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으로 되어지는 방언?

최송연의 신앙칼럼 2017. 10. 31. 23:04

 

학습으로 되어지는 방언?

 

뉴욕의 아멘넷 기사에 올라온 우리나라 어느 대학의 신학부 교수님은 방언은사는 우리나라가 유럽보다 많다고 하며, 그 이유를 들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고, 아래는 필자가 그 글아래 남긴 댓글인데, 행여 방언에 대한 오해가 있으신 분들에게 도움이 될까 하여, 이곳에 올려둡니다.


방언 그것이 알고 싶다!!, 왜 한국교회에 많이 나타나나

 사람들은 현재 교회에서 체험하는 방언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문을 가지고 있다. 그 중의 하나는 다른 나라 교회에 비해 왜 유독 우리나라 교회에서 방언의 은사가 많이 나타나는가 하는 것이다. 유럽 교회에서는 방언 은사 체험한 사람이 드물다는 것이다.

또 한국 교회에서도 어떤 교회에는 대다수의 성도가 방언을 체험하는데 반해 다른 교회에서는 극소수가 방언을 체험하는가 하는 것이다. 혹시 한국 교회에서 방언이 많이 나타나는 것은 신앙적인 측면보다 한국의 샤머니즘적 신앙과 어떤 연관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필자도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성서적 해답을 얻었다. 우선, 바울에 따르면 방언의 은사는 하나님의 주권(고전 12:11)과 신자의 사모함(고전 12:31)으로 체험한다는 것을 상기해야 하겠다. 은사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시기 때문에 사람이 은사체험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은사를 체험하는 것이 그 은사에 대한 신자의 태도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신자가 방언의 은사를 체험하려면 열심히 사모하라고 바울은 권한다(고전 14:1). 이렇게 은사 체험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다. 전도를 하는 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다음으로, 이것은 말씀이 실제화되는 주요 원리 중의 하나와 관련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것은 말씀의 뜻을 올바로 깨닫고 순종할 때다. 종교개혁 때 마틴 루터가 바울이 말하는 이신득의(以信得義)를 깨닫고 외쳤을 때 그 역사가 나타난 것이다. 요한 웨슬레가 성경이 말하는 성화의 원리를 깨닫고 선포했을 때 역시 그 역사가 이루어졌다.

마찬가지로 초대 교회를 제외하고는 많이 연구되지도 않았고, 활성화되지도 않았던 방언에 대해서 말씀을 연구하고 깨닫고 선포할 때 역시 방언을 체험하는 역사가 많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럽 교회에 방언 현상이 적게 나타난 것은 유럽 교회는 전통적으로 방언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을 긍정적으로 연구하지도 가르치지도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수 십 번 인도한 방언 세미나 혹은 집회를 통해서도 이 진리를 누누이 경험했다. 이 집회에서 필자는 대략 1시간 정도 방언에 대해서 성경 구절을 들어 그 의미와 필요성을 설명한다. 그러면 이전에 방언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잘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고, 잘 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을 교정 받는다.

그러고 나서 방언을 체험하고 싶은 사람은 강단 앞으로 나오라고 한다. 그리고 같이 기도하면 많은 경우에 그 자리에서 방언을 체험한다. 조사를 해 보면 자리에서 그냥 앉아 있는 사람보다는 앞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방언을 체험한다.

어떤 이는 앞으로 나오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인위적인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방언의 은사를 주시면 어떻게 자리가 그 은사 체험과 관련이 있느냐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앞자리에 앉은 사람이 공부도 잘 하고 은혜도 더 많이 체험한다.

은사도 마찬가지다. 앞자리에 앉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는 가운데 말씀에 동의하고 사모한다는 것을 다른 사람 앞에서 공식적으로 표현한다는 의미로 앞으로 나와 같이 기도하면 대부분 방언을 체험하는 것을 본다.

그래서 나는 이 문제를 이렇게 본다. 한국 크리스천들은 방언에 관련해서 말하면 앞자리에 앉았다가, 앞으로 나오는 사람들이다. 반면, 방언에 대해서 오랫동안 부정적으로 생각해 왔거나 소극적으로만 인정할 뿐 실제로 잘 인정하지 않는 유럽의 주요 교회들은 뒷자리에 앉아서 구경하는 사람들인 경우가 더 많은 셈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나, 우리 한국의 어떤 샤머니즘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사람의 방언에 대한 태도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방언체험에만 국한된 원리는 아니다. 성경 어떤 말씀이라도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순종하고 결단할 때 그것이 그 사람에게 적용되고 역사하는 말씀이 되는 것이다.(계속)

김동수 논설위원 / 평택대 신학과 교수
ⓒ뉴스미션

(반면, 방언에 대해서 오랫동안 부정적으로 생각해 왔거나 소극적으로만 인정할 뿐 실제로 잘 인정하지 않는 유럽의 주요 교회들은 뒷자리에 앉아서 구경하는 사람들인 경우가 더 많은 셈이다.)

 

1. 방언 은사를 사모하는 사람, 2. 방언 은사에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으로 인정하는 사람으로 분류하신 것 같네요. 교수님께서 분류하신 대로 하자면, 저는 후자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제가, 철야기도 시간에, 다른 이의 영혼을 위해 기도할 때, 성령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방언 은사를 체험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방언도,

주께서 원하시는 시간, 주께서 원하시는 사람,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판단이 되시면, 주님께서 주권적으로 허락하시는 은사 중 하나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 열정적인 사회나 더 열정적인 개인에게 주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는 것은 바른 성경관이라고 보기는 어렵겠다고 하는 것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지방방언도 여러 가지 방언이 있듯, 영언도 여러 가지임을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긴 하지만, 그 은사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더 열심있는 자에게"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1. 개인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2. 공동체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 원하시는 때에 주신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고전 14장 참조)

 

인간 지성의 잣대로 성경 말씀이나 하나님의 은사를 재단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나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고, 나의 경험은 너무 주관적이기 때문입니다. 내 지식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복종해야지, 내 지식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끌어와, " 꼭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아래 '질문'님이 우리 독자님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것도 그가 설파하고자 하는 말이 모두 다 틀렸다기 보다는 질문님의 논리 역시, 자신의 경험의 반경, 그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 주장하는 개론에 "성경적 뒷받침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주권적 은사를 인정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성령의 선물인 은사를 논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토대로 살펴보는 것만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요, 우리가 취해야할 바른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전지전능하심을 전제로, 모든 주권이 우리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은사의 주체와 은사를 선물로 받는 객체를 먼저 인정하는 겸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만약 강사의 초청에 의해서 강대상 앞으로 나간 사람이 더 많은 은사를 체험한다고 주장하시면, 글쎄요,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간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기를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보면 무리는 없겠습니다만...그것이 전부인양 말씀해서는 안 되겠지요.

 

요즘 부흥회나, 인터넷에 떠도는 'so called' 신령한 부흥강사님들, 신유집회 동영상을 보게 되면, 강사님들이 이상한 괴성을 지르며, ", ! !, 불로, 불로!, !!" 등등...강한 명령어를 사용함을 봅니다....주체와 객체가 뒤바껴 버린, 기형적 모습이 바로 그런 사상, 강대상 앞이 더 신령하고, 어떤 개인,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는 강사들이 더 신령하다고 보게 되도록 유도하는, 영적 특권의식층을 구성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런 사상이 만연할 때, 과거 박태선 장로나 전주 율리아 같은 이단을 양산해 낼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김교수님이 그렇다는 것은 결코 아니니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곳에서 과연 지.. 의를 온전히 갖추신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심히 의심스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오래 전, 철야기도 중에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여집사님이 방언을 한다고 알 수 없는 소리로 소리소리 지르며 기도를 합니다. 저는 아무런 생각없이 한 쪽에 앉아서 조용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주님께서 저의 영의 귀를 열어주심일까요? 그 여집사님의 방언이 통역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녀가 하는 뜻없는 말이란 것이, 놀랍게도 하나님을 저주하고 원망하고 욕하고....너무도 놀라서 저는 제가 잘못 듣고 있는가? 못들은척 하려고 하였으나, 듣기가 너무 거북스러워 견딜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일어나 그 여집사님께로 가서 어깨를 건드려, 물었습니다. 지금 무슨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 아십니까? 모른다고, 방언이 터져서 방언기도를 하고 있다고...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집사님께서 하시는 방언은 사단이 장난을 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지금 주님을 욕하고 원망하고 ...듣기가 거북할 정도이니 본 마음이 그게 아니시라면 절제하시지요." 그 여자 집사님은 그 말을 듣더니 너무도 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행이 나이가 훨씬 더 어린 저의 말을 듣고 절제를 하시더군요. 그때, 저는 바울 사도가 통역이 없으면 방언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신,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제가 모든 방언을 다 통역되어진다고는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놀랍게도, 제가 다른 분의 방언을 듣는대로 모두 통역되어지는 것은 아니더군요. 꼭 필요한 때, 주님께서 귀를 열어주셔야 되는 것임을 깨닫고 저는 그때부터 더욱 조심합니다. 그리고 영언이란 인간이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겸손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사단이그 사람의 혼을 사로잡아 장난질 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구더기 무숴워 장못담그랴? 사단의 장난이 무서워 성령님이 주시는 방언을 부정하느냐? 라고 몰아가는 사람이 있기에 말을 아끼려합니다만...제가 경험한 바로는 무조건 마음이 열려져 있는 무방비 상태는 더욱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령한 은사자라 부르는 자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알 수 없는 괴성을 내는 것이 모두 성령의 선물로서 방언은사가 아니란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하고, 교제님이 올려주신 동영상을 보아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님들이여, 가장 신령한 것은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내 마음속에 모시고 있는데, 무엇이 더 필요해서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는지자신의 영적 상태를 재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방언은사를 이유없이 뜻없이 받아누려야 할 필요가 어디있습니까? 그 시간에, 골방에 들어가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조용히 이웃을 위해, 국가를 위해, 하다못해 우리 아멘넷을 위해서 한마디 말이라도 진정한 기도를 드려주십시오. 그리고 더욱 신령한 은사를 사모하십시오. 그 신령한 은사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은사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자신은 숨고, 이웃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런 사람을 주님은 오늘도 찾고 계신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다윗이 양치는 목자로 있을 때, 주님은 그를 아시고 기억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위치가 어느 곳에 있던지, 개의치 마시고 주님 앞에 겸손해지도록 마음을 낮추는 자가 주님 마음에 합한 자입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더욱 낮아지고 겸손해져서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여도, 주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기만 하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을 남길 수 있겠습니까?

 

교제님께서 올려주신 동영상을 보면서, 영적 사깃꾼들의 작태가 갈수록 더욱 심각해진다는 것을 느끼고 우리가 좀 더 분별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오래 전에 있었던 실제적 체험담도 생각이 나고...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간증을 올려드렸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 별똥별/최송연

 

  
http://www.youtube.com/watch?v=3oMlZmJIZ6c
저 목사 누군지 아시는 분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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