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BT 인구의 통계와 추정치는

논란과 논쟁의 대상이 되고

정확한 숫자를 얻는 것은 여러가지 이유로 어렵다.


동성애자양성애자에 관한 통계 차이의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연구 성격과 관련이 있다.


LGBT 인구의 통계는

대부분 연구자의 자료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뢰할 수 있는 

LGBT 인구의 크기를 완전히 파악하기가 어렵다.


미국은 약 3.5%로 알려졌지만

미국 게이단체는 실제 10%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동성애 국가순위 1위는 브라질로 10%를 초과하고

이스라엘이 8.7%로 3위에 올라있다.


데이터는 동성애자,양성애자와 동성애 경험자를 포함한다.


 순위

1

10 

11 

12 

 국가

 브라질

네델란드 

이스라엘 

 영국

 멕시코

 뉴질랜드

미국 

프랑스 

노르웨이 

캐나다 

호주 

이탈리아 

 LGBT율

 10.1%

 8.9%

 8.7%

 7.0%

5.0% 

 4.3%

 3.5%

 3.4%

 3.3%

 3.0%

 2.5%

 2.4%

조사년도

 2009년

 2009년

 2012년

 2017년

 2017년

 2007년

 2011년

 1992년

 1988년

 2014년

 2013년

 2011년


브라질은 삼바축제 영향으로 보이고

이스라엘은 매년 수십만명이 참여하는 게이 프라이드 행사로

세속적 유대인들이 동성애에 관대한 경향으로 보인다.


소돔과 고모라 도시 샌프란시스코 

동성애 도시순위 1위는 샌프란시스코로 15.4%에 이른다.

상위 10위권 도시들은 미국과 브라질이 차지하고 있다 .


 순위

 도시

샌프란시스코 

브라질

리오 

시애틀 

애틀란타 

보스톤

새크라멘토 

브라질

포르탈레자 

 비율

15.4% 

14.3% 

12.9% 

12.8% 

12.3% 

9.8% 

9.4% 


​샌프란시스코는 동성애자의 집단거주지 카스트로가 있고

전용 게이바와 클럽이 60여곳 있다.


게이 프라이드 퍼레이드와 게이 영화제가 열리고

거리에는 게이 깃발이 걸리고 무지개 횡단보도가 있다.



동성애자의 비율이 10%를 초과하는 국가와 도시가 생겨났고,

거룩한 땅 이스라엘조차 세계 3위권으로 더렵혀졌다.


세계인구의 2~3% 또는 최대 3~8%라고 알려지고 있는데,

이는 74억 인구 중 2.2억이 동성애자라는 의미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지구에 오셨던 시대의 세계인구와 비슷한 수준이다.


동성애로 더럽혀진 땅,

동성애를 인정하는 현 시대는 다시 한번 정화될 것이다.



출처: 카이로스 / ars (acoloje)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영적인 일들은 오직 영적인 눈으로 바라봐야만 이해할 수 있다. 영적인 일을 세상의 눈으로만 바라보니 답이 없다는 결론만 나오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한반도의 모든 문제해결의 열쇠는 남한교회의 회개와 복음의 빛이 다시 한번 회복되는 것 뿐이다. 다른 길을 찾으면 안 된다.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시다. 남북관계에 애초에 없는 답을 찾으려고 하니 답이 안 나오는 것이다. 세상은 결단코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것의 실상은 영적인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거슬러, 한반도의 분단은 애초부터 영적인 것이었다.

초대 제헌국회 때부터 대한민국을 하나님께 철저히 맡기며 기도로 건국을 진행했던 나라와, 하나님이 계셔야 할 모든 자리에 김일성을 앉혀버린 이단집단의 나라의 건국사를 이해해야 한다. 주체사상은 종교이며, 기독교를 대적하는 최강의 이단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교회가 이 사실을 바로 알리고 전해야 하는데, 이러한 것들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


예수님의 몸된 교회들이 이런 한반도의 문제를 영적인 눈으로 보지 못하고 남북 문제를 어떠한 정치적 움직임 가운데, 그 안에서만 답을 찾으려 하니 답이 안 나오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허공을 치는 기도제목만이 돌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 분단의 본질적인 원인은 남한과 북한의 영적인 주인이 각각 다르다는 것에 있다. 이 건국사를 제대로 알아야 기도의 방향이 명확히 설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을 모시며 건국했던 대한민국 체제와, 김일성을 우상을 하나님으로 모시며 세웠던 북한의 독재체제는 본질적으로 공존이라는 것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통일은, 남한체제가 망하든지, 북한 주체사상 체제가 망하든지 둘 중 하나가 망해야만 가능한 영적인 원리이다. 남한교회가 회개하고 복음의 빛이 회복되면 북한의 우상정권 체제는 급속히 무너지게 된다. 오직 그것만이 통일의 열쇠다. 오직 예수만이 그 길이며, 그 진리며, 그 생명이다. 다른 길을 찾지 말라.




출처: 이신일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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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스스로 성을 선택하게 해야 한다?

캐나다의 싱글 트랜스젠더가 아이의 출생신고서를 작성할 때, 성별을 적는 란에 ‘모름’(unknown)이라고 기재한 사실이 알려져 눈길을 사로잡았다.




 

CBC 등 현지 언론의 3일(현지시간) 보도에 따르면 캐나다 브리티시콜롬비아에 사는 코리 도티는 지난 11월 태어난 자신의 아이가 아직 정확한 성별을 결정하지 못했다며 ‘성별은 모름’이라고 신고했다.

 

성전환자인 도티는 자신 역시 남성도, 여성도 아닌 양성의 특징을 모두 가진 ‘제3의 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그녀는 지난 11월 친구의 집에서 아이를 직접 출산했지만, SNS에서는 덥수룩하게 턱수염을 기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도티는 “아이가 자라서 자신이 어떤 성별을 가졌는지 스스로 인지할 때까지 (각종 서류에) 성별을 등록하지 않을 것”이라며 브리티시콜롬비아 주 당국 측에 이 같은 뜻을 밝혔다.

 

하지만 당국은 ‘성별은 모름’이라고 적힌 아기의 출생신고서 등록을 거부했다. CBS에 따르면 당국은 “제 3의 성을 가지면 오히려 혐오 범죄나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며 우려의 뜻을 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4월 도티는 당국으로부터 아이의 이름으로 된 의료카드를 받았다. 해당 카드에는 아이의 이름과 출생 연도, 발급일자, 유효기간과 성별 등이 기재돼 있는데, 성별에는 남성(M)이나 여성(F)을 뜻하는 글자 대신 ‘U’가 새겨져 있다. 도티는 이것이 ‘미결정’(undetermined), 혹은 ‘미지정’(unassigned)을 의미하며, 아이가 우선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당국이 조치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도티는 “‘제3의 성’ 혹은 ‘젠더 넌 바이너리’(gender non-binary·스스로를 남성 또는 여성으로 정의하지 않는 사람을 의미) 로 등록되는 것이 차별이나 혐오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에 동감한다”면서도 “나는 내 아이가 남자아이 혹은 여자아이로 규정되는 제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지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 캐나다에서 한 트랜스젠더가 자신이 낳은 아이의 성별을 ‘미결정’(undetermined), 혹은 ‘미지정’(unassigned)을 의미하는 U로 등록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 자신도 자궁을 가진 여성으로 태어나 아이까지 출산했지만, 스스로를 남자도 여자도 아닌 ‘제 3의 성’이라 주장하는 그녀는 자신이 낳은 아이도 자라서 스스로 성을 선택할 때까지는 U(모름, 미결정)로 표기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 5장 20절에서는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그들은 화가 있을 것”이라 하셨다.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성경의 선언(창 2:23)과 이를 확증하고 있는 유전적, 생물학적 증거들을 송두리째 부정한 채 “성은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이라는 희한한 주장을 펼치는 자들에게 소돔성에 내려졌던 유황불의 심판이 내려질 것이다.

 

 




- 예레미야 -

누가 나를 정의할 수 있나?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
(갈 5:17)


성경은 창조로부터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은 ‘사람’으로 정의하였고, ‘남성’과 ‘여성’으로 정의하였고, 더 나아가 ‘남자’와 ‘여자’로 정의하였다.


이는 인간 스스로 바꿀 수 있는 정의가 아니다. 오직 창조자의 계획과 예정과 구속 안에서 작정된 하나님의 결정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창조로부터 오직 하나님의 정의 안에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와 소통하며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정의를 벗어나 스스로를 정의하기를 원했다. 그것이 사단의 유혹이라 할지라도 그 결정은 스스로가 한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에 의하여 죄인으로 정의되었고 이 정의는 하늘의 천사도, 인간 스스로도 바꿀 수 없다.


최근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정의하여 "나는 게이다." "나는 젠더이다."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그의 정의는 죄인이냐 의인이냐의 작정된 틀 안에서 스스로 자기 결정을 한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 정의한다고 하나님의 정의가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내린 정의에 대한 책임은 갖게 된다.


다시 말하여 누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나는 ‘탈동성애자이다’라고 선언한다면 그의 인격은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보증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믿음의 고백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최근 들어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성향에 대하여 말한다. ‘내 아들은 아버지의 성향을 많이 닮았다. 나는 게이 성향으로 태어났다’라는 말을 한다.


성향이란 언어적 정의는 ‘새로운 상황에 나타나는 자신의 태도와 판단에 의해 자신의 위치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향이란 어떤 상황에 적응되었음을 전제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매운 것을 잘 먹지 못하는 성향이 있다. 나는 사색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다. 나는 진보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 나는 동성애적 성향이 있다라는 말은 동성애 유혹과 경험에 적응되었고 선택적 결정을 하였다는 말이다.


만약 북한에서 탈출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김정은 체제에서 태어나 선택의 여지없이 주체사상에 적응되어 북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그 상황이 싫어서 남한으로 탈북하였다면 그는 한국의 헌법과 생활관습과 사상과 철학을 새롭게 적응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적응은 생각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한국민이 가져야할 많은 것들을 배우고 공유하여 적응해 나가야 한다.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이 도둑질, 술과 마약, 도박, 동성애에 경험이 있어 그 매력에 동의하고 습관에 빠져 그 생활이 적응이 되었다면 그것은 하루아침에 벗어나오기 쉽지 않다. 이미 죄인으로 정의된 정체성에 스스로 성경에 정죄된 인간의 쾌락을 스스로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죄인의 정의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의인으로 정의되었다면 그는 그가 선택한 의인의 정의가 추구하는 의인의 삶에 새롭게 적응하여야 한다. 그가 설혹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받았다 해도 그는 옛생활에 적응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생활로의 적응이 필요하다.


그러나 죄성의 역사 속에서 옛삶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을 진리의 영이 하는 것이다. 이 때 가장 큰 문제는 본인의 의지로는 죄인의 육체의 속성 속에 역사하는 죄의 유혹들을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굳건한 의지적 믿음이 필요하며, 이 믿음은 오직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되어야 한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 곧 성령이 진리 속에서 역사하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정체성을 논한다. 정체성(identity)이란 사전적 정의는 [사물 본디의 형체가 갖고 있는 성격을 말한다. 여기서 ‘identity’란 단어가 ‘확인하다(identify)’란 말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정체성이 자기가 아닌 남에 의한 확인과 증명을 통해 형성되는 것임을 말해 준다.]라고 기술 되었다.


그러면 누가 사람의 정체성을 증명할 수 있는가? 그것은 곧 하나님 뿐이다. 그러므로 성향이나 정체성은 사람이 스스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피조물로서 이미 창조자에 의해 남자와 여자로 정의되고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남녀 동성애자들을 정의하여‘진리를 거짓말로 바꾸어 피조물을 경배하고 섬기는 자들이라’기록하였다(롬 1:26,27). 이제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거듭난 새 사람으로 정의할 필요가 있다.



글쓴이: 이요나 목사

존 오웬이 말하는 인간에 대한 바른 사고



영국의 모든 신학자들 중에 가장 위대한 인물들 중의 하나, 청교도들 중의 왕자, 그는 존 오웬이다.

그는 방대한 하나님의 지적 능력과 지식을 기억하며, 지식을 조직하는 비상한 능력을 소유한 신학자였다. 그의 거룩한 영적 능력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사고와 인간에 대한 바른 사고로 인한 겸손과 복음에 대한 능력을 경험으로 되어진 것이다.
청교도 교육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이에게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인간에 대한 사고는 필수조건이라고 한결같이 주장했으며, 존 오웬 역시 신자들에게 네 가지 항목으로 상기시켰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인간이다.

 

 그는 이성적인 활동을 위한 피조물이며 삼위일체적인 기능을 하는 이해력과 의지와 감정을 부여받는다.지성이며 이해력인 정신은 영혼의 선도적인 기능을 한다. 이의 기능은 인도하고 지시하고 선택하고 안내하는 것이다. 의지는 행동의 능력이고 이성적인 욕구이다. 정신에 인도되므로 이성적이며 감정에 의해 자극되므로 욕구적이다. 의지는 선의 모양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오직 이성적인 선에 따라 선택한다. 감정은 특별한 대상들로 이끌거나 또는 물리치는 선택들을 이끌어내는 정서적 연상들이다. 감정이 없이는 절대로 선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즉, 무엇이 감정의 지지를 얻느냐에 따라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힌다.
하나님은 진리를 감정과 의지에 직접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탁월함으로 심령을 압박하신다.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우리의 첫 번째 과제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을 배우는 것'이다. 영혼의 방향키가 감정이라면 항해지도는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이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타락한 인간이다.

 

 죄는 인간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에 Thomas Boston은 죄로 인한 4중 소외로 하나님, 이웃, 자신, 자연으로부터의 소외를 주장했다. 죄의 열매는 영혼의 무질서와 인격의 분열이다. 정신기능인 지성은 서로 엇갈리고 정반대로 움직이며, 의지는 정신이 발전하는 선한 것을 택하지 않고, 감정이 주권을 잡아 영혼을 포로로 잡고 이끌게 된다.
죄의 근원은 창조주에 대한 뿌리깊은 불만과 반감이다.(롬8:7) 불경과 불의와 불신과 이교는 내주하는 죄가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죄는 전 인격에 침투하여 오염시킨다. 지성은 무지하고 허영되며 부패하게 된다. 감정은 선한 것에 대한 혐오와 증오하게 되며 의지는 무기력하게 된다. 그러므로 죄의 존재와 능력으로 인해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자기 혐오와 자기불신 위에 기초되어야 한다. 자기 신뢰와 자기 만족은 자기 무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건강한 그리스도인, 참된 성도는 상하고 가난한 심령을 가지고 있다.

셋째, 그리스도인은 구속을 받은 인간이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빚을 갚으시고 그에게 생명을 얻게 하시고 그를 죄책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시고 그를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시키신 영원한 구속언약 가운데 보증인이 되신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대한 핵심이다.

넷째, 그리스도인은 중생한 인간, 곧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피조물이다.

 

 새로운 생명의 법칙과 순종의 습관이 주입되는 마음의 할례인 중생으로 인도하신다. 이 할례의 직접적인 결과인 회심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진정으로 구원을 얻는 믿음의 첫 번째 의식적인 행동이다. 중생은 인간의 심령을 죄와 싸우는 전투장으로 만든다. 죄는 마음속에서 항상 활동하고 있다. 죄가 일시적으로 공격의 소강상태를 보이는 것은 죄가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살아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죄는 가장 잠잠해 보일 때 가장 잠잠하지 않은 것이다. 죄의 호수가 잔잔할 때 가장 깊다." 죄의 전략은 기습의 전조로 거짓된 안전감을 주는 것이다. 이 죄와의 전투, 죄죽임은 평생에 걸쳐 이루어지는 것이다.

* 이 글은 존 오웬의 설교식 논문들, "내주하는 죄(indwelling Sin)", "죄의 억제(Mortification of Sin)", "유혹(Temptation)", "성령에 대한 논설(Discourse Concerning the Holy Spirit)"를 수집하여 집필한 청교도 사상(기독교문서선교회)의 저자 제임스 패커의 글 "존 오웬의 영성"에서 발췌하였다.

  하나님은 인간의 내면의 기능을 창조하셨고 사용하신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사고를 인식하고 조명되어 인간에 대한 내면의 기능을 바르게 이해함으로 그분의 거룩하고 탁월한 말씀 가운데 목적하신 바를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능력을 상실했다. 죄의 깊이는 가난하고 상한 심령을 가진 자에게 주시는 은혜의 깊이와 비례한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언약의 보증을 통하여 구원의 완결을 향해 이루어져 가는 은혜는 죄죽임을 통한 날로 새로워지는 거듭남을 의미한다. 이는 지상에서 거룩한 자녀가 되기 위한 하나님이 주신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로이드존스연구사이트

 

가져온 곳 : 
카페 >양무리마을
|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십자가가 해답이라네


나를 낮추게 하는 것도
나를 높이는 것도
나를 살리는 것도
내가 죽는 것도 십자가 뿐이라네.

미움을 용서로
시기와 질투를 감사와 축복으로
누군가를 세워줄 수 있는 것도 십자가 뿐이라네.

누군가를 품어주고
누군가를 이해하고
누군가를 용서하며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십자가 뿐이라네.

이 나무가 나를 살게 하네
木,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人),
森, 세 개의 십자가,
골고다 언덕을 상징하는 데...

이 나무가 나를 살게 하네
오늘 내가 숨 쉴 수 있는 것도 이 나무 덕분이라네.
사람이 마시는 산소를 만들어주고
사람이 내뱉은 더러운 것을 대신 먹어주는 나무처럼...
나의 허물과 죄악을 대신 담당하시고 돌아가신
그 생명이 나를 살게 하네
그 십자가 뿐이라네.

나는 포도나무
너희는 가지니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죽어, 열매 맺을 수 없나니...

그 십자가 나무에
접붙임 되어야 생명수를 공급받을 수 있다네
나는 죽어지고 그 나무에 붙어야 하나니
이것이 십자가의 원리라네.

누구든지
십자가에 붙어야 살고
십자가에 죽어야
영생얻는 부활이 있다네.

내가 평안을 누리며
이 하루를 살아갈 수 있음도
오직 십자가로 말미암아서라네
십자가가 해답이라네.

-해처럼달처럼



 

    선악과를 만드신 하나님을
    "사랑"이라 부르는 이유 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에덴동산에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왜냐구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른 동물, 아니, 하늘의 천사들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선택의지능력’을 인간에게만 부여하셨음을 알게 하여 주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요, 우리에게는 권리장전의 표식이요, 善과惡을 마음대로 택할 수 있는 멋진 특권(awesome privilege)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천사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무조건 순복하도록 창조되어졌습니다.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짐승들에게는 하나님을 알 수도 또 그분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마음도 선택의지능력도 전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속성을 닮은 인간만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있고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율권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악을 택할 수도 있고 선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자율성의 능력이라고도 부릅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억지사랑보다 자신이 선택한 자율적인 사랑이 더 의미가 있고 더 가치가 있는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지은 인간들을 용서하시는 방법을 보아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벌벌 떨고 있는 죄인들을 향해 “너의 죄를 사하노라…”   어느 영화장면의 한 대사처럼 그렇게 말씀 한 마디만 해 주셔도 됩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그 모진 십자가의 고난을 택하셨습니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셨습니다. (요10:18절 참조) 그러길래 십자가의 사랑이 가장 고귀하고 가장 값진 사랑이라고 말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닮은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는 내 남편보다 훨씬 더 잘 생기고 유능한 남자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즐거이 내 남편을 사랑하며 내 가정을 지킵니다. 내가 선택한 나의 길이요, 내가 선택한 내 남편이기 때문입니다. 남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포함한 이 세상의 여자들이 모두 다
    미쓰 코리아는 아니며 다 팔등신 미인들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 세상의 남편들은 자기의 아내들을 사랑하며 가정을 지키려고  온갖 고생을 다하며 가진 애를씁니다. 내가 택한 나의 가정이요 내 아내이기 때문이겠지요… 우리는 선택권을 남용해서 실낙원하는 안타까운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우리가 보는 대로, 우리나라에서도 손꼽히는 대형교회 리더들 중
    유능한 목사님들이 대거제7계명을 범하고 추락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들에게는 세상 모든 사람들(특히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잠시잠간의 쾌락을 택할 것이냐, 아니면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오늘의 유혹과 싸워 이길 것이냐? 선택의 능력을 사용해야 하는 때가 주어진 것일 뿐 우리와 전혀 다른 별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선과 악을 택해야 하는 때, 자신의 정과 욕심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고 당당히 승리할 것을 택하는 것도 자신의 몫이요, 정욕을 택하고 무릎을 꿇는 것도 자신의 몫입니다. 만약, 그분들이 보이지 않는 세계와 십자가의 길을 택했더라면, 가족의 행복은 물론, 그들의 목회여정은 지금보다 한결 더 빛이 났을 것이고 하나님의 충성된 종이라 하는 칭찬과 예비된 상급을 주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을 것을 기대해도 좋을 것 입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 보다는 보이는 육신의 쾌락을 택했고,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대로, 사랑스런 가정을 어둡게 했으며 에덴동산같이 사랑스럽고 축복된 교회를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악을 선택할 수도 있고 선을 선택할 수도 있는 자율권이 주어진 만물의 영장이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멋진 피조물들입니다!  처음사람인 아담과 하와는 이 권리를 남용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낙원, 에덴동산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선악과를 만드신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라, 선택의 능력을 남용한 인간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과 나에게 주어진 이 멋진 선택의 권리를 남용하지만 않는다면 이 선택의 능력을 사용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길을 찾을 수가 있고, 그 길을 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그리스도를 택하고 실낙원을 회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는 내가 가야할 길을 찾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구원의 길을 미리 정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구원받을 수를 정해 두신 분, 그 길을 마련해 놓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없는 길을 내가 만들어서 가라고 하시면
    구원의 길을 찾기에 얼마나 더 어려울까
    늘 생각하게 됩니다. 고로, 나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에덴동산에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 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부종하라" (신 30:19)
    By: 별똥별 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신학적 오류 준엄히 지적했지만 구원 대상 잊지 않았다

칼빈, 이슬람은 적그리스도요 일신론적 이단으로 규정 … 교리는 비판했지만 선교와 개종 가능성은 열어놓아




▲ 유해석 선교사(총회이슬람대책위원회 전문위원)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종교개혁을 이끈 프랑스의 기독교 신학자다. 역사의 여명(黎明)기에 칼빈은 가톨릭 사제, 법률가, 기독교 인문주의자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회심을 통해 그는 오직 성경만을 유일한 텍스트로 삼아 그것의 교사(doctor), 해석자(interpres), 수호자(custos)로서 자신에게 부여된 삶을 살았다. 그의 위대한 저서는 그의 나이 27세 때 라틴어로 출판한 기독교강요다. 그리고 그가 쓴 주석은 많은 주석들 가운데 이정표적인 저술로 평가받고 있다. 젊은 칼빈은 기독교 신학의 정수가 되는 교리들을 정리하고 심오하게 제시함으로써, 교리사상 개혁신학이라는 큰 일가(一家)의 초석을 놓는다.



1. 칼빈 시대의 이슬람


칼빈이 살았던 종교개혁시대에 이슬람은 가장 큰 팽창을 이루었고, 이슬람 제국의 황금기였다. 당시 오스만 터키 이슬람제국은 유럽인들에게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고,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의 글에서 ‘터키인들(Turks, 이슬람)’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다. 칼빈은 1544년에 쓴 그의 저서 <교회개혁의 필요성>에서 “터키인(이슬람)과의 전쟁은 온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어 버렸고, 놀라움으로 가득차 있는 상태”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루터와 마찬가지로 칼빈 역시 당시 이슬람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이슬람의 움직임에 대한 국제정세를 꿰뚫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칼빈이 무슬림들과 실제적인 논쟁은 벌였다거나 그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했다는 기록도 없다. 왜냐하면 루터 당시에는 비엔나를 정복하기 위하여 이슬람 세력이 물 밀들이 밀려왔을 때인데 반하여 칼빈 당시에는 이슬람 군대가 비엔나를 정복하지 못한 채 물러가고 나서 이슬람의 공격으로부터 어느 정도 안정된 된 시기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지정학적으로 루터는 이슬람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독일에서 사역하였고, 이슬람의 세력으로부터는 안정적인 제네바에서 사역했던 칼빈 사이에는 이슬람에 대한 긴장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칼빈의 작품 속에 나타난 이슬람에 대한 언급으로 볼 때 칼빈은 이슬람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2. 이슬람에 대한 칼빈의 이해


이슬람에 대한 칼빈의 태도의 가장 큰 특징은 신학적 오류를 지적하는 그의 엄격함이다. 칼빈의 주석과 설교들, 강의들 속에 방대하게 흩어져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이슬람에 대한 킬빈의 견해를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무함마드는 거짓 선지자요 배교자


칼빈은 무함마드를 ‘거짓 선지자’로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신명기 13장 1절 이하에 관한 설교에서 “기독교 신앙은 [삼위]하나님에게로 나아가지 않는 자들이 반대하는데, 그들은 바로 무슬림들, 이방인들, 그리고 유대인들이다”고 말하며, 그들은 신성모독을 하였으며, 교회로부터 마치 썩은 가지처럼 철저히 단절되었으며 그들이 복음에 대하여 저항하거나 기독교를 없애기 위하여 애쓰는 것은 우리들에게는 놀랄 일도 아니라고 하였다. 칼빈은 신명기 18장과 33장에 예언된 선지자가 무함마드가 될 수 없다고 설명한다. ‘위로자’는 그리스도와 성령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이므로, 보다 완벽한 계시가 그리스도가 출현한 이후인 7세기에 무함마드에게 도래했다는 이슬람의 해석을 비판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칼빈은 무함마드를 ‘배교자’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칼빈은 1550년에 데살로니가 후서에 관한 주석에서 ‘죄의 사람’과 배교를 로마교도들과 동일시하였으며, “변절이 보다 널리 퍼졌도다! 무함마드가 변절자였으므로 그는 그리스도로부터 그의 추종자에게로, 터키인들에게로 돌아섰다. 무함마드의 분파는 격렬한 홍수와 같은데, 그것의 폭력 안에서 교회의 절반을 떼어내어 갔다”고 주장하였다.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살면서 실제로 기독교 에비온파(Ebionite)의 영향을 받았다. 기록에 의하면 무함마드 당시에 메카에는 에비온파 신자들이 수백 명이 살고 있었다. 무함마드의 부인 카디자(Khadija) 또한 에비온파신자였다. 또한 무함마드에게 영향을 끼쳤던 이븐 와라카 나우팔(Ibn Waraqua Naufal) 역시 에비온파의 사제였다. 무하마드가 결혼을 할 때, 에비온파 의식에 따라서 결혼식을 했다는 견해도 우세하다. 따라서 칼빈은 무함마드를 변절자라고 불렀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둘째,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일신론적 이단


칼빈은 이슬람의 이단성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1550년에 집필한 주석 중 요한일서 4장 2절과 3절을 근거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것을 부정하는 이슬람은 기독교 이단”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요한일서 4장 6절을 주해하면서 거짓 선지자의 거짓 예언을 잘 분별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이슬람은 이단 가운데 어떤 이단일까? 이슬람은 한 분 하나님을 강조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부인하고 성령의 하나님 되심을 부인하는 일신론적 이단이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무슬림들도 천지의 창조자는 하나님이라고 힘껏 외치지만,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우상으로서 진정한 하나님을 대치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또한 하나님이 없으되”(요일 2:23)라고 한 말씀을 언급한다. 이슬람의 알라는 삼위일체를 부인한다. 또한 위격이 없이 단일하다. 또한 요한일서 2장 18절에 대한 주석에서 칼빈은 ‘적그리스도 왕국의 전령사’들로 여러 이단들을 언급하면서,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이 삼위일체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 대신에 일신론적인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슬람에서는 삼위일체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되심도 부정한다. 따라서 예수를 통한 중보 또한 부정한다. 따라서 칼빈은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일신론적 이단으로 이슬람을 이해했다.


셋째, 이슬람은 적(敵)그리스도


칼빈에 의하면 이슬람은 적그리스도이다. 칼빈은 신명기 설교(13:6~11)를 통해서 그는 “무함마드는 터키인들이 그들의 무함마드를 하나님의 자리”에 두고 있는데, 그는 “그런 자들은 그들 자신이 고안하여 만들어 내는 악마”일뿐이라고 말한다. 1556~7년에 낸 신명기에 관한 설교(18:15; 33:2)에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무함마드가 그의 <알 꾸란>(Al Coran)이 절대적인 지혜라고 말하고, 교황은 그의 칙령이 절대적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적그리스도의 두 뿔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다니엘의 예언들을 전적으로 역사적으로 과거에 일어난 일, 즉 한편으로는 안티오커스 IV 에피파네스(Antiochus IV Epiphanes)와 다른 한편으로는 고대 로마와 연관시키는 것으로 일관성 있게 해석한다. 칼빈은 교황을 서방의 적그리스도요 이슬람은 동방의 적그리스도라고 말하면서 그는 이 둘을 ‘두 뿔’로 언급하였다. 칼빈에 의하면 이슬람 혹은 이슬람을 창도한 무함마드는 적그리스도 혹은 적그리스도의 뿔이다. 하지만 칼빈이 이슬람을 적그리스도라고 표현했다고 해서 무슬림을 적대시한 것은 결코 아니다. 칼빈이 이슬람을 향해 적그리스도라고 표현한 것은 이슬람의 배후에 사탄이 역사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무슬림 자체가 적그리스도라는 뜻이 결코 아니었다. 참고로 이슬람은 종교이며 무슬림은 이슬람의 제4 분사형으로서 이슬람 종교를 믿는 신자를 의미한다.


넷째, 무슬림에 대한 선교와 개종 가능성


칼빈은 이슬람을 교리적인 차원에서 예리하게 비판했지만, 무슬림들이 도덕적으로 질이 낮다고 보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 이슬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 소재는 교리였지, 윤리적·도덕적 행위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슬람을 추종하는 무슬림들은 저주받아 마땅한 버림받은 자들인가”하는 선교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칼빈은 무슬림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칼빈은 무슬림이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복음화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많은 무슬림들을 신·구약성경의 참되신 삼위 하나님께로 나아오도록 정확히 예정하셨다고 믿었다. 칼빈은 신명기 23장 7절에 관한 그의 설교에서 “개종이 가능하고 세례받는 것이 가능한 무슬림들은, 이집트인보다 더 나았고 지금도 더 낫다(창 41:1~출 1:7).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잊지 않으실 것이다”라고 했다. 또한 “하나님께서 많은 무슬림들을 성경의 삼위 하나님께로 돌이키실 것을 예정하셨다는 것”이 이사야 19장 21-25절의 설교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집트의 무슬림들과 이스라엘의 유대주의자들과 이라크와 이란의 이슬람 민족들이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게 되고 그의 교회에 가담하게 될 것을 생각하면서 “영광스러운 날이 오고 있도다!”라고 했다. 칼빈은 무슬림들이 참된 진리가 있는 교회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3. 이슬람에 대한 칼빈의 선교적 적용


칼빈은 교리적, 신학적 잘못을 단호히 배격하고 비판하면서도 이슬람 역시 구원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칼빈은 무슬림이 증오의 대상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어야 하며, 참된 진리의 말씀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는 나눔과 섬김으로서 선교의 대상으로 인식하였다. 칼빈은 무슬림들이 기독교인에 의하여 복음화 되어질 수 있고 또 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을 뿐 아니라, 무슬림들이 삼위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러한 칼빈과 종교개혁자들의 견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역사 속에 나타난 기독교는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였다. 따라서 성경이 아랍어로 번역된 것은 이슬람이 시작된 지 227년이 지난 837년이었고, 정작 아랍어 성경이 출판된 것은 1516년이다. 이러한 무관심으로 인하여 전 세계 무슬림들의 80%는 복음을 들어보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는 한국 땅에서도 소리없이 정착하여 살아가고 있는 약 25만 명의 무슬림에 대하여 복음을 전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기독신문  ekd@kidok.com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103300

 

출처: 영적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뉴욕교계 연합기관이 인터콥(최바울)과 관계해서는 안 된다는 사례 남겨

1. 

 

뉴욕교협 산하 이단사이비대책협의회(회장 이종명 목사)와 뉴욕교협 신학윤리특별분과(위원장 유상열 목사)는 6월 29일(목) 오후 2시 뉴욕교협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뉴욕목사회(회장 김상태 목사)가 주관하여 7월 3일 뉴욕에서 인터콥 최바울 선교사를 강사로 개최하려는 세미나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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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이종명 목사와 유상열 목사  

 

이에 앞서 뉴욕목사회는 29일(목) 오전 긴급 임원회의를 열고 해당 세미나 주관을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회원들에게 보낸 취소 공문을 통해 “세미나는 교협의 할렐루야 전도집회를 코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교계가 양분되는 현상과 연합의 가치를 깨뜨리는 우려가 있어, 임원들의 결정에 의해 목사회가 주관하는 일이 취소되었음을 알립니다”라고 밝혔다. 인터콥 측은 아멘넷에 한인들이 아니라 다민족을 대상으로 세미나를 연다고 알려왔다.

 

이단사이비대책협의회가 발표한 성명서에는 “뉴욕목사회 회장 김상태 목사는 즉시 세미나를 취소하고, 뉴욕교계에 정중히 사과하기를 요구한다. 만약 이에 불응하고 세미나를 강행할시 강력히 대응할 것을 경고한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는데, 목사회 측이 세미나를 취소함으로 “사과 요구”는 지속하고 이와 함께 “이와 유사한 일이 앞으로 있을시 강력히 대응할 것을 경고한다”라고 성명서 내용이 바뀌었다.

 

2.

 

뉴욕교협 산하 이단사이비대책협의회가 발표한 내용을 보면, 인터콥(최바울)은 한국의 주요교단(합동, 통합, 고신, 합신)에서 극단적 세대주의 종말론, 불건전단체, 매우 심각한 이단성 등의 이유로 교류단절, 예의주시, 참여자제 혹은 참여금지 등의 판정을 받았다.

 

인터콥(최바울)의 특이점은 다른 단체와 달리 미주에서도 관련 판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미주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교단인 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와 남침례교 한인총회에서 개혁주의 신앙에 위배되는 불건전한 단체와 자의적 성경해석이라는 이유로 참여 및 교류금지 판정을 받았다. 미주합동은 극단적 세대주의, 베뢰아 사상, 신사도운동 등을 이유로 아예 이단으로 판정을 했다.

 

인터콥(최바울)에 대한 관련 판정은 다른 이단관련 판정과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많은 교단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며 △미주에 있는 한인교단에서도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며 △이단 등으로 판정된 다른 개인이나 단체보다 상대적으로 약한 교류금지 등이 대부분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3.

 

뉴욕교협 산하 이단사이비대책협의회가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은 신학적 논쟁이라기 보다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다. 뉴욕목사회 뿐만 아니라 뉴욕교협에는 인터콥(최바울)을 경계하는 판정을 내린 교단소속 회원들이 많이 있는데 교계의 연합기관이며 공적기관인 뉴욕목사회가 인터콥(최바울)을 강사로 하는 세미나를 주관하는 것은 뉴욕교계를 분열시키는 것이고 영적인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으로 보았다.

 

뿐만 아니라 뉴욕목사회 회장 김상태 목사는 회장에 당선되기 전 이미 인터콥(최바울)과의 관계가 교계에서 문제시 되었지만 인터콥(최바울)과의 관계단절 의사를 분명히 밝혀 더 이상 시비없이 회장이 되었는데, 회장이 되었다고 다시 인터콥(최바울)과의 관계를 진행하는 것은 신학의 문제 이전에 목회자의 신뢰의 문제이라고 지적했다.

 

4.

 

인터콥(최바울)은 한국과 미주에서 지속적인 사업과 집회를 열어왔다. 뉴욕교계에서 인터콥 집회가 개교회 차원에서 열리면 교계의 평화와 화합을 위해 사실상 관여하지 않았지만, 뉴욕교계의 연합단체이며 공적단체가 인터콥(최바울)에 관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이번 사례의 핵심교훈이다.

 

5.

 

지난 뉴욕목사회 총회에서 선거관리위원장은 “뉴욕목사회는 인터콥에 대해 아무런 판정을 내린 적이 없기에 인터콥을 지지해도 후보자격에는 문제가 없다”는 의미의 발언을 했다. 맞고도 틀린 이야기이다. 목사회는 심지어 신천지나 통일교에 대해서도 아무런 판정을 내린 적이 없다. 이것이 뉴욕교계 단체의 이단대처 수준이다. 누가 회장이 되느냐에 따라 매번 입장이 바뀐다.

 

사실상 뉴욕교계에서 권위를 가지고 이단관련 판정을 하고 책임을 진 경우는 드물다. 차선은 한국과 미주의 여러 교단의 이단관련 판정을 참고해야 한다. 한 교단에서라도 이단 관련 판정을 받으면 조심해야 하고, 더욱이 많은 교단에서 문제시 삼는 개인이나 단체는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참고로 아멘넷 댓글관리 지침에는 2개 이상 한국과 미주 교단에서 이단이나 교류금지 등 판정을 당한 개인이나 단체를 옹호하는 글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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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멘넷 뉴스(USAamen.net)

세 종류의 그리스도인/ 아더 핑크

일반적으로 말해 소위 “그리스도”이라고 불리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설교자에 의한 그리스도인, 자아에 의한 그리스도인, 하나님에 의한 그리스도인이다.

‘설교자에 의한 그리스도인’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유아세례를 받고 교회의 정회원이 되었을 뿐 아니라(특수한 직임은 맡지 않았을지라도), 책임 연령에 이르면 전도자에게 ‘고백할 것’을 강요받는다. 이러한 강요받는 형태와 정도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감정에 호소하는 방법에서 대중최면에 이르기까지 여러 방법을 통하여 ‘앞으로 나오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 수천 수만명의 사람들이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하나님 앞에서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도 없이 ‘당당한 일을 하도록’,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모이도록‘, ’하나님의 백성들과 연합하여 악에 대항하여 싸우는 십자가의 군병이 되도록‘ 권유받는다. 이러한 신자들은 버섯과 같아서 밤사이에 돋아 올라 잠시 동안 지탱하나 뿌리가 없어 견디지 못한다.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소위 ’인격적인 사역‘이란 미명하에 많은 사람들이 강요받는다. 이는 마치 떠돌이 외판원들이 세일하는 방식으로 실적을 올리려는 수작과 유사하다.

‘자아에 의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자들인가?
그들은 방금 앞서 말했던 사실들로 경고 받은 자들이며, 종교적인 협잡꾼들에게 농락당할까봐 두려워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협잡꾼들이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과 영교함으로 ‘만사형통’하다고 농간부리는 데 속지 않으려고 주의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만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과 그리스도께서 전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복음을 믿는 것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필요치 않다는 사실을 받아 들인다.
그들은 요한복음 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과 로마서 10:16(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라는 말씀을 단지 지적으로 승인하거나 받아들인다. 요한복은 2:23-24의 말씀은 별로 중시하지 않는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많은 사람이 그를 믿었으나 저희가 바리새인을 인하여 회당에서 쫓겨날까봐 그를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께 칭찬 듣는 것보다 사람에게 칭찬듣기를 더 좋아함이라”. 여기에서 그들의 믿음이 문제가 된다. 자연인도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들은 나름대로 만사형통하게 나아갈 수가 있으며, 기뻐할 수가 있다.
그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흔들 수 없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놀라운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이 지적으로 승인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러한 자들은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전적으로 자기 의지에 의해 좌우된다고 생각하는 자들과 다를 바 없다.
타락한 인생의 운명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처분에 달려 있다는 사상은 이러한 교만한 자들에게는 정말로 관심이 없다.
그리스도께 나아온다는 자체가 영적인 활동이지 자연적인 활동은 아니다.
중생하지 못한자는 죄와 허물 가운데 완전히 죽어 있기 때문에 어떤 영적 인 활동도 불가능하다.
그리스도께 나아온다는 것은 주님을 절감하는 영혼의 사역이며, 잃어 버린 바 된 죄인을 영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게 된 결과이며, 그를 간절히 사모하는 애정의 발로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과 원수’된 자연인이 성자 하나님을 사모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에 의한 그리스도인’은 은혜의 결과이며, 하나님의 지으심으로 말미암는다(엡 2:10).
그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거듭남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통하게 되고 새로운 지각과 활동을 하게 된다.
옛 성품으로써 신령한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에 없는 무언가 새로운 것으로써 교통하는 것이다.
‘무언가 새로운 것’은 ‘영으로 난 자는 영이니’(요 3:6)라고 말한 분과 동일한 성품에 참예한다. 그의 거룩한 성품에 참예한다.
그것은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며,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에 전가시킨 은혜의 원리이며, 그를 기쁘시도록 열매 맺게 하는 성향이다.
중생은 어떤 지루한 과정이 아니라 즉각적이다.
거기에는 다른 아무것도 추가 될 수 없고 제해버릴 수도 없다(전 3:14). 그것은 하나님의 법정적인 소산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매 그대로 되었다.
그것은 즉각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중생은 성직자의 마술적인 사역의 결과이거나 개인적인 체험의 결과가 아니다.
중생받는 자는 순전히 피동적이며 무의식중에 그것을 받는다.
성육신 하신 진리는 이렇게 말한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3).
혈통에 대해서 - 유전은 이 일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교도들의 조상들이 수세기 동안 우상을 숭배하였지만 그 후손들을 중생시켰기 때문이다.
육정에 대해서 - 하나님의 살리시는 역사 이전에 인간의 자의지는 철저히 하나님과 반대되기 때문이다.
사람의 뜻에 대해서 - 설교자는 자신을 중생시키지 못할뿐더러 남도 중생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생의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전권적인 역사로써만 가능하다.

또 다시 그리스도께서는 선포하신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그 결과는 명백함)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이것의 원인과 작용은 인간으로서는 깨달을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신비한 역사임)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이러한 하나님의 선포는 마치 빛이 어둠과 구별되듯이 모든 종교적인 가르침과는 완전히 판이하다.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타종교 아닌 기독교 이단’ 경계하되 긍휼 대상으로 이해
불링거 “거짓 선지자 무함마드는 교활하고 위선적 …
꾸란은 고대 교회 모든 이단의 거짓을 모은 것에 불과” 질타



▲ 유해석 선교사(총회이슬람대책위원회 전문위원)

종교개혁은 유럽사회가 로마 가톨릭교회 중심의 중세적 질서체제에서 근대적 민족국가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한편 이 시기는 오스만 제국의 유럽을 향한 군사적 팽창과 영토 확장이 최고조로 달했던 순간이었다. 종교개혁의 여파로 구교와 신교의 갈등이 고조되던 16~17세기는 오스만 제국에게 유럽으로 영토확장을 위한 다시없는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다. 종교개혁 직후인 1520년 오스만 군대는 헝가리를 침공하여 중부유럽을 장악했고, 여세를 몰아서 1529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인 오스트리아 빈까지 포위했다. 오스만 군대의 빈 공략은 유럽 전체가 공포에 휩싸일 정도로 가공할만한 사건이었다. 또한 이 무렵 이슬람에 대한 관심이 그 어떤 시기보다 고조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심지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기독교인들이 줄을 잇는 것을 보면서 이슬람의 유럽 점령이 가시화 된 것뿐만 아니라 이슬람화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종교개혁자들 중에서 이슬람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은 루터, 칼빈, 쯔빙글리, 불링거와 같은 신학자들이 있었지만 가장 이슬람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이슬람 책을 저술하였던 신학자는 불링거(Johann Heinrich Bullinger, 1504~1575)였다. 그는 스위스 취리히의 종교개혁자로서 40년 이상 교회를 효과적으로 이끈 탁월한 지도자일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혼란했던 시기에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신학자요, 설교자요, 상담가였다.



1. 이슬람에 대한 불링거의 이해


첫째, 불링거의 저서 <터키>(Der Tuergg)를 통해 본 이슬람


불링거는 1567년에 <터키>(Der Tuergg)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여기에서 터키란 당시 오스만 터키라는 의미와 함께 그들의 종교인 이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은 내용상 ‘이슬람’이라고 써도 무방하다. 이 책은 이슬람에 관한 불링거의 가장 중요한 책이다. 그는 이 책의 표지에 요한계시록 9장 16절과 17절을 실었다. “마병대의 수는 이만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이 같은 환상 가운데 그 말들과 그 위에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주빛과 유황빛 호심경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 그는 그 시대에 터키인들이 유럽으로 물밀 듯이 쇄도해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루터처럼 어떤 종말적인 분위기를 느꼈음에 틀림없다. 책의 첫 장의 제목이 ‘이슬람의 신앙과 거짓 선지자 무함마드에 대하여’이다. 그 책의 첫 문장을 “터키인들의 신앙은 무함마드의 신앙이다”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바로 이어진 문장에서 그는 무함마드를 교활하고(listig), 비열하고(dueckisch), 위선적(glychssnerisch)이라고 특징지었다. 이 책의 둘째 장의 제목은 ‘기독교 신앙만이 참된 신앙이며 그렇게 남아 있다’인데, 첫 문장이 “한 마디로 하나의 오래되고 참되고 거룩하고 의심할 여지없는 신앙이 세상의 시작부터 있었는데”라고 하여 기독교 신앙의 진리성을 천명하였다. 이 책의 내용은 무슬림의 신앙과 삶에 대한 전형적인 비판이다. 특별히 불링거는 디모데전서 4장과 골로새서 2장을 인용하면서 무함마드와 그와 같은 교훈들을 심지어 ‘사탄의 교훈’(tuefeles leeren)이라고까지 불렀다.


둘째, 이슬람은 기독교 이단


불링거는 이슬람을 타종교가 아닌 기독교 이단으로 보았다. 그가 1566년에 펴낸 것으로 여겨지는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에서 삼위 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고백하면서 이슬람의 가르침을 ‘잘못된 가르침’(Irrlehren)이라고 하였으며 이슬람교도들을 가리켜 이단자라고 칭하였다.


뿐만 아니라 꾸란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사역, 성육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 삼위일체와 같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특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부정하고 유일한 중보자로서의 존재도 부정하는 이단이라고 생각했다. 이슬람의 이단성을 처음 연구한 사람은 현재의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에서 살았던 비잔틴 신학자 요한네스(Johannes)였다. 그는 무함마드가 죽은 지 약 20년 후에 태어났다. 만수르(Mansour)의 명문가 출신인 그의 아버지는 이슬람군주 무아위야 1세(Muawiyah1, 602~680) 아래에서 재무부장관을 지냈다. 무아위야 1세의 뒤를 이은 왕이 기독교에 적대적인 정책을 펴자 요한네스는 예루살렘 근처의 마르사바(Mar Saba)수도원에 은신하여 이슬람을 연구하였다. 그는 자신의 신학적 저술인 <지식의 근원> ‘제2부 이단에 관하여’ 에서 이슬람을 이단으로 간주하였다. 그 이유는 “무함마드가 이단이였던 아리우스파 수도사로부터 정보를 받아서 이슬람이 시작되었으며, 꾸란에서 예수님은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며, 영으로 언급되지만.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기 때문에 이단이다”라고 하였다. 불링거는 요한네스의 입장을 따르고 있다.



셋째, 불링거의 꾸란에 대한 이해


불링거에게 꾸란은 고대 교회의 모든 이단들의 거짓을 모은 것에 불과하다. 꾸란의 기원을 하나님이 아니라 무함마드에게서 시작된 것으로 본다. 더불어 꾸란에 담겨있는 이단적인 요소들을 지적하였다. 무함마드가 신에게 받았다고 하는 계시와 비전(Vision) 역시 지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꾸란은 이단 사제의 도움과 완고한 유대인과 잘못된 기독교인의 조언이 섞였으며 아리안(Arians), 마케도니안(Macedonians), 네스토리안(Nestorians)과 같은 이단들에 의하여 부패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꾸란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의 유일한 중보자 되심도 부인한다. 이같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부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기독교 신앙의 주된 교리의 부인한다. 불링거는 금식, 기도, 구제, 알라와 이슬람을 위하여 싸우다 죽음으로서 모든 죄에서 해방된다는 교리를 만든 것에 대한 책임을 무함마드에게 묻는다. 또한 영생, 예배, 결혼 등에 대한 꾸란의 이해는 근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에 반대되는 것으로 보았다.


넷째, 이슬람 지배 아래서 기독교인의 태도


불링거는 1551년 헝가리의 이슬람 정권의 지배 아래에 있었던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헝가리 기독교 지도자들의 편지에 대하여 1551년 6월에 선명하고 원론적인 답신을 보냈다. 성경의 신자들이 사도시대에 우상을 숭배하는 로마제국 아래서도 살았으며,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앗수르의 통치 아래서 바벨론 포로가 된 상태에서도 살았다. 이러한 신뢰 속에서 불링거는 헝가리 신자들에게 예레미야의 가르침을 근거로(렘 29:7) 평안 중에 삶이 유지될 수 있도록 무슬림들을 위해서 기도할 것을 부탁하고 있다.


특별히 불링거는 헝가리와 동유럽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지배가 우리 모두의 죄악과 관련된 것임을 밝혔다. “우리의 죄악이 (하나님의) 회초리를 벌었다.” 불링거는 헝가리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이슬람 종교로 인한 고통을 탓하기 전에 그들 자신들을 먼저 살필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불링거는 헝가리 교인들에게 핍박이 올지라도 하나님이 금지하신 이슬람의 신앙과 의식에 참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불링거 역시 루터와 마찬가지로 이슬람의 침략을 하나님의 징계로 보았고, 이와 관련하여 헝가리 기독교인의 회개와 경건회복이 요청된다는 것을 편지에 언급하였다.


2. 불링거가 주는 교훈


이슬람에 대한 불링거의 견해를 다루면서 우리에게 주는 두 가지의 교훈이 있다. 하나는 분별의 척도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슬람은 기독교 입장에서 보았을 때, 많은 부분이 다르다. 무엇보다도 우리 신앙의 근간이 되는 삼위일체에 대하여 이슬람에서 유일신에 대한 고백은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 대한 고백은 없다. 또한 우리 신앙에 있어서 핵심적인 내용은 대속의 은혜인데, 예수의 주 되심을 부인하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대속이 없고 공덕에 의한 구원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슬람이 기독교의 구원 진리를 심각하게 왜곡한 점에 있어서는 당연히 경계의 대상이다. 우리 시대에 그들이 아무리 미사여구의 평화의 말로 접근해 올지라도 그들의 정체를 바로 알고 경계해야 한다. 또 하나는 이슬람에 대하여 경계할 것은 경계하되 그들 역시 선교의 대상으로 여기며 긍휼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 불링거는 하나님의 백성 밖에 있는 자들의 믿음과 삶에 대하여 보다 긍정적인 암시를 제공한다 즉 무슬림 또한 전도와 선교의 대상이란 점에 있어서 긍휼의 여지는 있다. 특히 이 점은 불링거에게 있어서 돋보이는 점이다.



3. 이슬람에 대한 불링거의 적용


종교개혁 당시와 같이 다시 한번 21세기 거대한 종교로 우뚝 선 이슬람은 국제사회를 공포와 위협으로 압박하며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다. 한국 또한 박근혜 전 대통령 때 구체화된 친 이슬람정책으로 인하여 작년 한 해 동안 이슬람 관광객 1백만 명이 우리나라를 다녀갔으며 할랄 시장의 확대 등 정부는 이슬람 인구를 맞이할 준비로 분주한 듯하다. 이슬람은 더 이상 중동의 종교가 아니다. 전 세계 이슬람 인구의 3분의 2가 아시아에 살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이슬람 인구가 많은 나라는 국민의 80%가 무슬림인 인도네시아(약 1억9000만) 두 번째, 인구의 96%가 무슬림인 파키스탄(약 1억7000만) 그리고 인구의 89%가 무슬림인 방글라데시(약 1억5000만) 등이다. 이 나라 이외에도 이슬람 국가인 우즈베키스탄과 키르키스탄 등 5개국이 한국으로 들어오고 있는 인력 송출국 속에 포함되어 우리나라에 정착하고 있다. 또한 한국인 이슬람 인구도 성장하고 있다. 1956년 208명이었던 한국 이슬람인구는 1970년 3700명, 2009년에는 9만1000명으로 성장하였다.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는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 발전되어 왔다”고 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이슬람의 도전 앞에 이슬람을 철저히 연구하였고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에 따라서 더 이상 이슬람의 문제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밀려오는 이슬람의 도전 앞에 한국교회는 응전을 준비해야 한다. 이슬람이 세상을 뒤흔든다고 할지라도 결국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수단에 불과하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이해 위에서 세상을 보고, 교회의 역할을 권고했다. 지금 세대에도 동일한 눈을 가진 기독교인들과 목회자들에 의하여 교회가 전진되기를 바란다. 한국교회는 끊임없이 성장하는 이슬람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이슬람을 올바로 이해해야 하며, 이슬람을 무조건 적대시할 것이 아니라, 루터나 칼빈, 불링거처럼 객관적이고도 정확한 이해를 통해서 무슬림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전도해야 하는 대상으로 이해해야 한다.


기독신문  ekd@kidok.com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103418


출처: 영적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사막은 은혜의 땅 38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정말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천사의 말을 따라 산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까. 

지금까지 쌓아온 재력과 경력, 사회적인 지위, 완전히 정착된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과연 산 속으로 홀연히 떠날 수 있었을까.

예수님께서는 이런 상황에서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명령하신다.

두 천사의 손에 억지로 이끌려 성 밖으로 나온 롯의 가족은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천사의 명령을 받고 소알성을 향해 산을 올랐다. 

여호와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성에 유황과 불을 비같이 퍼부으셨다. 

생명이 있는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유황불에 타버렸다. 

롯의 아내는 두고 온 소돔성에 대한 미련과 궁금함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천사가 절대로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건만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 소돔성을 바라보았고 그 순간 소금기둥으로 변했다.

축복과 재앙은 어찌 보면 종이 한 장 차이와 같다.

롯의 가족은 아브라함의 간구로 인해 소돔성에서 유황불에 의해 멸망하는 것을 면하는 특혜를 부여받았지만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는 운명이 되었다. 

그리고 롯의 두 딸은 아버지 롯과 근친상간의 죄를 범하며 자식을 낳아서 후세에 모압과 암몬 족속의 근간이 되었다. 

모압과 암몬 족속은 그 이후 이스라엘과 대립하고 우상을 숭배하여 버림받은 이방 족속의 대명사처럼 쓰이게 되었다.

피닉스로 이주한 후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족에게 넘치는 은혜를 부어주셨다. 

우선 물질적인 부를 넘치게 허락하셨다. 

먹을 것이 없이 근근이 생활하던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도무지 상상도 못했던 부를 허락해주신 것이다. 

한동안 내가 소유하게 된 부를 가지고 그저 평안하게 남은 여생을 살아야겠다는 그런 안락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피닉스로 이주해서 영적으로 완전히 침체된 시기를 지나면서 가졌던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물질을 허락해 주셨는지 그 이유를 확실 하게 깨닫게 됐다. 

물질은 나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여질 때 비로소 물질의 가치가 드러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교도소 선교의 비전을 위해 물질을 사용하기 원한다. 

재소자들의 가족이 사회로부터 소외되는 일이 없어지고, 재소자들도 출소 후에 가정과 사회로 돌아가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더욱 구체적으로 깨닫게 되길 원한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모든 인자함을 한순간에 잃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뒤를 돌아보지 않으리라고. 

뒤에 두고 온 쓰레기 같았던 일들, 즉 명예욕, 교단 정치, 세상 향락, 도박과 같 은 일들에 한 치의 미련도 두지 않으리라. 

뒤를 돌아보자 않는 한 주의 인자하심은 영원할 것이다.

피닉스로 이주한 뒤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부부 사이를 완전히 회복시켜 주셨다. 

지난 18년은 우리 부부에게 인고의 시간이었다. 

길고 긴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서로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주면서 정죄하던 고난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마음들이 모두 사라졌다. 

그 어느 때보다 하나님이 허락해주신 내 아내를 사랑하게 되었다. 

마음 가운데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온전히 세워주실 것이라는 오기에 가까운 믿음이 있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무려 18년 만에 나의 이런 마음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다. 

부부관계에서는 오래 참고 인내하는 것이 어쩌면 갈등의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오늘날 쉽게 가정을 깨고 있는 믿음의 형제, 자매들에게 기다림의 미학을 전하고 싶다. 

하나님을 믿고 기다릴 때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당신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모 든 것을 회복시켜 주신다는 믿음.

만약 그 믿음만 붙들고 끝까지 기다릴 수 있다면 믿는 자들의 가정이 그렇게 쉽게 갈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도전을 던져주고 싶다.

이제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생명을 허락하신 의미를 찾게 되었다. 

그것은 내 가정이 회복되고 물질적인 복을 받게 된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큰 복이다. 

삶의 의미를 찾게 된 것은 이제 남은 여생을 살 수 있는 동기를 부여받은 셈이다.

눈에 보이는 것들에 음을 빼앗기며 살았던 시간은 지난 시간으로 충분하다. 

앞으로는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영원한 가치를 따라서 살리라. 

삶은 의미가 있다. 

인생은 가치가 있다. 

오직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거룩하신 뜻을 좇아 살려고 다짐할 때 이 모든 의미와 가치가 부여되는 것이다. 

마음 속에 또 다른 갈등과 번민의 순간이 다가올 때 나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리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소금덩이로 바꾸는 그런 미련함을 다시는 범하지 않으리라'하고 스스로 다짐해 본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보니엠’이라는 흑인 보컬그룹이 있었습니다. 70년대 후반이니까 40여년 거의 된 것 같은데 지금도 기억나는 히트곡은 ‘바벨론 강가(By the River of Babylon)'이라는 노래입니다. 그런데 그 때는 그 의미를 알지 못 했습니다. 그냥 특색 있는 팝송으로만 생각했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By the rivers of Babylon, there we sat down. Yeah, we wept when we remember Zion." “바벨론 강가 거기에 우리 앉아, 아아, 우리는 슬피 울었네, 우리가 시온을 기억할 때.....”, 바로 시편 137편 앞부분이었습니다. 그 노래 가사에는 시편 137편처럼 “에돔 자손을 치소서, 멸망할 바벨론아, 네 어린 것들을 반석에 메어치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하는 바벨론과 에돔을 향한 원망과 복수와 저주의 소원은 없습니다. 그러나 시편 137편을 생각하면서 다시 들으니 단조롭고 경쾌하게 흐르는 음률과 흑인 특유의 음색 가운데 예루살렘을 훼파당하고 수천 리 머나먼 바벨론에 끌려와 원수들에게 종살이하며 그들을 위하여 비파와 수금을 타며 노래할 것을 강요당하는 비참한 상황에서 ’내가 어찌 원수들을 즐겁게 하려고 주의 노래를 부른단 말인가. 차라리 내 혀가 입천장에 붙을지어다,‘ 강가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어놓고 시온성을 그리워하며 하나님 앞에서 애곡하던 유대인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요 한 때는 가나안을 정복하고 솔로몬의 영광을 구가했던 이스라엘은 타락하고 분열하면서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차례로 멸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선지자를 보내 그들이 우상숭배를 떠나 하나님께 돌아오라 하셨지만, 한 때는 히스가야와 요시아를 통하여 신앙의 회복이 잠시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그들은 끝내 멸망의 길로 달려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흩어버렸고 바벨론은 시드기야 왕의 아들들을 쳐 죽이고 그 눈을 뽑고 사슬에 묶어 바벨론으로 끌고 가 거기에서 죽게 하였고 귀인들은 죽여 버리고 빈천한 자들만 포도원 농사를 위하여 남겨 두었으며 예루살렘을 모조리 파괴하고 성전의 모든 금, 은, 놋을 모두 뜯어서 바벨론으로 가져갑니다. 이 때 바벨론으로 잡혀간 유대인의 숫자는 겨우 4,600 명에 불과했다고 예레미야 52장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예루살렘은 황폐한 채 버려져 있었고 요단강 동편에 살던 에돔 족속이 슬금슬금 들어와 유대땅을 차지하고(이 족속에게서 나중 헤롯왕이 나옵니다), 살아남은 유대인들 일부는 애굽으로 내려가 목숨을 부지하게 됩니다(나중 이들에 의하여 헬라어성경 칠십인역이 번역됩니다).

열왕기와 역대기도 이스라엘과 유대의 멸망, 그리고 예루살렘의 처참한 파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예레미야서도 그 말미에 그 참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애가(哀歌)란 애통하는 노래란 뜻입니다, 1장의 1절부터 22절은 히브리어 알파벳 머리글자로 시작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며 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때는 아름답고 영화롭던 예루살렘이 망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죽임당하고, 잡혀가고, 유린당하고, 손을 벌려도 도와주는 이 없고, 목 놓아 울어도 들어주고 위로해 주는 이 없고, 보물을 먹을 것으로 바꾸고도 굶주리는 비참한 기아, 모든 것을 빼앗기고 아무 힘도 없고 도움도 없는 처참한 상황을 애통함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하소합니다. 백성들이 패역함으로 하나님께서 이런 징벌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비통하게 우리를 돌아보며 말합니다. “지나가는 자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관계가 없다니요? 우리에게도 관계가 있습니다. 그들의 패역과 멸망과 고통 가운데 우리 인간 모두의 모습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끝없이 은혜를 베푸시지만 패역한 인간들은 끝끝내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하고 멸망길로 달려갑니다. 그러나 오랜 침묵과 어두움을 거쳐 하나님은 끝끝내 구원사역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마침내 독생자를 내어주셨습니다. 한 때 기독교의 땅이었던 유럽, 로마 가톨릭의 암흑의 중세시대를 거치면서. 한 때는 종교개혁을 통하여 신앙을 회복하기도 하였지만. 다시 신대륙 미국에서 신앙의 불길과 선교의 횃불이 타오르기도 했지만, 그리고 그 선교의 불길이 한국과 아시아로 옮겨가기도 했고 다시 아프리카로 옮겨가기도 했지만, 인류역사 전체, 지구촌 전체를 놓고 보면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하고 우상을 따라 멸망길로 달려가던 이스라엘과 유다와 오늘날 시대는 크게 다르지 않다 싶습니다.

도대체 어째서 인간은 그럴까요? 가인으로부터 시작하여 노아시대의 패역과 이스라엘의 멸망, 그리고 오늘날 인류의 모습은 어째서 그렇게도 닮아 있으며 그렇게도 변함이 없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싫어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는 인간들은 그러다가 바벨론에 사로잡혀간 다음에야 비로소 강가에 수금을 걸어놓고 통곡하게 되는 할 수 없는 존재들일까요? 심판의 그 날에는 울어도 소용없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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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은 은혜의 땅 37

그래서 오랜 기간 동안 사막을 생명이 없는 광야로만 생각하고 따분하고 무의미 한, 그리고 이기적인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변화된 삶을 살기로 결단했다. 무익한 종이었던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나 그의 가르침으로 유익한 종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나는 이 시대의 오네시모가 되기 원한다.

 

"자기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히 13:3).

 

오네시모의 심정을 품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히브리서의 말씀을 주셨다. 그 말씀을 통해 교도소 사역에 임하는 나의 자세를 돌아보게 하셨다. 재소자들을 우리와 다르게 생각하면 안 된다. 재소자들도 따지고 보면 모두가 사회적 환경, 인류의 원죄로 인한 희생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갇힌 자들을 대할 때 '나 스스로도 갇힌 자라는 생각으로 그들을 생각하라'는 히브리서 기자의 말씀은 교도소 사역에 임하는 가장 마땅한 사역 자세라고 믿는다. 미국의 크리스천들은 그래도 긍흘과 자비 사역, 교도소 사역 등에 더욱 체계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편이다. 크고 작은 도시들마다 교회들에 의해 노숙자들을 위한 급식소가 운영되고 있고, Prison Fellowship Ministry와 같은 조직적인 교도소 선교 단체들이 오래 전부터 크리스천의 사랑과 은혜를 나누는 기관으로 자리잡고 있다. 한국에서도 많은 기독교 단체와 교회에서 갇힌 자들과 소외된 자들을 대상으로 한 구제 사역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구제 사역을 통한 열매들을 많이 보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사회적인 인식면에서도 한국은 소외된 계층에 대한 배려가 상당히 낮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재소자들의 경우 그 가족이 또한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특히 한국과 같은 문화권에서는 재소자들의 자녀들까지 동일하게 취급되어 학교나 이웃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들은 소리 없는 억눌림의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효과적인 교도소 사역은 재소자와 재소자 가족을 동시에 포용할 수 있는 사역이 되어야 한다. 가족이 있는 재소자가 복역 기간을 마치고 다시 사회에 돌아와 재적응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대개 가족들과의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통계에 의하면 재소자가 교도소에 있는 동안 가족들이 정기적으로 방문했던 재소자들은 대부분 형기를 마치고 사회로 돌아가 다시 재범을 일으키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러나 가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면회를 오는 사람이 없어서 가족들과 완전히 단절되었던 재소자들은 70% 이상이 다시 범죄를 저지르고 교도소로 돌아온다고 한다. 그래서 교도소 사역의 핵심은 가족 관계의 회복이라는 또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다. 가족 관계가 정상적으로 회복될 때 교도소에 들어갔던 사람들은 같은 범죄를 또 범하는 우를 반복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교도소 선교단체 중에는 성탄절에 재소자들의 자녀에게 장난감을 선물해 주는 Angel Tree라는 프로그램을 오래 전부터 운영해서 교도소에 갇혀 있는 재소자와 자녀의 관계를 회복시키는데 큰 효과를 거두고 있다. 작은 선물이지만 성탄절과 같은 명절에 교도소 안에 있는 부모의 이름으로 선물을 받게 되는 아이들은 이 작은 선물로 큰 위로를 받고 부모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된다는 것이다. 재소자들의 자녀들은 알게 모르게 부모들에게 버림받았다는 느낌과 어려움에 처한 가족들의 무관심으로 인해 잘못된 길로 빠지기 쉽다. 그렇기 때 문에 이런 작은 선물을 통해서라도 아이의 마음 깊은 곳에 새겨져 있는 상처들을 감싸 주고 치료해 주는 사랑의 정성이 필 요한 것이다.

 

목적이 없이 사는 삶은 공허한 삶, 의미 없는 삶이 될 수밖에 없다. 생명도 그 자체는 의미가 없다. 부와 재산도 결국은 헛것이다. 가진 것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자신의 재산이 컴퓨터 재벌 빌 게이츠의 재산이나 또는 성경에 기록된 솔로몬 왕의 부를 능가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그러나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부를 소유했던 솔로몬 왕도 삶의 종말에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라는 절규에 가까운 메시지를 후세에 남겼다.

 

"롯의 처를 생각하라."

 

예수님의 이 메시지는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신앙인들에게 큰 도전을 던져 준다. 롯의 가족이 살고 있던 곳은 소돔과 고모라 땅이었다. 그 당시 가장 문화가 발전되고 많은 사람들이 모이던 곳이었다. 사람 들이 많이 모이다 보니 조금만 장사 수단이 좋은 사람이면 단기간에 큰 재산을 모을 수 있는 곳이었고, 재산을 쌓은 사람들 은 그 재산으로 온갖 향락을 누렸던 곳이 었다. 소돔과 고모라는 컴퓨터와 비싼 자동차들만 없을 뿐이지, 아마도 오늘날 향락과 섹스 문화에 흥청거리는 헐리우드 거리와 흡사한 분위기가 아니었을까. 롯은 목축업자였다. 아브라함과 분가하면서 많은 가축들을 받아서 소와 염소, 양들을 그 지역에서 가장 많이 가지고 있었던 소돔 땅의 유지였다. 좋은 고기를 사먹기 위해 비싼 돈을 서슴지 않고 쓰는 소돔 사람들로 인해 롯은 단기간 안에 큰돈을 만지게 되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는 이제 롯의 가족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정치판에 관심이 많았던 롯은 슬슬 그 지역의 유지로서 법관으로, 정치가로 진출을 모색하고 있던 중이었다. 롯의 장성한 두 딸은 이미 약혼을 하고 결혼식을 앞두고 있었으며 누가 보더라도 롯의 가족은 아쉬운 것이 하나도 없는 가장 행복한 삶을 누리며 살고 있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알리기 위해 두 천사가 롯의 집을 방문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결혼 잔치를 앞두고 집안이 축제 분위기에 들떠 있을 때, 재력가로 성장한 롯이 법관으로 정치 입문을 생각하고 있을 때, 소돔성 내에서 롯의 가정이 가장 행복한 가정으로 알려지고 있을 때, 바로 그때 두 천사가 롯을 찾아왔다. 그리고 하룻밤 사이에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어버리고 소돔성을 떠나라는 전갈을 전했던 것이다. 롯과 그 아내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들은 천사의 말을 듣 고 떠나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무척 망설였을 것이다. 결코 쉽게 발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더하심이었더라"(창 19:16).

 

롯은 스스로 소돔 땅을 떠날 수 없었다. 그래서 두 천사가 롯 가족들의 손을 잡아끌어서 강제로 성 밖에까지 나가게 했다. 그것은 여호와의 인자하심 덕분이었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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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하와의 타락 <61>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61: “우리의 시조들은 사탄의 간계와 시험에 유혹을 받아 금지된 열매를 먹음으로 죄를 범하였습니다. 이들이 범한 그 죄는 하나님께서 그것으로 자신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하실 목적을 가지시고 그의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에 따라 기쁘게 허용하신 것입니다.”

피조물은 자신을 만드신 창조주의 의도와 목적에 따라 살아야 하는 존재들

본 항의 교훈은 우리의 시조들이 범죄한 사실과 그것과 관련한 하나님의 작정에 대한 것으로 크게 네 가지 내용들이 관찰이 됩니다.

우선 첫 번째와 관련한 것으로 (1) 우리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에게는 먹도록 허용이 되지 않은 금지된 열매가 있었다는 것이며, (2) 사탄이 이들을 유혹하여 먹도록 하였다는 것이고, (3) 그 결과 이들이 하나님께 죄를 범했다는 것이며. 그리고 두 번째 사실과 관련한 것으로 (4)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허용이 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 항은 두 문장으로 된 간단한 진술문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구원의 큰 일들을 시작케 한 이유들과 그 일들의 성질 그리고 장래의 결국을 설명하는 매우 심오한 성경 계시의 출발점입니다.

그러면 금지된 열매가 있었다는 사실이 주는 교훈부터 차례로 네 가지 내용들을 살펴보기로 합니다.

1.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금하신 이유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에 있는 각종 나무의 열매는 다 먹도록 허락을 하시면서도 어찌하여 유독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도록 명령을 하셨을까요?(2:17) 이 질문의 답은 우리의 시조들이 임의대로 사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훈에 따라 살아야 하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에서 확인이 됩니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잊은 듯이 살아갑니다. 마치 자신이 바라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스스로 행할 권리가 있으며 그것을 금할 어떤 권위도 없는 듯이 살아갑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금지된 열매에 대해 강한 반발을 합니다. 바로 여기서 피조물인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떠한 권위에 따라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의 긴장이 발생합니다. 금지된 열매는 사람이 추구하는 자유로운 삶을 억압하는 것으로 여기며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반발은 오히려 금지된 열매를 주신 까닭이 바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권위와 관련한 것임을 뚜렷이 드러냅니다. 피조물은 자신을 만드신 창조주의 의도와 목적에 따라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자신의 욕망의 성취에서가 아니라 오직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교훈과 일치하는 맥락에서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산에 있는 각종 나무의 실과를 먹도록 자유와 권한을 주시면서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금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권위 아래 살아야 함을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2. 사탄의 유혹에 빠진 하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금지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는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갖는 지는 본 항의 두 번째 내용인 사탄의 유혹의 과정을 통해서 잘 드러납니다.

사탄은 들짐승 가운데 가장 간교한 뱀을 사용하여 하와에게 접근하였습니다. 하와와 대화를 열어가면서 사탄은 하와를 간교한 시험으로 금지된 열매를 따먹도록 유혹을 합니다.

사탄 곧 마귀는 용 또는 뱀(20:2)이라 불리며, “온 천하를 꾀는 자이며(12:9), 또한 거짓의 아비이며 처음부터 살인한 자입니다(8:44). 이 마귀의 존재가 어떻게 비롯되었으며,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이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불순종하여 진리를 거슬리고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범죄케 하여 저와 더불어 영원한 불못의 죽음으로 치달아 가는 파멸의 길로 이끄는 자라는 사실입니다(20:10).

마귀가 하와에게 다가와 시험한 유혹의 속삭임은 이러하였습니다. 먼저 간교한 의심을 불어 넣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3:1). 이 질문은 순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 만일 그랬다면 그것은 어떤 다른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것이며, 그 의도는 결코 선한 것일 수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정말로 그렇게 말씀하셨나?”

하와는 이러한 마귀의 수작에 넘어가 과연 묘한 불만을 드러내게 됩니다. “...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3:3). 하나님께서는 먹지도 말라고 하셨을 뿐인데, 여기에 하와가 만지지도 말라는 말을 덧붙인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다소 과장되게 표현함으로써 하와 자신이 이미 최소한 하나님이 왜 그러셨을까?”의 의문의 심리에 노출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제 바로 불만과 저항의 심리로 이어져 갈 수 있는 징검돌이 놓인 셈입니다.

마귀는 하와에게 금지된 명령과 관련하여 의문의 심리를 불어 넣은 후에, 이제 하나님의 진실성과 선하심을 의심케 함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도록 유혹을 하였습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3:4).

마귀는 하나님께서 거짓을 말하셨다고 말합니다. 하와는 마귀의 말이 진실한 것인지 아니면 먹으면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한 것인지를 선택하여야 하였습니다. 이미 의문의 심리에 노출이 된 하와는 마귀의 말을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거짓으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금하셨을까? 마귀는 하나님이 선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결론으로 은근히 이끌어 갑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3:5).

3. 하나님께 범죄한 인류

결국 하와는 아담과 더불어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본 항이 교훈하는 세 번째 내용입니다.

하와는 하나님께서 금지의 열매를 명하신 까닭이 결국 자신이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게 될 것을 막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마귀의 말을 믿고, 그렇다면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 아니며, 또 그것을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거짓된 위협을 더하신 것이므로, 더 이상 금지 명령 때문에 억압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거짓에 기초한 잘못된 결론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악한 마귀의 속임수였으며 간교한 시험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은 정녕 죽음에 이르는 심판을 받게 되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하며, 또한 선악을 스스로 분별할 권리를 주장하는 인본주의는 피조물의 본분을 넘어서 방종의 삶을 살아 결국 멸망케 되는 불순종을 낳게 되는 근본적 이유가 되므로 이를 금하신 하나님은 실로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마귀의 간교한 시험은 하와로 하여금 이 모든 것을 부인하게 하였으며 결국 하나님께 죄를 범하게 하였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도록 금지하지 않았다면 시험도 없었을 것이며, 또한 인간이 죄를 범하여 심판을 받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불평을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시험을 받는 일도, 심판을 받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금지의 열매를 둔 것 자체에 대하여 반발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반발이며, 바로 하나님에 대한 반발입니다. 이러한 반발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 존재 자체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죄의 증상의 반영일 뿐입니다. 금지의 열매를 따먹는 마음과 의지 그리고 행위는 결국 스스로 선과 악을 분별하여 행할 것과 금할 것을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철저한 인본주의적 의지이며 피조물의 본분을 망각할 죄악입니다.

4. 은혜의 경륜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

끝으로 본 항은 이러한 우리의 시조의 범죄가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는 일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기쁘게 허용하신 것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어떻게 순전하게 창조된 부패한 본성이 없는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의 죄를 범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주어지는 답은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에 따른 것이며 또한 거룩한 계획에 의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에 의한 것이라는 말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가 하나님께서 강요하여 행하여진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불순종을 강요하였다면 불순종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죄에 대한 책임이 하나님께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유혹을 따라 스스로 원하여 불순종을 선택한 것이기에 모든 불순종에 대한 죄의 책임은 자신들에게 돌아갑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와 관련하여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거룩성을 훼손할 일은 없습니다.

또한 이 일은 하나님의 지혜에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순전한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하지 못하고 죄 아래에 놓이게 될 줄을 아십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창조하셨던 본래의 상태는 순전하다 할지라도, 이들의 상태는 유한한 존재의 가변적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순전한 원시 상태로 영원히 변치 않는 그러한 것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부으심으로 이들의 가변성으로 인한 죄의 발생을 막으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지혜의 계획 가운데 이들의 불순종의 사건을 허용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반역하는 죄의 성질을 드러내시고 죄의 책임에 따른 심판을 선언하시고 사람이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과 자비로 사는 것임을 드러내셨습니다. 또한 인간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 가운데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의 역사가 마침내 이루어질 때, 이 모든 일들은 합력하여 악인에게는 심판으로 나타나고, 의인에게는 긍휼의 구원으로 나타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는 그가 사랑하여 선택한 의인들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부으셔서 아무도 다시는 죄의 상태로 변화되어 다시 불순종의 죄를 범하지 않는 영광의 상태 가운데 거하게 하십니다(8:30, 22:14-15).

 
http://rpress.or.kr/xe/352354

출처: 영적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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