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전야(1)

교회론 2017. 7. 28. 08:03

종교개혁 전야(1)

 

종교 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여러 곳에서 종교개혁의 의미를 살피고 한국 교회가 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고 있습니다. 매우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한국 저자들에 의하여 종교개혁자들의 평전이 출판되었습니다. 한국인의 눈으로 바라본 종교개혁자들의 모습은 한국 교회의 성장을 잘 보여줍니다. 이제 유학 가서 공부하여야 할 이유가 없을 정도로 박사 학위 소지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유학 가는 사람들이 줄지 않는 것은 참으로 신기할 정도입니다.

한국 교회는 세계 선교 역사 가운데 가장 독특합니다. 복음이 증거 되고 단기간에 세계 최고의 성도수를 자랑하는 교회가 세워질 정도로 성장한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복음이 먼저 들어갔던 일본과 비교하여 본다면 그 차이는 더욱 기이한 일입니다. 참으로 한국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 교회를 보면 이러한 은혜가 무색한 것을 보게 됩니다. 마치 500년전 종교 개혁 전야의 모습과 같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은 한 순간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그 전조 증상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리고 때가 이르러서 개혁의 불길이 타올랐던 것입니다.

종교 개혁 전야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종교개혁을 기념하고 적용하는 일에 우선해야 합니다. 도대체 종교개혁 전야는 어떠했는지 그리고 우리는 어떠한지 살피는 것은 매우 의미있습니다. 종교 개혁 전야의 모습을 중심 말로 정의한다면 네 가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교회의 탐욕입니다. 둘째 사제의 타락입니다. 셋째 사제의 무지입니다. 넷째 성도들의 각성입니다. 이것이 종교 개혁 전야의 모습입니다. 이 모습을 하나씩 살펴보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상고하게 합니다.

첫째로 교회의 탐욕입니다. 중세 교회는 교회 역사 가운데 가장 형식적인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교회는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당시의 권력자들과 끊임없는 결탁을 통하여 교회 부동산을 한 없이 늘렸습니다. 교회는 최고의 부자였습니다. 교회가 부자가 되자 하는 일은 건물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중세에 나타난 로마네스크, 고딕,돔 양식의 성당들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습니다. 급기야는 로마의 베드로 성당을 짓는 일에 돈이 모자라니까 면죄부라는 기상 천회한 방식으로 돈을 모았습니다. 교회의 탐욕이 낳은 괴물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교회의 탐욕을 향하여 일침을 가하였던 단체가 수도원과 수도사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프란체스코는 대표적인 청빈한 수도사입니다. 청빈을 강조하였던 수도사들은 교회의 탐욕에 대하여 회개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일은 지금 세게 도처에 프란체스코 수도원의 땅과 건물들이 엄청나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의 탐욕은 종교개혁의 아침을 오기전의 칠흑과 같은 새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탐욕으로 가득차면 복음이 바르게 증거되지 않습니다. 가공되지 않은 순수한 말씀이 증거되지 않고 조미료가 가득찬 말씀만이 들려집니다. 면죄부는 교회의 탐욕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오늘날 면죄부를 남발하고 있는 강단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더 이상 회심의 설교는 하지 말자고 요청합니다. 원색적인 복음을 전하는 것은 경쟁 사회에서 힘들게 살고 있는 성도들을 피곤하게 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래서 선포하지 말고 이야기하자고 합니다. 좀 조미료가 가득찬 달콤하고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설교를 하자고 말합니다.

교회가 탐욕에 차 있으면 타협하기에 딱 좋습니다. 그래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사이를 만드는 일입니다. 더구나 요즘 교회가 힘든 시대에 설교자리 하나 얻는 것도 어려운 시기에 이러한 타협은 아주 절묘합니다.

교회가 커지면 소속된 사람들은 자부심을 갖습니다. 한 통속이 되고 의기양양합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마치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여로보암을 떠오르게 합니다. 하나님은 여로보암이 자신의 권력을 의지하여 우상숭배의 자리에 있자 그의 집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그에게 속하여 있는 자들은 부끄러운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왕상14:9-11]

누구에게 속하여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부심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전야에는 탐욕스러운 교회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탐욕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탐욕의 중심에 있는 성도들이 탐욕을 부끄럽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교회처럼 탐욕을 누리는 것이 축복이 된 것입니다.

부유함이 탐욕이 아닙니다. 부가 목적이 될 때 탐욕이 됩니다. 부는 나눔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평균케 하는 일에 쓰여 지도록 해야 합니다. 더구나 교회는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 역시 부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오래전에 개혁적인 목사님이 청년들을 위한 공간을 몇 백억 들어서 사서 공유하였습니다. 그리고 대단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때 10억씩 수도권과 지방에 건물을 사서 지역 청년들을 위한 공유 공간을 만드는 것에 대하여 요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일언지하에 거부당하였습니다. 그 교회는 잘 나갔고 더욱 커졌으며 갈수록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 점점 빈약한 교회들은 숨쉬는 것도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대형 집회에 서는 강사들의 교회에 젊은이들은 몰리고 가난하고 한번도 그런 자리에 서보지 못한 이들의 교회에는 청년들이 씨가 말랐습니다. 작은 교회는 청년들을 혹사 시킨다는 헛소문은 큰 교회를 가게하고 놀랍게도 그 곳에서 더 바쁘게 사는 것을 봅니다.

교회의 탐욕은 종교개혁의 전야의 모습입니다. 더 높아지고. 더 커지고, 더 넓어지고, 더 많이 집중되고, 양극화가 더욱 심해지는 것이 바로 교회개혁의 전야였습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동일하게 물어오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는 어떠한가? 

출처: 문화와 설교연구원/쉐퍼

|가ㅈ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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