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질문한다는 것은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이런 질문들을 합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한번에 모든 곳에 임하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육체에 속박된 분이라고 누가 그랬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모든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실 수 있습니까? (그분의 귀는 우리의 귀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성부, 성자, 성령님이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나라는 이 세상과는 체질이 다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에게 용서를 받을 수 없다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훨씬 더 큰 죄인이 되는 것입니까? (아니오, 그 반대입니다. 사람은 할 수 없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은혜를 베푸실 수 있습니다. 은혜는 그분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집/맥스 루케이도

잔인한 도축방식 따라 만든 할랄식품은 우상에 바친 제물
막강한 자금력 바탕으로 밀려오는 이슬람 물결에 맞서 영적 분별력 가지고 대처하며 교육 통해 경각심 높여가야

▲ 유해석 선교사(총회이슬람대책위원회 전문위원)

며칠 전에 한 주일학교 교사로부터 문자가 왔다. 내용은 교회에서 주일학생들을 위하여 간식을 사왔는데 자세히 보니 모든 과자에 할랄 인증 마크가 있다는 것이다. 과연 교회헌금으로 이슬람의 할랄식품을 사서 주일학생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2015년 3월 박근혜 전 대통령은 담화문을 통하여 제2의 중동 붐을 예고하였다. 이어서 나온 문화체육관광부 보도 자료에 의하면 첫째 한국에 무슬림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하여 이슬람 기도처소(Musalla)를 보완하고, 주요 관광지에 이슬람 기도처소를 만들고, 둘째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전환을 위해 다큐멘터리를 제작한다는 계획이 있다. 이밖에 의료관광객 확대를 위해 노력하고, 이슬람 음식인 할랄식품을 상품화하겠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그 이후 한국식품연구원은 할랄식품사업단을 발족했고, 할랄식품 전용단지를 조성할 예정이라면서 익산과 대구와 춘천 그리고 제주도에 할랄단지를 조성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최근에는 정권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산테크노밸리를 중심으로 이슬람 신도들을 위한 대규모 할랄타운이 조성될 것이라고 보도되었다. 친(親) 이슬람 정책은 새로 들어선 정권에서도 계속될 것으로 본다. 특히 할랄에 대해서는 경제적 측면으로만 접근하고 이슬람의 종교적인 관점이 무시되고 있는 현실을 볼 수 있다. 여기서 개혁주의 입장에서 이슬람의 할랄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이슬람의 알라는 기독교의 하나님인가?


성경을 바르게 믿고 그 가르침에 충실한 교회를 창출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 16세기 유럽의 신학과 신앙을 총칭하여서 ‘개혁주의’라고 부른다. 포괄적인 의미에서는 16세기 종교개혁의 정신을 물려받은 개혁신학이요, 로마 가톨릭 교회를 개혁하자는 의미에서 개혁주의이며, 그리고 신학 체계는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 중심의 신학이다.


이러한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할랄을 살펴보려면 이슬람의 신(神)인 알라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슬람의 알라가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니라면 알라의 이름으로 바쳐진 할랄식품이 우상제물이 되기 때문이다. 정통 이슬람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인 교제가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이슬람에서 알라는 창조물에게 속한 모든 속성과 상태를 초월한다고 이해하고 있기에 예수님의 성육신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자신을 낮추어 특정기간 동안 자신을 제한했다고 믿는다(빌 2:6-8). 또한 알라가 인간에게 아무리 가깝게 있다(꾸란 50:16)해도 알라는 인간 속에 내주(the indwelling God)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 속에 내주(고전 3:16)하신다. 이슬람에서는 기독교의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를 비판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비논리적일 뿐만 아니라 신성 모독적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꾸란 5:76). 또한 이슬람의 알라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이 아니다. 이슬람에서는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철저하게 부정한다(꾸란 2:116, 43:81). 따라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체를 입고 이 세상을 오신 것을 부정(요일 4:2~3)하는 꾸란의 알라는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요한일서 2장 18절에 대한 주석에서 ‘적그리스도 왕국의 전령사’들로 여러 이단을 언급하면서, 무슬림들이 삼위일체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 대신에 일신론적인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고 보았다. 즉, 이슬람의 알라는 성경의 하나님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일신론적 우상이다.


2. 할랄이란 무엇인가?


1) 할랄(Halal)의 개념


 할랄(Halal)이란 ‘허용된 것(permissible)’ 또는 ‘합법적인 것(lawful)’을 의미하는 아랍어로 이슬람법에 의해 허가된 것을 뜻하며, 이에 반대되는 의미인 하람(Haram)은 ‘금지되는 것(prohibited)’을 뜻한다. 즉, 이슬람 율법에 따라 행해야 되고 허용되는 것이 할랄이고 금지되는 것은 하람이다. 일반적으로 할랄이란 용어는 음식에 관한 규정, 특히 육류 및 가금류에 관한 규정의 좁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나, 사실상 할랄은 무슬림들의 모든 것을 말한다. 이는 행동, 말씨, 복장, 관습, 식사예법 등을 망라하고 있다. 식품 뿐 아니라 화장품이나 의약품 등 공산품까지 폭 넓게 적용되므로 할랄산업이라고 불리운다.


2) 할랄식품


 무슬림의 음식에 대한 규정은 주로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과 무하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의 지침을 따라간다. 꾸란과 하디스에 할랄 또는 하람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들 즉 알라가 침묵한 것은 일반적으로 먹어도 되지만 지역과 학파에 따라 달리 해석, 적용되는 경우가 있다.


<할랄 도축규정>
1) 정신적으로 완전한 성인 무슬림에 의해 도살되어야 함
2) 도살되는 동물의 경우는 이슬람법에 허가된 동물이어야 함
3) 도살되는 동물은 도살되기 전 살아있는 상태여야 함
4) 도살되기 직전에 “Bismillah(알라의 이름으로)”라고 말하고 도살해야 함
5) 도살에 사용되는 기구(칼)는 날카로워야 하며 한번 움직임으로 도살해야 함
6) 도살하는 자는 동물 목 부분의 기도, 식도, 경동맥을 끊어야 함
 


3. 할랄에 대한 개혁주의 입장


‘우상숭배’라는 말은 참 하나님을 제외한 다른 신(神)들 또는 상들(images)에 대한 숭배를 의미한다. 할랄식품을 위한 도축은 반드시 이슬람 율법에 의하여 무슬림 도축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데, “비스밀라((Bismillah, 알라의 이름으로), 알라후 아크바르(Allahu Akbar, 알라는 위대하다)”라고 외치며 한다. 도축 및 제조과정이 일종의 예배의식이기 때문에 그 식품 자체가 이슬람종교를 대변하고 있다. 이슬람 율법이 정해준 종교의식에 따라 도축된 가축과 이슬람의 제조방식에 따라 만들어진 할랄식품은 우상에게 바쳐친 제물이 된다.


그렇다면 우상에게 바쳐진 할랄식품에 대하여 기독교인들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8~10장에 사도 바울은 세 가지로 답변하였다. 첫째, 우상에 관해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관점이다. 우상은 세상에서 아무 것도 아니다. 우상은 세상에 실제 존재하는 신(神)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이 우상에 대한 바른 지식이다. 세상에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유일한 참 신이다(시 96:5; 115:4-7).


둘째, 우상 제물에 관해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관점이다. 사실 식물(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 기독교인을 정(淨)하고 부정(否淨)하게 하지 못한다.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음식으로 만들어 먹든, 우상에게 바치지 않은 식물로 음식을 만들어 먹든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평가받지 않는다.


셋째, 우상 제물을 먹을 수 있는 자유에 대하여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태도이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과 관련하여 기독교인이 믿음의 형제를 고려하여 조심할 것이 있다. 그것은 아무리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양심의 거리낌이 없이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을지라도 믿음이 약한 자들이 시험받아 죄를 짓고 약한 양심이 상처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믿음의 형제 앞에서 신령한 덕을 세워나가는 일을 위해서는 아예 포기하였다.


전 세계가 이슬람의 유입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이때 한국은 오히려 정부가 나서서 경제적인 이권을 고려해 이슬람 붐을 조성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이러한 현실 앞에 기독교인들은 몇 가지 유의하여야 한다.


첫째, 한국기독교는 막강한 자금력을 가지고 몰려오는 이슬람의 물결에 맞서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대처해야 한다. 할랄단지가 조성되면 도축인력 근로자는 무슬림이어야만 한다. 영국의 경우에 할랄시장이 열리자 파키스탄 출신의 무슬림 할랄도축사 5000명이 입국하였다. 따라서 무슬림인구 대거 유입이 불가피하게 되며, 그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둘째, 우상제물로서의 할랄에 대하여 사도 바울의 입장을 취해야 한다. 우상제물로 인하여 문제가 된 일곱 교회 중 버가모, 두아디라교회에게 하신 경고의 말씀을 새겨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부러 할랄식품을 구입할 필요도 없고, 권할 필요도 없으며 기독교인들이 할랄에 연관된 사업에 관여하는 것에 대하여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셋째, 할랄식품은 웰빙하고는 무관하다. 할랄식품은 종교적인 제사 음식이다. 특히 이슬람식 도축방법은 동물들이 극심한 스트레스와 공포를 경험하는 상태에서 피를 쏟아가면서 서서히 죽게 하는 아주 잔인한 방식이기에 한국의 동물보호법 제10조(동물의 도살방법)에도 위반이 된다. 유럽에 폴란드, 아이슬란드, 스위스, 스웨덴, 노르웨이 등의 나라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잔인한 할랄 도축방법을 금하고 있다.


넷째, 할랄은 이슬람교도가 먹거나 사용할 수 있도록 이슬람 율법에 따라 처리·가공된 제품을 말한다. 그런데 할랄 인증 비용의 일부를 정부가 지급해 주거나 할랄 도축장을 만드는데 250억의 예산 중 정부가 30% 지자체가 30% 투자회사가 40%를 부담한다고 하는 것은 종교의 중립을 지켜야 하는 헌법정신에도 위배된다.


다섯째, 많은 사람들이 염려하고 있는 것처럼 할랄 인증 자금이 테러자금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있다. 이슬람에는 두 종류의 기부금이 있다. 하나는 무슬림의 의무사항인 자카트(구제금, Zakat)이고 하나는 언제든지 기부할 수 있는 사다까(Sadaqa)이다(꾸란 2:263). 꾸란에 사다까의 용도가 8가지로 정해져 있는데 그 가운데 지하드에 사용할 수 있다는 항목이 존재한다(꾸란 9:60). 2011년 1월 5일 미국 기독교방송인 CBN은 70억불 규모의 프랑스 할랄 산업의 60%를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로 잘 알려진 무슬림 형제단에 속한 기관들이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고 방송했다.


현재 한국의 식품들 가운데 할랄마크가 인증되어있는 식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필자가 영국에서 사역할 때, 할랄식품이 영국 유통시장을 장악한 가운데 유통업체들이 할랄식품을 일반제품과 구분 없이 판매하는 것에 대하여 비난을 받곤 했는데 지금 그런 일들이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나아가 이슬람의 알라와 기독교의 하나님이 무엇이 다른지 교육해야 한다. 교회학교 학생들의 미래 한국에는 지금보다 많은 무슬림들이 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기독신문  ekd@kidok.com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104234

자유를 찾아 북에서 남으로 이사온 여인 강은정 자매 배불리 먹고 사는 꿈 자유롭게 사는 꿈 그 꿈을 그리며 넘어온 남쪽 땅에서 그녀는 복음을 만났습니다. 가족 모두를 자유의 땅으로 부르셨을 때에 감사! 출처: GOODTV 기독교복음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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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론 / 게르할더스 보스

 

2. 죄

2.1 죄에 관한 철학적 이론들
2.2 펠라기우스 죄론
2.3 로마교 죄론
2.4 원죄
2.5 행위 언약
2.6 아담의 범죄
2.7 첫 범죄로서 원죄

 

2.7.1 원죄(peccatum originale)의 정의와 장점

 

31. 어떤 명칭으로 신학자들은 우리가 화란어로 "유전된 죄"(에어프쏜테; erfzonde)라 부르는 것을 가리키는가?

 

그들은 이를 위해 페카툼 오리기날레(peccatum originale; original sin; 원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32. 왜 이 용어가 화란어 용어보다 더 나은가?

 

이 용어가 "유전된 죄"와 관련하여 생각해야 할 모든 것들을 표현할 때, 다음 두가지 사항을 구별한다면, 더 맞기 때문이다:

 

1) 아담의 첫번째 죄 때문에 우리에게 전가된 죄책.

 

2) 이 전가된 의 때문에 형벌로서 우리에게 내재하는 부패.

여기서 금방 알 수 있는 것처럼, 엄격하게 말해서 단지 후자[Nr. 2]만이 유전된다. 전자는 유전되지 않고, 다만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아담으로부터 우리에게 옮겨진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유전됨으로써 옮겨지는 것은 아니다. 원죄(peccatum originale)는 이것을 유전된 죄보다 잘 표현한다.

 

33. 그러면 원죄(peccatum originale)라는 용어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1) 죄를 원죄라고 할 때, 이것은 그 기원이 인류의 뿌리에서 났기 때문이다.

 

2) 나아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견해에 따라, 모방을 통해 우리 안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근원을 두기(origineel) 때문이다. 비록 이 용어가 이 개념들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사람이 의식적으로 계산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사용되었을 때, 이 모든 것을 몇 단어로 요약할 수 있는 탁월한 도구이다.

 

 

2.7.2 내재적 죄(peccatum inhaerens)

2.7.2.1 내재적 죄의 두 구성요소: 원의의 부재, 적극적 악의 실재

 

34. 이 원죄가 유전되는 경우만을 한정하여 생각할 때(peccatum inhaerens = erfschuld), 어떤 것으로 구성되는가?

 

두 가지로 구성된다:

 

1) 원의의 부재(abwezigheid). 이것은 유전된 결핍이요, 박탈이며, 있어야만 하는 어떤 것이 없는 것이다. 인간은 죄를 지었을 때, 이 죄가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대적하기 때문에, 형벌을 져야 할 의무가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죄를 통해 인간이 하나님께 그에게 합당한 순종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방금 앞에서 본 것처럼, 로마교 신학자들은 이것을 유전된 원죄의 유일한 요소로 생각한다[cf. Q. 7].

 

2) 적극적인 악의 실재(aanwezigheid). 이것은 적극적인 선 대신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을 말한다.

 

 

2.7.2.2 적극적 악의 실재

 

35. 내재적 죄의 두번째 적극적인 요소와 관련하여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가?

 

1) 첫째는 내재적 죄는 본질적이고 고유한 의미에서 죄라는 것이다. 여기서 단지 우리와 절반만 동행하고, 죄를 비유적인 의미에서 말하려고 하는 사람들(동방 그리스 교부들, 항론파들)에 반대하여, 인격적인 죄책이 거기에 결부되었는지만 질문하면 된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이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내재적 부패성에 대한 성경의 교리를 붙들지 않는 것이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재적 죄는 인간 영혼에 주입된 실체(substantie)가 아니다. 또한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실체의 변화도 아니다. 이것은 마니교도들과 종교개혁 당시 플라쿠스 일루리쿠스(Flacus Illyricus)의 오류이다. 죄를 실체로 만들므로써, 사람은 그것의 실재를 견지하려는 열심으로 자기 자신을 지나치고 만다. 실체로서 죄는 더 이상 죄가 아니다. 죄의 개념에서 분리할 수 없는 것은 죄가 성질의 영역에 있지 실제의 영역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3) 마니교도들에 대한 변증에서 어거스틴은 죄의 개념에 철학적인 요소를 도입했다. 이 철학적 요소는 그 이후로 한번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단지 죄가 실체가 아닐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죄가 존재의 박탈, 즉 어떤 부정이라고 가르쳤다. 여기서 그는 신플라톤주의자들과 오리겐의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것은 죄가 제한이라는 범신론적 이론과 연관된다[cf. Q. 1,2]. 그러므로 이 철학적인 요소를 죄 개념에서 몰아내는 것이 낫다. 어거스틴은 다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죄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죄는 하나님을 통해 야기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죄를 부정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어거스틴처럼 이 둘을 믿는다. 하지만 이 믿음을 위한 기초로서 이 철학적 견해를 삼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A. 이 철학적 견해는 단지 하나님이 죄의 원인이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죄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이것을 우리도 견지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든 죄를 야기시켰다는 주장에 분노한다. 그러나 우리는 논리적으로 하나님이 죄의 기원과 아무 관계가 없었다는 것을 분명히 제시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신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B. 죄에 관한 옳은 견해를 갖기 위해 죄를 부정으로 묘사하는 것은 위험하게 보인다. 죄는 삶에서 적극적인 권세이다.

 

C. 후대의 정통신학은 어거스틴의 가르침 중에서 이 철학적 요소를 배제했다. 정통신학은 죄를 단순한 박탈이 아니라 실제적 박탈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4) 따라서 죄는 실체가 아니다. 또한 단순한 박탈도 아니다. 오히려 죄는 어떤 하비투스(habitus) 곧 기질로서, 이것은 실체에 들러 붙어 있으며, 후자[실체]의 본질적인 변화가 없이도 바뀔 수 있다. 나아가 이것은 어떤 기질로서, 그것과 반대되는 것, 이로부터 영혼의 실체가 피할 수 없는 것과 반립을 이룬다. 연장(uitbreding)[이라는 속성]을 소유하는 것이 물질의 본성에 속하듯이, 어떤 도덕적인 기질(habitus)을 갖는 것, 그것이 선하든지 악하든지 하는 것은 인간 영혼의 실체의 본성에 속한다.

 

5) 죄 된 기질은 영혼 전체에 고유한 것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죄 된 기질은 영혼의 모든 기관과 영혼의 전 삶에 미치며, 그 어느 것도 손대지 않은 채 남겨두지 않는다. 저급한 기관에는 죄가 머물고, 반면 고등한 기관은 [건강하게] 남아 있을 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 낮은 기관 높은 기관 할 것 없이 둘 모두에 죄의 부패는 자리잡고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었고, 따라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대상이다. 이것을 "전적 부패"라고 부른다. 이 용어의 의미는 지금까지 우리가 죄의 본질과 형태를 정의한 것으로부터 끌어내야 한다. 만일 죄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면, 전적 부패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전적 부패는 다음 4가지를 의미하지 않는다:

 

A. 전적 부패는 각 사람이 그가 될 수 있을만큼 악하다는 것이 아니다. 비록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고 그와 적대적이 되었지만, 이 적대적의 강도는 사람마다 각각 다르다.

 

B. 또한 죄인은 양심에 하나님의 뜻에 관한 지식을 전혀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 양심은 인간의 도덕적 의식의 현실태(actus)이다. 이 도덕적 의식도 죄의 영향을 받았으나 인간이 이성적 존재로 머무는 한 이 사실에 대한 인식은 그의 의식으로부터 결코 사라질 수 없다. 양심은 이것에 대한 인식이다. 그러나 이 인식이 남아 있다는 것이 인간 안에 하나님께 대하여 선이 있다는 것을 전혀 증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식할 수 있는 무엇이다. 물론 양심은 의지와 감정에 영향을 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기적인 동기들로 하는 그렇게? 것이다.

 

C. 나아가 이것은 어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이기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향해서는 모두가 죄인이요 이기적이다. 그러나 자연인이 움직이는 이 이기심의 원들 안에 많은 동심원들이 있다. 어떤 죄인은 하나님을 행해서는 이기적이지만 그의 주변에 대해서는 넓은 마음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은 자신 안에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 세상에 대하여 거의 완전히 고립되어 있다. 그러므로 시민적의(justitia civilis)가 있을 수 있으나, 동시에 거기에 속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죄인 것일 수도 있다.


D. 죄는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다양한 형태들이 있다. 어떤 사람 안에서도 이 모든 형태들이 다 발현된 적이 없다. "전적 부패"라는 표현에서 "전적"(totale)이란 형용사는 모든 가능한 부패성이 인간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다.

반면, 이 전적 부패라는 말은 본성상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어떤 사랑도 우리 삶의 동기적 원리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결코 우리의 행동과 사고, 말을 결정하지 않는다. 반대로 우리의 전 삶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대성이 기저에 흐르고 있다. 그래서 주님을 의식적으로 대적하는 것으로 발전하기 위해서 어떤 외적 자극이 필요할 뿐이다. 우리 안에는 어떤 영적인 선도 없다.

6) 다른 측면에서 생각할 때, 이 내재적 부패성은 "영적 선에 대한 무능함"이다. 만일 인간이 모든 것에서 죄인이고 죄 된 것 뿐이라면, 이것으로부터 이미 죄인은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런 점에서 "무능"이란 행하는데 불가능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무능"은 다른 의미에서 이해되기도 한다. 즉 무능이란 자신의 의지의 방향을 거스르는 일의 불가능성으로, 악으로부터 선하게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두 번째 의미에서도 인간은 무능하다.

 


2.7.2.3 인간의 본성적 무능

36. 본성적 무능과 이성적 무능 사이의 구분은 무엇을 뜻하며 왜 이 구분을 버려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본성적 무능함을 부인하고 그의 도덕적인 무능함을 주장힌다. 이들이 이 주장으로 의도하는 것은, 인간이 그의 타락한 상태에서도 본성적인 능력을 소유하고 있어서, 이것을 영적으로 선한 일을 행하는데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그는 합리적인 이성, 의지력 등을 가졌고, 선[을 행하는 것]에 대한 기초가 그에게 전적으로 존재하며, 다만 도덕적으로 무능할 뿐이다. 다시 말해서, 이 본성적 기관을 옳은 방식으로 작용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은 것이다. 이 구분에 반대하여 다음 사항을 주목해야 한다:


1) 도덕적 무능과 본성적 무능을 구별하는 것은 옳지 못하고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도덕적"인 것과 "본성적"인 것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 어떤 것은 동시에 도덕적이고 본성적일 수 있다. 만일 사람에 관하여 그가 영적인 선에 무능하다고 말할 때, 이 무능은 본성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무능함은 그의 부패한 본성에 속하고, 이것은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전가되기 때문이다. 이제 누군가 이 무능함이 본성적이다는 것을 부인한다면, 그는 이 말이 가진 유일한 의미에서 그것이 본성적이라는 것을 부인하면서도, 위에서 논의했던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2) 사람들은 보통 본성적 무능과 도덕적 무능 사이의 대립을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다. 그런데 "본성적인"과 "도덕적인"이라는 두 형용사가 이 "무능함"과 함께 쓰이기 때문에, 이것은 마치 무능함에 두 등급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덜 강한 것을 도덕적인 무능함이라 부르고, 더 강한 것을 본성적인 무능함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어법으로 볼 때, 대체로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방식으로, "도덕적"이란 용어와 "본성적"이란 용어와 전혀 관련이 없는 변화가능성이라는 개념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영적인 선에 대한 인간의 무능함이 단지 상대적인 것이라는 오해가 생겨난다.

3) 이 구분은 의지를 너무나 추상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의지의 죄 된 기질과 선한 기질은 의지의 추상적인 셩격과 공통점이 있다. 이 둘은 모두 의지의 기질인 것이다. 그러나 이 추상[의지]이 그것이 내재하는 결정성과 상관없이, 자체로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인간은 악한 의지를 가졌기 때문에 무능하다. 그럼에도 본성적으로는 무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의지를 가졌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유일하게 유의미할 것이다. 여기서 만일 사람이 이 의지를 로마교의 초자연적 의미에서 본성상 결정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의지를 가진 것은 의지의 무능력으로부터 어떤 것도 제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의지의 본성적 존재는 무능함의 약화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모든 구분은 로마교 신학 체계에 속한 것이고 개혁파 신학 체계와는 거리가 멀다.

 

4) 그러나 이 안에 진리의 요소가 없지 않다: 인간을 말할 때, 그가 영적으로 무능하다고 말하면,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은 자신이 할 수 있다면, 자신을 변화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이 생각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타락한 인간 안에는 자신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이 욕망의 흔적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논의한 부분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만일 그가 원했다면, 영적인 선을 행할 수도 있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인간이 원하여 악하다는 것에 강조점을 둔다. 이런 강조는 전혀 불필요한 것이다. 더욱이 이 개념은 너무나 애매하다. 마치 영적인 무능이 우리의 운명이며 우리의 의지에는 해당사항이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마치 우리가 그 아래 신음하며 우리의 최선으로도 거기서 빠져나갈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 생각은 자신들의 무능력 뒤로 숨고 거기에 호소함으로써 복음에 대한 책임성을 회피하려는 무리들 중에 팽배해 있다. 따라서 항상 무능함과 무자원성은 동일한 일의 두 측면이라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우리는 선을 원치 않으며 우리의 의지를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러나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본성적인 무능과 도덕적 무능 사이의 구별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그렇게 하지 않고도]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계속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에 호소할 수 있다. 이 [개념]은 이미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지성과 감정의 능력을 [모두] 잏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5) 인간이 본성적으로 무능하지 않다는 견해는 또한 인간의 이성, 의지 등의 능력이 죄로 인해 심각히 약화되었다는 것 또한 부인한다. 인간이 악하고 또 악에 머무는 것은 이 능력들이 단지 잘못된 방향으로 작용하는 데에만 있지 않다. 설사 도덕적인 방향이 일시적으로 변화되었다 해도, 동시에 그 기관들 자체의 변화가 일어나, 그들이 이전 능력과 완전성을 돌려받지 않는다면, 인간은 하나님께 완전하다 인정될 수 있는 단 하나의 행동도 실행할 수 없다. 지성의 맑음, 의지의 능력, 감정의 기품, 이 모든 것이 죄 된 인간 안에서 손상을 입었다. 여기에 또한 인간의 무능함이 있고, 이것이 여기 지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선한 행위가 결코 완전하지 못한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본성적인 무능과 도덕적인 무능 사이를 구분을 받아들인다 해도, 본성적 무능은 여전히 확고하게 견지되어야 한다.

 

37. 인간의 영적인 무능은 그의 자유 의지의 상실 때문인가?

 

이 질문은 다양한 차원을 고려하여 답해야 한다. 만일 자유 의지의 의미를 영혼으로부터의 강요 없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영혼이 행하는 즉흥적인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 속성은 의지의 개념과 불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자유롭지 못한 노예적 의지란 자체 모순으로 존재한 적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

이와 달리 자유 의지를 인간의 의지가 선에서 악으로 또는 악에서 선으로 바꿀 수 있는 추상적인 가능성으로 생각한다면, 이런 자유의지는 타락 전에 존재했다. 그러나 타락 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신학자들이 죄의 결과중 하나로서 자유의지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선으로 악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은 가졌으나 악으로 선을 만들 능력은 없다. 후자, 곧 어떤 선한 것을 일으키는 일, 나아가 악을 폐지하는 일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특권이다. 인간이 타락 이후 악을 행할 때는 계속해서 자신의 모든 능력이 발전하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을 방해하므로, 이런 점에서 자유롭지 못함과 구속됨을 말할 수 있다. 인간은 그 안에서 죄인으로 존재한다.

38. 어떻게 당신은 영적인 선에 대한 인간의 무능함에 대한 가르침을 증명할 수 있는가?

이 교리는 다음으로 증명된다:

 

1) 성경이 그 어느 곳에서도 타락한 인간에게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2) 그 반대가 사실이라는 성경의 명백한 선언으로부터. Cf. 요 15:4, 5; 6:44; 롬 8:7; 고전 2:14.

 

3) 성경이 우리에게 원죄를 제시하는 형태로부터. 이와 관련하여 무엇보다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성경은 죄 된 인간의 자연 상태를 사망의 상태일 뿐 아니라 육적인 상태로 묘사한다. 이 두 가지 상들[사망, 육]에 포함된 비교점은 [인간이] 영적인 선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무능하다는 것이다. 어떤 죽은 사람이 자신을 일으키거나 죽은 육체에 생명을 표출시킬 수 없듯이, 자연인은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할 수 없다.

 

4) 인간이 부정적으로 말해서 단지 하나님 앞에서 죽고 육체적으로 움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죽음 안에 무엇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쪽으로 발전되는 원리와 적의의 원리가 숨어 있다는 성경의 설명으로부터. 따라서 인간은 단일 사슬이 아니라 이중 사슬로 전적인 무능함에 묶여 있다.

 

5) 만일 인간이 영적인 선을 이루려 할 때, 하나님의 호의와 교제가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된다는 필연성으로부터.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가 그에게 머무는 한. 인간은 그의 인생에서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 인간은 심판에 대한 의식 앞에 있는데, 이 심판에 대한 인식은, 다른 것들을 고려하지 않고도, 모든 선한 행위를 그 뿌리부터 잘라내 버린다.

 

6) 하나님의 성령이 거듭날 때, 직접적으로 행하시는 은혜의 사역의 필연성으로부터. 이것은 위의 Nr. 3)에서 언급한 것의 다른 측면이다. 성경은 도처에서 성령님을 생명을 일으키시는 분이시요, 생명의 원천으로 소개한다. 성경에서 인간 영혼은 그 어느 곳에서도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주체가 아니라, 항상 외부로부터 역사하는 은혜로 변화어야 할 대상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새로운 거듭남, 새로운 피조물,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 등을 말한다.

 

7) 하나님의 자녀들의 경험으로부터. 누구도 그가 율법이 그에게 요구하는 것을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 깨어있는 죄인의 죄책의식은,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그가 죄에 메여 있다는 것과 자신을 스스로 구속할 수 없다는 확신을 포함한다. 후자[인간이 스스로 구속할 수 없다는 확신]는 인간의 실제적 상태를 의식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이로부터 이것이 실제로 무능함의 상태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39. 이 전적 무능력 교리에 대적하여

 

1) 인간의 전적 무능력은 인간의 도덕적 책임성과 양립할 수 없다는 반론이다. 우리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어떤 반론이 제시되었는가?

 

A. 선을 행하는데 무능력이 책임성과 양립할 수 없을 때는, 이 무능력이 도덕적이지 않은 기원을 가질 때이다. 이것은 인간의 경우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의지의 방향이 잘못되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데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어떤 것을 원할 본성적인 능력이 결여된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에게 결여된 것은 자신의 능력의 선하고 도덕적인 성질이다. 우리가 본성적 무능력과 도덕적 무능함을 그별할 때, 이것을 진리의 핵심으로 생각한다. 인간이 도덕적이고 선하다는 것이 인간 본성에 속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도덕적 무능력을 또한 본성적 무능력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B. 인간의 법적 절차에서, 이 절차가 하나님의 길로 수행되는 경우에도, 책임성은 무능력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어떤 재판관도 피고가 언제나 그것 때문에 정죄받는 그 행동을 하지 않을 능력이 항상 있었다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정죄 판결을 내릴 것이다. 더욱이 재판관은 바로 본성과 행위 사이의 관계에서 그의 판결의 이유를 찾을 것이다. 이것이 왜 사람이 피고의 성격과 고소당한 행동 사이에 일치점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할 때, 그것이 항상 유효한 증거로 생각되는 이유이다.

 

2) 인간의 전적 무능력 교리는 [선을 행할] 모든 자극을 제거할 것이라는 반론이다. 그러나 이 반론은 단지 거룩한 행위를 한다는 점에서만 유효하다. 그래서 이것은 경륜이 아직 율법적인 때이던 구약에서보다 신약에서 더 명확하게 제시되었다. 은혜 언약의 혜택들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향하는 영혼의 활동들의 경우, 어떤 자극을 제거하는 것을 말할 수 없다. 이것으 단순히 다음에서 설명되는 이유에서이다. 즉 이런 활동들은 영적으로 선한 행동이 아닌 도구적 행동으로 여겨진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 믿음과 회개라는 은혜 언약의 요구가 온다면, 이것은 "영적으로 선한 행동을 하라, 그러면 당신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의 구원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라"는 의미이다. 물론 믿음과 회개의 경우, 그 안에 영적인 선의 원리가 포함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도 믿음과 회개는 거듭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은혜 언약의 혜택들을 자기 것으로 하는 것은 이런 관점으로 표현할 수 없다. 심지어 사람이 의를 얻는 믿음의 경우도, 질료적인 차원에서 볼 때, 여전히 죄와 불의로 오염된 영혼의 표출이다. 정화를 위해 믿음이 전달하는 그리스도의 의가 필요하다. 우리가 그를 통해 의롭게 되는 믿음도 자체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것이 아니다.

 

3) 인간의 전적 무능력 교리는 회개를 지연시킨다는 반론이다. 사람들은 이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나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맞지 않다. 인간이 자신의 힘과 자신의 주도권 아래 자신의 회심이나 심지어 자신의 거듭남에 어떤 일을 할 수 있다는 의식 속에서 살고 있다면, 이것은 그에게 무관심과 태만함의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자신의 능력 범위 내에 있는 행위들이 우리의 영혼의 생명 안에 더 깊은 움직임을 야기하지 않고, 반면, 이와는 반대로 중요한 일에 있어서 무능력과 무력한 수동성에 대한 의식이 사람을 가장 깊은 심연에서 흔들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심리학적인 증거로 생각할 수 있다. 누구든지 인간에게 자신을 바꿀 수 있다고 설교하는 사람은 인간이 이것을 쉽게 한 시간 후 다음 시간으로 미룰 수 있다고 기대할 것이다. 반면, 만일 이 무능력 자체는 죄책과 책임성으로 양심에 각인되었다는 것을 주의한다면, 인간에게 그의 조건에 관한 완전한 진리를 말하는 것은 결코 해로운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 것이다.

 

 

2.7.2.4 내재적 원죄의 범위

 

40. 무엇으로 원죄의 범위를 광범위하게 결정할 수 있는가?

 

1) 성경은 모든 곳에서 모든 육체는 죄가 있고 하나님 앞에서 그의 길이 부패했다고 가르친다(욥 14:4; 요 3:6; 롬 3:9ff; 왕상 8:46; 시 143:2; 잠 20:9; 전 7:20; 갈 3:22; 요일 1:8). 만일 모든 인간, 그가 누구든지, 심지어 아무런 실범죄도 저지르지 않은 사람(예를 들면 막 태어난 아이)에게도 이것이 해당된다면, 이것은 그들이 원죄 때문에 죄책이 있는 것과 관련 있다.

 

2) 죄는 인간 안에서 너무나 일찍 드러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예를 모방함으로써 죄 된 존재가 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성경은 우리 존재가 시작되는 처음 순간부터 이 죄가 우리에게 들러 붙어 있다고 가르친다(시 51:5; 우리는 이 시편에서 다윗이 내재하는 부패를 변명이 아닌 자신의 간음죄에 대한 심각한 상황으로 인용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시 58:3과 엡 2:3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한다. 죄가 본성이라는 것은 죄가 우리의 인간됨과 함께 주어진 것이며, 생육이라는 본성적 선을 따라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 무엇보다 이 본문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이 내재적 죄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츠빙글리파나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죄는 질병이나 결핍이 아니라 완전히 심판을 받을 만한 죄라는 것이다.

 

3) 죄의 결과는 보편적이다. 시간적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 심지어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않은 어린 아이들에게도 이른다. 결과가 있는 곳에 그 원인도 있어야 한다. 따라서 소시누스주의자들과 항론파 사람들은 이것을 옳게 인지했다. 그들의 입장에 따르면, 육체적 죽음은 어떤 윤리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과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cf. 롬 5:12-14). 신학파 신학은 이 비기독교적이고 비성경적인 입장으로 돌아가는 것과 아이들을 그들의 이성을 사용하기 전에는 동물들과 동등한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들 중에도 많은 이들이 이 입장을 감히 취하지 않으려고 했다.

 

4) 성경은 도처에서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이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면 무엇으로부터 구속인가? 이 구속은 일차적으로 죄책과 죄의 권세로부터 구속이다. 따라서 만일 원죄의 규모를 결정하려 한다면, 이것은 동시에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필연성을 결정하는 것이 된다. 유아들이 세례를 받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았다는 표와 인이다. 그러므로 유아세례는 원죄의 실재에 대한 하나의 증거이다. 유아들에게 구속은 악으로부터 해방이 아니요, 단지 악을 막는 수단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말은 은혜 수단의 지속적인 의미와 직접적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요 3:3, 5*과 비교할 때 분명해진다. 여기서 예수님은 모든 인간이 거듭나야 한다는 절대적인 필요성을 가르치신다(cf. 행 17:30; 막 16:16).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때, 그는 [그 때] 처음으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이미]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고 있는 것이다(요 3:36).

 

5) 성경에서 몇 군데는 죄가 인간에게 보편적이지 않다고 가르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우리는 다음 3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A. 시민적 의. 시민 사회 영역에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지 않으면서, [시민 사회] 법을 의도적으로 범하지 않을 수 있다.

 

B. 이스라엘 내의 언약적 의. 어떤 이가 모세의 법이 규정하는 의식법을 그가 할 수 있는 만큼 이루었다고 하자. 이 사람은 이 언약적 의를 소유한다. 그러나 이 의는 기껏해야 단지 예표적 의미가 있는데, 이는 믿음의 의가 아니며, 행위의 의는 더욱 아니다. 시편의 많은 구절들은 이런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cf. 시 18:20; 37:36-40].

 

C. 전가된 의. 이것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하는 의로, 이것은 내재적 의를 전제하지 않고, 그것을 정확히 배제한다. 인간의 의와 죄 없음을 말할 때, 모든 본문은 이 세 그룹 중 하나로 분류할 수 있다.

 

6) [인간] 경험은 이 세계를 살아간 어떤 피조물도 죄없는 것은 없었다고 증거한다. 심지어 원리상 원죄를 부인하는 사람들도 이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고 가능한 한 가장 좋은 대답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내재적 부패성이라는 설명 외에 다른 모든 설명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죄인인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반대 중거일 수 없다. 죄는 눈을 멀게 하는 권세이다. 이 권세를 통해 죄는 그 자신의 존재를 숨기려 한다. 반대로 은혜의 진보가 있을 때, 그것은 죄와 자연적 마음의 무능력에 대한 깊은 통찰과 함께 간다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41. 어떻게 이 내재적 부패가 아담으로부터 우리에게 전가되는지에 관하여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

 

1) 대다수 개혁파 신학자들은 죄는 비질료적인 무엇으로서 아버지의 씨에 숨겨질 수 있다는 데에 부정적으로 대답했다. 따라서 죄의 전파도 이 씨로부터 몸이 기원하는 것과는 다른 근거가 있어야만 했다.

 

2) 죄의 전파는 생식 행위의 죄 된 성질에 돌려질 수도 없다. 이것이 어거스틴의 생각이었다. 이것은 죄를 육체의 정욕으로 보는 편협한 견해와 관련있다. 인간이 그것을 통해 태어나는 그 행위가 전적으로 죄 되다는 것은, 이 행위의 산물이 또한 죄될 원인이 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죄는 성질이지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죄는 단지 그 행위를 한 사람들의 영혼에 자리잡을 뿐이며, 그들의 육체는 단지 이 영혼의 유기적 도구일 뿐이다. 그 행위 자체는 형이상학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생각할 때 전혀 죄 된 것이 아니다.

 

3) 세 번째 견해는 영혼의 죄성을 영혼이 육체에 접촉한 것에서 그 기원을 찾는 것이다. 이 견해 또한 주요 교의학자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이 견해가 옳다면,] 그러면 영혼은 죄없이 창조되었고, 육체와 연합하는 순간에야 죄가 있게 되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면 여기에 물질설적(또는 유전설적) 결론을 피하기 위해 무언가를 덧붙여야만 한다: 즉 육체나 배아의 부패성이 자체로 죄를 야기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원의를 빼앗긴 영혼이 이것을 하는[죄를 짓는] 그런 부조화한 육체와 연합이다. 따라서 육체 안에는 엄격한 의미에서 자체로 죄가 없지만, 그들의 생각에, 영혼을 통해 얻게 된 육체의 어떤 상태가 그것[영혼]에 죄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영혼]은 우리를 육체의 욕망을 제어할 적극적인 거룩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죄는 육체 자체에도, 영혼 자체 안에도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성에 있다. 왜냐하면 바로 인간의 본성은 육체와 영혼의 유기적 결합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런 견해를 가진 이들을 예를 들면, 피터 버밀리와 폴라누스, 베나딕투스 아레티우스, 휘페리우스, 케커만 등이 있다.

 

4) 대부분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A. 하나님은 언약에 입각하여 아담의 첫 번째 죄의 죄책을 영혼에 전가한다.

 

B. 이 일이(하나님의 판결로) 영혼의 실제적인 존재 이전에 이미 일어난 후에, 하나님은 영혼이 존재하게 하는 곳에서 창조자와 심판자 이중 자격으로 나타나신다. 창조주로서 하나님은 영혼의 실체를 무로부터 나타나게 하신다. 심판자로서 하나님은 그 실체로부터 이미 이 창조시 원의라는 기질을 거두신다.(단지 몇몇 신학자들, 예를 들면, 잔키우스 등은 영혼이 매우 짧은 시간 원의를 가졌으나 그 후 즉시 잃었다고 가르쳤다).

 

C. 원의 없이 존재하게 된 인간 영혼은 즉시 적극적 내부적 부패로 넘겨진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영혼으로부터 거두어 가신 필연적이고도 직접적인 결과이다. 이것은 실재이며, 실제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영혼에 행하시는 무엇이 아니다. 단지 영혼이 하나님께서 그것을 창조하시는 특별한 방식을 통해 겪게 되는 어떤 것이다.

 

이 마지막 설명이 우리에게도 가장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설명이 모든 반론을 잠재우지는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 중 아주 큰 어려움은 첫째, 하나님을 죄를 조성하는 일과 상관없는 분으로 붙들려고 할 때, 만나게 된다. 둘째, 영혼이 단 한 순간도 무죄 상태에서 존재하지 않도록 할 때이다. 이 두 조건 모두 하나의 일관적 이론으로 통합할 수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만일 하나님이 죄를 야기하지 않으셨다면, 죄는 이미 존재하는 영혼에서 발생해야만 한다. 그러면 그것은 죄 없음에서 죄 됨으로 이동이며, 만일 사람이 이것을 시작점으로 저것을 종착점으로 둔다면, 그러면 영혼을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이라도 죄없는 상태로 두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잔키우스가 시초에 소유했다가 그 후 곧 상실한 원의와 관련하여 가르친 것이다. 여기서 어려움은 우리가 섭리론에서 하나님의 인간의 악한 행위에 관여하신다는 것과 동일하다. 거기서도 우리는 어디에서 하나님의 사역이 배제될 수 있었는지 어떤 지점도 표시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어떤 행위 안에 있었던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 지탱되고 실행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동시에 그 행위는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부를 수 없는 어떤 방향과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많은 비유들을 가져올 수 있으나, 이들 모두는 대체로 문제에 관한 일반적인 이해를 줄 뿐,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나아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육체 밖에서 창조하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육체와 긴밀한 연합속에서 창조하셨다. 배아는 밖에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기관을 통해 형성되나 스스로 어떤 형성원리를 자체 안에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원리를 영혼에서 찾아야 한다. 그럼에도 이렇게 자란 배아가 계속해서 어머니 기관의 일부를 형성한다. 이런 점에서 또한 영혼은 후자[어머니 기관]와 긴밀히 연결된다. 여기에 유전설이 갖는 진리의 일면이 있다. 영혼과 육체는 서로 가장 깊은 내적인 관계 속에 있다. 이들은 유기적으로 하나이다. 그래서 육체가 여전히 모체의 일부를 구성할 때, 그것은 영혼에 영향을 주지 않고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죄의 전파까지 확장되는 데에까지 끄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생각과 의지, 감정은 전체 또는 일부가 육체적 기관들과 결합되어 있다. 여기서 또한 반대로 이 기관의 형성을 통해 그들의 발전이 결정된다는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 그러나 죄에 관하여 동일하게 말할 수 없다. 죄는 육체를 통해 드러난다. 그러나 죄가 육체를 통해 나타난다는 것은 죄의 강도에 대한 척도일 수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죄는 본성상 순수히 영혼에 관련된 것이다.

죄는 타락 후, 그렇게 되자 마자 인간의 본성적 상태에 속한다. 본성에 속하는 모든 것은 재생산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규정은 본성적 성향과 속성들은 부모와 자녀들에게 공통적이 되도록 한 것이다. 반면, 순수하게 인격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은 재생산될 필요가 없다. 본성이란 용어는 우리가 이 용어로 모든 인간에게 공통되는 것을 요약할 수 있는 것이다. 인격성이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의미에서 고유하지 않고 각자마다 차이가 나는 어떤 것이다. 우리는 죄가 본성 죄이며, 따라서 본성적인 전이의 선을 따른다는 것을 확고히 붙들어야 한다. 어떻게 이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더 설명할 수 없다. 이 일이 일어나는 근거는 단지 본성의 법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죄의 본성적 성질은 그들이 여전히 모든 사람에게 인격적인 모습을 취한다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죄 된 의지와 어두워진 지성 그리고 부패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기관들의 소유한 인격성이 각각 특별한 경우에 모두 다양하다. 그렇기 때문에 죄 또한 그 어느 곳에서도 두 개별자에게서 동일하게 나타나거나 동일하게 진행되지 않는 것이다.

 


게르할더스 보스의 '개혁 교의학(신론, 인간론)'에서 발췌(458-479p)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회개와 기도만이 이슬람과 영적전쟁서 승리하게 한다”
루터, 기독교 타락이 이슬람이라는 징계 불러왔다고 판단 …
칼이 아닌 개혁이 진정한 무기임을 강조했다



▲ 유해석 선교사(총회이슬람대책위원회 전문위원)

현재 기독교 안에 이슬람을 바라보는 네 가지 입장이 있다.

첫째는 이슬람에 대한 공포가 혐오적으로 나타나는 이슬람포비아(Islam phobia) 입장이다. 이슬람포비아라는 말은 1980년대에 만들어졌으나 실제로는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일어난 9·11테러 이후에 많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둘째는 무슬림들에게 다가가기 위하여 이슬람권 안에서 현지의 삶의 방식과 문화를 그대로 따르면서 은밀하게 마음 안에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는 내부자 운동(Inside Movement)적 시각이다. 셋째, 다원주의(pluralism)적 입장이다. 두 종교가 서로 공존하기 위하여 기독교와 이슬람의 공통적인 부분을 강조하며 이슬람의 알라와 기독교의 하나님은 똑같은 하나님이라는 주장이다. 넷째, 개혁주의적(reformism)입장이다. 이는 무슬림들이 이슬람을 떠나서 기존의 기독교로 들어오라고 초청하는 입장이다. 이슬람은 진화론적 종교관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무슬림들에게 기독교인이 되라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방법이다. 우리는 개혁주의적 입장을 이해하기 위하여 이슬람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견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불편한 관계의 역사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A.D. 570년에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에서, 쿠라이쉬(Quraish) 부족의 하심가문에서 태어났다. 이슬람에 의하면 그가 나이 40이 되었을 때, 메카에서 2마일 떨어진 히라산 동굴에서 계시를 받고 모든 우상을 제거하고 쿠라이시 부족의 신(神)이었던 ‘알라’만을 섬기라고 주장하면서 새로운 종교를 시작하였다. 무함마드는 70여 차례 전쟁을 치렀으며, 그 가운데 직접 군대를 지휘한 것도 27차례나 된다. 무함마드는 칼을 들고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했다. A.D. 632년 무함마드는 62세로 메디나에서 고열과 폐렴으로 죽었다.

무함마드가 사망한 이후에 그의 후계자들을 통하여 무슬림 세계는 아라비아 반도를 넘어서 비잔틴 기독교 제국을 정복해 나갔다. 10년 후 이슬람 군대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 대부분을 점령했다. 이후 70년 동안 서쪽으로 진군하여 북부 아프리카 전체를 정복했다. 그리고 15세기까지 이슬람 군대는 이베리아 반도와 남부 이탈리아, 그리고 남부 프랑스와 지중해 서부를 점령했다.


오스만과 터키의 술탄 메멧 2세(Mehmet II, 재위 1452~1481) 때인 1453년에 고대 로마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됨으로, 비잔틴 제국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메멧 2세는 여세를 몰아 발칸 반도 안으로 유럽의 중심부를 향해 터키 제국의 경계를 넓혀 나갔다. 1475년에는 크림반도(the Crimea)를 탈취하였다. 나아가 1500년에는 알바니아(Albania)를, 1512년에는 몰다비아(Moldavia)를, 1516년에는 루마니아(Romania)를, 1517년에는 몬테네그로(Montenegro)를 복속시켰다. 1517년은 바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34살의 나이로 종교개혁의 기치를 든 때다. 1529년 비엔나에서 그 걸음을 멈추게 되기까지, 이들은 계속하여 유럽 중앙으로 전진해 들어왔던 것이다. 이 절박한 상황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이다. 이슬람 군대인 오스만 터키와의 전쟁이 종교개혁의 다양한 배경을 형성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슬람에 대한 루터의 저서들

마르틴 루터가 이슬람에 대하여 최초로 언급한 것은 종교개혁이 일어난 그 다음 해인 1518년에 쓴 <사면의 능력에 대한 논쟁의 해답들>(Resolutione Disputationum de Indulgentiarum virtute)이다. 또한 서신 등을 통하여 이슬람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나, 본격적으로 이슬람에 대하여 써서 출판한 작품은 1529년 <터키인들에 대항하는 전쟁에 대하여>(Vom Kriege wider die Turken) 이었다. 그 후 루터는 터키군대의 움직임을 전해듣고, 또 하나의 작품을 출판하게 되는데, <터키인들에 대항하는 군대설교>(Heerpredigt wider den Turken)이었다. 세 번째 작품은 <터키인들에 대항하는 기도에 관한 훈계>(Vermahung zum Gebet wider den Turken). 이 작품을 총 세 번(1539년, 1541년, 1543년)을 썼다.

이와 함께 1530년 출판된 책 <터키의 의식과 윤리에 대한 책>(Libellus de ritu etmoribus Turcorum)의 서론을 썼다. 또 기억할 만한 것은 루터가 1542년에 편집 번역한 작품인데, 이 책은 1300년 경에 도미니칸 수도사인 리콜도(Riccoldo de Monte Croce)가 쓴 <꾸란에 대한 반박>(Confutatio Alcorani)이다. 본래 루터는 이 책을 부정적으로 보았으나, 그가 꾸란의 라틴어 번역본을 읽은 후에 이 책을 긍정적으로 보았으며 그 후에 루터는 이 책을 편집하여 번역하였다. 또한 1530년 헝가리의 게오르기우스(Georgius)가 출판한 <무슬림의 의식과 도덕에 대한 책>에서 루터는 ‘경건한 독자에게’(Lectori pio)라는 서문을 썼다. 이 책은 도미니크 수도사인 게오르기우스가 1480년 터키에 사로잡혀서 오랜 기간동안 노예로 있으면서 직접 보고 경험한 것을 적은 책이다. 루터는 이 책을 이슬람에 대하여 알 수 있는 매우 유익한 책으로 여겼다. 이슬람에 대한 또 다른 작품의 서문이 있는데 1542년에 아랍어에 능통했던 취리히의 신학자 테오도르 비블리안더(Theodor Bibliander)가 독일어로 번역한 꾸란의 서문이다. 루터는 1543년 초에 나온 이 책의 서문을 썼다. 다양한 루터의 글을 통하여 루터가 이슬람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이슬람에 대한 루터의 이해

첫째, 루터는 이슬람의 침략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반대하고 있다. 유럽을 정복하려는 이슬람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루터가 반대한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살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떠난 기독교인들을 징계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슬람 군대를 보낸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루터는 이슬람을 하나님의 채찍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루터는 이슬람을 향해 칼을 들고 벌이는 전쟁은 하나님에 대항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여기에서 루터는 ‘이슬람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가나안에 입성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통하여 이들을 징계하시고,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하고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했듯이, 기독교의 타락이 이슬람이라는 징계를 불러 왔다고 본 것이다.


둘째, 루터는 이슬람과의 외적인 전쟁보다는 먼저 내부의 적(敵)인 ‘기독교인들의 부패와 타락’을 회개할 것을 촉구했다. 외부의 적인 이슬람보다 내부의 적인 교황청이 더욱 악하다는 것이다. 교황청의 사기꾼들이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주면서 이슬람 군대와 싸우도록 부추기는 것을 비판하면서, 이슬람 군대보다 내부적인 부패와 거짓과의 싸움이 우선이라고 보았다. 즉, 기독교인의 부패와 타락에 대한 회개가 이슬람보다 더 시급한 문제라고 루터는 보았던 것이다.


셋째, 루터는 이슬람과의 전쟁은 영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오스만 터키 이슬람 군대와의 전쟁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사탄과의 전쟁이라고 확신하였다. 루터는 이슬람의 신(神)을 사탄으로 보았고, 이 영적인 전쟁은 기독교인들이 회개와 기도를 통해서만 승리를 거둘 수 있으며, ‘기독교인들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있는 이슬람이라는 채찍을 빼앗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루터는 기독교인들이 회개와 기도로써 이슬람과의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넷째, 루터는 이슬람을 종말론적인 적(敵)으로 인식하였다. 1529년 이슬람 군대가 오스트리아의 비엔나(Vienna)를 포위한 소식을 들으면서, 루터는 임박한 종말을 의식하며 이슬람을 종말론적인 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터키인에 대항하는 군대 설교>에서 루터는 말세에 예언된 두 폭군을 교황과 이슬람으로 해석하고, 다니엘서 7장의 4번째이자 마지막 짐승을 로마 제국으로, 열 뿔을 제국 내의 나라들로, 그리고 뿔들 사이에 있는 ‘작은 뿔’을 이슬람으로 이해하였다. 교황을 “위선의 가면을 쓰고 성전에 앉아서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는 적그리스도”로, 이슬람을 “선하고 정결한 덕목을 지닌 광명한 천사로 가장한, 사단의 계략을 가진 적그리스도”로 이해했다.


종교개혁 당시의 이슬람 군대의 침략은 온 유럽을 혼란에 빠뜨리기에 족한 사건이었다. 심지어 루터는 세상의 종말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정도다. 그러나 그는 신학적, 정치적 눈을 가지고 교회와 세속권력이 이 위기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차분하게 조언한다.


이 조언은 지금의 한국교회에게도 유용하다. 위기를 맞고 있는 한국교회는 루터의 조언에 따라서 내부적으로 말씀과 거룩을 따르며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앙고백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싸움은 루터의 견해처럼 영적인 전쟁이다. 따라서 회개와 인내가 그 모습이 되어야 한다. 만일 힘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교회가 사용할 것이 아니라, 세속정부의 영역에 있는 기독교인들의 역할로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혼돈될 때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잃게 될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사랑의 모습으로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는 기독교가 발전하고 융성했던 곳들이 이슬람으로 대체된 것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기독교가 변질되고 골고다 산상의 십자가를 자신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킬 때 이슬람이 몰려왔고, 그에 대항할 만한 능력을 상실한 채 시간이 흐르면서 기독교는 그 주권을 이슬람에게 내어 주고 말았다. 중동이 그랬고, 유럽이 그 길을 가고 있다. 우리 곁에 이슬람이 다가오고 있다. 이 중요한 시기에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은 다시 개혁을 논해야 한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이슬람으로 인하여 종교개혁을 가속화시켰던 마르틴 루터의 말로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내 말은 이슬람에 대항하여 싸우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자비로우신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더 개선하자는 것이다.”



기독신문  ekd@kidok.com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103184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예수와 하나가 되라!
“저는 주님밖에 바라볼 데가 없어요!”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려는데도 다시 죄에 무너지는 일이 있습니다.

다 죽은 것 같은 혈기를 부리고, 음란한 유혹에 무너지고, 거짓과 탐욕의 죄에 무너집니다. 이때의 죄책감과 좌절감은 엄청납니다.

‘결국 죄는 극복할 수 없는 것인가?’
‘주님을 바라보아도 죄를 이길 수 없는 것인가?’


죄를 이기는 것은 우리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이기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면 죄를 이기는 놀라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왜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는데도 다시 은밀한 죄에 무너지는 것입니까? 주님을 바라보면서도 세상을 기웃거리며 마귀에게 틈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 세상에 한눈 파는 것이 우리가 죄에 무너지는 시작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이 놀라운 사실을 정말 믿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한눈팔지 말라”는 권면을 받으면 한숨을 내쉽니다. 너무 힘들다고 탄식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 탄식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한눈팔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생각, 그것이 우리가 여전히 죄에 무너지는 상태에 머물러 있음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한눈팔지 말라는 것을 힘쓰고 애써서 지켜야 하는 율법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아직 마음에 임하신 주님을 진정으로 믿지 않는다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입니다. 주님이 마음에 거하시는 것을 정말 믿으면 세상에 한눈팔아지지 않습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눈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한눈팔지 말아야지’가 아니라 ‘한눈팔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떤 이단 단체에서 돈 100억 원을 주고 오라고 하면 그 제안이 유혹이 되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어느 이단으로 갈까?” 하면서 이단에 한눈파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한눈팔지 말아야지’가 아닙니다. 한눈팔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왕이신 주님이 우리 안에 임하신 것을 믿으면 세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됩니다. 왕이신 주님과 친밀해지는 과정에 있는 사람에게 세상이 유혹이나 관심의 대상이 되겠습니까?


은밀한 죄에서 이기는 길은 결단이나 회개나 금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어쩔 수 없는 육신의 일이니 너무 상심 말고 스스로 학대하지 말고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믿으면 결국 주님이 이기게 해주실 거라고 쿨하게 넘겨버린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왕이신 주님이 마음에 오신 것이 황홀하게 여겨질 때입니다! 날마다 왕이신 주님과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이 흥분이 되고 감격이 될 때 죄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이것은 금욕생활과 다른 것입니다. 실제로 왕이신 주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은 평생을 투자해도 가치 있는 일입니다.


왕이신 주님과 친밀해지는 것, 왕이신 주님과 동행하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이 눈에 보이듯이 믿어지는 것은 정말 꿈같은 일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정말 믿으면 세상에 한눈팔아지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믿어도 세상에 한눈팔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진정으로 믿지 못하였기에 세상에 한눈팔고 살아온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의 문제는 우리 안에 주님이 임하신 것이 실재라는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세상을 저울질하고 산 것입니다. 주님은 막연하고 세상은 실재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말 자격이 안 되는데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이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이 놀라운 사실을 정말 믿는 것뿐입니다.


“왕이신 주님이 내 안에 계신다!” 이것이 모든 문제의 답입니다.

아직 주님이 함께하시는 것을 분명히 모르겠고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막연하다면 안타까워할 일이 아닙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그럴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면 됩니다. 그동안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살았기 때문일 뿐입니다.


이제부터라도 매일 매 순간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깨닫게 하셨는데도 순종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즉각 회개하고 순종해가면 됩니다. 오늘도 황홀한 날입니다. 왕이신 주님과 함께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갓피플 말씀테마 (http://gp.godpeople.com/archives/category/theme/b_theme)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다”는 말의 의미/ 마르틴 부처

그러나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보혈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을 성취하셨듯이, 성령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께 바치며, 이웃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살아가게 하신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계의 기초가 놓이기 이전에 선택되었고, 성령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위하여 성도들에게 부음 바 되어, 그들의 이름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생명책에 기록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들이 현재 속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사도는 여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 나는 이것을 ‘그리스도를 통하여’라고 번역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바울은 올바르게도 우리의 선택을 그리스도에게로 돌리고 있다. 만약 아마도 어떤 사람이 이것을 ‘그리스도 안에’로 파악할 경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거룩하고도 복된 삶으로 예정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런 의미는 항상 바울의 교리와 전적으로 일치할 뿐만 아니라, 첫 번째 의미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며,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성도들을 그의 자녀들의 유업으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하여 그들을 그곳에 참여하게 하셨다는 뜻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고, 거룩하고도 행복한 삶이 주어지고, 선하고도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하여 능력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 이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 돌려져서는 안 된다.

- ‘에베소서 주석’(1527) 중에서 -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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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들을 시험해야 할 우리들의 의무 - 로이드 존스

얼마 전의 우리의 연구에서, 우리는 어떻게 현상들을 시험해야 하는지를 숙고하기 시작했으며, 저는 여러분에게 감정을 신뢰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충고를 했습니다. 저는 이제, 각각의 현상들을 긍정적으로 시험하고 분별하는 방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번째로 우리는 우리의 이성과 지혜를 사용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제가 성경이 아니라, 이것으로 시작하는 것에 놀랄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물론, 초대교회는 우리처럼 온전한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 때문입니다.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들은 시험할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그들은 영들을 분별할 수 있었습니까? 그러므로 저는 이성과 지혜로 시작하며, 이것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러분에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저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이성과 지혜를 결코 포기하거나 내던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성경에서 발견되는 하나의 원리로 제시하고자 합니다. 저는 이것을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할 문구로 삼고 싶습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자제력을 상실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중에 이 문제들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특히, 오늘날 미국과 영국에서 그리고 세계의 다른 지역들에서 이 일들에 새로운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제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다가와, “이제 여러분이 이 복을 얻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의 마음을 ...
여러분이 이 은사를 원한다면 자신을 버려야 한고, 여러분의 자제력을 상실해야 합니다”라고 가르칩니다.

저는 이것이 항상 잘못된 것임을 제시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이 점만은 명백히 하고 싶습니다. 어떤 이는 저에게 “
그런데 당신은 분명히, 사람이 스스로 기독 신앙을 믿을 수 없으며, 단순히 지적인 이해와 노력만으로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을 벗어나고 있소. 당신은 이것을 강조하는데 결코 지쳐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 그 말이
전적으로 옳습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지적인 과정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진리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가 비합리적인 것도 비이성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기독 신앙을 믿게 될 수는 없으나,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여러분은 기독교가 모든 것 중에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느모로 보나, 우리가 우리의 지성을 일부러 버려야 한다는 것은 없습니다. 성경 안에서도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결코 없습니다. 고의로 생각을 중단하고 우리 자신이 공허한 상태에 빠지게 하는 것 즉, 우리 자신을 다른 권세들에 내맡기는 것은 결코 성경이 옹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런 일은 이렇게 해서 일어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과 이성을 조명하여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이성을 배제하고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그가 행하시는 일은 우리의 이성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것입니다. 이 마음과 이성이 죄의 성향에 지배되기
에 우리를 기독교, 혹은 하나님의 나라로 결코 인도할 수 없다는 것 외에는, 이치상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마음과 이성을 고양시킬 수 있습니다. 인간은 결코 그의 이성과 지혜를 떠나서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절대로! 발생하는 것은 그의 마음과 이성이 전에는 거절했던 진리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대답은 지적인 자멸을 허용하거나, 자제력을 상실하고 생각을 중단하거나, 고의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능력들을 포기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성령의 조명과 인도하심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할 때에 성령은 여러분의 마음을 밝혀 줄 것입니다. 사도는 이것을 고린도전서 2:10에서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점이 분명하다고 확신합니다. 지성만 가지고는 우리는 진리를 이해할 수 없으나, 성령을 통하여 계시가 주어질 때 우리의 마음과 이성은 진리를 깨닫게 되고 그 안에서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혜를 사용해야 할 첫 번째 답변이었습니다. 이제 저는 더욱더 중요한 두 번째 답변을 제시하고자합니다
. 고린도전서 1, 12, 13장 그리고 14장에 있는 논증의 배후에 있는 전제 조건은 지혜와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
며, 이것은 모든 신약성경에서도 동일합니다. 왜 고린도 교회에서는 이러한 은사들을 시행하고 나타내는데 어려움이 생겼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이성과 지혜를 사용하지 않고 자신을 스스로 포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요한일서에 있는 권면을 받아들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 4:1). 만일 여러분이 마음과 이성과 지혜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어떻
게 영들을 분별하고 시험할 수 있을까요? 이 일은 불가능
이런 상황을 가정해 봅시다. 여기에 한편은, 성령을 소유한 사람과 다른 한편은 악령들과 적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이 있습니다. 양자는 우리를 끌어들이고,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무엇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만약 여러분이
자신을 내어버리거나, 자제력을 잃어버리거나, 사고(思考)를 그치거나, 이성과 여러분의 지혜를 사용하기를 중단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시험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고린도교회에 문제가 발생했던 이유도 그들이 그렇게 행하지 않았거나 그렇게 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살펴볼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사도는 고린도전서 14장에서 - 저는 이것을 얼마 후에 다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 방언의 은사를 오용하는 포괄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은사를 오용하는 경향이 있었고 어쨌든 그들이 함께 모였을 때 종일토록 이것을 시행하기를 원했습니다. 따라서 사도는 외부인이 들어오게 되었을 때, 끼치는 영향을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
하겠느냐”(고전 14:23). 이것이 사도가 다루어야 했던 상황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방언으로 말하면서, 그들의 교회 모임의 모든 시간을 보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면 사도가 그들에게 충고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그의 권면과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이는, 방언이 통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동시에 자신을 내어버리거나, 자제력을 잃어서는 안 되고 여전히 통제 아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제시하는 구절은 고린도전서 14:32입니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이제 이 말씀은 확실하게 이것을 단번에, 영원히 해결해 줍니다! 여러분이 스스로를 방종에 내어버려선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그렇게 한다면, 다른 영들에게 자신을 노출시킬 것이며, 여러분은 시험할 수도 나아가 통제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는 권면으로 이 장을 마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사고와 이성 그리고 지혜를 내버린다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여기에 한 자기 문제가 있는데 곧이어 이 문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이것은 저에게 있어, 가장 놀라운 진리의 특성 중의 하나로, 어떻게 단번에 그리고 동시에 여러분이 성령에 붙들림 바 되고 이끌려 지면서, 여전히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영광이며, 기독교를 거짓되고 그럴듯한 다른 모든 종교들로부터 구별되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인 이성과 지혜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참으로 저는 이것을 긍정적인 충고로 제시하고자 합니다. 바로 이것이 온 인류를 사로잡는 기독교적 구원의 본질적인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사람의 이성과 마음과 의지를 사로잡습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사고(思考)를 중단하면 복을 얻게 될 것이라는 어떠한 가르침이 있다면, 그것은 복음자체의 가르침과는 반대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지혜의 눈을 밝혀주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마음은 한껏 펼쳐지고 사로잡힌 바 되지만 지성과 전인(全人)이 수반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방법이나 암시를 통해서 우리의 사고를 중단시키려는 어떠한 가르침도 의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제가 말하려는 것은 조명을 끄고서, 어떤 음악이나 문구를 리듬있게 반복하는, 잘 알려진, 심리학적 기술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보다 더 미개한 종족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 즉, 그들이 이런 방식을 통해서 어떻게 자신을 홍분시켜서 이성과 지혜의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지 직접 보았거나, 읽어 보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어떠한 것이라도 의심해야만 합니다. 신약성경에는 이것에 근접하는 것은 전혀 없으며 여러분은 오히려 엄밀하게 정반대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믿는 이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과연 이것이 진리일진대, 명백한 것은 이것은 우선적으로 인간의 마음에 일어나는 어떤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에게 “자제력을 상실하십시오”라고 암시하는 어떠한 가르침이 있다면, 이미 그 자체로 적어도 의심할 근거가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제 우리는 영들을 시험하는 두 번째 대원리로 넘어 갑시다. 이것은 성경 자체입니다. 저는 이미 초대교회는 우리처럼 온전한 성경을 가지지 않았었다고 여러분에게 상기시켜 드렸습니다. 교회가 생겼을 때 이런 문제들은 이미 일어났었고, 바로 이것 때문에 사도들이 그들의 서신서들을 써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이전에 이미 시험해야 할 상황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감사한 것은, 오늘날 우리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이것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엡 2:20)고 말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가지게 된 것도 바로 이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통해서입니다. 여기에 권위있는 가르침이 있으며,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가르침이 있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이미 여기에 주어졌기 때문에 성경에 다른 것을 덧붙일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시험들을 적용하는 방법들을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성경과 분리시키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사에 정통한 모든 사람들은 제가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알 것입니다. 그것은 항상 거짓된 운동, 혹은 소위 이단의 특징이었습니다.
특별히 영적인 은사와 나타남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의
경우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들은 항상 성령을 말씀에서
따로 떼어놓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성경말씀은 더 이상 필요없다고 주저하지 않고 말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내적 광명을 소유했다면 왜 성경을 필요로 하나요? 여러분이 성령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받고있다면 어디에 성경이 필요하나요?”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이고, 새로운 성령의 나타남으로 우리에게 제시되는 모든 것에도 적용해야만 하는 가장 우선적인 시험들 중에 하나입니다. 특별히 은사의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성경에 제시된 입장을 고수하십시오. 여러분은 그런 운동의 역사에서, 비록 그들이 시작은 잘하지만, 점차적으로 성경을 적게 사용하고 소위 “예언의 메시지”라는 것에 더욱더 큰 중요성을 부여하는 경향을 종종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에 관해 더 많이 말하고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하나님 말씀을 설명하는 대신에 이것을 인쇄하여 유포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항상 가장 위험스런 징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진리는 성경에 있으며,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조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일반적이고 가치있는 원칙으로 이것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점점 더 성경에 근거하려 하지 않고, 이것을 설명하는데 보내는 시간이 점점 더 줄어든 반면에 성령으로부터 직접적인 메시지에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경향을 발견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모로 의심을 해야 할 책임이 있으며, 경계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성령의 주권적 사역 - 로이드 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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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엔 왜 공룡이 안 나오나요? ? 과학이 심어놓은 관념과 성경의 대결

무신론자 중에는 성경에 공룡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이 가짜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주장에 동요를 하며 성경에 공룡이 등장하지 않는지 질문하십니다.

솔직히 저는 왜 성경에 공룡이 등장하지 않는다고 성경이 가짜가 되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성경에는 호랑이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코끼리도 등장하지 않죠. 역사속에 존재했던 특정한 동물이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것이 왜 성경을 가짜로 만드는 것이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복음을 설명하는 책이지 백과 사전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다고 일부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듯 성경에 공룡이 등장하지 않는것도 아닙니다. 저는 오늘 글을 통해서 여러분이 아! 성경에 공룡이 있구나 그러므로 성경은 믿을만한 책이야! 라는 결론을 얻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성경을 어떻게 읽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그 근본적인 관점과 자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오늘 성경에 공룡이 등장하며 사람들과 공존했다는 여러가지 객관적인 증거들을 드리려고 합니다. 어떠한 객관적인 증거를 드려도 어줍잖은 진화론적 고정 관념에 막혀 증거를 인정하지 않는 분들은 항상 계시지만 부디 관념을 버리시고 증거를 바라보며 이 글을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용은 이 세상에 실존했던 동물입니까? 아니면 전설속의 동물 입니까?

저는 성경에 등장하는 공룡의 존재를 찾기 전에 성경을 신뢰하지 못하는 분들이 어떤 함정에 빠지게 될수 있는지를 설명드리고 싶습니다. 과학을 신뢰하는 많은 분들이 과학과 상충되는 성경 구절들을 신화나 신학적 메세지를 담은 상징으로만 치부합니다. 심지어는 일부 성경 번역본 마저도 현대 과학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단어들을 마음대로 고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들어 욥기 30:29를 보시겠습니다.

난 이리 떼의 친구, 타조의 벗이로구나. (쉬운 성경)

나는 이리의 형제요 타조의 벗이로구나 (개역 개정)

나는 용들의 형제요, 올빼미들의 벗이로다. (킹제임스 흠정역)

각 번역본에서 이리 혹은 용으로 번역되어 있는 단어의 원어는 탄닌(?????????) 입니다. 그리고 탄닌이란 단어의 의미는 괴물, 뱀, 용 입니다. 하지만 이미 사람들은 용이 실존했던 동물이 아니라 전설속의 동물이라는 관념을 갖고 이 단어를 이리(혹은 영어로 Jackal)로 번역합니다. 탄닌의 경우에는 탄닌이란 동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두려워 할만한 다른 동물로 번역을 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히브리어로 너무나도 분명하게 알지만 우리가 과학적으로 존재할수 없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는 동물 역시 등장한다는 것 입니다.

온 블레셋이여! 너를 친 자의 막대기가 부러졌다고 기뻐하지 말라. 뱀의 뿌리에서 독사가 나오고 그의 열매가 날아다니는 불 뱀이 되리라. <이사야 14:29>

…. 젊은 사자와 늙은 사자와 독사와 날아다니는 불 뱀이 나오는 땅 곧 고난과 고통의 땅으로 들어가 자기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할 백성에게로 가리라. <이사야 30:6>

여기에서 불뱀이란 단어에 사용된 히브리어 사라프(??????)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뱀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낸 불뱀, 그래서 장대에 매달은 불뱀을 쳐다보는 사람이 낫게되는 불뱀과 같은 단어 입니다. 여러분은 날아 다니는 불뱀을 보신적이 있으십니까? 혹은 화석으로 발견된 적이 있나요? 과학자들에게 뱀이 날아 다녔다고 주장해 보십시오. 그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비웃을 것 입니다.

역사속에 기록된 날아다니는 뱀

하지만 저에게는 날아다니는 뱀이 실존했다는 객관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날아 다니는 뱀을 봤던 사람들의 역사 기록 입니다.

첫번째 역사학자 - 헤로도토스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

사람들은 헤로도토스를 인류 최초의 역사학자로이자 역사의 아버지로 불립니다. 그가 기원전 5세기에 집필한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이런 기록을 남깁니다.

내가 방문한 부토라는 도시 가까이에 있는 아라비아에 날개가 달린 커다란 뱀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내가 그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나는 설명이 불가능 할 만큼 엄청난 양의 뱀의 뼈와 척추를 보았다. 뱀의 형태는 물뱀과 같았고, 다만 깃털이 없는 아마도 박쥐의 것과 비슷한 날개가 있었다. 1  2

그리고 고고학자 R.W.Hutchinson은 헤로도토스의 날아다니는 뱀에 대한 기록을 우리가 관념적으로 받아들이기 이상하다는 이유로 부정하는 것을 비판하는 논문을 씁니다.3

저는 그의 지적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는데, 날아다니는 뱀에 대한 기록은 헤로도토스만 남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역과 시대를 넘어서서 다수의 사람들이 날아다니는 뱀에 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1  4  5  6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화석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래서 현대 과학이 날아다니는 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성경의 기록을 신화처럼 여기지만 날아다니는 뱀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 특히 역사학자들은 날아다니는 뱀을 목격하거나 목격자의 증언을 역사 기록에 남겨 놓았습니다.

여러분은 날아다니는 뱀을 부정하는 과학을 더 신뢰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과 이를 뒷받침하는 역사 기록을 더 신뢰하시겠습니까?

마찬가지의 이유로 성경에 기록된 용의 존재를 부정하는 기독교인들…

성경에는 용에 대한 기록이 여러번 등장합니다. 어떤 경우는 상징적인 의미 혹은 비유적 표현으로도 사용되지만 어떤 경우는 의심의 여지없이 실존했던 동물에 대한 묘사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들짐승 곧 용들과 올빼미들도 나를 존경하리라. 이는 내가 광야에 물들을 내고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들에게 마시게 할 것이기 때문이라. <이사야 43:20, 킹제임스 흠정역>

이사야서에 등장하는 용들 역시 탄닌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용을 전설 속의 동물로 생각한 번역자들이 원어 그대로를 사용하지 않고 이를 이리나 승냥이 같은 다른 들짐승들로 번역해 버렸습니다.

성경에서 탄닌은 들짐승이기도하고 바다에 살기도 하는 동물로 등장합니다.
탄닌이 승냥이나 이리 같은 동물이 될 수 없는 결정적 증거는 같은 단어가 바다에 사는 용으로도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이리나 승냥이는 바다에 살지 않습니다.

그 날에 주께서 자신의 매섭고 크고 강한 칼로 꿰뚫는 뱀 리워야단 곧 구부러진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이사야 27:1 , 킹제임스 흠정역>

그 날이 오면, 여호와께서 그 단단하고 날카로운 큰 칼로 행동이 재빠르고 구불구불한 모양의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고,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실 것이다. (쉬운 성경)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개정 개역)

여기에서 모든 번역본이 용이라고 번역한 단어의 어원 역시 탄닌입니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기독교인이라면 여러분들은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성경은 날아다니는 뱀과 마찬가지로 분명하게 용이 실존했던 동물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창세기처럼 용에 대해 상징적인 의미라고 얘기를 할 수도 없습니다.

탄닌은 구약에 27번 나옵니다. 왜 전설속의 동물을 구약 성경에만 27번이나 등장시킬까요?  성경 구절속에서 탄닌과 함께 등장하는 동물들은 대부분 우리가 잘 아는 동물들과 함께 등장 합니다. 부엉이, 사자 등등…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말씀을 하시면서 왜 전설속의 동물들을 실존했던 동물들과 함께 설명하실까요?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성경의 용이 실존 했음을 지지하는 역사 기록

그렇다면 성경 외에 용을 묘사한 다른 기록은 없을까요? 놀라울 정도로 많이 있습니다. 용에 대한 기록들을 정리한 글을 링크 합니다.  참고해주시고, 오늘의 글에서는 대표적인 역사 기록 몇 부분만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드라코렉스 공룡이 용과 얼마나 비슷한가

전설속의 용의 상상도와 화석을 통해 드라코렉스 공룡을 복원한 그림 비교

아일리아누스는 동물의 본성(De Natura Animalium)이란 책에 아래의 기록을 남깁니다. 동물의 본성은 오늘 날로 얘기하면 동물 백과사전 같은 책이며 거의 대부분을 구전이 아닌 직접 관찰한 내용에 대한 기록을 토대로 작성한 글 입니다. 꾸며낸 이야기나 재미를 위한 글이 아닌 것이죠.

알렉산더가 인도의 일부 지역에 혼란을 일으키고 다른 지역을 차지 했을 때, 그는 동굴에 살면서 인도 인들에 성스럽게 여겨지며 커다란 신적 경외를 받는 거대한 뱀들과 마주 쳤다. 이에 따라 인도인들은 아무도 그 거대한 뱀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해달라고 청원했으며, 알렉산더는 그들의 소원을 들어 주었다. 군대가 동굴을 지나가며 소리를 내자, 그 거대한 뱀이 감지했고. (그 동물은 동물들 중에서 가장 예민한 귀와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쉭쉭 소리를 내며 거칠게 숨을 내쉬자 모두 겁에 질리고 당황했다. 보고에 따르면 몸 전체가 보이지도 않고 머리만 내밀었는데도 32 m 가량 되었고, 그것의 눈은 커다랗고 둥근 마케도니아 방패의 크기 였다. 7 

여러분의 지식 내에서 지구 상에 존재했던 동물 중에 머리가 32m 가량 되고 눈이 커다란 방패 크기였던 동물이 무엇입니까? 아일리아누스는 뱀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공룡이 이 설명에 가장 잘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또 탄닌이란 히브리어를 공룡으로 해석해도 모든 구절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리나 승냥이는 바다에 살지 않지만 공룡은 바다에 사는 수룡도 있고 하늘에 날아 다니는 익룡도 있기 때문입니다. 탄닌은 들짐승이기도하고 바다에 살기도 하는 동물로 등장합니다.

뱀에 다리가 있었나요? 우주에 시작이 있었나요?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는 뱀의 다리를 없애셔서 배로 기어다니게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과학적인 증거가 있나요? 네! 2015년 4개의 다리를 가진 뱀의 화석이 발견되었습니다. 8  그렇다면 여러분은 뱀에 다리가 있는 화석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성경을 믿지 않고 여러분의 눈으로 증거를 보아야만 성경을 신뢰하시겠습니까?

중세시대 이후 인간의 지성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식에 대한 커다란 자신감에 충만해 또 다른 지식의 바벨탑을 짓기 시작했고, 그 바벨탑은 지금도 계속해서 지어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학문들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든 성경을 부정하려는 경향을 띄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인간의 지식주의에 기독교인들이 동조하며 성경 대신 인간의 지식과 자기의 이해를 더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진리이기 때문에 인간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이 계실수 밖에 없다는 증거들을 찾고, 성경이 정확하다는 증거들을 찾습니다.

사람들은 우주에 시작이 없이 영원하다고 했지만 우주에 시작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사람들은 아브라함, 다윗, 솔로몬 모두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했었지만 이는 거짓으로 드러났습니다. 사람들은 출애굽의 증거가 없다고 했지만 출애굽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증거는 널리고 널리고 널렸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공룡

성경에는 공룡이란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공룡을 묘사하는 장면은 나옵니다.

이제 내가 너를 만들 때에 함께 만든 베헤못을 보라. 그가 소처럼 풀을 먹느니라. 이제, 보라, 그의 기력은 그의 허리에 있고 그의 힘은 그의 배의 배꼽에 있느니라. 그가 자기 꼬리를 백향목같이 움직이며 그의 돌들의 힘줄은 서로 얽혀 있고 그의 뼈들은 강한 놋 덩이 같으며 그의 뼈들은 쇠막대기 같으니라. 그는 하나님의 길들 중에서 으뜸이거니와 그를 만든 이가 자신의 칼을 그에게 가까이 댈 수 있느니라. <욥기 40:15~19>

베헤못은 과연 어떤 동물이기에 하나님께서 자신만이 칼을 가지고 다가갈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공룡이 사람과 같이 살지 않았다고 판단한 사람들은 베헤못을 하마나 코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마나 코끼리가 하나님께서 자랑하실만큼 웅장한 백향목 같은 꼬리를 갖고 있나요? 아닙니다. 진화론적인 모든 관념을 버리고 베헤못의 묘사를 읽어보면, 이 동물은 브라키오사우르스 같은 초식 공룡과 가장 근접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진화론자들이 이를 부정하고 조롱합니다.

사람들이 이를 믿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공룡이 사람과 함께 살지 않았다는 진화론적인 생각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이미 인간이 목격한 용에 대한 역사적 기록들을 거의 20개 이상 읽어 보셨습니다. 이는 시대와 인종과 장소를 떠나 일관성을 가진 독립적인 기록들 입니다. 그리고 공룡이 멸종한지 오래되지 않았다는 증거들은 역사적 기록에만 있지 않습니다.

2억년 전 공룡 단백질이 아직도 남아 있는가?

공룡의 연부 조직 - 젊은 지구의 증거

과학적으로 100만년이 지나면 완전히 분해되야 하는 연부 조직이 공룡 화석에서 발견됩니다. 과학적으로 이 공룡 화석은 만들어진지 100만년이 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과학과 객관적인 증거를 추종하는 분이라면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그 결과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을 갖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연구와 실험 등의 객관적인 데이터에 따라 판단해야하지 관념을 가지고 해서는 안됩니다.

최근 논문에서 과학자들은 2억년 된 공룡의 화석에서 단백질을 검출했음을 발표 9  합니다. 지난 2008년 매리 슈바이쳐 박사가 공룡 화석에서 단백질과 일부 아미노산 서열을 발견했을때에도 과학자들은 단백질이 100만년 이상 보존 될 수 없는데 수천만년 이상 남아 있을수 없다며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10 그런데 그 보다 2.5배가 더 긴 2억년 동안 단백질이 남아 있을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우리가 환경 오염의 주범이라고 경계하는 알루미늄 캔이나 비닐도 100만년이면 분해가 됩니다. 그런데 단백질이 그 보다 200배 이상 남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과학적이지 않음을 넘어 비상식적인 생각입니다. 실제로 어떠한 과학적 연구 결과도 단백질이 100만년 이상 보존 될 수 있음을 입증하지 못합니다.

명백한 관찰 결과가 있지만 그 어떤 진화론자도 공룡의 멸종이 100만년 이상 되지 않았을거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객관적인 증거만으로 결론을 내리기때문에 신뢰할만 하다는 그들의 ‘과학’이라는 학문이 실제로는 증거가 아니라 그들의 관념과 감정에 따라 좌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진화론이라는 관념에 치우쳐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기까지 이릅니다.

성경에는 왜 공룡이 나오지 않나요?

성경에 왜 공룡이 나오지 않느냐는 질문은 무지에 의한 잘못된 질문입니다. 첫번째로 성경에 공룡이 나오지 않아도 성경을 부정하지 않으며, 두번째로 성경에 공룡은 등장합니다. 제가 오히려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날아다니는 불뱀이 있었다고 믿으십니까? 수많은 분들이 이 질문에 답을 망설이시리라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거북선이 실존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거북선을 본적이 없으며 거북선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즉 여러분이 거북선의 실존했다고 여기는 유일한 증거는 역사 기록입니다. 날아다니는 뱀에 대한 증거는 성경에도 있고 일반 역사기록에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북선의 실존 여부보다 날아다니는 뱀의 실존 여부가 훨씬 더 확실한 것 아닌가요?

여러분들이 날아다니는 뱀의 존재를 믿지 않는 이유는 과학자들이 그에 대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증거의 부재는 부재의 증거가 되지 않습니다. 다리가 달린 뱀의 존재가 2015년에야 처음 발견되었다고 해서 2014년까지는 다리 달린 뱀이 존재하지 않았다가 2015년에 뿅 하고 생긴 것이 아니라 원래 다리 달린 뱀은 이 땅에 존재했었는데 인간이 무지해서 그 존재 여부를 알지 못했던 것 입니다.

교과서를 통해 무비판적으로 주입되는  ‘역사 과학’, ‘진화론’,  ‘오랜 연대’ 등은 자세히 파고들면 전혀 과학적이지도 않거니와 진리도 아닙니다. 이는 진정한 과학이 아닌 진화론자들의 신앙일뿐입니다. 진리대신 진리가 아닌것을 믿는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공룡과 성경의 관계에 대한 가장 바람직한 질문은 “성경에 공룡이 등장하는데 왜 여러분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까?” 가 되어야 합니다.

출처: http://fingerofthomas.org/%EC%84%B1%EA%B2%BD%EC%97%90%EB%8A%94-%EC%99%9C-%EA%B3%B5%EB%A3%A1%EC%9D%B4-%EC%95%88-%EB%82%98%EC%98%A4%EB%82%98%EC%9A%94/

미군·미국인·미국 돈이 빠지는 날...


수풀을 들추고 드러난 진실은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 한 손을 털고 다른 한 손도 털 수 있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은 얼핏 윤곽을 잡기 어렵다. 한미동맹의 ‘동맹’을 강화한 것 같기도 하고, 남북교류의 소위 ‘자주’를 강조한 것 같기도 하다. 어느 쪽일까.

 

한미동맹? 7월4일 북한의 자칭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전후로 열린 한·미·중·일·러 정상들의 양자 및 다자 회담을 거치며 ‘한·미·일’ 대 ‘북·중·러’ 구도가 떠올랐다. 문재인 대통령은 시진핑 중국 주석에게 “북한 도발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한·미·일 협력이 불가피하다”고 하는 등 일련의 정상회담에서 ‘선(先)제재, 후(後)대화’ 노선을 보였다. 한·미·일은 94년 정상 회동 시작 이후 처음으로 공동성명도 채택했다.

 

공동성명 내용인즉 “한반도 비핵화 원칙으로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 즉 ‘CVID(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t)’를 강조한 뒤 “미국의 재래식 및 핵 역량을 활용한 한국과 일본에 대한 철통같은 방위 공약을 재확인하였다”며 “국제사회가 북한과의 경제적 관계를 축소하는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하고 “북한과 국경을 접한 국가들”, 즉 중국과 러시아를 상대로 “북한을 설득하는 보다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라”고도 했다.  

 

반면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3일 회담을 통하여 ‘사드 배치 반대’와 ‘제재보다는 대화를 통한 북핵 해결’에 합의했다. 러시아는 5일 열린 UN안보리 회의에서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로 주장한 것을 ‘중거리 미사일’이라며 언론 성명 채택을 무산시켰다. 시 주석은 6일 文대통령 앞에서 “北·中 혈맹”을 역설했다. 중국·러시아로선 북한 핵보다 동북아시아에서의 미국 견제가 더 우선적인 국익이라고 보는 것이다.



<北정권 교체나 붕괴 없다는 4NO 원칙>

 

정부는 표면적으로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한·미동맹 강화와 한·미·일 협력의 불가피성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여기는 전제가 있다. 文대통령은 6월30일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서 “나와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적대시 정책을 추진하지 않는다. 우리는 북한을 공격할 의도가 없으며, 북한 정권의 교체나 정권의 붕괴를 원하지도 않는다. 인위적으로 한반도 통일을 가속화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4No’의 원칙을 밝혔다.

 

이는 7월6일 베를린 쾨르버 재단에서 밝힌 대북 평화구상으로 이어졌다. 역시 북한을 공격할 의도가 없으며, 정권의 교체나 붕괴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나아가 남북관계가 ‘6·15공동선언’과 ‘10·4정상선언’으로 돌아갈 것이며 이른바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을 추진할 것이란 요지를 밝혔다. 정치·군사적 상황과 분리한 비정치·민간 교류 지원의 의지도 역설했다. 대북지원은 8일 G20정상회의 대통령 연설에서 다시 한 번 강조됐다.



<피할 수 없는 답을 피해 가면 시간만 흐른다>

 

한반도 문제의 해법은 김정은의 개과천선이다. 핵개발을 포기하고 개혁·개방하면 해결된다. 그러나 이것은 낭만적인 상상이다. 핵무기는 업적 없는 김정의 유일한 권위의 ‘근원’인 탓이다. 가짜 백두혈통 출신, 인민에 가져다 준 것은 가난뿐이다.


핵무기를 포기하면 내세울 게 아무 것도 없는 지도자, 최고 존엄 김정은의 민낯이다. 개혁·개방까지 나선다면 체제붕괴로 이어질 것이다. 주민들이 인터넷만 사용해도 김정은을 지도자로 따를 리 없다. 핵 포기와 개혁·개방은 과거에도 불가능한 일이었고 미래에도 불가능하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혈로는 70년 체제의 운명을 걸고 개발해 온 핵과 함께 북한 체제를 끝내는 것이다. 압박과 봉쇄와 억지(deterrence)로 백기를 들게 하는 것이다. 피할 수 없는 답을 피해 가면 시간만 흐른다.


한·미·일 3국은 7월4일 북한이 발사한 탄도미사일을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아닌 ‘대륙 간 사거리를 갖춘 탄도미사일’로 공식 규정했다. ICBM에 버금가는 사거리를 갖춘 것으로는 평가되지만 대기권 재진입체 등 핵심기술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음을 고려한 것이다. 맞는 말일지 모른다. 그러나 ‘수년 내’ ICBM은 완성될 것이다.

 

ICBM이 완성으로 치달으면, 미국도 ‘독자적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다. 자국의 안전을 위해서다. 북폭을 할 수도 있지만 타협할 수도 있다. ‘북폭’은 화끈해 보이나 중국과 러시아, 복잡한 외교적 문제를 낳는다. 무엇보다 4No원칙을 밝힌 한국 정부의 절대적, 사실상 결사적 반대를 넘기 쉽지 않다.


‘타협’은 북한과 단계별로 적당히 주고받는 게임이다. 핵 폐기 이전에 테러단체에 핵 확산을 하지 않고 외부도발, 핵실험·미사일 발사를 자제해 준다면 이른바 평화협정을 맺어주는 시나리오다.



<북폭이냐, 타협이냐>

 

미국이 북폭이 아닌 타협으로 선회하면 북한정권과 한국정부, 중국과 러시아 모두 환호할 지 모른다. 그러나 타협의 미래는 어떨까? 한미동맹은 유지될 수 있다. 동맹의 파기는 ‘미국’은물론 ‘한국’에게도 부담스럽다. 다만 북한과 그 뒤 중·러의 힘이 남진(南進)하며 한·미는 말 그대로 형식적 동맹이 된다. 주한미군 지상군은 철수하고 해군과 공군은 한국의 기지를 활용할 것이다.


지상군을 붙박이로 한반도에 두지 않는 이른바 ‘전략적 유연성’ 개념이다. 미국은 타협의 대가로 중국과 한국에 대해선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 일본과 동맹을 강화해 ‘대륙세력의 힘’을 누르려 할 것이다. 

 

정부는 이 같은 미래를 이미 상정한 것인지 모른다. 6월30일 나온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에는 “조건에 기초한 한국군으로의 전작권 전환이 조속히 가능하도록 협력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이는 文대통령 임기 내에 전작권 전환을 추진하겠다는 의미다.


전작권 전환은 노무현 정부가 2012년 4월로 이양을 합의한 후, 이명박 정부가 북한의 천안함 폭침 3개월 뒤 2015년 12월로 연기했고, 박근혜 정부 들어 북핵 문제 해결 뒤로 무기한 연기했다. 그러나 현 정부 들어 ‘조속한’ 전환을 재합의, 5년 내 전작권 전환이 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전작권이 한국군에 넘어가면 한미연합사령부도 존재할 이유가 없어진단 사실이다. 연합사가 사라지면 한미동맹은 더욱 형식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평화협정이 맺어지면, 미국이 한국서 한쪽 손을 터는 것이 된다. 주한미군이 해·공군 위주로 잔류하건 한미동맹의 틀 거리가 유지되건, 거대한 변화가 초래될 것이다. 70년 간 유지해 온 해양세력과의 연대가 느슨해지고, 그 이전 반 만 년 계속돼 온 대륙세력과의 결합이 견고해지는 미래이다.


그 틈을 파고들며 남한 정부와 북한 정권의 교집합인 6·15와 10·4선언의 ‘낮은 단계 연방제’가 맺어질 것이다. 한미 간 동맹을 남북 간 연합이 대체하는 셈이다. 미국을 통해 유입된 자유주의에 대륙의 사회주의 흐름이 섞이며 가치의 혼재와 혼란이 불가피할 것이다.



<한 순간 봇물 터져 미군·미국인·미국 돈이 빠지면>

 

상황은 더 극으로 치달을지 모른다. 남한에 국가보안법 철폐와 반공세력 약화로 주사파가 더욱 창궐하면 주한미군 기지 등을 중심으로 반미시위가 격렬해진다. 한 순간 봇물이 터지며 미군과 미국인, 미국 자본까지 빠져나갈 수도 있다.


남(南)월남은 1973년 1월 평화협정 체결 이후 주월미군이 철수했고 2년 뒤 북(北)월맹의 남침으로 멸망했다. 한반도에서는 1950년 1월 주한미군이 철수하고 반년 뒤인 6월25일 김일성이 남침했다. 설령 미군이 모두 다 나가지 않아도, 한국이 전체주의 국가인 北·中·露와 유착해 과연 평화와 번영을 유지할 수 있을까?

 

사드(THAAD)의 한국 배치가 지지부진하면, 이는 미국의 ‘독자행동’을 부추길 것이다. 2기가 경북 성주에 들어와 있지만 레이더 가동에 필요한 유류 공급이 원활치 못하다. 4기를 추가로 배치할 때까지 이른바 ‘일반 환경영향평가’를 거쳐야 한다. ‘일반 환경영향평가’는 반미 성향 시민단체들의 공청회·토론회·세미나 등 숱한 난관을 안고 있다. 정부는 “사드 철회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북한의 핵과 미사일이 급속도로 개량되고 사드 배치가 시간을 끌게 되면, 미국은 남은 한쪽 손마저 털 수 있다. 역시 ‘북폭’ 아니면 ‘타협’을 저울질할 테지만 한국의 결사반대 아래서 후자로 기울 공산이 크다.   



<'악'을 '악'으로 보지 않는 또 다른 '악'>

 

남북문제를 보는 뷰(view)는 북한 정권에 ‘연민’을 느끼는 순간 왜곡돼 버린다. 악(惡)을 악으로 보지 않는 것은 또 다른 작은 악이다. ‘시간과 돈을 주면 평화로 갚을 것’이라는, 북한의 선의(善意)에 기대는 햇볕정책은 진실이 아니며 성공할 수 없는 신기루 같은 것이다. 햇볕정책이 달빛정책이 된다 해도 마찬가지다. 엄동(嚴冬)정책으로 각을 잡지 않는다면 북한의 변화는 요원한 일이다.

 

중국의 국제 전문가들조차 文대통령이 추진하려는 외교 정책이 난관에 봉착할지 모른다고 지적한다. 스인훙(時殷弘·시은홍) 인민대 국제관계학원 교수는 7월9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미·일과 중·러의 갈등 전선이 매우 뚜렷해졌다”며 “文대통령도 매우 곤란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의 한반도 전문가인 추수룽(楚樹龍·초수룡) 칭화(淸華)대 교수도 “文대통령이 온건한 대북정책으로 관계 개선 의사를 표시하고 남북회담 의사를 밝혀도 북한은 현재까지 (한국을) 전혀 거들떠보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 이유에 대해 추 교수는 “북한이 핵·미사일 개발 뜻을 전혀 바꾸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반도 비핵화, 한미동맹 강화, 한·미·일 공동대응, 한·미·일 vs 북·중·러 대치 등 새로운 형태의 냉전을 암시하는 컨셉들이 난무한다. 그러나 수풀을 들추고 드러난 진실은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 한 손을 털고 다른 한 손도 털 수 있다는 것이다.


한미동맹의 형식화, 주한미군 무력화,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대체, 6·15와 10·4선언의 낮은 단계 연방제 속에서 해양과 맞닿아 온 기존의 문명 축은 대륙으로 급선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정권은 되살아나고 한반도 평화로 분식된 분단은 고착되며, 핵으로 무장한 북한의 국지적 도발을 막기 위한 대북지원은 상습화된다.


한미동맹 이완으로 주변 강국 횡포도 늘어날 것이다. 미군·미국인·미국 돈이 슬슬 빠지며 장기적 침체와 국가의 쇠락 속에 남미식 몰락을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

 

노예상태에서 신음하는 북한의 2,400만 동족의 고통을 외면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할 수도 있다. 유일한 변수는 북한정권의 조속한 붕괴, 급변사태 뿐이다.



출처: 리버티헤럴드 / 김성욱 대표

(http://libertyherald.co.kr/article/view.php?&ss[fc]=1&bbs_id=libertyherald_news&doc_num=1084

예레미야 애가 3장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죽임당하는 참혹함을 어디에 비기겠습니까? 예레미야 애가는 나라가 짓밟히고 백성이 죽임당하고 예루살렘성이 훼파당한 그 참혹한 현장에서 부르짖는 애통의 노래입니다. 5장으로 구성된 예레미야 애가는 각장마다 각 절이 히브리어 알파벳순으로 첫 글자를 시작합니다. 히브리어 알파벳 22글자에 맞추어 22절까지로 되어 있는데 3장만은 첫 글자를 세 번씩 반복하여 모두 66절로 되어 있습니다. 이 예레미야 애가를 통하여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멸망에 따른 슬픔과 비통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통을 당하는 자가 바로 예레미야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노하신 매로 인하여 고난당하는 자는 내로다.” 예레미야를 대표로 삼고 본보기로 삼으셨는지 여호와께서 그 노하신 매로 예레미야를 치셨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치신 그 고통을 토로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둠 속에 자기를 집어 넣으시고, 자주자주 치시고,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고, 뼈를 꺾으시며, 쓰디쓴 담즙과 수고로 둘러싸고, 나가지 못 하게 하시고, 사슬을 무겁게 하시고, 사자같이 곰같이 엎드려 기다리시고, 내 몸을 찢으시고, 활을 당겨 내 허리(킬레야: 콩팥, 신장)를 쏘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백성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시고, 쓴 것으로 배불리시고 쑥으로 취하게 하시고, 조약돌로 이를 꺾으시고 재로 덮으셨다는 것입니다.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기도를 물리치시고 들으시지도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부르짖습니다.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도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죄 없이 버림 받아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그러나 선지자 예레미야의 토로는 그 고통과 슬픔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부릅니다. 그 고통과 재난, 쑥과 담즙을 기억해 달라고 하나님께 하소합니다. 그 고통을 마음의 중심에서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 이유는 22절,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하며,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고난이 심하고 고통이 크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자비와 긍휼이 무한하시고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여호와께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고난당한 백성들에게, 그리고 또 우리에게 촉구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40-41절).” 주께서 우리의 범죄함과 패역함을 인하여 우리를 살육하고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시고, 구름으로 스스로를 가리고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우리를 열방 가운데 던져 모든 대적들이 입을 벌려 우리를 삼키고 두려움과 함정과 잔해와 멸망이 우리에게 임하며. 내 눈에서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고, 대적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구덩이에 던져 넣고 그 위에 돌을 던지고 우리의 모든 소망이 끊어지고, 우리가 멸절되었다고 해도 오직 우리가 부를 것은 여호와의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마침내 우리를 돌아보시고 건지시고 신원하시며 보수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설사 우리가 죽어 없어진 것 같이 된다 할지라도 우리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애가 3장의 흐름은 예레미야애가 전체(1-5)의 흐름과 상통합니다. 처절한 슬픔과 고통을 토로하며 예레미야애가 5장 끝부분은 그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만 소망이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세세에 미치나이다.” 오직 주께로 돌아가겠다고 하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주 버리셨다고,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크다고 하면서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치시고 던지시며 설사 우리를 버리신다 해도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죽어도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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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일보 대기자]국제 엠네스티가 “시민의 정치적 자유 국제조약에 위배된다"며 지난 3월 제출한 청원서에 대해 '박근혜 재판' 조사에 착수하겠다는 사실을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3월 6일 월드한인총연합회(공동대표 정재윤·최창건·황일록)를 비롯한 미국, 카나다, 아메리카, 중국, 등 9개 국가 116명은 지난 3월 6일 대한민국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절차의 “시민의 정치적 자유 국제조약” 위반했다며 국제 앰네스티 국제본부에 ‘대한민국 헌법재판소’를 청원한 것에 대한 회신이다.

청원내용에는 박근혜대통령에 대한 신속심리의 위법성과 조약위반성, 시민의 정치적 자유 국제협약(International Covenant on Civil and Political Rights)에 의하면 ,범죄피의자는 무죄로 추정되며(제14조②), 또한 방어를 위한 상당한 기간을 보장해야 한다..

또 박근혜 전 대통령의 변론기일 연장신청에도 불구하고 이를 허용하지 아니하고, 부당한 이유로 조기에 심리를 종결하고, 신속한 재판을 하는 것은 국제조약에 위반하므로 무효라는 주장이다.

한편 이와 관련 극우 성향의 정미홍 더코칭 대표는 12일 자신의 SNS에 "엠네스티에서 박근혜대통령에 대한 인권유린적 재판에 대해 조사에 착수한다는회신을 받았다. Amnesty International 런던본부에 인권침해 specialist가 배당되어, 재판의 진행과정 처리조사와 ,박근혜대통령에 대한 인귄유린적 재판에 대한 적절한 조사를 하겠다는 것"이라고 맑했다.

이어 "미국에서 탄핵 진실규명을 위해 헌신하시는 목사님께서 큰 역할을 하셨다. 유엔 인권위와 트럼프대통령, 독일의 메르켈 총리에게도 박근혜대통령에 대한 불법 파면과 살인적 재판에 대한 진실을 전했다."고 덧붙였다.

끝으로 정 대표는 "국제 전문가들을 동원해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유 민주의와 법치 파괴행위에 대해 진실을 알리고, 박근혜대통령 구명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이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지고, 반드시 이긴다"고 말했다.
 

심일보 기자 jakysim@naver.com

© 시사플러스

제 12장 자유의 문제 (1) / 안토니 A. 후크마

 

 

크리스챤 인간론에 관계된 중요한 문제 중 이제 생각해야 될 것은 자유에 관한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선 지금까지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때때로 이 논의는 이 문제 논의에 사용되는 다양한 용어들이 갖는 모호성 때문에 뜨거운 논란을 불러 일으켜 왔다. 자유로운(free), 자유(freedom), 자율(liberty), 의지(volition), 뜻(will)과 같은 단어들이 때때로 너무도 다앙한 의미로 쓰여지기에 인간의 자유를 논의하고 있는 사람들도 심지어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왔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타락한 인간이 오늘날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주려 한다고 가정해 보자.

 

자유의지라는 이 두 단어 모두가 문제가 된다.

 

우선 의지란 단어가 아주 명백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며 그러기에 오해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인간 속에는 "의지"라 불리는 구분된 형태의 "기능"이 있으며 이 기능의 역할은 선택하며 걸정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자아낸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은 "강한 의지" 즉, 예컨대 강한 의지의 기능을 갖고 있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약한 의지"를 갖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의지"가 자유로운가라는 질문을 할 때, 그는 이미 의지는 행동에 있어서 자유롭거나 그렇지 못한 어떤 사람 속에 있는 구별된 동인(動因)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은 "기능 심리학"이라 불리는 것과 병존할 수 없는 것이다. 기능 심리학에 있어서 인간의 다양한 능력과 재질과 재능은 마치 이 모든 것들이 어떤 행동을 실행하는 사람 가운데 있는 구별된 동인 혹은 "인성들"인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의지"라 부르는 것은 전인에 의해서 실행된 어떤 행위에 대한 다른 이름일 뿐이다. 즉 결정을 하는 과정 중에 있는 전인을 말하는 것이다.1 그러므로 의지가 자유로운가라는 질문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2

 

또한 자유란 용어 역시 분명치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양한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된 바 있는 질문자가 그의 질문을 통해 의미하는 바는 이와 같은 것들인 것이다. 타락한 인간이 오늘날도 여전히 "선택의 피조물"(creature of option) 즉 이러한 종류의 결정을 할 수 있거나 동시에 그러한 결정들을 하고 있는 자일까? 혹은 타락한 인간이 오늘날, 하나님의 특별은총을 떠나서도 여전히 하나님이 보시기에 전적으로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다시 말하면 만약 그가 대단히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죄없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라는 질문들일 것이다. 자유란 단어의 이러한 두 의미는, 비록 서로 연관되어 있긴 하지만 피차 아주 다른 내용을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용어들을 조심스럽게 정의내린다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이 용어들을 사용할 때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바르게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혼동을 피하고자 "의지의 자유"와 같은 표현 대신에(비록 이 표현이 인용구문에서 간혹 나타나긴 하지만) "선택""참자유"란 단어들을 사용할 것이다.

 

"선택" 혹은 '선택하는 능력"이 의미하는 바는 양자 사이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인간의 능력 즉 이러한 선택들에 대한 책임을 내포하는 능력을 말한다. 이러한 선택 혹은 결정들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으며,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할 수 있으며 그에게 도전할 수 있는 것들일 수도 있다. 참자유가 의미하는 바는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의 계시된 뜻에 맞는 것들을 생각하고 말하며 행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말한다.3 우리가 우리의 타락과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우리의 "의지"와 "자유"에 어떠한 영향을 미쳐 왔는가라고 질문할 때마다 자유의 개념에 대한 이러한 두 개의 구별된 이해를 분명히 염두에 두어야 한다.

 

 

1. 선택하는 능력

 

이제 우리의 관심을 두 표현 중 첫번째인 즉 선택할 수 있는 능력(혹은 선택에 대한 능력)에 두기로 하자. 이 능력은 정상적인 인간 본성의 하나의 지울 수 없는 측면이다. 앞에서 이미 이 점을 지적한바 있다. 2장에서 우리는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인간은 "피조된 인격체"라는 사실 속에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살펴본 일이 있다.4 또한 선택의 능력은 광의의 혹은 구조적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의 한 측면이라는 것도 지적된 바 있다.5 그러므로 인간은 이러한 선택에 대한 능력을 갖고 있으며 이 능력을 심지어 인간타락 이후에도 보유하고 있다는 인식이 기독교적 인간론에 있어서 본질적인 역점사항이다. 성경은 항상 인간을 결정할 수 있으며 그가 결정한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자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마치 "지팡이"나 "돌"처럼 취급하지 않으시며 인간을 그에게 필연적으로 반응하며 그의 반응이 갖는 특성에 대해 책임성을 지니는 자로 취급하신다.6

 

벌두인(Leonard Verduin)이 표현하듯이, 크리스챤의 시각으로 볼 때 "사람은 본질상 선택의 피조물이요, 또한 그렇게 존재하며 계속적으로 양자택일에 직면하여 어느 하나에는 예라고 다른 하나에는 아니오라고 말해야 하는 자"이다.7 이 선택의 능력이 인간을 지상의 모든 다른 피조물들ㅡ산, 식물, 동물ㅡ로부터 구분짓는다.

 

사실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함으로 인간은 하나님과의 닮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은 가장 중요한 재능 중 하나이다. 그것은 인간 존재에 기본적인 것이다. 이것을 떠나선 어떠한 책임도 어떠한 신뢰도 그리고 어떠한 계획도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없이는 교육도, 종교도, 예배도 있을 수 없으며 이것이 없이는 예술도, 학문도, 문화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은 모든 인간 삶의 본질 그 자체이다.

 

 

2. 참 자유의 기원

 

이제 자유에 대한 좀 더 높은 차원의 이해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인 참된 자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 그는 선택에 대한 능력과 참 자유를 소유했었다. 어거스틴의 잘 알려진 말을 빌자면 그 당시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그의 도덕적 완전성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도 있었으며 뱀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비록 심지어 유혹에 대한 이러한 저항도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로 했었지만).8

 

그러므로 태초에 인간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중립적 존재가 아니였으며, 하나님의 도움을 힘입어 전적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존재였다. 인간은 "온전한 상태"로 창조되었다. 인간은 선택할 수 있는 능력 뿐만 아니라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도 갖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때의 인간은 참된 자유를 갖고 있었다ㅡ그러나 그것이 여전히 완전한 자유는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죄를 지을 수 있었으며 사실상 죄를 지었다. 우리의 첫 조상은, 예컨대 그들의 순결성이 깨어질 수 없는 그러한 더 높은 단계까지 진보해 나갔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더 낮은 단계로, 즉 죄와 타락의 단계로 떨어졌던 것이다.

 

 

안토니 A. 후크마의 '개혁주의 인간론'에서 발췌(375-382p)

각주 1

1) 기능 심리학에 관한 훌륭한 비판서로는 John Locke,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Bk. II. Chap. 21, Secs. 6, 14-17.

각주 2

2) '의지'라는 단어는 선택의 과정 혹은 무엇을 하려는 과정을 의미한다-이 과정은 전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의지는 합리적 고려와 감정적 충동을 떠나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의지적 행동은 항상 전인적 기능이다.

각주 3

3) 그러나 종종 '자유' '자유스러운'이라는 용어를 일반적 의미로 사용하기도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언론의 자유'니 '자유스러운 세계'니 하는 용례들과 같다.

각주 4

4) 본서의 pp. 14~22을 보라.

각주 5

5) 본서의 p. 125을 보라.

각주 6

6) 이러한 사상은 특별히 에밀 부른너에 의해 강조되고 있다(본서의 pp. 95~103을 보라).

각주 7

7) Somewhat Less than God, p. 84.

각주 8

14) 이 점에 관해 Bavinck, Dogmatiek 2:600을 보라.

  1. 1) 기능 심리학에 관한 훌륭한 비판서로는 John Locke,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Bk. II. Chap. 21, Secs. 6, 14-17. [본문으로]
  2. 2) '의지'라는 단어는 선택의 과정 혹은 무엇을 하려는 과정을 의미한다-이 과정은 전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의지는 합리적 고려와 감정적 충동을 떠나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의지적 행동은 항상 전인적 기능이다. [본문으로]
  3. 3) 그러나 종종 '자유' '자유스러운'이라는 용어를 일반적 의미로 사용하기도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언론의 자유'니 '자유스러운 세계'니 하는 용례들과 같다. [본문으로]
  4. 4) 본서의 pp. 14~22을 보라. [본문으로]
  5. 5) 본서의 p. 125을 보라. [본문으로]
  6. 6) 이러한 사상은 특별히 에밀 부른너에 의해 강조되고 있다(본서의 pp. 95~103을 보라). [본문으로]
  7. 7) Somewhat Less than God, p. 84. [본문으로]
  8. 14) 이 점에 관해 Bavinck, Dogmatiek 2:600을 보라. [본문으로]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 절대절명의 고난을 이겨 낸 기적의 인생 드라마 -

1949년 당시 12세 임종덕은 중국 용정에서 독립 운동하던 부모님과 함께 서울에 왔다.

서울중학교에 입학했고 1년후 북한의 6.25 남침때 피난가지 못하고 고아가 되었고 그날의 6.25전쟁 61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였다.

형님뻘 되는 청년이 임종덕 에게 서울중고등학교 교실에 불을 지르라 했다.

당시 서울중고등학교는 인민군들이 주둔해 있었는데 이곳에 수감된 수십 명의 청년 이 훈련받고 북한 의용군으로 전쟁에 가는 것이다.

바로 이 청년들을 탈출시키기 위해서 임종덕이 불 지르라는 지시를 한 것이다.

평소부터 의협심이 강한 임종덕은 그 청년이 전해준 기름통을 들고 교실 옆 목조 건물에다 불 지르고 북아현동 자신의 집으로 도망갔다.

집에 도착한 임종덕은 집안에 큰 나무에 올라가 나무속에 숨었다.

잠시 후 인민군 찌프차가 집 앞에 도착 대문을 박차고 들어와 마당에 있던 어린 여동생 머리에 총검을 대고 부모님을 찾았다. 

어린 여동생은 겁에 질려 와들와들 떨더니 지하 창고에 부모님이 있다고 말을 해 버렸다.

잠시 후 부모님이 양손을 뒤로 묶인 채 마당에 섰다. 인민군은 반동분자이기 때문에 처형 하겠다 했다.

임종덕을 학교 방화범 체포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총 소리와 함께 부모님은 쓰러졌다.

아버지 임성규는 독립운동가였고 어머니는 당시 숙명여고 교사였다

인민군들은 준비해온 장작 위에 시체를 얹어 놓고 기름을 부어 불을 질렀다.

이 무서운 만행을 나무 위에서 직접 목격 했던 임종덕은 그 길로 서울을 탈출 피난민 길에 끼어 정처 없이 걷다가 다시 9.28 수복 때 미군을 만났다.

한 미군 대위는 임종덕을 친동생처럼 보살펴 주면서 데리고 다녔다.

그러나 원산과 흥남까지 임종덕을 데리고 간 그 미군 대위가 전사하면서 임종덕은 외로운 고아로 거지생활을 시작했다.

주로 서울역 앞에서 거지생활 하던 임종덕 소년은 고아들을 데리고 당시 불광동 희망원으로 갔다.

그때 그의 나이는 열다섯 살이었다. 자신보다 어린 고아들을 동생처럼 보살폈다.

그러나 어느 날 고아원 원장의 부정행위를 목격한 임종덕은 몽둥이를 들고 원장실로 들어 가 사무실을 박살냈다. 

원장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산으로 도망쳤다. 임종덕은 고아원을 나와 서울역을 향해 달렸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니 동생뻘 되는 아이들이 “형, 오빠” 하면서 29명이 따라오고 있었다.

임종덕은 깜짝 놀라 돌맹이를 던지면서 따라오지 말고 고아원으로 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내 혼자도 먹고살기 힘든데 너희들 어떻게 먹이고 또 잠은 어디서 잔단 말이냐”하면서 계속 돌멩이를 던지면서 저지했으나, 어린 소년, 소녀들은 함께 손을 잡고 울며불며 임종덕을 따랐다.

저녁때가 되어 서울역에 도착한 임종덕은 염천교 다리 밑에 임시 거처를 정하고 모두가 밥을 얻으러 나갔다 두 시간 후에 이들이 얻어온 각종 음식을 모아서 비빔밥을 만들어 골고루 배식을 했다.

그러나 정작 임종덕은 자신이 먹을 음식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잠잘 곳을 찾아서 임종덕은 행복했다.

즉 큰 방공호로 만들어 놓은 장소를 깨끗이 청소하고  그곳에 많은 아이들이 들어갈 수 있었다. 

나이별로 남·녀구분과 엄격한 규칙을 정했다.

임종덕은 어느날 염천교 밑에서 당시 거지왕자로 소문난 김춘삼을 만나서 거지로 살아가는데 지켜야할 중요한 규칙을 교육받았다.

1) 밥을 얻으러 갈 때 대문을 두드리지 말고 깡통 소리를 내라.

2) 밥을 얻을 때는 꼭 깡통이나 그릇을 준비해 가라.

3) 하루에 같은 집에 두번 가지마라.

4) 땅에 떨어진 음식은 절대 먹지 말아라.

한편 날이 갈수록 고아들이 계속 모여들어 129명이 되었다. 고아동생들을 살리기 위해 소매치기와 절도범으로 변했다.

129명의 아이들이 제대로 못 먹고 질병으로 그동안  24명이 죽었다.

어떤 날은 8명이 한꺼번에 죽는 날도 있었다. 

약 사먹을 돈이 없어 감기만 걸려도 고열로 쓰러져 죽어갔다.

그래서 임종덕은 중대한 결심을 했다.

그것은 바로 소매치기와 도둑질을 해서 약값을 모으기를 했다.

1952년이었다. 매일매일 소매치기로 번 돈으로 당장 아이들에게 옷도 사 입히고 약값을 충당했다.

임종덕은 서서히 간이 커지면서 소매치기에서 부잣집들의 담을 넘기 시작했다.

주로 서울 장충동이 활동 무대가 되었고, 특히 제니스 라듸오를 훔치는 날은 아이들에게 특식으로 꽈배기 빵을 한 보따리씩 사가지고 왔다.

어느 날 임종덕 소년에게 그의 인생의 운명을 바꾸는 날이 왔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임종덕은 미국 공군 장성이 탄 승용차 한 대가 미군 전용 주차장에 도착하는 것을 목격했다.

미군 헌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차에서 내린 장군은 환송 중이던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며 잠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바로 이 때 임종덕은 승용차 뒤의 트렁크가 약간 열린 것을 발견하고 그 안에 있는 가방 하나를 훔쳐 비호처럼 도망갔다.

그러나 그는 멀리못가고 미군 헌병들에게 붙잡혔다.

임종덕은 과거 미군부대에 조금 있을 때 배운 서투른 영어로 자신이 절도를 하지 않으면 자신이 데리고 있는 고아들이 굶어 죽는다고 말했다.

근처에서 임종덕을 유심히 보고 있던 장군은 곧 절도죄로 파출소로 연행하려는 헌병들에게 임종덕을 조선호텔 장군의 숙소로 보내 하우스보이로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임종덕은 이 절호의 기회, 이 좋은 직업을 사양했다. 내가 없으면 100여명의 고아 들이 당장 굶어죽는다고 했다.

장군은 헌병들에게 100여명 고아들의 생활 현장을 확인하고 그것이 사실이면 그 고아들 전원을 미 공군이 운영하는 제주도 고아원으로 입소시키고 그리고 임종덕은 자신의 하우스 보이로 일하게 명령했다.

그가 바로 미국 5공군 사령관 스티브 도마스 화이트 중장 이었다.

당시 사령부는 일본에 있지만 작전 지시 관계로 서울 조선호텔에 상주했는데,  안타깝게도 전투비행기 조종사인 그의 외아들이 전투비행 중 전사했다.

한편 화이트 장군은 임종덕을 데리고 약 1년 동안 유심히 관찰한 후 어느 날 임종덕에게 “너는 오늘부터 내 아들이 되었다” 며 양자로 입적을 시키겠다고 했다.

모처럼 장군의 가슴에 푹 안긴 임종덕은 탱큐를 연발하며 엉엉 울었다.

임종덕은 다시 서울중학교 3학년에 복학하여 중단되었던 학업을 계속했다.

어느 날 임종덕은 사령관을 따라 수원의 미공군 기지를 찾았다. 그는 이곳에서 좋은 친구를 만났다.

같은 하우스 보이로 이곳 공군기지 막사에서 일을 하는 김장환이란 소년을 만났다. (후일 수원중앙교회 원로 목사)

김장환 소년은 임종덕을 아주 경계하는 눈초리로 보면서

“너는 도대체 누구냐 너는 무엇 때문에 여기 왔느냐”며 매우 못 마땅한 표정으로 임종덕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 이유는 자신이 일하는 이곳의 하우스보이 자리를 임종덕이 차지하려고 온 것으로 오해를 한 것이다.

그러나 잠시 후 오해가 풀린 김장환은 임종덕에게 “너는 어떻게 장군의 하우스 보이가 되었느냐, 누구 빽이냐”며 너무나 궁금하다면서 계속 캐물었다.

김장환은 임종덕과의 우정이 깊어질 즈음 미국으로 건너간다.

하우스보이 제1호 출국이었다.

임종덕은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살아온 과거와 특히 장군과의 인연이 된 사건까지 다 말해 주었다.

임종덕의 말을 다 듣고 난 김장환은 임종덕의 손목을 꼭 잡고 앞으로 좋은 친구가 되자며 격려를 해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하우스 보이가 된 사연을 간단하게 말했다.

즉 김장환이 동네 아이들과 지게를 지고 산에 나무를 하러 가는 길에 당시 수원형무소 근처에서 미군들의 야외 회식자리가 있었던 현장을 발견했다.

현장에는 미군들이 먹다 남은 각종 음식이 많이 있어서 김장환은 친구들과 함께 신나게 먹었다.

음식을 다 먹고 나자 한 친구가 흙투성이가 된 미군 군화가 몇 켤레 있는 것을 보고 “저것도 가지고 가서 시장에 팔면 돈이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가지고 가자고 했다.

그러나 김장환은 절대 반대했다.
“음식은 남은 것이니까 다 먹고 가도 되지만 군화는 가지고 가다 들키면 도둑놈으로 형무소에 간다”면서 적극 만류했다.

김장환은 친구들이 떠난 후에도 혼자서 흙투성이가 된 군화들을 전부 깨끗이 닦아 가지런히 놓아 주고 일어섰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김장환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바로 미군이었다.

김장환은 이날의 인연으로 나무 지게꾼 소년에서 하루아침에 당장 수원의 미공군부대 하우스 보이가 된 것이다.

김장환의 얘기를 다 듣고 난 임종덕은 마음 속으로 우리는 다 절도와 관련된 운명으로 하우스 보이가 되었구나 하면서 앞으로 자주 만나자고 했다.

김장환도 일요일이면 여중생들과 항상 모임이 있는데 너도 꼭 놀러 오라고 했다.

그 후 임종덕은 일요일만 되면 초콜릿과 온갖 과자를 가방에 가득히 넣고 김장환을 꼭 찾아갔다.

김장환을 꼭 찾아가는 첫째 목적은 여중생을 사귀기 위해서였다.

양아버지의 본격적인 신앙과 교육을 위한 원대한 계획

1953년 어느 주일날 임종덕은 양아버지 화이트 장군과 함께 당시 여의도 비행장에 있는 미군 교회를 찾았다.

미군들의 예배가 끝나자 바로 한국 공군 장병들의 예배가 시작되었다.

이날 예배석 제일 앞줄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김정열 국방장관, 김신 공군참모총장 그리고 화이트 장군과 그외 외국 고관들이 앉아 있었다.

임종덕 소년은 이날 이승만 대통령을 처음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었다.

이 날의 설교를 맡은 한국 공군 군종감의 설교중 후반부의 설교가 임종덕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했다.

“지금 이 나라는 온갖 부정부패의 척결을 단행하지 않으면 이 자유당의 정부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자유당의 총재인 대통령에서부터 국방장관 그리고 군종감의 직속상관인 공군참모총장까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새파란 20대의 청년 군종목사가 거침없이 설교를 해나갔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임종덕은 마음 속으로 “저 목사님은 오늘 당장 형무소 가겠구나”하고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예배가 끝나자 이승만 대통령은 강대상에서 내려온 군종목사를 덥석 안으면서 “아주 훌륭한 설교였소,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들이 목사님의 설교를 모두가 다 깊히 생각하고 각자의 소임을 성실히 해 나가십시오” 하면서 다시 군종목사의 손을 잡고 목사로서 애로사항이 있다면 말해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특히 공군초대 군종감의 입장에서 제일 큰 애로사항으로 교회가 없어 미군 교회를 빌려 쓰는데 하루빨리 우리공군도 자체 교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 박사는 앞으로 서울 대방동에 건설될 공군본부 건설 때 공군 교회부터 먼저 건축하라고 공군참모총장에게 지시했다.

이날의 설교를 했던 공군 군종감이 지금(2011년) 미국 LA의 동양선교교회 원로 목사인 임동선 목사다.

한편 임종덕 소년은 서울중학교를 졸업후 양아버지의 권유로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미국행을 극구 반대했다. 이유는 공산당에 의해 부모님의 그 처참한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에 자신은 앞으로 군인이 되어 공산당을 타도 한다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러나 양아버지는 앞으로 미국에 가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하면 다시 군대에 가서 군인이 될 수 있다고 임종덕을 타일렀다.

한편 임종덕은 지금 양아버지께서 미국 본토로 근무지가 바뀌어서 곧 출국하는데 만일 아버지를 따라가지 않으면 자신은 또다시 고아 신세가 된다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1953년 12월 화이트 중장은 북미주 항공사령관으로 발령 받아 본국으로 귀환한다.

한편 양아버지와 함께 미국에 도착한 임종덕은 아버지의 주선으로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풋싱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그는 학교 기숙사 생활에 만족하면서 하루 100개의 영어 단어를 외우는데, 만일 하루에 단어 100개를 못 외우는 날은 그날 저녁 식사를 굶으면서 밤을 세워 가며 단어를 외었다.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임종덕은 하버드대학교에 무난히 입학하면서 그의 향학열은 더욱더 불타올랐다.

1957년 하버드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다른 동료들은 모두 여행을 떠났지만 임종덕은 기숙사에서 방학 숙제와 리포터 작성에 여념이 없었다.

임종덕은 “앞으로 인류 역사와 문화의 중심은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테마를 주제로 하여 <21세기는 중국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논문을 썼는데 이 논문이 하바드 대학교 학생 잡지에 게제가 되면서부터 이 논문은 미국의 언론과 정계에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닉슨 대통령의 외교안보 보좌관이었던 키신저는 임종덕의 논문에다 자기의 생각을 첨가해서 “중국이 앞으로 문화 중심이 될 수도 있다”고 썼는데 미국의 뉴스위크가 이 글을 크게 보도했다.

한편 임종덕은 <2차 대전후 바이 아메리칸 정책이 아시아에 끼친 영향>이란 졸업 논문으로 하바드 대학교 국제관계 정치학 박사가 된다.

이날 임종덕의 박사 학위식에 참석한 임종덕의 양부모는 감격을 억제하지 못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하고 있었다.

즉, 소매치기와 절도로 전락한 전쟁 고아를 자신에게 맡겨 오늘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참석하게 한 하나님의 섭리에 화이트 장군은 계속 감사 기도를 드렸다.

특히 이날 학위식에는 화이트 장군의 가까운 동료 장성들이 대거 참석해서 자신의 아들처럼 임종덕을 껴안고 박사 학위를 뜨겁게 축하해 주었는데, 하버드대학 개교 이래 그야말로 최고의 “별들의 잔치”였다.

한편 1967년 임종덕은 25살의 나이로 군 입대를 해서 4년간 장교 훈련을 받았는데, 특히 낙하산 훈련과 특공대 훈련에서 1등으로 수료했다.

그의 첫 부임지는 주일 대사관 무관이었다.

미국 정부는 임종덕을 아마 외교관으로 키울 계획이었지만 임종덕은 6개월 만에 월남전에 지원 특수부대로 갔다.

임종덕의 임무는 미군 포로수용소를 습격 미군들을 구출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어느 날 임종덕 대위가 작전을 마치고 지프차로 귀대 중 매복 중인 베트공의 기습을 받아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숫자적으로 불리함을 판단 부하 3명을 살리기 위해서 그들에게 후퇴할 것을 명령하고 대신 자신이 포로가 되었다.

포로가 된 임종덕을 지켜준 하나님

임종덕은 먼저 포겟 성경을 끄내어 급히 손에 잡히는 대로 몇 장을 찢어 몸속에 감추고 성경을 풀 속에 던졌다.

이 포겟 성경은 지난날 장교 훈련소에서 함께 지낸 동료가 준 선물이었다.

이 때만 해도 임종덕은 확고한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그 동료는 임종덕을 항상 안타깝게 여기고 “너는 키도 작고 연약한 몸이니까 앞으로 전쟁터에서 하나님이 너를꼭 지켜 주실 것이다. 그러니 이 성경을 열심히 읽어라”

임종덕은 그 친구의 강력한 권고로 성경을 꼭 세 번 읽고 난 후부터 성경의 내용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임종덕은 그 때 비로써 예수님을 영접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했다.

그때 장교시절 자신에게 확고한 신앙을 심어준 동료가 지금 미국 뉴욕에서 거대한 회사의 회장이 되었다고 했다.

한편 앞서 포로가 되기 직전 성경에서 몇장 찢어서 늘 간직한 것이 성경의 시편 1장에서 3장까지였는데 특히 3장의 내용이 임종덕에게 항상 위로와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임종덕은 수용소에서 “하나님은 왜 나를 포로가 되게 했느냐”고 짜증석인 기도를 자주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 속에 탈출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왔다. 그는 절박함 속에 간절한 기도가 끝나자 야음을 틈타 포로수용소를 무조건 탈출했다.

총탄이 빗발처럼 날아왔다. 단신의 체구에 단 한군데도 부상이 없이 월맹군 부대지역을 벗어나 자신의 부대로 찾아왔다.

부대는 함성으로 뒤덮였고 특히 월맹군 지역의 포로수용소 위치와 주요 부대의 배치 내용도 알고 왔다.

한편 임종덕은 이때 국방성으로부터 정식 그린베레 대원으로 임명 받았다.

그의 활약은 주야간 없이 강행되었다.
적진의 주요 시설을 파괴하고 적군의 고위 지휘자를 납치하며 그리고 미군 포로들을 구출하는 임무였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두번 째 포로가 되었다. 첫 번 포로에서 탈출한지 3개월만 이었다.

임종덕은 이제 처음으로 하나님을 의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날 장교시절 룸메이트였던 그 친구의 말이 문득 생각이 났다.

“하나님은 너를 들어 쓰시려고 이 고된 훈련을 시키니까 지금의 우리들 훈련을 잘 받아내야 앞으로 전쟁터에서 하나님이 분명히 너를 도와 줄 것이다”라는 그 말이 지금에 와서 자신에게 큰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임종덕은 다시 탈출의 기회를 노리는데 어느 날 특별한 심문을 받는 날이 왔다.

즉, 북한군 몇 사람이 임종덕을 유심히 보더니 “이 놈은 틀림없는 남조선 군인이다”하면서 한국말로 심문하는데 임종덕은 그들에게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고 영어를 사용했다.

즉, 자신은 중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이라고 강력하게 말했다.

그러자 북한군은 야구방망이 같은 몽둥이로 임종덕을 엎드려 놓고 그야말로 개 패듯이 내려쳤다.

임종덕은 기절 직전까지 갔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임종덕의 입에서 “아이고 죽겠네! 아이고!” 이런 말이 단 한마디만 튀어나오면 한국군으로 인정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임종덕은 고통과 신음 속에 “오 마이 갓”이란 말만 계속했다.

북한군은 자기들끼리 조용한 음성으로 “이놈이 진짜 남조선 놈은 아닌 것 같은데” 하면서 계속 의심을 하면서 수용소를 나갔다.

2번째 포로가 된 임종덕을 다시 찾아온 하나님

한편 임종덕은 월맹의 최북단의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이 곳은 당시 소련, 중국, 북한으로 쉽게 보낼 수 있는 포로들의 집합소였다.

그런데 이 수용소에서 임종덕은 기막힌 현장을 목격했다. 어느 날 임종덕은 수용소 사무실로 불려나갔다.

월맹군 장교 4명과 경호원 1명이 각자 권총을 차고 있었는데, 임종덕이 보는 앞에서 소련제 권총에 실탄 1발만 장전해서 임종덕에게 건네는 것이다.

6발이 장전되는 탄창에 1발만 넣고 탄창을 몇 바퀴 돌렸다.

그리고 이 권총을 임종덕에게 주면서 자신의 머리에다 데고 발사하라는 것이다.

권총 방아쇠를 당길 때 탄창 칸에 다행히 실탄이 없으면 살고 만일 있으면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

그러니까 생존 확률은 6대 1이다. 소위『러시안룰렛』이란 살인 놀음판이다.

당시 책상에는 승자가 가질 돈이 놓여 있었다.

즉 임종덕이 죽느냐, 사느냐에 따라 각자가 택한 것에 돈을 걸어놓고 놀음판을 벌리는 그야말로 인간의 목숨이 파리 목숨이었다.

임종덕은 이 순간 하나님께 마음 속으로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저가 지금 이 순간 이 악독한 무리들에게 제 생명을  빼앗긴다는 것은 너무나 억울합니다”……

드디어 경호원의 명령으로 임종덕은 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다행히 총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러자 이긴 팀의 군인이 책상 위의 돈을 자신의 포켓에 다 넣었다.

수용소의 고위 관리자들이 하루하루 일과가 너무나 심심하니까, 이『러시안룰렛』놀음판을 매일 한 번씩 하는데 어떤 날은 권총 소리가 나면 죽은 자의 시체는 바로 옆에 있는 강으로 던져 악어가 순식간에 먹어치운다.

임종덕은 이 절박한 현실에서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나깨나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에 매달렸다. 그리고 탈출의 계획을 세웠다.

다시 『러시안룰렛』놀음판에 불려 나가면 지난번과 같은 상황에서 4초안에 현장에서 그들을 무력화 시키고 도망칠 계획을 세웠다.

즉 4초란 것은 1초에 한명씩 박살하고 100미터 정도 떨어진 매콩강에 뛰어 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1주일에 한 번씩 놀음판에 불려가던 순서가 임종덕에게는 한 달이 되었는데도 부르지 않았다.

임종덕은 날로 초조했다. 곧 월맹을 떠나 북한, 중국으로 끌려 갈 것으로 생각했다.

임종덕은 한 달 동안 “4초 탈출”이란 작전을 세우고 마치 운동 연습하는 흉내를 내면서 “4초 탈출”의 연속 훈련을 한 달 동안 계속했다

임종덕은 후일 “그때 한 달 동안 그들이 나를 부르지 않은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나의 탈출을 완벽하게 성공시키기 위한 훈련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고 깨달았다.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드디어 임종덕이 그들에게 불려 나갔다.

4명이 권총을 차고 서로 2명씩 마주보고 앉았다.

이날따라 여자 경호원이 총을 옆에 세워놓고 서 있었다. 임종덕은 경호원 옆에서 떨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 속으로 하나님을 힘차게 불렀다.

“하나님 한 달 동안 훈련시켜준 4초 탈출의 승패가 지금 하나님 손에 달렸습니다.

우선 권총의 탄환이 첫 번째 탄창에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상대방 한명이라도 사살할 수 있습니다”……

이윽고 장교 1명이 자기들끼리 보는 앞에서 권총에 탄환 한발을 장전 두루룩 돌린 후 임종덕에게 건넸다.

권총을 받은 임종덕은 순간 용기가 생겼다. 

조금 전 그토록 불안했던 마음은 순간에 사라지고 틀림없이 하나님이 자신을 도와준다는 확신이 생기면서 한 달 간 연습한 “4초 탈출” 작전을 개시했다.

드디어 권총을 자신의 머리에 대는 척 하다가 가장 경계하는 표정의 상대방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총소리와 함께 상대방이 꼬꾸라지자 임종덕은 평소 그린베레의 무술로 상대방이 권총을 꺼내기 전 평소 훈련했던 4 초 만에 그들을 격파하고 강을 향해 뛰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이런 순간이었다.

강물로 뛰어든 임종덕은 지난 날 특수전 훈련 때 배운 대로 뛰어든 그 물 속 그 위치에서 1분을 있었다.

뒤늦게 달려온 월맹군들이 강을 향해 사격을 퍼부었다. 잠깐씩 숨을 쉬기 위해 순간 수면에 올라와보니 월맹군들은 멀리 2백 미터 쯤 떨어진 강물에 사격을 하고 있었다.

즉, 그들은 그동안 2백 미터 이상 도망간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대형 물뱀과 악어들 속에서 살아나다

임종덕이 뛰어든 강은 매콩강 지류이기 때문에 악어와 5미터 이상되는 물뱀이 많이 서식하는 지역이다.

임종덕은 강물을 헤엄쳐 떠 내려가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것은 “하나님 저 악어들과 물뱀들이 나를 보지 못하게 저 동물들의 눈을 가려 주옵소서” 계속 이 기도만 했다.

월맹군 주둔 지역을 벗어난 임종덕은 드디어 밀림 속으로 숨어 들었다.

매일 같이 큰 개구리를 잡아먹었으며 어떤 날은 4미터 이상 되는 뱀을 잡아 껍질을 벗기고 나무 위에 걸쳐 말리면서 1주일간 먹었다.

임종덕은 가끔 멀리서 들려오는 비행기 소리를 듣고 그쪽이 남쪽이라고 판단 계속 밀림 속을 걸었다.

어느 날 미군 헬리콥터 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순간 그는 자신을 알리기 위해 강가의 백사장으로 뛰어나가 헬리콥터를 향해 미친 듯이 펄쩍 펄쩍뛰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헬리콥터는 베트콩 복장을 한 임종덕을 발견하고 그가 베트콩인 줄 알고 기관총 사격을 퍼부었다.

임종덕은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총탄에 단 한군데도 부상 없이 밀림 속에 숨었다.

임종덕은 엄청난 절망감으로 쓰러져 누웠다.

의식이 몽롱해진 임종덕에게 다시 그 헬리콥터 소리가 들려왔다.

임종덕은 순간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내 영혼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큰소리로 외치면서 무조건 백사장으로 다시 뛰어나가 헬리콥터를 향해 손을 흔들며 펄쩍 펄쩍 뛰었다.

그 순간 미군 헬리콥터 조종사는 중요한 판단을 했다.

즉, 비록 베트콩의 군복을 입었지만 저 사람은 분명 월남군인의 패잔병으로 판단 그를 구출하기 위해 백사장에 비상 착륙을 감행했다.

임종덕은 헬리콥터에 타자마자 실신되어 공군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병원에 도착한 임종덕은 의식이 회복되자 자신은 미군 그린베레임을 밝혔다.

즉시 신원을 확인한 미군 수사관은 부모님께 이 기쁜 소식을 알려 주겠다고 연락처를 대라고 했다.

임종덕은 미국 공군 참모총장이 자신의 아버지라고 하면서 연락을 취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수사관은 임종덕을 조금 이상한 눈초리로 보았다.

임종덕은 즉시 메모지에다 아버지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록해 주었다.

공군 참모총장 스티브 도마스 화이트 공군대장 이라고 적어 주었다.

“하나님은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

밀림속에서 미군 헬리콥터에 극적으로 구출된 임종덕은 사이공의 공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즉시 미국 공군 참모총장 화이트 대장과 전화 통화가 되었다.

아버지 화이트 대장은 포로가 되었던 아들이 탈출해서 사이공에 왔다는 아들의 육성을 듣고

“이게 혹시 꿈이 아니냐 아들아 너가 포로로 잡혀간 그날부터 네 어미와 나는 밤낮으로 너를 위해 기도했단다”……

당시 월남전에서 8명의 미군이 포로수용소에서 탈출에 성공했는데 그중 임종덕 대위가 제1호 탈출이었다.

그래서 미군은 물론이며 미국 내 참전 가족들의 환성이 대단했다.

화이트 대장은 “아들아 내가 너를 직접 보아야 실감이 날 것 같구나.

그래 어디 부상당한 데는 없느냐”며 계속 울먹이며 질문을 했다.

임종덕은 울먹이는 아버지를 오히려 위로하면서 그가 항상 아버지께 한 말을 했다.

“아버지 하나님은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고 늘 얘기 했잖아요”…

임종덕은 1주일 간 공군병원에서 요양을 하면서 3개월간의 포로 생활에서 특히 그 생사의 갈림길에서 끝까지 자신의 생명을 지켜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사이공에 도착한지 8일 째 되는 날 임종덕은 미국 백악관으로부터 긴급 통보를 받았다.

“존손 대통령께서 귀관을 백악관으로 초청하라는 명령이니 급히 오십시오”……

임종덕은 즉시 아버지께 이 내용을 알렸더니 아버지도 이미 알고 있다면서 나와 함께 백악관에 들어가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 했다

은성 무공 훈장과 1계급 특진

임종덕은 키가 팔 척 대장 같은 거구의 존슨 대통령으로부터 은성 무공 훈장을 받으면서 감격했다.

한편 대위에서 6년 후 소령이 되는데 임종덕은 대위에서 바로 소령 특진을 받았다.

특히 은성 무공 훈장을 받은 것은 부하 3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직접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한다.

훈장 수여가 끝나자 존슨 대통령은 임종덕을 신기한 표정으로 아래 위를 살피며 미소를 지었다.

키가 1m64cm의 이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그 엄청난 행동과 지혜가 있었는지에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존슨 대통령은 공군 참모총장에게 “귀관은 어떻게 이런 자랑스럽고 훌륭한 아들을 두었소.”하고 물었다.

대통령의 질문에 아버지가 답변을 못하자 임종덕은 “대통령 각하 하나님은 항상 저와 함께 하십니다.”라고 말하자 존슨 대통령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임종덕의 굳건한 신앙에 큰 미소를 지었다.

한편 임종덕의 포로수용소 탈출 기자회견을 계기로 그가 겪었던 수용소 생활과 특히 러시안 룰렛 즉, 권총 살인게임 등을 소재로 한 영화가 제작 되었다.

감독에 마이클 치미노 주연 배우에는 로버트 드니로를 비롯한 존케세일, 존세비지 등이 출연한 이 영화가 바로 디어헌터 (The Deer Hunter)였다.


그 후의 남은 이야기

백악관서 은성무공 훈장, 대통령 안보비서관

존슨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처음으로 백악관에 가서 은성무공훈장을 받고 특진하였다,

존슨 대통령이 화이트장군에게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아들을 두었냐고 해서 “하나님이 함께하기기 때문이라”라고 하였다.

5년후 닉슨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두 번째 백악관을 가서 대통령 안보비서관 임명을 받고 전 미 국무장관 키신저와 함께 외교활동을 했다.

미국 중국, 핑퐁 외교로 극비합의 성공

미국과 중국이 적성국가로 외교가 단절된 상태이고 당시 중국은 모택동의 문화혁명으로 외국의 어떤 문화도 침투할 틈이 없었는데 오직 탁구경기만이 중국정부와 국민이 거부반응이 없어서 임종덕비서관은 미국 탁구선수단을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등지로 순방하면서 탁구를 통한 양국의 스포츠 교류를 서서히 진행시켰다

임종덕비서관은 당시 중국총리 주은래를 여러 번 만나면서 주은래가 동생처럼 호의를 베풀면서 임종래라는 이름도 지어주고 모택동도 다섯 번 만났다.

박정희 대통령의 소개로 결혼

1971년 미국과 중국이 극비리에 정상회담을 합의하고 키신저가 가는 길에 인접한 일본에도 알려야겠다고 할 때, 한국도 알려야 한다고 하자 한국은 당신이 가서 알리시오 해서 처음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더니 그렇게 좋아하면서 일 하느라 장가 못간 노총각이니 중신은 내가 서겠다고 하며 육여사에게 당부하여 한국의 전통 가문인 민 씨 가문의 규수를 소개하여 결혼하고 더욱 친밀해졌다.

노벨평화상 감이 된 탁구공

1971년 키신저의 중국 극비방문에서 합의 한 대로 1972년 2월 닉슨대통령이 중국을 공식 방문하여 양국공식성명이 발표되었다

불과 2.5g 의 작은 탁구공이 미중외교를 성사시킨 1등공신으로 노벨평화상감으로 선정되어 세계를 흥분시켰다.

이민동포를 위한 LA 동양선교 교회 설립

임종덕비서관은 LA출장 중에 한국에서 온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 했다가 설교한 목사님을 본 기억이 났다 20여 년 전 1953년 15살 때 이승만 대통령과 아버지 화이트장군과 여의도 미군공군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한국공군군종감 임동선 목사의 설교를 듣고 감동받은 목사였다.

그래서 임종덕비서관은 임동선 목사에게 70년대에는 한국에서 이민을 많이 올 텐데 와서 서로 위로 받을 이민교회를 세우자고 하여 1970년 동양교회를 창립하여 8000명의 교포가 모인 가장 큰 한인교회가 되었다.

1975년에 임종덕비서관을 장로추대를 했으나 자신이 장로될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장로학과 장로란 책 두 권을 필독하고 부족하다고 사양했다.

미국 대통령3대에 걸친 안보비서관

함께 일한 헨리 키신저가 국무장관이되어 미,중 외교에 전념하여 순조롭게 이루어졌는데 1974년 양아버지가 83세로 서거하고 화이트장군은 재산을 임종덕을 훌륭하게 교육시킨 하버드대학과 모교인 미 공군사관학교에 기증했다.

임종덕비서관은 닉슨, 포드, 카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안보비서관을 잘 수행했다.

중국과 친선경기로 시작한 핑퐁외교도 1979년 양국 간 국교가 수립되었다.

미군철수를 고집하는 카터 대통령과 결별

카터대통령이 주한미군을 4,5년사이 완전 철수 하겠다고 할때 주한 미군사령부참모장 싱글러브소장이 철군반대를 주장했다.

이틀 뒤 5월19일 카터대통령을 싱글러브장군을 소환하고 참모장 직에서 해임시킨 후 카터대통령은 임종덕비서관에게 “당신의 조국이란 입장을 떠나서 나의 철군계획과 한반도 정책에 대해 말해보시요”하여 “ 현재 4만여 미군이 주둔하여 북한이 도발 못하며, 한국은 경재부흥과 더불어 미국이 바라는 민주주의국가로 성장하고 있다”하였다.

또 카터가 국가안전보장 이사회에서 과거 월남전에서 도망한 도망병을 전부 사면하라는 지시에 아무도 말 안할 때 장군 진급심사를 두 달 앞둔 임종덕은 싱글러브장군과 같이 불이익을 받을 줄 알면서도 “전투 중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친 자를 대통령이 사면하면 앞으로 전쟁터에서 누가 미국을 위해 생명 바치겠냐?”고 했다.

임종덕은 대통령비서관이 걸림돌이 되어 결례가 되므로 자진해서 자리를 옮기겠다고 건의하여 백악관을 떠나면서 몇 번이고 뒤돌아보면서 발길은 교회로 향하고 텅 빈 교회에 들어가서 모처럼 하나님께 긴 시간의 감사기도를 드리고 1986년 육군대령을 예편하면서 LA동양교회 장로가 되었다.

미국 육사의 교과서 주인공

625 당시 밥을 얻어먹지 못하여 물배를 채우려고 종로구 내자동 우물가를 찾아가서 허기에 지처 힘없이 누어있던 임종덕 아이를 625타임즈 종군기자가 찍은 사진이 유명한 풀브라이트 종군기자상을 수상한 사진 ‘우물가의 소년’이다.

임종덕 소령은 당시 영화 제작사로부터 기막힌 소재를 제공한 대가로 당시 15만 불을 받았고 또한 미국 육군사관학교는 임종덕의 수용소 탈출과 15일간의 정글 생활에서 살아나온 과정을『정글 탈출기』란 책으로 만들어 육군사관학교 정식 교과서로 사용했다.

이웃블로그/푸른 솔

서울 교대 여학생의 호소!

“더이상 그들의 외침을 모른 척해선...”





2012년 8월 15일.
이 날은, 내가 대학교 2학년 때
북한 동포들의 해방을 다짐하며,
중국 대사관 앞에서 탈북자들의
자유와 인권과 생명을 보존할 것을
결의한 날이다.




그리고 5년 후
3.1절 '다시, 독립정신' 집회에서
한 친구가 북한 땅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받았고
북한 해방을 위해 자신의 삶을 던지고 싶다며

나에게 찾아왔다.

그렇게 하나님의 같은 비전 아래 우리는 동료가 되었고
예수님의 다시 오실 길을 예비하기 위해
매주 함께 기도하며 삶을 나누고 있다.

2017년 4월 21일, 정부서울청사 앞
대학교 2학년에 재학중인 이 친구가
교회와 민족을 향한 하늘의 메시지를
선지자적으로 쏟아냈다.

교회의 미래를 절망적으로 쏟아내는 통계 속에서
하나님이 직접 준비하시는 비밀병기들이 있다는 것은
아직 통계에 잡히지 않았다.


하나님의 비전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질 것이며
반드시 성취되고 말 것이다.



글쓴이: 정우민 전도사님

선감학원은 소년 감화원이란 이름의 강제 수용소였다. 이 수용소는 일제가 '소년 감화'를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수용소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 운영 됐다. 수용소 안에서는 문을 닫던 해인 82년도까지 강제노동과 폭력 등 온갖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그 사이 수많은 수용자들이 고통 속에 죽어갔다. 살아남은 일부 수용자들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경기도의회가 진상조사에 나서면서, 과거 이 수용소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오마이뉴스>가 선감학원이라는 이름의 강제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 비극을 낱낱이 밝힌다. [편집자말]
⇒ 전편에서 이어진 기사.

 선감학원에서 죽은 소년들이 묻힌 배꼽산, 그 옆 비닐하우스가 예전에 소년들이 닐하던 뽕나무밭이다.
 선감학원에서 죽은 소년들이 묻힌 배꼽산, 그 옆 비닐하우스가 예전에 소년들이 일하던 뽕나무밭이다.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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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에게 버림받은 7살 소년 임용남은 서울역 인근 남대문시장에서 국화빵 몇 개를 얻어먹은 것을 시작으로 걸인 생활로 접어들었다. 한뎃잠을 자고 구걸해서 배를 채우면서 유령처럼 도시를 떠돌았다. 그래도 엄마를 찾는다는 목표가 있어 참을만했다.

추위를 피하려고 우연히 찾아 들어간 다리 밑 거적때기 오두막에서 걸인 노인을 만났다. 그와 함께 생활하면서 '잘 빌어먹는 법'을 터득했다. 혼자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자, 그는 걸인 노인과 헤어져 엄마 찾기에 나섰다. 본격적인 유랑을 시작한 것이다.

문산, 의정부, 안양, 인천, 부평…. 발길 닿는 곳이면 어디든지 갔다. 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워질 때마다 '아들 버린 것을 후회하며 엄마도 지금쯤 나를 찾고 있을 것'이라 상상했다. 이 상상만 하면 다리에 힘이 붙었다.

거리에서 만난 형들(걸인)과 어울리다가 범죄에 휘말려 파출소 신세를 지기도 했다. 형들이 도둑질하는데 망을 본 것이다. 다행히 나이가 어려 감옥이 아닌 보육원에 보내졌다. 부평에 있는 에덴 보육원이다. 하지만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엄마를 찾는다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에덴 보육원을 탈출한 그가 향한 곳은 경기도 수원이다. 얻어먹고 한뎃잠을 자며 수원에서 한 달가량을 버텼다. 자연스럽게 다시 걸인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맞춤한 잠자리를 찾아 누우려던 찰나였다.

"팔달산 근처였어요. 경찰이 저를 손짓하며 부르는데,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거예요. 그 경찰이 저를 다짜고짜 지서로 끌고 갔고, 다음 날 아침 수원 군청(시청)으로 넘겼어요. 그곳에 도착해 보니 '전국 부랑아 일제 단속 기간'이라는 커다란 글씨가 붙어 있었어요. 그제야 저를 왜 끌고 왔는지 알 수 있었죠." 

소년 임용남은 여기저기서 붙잡혀 온 30여 명의 아이들과 함께 선감도로 끌려갔다. 1963년, 그의 나이 만 12살이었다. 소년들은 죄가 있어서 끌려간 게 아니었다. 운이 나빴을 뿐이다. 죄가 있다면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는 것, 배가 고파서 밥을 얻어먹었다는 것, 잠 잘 데가 없어 한데서 잤다는 것, 그러다 보니 옷이 무척 남루하다는 것뿐이다.

지난 1998년경부터 선감학원의 진상을 조사한 정진각 안산지역사회연구소 소장에 따르면, 당시는 쿠데타에 성공한 군사정권이 아이들을 무더기로 잡아서 수용하던 때였다. 이른바 '후리가리(일제 단속)'라고 해서, 100명을 잡아넣으라는 지침이 떨어지면 어떻게든 채워 넣어야 하는 그런 시기였다. 그래서 부랑아도 아니고 고아도 아닌, 부모가 멀쩡하게 있는 아이를 유괴하다시피 해서 끌고 간 경우도 허다하다.

폭력은 일상, 구걸해서 먹는 밥보다 못한 식사

 위령탑 뒤로 보이는 산(배꼽산)에 선감학원에서 생을 마감한 소년들 유해가 묻혀 있다. 약 300미터 정도 거리.
 위령탑 뒤로 보이는 산(배꼽산)에 선감학원에서 생을 마감한 소년들 유해가 묻혀 있다. 약 300미터 정도 거리.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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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은 걸인 생활보다도 못한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구걸해서 먹는 것보다도 못한 식사가 나왔고 매 맞는 일은 일상처럼 돼 있었다. 자유도 없었고, 그 대신 단체 생활에서 오는 고단함만 있었다.

정말 견디기 힘든 것은 성폭력이었다. 어리고 곱상하다 싶으면 영락없이 검은 손이 뻗어 왔는데, 소년 임용남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게 제일 힘들었어요. 자존심도 많이 상했고요. 엄청난 폭력 앞에 무릎을 꿇은 거죠. 밤만 되면 지옥이에요. 함께 잠을 자는 막사 안에서도 그 짓을 했고, 산에 끌고 가서 하기도 하고. 아파도 소리 못 질러요. 곡괭이 자루로 때리고, 낫이나 칼로 찌른다고 위협하니까요. 그때 총이 있었다면 다 쏴서 죽였을 거예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죽기를 각오하고 미친 듯이 반항을 하니까 그때야 그들이 그 짓을 멈췄어요. 나중에 성인이 돼서 감옥에도 갔었는데, 그곳이 선감학원보다 훨씬 나았어요."

그들은, 막사에서 힘이 있는 계층인 사장(막사의 장) 반장 같은 스무 살 정도 된 청년들이었다. 가해자는 천국이었을지 모르지만, 피해자는 지옥이었다고 임 목사는 회상했다.

"그 사람들은 그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을 다 누렸어요. 권력, 섹스 등. 쌀밥도 마음껏 먹을 수 있었고요. 힘없는 어린아이들을 노예로 부릴 수 있었으니 그들은 어쩌면 밖으로 나가기 싫었을 수도 있어요. 다리 주무르기부터 빨래, 잔심부름까지 다 해주었거든요. 그 시절에 어디 가서 쌀밥을 먹고, 어디 가서 그런 대접을 받을 수 있었겠어요."

그러나 힘없는 소년 임용남에게 그곳은 지옥이었다. 엄마를 찾을 수 없어서 더 견디기 힘들었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탈출뿐이었다. 탈출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결국, 그는 7번이나 탈출을 시도해 자유를 얻게 된다. 6번째 탈출에도 성공했지만, 수원에서 다시 일제 단속에 걸려 선감학원으로 끌려가는 불운을 겪기도 한다.

잦은 탈출, 주의할 인물로 찍혀서...

 선감학원 피해자 임용남 목사
 선감학원 피해자 임용남 목사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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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에 온 지 채 10일도 지나지 않아 소년 임용남은 탈출을 결심했고, 몇 달 뒤 첫 탈출을 감행했다. 그러나 바닷가를 서성이다가 한 뱃사람 눈에 띄어 바다에 발도 담그지 못하고 실패했다. 뱃사람 만류로 바다에 뛰어들지 못하고, 그와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선감학원 사감 선생 등에게 붙잡힌 것이다.

붙잡혀 와서는 죽도록 맞았다. 곡괭이 자루로 맞았고 쌀부대 같은 데 집어넣고 몰매를 가하는 '부대 말이'도 당했다.

두 번째 탈출은 치밀한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 화장실 문짝을 떼서 뗏목으로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도 역시 실패했다. 화장실 문짝으로 센 물살을 헤쳐 나가기는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바다에 떠서 오도 가도 못 할 때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나가는 배가 있어 목숨은 구할 수 있었다.

역시 몰매가 뒤따라 왔다. 첫 번째 탈출 때보다 훨씬 센 강도였다. 겁도 없이 화장실 문을 뗐다며 사감 선생이 미친 듯이 회초리질을 했는데,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선감도를 오가는 선박의 창고에 숨어든 게 세 번째 탈출이었다. 바다로 나가기도 전에 선주에게 들켜서 실패했다. 그 뒤로도 소년 임용남은 2년 동안 총 2번의 탈출을 더 감행했는데, 그때문에 요주의 인물로 찍혀 밤에 화장실조차 마음대로 가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소년은 탈출을 멈추지 않았다. 여섯 번째 탈출은 철저한 준비와 치밀한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 우선 죽을 힘을 다해 수영을 연습했다. 그 덕분에 수십 명이 선수로 참가한 선감학원 수영대회에서 6등이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물때도 잘 맞춰 소년 임용남은 드디어 탈출에 성공했다. 선감학원에 끌려간 지 3년여만이었다.

탈출한 지 3일만에 다시 일제 단속에 걸려서

 어린 넋을 건져 올리는 홈 맞이 굿이 열린 선감 선착장,
 어린 넋을 건져 올리는 홈 맞이 굿이 열린 선감 선착장,
ⓒ 김성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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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쁨도 잠시, 소년 임용남은 수원에서 또 경찰에게 붙잡히게 된다. 탈출한 지 약 5일만이었다. 경찰에게 붙잡혀 파출소로 간 소년 임용남은 또 한 번 소름 끼치는 글자를 마주하게 된다. '전국 부랑아 일제 단속기간!'이라는 글이다. 3년 전에 일제 단속에 결려 끌려가 죽을 고생 끝에 탈출했는데 또 일제 단속에 걸린 것이다.

소년 임용남은 다시 선감도로 끌려가게 된다. 선감도로 오는 배 안에서는 자살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려 했지만, 경찰에게 가로막혀 그마저도 실패했다.

"그 참담함이란, 가슴이 무너진다는 게 어떤 심정인지 알 수 있었어요. 그저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요. (탈출하기 위해) 헤엄치다가 차라리 고기밥이 되는 게 나았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소년 임용남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시무시한 폭력이었다. 얼굴을 물에 처박은 다음 숨이 꼴딱 넘어가기 전에 꺼내주는 이른바 물고문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물고문과 함께 가해지는 채찍질과 몽둥이세례도 끔찍했다. 시야가 흐려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필름이 끊기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깨어나 보니 양호실이었다.

"7번이나 탈출을 시도하면서도 무턱대고 바다로 뛰어들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요. 그곳에 있는 3년 동안 10번 정도 죽음을 목격했는데, 대부분 도망치다 바다에 빠져 죽은 경우였어요. 정말 끔찍합니다. 몸은 퉁퉁 불어 있고, 조그마한 조개가 덕지덕지 붙어 있고. 시체를 건지면 가마니에 둘둘 말아서 묻으면 그만이에요. 개죽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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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산부인과 의사들이 남자로 태어나 여자로 성전환을 진행 중인 트랜스젠더와 또 한 남자에게 자궁 이식 수술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National Health Service 소속의 의사들은 The Mail과의 인터뷰에서 “평등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도 이 이식 수술 비용이 국가의 세금으로 충당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리버풀 대학의 Amel Alghrani 박사는 이런 이식수술은 실제로 가능하며, 이 수술이 아이를 갖기 원하는 트랜스젠더 여성 뿐 아니라, 역시 “아이를 낳는 경험을 하고 싶어하는” 동성애자와 일반 남성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설명하였다.

 

Alghrani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시도는 “임신과 출산에 있어서 혁명적인 일이 될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평범한 남자가 자궁을 이식 받음으로 “부부 모두가 임신과 출산의 부담과 기쁨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녀는 또 “아이를 얻기 원하는 동성커플들과 대리모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 독신 남성들도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기사원문>> Womb Transplants for Gay, Transgender and Straight Men Who Want to Carry a Child?

 

 

* 1994년 개봉했던 ‘주니어’라는 영화에선 한 불임전문의사가 자신이 개발한 약을 통해 수정난을 남자의 복강에 이식하여 임신을 시키고 아이를 출산한다는 내용이 소개된 바 있다.

 

당시 남성미의 상징이었던 미스터 월드 출신의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영화 속 실험대상이 되어 임신과 출산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큰 웃음을 주었었는데, 이 영화와 같은 일이 이제는 현실속에서도 재현될 것으로 보인다.

 

 

영국에서 남성의 몸에 자궁을 이식하여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는 엽기적인 프로젝터가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남녀의 성구별을 없애려는 다양한 시도가 문화(패션)와 법조계(용어 사용, 화장실 사용에 대한 규제) 뿐 아니라 의료계에서도 조직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 더 나아가 인간과 짐승의 구분을 없애 버림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짐승만도 못한 인간으로 바꾸어가기 위한 ‘루시퍼 프로젝트’가 진행 중인 것이다. 

이 망령된 일들을 멈추게 하기 위해 심판의 주가 곧 오실 것이다. 마라나타!

- 예레미야 -


5. 죄의 수수께끼 / 안토니 A. 후크마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첫 조상의 유혹과 타락에 나타난 이러한 단계들을 분별할 수 있다고 해서 우리가 창세기의 이야기 속에서 인간 세계로 침입한 죄에 대한 설명을 찾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여기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죄의 기원에 대한 성경의 이야기체이지 죄의 기원에 대한 설명은 아니다. 사람과 천사의 삶에 있어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죄는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악의 기원에 관한 문제는 바빙크가 말했듯이 삶의 가장 어려운 수수께끼 중의 하나이다.

 

물론 첫 조상이 창조될 그때에 죄를 범할 가능성이 그들 안에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부정적인 묘사를 통하여 서술하였다: 인간이 처음 피조되었을 상태를 풋세 논 페카레(posse non pecare, able not to sin) 즉,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존재였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이 진술자체가 죄를 범할 가능성이 아담과 하와 안에 처음부터 잠재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어떻게 이 가능성이 실제적으로 터져버렸는지 우리는 결코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하와의 마음 속에 의심이 처음 솟아올랐는지 우리는 도저히 알 길이 없다. 어떻게 죄없는 상태 즉 순결의 상태로 피조된 인간이 죄를 짓게 되었는지 우리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나 그가 인간에게 주신 재능 안에서 우리는 죄의 동기를 찾을 수 없다. 그 재능들로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께 순종을 지킬 수 있어야 했다. 그들이 그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는 그들의 도덕적 순결성을 지킬 수 없었음을 우리가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담과 하와가 그것을 지킬 수도 있었으며 지켜야 했다는 점이다. 왜 그들이 그리하지 않았는지 하나님의 창조 안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의 첫 조상들이 죄로 인해 타락하게 된 원인이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어찌 하나님께서 그의 뜻에 상반되는 것을 그들로 하여금 하도록 하실 수 있겠는가? 이 사상은 그 자체가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께 대하여 가르치는 모든 것을 부인하도록 한다. 야고보서가 말해주듯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함과 같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 자신의 욕심에 미혹되었으나 어떻게 혹은 왜 그랬는지 우리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죄의 행위는 죄의 의지를 그 동기로 삼는다고 할 수 있겠으나 무엇이 죄의 의지의 근원이었나? 어떻게 무죄한 의지가 죄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시작할 수 있었겠는가? 어거스틴은 이점에 대해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무도 악한 의지의 충족한 동인을 찾으려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동인은 그 자체가 충족한 것이 아니라 결함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결함들의 원인들-다시 말하거나와 충족한 것이 아니라 결함되어 있는 원인들-을 찾는 것은 마치 어두움을 보려는 것이나 침묵을 들으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더 나아가서 혹자는 죄의 무감각성과 "무동기성"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죄를 합리적 체계의 한 부분으로 바라보려는 시도는 단연코 배격되어져야 한다. 몰상식으로부터 상식이 나올 수 없는 법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죄는 설명되어질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이런 정도에 내어버려야 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 첫 조상이 죄를 범한 것이 하나님의 섭리적인 허용바깥에서 일어나지 않았음은 여전한 진리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의 원인이 아니셨다. 그러나 허락은 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이 어떻게 그의 뜻에 어긋나는 일들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실 수 있겠느냐 하는 어려운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오래전 어거스틴은 그것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주님의 하신 일들은 그의 의지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크고, 잘 숙고된 일이다'라는 진술의 의미는 이것이다. 즉 기이하고도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뜻에 어긋나게 행해진 일이라 할지라도 그의 뜻이 없이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죄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지 결코 하나님의 뜻밖에 있거나 너머에(praeter) 있지 않다. 하나님은 그의 전능하심으로 심지어 악으로부터도 선을 가져오실 수 있기에 인간타락을 허락하셨다. 그러나 인간의 죄가 하나님의 뜻 밖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죄를 면제해 주거나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죄는 언제나 수수께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안토니 A. 후크마의 '개혁주의 인간론'에서 발췌(222-225p)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3. 천사들의 타락 / 안토니 A. 후크마

 

 

그러나 인류의 죄의 기원을 말해주는 창세기의 인간타락 이야기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죄는 인간타락 이전에 천사들의 타락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뱀”이라 불리는 한 피조물에 의해 유혹을 받았다(창 3:10). 그러나 다른 성경구절을 보면 뱀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하나님께 반항하여, 타락한 천사들의 지도자가 되어버린 최고의 악한 영인 사탄의 “대변자” 혹은 도구였음이 분명해진다.1 그 뱀이 우리의 첫 부모들을 유혹해 죄를 범케 했고, 그 뱀이 사탄의 도구였기에 우리는 죄가 인간세상 속에 들어오기 전에도, 죄가 천사들의 세계에 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분명히 천사의 계급에 속해있던 사탄은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수많은 천사들을 데리고 순결의 상태에서 악의 상태로 떨어졌음에 틀림이 없다.2

 

천사들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이 골로새서 1:16에 분명히 나타나고 있으며,3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성경구절 속에 암시되어지고 있다(시 33:6, 느 9:6, 요 1:3, 롬 11:36, 엡 3:9). 비록 언제 천사들이 피조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이 그 모든 일을 마치신 후 쉬시기 전에 천사들이 피조 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31).

 

성경에는 천사들의 타락의 시기와 그 성격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그러나 천사들의 타락이 인간타락 이전에 일어났음이 분명하다. 천사들의 죄의 성격을 가장 가깝게 기술하고 있는 곳은 유다서 6절이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이 천사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셨던 위치에 만족치 못하고 더 높은 지위를 원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죄의 뿌리는 끝내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에 이르게 된 교만이었다. 교만이 사탄과 그의 천사들의 죄의 뿌리였다는 사실이 디모데전서 3:6에서 더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교회의 감독자가 되기를 원하는 자) 새로 입교한 자이어서도 안되니 그렇지 않으면 그가 교만하여져 마귀가 처한 같은 심판에 처하게 될까 함이라”(NIV 직역).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죄는 인간세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영들의 세계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 영들은 그들 밖에 있는 어떤 힘이나 세력에 의해 죄를 짓도록 유혹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타락한 것이다. 사실상, 예수님은 마귀가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거짓을 말할 때마다 “자신의 본성을 따라"(요 8:44) 말한다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하면, 타락한 천사들의 지도자인, 마귀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거짓을 세상에 가져온 것이다.4

 

그러나 인간 세계에서는, 죄를 짓게 하는 유혹이 외부로부터 왔다. 아담과 하와는 뱀의 모습을 하고 나타났던 마귀에 의해 유혹을 받았다. 뱀을 통하여 마귀는 신약 성경적 표현인,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요일 2:16) 호소하였다. 비록 죄가 외부로 왔다는 사실이 결코 인간의 죄를 면제하거나, 설명할 수는 없을지라도 이 사실이 인간의 죄와 천사들의 죄 사이에 중요한 차이점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5

 

 

 

안토니 A. 후크마의 '개혁주의 인간론'에서 발췌(209-212p)

 

각주 1

27)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 12:9과 20:2을 주목하라.

각주 2

28) 베드로는 범죄한 천사를 지적하고 있다(벧후 2:4).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울은 택함 받은 천사에 관해 이야기한다(딤전 5:21).

각주 3

29)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여러 종류의 천사들에 대한 언급임)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각주 4

30) 천사들의 타락에 관하여는 H. Bavinck, Dogmatiek 3:11, 52-53, 60을 보라. 또한 L. Berkhof의 Systematic Theology, pp. 148-49, 220-21을 보라.

각주 5

31) Bavinck, Dogmatiek 3:52-53. 심지어 어떤 이는 인간의 죄가 외부로부터의 유혹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그들 자체로부터 시작된 죄를 갖고 있는 천사들은 죄로부터 구원받을 수 없는 반면, 타락한 인간은 죄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게 되는 이유를 제공해 준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추론이 어떠한 가치를 갖든지간에, 천사들의 세계에서 죄가 시작..

  1. 27)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 12:9과 20:2을 주목하라. [본문으로]
  2. 28) 베드로는 범죄한 천사를 지적하고 있다(벧후 2:4).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울은 택함 받은 천사에 관해 이야기한다(딤전 5:21). [본문으로]
  3. 29)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여러 종류의 천사들에 대한 언급임)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본문으로]
  4. 30) 천사들의 타락에 관하여는 H. Bavinck, Dogmatiek 3:11, 52-53, 60을 보라. 또한 L. Berkhof의 Systematic Theology, pp. 148-49, 220-21을 보라. [본문으로]
  5. 31) Bavinck, Dogmatiek 3:52-53. 심지어 어떤 이는 인간의 죄가 외부로부터의 유혹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그들 자체로부터 시작된 죄를 갖고 있는 천사들은 죄로부터 구원받을 수 없는 반면, 타락한 인간은 죄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게 되는 이유를 제공해 준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추론이 어떠한 가치를 갖든지간에, 천사들의 세계에서 죄가 시작되었다는 것과 인류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것 사이에 차이점을 두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 지적이며, 이러한 지적은 무시되거나 잊혀져서는 안될 것이다. [본문으로]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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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천사는 무엇인가?  (0) 2014.07.16

십자가 그 사랑


사람들은 모두
사랑하기를 원한대요
사람들은 모두
사랑을 찾아다니고 있어요.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간혹 어그러진 사랑도 있지만
모두가 사랑을 찾아 헤매고 있어요.

태초에 잃어버린 사랑을 찾기 위해
어떤 사람은 부귀를 사랑하고
어떤 사람은 권력을 사랑하고
어떤 사람은 지식을 사랑하고
모두가 다 자기 사랑을 찾아다니고 있네요.

세상 사람 모두는 사랑을 받기 원해요.
부모의 따뜻한 보살핌 있는 사랑
친구와의 끈끈한 우정어린 사랑
연인간의 달콤하고 황홀한 사랑
아프고 외로운 영혼들도
위로 가득한 사랑을 받기 원하네요.

세상 사람들 이 사랑 받지 못해
참 평안 얻지 못하고
저마다 사랑을 찾고 받기 원하나,
오호라!
그 사랑을 어디 가서 찾을 수 있을까요.
사랑을 떠난 무지한 사람들
참 사랑 알지 못해
참 사랑을 주고받지 못하고 있어요.

십자가 그 사랑
갈보리 언덕위 피흘린 그 사랑
아무 댓가없이
대신 죽어진 그 사랑
그 사랑이 사랑 중의 사랑일진대
이 사랑 알지 못해
헛된 사랑속에 빠져 살고 있네요.

영원하지 않은 것은
모두가 다 진리가 아니랍니다.
영원한 사랑이 아니라면,
환경따라 변하는 사랑이라면
그 사랑이 최고라고 말하지 마세요.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동일한 것
시대를 초월하고
인종을 넘어서고
종교를 넘어서야 한답니다.
십자가 그 사랑은
그렇게 그 모든 것을,
삼라만상 우주를 품은 것이랍니다.

우리도 그 사랑 따라 살아봐요
위로는 하나님
아래로는 이웃
이 두 사랑이 최고의 계명
새 계명일진대
가서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살아 보자구요.

나는 그 사랑 짊어줄 수 없으나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하네요
그 사랑이 나를 붙들어 주네요
One Way!
일방적인 사랑!

오늘 나에게 노래가 있음도
나에게 내일이 있음도
십자가 그 사랑 때문이랍니다.

십자가 그 사랑이
참 사랑이랍니다.


-해처럼달처럼






서울 하늘에 나타난 예수의 형상, 예수의 사진, 예수의 기적



하늘에 갑자기 예수의 형상이나 모습이 나타난다면 과연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그리고 과연 기독교에서 말하는 그리스도 예수는 실제 존재하는 신일까요?

정말 예민한 주제가 아닐 수 없지요.

오늘 게시글의 주제를 예수의 형상(사진)으로 정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지요.

중세부터 지금까지 예수에 대한 존재 여부가 오랫동안 논쟁거리가 되어 왔지요. 기독교인들은 당연히 예수는 실존했던 신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예수의 실존에 대한 논쟁은 그 결론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이죠.





1951년 우리나라에서 6.25전쟁으로 인해서 한창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에 하늘에서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1951년 3월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유엔군의 참전으로 북쪽으로 밀려갔던 북한군이 다시 중공군의 지원을 받아 남쪽으로 공격해 내려오고 있었지요.

북한군에게 다시 서울을 빼앗기고 남쪽으로 후퇴하던 상황에서 미군은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한국전쟁에서 북한군이 서울을 다시 점령하던 상황에서 미군은 서울에 주둔해 있는 북한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지요.

결국 미군은 북한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기 위해서 대규모 비행단을 수도서울의 상공에 진입시켜서 폭격 작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합니다.



북한군에게 돌아간 승기를 다시 잡기 위해서 미군이 세운 골육지책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미군의 폭격 작전은 영국군과 유엔군의 거센 반대에 부딪히고 맙니다.

그 이유는 미군폭격기들이 수도 상공에서 융단폭격을 가하면 미처 피난가지 못한 수많은 한국사람들이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미군은 영국군과 유엔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B-29기 비행단을 출격시킵니다.


그런데 서울쪽으로 날아갔던 비행단 전투기들 사이에서 이상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미군 전투기들이 경기도에서 서울쪽으로 막 넘어가려고 할 때에 하늘에 이상한 물체가 떠 있는 것을 비행기 조종사들이 목격하게 됩니다.



전투기를 몰던 한 조종사가 하늘에서 예수형상을 목격했던 것이지요.

그 조종사는 이 사실을 본부에 보고하게 됩니다. ‘하늘에 커다랗고 하야한 옷을 입은 예수의 모습이 눈앞에 보인다’고 보고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 조종사에 이어서 다른 조종사들도 이구동성으로 하늘에서 예수의 형상을 목격했다는 보고들이 계속해서 본부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수도 서울 상공에서 융단 폭격을 하기 위해 출격했던 B-29기 전투기조종사들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지금말로 하면 맨붕에 빠지게 된 것이죠.

결국 미군본부에선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퇴각명령을 내리게 되었고 출격했던 B-29기 전투기들은 모두 부대로 복귀하는 상황이 벌어졌지요.

그 시기가 1951년 3월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51년 3월 미군 B-29기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목격되었던 하늘에 떠있는 예수형상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요? 조종사 한명도 아니고 수많은 조종사들이 목격했던 예수의 형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 당시 출격했던 미 B-29기 전투기 안에는 종군기자 로버트 게리슨이 함께 탑승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B-29기 전투기 안에서 종군기자 로버트 게리슨이 하늘에 떠있는 예수의 형상을 사진기로 찍었으며 그 사진이 지금까지도 남아있다고 하는데요.

아래 사진이 바로 그 당시 종군기자 로버트 게리슨이 찍은 실제 예수형상의 사진입니다.


이 이야기는 실화이며 이 예수형상의 사진도 종군기자 로버트 게리슨이 찍은 실제 예수의 사진입니다.



바로 이 예수의 형상이 갑자기 서울 상공에 나타남으로 인해서 출격했던 미군폭격기들은 폭격을 포기하고 다시 부대로 복귀했던 것이고 이로 인해서 아직 서울에서 피난가지 못했던 수많은 한국사람들의 목숨을 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즉, 하늘에 갑자기 출현한 예수의 형상이 수많은 한국사람들의 생명을 구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드라마 같은 이야기이고 신화 같은 이야기이지요.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1951년 3월 한국 서울의 상공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입니다.

즉, 수도 서울의 상공에 예수가 나타난 것이지요. 진짜 예수인지는 모르겠지만 수많은 조종사들이 목격했으며 종군기자 로버트 게리슨도 목격했으며 그가 그 당시에 찍은 예수의 사진은 현재까지도 남아있어 그 증거가 되고 있지요.



과연 1951년 3월 서울의 상공에 출현했던 예수의 형상은 진짜 예수였을까요?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외계의 존재일까요?

미국 OSS(전략사무국)에서는 이 불가사한 현상을 밝히기 위해 오랫동안 조사활동을 벌였지만 지금까지도 그 이유를 밝혀내지 못하고 영원히 미스테리를 남게 되었다고 하네요.


1967년 월맹군과 미군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여졌던 베트남전을 돌아가 볼까요?

67년 베트남전에서 미군은 월맹군을 공격하기 위해 팬텀기편대를 월맹군의 본거지인 호치민시에 출격시켰죠.

그러자 월맹군은 전투기 요격용 무기인 고사포를 발사하여 미군 팬텀기들을 공격했다고 합니다.

호치민시를 방어하기 위해서 월맹군들이 맹렬하게 고사포를 쏘아올렸지만 미국 팬텀기들은 단 한 대도 격추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월맹군들은 팬텀기를 한 대도 격추시키지 못한 채 자신들의 고사포 포탄을 모두 소진하게 되었고 월맹군의 고사포 공격에도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던 미국 팬텀기들을 월맹군들은 ‘도깨비’라고 부르며 두려움에 떨었다고 하네요.


이 전투에서 미군은 월맹군을 대파하였는데 이렇게 미군 팬텀기가 한 대도 적의 포탄에 맞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그 당시 출격시켰던 미군의 팬텀기들은 진짜 팬텀기들이 아니라 홀로그램을 사용해서 만든 가짜 팬텀기들이었다고 합니다.

즉, 미군은 진짜 팬텀기들을 출격시킨 것이 아니라 팬텀기 이미지를 호치민시 상공에 홀로그램을 이용해서 만들어 놓고 월맹군의 고사포공격을 유도하여 고사포폭탄을 모두 소진시키게 하는 전략이었지요.

월맹군은 하늘에 이미지만 만들어놓은 허공에다 대고 아까운 고사포 포탄만 낭비하였던 것이지요.



1991년 1월에 발생한 걸프전에서도 똑같은 일들이 벌어지지요.

후세인의 이라크군과 미국이 주축이 된 다국적군 전투에서도 미군은 홀로그램을 이용한 가짜 전투기들을 출격시켜서 이라크군의 대공포 공격을 유도하였고 홀로그램으로 만든 가짜인줄 모르는 이라크군들은 엄청난 양의 대공포를 발사함으로서 자신들의 대공포 포탄을 모두 소진시켜 버렸지요.



이렇게 미군과 다국적군은 이라크 방공망을 무력화시키고 난 후 자신들의 진짜 전투기와 폭격기들을 출격시켰고 이라크 대공포의 공격을 받지 않고 바그다드로 출격했던 다국적군의 전투기와 폭격기들을 엄청난 화력으로 바드다드 요새들을 무차별적으로 폭격을 가해서 바그다드를 초토화시킴으로써 이라크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이죠.


미국은 홀로그램 기술을 이용해서 무기를 만들었는데 이것을 불루빔 프로젝트라고 하지요. 이 불루빔 프로젝트를 활용해서 미국은 베트남전과 이라크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그런데 2007년 8월 러시아의 리페츠크 옐레츠 상공에서도 십자가를 지고 있는 예수의 형상이 출현했다고 하네요




또한 2008년 4월 미국 레이크랜드 하늘에서도 십자가 형상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날 레이크랜드에서는 토드 벤틀리목사가 집회를 하는 도중에 하늘에서 십자가형상이 나타났고 그 집회에 참석했던 수많은 신도들이 십자가 형상을 목격하였고 기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는데요.

이렇게 상공에 십자가 형상이 나타나는 미스테리한 현상이 계속되자 많은 사람들이 경악하는 일들이 벌어졌는데요.


신도들은 이러한 십자가 형상의 출현을 두고 성령의 계시라고 받아들이기까지 했답니다.

그런데 미국 레이크랜드에 나타난 십자가형상은 성령의 모습이 아니라 홀로그램으로 만든 가짜 형상이라는 사실을 미국 미리암 프랭클린이라는 과학자가 밝혀내었다고 합니다.

즉, 금세기에 자주 출몰하고 있는 십자가 형상 등은 많은 신도들을 세뇌시키고 자신들의 종교적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종교적 지도자들이 계획적으로 만든 홀로그램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이렇게 베트남전과 걸프전에서 미군이 사용해서 효과를 톡톡히 본 홀로그램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미국 레이크랜드에서 십자가형상을 만들었던 홀로그램은 어떤 원리로 작용하는 것일까요?

홀로그램이란 미리 컴퓨터를 이용해서 전투기나 무기의 이미지를 만들어 놓은 후 이 이미지들을 인공위성을 이용해서 해당 지역에 레이저를 발사해서 만들어 놓은 가짜 형상의 이미지를 의미하지요.


즉, 레이저를 쏴서 만든 이미지의 형상을 홀로그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홀로그램 무기는 레이저 기술이 있어야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레이저가 발명되었던 1960년도에 비로소 홀로그램 기술이 발견되었지요.



여기서 의문점이 생기네요. 67년 베트남전과 91년 걸프전 때에 전투기 형상을 만들어냈던 것은 홀로그램으로 밝혀졌지요.

그리고 2008년 미국 레이크랜드 상공에 십자가 형상을 만들었던 것도 홀로그램 기술이었구요.

이렇게 홀로그램 기술로 만들었던 형상들은 모두 다 60년대 이후에 발생했던 일들이었지요.

즉, 홀로그램 기술은 1960년에 발견되었으며 홀로그램을 이용한 형상 재현도 1960년 이후에나 비로소 가능해졌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한국전쟁 때 서울상공에 나타났던 예수의 형상은 그 시기가 1951년이었는데 이 당시에는 홀로그램 기술이 발견되기 훨씬 전의 일이었지요.

홀로그램 기술이 최초로 사용된 1967년보다 16년이나 앞선 1951년에 서울 하늘에 나타난 예수의 형상과 사진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1951년 서울 하늘에 나타난 예수의 형상은 홀로그램으로 만든 형상이 아니라는 사실이지요.

그럼 지금도 사진으로 남아있는 서울 상공의 예수의 형상과 모습은 서울의 수많은 시민들을 구하기 위해서 진짜 예수가 나타난 것이 아닐까요?

아무도 알 수 없는 정말 미스테리하고 신비한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나타났던 예수의 형상들은 대부분 홀로그램으로 만든 영상들이었지만 유독 51년 한국 서울에 나타난 예수의 형상은 홀로그램이 아니라는 사실이 무척 신기하기 그지 없군요.

물론 홀로그램 기술로 만든 형상이 아니라고 해서 무조건 진짜 예수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서울 상공에 나타난 예수의 모습은 수많은 조종사들이 목격했었고 종군기자가 찍은 사진까지 있다는 사실이지요.



그렇다면 1951년 수도 서울의 상공에 나타났던 예수의 형상은

첫째 진짜 예수이던가 또는

둘째 외계에서 온 외계인들의 기술로 만들어진 형상 재현


이렇게 둘 중 하나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 당시는 우리 인류는 홀로그램 기술이 발견되기 전의 일이었으니까요. 그 가능성은 위의 둘 중 하나라고 봅니다.

1951년에 벌어진 한국전쟁 당시 서울을 다시 점령한 북한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기 위해서 계획한 미군의 전투기편대 출격으로 그 당시 서울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수많은 한국사람들의 생명을 지켜주기 위해서 하늘에서 온 구세주 예수가 나타나서 미 전투기들의 공습을 막아준 것이 아니었을까요?


아니면 우리 지구를 탐사하기 위해 지구를 순회하던 외계인들이 한국 서울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위기에 처하자 그들을 구해주기 위해서 외계인들의 선진 첨단기술을 이용해서 홀로그램에 의한 예수 형상을 만들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 당시 인류가 홀로그램으로 예수의 형상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없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위에 열거한 두가지 중 하나가 정답이라고 할 수 있지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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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통령의 Freedom Rally 연설!

(꼭 다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7월 1일,

독립기념일(7월 4일)을 맞이하여서 워싱턴디시에서 연설을 하였습니다.


제가 들은 어느 연설보다도 훌륭한 연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연설에서 세가지 면을 볼 수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모습니다.


둘째는, 가짜 미디어와 언론을 향해서

“내가 대통령이지 너희들이 대통령이 아니다.” 라고 일침을 가했습니다.


셋째는,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군인들에 대한 존경심을 보여주었습니다.

요약은:
1)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한다.
2) 이제 미국에서 우리는 마음대로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부를수 있게 될 것이다.
3) 미국에서 우리는 정부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긴다.
4) 우리는 미국의 공공기관이나 공립학교에서 하나님이 제외되는 것을 원치않으며,

    축구경기와 같은 공공모임의 전에 기도하는 것을 보기를 원한다.
5) 나는 우리의 아이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알기를 원하고,

    존경하는 목사들의 설교를 정부가 통제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6) 나는 종교 자유의 법안을 담은 행정 명령을 내려서,

    교회들의 정치적인 지지와 반대를 못하게 제약하는

    “존슨수정안 (Johnson Amendment)” 을 중지시켰다.
7) 내가 대통령으로 있는한, 어느 누구도 당신의 신앙생활을

    방해하거나 복음전파를 방해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8) 우리는 모두 같은 미국의 성조기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
9) 우리는 모두 같은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피조물들이다.


역사상 어느 미국의 대통령도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연설을 한적이 없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의 요시야 왕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며,

우리 모두가 트럼프 대통령의 안전과 리더십을 위해서

기도해야겠습니다.


<영상으로 확인>

[선감도의 비극 ⑦-1] 양어머니의 학대, 도망치던 순간이 악몽이 되어

[오마이뉴스 글:이민선, 편집:성낙선]

선감학원은 소년 감화원이란 이름의 강제 수용소였다. 이 수용소는 일제가 '소년 감화'를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수용소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 운영 됐다. 수용소 안에서는 문을 닫던 해인 82년도까지 강제노동과 폭력 등 온갖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그 사이 수많은 수용자들이 고통 속에 죽어갔다. 살아남은 일부 수용자들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경기도의회가 진상조사에 나서면서, 과거 이 수용소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오마이뉴스>가 선감학원이라는 이름의 강제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 비극을 낱낱이 밝힌다. <편집자말>

 경기 창작센터에 전시된 선감학원 막사,
ⓒ 이민선
"제 말 안 믿어지죠?"

이 말에 무심코 "네!"라고 대답했다가 대화가 끊길 뻔했다. 그는 "그럼 그만합시다. 믿지 못하는 사람한테 말해서 뭐해!"라며 실망스러운 듯 입 언저리를 씰룩거렸다. 다행히 잠시 뒤 감정을 추스른 듯 다시 말을 이었다.

"혹시, 증거가 될 만한 서류 같은 거 없나요? 저는 사실만을 써야 하니까요!"

이렇게 말했다가 또 대화가 끊길 뻔했다. 그는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요? 실수하셨네!"라며 다시 입을 닫았다. 급히 '그런 뜻이 아니고, 증거가 있으면 더 신뢰할 수 있으니까요. 어쨌든 불쾌했다면 사과합니다'라고 수습 멘트를 날렸다. 그는 "뭐 그렇다고 사과할 일은 아니고"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바쁘시겠지만, 내 평생 한이니까. 내 얘기 좀 들어줘요. 죽음으로 증명하라고 하면 나 죽어 드릴게."

내 얼굴에 '불신의 빛'이 어렸던 것일까! 아니면 조급함이 서렸던 것일까. 그가 소리치듯 한 느닷없는 말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잘 듣고 있어요'라고 해야 하는데,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인터뷰가 5시간 넘게 이어지면서 나 또한 지쳐가고 있었던 탓이다. 소리를 한 번 치고 난 뒤에 속이 후련해졌는지, 그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처절한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다시 이어 나갔다.

지옥의 소년 수용소 안산 '선감학원'과 한국의 홀로코스트로 알려진 부산 '형제복지원'을 모두 거친 태장희(52세)씨와의 대화는 이렇게 '이어질 듯 끊어질 듯' 아슬아슬하기만 했다. 그래도 끊어지지 않고 7시간 넘게 이어졌다.

인터뷰를 정말 힘들게 한 것은, 이러다가 숨이 멎는 게 아닐까 할 정도로 걱정스러운 그의 열악한 건강 상태였다. 갑자기 힘이 몽땅 빠져 나가 버린 듯 목소리가 잠겨 들기도 했고 폐가 찢겨 나가는 듯한 지독한 기침을 해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공연한 일을 벌여, 너무 고통스럽게 하는 게 아닐까!' 하는 미안함이 밀려왔다.

육신은 죽어 가는데 정신은 놀라울 만큼 명료

 태장희씨 다리, 지금은 훨씬 더 상태가 안좋다.
ⓒ 태장희
그를 지난 6월 28일 대전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만났다. 만나자마자 '인터뷰가 정말 가능할까!'라는 걱정이 앞섰다. 병색이 깊어 보여서다. 오른쪽 눈은 거의 감겨 있고 다리는 '코끼리 다리'처럼 부풀어 있었다. 스타킹 사이로 보이는 다리 빛깔도 거무죽죽했다.

그를 괴롭히는 병마는 뇌종양, 심부전 등 듣기만 해도 혀를 차게 되는 무시무시한 것들이다. 그가 내민 진단서(2013년 발급)에는 '고혈압, 당뇨, 통풍, 심부전, 진폐증, 뇌종양'이라는 병명이 적혀 있었다. '호흡곤란 등의 증상으로 인하여 일상생활의 어려움이 있을 수 있으며, 급사의 위험이 있다'라는 의사의 소견도 있었다.

이 병마와 그는 수년째 함께 살고 있다. 의사는 이미 진단서를 발급한 지난 2013년에 길어야 3~6개월 정도 살 수 있으니 (삶을) 정리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살아 있다. 더군다나 그의 정신은 놀라울 정도로 또렷했다.

"내 몸은 이미 죽어 있어요. 그때(2013년)는 그래도 시력은 있었는데, 지금은 시력도 거의 없어요. 누우면 숨을 쉴 수가 없어 눕지도 못해요. 이 상태로 수년을 버티고 있는 겁니다. 저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의) 한계치를 이미 넘어 섰어요. 어째서 저에게 24시간 고통 받으면서, 잠 한 번 편히 잘 수 없는데, 이토록 명료한 의식을 지금까지 주시는지! 이 몸을 가지고 버티며 혼신의 힘을 다해 이야기한다는 것만 알면 좋겠어요."

이 말과 함께 그의 처절한 인생 이야기가 시작됐다. 그가 태어난 곳은 서울 돈암동이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낳다가 돌아가셨다. 네 살 터울 그의 형과 그를 잠시 이모가 맡아 길렀지만, 생활이 어려웠던지 어느 날 그를 홍씨 성을 가진 아들 없는 종갓집 '업둥이'로 보내 버렸다. 포대기에 싸서 홍씨 대문간에 버린 것이다.

이것도 장성한 그가 일본에서 사업에 성공해 한때 잘 나갈 때 사설탐정을 고용해 알아낸 사실이다. 그 전에는 이마저도 알지 못했다.

치매 걸린 할머니 송곳으로 찌르라 강요, 갈가리 찢긴 동심

 태장희 씨 어릴적 사진.
ⓒ 태장희
그의 양부모는 그에게 홍장희라는 이름을 지어 주기는 했지만, 그를 홍씨 집안 자식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업둥이를 내몰면 재수가 없다는 속설이 두려워 마지못해 받아들이긴 했지만, 사실상 노예와 다름없는 취급을 했다.

"누군가 저를 안아준 기억이 없어요. 늘 맞을까 봐 두려웠고요. 그곳에서 10살, 광명 초등학교 3학년까지 다니다 도망쳤는데, 지금도 도망치던 날 기억이 생생해요. 어렸을 때는 그 날 일이 악몽이 되어 자주 나타나기도 했고요."

그를 심하게 학대한 것은 양어머니였다. 학대는, 그의 양할머니가 치매에 걸리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완전히 역전이 된 거죠. 논 두 마지기에 팔리듯 시집와서는 아들 못 낳는다고 시어머니한테 엄청난 학대를 받다가, 치매에 걸리자마자 복수를 시작한 거예요. 툭하면 아무 이유 없이 할머니를 꼬집고 깨물고. 전 무서워서 말릴 수도 없었어요. 나중엔 송곳으로 찌르기까지 했는데, 언제부턴가 저한테 찌르라고 강요하는 거예요. 하지 않으면 그 송곳으로 저를 찔렀고요. 무서움에 덜덜 떨며 할머니를 찌르면서 제 동심은 갈가리 찢어졌고요."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양어머니의 학대는 극단으로 치달았다.

"남편이 툭하면 새벽에 들어왔는데, 그때까지 저를 무릎 꿇려 놓는 거예요. 밥도 못 먹게 하고요. 힘들어서 다리를 풀면 그 두꺼비 같은 손으로 '빡' 그러면 저는 그냥 날아가요. 정말 두려운 것은 그 여자 슬리퍼 끄는 소리였어요. 그 소리만 나면 저는 숨이 막혔어요. 넥타이를 제 목에 감고 발로 제 어깨를 누른 뒤 당겼는데, 혀가 다 빠져 거품 물고 죽게 될 정도가 되면 놓아주기를 반복하는 거예요. 이거 한참 하다 지치면 돌아가요. 그러니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지요. 너무 어리니 대항할 수도 없고 분노할 줄도 모르고. 그저 두렵기만 한 거죠. 도망칠 때까지 제 일상이 이랬어요."

어느 날, 어린 홍장희가 '(학교에서) 엄마 모시고 오라고 했어요!'라고 말하자, 양어머니의 얼굴이 무섭게 변했다. 양어머니의 손에는 불에 벌겋게 달궈진 연탄집게가 들려 있었다. 그의 몸을 숱하게 아프게 했던 무서운 연탄집게였다. 그가 10살 된 겨울에 벌어진 일이다.

"5원짜리 동전을 꺼내려고 학교 스케이트장 얼음을 깬 적이 있는데, 그 일로 학교에서 흠씬 두들겨 맞았고, 엄마 모시고 오라는 말도 들었어요. 그 말을 전하자 그 시뻘건 연탄집게로 제 배를 인정사정없이 찔러 버렸어요. 갈 데까지 간 거죠. 가학증은 갈수록 심해지잖아요."

개밥 뺏어 먹으며 서울역까지

 가혹한 폭력에 시달렸던 형제복지원 원생들은 극한의 강제 노력 또한 수행해야 했다.
ⓒ 형제복지원진상규명을위한대책위원회
그때 "도망쳐"라는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세 들어 살던 새댁이었다. 소년의 머리에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새댁은 "애한테 도대체 왜 그러느냐"고 악을 썼다. 그리고는 "너 여기 있으면 죽는다"라고 소리치며 소년의 등을 떠밀었다. 소년은 죽을 힘을 다해 대문으로 내달렸다. 양어머니가 무어라 소리치며 그의 뒤를 쫓았다. 그러는 사이 신발 한 쪽이 벗겨졌다.

소년은 그 길로 버스를 얻어 타고 서울 관악구 신림동까지 도망쳤다. 시장통에 떨어져 있는 배추 잎사귀를 주워 먹으며 허기를 달랬고 그 잎사귀에서 나온 즙으로 살에 눌어붙은 옷을 떼어냈다. 그러나 세상은 10살 어린아이를 자유롭게 놓아두지 않았다. 그는 시장 경비원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 붙잡혀 신림동 파출소를 거쳐 봉천동에 있는 한 아동 보호소에 가게 된다.

그곳은 천국이었다. 다정하게 손을 잡아주는 여자 선생님이 있었고 먼저 말을 걸어준 예쁜 여자아이도 있었다. 그러나 오래 있을 곳은 아니었다. 친절한 여자 선생님은 집 전화번호를 대라고 끈질기게 설득했고, 그는 결국 집 전화번호를 말해 버렸다. 다음 날 그의 양부모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숨이 막혔다. 끌려가면 죽는다는 두려움이 목을 죄었다.

그는 죽을 힘을 다해 뒷산으로 뛰었다. 밤낮없이 뛰다 보니 서울 동작구 흑석동이 나왔고 한강 다리를 넘자 서울역이라는 곳이 나타났다. 서울역까지 가는 동안의 배고픔은 견공들이 해결해 줬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안해, 미안해' 하자 인심 좋게도 견공들은 자기의 밥을 뺏어 먹는 소년을 물지 않았다.

이것으로 그와 양부모와의 인연은 끝이 났다. 먼 훗날 마흔 줄이 넘은 홍장희가 병으로 갑자기 쓰러져 생사의 갈림길에 있을 때, 딱 한 번 홍씨 일가와 연락이 닿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독한 악연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일이었을 뿐이다. 양부모인 홍씨 집안에 연락을 한 것은 병원이었다. 호적상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홍씨 측에서는 매정하게도 병마에 휩싸인 홍장희에게 '그런 아들 없다'며 '유산 상속 문제도 있으니 호적을 파가라'고 요구했다. 이것이 그의 이름이 홍장희에서 태장희로 바뀐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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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마이 뉴스

동성애 반대는 차별이 아니다

ae7003e241cb7d48a540f6fc61c153ab_1496834020_16.jpg매년 이맘때쯤이면 소위 퀴어문화축제가 열린다. 퀴어(queer)란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을 드러낼 때 지칭하는 표현으로, 퀴어문화축제는 동성애를 옹호하고 동성애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금지하자는 캠페인이다. 지난 17년간 계속되어온 이 행사는 올해 7월에도 ‘나중은 없다, 지금 우리가 바꾼다!’라는 슬로건 아래 진행될 예정이다. 

 

불과 10여 년 전만해도 우리 사회에서 터부시 되던 동성애가 각종 미디어와 SNS 등의 영향으로 대중에 널리 알려졌고, 현 시대에는 ‘차별금지법’이라는 이름으로 동성애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하물며 교회 안에서조차 동성애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러한 시대 흐름 속에서 한국교회는 왜 동성애를 적극 반대해야 하는지, 동성애의 폐단에 대해 논의해보고자 한다.

 

첫째, 동성애는 기독교 진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반(反)성경적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고, 이 둘이 하나가 되어 가정을 이루도록 명하셨다. 그리고 이들로 하여금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명하셨다(창 2:24). 하지만 동성애자들은 자신의 의지와 감정에 따라 동성 간에도 성관계를 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동성 간의 결혼도 합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이며, 분명한 죄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소돔과 고모라는 이러한 죄의 결과를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들이 롯에 집에 방문한 두 천사와 성적인 관계를 맺으려 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함을 보시고 그 땅에 심판을 내리셨다(창 19장).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깨뜨리는 동성애에 대해 경계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서도 동성애와 타협해서는 안 된다.

 

둘째, 동성애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사회 질서를 깨뜨리는 일이다. 성관계는 결혼한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표현 방식이며, 인간이 자신의 공동체를 보존하기 위한 성스러운 행위이다. 그러나 동성애자들은 이것을 하나의 즐길 거리로 전락시키고 있으며, 동성 간에도 성관계를 통해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한국의 퀴어문화축제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것이 동성 간의 성관계이다. 이 행사에서 동성애자들은 반라의 모습으로 거리를 돌아다니며, 성행위를 묘사하는듯한 퍼포먼스를 시행하기도 했다. 성관계를 하나의 즐길 거리로 전락시키는 문화는 결코 옳지 않다. 이는 정상적인 가정을 깨뜨리는 주범이기도 하며, 특히 동성 간의 성관계는 인간의 출산을 가로막는 행위이기 때문에 우리 사회의 보존을 위해서 반드시 막아야 하는 일이다.

 

셋째, 동성 간의 성관계는 인간의 건강 및 보건에 치명적인 일이다. 질병관리본부에 의하면 우리나라 전체 HIV(AIDS의 원인이 되는 균) 감염인의 98%가 성관계를 통해 감염이 되었으며, 또한 2015년 기준으로 전체 감염인 중 약 92.7%가 남성이라고 한다. 유럽과 미국 등전 세계적으로 동성애가 HIV 감염의 주된 원인임을 밝혔는데, 우리나라 역시 동성애가 주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까지 HIV 감염을 완전히 고칠 수 있는 백신이 개발되지 않았다. 2015년 한 해 동안 신규 HIV 감염 환자가 1,152명이 늘었다고 하는데, 우리 사회의 건강과 보건을 위해서라도 동성 간의 성관계와 동성 간의 결혼을 합법화해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다.

 

여러 기독교 단체와 시민 단체들의 반대로 인해 아직까지 퀴어문화축제의 장소 사용이 승인되지 않고 있다. 해마다 더욱 커져가는 동성애 합법화 요구에 있어서 한국교회 역시 물러서지 말아야 할 것이다. 동성애 반대는 차별이 아니며, 기독교 진리와 우리 사회의 전통적인 가치를 지키기 위한 필수적인 행동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 건전하고 올바른 성 정체성 및 성 의식이 자리 잡을 때까지 동성애 반대 운동을 펼쳐나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동성애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단순히 정죄의 대상으로 여겨서는 안 되며, 긍휼과 관용의 마음으로 품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성경적이며 정상적인 관계 회복이 일어나며, 그들이 우리 사회 안에서 상식적이고 용인될 수 있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이영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 데일리굿뉴스.

가져온 곳: USA 아멘넷

남조선도 전쟁 터지면 무사할 수 없다"

(서울=연합뉴스) 북한은 지난 4일 실시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4' 발사를 통해 미사일 탄두부의 대기권 재진입 및 단 분리 기술을 시험했다고 노동신문이 지난 5일 보도했다. [국내에서만 사용가능. 재배포 금지. For Use Only in the Republic of Korea. No Redistribution] nkphoto@yna.co.kr

(서울=연합뉴스) 홍국기 기자 = 북한이 최근 대북 군사옵션을 시사한 미국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며 강력히 반발하며 이에 대응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밝혔다.

북한 노동당 외곽기구인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는 7일 대변인 담화에서 "미국은 군사적 공격 방안이 우리가 전략적 조치를 취하면 곧바로 대통령에게 제출될 것이라고 떠들고 있다"며 "트럼프 역시 '북한에 대한 매우 강하고 확고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느니 뭐니 하며 우리에 대한 군사적 공격기도를 숨기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이날 담화는 미국 CNN방송이 지난달 29일(현지시간) 국방부 관계자들을 인용해 북한이 지하에서 핵이나 탄도미사일 시험을 감행하면 군사적 대응을 포함한 옵션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제출될 것이라고 전한 것에 대한 반발이다.

또 니키 헤일리 유엔주재 미국대사가 지난 5일(현지시간)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4형' 시험발사 도발로 긴급 소집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에서 대북 군사옵션을 시사한 사실도 이번 담화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유엔본부<뉴욕> AFP=연합뉴스)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4형' 발사 대응 방안 등을 논의하는 5일(현지시간) 뉴욕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전체회의에서 니키 헤일리 유엔주재 미국대사가 말하고 있다. 헤일리 대사는 "우리가 가진 여러 능력 가운데 하나가 막강한 군사력(considerable military forces)"이라며 "미국은 스스로와 우방을 방어하기 위해 우리 능력들을 최대한도 사용할 준비가 돼 있다"고 경고했다. bulls@yna.co.kr

담화는 '화성-14형' 시험발사에 대응한 한미연합 탄도미사일 사격훈련 등을 언급하며 "미국의 단말마적 발악으로서 트럼프 행정부의 대조선(대북) 적대시 책동이 극히 무모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어 "우리 군대와 인민은 트럼프의 미치광이 같은 군사적 선택에 기꺼이 대응할 만단의 준비가 이미 되어있다"며 "앞으로 심심치 않게 크고 작은 선물 보따리들을 자주 보내주어 미국을 더욱 불쾌하게 해줄 것"이라고 밝혔다.

또 담화는 "미국의 음흉한 선제공격 기도를 대화니, 주도적 역할이니 하며 가리워(가려)보려는 남조선 당국도 일단 전쟁이 터지면 무사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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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론 19: 제15장 예정론은 숙명론인가?

 

  기독교의 예정론과 이교의 숙명론을 혼동하는데서 많은 오해가 생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미래의 사건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는 것을 단정하는 것 외에는 양자 사이에 어떤 공통점도 없습니다. 양자는 운명론이 인격적인 하나님을 용납할 수 없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예정론은 무한히 지혜로우시고 능력이 많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루어지도록 정하셨기 때문에 모든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숙명론은 물리적 필연성과 구별 지을 수 없는 마치 큰 강이 나무 조각을 떠내려 보내듯 어쩔 수 없이 인간을 이끌어가는 하나의 맹목적이며 무지한 그리고 비인격적이며 무도덕한 세력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건들이 생기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예정론은 하나님께서 이 세계 질서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통해 완성되어가고 있는 하나의 통일된 계획 또는 목적을 영원 전부터 가지고 계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의 모든 결정은 충분한 이유를 근거로 한 합리적 결정들이며 그는 “모든 피조물이 지향하는” 하나의 큰 목표를 정해 놓으셨다고 하면서, 그 모든 사건들의 존재 목적은 첫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둘째, 하나님의 백성을 위함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숙명론은 궁극적 원인이라는 관념 자체가 없습니다. 즉 전 우주를 통치하는 것은 무한한 지혜와 사랑을 가진 인격적인 신이 아니라 맹목적인 필연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숙명론은 자연의 운행과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사건들의 원인을, 그것에 대항하여 싸워보았자 헛수고이며 어린애처럼 불평만 하게 될 미지의 부가항력적인 어떤 힘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예정론 안에서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고스란히 보존이 됩니다. 그러나 숙명론은 의지의 자유 선택 및 결정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므로 인간의 행동 역시 자연 법칙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필연에 속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숙명론의 주장처럼 불가항력적, 비인격적, 추상적 능력이 모든 행동의 원인이라면 자유의지를 조건으로 하는 도덕적 책임은 세상에서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예정론에서는 인간이 보기에 비인격적, 맹목적인 것 같은 모든 세력들도 결국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방편일 뿐, 이 세력들이 인간의 의지까지 장악한다고는 보지 않기 때문에 자유의지를 조건으로 하는 도덕적 책임은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봅니다. 또 숙명론이 진리라면 인간에게는 종교, 사랑, 자비, 성결, 공의, 지혜 등을 추구할 동기가 없어질 테지만 예정론은 오히려 인간에게 이런 덕행들을 사모하도록 동기를 부여해줍니다. 결국 숙명론은 인간의 회의와 절망으로 인도하는 반면 예정론은 하나님의 영광과 찬란한 하늘나라의 영광을 나타내주며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해 줍니다.

 

  따라서 인간의 행동이 기계의 작동과 다른 것만큼, 또는 하나님 아버지의 다함없는 사랑이 인력의 힘과 다른 것만큼이나 예정론과 숙명론은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스미스(Smith)는 “예정론은 우리의 생명과 마음이 하나의 수레바퀴와 같은 인정 없는 운명이나 회오리바람 같은 광무하는 우연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무한히 선하시고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전능하신 장중에 달려 있다는 영광스런 진리를 우리에게 계시해 준다.”고 말합니다.

  칼빈도 예정론을 숙명론이라고 말하는 비난에 대해 극구 부인했습니다. 그는 “운명이란 스토아주의 철학자들이 만들어 낸 필연이라는 말의 또 다른 명칭으로, 하나님 자신까지도 전혀 자유가 없고 필연이란 것의 노예가 되어버린 분으로 여기는 교훈이다. 그러나 성경으로 정의해 볼 때 예정이란 어떤 속박도 받지 않는 자유자재하신 하나님의 모략이나, 그것으로 모든 인간과 사물들을 제정, 통치하시되 우주 안에 있는 모든 부분, 심지어 지극히 적은 티끌에 이르기까지 무한히 지혜롭고 공평하게 제정, 통치하시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만일 독자들이 나의 저서들을 주의 깊게 읽어보기만 한다면 사실 운명이란 모욕적인 용어는 내가 가장 싫어하고 꺼려하는 용어임을 단번에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어거스틴마저도 그 당시 그의 반대자들로부터 이와 똑같은 극단적인 말로 비난받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루터는 이교적 숙명론은 “하나님의 예정과 예지에 관한 지식이 신(神) 자체에 대한 통념만큼이나 이 세상에 방치되어 있다.”는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철학사를 연구해 보면 유물론이 바로 숙명론임을 알 수 있으며 범신론 역시 숙명론과 많이 결부된 사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숙명론자라면 누구나 다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철저한 숙명론자가 된다면 그는 “만일 내가 오늘 죽을 운명이라면 어차피 죽을 테니까 아무 것도 먹을 필요가 없다. 또 만일 내가 앞으로 수년간 생존할 운명이라면 어차피 살 테니까 아무 것도 먹을 필요가 없다. 따라서 나는 아무 것도 먹지 않을 것이다.”라는 식의 추론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정론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인간을 어느 때까지 생존하도록 예정하셨다면 식사를 거절하는 식의 자살적 행위로부터 그를 보호해 주실 것까지도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해밀톤(Hamilton)은 “예정론은 단지 외부적으로만 이교의 숙명론과 비스해 보일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냉혹하고 비인격적인 운명의 수중에 붙잡혀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시어 우리를 위해 갈보리에서 죽게 하신 자비하고 사랑이 많으신 하늘 아버지의 장중에 붙잡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전지하시고, 사랑이 많으시며, 공의롭고, 성결하심을 알기 때문에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아시고 모든 것을 계획하셨기 때문에 설사 어떤 일이 잘못 되어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당황해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예정론을 신중히 검토해 보지 않았거나 이에 대해 악의를 품고 있는 자는 예정론을 숙명론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예정론이 무엇이고 숙명론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가 그런 실수를 범한다면 그것은 전혀 변명할 여지가 없다고 봅니다.

우주는 하나의 조직체이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의 의도와 목적을 없애버리는 숙명론을 택하든 아니면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그것을 섭리적으로 지배하신다는 것, 그리고 그 자신이 자유이신 것처럼 인간도 인간본성의 한계 내에서 자유하게 만드셨다는 것을 주장하는 성경적 교리의 예정론을 택하든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제 우리는 예정론과 이교적 숙명론은 서로 다를 뿐 아니라 완전히 상반되는 것으로서 절대 양립할 수 없는 양자택일적인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제16장 예정론은 인간의 자유행동과 도덕적 책임에 있어서 모순된다?

 

I. 인간의 자유행동 문제

 

  이제 우리가 당면하게 되는 문제는 만일 인간의 모든 행동이 영원부터 예정되어 있다면 인간이 어떻게 자유롭고 책임 있는 행위자가 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자유롭고 책임 있는 행위자란 자신의 이성적 결정으로 행동하는 지성적 인간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모든 인간의 생애와 자연계에서 발생할 모든 사건들의 실제적인 과정을 필연적으로 확정해 놓으셨다는 말입니다. 물론 인간의 행동은 강요가 아닌 자신의 희망과 성향에 따라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전혀 책임질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유행위의 성격이 우연적이며 불확실한 것이라면 예정과 자유행위는 분명 모순될 것입니다.

  만물을 생기게 하고 또 그것을 지배하는 위대한 힘의 존재를 믿는 철학자는 무한한 의지의 지배 아래서 유한한 의지가 어디에 나타날 수 있는지를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에 관한 이 어려운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둘 중 어느 하나를 부인하는 데 있지 않고, 이 둘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무한히 높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을 죄인인 피조자의 자유 위에 두는 조화에 있습니다. 모든 사건을 예정하신 하나님은 그 사건 속에 있는 인간의 자유도 예정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는 다른 모든 사건과 마찬가지로 확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무한히 다양하고 복잡하며, 영원에서 영원까지 이르며, 그 안에는 행동하고 상호작용하며 서로 반응하는 수많은 자유행위자가 포함되어 있으며, 그 계획 속에서 하나님은 그의 주권 하에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가질 수 있도록 예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문제에 대해 우리에게 정식으로 설명을 해 주시지 않았고, 우리 역시 우리의 유한한 지식으로는 이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 기자들은 인간의 생각과 의도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지배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유행위자의 행위를 하나님의 포괄적인 계획 속에 포함시키는데 대해 전혀 곤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작성한 사람들도 인간의 자유를 분명히 인정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장래 일어날 모든 일을 자주적으로 불변하도록 미리 작정하셨다.”고 말한 후에 “비록 하나님이 이 모든 일들을 작정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죄의 근원이 되시거나, 지음 받은 피조물의 자유를 억제하시거나, 제2 원인이 발생할 자유나 가능성을 제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굳게 세우신다.”고 덧붙였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의 행동은 그것이 그 개인의 행동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합법적으로 실현되는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건축을 하는 경우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건축가는 먼저 설계도를 작성한 다음 일꾼들을 고용해서 공사를 진행합니다. 이 일꾼들은 모두 자유로 일합니다. 어떤 종류의 강요도 받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만 노임 또는 노동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스스로 결정하여 그 공사에 종사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건축가가 계획한 것을 자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완성해 놓습니다. 이 때 건축가의 의지는 그 건축 공사의 중요 의지(또는 일차적 원인)가 되고, 고용인들의 의지는 이차적 의지(또는 이차적 원인)가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종종 타인의 자유나 책임을 침해하는 일이 없이 그들의 행동을 지시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러나 이보다 훨씬 더 무한하신 강도(强度)로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을 지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건의 진행과정에서 하나님의 의지는 일차적 원이이요 인간의 의지는 이차적 원인으로 이 양자는 완전한 조화 속에서 일을 합니다.

  좀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는 민주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본질적 원리는 그것이 “피지배자의 동의”에 입각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물론 하나님을 절대적 지배자로 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신자의 동의를 무시하거나 강요하지 않습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감화를 받아 즐거운 마음으로 복음을 받으며 주권자의 뜻을 행하기를 일생일대의 기쁨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II. 이 반론은 하나님의 예지에 대해서도 공격한다.

 

  인간의 자유행위력과 양립될 수 없기 때문이라며 예정을 반대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예지를 반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미래에 생길 어떤 사건을 예지하셨다면 그것은 예정된 것과 마찬가지로 확실히 발생할 것입니다. 따라서 예정이 자유행위력과 모순된다면 예지 역시 자유행위력과 모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의 자유와 모순된다고 하면서 예정교리는 버리고 예지교리는 계속 지지하고 있으니 참 불합리한 일이 아닐까요? 유니테리안파(16세기의 이단 중에 '소시니안파(Socinians)와 유니테리언파(Unitarians)'가 있습니다. 16세기의 소시니안파는 삼위(三位)가 공통된 본체(本體)를 가졌다는 교리는 이성에 모순된다고 보았으며, 심지어는 성자의 선재까지도 부정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비록 특별한 성령을 충만이 받으시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많으며, 승천 후에도 만물의 지배권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는 본질적인 성질로 보아 단순한 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는 비복음적이면서도 이 점에 있어서는 알미니안파보다 훨씬 더 철저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가지(可知: 알 수 있는 것)적인 모든 일을 하신다. 그러나 자유 행위는 불확실한 것이므로 하나님이 그것을 모르신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자유행위자의 행동을 통해 성취되는 크고 작은 많은 사건들에 대한 예언이 담겨있습니다. 이 때 자유행동자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하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유로 행동했으나 실제로는 예언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절한 것, 로마 병사가 예수님의 겉옷을 제비뽑은 것,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것 등은 그 한 예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기자들은 어떠한 자유행위도 하나님이 예지하신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성취될 것이라고 믿었음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예지는 유다나 베드로의 자유를 손상시키지 않았습니다. 아니 적어도 그들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베드로는 닭 우는 소리를 듣자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통곡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건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제자들은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요 12:16)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공평한 재판관이 뇌물을 받지 않으리라는 것과 수전노가 금괴를 단단히 붙잡고 있으리라는 것을 미리 압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행동에 대한 우리의 예지가 아들의 행위상의 자유를 손상시킨 것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유한한 지식의 소유자인 인간도 타인의 행위에 대해 어느 정도 예언적으로 정확히 알 수 있는데 하물며 인간의 마음을 완전히 아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위를 예지하시지 못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행동의 확실성은 그것을 실행하는 행위자의 자유와 모순되지 않습니다. 만일 인간의 자유가 하나님이 예상치도 않았던 방면으로 마구 나아갈 수 있다면 하나님의 예지란 말은 사실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예지란 미래의 행위를 확실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 확실한 것을 추정할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전혀 불확실한 사건을 확정적인 일처럼 예지하신다면 그것은 모순이 아닐까요? 따라서 우리는 미래의 모든 사건은 확정적이며 하나님은 이것을 전혀 예지하지 못한다고 말하든지 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예정교리와 예지교리는 서면 같이 서고 넘어지면 같이 넘어지는 상호수반적인 교리입니다.

 

III. 확실성은 자유행동과 일치한다.

 

  어떤 사람의 행위가 절대적으로 확정적이었다는 말은 그 사람의 행위가 강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가 원했다면 그는 달리 행동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그가 반드시 행해야 할 일은 행하지 않고 그가 행하지 말아야 할 일은 행하는 능력과 기회가 있습니다. 즉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외부적 영향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동은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결정되지만 강요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달리 행동할 수도 있고 종종 달리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될 때도 있습니다. 유다와 그의 공범자들은 그들의 목적을 수행하도록 남겨졌고, 그 사악한 성향이 지시하는 대로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들을 비난했으나 동시에 그들이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행동했다고 선포하였습니다(행 2:23). 그들이 하려고만 했다면 그들은 달리 행동할 수도 있었고 달리 행동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그렇게 행했으며 그것은 또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확실성과 자유행위력은 서로 일치합니다.

  확실성과 자유행위력의 일치를 증명해 주는 또 다른 논거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행동의 자유를 갖고 있지만 종종 어떤 기존 조건 아래서 행동을 확정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자식을 위험으로부터 구출하리라는 것은 확실하며 그 구출 행위는 예언적으로 확정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모가 그 일을 행할 때는 전혀 자유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 자유 행위자이지만 언제나 공의롭게 하십니다. 거룩한 천사들과 구원 얻은 성도들도 자유행위자이지만 결코 범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영원토록 천국에 있으리라는 보증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악마나 타락한 인간은 비록 자유행위자이지만 범죄할 것입니다. 부친은 그의 아들이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행동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상황을 적절히 통제함으로써 아들의 행동을 미리 확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아들은 자유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 부친이 아들을 의사로 만들 계획이라면 그는 아들에게 그 길을 따르도록 격려하고, 그 방면의 책들을 읽게 하며, 그 방면의 학교에 다니게 하는 등 아들의 마음을 그 방면으로 유도함으로써 자기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그러나 훨씬 더 무한한 정도로) 하나님은 우리가 자유로 행하면서도 확정적으로 행할 수 있도록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사건을 발생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사건의 발생을 확정시킬 뿐입니다. 행동의 확실성을 결정하는 하나님의 작정이 동시에 행동자의 자유도 결정하는 것입니다.

 

IV. 인간의 자연적 의지는 악에 예속되어 있다.

 

  엄밀히 말해서 인간은 어떤 외적 강요에 의해 그의 선택의 자유나 책임을 간섭받지 않을 때 비로소 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타락 상태에 있는 인간이 갖는 자유란 ‘노예적 자유’에 불과합니다. 그는 죄의 포로가 되어 자진해서 사탄을 좇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길 능력도 의향도 없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자유’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유 의지’라는 말보다 ‘자기 의지’라는 말이 타락 이후의 인간 상태를 표현하는 데는 더 적절할 것입니다. 인간은 범죄하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과실로 스스로 그런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실수라고 해서 그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의 구속이 완성되는 날 그는 천사와 같이 임의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가 악의 포로가 되었다는 것은 물론 루터가 가르친 교의입니다. “노예적 의지”라는 그의 저서에서 루터는 “인간은 무슨 일을 하든 어떤 강요도 받지 않지만 필연적으로 그 일을 행하는 것이다. 또 하나님이 영원부터 뜻하시고 인간이 꼭 행할 것을 예지하신 것만 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의지는 반드시 성취되고 그의 예지는 확실시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지나 인간의 의지는 무슨 일이든 남에게 강요되어 행하지는 않는다. 선행이든 악행이든 인간이 행하는 모든 일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자기가 좋아서 그렇게 행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의지에 지배되어 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지는 확실불변하기 때문이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는 또 “만일 자유의지가 그 자유를 상실하자 곧 죄악의 포로가 되어 어떤 선도 의지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하면 자유의지란 말은 사실 알맹이 없는 빈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말로서 그것은 이미 자유가 아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자유의지란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 후 “따라서 하나님은 그의 영원불변하시고 무오하신 의지로서 만물을 예견하시고 의도하시고 행하시는 것이지 결코 있을 수 있는 가능성만 가지고 어떤 일을 예지하시는 것이 아님을 그리스도인은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대로 모든 일이 결정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은 그것이 비록 가변적이요 우발적으로 행해지는 것처럼 보이거나, 심지어 우리가 우발적으로 행한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의지와 관련되어 필연적이요 불변적으로 행해진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의지는 불가항력적이어서 어떤 방해도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큰 능력이 하나님에게는 아주 당연한 것이요 그의 예지는 절대적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자는 만일 인간의 의지가 완전히 자유로울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행할 수도 없을 일을 행하라고 명하시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들의 힘으로는 전혀 행할 수 없는 일을 행하라고 명령하신 것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손이 마른 자는 손을 펴라는 명령을 받았고(막 3:5), 병자는 일어나 그의 침상을 가지고 걸으라는 명령을 받았고(막 2:11), 죽은 나사로는 일어나 나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요 11:43,44). 그리고 인간은 믿으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더구나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엡 5:14)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는 등의 성구를 볼 때 인간이 자초한 도덕적 무능력 때문에 인간의 도덕적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V.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시며 그의 백성에게 하나님께로 갈 의지를 주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내적 감정, 외적 환경, 습관, 욕망, 동기 등을 다스리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행동하면서도 하나님의 뜻하시는 바를 수행할 수 있도록 조정하십니다. 우리가 그 과정을 측량할 수는 없지만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현재 지식으로는 이 감화가 어떻게 역사하여 인간의 자유행동력을 파괴하지 않고서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지에 대해 충분히 설명할 수 없지만, 우리가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곧 수행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는 실질적인 것이며, 이 둘은 완전한 조화 속에서 함께 역사하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바울은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되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명했으나 즉시 그 명령을 한 이유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기”(빌 2:12,13)때문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 역시 “주의 권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시 110:3)라고 말함으로써 똑같은 원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종류에 따라 각기 특성을 부여받았으니 저들의 특성을 나타내는 모든 행동은 이미 창조 당시에 예선적으로 결정된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의 특성을 나타내는 공통적 행동을 가졌으니 이 행동은 이미 그들이 창조될 때 받은 것으로 예선적인 결정이었습니다. 소와 말도 역시 그들이 행할 동작의 형태가 예정되었고 식물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자들은 네 발로 걷거나 말처럼 소리를 지르도록 예정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외부에서 결정된 행동은 자유행동이 아니지만 내부에서 자기 이성으로 결정한 행동은 자유행동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이렇게 인간의 내부성을 포함하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를 말살하지 않는 것입니다. 포괄적인 하나님의 작정 곧 예정 속에는 모든 인간이 자유행위자가 될 것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그 사람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어떤 환경이나 외부적 영향 아래에서 어떤 욕망과 습관에 따라 마음이 움직일 것이라는 것과 이 모든 것들 속에서 자신의 이성대로 자유롭게 선택할 것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선택할 대상도 일정하게 예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동작의 원인을 알고 다스리시며 또 그 행동이 어떻게 진전될 것을 아시나니 이는 곧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행동을 예정하셨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징키우스는 인간은 자유행위자라고 말한 후에 “인간은 그의 생애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작정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여 행동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떠한 강요도 의식하지 않으며 마치 어떠한 지배도 받지 않는 독립자인 양, 자기가 완전히 자기의 주인인 양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행동한다.”고 덧붙임으로써 이 개념을 아주 명료하게 표현하였습니다. 루터는 “선인이든 악인이든 저들의 행위로 하나님의 작정이나 정하신 바를 성취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강요에 못 견뎌서 억지로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원리에 따라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행동력을 손상시키지 않고도 성령을 통하여 그들 안에 역사하사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나올 수 있게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의욕을 주시기 전에는 아무도 그리스도에게 나올 수 없는데 하나님은 그의 선민에게만 이런 의욕을 주십니다. 이때 선민의 자유는 전혀 손상되지 않는데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친구를 권하여 같이 산책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구원 얻은 자와 구원 얻지 못한 자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나타내 준 H. 존슨(H. Johnson)의 비유를 보면 “이백 명의 범죄가 투옥되어 있다고 하자. 나는 그들의 석방을 위해 했는데, 그로 말미암아 공의가 만족되고, 법의 정당성이 입증된 죄수들은 자유를 얻게 되었다. 옥문 빗장이 벗겨지고 그들의 절대적 사면이 약속되어 모든 죄수에게는 그들이 곧 자유인으로 출옥할 수 있다는 확약을 주었다. 그런데 한 사람도 나올 생각을 안 한다. 이 때 내가 그들의 사면을 위해 애쓴 나의 수고를 헛수고로 돌려 보내지 않으려고 이백 명 중 백오십 명을 개인적으로 방문으로 그들에게 힘과 정성을 다해 출옥할 것을 권면한다고 하자. 이것이 바로 선택이다. 이럴 경우 내가 그 남아 있는 오십 명을 옥중에 가두었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다. 그들의 사면을 위해 애쓴 나의 수고는 여전히 충분하고, 옥문 빗장은 여전히 벗겨져 있으며, 옥사의 대문도 여전히 열려 있으므로 걸어 나오기만 하면 그들의 자유는 보장되는 것이다. 그리고 옥중에 있는 자들 역시 자기들이 원하기만 하면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내가 옥중에 남아 있는 오십 명을 그대로 가두어 두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알미니안파는 종종 인간은 본래 이것이나 저것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으므로 덕은 칭찬을 받아야 하고 악은 비난 받아야 마땅하다고 말하는 펠라기안의 교의를 그대로 고수하지만 그것은 논리적으로 거룩한 천사의 선함, 영화된 성도의 선함 심지어 하나님 자신의 선하심까지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덕을 선택함에 있어서 어떠한 노력도 필요하지 않은 하늘나라와 같은 상태에서는 덕이란 칭찬할만한 선(善)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악을 취사선택하는 능력이 인간의지를 고귀하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힘이라는 관념은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인간은 선악을 취사선택하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금수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지의 극치는 아닙니다. 그래서 모즐리(Mozley)는 “의지의 초고로 완전한 상태는 필연의 상태이다. 선택의 능력은 순전한 의지의 본질이 아니라 오히려 약점이요 결함이다. 의지의 불완전하고 미숙한 상태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증거는 의지가 선악을 앞에 놓고 어느 쪽을 선택해야 좋을지 몰라서 망설이고 있는 바로 그것이 아니가?”라고 말합니다. 현세에서는 필연적으로 선을 행하는 하는 은혜가 한결같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생한 자라도 누누이 죄를 범합니다. 그러나 내세에게서는 은혜가 한결같이 부어진다든지 아니면 완전히 거두어지든지 할 것이기 때문에 그 때의 의지는 필연적으로 선을 결단하든가 아니면 악을 결단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동력과 인간의 행동력이 연합하여 한 행위를 산출하게 되는 방법은 성경에 기록된 방법을 고찰해 봄으로써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고의 의미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동시에 인간의 말입니다. 그것은 성경의 어떤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어떤 부분은 인간의 말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성경 전체가 그 모든 부분에서, 즉 표현 양식에서든 교훈의 실질에서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 동시에 인간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해밀튼(Hamilton)은 “영감이란 하나님께서 각 성경 기자를 기계처럼 사용하셨다거나 그들에게 말씀하실 것을 받아 적게 하셨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그들을 인도하시고 지배하시어 그들이 기록한 것이 진실 되게 하시고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기록으로 주시고자 한 바로 그 진리가 되게 하신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지혜, 언어 및 표현 양식을 사용하게 하시되 그들이 기록할 때 성령께서 초자연적으로 그들을 오류로부터 지켜주시어 하나님이 모든 세대에 걸쳐 그의 백성에게 주시고자 한 바로 그 진리를 기록하게 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우발적인 일”이나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생기는 사건이 정확한 예지의 객체가 되거나 사전준비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물론 모순입니다. 그 일의 성격상 그것은 근본적으로 불확실할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톱레이디(Toplady)의 말처럼 “인간이 자기 의지대로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는, 그가 운명의 연신을 예배하는 의미에서 그런 말을 하든 아니면 다른 의미에서 그런 말을 하든, 사실상 섭리의 하나님을 그 보좌에서 쫓아내는 자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실 수 없다면 그는 수많은 인간의 자의적 행동결과에 대해 항상 새로운 대책을 강구해야만 할 것이니 얼마나 분주하실 것입니까? 만일 인간이 실제로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시고 회심시키시기 위해 마치 인간이 동료 인간에게 하듯 여러 개의 안을 마음에 품고 가서 제일 안(第 一案)이 실패하면 제이 안, 제삼 안을, 이런 식으로 성공할 때까지 계속 시험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 자유행위자의 행위가 전혀 불확실한 것이라면 하나님은 미래를 예지하시기는커녕 오히려 날마다 접하게 되는 새로운 사실들에 대해 수없이 많이 놀라면서 그에 대한 지식들을 습득해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견해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요, 비합리적이며 비성경적인 견해들입니다.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을 부인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아신다는 것과 인간적 견지에서는 아무리 불확실하게 생각될지라도 하나님의 견지에서는 확실하고 부동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 견대는 그 타당성이 널리 인정되고 있는 견해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기 위해 주권적으로 자신을 제한하사 인간의 미래 행동 중 어떤 것은 알지 않기로 작정하셨다는 이론은 성경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어리석은 이론입니다. 그것은 마치 자녀의 악행을 눈감아주는 부모의 어리석은 행동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외부적인 힘에 의해서든 자발적인 행위에 의해서든 제한을 받으신다면 그 하나님은 유한한 하나님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죄인을 회심시키려고 열심히 분투하시지만 그들의 자유행동력을 무시하지 않는 한도에서 권면할 뿐이며 그 이상은 행하시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알미니안파의 이론은 마치 영원히 서로 투쟁하는(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이길 수 없으므로) 선과 악의 두 원리가 있다고 말한 옛 페르시아 인(바사제국)들의 세계관과 그 의미하는 것과 거의 동일합니다. 인간의 절대적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로부터 그 통치권과 통치력을 박탈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피조자를 하나님의 절대적 지배권 밖에 두는 것이요, 어떤 의미에서는 피조자에게 하나님의 영원하신 의지와 목적에 대한 거부권을 주는 셈이 됩니다. 이 이론은 또 하늘의 성도들과 천사들이 죄를 범할 수도 있어서 하나님의 통치는 전복되고 사탄과 악한 천사들이 지배적인 위치에 있게 되어 마침내 온 세계가 악으로 화할 가능성도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VI. 의지가 결정되는 방법

 

  인간은 이성적 행위자이므로 그의 독자적 행위에는 틀림없이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의지는 반드시 최강의 동기에 따라 결정을 내립니다. 만일 의지가 약한 동기에 의해 결정을 내린다거나 아무런 동기도 없이 결정을 내린다고 한다면 이는 마치 원인 없어도 결과가 생길 수 있자는 말만큼이나 모순된 말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일에는 항상 이유가 있음을 양심이 가르쳐주며, 또 우리가 어떤 일을 해 놓고 난 후에는 그보다 더 강한 다른 동기가 있었다면 달리 행동했을 텐데 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행위는 그다지 강한지 않은 동기나 잘못된 판단에 따라 행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동기라 할지라도 그 행위를 산출해 낼 만큼은 강한 것입니다. 저울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다른 한쪽이 가볍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때 하기 싫은 일을 선택하는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때의 동기는 매우 약할 것입니다. 그래도 그 일을 선택하는 이유는 어떤 다른 세력이 그 동기에 인력(引力)을 가하기 때문에 그 일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우리는 아픈 이를 기꺼이 뽑아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심하게 아파서 정말 뽑아버려야겠다는 더 강력한 이유가 첨가되기 전에는 그 이를 뽑아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튼 인간은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가장 강력한 동기에 의해 어떤 일을 결정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부산에 거주할 것을 선택한 자가 동시에 서울에 거주할 것을 선택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인간의 결의는 그의 천성의 지배를 받으며 그의 욕구, 성향, 기호, 지식 및 성격에 따라 결정이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한 자도 아니요, 정신 및 물질의 법칙으로부터 독립한 자도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어떤 일을 결정한다고 할 때 그것은 이상에 진술된 모든 것의 영향 하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가장 강한 성향 및 동기가 이끄는 대로 행동합니다. 우리의 양심이 증거하는 대로 어떤 일을 결정할 때는 그 당시에 우리 마음에 가장 강력하게 호소한 것들이 곧 우리의 의지를 결정하게 한 것들입니다. 핫지 박사는 “의지는 어떤 필연적 법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독자적으로 자기 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항상 마음의 선행(先行)적 상태 즉 심중의 가장 강한 동기에 의해 모든 것을 결정한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는 그의 결의가 그의 마음을 의식적(자발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의미에서만 자유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행위가 자신의 이성과 마음에 따라 결정, 지배된다는 의미에서만 자유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결의한 바가 그의 성격을 근거로 해서 혹은 그의 성격에 따라 결정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그의 결의라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는 그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인관계에 있어서 우리는 타인의 행동을 보고 그의 성격이 선하다든지 혹은 악하다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의 열매를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를 그들을 알리라(마 7:16-20)” 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느니라.(마 15:18)”고 하였습니다.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거나 나쁜 열매를 맺는 것은 그 나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그 나무의 질(質)대로 되는 것입니다. 열매가 그 나무의 좋고 나쁨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요, 그 나무의 질이 열매의 좋고 나쁨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는 인간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인간의 행동이 그 성격의 표현이 아니라면 우리가 어떻게 어떤 사람은 선하고 어떤 사람은 악하다고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자가 변론을 일삼기 위해 인간의 의지는 독립되어 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인간의 의지는 인간 성격의 산물이요 표현이라는 것을 누구나 다 일상생활 속에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나 살인자가 될 어떤 일을 결의한다고 할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를 악한 성격의 소유자로 판단하고 그에 따라 그를 대우하는 것입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인간의 결의는 오성(悟性), 원리, 감정 등에 근거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근거에서 내려지지 않는 결의라면 그것은 어리석은 결의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모든 것을 결정한 후에 의지가 선악 간에 어느 쪽도 결정하지 않은 무결정의 상태로 되돌아간다면 인간에게는 동료 인간을 신임할 근거가 없어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의지가 독자적으로 결정한다는 의미에서 인간이 자유를 갖는다면 그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행위가 외부의 법칙과는 상관없이 무법해질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어떤 상황 아래에서 무슨 일을 저지를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의는 인간성의 표현”이라는 사실이야말로 내세에 선한 자들은 영구히 선하고 악한 자들은 영구히 악하리라는 것을 보증해 줍니다. 만일 인간의 자유행위력이 필연적으로 범죄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천국의 성도들도 다시 범죄하여 타락한 천사들처럼 지옥으로 갈 수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선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최상의 의미에서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이제 더 이상 자기 의지를 고집하거나 투쟁하는 일이 없으며 훨씬 수월한 물리적 법칙 아래 있기 때문에 선한 행동이나 동기를 계속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악한 자들은 내세에서도 역시 사악한 것이 영구적입니다. 그들은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감화로부터 완전 분리되어 고칠 수 없는 그 완악함으로 더욱 대담무쌍하게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들은 영원히 악의, 사악, 증오의 성향을 갖게 되어 완전히 ‘악’의 신민이 되고 맙니다. 또 만일 자유의지 이론이 옳다고 한다면 사후의 회개도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론은 지옥에 들어간 자 중에서 어떤 자가 그 고통을 겪어보고 나서 자기의 과오를 깨달아 하나님께 돌아올 수도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설마 현세에서의 경미한 형벌도 인간을 죄로부터 돌이키는 효력이 있는데 설마 지옥에서의 준렬한 형벌에 그런 효력이 없을 수 있겠느냐고 추측합니다. 추측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인간의지는 그의 성질과 주어진 유인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는 칼빈주의의 원리만이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아무도 이것을 건설 수 없다는 즉 구원 얻은 자와 멸망자의 상태는 영구적이라고 단정한 성경의 결론과 일치하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의지 결정의 문제를 피상적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인간이 큰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추정합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과시하는 자유를 좀 더 상세히 검토해보면 자기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제한된 자유를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자연계의 법칙, 자신의 특수 환경, 습관, 과거에 받은 교육, 사회적 관습, 처벌 또는 비난에 대한 공포, 현존하는 욕망, 야심 등 이 모든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어느 순간에든지 인간은 그의 과거가 만들어 놓은 그인 것입니다. 즉 인간은 역사적 산물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는 자기 성질의 지배 아래 행동하고 또 그 행동을 그의 마음이 결정한다는 점에서 “피조자에게 가능한 자유”를 가질 뿐입니다. 이외의 어떤 자유도 그것은 무질서를 산출해 낼 뿐입니다.

사람은 금붕어가 든 어항을 어디든지 갖고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금붕어 자신은 자유로우며 어항 속에서 마음대로 헤엄쳐 다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무 조각이나 돌조각 또는 금속조각을 육안으로 보면 그것이 완전히 정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분자나 원자 및 전자를 볼 수 있는 강력 확대경을 통해 보면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그 권내에서 빙빙 돌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예정과 자유행동력은 큰 성전을 떠받들고 있는 두 기둥인데, 이 둘은 인간의 시력이 미치지 않는 구름 위에서나 서로 만납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두 평행선뿐이고 우리의 시력이 미치지 않는 저편 하나님의 예지 속에서 이 둘은 서로 합하며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주의자는 이 둘을 서로 결합시킬 수도, 결합시키려고도 하지 않는데, 알미니안파가 어떻게 이 둘을 서로 교차시킬 수 있다는 말입니까? 사실 그들은 인간의 자유를 주장하기 위해 하나님의 절대성을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사건을 일으키는 절대적 결정권이 인간의 수중에 있다는 의미에서 자유의지를 용인한다면 그 자유의지는 신적 자유의지가 되어 인간이 하나님(즉 제1 원인, 행동의 원천)처럼 되어 자유의지의 수효만큼 반신반인(半神半人)이 많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부인하지 않는 한 인간에게 이러한 독립을 허용할 수는 없습니다. 유물론적 철학자나 형이상학적 철학자들도 칼빈주의가 부인하는 것처럼 완전히 이 ‘자유의지’를 부인합니다. 그들은 모든 결과에는 그 결과에 상당하는 원인이 반드시 있다고 추론합니다. 따라서 의지의 행위에는 반드시 동기가 있다고 봅니다. 동기란 외부의 법칙과 사물이 인간 심성에 반사된 것을 의미하므로 의지의 행위가 동기로 말미암는다는 말은 곧 자유의 절대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VII. 성경의 증거

 

  성경의 교훈에 의하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는 완전히 조화되어 나란히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권적 통치자요 제1 원인이신 반면 인간은 그의 성질의 제한 속에서 자유행위자요 제2 원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가 인간에게 시키고자 계획하신 일을 인간이 자유로 임의적으로 행하도록 인간의 사고와 의지를 지배하십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가 상호 협력한 전형적인 실례는 요셉과 그 형제들의 행적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에 의해 후에 총리가 되 기근 때 식량을 공급하는 큰 사역을 감당했던 애굽으로 팔려 갔습니다. 그의 형들은 자기들이 자유로 그런 행동을 한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몇 년 후에 요셉과 상봉했을 때에 자기들의 죄를 자인한 것입니다(창 42:21, 45:3). 그러나 신앙을 갖고 있는 요셉은 그들에게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말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그런 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5, 8)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의 형제들은 그 악한 본성대로 동생을 이방의 노예로 팔았지만 그들의 행동은 결국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성취한 인연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즉, 그들의 계획적인 악이 선으로 변하였다고 해서 그들의 죄가 감소된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한 행위는 지극히 부당한 것이었으나 사실 그는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한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바로에게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나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롬 9:17, 출 9:16, 10:1-2)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악행을 제어하심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이루십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이 매년 세 번씩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 하나님께서는 이방 족속들이 그 땅을 엿보지 못하도록 제어해주셨고(출 34:24), 파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여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게 하셨습니다(스 1:1-3). 또 성경에는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으로 인도하시는니라.”(잠 21:1)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수월하게 왕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다면 범인의 마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이사야 10:5-15에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가 완전한 조화 속에서 서로 일하고 있는 현저한 실례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즉 “화있을진저 앗수르 사람이여 그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 내가 그를 보내어 한 나라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하여 나의 노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 또 그들을 가로상의 진흙 같이 짓밟게 하려 하거늘 그의 뜻은 이같이 아니하며 그 마음의 생각도 이 같지 아니하고 오직 그 마음에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여 이르기를 나의 방백들은 다 왕이 아니냐. 갈그미스와 같지 아니하냐. 내 손이 이미 신상을 섬기는 나라에 미쳤나니 그 조각한 신상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신ㅅ아보다 우승하였느니라. 내가 사마리아와 그 신상에게 행함같이 예루살렘과 그 신상에게 행치 못하겠느냐?” “이러므로 주 내가 나의 일을 시온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한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리라. 그의 말에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나는 총명한 자라 열국의 경계를 옮겼고 그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나의 손으로 열국의 재물을 얻는 것은 새의 보금자리를 얻음 같이 온 세계를 얻은 것은 내어버린 알을 주음 같았으나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리거나 지저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는도다.”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 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함과 일반이로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성구에 대하여 라이스(Rice)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성구의 명확한 의미는 첫째, 앗수르 왕이 비록 교만하고 불경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는 마치 사람 손에 들린 도끼나 톱이나 막대기처럼 하나님이 유대인에 대한 그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요, 둘째 앗수르왕은 자신의 자유를 조금도 손상치 않고 자의로 활약하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행했다는 말은 본문에 없고 단지 자기 야심을 이루려고 했다는 말만 있으니 곧 ‘그의 뜻은 이 같지 아니하며 그 마음의 생각도 이 같지 아니하고 오직 그 마음에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여’라고 했다. 셋째, 하나님이 비록 악한 왕의 행위를 이용하여 결국 자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신다 할지라도 그 왕의 악행은 그 행위대로 벌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죄악을 벌하시기 위해 앗수르 왕을 사용하셨다. 그런 다음 앗수르 왕의 완악한 계획을 벌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간을 지배하여 그들의 자유행위력을 전혀 방해하지 않고 그의 계획을 수행하실 수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도 수행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명백한 교훈 아니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자라면 누구나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죄악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행 4:27,28)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행 2:23)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행 3:18)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성경에 저를 가르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행 13:27-29)

십자가 사건만 예정되었던 것이 아니라 그 뒤에 따르는 여러 사건들도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겉옷을 나누어 가지려고 군인들이 제비뽑은 일시 22:18, 요 19:24), 십자가에 달린 예수께 신 포도주를 드린 일(시 69:21; 마 27:34; 요 19:29), 백성들이 예수를 조롱한 일(심 22:6-8; 마 27:39), 예수를 강도와 함께 매단 것(사 53:12, 마 27:38), 죽은 예수의 뼈를 꺾지 않은 것(시 34:20; 요 19:36), 창으로 찌른 것(슥 12:10, 요 19:34-37) 등이 있고, 이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놓고 운명해 가는 예수를 향하여 비난하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저들은 아마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 행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서를 읽어보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과 결부된 모든 일들은 사사건건 다 예언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사건들은 발생하기 전 수세기 동안 구약 예언서에서 자세히 예언된 것이므로 영원 전부터 예정되고 확정되었음이 분명하며, 예정된 사건들은 그리스도가 누군지도 모르는 인간들을 통해 성취되었고, 또 저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룬다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한 채 임의적으로 행동한 것입니다(행 13:27,29, 3:17). 만일 역사상 최악의 사건 곧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계획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면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보다 적은 사건들도 하나님의 예정 속에 들어 있으며, 그것은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계획된 것이라는 사실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성경적 증거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잠 16:9-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렘 10:23-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 하니이다.

출 12:36-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으로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의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스 6:22-이는 여호와께서 저희로 즐겁게 하시고 또 앗수르왕의 마음을 저희에게로 돌이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전 역사하는 손을 힘 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느니라.

스 7:6-그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으므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에스라)니라.

사 44:28-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

계 17:17-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삼상 2:25-그들(엘리의 아들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

왕상 12:11,15-네 부친(솔로몬)은 너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나는(르호보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왕이 이 같이 백성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삼하 17:14-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모략은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셨음이니라.

출처: 행함과 믿음/Chukang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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