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 문제에 대한 칼빈 신학의 의의(삼위일체, 기독론, 성령론, 구원론적 이단들)

자료실 2010. 4. 8. 09:35
▲ 이승구 교수
칼빈 신학을 다루면서 이단 문제를 다루어 달라는 요청은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 이단이 나타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며, 우리 시대의 영적인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는 요청이라고 여겨진다. 이 글에서는 일단 교회사에서 나타났던 명백한 이단들에 대한 칼빈의 견해를 생각해 보고, 칼빈 시대에 나타난 잘못된 사상과 실천에 대한 칼빈의 견해를 이끌어 내고자 한다. 그 후에 성경을 잘못 해석하면 이런 이단이 융성할 수 있도록 하는 분위기를 마련하는 몇 가지 본문들에 대한 칼빈의 견해를 명확히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이단이나 사이비적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일을 시도해 보도록 하겠다.

이런 작업이 중요한 것은 칼빈의 가르침은 개혁파 정통주의의 기준과 같은 것이므로 이와 같은 노선에 서 있으면 이단이나 사이비적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분명하고 바른 신앙의 길에 서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논의는 단순히 어떤 것이 이단인지 아니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하면 가장 바람직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지를 제시하기 위한 것이며, 또한 우리 주변에 이단 사상들은 물론이거니와 사이비 신앙적 요소가 근절되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되는 것이다.

I. 명백한 이단들

이 항목에서 논의할 것은 일차적으로 역사적 기독교회가 전통적으로 성경에 근거해서 이단이라고 규정했던 바들을 중심으로, 이런 명백한 이단적 사상에 대해 칼빈이 어떤 입장을 표명했는지를 알아보고, 그에 근거해서 자신이 살던 시대의 잘못된 신앙의 풍조와 사상에 대해서 칼빈이 말한 바를 찾아, 칼빈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했으며 이단적이라고 여긴 사상과 실천들을 논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여기서 언급하는 사상의 요소들을 자신의 가르침 가운데 가지고 있는 이들은 이단적인 가르침을 자신도 모르게 가지는 것이며, 그것을 유포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아주 명확히 정리를 하여 우리 안에 이런 이단적 사유나 실천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1. 삼위일체론에 대한 이단들

1) 아리우스주의(Arianism)
아리우스와 아리우스파에 대한 칼빈의 설명은 그가 이들의 이단성을 어떻게 지적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 주는 예가 된다:

아리우스(Arius)는 … 그리스도께서 다른 피조물들처럼 창조되셨고 그가 존재하게 된 시발점이 있다고 주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옛 사람들은 그의 다재다능한 간교함을 그 은신처에서 끌어내기 위하여 … 그리스도께서 성부의 영원한 아들이시오 성부와 본질이 동일하시다(consubstantial)고 선언하였다[니케아 회의, 325]. 그러나 아리우스파 사람들은(the Arians) “동일본질”(homoousios)라는 단어를 지극히 사악하게 미워하고 저주하기 시작하였고, 그리하여 그들의 불경스러움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1)

칼빈은 이들이 처음부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라고 진정으로 전심으로 믿었다면, 그가 성부와 동일본질(homoousios)이심을 부인하지 않았을 것인데, 이를 부인하는 것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온전한 신성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라고 논의하는 것이다.

2) 양태론(Modalistic Monarchianism)
이와는 정반대로 사벨리우스(Sabellius)의 주장이 어떻게 이단적이지에 대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제시하며 비판하고 있다:

그 후에는 사벨리우스가 일어나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이름들은 … 어떤 구별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고 … 성부가 성자요, 성령이니 계급도 구별도 없다고 하여 옛 노래를 다시 부른 셈이다. 그 당시 마음에 경건을 지닌 의로운 학자들은 그 사람의 사악함을 깨뜨리기 위하여 한 분 하나님 안에 삼위(three subsistences)가 계심을 진실로 인정해야 한다고 천명하였다.2)

아리우스와 사벨리우스의 견해가 이단적이라는 것은 이미 칼빈 이전에 확립된 것이므로 칼빈은 이와 같은 견해의 문제점을 드러내면서 정통적 삼위일체 교리를 아주 분명히 천명하고 있다. 칼빈은 삼위일체에 대한 믿음을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한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한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성자는 성부가 아니고, 성령도 성자가 아니시며, 그들이 각기 고유한 존재(peculiar subsistence)를 지니신다는 이 믿음.”3) 바로 이것이 정통 기독교회의 삼위일체에 대한 믿음의 표현인 것이다.

이에 따라서 이전 시대에 이를 벗어나 말하거나 설교하면서 교회에 영향을 미치려 하던 아리우스주의나 사벨리우스주의와 같은 명백한 이단들을 칼빈은 정확히 언급하여 그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3)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뿐만 아니라 칼빈은, 자신이 살던 시대에 이와 같은 정통적 삼위일체 이해와는 다른 이해를 제시하는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1511-53) 같은 사람을 그 시대의 천주교를 비롯한 모든 삼위일체론자들과 같이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이단이라고 단언하였다.4) 이와 같은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칼빈은 “자! 이제 경건한 독자들은, 지금까지 교리에 대한 순전한 믿음을 왜곡시키고 어둡게 만들기 위하여 사탄이 사용해 온 온갖 비난들이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서 반박된 것을 인식하리라 믿는다.”고 말하고 있다.5) 그러므로 칼빈은 이단들은 “교리에 대한 순전한 믿음을 왜곡시키고 어둡게 만들기 위하여 사탄이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를 반박하는 것이 바른 가르침과 신학의 역할이라고 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4) 칼빈 이후 시대에 나타난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이단들
칼빈 이후에 나타난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이단들로는 소시누스주의(Socinianism)와 유니테리언(Unitarian),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모든 후대의 신학들, 그리고 삼위일체를 이야기 하나 정통적 삼위일체론에서 교묘히 벗어나는 이들이 다 삼위일체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이단에 속하는 것이라고 판단해야만 한다.6)

2. 기독론적 이단들

1)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이단들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고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었던 아주 뛰어난 인간 예수에게 세례 때에 하나님의 권세가 임하셔서 사역하게 하셨다가 십자가에서 그 권세가 떠나갔다고 주장하는 에비온주의자들(Ebionites), 온전한 사람이신 예수에게 요한의 세례 때에 하나님의 속성인 비위격적 로고스가 임하여 사역하게 하셨다가 십자가에서 떠났다고 주장하는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ta)의 역동적 군주론(Dynamic Monarchianism), 요한복음을 거부하면서 동정녀 탄생으로 탄생하였으나 단지 사람인 그리스도는 로고스가 아니셨다고 주장하는 알로기파(the Alogi), 사모사타의 바울의 견해를 포함하여 본래 아들이 아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고 주장하는 양자론(adoptiism), 그리고 영원에서 한동안 성자가 있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아리우스주의 등이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이단들이다. 칼빈은 이런 이단들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또한 칼빈은 자신이 살던 시대에 그리스도는 사람이셨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소시니우스주의(Sociniansim)의 이단성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2)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이단들
:가현설(docetism), 아폴리나리우스주의(Apollinarius, 310~390)

칼빈은 이전 시대의 정통적 성경적 견해를 따르면서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실제로 가지셨다는 것을 부인하는 가현설(Docetism)을 강하게 비판한다. 칼빈은 마르시온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그저 그렇게 보였을 뿐이라고 상상하였다고 하면서 비판한다.7)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육체를 지니고 계시므로 그가 우리를 만지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다.”8) 또한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육체로 보이신다는 사실을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이 유령이 아니심을 친히 증명하신다”고 단언한다.9)

또한 그리스도의 인성의 온전성을 부인한 아포리나리우스(Apollinarius)의 사상도 칼빈은 강하게 비판한다: “아폴리나리우스는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영[로고스]을 지니셨으나 (인간적) 영혼은 없으셨고, 그리하여 그는 절반쯤만 사람이셨다고 주장했다.”10)

3) 신성과 인성의 위격적 연합을 오해한 이단들
:유티케스주의(Eutychianism), 네스토리우스주의(Nestorianism)

신성과 인성이 연합하여 두 성질이 합하여져서 하나의 본질을(fused into a single nature) 형성했다고 주장하면서 따라서 그리스도는 “신적인 몸”을 지녔다고 주장한 유티쿠스(Eutychus, or Eutyches, 378-454)를 따르는 사람들과 이를 발전시켜 그리스도는 아주 한 본성을 지녔다고 주장하는 단성론자들(Monophysitism)도 잘못된 것임을 칼빈은 분명히 한다.11) 그런가 하면 신성과 인성은 그 나름의 위격을 지니고 있으므로 결국 그리스도 안에 두 인격이 있다고 주장한 네스토리우스(Nestorius)주의자들은 이단임을12) 칼시돈 정의(451)에서 명확히 선언되어졌기에 칼빈도 네스토리우스주의를 강하게 비판한다.13) “그는 그리스도의 본성을 구분하기 보다는 서로 완전히 분리시켜서 두 분의 그리스도를 만들어 내고 만 것이다.”14)

칼빈은 또한 자기 시대의 세르베투스가 유티케스주의와 비슷하게 “그리스도의 신성이 그의 몸을 삼켜 버렸다”는 “정신 나간 사상”을 말한다고 하면서 강하게 비판한다.15) 그리스도께서 “결국 하나님도 사람도 아닌 일종의 중간적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과거의 유티케스와 칼빈 당대의 세르베투스의 주장이라고 언급하면서 비판하는 것이다.16)

4) 칼빈 이후에 나타난 기독론적 이단들
칼빈 이후에 나타난 기독론적 이단으로는 이 땅에 계신 예수님께서는 신성에 속한 성질을 전적으로나 일부를 실질적으로 비우셨다는 극단적 형태의 케노시스(Kenosis) 이론들과 그리스도를 그저 사람으로만 여기려는 구자유주의(Old liberalism)를 생각할 수 있다. 칼빈은 케노시스 이론들이 나타나기 전에 활동하였으나 그의 저작 전반에서도 그러할 뿐만 아니라 특히 빌립보서 주석에서는 그가 마치 케노시스 논쟁을 지켜보는 것처럼 후대의 케노시스 이론을 효과적으로 강하게 반박하고 있다. 그러니 더 극단적으로 나아가 실질적인 성육신을 부인하는 이들에 대한 칼빈의 입장이 어떠하였으리라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또한 우리가 성경으로부터 예수님에 관한 역사적 정보를 전혀 얻을 수 없으며,17) 혹시 얻을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별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에18) 대한 칼빈의 입장이 어떠할지는 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3. 성령론적, 계시론적 이단들

1) 노바티아누스주의(Novatianism)
도덕적인 삶을 강조하면서 지나치게 나아갔던 또 하나의 이단이 3세기 중엽 이후에 강하게 나타났으나 그리 오래 가지 못했던 노바티아누스주의이다. 칼빈에 의하면 이들은 히브리서 6장 4~6절과 10장 26절 말씀들을 “잘못 오해하여 그들의 이단적 사상의 근거로 삼기도 했다”고 한다.19)

2) 재세례파 열광주의자들(Spiritualists, ἐνθουσιασταί)
“성경을 떠나 직접 계시로 비약하는 광신자들은 경건의 모든 원리를 파괴한다”고 하는 칼빈의 말은20) 이 맥락에서 특히 인용할만하다고 여겨진다. 우리는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솔하게 저버리고 결별하면서도 자신들의 마음에 일어나는 몽상들을 붙잡는다”고 하면서21) 이들을 강하게 탄회(坦懷)하는 칼빈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또한 “일부 재세례파 사람들은 모종의 광적인 무절제 상태를 영적 중생으로 오해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무죄 상태로 회복되었으므로 육체의 정욕을 억제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고, 인도자이신 성령을 따르며 그가 주시는 충동 아래 있으면 절대로 곁길로 빠질 수가 없다”고 주장하는 데, 이런 주장이 아주 잘못된 것이라고 칼빈이 비판하고 있음을 잘 알게 된다.22)

3) 성경 이외의 계시를 인정하는 일의 이단성
이와 같은 정통적 이해와 이에 충실한 칼빈의 모습을 볼 때에 성경 이외의 계시를 인정하는 일은 모두 다 이단성이 있다고 칼빈이 판단하리라는 것은 아주 명확하다. 몬타누스파에 대해서 많이 언급하고 있지는 않으나 칼빈이 이들을 비판적으로 볼 것임은 아주 분명하고, 따라서 오늘날 몰몬교, 여호와의증인, 박태선, 통일교, 그리고 새로운 계시를 주장하는 현대인 등 성경 이외의 것에 계시적 의미를 부여하는 모든 이들은 다 이단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4. 구원론적 이단들

1) 영지주의 (Gnosticism)
몸과 영혼을 날카롭게 구별하면서 몸을 천시하고 악한 것으로 보면서 영혼만의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칼빈은 여러 번 강조한다. 칼빈 자신이 몸보다는 영혼을 더 귀한 것으로 여기고 있지만 그것이 영지주의자들의 영육 이원론과는 아주 명확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은 칼빈이 부활한 몸을 강조하며 영원 상태를 몸을 가진 상태로 강조하면서 말하는 부분을 들 수 있을 것이다.23)

2)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
어거스틴과 같이 칼빈은 펠라기우스(Pelagius, 354-420)와 그의 추종자 셀레스티우스(Celestius 또는 Coelestius)는 원죄를 부인하면서 아담의 후예들의 죄악은 모두 “모방에 의한 범죄”라고 잘못 주장함을 강하게 비판한다.24) 이에 대해서 칼빈은 어거스틴의 이들에 대한 반박을 높이 사면서 논의하고 있다.25)

3) 반(半)-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
펠리기우스의 사상이 잘못되었다고 선언한 천주교회 안에도 잘못된 이해가 지속적으로 나타났으니 이는 결국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한 결과였다. 예를 들어서, 피터 롬바르드(Peter Lombard)는 우리가 선행을 하려면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우리에게 가져다주어 효력을 발생하게 하는” 역사하는 은혜(operating grace)와 선한 의지를 돕는 “협력하는 은혜”(co-operating grace)라는 두 가지 은혜가 필요하다고 하였는데(Sentences, II. xxvi. 1),26) 칼빈은 이에 대해서 “바람직하지 못한 점은, 그가 선을 행하고자 하는 효력 있는 열심을 하나님의 은혜의 덕분으로 돌리고 있기는 하나, 그러면서도 사람이 자기의 본성으로 무언가 선을 추구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라고 말하여 정확한 비판을 하고 있다.27) 논의의 요점은 이들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에 우리가 협력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28) 이를 비판적으로 보면서 칼빈은 “피터 롬바르드는 소망의 기초를 두 가지로 - 하나님의 은혜와 행위의 공로로 - 제시하는 데,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는 것이 이제 분명해졌다”고 한다.29)

또한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우리가 타락한 상태에서도 계속해서 신학적인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데,30) 이것이 큰 문제라고 칼빈은 비판한다. 이들은 또한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이 없지 않다”고 주장하는 데31) 이것이 심각한 문제라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타락한 인간의 의지는 노예라고 말하는 어거스틴에게 동의해야 한다는 것이다.32) 칼빈은 이를 강조하기 위해 어거스틴의 다음 같은 말들을 인용하여 제시한다:

“성령이 함께 계시지 않으면 사람의 의지는 자유롭지 못하다. 이는 그 의지가 정욕에 사로잡히고 정복당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33)

“의지가 타락하여 악에게 정복 당했을 때에, 인간 본성이 그 자유를 잃기 시작했다.”34)

“사람은 창조함을 받을 때에 자유의지라는 위대한 능력을 부여받았으나, 죄를 지음으로써 그것들을 잃어버리고 말았다.”35)

“자연적 은사들은 죄로 말미암아 사람에게서 부패하였으나, 초자연적 은사들은 사람들에게서 빼앗긴바 되었다.”36)

“우리에게는 죄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37)

“자유를 통해서 사람이 죄 가운데 있게 되었지만, 그에 대한 형벌로 나타난 부패성이 자유를 필연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38)

“은혜가 모든 선행에 먼저 작용하는 것이며, 의지는 은혜의 인도자로서 앞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추종자로서 은혜의 뒤를 따라 가는 것이다.”39)

“사람이 선한 의지를 갖기 이전에 하나님의 수많은 은사들이 선행하므로, 선한 의지 그 자체도 하나님의 은사들 가운데 속한 것이다.”40)

“오직 은혜만이 우리 속에서 모든 선행을 이루어낸다.”41)

한 곳에서는 다음과 같은 끌레르보의 버나드의 말도 동의하면서 인용하고 있다: “저에게 의지가 없사오나 저를 이끄사 의지를 갖게 하옵시며, 제가 걸음이 더디오나 저를 이끄사 달리게 하옵소서.”42) 그러므로 우리는 타락한 사람들은 심지어 자연적인 은사도 다 부패한바 되었다는 것을 성경에 근거해서 명확히 해야 한다는 것이 칼빈의 입장이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이 어떤 영적인 선을 조금이라도 행할 수 있는 것처럼,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것처럼 논의하는 것은 다 반-펠리기우스주의적인 것이고, 이런 입장의 논의들을 칼빈은 강하게 논박한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은 자기 당시의 천주교 신학들, 즉 오늘날 우리가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라고 하는 이들을 “오늘날의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라고 언급하곤 한다.43) 그리고 그들이 “사실상 자기들의 조상 격인 펠라기우스를 그대로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고 말한다.44) 특히 칼빈은 이런 자들의 오용에 반해서 어거스틴의 의도를 잘 밝히는 데 열심이다: “어거스틴이 인간의 의지를 은혜의 추종자라고 부르지만, 그는 선행에서 의지가 은혜 다음으로 기능을 발휘한다는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다. 그의 목적은 다만, 구원의 첫째가는 원인을 사람의 공로에다 두는 펠라기우스의 악한 가르침을 반박하고자 하는 것뿐이었던 것이다.”45)

칼빈은 천주교회의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알레고리적으로 사용하여 타락한 사람들은 “절반쯤은 살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절반쯤 살아 있는’ 상태에 있는 것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이 복된 생명에 관한 한 완전히 죽어 있는 것으로 가르친다”고 하면서 에베소서 2:5, 5:14, 요한복음 5:25 등의 말씀을 인용한다.46) 이와 같이 칼빈은 이전 시대에 명확히 이단으로 규정된 사람들만 아니라 자신의 시대에 이단적으로 나아가는 중세 스콜라신학자들의 문제점을 아주 명확히 드러내어 주는 공헌도 하고 있다.

4) 반법주의(Antinomianism) 이단들
또한 칼빈 시대에 이제 구원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 칼빈은 “이런 사악한 생각은 머리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하면서 “모세는, 율법이 죄인들 가운데서는 죽음 이외에 아무 것도 이루어 낼 수 없지만, 성도들 가운데서는 더 낫고 훨씬 탁월한 용도가 있다는 것을 훌륭히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고 말한다.47) 그러나 칼빈이 말하는 율법 준수는 율법의 정신을 지키는 것이지, 구약 율법을 그대로 준수하는 율법주의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그 한 예로 주일과 안식일 문제에 대한 칼빈의 입장을 생각해 보자. 칼빈은 “미신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성일이 뒤로 제쳐진 것이요, 교회의 품위와 질서와 평화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그 목적을 위하여 다른 날이 지정된 것이다.”고 말한다.48) 이런 변화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완성과 연관된 변화이다. 그래서 칼빈은 “고대의 안식일이 나타내었던 바 그 참된 안식은 바로 우리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 목적이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주님이 부활하신 그 날이 그 그림자를 종결지은 것이요,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그림자와 같은 의식을 고집하지 말도록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49) 이 때 칼빈이 “교회들이 다른 날을 엄숙히 지정하여 모임을 갖는다 할지라도 그것을 정죄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할 때50) 그 의미를 좀 주의해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여겨진다.

많은 분들은 칼빈이 꼭 주일이 아닌 날 예배를 허용한 것으로 이를 해석하려고 한다. 기본적으로 그러하나 이 때 칼빈은 주로 유대인이 안식일로 모이는 토요일을 고집하는 분들을 주로 염두에 두면서 이 말을 하였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칼빈은 이 말에 “미신이 개입되지 않는다면”이라는 말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이 오늘날 안식교와 같이 이날 주께서 안식일로 정하셨다고 하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면 혹시 그 날 모여서 공식적 예배를 해도 정죄하지는 않겠다고 한 것이다. 다른 주석이나 논의 중에서 주일에 모여 예배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서 쉬는 것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이것은 안식일을 율법주의적으로 지키려는 이들에 대한 반박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에 대해서 칼빈은 “자신들의 규정을 고집하는 그런 자들은 안식일에 관하여 유치하거 더러운 미신을 조장하는 면에서 유대인들보다 세 배는 더한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51) 그러나 어떻게 하든지 “우리들 가운데서 신앙이 쇠퇴하거나 무너지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거룩한 모임들을 자주 부지런히 가져야 하고, 또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돕는 외형적 보조 수단들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칼빈은 또한 강조한다.52)

5) 속죄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이단들
오늘날에는 이에서 더 나아가서 속죄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이단들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주장들에 대해서 그리스도 속죄의 “결과적 절대적 필요성”(consequent absolute necessity)을 강조하는 칼빈이53) 어떤 태도를 나타내어 보이려는지는 명약관화한 것이다. <계속>

<각주>
1)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LCC edition, edited by John T. Mc Neill, translated by Ford Lewis Battles (Philadelphia: Westminster, 1960), 1. 13. 4 . 이하에서 이 책으로부터의 인용은 다음과 같이 약하기로 한다. Calvin, Institutes. 1. 13. 4.
2) Calvin, Institutes 1. 13. 4.
3) Calvin, Institutes 1. 13. 5.
4) 이에 대해서는 Calvin, Institutes 1. 13. 22를 보라.
5) Calvin, Institutes 1. 13. 29.
6) 이런 것들에 대한 칼빈적, 정통주의적 입장에서의 좋은 논의로 Herman Bavinck, The Doctrine of God (Grand Rapids: Eerdmans, 1951, paperbak edition Grand Rapids: Baker, 1977), 288-89=이승구 역, <개혁주의 신론> (서울: CLC, 1988), 422-24. 그는 또한 사벨리우스주의의 후대적 변형으로 세르베투스와 야콥 뵈메의 사상, 쉘링과 헤겔의 사상 등을 언급하고 있다. Cf. Bavinck, The Doctrine of God, 29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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