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확신/존 라일
개혁주의 신학 2012. 11. 8. 01:57디모데후서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확신은 단순한 감정이나 추측이 아니며, 예리한 동물적 감각이나 낙천적인 감수성의 결과가 아니다. 체질이나 기분과는 상관없는 성령의 적극적인 은사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가 목표로 삼고 추구해야 하는 은사이다. 하나님 말씀은 신자가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확신
참된 그리스도인, 즉 회심한 사람은 죄 사함과 자기 영혼의 안전을 확신한다. 의심하거나 혼란스러워하지 않는다. 내면의 죄악과 힘든 싸움을 벌일 때도 많지만, 태연히 죽음을 고대하며 당황하는 기색 없이 심판 날을 기대한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자신을 정죄와 저주로부터 구해 내셨음을 온전히 확신하여 감사와 승리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죄의 몸의 비참한 상태를 불평하며 탄식할 수 있었다. 전자와 후자는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양립하는 것이다." 러더퍼드(Samuel Rutherford)
나는 확신을 위와 같이 설명한다. 하지만 이 내용을 반박하고 거부하는 이들이 많다. 그들은 확신에 대한 진실을 전혀 보지 못한다.
구원의 확신에 대한 비난
가톨릭 교회는 너무나 터무니없는 말로 확신을 비난한다. 트렌트 공의회에서는 “죄 사함에 대한 확신은 공허하고 불경건한 확신이다.”라고 가차 없이 선언한다. 유명한 가톨릭 옹호자인 벨라르미노(Roberto Bellarmino) 추기경은 그것을 ‘이단들의 으뜸가는 오류’로 지칭한다.
세상적인 사람들은 대부분 확신 교리를 반대한다. 자신이 평안과 확신을 느끼지 못하는 까닭에 다른 사람들이 그런 느낌을 갖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구원의 확신에 대한 거부
참된 신자들 중에도 확신을 거부하거나 위험한 교리로 여겨 기피하는 이들이 있다. 확신을 억측으로 여긴다. 확신하지 않고 어느 정도 의심하며 사는 것을 겸손으로 여기는 것 같다.
한편 성경적 근거도 없는 구원의 확신을 주장하는 주제넘은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 보시기에 나쁜 자신의 모습을 좋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자신의 모습을 나쁘게 여기는 이들도 있다.
성경의 진리 중 남용되지 않거나 그 모조품이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의 선택, 인간의 무력함, 은혜를 통한 구원 등 모두 남용되고 있다.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광신자들도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확신은 실제적이고 온당하며 참되다. 어떤 진리가 남용된다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그것을 기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성령의 증인’인 체하는 사람들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확신에 찬 신앙을 고백한다면서 자신을 내세우기에 급급한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거짓된 결과를 지나치게 염려한 나머지 계시된 진리의 교리마저 거부해서는 안 된다." 로빈슨(Thomas Robinson)
"참된 확신은 성경의 기초 위에 세워진다. 가정(假定)은 성경적 근거로 뒷받침되지 않는다. 그것은 날인과 증거가 없어서 법적으로 무효한 유언과 같다. 가정은 말씀의 증거와 성령의 날인을 필요로 한다. 확신은 언제나 겸손해지게 한다. 반면 가정은 교만에서 생겨난다. 깃털은 날아오르나 금은 아래로 떨어진다. 황금의 확신을 가진 사람은 겸손히 가라앉는다." 왓슨(Thomas Watson)
"가정(假定)은 느슨한 삶과 결부되어 있다. 신념은 민감한 양심과 결부되어 있다. 가정은 죄를 거부하는 단호함이라는 측면에서 느슨하다. 신념은 죄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죄 때문에 주님이 희생당하셨기 때문이다. 겸손은 천국으로 향하는 길이다. 천국행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을 지닌 사람은 지옥으로 갈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보다 죄를 범할 가능성이 훨씬 적다." 애덤스(Thomas Adams)
- 『1장. 구원의 확신은 참되며 성경적이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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