중에서 그 사진을 찾으며
'혹시 여학생 5명?'기대하며 찾았어요

정확히 5명의 여학생들이었어요ㅡ감동ㅜㅜ

4명이나 6명이 찍힌 사진도 있고
남학생들이 찍힌 사진도 있는데...
정확히 여학생 5명...




교실에는 많은 학생들이 있지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밖에 나와서
기다리는 아이들은
아마도 선생님이 좋아서겠지요...

제 차의 시동이 꺼지면
문 열어주고
가방 들어주고
엘리베이터 버튼 눌러주고
서로 선생님 손잡으려고 아웅다웅ㅜㅜ

저는 너무 놀라웠어요.


"제가 어떻게 할까요?"
여쭈었을때 아무 말씀없이 보여주신
딱 두 개의 사진.

신랑을 기다리는
5명의 신부
선생님을 기다리는
5명의 여학생...

공통점은
기다림!

ㅡ제가 어떻게 할까요?
ㅡ사랑하며 기다려라

놀라운 응답의 내용도

또한
우리의 머리털도
다 세신다는 하나님

제 폰에 있는 수 천 장의 사진도 다 아시고
그것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방법도
참 은혜로웠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 얼마인지 모르나
기다리라는 건 곧 오신다는 말씀이잖아요.


우리가 생활 속에서 자녀들에게든 친구들에게든

기다리라고 말할 땐 곧 간다는 뜻이잖아요.

기쁨으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하며
신랑 예수님을
함께 기다립시다!

강물을 역류하여
본향을 향하는 연어떼처럼
우리도 세상을 따르지 않고
천국을 향해 날마다 힘차게 나아갑시다.

오직 예수! ♡♡♡



이웃블로그 / 우리예수님

어떻게 하면 점도 흠도 없는 신부의 삶을 지속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야 하나?


사람은 선하게 살기에는 세심한 주의와 노력이 필요하지만 악한 길은 내리막길과 같아서 별다른 노력없이도 목구멍으로 달콤하게 술술 내려간다.


원수 사탄마귀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기 때문에 조금의 틈도 주지 말아야 한다. 생각의 틈, 세속주의 틈, 탐욕이나 음란의 틈, 게임이나 영상의 틈, 내가 연약하게 반응하는 것들이다. 조그마한 틈만 있어도 악한 것들은 비집고 쏟아져 들어온다. 그리고 점점 은밀하게 구멍을 넓혀 넘어뜨린다.


지금은 과연 노아의 때와 같다. 먹을 것, 마실 것, 즐길 것이 풍족하여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기도보다 세상의 것을 즐기느라 여념이 없다.


기도로 깨어있는 신자의 경우, 성령께서는 민감하고 즉각적인 경고 싸인을 보내신다. 이때 즉시 순종하고 돌이켜야 하지만 경고를 자꾸 무시하면 무디어지고 미끄러진다.


성령님의 생명력이 충만하게 흘러 넘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나만의 그리스도와 친밀감을 이루는 타이밍과 리듬의 비밀이 있어야 한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이나 도우심이 없다면 올바른 길을 걸어 갈 수 없을 것이다. 성령이 심령에 충만할수록 심령은 정결해지고 의의 열매는 무르익는다.


노아는 눈에 보이는 방주를 준비하였는데 120년간 인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심령의 방주를 짓기 때문에 인내하기 더 어렵다. 불같은 의심과 무디어짐에 분투해야 한다.


신부들의 가는 길목에 이런 장애물과 덫들이 즐비하게 놓여져 유혹한다. 우리는 직장을 다니고 일로 분주하게 살면서 베드로나 바울처럼 엄청난 사역을 이루어내기 어렵다.


그런데 엄청난 일을 성취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작은 일이라도 꾸준하게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다. 새벽기도나 특정한 사역을 한두번 하는 것은 큰 일은 아니지만 이 일을 10년 또는 수십년간 지속하여 축적된 결과는 엄청난 성취를 이루어낼 수 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을 깨닫고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한 가지 목표 곧 예수만을 바라보는 삶을 통해 이루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하늘에 소망을 두는 사람들은 그 목표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가 기뻐하는 길을 믿음으로 걷다보면 어느새 열매를 맺는 것을 보게 된다.



출처: 카이로스 / ars

욥기를 보면

사탄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열리는 장자의 회의에 참석할 뿐 아니라,

사탄이 욥을 참소하자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셨다.

사람의 짧은 일생은 고난과 죄에 대한 유혹과 끊임없이 투쟁한다.


천국에 거주하는 천사들조차

루시퍼의 유혹이 허락되어 수많은 천사들이 타락하여 귀신의 존재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유혹이 있을 가능성을 허락하셨는데,

에덴동산에 거주하던 최초의 부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을 때 인성측면에서 사탄의 유혹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가장 센 유혹인 세가지 시험을 받으셨다.



그리스도인이 거듭났다고 하여 유혹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도 만약 지속적으로

죄의 유혹에 빠진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은 육체의 몸을 입고 살아가며

세상은 욕망과 정욕으로 끊임없이 신자를 유혹한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죄와 구원>에서 사람이 세 가지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안일해지려는 경향과 옛품성으로 복귀해지려는 경향, 반란을 일으키려는 경향이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도덕적인 것은 도덕적이지 못한 것으로,

영적인 것은 영적이지 못한 것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있다.


죄의 성향은

하나님께서 나를 다스리시는 것에 대항하는 근본적인 반란이다.

그 성향이 남아 있는 한 유혹은 내 안에서 죄의 습성을 찾아낸다.


그러나 주님께서 죄의 성향으로부터 나를 구원하시면

유혹은 내 안에서 죄의 습성을 찾아내지 못한다.

따라서 단지 가능성을 시험해 볼뿐이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 10:12)


유혹 자체는 죄가 아니다.

사람은 유혹을 받을 수 밖에 없는데

오히려 유혹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무시당하는 것이다.


유혹하는 자는

유혹당하는 자가 연약하게 반응하는 요소를 잘 찾아낸다.


탐심, 간음, 교만, 술취함, 비방, 명예같은 것으로

모든 사람은 각가 속성에 맞게 유혹을 받는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유혹은 죄와 달리 원하는 목적의 경로에서 복잡한 상황으로 인도한다.

사람은 그 딜레마 가운데 어느 쪽을 따를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죄지을 가능성과 죄를 짓는 습성은 서로 다른 것이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은 살인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지만 살인하는 습성은 없다.

죄의 습성은 그것이 실천에 옮겨지든 아니든 행위 자체와 다름없다.

천사나 사람이나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불순종의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선택의 유혹이 왔을 때

그 유혹은 그리스도 안에서 불순종의 습성을 찾지 못한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죄의 성향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인간중에 없다.


그리스도안에서 죄의 습성은 제거되었지만

죄를 지을 가능성까지 제거된 것은 아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도

언제든지 죄로 돌아갈 경향은 남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사람이 유혹에 넘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욕심이나 탐욕 때문이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약 1:14)


욕심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특별히 보암직하고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종착지는 파국적이다.


그리스도인이 욕심의 결과에 대해 안일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심지어 각자가 이해하는 자기 상황에 맞추어 자기 방식대로 성경을 해석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유혹 자체를 막아주지는 않으신다.


대신 유혹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시험이 오는 것을 막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각자 선택하는 환경도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다.


아브라함은

안락한 우르라는 도시를 떠나 가나안 초원으로 갔고

반대로 롯은 소돔 도시로 들어갔다.


솔로몬은 부귀와 많은 이방여자들에 둘러싸여

종교적으로 타락의 길을 자초했다.


우리의 삶에서도 이런 선택의 상황에서 딜레마에 빠질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신앙의 유익한 길을 선택해야 한다.


신자가 하나님의 방식을 우선순위로 놓을 때

유혹이 더 많은 길을 피하여 평강의 삶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욕심보다 평강의 삶을 추구하자.



출처: 카이로스 / ars

하나님께서 나에게 왜 이런 마음을 심어 주신 것일까. 스스로 질문을 해보기도 했다. 키가 작은 것도 단점으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혹시 저 사람이 잘 먹고 고생을 좀 덜하면 키도 더 크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람에 대한 마음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무언가에 홀린 듯한 느낌이었다. 사실 나는 그 당시에 이미 선을 여러 번 봤었는데 하나님이 정해주신 배우자라는 감동이 오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김태훈 씨를 만나고 나서도 그 사람이 정해진 배우자라는 큰 감동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의 신앙적인 열정이 뜨겁게 느껴졌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예수님을 그렇게 열심히 사랑하는 사람이면 된 것이 아닐까. 나는 그렇지만 자신이 없었다. 며칠 후 그에게 전화를 해서 내가 다니는 교회에 주일 날 한 번 방문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 사람은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과 친하게 지내는 교우들에게 그를 선보인 후 저들의 의견을 들어보기 위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가 교회를 다녀간 후 목사님을 위시해서 대부분의 주위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기보다는 좀더 시간을 두고 더 잘 알게 된 후에 모든 것을 결정하라는 신중론을 제기했다. 더욱이 웃겼던 것은 처음에 우리의 중매를 주선했던 여자 집사님조차도 뭐가 자신이 없었던지 그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아이까지 딸려 있는 사람이니까 후회할 일들은 절대로 하지 말라고까지 말했다. 그러니까 내 주위의 사람들은 중매를 섰던 아줌마까지 포함해서 모두가 그와의 결혼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결혼 문제를 두고 목사님과 상담을 했는데 "결혼은 절대로 동정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충분히 기도한 후에 하나님이 정해 주신 배필이며, 자신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올 때 결혼을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말씀하시며 서두르지 말라고 몇 번을 권유하셨다.

그런데 그를 만나면 마음이 많이 흔들렸다. 그 사람은 자기가 기도를 해 보니 우리 둘의 결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결혼이라는 확신이 왔다고 하면서 기왕에 결혼할 것이라면 빨리 서둘러 결혼하자고 다그쳐왔다. 그 사람을 만나면 만나기 전에 생각했던 생각들이 다 사라져 버리고, 단지 그가 하는 말들만이 마음속에 남았다. 상담 목사님의 말도, 교회 식구들의 권유도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무엇에 홀린 듯한 느낌으로 처음 만난 지 한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반대했던 결혼이었지만 나는 그래도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을 귀한 주의 종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의 입으로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던가. 앞으로 주의 종으로 쓰임받는 것이 남은 여생의 소원이라고…. 나는 더 이상 바라고 싶은 것이 없었다.>

 결혼식을 마친 후 우리는 곧바로 맨해튼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기도원으로 올라갔다.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또한 앞으로의 결혼생활과 가정의 모든 일들을 하나님에게 의뢰하기 위해서였다. 아내와 함께 기도를 드리는데 성령의 뜨거운 불이 임했다.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결혼을 기뻐해 주신다는 확신이 들었다.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드리고, 또다시 방언으로 기도하고…. 그렇게 하기를 몇 시간. 시계를 보니까 어느덧 새벽 2시였다. 배가 많이 고팠다. 우리는 그 시간에 기도원에서 내려와서 플러싱에 있는 24시간 오픈 설렁탕집에서 국물을 시원하게 마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사실 나는 이번 결혼이 호적상 네 번째 결혼이었지만 주위 사람들을 초청해서 정식으로 결혼 예식을 올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결혼식을 올리면서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생명을 바쳐서라도 이 결혼만큼은 하 나님 앞에 가는 날까지 절대로 깨지지 않게 하겠다고….

 

아내와 지난 18년 동안의 결혼 생활을 돌이켜보면 결코 순탄치 못한 결혼생활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정을 지키고 결혼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나 나나 결혼하면서 마음판에 새겼던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으로 여기고 절대로 이혼만은 할 수 없다는 오기에 가까운 결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김경애 사모의 간증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나의 마음은 왠지 모르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한편으로는 결혼 서약을 하기 전에 도망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한 달 만에 초고속으로 결혼식을 치르고 있는 나 자신이 정말 믿어지지 않았다. 지금 목사님 앞에 서서 결혼 예식을 올리고 있다는 것이 꿈 속인지 현실인지 아리송해지기도 했다.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오가고 있는데 어느덧 주례 목사님이 혼인서약을 물어오셨다. 

 "신부 김경애 양은 신랑 김태훈 군을 하나님 앞과 모든 증인 앞에서 그대의 남편으로 삼아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며 어떠한 경우에도 이 남자를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며 위로하고 순복하여 진실한 아내로 일정한 부부의 대의와 정조를 굳게 지킬 것을 서약하십니까?"

 "예."

 아, 이제는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어섰구나. 하나님 앞에 혼인 서약까지 했으니 이제와서 무슨 말을 더 하리. 나는 이제 모든 상황을 하나님이 정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것으로 받아들이자고 다짐했다. 주변 사람들이 반대하는 것이 마음에 걸림돌처럼 박혀 있었지만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면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 열심히, 행복하게 잘 살자.'

 

결혼식 전에 신혼여행에 대해서 물었더니 애까지 딸린 사람이 무슨 신혼여행을 따로 가겠냐면서 출근도 계속해야 되니 나중에 기회를 봐서 좋은 곳으로 여행을 다녀오자고 했다. 물론 좀 섭섭한 생각도 있었지만 그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그런데 결혼식을 마치고 기도원에 올라갈 줄은 몰랐다. 기도원으로 올라가는 것이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결혼식 날 만큼은 평생에 기억될만큼 좀 낭만적인 뭔가가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다른 사람들은 결혼식 뒤에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이벤트들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기도원에 올라가서 기도를 하는데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남편의 목소리가 그렇게 천둥소리처럼 크다는 것을 알게 됐다. 통성기도를 어떻게 그렇게 우렁차게 하는지 옆에 앉아서 함께 기도하면서 나는 귀가 다 얼얼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19대 대선, 동성애 찬성하면 교회는 없어집니다!

- 유공연 TV -


미국은 동성애를 합법화 시키고 난 후

아동소아성애자도 일부다처제 주장자도

소수인권이라고 합법화를 주장하고 있다.


당신이라면 동성애를 찬성하시겠습니까?



버거 킹에서 우리는 햄버거 하나와 음료수를 시 켜 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둘 중에 음식을 먹고자 하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빈 테이블에 앉아 있자니 눈치가 보일 것 같았고 그래도 음식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하면 왠지 말이 술술 풀릴 것 같기도 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김태훈이라고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김경애입니다."
 

아내는 검은색 티셔츠에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공부를 많이 한 사람처럼 보였다.
 

"저는 봉제 공장에서 기술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주급도 많이 받지 못하고, 뭐 그저 벌이는 신통치 않지만 특별히 다른 할 일이 없어서… 1985년도에 이민 와서 첫 직장으로 일을 시작해서 벌써 만 1년이 넘었습니다. 미국에 오니까 한국보다 시간이 더 빨리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 아파트 안에서 아는 손님들의 미용 손질을 해드 리고 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우리를 중매했던 동료 집사님도 아내가 하는 미장원의 단골 손님이 었다. 아내는 나보다 훨씬 먼저 인 1977년도에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미용 기술을 배워 학교를 졸업한 후부터 지금까지 계속 미용 관련 일을 해왔다고 말했다.
 

"저는 앞으로 평신도든 교역자로든 주의 일을 열심히 하면서 사는 것이 평생 꿈입니다.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 서라도 써주시기만 한다면 목숨을 내놓고 일하고 싶은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내의 표정에서 약간의 동요가 보였다. 내가 혹시 뭔가 말을 잘못했나 싶어서 얼른 화제를 돌리려고 하는데, 아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면서 가장 큰 복은 주님의 선택을 받아서 주의 일을 마음껏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태훈 씨가 만일 주의 종이 된다면 당신도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복을 받은 사람이 되는 것이겠지요."
 

잠깐 사이였지만 아내의 눈망울에 물기가 맺히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한 시간 정도 우리는 버거킹에 마주 앉아 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나눴다. 물론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아들 성민이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그런데 아내는 전혀 그 런 사실에 개의치 않는 듯한 눈치였다.
 

버거킹을 나와 얼마 동안 맨해튼 길을 걸었다. 그때는 초가을이었는데 날씨가 그렇게 춥지도 않고 얼굴을 스쳐가는 바람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옆에서 다소곳이 쫓아오던 아내에게 대뜸 우리 아들 성민이를 한 번 만나보지 않겠냐고 말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에 좀 당황하더니 금방 그렇게 하자고 했다.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플러싱의 단칸짜리 아파트로 갔다.
 

원 베드름 아파트에는 성민이를 봐주기 위해서 어머니가 오셔서 함께 기거하며 지내고 있었고, 그나마 방 하나는 아파트 렌트비를 줄이기 위해서 셋방을 내주고 있어서, 결국 우리 식구들은 거실 쪽에서 그냥 뭉개면서 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사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전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만일 이 여자가 나의 남은 여생을 함께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운명의 사람이라면 오히려 이런 구질구질한 모습부터 다 보여 주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러고 나서도 싫다고 하지 않으면 그때 나도 결혼할 생각을 해봐야겠다는 계산을 마음 속에서 하고 있었다.
 

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머니가 깜짝 놀라셨다.
 

"아니,함께 오신 아가씨는 누군가?"
 

"오늘 처음 만난 김경애 씬데, 성민이를 한 번 보러 왔습니다."
 

성민이는 거실 한쪽 구석에서 조그마한 상을 펴놓고 숙제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아비가 눈짓을 하자 성민이는 하던 숙제를 잠시 내려놓고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그래, 지금 몇 학년이니?"
 

"4학년입니다."
 

"학교 공부하는 거 힘들지 않아?"
 

아내는 오랫동안 알았던 사람처럼 그렇게 다정하게, 그리고 전혀 어색하지 않게 성민이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눴다.
 

'혹시 정말 저 여자가 하나님이 정해 주신 나의 진정한 배필일까'
 

마음 가운데 확신이 서는 점은 하나도 없었지만, 첫 번째 만남에서 서로가 좋은 감정을 갖고 헤어진 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나중에 아내는 그날 우리집에 왔다가 성민이가 성경을 창세기부터 연필로 노트에 쓴 것을 보고 많이 놀랐고 또 이런 사람과 아이라면 함께 살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 김경애 사모의 간증>
 

그날 밤 나는 이상한 꿈을 꿨다. 머리털 나고 그렇게 크고 둥근 보름달은 꿈에서라도 처음 봤다. 보름달 빛이 옥토밭으로 바닷물 쏟아지듯 흘러들었다. 평생을 기도하면서 살아오신 어머니가 옆에 서 계셨다. 달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달이 계속 나눠지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처음에 하나였던 보름달이 어느덧 12개로 나눠졌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엔가 12번째 달이 쿵 소리와 함께 옥토밭으로 떨어졌다. 밭 옆에 조그마한 교회 건물이 있었는데 언제 나왔는지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나와 옥토밭에 떨어진 달을 잡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난리가 났다. 옆에 묵묵히 계시던 어머니께서 갑자기 너 도 가서 한 번 잡아보라고 말씀하셨다. 내심 마음 가운데 나도 한 번 잡아볼까 하는 마음이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쏜살같이 옥토밭으로 뛰어들었는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이 잡으려고 할 때는 잡힐 듯하다가도 다시 멀어지곤 했던 보름달이 내가 옥토밭에 발을 대는 순간 내 쪽으로 굴러오기 시작 했다.

짐짓 놀라 뒷발걸음질을 하려고 하는데 어느 순간엔가 보름 달이 내 코 앞에 다가와 있었다. 손을 뻗어 보름달을 만지는 순간, 그 보름달은 황금 깃털을 가진 거대한 비둘기로 변했다. 앗! 너무나도 놀라 소리를 지르면서 꿈에서 깨어났다. 김태훈 씨를 만나고 난 후 왠지 모르게 그에게 호감이 갔다. 키도 작고 깡마른 체구가 겉으로 보기는 참 왜소해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이야기를 나누면서 예수님을 참 많이 사랑하고,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왔다. 사실 나도 이제 나이 30이 넘었는데 무슨 조건을 그렇게 까다롭게 찾을 때도 아닌 것 같 고…. 아들에게 성경을 노트에 적게 하며 말씀을 배우게 하는 것도 참 인상적이었다. 평소  생각했던 이상형 배우자 조건과는 하나도 일치되는 것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에게 마음이 끌렸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홍준표, 서민이었기에..
'서민 대통령'을 꿈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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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복음주의신학회, ‘동성애’와 ‘동성 결혼’에 대한 선언문 발표

 

 

"우리는 동성애를 인정할 수 없다"

   

1,000여명의 회원과 45개의 대학과 신학전문대학원 대학교가 소속된 한국 최대의 신학관련 학술단체인 한국복음주의신학회(회장 심상법 교수, 총신대 신대원 신약학)는 3일, ‘동성애’와 ‘동성 결혼’에 대한 한국복음주의신학회 선언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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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복음주의신학회 제68차 정기논문발표회 후 기념촬영 © 뉴스파워

 

지난달 22일 지구촌교회(담임목사 진재혁 목사) 수지채플에서 「성, 가정, 사회」 라는 주제로 열린 한국복음주의신학회 제 68차 정기논문발표회 중 제안된 '동성애'와 동성 결혼'에 관한 한국복음주의신학회의 입장을 나타내는 선언문을 발표하기로 결의를 했다.

 

이후 임원회는 제 69차 정기논문발표회 때 자구수정에 대한 조건으로 인준을 받아 여러 지문과 검토를 가진 최종적인 선언문을 완성했다.

 

한국복음주의신학회는 선언문에서 “성경은 동성애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창 2:18-25)에 어긋나는 것임을 분명히 선언한다.”며 “성경은 동성애를 엄격히 금하기 때문에 성경을 믿는 우리는 동성애를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은 동성애가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성령의 능력에 의존하여 이런 성향을 극복하여 참된 성화의 길로 나아가도록 애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동성애를 실행하는 사람들은 교회 공동체의 예배는 참여하지만 교회의 온전한 회원권은 가질 수 없으며, 성찬의 참여와 교회 직분을 가질 수 없다.”며 “그러나 성령께 의존하여 그 동성애를 극복할 때는 이 모든 권한을 회복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한국복음주의신학회는 그러나 “동성애자뿐 아니라 그 어떤 사람도 교회 예배에 참석해야만 복음의 말씀을 듣고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많다.”며 “그러므로 누구든지 교회 예배에 참여해야 하며, 선포되는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성령께서 변화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간구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동성애자들 역시도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과 돌봄의 대상이지만 동성애를 인간애의 한 부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며 참된 그리스도의 사랑은 잘못된 습관과 행동으로부터 그들을 회복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선언문 전문.

 

‘동성애’와 ‘동성 결혼’에 대한 한국복음주의신학회 선언문 발표

 

1. (신앙고백과 원칙)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모든 문제의 최종 판단 기준임을 믿는다. 그러므로 동성애와 동성 결혼 문제에 대한 판단은 성경에 근거한다.

 

2. (성경적 판단) 성경은 동성애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창 2:18-25)에 어긋나는 것임을 분명히 선언한다(창 19:5, 7, 9; 롬 1:26-27; 딤전 1:9-10). 성경은 동성애를 타락한 사람들 가운데 있는 행위와 습관으로 규정하며, 하나님의 백성은 이런 관습에 따르지 말아야 한다.

 

3. (현대 교회에 적용) 성경은 동성애를 엄격히 금하기 때문에 성경을 믿는 우리는 동성애를 인정할 수 없다.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은 동성애가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성령의 능력에 의존하여 이런 성향을 극복하여 참된 성화의 길로 나아가도록 애써야 한다. 동성애를 실행하는 사람들은 교회 공동체의 예배는 참여하지만 교회의 온전한 회원권은 가질 수 없으며, 성찬의 참여와 교회 직분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성령께 의존하여 그 동성애를 극복할 때는 이 모든 권한을 회복할 수 있다.

 

4. (동성애적 성향의 변화 가능성)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들은 내주하시는 성령의 능력에 근거하여 동성애적 성향을 극복할 수 있다. 동성애를 극복한 사람들의 증언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그러므로 동성애자들은 성령께 의존하여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5. (동성애자의 교회 출석) 동성애자뿐 아니라 그 어떤 사람도 교회 예배에 참석해야만 복음의 말씀을 듣고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많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교회 예배에 참여해야 하며, 선포되는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성령께서 변화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간구하고 노력해야 한다.

 

6. (세상 속의 동성애자들) 세상에는 동성애자들이 항상 존재해 왔다. 우리는 여러 가지 상황과 이유로 동성애자가 된 자들에 대하여 진심어린 이해와 사랑으로 대하며, 그들이 동성애와 동성결혼의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도록 최선을 다 해야 한다.

 

7. (인권 운동으로서 동성애 확산 운동에 대하여) 동성애를 용인하는 것이 동성애자의 인권을 존중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동성애자도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지만 동성애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거부하시며 특히 동성애의 행위는 행위자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에 유익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반대해야 한다.

 

8. (사랑의 동기) 동성애자들 역시도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과 돌봄의 대상이지만 동성애를 인간애의 한 부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며 참된 그리스도의 사랑은 잘못된 습관과 행동으로부터 그들을 회복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김다은 ⓒ 뉴스파워

가져온 곳: USA 아멘넷

'범기독교계가 홍준표 후보 지지?'…교계 "특정후보 지지 안될 말"

 

 

기독자유당 지지선언…한기총ㆍ한교연 등 "관련 없다" 성명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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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자유당 홈페이지에 게시된 내용(이미지 출처: 기독자유당 홈페이지)ⓒ데일리굿뉴스

 

'범기독교계가 대선후보인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를 지지한다'는 내용이 일부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한기총ㆍ한교연 유감 표명 "우리와는 무관"

 

기독자유당은 1일 오후 홈페이지와 SNS를 통해, 홍 후보 지지를 선언하는 기자회견을 2일 오후 자유한국당 당사에서 한다고 공지했다.

 

이와 같은 소식이 알려지면서 SNS에서는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사회에 본이 돼야 할 한국교회가 집단으로 특정 후보를 공개 지지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 특히 기독자유당이 이 기자회견에 초청한다고 한 단체에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한국교회연합 등 주요 연합기관들이 포함돼 있었다.

 

한기총과 한교연은 곧바로 성명을 내고 강한 유감을 표명했다.

 

한기총은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한기총은 특정 후보를 지지하지 않으며, 이와 관련한 보도는 사실이 아니"라면서 "대선에서 국민들의 소중한 한 표, 한 표가 모여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지도자가 세워지게 되기를 기도한다"고 밝혔다.

 

이어 "한국교회 성도들이 이번 대선에서 하나님 뜻에 합당한 지도자가 세워질 수 있도록 기도하기를 요청하며, 모두가 투표에 동참할 수 있기를 당부한다"고 말했다.

 

한교연도 "기독자유당과 범기독교계가 자유한국당 당사에서 홍준표 후보를 지지하기로 했다는 일부 보도와 관련하여 본 한국교회연합은 본회와 아무런 사전 협의도 없이 본 회 이름이 거명된데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사회에 본이 돼야 할 기독교가 오히려 집단적으로 나서서 특정 정당, 특정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행위가 아니“라며 ”이는 기독교인들의 신앙 양심에 역행하는 일이며 현실 정치에서 엄정 중립을 지켜야 할 기독교계가 금도를 벗어나는 일“이라고 밝혔다.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총회장 이종승 목사)도 입장을 표명했다. 예장 대신은 “최근 기독교계의 특정후보 지지선언은 본 교단과 상관이 없으며 보도내용은 사실이 아님을 밝힌다”면서 “대신총회는 특정후보는 지지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지도자, 기독교 가치관을 실현하는 지도자가 세워지도록 기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광훈 목사 등 홍준표 후보 지지 선언

 

그럼에도 불구하고 2일 서울 여의도 자유한국당 당사에서는 예정대로 홍준표 후보 지지선언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전광훈 목사(사랑제일교회)와 김승규 장로(법무법인 로고스) 등이 참석했다.

 

전 목사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기독교 정신과 가치관, 정체성과 노선에 부합된 대선후보로 홍준표 후보를 지명, 선언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2017년정의평화기독교대선행동'은 같은 날 오후 3시 특정후보 지지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범(汎)기독교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신앙인들을 휘잡아 대선 정국에 이용하려는 타락한 성직자 집단을 기독교 대선 운동의 이름으로 세상에 고발한다"며 전광훈 목사의 행보를 비난했다.

 

이들은 또한 "하나님 이름을 팔고 있으나 자신들 기득권 유지를 위해 안간 힘을 쓰고 있음을 하늘이 알고 땅이 알며 이 나라 국민들이 안다"면서 "신앙양심과 시민적 판단에 따라 기독교인들이 선거에 임하길 강권한다"고 말했다.

 

한연희 ⓒ 데일리굿뉴스

 

가져온 곳: USA아멘넷

현직 의사가 말하는 '동성애와 에이즈'


동성애->항문성교->불임->치매->에이즈->격리->사망

 

동성애 장려는 자유, 사랑, 존중, 배려 따위와는 상관이 없다.

동성애 장려는 인구감축을 위한 것이다.

 

물론 선천적 성소수자의 인권과 권리는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동성애는 후천적 경험을 통해 유도된다.


그러다 위와 같은 경로로 대부분 끔찍한 말년을 맞는다.

젊어서 죽기도 한다.


인구를 도태시키고 감축시키기 위한 1퍼센트의 야비한 전략임을 깨달아야 한다. 

 

"적어도 저희 병원에서는 남성간 항문성교로 인해 에이즈에 감염되신 분들이 대부분이었어요."

"이 게이분들이 항문성교만 안 했어도 건강하게 잘 사실 분들이거든요."


"항문성관계를 통해 에이즈, 매독, B형간염 등 30여가지 이상의 위험한 질병이 전파될 수 있습니다."


"소위 동성애자 인권운동하신다는 분들, 여기서 에이즈로 죽어가는 동성애자 병문안 온 적 한번도 없어요."


"인권운동가 명성 쌓으려고 돌아다니기만 하지 여기 병문안 오거나 봉사활동하러 오시는 분 한명도 없어요."


"2013년에만 우리나라에 1000명 이상의 신규 에이즈환자가 발생했거든요. 그 에이즈 환자들 100%가 성관계를 통해서 감염이 됐어요."


"저희 병원에 오는 동성애자 에이즈 환자분들 후회 안 하시는 분 한 명도 없습니다." 

 

직접 에이즈 환자들 수십명을 돌봤던

수동연세요양병원 염안섭 원장이 말하는 동성애와 에이즈





출처: 갓톡 http://www.godntalk.com/?mid=best&document_srl=34112.

구원 받고도 성령을 따로 받아야 하나요?


[질문]


어떤 목사님 설교에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제가 알고 있기로는 사람이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받는 동시에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속에 들어오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고전 3:16절)

그런데 그 목사님은 행 1:8의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 이 말씀과 또 몇 군데 말씀으로 구원을 받았더라도 성령을 받지 못하면 신앙이 미지근하다고 합니다. 성령 받아야 역사가 일어난다고 하는데 올바른 말씀이신지요?


[답변]

구원을 받았어도 성령을 따로 받아야 한다는 주제에 대해선 오래 전부터 많은 논쟁이 있어 왔습니다. 솔직히 성경적으로 따져볼만한 것은 다 따졌기에 따로 더 보탤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지금도 인터넷을 조금만 탐색해 보면 따로 받아야 한다와 받을 이유가 없다는 양쪽의 입장을 쉽게 알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감스럽게도 그 대부분의 논거가 성경의 부분적 기술에만 치중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성경에 일관되게 드러난 구원과 성령의 전체 맥락에서 따져보는 면이 부족한 반면에 몇몇 구절에 치중하여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만 해석하려 듭니다. 심지어 자신의 주장을 강화 변증할 목적으로 그에 적합한 말씀만 동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성령의 외적 은사, 그 중에서도 방언의 유익을 강조하려다 그 은사를 받지 않았으면 아직 구원 받지 못한 것이라고까지 말하는 극단도 등장합니다. 그들은 대게 방언을 설명하거나 방언을 받은 모습에 관한 구절들만 내세워 변증 도구로 사용합니다. 방언은 어디까지나 성령의 외적 은사 중의 하나일 뿐인데도 성령에 관한 근본원리부터 따지지 않습니다.

구원 후에 성령을 따로 받아야 하는지를 묻는 이 주제도 그런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구원과 성령에 대해 성경이 일관되게 말하는 원리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 지금껏 간과했던 측면도 일부 있는 것 같습니다.

성령 받지 않고는 구원 받지 못한다.

“구원 받았더라도 성령을 받지 못하면 신앙이 미지근하다”는 말은 “구원 받았더라도 성령 받지 못한 자가 있다”는 뜻입니다. 역으로 따지면 성령 받지 않아도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명제가 성립합니다. 신앙 논쟁을 해결하는 기준은 당연히 성경이며, 그 중에서도 예수님이 그 주제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는지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할 것입니다.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어떻게 답변했습니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3:5-7) 한마디로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할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을 보면 더 확실해집니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7-13)

진리의 영인 성령이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리라고 합니다. 특별히 죄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당신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단을 심판했고 또 승천하심으로 하나님의 인류 구원에 대한 계획이 완성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독생자에게 드러난 하나님의 의를 믿는 자는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데, 그 은혜를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성령이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으로 거듭난 결과를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설명해 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6-18)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질문자님 말씀대로 “예수를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해 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처럼 아무리 하나님을 알고 믿어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와 공로를 믿지 않으면 심판을 받습니다. 요컨대 성령의 가장 근본적 역할은 예수를 자신의 개인적 구세주로 영접케 하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1-3)  

성령이 언제 내주하는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구원 받을 수 없음은 절대적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구원 받아도 성령을 따로 받아야 한다는 말이 성립되려면 두 가지 가능성 밖에 없습니다. 첫째는 성령이 역사하여 거듭나게만 해놓고는 일시적으로 떠났다가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둘째는 구원 받게 하는 성령이 따로 있고 또 신앙이 뜨거워지게 만드는 성령이 따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두 성령이 있을 수는 절대 없습니다. 결국 한 성령이 처음에는 구원만 준 후에 떠났다가 뜨거운 신앙을 주기 위해 다시 와야 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깊이 따져 볼 것도 없습니다. 성령이 신약시대에도 구약시대처럼 특정인에게 특정시점에만 제한적으로  역사한다는 뜻과 같아집니다. 이는 성경 전체가 말하는 바와 다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말하는 바와 완전히 상충됩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6-18) 성령이 영원토록 너희와 거한다고 했습니다. 수시로 들락날락하지 않고 내주(內住-indwelling)한다는 것입니다.

보혜사라고 번역된 헬라 원어 파라클레토스는 바로 곁에서 위로하는 자(comforter)라는 뜻입니다. 성령은 신자의 바로 곁에서, 즉 항상 함께 하셔서 환난 가운데 위로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며 영생에 대한 소망을 키우게 하며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성령은 구원 받은 보증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주는 진리의 영입니다.    
    
성령이 내주할 것이라는 이 약속 전후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주목해 보십시오. 신자더러 당신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 것도 할 수 있을 테니까 당신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했습니다.(12-14절) 그리고선 성령이 와서 신자에게 내주한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럼 성령 내주의 목적은 당신 이름으로 구하게 해서 당신의 일을 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어서 성령이 오면 세상은 예수를 보지 못하나 성령 받은 자는 보고 또 예수님이 살았듯이 신자도 살게 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신자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신자 안에 있게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19-20절) 말하자면 성령이 하나님과 예수님과 신자를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성령이 내주하는 신자는 당연히 그분의 일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당신을 사랑하는 자이며 당신도 그를 사랑해 그에게 당신을 나타내실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21절)

한 마디로 신자가 하나님의 위로 받고 그분의 성품에 참여하며 나아가 그분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이 내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성령이 대체 언제 내주해야만 합니까? 두말 할 것 없이 구원 받자마자 아닙니까? 구원 받음과 성령 내주 사이에 시차가 있다면 그 동안에는 이런 일들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 되어버리지 않습니까? 또 성령이 중간에 떠날 수 있거나 수시로 들락거릴 수 있다는 주장도 똑 같은 하자를 내포하지 않습니까?  논리적으로 말도 안 될뿐더러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도 전혀 아닙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대면하자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야가 바로 그분임을 확신하고 자신의 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는 열두 제자와 달리 주님의 사역을 곁에서 지켜보거나 가르침을 직접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로선 주님이 당신의 원수였던 자기마저 구원해주셨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았지만 그 이유와 자신에 대한 그분의 구체적인 계획까지는 몰랐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놀랍게도 그는 다메섹 도상의 회심 사건 이후로 바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이전의 자기 같은 유대인들을 굴복시키기도 했습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행9:17-22)

분명히 바울에게 성령으로 충만케 하신다고 했습니다. 비록 제자들과 며칠 교제하면서 예수님에 대해 궁금한 것을 많이 물어보고 또 제자들도 나서서 그분의 가르침과 십자가 사건의 전말을 알게 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영이 내주하여 그로 진정과 열심으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역사하지 않았다면 며칠 새에 열렬한 전도자로 곧바로 변신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에게 구원과 성령 내주의 시점 사이에 간격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이런 체험에 입각하여 고린도 교인을 향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라고 힐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단순히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그분이 보내신 독생자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성삼위 하나님을 성경대로 올바르게 믿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당연히 성경 말씀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6,17) 성령의 감동으로 저작된 성경을 바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성령의 조명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시공간상으로 너무나 떨어져 있는 신약 성도들이 구원을 받고도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천주교처럼 사도의 해석에만 의존토록 하나님이 방치하신다는 것은 도저히 말이 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령이 간섭하여 구원을 얻은 모든 성도에게는 곧바로 성령이 내주케 됩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며 그분의 일을 해야 하고 또 때로는 성령이 우리를 대신해 탄식하며 기도하신다면 당연히 구원과 동시에 성령이 내주해야만 하지 않습니까?

성령을 받으라.

그런데도 문제는 구원 받은 자도 성령을 따로 받는 것 같고, 특별히 제자들의 경우는 명시적으로 두 번이나 받았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어 논란이 그치지 않습니다. 이는 구원의 예정과 구원의 실현을 혼동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나아가 성령의 내주와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구분하지 못한 것입니다. 가장 논란이 될 수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경우를 따져 보기로 합시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20:19-23)

분명히 부활하신 예수님이 마각의 다락방에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했으니 제자들은 이 때 성령을 받은 것으로 해석함이 타당합니다. 그러나 승천하시기 직전에 다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권능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모여서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는데 홀연히 아주 강력한 모습으로 모두에게 임하며 그들이 방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6-8)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1-4)

언뜻 보면 예수님이 제자로 선택하여 함께 동행 했기에 이미 구원을 받았는데 다시 성령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또 심지어 성령을 받았음에도 다시 방언의 은사를 주는 성령을 더 받아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예정하고 선택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요6:65)고 말씀하셨습니다. 안디옥에서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행13:48) 믿었습니다. 바울도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엡1:4,5) 하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신자나 바울에게 예정되었던 구원은 성령으로 거듭나면서 비로소 유효해졌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택해 삼년간 동행하고 있을 때는 구원이 예정 된 것이지 아직 그 효력이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가룟 유다는 구원을 받았다가 취소가 된 셈입니다.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 때에 이미 몸을 씻은 자는 다시 씻을 필요 없다고 하면서 제자들의 발만 씻겨 주시면서 이중에 하나는 아니라고 확실하게 언급하셨습니다. 유다는 제자로 선택하긴 했지만 구원으로 예정된 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모세가 도대체 자기 같은 자가 무슨 수로 애굽에 종살이 하는 동족을 구원해 낼 수 있겠는가 물었더니 하나님은 엉뚱한 대답을 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3:11,12)  

논리적으로 따지면 네가 열 가지 재앙을 일으키고 마지막으로는 애굽의 장자가 죽고 홍해가 갈라질 것이라고 답해야 맞습니다. 그런 말씀은 전혀 하지 않고 단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당신의 증거, 즉 답이라고 합니다. 홍해를 건너 광야를 거치고 시내 산에 도달해 제사를 지낼 것이라는 약속만큼 확실한 보장은 없습니다. 출애굽은 아예 생각도 하지 말고 완전히 구원 받은 후 이 산에서 어떻게 제사지낼지나 염려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구원자로 세웠으면 출애굽은 이미 이뤄진 것입니다. 남은 것은 시기와 방법뿐입니다. 그분에게만은 인간과 달리 약속이 바로 보증 자체이며 따로 징표가 필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열한 제자를 택했으면 구원은 이미 이뤄진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만찬 때 아직 유다가 남아 있었듯이 구원의 실현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내쉬는 숨, 즉 성령을 받고는 더 이상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정되었던 구원이 비로소 효력을 발휘한 것입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무슨 일을 감당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몰라도 백이십 명 모두가 오직 예수를 위해 살고 죽으려 결심하여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고 반드시 실현 될 그분의 또 다른 약속을 기다린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들이 성령 받은 것은 작정 되었던 구원이 실현되었다는 증거이자, 또 앞으로 자기들을 통해 반드시 실현되고야 말 그분의 소명에 대한 보장이었습니다. 제자들이 구원 받은 후에 성령을 따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재삼재사 강조하지만 예정되어 있던 구원이 성령을 받아 확정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신자도 예수님 말씀대로 진리의 영이 와야만 당신을 믿게 되고 당신 계명대로 살며 당신의 일에 쓰임 받게 됩니다. 말하자면 거듭난 신자는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영생하게 된다는 약속이 반드시 실현된다는 보증으로 구원 때에 성령을 받으며 그 이후로 떠나지 않고 영원토록 내주하십니다.        

성령이 임하면

그럼 왜 예수님이 이미 부어주신 성령 위에 다시 “성령이 임하면”이라고 말했습니까? 이 문제는 초대 교회의 특수 상황에 비추어 해석해야만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 직전에 니고데모나 빌립보 간수처럼 “어찌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기에 자신들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선 아무 염려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대신에 그들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어느 때이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제 동족의 구원이 안타깝게 여겨졌고 절실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한 것처럼 질문에 대해선 침묵하고 엉뚱한 말씀으로 대체했습니다. 우선 때는 너희가 알 바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어김없이 실현될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부터 약속하신 이스라엘의 회복은 염려하지 말고 너희더러 지키라고 한 계명부터 철저히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는 기독교가 태동되기 직전이었습니다. 죄와 사단과 사망의 노예가 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져야 했습니다. 승천 직전에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마지막 계명을 주셨습니다. 당신의 생전에 그 일을 직접 하시지 않고 죽으신 이후 제자들에게 위탁하셨던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목적 자체가 십자가에 죽기 위한 것이므로 공사역 중에 이룰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에 당신께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성령을 받으면 온전히 하나가 되어 당신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보다 초자연적 능력을 더 크게 베푼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해 영혼을 구하는 일을 당신보다 더 많이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당신께서 생전에 가르쳤던 제자보다 베드로가 오순절 한 번 설교에 회심시킨 3천명이 수십 배나 많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예수님은 오순절에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를 세울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 땅에 교회를, 가시적 조직체 이전에 성도들이 함께 힘을 합해 복음을 전할 모임이라는 의미에서, 창립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구성원 모두가 온전한 하나로 되게 하여 전도 사역을 담대하게 담당할 수 있게 만드는 특별한 조처가 필요했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성령을 받았어도 개인적으로 구원 받았다는 사실만 인식했습니다. 분명 예수님을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세주로 영접했고 그분을 위해 여생을 살겠다는 다짐은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 전파 사역에서 성령이 하시는 역사에 대해선 전혀 무지했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아직 성령의 강력한 임재 체험을 하지 못했기에 담대해지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신자는 되었지만 사역자로선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이전에 성령을 받은 자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주위에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나 참고할 신약 성경이 있었던 오늘 날의 신자와는 경우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반드시 성령의 강력한 외적 은사를 최초로 체험했어야 했고 또 성령이 어떻게 외부에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체험과 역사를 성경기록으로 남겨 후대 신자들에게 전해주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마침 오순절 날 천하 각국에서 성전 제사를 드리기 위해 모인 수많은 순례자들 앞에 당신의 큰 능력을 보이기로 했습니다. 아니 능력보다는 십자가 진리를 제대로 전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외국어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던 제자들로 각 나라 언어의 방언으로 복음을 전하게 했던 것입니다. 구약 선지자 요엘의 예언이 그대로 이뤄지는 모습을 유대인들에게 보여줘 예수님이 바로 구약에서 말한 메시아임을 더욱 확증 시켰던 것입니다.

요컨대 오순절에 성령이 임한 것은 각자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최초의 교회를 창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모든 성도들 위에 즉, 교회라는 공동체 위에  가시적 모습으로 임재한 것으로 역사상 한 번 있는 아주 특수한 경우였습니다. 한 교회 위에 성령이 강력히 임재하여 모든 성도가 방언을 하고 또 그 모두가 복음 전파 사역에 헌신하게 된 예는 전무후무하지 않습니까? 이 말씀으로 이미 성령으로 거듭나 구원 받은 자가 다시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는 결코 될 수 없습니다.  

방언을 해야 구원 받았는가?

구원 얻었는데도 성령을 따로 받아야 하는지의 문제를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예수 믿은 신자에게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성령이 일시적으로 내주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경을 통해 복음의 진리를 더 깊이 깨닫지도 못하며 기도나 묵상이나 말씀을 통해 들려오는 하나님 음성을 정확히 분별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세상 쾌락과 죄악과 사단의 유혹 및 방해를 제대로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요컨대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를 그렇게 방치하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 상태는 예수 믿기 전에 어둠 속에 있었던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기독교 구원이 살아 있을 때부터 확신을 갖게 하는 이유는 예수님 약속대로 당신보다 더 큰 일을 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성령의 내주 없이 어찌 그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무엇보다 예수님이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보혜사가 함께 해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지 않습니까?

구원 받아도 성령을, 특별히 방언 같은 은사를 따로 받아야 한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틀린 말입니다. “성령의 신령한 은사”는 바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것”입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함, 영들 분별함, 각종 방언 말함, 방언을 통역함 등의 은사는 신자를 유익하게 하고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한 성령이 하시는 일로 당신의 뜻에 따라 사람마다 다르게 나눠주십니다. 대개의 신자들이 이 중에 하나 정도의 은사는 받습니다. 물론 하나도 해당되지 않는 신자도 많지만 구원 받지 못했거나 성령이 내주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2:29-13:2,13)

성경은 분명 외적 은사 외에 크고 더 좋은 은사로 믿음, 소망, 사랑이 있는데 그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라고 선언합니다. 예수를 믿어 그분의 사랑을 주위에 전하며 천국에서 그분의 영광을 바라볼 것을 소망하는 신자에게는 성령이 내주한 정도가 아니라 성령의 가장 좋은 은사를 소유한 했다는 뜻입니다. 방언 같은 외적 은사를 받는 것이 신자에게 더 유익한 것은 사실이나 그런 은사를 받지 못했다고 구원 받지 않은 것은 전혀 아닙니다.  

바꿔 말해 흔히 행해지는 설교나 논쟁에서 핵심 주제와 사용된 용어들의 뜻이 애매한, 심지어 당사자마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로든 목사님의 설교에도 그런 모호함이, 그분의 복음에 대한 열정이나 순수함을 의심하는 것은 결코 아님, 여실히 나타납니다.

우선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나, “성령을 받지 못하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표현은 마치 “공부를 못하는 자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교인들이 이런 너무나 ABC 같은 말씀을 듣고도 아멘만 연발합니다. 아무리 한국인들이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이라 해도 말씀을 깊이 갈등 묵상하는 일에서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대신에 그분 말씀대로 구원을 받았더라도 신앙이 미지근한 자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받았더라도 성령이 강력히 역사하지 않으면 신앙이 미지근해진다”라고 표현해야 맞습니다. 신앙이 더 뜨거워지기 위해서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해야지 성령을 다시 받으라고 하면서 은근슬쩍 구원과 연결시키는 것은 잘못입니다. 차라리 아예 “성령 받지 않고도 구원은 일어난다.”라고 속내를 직설적으로 드러내어야 합니다. 그 말이 옳다는 뜻이 아니라 신자더러 당혹하지 않고 쉽게 판단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령과 구원에 관해 용어를 통일되게 정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해 되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용어는 행1:5의 성령 세례입니다. 우리말은 항상 한자의 의미와 중첩되고 교회 관행과도 연결되어 해석되므로 성령 세례라고 하면 성령이 인간에게 회개를 하게 만드는 최초의 강림으로만 이해합니다. 그러나 헬라 원어는 완전히 물에 잠기게 만든다는 ‘뱁티조마’, 우리말로 세례 혹은 침례라고 번역된 모든 말에, 하나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성령세례는 오히려 성령의 더 강력한 임재, 흔히 말하는 성령 충만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구원이 실현되는 것은 반드시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또 거듭난 자에게는 성령이 내주하여 떠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처음 성령으로 중생할 때에는 “성령 세례를 받는다는” 용어보다는 오히려 성령이 ‘임재’(강림하여 내재한다는 의미로)한다는 표현이 나을 듯합니다.(이는 순전히 제 개인적 의견입니다.) 나아가 앞에서 언급한대로 성령의 임재와 관련해선 반드시 구원의 예정과 구원의 실현에 대해 구분해서 설교하고 가르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이 유익하다든지, 소원하여 기도하면 받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은 괜찮지만 성령 은사를 받지 않았기에 구원 받지 못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가 구원 유효성이나 신앙 우월성의 증명이 결코 아닙니다. 반면에 이제는 성경 말씀이 있으니 그런 은사가 실효되고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극단도 성경의 진술과는 반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진정으로 구원이 유효해졌다면 이미 성령으로 거듭났고 내주하고 있으므로 따로 성령을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또 신자라면 더 뜨거운 믿음을 갖기 위해 성령의 더 강력한 역사는 당연히 소원해야 합니다.

10/13/2008

출처: 박신 목사 홈피

남재준 전 국정원장이 애국 국민들에게 보내는 메세지!


사랑하는 애국동지 여러분!

지금 우리 조국의 현실은 우리 조부모 및 부모세대가 피와 땀을 흘려 건설한 자랑스러운 자유 대한민국이 해체될 참담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번 대선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지키고 독립적인 주권국가로서의 삶을 영위할 것인가? 아니면 핵무기를 가진 북한의 인질로서 비굴하게 살다가 종국에는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전락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국운을 가름할 전쟁입니다.


이제 사랑하는 우리 조국 대한민국과 우리 후손들의 밝은 미래를 위하여, 위기에 처한 우리의 조국을 구하기 위해 사사로운 개인의 감정을 접어두고 우리 모두의 힘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제가 홍준표 후보를 지지하고 대선후보를 사퇴한 것은, 홍준표 후보를 중심으로 애국보수세력이 단결해야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고, 통일된 위대한 대한민국을 건설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길만이 우리 조국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자 마지막 기회임을 확신 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애국동지 여러분!

모두 힘을 모아서 홍준표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대한민국과 이땅의 자유 민주주의를 굳건히 하여 희망찬 새역사를 이루어 갈 것을 간곡히 호소드립니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2017. 5.2 남재준 전 국정원장




빅데이터가 말하는 홍준표, 9회말 투아웃의 역전극?
바른정당 12인 탈당 지지선언.. 우익의 담대한 걸음 꿈을 현실로 만들 것


역사상 지진이 일어나기 전 동물들이 이동 한다거나 이상 징후를 보인 일은 곧잘 있었다. 그때마다 과학적인 근거가 부족하다는 이유 때문에 동물의 이상행동을 보고 지진을 예측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지만, 우연치고는 묘하게 맞아 떨어진 사례가 많다.


바른정당 소속 13인의 의원들이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집단 탈당하는 모습에서 일종의 이상 징후가 느껴진다. 엄청난 지각 변동이 일어나기 직전에 미리 대비하는 동물들의 예민하고 민첩한 감각이다. 더욱이 이들은 적자생존의 법칙이 작용하는 대한민국 정치 환경에 최적화된 인물들 아닌가.


참고로 생물학에서 적자생존이라는 말은 우수한 생물이 생존한다는 말이 아니라 환경에 잘 적응해 번식을 잘하는 생물이 살아남는다는 뜻이다. 가령 인간보다는 바퀴벌레 따위가 적자생존에 적합하다.


재산을 다 탕진하기도 전에 13인의 탕아가 돌아온 이유를 잘 설명해주는 것이 구글 트렌드다.

여론을 조작하다 철퇴를 맞기도 하는 요즘 못 믿을 여론조사 기관들이 남발하는 가짜 여론이 아니라 지금도 꿈틀거리는 생생한 여론의 움직임 말이다.


경남도지사 직에서 자유로워진 뒤 선거운동을 시작하면서 홍준표의 구글 트랜드 빅데이터 지수가 폭증하고 있다. 초반 미미하던 것과 비교하면 말 그대로 폭증이란 표현이 어울린다. 특히 최근 이틀간은 문재인 후보와 거의 양강 구도의 흐름을 보였다.


4월 말 경에서 5월2일까지의 흐름은 홍준표와 유승민을 묶어야 거의 문재인과 견줄만한 수치였는데 시간이 갈수록 양자 대결이 뚜렷해지고 있는 것이다. 지역별 흐름에서도 전통적 지지 기반인 영남에서 홍준표의 빅데이터 지수는 문 후보를 따라잡고 있다. 전통적 지지세를 회복해가고 있는 것이다.


최근 이틀간으로 한정해 보면, 문재인 대 홍준표의 이런 흐름은 명확히 눈에 보일 정도다.


▲ 우익은 '홍찍문(홍준표를 찍으면 문재인이 된다)'의 공포에 시달릴 이유가 없다. 홍준표의 담대한 걸음과 나라를 걱정하는 우익의 집결이 '홍찍홍' '홍찍자'를 현실로 만들고 있다./사진=한국당 제공


꿈은 이루어진다.


이건 홍준표가 일부 여론조사에서 몇 주 만에 20% 가까이 지지율이 급등하는 것으로도 나타나는, 시중 엉터리 여론조사마저도 감출 수 없는 큰 흐름이다. 바른정당에서 13인 외에도 앞으로 추가 탈당자들이 나올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는 것도 이런 여론 흐름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동안 우익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사태와 그에서 비롯된 온갖 후유증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태극기 세력 내 자중지란의 모습까지 겹쳐지면서 조기 대선에 들어서서도 방황하고 혼란스러워만 했다.


홍준표가 속칭 사이다 발언으로 흩어진 집토끼들을 불러들이며 보수결집의 단단한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이번 대선에서 홍준표의 등장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대통령 탄핵 사태라는 초유의 사건이 있었고, 반기문 황교안 등의 예상됐던 후보들의 예상치 못한 불출마 선언이 잇달아 벌어지면서 갑작스럽게 등판한 인물이 홍준표다. 우익의 대선후보를 홍준표가 꿰차리라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그가 허리케인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자당에 침을 뱉고 떠난 배신자들이 다시 돌아올 정도로 우익의 희망이 되고 있다. 배신자의 행위는 도저히 봐줄 수 없는 역겨운 것이나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었던 탕아의 어리석음을 용서하는 것도 우리의 몫일 것이다.


어리석은 행위는 용서하되 잊지는 말아야 한다. 대선 후 돌아온 그들이 가슴에 뼈저린 반성문을 쓸 수 있도록 여운을 남겨야 한다. 홍준표가 이들을 받아들이고 단합을 외친 것은 보수를 불태우고 궤멸시켜야 한다는 좌익의 공포정치로부터 국민을 구하는 것이 우선순위라는 점을 알기 때문이다.


기세가 올랐을 때 그 흐름을 타야 한다. 홍준표는 지금 크게 선 파도에 올라탔다. 바른정당의 탈당파들 논란을 가지고 시간을 허비할 틈이 없다. 혹자들은 유승민이 가져갈 표를 생각해 단일화에 아직도 연연해하고 있다.


부질없는 짓이다. 미국 대선 결과를 맞춘 구글 빅데이터 지수는 그 짓이 오히려 쓸데없는 소모적 행동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익은 '홍찍문(홍준표를 찍으면 문재인이 된다)'의 공포에 시달릴 이유가 없다. 홍준표의 담대한 걸음과 나라를 걱정하는 우익의 집결이 '홍찍홍' '홍찍자'를 현실로 만들고 있다. 꿈은 이루어진다.


- 박한명 미디어펜 논설주간



출처: 미디어펜 (http://www.mediapen.com/news/view/263007)

율법과 복음

홍인규

 


율법은 바울 신학의 중심을 차지한다. 그것은 바울의 신학과 윤리의 여러 주제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주제이다. 그래서 바울의 율법관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바울의 사상을 공부하는 데 절대 필요하다.

 

바울 서신에서 율법은 아주 어려운 문제이다. Schoeps이 말한 것처럼, 그것은 아마도 “바울의 신학에서 가장 복잡한 교리적인 이슈”이다. 그 난해성은 주로 바울의 율법관에서 나타난 외견상의 모순에 기인한다.

 

한편으로, 바울은 율법을 부정적으로 말한다. -때로는 아주 냉혹하게. (1) 칭의는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는다(갈 2:16; 3:11; 롬 3:28). (2) 율법은 약속보다 열등하다(갈 3:15이하). (3) 율법은 범법함을 (생산하기)위해서 주어졌다(갈 3:19). (4) 율법은 죄를 더하기 위해서 주어졌다(롬 5:20; 7:5, 8-13; cf 고전 15:26). (5) 율법은 생명을 공급해 주지 못한다(갈 3:21). (6)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갈 2:19; 롬 7:4). 그리고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갈 3:25; 5:1 롬 7:6). (7)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다(롬 10:4). 등등.

 

다른 한편으로, 바울은 율법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1) 율법은 거룩하고 (롬 7:12), 영적이다(롬 7:14). (2) 율법은 지식과 진리의(구체적) 표현이다(롬 5:20). (3) 계명은 생명을 위한 것이다(롬 7:10; cf 갈 3:12). (4)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율법을 세운다(롬 3:31) (5) 모든 율법은 사랑 안에서 완성된다(갈 5:14; 롬 13:8, 10; cf 갈 6:2; 롬 8:4) 등등.

 

그러므로 지금까지, 특별히 지난 20-30년 동안에, 바울과 율법에 대하여 막대한 양의 글들이 쏟아져 나온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와 같은 엄청난 학자들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의견의 일치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더욱 더 많은 다양한 의견들만 생산되었다. 모든 의견들을 여기서 다 소개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현재까지 제안된 것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것들만 소개하겠다.

 

1. 수많은 학자들은 율법주의적으로 사용된 율법과 하나님의 뜻의 표현으로서의 율법을 구분하거나(Burton, Cranfield, Moule, Ladd), 의식법과 도덕법을 구분하거나 (Haufe, Kaiser, Schreiner), 또는 모세의 토라와 메시야 토라 사이를 구분하여(Davies, Longenecker. Stuhlmacher) 바울의 율법관에서 어떤 일관성을 찾으려고 시도하였다.

 

2. 어떤 학자들은 율법에 대한 바울의 진술에서 불일치(inconsistencies)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 진술들을 발전적인 구도(developmental scheme) 안에서 조화시키려고 시도한다. Drane, Huebner, Wilckens에 의하면, 바울의 사상은 갈라디아서를 쓸 때에 로마서를 쓸 때 사이에 의미있는 변화를 겪었다고 주장한다. 갈라디아서에는 전적으로 부정적인 견해를 취하고 있는 데 반하여, 로마서에는 상당히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므로 전적 부정에서 긍정으로 발전되었다고 이해한다.

 

3. Sanders는 갈라디아에서 로마서로 직선적인 발전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로마서에서의 율법에 대한 바울의 진술에서 내적 긴장과 불일치가 있음을 인식한다. 예를 들면, 롬 1:18-2:29에서 바울은 우주적인 죄를 주장한다. 그러나 2:14-15, 25-29에서는 어떤 자는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고 보고 있다.

 

Raeisaenen은 Sanders보다 더 과격한 입장을 취하여, 바울의 율법 신학에서 모순과 긴장으로 가득차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율법의 계속적인 유효성, 성취 가능성 등.

 

4. Dunn은 Raeisaenen와 Sanders의 견해에 만족치 못하고, 그들이 바울의 저작의 (서신의) 사회적인 문맥과 그 당시의 문맥과 그 당시의 율법의 사회적인 기능의 온전한 의의를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비판한다. Dunn에 의하면, 바울은 율법 그 자체를 비판하지 않고,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구분하는 율법의 사회적인 기능을 공격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선민사상과 우월의식을 공격하고 있다).

 

5. 이상의 모든 주장에 반대해서, Westerholm은 바울에 대한 Luther의 이해를 복원하기를 시도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모세의 율법은 생명을 이해서 “doing"(순종)을 요구한다(갈 3:12; 롬 10:5; 레 18:5).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는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의 길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바울은 인간이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대조시키고 있다.

 

이상의 모든 견해들은 우리에게 완전한 만족을 주지 못한다. 바울과 율법이란 주제는 이해할 만한 해결을 위해서 과학적인 탐구(연구)를 요구하는 문제이다. 바울의 율법관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바울 서신의 각권에 들어 있는 율법에 관한 진술에 대하여 완전하고 철저한 연구를 해야 한다. 그 이유는 바울 서신의 각권은 그것의 독특한 수사학적 그리고 사회학적 상황 안에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의 복잡성 때문에 필자의 연구는 갈라디아서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고, 때때로 로마서와 다른 바울 서신에도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I. ν?μο?에 대한 바울의 이해

율법은 헬라어로 ν?μο?이다. 이 ν?μο?는 갈라디아서에 32번 나온다. (롬 72번). 갈라디아서에서 ν?μο?는 때때로 정관사와 함께 (? ν?μο?, 11번), 다른 때는 정관사 없이 (ν?μο?, 21번) 나타난다.

 

Lightfoot에 의하면, ? ν?μο? 와 ν?μο?는 의미의 차이 없이 서로 바꾸어 사용된다(갈 3:11-12, 23-24; 롬 2:23-27).

 

Blaeser에 의하면. 정관사의 존재와 무는 다음과 같은 언어학적인 규칙에 의하여 설명될 수 있다. 첫째로, ν?μο?가 소유격으로 사용될 때는 정관사가 붙지 않는다.(갈 2:16; 3:2,5,10). 둘째로,, 전치사구에서 ν?μο?는 보통 정관사를 동반치 않는다(갈 2:19, 21; 3:11, 23; 4:4, 5, 21; 5:4, 18). 예를 들면, ?πο ν?μον ?ν ν?νω, 그러므로 ? ν?μο?는 ν?μο?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ν?μο?는 갈라디아서에서 시내산 위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모세의 율법을 압도적으로 가리킨다(3:17; cf. 4:24). 그러나 예외가 있다. (1) 3:21b는 가정적인 진술인데, 거기서 두 번 사용된 ν?μο?는 any divine law를 의미한다(비록 바울은 모세의 율법을 divine law의 최고의 예로 생각했겠지만). (2) 4:21에서 ν?μο?는 창세기에 나오는 하갈의 이야기를 지칭한다.

 

5:23b에 나오는 ν?μο?를 많은 학자들은 예외적인 범주에 포함시킨다(Burton, Guthrie, Moo, Yates). 5:23b를 읽으라.1 그러나 필자는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갈 5:18-23에서 바울은 성령과 모세의 율법과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5:18은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라고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율법 아래”는 모세의 율법의 저주 아래를 의미한다. 5:18의 선언의 기본적인 사상은 5:23b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육체의 일에 반대되는 성령의 열매를 나열한 후에(5:19-23a), 5:23b에서 바울은 κατ? τ?ν τοιο?των ο?κ ??στιν ν?νο?라고 말한다. 이 헬라어의 문장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율법은 이러한 것들(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을 반대하지 않는다”가 된다. 그 이유는 5:14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온 율법은 성령의 주요한 열매인 사랑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cf. 롬 8:4). 그러므로 갈 5:23b의 ν?νο?는 모세의 율법을 가리킨다.

 

또한 Bultman, Gutbrod, Bauer, Fitzmyer, Raeisaenen과 같은 학자들은 갈 6:2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법”을 비유적인 의미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법”은 5:14에서 모세의 율법을 의미하는 “온 율법”과 다르지 않다. 그 이유는 6:2의 “서로 다른 짐을 지라”는 5:14의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명령의 구체적인 표현 그 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세의 율법은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의 complete unit 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바울이 ν?νο?를 항상 단수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바울은 의식법, 시민법, 또는 윤리적인 법 사이의 구분을 하지 않는다. 갈 5:3에서 바울은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라고 말한다. 여기서 “율법 전체”는 5:14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랑 가운데서 완성이 되는 “온 율법”과 동일하게 모세의 율법을 가리킨다. 이것은 바울이 모세의 율법 전체를 하나로 보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모세의 율법을 바울은 세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다. 그것들은 시내산 언약의 의무, 예속시키는 능력(세력), 그리고 사랑의 표현이다.

 


 

II. 시내산 언약의 의무로서의 율법

1. 율법은 구원(입회)의 조건이 아니다.

갈라디아 지방에서 활동한 바울의 대적자들의 주 issue는 누가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냐는 것이다. 그들은 이방 갈라디아인들을 아브라함의 언약의 국외자(outside)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그 대적자들은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는 믿음 외에 할례와 율법을 받아 들여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분명히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반대한 것은 아니다(믿음을 수단으로 한 구원과 행위를 수단으로 한 구원과를 대조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할례와 율법을 이방인의 경우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추가적인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울이 볼 때 이러한 주장은 심각한 신학적인 문제를 갖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새 언약의 시대에는 누구든지 믿음 하나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그것은 즉 믿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필요 충분 조건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믿음에다 할례와 율법을 더 요구하는 것은 믿음을 불 충분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무효화하고 하나님의 절대 은혜를 폐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 이유 때문에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자기의 율법관을 제시하고 있다.

 

율법은 구속사에서 여러 기능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에 관한 한, 율법은 결코 구원의 수단으로 의도된 적이 없다. 바울은 갈 3:6 이하에서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칭의는 오직 믿음만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예를 드는 것은 지극히 권위가 있다. 왜냐면 그는 하나님의 백성의 조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칭의 경험은 그의 모든 자녀들의 모범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바울은 갈 3:6에서 창 15:을 인용하고 있다.2

 

대적자들은 율법의 선재(pre-existence)를 전제하여 그 아브라함의 믿음을 율법에 대한 순종으로 해석한다. 시련의 때에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으로 표현되는 데, 이것은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시험 때에 가장 극적으로 증명되었다. 이렇게 대적자들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공적 성취(meritorious achievement)로 이해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의(righteousness)의 실제 행위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창 15:6을 완전히 반대로 이해하고 있다.“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라는 말은 창 15:5의 약속을 하나님이 지키리라고 확신했다는 뜻이다.3 이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전적 수용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적절한 인간의 반응이다. 그것은 어떠한 선행과도 반대되는 개념이다. 사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율법과 전혀 상관이 없다. 왜냐면 율법은 430년 이후에 주어졌기 때문이다(갈 3:17)4.-여기서 율법 선재 개념은 부인되고 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롬 4장에서 더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믿음은 행위와 반대 개념이다(롬 4:2-4).5 그것은 “경건치 않은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롬 4:5),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롬 4:5, 17) 하나님께 대한 신뢰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도저히 이루어지기 힘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이다(롬 4:18-21).6 이러한 과격한 믿음에 근거하여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

 

위와 같은 아브라함의 예에서 바울은 3:7에서7 믿음의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테제를 도출해 내고 있다. 이것은 아브라함처럼 믿는 자들은 그의 참 자손이다는 것과 믿음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윈리는 새 시대에 이방인에게도 적용된다. 왜냐면 갈 3:88-여기서 아브라함의 축복이 칭의로 해석되고 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공유한 자들은 누구든지(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분없이) 아브라함과 함께, 즉 아브라함과 동일한 방법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 이것은 구속사의 초두부터 믿음만이 하나님의 정하신 칭의의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Howard는 갈 3:7(또한 갈 3:9)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라는 구절에서 믿음이란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행위라고 주장한다. 또한 Hays는 갈 3:7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란 구가 3:11에 인용되어 있는 메시야적인 구절인 합 2:4에 대한 암시적인 언급이라고 전제하면서 그 믿음이 메시야의 신실성이라는 의견을 개진한다. 이와 같은 의견들은 바울의 논쟁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것들이다. 여기서 여러 가지 반대 주장을 제시할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3:7의 첫 단어인 ??ρα를 주목하는 것이다. 이 헬라어 단어는 추론적인 불변화사인데, 그것은 3:7이 3:6에서 추론된 statement라는 것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3:7의 믿음이란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의 행위가 아닌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은 인간의 행위이다고 결론 지을 수 있다. 그러므로 Howard나 Hays의 의견은 잘못된 것이다.

 

아무튼 아브라함과 똑같은 성격의 믿음으로써 갈라디아 사람들은 성령을 받았다(3:1-5).9 여기서 그들이 성령을 받은 방법은 ?εκ ?αλο?? π?στεω?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헬라어는 많은 해설가들을 당황케하고 있다. 그 이유는 ?ακο?나 π?στι?나 모두 두 가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ακο?는 능동적인 의미로는 듣는 행위, 또는 수동적인 의미로는 들어지는 것(즉 메시지 또는 보고)을 가리킨다. 한편 π?στι?는 능동적인 의미로는 믿는 행위 또는 수동적인 의미로는 믿어지는 것(즉 기독교 메시지)를 가리킨다. 그러나 가까운 문맥이 그 헬라어 구의 정확한 의미를 결정한다.

 

먼저 우리가 주목할 것은 갈 3:2, 5에서 ?ακο? π?στεω?가 ??ργα ν?μου와 대조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ργα는 율법을 준수하는 인간의 행위를 가리킨다. 이것은 ??ργα와 평행 관계를 이루고 있는 ?ακο?가 똑같이 인간의 행위(즉 듣는 행위)를 가리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ακο? π?στεω?라는 구에서 π?στι?는 무슨 의미로 사용되었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갈 3:6의 초두에 나타난 부사 καθ??에 특별한 관심을 모아야 한다. Louw와 Lida에 의하면, 이 부사는 사건과 상태에 유사점을 나타내는 표시물이다. 그렇다면,, 갈라디아인들의 성령 받음과 아브라함의 칭의 경험은 같은 성격의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 : 갈라디아 사람들은 ?εκ ?αλο?? π?στεω?로 성령을 받았다. 이 평행적 관계는 ?κο? π?στεω?라는 구에서 π?στι?가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은 인간의 행위를 가리킨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

 

그러므로 ?κο?와 π?στι?를 모두 능동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ακο?는 듣는 것을 의미하고 π?στι?는 믿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듣고 믿음을 수단으로 하여 갈라디아 사람들은 성령을 받았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입은 것처럼, 갈라디아인들의 경험은 율법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경험이다. 왜냐면 갈라디아인들이 바울에 의해서 선포된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최초로 반응을 보일 때, 그들은 모세의 율법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인들의 성령 받음은 그들이 갈 4:6의10 말씀처럼 아들의 영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는 사실의 증거이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갈라디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을 의롭다하고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케 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과 성령을 받은 것은 동일한 사건이다. 사도행전에 근거해서, 구원받고 그 후에 성령을 받는다는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갈 3:8에서 인용된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는 창 12:3의 우주적인 약속이 성령을 받음으로 성취되었음을 본다. 이와 관련하여 갈 3:14하반절에서 이방인이 아브라함의 복의 복의 참여하는 것이 성령의 약속(=약속된 성령, 이미 성령의 약속이 성취되었기 때문)을 받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나타나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평행 관계 역시 이방인이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하리라는 약속이 약속된 성령의 수여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약속의 성취는 갈 3:6에 함축되어 있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무수하리라는 약속의 성취로 자연스럽게 성취된다. 만약 이방인(유대인을 제외한 모든 민족들)들이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하여 그의 자녀들이 되었다면,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수많으리라는 약속이 성취된 것이 아닌가?

 

이리하여 우리는 성령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앞에서 언급한 두 약속의 성취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달리 표현하면, 아브라함의 약속들은 성령의 약속이다.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건의 빛아래서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재해석한 것이다.

 

갈 3:14에서11 성령과 관련되어 ?επαγγελ?α(약속)라는 단어가 처음으로(물론 갈라디아에서) 사용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 단어는 다음에 따라오는 pericope들에서 자주 나타나면서 중심주제가 된다. (3:16, 17, 18, 19, 21, 22, 29). 이것은 3:14에서 언급된 약속과 3:16-29에서12 취급된 약속 사이에 가까운 관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3:16에서 언급된 약속들은 땅에 대한 약속들임이 분명한 것 같다. 그 이유는 3:16의 κα? τ? σπ?σματ? σου(네 자손이라)라는 구가 땅에 대한 약속들과 관련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창 <LXX> 13:15; 17:8; cf. 12:7; 15:7; 24:7). 3:16이하에서도 다른 약속들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이 땅에 대한 약속이 계속 바울의 염두에 있는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그 땅은 원래 가나안 땅을 가리켰다. 바울이 볼 때, 그것은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세계를 의미한다. 롬 4:13을 보라.13 이 땅에 대한 약속은 3:6, 8에서 언급된 다른 두 약속과 날카롭게 구분되어서는 안된다. 왜냐면 세계를 소유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가족 안에 수많은(3:6)14 이방인들(3:8)이15 포함됨으로써 실현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땅에 대한 약속 또한 성령의 선물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리하여 성령의 오심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모든 약속들의 성취이다.

 

만약 이방 갈라디아인들이 믿음으로 성령을 받고 그럼으로써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모든 약속들에 참여하였다면, 그 구원의 약속들을 유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율법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믿음에만 근거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근본적인 관점에서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약속들을 상속하기 위해서 할례와 율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선동자들의 주장을 반박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오직 믿음만이 아브라함의 합법적인 자손이 되고 그의 약속들에 참여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의도한 구원의 수단이다. 믿음은 율법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코자 하는 하나님의 첫 시도가 끝난 후 두 번째로 주어진 길이 아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결코 의도된 적이 없었다.(CF. 루터교파와 세대주의자들은 구약과 신약을 대조시킨다. 아담-아브라함-모세-새언약).

 


 

2. 율법은 시내산 언약 안에 계속 머무르기 위한 조건이다.

갈 3:10-13은16 이방인이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하리라는 약속을 담고 있는 3:8과17 그 약속이 성령의 선물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3:14과의18 사이를 연결해 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 다른 말로 말하면, 3:10-13은 어떻게 아브라함의 복(즉 이신칭의)이 이방인에게 이르렀는지에 대하여 설명해 주고 있자. 그럼으로써 3:10-13은, 특별히 3:10과 13은 바울의 율법 신학의 새로운 차원을 계시해 주고 있다.

 

갈 3:10은 율법의 저주에 대한 문제를 소개하고 있다(3:10을 보라).(우리는 이미 이 절을 다루었지만, 여기서는 약간 다른 관점에서 조명해 보고자 한다). 3:10의 ??ργα ν?μου(우리 말 성경에는 “율법의 행위”로 번역되어 있음)는 전통적으로 율법의 요구에 순응한 행위로 이해되었다.(Moo; Raeisaenen; Fung; Westerholm). 이러한 전통적인 견해에 반대하여 최근에 여러 의견들이 개진되었다. Burton, Bring, 그리고 Cosgrove는 ??ργα ν?μου가 율법의 유대적인 오해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ργα ν?μου가 항상 칭의의 조건인 믿음과 대조되어 나타나는 것을 보고, 그 표현을 하나님의 호의를 얻기 위한 율법주의적인 율법준수로 해석한다. Fuller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ργα ν?μου는 선행을 근거로 해서 축복을 내려 달라고 하나님을 매수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에 의하면 ??ργα ν?μου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다(.cf. Bultmann에 의하면, 인간은 피조물로써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포기하고, 자기 행위로써 구원에 이르려는 시도는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다. 이 말 자체는 옳다). 그러나 바울은 3:13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러한 율법주의적인 율법의 오해로부터의 구속이라고 보지 않는다. 또한 갈 2:16, 21; 3:11; 5:4에서 ??ργα ν?μου가 율법과 맞바꿔 쓰여 있다는 사실은 바울이 ??ργα ν?μου를 시내산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의무의 총계로서의 율법과 구별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더 나아가서, 롬 3-4에서 τ? ??ργα το? ν?μου와 평행관계에 서 있는 ??ργον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중립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 자신은 ??ργα ν?μου를 율법주의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하다.

 

Dunn은 갈 2:1이하, 11이하; 4:10; 5:2이하; 6:12-13에서 제기된 특별한 이슈들을 주목하면서 ??ργα ν?μου를 일반적인 선행으로 이해하지 않고 할례, 음식법, 그리고 특별한 축제일과 같은 율법의 특정한 준수로 이해한다. Dunn에 의하면, 이러한 특정한 율법 준수는 이방인과 구별된 유대 공동체의 독특성을 드러내 주는 “Jewish identity makers"로서의 역할을 한다.(cf. Tyson, Heligenthal, Lambrecht, Hamerton-Kelly). 그러나 앞에서 본 것처럼 우리는 바울의 대적자들이 율법의 의식적인 조항들만 주창한 것이 아니라 전율법의 순종을 요구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ργα ν?μου가 교체되어서 사용된 것은 ??ργα ν?μου가 단순히 율법의 특수한 준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시사한다. 게다가 롬 3-4에서 τ? ??ργα το? ν?μου와 기능적으로 동등한 ??ργα는 의식적인(cultic) 율법 준수아닌 일반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Gaston은 ??ργα ν?μου와 대조되어 사용된 믿음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faithfulness를 가리킨다고 전제하고 ??ργα ν?μου는 주격적인 소유격, 그니까 율법이 행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Gaston에 의하면, 율법은 능동적인 세력으로서 저주, 죄, 그리고 죽음을 생산한다. 그러나 이러한 학설 또한 잘못된 전제위에 서 있다. 위에서 주장한 대로 갈 3:1-14에서 칭의와 관련된 믿음은 아브라함의 믿음처럼 인간의 행위이다. 그렇다면, ??ργα ν?μου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로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롬 3-4에서 τ? ??ργα το? ν?μου와 병행되어 나타난 ??ργα가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중립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ργα ν?μου를 율법에 순응행위로 이해한 전통적인 해석이 여전히 정당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렇다면, 3:10상반절은 율법 순종 행위를 의지하는 자들은 저주아래 있다고 이해되어야 한다.

 

3:10상반절의 진술에 대하여 10하반절에 인용된 신 27:26은 그 이유를 제공한다. 이 신명기 인용은 율법 순종 불가능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Drane, Bruce, Moo, Schreiner. Gundry, Lambrecht). 이 견해가 옳다면, 우리는 바울의 논리를 다음과 같이 재구성할 수 있다 : (1) 율법을 완전히 순종치 못한 사람은 다 저주를 받는다(10하). (2) 그러나 아무도 율법을 완전히 지키지 못한다(암시된 전제). (3) 그러므로 율법 순종을 의지하는 모든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다(10상). (enthymeme).

 

그러나 Sanders는 이러한 일반적인 학설을 반대해서 3:10에서 바울은 율법을 완전히 지킨다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여러 논거들을 제시한다. 나는 여기서 Sanders의 설득력있이 없는 모든 논거들을 취급하지 않고 (관심있는 사람들은 내 논문을 보라). 그 중에서 흥미있는 것 하나만 소개 비판하겠다. Sanders에 의하면, 빌 3:6하반절은 율법이 완전히 성취될 수 있음을 말한다. 언뜻 보면, 이 구절은 바울이 율법을 조금의 흠도 없이 순종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 같다. 그러나 문맥 속에서 3:6을 이해할 때 그것은 개종전의 자신에 대한 바울의 평가이다. 엄격한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 바울은 자신의 율법 순종이 완벽했다고 생각하였을지 모른다. 물론 그의 율법 순종이란 자신이 실패에 대하여 성전에서 속죄 제사를 드린 것까지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받은 그리스도의 계시의 밝은 빛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무서운 죄를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유대교 안에 있을 때 보지 못했던 자신의 종교적 윤리적 파산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것은 과거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 존재했던 율법과의 무의식적인 갈등을 새롭게 깨달은 것을 포함한다(cf, 롬 7). (이러한 바울의 경험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도 믿기 전에는 제법 의로운 것처럼 생각했으나, 주님을 만난 후 엄청난 빛이 우리 마음속에 밀고 들어와 숨겨진 모든 죄가 드러나는 경험을 한다.). 그러므로 Sanders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 갈 3:10이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한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취하는 것은 여전히 안전하다. 롬 1:18-3:20과 7:1-25도 이러한 견해를 지지한다. 그러나 Sanders는 이 로마서 구절들에서조차 바울이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Sanders의 논쟁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수많은 학자들은 율법이 칭의의 수단이 아니라는 바울의 주장의 이유는 아무도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e.g,. Wilckens, Moo, Huebner). 이 말은 누가 율법을 완전히 지킨다면, 그로써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인가? 더 나아가서 그것은 율법과 믿음 공히 칭의의 수단으로서 서로 경쟁한다는 말인가? 이러한 견해는 바울의 율법 이해와 일치하지 않는다. 바울에 의하면, 약속보다 430년 후에 주어진 율법은 약속을 폐하지 못하고(갈 3:17) 약속을 반대하지도 않는다(3:21). 또한 바울은 갈 3:18에서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구원의 약속에 참여하는 수단으로서 결코 계획된 적이 없다. 참으로, 하나님의 이신칭의의 계획을 취소시킬 의도가 단 한 번도 율법에게 주어진적도 없다. 갈 3:11에 의하면, 칭의는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는다. 그 이유는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3:12은 계속해서 율법은 믿음과 양립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원칙적으로 칭의의 대안이 아니다. 만에 하나 어떤 사람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킨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써 그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율법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결정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앞에서 소개한 Bultmann의 주장은 옳다.

 

우리가 갈 3:10-13에서 나타난 바울의 율법관을 제대로 이해할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하여야 한다 : 왜 율법은 그것을 완전히 순종치 못한 사람들을 저주하는가?(이미 우리는 이 문제를 논의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그 논의의 일부분을 좀 더 상세히 다루고자 한다). (우리는) 바울은(이) 범죄자에게 저주를 선언하는 신 27:26를 인용할 때 히브리 원문에 나타나 있는 “이 율법”을 갈 3:10하반절에서 “율법 책”으로 대치함으로써 그 신명기의 저주를 전 모세의 율법에 적용시켰다(는 것을 관찰하였다).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모세의 율법이 야웨와 특별한 관계를 맺은 이스라엘이라는 구체적인 공동체에 주어졌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과 야웨의 특별한 관계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브라함이 99세 되었을 때, 야웨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 은혜로 약속하시길(창 17:7)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야웨는 후에 이삭과 그 다음엔 야곱과 언약을 맺으셨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족장과의 언약 때문에 야웨는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출애굽 이야기는 실제로 이렇게 시작된다. 출 2:4이후. 출에굽이라는 위대한 구원 사건을 통하여 야웨는 언약에 신실하심을 보이시고 자신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입증하였다. 그 후 그는 시내산에서 자기 백성에게 율법을 주어 자기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도록 요구하셨다.

 

그러므로 언약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이니셔티브(initiative)로써 먼저 설립되고, 그 후에 율법이 선포되었다. 환언하면, 언약이 율법을 선행한다. 이것은 즉 율법이 언약의 전제 조건이 아니라 그 결과임을 말한다. 율법은 언약의 설립과 관계가 없다. 그것은 언약을 맺는 조건이 아니다. 그러나 율법에의 순종은 언약을 설립하기 위해 이니셔티브를 취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다. 이것은 율법이 언약의 의무임을 뜻한다. 율법준수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안에 머물도록 한다. 갈 3:12에19 인용된 레 18:5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여기서 “산다”는 말은 오는 세계에서의 삶을 가리키지 않고, 언약안에서의 삶, 즉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안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한다-이미 주어진 생명이 계속 이어진다-이 언약 안에 거하는 것은 생명의 축복을 향유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 이유는 축복이 언약 안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Noth는 말한다. “사실 신 28에 포함된 축복은 율법이 선포되기 전에 이미 존재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법 순종으로 새롭게 축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이미 주어진 언약과 그것 안에 들어 있는 축복이 계속 유지된다. 순종은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를 경험한 언약 백성의 의무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어떠한 보상도 요구할 수 없다.(cf. 순종-보상, Bultmann의 말을 기억하라). 그러나 율법 위반은 언약의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저야 할 충성의 포기이다. 그것은 즉 율법을 파기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저주를 초래한다. 이 저주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저주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그의 거룩한 백성으로부터의 분리 그리고 언약 안에 존재하는 모든 축복의 몰수를 의미한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죽음을 가져온다.

 

여기서 우리가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은, Noth가 말한 것처럼 “순종과 불순종, 축복과 저주는 양자 모두 똑같은 차원 위에 서 있지 않다. 율법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들은 인간에게 주어진 두 개의 선택 가능성이 아니다. 율법 준수는 인간의 의무이지, 선택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보상도 요구할 수 없고, 다만 언약에 속한 축복이 계속 유지된다. 반대로, 범법과 그 결과인 저주는 인간이 자기의 자유 의지로써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cf. 국방의 의무).

 

바울이 볼 때,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 이것은 갈 3:10,13,22,23; 4:4-5에 분명히 함축되어 있다. 그런데 Sanders는 바울 당시 유대인은 율법 안에 있는 속죄 수단들(즉 제사와 회개)이 범죄를 속하는 데 충분하다고 믿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안에서의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 사건의 빛 아래서 그러한 속죄 수단들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만약 그것들이 완전한 것들이었다면, 그리스도께서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바울이 그러한 속죄 수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임박한 파멸을 예언한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더 깊이 깨닫게 되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이스라엘 위에 놓인 율법의 저주를 제거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갈 3:13에서 일인칭 복수 “우리”는 유대인을 가리킨다. 유대인은 모든 민족의 대표 역할을 함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유대인을 구속한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는 우주적인 결과, 즉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기서 우리는 갈 3:8에 인용된 창 12:3에서20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우주적인 약속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된 것을 본다.

 

이제 바울은 갈 3:10-13에서 율법은 언약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에게 있어서, 율법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언약의 의무이다. 그것은 결코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이 아니다. 설사 그것이 완전히 지켜진다해도, 율법에의 순종은 단지 언약과 그 안에 있는 축복이 계속되게 할뿐이다. 그러나 율법 위반은 저주를 불러 일으키고 그 범죄자를 언약에서 추방시킨다. 시내산 언약의 의무로서의 이러한 율법의 기능은 십자가 위에서 종식되었다(cf. 롬 10:4)21.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전례없는 구원의 행위로 새언약을 세우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율법의 이해는 어떤 율법주의 개념을 포함하지 않는다.

 

똑같은 율법에 대한 이해가 다른 바울서신에도 나타난다. 롬 10:1-10은 두 가지 다른 형태의 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것들은 이스라엘의 의와 하나님의 의이다(3절). 전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10:5)이고 ; 후자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10:6)이다. 이 둘은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 Ridderbos, Beker, Wilckens 등 많은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의, 즉 율법에서 말미암는 의는 율법의 율법주의적 준수에 기인한 이스라엘의 자기 의(self-righteousness)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맥에서는 바울이 율법에서 나온 이스라엘의 의가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힌트가 없다. 또한 바울은 10:2에서 실제로 율법에 대한 열심인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Dunn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의는 이스라엘만의 의, 그러니까 언약의 의를 가리킨다. 이와 관련하여 Dunn은 롬 10:3에서 사용된 ??δο?(one's own)를 “peculiar to me"(나에게 독특한 또는 고유한)의 의미로서 ”mine"(and not yours)로 이해한다. 그리고 στ?σα?를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행위로 보지 않고 이미 존재하는 어떤 것을 세우거나 확인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율법에서 말미암은 이스라엘의 의를 설명하기 위해서 바울은 롬 10:5에서 레 18:5를 인용한다. 롬 10: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Dunn에 의하면 이 레위기 구절은 “이스라엘의 언약적 의무의 전형적 표현이다.” 이것은 행위를 하나님의 호의를 얻기 위한 시도라고 비판하지 않고 언약안에서의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의, 즉 언약의 의는 율법을 행하고 그 언약 안에서의 사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율법이란 자기 의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적 의를 유지하기 위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율법의 기능은 이스라엘의 범죄를 대속하심으로써 모든 인류를 위해 하나님의 의를 세우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중단되었다(롬 10:4). 여기서 τ?λο?는 종지 또는 종료(goal)를 의미한다.

 

빌 3:9에도 똑같은 구원사적인 대조가 나타난다. 그것은 바울의 의(율법에서 난 의)와 대조적인 하나님의 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난 의)이다. 바울은 전자를 그리스도를 아는 빛아래서 “해(loss)"로 여긴다(3:8). 롬 10:3에 언급된 이스라엘의 이처럼, 여기 율법에서 나온 바울의 의도 전통적으로 인간의 업적에 근거를 둔 자기 의(self-righteousness)로 해석되었다(Bultmann, Beare, Ernst). 그러나 문맥에서 그 의가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다는 암시가 없다. 오히려 3:7은 그것을 ”유익하던 것(gain)“이라고 불리운다. 더 나아가서 바울은 3:5-6에서 율법에서 난 의를 다른 언약적 특권들(즉 할례, 이스라엘에 속함, 율법에 대한 열심)에 포함시킨다. 이것은 그 의가 율법주의적인 자기 의(self-righteousness)가 아니라 언약의 의(covenant-righteousness)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여기서도 율법은 언약의 의무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비록 바울의 대적자들이 이방 갈라디아인들에게 아브라함의 참자손이 되기 위한 수단으로 율법을 지키도록 요구했지만, 그들도 또한 율법을 언약의 뼈대 안에서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순종 덕분으로 선택되어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로 들어가게 되었으며 그 언약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있어선, 그리스도는 율법을 확인하고 시내산 언약을 강화하기 위해 온 새로운 모세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잘못은 이스라엘이 불순종으로 언약을 파괴했고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위에 놓인 저주를 제거하기 위해 십자가 위에 죽으셨으며, 그럼으로써 새언약을 수립하시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데 있다.

 

바울 당시 팔레스타인 유대교는 행위 의(work-righteousness)의 종교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Sanders는 1977년 그의 저서 Paul and Palestinian Judaism에서 그 유대교는 율법주의적인 종교가 언약 종교라는 것을 아주 설득력있게 입증하고 있다(cf. Neusner). (전통적인 견해에 의하면, 유대교는 Babylonian exile 이후에 율법주의적인 종교로 변질되었다).

 

요컨대 갈 3:10-13은 바울이 모세 언약의 관점에서 율법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율법은 언약에 들어가는 조건이 아니고 언약안에 머무는 조건이다. 그러나 율법은 범죄자들에게 저주를 선언한다. 이러한 율법의 이해는 롬 10:1-10과 빌 3:9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또한 율법과 언약과의 관계에 관한 한, 갈라디아에서 활동한 바울의 대적자들과 1 세기 팔레스타인 유대교도 기본적으로 바울과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3. 언약의 의무로서의 율법은 이스라엘의 독특성의 심볼이다.

최근에 율법에 대한 바울의 비판의 핵심은 율법의 사회적 기능이다는 주장이 상당한 세를 형성해 가고 있다. Dunn이 이러한 유행의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cf. Helilgenthal, Watson. Gordon). Dunn에 의하면, ??ργα ν?μου는 유대인의 독특성을 나타내 주는 할례, 음식법, 그리고 축제일과 같은 특정한 율법준수를 가리킨다. 이것은 바울이 율법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적 identity를 결정하는 율법의 기능을 공격함을 보여 준다. 그래서 3:10에서 말한 율법의 저주라는 것은, 율법을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것으로 취급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을 이스라엘에게만 제한시키는 사람들에게 내려진 것이다.

 

Dunn의 이러한 새로운 주장은, 비록 흥미가 있지만, 많은 약점이 있다. 첫째, 우리가 이미 주장한 대로 ??ργα ν?μου는 율법의 어떤 부분만 행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 전체를 요구하는 순종행위이다. 둘째, 율법에 대한 바울의 공격은 Dunn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과격하다. 바울이 저주하고(3:10.13), 범죄를 생산하고(3:19), 예속시키는(3:23이하) 율법에 대해서 말할 때 또한 율법을 죄의 세력(3:22), 마귀의 세력(4:3,9), 그리고 성령의 능력과 반대되는 육체의 세력과 관련시킬 때, 그는 전 율법을 염두해 두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율법의 그러한 민족주의적인 이해로 부터의 해방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율법을 순종하기 위해서 경건치 못한 민족들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결코 잘못이 아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죄는 자연적으로 boundary maker(표시) 역할을 하는 율법을 소유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지 못한 데 있다. 사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 악한 세상으로 부터의 종말론적인 구속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Dunn의 학설은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의 사회학적인 기능에 대한 암시가 갈라디아서에 없다는 말이 아니다. 갈 2:15에서 바울은 이방인을 유대화시키려는 베드로에 반대해서 이신칭의의 교리를 제거하기에 앞서 일단 유대인의 관점을 수용한다.

 

2: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유대인은 원래 이방인을 죄인 취급하였다. 그 이유는 이방인들이 율법을 지키니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완전히 율법밖에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ο?ι ?αν?νοι 라고 불리워졌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기 자신들을 율법의 백성으로 간주하였다. 왜냐면,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때문에 그것을 지킬 엄숙한 의무 아래 있기 때문이다. 이 율법은 원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묶으려고 계획된 것이다. 그래서 율법에의 순종은 필연적으로 이방민족들 그리고 그들의 불경스러운 우상 숭배의 관습과 습관으로부터의 분리를 포함한다. 이와 관련하여 신 7:1-11과 에스라 10:11에서 율법에 순종하라는 명령과 불경스러운 이방 민족과 분리하라는 명령이 나란히 나타나고 있음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율법을 지킴으로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반복되는 호소는 암시적으로 다른 신을 섬기는 이웃 백성들로부터 분리하라는 요구이다. 이처럼 원래 언약의 의무로서의 주어진 율법은 이스라엘을 이방 민족들과 구분하는 사회적인 기능을 자연스럽게 갖게 되었다.

 

우리는 ??ργα ν?μου가 할례, 음식법, 그리고 축제일과 같은 율법의 특정한 준수를 가리킨다는 Dunn의 의견을 배척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의식법 준수가 유대인의 독특성을 유별나게 특징적으로 드러내 준다는 Dunn의 주장에 동의한다. 왜냐면 도덕법은 모든 민족에게 적용될 수 있는 데 반하여 그 의식법은 이스라엘에게만 독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은 2:3에 언급된 디도처럼,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받았고, 2:11-14는 안디옥에서의 issue가 유대 음식법임을 말하고 있으며, 4:10은 선동자들의 설득으로 갈라디아인들이 받아들인 것은 Jewish calendar임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 특별히 음식법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유대교의 identity symbol로서 기능하였다. 그것은 엡 2:14-1522에 언급된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사이에 “중간에 막힌 담”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새 시대를 도래케 함으로써 그 벽을 허물어 버리셨다. 십자가 위에서 그는 유대인 위에 놓인 율법의 저주를 제거하심으로써 새 언약을 세우셨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되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방인뿐만 아니라 유대인까지도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와 무할례, 그리고 유대인과 헬라인의 옛 구별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유대인을 다른 민족으로부터 구별시키는 율법의 사회적인 기능은 소멸되었다.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사람들은 다 하나이다.

 


 

III. 예속시키는 세력으로서의 율법

1. 율법과 죄

이미 말씀 드린바와 같이 바울의 대적자들은 이방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아브라함의 약속을 상속받기 위해서는 할례와 율법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대해서 바울은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약속을 받았으며, 또한 갈라디아 사람들은 믿음으로 성령, 즉 아브라함의 약속의 실제적인 성취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서 바울은 3:18에서 유업이 율법에 근거하지 않다고 단언한다. 바울이 볼 때, 율법은 약속을 폐할 능력이 없다(3:17). 율법은 약속을 거스리지 않는다(3:21). 오히려 그것은 약속 성취의 길을 예비한다. 율법은 원래 시내산 언약의 의무로 주어졌다. 그러나 그것을 이스라엘이 위반하자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저주를 선언한다. 이 율법의 저주로부터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구속하셨다. 그 결과 아브라함의 약속이 성취되었다(3:13-14). 이 성취와 함께 시내산 언약의 의무로서의 율법은 폐지되었다. 이리하여 율법의 시기는 약속과 성취 사이에 일시적으로 제한된다.

 

이 시점에서 바울은 구속사에서 율법의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3:19a :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이 질문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3:19b에서 찾아진다 : τ?ν παραβ?σεων χ?ριν προσετ?θη. 여기서 χ?ριν이란 전치사는 목적 혹은 이유를 뜻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범법을 목적으로)범법을 위하여)”, 그러니까 범법을 생산하거나 자극하기 위하여라는 의미가 되고, 후자의 경우에는 “범법함을 인하여”, 그러니까 범법함을 처리하거나 방지하기 위하여라는 뜻이 된다. 후자의 뜻은 토라를 죄로부터의 방지를 위한 울타리로 이해하는 유대적인 전통과 일맥상통한다. Keck과 Lull은 이 견해를 취한다. 그러나 갈에서나 다른 바울 서신에서는 이 의견을 지지하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

 

대부분의 해석가들은 첫 번째 견해가 바울의 의도를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e.g. Cranfield, Eckert. Betz, Ebeling, Fung). 그들은 그 근거로서 롬 3:20; 4:15; 5:13, 20 ; 7:5.7-24; 고전 15:56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들은 갈라디아서 자체에서 충분한 근거를 차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갈라디아서가 그 첫 번째 견해를 지지하는 충분한 인디케이터들(indicators)을 제공한다. 첫째, 3:8-14를 보면, 약속은 율법이 선포되어지기 훨씬 저에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그 약속은 율법의 저주를 제거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성취되었다. 이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 약속이 주어졌을 때 율법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성취되었을 때(특별히 범법)이 전제되었다. 이것은 율법이 범법을 생산함으로써 약속의 성취를 돕기 위해서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그것을 지킬 능력을 주었다면, 율법은 약속을 분명히 취소시켰을 것이다.

 

둘째, 우리는 율법의 예속시키는 능력을 주목해야 한다. 3:23을 보라. 여기서 묘사된 율법 아래의 노예 상태는 4:3-9에서 마귀의 세력 아래 있는 노예 상태와 병행되어 나타난다. 율법의 이러한 부정적인 성격은 범법을 생산하는 율법의 기능과 연결된다.

마지막으로, 범법(παρ?βασι?)가 법 용어로서 일반적인 죄가 아니라 공포된 법을 범한 구체적인 행위를 가리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롬 4:15과 5:14에 의하면, 아담과 모세 사이에 ?αμρτ?α는 있었지만 παρ?βασι?는 없었다. 그 이유는 율법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παρ?βασι?는 율법이 온 결과로서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τ?ν παραβ?σεων χ?ριν를 “법범함을 인하여”로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 번역은 율법 없이도 범법함이 많이 생겨났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χ?ριν를 목적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3:19은 율법은 범죄를 생산할 목적으로 더해졌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23

 

이와 관련하여 롬 5:20상반절을 고려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5:20 상반절24 :ν?μο? δ?ε παρεισηλθεν, ??να πλεον?ση τ? παρ?πτωμα. 여기서 παρ?πτωμα는 παρ?βασι?보다 더 더 넓은 개념이다. 그러나 παρ?πτωμα는 마귀적 세력으로서의 ?αμαρτ?α와는 다르다.(그 이유에 대해서는 내 논문을 보라). Cranfield에 의하면 παρ?πτωμα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잘못된 행동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롬 5:20 상반절을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한다 : 율법은 이미 생겨난 죄악된 행위를 증가시키기 위해서 들어 왔다. 이 상은 갈 3:19b의 사상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둘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기본적으로 율법이 인간의 기존 상태를 악화시키기 위해서 주어졌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갈 3:19b로 돌아가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보자 : 어떻게 율법은 범법을 생산하는가? 불행하게도 이점에 있어서 갈라디아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만약 롬 5:20a가 갈 3:19b와 기본적으로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우리는 롬에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그 이유는 롬 7:5ff가 갑작스런 진술인 롬 5:20a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롬 7:5a :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이 사상은 7:8ff에서25 상세히 설명되고 있다. 율법이 없을 때, 죄(하마르티아)는 상대적으로 활기가 없었다. 그러나 “탐내지 말라”는 계명이 오자 죄는 그 계명을 통하여 인간에게 각양 탐심을 이루었다. 이처럼 죄가 인간의 죄악된 정욕을 자극하도록 작전 기지를 제공함으로써, 율법은 비록 간접적이나마 범법을 자극하는 역할을 한다26(이 설명은 뱀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계명을 가지고 선악과를 따먹도록 아담을 유혹한 창 3에 나오는 타락 이야기에 대한 분명한 암시적 언급이다). (나는 7:7-13)이 율법 아래 있는 이스라엘의 곤경 상태를 바울이 크리스챤의 눈으로 묘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이 아니다27).

 

3:19b의28 결과는 3:22a에 나타나 있다. “(갈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여기서 “성경”이라 함은 그것이 의인화되어 기술된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권위 수여 받은 전성경을 가리킨다. “가두다(συγκε?ω)”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긍정-보호, 부정-자유제한), 여기서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모든 것(τ? π?ντα)”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죄아래(?πο ?αμαρτ?αν)“이란 표현은 옛 시대의 악한 세력인 ‘죄의 속박 아래’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3:22a가 제시하고 있는 그림은 감옥인 것 같다. 성경은 치안 판사, 모든 사람은 죄인들, 그리고 죄수는 간수를 대표한다.

 


 

2. 율법의 속박

3:15-2229의 과도적인 부록에서 율법과 죄의 관계를 다룬 후에, 바울은 3:23-4:730에서 율법의 속박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양자됨과 대조하여 묘사하고 있다. 이 노예 상태는 3:23과 4:4-5에서 율법 아래에 있는 상태(being. ?π? ν?μον)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3:25에서 παιδαγωγ?? 아래의 상태(being. ?π? παιδαγωγ?ν), 4:2에서 ?επιτρ?που? κα? ο?ικον?μου? 아래의 상태(being. ?π? ?επιτρ?που? κα? ο?ικον?μου?), 4:3에서 τ? στοιχε?α το? κ?σμου 아래의 상태(being. ?π? τ? στοιχε?α το? κ?σμου)와 비교되고 있다. 이것은 율법 아래의 노예 상태가 죄 아?(?π? ?αμαρτ?αν. 3:22)의 노예 상태처럼 범법을 자극하는 율법의 기능의 결과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율법에 관한 여러 가지 analogies의 취지를 고려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갈라디아서에 사용된 ?π? ν?μον의 의미를 연구해야 한다. 많은 학자들은 ?π? ν?μον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παιδαγωγ?? 와 ?επιτρ?που? 그리고 ο?ικον?μου?의 역할을 그레코-로만 사회의 배경 안에서 조사하는 것을 먼저 한다(e.g. Longenecker, Belleville, Young). 그러나 이런 순서는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 비유들의 의의는 바울이 ?π? ν?μον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의해서 결정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π? ν?μον이란 표현은 3:23에서31 처음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동사 ?εφρουρο?μεθα와 분사 συγκλει?μενοι과 동반된다. 그리하여 그것은 믿음이 오기전의 유대인의 상태를 가리킨다.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의 상태에 대하여 많은 의견이 있다. (1). Gordon은 율법의 기능을 이방인의 불경한 수상 숭배로 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율법 아래 있는 이스라엘의 상태를 긍정적으로 이해한다. (2). Bellevile은 율법 아래의 상태를 중립적인 것으로 본다. 그녀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죄의 무서운 영향력 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의 엄격한 감시(잘못에 대한 처벌 포함)와 율법의 보호가 필요하다. (3). Young은 율법 아래의 상태를 사회학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는 율법 아래의 상태를 율법의 제한 아래 있는 것으로 본다. 율법의 제한이란 율법이 유대인을 이방인과 자유롭게 교제하는 것을 막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율법 아래 있는 존재의 성격을 파악하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주목해야 한다. 첫째, 23절의 율법 아래 있는 상태는 22절의 죄 아래 있는 상태와 병행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율법 아래 있는 상태가 매우 부정적임을 시사한다. 둘째, 그렇다면 22절에서의 죄의 예속시키는 능력과 관련되어 사용된 “가두다(συγκε?ω)”는 동사가 23절에서도 부정적으로 사용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19절에서 언급된 범법함을 생산하는 율법의 기능 또한 매우 부정적이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23절에 묘사된 율법 아래의 실존이 부정적인 것으로서 보호를 위한 것이 아니라, 억압을 위해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와 같은 것임을 말해 준다.

 

율법의 속박의 의미를 좀더 분명히 하기 위하여 ?π? ν?μον이란 표현이 두 번이나 나타나 있는 4:4-5을 보자. --(갈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갈4: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여기서도 being ?π? ν?μον는 노예 상태로 묘사되고 있다. 그 이유는 ?ξαγορ?ζω(속량하다)는 단어가 구출 또는 해방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동사가 갈 3:13에서 두 번이나 나오는 “우리”는 이미 주장한 대로 유대인만을 가리킨다. 3:10에 의하면, 그들은 율법 순종에 실패함으로 저주아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3:13a가 4:4b-5a와 상통함이 현저함을 보이기 위해서 13절의 구조를 바꿀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저주아래 있는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기 위해 저주가 되셨다. 이제 이것을 4:5a과 비교하면, 우리는 4:4b-5a에서 말하고 있는 율법 아래의 실존이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실존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율법 아래의 노예 상태, 즉 율법의 자주 아래 있는 실존을 묘사하기 위해서 바울은 갈 3:24-25에서 παιδαγωγ??라는 metaphor를 고용하고 있다. παιδαγωγ??는 선생이 아니라, 종으로서 주인의 아들이 어디를 가든지, 특별히 학교를 갈 때 동행한다. 그의 임무는 모든 위험으로부터 그 소년을 보호하고, 그의 모든 행동을 감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쁜 행동에 대해서 책망과 처벌을 포함한다. 이 παιδαγωγ??는 그 소년이 성년이 되기까지 그를 통제하고 자유를 제한한다. 그런데 그 당시 많은 παιδαγωγ??들 중에는 존경을 받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무례하고 거칠게 소년들을 다루는 자들이 많았다.

 

많은 학자들은 παιδαγωγ??의 주요 임무가 소년을 모든 종류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그에게 합당한 예절을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에 율법도 그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갈 3:34-25의 문맥에서 우리는 율법의 그러한 보호적이고 교육적인 역할을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그 문맥은 παιδαγωγ??의 불유쾌한 속박이 metaphor의 핵심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3:24에서32 바울이 παιδαγωγ??와 율법을 비교한 것은 3:23의33 상황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다. 23절은 율법 아래의 노예 상태에 대해서 말하고 있음으로 παιδαγωγ?? 아래의 실존은 자유가 없는 노예 상태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많은 학자들은 율법의 지배를 심리학적으로 해석한다(Luther, Ridderbos, Cole, Suh). 그들은 3:24에서 ε?? χριστ?ν을 “그리스도에게로”라고 이해하여, 율법이 억압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에 대한 열방을 창조함으로써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ε?? χριστ?ν의 ε??는 문맥에서 시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cf. 3:19; 3:23(2번); 3:25; 4:2, 3). 또한 우리가 고려할 것은 갈 3:15-4:7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전의 율법의 예속시키는 기능을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사적인 관점에서 보고 있다는 점이다.

 

갈 4:2에서34 바울은 율법 아래의 노예상태를 being ?π? ?επιτρ?που? κα? ο?ικον?μου?으로 묘사하고 있다. (4:1의 초두에 나온 λ?γω δ?가 암시하는 것처럼, 갈 3:23-29의 기본사상이 4:1-7에 반복되어 있다.) ?επ?τροπο?는 아버지나 법원이 정한 때까지 미성년자의 재산을 관리하는 후견인이다. ο?ικον?μο?는 보통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이다. 4:1에서 바울이 “(갈4: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처럼,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상태는 어린 상속자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서 자기 재산에 대하여 아무런 자유를 행사할 수 없는 노예상태를 가리킨다.

 

더 나아가서 4:3이하에서 바울은 율법 아래의 노예상태를 being ?π? τ? στοιχε?α το? κ?σμου와 비교하고 있다. τ? στοιχε?α το? κ?σμου는 4:9에서 단순히 τ? στοιχε?α 라고 불리우고 있다. 헬라 고전 문학에서 τ? στοιχε?α 는 주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 (1) 지식의 요소 또는 근본적인 원리들; (2) 땅, 물 공기, 그리고 불과 같은 우주의 물질적인 요소들. 이것들은 이방인에 의해서 신들로 숭배되었다. (3) 그러나 Justin Martyr의 Second Apology를 보면, στοιχε?α가 천체들, 특별히 자연의 계절에 영향을 미치는 해와 달, 그리고 다른 혹성들을 가리킨다. 이것들도 이방인들에 의해서 신들로 숭배되었다.

 

그렇다면,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τ? στοιχε?α το? κ?σμου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이에 대해 내 논문은 8개의 다른 학설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다양한 학설 중에서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을 선택하기 위해서 문맥을 고려해야 한다.

 

(1) 4:3-5에서35 율법 아래의 노예 상태와 τ? στοιχε?α το? κ?σμου의 노예 상태가 병행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율법과 στοιχε?α를 비교하지 않음). (2) 4:8은36 στοιχε?α가 이방인에 의해서 신들로 여김을 받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자들”이란 표현은 이방 다신교에 대한 전형적인 유대인의 비판을 상기시킨다.(e.g. 사 37:19; 레 2:11; 5:7; 16:20).37 (3) 마지막으로, 4:9은38 갈라디아인들이 στοιχε?α의 노예로 돌아가려는 시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바울은 4:10에서 천체 숭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칼렌다 준수를 갈라디아인들이 행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을 고려할 때, 우리는 στοιχε?α가 이방 종교에서 신으로 숭배된 천체와 우주의 물질적인 요소들을 가리킨다는 Betz의 의견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이 볼 때, 그것을은 1:4에서39 언급된 “ 이 악한 세대”를 지배하는 마귀적인 세력을 대표한다. 이 마귀의 세력은 그리스도 이전과 밖에 있는 모든 인간을 지배한다. 그래서 우리는 στοιχε?α 밑에 있는 노예 상태와 율법 아래 있는 노예 상태를 바울이 동일시하고 있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이 두 실존 상태는 자유가 없고, 압박에 복종된 상태를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율법 아래의 실존과 육체에의 복종을 바울이 갈 5:16-18에서40 병행시키고 있음을 관찰한다. 5:18과 5:16. 여기서 육체는 성령과 반대되는 세력으로서, 옛 시대의 악한 세력이다. 이 세력에 복종하는 것은 연약한 인간으로 하여금 율법을 범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을 율법의 저주 밑으로 끌어내린다. 그러므로 육체에 복종하는 것과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인 것과는 동일한 것이다.

 

요약하면,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은 범법을 생산하기 위하여 주어졌다. 그 결과 율법은 모든 범죄자를 그 저주 아래 가둔다. 바울은 이러한 감금상태를 3:25에서 소년 인도자, 그리고 4:2에서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놓인 자유 없는 상태와 비교한다. 더 나아가서, 그는 율법 아래의 감금 상태를 3:22에서 죄, 4:3, 9에서 마귀의 세력, 그리고 5:13 이하에서 육체 아래의 노예 상태와 연결시킨다.

 

율법 아래의 노예 상태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의 유대인의 실존이다. 이 특수한 노예 상태는 죄와 마귀의 육체 아래 있는 우주적인 인간의 절망 상태를 대표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서문에 해당한다.

 


 

3. 율법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

갈 3:25에서 바울은 율법의 지배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종식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4:4b는41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오셨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이 진술은 하나님께서 선재하는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말하고 있다.

 

4:4c는42 그 아들이 어떻게 나타나셨는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실 때 인간의 본성을 취하여 참된 인간이 되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자기가 구속하러 온 사람들의 수준까지 낮아지심을 의미한다.

 

“율법 아래 나다”라는 말은 주석가들을 당혹시키는 말이다. Burton이나 Cole 같은 학자들은 그 말을 율법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켜야 만 하는 의무를 가진 유대인의 한사람으로서 태어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율법 아래”가 ‘율법의 저주 아래’를 가리킨다는 좀전의 우리의 주장을 기억해야 한다. 만약 우리의 주장이 옳다면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리스도께서 탄생시에 유대인이 율법을 불순종함으로 초래한 모든 저주를 자기 몸에 짊어 지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도성이신의 깊은 낮아지심을 가리킨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와 같은 수치스러운 도성이신은 그리스도의 첫 번째 의미 있는 단계이다. 그 도성이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간의 연약함에 복종하고, 오해를 받고, 천대를 받고, 거절당하고, 고난을 받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십자가 위에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림을 받으셨다.(우리는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형을 당하신 것은 그가 이미 저주가 되셨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을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를 완전히 제거하셨다. 그럼으로써 그는 율법의 저주에서 자기 백성을 구속하셨다(갈 3:13). 이 특수한 구속(유대인의 구속)은 우주적인 결과, 즉 죄와 마귀의 세력과 육체로부터 모든 사람의 구속을 가져왔다. 그 이유는 유대인이 모든 인류의 대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사실 도성이신, 고난, 죽음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완전히 동일시하셨다.

 

3:23-4:7과 병행되는 갈 2:18-21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수혜자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다. 갈 2:19에서 “나”는 바울 자신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우선적으로 대표한다. 또한 2:19의 율법은, 율법과 하나님이 대조되어 나타난 것으로 봐서, 3:23-:7에서와 같이 옛 시대의 악한 세력을 가리킨다. 이 율법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죽었다. 이것은 율법의 예속시키는 능력으로부터 완전한 결별을 의미한다.(여격 ν?μω와 θε?는 관계를 나타내는 여격이다). 그 결별의 결과는 율법이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을 노예로 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율법에 대한 죽음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리는 2:19a(실제로는 2:20a가 19절에 포함되어 있음)에서 환언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는 것과 그리스도의 십자가형을 당하심과의 사이에 아주 가까운 관계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위에서 본 대로 율법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율법의 저주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내려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으셨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한 믿는 자들 또한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율법의 저주와 그것의 포악한 지배로부터 해방되었다. 바울은 이러한 율법의 악한 세력으로부터 구출된 것을 옛 기대로부터 새 시대에로의 종말론적인 이동이라고 이해하고 있다(cf. 1:4; 6:14). 그러므로 이 구출은 죄와 마귀와 육체와 같은 옛 세력들로부터의 구출이다.

 

이 해방은 모든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살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2:19b). 하나님께 대한 이 새로운 삶은, θε?를 advantage(여격)를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전통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삶으로 이해되었다(Burton, Ridderbos, Fung). 이 의미가 여기서 완전히 제외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바울의 의도하는 바가 아니다. 우리는 2:19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사는 것과 옛 세력으로서의 율법에 대하여 죽는 것이 정면으로 대조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새 삶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과 다스림에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삶이다. 2:20a는 이 삶을 새 시대의 주인인 그리스도께서 안에서 사시고 control하는 삶으로 묘사되어 있다. 5:25에서 그 삶은 하나님의 능력인 성령에 지배를 받는 삶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IV. 사랑의 표현으로서의 율법

1. 율법과 사랑

우리는 앞에서 율법의 두 독특한 기능인 시내산 언약의 의무와 예속시키는 능력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의해서 종식되었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 주장은 율법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아무런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어떤 학자들이(Drane, Huebner) 주장하는 대로 갈라디아에서 율법에 대한 바울의 태도는 완전히 부정적인가?

 

위에서 본대로, 선동자들의 다른 복음은 갈라디아 교인들 속에서 혼동과 논쟁과 분쟁을 일으켰다. 그럼으로써, 아주 심각하게 그들의 하나 됨을 위협하였다. 5:15은43 이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나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를 5:14에서44 말하고 있다. 5:13-14에 나타난 일반적인 권고는 6:1-2에서45 상술되고 있다. 1절에서 바울은 범죄한 자를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으라고 권면하고 있다. 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

 

여기서 우리가 관찰해야 할 것은 5:14과 6:2에서 율법은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사랑이 율법을 대치하거나, 그것을 무용하게 만들지 않고, 사랑은 완성(the fulfillment of the law)이라고 말한다. (5:14 fulfill{πεπλ?ρωται - πληρ?ω} ; 6:2 ναπληρ?σετε - ναπληρ?ω). 이것은 바울이 5:12까지 율법을 냉혹하게 비판한 것을 고려할 때 매우 놀랄 만한 일이다(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다 ; 율법의 저주 ; 율법은 범법을 생산한다 ; 율법 아래의 노예 상태).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제기해야 한다. 우리는 그러한 긍정적인 율법에 관한 진술을 앞에 나오는 부정적인 율법에 대한 견해와 관련시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Raeisaenen이 주장한대로, 바울은 자기 모순에 빠져있는가? 아니면, 그는 앞에서 언급한 율법과는 다른 율법을 5:13이하에서 소개하고 있는가? 그것도 아니면, 그는 율법의 다른 측면을 제시하고 있는가?

 

5:14과 6:2에서 나오는 율법의 긍정적인 진술들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5:14의 ?ο π? ν?μο?와 6:2의 ?ο ν?μο? το? Χριστο?의 identity를 먼저 밝혀야 한다. 그러나 Huebner는 그것이 모세의 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계명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Huebner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 자세한 것은 내 논문을 보라.

 

그러면 6:2의 ?ο ν?μο? το? Χριστο?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여기에는 많은 의견들이 있다. Davies는 ?ο ν?μο? το? Χριστο?를 메시야의 법, 즉 메시야의 새로운 토라이다고 주장한다. 비슷하게 Stuhlmacher는 그리스도의 법을 시내산 토라와는 다른 시온 토라라고 생각한다. Dodd는 그리스도의 법을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이해한다. Gutbrod, Furnish, Beker, Fung과 같은 많은 학자들은 그리스도의 법이 5:14에서 언급된 사랑의 계명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Guthrie, Raeisaenen, Hays는 그리스도의 법의 ‘법’을 은유적인 의미로 이해하여, 그리스도의 법이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모범적으로 나타난 그리스도의 삶의 원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ο ν?μο? το? Χριστο?가 모세의 법을 가리킨다고 이해한다. 그 이유로 우리는 5:14과 6:2이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 두 진술을 똑같은 주제, 즉 사랑에 의한 율법의 완성을 다루고 있다. 이 두 진술의 주동사는 πεπλ?ρωται와 ναπληρ?σετε인데, 그들은 동의어로서 같은 어간을 가지고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5:14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말하고 있고, 6:2은 특수한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구조 분석에 의하면, 5:13-24과 5:25-6:10은 일반과 특수의 관계에 서있다.) 실제로 6:2의 권면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는 5:14의 권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의 특수한 표현이다. 이러한 관찰 때문에 우리는 6“2의 ‘그리스도의 법’은 5:14의 ‘온 율법’과 같은 것이라고 이해한다. 5:14의 온 율법이 모세의 법이기 때문에 6:2의 그리스도의 법은 반드시 모세의 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만약 온 율법과 그리스도의 법이 모세의 법을 가리킨다면, 모세의 법이 사랑을 통하여 이루어 진다(성취된다, 완성된다)라는 5:14과 6:2의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6:2을 우리는 이렇게 바꿀 수 있다. 그리스도의 법은 서로 짐을 짐<하나의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으로써 성취된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fulfill이다. 이 영어 단어는 5:14에서 πληρ?ω이고, 6:2에서는 ναπληρ?ω이다. 그러나 롬에서 율법의 완성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8:4; 13:8) πληρ?ω만 사용되었다.

 

Schlier, Raeisaenen, Huebner, Thielman 등은 πληρ?ω가 poi?ω와 같은 의키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Betz가 올바로 관찰한 대로, 바울이 율법을 ‘행하는 것’과 ‘성취하는 것’과의 사이에 조심스런 구별을 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시내산 언약 아래 있는 유대인들은 율법의 모든 조항들을 다 행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갈 34:10, 12 ; 5:3; 롬 10:5). 그러나 새 언약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의무 아래 있지 않고, 사랑을 통하여 율법을 ‘성취한다.’ 사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을 ‘행하라’고 결코 명령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율법을 ‘성취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과 율법과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다(갈 5:14; 6:2; 롬 8:4; 13:8; cf. 롬 13:10; 마 5:17).

 

Furnish와 NEB, JB, TEV, NIV와 같은 영어 성경 번역들은 πληρ?ω를 롬 13:9에 나오는 νακεφαλαι?ω(sum up)과 동등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두 가지 결정적인 이유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 첫째, 롬 13:8-9에서 바울은 πληρ?ω를 νακεφαλαι?ω과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 둘째, πληρ?ω가 sum up의 의미로 사용된 예가 신약, LXX, 그리고 고대 헬라 문헌에서 한 번도 발견되지 않는다.

 

내 생각엔, 가장 좋은 해석은 πληρ?ω를 ‘참된 의도를 충족시킨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다(Westerholm, Barclay).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의 모든 조항들을 낱낱이 지켜야 하는 의무에서 해방되었지만, 율법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랑으로(을 통하여) 율법을 완성한다는 말은 율법의 참된 목적과 의미가 사랑을 통하여 완전히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이 말은 사랑이 전 율법을 취소하거나 대치하거나 혹은 흡수해 버린다는 뜻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어떤 상세한 지침이 없는 사랑은 낭만주의에 기초를 둔 막연한 관대함이나 또는 충동적인 즉석 연주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롬 13에서 율법의 완성에 대하여 말하면서 바울이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라고 분명히 말한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 진술은 십계명 중 4계명의 인용 바로 다음에 따라 온 것이다. 이것은 사랑이 그러한 계명들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더 나아가서, 바울은 그전 13:6에서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비록 사랑은 율법의 계명들을 낱낱이 지키는 것들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들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오히려, 사랑은 율법을 올바른 관점으로 조명하여 율법이 사람들에 의해서 오용되는 것을 방지한다. 이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이란 궁극적으로 사랑의 표현임을 말해준다. (공의와 사랑과의 관계, 공의는 사랑 없이도 존재, 그러나 사랑은 공의를 포함하면서 초월).

 

랍비 유대교에서도 또한 우리는 사랑이 율법의 모든 계명들의 핵심으로 여겨 지는 것을 발견한다. 예를 들면, 아키바라는 랍비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것이 토라 라에 있는 대 원칙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유대교의 이러한 입장은 바울의 입장과 똑같은 것이 아니다. 랍비들에게 있어선,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율법의 모든 계명을 다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의 모든 규례들을 실제적으로 행한다는 것이 아니다. 갈라디아에서 바울은 할례 그리고 율법의 다른 조항들이 그리스도인들, 특별히 이장 그리스도인들에게 유효하지 않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갈 5:6; 6:1546(cf. 2:3이하; 6:12-13)은 그리스도안에서 할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또한 2:14이하는 유대 그리스도인이 음식법들을 지키기 위해서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식사하는 것을 중단하는 것은 복음의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음식법이 그리스도인들에겐 완전히 부적절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더 나아가서, 4:10은47 이방 신자들이 유대인의 축제일들을 지키는 것은 그들의 과거 신들을 섬기는 것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이미 언급한 것과 같이 율법의 이 조항들의 공통점은 그것들이 전형적으로 유대적이다는 것이다. 유대교에서 그것들은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별시키는 강력한 유대인의 상징 역할을 한다. 그러나 바울이 볼 때, 그것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에게 적합하지 않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Sanders는 이에 대해 바울이 아무런 이론적인 설명을 제공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그 대답을 바울의 그리스도의 사건의 이해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을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율법의 저주를 짊어 지고 돌아가심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도래시켰다. 이 은혜의 시대에 아브라함의 축복은 모든 민족들에게 이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만 근거하여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받아 들이셨다. 이러한 이해로 말미암아 바울의 “이웃”에 대한 개념은 혁명적인 변화를 겪었다. 유대교 안에 있을 때 바울은 “이웃”을 동료 유대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물론 여기에는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도 포함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에는 “이웃”을 민족과 국적을 초월한 모든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크는 것으로 본다. 그 결과, 바울은 레 19:18의48 이웃 사랑의 계명을 유대 그리스도인들 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배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방 그리스도인들까지 사랑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 이유 때문에 바울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할례, 음식법, 그리고 축제일과 같은 전형적인 유대인의 규례들, 즉 유대인을 이방인과 날카롭게 구별되는 율법의 조할들의 준수를 포기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그러한 조항들을 지키는 것을 고집한다는 것은 그 공동체 안에 하나의 벽을 만드는 것이 된다. 그럼으로써, 그 공동체의 사랑의 하나됨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이 된다. 사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반대하는 것이다(cf. 갈 2:14이하). 그래서 바울은 그러한 율법의 특수한 준수들을 갈라디아서와 다른 서신에서 공격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렇다면, Raeisaenen과 Sanders가 주장한 대로, 이웃 사랑안에서 완성되는 “온 율법”(갈 5:14)은 할례, 음식법, 그리고 축제일이 제외된 축소된(그러니까 소우 도덕법만을 포함하는) 율법인가? 여기서 우리는 “완성”이라는 말이 율법의 모든 문자적인 요구들에 부응하는 것을 말하지 않고, 그 요구의 참된 의도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온 율법”이 율법 전체를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내 생각에는 갈 5:14의 진술뒤에 있는 바울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1) 예 언약에서 율법 준수는 출애굽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이다.

(2) 새 언약에서 이웃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건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반응이다(바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구별되지 않는 이웃 사랑은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삶의 한 측면이 아니라 그 삶의 전 내용과 방식이다).

(3)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전 율법의 종말론적인 완성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비록 율법의 어떤 조항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절하지 않지만 전 율법의 참된 정신은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이것은 오직 율법의 내적 의미만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에게 적합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바울은 여러 곳에서 율법을 구체적인 도덕 가이드로 계속 사용하고 있다. 갈 5:14에서 레 19:18을 인용한다. 율법은 사랑의 완성이라는 사상이 또한 나타나 있는 롬에서 바울은 십계명을 13:9에서 인용하고, 1:24-27에서 동성 연예를 정죄하면서 레 18:22과 2:13을 염두해 두고 있다. 더 나아가서 바울은 고전 14:34에서49 여자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하면서 율법에 호소하고 있고, 5:1-5에서 성적 문란을 꾸짖으면서 레 18:8과 20:11을 의심없이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은 바울이 율법을 그것을 민족적인 제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의 표현, 특별히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율법은 올바로 해석되기만 하면,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의 표준 역할을 한다. 그러나 바울이 믿는 자에게 율법을 행하라거나 순종하라고 결코 명령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오히려 그는 율법은 사랑으로 완성된다고 단순히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율법 완성이 사랑의 결과임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바울이 율법 완성에 대해서 말할 때 결코 명령법을 사용하고 있지 않고 있다.

 


 

2. 율법과 성령

갈 5:14에 나타난 바울의 율법관은 5:16-24에서 더욱 발전되고 있다. 5:16에 있는 λ?γω δ?가 이것을 시사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율법의 완성이 궁극적으로 성령에 의한 삶의 결과임을 단언하고 있다. 외냐면 사랑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이다(5:22). (모든 다른 성령의 열매는 사랑의 표현이다. Cf. 고전 13:4-7). “열매”라는 Metaphor가 시사한 대로 성령은 사랑의 내적 원천과 힘이다. 믿는 자의 사랑은 성령의 내적 사역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리하여 율법은 성령의 능력 아래 사는 믿는 자의 삶 안에서 완성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5:23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κατ? τν τοιο?των οκ ??στιν ν?μο?. 중성복수 τν τοιο?των은 9개의 성령의 열매를 가리킨다.

 

κατ?는 againinst를 의미한다. NEB와 Styler는 그것을 dealing with, with respect to, in realtion to로 이해하여 성령의 열매를 율법과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 근거로 5:18을 가리킨다. 그러나 5:18의50 under the law = under the curse of the law이다. 또 우리가 앞에서 본대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율법의 페지로가 아니라, 율법의 완성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κατ? + 소유격은 dealing with, with respect to, in realtion to의 의미로 사용된적이 한 번도 없다. 또 많은 학자(Burton, Guthrie, Yates, 한국말 성경)들은 ν?νο?를 일반적인 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5:23이하의 사상은 5:14과 5:18의 사상과 잘 들어 맞는다(아래를 보라). 그러므로 5?:23이하의 ν?μο?는 모세의 법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5:23이하는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야 한다. “율법은 그러한 것들을 반대하지 않는다.” 이 말은 즉, 율법은 그러한 것들을 반대하여 심판을 선언하지 않는다는 말이다(5:21과 비교하라). 사실, 성령의 열매는 율법의 기본 정신과 완전히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5:23이하는 성령의 열매는 율법의 참된 의도를 완전히 만족시킨다는 말을 강조하는 단언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성령의 열매를 자동적으로 생산하지 않는다. 5:13은51 육체가 이미 성령을 소유한 갈라디아 교인들의 윤리적인 삶의 심각한 위협임을 말하고 있다. 육체는 옛 시대의 악한 세력으로서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패배 당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활동하고 있고, 정과 욕심을 소유하고 있으며(5:24), 성령의 열매와 반대되는 육체의 일을 생산한다. 그럼으로써 육체는 그리스도밖에 있는 사람들을 율법의 자주 아래 끌어내린다(5:18). 사실, 육체는 새로운 메시야 시대의 하나님의 능력으로서의 성령과 반대되는 세력이다. 성령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는 육체와 성령의 갈등 안으로 인도되었다. 그리하여 5:17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갈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 절은 많은 해석가들에게 골치 아픈 문제이다. 어떤 학자들은(Lightfoot, Althaus, Ridderbos, Dunn, Cole, Raeisaenen) 갈 5:17을 롬 7:14-25와52 연결시켜 육체와 성령의 싸움을 묘사하는데, 그 결과는 육체가 믿는 자로 하여금 성령의 인도를 따르지 못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학자들은(Jewett, Guthrie, Arichea & Nida) 16의 약속의 빛 아래서 17절을 이해한다. 그들에 의하면, 17절은 육체와 성령의 갈등을 말하고 있는 데, 그 결과 성령은 믿는 자로 하여금 육체의 소욕을 만족시키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17절은, 특별히 17절 이하는, 육체 또는 성령의 일방적인 승리보다는 육체와 성령의 상호 적대를 분명히 묘사하고 있음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또한 17절은 “너희의 원하는 것”이 육체나 혹은 성령에 의해서 자극된 원함을 가리킨다는 어떤 인디케이터가 없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5:17이 성령과 육체의 갈등안에서 믿는 자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이해해야 한다.(Fung, Hong). 그는 육체를 섬기든지 아니면 성령을 따르든지 해야 한다. 여기서 17이하의 ??να는 결과를 나타내고, “너희의 원하는 것”이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가리킨다. 이것은 믿는 자가 자기 자신의 의지에 대한 자유로운 주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육체에 복종하든 아니면 성령을 따르든지 양자 택일을 해야한다.

 

물론 이것은 승리가 온전히 믿는 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말 기억해야 될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이 악한 세대에서 구출하셨다는 것과 믿는 자는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함으로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것이다(5:24).53 그 결과 믿는 자는 지금 성령 안에 산다(cf. 5:25).54

 

이와 같이 신학적인 바탕에 근거하여, 바울은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에게 5:16에서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기 위해서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 서신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이다.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따르기로 한 심각한 결심을 포함한다. 성령은 옛시대의 악한 세력인 육체의 세력을 파괴할 수 있는 새로운 메시야 시대의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자신을 성령의 능력에 맡기면,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아니한다.

 

이러한 진리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성령은 육체에 저항 할 수 있는 능력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특징되어지는 성령의 열매를 생산하는 능력을 공급한다. 4:6에55 보면, 성령을 통하여 믿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인정하게 된다. 나는 이 인정이 필연적으로 그의 아들의 십자가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동반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바울은 롬 5:5에서56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롬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이란 문맥을 고려할 때 subjective genitive로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이 더 나아가서 믿는 자를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도록 인도하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강권하다고 말할 수 있다. 믿는 자가 어떻게 반응하는가? 바울에 의하면, 그것은 이웃(우선적으로 하나님의 공동체의 동료 일원을 가리킴)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자기 백성을 위하여 희생시킴으로써 그들에게 자기 사랑을 보여 준 것처럼, 믿는 자들은 자기 이웃을 섬김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사랑을 보여 주어야 한다.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해진 이 믿는 자의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이리하여 바울은 5:18에서 만약 믿는 자들이 성령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는 다면, 그들은 율법의 저주 아래 있지 않다고 선언한다. 6:8b은 그것을 긍정적으로 말한다. “(갈6:8)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그러나 육체의 영향에 굴복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건의 혜택을 포기하고 육체 아래의 옛 노예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율법을 완성하지 못하고 육체의 일을 생산하므로, 정죄에 이르는 것이다. 그래서 5:21이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갈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갈5: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갈6:8a도 동일한 선언을 한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cf. 롬 8:1-4; 13:8-14).

 

그러면 이와 같은 행위 심판의 교리는 바울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그토록 정렬적으로 논증하고 선포한 이신칭의의 교리를 결국 부인하는 것인가? 이 두 가르침은 서로 상반되는 것인가? 그들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은 단순함 법정적인 개념으로서 죄용서함을 선언받았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더 근본적으로 언약적이고 종말론적인 개념으로서, 죄용서함을 바탕으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예 악한 주인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새로운 주인에게 모든 충성을 바치는 것을 뜻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죄와 마귀와 육체와 같은 악한 세력들이 지배하는 악한 시대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다스리는 새로운 시대로 이동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윤리적으로 볼 때, 의롭다함을 받은 자는 육체의 정욕에 복종하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이다.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은 이 세상 주관자들에게 노예처럼 완전히 예속되어 살고 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계속적으로 이 악한 세상의 절대 군주들에게 구원을 받고, 인간의 능력으로는 성취 불가능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기 위하여, 주님의 다스리심에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며, 성령의 능력만을 의지하며 사는 자이다. 이런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생산하게 된다. 그리하여 율법은 완성된다. 이런 자들에게 율법은 정죄를 선언할 수 없다<갈 5:23이하>.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에게 주어지고, 영생의 복이 임한다<갈 6:>).

 

결론적으로 말하면, 비록 율법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결과로 시내산 언약의 의무와 예속시키는 능력으로서의 두 기능을 상실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뜻의 표현으로서의 역할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믿는 자에게 율법을 행하라고 결코 명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옛 언약 시대에는 율법의 모든 외적 요구에 순응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중요한 의무이었다. 그러나 새 언약 시대에는 그것이 더 이상 효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속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훨씬 더 깊은 헌신, 즉 성령의 절대 주권적인 다스림에 전 삶을 완전히 복종시키는 것이다. 그 결과는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위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여 이웃을 사랑하도록 강권을 받고 또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안에서 율법의 전 의도는 실현된다. 이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의 모든 계명은 명시적이든지 아니면 암시적이든지 사랑의 총망라적인 요구를 표현하는 것임을 시사한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연구가 정당하다고 한다면, 우리의 연구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적인 주장을 할 수 있다.

 

1. 바울은 유대 종교의 율법을 잘못 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Raeisaenen은 바울이 자기 당대의 율법을 언약의 틀에서 분리시켜 구원의 수단으로 완전히 잘못 제시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을 철저히 언약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 바울이 유대교를 포함하여 율법에 대하여 부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유대교가 율법주의적인 종교이고 율법이 의와 구원의 수단이 되어 있기 때문이거나(전통적인 해석), 혹은 당대의 유대교가 아무런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신하였기 때문이거나(Sanders), 혹은 율법이 유대종교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특수한 민족에게 한정시키는 사회학적인 기능 때문이(Dunn, Wright, Barclay) 아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건의 빛 아래서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의 범죄 때문에 그들 위에 임하였던 율법의 저주를 감당하심으로써(갈 3:10,13),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우주적인 구원의 약속(창 12:3; 갈 3:8)을 성취시켰으며,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와 더불어 새 언약을 재정하셨다고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옛 언약은 율법을 지키는 데 실패한 이스라엘에 의하여 파기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2. 갈라디아서에 나타나 있는 바울의 율법관은 완전히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Huebner는 바울의 초기 서신인 갈라디아에서는 율법이 전적으로 부정적으로만 묘사되어 있고, 반면에 후기 서신인 로마서에는 갈라디아서와는 대조적으로 긍정적인면이 많이 나타나 있다는 점에 근거하여 두 서신 사이에 율법에 관한 진화론적인 발달이 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바울은 갈라디아서의 권면 부분에서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랑은 모든 율법의 성취라고 말하면서 새 시대에 있어서는 율법의 유효성을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에, Huebner의 주장은 정당치 않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묘사되어 있는 율법이 정확하게 동일하지 않는 것은 율법에 관한 바울 자신의 사상적 발달 때문이 아니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수신자와 그들의 상황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강조점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보아야 한다.

3. 갈라디아서에 있는 율법에 관한 바울의 취급이 모순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Raeisaenen은 갈라디아서 자체 안에서도 율법에 대한 바울의 묘사가 서로 불일치를 보이고 서로 모순을 일으키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견해로는 이것이 상호 모순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가 이미 주장한 바와 같이, 바울이 다른 관점에서 율법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언약적인 관점에서 바울은 율법 준수를 언약에 머물러 있기 위한 조건으로 본다. 그렇지만 그는 구원사적인 관점에서 율법의 역할을 존재하는 상황을 최악의 상황으로 만들기 위하여 범죄를 산출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바울의 율법에 대한 Raeisaenen의 접근은, 비록 그의 주장이 가끔 인상적이기는 하지만 너무나 단수하여 바울의 부유한 사상을 잡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의 결론은 갈라디아서에 나타나 있는 바울의 율법에 관한 언급은 상호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먼일 우리가 바울의 서신에 나타나 있는 동일한 주제를 접근하는 데 있어서, 각 서신의 전체적인 수사학적인 구조와 상황,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배경과 그리고 다양한 신학적인 관점들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바울의 불일치에 관한 대부분의 비판이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수 있는 것으로 믿는다.

 


 

1 (갈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 (갈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창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3 (창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4 (갈3: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5 (롬4: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롬4: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6 (롬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롬4:19)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롬4: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롬4: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7 (갈3: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지어다

8 (갈3: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9 (갈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3: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갈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3: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갈3: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10 (갈4: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11 (갈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12 (갈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갈3: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갈3: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갈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갈3:20)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갈3: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갈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갈3: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갈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3: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갈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갈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13 (롬4: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 (갈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15 (갈3: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16 (갈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갈3: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7 (갈3: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18 (갈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19 (갈3: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20 (창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21 (롬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22 (엡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엡2: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23 하나님은 미혹자이신가? 어떻게 자기 백성이 죄를 짓도록 율법을 주신단 말인가? 법이란 죄를 지은자를 벌하기 위함이며 또한 법이란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하는 억제 역할을 하는 기능을 하는 것인데, 어떻게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죄를 짓게 하기 위하여, 자기 백성이 죄를 생산하도록 하기 위하여 율법을 주신단 말인가? 물론 죄를 짓게 하여 더 큰 목적을 이루신다는 의도가 있을지라도--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이는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만약 율법의 기능 중에 하나가 죄를 생산하기 위함이라면 목적, 즉 메시야를 바라보게 하는 목적을 이루게 하기 위하여 자기 백성이 죄를 짓도록 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생산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죄에 속박되어 죄의 종이 되고 죄로 말미암아 죽은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으로 하여금 죄는 우리 등뒤로 멀리 멀리 버리셨고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죄를 멀리 하게 하셨다. 그런데 율법의 기능이 죄를 생산하기 위함이라면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은 어떻게 할 것이다? 우리는 죄와 범법의 관계를 좀더 구체적이고 창조 때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분명한 범법 행위이다. 이러한 범법으로 말미암아 죄가 이 땅에 들어 온 것이다. 그러므로 범법은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그 순간부터 있어 온 것이고 또한 동시에 죄는 그 범법을 타고 이 땅에 침투해 들어 온 것이다. 범법은 모세의 율법을 어기므로 생겨난 것이 아니고 최초의 죄가 생겨난 그 순간부터 있어 왔고 또한 죄는 아담이 최초의 죄를 짓는 순간부터 범법은 있어 왔다.

24 (롬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25 (롬7: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롬7:9)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롬7: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롬7: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롬7:12)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롬7: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롬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롬7: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롬7: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롬7: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7: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롬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26 계명이나 율법이 있기 전에도 인간은 죄를 지어 왔다. 즉 탐심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기 전에도 인간은 탐심을 품고 있었고 탐심으로 인하여 인간은 죄를 짓고 있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탐심의 죄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하여--그러므로 계명이나 율법은 선하다(롬 7:12)--인간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죄, 즉 사단은 그 계명을 이용하여 인간이 탐심의 죄를 짓게 하였다. 그 이유와 증거는 최초의 법 즉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가지고 사단은 아담에게 이용하였다. “정녕 하나님께서 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더냐?” “죽지 않으리라”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등등. 그러므로 율법이나 계명은 죄를 생산하거나 더 하거나 짓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것이 아니다. 창조 때부터 사단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한 목적으로 주신 것들을 악용하여 인간이 죄를 범하므로 하나님을 떠나게 하고 있다.

그리고 창조시 인간에게 왜 선악과를 주셨는가?에 대한 질문보다는 왜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게명을 주셨는가가 좀더 구체적인 질문이 될 것이다. 즉 인간의 입장에서 선악과를 만드셨다는 것이 의문이 아니라 왜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는가?이다. 왜 먹지 말아야 될 것을 만드셨는가? 이는 동산 중앙의 선악과를 볼 때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인 것을 인식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동산 중앙에 있다는 것은 매일 같이 주시할 것과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드신 목적과 계명을 주신 목적은 동일하다. 만드신 목적은 인간은 피조물임을 인식하게 하여 창조주께 순종케 함이요, 계명의 목적은 그 계명을 받은 자와 수여자는 주종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인간은 반드시 수여자에게 순종하여야 한다. 만드신 목적과 그것을 통하여 요구하시는 것이 동일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27 즉 바울의 개종 후의 경험이나 심정이 아니다(我言)

28 (갈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29 (갈3:15)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갈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갈3: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갈3: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갈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갈3:20)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갈3: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갈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30 (갈3: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갈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3: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갈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갈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4: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갈4: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갈4: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갈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갈4: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4: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4: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31 (갈3: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32 (갈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33 (갈3: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34 (갈4: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5 (갈4: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갈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갈4: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6 (갈4: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

37 (사37:19)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나 이들은 참 신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뿐이요 나무와 돌이라 그러므로 멸망을 당하였나이다 (레2:11) 무릇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물에는 모두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 (레5:7) 만일 힘이 어린 양에 미치지 못하거든 그 범과를 속하기 위하여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여호와께로 가져 가되 하나는 속죄 제물을 삼고 하나는 번제물을 삼아 (레16:20) 그 지성소와 회막과 단을 위하여 속죄하기를 마친 후에 산 염소를 드리되

38 (갈4: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39 (갈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40 (갈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41 (갈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42 (갈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43 (갈5: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44 (갈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45 (갈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갈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46 (갈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갈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47 (갈4: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48 (레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49 (고전14:34)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50 (갈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51 (갈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52 (롬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롬7: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롬7: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롬7: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7: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롬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53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54 (갈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55 (갈4:6) 너희가 아들 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56 (롬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본문스크랩] 바울의 율법과 복음 -홍인규|작성자 이덕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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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율법과 복음 서론 / 홍인규 교수

 

 

서론

 

율법은 바울에게 있어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율법은 바울의 신학과 윤리의 여러 주제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의 율법관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바울의 사상을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일이다.

 

바울 서신에서 율법이라는 주제는 극도로 복잡한 문제이다. 쇠프스가 말한 것처럼, 그것은 아마도 "바울의 신학에서 가장 난해한 교리적 이슈"일 것이다.1 그 난점은 주로 바울의 율법관에서 나타난 외견상의 모순에 기인한다.

 

한편으로, 바울은 율법을 부정적으로 말한다.

(1) 칭의는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는다(갈 2:16; 3:11; 롬 3:28).

(2) 율법은 약속보다 열등하다(갈 3:15 이하).

(3) 율법은 범법함을 (생산하기) 위해서 주어졌다(갈 3:19).

(4) 율법은 죄를 더하기 위해서 주어졌다(롬 5:20; 7:5, 8-13; cf 고전 15:26).

(5) 율법은 생명을 공급해 주지 못한다(갈 3:21).

(6)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갈 2:19; 롬 7:4). 그리고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갈 3:25; 5:1 롬 7:6).

(7)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다(롬 10:4). 등등.

 

다른 한편으로, 바울은 율법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1) 율법은 거룩하고(롬 7:12), 영적이다(롬 7:14).

(2) 율법은 지식과 진리의 (구체적) 표현이다(롬 5:20).

(3) 계명은 생명을 위한 것이다(롬 7:10; cf 갈 3:12).

(4)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율법을 굳게 세운다(롬 3:31)

(5) 모든 율법은 사랑 안에서 완성된다(갈 5:14; 롬 13:8, 10; cf 갈 6:2; 롬 8:4) 등.

 

그러므로 지금까지, 특히 지난 수십년 동안에, 바울과 율법에 대하여 막대한 양의 글들이 쏟아져 나온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학자들의 이와 같은 엄청난 수고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의견의 일치는 이루지 못하고, 각양각색의 상이한 견해들만 양산해 내었다는 것은 불행한 알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여기서 모든 의견들을 소개하지 않겠다. 다만 현재까지 제안된 해결책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것들만 개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2

 

1. 잘 알려진 대로, 수많은 학자들은 율법주의적으로 사용된 율법과 하나님의 뜻의 표현으로서의 율법을 구분하거나3, 의식법과 도덕법을 구분하거나4, 또는 모세의 토라와 메시아의 토라 사이를 구분하여5 바울의 율법관에서 어떤 일관성을 찾으려고 시도하였다.

 

2. 어떤 학자들은 율법에 대한 바울의 진술에서 불일치(inconsistencies)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진술들을 발전적인 구도(developmental scheme) 안에서 조화시키려고 한다. 드레인에 의하면,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의 압력을 받으면서 쓴 갈라디아서에서 자유방종주의자(libertine)로서 율법을 완전히 비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고린도전서에서는 율법주의자처럼 보인다. 이 서신에서 바울은 영지주의자로 기울어 가는 자유방종주의자들에 직면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함으로써(고전 7:19) "법적인 언어 형식"을 다시 도입한다.6 그러나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갈라디아서의 자유방종주의(libertinism)와 고린도전서의 율법주의를 결합시킨다. 이러한 종합은 바울 신학에 대한 균형 있고 중립적인 표현(자유방임주의도 율법주의도 아닌)이 나타나는 로마서에서 좀더 충분히 이루어진다.7 로마서에서 바울은 율법의 구원 능력은 부인하지만, 그것의 신적 기원(롬 7:22, 25, 8:7)과 믿는 자의 생활 속에서의 긍정적 역할(롬 8:3-4, 13:8-10)은 인정한다.8

 

휘브너도 비슷한 이론을 제시하는데 그의 기본 명제를 보면, 율법에 대한 바울의 사상은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의 기록 사이에 중요한 발전이 있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쓸 때 율법에 대하여 전적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였다고 주장한다. 즉, 율법은 범법 행위를 유발하기 위하여 타락한(demonic) 천사들이 주었으며(갈 3:19),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계명 외에는 율법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갈 5:14).

 

이러한 과격한 입장은 예루살렘 교회의 격렬한 바난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것 때문에 바울은 그의 율법관을 재고하게 되었다. 그 결과가 로마서에 나타나 있다. 로마서에 보면, 율법은 신적인 것이며, 그 기능은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지(롬 3:20, 7:7) 죄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로마서에는 모세의 율법과 사랑의 계명 사이의 대조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그 대신, 사랑의 계명은 여전히 유효한 모세 율법의 요구 사항들을 요약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롬 13:8-10).

 

휘브너는 로마서 10:4을 주석하면서, 갈라디아서에서는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지만, 로마서에서는 "그리스도가 율법에 대한 육적 오용의 마침"이라고 하였다.9

 

빌켄스도 마찬가지로 바울의 율법 이해에 어떤 발전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갈라디아서의 논쟁적 상황에서 바울은 율법의 폐지를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와 율법, 믿음과 율법의 행위, 약속과 율법 사이의 대조를 발전시킨다. 동시에 그는 교회를 이스라엘과 대립시킨다. 그러나 로마서에서 바울은 율법을 하나님의 법으로 제시하면서, 율법은 믿음으로 폐지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성취된다고 말한다(롬 3:31, 13:8-10).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함께 심판 아래로 끌어 간다.10

 

3. 이와는 대조적으로 샌더스(Sanders)는 갈라디아에서 로마서로 직선적인 발전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 대신에 그는 로마서에서의 율법에 대한 바울의 진술에 내적 긴장과 불일치가 있음을 발견한다. 예를 들면, 롬 1:18-2:29에서 바울은 우주적인 죄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2:14-15, 25-29에서는, 어떤 자는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로마서 로마서 2장에서는 죄가 인정되기 위해서는 율법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해놓고, 5:12-14, 18에서는 율법이 없던 아담과 모세 사이의 시대에도 죄가 인정되었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로마서 5:20-21과 7:7-13, 14-25에서 죄와 관련된 율법의 기능에 대하여 상반되는 세 가지 설명을 제시한다.11

 

센더스가 보기에, 이상의 모든 것들은 바울의 신학적 사유가 "곤경에서 해결로 나아가기보다는 해결에서 곤경으로" 나아가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12 다시 말해서, 바울의 율법관은 인간의 곤경을 분석한 다음 그리스도가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결론을 내린 데서부터 형성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라는 것이다.

 

레이제넨도 비슷한 노선을 취한다. 그러나 그는 샌더스보다 상당히 더 과격하다. 그는 "모순과 긴장은 율법에 대한 바울의 신학에서 항구적인 특징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것들은 "바울이 개인적으로 신학적 문제점들을 안고 있었음을 지적하는 것들"이라는 것이다.13 비일관성이 포착되는 주요 영역은 율법의 개념과 지속적 유효성, 성취 가능성, 기원(origin) 그리고 기능이다. 레이제넨은 바울이 일관성 없는 율법관을 갖게 된 것은 선교 사역을 하는 중에 이방인의 율법관을 수용하여 자기 것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4. 던은 자신이 이전의 한 논문에서 제시한 논증을 사용하여,14 위에서 살핀 샌더스와 레이제넨의 해석에 불만을 표시하고, 그들은 모두 바울 서신들의 사회적인 정황 속에 충분히 파고 들어가지 못했고, 당시의 율법이 발휘했던 사회적 기능의 온전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던이 보기에 바울은 율법 자체를 배척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공격한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구분하는 율법의 사회적 기능이다. "율법의 행위"라는 어구는 일반적인 선한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특수하게 이스라엘의 정체의 독특성에 날카롭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요구 사항들"을 가리키다.15 이러한 이유로 할례와 음식법, 안식일 준수가 "율법의 행위"에 대한 논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와 같은 사회적인 기능을 제외하면, 율법은 계속해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사랑 안에서 성취된다. 

 

5. 위에서 언급된 바 바울의 율법관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법들에 반대하여, 웨스터홈( Westerholm)은 루터의 바울 이해를 부활시키고자 한다. 그의 견해로는, 바울에게 있어 율법은 기본적으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세세한 요구 사항들의 총합"을 가리킨다.16 이 모세의 율법은 생명을 위하여 "행함"(doing)을 요구한다(갈 10:12; 롬 10:5; 레 18:5).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는 일은 이스라엘의 구원의 길로 이해되어야 한다.17 그러나 바울은 인간이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대조시키고 있다. 웨스터홈은 계속해서, 율법은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하게 대치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율법의 교훈에 매달릴 의무가 없고,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한다.

 

필자의 생각에는, 위의 해결책 가운데 어느 것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바울과 율법이라는 주제는 설득력 있는 해결책을 얻기 위해서 과학적인 탐구를 계속 요구하는 문제이다. 이 점에서 필자는 근래의 해석학 분야의 발전에 비추어 이 문제에 새롭게 접근해 보아야겠다는 도전을 받았다.

 

바울의 율법관에 대한 포괄적인 취급은, 그의 서신들 각각에 나타나 있는 율법에 대한 발언들을 전반적이고 철저하게 조사한 것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확신이다. 그 이유는 바울의 각 서신은 특정한 수사학적(rhetorical), 사회적 정황 속에서 기록되었고, 따라서 각각 그 나름대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율법 문제의 복잡성을 감안하여, 필자의 연구는 율법이 처음으로 취급되었던 갈라디아서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다.18 필자가 보기에는, 지금까지 아무도 이 서신에 표현된 바 율법에 대한 바울의 이해를 심층적으로 파헤치려고 진지하게 시도한 적이 없었다.

 

본서는 7개의 장으로 이루어졌다. 제 1장에서는 갈라디아서의 표면 구조를 분석한다. 여기서 사용한 주요 도구는 강화 분석법(discourse analysis)이다. 그러나 고대 서간문 형식과 수사학적 구조도 참작할 것이다. 제 2장에서는 구조 분석에 의하여 드러난 주축적(pivotal) 진술들을 탐색하여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바울의 신학적 관점을 파악한다. 제 3장에서는 적대자들의 주장과 정체를 재구성해 본다. 갈라디아서의 구조와 바울의 신학적 관점으로부터 도출된 함의들(implication)이 이 작업을 위한 기준으로 활용된다. 이상의 3개 장이 제 1부를 구성한다.

 

이러한 예비적 고찰에 근거하여, 제 2부에서는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을 어떻게 취급하였는가를 다룬다. 이것은 4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제 4장에서는, 갈라디아서의 "율법"(ν?μο?)은 두 가지 예외를 제외하면(갈 3:21b, 4:21b)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모세의 토라를 가리키며, 그것은 하나의 완전한 단위로 간주된다는 것을 간단하게 주장하려 한다. 제 5장에서는, 율법을 시내(Sinai) 언약의 의무로 보지,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에 들어가기 위한 요건으로 보지 않는다. 제 6장에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율법이 수행하는 기능을 조사한다. 제 7장에서는 율법과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다룬다. 결론 부분에 가면, 갈라디아서의 율법에 대한 필자의 논의에 따르는 결과들이 요약된 형식으로 제시되고, 그 후에 바울과 율법에 대한 최근의 논쟁들과 관련 있는 몇 가지 함의들이 필자의 연구로부터 도출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 논문이 율법에 대한 바울의 여러 가지 진술들을 좀더 명료하게 밝히는 데 기여하게 되기를 바란다.

 

 

홍인규 교수의 '바울의 율법과 복음'에서 발췌(13-20p)

각주 1

Schoep 1961:168.

각주 2

바울의 율법에 대한 최근의 논쟁들을 전반적으로 개관하려면, Moo 1987:287-307을 보라.

각주 3

예를 들면, Burton 1921:443-60; Cranfield 1964:43-68; Moule 1967:389-406; Ladd 1968:50-57.

각주 4

예를 들면, Haufe 1966:171-78; Kaiser 1983:307-14; Schreiner 1989:47-74.

각주 5

예를 들면, Davies 1948:71-72, 136-46; Longenecker[1964] 1976:128-32, 183-96.

각주 6

Drane 1975:65.

각주 7

Drane 1975:4.

각주 8

Cf. Drane 1974:167-78.

각주 9

Hubner 1968:148-49.

각주 10

Wickens 1982a:154-90; Wilckens 1982b:17-26

각주 11

Sanders 1983:74-75.

각주 12

Sanders 1983:150; cf. Sanders 1977:442-47.

각주 13

Raisanen 1983:11, 12.

각주 14

Dunn 1983a.

각주 15

Dunn 1985:531; cf. Dunn 1983a:107-11; Wright 1978:61-88.

각주 16

Westerholm 1988:108.

각주 17

Westerholm 1988:142.

각주 18

Cf. Cranfield 1964:62.

  1. Schoep 1961:168. [본문으로]
  2. 바울의 율법에 대한 최근의 논쟁들을 전반적으로 개관하려면, Moo 1987:287-307을 보라. [본문으로]
  3. 예를 들면, Burton 1921:443-60; Cranfield 1964:43-68; Moule 1967:389-406; Ladd 1968:50-57. [본문으로]
  4. 예를 들면, Haufe 1966:171-78; Kaiser 1983:307-14; Schreiner 1989:47-74. [본문으로]
  5. 예를 들면, Davies 1948:71-72, 136-46; Longenecker[1964] 1976:128-32, 183-96. [본문으로]
  6. Drane 1975:65. [본문으로]
  7. Drane 1975:4. [본문으로]
  8. Cf. Drane 1974:167-78. [본문으로]
  9. Hubner 1968:148-49. [본문으로]
  10. Wickens 1982a:154-90; Wilckens 1982b:17-26 [본문으로]
  11. Sanders 1983:74-75. [본문으로]
  12. Sanders 1983:150; cf. Sanders 1977:442-47. [본문으로]
  13. Raisanen 1983:11, 12. [본문으로]
  14. Dunn 1983a. [본문으로]
  15. Dunn 1985:531; cf. Dunn 1983a:107-11; Wright 1978:61-88. [본문으로]
  16. Westerholm 1988:108. [본문으로]
  17. Westerholm 1988:142. [본문으로]
  18. Cf. Cranfield 1964:6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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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 믿음, 칭의, 양자, 성화, 견인 등은 모두 하나님이 미리 마련하신 구원의 수단이다. 하나님은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이러한 일들을 성도들을 택하실 때에 그 자녀가 되는 수단과 방법으로 미리 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영원한 영광으로 택하실 때에 영원한 영광에 이르는 방법과 수단까지도 정하신다. 이런 것들을 정하지 않고 성도들에게 알아서 영원한 영광에 이르라고 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설정하고 이 목표를 이루는 자에게만 상을 주겠다고 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로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란 수단을 준비하셨고, 부르심, 믿음, 회개, 칭의, 양자, 성화, 견인 등과 같은 성령님의 사역을 영원한 영광에 이르는 수단으로 미리 준비하셨다. 예수님이 객관적으로 획득하신 구원과 성령님이 주관적으로 적용하시는 구원을 성도들이 영원한 영광에 이르는 수단으로 준비하신 것이다. 그래서 성도들의 구원은 흔들리지 않는다. 성도들이 구원을 획득하고 획득한 구원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획득하시고 하나님이 적용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성도들을 오직 하나님의 순전한 자유로운 은혜와 사랑으로 택하시어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하시는 것처럼, 오직 하나님의 순전한 자유로운 은혜와 사랑으로 성도들이 그 영원한 영광에 이르는 수단들도 미리 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부르심, 믿음, 회개, 칭의, 양자, 성화, 견인 등에 성도들을 참여시켜 주심으로 성도들이 이 일들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기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있다. 비록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을 하고, 우리가 죄에 대하여 회개를 하고, 우리가 점점 더 거룩한 자로 자라가고, 우리가 여러 시험과 고난들 속에서도 우리의 믿음을 져버리지 않지만, 실은 이러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순전한 자유로운 은혜와 사랑으로 인한 것들이다.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미리 정하신 것이므로 이것들 모두는 하나로 묶여있다. 일종의 사슬(체인, chain) 같은 것이다.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는 이것을 황금사슬:(golden chain)이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의 획득과 적용을 위해 부르심, 중생, 회개, 양자, 칭의, 믿음, 성화, 영화, 견인 등을 황금과 같이 귀하고 견고한 체인으로 하나가 되게 묶어 주셨다는 것이다. 체인을 이루는 각 이들이 촘촘히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 페달을 밟는 발의 힘이 그 체인을 통해 바퀴에 실패하지 않고 그대로 전달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신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자전거 체인의 이들보다 더 깊고, 많고, 신비하다. 그 구원이 우리에게 한 번에 순간적으로 간단히 펼쳐지지 않는다. 과정과 순서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황금과 같은 귀한 사슬로 연결되어 반드시 우리에게 실패 없이 주어진다.

 

요사이 이것을 구원의 서정”(序程, The order of salvation)이라고 부르는데, 자칫 오해하면 부르심, 중생, 회개, 양자, 칭의, 믿음, 성화, 영화, 견인 등에 엄밀한 순서가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구원의 서정은 이것들이 나열한 순서대로 사람에게 일어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사람에게 주어질 때 위와 같은 과정이 있다는 뜻이다. 이 과정은 하나의 사슬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신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자전거의 체인의 이들을 보면 이것이 없이 저것이 없고, 저것이 없이 이것이 없는데, 바로 우리의 구원의 과정을 이루는 것들이 모두 하나로 연결이 되어 반드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이신칭의오직 은혜오직 믿음의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이것에 대한 이해 없는 이신칭의는 언제든 신인협력으로 나아간다. 이미 성화는 신인협력으로 너무 이해되고 있다. 황금사슬과 떨어져 오직 믿음을 말하면 이미 거기에서는 믿음이 구원의 원인이 되기 시작한다. 이것 없이 저것을 준비하시지 않은 하나님의 크고 다양한 사역은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다고 할 수 있겠다.

 

이것들을 이해할 때 비로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택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가시는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역이 이해가 된다. 이에 대한 이해가 적으면 우리는 그만큼 성경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 사람이 하는 일로 읽게 되어 성경을 때로는 위인전기전으로 읽게 되고, 때로는 적극적 사고방식과 긍정적 사고방식을 고취하는 인간 계발서로 읽게 되고, 진리 대신에 정직과 인내와 성실이라는 인간적 교훈에 집중하게 된다.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 등과 이스라엘 민족을 보라. 하나님은 부족한 이들의 범죄와 탈선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며 끝내는 이들에게 구원을 주시지 않는가? 구약이나 신약이나 모두 예수님이 획득하신 구원과 성령님이 적용하신 구원에 대한 기록이지, 절대로 사람들의 정직, 용기, 인내, 화합에 관한 기록이 아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이러한 구원의 사역을 사랑으로 하시지 않는다면 인간들은 노아의 홍수 때와 같이 모두 죽어갔을 것이고,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을 당하였을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에 나오는 모든 신자들에게 즉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나 요셉이든, 선지자이든, 제사장이든, 왕이든, 열 두 제자이든 모두에게 부르심, 중생, 회개, 양자, 칭의, 믿음, 성화, 영화, 견인을 하나의 사슬로 묶어 주셨다. 이들 모두의 생애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반드시 주시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처음과 마지막이 되시고, 시작과 마침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의 시작과 마침이 되시어 우리에게 완벽한 구원을 주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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