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죽어가는 사람처럼 설교한 백스터
개혁주의 신학 2017. 3. 12. 04:00
(4) 죽어가는 사람처럼 설교한 백스터
영국교회 부흥의 주역과 현장의 역사
백스터의 성경 사랑과 회심 체험
17세기 리처드 백스터 (Richard Baxter, 1615-1691)는 청교도 운동의 영향을 거의 받지 못한 영국의 슈롭셔 주 로우톤에서 외아들로 태어나 청년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아버지가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하였고 어머니의 건강 악화 때문에 그는 10년을 외조부모의 슬하에서 지내야 했다. 나중에 아버지가 스스로 성경을 읽다가 회심하게 되자 백스터는 부모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에 ‘청교도’라는 말을 듣기는 했으나 단지 경멸의 용어로 배웠을 뿐이었고, 그의 고향 교회에는 예배를 인도하는 낭독자가 있었으나 성경을 알지 못하는 설교자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스터의 회심에 제일 먼저 영적으로 감명을 준 사람은 바로 아버지였다. 그의 아버지는 원래 도박꾼이었으나 혼자 성경을 읽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삶이 변화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어린 백스터가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의 역사 부분을 읽게 하고 성경을 깊이 연구할 수 있도록 해 주었고, 하나님과 미래의 삶에 대하여 말해 주어 그것으로 인해 죄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다. 비록 교리적인 부분과 구속의 신비에 대해서는 잘 이해하지 못했으나 성경에 깊이 몰두하도록 이끌어 주었다. 백스터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성경을 읽고 회심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때가 15살이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 주셨던 놀라우신 사랑을 경험한 백스터는 자신의 영혼에 대한 관심과 실상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그 후 그의 마음은 영적인 것에 더욱 더 절실하게 되었고 그가 죄를 범할 때면 그의 양심은 몹시 괴로워했다.
백스터는 대학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였지만 존 번연처럼 독학하였다. 그는 히브리어와 헬라어와 라틴어를 공부하였으며, 신학적 지식을 이해하기 위해 논리학과 형이상학과 물리학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또한 그는 신학과 중세 신학자들, 철학, 의학, 약학 등을 공부했다. 그리고 그는 대륙의 종교 개혁자들이 쓴 책을 읽음으로써 종교 개혁 사상을 배웠고, 영국 청교도들의 서적을 통해 구속의 신비를 생생하게 느끼며 복음과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알게 되었다. 이러한 회심 체험이 그의 사역에 열정을 쏟게 만들었다.
점점 세속화 되어 영적 능력을 상실해가는 성직자들
사회적으로 방탕과 유혹의 시기였던 그 당시에 목사들은 무지하고 나태하여 교인들의 생활에 무관심하였다. 백스터의 고향인 로우톤에는 예배를 인도하는 4명의 낭독자가 있었는데 한 사람도 성경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 가운데 2명은 부도덕하여 성도들의 지탄을 받고 있었다. 또한 3개월에 한 번씩 설교를 전하고, 자주 술집을 드나들며 때로는 술에 취하기도 하였다. 어떤 성직자는 설교 준비보다 술집에 앉아 있기를 즐기다가 교회에서 추방되기도 하였다. 또한 목회자의 재정적인 타락도 극에 달하였다.
교회의 부패는 평신도들에게서도 극심하게 드러났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할 예배는 운동회나 무희들의 패션쇼와 같게 되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대신 운동하거나 춤을 추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배 후에 밤이 지새도록 춤을 추며 쾌락에 빠져 흥청거리곤 했다. 영국 교회의 예배가 의식주의로 만연되었다.
키더민스터 교회에서 백스터의 목회사역
1638년 백스터는 잉글랜드 국교회에서 안수를 받은 후 더들리에 있는 교구교회와 주변 마을 교회에서 종종 설교하기 시작하였는데 그가 설교할 때 마다 예배당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그후 그는 브리지노쓰로 옮겨 2년 동안 열정적인 설교 사역을 하다가 1641년에 작은 도시 키더민스터 (Kidderminster) 교회로부터 칭빙을 받았다. 영적으로 황무지 같은 교회에 부임한 백스터는 키더민스터 교회를 청교도 신앙으로 개혁하기 위해서 전력을 기울였다.
* 열정적인 설교 사역
* 개인별 교리문답 교육
백스터는 설교만으로는 회심을 통한 개혁을 적절히 이끌어 낼 수 없다고 생각하여 보조 사역자들과 함께 매주 2일에 걸쳐 교구민들의 각 가정을 방문하여 개인별 교리문답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는 각 가정을 방문하여 한 가정당, 한 시간 정도를 교리 교육을 하였는데 특별히 회심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들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고 신앙을 양육하였다. 사역자들은 성도 개개인의 성향과 수준에 맞는 교육을 위해 치밀하게 준비하여 복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성도들에게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방식으로 심방을 하였다. 그리고 설교를 들으면서도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했던 회중들이 요리문답 교육을 통해 많은 영적 지식을 얻도록 하였다. 백스터는 개인들에 대한 수준 높은 목회 (pastoral care) 를 실천했다. 리차드 그린햄은 “교리문답 교육이 개혁주의 교회를 세우고 로마 카톨릭 교회를 심각하게 도전하고 무너뜨렸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백스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품고서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하여 복음을 집으로 가져와 가정이 복음으로 물들게 하였다. 이처럼 열정적인 심방 사역은 가족과 교회의 지체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 영혼들의 회심에 목회 초첨을 둠
백스터가 목회사역에 있어서 설교와 교리문답 교육을 필수적인 목회 요소로 보았던 이유는 영혼들의 회심을 위한 가장 유익한 수단으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또한 회심한 사람들의 올바른 성장을 촉진시키며 성도로 하여금 영원한 안식을 준비하도록 하는 최상의 길은 회심이었기 때문이다. 백스터는 회심이 개혁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아마 백스터의 전후의 어떤 저술가나 목사도 회심의 중요성과 회심이 교구 개혁과 맺고 있는 연관성에 대해 이처럼 확고한 신념을 표현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 기도생활, 공 예배 출석, 신앙 실천 강조
백스터의 기도는 매우 강력했다. 그에게 있어서 기도는 설교와 마찬가지로 매우 중요한 업무가 되었다. 그는 그의 무릎에서 그의 설교들을 얻어냈으며 특별히 기도의 능력을 신뢰하였다. 그래서 그는 회중을 위해 늘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성도들에게도 쉬지 않는 기도 생활을 가르쳤다. 그는 성도들에게 “기도로 인하여 하나님이 변하시지는 않지만 우리가 변화된다”고 말하면서 영적개혁을 위해 기도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더 나아가 백스터는 철저한 공적인 예배 출석을 강조하였다. 성도들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신약적인 예배 즉 초대 교회 성도들이 단순하고 소박하게 드리던 예배를 회복할 것을 가르쳤다. 이처럼 예배의 개혁을 촉구함으로써 키더민스터를 성경중심적인 마을로 만들어 갔다. 그리고 백스터는 가정 예배를 권장하면서 신자 교육을 위해 자신이 쓴 책 한 두 권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또한 백스터는 경건한 신앙 생활의 실천을 강조하였고 성도들의 생활이 개혁되기를 원했다. 특별히 거룩을 많이 강조하였는데 그는 ‘거룩이란 가장 많이 유익을 얻고 안전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요, 가장 영예스럽고 즐거운 길’이라고 말하였다. 백스터의 경건과 영성 그리고 열정적인 목회사역은 키더민스터 교회 부흥의 기초를 세우게 되었다.
마을 전체가 회심했던 키더민스터 교회 부흥
그리고 많은 가정들이 양심의 회개를 경험하고 눈물을 흘리며 경건한 삶을 살게 되는 열매를 맺었다. 부흥으로 인해 아침과 저녁의 가정 예배 시간이 되면 모든 가정에서 시편을 읽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모든 골목이 찬송과 기도 소리로 메아리 쳤다. 한 가정에서 찬송이 끝나면 다른 가정에서 찬송이 연이어졌고, 한 가정에서 설교 소리가 끝나면 다른 가정에는 기도가 시작되었다. 이처럼 사람들의 모습 속에 신앙적 생명이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특별히 주일이면 거리에서 단 한 건의 무질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모두가 평화롭고 고요하였다. 많은 가정들이 찬송가를 부르고 시편을 찬양하였다. 또한 그들은 설교문을 읽고 설교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수 많은 회심자들 가운데 세속의 길로 빠져 실족한 자는 하나도 없었다고 말한다. 백스터가 영국 우스터셔 (Worcestershire)에 위치한 키더민스터 교회의 목사가 되었을 때, 처음에는 한 거리에 한 가정 정도만이 집에서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섬겼지만 사역 후기에는 그 마음에 있는 모든 가정이 진지하게 신앙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기게 되었다. 이와같은 키더민스터 부흥으로 인하여 교회는 소문나게 되었다. 그의 목회사역에 성령의 부으심과 역사하심으로 인해 키더민스터 마을 전체가 회심했던 부흥 이야기는 놀랍고 감동적인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모든 목회자들을 깨우치는 백스터의 ‘참된 목자’ (The Reformed Pastor)
백스터는 목회자 개혁 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교회의 온갖 부패가 목회자에게서 시작된다고 보고, 먼저 목회자의 개혁을 시도하기 위해 주변 교회의 목사들에게 매월 한 번씩 모임을 갖고 성경 말씀에 대하여 연구할 것을 제안하였다. 제안을 받은 목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참석하여 기도와 성경 연구 모임이 활성화 되었다. 교회의 성장이 외적인 조건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 자신에게 있다고 보았던 백스터는 교회의 문제를 보지 말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함으로써 교회를 부흥시켜야 하다고 권하였다.
백스터의 감동 저서인 “참된 목자 (The Reformed Pastor)”에서 그는 목회자의 말씀과 기도에 전념한 생활과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함과 성경과 신학에 대한 지식, 목회적 열정, 목회자의 언행일치, 지도력과 행정 능력 등이 교회 부흥과 침체를 결정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백스터는 참된 목자가 되려면 부단한 자기 개발이 필요하며, 죄의 유혹을 멀리하고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할 것을 권면하였다.
리처드 백스터는 목회자들에게 이렇게 권면하였다. “자신이 은혜 가운데 있다고 만족하지 말라. 당신의 은혜가 적극적이고 생동적인 실천 속에서 지켜진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하기 전에 자신이 공부하고 준비한 설교들을 스스로에게 먼저 설교하라.” 백스터는 목회자에게 먼저 믿음과 사랑과 열성이 넘치면 이와 동일한 은혜들이 회중들에게 신선한 은혜로 흘러 들어간다는 것임을 강조했다.
또한 백스터는 목회자들이 참으로 훌륭한 교리를 설교하면서 반드시 생명력 있는 적용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메시지를 통하여 청중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에 대해 경외심을 갖기를 갈망하였으며, 반면에 그들의 마음을 경박하고도 웃기게 하고 즐겁게 하는 설교를 가장 혐오하였다. 그리고 그는 영적 의사인 설교자가 성도들에게 잘못된 치료제를 처방하는 것은 그들을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하는 영혼 살인자가 되게 한다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백스터는 “내 설교를 통해서 영혼들이 구원을 받거나, 아니면 나의 나태함으로 멸망하여 지옥에 간다는 무섭고 중대한 생각을 해보라”고 말하면서 이처럼 무섭고 엄청난 생각이 항상 설교자들의 심령 속에 머물러 있기를 권면하였다. 또한 설교자들은 청중들의 마음을 각성시키기 위해 강단에 올라가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마음을 살펴 깨우고 각성시키며, 세상적인 경향들을 제거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열정의 삶을 지속해야 한다. 그리고 생기가 없는 게으른 설교자는 졸고 있는 죄인들을 결코 각성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이 책은 필립 도드리지, 존 웨슬리, 찰스 웨슬리, 찰스 스펄전 등을 비롯하여 수 많은 저명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백스터의 많은 저서와 신학 사상 문제
백스터는 설교사역의 침묵을 강요당한 기간 동안에 집필에 열중하였다. 1691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150편의 논문을 썼고 많은 저서를 남겼다. 특별히 그의 감동적인 저서 “성도의 영원한 안식”과 “회개치 않는 자들에의 부르심”, 그리고 목회자들을 위한 필독서 “참 목자상”은 수 많은 사람들이 읽고 회심하였다. 그리고 그의 베스트셀러 중에 “크리스천 핸드북, 거룩, 천국을 준비했는가, 백스터의 자취 혹은 회고록” 등이 있다. 그는 기독교의 저자로 명망이 높았지만 그의 책들은 주로 신학적인 주제들에 대한 글 보다는 헌신적이고 목회적인 강해서들이 많았다. 청교도 목사인 존 제인웨이는 자신의 회심에 있어서 백스터의 책을 읽은 것이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백스터의 신학적 오류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책들을 읽을 때 조심해야 한다. 그의 작품들은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특이한 혼합을 이루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작정, 속죄, 칭의 교리에 있어서 결코 개혁주의적 견해를 가졌다고 볼 수 없다. 리처드 백스터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제임스 패커 (Packer)는 백스터는 이것 저것을 마구 섞어 놓았는데 그의 신학 때문에 다음 세대가 교리적 혼란을 겪는다고 말했다. 백스터는 개혁주의 신학 라인을 따라 형성해 가면서도 때로는 알미니안주의적 사고에 기울였다. 예를들면 백스터의 칭의론과 속죄론 그리고 하나님의 작정 교리에 있어서 결코 개혁주의적 견해를 가졌다고 볼 수 없다.
비국교도 운동의 지도자 백스터
백스터는 1638년에 영국 국교회에서 안수를 받았으나 실은 비국교도 목사였다. 그는 영국 국교회의 예배 의식과 규율에 얽매이기를 거부하였다. 그는 교회 안에서 비국교도들을 보호하는데 관심을 쏟았다. 정부 당국과 청교도들과의 대립은 백스터의 설교사역을 순탄케 하지 못하였다. 1662년 5월, 찰스 2세는 통일령을 발포하였는데 백스터는 발포된 통일령의 정책에 항의를 표하면서 궁정 목사직을 사임하고 비국교도 목사들 편에 서게 된다. 찰스 2세의 박해로 비국교도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자 수 많은 목사들이 교회에서 추방을 당하였다. 이 통일령은 수 많은 청교도 목사들을 거리로 내 몰았으며, 백스터도 다른 목사들과 함께 그토록 사랑하던 목회지를 떠나야 했다. 이때에 백스터는 통한의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백스터는 1662년 대추방 이후로 비국교도들 가운데 보수적인 집단의 지도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1664년 비밀 집회령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어 정부 당국이 설교를 금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스터는 설교를 들을려고 몰려든 성도들에게 설교하였다. 결국 이 일로 그는 체포되어 18개월의 옥살이를 해야 했다. 1675년 모든 비국교도 설교권이 다시 상실되었지만 한 예배당에서 위험을 무릎쓰고 말씀을 전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 보다 더 심한 박해를 받았다.
세상 떠나기 전 런던시를 위한 기도 - “하나님, 무지한 이 도시를 긍휼히 여기소서!”
백스터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육체적인 질병이었다. 많은 의사들로부터 치료를 받았지만 건강이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그는 언제라도 죽을 수 있었던 몸이었다. 그는 매주 설교하러 강단에 올라가지만 혹시 내려오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백스터는 자신이 질병을 늘 하나님의 고귀한 은혜로 간주했다. 왜냐하면 그 육체적인 고통이 그로 하여금 세상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지 않도록 해 주었으며, 그리고 매 순간이 중요함을 깨닫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매일 매일을 그의 생애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았다. 백스터는 그의 병이 여러 번 재발한데다 핍박까지 받아 몸이 몹시 지쳤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런던시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하나님, 이 불쌍하고 무지한 이 도시를 긍휼히, 긍휼히, 긍휼히 여기소서.” 1691년 12월 8일, 비국교도의 아름다운 말씀 사역자 백스터는 76세의 나이로 주님의 평안 가운데 눈을 감았다.
백스터는 영국교회 부흥의 주역이요, 교회를 개혁시킨 강력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신실하고 긴박한 설교자요, 청교도 설교자요 열정적인 복음 전도자였다. 그는 해외 선교사역에도 동일한 열정적 관심이 있었다. 그는 복음 전파 선교회를 설립하는데 주역을 맡았다. 그에게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이 있었다. 백스터는 죽음의 병상에서 엘리옷 선교사의 생애를 읽고서 감동받기도 하였다. 불같은 열정으로 사역했던 백스터의 생애가 끝났다.
리처드 백스터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
1. 백스터는 복음으로 영혼을 일깨워 준 신실한 말씀 사역자였다.
2. 백스터는 기본적인 교리문답 교육에 열정을 쏟았다.
그는 설교만으로는 회심을 통한 개혁을 적절히 이끌어 낼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교리문답 교육에 힘썼다. 그는 성도들에게 기본적인 교리 문답 교육을 통해 회심할 자를 찾아 내고 그들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고 신앙을 양육하였다. 이처럼 백스터의 목회 사역의 핵심은 말씀선포와 교리 문답 교육 이었는데 백스터의 이러한 열정적인 사역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부흥을 허락하셨다. 그가 목회하였던 키더민스터 마을 전체가 회심하였다는 사실은 놀랄만한 부흥이다.
또 다른 부흥을 갈망하면서
부흥이란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가고 나타나는 것인데 지금 교회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부흥이 필요하다. 개혁과 부흥의 시기에는 항상 위대한 설교자가 있었다. 복음이 점점 쇠퇴하고 있는 이 시대에 리처드 백스터와 같은 설교자가 필요하다. 설교할 때 마다 지금 이 시간이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이라는 엄연한 사실 앞에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죽어가는 사람처럼 죽을 힘을 다해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가 나와야 한다. 말씀과 교리를 붙잡는 균형잡힌 설교자가 진리위에 든든히 서 가는 교회를 세워갈 것이다. 누가 점점 침체해져가는 교회를 살릴 것인가? 누가 회심을 목표로 한 강력한 말씀선포와 교리문답 교육을 할 것인가? 누가 이 시대에 부흥의 주역이 될 것인가? 강단에서 하늘의 진리를 불처럼 토해내는 열정적인 설교자들을 통하여 이 땅에 참된 부흥이 일어날 것이다. 약 300년 전 키더민스터 교회 부흥이 우리의 설교 사역 가운데 다시 리바이벌 되기를 갈망한다.
*김현배 목사/독일 함부르크 한인선교교회 담임목사. 유럽성시화운동본부 상임회장 겸 독일 성시화운동본부 대표회장, 뉴스파워 유럽 본부장
김현배 ⓒ 뉴스파워
출처: USA아멘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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