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으로 되어지는 방언?

 

뉴욕의 아멘넷 기사에 올라온 우리나라 어느 대학의 신학부 교수님은 방언은사는 우리나라가 유럽보다 많다고 하며, 그 이유를 들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고, 아래는 필자가 그 글아래 남긴 댓글인데, 행여 방언에 대한 오해가 있으신 분들에게 도움이 될까 하여, 이곳에 올려둡니다.


방언 그것이 알고 싶다!!, 왜 한국교회에 많이 나타나나

 사람들은 현재 교회에서 체험하는 방언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문을 가지고 있다. 그 중의 하나는 다른 나라 교회에 비해 왜 유독 우리나라 교회에서 방언의 은사가 많이 나타나는가 하는 것이다. 유럽 교회에서는 방언 은사 체험한 사람이 드물다는 것이다.

또 한국 교회에서도 어떤 교회에는 대다수의 성도가 방언을 체험하는데 반해 다른 교회에서는 극소수가 방언을 체험하는가 하는 것이다. 혹시 한국 교회에서 방언이 많이 나타나는 것은 신앙적인 측면보다 한국의 샤머니즘적 신앙과 어떤 연관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필자도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성서적 해답을 얻었다. 우선, 바울에 따르면 방언의 은사는 하나님의 주권(고전 12:11)과 신자의 사모함(고전 12:31)으로 체험한다는 것을 상기해야 하겠다. 은사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시기 때문에 사람이 은사체험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은사를 체험하는 것이 그 은사에 대한 신자의 태도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신자가 방언의 은사를 체험하려면 열심히 사모하라고 바울은 권한다(고전 14:1). 이렇게 은사 체험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다. 전도를 하는 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다음으로, 이것은 말씀이 실제화되는 주요 원리 중의 하나와 관련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것은 말씀의 뜻을 올바로 깨닫고 순종할 때다. 종교개혁 때 마틴 루터가 바울이 말하는 이신득의(以信得義)를 깨닫고 외쳤을 때 그 역사가 나타난 것이다. 요한 웨슬레가 성경이 말하는 성화의 원리를 깨닫고 선포했을 때 역시 그 역사가 이루어졌다.

마찬가지로 초대 교회를 제외하고는 많이 연구되지도 않았고, 활성화되지도 않았던 방언에 대해서 말씀을 연구하고 깨닫고 선포할 때 역시 방언을 체험하는 역사가 많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럽 교회에 방언 현상이 적게 나타난 것은 유럽 교회는 전통적으로 방언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을 긍정적으로 연구하지도 가르치지도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수 십 번 인도한 방언 세미나 혹은 집회를 통해서도 이 진리를 누누이 경험했다. 이 집회에서 필자는 대략 1시간 정도 방언에 대해서 성경 구절을 들어 그 의미와 필요성을 설명한다. 그러면 이전에 방언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잘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고, 잘 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을 교정 받는다.

그러고 나서 방언을 체험하고 싶은 사람은 강단 앞으로 나오라고 한다. 그리고 같이 기도하면 많은 경우에 그 자리에서 방언을 체험한다. 조사를 해 보면 자리에서 그냥 앉아 있는 사람보다는 앞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방언을 체험한다.

어떤 이는 앞으로 나오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인위적인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방언의 은사를 주시면 어떻게 자리가 그 은사 체험과 관련이 있느냐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앞자리에 앉은 사람이 공부도 잘 하고 은혜도 더 많이 체험한다.

은사도 마찬가지다. 앞자리에 앉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는 가운데 말씀에 동의하고 사모한다는 것을 다른 사람 앞에서 공식적으로 표현한다는 의미로 앞으로 나와 같이 기도하면 대부분 방언을 체험하는 것을 본다.

그래서 나는 이 문제를 이렇게 본다. 한국 크리스천들은 방언에 관련해서 말하면 앞자리에 앉았다가, 앞으로 나오는 사람들이다. 반면, 방언에 대해서 오랫동안 부정적으로 생각해 왔거나 소극적으로만 인정할 뿐 실제로 잘 인정하지 않는 유럽의 주요 교회들은 뒷자리에 앉아서 구경하는 사람들인 경우가 더 많은 셈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나, 우리 한국의 어떤 샤머니즘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사람의 방언에 대한 태도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방언체험에만 국한된 원리는 아니다. 성경 어떤 말씀이라도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순종하고 결단할 때 그것이 그 사람에게 적용되고 역사하는 말씀이 되는 것이다.(계속)

김동수 논설위원 / 평택대 신학과 교수
ⓒ뉴스미션

(반면, 방언에 대해서 오랫동안 부정적으로 생각해 왔거나 소극적으로만 인정할 뿐 실제로 잘 인정하지 않는 유럽의 주요 교회들은 뒷자리에 앉아서 구경하는 사람들인 경우가 더 많은 셈이다.)

 

1. 방언 은사를 사모하는 사람, 2. 방언 은사에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으로 인정하는 사람으로 분류하신 것 같네요. 교수님께서 분류하신 대로 하자면, 저는 후자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제가, 철야기도 시간에, 다른 이의 영혼을 위해 기도할 때, 성령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방언 은사를 체험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방언도,

주께서 원하시는 시간, 주께서 원하시는 사람,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판단이 되시면, 주님께서 주권적으로 허락하시는 은사 중 하나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 열정적인 사회나 더 열정적인 개인에게 주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는 것은 바른 성경관이라고 보기는 어렵겠다고 하는 것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지방방언도 여러 가지 방언이 있듯, 영언도 여러 가지임을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긴 하지만, 그 은사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더 열심있는 자에게"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1. 개인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2. 공동체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 원하시는 때에 주신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고전 14장 참조)

 

인간 지성의 잣대로 성경 말씀이나 하나님의 은사를 재단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나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고, 나의 경험은 너무 주관적이기 때문입니다. 내 지식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복종해야지, 내 지식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끌어와, " 꼭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아래 '질문'님이 우리 독자님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것도 그가 설파하고자 하는 말이 모두 다 틀렸다기 보다는 질문님의 논리 역시, 자신의 경험의 반경, 그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 주장하는 개론에 "성경적 뒷받침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주권적 은사를 인정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성령의 선물인 은사를 논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토대로 살펴보는 것만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요, 우리가 취해야할 바른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전지전능하심을 전제로, 모든 주권이 우리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은사의 주체와 은사를 선물로 받는 객체를 먼저 인정하는 겸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만약 강사의 초청에 의해서 강대상 앞으로 나간 사람이 더 많은 은사를 체험한다고 주장하시면, 글쎄요,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간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기를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보면 무리는 없겠습니다만...그것이 전부인양 말씀해서는 안 되겠지요.

 

요즘 부흥회나, 인터넷에 떠도는 'so called' 신령한 부흥강사님들, 신유집회 동영상을 보게 되면, 강사님들이 이상한 괴성을 지르며, ", ! !, 불로, 불로!, !!" 등등...강한 명령어를 사용함을 봅니다....주체와 객체가 뒤바껴 버린, 기형적 모습이 바로 그런 사상, 강대상 앞이 더 신령하고, 어떤 개인,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는 강사들이 더 신령하다고 보게 되도록 유도하는, 영적 특권의식층을 구성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런 사상이 만연할 때, 과거 박태선 장로나 전주 율리아 같은 이단을 양산해 낼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김교수님이 그렇다는 것은 결코 아니니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곳에서 과연 지.. 의를 온전히 갖추신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심히 의심스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오래 전, 철야기도 중에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여집사님이 방언을 한다고 알 수 없는 소리로 소리소리 지르며 기도를 합니다. 저는 아무런 생각없이 한 쪽에 앉아서 조용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주님께서 저의 영의 귀를 열어주심일까요? 그 여집사님의 방언이 통역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녀가 하는 뜻없는 말이란 것이, 놀랍게도 하나님을 저주하고 원망하고 욕하고....너무도 놀라서 저는 제가 잘못 듣고 있는가? 못들은척 하려고 하였으나, 듣기가 너무 거북스러워 견딜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일어나 그 여집사님께로 가서 어깨를 건드려, 물었습니다. 지금 무슨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 아십니까? 모른다고, 방언이 터져서 방언기도를 하고 있다고...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집사님께서 하시는 방언은 사단이 장난을 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지금 주님을 욕하고 원망하고 ...듣기가 거북할 정도이니 본 마음이 그게 아니시라면 절제하시지요." 그 여자 집사님은 그 말을 듣더니 너무도 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행이 나이가 훨씬 더 어린 저의 말을 듣고 절제를 하시더군요. 그때, 저는 바울 사도가 통역이 없으면 방언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신,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제가 모든 방언을 다 통역되어진다고는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놀랍게도, 제가 다른 분의 방언을 듣는대로 모두 통역되어지는 것은 아니더군요. 꼭 필요한 때, 주님께서 귀를 열어주셔야 되는 것임을 깨닫고 저는 그때부터 더욱 조심합니다. 그리고 영언이란 인간이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겸손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사단이그 사람의 혼을 사로잡아 장난질 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구더기 무숴워 장못담그랴? 사단의 장난이 무서워 성령님이 주시는 방언을 부정하느냐? 라고 몰아가는 사람이 있기에 말을 아끼려합니다만...제가 경험한 바로는 무조건 마음이 열려져 있는 무방비 상태는 더욱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령한 은사자라 부르는 자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알 수 없는 괴성을 내는 것이 모두 성령의 선물로서 방언은사가 아니란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하고, 교제님이 올려주신 동영상을 보아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님들이여, 가장 신령한 것은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내 마음속에 모시고 있는데, 무엇이 더 필요해서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는지자신의 영적 상태를 재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방언은사를 이유없이 뜻없이 받아누려야 할 필요가 어디있습니까? 그 시간에, 골방에 들어가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조용히 이웃을 위해, 국가를 위해, 하다못해 우리 아멘넷을 위해서 한마디 말이라도 진정한 기도를 드려주십시오. 그리고 더욱 신령한 은사를 사모하십시오. 그 신령한 은사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은사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자신은 숨고, 이웃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런 사람을 주님은 오늘도 찾고 계신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다윗이 양치는 목자로 있을 때, 주님은 그를 아시고 기억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위치가 어느 곳에 있던지, 개의치 마시고 주님 앞에 겸손해지도록 마음을 낮추는 자가 주님 마음에 합한 자입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더욱 낮아지고 겸손해져서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여도, 주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기만 하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을 남길 수 있겠습니까?

 

교제님께서 올려주신 동영상을 보면서, 영적 사깃꾼들의 작태가 갈수록 더욱 심각해진다는 것을 느끼고 우리가 좀 더 분별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오래 전에 있었던 실제적 체험담도 생각이 나고...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간증을 올려드렸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 별똥별/최송연

 

  
http://www.youtube.com/watch?v=3oMlZmJIZ6c
저 목사 누군지 아시는 분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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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에는 구원받은 무리 중에서 

특별한 두 종류의 계층이 등장한다.


한마디로 천국에서 특수신분을 가진 자들로 

그리스도의 신부와 왕권을 가진 왕족이다.


첫번째 무리는 환란전 휴거자들로 

이들은 가장 고귀한 '그리스도의 신부'로 불리는 이들로 

그들의 거주지는 천국에서도 가장 신비한 장소, 예루살렘성이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매우 특별한 신분으로 이들은 환란을 통과하지 않는다.


자고로 아름다운 신부를 환란에 보내는 신랑은 없다.

신부들은 살아서 신령한 부활의 몸으로 변형되며 순교하지 않는다.




두번째 무리는 환란전 순교자들과 환란통과 순교자들로 

이들은 첫째부활에 참여하여 천년왕국에서 왕노릇한다.


이들에 대한 기록은 계시록 20장 4~6절에 소개된다.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환란전 신구약 순교자들)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미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환란통과 순교자들)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동안 왕노릇하니 이는 첫째 부활이라" (순교자들은 부활하여 천년왕국에서 왕노릇한다)


순교자들에게 요구되는 성품은

고문과 순교의 상황에서도 변치않는 불굴의 순교정신이다.




첫번째 무리(휴거자,신부)에 대한 기록도 계시록에 등장한다.


계시록 7장 9절의 '능히 셀수 없는 큰무리'가 그들로 흰옷을 입은 자들이고,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이들이다(7:14).


결혼식의 신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웨딩드레스인 것 처럼 신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예복이며,

이것은 어린양의 피로 세탁된 깨끗한 마음과 거룩한 삶으로 만들어진다.


희고 빛나는 예복을 입은 신부를 환란에 던지지 않는다.


또한 신부는 옳은 행실로 세마포 옷입 입은 자들이고(계 19:8)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다(계 22:14).


깨어 자기 옷을 지키는 자들이며(계 16:15),

기도로 깨어 준비한 자들이다(마 24:42~44).


기름등불인 말씀과 성령이 충만한 슬기로운 처녀들이다(마 25:1~13).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계 21:9)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계 21:10)


이들은 혼인잔치에 신부로 초청장을 받는 자들이다.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계 19:9)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리라" (계 22:17)


이들이 신부로 인정받기 위해 하는 것은 초청에 응하는 일이다.

환란을 통과하며 순교를 당하면서 댓가를 지불하지 않는다.

값없이 와서 생명수를 받을 수 있다.

 

계시록에 세번째 계층도 있다.


이들은 순교자도 아니고 휴거자도 아닌

일반 성도들로 천년왕국이 끝날 때까지 부활에 참여하지 못한다.

일반성도들은 백보좌 심판을 받아서 그의 상급에 따라 거주지가 결정된다.

이들은 신부나 왕족이 아니라 백성신분인 것이다.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계 20:12)


순교자들과 휴거자들은 백보좌 심판을 면제 받는다.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계 20:6)


이들이 백보좌 심판을 면제 받는 이유는

백보좌 심판이 시기적으로 천년왕국 후에

인류 모두가 부활하여 심판을 받는데, 

순교자들과 휴거자들은 이미 천년왕국 전에 부활하였기 때문이다(첫째부활).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계 20:5)

백보좌 심판의 대상은 둘째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이다.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들도 모두 육체가 부활하여 심판을 받고

불못에 들어가 영원히 고통 가운데 살 것이다. (둘째사망)


그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자들이며

우주와 생명체가 우연히 존재했다고 믿는 무지한 자들이며,

기독교는 여러 종교중의 하나거나 사람이 만든 종교라고 말한다.


그들은 성경안에 계시된 인류의 시작과 끝,

성경의 예언이 역사속에 성취된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며,

건물 하나도 저절로 생기지 않고

설계자와 만든자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보다 더 복잡한 설계도(DNA)가 있는 생명체는 저절로 생겼다고 믿는다.


일상적인 삶에서 성경 가운데, 만물 가운데 숨겨진 보물,

진리의 퍼즐을 발견하는 것은 각자의 역할이다.


하지만 그들은 마음이 완악하여 거절하거나

사실과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비전은 세상의 모든 민족과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보물을 발견한 자들은 최고의 반열, 하나님의 꿈,

창조때 계획하셨던 영생의 삶, 하나님의 나라에 거주하게 될 것이다.



글쓴이: 카이로스 / ars (acoloje)

 

 

신부단장 매뉴얼!


베드로후서 3장은 <신부단장 매뉴얼>입니다. 그래서 특정구절을 묵상하기보다는 전체적으로 꼼꼼히 정리하며 요점정리를 할 필요가 있어서 오늘은 기도하며 한구절도 놓치지 않고 조명해 주시는 성령의 음성을 기록해 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둘로 너희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하여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벧후 3:1-2)


베드로전후서 두개의 서신을 쓴 이유는, 우리 속에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과 신약의 사도들의 명령의 가장 중요한 핵심메세지를 전달하여 기억케 하기 위함이라고 베드로는 고백합니다.

신구약에 걸쳐 재림과 마지막 때에 대한 메세지는 무려 1/4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역사서 빼고 예언서 및 신약만 놓고 보면 거의1/2이 재림메세지입니다. 그러기에 재림이 상실된 복음은 복음이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토록 재림신앙은 십자가신앙과 함께 우리의 삶과 심령 가운데 두 커다란 기둥으로 뿌리박혀 있어야 마땅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감사하고 기뻐하는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지 않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벧후 3:3~7)

신부단장을 하기 전에 우선적으로 밝히 알아야 할 마지막 때에 대한 정보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때가 되면 많은 속이는 자들이 나타나 재림메세지를 가볍게 여기고 조롱한다는 것입니다. 최첨단 과학시대에 구름타고 다시 오신다는 허무맹랑한 소설같은 얘기가 어디 있냐고 비아냥거리며 마치 세상종말이 오지 않을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을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없어지지 않고 있을 거라고 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천지창조가 말씀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믿는다면, 세상종말도 말씀으로 마감되는 것도 믿어야 합니다. 신구약에 수없이 많은 선지자가 세상 종말이 온다고 외치고 있는데, 그러한 메세지를 애써 외면하며 무시하고 소멸하는 교만한 행위로 말미암아 이제 하늘과 땅은 경건치 아니한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실 '소멸하는 불'로 임하실 것을 성경은 단호히 선포합니다.

이런 배경 가운데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한  신부단장 매뉴얼(베드로판)이 시작됩니다. 신부단장 매뉴얼의 핵심은 한마디로 <사랑하라>인데 이것을 베드로후서에서는 여섯가지 명령어로 풀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 회개하라 (사랑의 시작)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 3:8-9)

사랑의 시작은 음란하게 세상과 벗하며 살던 삶에서 돌이켜 신랑을 향해 돌이켜 방향전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제 더 이상 '세상'은 내 남편 아니라고 선언하고, 내가 사랑해야 할 대상은 오직 나의 신랑 주 예수님 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것... 이것이 회개입니다. 

주님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전부 다 회개하여 모든 사람이 구원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이 지금껏 오래참고 기다려주신 것입니다. 회개함으로 참 좋으신 신랑 예수님과의 사랑의 첫단추를 끼워야 합니다.

2. 거룩하라 (순결한 사랑)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벧후 3:10-11)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은 도적같이 올 것입니다. 하늘이 두루마리처럼 말려 없어지고 뜨거운 불에 체질이 녹아지며 지금껏 사람들이 저지른 모든 죄악들과 악의 근원적 뿌리가 드러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완전한 멸망의 날입니다.

이 날을 바로 코 앞에 둔 시점에서 당연히 주님의 신부된 자로서 가져야 할 태도는 거룩과 순결입니다. 이전에 음란하게 세상과 짝하여 히히덕거리며 놀아나던 과거를 청산하고 오직 예수님만 사랑하며 그분을 향한 사랑 때문에 자신의 몸을 더럽히지 아니하는 정결과 지조를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정 신랑으로 인식하는 자는 결코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숨막히고 고리타분한 율법적인 삶으로 치부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살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삶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랑을 못 견디게 사랑하기 때문에 신랑과의 사랑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에 관심조차 두지 않고 전부 다 자원함과 기쁨으로 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3. 바라보라 (기다리는 사랑)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벧후 3:12~14상)

주님의 신부된 자들은 신랑이 데리러 오실 하나님의 그 날을 간절히 바라봅니다. 또한 신랑과 함께 영원토록 거하게 될 처소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봅니다. 더 이상 이 세상은 신부가 영원히 거할 곳이 아닙니다.

오직 신랑이 오는 날, 신랑과 함께 살 처소를 바라보며 간절히 간절히 신랑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들은 한사람도 예외없이 반드시 데려가실 것입니다. (딤후 4:7-8)

4. 평안하라 (두려움 없는 사랑)

"...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벧후 3:14하)

주님의 신부들이 매우 자주 빠지게 되는 역경은 두려움입니다.
"혹시나 나를 데려가지 않으시고 대환란 가운데 버리시면 어떻하지?"하는 두려움...

(요일 4:18)에서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 온전히 이루지 못한 자라고 진단해 주십니다. 빛의 부재가 어두움이듯이 사랑의 부재가 두려움입니다. 주를 향한 사랑이 있는 자는 결코 두려움이 엄습하지 못합니다. 내가 아무리 부족하고 넘어지고 실수하고 나도 나를 용납할 수 없을 만큼 신물이 난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이렇게 주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그 사랑의 그늘막 아래 거하는 자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깊은 평안 가운데 다시 일어나 점없고 흠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씁니다. 두려움을 내어쫓는 주님과의 깊은 사랑의 관계가 평강으로 들어가는 열쇠임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5. 절제하라 (겸손한 사랑)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벧후 3:15~17)

마지막 때는 주를 위해 대단한 일을 성취하고 이루는 것보다는 절제하고 삼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히려 주를 위하여 이것저것 화려하게 사역하고 이루는 것이 스스로를 교만하게 하여 올무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오래 참아주심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임을 겸손히 인정하고, 모든 일에 삼가고 절제하고 들레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지막 때의 끝자락으로 갈수록 엄청난 미혹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수록 사랑하는 주님의 말씀에 착념하여 말씀에서 경계하시는 모든 죄의 올무들을 미리 알고 겸손히 자신을 먼저 살피고 돌아보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자신을 돌아보기보다는 남의 신앙을 세워준다는 미명 하에 부족해 보이는 남의 허물과 잘못을 들춰내고 판단하는 태도가 발견된다면, 즉시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엎드려 철저히 주님 앞에 겸손하고 또 겸손해야 합니다. (고전 4:5)

6. 자라가라 (깊어가는 사랑)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벧후 3:18)

멈추지 않는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
그 관계의 깊이가 끝없이 깊어지는 성숙한 신부의 삶... 

주님의 신부들은 결코 현재 주님과 맺고 있는 관계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끊임없이 열어주시는 더 깊은 사랑의 관계 속으로 파고 들어갑니다. 문을 열면 또 문이 있고, 그 문을 열면 또 다른 차원을 열어주시는 주님으로 인해 늘 항상 갈급하게 주님의 사랑을 찾고 앙모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평생의 소원이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주님의 아름다움을 앙모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주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에 올인하는 모든 자들은 지금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 누리는 하늘의 영광이 주님 강림하셔서 하늘로 올리워가시는 그 날 이후까지 영원토록 지속될 것입니다. 

신부단장 매뉴얼을 복잡하게 정리한 것 같지만, 
핵심은 단 하나 <사랑>입니다. 

신랑을 사랑하기만 하면 신부단장 매뉴얼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위에 나열한 삶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돌이키고,
사랑하기 때문에 순결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기다리며,
사랑하기 때문에 평안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겸손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자라갑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13)



<기도>
사랑하는 주님, 저는 사랑만 하면 되는군요.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그게 전부이군요. 순종하겠습니다. 날 위해 죽기까지 사랑해 주신 예수님의 사랑만 생각하면... 당연히 기쁨으로 순종해야 할 일임을 고백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날 위해 죽어주셨다는데 무엇인들 못하겠나이까!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며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앞으로 남은 생을 사랑만 하며 살겠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모든 말과 생각과 행동은 저 하늘에 묻어두고 오직 주를 신뢰함으로 온 세상에 주님의 사랑을 알리는 삶에 순종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곰팅이의 하늘우체통

<앵커>

이슬람 무장세력 IS가 패망 직전에 몰리면서 구사일생으로 노예 생활에서 풀려난 아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심각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카이로, 이대욱 특파원이 취재했습니다.

<기자>

이 아이는 걸음마를 뗄 무렵 IS에 끌려가 아동 노예로 지냈습니다.

3년 만에 풀려나 가족 곁에 돌아왔지만 누가, 무엇을 물어도 입을 굳게 다뭅니다.

아빠 품에 안기지도 않습니다. 그동안 겪은 끔찍한 경험이 사람을 두려운 존재로 만든 겁니다.

11살 무완은 다리가 두 번이나 부러졌습니다.

IS의 노예로 지내면서 테러 교육을 받다가 생긴 상처입니다.

[무완/11살·야지디족 : 테러리스트 훈련을 받으며 소총훈련과 대전차포 사격술까지 배웠습니다.]

IS는 학교에서 적에게 몇 번이나 채찍질하는 지로 숫자를 가르치고, 사상 교육이라며 참수 현장을 지켜보게 했습니다.

그래서 IS 지배 아래 있던 아이들의 트라우마는 심각한 폭력성까지 동반합니다.

[칼 게이드/구호단체 직원 : 아이들의 폭력적인 행동으로 위험한 일을 겪는 사례가 많습니다. 가족들이 집 안의 칼을 모두 숨겨놓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와서 부모와 형제들이 IS 때문에 숨지거나 실종됐다는 걸 알았을 때 아이들의 분노와 상처는 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IS는 수세에 몰리자 아동 노예를 이제는 총알받이로 전선에 내몰고 있습니다.

극적으로 목숨을 구한 아이들도 치료가 제때 이뤄지지 않으면서 IS의 악몽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대욱 기자idwook@sbs.co.kr

“오직 십자가 신학만이 십자군 및 교회에 대한 승리주의적 이해와 연결된 사악한 관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는 서구의 소유적 개인주의와 정치적 정적주의 안에 집약된 형태로 은닉하고 있는 상태에서 뚫고 나와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삶의 토대로 삼고 있는 모든 우상숭배적 추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야 한다.”


남아공 케이프타운대학교 명예교수이자 공공신학자인 존 디 그루치 박사(Dr. John W. de Gruchy)는 지난 10월 20일 밤 8시 30분, 경기도 곤지암 소망수양관에서 가진 종교개혁500주년기념공동학술대회에서 ‘세상의 생명을 위한 말씀과 성령의 변혁운동으로서의 종교개혁’이라는 주제로 강연에서 한 말이다. 통역은 김선영 교수(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가 맡았다.


   
▲ 존 디 그루치 박사(Dr. John W. de Gruchy)가 번영신학과 번영복음을 미국에서 만들어진 이단신학이라고 질타했다. ⓒ<교회와신앙>

그루치 박사는 “한국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다. 장로교 안에 너무 많은 분파들이 많다는 것에 놀랐다. 교파별로 너무나 찢겨져 있어서 놀랐다.”며, “한국의 대형교회들과 선교활동에 대해 들어왔다. 남아공에도 대형교회가 있다. 하지만 주류 교파가 아니라 오순절파와 독립교회들 중에 대형교회가 있다. 주류교회에는 대형교회가 없다. 번영신학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서두를 열었다.


그는 ‘번영신학의 문제점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지고는 “전혀 그리스도적(기독교적)이지 않다.”고 단언했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제자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를 ‘번영하라’고 부르신 게 아니라 ‘십자가를 지라’고 부르셨기 때문”이라며, “그리스도인이 번영하려고 하는 의도를 갖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의도가 전혀 아니”라고 전했다.


심지어 “남아공에서는 오순절파나 독립교회를 제외하고는 목사나 신학자들은 번영신학을 믿지 않는다. 번영신학이나 번영복음은 미국에서 만들어진 이단신학이라”고까지 말해 회중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특히 “복음은 세상을 섬기라고 말씀하셨는데 번영신학은 우리 자신의 상태를 더 좋게 하거나 더 높은 지위를 얻게 하는 것을 추구한다는 것이 문제”라며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필요가 무엇인지, 그 필요를 채워주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런데 번영신학과 번영복음은 돈을 내게 끌어들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마르틴 루터 당시 성직자들은 성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했다. 면죄부는 ‘돈을 내고 복을 받는다’는 개념의 번영신학과 일맥상통한다. 루터는 하이델베르그 논쟁에서 제시한 95개조의 논제를 통해 면죄부를 공격하면서 ‘영광의 신학’ 대신 ‘십자가 신학’을 강조한다.”고 밝혔다.


또한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의 교회 개혁운동이 교회 안의 잘못된 신학과 제도를 개선한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변혁운동으로 나아갔다.”며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과 분리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루치 박사는 “루터는 맘몬(Mammon)을 ‘지상에서 가장 흔한 신’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종교개혁시대 이후 전 세계에 퍼진 자본주의가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 그리고 북아메리카에서 일어나고 있는 유럽의 착취와 식민지화의 집단 ? 종족학살에 나타났다.”며 “오늘날 경제 성장, 통화 팽창, 사유화의 힘은 지구를 위협하며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사회 제도에 어설프게 손을 대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만이 도움이 될 것이다. 교회로서 우리는 대안을 찾는 것을 도와야 한다.”며 “특히 ‘번영복음 ? 번영신학’이 너무나 많은 신자들을 지배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기에 더욱 그래야 한다.”고 말했다.


그루치 박사는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후계자들인 우리는 지난 500년 동안 파벌주의와 교판간의 신앙고백 논쟁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개혁가들이 확신을 갖고 결사적으로 저항했던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권주의, 성직 계급주의, 권위주의, 가부장주의, 그리고 호사스런 풍조를 개신교식을 탈바꿈하여 다시 만들어 냄으로써 위태롭게 되었다는 비통한 실상을 직시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그러면서 “독일의 공공신학자이자 목회자였던 디크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1932년 종교개혁 주일, 독일국가의회 총선이 치러지던 날, 요한계시록 2장에 관한 설교를 하면서 회중들에게 ‘너는 너의 첫 사랑을 버리고 말았다’며 루터의 교회가 얼마나 추락했는지를 기억하고 회개할 것을 촉구했다.”며, “종교개혁500주년을 기념하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라고 밝혔다.


이어 “본회퍼는 종교개혁의 중심에 ‘말씀’ 뿐만 아니라 ‘성령’이 있었음을 강조한다. 말씀은 결코 하나님의 성령과 분리될 수 없고, 성령은 말씀과 분리될 수 없다. 개혁가들에게 말씀과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 안에 연합되어 있었다.”면서, “프로테스탄트 개혁은 변혁적 신앙고백이라는 이해의 특성을 규정하는 요소들인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간의 관계성 회복”임을 강조했다.


그렇기 때문에 “16세기 개혁가들은 성경을 읽을 때나, 성경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할 때나, 그리스도를 고백할 때나 성령이 그리스도에 대한 주된 증인이기에, 성경은 성령의 변혁하는 사역 없이는 죽은 문자로 남아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며 “성경은 독자를 과거로 연결시켜 준 이야기를 제공하지만 성령만이 확신시키고, 개종시키고, 변화시키면서 그 과거를 현재로 만들었다.”고 역설했다.


마지막으로 그루치 박사는 “16세기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변혁적 힘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에큐메니칼 전체와 힘을 합쳐야 한다. 루터와 동행하되 그를 넘어서고, 칼뱅과 동행하되 그를 넘어서고, 츠빙글리와 동행하되 그를 넘어서고, 재세례파와 웨슬리와 동행하되 그들을 넘어서야 한다.”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들이 우리에게 넘겨준 신앙고백들을 되새겨 보되, 오로지 오늘날 그리스도를 충실히 고백하고자 성령을 통해 말씀을 들으려고 노력하자.”고 갈무리했다.

한편 존 디 그루치 박사(Dr. John W. de Gruchy)는 Chicago Theological Seminary(Th.M, D.Lit., D.D)와 Rhodes University(D.Lit), University of Cape Town(D.S.S)에서 학업을 마쳤으며 현재 남아공 케이프타운대학교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작물로는 The Church Struggle in South Africa(1979), Liberating Reformed Theology: A South African Contribution to an Ecumenical Debate(1991), Christianity, Art, and Transformation: A Study in Theological Aesthetics, Bonhoeffer(2001), John Calvin: Christian Humanist and Evangelical Reformer(2013) 등이 있다.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5759

출처: 영적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최근 YouTube에 올라오는

Rapture에 대한 많은 영상이 휴거의 꿈에 대한 것이다.


아래 그래프를 보면

휴거 꿈을 올리는 영상이('Rapture Dream 년도' 검색) 

매년 증가 추세에 있음을 알 수 있는데

2017년에는 137만건으로 증가했고 

특히 전년대비 증가차이를 보면 2017년은 40만건이 추가되었다. 


이 데이터가 모두 휴거에 대한 꿈이 아니겠지만 

상대적으로 휴거 꿈을 꾸는 사람들이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건수는 금년에 휴거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내년에는 더 증가할 것이다.


<UTube의 Rapture Dream 건수> 



우리는 그동안

휴거를 예측하는 그 어떤 날짜도 맞지 않았다는 교훈을 얻었고,

앞으로도 그 날을 알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휴거에 대한 관심이

한국이 아니라 미국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그런면에서는 한국교회는 잠들어 있고

미국교회는 임박한 종말에 회개를 촉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트랜드는,

YouTube에 올라오는 Rapture에 대한 제목이

전반적으로 좀 더 긴박하게 달라진 것을 볼 수 있다.


2015년: Jesus is coming

2016년: Jesus is coming SOON

2017년: Jesus is coming NOW


성경은 말세에 장래 일을 말하며 꿈을 꾸게 할 것이라고 기록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요,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욜 2:28)


꿈을 꾸게 하는 이유는 회개를 통해 신부로 준비시키기 위함이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욜 2:13)


"백성을 모아 그 모임을 거룩하게 하고 장로들을 모으며

어린이와 젖 먹는 자를 모으며 신랑을 그 방에서 나오게 하며

신부도 그 신방에서 나오게 하고" (욜 2:16)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예복은 어린양의 피 뿌린 옷으로 깨끗하게 되는데

이는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신랑의 공로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출처: 카이로스 / ars (acoloje)

창세기로 부터 요한 계시록에 이르기 까지, 성경은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신정국가(말 그대로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기사다.

에덴 동산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통치는 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로 상징되었다. 모든 창조물을 다스릴 대리자의 지위를 부여받은 아담은 모든 지상활동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이바지하도록 해야만 했다. 구약학자인 Meredith Kline은 이와 같은 신정국가들을 시종일관 종교(예배)와 문화(세속적 활동)의 결합으로 구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적인 활동들이 '예배'라는 보편적 방향에 기여할 수 있도록 아담의 왕적 신분을 통해 에덴동산을 통치하셨다. 바꿔 말하자면, 에덴 동산은 말 그대로 '지상천국'이었다. 모든 것이 이적에 의해 다스려졌다. 그것은 천국의 축소판이었다. 그렇지만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 예배와 문화의 통일성이 와해되었다. 하나님 나라는 단지 장래를 위한 상징과 그림자와 약속을 통해 구원을 소망할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 나라가 다시 회복되고, 하나님 나라의 왕이 죄를 용서하고, 믿는 자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모든 것을 바르게 회복하실 때가 올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는 구원을 받았다.

세계 역사가 진행된 훨씬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반역과 죄악으로 가득 차 버린 세상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라는 한 사람을 택하시고 방주를 만들게 하셨으며, 장차 그 방주를 통해 '새 창조'가 이루어 질 수 있도록 하셨다. 각각의 종류에서 보존된 생명체들은 이 작은 신정국가, 곧 노아의 방주 안에서 하나님의 진노로 범람하는 바다를 견뎌 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다시 한 번 한 왕을 통해 기적으로 자기백성을 인도하셨다.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으로 말미암아 악인들은 멸망당하고 의인들은 구원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될 것임을 약속하셨을 때, 하나의 새로운 국가가 탄생되었다. 이스라엘이 바로 그 신정국가가 되었다. 성막이 세워졌으며 이후에는 성전이 건축되었다. 그 성전은 에덴 동산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불쾌한 냄세로 가득 찬 방주도 아니었다. 그것은 영광스러운 업적이었다. 다시 한번 종교(예배)와 문화(인간의 활동)가 융화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이적으로 직접다스리셨다. 홍해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길을 열기 위해 갈라지고 그들의 대적을 집어삼키키 위해 덮쳤을 때, 하나님의 백성은 다시 한번 물로 구원을 받았다. 그들은 광야에서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양육되었으며,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았다. 그 나라는 그들 가운데 있었다. 그들은 대제사장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갔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왕을 세우셨다. 다윗은 이스라엘 왕국사의 중심이요, 장차 오실 왕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가 되었으며, 자신이 가진 제사장과 왕의 직무를 행함으로 종교와 문화를 하나로 융합시켰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 구원, 기도, 예전 그리고 '영적'인 일에 관한 문제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셨을 뿐 아니라, 문화, 사회, 정치, 경제 생활의 모든 양식을 지시하셨다.

그와 같은 각각의 신정국가에는 성전,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이 있었으며, 희생 제사도 있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첫 신정국가의 성전이었고, 노아의 방주는 두 번째 성전이 되었지만, 솔로몬의 성전이 구약 전체를 통틀어 가장 탁월한 것이었다.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직무의  경우, 신정국가에서는 대개 한 사람의 대리자가 그 세가지 직무를 모두 겸임했다. 희생 제물의 경우, 타락한 아담과 하와에게 그들의 벌거벗은 몸을 덮을 수 있는 가죽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직접 동물을 희생 제물로 삼으셨으며(창 3:21), 죄를 위한 궁극적 희생을 약속하셨는데, 단지 이 동물 희생은 장차 있을 궁극적 희생에 대한 하나의 모형에 불과한 것이었다(창 3:15). 홍수 이후에 노아는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다"(창 8:20). 희생제사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신정 국가에서 중심을 이루었다. 그리고 모든 신정 국가들은 이적으로 통치 받았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시하시고, 구원하시고, 보여주고 계셨던 것이다.

하지만 나사렛의 어느 고요한 밤, 한 유대인 처녀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잉태했을 그때에 어떤 변화가 발생하였다. 과거에 예언자들과 제사장들과 왕들이 예표했던 바로 그분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이르자 세상에 오셨던 것이다. 그분의 신정국가는 이적과 계시와 구속 행위가 다시 한번 새로운 국면으로 국면으로 펼쳐질 것을 예고했다.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 나라의 실제 속에서 천국을 지상으로 이끄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성전이셨으며, 그것은 솔로몬이 최고 전성기 때 누렸던 명성과 영예의 찬란함을 능가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라고 선언하셨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영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그때에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적보다는 섭리가 특정적이었던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승천을 기점으로 지상이 아닌 하늘의 신정국가로 나아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천국에 계시기 때문에 천국이 이 땅에 존재하지는 않지만, 복음이 전 세계를 통해 신앙되고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적으로 현존한다. 우리는 말 그대로 홍해를 통해, 혹은 방주 안에서 홍수를 통해 인도함을 받는다기 보다는 심판의 바다를 통해 인도함을 받는다.

그리스도께서 통치하고 있는 나라가 점진적으로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는 사실과,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시는 일이 원수를 친구로 변화시키는 십자가상에서 이루어진 그분의 희생으로 성취된다는 것에 주목하자. 대중들이 믿고 있는 바가 다양하지만, 그것은 정치적 강령이나 사회적 행동지침이 아니다. 결국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희생 제물이다. 그리스도는 성전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이시며,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우리의 죄악을 위해 희생 제물이 되셨다. 그리스도는 '정결한' 짐승 제사로 예표되었던 온전하고 흠이 없는 한 번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화목을 위한 최고의 방식을 충족시키셨다.

은혜의 복음이란/ Michael S. Horton

 

성경에서는

사단을 '이 세상 신'이라고 칭한다.


이 세상 신이란 말은, 다시 말해

이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고

미혹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단이 전지전능한 존재는 절대 아니다.


사단이 이 세상 신이 될 수 있는 것도,

그놈이 전지전능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에

가능한 부분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무엇보다 주님 오심이 아주 가까운 이 말세지말의 때에,

"다수"가 옳다고 외치는 진실이 

성경적으로 "진실"이 될 수 있고,

"평화"가 될 수 있고,

"인권"이 될 수 있고,

정말 성경적인 "정의"가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나는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본다.


성경은, 마지막 때가 되면 될수록,

사단이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는다고 말씀한다.


한번 생각해보자.


한사람 한사람씩

일일히 찾아다니며, 미혹시키는 것보다,

어떤 방대한 차원의 큰 문제 하나를 풀어놓고,

사람들을 집단으로 미혹시켜서 삼키는 것이

사단 입장에서도, 훨씬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왜 이런 효율적인 작업을 놔두고,

마귀들이 사람을 일일히 찾아다니며 미혹하는 

그냥 각개전투만 하도록 놔두겠는가!  


이런 사단이...

주님오심이 가까운 이 시대에,

세상 사람들을 포함한 다수의 사람이 목소리 높이는 게

'진실'이고 '정의'이고 '선'이 되도록

가만히 보고 있을거라 생각하는건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 아닐까?


우리가 판단하고 분별해야 할 문제가 

외적으로 볼 때,

어느 정도, 사안의 중대성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 문제의 진실과 거짓에 대한 분별 문제는

그만큼 더 영적인 집중을 하지 않으면, 

분별하기가 쉽지 않다.


여기서, 분별이 필요한 문제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보자면,

개인적 차원, 집단적 차원, 국가적 차원

로 볼 수 있는데,


문제는

개인적 차원의 문제보다는

집단적 차원의 문제가 더 분별이 어렵고,


집단적 차원의 문제보다는

국가적 차원의 문제가 더 분별이 어렵다는 데 있다.


왜일까?


개인적 차원의 분별 문제는

대개 객관적 진위여부의 문제보다,

주관적인 가치판단의 문제인 경우가 대다수이다.


즉 다시 말해,

내가 스스로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또 성령님께 묻고 의지하여

답을 찾으면 되는 문제가 대부분인 것이다.


하지만, 개인이 아닌 다수가 걸린 문제는

개인의 생각이나 판단만으로 되는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주장과 판단이 혼재되어 있기에 

그런 상황에서 문제의 객관적 진위여부를 판단하는데는,

그만큼 더 큰 신중한 접근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교회 안에서

A그룹과 B그룹이 나뉘어

서로 분쟁이 일어났는데,

서로 주장하는 바가 다르고, 진실공방이 치열하다면,

누구의 주장이 진실이고 거짓인지에 대해,

매우 차분하고 객관적이고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그 다수가 이렇게 단 몇사람이라 하더라도,

결코 쉽지 않은 게 바로 분별의 문제인데,

국가적 차원의 문제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런 분별의 문제 이전에,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섭리도

크게 나눠보면,


개인적 차원, 공동체적 차원(교회적 차원),

그리고 가장 중요한 국가(민족)적 차원의 범주로 나눠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개인에게 역사하시어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가시는 것처럼

내가 속한 가정이나 교회 공동체에도

역사하시어 뜻을 이루어가시고,

국가와 민족에도 역사하시어 주님의 계획을 이루어가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인류 구속 역사를

크게 이런 범주에 의해 이루어가신다.


그런데, 문제는

사단도 하나님의 이런 구속 역사를 그대로 흉내내어,

개인적 차원, 공동체적 차원, 그리고 국가적 차원에서 

각기 다른 수준의 미혹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 시대가 시대인만큼,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국가적 차원에 있어서,

그 미혹의 정도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게 현실이다.


이런 혼란한 시대 속에서,

가장 분별이 힘든 범위인 국가적 차원의 사안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만큼 영적집중도를 높이지 않으면,

아주 그럴듯한 논리와 사상,

자기안에 심겨진 '종교적 틀'에 갇혀서,

그대로 휩쓸려 가버리게 될 수가 있다.   



여기서 조금만 내 얘기를 해보자면...


예수님을 만난 후,  2년이 지난 2008년,

그때만 해도, 나는 신앙심이 나름 뜨거워서,

재림과 십자가 복음에 대한

여러 신앙관련 자료들도 보고,

여러 목사님들의 말씀도 듣고,

기도 열심히 하면서, 믿음생활에 충실하던 때였다.


그러던 2008년의 어느날,

우연히 어떤 목사님의 말씀을 듣는데,

갑자기 그 목사님이 정치(?) 관련 얘기를 하시면서,

반드시 한반도가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 나는 그 애기를 듣자마자,

속으로 막 비웃으며 판단을 했다.


"아니, 지금이 때가 어느 땐데, 통일이야,

예수님 재림하실 때가 얼마나 임박해 있는데...

그런건 다 정치인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목사님이 너무 시대를 모르는 얘기를 하시네...

그리고 목사님이 균형을 잃고 저렇게 편향적으로

정치적 발언을 해도 돼? 저 교회 성도들은 어째..ㅉㅉ"


아주 또렷히 기억이 난다...

이런식의 생각들을 했던 당시를...


그리고 그 비슷한 시기에

TV뉴스만 틀면 연일 나오던 소식들...

바로 광우병 사태...  


나는 당시 세상적인 이슈에 거의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하나님, 예수님만 생각하며 살고 있다고 여겼는데,


뉴스에 그런 소식들이 연일 집중적으로 보도되고,

이런저런 정보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어줍짢은 지식들이 내안에 막 들어오고, 

괜한 정의감에 불타,

"나도 만약 서울에 있었다면... 저 시위에 참가했을텐데..."

라는 생각을 했던 것도 기억이 난다...!!


내가 귀로 듣고 눈으로 보던 그 정보들이

실상은 사실이 아닌 거짓들이었지만,

그 당시는, 내가 눈으로 들어오던 대부분의

주류언론 미디어, 인터넷 포털 등이

그러한 정보들을 사실인 것처럼 쏟아내고 있었다... 




당시 조직적으로 뿌려지던 광우병 괴담들.

이런 황당한 거짓말을, 대다수 언론들은

사실관계 확인도 하지 않고

거짓 왜곡 선동 보도에 열을 올렸었다.

그로 인해, 너무나 터무니 없고 황당한 거짓말임에도,

당시 대다수 국민들이 분별력 없이 받아들이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그리고 그런 정보들이

거짓임을 증거하는 진실의 소리는,

내가 힘들게 검색하고 찾아야만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모퉁이 구석진 어딘가에서 울려지고 있었지만,

나는 관심이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하나님, 예수님 찾고,

재림과 십자가 복음에 열성적이던 내가...


세상문제 관심없다고 자부하면서도,

정작 내 귀에 들리고, 눈에 보이고,

세상이 강력하게 부르짖는 진실(?)에

내 마음이 서서히 움직여 가고 있었다는 사실이...

지금 생각해보면 기막힌 일이다.


사실, 이 당시 광우병 사태는,

국가적 차원의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분별이 요구되는...


당시 나는 내 나름대로 세상을 멀리하고

'십자가와 재림 복음'에만 관심 갖겠다는

어떤 신앙적인 원칙(?)같은게

나도 모르게 내 안에 형성되어 있던 상태였다.


그 원칙은

내 스스로에 의해 규정되어진

그런 신앙적 원칙이었는데,


하지만 그 원칙이란 것도,

국가적 차원의 어떤 문제가 터지니,

다 사라져버리고,

그 문제에 자연스레 반응하며,

그 거대한 미혹의 흐름 속에 

조금씩 따라가고 있었다. 


결국...

주님도 아니고, 성령님도 아닌, 

내 스스로에 의한 신앙 원칙이

나도 모르게 내안에 세워진 상태에서,

실상은 내가 반응하고 싶은 것에 반응하고,

내안의 자아와 사단의 미혹에 의해

마음의 일부가 그렇게 움직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는, 그냥

그것이 선이었고,

그것이 정의라고,

아주 철썩같이 믿었었다...


내가 보고 듣는 것이

다 진실이라고 아무 의심없이 믿었다.


나름 신앙이 뜨거웠다고 자부하면서도

분별이 필요했던 이 문제에 대해

단 한번이라도, 주님께 여쭈어보고,

성령님의 도우심과 분별하심을

직접적으로 구한 적도 없었다.


그냥 으레

주님이 함께 해주시고 역사해주셔서

내가 그렇게 반응하고 있는 것이라

아주 당연하게 여겼었다.


그렇게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나도 모르게 세워진 신앙원칙이

애초부터 잘못된 방향이었기 때문에,

무너질 때도, 쉽게 무너져버리고

국가적 차원의 문제엔 분별마저 못하고,

사단이 주는 미혹에 별 저항없이

그렇게 조금씩 끌려갔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부분들은, 마음 중심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곁가지적인 방향이 어긋난 부분들이었고,

내 마음의 중심은 그래도 

하나님 안에서 서 있던 상태였었기에,


여타의 신앙생활들,

기도도 꾸준히 잘 했었고,

기도하면서 눈물도 났었고,

삶 가운데 개인적 차원에서

주님의 마음을 깨닫기도 하고, 

말씀을 읽을 때도, 말씀이 잘 들어왔고,

주님의 은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그렇게 

내 중심에 하나님이 계셨기에,

시간이 지난 후, 자연스레 하나님께서는

나의 잘못됐던 방향의 틀을 바로잡아주시고,

하나둘씩 깨닫고, 분별할 수 있게 해주셨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한가지 아찔한 것은,

그때 만약, 이런 문제를 대함에 있어서, 

자칫 사단이 주는 그 미혹에 아주 깊게 빠져들어갔다면,

이건 곁가지적인 방향이 어긋나는 그런 수준이 아니라,

내 마음 중심이 송두리채 흔들리고,

결국 하나님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잘못된 사상과 이념"들이

내 마음 중심에 가득 채워졌을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8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

지금은 국가와 민족의 문제에 대해

내 일처럼 마음이 가고, 관심을 쏟고 있고,

누구보다 한반도 자유통일을 간절히 원한다.


(물론, 지금까지

내가 가장 바라고 소망하며 기다리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이다. 이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또한 신앙적인 균형을 가지고 살려고 노력하고 있고,

무엇보다, 분별이 쉽지 않은 차원의 문제들에 대해선,

내 생각과 내 판단이 아니라, 어떻게든

성령님을 의지하려고 하고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스스로가 신앙이 투철하다며,

하나님께 기도 열심히 하고,

말씀 잘 읽고 듣고 하더라도,

높은 분별이 요구되는 문제에 있어서,

그 방향이 어긋나 있는 경우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상당히 많이 있음을 본다.


왜일까?


앞선 내 경우처럼,

스스로 자기도 모르게

어떤 신앙적 원칙을 마음안에 세우고 있거나,

아니면, 자신은 믿음이 온전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자기 생각과 판단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거라 믿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미 특정한 사상이나 관념이 

내 마음안에 박혀 있으면,


기도 많이 하고, 말씀 읽고, 예배드리고,

신앙생활 하고 있는 내 믿음이

아무리 훌륭하고 정상적으로 느껴진다 해도,

실제 세상 가운데 일어나는 문제를 분별하는데 있어선,

잘못된 방향으로 얼마든지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개인적 차원의 분별과

국가적 차원의 분별 문제는

그 수준이 다르다는 것을....


이런 경우, 내가 아무리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읽고, 신앙생활 잘 하고 있다 해도,

그 문제를 분별함에 대해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직접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묻고 구하는 습관을 들이지 않으면,

이미 내재되어 있는 내 사상과 관념에 의한

내 생각과 판단만 마구 쏟아져 나올 수밖에 없다.



"매체의 힘이 만만치 않다...


 주위에도 적지 않은 목회자들이 있지만

주류 언론과 인터넷을 습관처럼 보고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 시대 속에서 주입되는 선동적 미혹을

간파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말해줘도..

그간 봐왔던 동료보다

매체의 말을 더 신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도 나름 말씀보고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말씀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이 나의 인식과 사고의 틀을 구축하도록 해서

이물질이 저절로 걸릴 정도가 되어야 한다.


'비교'와 '팩트체크'만 하려는 노력이 있었어도

그리 되기도 쉽지 않은데.. 안타깝다."


- 이환희 목사님 글 中



사실 이런 경우는 대부분이 자기 안에

크든작든, 특정한 사상과 관념이

들어차 있는 경우가 많다.


어떤 특정한 프레임안에 사로잡혀 있으니,

사실여부에 있어서,

언론들이 편향되고 왜곡된 보도를

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더라도,

그것은 보이지 않고,

자기안에 있는 사상과 관념에 의해

내가 믿고싶은 것만이 진실이고,

내가 보고싶은 것만이 팩트가 되고 본질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스스로는 균형잡힌 신앙인이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았다고 착각하며 산다.


누구보다 편향되어진 사고의 틀속에 갇혀 살면서

자기 안에 내재된 그 종교적 틀에 맞지 않는 소리를 하면

교회에서 왜 정치적인 소리를 하느냐며 판단을 일삼는다.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성령님은 여러 분이 아니라 한 분이시다.


그 한분이 이 사람에게는 이런 분별을

저 사람에게는 저런 분별을 허락하시지 않는다.


서로 상반된 곳을 보는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반드시 자기 생각과 자기 판단이

나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마음 중심이 하나님 안에 바르게 서 있으면서도,

곁가지적인 방향이 조금 엇나가,

지금 당장은, 바른 본질을 보지 못하고 있는

예전의 나와 같은 그런 이들도 있을 것이고,


안타깝게도, 성령님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시어

그 내면에 들어차 있는 왜곡된 사상과 관념을

비춰 보여주시지 않는 이상,

자기가 보고싶은 것만 보고,

듣고싶은 것만 듣고, 

믿고싶은 것만을 믿는,

그런 관념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이들도

상당히 많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자신이 생각하고 사고하고 있는 것들이

정녕 하나님안에 합당한 것들인지 날마다 점검하는 노력없이,

그져 "내가 하는 생각은 옳은데, 왜 저들은 저런 잘못된 사고에 갇혀서

저런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거지??"

이런식으로 스스로에 대한 자각은 전혀 할 생각없이 

그져 남의 말과 행동만을 관찰하며 판단하는 이들에겐

결코 성령님의 터치하심은 쉽게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교회에서 무슨 정치문제에 관심을 갖나?

교회는 오직 복음에만 신경써야 한다..."


언뜻 보면 맞는 말처럼 보인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하게

중심에 두어야 할 점이 있다.


신앙생활에 있어선 균형이란.


"믿음과 행함"

"말씀과 은사"와 같은

교리적인 범위에 국한된 균형도 그렇지만,


삶 가운데서,

교리적인 부분과 실제적인 부분이

균형 있게 조합되는 것,


예를 들어,

"지금 이 마지막 때에 통일이 뭐가 중요하냐,

북한인권이든 종북이든 그런 정치문제엔 관심끄고

제발 복음에나 좀 신경쓰자"

이런식으로 자기 스스로가 세운 신앙공식이 아니라


"통일은 반드시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알려야 하고,

저 사악한 독재 체제는 무너져야 한다.

그리고 살기 위해 북한을 탈북하는

탈북자들의 생명도 살려야 한다.


그래서 북한땅에 복음이 들어가,

한반도가 복음통일이 되어서

남북한이 함께 찬양할 수 있는 날이 와야 한다.


나라가 없이는 교회도 없고 가정도 없다.

진리안에서 우리가 분별해야 할 것을 온전히 분별하고

세상이 주입하는 미디어들의 거대한 흐름속에서

주입되는 거짓을 분별하여 이 나라가

복음의 진리안에서 바르게 세워질 수 있도록

분별하고 기도하며 나아가자..." 등등

이런식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의 가치가

실제 삶에서 행동으로 나타날 때,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진짜 복음의 삶을 사는 것이고,

빛과 소금의 가치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회개'다.

교회가 회개치 않은 교만함, 강팍함으로

지금의 국가적 문제가 생겼다는 말은 분명하다.


그래서 우리가 그 마음으로 통회자복하는 것은

사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이 또한...

겉으로는 회개를 말하고 거룩함을 강조하는 것 같지만,

분별이 필요한 여러 국가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모습으로, 관심갖지 않고 분별하지 못한 상태에서

회개를 강조하는 것은, 그 또한 마찬가지로

어떤 '신앙적 원칙'을 자기안에 세워놓고,

정작 주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왜냐면...

문제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인식하고 분별을 해야지만,

'무엇을 어떻게' 회개해야 하는지...

올바른 방향 안에서 진짜 회개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분별하며 관심갖고 나아가야 할 그것이

외적인 모양으론 '정치'라는 껍데기에 가려져 있기도 하고,

세상적인 그 어떤 프레임으로 나타나는 것들도 있다.


지난 몇년간 계속해서 블로그 카테고리에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여러 국가적 문제에 대해

이것이 실상은 국가적 차원의 영적전쟁임을,

계속해서 분명하게 전하고 있고,

지금도 이 나라 안에 여러 거짓과 선동에 의한

분별이 필요한 여러 문제들을 다루고 전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런 껍데기에 가려진

본질을 보진 못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분별이 필요한 것들을 대할 때, 

종교적 틀에 갇혀 있으면,

그 프레임 안에 있는 본질은 보지 못하고,

스스로가 내세우는 종교 틀안에서

때론 말씀을 내세우고, 거룩한 어떤 모양을 내세워서

판단하고 정죄하면서, 정작 자신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치 못하는 치명적인 우를 범하게 된다.


그래서...

단 한번이라도 다른 사람의 사고와 내 사고가 충돌할 때,

정녕 내 생각과 사고가 옳은지를 점검해보는 것이 우선이다.


앞서 고백한 바와 같이,

이미 뼈저리게 한번 경험해보았기 때문에,

과거의 나처럼 그런 종교적 틀, 신앙공식을

자기 안에 만들어놓고

그런 종교적 공식에 의해서만 사고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이 있음을 보고 있어서 심히 안타까운 마음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훗날 물으실 것이다.


너는 얼마나

내 생각과, 내 뜻과, 내 마음에 합한 자로써

나와 함께 살았느냐고...



글: 엘샤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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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며칠 동안, 밤이면 밤마다 쏟아져 내리던 폭우가 공기 속의 더러운 먼지를 모두 씻어낸 때문일까? 유리알같이 맑고 투명한 하늘이 눈부신 아침이다. 복잡하고 심란한 마음도 털어낼 겸, 신선한 산소도 들이킬 겸, 가까운 산, 작은 바위를 찾아 잠시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본다. 새각시의 치맛자락처름 보드라운 솜털 구름이 두둥실 고운 그림을 그리며 흘러가는 파아란 저 하늘은 평화로워서 좋고, 자연의 소리는 언제나 맑고 깨끗하고 그 무엇보다 거짓이 없어 좋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 렘 17: 9) 탄식하신 주님의 말씀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렇다. 인간의 마음이란 참 신묘막측한 것이다. 누가 그 마음을 헤아려 알 수 있으리. 그리스 철학자요, 플라톤의 위대한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사고(思考)의 활동 속에는 항상 심상(心象)이 따른다.” 라고 말했던 것 같다.
 
심상(心象)이란 감각에 의하여 획득한 현상이 마음속에서 재생된 것, 이전에 경험한 것이 마음속에서 시각적으로 나타나는 상(象)을 의미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백두산을 머리에 그리는 경우, 지각만큼 생생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형태라든가 산꼭대기에 쌓인 눈 따위가 떠오른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백두산의 심상(心象)이라고 국어사전에서 정의하고 있다.

느닷없이 별님이 어인 심리학 강의냐고 놀리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으나, 필자는 오늘 전공 분야도 아닌 심리학을 논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과 내 마음의 소리(내면의 소리), 그리고 사단의 소리, 그 경계선이 어디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려 하는데, 그전에,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잠시 설명해 본 것뿐이다.

사실, 성경은, 인간이 물리적(물질적(物質的)) 세계를 벗어나, 영적인 세계를 너무 탐하거나 영계의 영물들과 교류하는 것을 엄히 금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논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기에 금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을 빌미로,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 순진하고 어리석은 영혼들을 미혹하는 것이다. 과거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다. 이런 때인 만큼, 성도가 영적 세계를 너무 깊이 알려고 시도하는 것은 위험한 것이 되겠으나, 우리 신앙생활의 잣대(Cannon)가 되는 성경 말씀을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우리가 배워두어야 할 필요성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리 없는 소리, 영음(靈音)으로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어떤 것이 있을까? 그것은

1. 마음의 소리
2. 사단의 음성
3. 천사의 말
4. 하나님의 음성, 이렇게 분류해 볼 수 있겠다.

인간은 다른 동물에게 없는 특별한 인지(knowledge)능력과 양심(conscience) 이란 것이 있다. 타락하기 전, 인간의 마음은 본래 선한 양심( good conscience)이 있어서 주께서 심어두신 그 양심을 따라, 재판석을 차리기도 하고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답할 수 있어, 선(善)과 악(惡)을 분별할 수 있는 선택권을 부여받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책망과 질책, 변명 그리고 위로의 음성이 들려오기도 하고, 또 때로는 자신을 신원하여 주고 달래어 주며 어루만져 주기도 하는 것이다. (판사도 검사도 변호사도 모두 내 마음속에 있다고 해야 하나? ㅋㅋㅋ) 이런 현상을 “서로 송사하며 변명하기도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롬 2: 15절 참조)

본래 인간은 이 선한 양심( good conscience)이 하나님을 찾아가게 되는 것인데, 마음속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주파수를 받아들이기도 하고, 깨끗한 양심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대화하며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된 만물의 영장이기 때문이다.(창 1: 27절 참조) 문제는 그 양심이 병들고 화인 맞아 더는 그 양심이란 것마저 믿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딤전 4 : 2)

예수님을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물(말씀)과 피로 거듭난 성도는, 그동안 병들어 제 기능을 상실했던 양심이 먼저 살아나게 된다. 이렇게 선한 양심으로 살아난 성도(벧전 3 : 21절 참조)를 가리켜 거듭난 성도(Born Again Christian)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다시 태어난 성도가 하나님의 양이라면,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도, 기이한 일도 아니다. 성경은 우리(성도)는 오늘날도 분명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요 10장 27절)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요 10장26절)에서는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한다.” 라고 경고해 주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거듭난 성도가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이 비정상이 아니라, 들을 수 없는 것이 비정상이다. 문제는 바른 분별력이다. 주님의 영(Holy Spirit, Hoy Ghost)으로 주시는 신령한 은사들을 사모하는 성도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음성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단의 음성일 것이다. 인간의 마음 밭을 잘 알고 있는 사단은 하나님의 음성을 흉내 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마 4: 3-10 참조)도 하고 예언적 형태를 갖추기도 하여 인간의 마음속에 거짓 심상(心象)도 불러일으키고, 거짓 음성을 말씀의 씨앗인양 뿌려대기도 한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원수가 ‘가라지’ 를 뿌리고 갔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 마 13: 25-26 참조)

항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사람이 부쩍 많아졌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영(Hoy Spirit, Holy Ghost)을 소유한 거듭난 상태가 아니란 것이다. 병든 양심, 하나님의 원수 된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 아직도 옛사람 그대로인 상태에서, 마음속에 어떤 음성이 들려온다고 하여 그 음성이 모두 다 하나님의 음성은 아니란 것이다.(하나님의 자녀는 그 열매로 그들을 알 수 있다.) 사람이 물(말씀)과 피와 성령으로 완전히 거듭난 새사람,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 마음속에서나 귀에 어떤 소리가 들린다면, 그것은 십중팔구 사단의 음성임을 주지(周知)해야 한다.
 
영험하다는 무속인들이 자신의 마음에서 들리는 마음의 소리, 혹은 사단의 졸개들의 음성을 실제로 듣는다는 것은 괄목할 만한 것이다. 또 거듭난 성도들에게도 흉내쟁이 사단이 하나님의 음성인 양 가장하여 들려지게도 한다. (마 4: 3-11, 고후 2: 11 참조) 이런 영적 원리를 항상 기억하고 내 마음속에서 들리는 모든 음성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받지 말고, 반드시 우리 신앙생활의 잣대(Cannon)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검증도 하고 분별도 해야 한다! ( 마 4: 3-11, 고후 2: 11 절 참조)

아이홉 지도자인 ‘마이크 비클’ 씨의 고백에 의하면, 그들이 쏟아내는 예언이 80%가 틀리고 20%도 정확성이 있더라고 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그런 자들의 예언은 무엇이라고 지적하는가? 성경은 그런 자들의 예언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니 두려워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사단이 시험하는 미혹의 음성이란 것이다. 정말 하나님께서 주신 예언, 하나님의 음성이라면 100% 모두 정확해야 한다!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말지니라” (신명기18:21)

그렇다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들은 음성의 예언에 100% 정확성이 나타나지 않는데, 왜, 무엇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고 더욱이 사단의 음성을 들었다고 인정하기 싫어하는 자존심 때문이다! 사단에게 속고 있는 것임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자만이고 그러면 그럴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어 가는 것이다!
 
얼마전, 이단에 미혹된 한 청년이, 부모님의 권유로 상담 교육을 받고 치유, 이단에서 빠져나온 뒤 “사실은 상담 하루 만에 깨져버렸는데 내 자존심 때문에 시인하질 못했다.”라며, 진솔하게 고백한 것을 우리 아멘넷 기사에서 읽어 본적 있다.

지난 날, 우리 아멘넷의 한 논객 님께서 ‘요나’ 선지자와 ‘니느웨’ 성을 그 예로 들면서, 하나님께로부터온 예언일지라도 틀린 적도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천만의 말씀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요나’ 선지자의 예언은 틀린(wrong)것이 아니라, 변경(change)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예언이 변경(change)된 사실을 당사자인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그 변경(change)된 사실을 전하여 주셨다.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 그 주신 예언의 말씀을 변경(change)하고 그 계획하신 바, 뜻을 바꾸실 때는 반드시 그 종에게 말씀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언이 빗나가고 틀린 것은 당사자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란 것이고,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성령 하나님은 같은 분이시기에, 같은 방법을 일관성 있게 사용하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신령한 은사를 사모하는 성도가, 이 외에도 한 가지 더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직통 계시적 형태를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성도)가 모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어야 하며 그 음성을 들려주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의 역할이시요, 사용되어지는 말씀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 안에 그 내용이 있어야만 한다. (행27:22-25)

계시 속에는 크게 나누어 두가지 형태의 계시가 있다
1. 특별계시, 2. 일반계시로 나누어진다. 간단히 요약해, 특별계시는 a)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며 b) 기록(문서)계시(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일반 계시도 다음 두 가지 계시로 세분해 볼 수 있는데, a)자연계시, b) 양심계시이다.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시고, 기록(문서)계시의 목적은 인간 구원이다. 자연계시 역시, 그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뜻(계시)을 나타내 보여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현 세대에서 우리(성도)는 성경을 다시 쓸 수 있는 문서(기록) 계시는 받을 수도 없고, 또 받을 필요가 없다. 일반계시도 자연 속에서 찾으면 되기에 우리가 다시 재창조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우리(성도)가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란, 곧 성령님의 조명하에 문서(기록)계시, 양심계시, 혹은 자연계시 속에서 찾아지고 들려질 수가 있으며,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양으로서 목자의 음성을 분별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성도(양)는 반드시 목자의 음성, 곧 성령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이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우리 속에 계시면서 역사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몫이며, 반드시 성경 말씀을 레마(로고스)로 들려져야 하고 그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며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신다.

하나님의 음성을 양들에게 들려주시는 것은 목자로서 양들을 바른길, 구원의 길, 예수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주시기 위함이다. 언제 어느 때 장사가 잘되고 또 아들이나 딸이 원하는 학교에 입학할 수가 있고 없고, 등등…이런 유의 점치는 형식이나 족집게 점장이 식의 음성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 14 : 26)

다음은 오래전 필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검증법을 성경을 토대로 경험한 것을 나눈 적이 있는데, 그 부분을 옮겨 적는다. 너무나 중요하기에 복사하여, 성경과 대조하여 잘 배우면 신앙생활에 유익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누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나 무시로 기도할 때나 주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가 있다.
그 음성을 판별하지 못해서 많은 주의 종들이 사탄의 덫에 걸려 넘어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젊었을 적부터 하나님께서 온갖 고생 중에서 당신의 음성을 가려내는 훈련을 시키셨고,성령님께서 말씀을 주시면, 아래와 같이 말씀의 잣대로 검증된 대언은, 그 정확성에 있어서 단 한 번도 그 말씀이 빗나가거나 틀려본 적이 없다. 고로, 하나님의 음성은 반드시 다음과 같은 잣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검증 돼야만 한다.

1. 자기가 기도하거나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정 반대의 생각이 머리에 주입된다. 도덕적으로 흠이 없어야 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 : 23절 하반절)".

2. 그 생각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어야 하며 레마(로고스, 기록된 계시 말씀)로 머리에 정확히 떠오르거나 입술에서 터져 나온다. 성령님께서 예수님, 곧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기 때문이다. (요 14 : 26절)

3. 그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뜨겁다(때론 너무나 뜨거워서 부모가 돌아 가셨을 때보다 더 통곡하지만 마음은 오히려 큰 감동으로 행복감을 느낀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눅24:32절 말씀 )”.

4. 다른 이가 예언 은사적 말씀을 받았을 때에도 예언 은사를 받은 사람이면 그 말씀을 들을 때에 같이 마음이 뜨거워진다. (눅 1 : 41-45절)

5.항상 선한 말씀이 아니고 때론 책망함과 바르게 함으로 탄식하신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 : 16-17절)”.

양에게 있어서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이 중요하듯, 성도가 성령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건만 ‘현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대는 끝났다’ 라고 가르치므로서 성령님의 역할마저 제한시키려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신학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과 목회자들에게 만연하게 된 것은 ‘신비주의자들’의 1류급 신자의식이나, 직통계시 파들의 이단적 행위가 성도들의 삶을 좀먹는 것을 많이 보아온 까닭이기도 하고 또 자신이 성경을 많이 읽지 않고 들은풍월, 혹은 배운 신학 사조만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독히 함으로써 항상 살아 있는 말씀이 내 속에서 역사 하시도록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또 읽어야 하며, 성령 하나님께서 나의 영과 혼과 육체를 온전히 주장하시도록 겸손하게 내 마음의 보좌를 내어 드려야 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면, 주시는 말씀이 힘들더라도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결단을 보여야만 한다. 이렇게 될 때 현대에도 양은 목자 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으며 그분의 사랑과 보호하심 속에서 예수그리스도의 날까지 안전하게 인도하심을 받게 된다.


"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마 24: 11),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 마  24: 24),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 (신명기18:21)

USA 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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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본질과 속성


종교개혁 이후 개혁파 교의학 03 / (The Divine Essence an Attributes)













저자/역자 : 리처드 멀러/김용훈 | 출판사 : 부흥과개혁사


발행일 : 2014-12-30 | (150*228)mm양장 960p


판매가 : 45,000원 → 40,500원








신학서론과 개혁파 신학체계의 두 원리들(principia)에 대한 본 연구는 실로 그 자체로 스콜라주의적인 정통주의 개신교 사상에 대한 논의와 부분적인 재평가를 위한 알맞은 기초를 제공한다. 함께 다루어진 이 세 개의 논제들(loci)은 17세기 신학의 전제들과 방법들에 대한 일별을 제공한다. 정통주의자들이 신학 원리들로 규정했고 아마 틀림없이 개신교 정통주의의 정신에 가장 중요했던 이 교리들의 두 가지 내용들―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개관은 신학서론에서 개략적으로 설명한 정의들 · 연구법들 · 신학 방법들을 교리의 공식화에서 어떻게 사용하기 시작했는지를 예증한다. 개혁파 정통주의 신론―하나님의 본질 · 속성들 · 삼위일체―은 종교개혁 이후 개혁파 교의학의 특징에 대해 신학서론과 성경론보다 훨씬 더 많은 증거를 준다. 이 교리는 매우 성경적이고 · 고도로 철학적이며 · 철저히 17세기의 석의적인 그리고 철학적인 맥락 안에 위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탁월하게 전통적이고, 결코 경건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이 교리는 그것의 고백적 서약에 있어서 개신교적이고, 그것의 스콜라주의적인 방법과 초대 교부적 토대들과 고전 철학적 뿌리들에 있어서 가톨릭적(catholic)(보편교회적 의미에서!)이다. 이 교리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함께 삼위일체론적인 정통주의(a trinitarian orthodoxy)뿐 아니라 존재론적 · 설교적 · 케리그마적 경향을 공유하지만, 또한 중세의 신학 박사들의 신학과 함께 변증법적 · 철학적 예리함과 실로 내재적 삼위일체의 관계들에 대한 관심을 공유한다. 더욱이 이 주제를 두 권의 책으로 나누어 하나는 본질과 속성들을 다루고 다른 하나는 삼위일체론을 다루는 것은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이 하나로 이해했던 주제들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다. 이 주제를 이렇게 나누는 것은 단지 이 연구 과제의 늘어나는 길이를 감안한 것일 뿐이다.




개신교 정통주의의 교리적 진술들의 특징은 스콜라주의적인 개신교 교의학을 이성주의의 한 형태와 동일시하는 것을 아주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리는 성경의 규범들 · 신앙고백의 범위 · 공식화의 보편교회성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보여준다. 누구든지 종교개혁자들을 맹목적인 믿음주의자들(blind fideists)로 내쫓아서는 안 되는 것처럼,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을 이성주의자들로 내쫓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비록 17세기의 신학자들이 개신교의 1, 2세대 종교개혁자들보다 더 형이상학적인 특성을 가진 교리적 논의들을 하고자 했던 것은 아주 분명하긴 하지만, 이런 논의들이 완전한 규모의 신학 체계를 형성하는 것에 속하고, 정통주의자들이 이 논의들을 경솔하게 시작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아주 확실하다.




따라서 개혁파 정통주의의 성경주의(biblicism), 혹은 더 정확하게는 17세기 신학의 특징인 석의와 교리의 공식화 사이의 밀접한 관계는 또한 제 3권과 4권의 주제이다. 개혁파 정통주의 신론이 매우 석의적이었다는 것, 그리고 삼위일체론과 관련된 논제의 부분이 두드러지게 석의적이었다는 것은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다. 더욱이 이 주제는 증거 구절들(dicta probantia)의 사용에 대해 『종교개혁 이후 개혁파 교의학』 제 2권에서 진술했던 요점을 계속 이어가는 것과 증거 자료를 제공하는 것으로서 위치한다. 『종교개혁 이후 개혁파 교의학』 제 2권에서 이 “증거 구절들”(proof texts)이 그것들의 문맥에서 왜곡되어 비-석의적인 교의 신학을 정당화하는데 사용된 성경 구절들이 아니었다는 명제를 제시했는데, 여기에서는 이 명제를 다양한 주석자들의 작업과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의 교리적 공식화들을 서로 비교함으로써 예증한다. 이와 비슷하게 석의 · 교의학 · 경건 사이의 관계는 신학의 학술적 주석들과 체계들뿐 아니라 설교들과 (일반적으로 일련의 선포된 설교들에서 나오는) “대중적인” 주석들을 인용함으로써 예증한다. 이렇게 본권은 또한 이것의 조직신학적인 구성(systematic organization)에도 불구하고 대학 강단을 넘어선 개혁파 정통주의의 더 폭넓은 영향력을 예증하고 입증한다. (나는 또한 조사한 성경 본문들에서 선별적이어야만 했다는 것을 밝히는데, 교리의 긍정적인 석의상의 기초를 증명하거나 다양한 반-삼위일체론자들에 반대한 논박의 증거 자료를 제공하는 대표적인 본문들만 선택하려고 했다. 그러나 본 연구의 길이를 감안할 때, 모든 석의상의 논거들을 개관하기란 불가능했다.




리차드 A. 멀러 -저자 서문 중에서






제 1부 서론




제 1장 12세기부터 15세기까지의 신론


1.1 신론의 역사에 대한 연구와 관점 | 53


A. 신론의 역사에 대해 - 16, 17세기 위주


1. 본 연구의 범위와 방향


2. 본 연구의 현황


B. 개혁파 정통주의의 신론: 테제를 향해


1. 일반적 문제: 연구 궤적들과 연속성들과 불연속성들을 확인하는 일


2. 몇 가지 세부사항들




1.2 스콜라주의 신론에서의 성경?전통?철학 | 71


A. 초기 스콜라주의의 공헌: 캔터베리의 안셀무스에서 페트루스 롬바르두스까지


1. 역사적 발전의 과정


2. 초기 스콜라주의 신학에서의 하나님의 속성들


3. 하나님의 단순성


4. 다양한 속성들


B. 높은 스콜라주의 신론: 13세기의 신학자들


1. 하나님에 대한 이해 가능성


2. 하나님의 존재의 “증명들”


3.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들


4. 하나님의 단순성


5. 속성들과 속성들의 공식화의 논리에 대한 다양한 연구법들




1.3 신론에 대한 중세 후기의 공헌들 | 113


A. 중세 후기 신학에서 일어났던 관점의 변화들 - 쇠퇴 혹은 발전


1. 둔스 스코투스, 두란두스, 그리고 그들의 동시대인들의 역할


2. 스코투스와 두란두스 이후의 발전들: “유명론”과 근대의 학문방식의 문제들


B. 세부 쟁점들


1. 하나님에 대한 가지성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명들


2. 하나님의 능력?의지?자유


3. 하나님의 단순성


4. 다양한 속성들: 속성들의 순서와 배열




제 2장 16세기부터 18세기 초까지의 신론


2.1 종교개혁의 신론 | 147


A. 종교개혁 초기의 하나님에 대한 견해들


1. 루터와 멜란히톤


2. 츠빙글리


B. 제2세대 집성자들의 저작에서의 신론


1. 칼빈?비레?불링거


2. 히페리우스?무스쿨루스?버미글리?허친슨


C. 개혁파 신앙고백들에서의 신론


1. 16세기의 신앙고백들


2. 정통주의 시대의 신앙고백들




2.2 개신교 스콜라주의와 신론: 초기 정통주의가 이루었던 것 (1565~1640)
| 165


A.관점의 교정을 향해


1. 자료에 대한 현대의 연구법들의 신학적이고 역사적인 편견들


2. 교정의 근거들


B. 초기 정통주의의 발단들과 후기 르네상스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부흥


1. 초기 정통주의 사상가들과 스콜라주의 논법의 부흥


2. 수아레즈?몰리나?수정된 토마스주의의 새로운 형이상학


3. 개신교 신학자들 사이에서: 하나님과 새로운 철학적 관점들




2.3 높은 정통주의 시기에서의 신론(1640~1685) | 195


A. 높은 정통주의로의 변천


1. 사상가들 및 쟁점들


2. 논쟁과 변화: 구체적인 발전들


B. 개혁파 정통주의와 이성주의의 발흥


1. 데카르트와 데카르트주의자들


2. 개혁파 정통주의자들과 스피노자주의


3. 17세기 이성주의의 다른 형태들과 그 영향력


C. 개혁파 정통주의 신론의 완전한 발전


1. 영국의 신학자들


2. 대륙의 개혁파 신학자들


3. 공식화와 논쟁에서의 쟁점들




2.4 17세기 말과 18세기에서의 정통주의?이신론?이성주의 | 229


A. 대륙에서의 발전들


1. 라이프니츠, 그리고 이성주의와 정통주의 사이의 화해의 발단들


2. “과도기적 신학”과 이성주의로의 변천


3. 개혁파 정통주의와 볼프 철학


4. 18세기의 전통적인 정통주의의 잔여물들


B. 쇠퇴하는 영국 제도의 개혁파 신학


1. 영국 신학의 이성주의와 광교회주의


2. 18세기의 정통주의의 잔여물들




제 2부 개혁파 정통주의 신론




제 3장 하나님 안에서의 존재와 본질과 속성들의 단일성


3.1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에서의 신론의 순서와 배치 | 251


A. 종교개혁 시대에서의 방법과 순서


1. 종교개혁 시대의 신론의 “방법들”


2. 현대의 비평들: 신론의 순서와 배치에 대한 잘못된 이해들과 잘못된 진술들


B. 초기 정통주의 개혁파 교의학의 순서?방법?구성


1. 초기 정통주의 모델들: 라무스주의의 지식 체계론과 우선순위의 문제들


2. 다른 초기 정통주의의 연구법들




3.2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 | 268


A.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신적 불가해성


1.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의 원천들과 한계들


2. 하나님을 아는 방식들과 신학의 경건


3. 초자연 신학?자연 신학?형이상학-정통주의 시대의 개혁파 사상에서의 관계와 구별


B. 개혁파 신학에서의 자연과 이성, 신 존재 증명들의 문제


1. 개혁파 정통주의에서의 신 존재 증명들의 형태와 특징


2. 종교개혁자들과 신 존재 증명들: 멜란히톤의 신 존재 증명들의 시작


3. 칼빈과 신 존재 증명들


4. 불링거?무스쿨루스?히페리우스의 신 존재 증명들


5. 신 존재 증명들의 방향: 논리적?수사학적 연구법들과 “사변적”?“실천적” 무신론의 문제들


C.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에서의 신 존재 증명들


1. 신 존재 증명들의 특징과 유형 분류 체계들


2. 증언으로부터 도출한 신 존재 증명들: 계시와 수사학적 논증들


3. 이성으로부터 도출한 신 존재 증명들: 후험적 증명들


4. 후기 정통주의 시대에서의 신 존재 증명들의 변화




3.3 술어적 서술의 문제와 하나님의 속성들에 대한 일반론 | 317


A. 술어적 서술의 문제


1. 술어적 서술과 하나님을 묘사하는 용어의 어려움: 정통주의의 몇몇 예비 단계


2. 술어적 서술의 규칙들


3. 속성들과 본질적 특성들: 유비와 불균형의 문제들


4. 계시와 이성, 그리고 속성들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


B. 하나님의 속성들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교리


1. 종교개혁 시대에서의 하나님의 속성들에 대한 문제


2. 하나님은 “본성”을 가지시는가? 무스쿨루스의 비평적 질문


C.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에서의 하나님의 속성들


1. 해설의 기본 쟁점들: 속성들에 대한 논의와 이 논의의 성경적이고 전통적인 근거들의 중요성


2. 속성들?우유성들?특성들?본질적 완전성들: “속성들”에 대한 교리에서의 용어의 구별들


D. 분류의 유형들


1. 패러다임들을 이해하는 일을 향해


2. 하나님의 이름들?본질적 혹은 절대적 속성들(첫째 순서의 속성들)?관계적 속성들 및 하나님의 정동들(둘째 순서의 속성들)


3. 본질?생명?지성?의지의 속성들


4. 부정의 방식과 탁월성의 방식으로의 분류 혹은 선험적 속성들과 후험적 속성들로의 분류


5. 본질적 특성들?하나님의 활동성의 속성들?하나님의 관계성의 속성들


6. 논증적으로 배열된 속성들: 무엇인가?얼마나 큰가?어떠한가


7. 비공유적 속성들과 공유적 속성들




제 4장 하나님의 본질?이름들?“본질적” 속성들


4.1 하나님의 본질?비의존성?단일성
| 367


A.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교리


1. 개혁파의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논의에서의 기본적인 쟁점들과 연구법들


2. 종교개혁 시대의 교리


3.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의 교리


B. 하나님의 비의존성과 단일성


1. 하나님의 비의존성


2. 하나님의 단일성




4.2 하나님의 이름들 | 399


A. 종교개혁 시대에서의 하나님의 이름들에 대한 교리적 논의


1. 하나님의 이름들과 종교개혁자들의 신론


2.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 여호와


3. 하나님의 다른 이름들


B. 하나님의 이름들에 대한 개혁파 정통주의의 논의


1. 하나님의 이름들에 대한 일반론: 분류와 논의의 유형들


2. 여호와 엘로힘


3. 4자신명: 야훼 혹은 여호와


4. 하나님의 유일한 이름으로서 4자신명에 대한 소키누스주의의 반론들


5. 하야: “스스로 있는 자”


6. 엘로힘: 유적이지만 복수 형태인 이름


7. 샤다이와 엘 샤다이


8. 하나님의 다른 이름들




4.3 단순성?영적 특성?불변성 및 관련된 속성들 | 438


A. 하나님은 무엇이신가: 첫째 순서의 본질적 속성들


B. 하나님의 단순성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교리


1. 초기 종교개혁자들


2. 칼빈과 무스쿨루스


C. 하나님의 단순성에 대한 개혁파 스콜라주의자들의 교리


1. 구성 요소로 이루어지지 않는 특성으로서의 단순성


2. 단순성,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의 구별들의 실재


D. 구성요소로 이루어지지 않은 존재 안에서의 속성들의 구별


1. 존재의 특성들과 존재 안에서의 구별들: 예비적 숙고들


2. 개혁파 정통주의와 하나님의 본질 안에서의 구별들의 문제


3. 개혁파 정통주의의 다양한 공식화: 전통적인 논쟁의 되풀이들


E. 영적 특성과 비가시성


1.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


2. 하나님의 영적 특성에 대한 개혁파 정통주의의 견해


3. 하나님의 비가시성


4. 정통주의 시기에서의 하나님의 영적 특성과 비가시성에 대한 논쟁


F. 하나님의 불변성


1. 최근의 사료 연구에서의 불변성


2.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


3.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한 개혁파 정통주의의 견해: 정의들


4. 불변성과 성경: 석의적 논증


5. 불변성과 이성: 전통적인 석의에 대한 신학적 논증과 철학적 뒷받침


6.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한 반론들


7. 실천적 적용: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한 고백과 경건


G. 완전성과 필연성


1. 하나님의 완전성


2. 하나님의 필연성




4.4 하나님의 무한성과 영원성 및 관련된 속성들 | 525


A. 하나님의 무한성


1. 기본적인 정의들과 성경의 근거들


2. 본질적 무한성과 외향적 무한성: 하나님의 무한성에 대한 절대적 이해와 관계적 이해


3. 논쟁에서의 쟁점들


B. 양과 관련된 무한성: 하나님의 위대성


C. 공간과 관련된 무한성: 무변성과 편재성


1. 무한성과 현존: 종교개혁을 반영하는 스콜라주의적인 문제


2. 외향적 속성들로서 하나님의 무변성과 편재성에 대한 개혁파 정통주의의 개념


3. 보르스티우스와 소키누스주의자들?루터파?다양한 데카르트주의자들에 반대한 논쟁들


4. 편재성: 긍정적 해설과 철학적 함의들


D. 시간과 관련된 무한성: 영원성


1. 연구법들과 전제들


2. 석의상의 근거들


3. 영원성, 영원한 지속, 그리고 시간의 계기적 연속의 문제


4. 무한성?영원성?영원한 지속: 하나님의 지속의 내향적 측면과 외향적 측면 및 진정한 시간성에 대한 확언


E. 실천적 부분: 하나님의 무한성?편재성?영원성의 “적용들”




제 5장 생명?지성?의지의 속성들


5.1 “둘째 순서”의 속성들: 하나님의 활동과 외향적 발현 | 587


A. 초기 정통주의 모델들: 퍼킨스와 폴라누스


B. 높은 정통주의: 데카르트주의적 연구법과 반데카르트주의적 연구법




5.2 생명?전충족성?하나님의 복되심 | 591


A.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


1. 하나님의 생명과 자존성


2. 하나님의 충족성


3. 하나님의 복되심 혹은 지복


B.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에서의 하나님의 생명


1. 하나님의 생명과 자존성


2. 하나님의 전충족성


3.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에서의 하나님의 복되심




5.3 하나님의 지적인 속성들: 오성?지식?지혜?참되심


?신실하심 | 617


A. 지적인 속성들: 논제의 구조와 내용


B. 하나님의 지혜


1.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


2.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개혁파 정통주의의 정의들


3. 하나님의 사역들에서의 하나님의 지혜의 증명들


4. 하나님의 지혜의 교리의 실천적 적용


C. 하나님의 오성과 지식


1. 종교개혁자들의 견해들


2. 개혁파 정통주의의 하나님의 지식 혹은 전지에 대한 교리의 성경적?이성적 근거들


3. 기본적인 정의들과 반론들


D. 하나님의 지식: 하나님의 지식의 방식?대상들?정도


1. 하나님의 앎의 방식


2. 하나님의 앎의 대상들과 정도


3. 하나님의 “예지”


4. 하나님의 전지 교리의 실천적 적용


E. 하나님의 앎의 구별들


1. 필연적 혹은 본성적 지식과 자유로운 혹은 자발적 지식


2. 단순한 오성의 지식과 바라봄의 지식


3. 한정되지 않은 지식과 한정된 지식


4. 실천적 지식과 사변적 혹은 이론적 지식


5. 보편적 지식과 개별적 지식


6. 승인의 지식과 배척의 지식


F. 하나님의 “필연적” 지식과 “자유로운” 지식, 그리고 “중간 지식”의 문제


1. 기본 정의들


2. 기본적인 구별들에 대한 17세기의 비평


3. 중간 지식


4. 중간 지식에 대한 개혁파 신학자들의 비평: 몰리나주의의 문제


5. 소키누스주의의 문제: 미래의 우연성에 대한 제한된 예지


6. 조건부의 일들?가능한 일들?반사실적서술들: 몇몇 결론들




5.4 의지와 자유 | 694


A. 개혁파 신학에서의 하나님의 의지


1. 현대의 논의에서의 이 문제의 상황


2. 종교개혁과 정통주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B.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에서의 하나님의 의지


1.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무스쿨루스?칼빈?버미글리의 교리


2. 하나님의 의지의 구별들


C.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개혁파 정통주의의 교리


1. 하나님의 단일한 의지에 대한 기본 정의들


2. 하나님의 자유: 필연적이고 불변하며, 자발적이고 구속 받지 않는 자유


3. 하나님의 전적인 자유: 유한한 질서와 관련해서 중립의 자유 혹은 정반대의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4. 하나님의 의지의 구별들에 대한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의 교리


D. 내적 구별들


1. 본질적 의지와 위격적 의지


2. 필연적 의지와 자유로운 의지


3. 선행하는 의지의 자유와 동시적인 의지의 자유


4. 의지 행위과 의지 불행위


E. 내적 - 외적 구별들


1. 선한 기쁨의 의지와 표시의 의지


2. 작정하시는 의지 혹은 작정의 의지 혹은 계획된 의지와 계명의 의지


3. 내재하는 의지와 이행하는 의지


4. 감춰진 의지와 계시된 의지


5. 절대적 의지와 조건적 의지


6. 선행하는 의지와 후행하는 의지


F. 외적 구별들


1. 미래의 것들에 대한 작정 혹은 의지와 현재의 것들에 대한 의지


2. 작정하시는 혹은 유효적 의지와 명령하시는 혹은 도덕적 의지


3. 유효적 의지와 비유효적 의지


4. 유효하게 하시는 혹은 유효적 의지와 허용하시는 혹은 허용적 의지


5. 유효하게 하시는 & 유효적 의지와 승인하시는 & 승인적 의지


6. 정하시는 의지와 통치하시는 의지


7. 의무의 혹은 계명의 의지와 승인의 혹은 승인하시는 의지


8. 율법적 의지와 복음적 의지


G. 하나님의 의지: 연속성들?발전들?적용들




제 6장 하나님의 의지의 표명 및 행사와 관련된 속성들


6.1 하나님의 의?거룩하심?선하심?참되심?신실하심 | 763


A. 하나님의 의 혹은 공의


1.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에서의 하나님의 의


2. 하나님의 의: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의 기본 정의들


B. 하나님의 의의 구별들


1. “다양하게 숙고된……본질적 올곧음” 내향적/외향적 원동력


2. “이중의 공의”와 법 너머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문제


3. 외향적인 구별들의 요약


4. 말씀에서의 공의와 행하심에서의 공의


5. 배정적 공의와 분배적 공의


6. 분배적 공의에서의 구별들: 상급의 공의와 형벌에서의 공의


7. 하나님의 형벌적 혹은 응징하시는 공의에 대한 논쟁


8.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경건: 실천적 적용들


C. 하나님의 거룩하심 혹은 순수성


1.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에서의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순수성


2.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개혁파 정통주의의 교리


3. 피조물들의 거룩함과 이 교리의 실천적 적용


D. 하나님의 선하심


1. 종교개혁자들의 견해들


2.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의 견해들


E. 참되심과 신실하심


1. 개혁파 신학에서의 하나님의 참되심과 신실하심


2.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


3. 개혁파 정통주의의 교리




6.2 하나님의 능력?통치?위엄?영광 | 831


A.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에서의 하나님의 전능과 통치


1. 종교개혁자들과 하나님의 전능에 대한 신학 전통


2.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무스쿨루스의 교리


B. 초기 그리고 높은 정통주의 신학에서의 하나님의 전능


1. 기본 정의들


2. 석의적 쟁점들


3. 하나님의 능력의 구별들과 한계들


4. 절대적 능력과 규정된 능력


5. 능력?권능?통치권: 능력?권능?통치권의 구별과 관계


6. 실천적 적용들


C.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


1. 하나님의 속성들 사이에서 위엄과 영광의 위치


2. 하나님의 위엄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교리


3. 하나님의 위엄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개신교 정통주의의 교리: 정의들


4.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에 대한 구별들




6.3 하나님의 정동들과 미덕들 | 886


A. 일반적 숙고들: 하나님 안의 정동들과 격정들에 대한 문제


1. 정동들과 격정들의 개념: 쟁점들과 문제들


2. 석의적 해결들: 성경의 신인 동감 동정론의 확인


3. 교리적 결론들: 하나님의 정동들과 미덕들의 본질


B. 하나님의 사랑


1. 개혁파 신학에서의 하나님의 사랑: 이 논의의 쟁점들과 배치들


2.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에서의 하나님의 사랑


3.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에서의 하나님의 사랑과 우정: 기본 정의와 본성적 사랑


4. 자발적 사랑: 이 사랑의 본질과 대상들


5. 하나님의 사랑의 효과들


C. 하나님의 은혜와 호의


1.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에서의 하나님의 은혜


2.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개혁파 정통주의의 교리


D. 하나님의 자비


1.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에서의 하나님의 자비


2.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개혁파 정통주의의 교리


3. 하나님의 자비의 구별들


4. 실천적 숙고들


E. 하나님의 진노와 증오: 하나님의 진노와 증오 및 이와 관련된 정동들


1. 종교개혁자들의 견해들


2.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의 가르침


3. 하나님의 증오




색인
| 947




만일 기독교 신학이 성경의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는지를 알고 싶다면, 멀러 교수의 이 책에 비할 만한 것은 거의 없다. 어느 한 신학자의 소견을 통해서도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알 수 있겠으나, 그것은 기독교 신학사를 망라하지를 못하는 한계를 갖는다. 멀러교수의 이 책은 신학사에 있어서 가장 정밀한 논의가 있었던 12세기로부터 18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의 신학지평 전반을 아우르면서 그 배경 위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결정체를 소개한다. 독자는 교회에 남겨진 신학유산의 규모와 부요함에 충격과 감격을 경험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무지와 빈약함에 고통을 받을 것이다. 또한 이 귀한 유산을 공부하고 정리하여 우리에게 제시한 멀러 교수의 역량에 존경과 탄성을 금할 수가 없다. 이 책은 신론 가운데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다룬다. 이것을 읽는 것은 신학의 절반을 품는 것과 같다. 제발 꼭 읽기를 바란다.


_김병훈 (합동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멀러 교수는 개혁파 정통신학의 신론이 가지고 있는 다양성과 풍성함을 다각도에서 조명한다. 즉 종교개혁, 성경주해의 전통, 스콜라신학, 신학 방법론, 신학 논쟁, 교회회의, 종교개혁과 후기종교개혁의 연속성과 단절성 등이다. 특히 멀러는 초대교회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교회사를 관통하는 교리사와 의미 있는 대화를 시도한다. 말 그대로 한 없이 넓은 사료(史料)의 바다에서 독자들은 매우 전문적이며 통찰력 있는 도움을 받으며 17세기 개혁파 신학의 장엄한 유산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_안상혁(합동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교수)




리처드 멀러 교수님은 저의 박사 지도 교수님 중 한 분이시며, 이 책은 그분의 가장 주저에 속합니다. 이 책의 주된 장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원전에 매우 충실합니다. 이 책은 방대한 2차 자료를 섭렵하고 있지만 결코 2차 자료나 3차 자료에 의지하여 결론을 내리지 않고, 반드시 1차 자료 그것도 16~17세기 당시에 출간된 책들을 직접 독해해 내어 충분한 근거를 가진 결론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둘째, 다만 17세기뿐 아니라 교부 시대와 중세 시대, 그리고 16세기 종교개혁의 신학 논의들 역시 자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신학 역사 전반을 세밀하게 살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것이며, 16~17세기 신학을 그 역사적 현장에서 정확하게 관찰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에 관해서 현대 학계에서 논의가 되는 쟁점을 두루 망라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잘못된 오해들을 걷어 내고, 예를 들어 영원성, 불변성 등에 대한 매우 훌륭한 관점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넷째, 성경에서부터 교리가 어떻게 도출되고 있는지 상세히 묘사해 줍니다. 16~17세기 개혁신학은 다양성을 가졌지만 최대한 성경적이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다른 교회사 시대와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서 개혁신학자들의 성경 주석에 대해서도 두루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 책은 신학자들뿐 아니라 목회자들 역시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을 통하여 개혁주의 신론의 그 방대하고도 세밀한 아름다움을 최대한 접하게 되실 것을 확신하며 진심을 담아 이 책을 추천합니다.


_우병훈(칼빈신학교 조직신학 박사)




한국에서 개혁파 정통주의의 신학과 유산이 많은 관심과 조명을 받고 있는 시기에 멀러교수의「종교개혁 이후 개혁파 교의학」(Post-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 3권이 번역 출간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 멀러교수는 방대한 일차자료와 이차자료의 분석을 통해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에 관한 개혁주의 신학전통이 무엇인지를 상세하고 정확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본서는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개혁주의 전통에 관심 있는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에게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_유정모 (침례신학대학교 박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리처드 멀러 교수의 4권짜리 '종교개혁 이후 개혁파 교의학' 시리즈는 큰 축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이 있었기 때문에 종교개혁 신학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 더 나아가 중세 스콜라 신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제3권은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다루는데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은 신론에 있어서 정확한 교의학적 개념들을 역사 신학적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제 이 책은 이미 하나의 고전이 되었다. 교의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언급하지 않고 신학을 논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_이성호(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교수)




오랜 기간 개혁파 정통주의 연구에 전념해 오신 멀러 교수님의 ??종교개혁 이후 개혁파 교의학?? 시리즈를 한글로 만날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이 시리즈는 신학서론, 성경론 그리고 신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성경과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교리는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 체계의 두 원리입니다. 17세기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성경 석의는 신앙과 삶의 모든 문제들에 관한 교리 형성의 기초였습니다. 이번에 부흥과개혁사에서 출간된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더욱 잘 알기 위해 성경을 연구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노정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여 주는 역작이기에 독자 여러분께 적극 추천합니다.


_임원택(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교수)




『종교개혁 이후 개혁파 교의학』은 유럽과 북미의 학문적 풍토에 변화를 가져왔다.


_윌리엄 반 아셀트(우트레흐트 대학교)




프로테스턴트 정통주의 시대만큼 심하게 간과되거나 현대 신학 논의에서 자주 곡해되는 기독교회사 시대는 별로 없다. 리처드 멀러는 이 시대가 지니는 중요한 의미에 일반적 통념을 전복시키고, 원자료들에 대한 신중하고도 광범위한 분석을 통해 이 분야를 새롭게 재정의 했다. 1550~1800년 시기의 개신교 신학사에 대한 앞으로의 모든 연구 작업에는 멀러 교수의 업적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_데이비드 스테인메츠(듀크 대학교)




이 책에서 멀러 교수는 자신의 방대한 학식과 열정을 담아 기독교 교리사 전반을 아우르는 가운데, 이와 관련된 개혁파 스콜라주의 신학을 실로 기념비적인 대단한 규모로 해설하며 선보이고 있다. 학계는 영구적으로 멀러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멀러는 오랫동안 간과되었던 개혁파 교의학의 부요함이 분별력 있게만 사용된다면 기독교회의 신학 성찰과 강단에서의 설교에 깊이를 더하게 될 것을 증명하고 있다.


_폴 햄(리전트 칼리지)




17세기 개혁파 신학을 고전, 교부, 중세, 르네상스, 종교개혁 지성 사조 배경에 비추어 자리매김 함으로써, 멀러 교수는 17세기 개혁파 신학의 밑그림에 풍부한 색을 덧입히고 있다. 이 분야에 관여하는 이라면, 그 누구도 멀러의 논지나 결론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멀러의 주장에 반대하고자 하는 이는 감당하기 벅찬 일에 직면할 것이고, 멀러와 동의하는 이는 이 책을 통해 해당 분야의 연구 기준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_칼 트루먼(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




멀러 교수의 저작은 상세하고 정확하게 다루어진 비할 데 없는 최고의 자료로 점철된다. 역사가로서 멀러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는 신학적 전통의 영속성과 그 문맥을 능숙하게 분별하고 있다. 때로는 해악일 수 있는 개신교 스콜라주의에 대한 멀러의 접근에는 개신교 스콜라주의에 대한 동정과 함께 일반적 편견에서 벗어난 그의 관점이 잘 드러나 있다.


_존 톰슨(퓰러 신학대학원)




리처드 멀러


듀크대학교에서 스타인메츠 교수의 지도 아래 박사학위를 마쳤으며, 현재 미국 미시간 주 그랜드 래피즈에 위치한 칼빈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그리스도와 작정』(Christ and the Decree, 1986), 『진정한 칼빈 신학』(The Unaccommodated Calvin, 2000), 『종교개혁 이후 개혁신학』(Post-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 2003), 『칼빈 이후 개혁신학』(After Calvin, 2003, 부흥과개혁사 역간, 2011) 등이 있다.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가을 그리움 최송연 가녀린 햇살이 강둑에 아련히 걸릴 제면 산머루 익어가듯 내 그리움도 익어갑니다 다시 오마 약속 주신 님 오시지 않고 임 그리는 애잔함은 떨어지는 낙엽처럼 서러운데 가을 그리움은 영원으로 이어지는 불빛 되어 오늘도 저 산천을 저리도 붉게 물들이고 있나 봅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 20) 마라나 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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