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네 가지 은혜(고전 1:30) /존 플라벨(1627-1691)

개혁주의 신학 2012. 11. 6. 12:29

성도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네 가지 은혜(고전 1:30)



존 플라벨(1627-1691)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그리스도의 정확한 가치와 진가(眞價)가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은 이 땅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과 천국에 거하는 모든 천사들도 영원히 대답할 수 없는 어려운 질문을 하는 셈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지식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봉은 우리의 지식으로는 그리스도 자신과 그의 사랑을 도무지 헤아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엡 3:19). 그런데 그리스도 자신이 아무리 탁월하고, 그리스도의 피 속에 의(義)의 보화들이 아무리 많을지라도, 또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비하(卑下)와 승귀로부터 아무리 많은 기쁨과 평안과 매혹적인 위로가 사람들에게 샘솟는다 할지라도, 이 모든 것들은 ‘효과적인 적용’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각각의 독특한 은혜와 위로를 사람들에게 전달해 줍니다. 고약을 아무리 잘 만들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상처에 바르지 않으면, 아주 작은 상처도 고치지 못하는 법입니다. 아무리 호사스러운 옷을 만들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몸에 걸치지 않으면, 결코 사람의 몸을 따뜻하게 보온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아무리 진한 강장제를 만들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마시지 않으면, 결코 심장은 원기를 회복하거나 편안해지지 못하는 법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죄인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시지 않고는, 그 어떤 죄인도 결코 구원을 받지 못하는 법입니다.


죄와 사탄으로부터 기만을 당했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으며 죄로 더러워져 한없이 비참한 상태에 빠진 가련한 죄인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죄인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시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참혹한 상태로부터 실제적으로 구원을 받은 일은 세상이 존재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 일은 결단코 없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자연적 출생에 의해서 첫 번째 아담의 후손이 되지 않았다면, 첫 번째 아담이 받은 저주는 우리에게 전가(轉嫁)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중생에 의해서 두 번째 아담의 후손이 되지 않는다면, 두 번째 아담으로부터 은혜와 죄사함은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첫 번째 아담의 죄는 오직 아담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해를 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피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유익을 줍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사람의 영혼에 효과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이겠습니까! 온 세상에 이것만큼 지극히 엄숙한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온 세상에 이것만큼 크게 중요한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사람의 영혼에 효과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강력한 위로를 산출합니다. 그렇게 산출되는 강력한 위로는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비천함에 대한 지극히 큰 보상으로 오늘 본문의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앞에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비천함이 언급되어 있고, 본문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신자들이 누리는 중요한 특권이 여러 가지로 나열되어 있습니다.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

이 네 가지는 각각 그 자체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한 은혜입니다. 또 이 네 가지는 인간에게 있는 네 가지 비참함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는 네 가지 비참함이란 무지, 죄책, 죄로 인한 부패, 그리고 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임한 모든 비참한 결과와 결말 전체인데,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은 그 네 가지 비참함과 각각 연관되어 있습니다.

1. 타락한 인간은 비참함에 깊이 빠져 있을 뿐만 아니라 지독하게 무지합니다. 자신이 비참함에 깊이 빠져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지독하게 무지하고, 거기로부터 회복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지독하게 무지합니다.

죄를 범하는 순간부터 인간은 죄 때문에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전혀 지각하지 못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참된 치료법에 대해서도 정말로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지혜가 되십니다. 자기를 머리로 삼고 연합한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지혜의 모든 보화를 사용하심으로써 지혜가 되실 뿐만 아니라, 신령한 빛을 비춰 주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자신의 지혜를 나누어주심으로써도 지혜가 되십니다.

신령한 빛을 비춰 주시는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지혜를 나누어주심으로써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와 자신들이 처한 위험한 상태를 모두 뚜렷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죄와 자신들이 처한 위험한 상태로부터 회복하는 진정한 길도 뚜렷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영혼에 적용하는 것이 참된 치료법임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2. 그러나 단순히 신령한 빛만 비취고 만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들이 범한 죄에 대한 죄책이 우리에게 있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유죄 판결을 받거나, 또는 우리의 양심이 우리가 범한 죄를 고소함으로써 우리의 죄를 생각나게 하기만 한다면, 그와 같이 신령한 빛은 단지 우리의 죄짐을 더 무겁게 할 뿐이고 우리의 비참함을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의로움이 되십니다. 완전하고 완벽한 의로움이 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의가 되심으로써 우리는 죄의 마땅한 형벌을 면제받게 되고, 양심이 확고한 평강을 누릴 수 있는 견고한 기초가 굳게 세워집니다. 물론 우리의 인격과 양심으로부터 죄책을 제거하는 것은 한량없는 은혜입니다.


3.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를 완전히 행복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책이 제거되면 사람은 죄로 인한 저주를 결코 받지 않게 되지만 다른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죄책이 제거되었다 할지라도 사람의 본성은 죄로 인해 부패해 있기 때문에 사람은 모든 더러운 정욕의 군림과 부패함 아래서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무슨 행복이겠습니까?

그것은 땅 위에 있는 지옥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구원받은 자들의 행복을 완전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나와 그들에게 지혜와 의로움이 되셨을 뿐만 아니라 (지혜는 무지를 치료하는 것이요, 의는 죄책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우리 본성의 군림과 부패함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거룩함도 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물과 피로 임하십니다(요일 5:6). 피로만 임하시는 것이 아니라 물로도 임하십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죄로부터 정결케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아, 그리스도께서는 얼마나 완벽하고 완전한 구원자이신지요!


4. 그러나 우리의 행복을 완전하고 흠 없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 외에도 또 다른 것이 더 필요합니다.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죄의 서글픈 결과들과 효과들이 제거되는 일이 더 필요한 것입니다. 신령한 빛을 비추임 받고 의롭다 칭함을 받고 거룩케 된 사람들의 영혼과 몸에 계속해서 남아 있는 죄의 서글픈 결과들과 효과들이 제거되는 일이 더 필요합니다.

가장 경건한 사람들 안에서도 헛된 생각들이 얼마나 수 없이 떼지어 일어나며, 또 얼마나 지독한 무감각과 불신앙이 날마다 고개를 쳐들고 일어나 그들의 영혼을 압제하며 그들의 삶의 모든 위로를 씁쓸하게 만드는지요! 또 얼마나 많은 질병과 고통이 그들의 신체를 괴롭히는지요! 수많은 질병과 고통이 그들이 죽어 무덤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날마다 그들을 쇠퇴시킵니다.

그리스도로부터 신령한 은혜를 받은 적이 한 번도 없는 다른 사람들의 신체에 일어나는 일들이 경건한 사람들의 신체에도 똑같이 일어납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롬 8:10) 라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거룩해 진다고 해서 육체적인 죽음으로부터 면제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초래한 이 모든 결과들과 열매들로부터, 그리고 이 외에도 다른 모든 결과들과 열매들로부터, 자기 백성을 건지시는 ‘구속함’도 되십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모든 은혜는 완전하게 확증됩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모든 은혜가 완전하게 됩니다. 이것으로 인해 성도들의 행복은 지극히 완전하게 됩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본문에 나와 있는 네 가지, 즉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에는 영혼을 진정으로 그리고 완전히 행복하게 만드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존 플라벨의 '은혜의방법'중에서 / 이태복 역

출처: http://blog.daum.net/7gnak/15719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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