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저의 시대性 착오

자료실 2010. 11. 4. 03:34
조나단 에드워즈의 시대착오性 (The Anachronism of Jonathan Edwards)

by H. Richard Niebuhr
(1958년 조나단 에드워즈 서거 200주년을 기념하여 그가 시무하던 Northampton에서 H.R. Niebuhr가 행한 기념사)

http://www.religion-online.org/showarticle.asp?title=177


맥긴리가 전하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인상에 대한 유명한 기록에 따르면, 에드워즈가 교회에서 저주에 관한 설교를 할 때마다 청중들이 요동하여 좌중에 지진이 일어난 듯 하였다고 한다. 한편 패링턴의 다소 냉소적인 견해에 의하면, 에드워즈는 위대한 "시대착오자"이었다.

패링턴에게 있어서 에드워즈는 옛 교리와 새 자유주의가 대립할 때 옛 교리를 택한 시대착오자이었다. 탁월한 이상주의 형이상학자가 전통 신학자와 내면적 투쟁을 벌여 구시대의 신학자에게 굴복한 것이다. 성스런 삶을 지향하는 에머슨류의 신비로운 의식이 에드워즈의 주변에 넘쳐흘러 그를 神性한 자로 만들어서, 내면의 교조적 칼빈주의자와 투쟁했으나 결국은 칼빈이 이긴 것이다. 하나님과 막 화해하여 안식처를 구하는 풋나기 새 교인들에게 성전 문을 연다는 일이, 하나님께 반역적인 세상에서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정예돌격대원으로 훈련된 소수의 선택된 무리들, 즉 옛 교리에 충성하는 성도들의 성역이어야 한다는 신념과 갈등 대립하였다.

패링턴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다:

“에드워즈는 다른 지식인과의 건설적인 교류를 끊고 활기찬 철학에서 무미건조한 신학의 영역으로 멀어져갔다. 타고난 본성과 능력을 발휘해 해방시켜야할 제도에 대해, 오히려 그 제도 내의 New England정신에 자신의 고귀한 재능을 가두어 소모해버리는 운명을 타고났던 것이다. 그는 시대를 뛰어넘을 해방자로 부르심을 받았으나 칼빈주의자를 고수하였다.”

밀러 교수는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인 죄인들" 같은 설교가 아닌 경로를 통해 에드워즈를 접한 학생들은 맥긴리의 견해을 바로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미국 내의 개신교나 신학계의 공통된 견해는, 에드워즈가 위대한 사람이었지만 그가 옹호했던 거의 모든 이슈에 관한 그의 견해는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스런 불가지성, 전능, 편재, 위대, 진노; 인간마음의 철저한 타락; 교회가 집단적 공회로서가 아니라 확인되고 선발된 소그룹으로 재구성되어야 함; 결정론, 인간존재의 비자유성에 관한 그의 주장은 옳지 않다고 하였다. 존재의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하여, 화목하게된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온 우주적 군병으로 자처하며 파멸의 길을 가는 맹목적 순종을 정당화한 사실 즉, 히틀러의 추종자들이 그들의 파국적 종말을 정당화한 사실이 그 예라고 하였다.

에드워즈에 대한 미국의 신앙인들과 지성인들의 평가가 이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무슨 근거로 에드워즈를 정당화할 수 있다는 말인가?

에드워즈를 추모하는 무리들 틈에서 우리가 그들과 함께 추모예식에 참예하는 정당한 이유는 무엇인가? 노드햄튼에서 유리되고 현대적 지성인들로부터 괴리된 그를 생각하며, 우리는 예수께서 위선자들을 질책하신 그 말씀을 우리자신에게 적용해야 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마23:29-30)

200년전 뉴잉글랜드 지방의 풍토를 고려하며 에드워즈가 노드햄튼교회에서 해임된 이야기를 읽으면, 그가 다른 지방의 교회에서 목회했더라도 상황이 더 나았을 것이란 보장이 없다. 스톡브릿지(노드햄튼에서 해임된 후 그가 목회했던 신개척지)가 아니라 캠브리지나 뉴헤이븐 같은 곳에서 목회했더라면 노드햄튼보다는 다소 나을 수 있었을 지는 모를 일이다. 만약 천연두로 프린스톤에서 일찍 사망하지 않았다면 오랫동안 대학총장으로서 얼마나 영예롭게 살았겠는가? 그가 18세기로부터 오늘날의 우리세대에 와서 산다고 하더라도 1750년대에 받았던 존경 이상을 받으리란 보장이 없다.

에드워즈가 그당시 추구하고 시도했던 이슈들은 미국인과 기독교인들에 의해 전적으로 거부당해서 오늘날 문제거리로도 남아있지 않다. 만약 그가 강단에 서서 우리의 사악과 부패, 우리의 부자유와 삶의 결정론,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 저주, 거룩한 공동체를 재구성해야함을 우리에게 설교한다면 어떤 반응을 가져올 것인가?

우리가 에드워즈의 동시대인보다 더 그의 주장에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근거로 그를 존대할 수 있겠는가? 에드워즈의 200주년 서거를 기념하는 이자리에 모인 우리들은, 그에 대한 신실한 마음의 존경을 나타내려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유명인이라 하니까 피상적이며 희미한 영광이나마 끼어들어 나누어 가지려함은 아닌지?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아야 한다.

에드워즈를 기리는 정당성을 다른 측면에서 모색하여보자. 만일 우리가 오늘날 그의 <정신; 영성 spirit>과 만난다면? 쓰라린 고행에 필요했던 그의 인간적 허영심에 부합하는 형식으로서의 존대가 아니라, 에드워즈가 진심으로 원하고 바랐던 그의 주된 <목적과 의지>에 부합하는 방도를 찾아봄이 어떠한가? 인디언에게 선교하던 사위 브레이너드의 죽음을 대하는 에드워즈의 행적이 시사하는 바가 많다. 에드워즈가 그렇게 수호하고자한 신념과 의도가 무엇인지 그때의 상황을 모르고서는 우리가 그를 존대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그를 존대하기 위한 어떤 다른 방식이 존재하는가? 그를 위대한 사변가로 받든다며 마치 에드워즈가 자신의 날카로운 지성이 칭찬받는 일로 내심 흡족한 듯이 보이게 해서 저희들 멋대로 에드워드를 제단하도록 하겠는가? 그를 탁월한 설교자라고 찬양하며 그의 시각적 표현을 선망의 대상인냥 말하지만 자신들은 진작 무얼 상상하는지 알기는 하는가? 뉴튼, 로크, 플라톤 등을 연구한 위대한 배움의 사람으로서 에드워즈를 숭배한다고 하지만, 에드워즈가 그들로부터 무엇을 배웠는지 알고 있는가? 그러므로 에드워즈를 존대하는 길은 그를 존대하지 않는 것이다.

그를 존대함이란 마치 니체를 위대한 크리스챤으로, 조지 3세(1738~1820)를 위대한 미국인으로 추앙함과 같다. 이는 에드워즈의 <영성; 정신 spirit>을 이해하는데 모순되는 일이다. 위대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 탁월함으로 존경을 받고자 하는 욕망,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뛰어나고자 하는 욕망, 동료들보다 자기가 더 사랑을 받고자 하는 욕망이 인간에게 가득차 있다고 에드워즈는 설파하며, 이는 인간의 왜소함, 삐뚤어짐, 병적인 곪음증 때문이라고 그는 말할 것이다.

진심으로 에드워즈를 존대하는 길은, 그가 살았던 삶의 정황을 고려하여 그의 삶의 참된 동기를 새롭게 재발견하는 것 외에는 불가능하다. 그의 동기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다. 무리들이 에드워즈의 설교를 들을 때 이 동기를 생각하며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고양시켜 그 고귀한 상념의 영역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위대한 cause에 헌신하는지는 나로선 알 수가 없는 일이다. 단지 내가 아는 사실은, 당신의 목사는 에드워즈가 하나님의 영광을 설교하기 위해 고른 구절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딤전1:17)을 가지고 설교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을거라는 말이다.

당신의 생각을 움직여서 에드워즈를 진심으로 존경할 수 있는 유일한 상황으로 몰아가는 일은 내 의도와 정신의 능력 밖에 있는 일이므로, 부족하더라도 그를 다소나마 정당화하기 위해 그를 불러내어 그의 <정신 spirit>을 되살려내는 우리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에드워즈를 비난하는 자들에게 이야기를 걸어보는 모험을 해보자.

에드워즈가 말하기를,

"당신들이 첫째로 나에게 제기하는 문제는, 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고 인간의 품격을 떨어뜨렸다는 주장이다. 당신들은 내가, 인간의 경험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는 성서의 진리를 가르치고, 인간은 마귀적이고 사탄적이며 탐욕스럽고 악의, 질투, 살인, 다툼, 사기, 원한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한다고 한다. 인간은 이웃을 모함하고 비방하며 하나님을 싫어하고 오만불손하며 허풍을 떨고 악을 궁리하며 부모에 불순종하고 어리석으며 신의가 없고 매정하며 무자비하다고 내가 말한다고 한다. 당신들은 인간들이 여러 좋은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 예를 들자면, 어린이를 귀여워함이나 남녀간의 사랑이나 조국애 등에도 불구하고, 내가 성서를 인용하여 그 영민한 마음 모두가 부패하고 타락해서 알지못할 심연의 나락으로 떨어져서는 결국에 쓸모없게 되어버린다고 말한다고 한다."

어떤이는 이러한 에드워즈의 주장이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 한다. 특히 에드워즈의 후세 사람들은 인간에 대한 찬양을 많이 들어왔다. 성서 대신 교과서로서 배우며 끝까지 읽지도 못한 세잌스피어를 인용하여 거기 나온 햄릿과 같이 "얼마나 인간은 위대한가! 그 고귀한 이성! 무한한 능력! 아름답고 숭고한 몸짓! 천사와 같이 우아하여라! 신과 같은 지성! 세상은 아름다와라! 영용한 동물들!"

그런데 이상한 일이 하나 생겼다. 후세의 사람들이 그 낭만적 人間像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잔악한 人間性의 무한한 한계, 그리고 동물적 인간성이 공격을 받을 때 배출되는 그 광포함을 경험하게된 일이다. 돈이라면 사죽을 못쓰는 인간성을 삐딱한 냉소로 받아들이는 것; 한편으로는 이성의 힘이 얼마나 미소한가 하는 심리분석과 다른 한편으로는 애매한 욕망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받아들이는 것; 어머니의 애정과 아버지의 분노가 어떻게 그들의 자식들을 파멸시키는가 하는 것; 쓰리고 환멸적인 소설에서, 그리고 인간의 비인간적 행위를 기록한 역사에서 묘사되는 인간과 인류의 모습들; 이들 모두 20세기에 일어난 人間像들은 에드워즈가 말한 인간의 타락상을 넘어서는 모습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표면적으로는 우리시대사람들이 에드워즈가 예상했던 그런 모습들을 받아들이는 듯 하지만, 다른 이유로 여전히 에드워즈를 배척하고있다.

에드워즈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어떤 기준으로 너는 네가 판단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냐?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취하는 기준에 의해 그 사람을 평가해야한다는 내 말에 너는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 혐오스런 벌레를 인간에 대비하는 것은 인간을 영원한 하나님과 대비하는 것에 비교된다는 나의 말을 싫어했다. 너는 인간의 기준을 다른 인간들에게서 또는 네 자신에게서 찾았다. 그러고 나서 인간 스스로가 신과 같다고 하다가 이제와서는 인간은 악마와 같아서 인간 자신을 파괴할 것이라고 한다.

자 이제, 누가 인간의 품격을 떨어뜨렸는가? 인간성의 기준을 낮게 본 자인가 아니면 고귀하게 드높인 자인가? 인간을 소시민적 애정의 대상으로서 판단하는 자인가 아니면 보편적 연합체의 한 구성원으로 판단하는 자인가? 재물을 신실하게 혹은 부실하게 관리하는 사람 정도의 차원에서 인간을 보는가 아니면 영원한 부요를 관리하는 청지기로서 인간을 보는가? 잘 건축되고 장식된 8베드룸 하우스와 廣場이나 파르테논의 잔해 중에 어느 것이 더 위대한가?”

에드워즈가 마음 속 깊이 믿고 깨달았던 바는, 인간은 영원불멸의 절대적 영광 앞에 서기 위해 지음을 받았고, 모든 타락, 파괴, 부정으로부터의 전우주적 구원에 참예하기 위해 만들어 졌으며, 온 우주의 캔버스에 별들을 흩뿌리고 천사적 권능의 모습을 빚어내며 그 세계 안에 정겨운 小세계를 창조한 위대한 예술가를 찬양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그러한 운명을 타고났다는 사실과 그 부르심의 위대함 때문에, 인간들이 그러한 자신들의 유산을 내던져 버리고 뜨내기 동료 인간들로부터 위로받고 인정받는 바람보다 더 큰 소망이 없이 사소한 존재로서 만족해함을 보면서 에드워즈는 낙담하고 우울하여졌던 것이다. 위대함에 봉사하도록 지음을 받았던 인간이 유일하신 위대한 주님께 대한 봉사를 거부하고 자신의 소아적 세계 내에서 극도로 사악하게 되어 금새 사라질 안락을 탐닉함을 보았다. 그러나 종국에, 사람의 길이 그 자신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인간이 자신을 그토록 왜소하게 되도록 할 수 없음을 에드워즈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에드워즈에게 제기할 두번째 질문을 가져다 준다. 그가 이해하는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자유>를 조금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첫번째 질문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믿음의 논리를 따를 수 없는 비신자들이 神政과 사도권을 동등하게 여기는 데서 기인한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한 통치를 믿는 에드워즈가 그러한 전제 -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非자유성 – 로부터, 설교자들은 이땅에서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신과 동등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한다. 이야말로 비논리적인 유추에서 나온 어불성설이다.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전제하의 결론이 "그러므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지 "그러므로 내가 다스려야 한다"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하므로 나의 의지는 좌절돼야 한다. 노드햄튼에서의 분쟁을 포함한 에드워즈의 삶에 대해 읽어볼 때 내가 믿기는, 그가 자기의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먹는 그런 이기적인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여하간 그에 대한 주된 고발점은, 에드워즈의 결정론적 세계에서는 인간의 자유가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에드워즈가 어떻게 이러한 질문에 응답할 것인가? 철학에 열심이었던 그로서는, 그의 논리전개 방식이 그의 시대의 기계적인 사고방식과 개혁주의자들로부터 지나치게 영향을 받지 않았는가 나는 생각한다. 이런 견해에 에드워즈 자신이 수긍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주된 요점은 유효하다. 그리고 인간 존엄성의 퇴락에 대해서는 지난 역사가 그의 적대자들의 의견을 반전시켜 놓았다. 그들의 에드워즈에 대한 견해를 바꾸어 놓지는 않았지만.

에드워즈가 말하기를, 우리가 <자유의지>에 대해 고심하는 이유는 의지의 선한면을 선택하기 위해, 또는 선과 악, 하나님과 마귀를 분별하여 선택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우리는 말하기를, 인간은 어쨋건 그의 운명의 주체이어서 인간 자신의 의지가 없이는 하나님 자신도 인간을 파멸에서 구원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면 에드워즈는 지적하기를, 인간은 그의 가장 강력한 동기에 의해 결정되어진다는 것, 그리고 그 동기란 자기사랑 자기만족에 가득찬 것이어서 그런 동기가 선한 행위을 촉발하게 하여 그를 구원에 이르게 하기는 불가능 하다는 나(에드워즈)의 주장에 굴복하는 것 아니냐고 할 것이다. 우리 사회를 볼 때, 숨겨진 손에 의해 조정되고 개방된 시장에 의해 움직이는 자본주의 사회라고들 한다. 누가 자유한가? 인간은 자기 자신의 이해를 추구하는 데에 자유하다고 한다. 하지만 참으로 인간이 그의 이해관계로부터 자유했던가? 인간은 자기이해 외의 길을 따라갈 수 있는 자유가 있는가?

국제정치는 어떠한가? '자국의 이익'이란 말은 국가들이 추구하는 변함없는 원칙으로서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따르고 지켜야할 근본원리가 아닌가? '종교의 자유'를 생각해 보자. 이는 우리가 종교적이어야 하거나 비종교적이어야 한다는 자유가 아니고, 우리 자신의 이해관계에 의해 나에게 좋으냐 안좋으냐에 따라 종교예식에 참석하거나 안하거나 하는 그런 자유가 아닌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르는 종교자유는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든다. 종교 안에서도 자신을 사랑하도록 되어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의지가 의지의 가장 강력한 동기로서 작동하듯이, 인간의 가장 강력한 동기는 자기자신의 이해관계이다. 그에 의해 인간은 결정되어지고, 그가 행사할 수 있는 어떤 새로운 자유도 자기이해관계에 의해 결정된 것을 바꿀 수 없다.

200년이 지난 지금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자유와 굴레에 대한 에드워즈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결정론>을 받아들이는 많은 이들이 여전히 그 '자기이해'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시민적 자유를 만끽하는 일을 계속적으로 보장할 것이라고 한다. 어떤 나라들은 자기이해가 그들 스스로의 불멸의 동기 그 자체로 느껴지게 하여, 우리가 말한 자유를 포기하기까지 하는 사실을 보아왔다. 이런 사실들을 생각할 때, 시민적 자유나 종교적 자유가 에드워즈의 반대자들 편에 기반을 두고도 성립할 수 있는지, 또는 에드워즈가 제시하는 결정론에 연관되어서만 가능한 일인지 의구심이 든다. 인간의 비자유성에 대한 에드워즈의 견해는 그렇게 시대착오적이지는 않다. 허나 우리가 비록 그의 전제를 얼마간 받아들이더라도 그의 논리를 따를 수 없는 어떤 이유가 있다. 말하자면 우리의 가장 강력한 동기에 의해 우리가 결단한다는 사실이다.

에드워즈에 대한 세번째의 고발은 예전에 가졌던 설득력을 좀 잃어버린 주장인데, 바로 에드워즈가 흔히 청중들을 향해 사용했던 파멸적 지옥에 대한 위협이다. 에드워즈는 이것으로 청중들에게 새 자유의 길목에서 가져오는 혁명적 사고와 양심의 강력한 반응을 일으키려 하였다. 지옥에 대해 설교하는 일은 소위 진보적 사상을 가진자들이 꺼리는 바이다. 고뇌의 상처가 어떻게 자비로운 하나님의 통치와 병존할 수 있는가? 어떤 인간의 사악함이 그러한 벌을 받기에 마땅하다는 말인가?

이 경우에도 역시 에드워즈가 예전 보다 덜 시대착오적인 면이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인 죄인들"를 다시 읽어 보면, 강조점이 지옥이 아니라 삶의 비통한 불확실성에 있음을 알게될 것이다. '그들의 발을 미끄러운 곳에 두었다' 우리들의 이 편안한 삶이 언제까지나 지속될지 아무도 보장할 수 없다고 한다. 그 미끄러움 밑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이고, 언제 닥칠지 모른다. 죽음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이는 또 다른 무엇의 시작이다.

우리가 에드워즈 신화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사실을 안다. 허나 우리가 우리자신을 선택하여 존재하게 하였거나 할 수 있지 못하며, 거기(존재)로부터 우리자신을 밖으로 빼내지도 못하는 현실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신화를 얼마간 받아들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혹 불가해한 힘이 우리를 존재하게 하여 우리의 생물학적 죽음 후에도 삶이 있게 한다면 어쩔 것인가? 그 외에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화가 있다. 우리는 실제 미래에 가능한 지옥을 개인적이 아니라도 사회적으로 우리 앞에 대면하고 있다. 살기로 저주받은 살아남은 영혼의 존재 상태가, 살 수 없지만 살 수 밖에 없는 곳에서 잠행성 독약의 방열과 독가스 가운데서 비참히 꿈틀거리는 곳이다. 또는 구성원 하나하나가 그들의 이웃을 적대시하는 무정부 상태의 가능성에 직면하고 있다. 진실은 없고 오직 사기와 거짓만이 남은 곳. 혹은, 우리가 그려내는 지옥은 헉슬리의 또는 오웰의 <1984>, 또는 조직적 인간 삶의 정점이기도 하다.

그러한 신화는 변화하였다. 에드워즈가 예전에 보았던 인간 앞에 놓인 가능성은 지금 우리의 것이 되어있다. 비록 다른 배경이기는 하지만. 완전한 인간으로의 진보와 지상낙원 외에는 대안을 보지 못했던 에드워즈의 비판자들은 지금 다소 조용한 편이다. 그들은 우리가 전쟁과 기계를 다른 지구로 수출하고 우리에게 낯익은 역사의 사건들을 거대하게 재현시키더라도 별로 흥분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 움켜쥐고 있는 사소한 것에 대해 에드워즈와 의견을 더 같이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알듯이, 우리는 미끄러워 넘어지기 좋은 곳에 자리잡혀 있다. 대량살상무기를 실은 폭격기 조종사가 어느 때든 단지 한방의 버튼을 누름으로써 전 인류의 종말의 개시를 고할 수 있다. 미사일의 조그만 부품이 잘못되어 빗나가면 우리를 향해 날아와 불지옥을 만들어 버릴 것이다. 또는 한 국회의원의 부주의한 언사가 당장 우리에게 죽음을 가져다 주지는 않지만 멀지않은 장래에 길고 긴 파멸의 시작을 촉발시킬 수 있다.

에드워즈는 이점에 있어서 그의 시대에서와 달리 그렇게 시대착오적이지 않다. 그의 19세기 비판자들이 오늘날 시대착오자인 것 만큼 그렇지 않다.

그러나 에드워즈가 우리와 19세기 비판자들로부터 여전히 유리되어 있다는 주된 요점은, 그와 동시대 18세기의 벤자민 프랭클린에 비할 때 그는 시대에 동떨어진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그가 그 당시에 우리에게 이방인 같았으므로, 우리와 의견을 같이할 수 있는 다른 의견들은 피상적이고 비실제적이 되어버린다.

에드워즈가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사악하다고 우리가 동의할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아직도) 모르는 바는 에드워즈 자신이 아는 만큼의 하나님의 거룩함이다. 우리는 우리 지혜 내에서 거룩한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어진 아버지로 대치하였다. 거룩한 하나님은 광대하고 절묘하며 오묘한 창조의 계획에 차질이 없도록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지음 받은 그들이, 나이와 상관 없이, 개인이나 국가나 문명이나를 막론하고, 멸시를 당하거나 자기 의지에 의해 상처를 입거나 약간의 직무태만에 만족하는 것을 허락지 않을 것이다. 혹은, 우리들은 거룩한 하나님을 주권의 원천과 존재의 결정권으로 대치했다. 존재란 간단히 말해서, 무작위적인 확률로부터 결정되어 있게 하는 우주의 본질이다. 우리의 발이 미끄러운 곳에 서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우리가 거룩한 힘과 결정론에 의해 파멸의 한쪽편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미끌어지지 않도록 붙들고 있는 것은 chance 이다. 우리를 향한 진노가 하늘에 쌓여있지 않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온전-고결-영광을 위한 거룩함과 의지란 없기 때문이다. 거룩함이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희망이 없고, 유일한 희망이란 우리의 타협과 탁월한 동물적 영민함으로 (파멸을) 잠간 더 모면하는 일 뿐이다.

에드워즈가 자주 말하기를 인간이 고난을 당한다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주 조금 밖에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기에 조금 덧붙이자면, 인간 그들의 왜소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ideas)이라는 사실이다. 에드워즈의 시대착오성을 기념하려는 것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 무신론의 시대에 그를 기리려는 목적이 아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은 전능하신 주님, 스스로 계신 자, 모든 권세 위의 주제자되신 분의 종으로서 헌신하며 살다 간 사람 에드워즈을 알고 존대하기 위하여서이다. 우리의 종교적 헌신을 통해 유지시켜 보려는 존재로서의 하나님, 우리의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존재, 또는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존재로서의 하나님을 찾는 세대에서 하나님의 진노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의 이미지를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그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룩함 없이 상징을 그려냈으니까.

만일 에드워즈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사악성과 결정론 그리고 파멸의 위협에 대한 그의 전제에 동의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리의 사악성에 대한 느낌에 회개가 따르지 않으면, 우리의 고뇌가 삶으로 이끄는 하나님이 주시는 고뇌가 아니라 냉소적이고 패배적인 죽음으로 이끄는 염려가 된다. 결정론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갈등과 투쟁을 통한 극복이 없는 이유는, 어떤 권능으로도 우리를 마침내 자유케할 수 없음을 믿기 때문이다. 파멸의 한가운데 있는 한 삶에 대한 비젼이, 영광과 영원한 기쁨 가운데 있는 삶의 비젼과 함께하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여기에 우리가 에드워즈를 기억하며 사람들의 그에 대한 회상을 떠올리며 한 가능성이 보여진다. 우리는 에드워즈가 말한 많은 말들의 진실성에 대해 우리의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니, 우리의 역사에 일어난 사실들에 의해 우리의 마음이 바뀌었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하여 그가 본 악마를 본 것이다. 우리가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꿰뚫고 들어왔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 또한 일어날 것임을 왜 희망하거나 두려워 하지 않는가? 한번 더, 아마 갑작스러운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우리를 감싸고 있는 악마적 공허를 감지하게 하는 비슷한 류의 축적된 영감에 의하여 우리가 들어올려져서, 우리 시대에 목격하고 알게 될 그 거룩한 존재, 영원 가운데 있으면서도 겸손하고 참회하는 마음에 가까우신 분,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에드워즈를 그 자리에서 함께 볼 것인데, 그가 찬양하기를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출처: 아멘넷, 정리: Thomas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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