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비주의

 

http://www.ligonier.org/learn/articles/mystic/

by 피터 릴백(Peter Lillback)

 

 

14세기는 신비주의가 만개한 시대였다. 당시의 신비주의는 오늘날까지도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운동이다. 신비주의는 이 지상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개인적이고 즉각적으로 연합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특별한 정신적 체험과 상태를 통해 하나님에 관한 직접적인 지식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신비주의는 기독교에서만 찾아볼 수 있지는 않다. 전세계 철학과 종교들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비주의는 그 뿌리를 성경에 두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저술가인 위디오니우스(Pseudo-Dionysius) 등의 신플라톤 철학과 8세기 위디오니우스의 저술들을 번역한 스콜라 철학자 존 스코투스(John Scotus)에게 영향을 받았다.

14세기에는 신비주의 도미니크파 신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hart), 요한 타울러(Johann Tauler), 하인리히 수소(Heinrich Suso) 등이 활약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의 신비주의 저서인 [독일신학_Theologica Germanica]이 어느 정도 마르틴 루터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화란의 신비주의자인 게르하르트 그루테(Gerhart Groote)는 공동생활형제단(Brothers of the Common Life)를 세웠는데, 그 단체가 종교개혁의 선구자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영국의 신비주의자 중에는 여성인 노위치의 줄리언(Julian of Norwich)이 있으며, 동시대 여성 신비주의자는 시에나의 캐더린(Catherline of Siena),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등이 있다.

 

기독교 신비주의 출현의 원인

교회사의 다른 이면에는 마술적이고 비현실적인 특징들이 존재하는데, 이런 이유로 그것은 매우 의심쩍고 비정통적인 전통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기독교 신비주의는 출현했다. 금욕주의, 성례적 미신주의, 성경의 알레고리적 해석 등도 이에 포함된다.

금욕주의는 급진적으로 물리세계를 거부하는 사상으로서, 기독교 신비주의의 조상이라 할 만하다. 기독교 신비주의와 마찬가지로 금욕주의는 신플라톤주의에 연원을 두고 있다.

성례적 미신주의는 그레코-로만 신비종교들의 영향 속에서 발전하였으며, 미트라와 이시스를 섬기는 사교가 이에 해당한다. 교회는 이 미신주의가 특별한 의식이 발휘하는 능력에 대한 신비적이고 마술적인 믿음을 특징으로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특징이 교회에 영향을 미쳤다. , 이 미신주의의 특징은 성례, 순교자의 성물, 교회의 영웅들 등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에 영향을 줬다는 것이다.

성경의 알레고리적 해석은 성경을 4중으로 주해해야 한다는 믿음에서 시작되었다. , 그리스도 중심적인 역사적 시각 대신, 성경은 비밀스럽고 형이상학적이며, 종말론적인 지식을 전달해 주는 지식이 숨겨져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특별한 체험을 하여 의식의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이러한 욕망은 무엇을 결과했는가? 첫째, 성경을 잘못 해석했다. 예를 들어, 베드로후서 1:4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로 만들었다고 말씀한다. 이 구절을 맥락에서 벗어난 상태로 읽으면, 지나친 영적 해석으로 나아갈 수 있다. 또한, 변화산상의 변형사건(17:1-13), 바울의 삼층천 경험에 대한 묘사(고전 12:2), 계시록의 요한의 환상 등을 잘못 해석하게 되면 부지불식간 성경적 기독교신앙을 비기독교신앙, 이교의 신비적 체험과 철학 등에 혼합시키게 된다.

기독교 신비주의 출현의 또다른 원인을 언급할 때, 우리는 중세적 맥락도 생각해야 한다. 당시의 시대상을 살펴보면, 페스트의 유행과 높은 사망률, 이단의 박혜, 십자군전쟁, 부유한 교회의 상태 등도 원인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기독교 신비주의는 위협적이고 혼란스러우며 만만치 않은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도피처를 제공해 주었다. 신비주의자들은 주관적이고 내적인 체험을 강조하며 외부세계에서 벗어나게 하거나 무시하게 만들었다.

 

기독교 신비주의의 전통과 기술

수도원운동을 통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을 떠나 수도원생활을 했는데, 14세기까지도 여전히 그 영향력은 줄지 않았다. 수도원운동이 확산되자, 수도원에서는 수행자들에게 신비체험을 증진시키는 명상과 관련한 경건 계획표를 제공해 주었다. 예를 들어, 신비주의자들은 종종 금식과 순례를 훈련으로 삼았으며, 좀더 급진적인 금욕주의 형태로는 극단적 금식, 수면금지, 자기 태형 등이 있다. 종교적 황홀경에 대한 신비주의자들의 탐구는 정신의 수위성(秀偉性)을 거부하고, 끊임없는 반복 기도를 통해 정신을 비우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구하려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체험을 활용하였다. 첫 번째 방식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부정하여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시도였고, 두 번째 방식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역설(力說)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시도였다. 두 방식 모두 본질적으로 사색적이었다. 어떤 방식도 성경적 계시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오히려, 인간 자신의 내적이고도 비이성적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찾으려 했다. 그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찾으려는 행위는 종종 가설적이었고, 성경적 기반이 없기 때문에 문제를 야기시킬 가능성이 있었다.

 

기독교 신비주의 신학자들

14세기 신비주의자들은 신비주의에 대하여 각자 자신들만의 접근법을 갖고 있었다. 동방의 그레고리 팔라마스(Gregory Palamas)는 하나님을 찾으려는 시도로 기도를 통한 내적 침잠을 지지했다. 그는 아타나시우스의 금언(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다, 그러므로 인간도 하나님이 될 수 있다)을 활용하였다. 그는 이 금언 속에는 범신론과는 다르지만 인간 신성화의 형태가 담겨있다고 주장했다. 팔라마스에 따르면,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계신 반면, 인간은 신적 에너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특별한 자세로 신성한 문장을 암송하는 등의 여러 신비주의적 의식을 발전시켰다.

반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가지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즉시적 지식관에는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영혼의 불꽃_spark of the soul” 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믿었다. 그 불꽃은 영원한 진리를 명상하게 하여 영혼 속에 하나님을 출생할 수 있도록 만든다. 에크하르트에 따르면, 이것은 오직 자아와 이 세상을 포기할 때만이 일어나는 사건이다. 하나님과 연합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생명과 그 신적 본성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 연합으로 영혼은 신적 본성에 참여하여 신이 될 수 있다. 에크하르트는 이 지식은 말로는 형언할 수 없기 때문에 오직 순전한 신적 연합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축복의 이상_beatific vision”은 그리 오래가지 않으며, 영원 속에서만이 영구한 상태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교황은 나중에 에크하르트의 범신론적 주장을 비판하였다.

 

중세신비주의의 유산

신비주의 신학은 중세기를 끝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이후 교회에서도 꾸준히 재등장하였다.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Loyola), 오시그의 카스파르 슈벵크펠트(Caspar Schwenkfeld von Ossig), 일부 영국 청교도들이 신비주의적 주장을 했다.

또한, 다양한 개신교 전통 속에도 신비주의가 들어있거나, 신비체험에 대해 개방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경건주의, 퀘이커, 오순절운동, 은사주의운동 등이 이에 포함된다. “개신교 자유주의의 아버지프리드리히 슐라이마허는 종교적 체험은 기독교신앙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20세기의 신비주의는 종교적, 철학적 경계를 뛰어넘어가는 양상을 보였다. 그같은 양상을 주도한 이들로는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오토(Rudolf Otto),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유대 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떼이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 등이 있다. 이들 모두 14세기 기독교 신비주의에 영향을 받은 인물들이다.

 

기독교 신비주의의 극복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신비체험 등에 자리를 내주어서는 안된다. 말씀은 우리에게 정당한 계시 진리이며, 누군가가 어떤 개인적인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려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의심해 봐야 한다. 마음을 비우고 무아지경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마음과 뜻과 생각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난 행위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인격을 통해 당신을 예배하라고 요구하신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가르친 성령과 말씀 간의 철저한 연결성, 말씀과 성례의 성경적 결합, 겸손한 순종과 믿음 안에서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원리는 범신론이나 인신공양적 미신주의 등등의 여러 신비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위험성에서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방법들이다.

성경은 거짓 가르침이 우리 인간의 타락한 품성에서 나타나기 태문에 영을 시험하라고 가르친다. 구원은 인간 중심적인 것이 아니다. 감정, 선택, 사상, 이상 등등이 구원으로 이어지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진리와 지혜는 하나님의 은혜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을 좇는다고 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하고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그 기초를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적 기독교, 특별히 종교개혁적 의미의 신앙의 회복은 무절제한 신비체험을 거부하고, 성령님을 통한 그리스도의 정경적 계시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진정으로 인간은 타락한 본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우리는 내적 충동성을 우선적인 영적 안내자로 삼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말씀과 성령님을 겸손히 의지하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묵상은 성경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어떤 특별한 체험을 구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해 행하시고 말씀으로 기록하신 특별한 이적들을 상고해야 한다. 하나님을 알고자 할 때, 그분을 말해주는 성경을 알아야 하고(5:46), 사랑하는 아버지께 기도해야 하며, 예배와 성례에 참여해야 한다.

우리는 지상명령을 기억하며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10:27). 또한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에 뿌리를 두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은혜를 내적으로 체험한 마음과 감정만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해 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가져온 곳 : 
카페 >(안산) 회복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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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안식| 원글보기
'청지기 사명' (십일조) / R.C. Sproul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

1947년,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야구 시합을 보러 가게 되었을 때 나는 무척 흥분해 있었다. 나는 삼촌과 손을 잡고 포비즈 경기장 관람석의 우리 자리를 찾아 걸어갔다. 경기장 한쪽에서 선수들이 연습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아이비 덩굴 잎이 덥힌 담장과 관람석 중앙의 기념탑 뒤쪽에 있는 오래된 철문과 베이브 루스가 그의 마지막 홈런을 날린 우익수 쪽 관람석을 가로막고 있는 높은 철망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삼촌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지갑을 조심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즉각 그 지시를 따랐다. 자리에 앉은 다음 나는 "이제 지갑에서 손을 떼도 될까요?"" 하고 물었다. 삼촌은 그래도 좋다고 하셨다. 왜 갑자기 그런 주의를 주셨는지를 묻자 삼촌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기 둥근 목 칼라가 달린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을 보렴. 신부란다. 신부나 목사가 가까이 올 때면 언제나 지갑을 조심해야 한단다. 그 사람들은 모두 돈을 뺴앗아 가려고 하거든."

내 첫 번째 야구 경기 관람은 십일조와 자선금에 대한 냉소적인 자세를 처음 대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삼촌과는 다르셨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십일조를 하도록 가르치셨다. 매주 나는 내 용돈의 10%를 헌금 주머니에 넣어야 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오래 전부터 그렇게 배웠고 또한 계속해서 그렇게 해왔다.

갈수록 믿지않는 사람들은 십일조나 헌금에 대해 거센 비난을 퍼붓는다. TV를 통해 복음을 전한다는 사람들이 십일조에 대한 좋지 않은 인상을 심어 놓았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한 청지기가 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우리는 매주 주일에 헌금을 한다. 헌금을 하기 바로 직전에 나는 보통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십일조와 헌금으로 하나님을 예배합시다." 내가 우리 성도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헌금이 예배의 한 행동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구약 성경의 십일조]
 

성경에 가장 먼저 기록된 헌물은 가인과 아벨이 드린 것으로 창세기 4장에서 볼 수 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4:3-5)
 

하나님은 왜 가인의 제물보다 아벨의 제물을 더 기뻐 하셨는가? 어떤 사람들은 가인은 땅의 소산을 드린 반면, 아벨은 동물을 잡아 피의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서 보면 하나님은 땅의 소산을 제물로 드리는 것을 합당하게 여기셨다. 아벨은 양을 친 반면 가인은 땅을 경작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농작물을 제물로 드렸다. 성경 그 어디에도 양을 치는 목동이 땅을 경작하는 농부보다 더 거룩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히브리서 11장 4절이 이 문제를 푸는 열쇠가 된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을 더 기뻐하신 것은 그가 드린 제물의 방법 때문이었다. 그는 믿음으로 제물을 드렸다. 그러나 가인은 그렇지 않았다. 실제로 그의 믿음없는 행동은 동생에 대한 질투로, 분노로 표출되었다.

나는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아벨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한 것이다. 그는 그의 제물을 믿음으로 드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를 드렸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진수이다.

제사의 개념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핵심으로 이어진다. 구약 성경의 예배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원 사역을 예시하면서 희생 제사 제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구약의 회막 안으로 들어가면서 가장 먼저 마주치게 되는 것은 '번제단'이다.

오늘날 교회에는 구약 시대의 번제단 같은 것은 없다. 동물의 피로 희생 제사를 드리던 시대는 끝이 났다. 단번에 완전한 제사를 드리신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것의 막을 내리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히9:24-10:3)  
 

우리의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의 대속은 구약의 제사제도를 폐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희생의 원리까지 제거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사를 드려야 한다. 바울은 로마서에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도록 되어 있다. 우리는 예배와 감사를 통해 우리의 시간과 힘과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 성경적인 헌금은 전반적인 청지기 사명의 일부이다.

청지기 사명은 창조와 함께 시작되었다. 창세기에서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가, 특히 하나님께서 온 우주의 주인되심을 찬양하는 예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용했던 시편을 통해 창조를 찬미하고 있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24:1).
 

하나님은 모든 것의 근원이시며 모든 것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것의 주인이시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다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로서 소유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우리 '소유물'의 궁극적인 주인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그 소유물들을 우리에게 맡기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식으로 그것들을 관리할 것을 기대하신다.

성경에 '청지기'라고 번역된 단어는 '경제'(economy)라는 단어가 파생되어 나온 헬라어 단어 '오이코노미아'(oikonomia)이다. '집'을 뜻하는 헬라어 단어 '오이코스'(oikos)와 '법'을 뜻하는 헬라어 단어 '노모스'(nomos)가 합성된 이 단어는 직역하면 '가정 법' 또는 '가정 규정'이란 뜻이다.
 

고대 사회에서의 청지기는 집주인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주인이 집안 일을 관리하기 위해 고용한 사람이었다. 그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고 가정의 물자를 배분할 책임이 있었다. 청지기의 일은 찬장에 음식을 가득 채워 놓고, 돈을 관리하고, 잔디를 정리하고, 집을 좋은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청지기적 사명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에게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명하신 에덴 동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아담과 이브가 세상의 주인이 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세상을 관리할 책임을 갖게 되었을 뿐이다. 동산을 파손하고 남용하는 것이 아니라 가꾸고 경작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 낭비되거나 상하지 않게 돌봐야 했다.
 

나는 리고니어 성경연구원(Ligonier ministries)의 회장직을 맡고 있다. 그 일에는 모든 최고 경영 관리자가 해야 하는 자원의 배치라는 책임이 따른다. 우리는 사역을 하지만, 우리에게는 관리해야 할 건물과 규정이 있고, 사람들과 컴퓨터와 사무실 집기와 물자가 있고 또 돈이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해야 하는 정해진 시간이 있다. 우리의 시간과 인력과 돈을 낭비하고 우리의 설비나 장비를 잘못 사용한다면 우리는 효과적으로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불충한 청지기가 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원을 잘 다루기 위해서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한 가지 일에 어떤 자원을 다 써버리면 다른 일에는 그 자원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만약, 우리에게 100불이 있는데 그 돈을 가지고 모두 옷을 샀다면, 더 이상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고 있다. 모든 사람이, 비록 억만장자라 할지라도 모두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일한다. 어떤 자원을 사용할 때마다 우리는 결정을 내려야 하고 그 결정은 우리가 어떤 청지기인지를 보여준다. 이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에게 에덴 동산을 어떻게 관리했는지에 대한 책임을 물으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역과 가정 생활과 개인적인 일 등,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을 어떻게 관리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신다. 이 모든 일들은 자원을 관리하고 배치하는 일이다.
 

신약 성경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이야기 중의 하나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이다. 그 젊은이는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번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재산을 유산으로 받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유산을 받자마자 재산을 늘리거나 투자하려 한 것이 아니라(종의 비유에서 보았듯이), 집을 떠나 먼 곳으로 가서 술과 여자와 여흥에 다 허비해 버렸다는 점이다. 그는 결국 돼지들이 먹는 열매를 먹으며 살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해 버렸기 때문에 '탕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자신의 삶을 낭비한 것이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청지기 사명을 저버린 죄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산하는 것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이 지구상에 두셨다. 삶을 낭비하는 것은 비극이다. 그러나 그것이 탕자가 새로운 삶을 찾고 다시 제 정신을 차리게 될 때까지 그의 삶이었다.
 

그는 아들의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고 종으로 여겨질 것을 각오하고 회개하면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기쁘게 맞아 주었고, 그가 돌아온 것을 축하하기 위해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그것은 모든 탕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보여 주는 아름다운 그림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재산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다. 그분은 은이나 금이나 그 어떤 보화보다 더 소중한 선물이다. 우리는 그 보화를 질그릇에 담고 있다(고후4:7). 이 소중한 보화를 그저 평범한 질그릇에 담아 가지고 다닌다고 생각해보라.

청지기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의 핵심에는 십일조가 있다. 구약성경에서는 십일조가 법으로 제정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법이 신약 시대에 와서도 유효한 것인지에 대해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먼저 구약 성경에서 십일조의 역할을 살펴보자. 십일조라는 말은 '십분의 일'이란 뜻이다.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은 해마다 자기 소산물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게 되어 있었다. 십일조의 이점은 계급 투쟁과 질투로 인한 책략을 막아 버리는 데 있다. 어느 한 그룹의 사람들에게 다른 그룹의 사람들보다 더 높은 비율의 세금을 부과하는 불공평을 막아 준다. 그리고 어떤 한 그룹의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비율의 세금을 부과하게 되면 경제가 정치화되고 권력을 잡기 위해 사회 정의를 무시하는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을 배출하게 된다.


이스라엘에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양을 낸 것은 아니었지만 모두 똑같은 비율로 십일조를 냈다. 이런 구조 속에서는 일 년의 10,000불을 버는 사람의 십일조는 1,000불이다. 그리고 일 년에 1,000,000불을 버는 사람의 십일조는 100,000불이다. 부자가 더 많은 돈을 내기는 하지만 가난한 사람과 같은 비율이 적용되었다.

구약 성경을 보다 보면 사람들이 십일조를 내지 않게 되었을 때부터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았다. 말라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8-10)


최근에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복음주의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가운데 4%만이 십일조를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 '복음주의' 기독교인은 평균 수입의 2%만을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이 조사가 정확하고 십일조에 대한 원리가 아직 유효하다면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96%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고 있는 것이다. 말라기서의 가르침에 따르면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교회와 목회자와 기독교 교육에 속한 것을 도적질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말라기서 안에서 제기된,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라는 질문을 한다면 우리가 언제 그랬느냐고 놀라며 움찔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의 것을 훔치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렇게 반응했다고 지적하셨다. 그리고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시겠다는 약속과 함께 그들에게 신실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처음 십일조를 제정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성전에서 섬기는 일을 하도록 레위 족속을 따로 구별하셨다. 레위 족속은 국가의 영적, 교육적 책임을 감당하도록 다른 족속들로부터 구별되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상품과 용역의 '가치'가 결정되는 시장 경제를 이해하고 계셨을 것이다. 연예인, 운동선수, 기업체, 의사, 변호사, 그리고 최고의 수입을 자랑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우리 사회의 시장 경제 속에서는 그들의 용역이 높이 평가된다. 그러나 교사와 목회자들의 용역은 그렇지 못하다.

미국에서 가장 수입이 적은 전문가는 성직자이다. 그리고 그 다음이 학교 교사이다.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 십일조를 제정하셨다.


목회자들은 정부로부터 급료를 받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그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교회가 십일조를 하지 않게 되면 그것은 목회자의 보수에 반영된다.

목사가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려면 목사의 보수가 적어야 한다고 말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있다. 그들은 사역자들이 전적으로 사역에 헌신하면서 그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기꺼이 희생해 주기를 바란다. 한 사람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헌신을 강요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그리고 실제로 다른 사람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그들을 착취하는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다.


우리가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쇠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재정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다. 여기에 가장 근본적인 원리가 적용된다. 만일 100불을 가지고 사역한다면 우리의 사역은 그 돈의 액수에 의해 제한을 받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는 그 돈을 낭비하고 10불 정도만을 사역에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전문적인 경영 능력이 있고 청지기 사명을 철저하게 수행한다 해도 100불을 가지고 110불만큼의 사역을 할 수는 없다.

기독교 사역은 그리스도인들의 헌금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그 헌금에 따라 언제 어디서나 사역은 제한을 받는다.



[신약 성경의 십일조]


신약 시대에는 더 이상 십일조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유물로 전해진 기독교 초기의 고서를 보면 신약 시대의 사람들은 공동체 내에서 십일조를 계속 했다. 1세기 말 또는 2세기 초에 기록된 '사도들의 가르침'이라 불리는 '디다케'(Didache)의 상당 부분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후원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거기에도 십일조는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처럼 기독교 교회 역사의 초기 문서에서 우리는 초대 기독교 공동체가 계속해서 십일조를 실천했음을 볼 수 있다. 또 디다케에는 "기부를 하기 전에 손에 땀이 나게 하라"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중하게 경고하는 내용이 있다. 상당히 흥미로운 비유가 아닌가? "기부하기 전에 손에 땀이 나게 하라." 이것은 돈을 주지 않으려고 너무 꽉 움켜져서 손에 땀이 나게 하라는 뜻이 아니라, 어디에 기부할 것인지를 매우 조심스럽게 분별하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후원하는 문제와 관련해 논쟁의 여지를 야기시킨다. 말라기 3장 10절에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구약 성경에서 땅의 소산물이나 동물의 십일조는 레위인들이 관리하는 중앙 창고로 가져갔다. 모든 백성의 십일조는 그곳에 모았다가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레위인들이 다시 분배했다.

그래서 신약 시대에도 중앙 창고가 있어야 하며 모든 십일조를 그곳에 모았다가 다시 분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단 하나의 중앙 성전이 있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의 교회가 시작되었을 때에는 에베소, 고린도, 데살로니가 등 각 도시와 마을에 교회가 세워졌다. 중앙 성소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십일조를 중앙 창고로 모으는 것 역시 애매한 일이 되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에 투자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 원리를 기초로 하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그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개념은 만족을 뒤로 미루는 것이다. 우리가 번 돈을 지금 다 사용하기보다는 저축하고 투자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자본이 그 부를 늘려가면서 우리를 위해 굴러가게 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투자는 영원한 보상이 따르는 하나님 나라에 투자하는 것이라고 확실히 믿는다. 그 보상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과 자녀, 그리고 손자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들은 다음 세대를 위해 하나님의 일에 투자해야 한다. 이것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고 하신 예수님의 훈계를 따르는 것이다.


십일조에 대한 실제적인 제안을 하고 싶다. 사람들은 "십일조를 하고는 싶지만 할 수가 없어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투자한다면 결국에는 아무것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정직하게 말할 수 있다. 십일조를 우선시하는 것을 가능한 한 어릴 때부터 배우는 것이 좋다. 아이에게 용돈으로 1불을 준다면 그 중 10센트는 주일날 헌금 주머니 속에 넣도록 가르치고 아이가 어려서부터 이 원리를 배울 수 있게 하라. 정부가 원천징수하는 세금은 우리가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세금을 공제한 금액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의무는 정부에 대한 의무보다 우선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먼저 드려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 투자하는 일에 자신이 얼마나 진지한지를 알아보려면 지출 명세서를 살펴보라. 당신의 보화가 있는 곳에 당신의 마음도 있다는 객관적이고 확실한 증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내어 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이다. 그것은 영적인 성장을 위한 중요한 발걸음이 된다.


성경 읽기, 기도, 예배, 섬김, 청지기 사명 이 다섯 가지는 생산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훈련해야 할 핵심 요소들이다. 이 다섯 가지는 교회의 건강과 우리의 영적 건강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다섯 가지를 신실하게 실천해 나간다면 우리도 언젠가는 바울처럼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R.C. Sproul의 '당신은 건강한 그리스도인인가?'에서 발췌 (120-140p

출처: 생명나무 쉼터: 글/ 한아름 님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다”는 말의 의미/ 마르틴 부처

그러나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보혈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을 성취하셨듯이, 성령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께 바치며, 이웃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살아가게 하신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계의 기초가 놓이기 이전에 선택되었고, 성령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위하여 성도들에게 부음 바 되어, 그들의 이름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생명책에 기록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들이 현재 속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사도는 여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 나는 이것을 ‘그리스도를 통하여’라고 번역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바울은 올바르게도 우리의 선택을 그리스도에게로 돌리고 있다. 만약 아마도 어떤 사람이 이것을 ‘그리스도 안에’로 파악할 경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거룩하고도 복된 삶으로 예정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런 의미는 항상 바울의 교리와 전적으로 일치할 뿐만 아니라, 첫 번째 의미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며,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성도들을 그의 자녀들의 유업으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하여 그들을 그곳에 참여하게 하셨다는 뜻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고, 거룩하고도 행복한 삶이 주어지고, 선하고도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하여 능력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 이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 돌려져서는 안 된다.

- ‘에베소서 주석’(1527) 중에서 -


마르투스선교회 /개혁주의마을

다른 복음을 몰아내라-② 율법주의
▲정성욱 교수.
 

한국교회의 안방을 차지해 들어와서 한국교회를 어지럽히고 부패하게 하고 있는 다른 복음 중 두 번째는 율법주의다. 율법주의의 기본 정의는 죄인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을 지켜 행해야 한다는 주장과, 그런 주장에 근거한 신앙생활이다. 좀더 풀어 해설하면 죄인이 율법을 지켜 행하는 도덕적 공로를 세울 경우, 그 도덕적 공로에 대해 하나님께서 칭의나 구원으로 보상하신다는 도덕주의·공로주의적 신념과 그런 신념에 기초한 잘못된 신앙생활이다. 좀더 넓게 말한다면 죄인이 칭의와 구원을 얻기 위해 어떤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모든 종류의 조건주의 역시 율법주의라 할 수 있다.

 

한국교회 내에 팽배한 율법주의는 다양한 형태를 띄고 있다. 그 첫째 경우가 바로 오직 믿음과 은혜로 말미암은 칭의와 구원을 거부하고, 죄인 스스로의 능력과 노력으로 거룩한 율법의 요구를 성취함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원조 율법주의이다. 이런 원조 율법주의를 신봉하고, 또 그렇게 교인들에게 가르치는 교단이나 교회는 그렇게 많지 않다.

 

세계 교회사에서 어거스틴과 구원론 논쟁을 벌였던 펠라기우스의 구원론은 율법주의·도덕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 본성의 전적 타락과 무능력을 거부하고, 인간의 본성이 근원적으로 선하며, 하나님의 율법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펠라기우스는 본성적으로 선하고 능력 있는 인간이 도덕법을 대표하는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함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 내에서 급진적 펠라기안주의자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둘째 경우가 로마 가톨릭적 율법주의다. 로마 천주교의 공식 교리에 의하면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영세를 받을 때, 죄인의 원죄를 포함한 과거의 죄가 사함을 받고 처리된다. 그러나 이때 칭의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영세를 받은 천주교인은 남은 인생 동안 지속적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뤄가야 한다. 천주교의 공식 교리에 의하면 영세 이후 신앙생활 속에서 율법의 요구를 이뤄가는 과정이 칭의다. 신앙생활 과정에서 영세받은 천주교인이 율법의 요구를 이뤄가야 한다는 조건을 성취할 때만 최종적으로 칭의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천주교인이 율법의 요구를 이뤄가는 칭의의 과정 속에서 계속 죄를 범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죄에 대한 보속의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천주교인들 중 최종적으로 자신이 칭의되어 천국으로 간다고 믿고 또 그렇게 확신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러한 로마 천주교의 구원론은 펠라기우스주의 같은 원조 율법주의는 아니지만, 오직 하나님 은혜로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믿고 의지함으로 영 단번에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는 성경적 구원론에서 크게 이탈한 이단적 주장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죄인의 모든 죄를 일거에 용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공로를 믿음으로 붙드는 모든 죄인이 영 단번에 의롭다 함을 받아, 영원한 의인의 신분을 얻게 된다는 성경적 구원론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 천주교회의 구원론은 예수 믿음에 인간의 율법적·도덕적 공로를 더해야 칭의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의미에서 반(半)펠라기우스주의로 비판받아 왔다. 로마 가톨릭이 가르치는 반펠라기우스주의적 구원관은, 바로 신약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경고한 ‘다른 복음’과 매우 유사한 성격을 띠고 있다.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율법주의자 또는 유대주의자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완전성과 충족성을 거부하고, ‘오직 믿음’의 효력을 거부하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믿고 의지한다 해서 칭의와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음에 율법 준수를 더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말한 율법 준수란 할례 받음, 안식일과 다른 절기 준수, 구약 정결음식법 준수 등을 포함한다. 우리의 칭의와 구원은 오직 은혜만으로, 오직 믿음만으로,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완성된다는, 순수한 복음, 순도 100%의 복음, 진짜 복음에서 이탈한 것이다. 이것은 다른 복음을 전하고, 다른 복음을 믿고,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이기에 영원히 저주 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오늘날 이러한 로마 가톨릭적 율법주의가 한국 기독교회 내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예수 믿음에 율법 준수를 더해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공공연히 가르치는 교회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교회들에서는 예수님을 믿고 회심한 후 주일성수, 십일조 헌금, 새벽기도, 주초 금지 등을 준수하지 않으면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처럼 가르친다.

 

이들의 의도가 어떻든, 이런 설교는 철저히 율법적이며,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에 정면 배치된다. 이런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하며, 다시금 믿는 자들을 율법과 정죄 의식의 굴레와 속박에 빠져들게 하는 심각한 오류이다.

 

상술한 관점이 좀 더 노골적인 율법주의라면, 좀 더 미묘한 차원에서 율법주의적 다른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교회들이 증가하고 있다. 이런 교회들은 칭의·구원과 선행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 오해로 말미암아 이런 미묘한 율법주의적 오류에 빠지게 된다. 이들의 주장은 소위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입술로는 신앙고백을 하더라도, 삶 속에 선행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표면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가지고 있는 미묘한 함정은, 여전히 믿음에 선행을 더해야 구원을 얻는다는 율법주의적 패러다임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믿음에 선행을 조건으로 더해야 구원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수식으로 표현하자면 ‘믿음+선행=구원’이다.

 

그들이 이런 주장을 내세우는 이유와 배경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한국교회 내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적으로 복음에 합당한 삶과 윤리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 교회 지도자들 중에서도 윤리적 실패의 모습을 보여준 사례가 최근 많이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의 계속되는 윤리적 실패를 바라보면서 좌절을 경험한 일부 지도자들은, 선행과 윤리를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려는 유혹에 쉽게 빠져들 수 있다. 이들의 의도는 십분 이해하더라도, 그들의 가르침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이 우리들에게 전해준 오직 은혜와 믿음과 보혈의 복음과는 배치되는 다른 복음이다. 왜냐하면 선행은 결코 구원의 조건이 아니며, 구원의 조건으로 높여도 안 되기 때문이다.

 

선행은 참된 믿음의 결과와 열매이며 동시에 선행은 구원의 목적이요, 증거라는 것이 100% 순수한 복음이다. 이것을 수학적인 등식으로 표현하자면 ‘믿음=구원’이며, “구원이 뿌리라면 선행은 열매”, “구원이 원인이라면 선행은 결과”, “구원이 실재하다면 선행은 그 증거”, “구원을 받은 사람의 삶의 목적은 선행”이라는 방식으로 표현돼야 한다. 참된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의 삶 속에는 선행이 반드시 따라오게 되어 있다. 그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선행은 구원의 조건으로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와 결과와 목적과 증거로서 따라온다.

 

최근 교회 갱신 전략으로 제시되었지만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제안들 중 다른 하나는, 바로 성경과 종교개혁에 뿌리를 두고 있는 칭의론을 수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몇몇 영향력 있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이런 제안을 하고 있고, 이 제안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심각하게 우려할 만한 일이다. 한국교회는 외부에서 신천지와 하나님의교회 같은 이단들의 공격을 받고 있으며, 동시에 내부에서 교리적 수정주의자들로 인한 혼란으로 골치를 앓고 있는 형국이다.

 

수정주의자들은 전통적인 교회에서 가르친 칭의론, 즉 종교개혁의 법정적 칭의론이 신학적으로 심각한 오류라고 주장한다. 죄인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할 때 영원히 칭의된다는 법정적 칭의론은 구원파적 오용과 남용의 대상이 되었다고 수정주의들은 주장한다. 한 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다음에는 어떤 방식으로 삶을 살더라도 구원이 영원히 보장된다는 전통적인 칭의론 때문에, 교인들의 방종적이고 비윤리적인 삶이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칭의를 “전 생애에 걸쳐 일어나는 과정”이며, “처음 예수를 믿을 때 선취적으로 칭의를 받았더라도 남은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해야만 종말에 최종적으로 완성적 칭의를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따라서 처음 예수님을 믿은 다음 삶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지 않을 경우 종말론적인 완성적 칭의를 받을 수 없으며, 결국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 번 칭의는 영원한 칭의이며,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전통적 교리가 도리어 한국교회의 윤리적 타락의 주범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일견 일리가 있는 분석인 것 같으나, 더 깊이 들어가보면 이런 수정주의는 매우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성경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깊이 분석해 보면 죄인을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인이라고 선포하는 칭의는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영 단번의 사건이며 영원한 효력을 가진다. 그리고 칭의는 율법의 행위와 관계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와 공로 덕분에, 그리고 오직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 덕분에, 그리고 예수님의 인격과 공로에 대한 믿음만으로 완성되는 사건이다. 한 번 칭의된 자는 영원히 칭의된 것이며, 한 번 칭의된 자의 구원은 영원히 보장된다.

 

그래서 루터와 칼빈과 같은 개혁자들은 오직 믿음과 은혜로 말미암는 칭의가 복음의 중심이요, 복음의 정체성 자체라고 선포했다. 그리고 참된 믿음으로 칭의된 신자는 성화의 과정을 시작하며, 점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가고 선한 일에 열심하는 하나님의 친백성으로 자라가게 된다. 즉 칭의가 뿌리라면, 성화는 열매이다. 칭의가 원인이라면 성화는 결과이다. 성화의 칭의의 증거이며, 목적이다. 칭의와 성화는 서로 구별되지만, 필연적인 연합관계에 있기 때문에 결코 서로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입술로는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그 사람의 삶 속에서 거룩함과 선행의 열매가 나오지 않을 경우는 두 가지 중 하나이다. 하나는 그의 신앙고백이 거짓인 경우 즉 참되게 거듭나지 못한 경우이고, 둘째는 신앙고백은 참되나 아직 믿음이 연약하고 유치한 단계에 있는 경우이다.

 

한국교회 내에는 성경적 칭의론에 대한 오해와 남용이 팽배해 있다. 이것은 율법주의적 유혹을 부추긴다. 그렇다 해서 성경적 칭의론을 수정하여 율법주의적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복음에 대한 배신이요, 진리의 왜곡이기에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 무엇보다 성경적 칭의론에 대한 바른 이해가 뿌리내릴 수 있도록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비상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더 나아가 칭의론에 대한 바른 이해에 기초하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신앙인들의 윤리적인 삶을 고취시키는 일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점진적으로 열매를 맺게 될 때 한국교회는 새롭게 갱신되고 개혁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덴버신학대학원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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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설교의 대체물이 아니라 설교의 회복이 필요하다/ 조엘 비키

 

종교개혁자들은 다른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말씀 전파만을 최고의 임무로 삼았다.

그들은 말씀 전파에 심혈을 기울였고,

말씀을 올바로 전파하면 풍성한 결과를 거둘 것이라고 믿었다.

 

오늘날의 복음주의 설교자는

현대인들이 말씀 듣기를 특히 어려워한다는 이유로

말씀 전파에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붓지 않는다.

그래서 사역의 결과가 미미하기 짝이 없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안타깝게도 일부 복음주의 설교자는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는 설교관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

물론 그들은 자신이 내세우는 ‘복음주의’가

종교개혁의 풍요로운 성경적 신앙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도 의식하지 못한다.

 

그 결과 많은 복음주의 교회들이

한동안 설교를 대체할 것들(화려한 예배 의식, 연극, 영상물, 재즈 밴드, 경배의 춤 등)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결과는 항상 실패로 끝났다.

 

대체물을 찾는 이런 노력이 언제쯤 끝이 날까?

종교개혁의 역사를 돌아보라.

그러면 우리가 세상에서 부딪치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오직 말씀 전파 뿐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설교를 대체할 것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회복하는 일이 필요하다.

 

공중 예배 의식 가운데 설교의 비중을 낮추는 요소들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

또한 설교할 때도 부적절한 유머나 그럴듯하지만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이야기,

통속심리학, 스포츠, 정치, 텔레비전, 사회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는

각종 사회운동과 관련된 내용은 언급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런 해로운 요소들을 모두 제거할 때 비로소 오늘날의 설교자들이 말씀을 온전하고

풍요롭고 능력 있게 전해야 하는 소명에 진정으로 충실할 수 있다.

 

성경적 복음만이 불신앙을 정복하고

죄인들을 회개로 이끄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를 개혁하고 새롭게 부흥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말씀이 세상과 육신과 마귀를 대적하는 싸움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루터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을 정복하는 수단도 말씀이고, 교회를 섬기고 재건하는 수단도 말씀이다.”

 

설교보다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그분의 인정을 받을 만한 것은 없다.

성령께서는 설교를 가장 존중하신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와 교회를 유지하고 확장하고 발전시키는

가장 확실한 수단도 바로 설교이다.

 

오늘날의 신자는 설교와 기도와 예배와 일상생활 등 모든 영역에서

말씀 중심의 삶을 실천해야 한다. 헨리 스미스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우리 앞에 두어 규칙으로 삼아야 한다.

말씀이 가르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말고,

말씀이 권고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으며,

말씀이 금지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미워하지 말고,

말씀이 명령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행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이 시대는 삶에서 말씀이 변화시키는 능력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속히 일어나기를 고대하고 있다.

 

- 조엘 비키 외6, 『오직 성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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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들과 칭호들에 함께 참예한 자가 되었다. 그리스도로부터 그리스도인이란 칭호를 얻어 일컬음을 받게 된 것이다. 하늘과 땅의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모든 이름을 얻었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들의 후사이며,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후사가 되었다. 왕과 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신자들로 하여금 왕과 제사장이 되게 하셨다.

 

신자들은 단지 이름만 받은 것이 아니다. 칭호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실제적인 문제에서 은택을 입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는 신자의 의가 되었다(고후5:21).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가 되신 것이다(23:6). 그 의는 우리 속에 있었던 의가 아니다. 전가의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된 것이다. 의가 전가되어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아야만 비로소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있는 것이다(고후5:21).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심이라”(3:9).

 

그리스도와 신자들은 율법의 구조 안에서 한 사람으로 인정된다. 남편과 아내가, 빚진 자와 보증인을 하나로 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우리가 갚지 못할 빚을 대신 변제하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우리가 한 일로 인정하시는 것이다. 이보다 더한 복락과 자비의 증거가 무엇인가? 우리가 갚을 길 없던 죄의 빚을 생각해보라.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의 순종으로 그 엄청난 빚을 호리라도 남김없이 대신 갚아 주셨다. 마치 가난한 여인이 부유한 남자와 결혼함으로 그 남편이 자신의 모든 빚을 갚아준 은택을 입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내게 대한 어떤 자의 말에 공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45:24).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로 나와 신자들의 가 되셨을 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거룩이 되셨다. 전자의 특권은 그리스도의 피 안에 있는 공력의 덕을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경우이지만, 성화의 경우는 신자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고 있는 경우에 해당된다(고전1:30). 성화는 우리 영혼을 은혜로 충만케 하시는 경우를 말한다. 이를 위해 주어진 은혜 위에 다시 은혜가 주어지는 것이다. 신자들은 넘쳐나는 거룩의 은혜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되는 것이다.

 

거룩은 가장 보배로운 것이다. 거룩은 곧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니 어찌 사람에게 있어서 거룩이 가장 뛰어난 탁월함이 아닐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영광의 증거이자 열매이다.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온 은혜는 지체인 우리에게 전달된다. 우리의 거룩은 곧 거룩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와 하나라는 사실을 증거한다.(2:11).

 

여러분이 귀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설령 금화가 가득 들어있는 돈 가방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의와 거룩이 여러분 자신의 것으로 여겨져 여러분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거룩하게 하심을 받는 것에 비하면 하찮기 짝이 없는 것이다.

 

- 존 플라벨, 은혜의 방식, pp 180-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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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앙과 실천의 유일한 법칙이자 유일한 진리를 시험할 수 있으며 유일하게 논쟁을 판정하는, 성령님께 맡겨진 절대적 초월성이다.

 

말씀에 쓰이지 않은 것, 혹은 그 말씀에 의해 입증되지 않는 것은 믿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을 위해 성경과 동등한 다른 어떤 안내자가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부인한다. 성경의 지상적 권위는 한 마디로 말하여 우리의 체제의 초석 중의 하나이다. 우리에게 성경에 자명하게 기록된 바를 보여주라. 그리하면 현세의 인간성에 어떻게 작용하는 것이든 간에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고 믿을 것이며 또한 그것에 순복할 것이다. 또한 우리에게 신앙으로써 성경에 위배되는 바를 증명해 보여주라. 그리하면 아무리 허울 좋고 진실같이 그럴듯할지라도, 제 아무리 아름답고 명백히 바람직하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조금도 취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항이 성경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면 성경으로부터 추출해 낼 수 없으며, 성경과 명백하게 일치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것을 조금도 취하지 아니할 것이다. 금단의 과일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감히 그것에 손대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죽게 된다. 우리의 신앙은 성경, 혹은 성경의 논증들 외에는 다른 아무런 의지할 만한 것을 발견할 수가 없다. 바로 여기에 반석이 있다. 그리고 그 외의 모든 것은 모래일 뿐이다.

 

2. 인간의 죄악됨과 타락에 대해 그것이 부여하는 깊고도 탁월한 의미이다.

 

그 이론은 아담의 타락의 결과로 모든 인간은 본래의 의로부터 가능한 한 가장 멀리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단지 비참하고 가련하며 파국적인 상황에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죄책과 임박한 위험, 그리고 유죄 판결의 상태에 있게 되었다. 그들은 조물주와 적대관계에 있고 천국에 대한 아무런 권한도 지니지 못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저희 조물주를 섬기려는 아무런 의지도, 저희의 조물주에 대한 아무런 사랑도, 천국에 대한 아무런 부응되는 요소도 지니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강도(强度)의 영적인 병은 그 치유를 위해 강력한 영적인 치료약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치명적인 상처를 쉽게 치유할 수 있게 해준다는 생각을 부추기는 듯 보이는 어떤 종교적인 체제도 지지할 수 없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형식주의와 예식주의, 그리고 단순히 외적이며 대리적인 측면만을 강조하는 모든 종류의 기독교를 배격한다. 우리는 그와 같은 모든 신앙은 인간의 영적인 필요에 대해 적합하지 못한 생각을 근거로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것보다는 영혼을 구원하고, 대속하고 성화시키는 일이 훨씬 더 필요하다. 성자 하나님의 피가 양심에 적용되며 성령 하나님의 은혜가 마음을 완전히 새롭게 하는 일이야말로 필요하다. 타락의 영향에 대한 무지, 원죄에 관한 전반적인 교리에 대한 무지야말로 많은 사람이 복음주의 신앙을 이해할 수도, 깨달을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중대한 하나의 이유라고 믿는다.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라”(1:10). 이 말씀은 사도의 명령이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직임에 대하여 최고의 중요성을 부과한다는 것과, 그리고 그에 대하여 그가 인간을 위해 행하신 구원의 성격에 지고한 중요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 이론은 하나님의 아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표하고 대신하여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죄인들을 위한 완전한 구원, 그리고 죄책과 죄의 세력과 결과로부터의 구속이 있게 되었으며, 그러므로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살아있는 동안에도 완전히 용서받으며 모든 것으로부터 의롭게 되며,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혜들과 관계가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죄인인 인간의 영혼과 구세주이신 그리스도 사이에는 오직 단순한, 어린 아이 같은 신앙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모든 수단들과 도움들, 성직자들과 규례들은 이 신앙을 돕는 범위 내에서만 유익하며 그 이상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써 의지하고 의뢰할 때에 그것은 영혼에 독약과 같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중보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적인 지식이 기독교의 핵심이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넉넉함과 값없이 은혜로 주어진 그 단순명료함을 아무리 강조해서 말하여도 결코 지나치니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교리는 엄밀히 말하여 본성적인 인간의 마음들이 대부분 싫어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굳게 확신하고 있다. 사람이 추구하는 종교는 이목과 감각의 종교이지, 믿음의 종교가 아니다. 그 본질이 믿는 것인 내면적이고 영적인 종교가 아니다.

 

우리는 영속적인 삶이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며 그리고 단순한 개인적인 믿음으로 매일같이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 말한다.

 

4. 사람의 마음 안에서의 성령의 내적인 사역에 높은 중요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 이론이 어떠한 사람에게 있어서 활력있는 기독교 신앙의 뿌리와 근원이 되는 것은 바로 마음 가운데서의 은혜의 사역이라는 것, 그리고 한 사람의 내부에서 진정한 체험적인 일이 있기까지는 그의 신앙은 단순한 껍데기, 쭉정이, 이름 내지는 형식 뿐이고, 그는 위로를 받을 수도 구원을 받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의 관심이 가장 집중될 필요가 있는 사항들은 성령의 능력이 있는 사역들, 내적인 회개, 내적인 믿음, 내적인 소망, 죄에 대한 내적인 혐오, 그리고 하나님의 법도에 대한 내적인 사랑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모든 중요한 은혜들을 알지 못한 채 세례를 받은 것이나 교회의 교인이라는 것 자체에서 위로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단순한 실수일 뿐만 아니라 명확하게 참혹함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성령의 내적인 사역은 인간의 구원에 필수적 일이며 인간은 또한 이를 내적으로 느껴야만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여러 감정들은 종종 믿지 못할 거짓된 것들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내적으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것도 체험하지 못하는 곳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회심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어떠한 창조도, 영혼의 새로운 탄생도 있을 수 없음을 단호하게 주장한다.

 

우리는 비록 남용될 여지가 많기는 할지라도 영혼의 증거는 진정한 것이요 참된 것이라는 의견을 고수한다. 우리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하는 것 만큼이나 그 정도와 위치에 있어서 사모해야 하는 것을 엄중한 의무로 간주한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 아무것도 느끼는 바가 없으면 진정으로 아무것도 소유할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5. 사람의 생활에 있어서의 성령의 외적이며 가시적인 사역에 대해 중요성을 부과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참된 은혜는 언제나 그 은혜를 소유한 사람의 여러 행위나 품행, 취향, 방법, 선택, 습관들에 명백히 나타나게 된다. 그 은혜는 외부로 드러나지 않고 사람 안에 내재된 채 정지상태로 있을 수는 없다. 하늘의 씨는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로서 난 모든 사람 안에 거하는 씨이다(벧전1:23, 요일3:9). 성령께서는 그가 거하시는 곳마다 항상 그의 존재를 알려지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실제로 세상과 육신과 마귀를 이기지 않는 한 저희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지체요 하늘나라의 후사들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견해를 고수한다.

우리는 열매야말로 한 사람의 영적인 상태에 대한 유일하고도 확실한 증거라고 확신 있게 단언한다.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누구를 섬기고 있는지를 알려면, 우리는 먼저 그의 생활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의 은혜가 있는 곳에는 언제든지 꼭 성령의 열매들이 있을 것이다. 열매가 보이지 않는 은혜는 은혜라고 할 수 없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다.

 

- 존 라일, 오직 한 길, pp 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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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1)

이승구 목사(국제신대원 교수)

 



우리 나라에서는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사는 일을 흔히 "예수 믿는다"고 표현합니다. 너무 많이 사용되어서 그 의미가 손상되어 사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어떻게 생각해 보면 좋은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은 다른 존재나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을 믿으며 산다는 의미를 함의하니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힘과 능력에 의존하거나, 돈과 재화에 의존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거나, 인간의 능력에 의존하거나, 과학 기술을 믿거나, 이 세상을 의지하거나, 그 어떤 다른 것들을 믿는 이들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 믿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도대체 이 "예수 믿는다"는 말로서 우리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으로, (1) 구원의 방도로 예수님과 그의 사역에 의존한다는 것을 뜻하고(예수님을 "구주, 구원주"[Saviour]로 믿음) (2) 삶 전체를 예수님을 의존해서 살아간다(예수님을 "주님"[Lord]으로 믿음)는 의미를 가진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차례로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번 호에는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말을 우리의 구원의 방도로 예수님과 그의 사역을 의존한다는 뜻으로 사용한다는 점, 즉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구원주로 믿는다"는 뜻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과 관련 없는 우리의 상태가 구원받아야 할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스스로의 힘으로서는 전혀 구원함을 받을 수 없는 상태(total inability)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태를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믿기 이전의 우리 상태를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에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엡 2:1). 이를 영적인 죽음(spiritual death)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는 그 사람 안에 영혼이 없다거나 영혼이 전혀 활동하고 있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그의 영혼이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믿기 이전의 상태를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보는 것은 사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바르고 온전하게 인정하는 데서 나오는 인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 한 사람만이 예수님과 관계되기 이전의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인 사람은 자신의 이전 상태를 성경을 따라서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자신의 힘으로, 또는 다른 인간들의 힘에 의존해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아직도 인간적인 것에 대해서 철저히 절망하지 않은 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자신을 철저하게 심각한 상태에 있다고 여기는 이들만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들은 모든 인간적인 것에 대해서 참으로 철저하게 절망한 이들입니다. 그것이 참으로 전적 부패(total depravity)에 대한 바른 인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자신의 상태를 생각하지 않는 이들은 결국 어느 정도는 자신이 구원에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바르지 못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스스로에게 어떤 기여점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아직 자신과 모든 인간적인 것에 대해서 철저히 절망하고 성경이 말하는 대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방도를 하나님께서 구원 사건을 일으키신 그대로, 또 성경에 기록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성취하시어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후에 우리의 자리, 우리의 형벌의 자리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대리 구속[代贖]의 방도로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고, 그런 방식으로 구원 사건을 이 세상 역사 가운데서 이루셨습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고전 15:3, 4).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내신 이런 구원의 방도를 그대로 받아들이고서, 그가 이루신 구원의 방도에 온전히 의지하는 것이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복음 사건과 그것을 전하는 말인 복음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고전 15:2).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다른 구원의 방도를 마련하시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라든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방도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든지, 하나님의 구원 방도는 너무 쉬워서 그런 식으로 구원하려 하신 것은 옳지 않다든지 하는 식의 말과 태도를 나타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는 십자가와 그를 통한 구원의 방식을 어리석은 것이라거나,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는 이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십자가를 하나님의 지혜의 표현이라고 하며,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연약하여 죽고 돌아가신 십자가상에서의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며(고전 1:18, 24), 그 수욕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는 이는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라든지, 있지 않았어도 되는 것이라든지, 실제 역사 가운데서의 부활은 없이 그 의미만이 역사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라는 말과 태도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는 이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 역사 가운데 오셔서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대속의 죽음을 죽어 주시고 다시 사신 것에 온전히 의존하고 그것이 바로 자신을 위해 일어난 사건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그는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기 위해 부활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롬4:25).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존하며 최후의 심판 자리에서도 그것에 근거해서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십자가와 부활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는 십자가와 부활이 바로 자신을 위해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라고 받아들이는 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들은 자신들의 유일한 구원의 근거가 예수님께서 이루신 대속에 있음을 믿으면서, 언제까지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의존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다른 방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구원을 이 역사 가운데서 이루신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분의 구원을 이루시는 방식에서 지혜를 발견하고 영원을 다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는 어떤 상황 가운데에서든지 구속해 주신 예수님과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이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일찌기 죽임을 당하셨던 그러나 다시 사셔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어린 양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찬양과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돌려 드리며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 이들은 이렇게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을 찬양만 하고 있는 이들은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그의 뒤를 따라가며, 그의 손발이 되어 그가 이루시려는 일을 열심히 이루어 가는 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에는 예수님을 믿는 다는 말의 또 다른 부분인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의 의미를 좀더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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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사건의 의미 - R.C. 스프라울

가장 중요한 사건은 무엇인가? 성육신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일인가? 부활인가? 이 질문에는 정답이 없다. 왜냐
하면 이 사건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상호 의존적이기 때
문이다. 십자가는 성육신이 없다면 무의미하고 부활이 없다면 불완전하다.

그리스도가 지상 사역을 마치고 하늘로 돌아가신 사건은
기독교 사상에서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 그러나 이것도 하나님의 전체 계획 가운데 일부이며,
따라서 이것 없이는 다른 어떤 사건도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승천은 신약 역사의 최고 정점일 뿐만 아니라 많은 구약 예언의 초점이다.

사실상 로마 가톨릭은 승천에 합당한 관심을 기울여왔다.
개신교에서는 예수 승천일과 성령 강림절을 기념하는 일은
별로 없다. 이러한 절기들은 성탄절과 부활절에 가려 주목
받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개신교에서는 종교 개혁의 날이
더 기념되고 있다. 이러한 과오는 유감스러운 일 중의 하나
다. 개신교는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의 강림을 너무 과소 평
가하는 경향이 있다.

승천은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 요소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구약과 신약 성경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주제는 없다. 하나
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영원한 메시야요 왕으로 등극하실
때 절정을 이룬다. 승천하시지 않으면 예수님께서는 왕이
되실 수 없다. 따라서 승천을, 편지의 대수롭지 않은 추신
정도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제
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승천은 지극히 중요하다.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이른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 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
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니
라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
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
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
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
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요 16:4-1)

이것은 예수님의 떠나심을 알리는 하나의 암시일 뿐이다.
예수님의 떠나심은 베일에 가려져 있어서 제자들을 당혹스
러운 슬픔에 빠뜨렸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의 심
정을 알고 당신이 떠나시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하다고 위
로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더 좋은 일이 생기려면 자신이 떠
나야 한다고 판단하셨다. 어쨌든 예수님께서 육체로 함께
계시는 것보다 떠나시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말씀은 언
제나 교회가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다. 크리스천들은 산중
턱에서 예수님의 발 밑에 앉아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상 속
에서 어렴풋하게만 볼 수 있었던 것을 구체적인 현실로 목
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영광스러울까 상상하곤 한다. 그러
나 제자들이 예수님과 나누었던 사귐보다 현재의 우리 상
황이 더 낫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 제자들이 경험
했던 특권은 그것이 무엇이든 여전히 승천 이전의 역사 속
에서 누렸던 것이고 따라서 덜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제자들마저도 승천이 슬퍼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역사적인 진술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
로 올리우] 시니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
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
라”(눅 24:50-53)

이 이야기로 누가복음은 끝을 맺고 있다. 누가가 예수님의
떠나심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예기치 않게 매우 즐거운
대단원이다. 이것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놀랍고 의미심장하
다. 승천은 절망의 순간은 아니었을지라도 적어도 그것은
이별의 순간이었다. 우리는 그런 이별은 보통 슬픔을 동반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 떠나겠다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크게 슬퍼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떠날 것을 예고하신 이래 제자들의 인
식에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 새로운 인식 덕분에
자신들의 주인이요 친구인 그분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어도
이들은 크게 기뻐할 수 있었다. 우리는 오늘날의 교회를 위해
제자들의 그 깨달음에서 배워야 한다.


정말 그렇게 믿습니까?(좋은씨앗, ) - R.C. 스프라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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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부활 속에서 그리고 부활하신 뒤 이 땅 위에 머무시는 동안 우리의 구원이라는 위대한 사역을 수행하신 예수님을 알자. 그것에 우리의 칭의와 성화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만일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면 우리에게는 천국에 대한 소망도, 부활에 대한 소망도 없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면 모든 사람 가운데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가장 비참한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한다면 그것을 이론적으로 아는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가 않다. 당신이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마음속에 새기고 있는지를 확실히 하라. 그것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리스도가 나의 머리가 되신다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식은 개인적으로 특별히 적용되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실 때 나도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에게 임한 은혜가 당신에게도 흘러갈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열매가 당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것일 뿐만 아니라 바로 당신의 것이다! “너의 유익을 위해 그것을 알지니라”(5:27).

 

구원에 필요한 진리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우리의 가엾은 영혼에 영양분과 새 힘을 주기 위해서는 진리를 소화 흡수해서 그것에서 힘을 끌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한 시간 안에 많은 진리를 머릿속에 담아 둘 수는 있지만 그 진리를 모두 소화시키기 위해서는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묵상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 많은 설교가 잊혀진다. 이 설교, 저 설교를 찾아다니면서도 파리하게 굶어가는 영혼이 되어 간다. 그것은 그들이 묵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율법을 읽을 뿐만 아니라 묵상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1:8). 알고 있다면 그것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반추하며 묵상하라.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신 시간에 대해 생각하라.

그리스도가 무덤 속에서 정확히 3일을 보내셨듯이 당신은 그분에 대해 3일의 시간을 생각해야 한다. 첫째 날은 준비의 날이라고 불렸다. 둘째 날은 안식일이었고, 셋째 날은 부활절이었다. 따라서 당신의 첫째 날은 준비의 날, 수난의 날이다. 이 날에 당신은 죄와 사탄과 대적해 몸부림치고 싸워야 한다. 이 날에 당신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죄와 사탄이 쏘는 모든 고통스런 불화살을 견뎌야 한다. 둘째 날은 안식의 날이다. 이 날에 당신의 몸은 무덤 속에 있어야 하고 소망 가운데서 안식을 누려야 한다. 이 날에 당신은 나팔 소리가 울리고 당신에게 일어나 심판대 앞에 오라는 명령을 받을 때까지 평안에 들어가고 침상에서 편히 쉬리라”(57:2). 셋째 날은 영광으로 부활하는 날이다. 그것은 안식일 다음 날, 한 주가 시작되는 첫날이다. 이 날은 결코 끝남이 없는 세상이 시작되는 첫 날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때를 생각하라. 그렇게 할 때 당신은 자신의 영혼의 양식을 위해 부활의 유익을 끌어올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신 이유들을 생각하라.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이 유대인들을 당황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는가? 제자들이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것을 전하자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했다”(5:33). 자신의 죄로 매일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그분이 높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끔찍한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가 그들의 심판자로서 다시 살아나신다는 사실이 그들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 놓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것이 그분을 따르는 자들의 믿음을 확증시켜 주지 않았는가? 그들의 믿음은 단지 연약한 믿음에 불과했다. 지식도, 확신도, 담대함도 연약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류 없는 많은 증거를 통해 자신이 살아나셨음을 나타내신 뒤에 제자들은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다. “니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분이 온전히 우리의 모든 빚을 지불하셨다는 증거가 되지 않았는가?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7:22). 죽음으로 그리스도는 체포되어 감옥에 내던져졌다. 그 감옥에서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나셨고 무덤의 빗장과 족쇄를 깨뜨리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만족함을 얻었고 하나님이 친히 그리스도를 풀어 주셨다는 명백한 증거다. ! 여기에 얼마나 넘치는 위로가 있는가!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이 죄와 죽음, 사탄을 정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는가? 이제 그리스도는 사망에서 그 쏘는 것을 제거하셨다. 지옥에서 그 깃발을 취하셨다. 이제 그리스도는 손에 우리를 대적하는 문서를 취하고 그것을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이제 그리스도는 주권과 권세를 탈취하고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손에 쥐셨다. 이제 그리스도는 강한 정복자로서 무덤에서 나와 드보라가 찬양했듯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기손 강은 그 무리를 표류시켰으니 이 기손 강은 옛 강이라 내 영혼아 네가 힘 있는 자를 밟았도다”(5:21).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었는가? 그리스도는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첫 번째 분이 되었다. 그분의 부활의 미덕을 통해 모든 택함받은 자가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고전15:22-23). 한 사람의 죽음이 우리 모두가 죽어야 할 이유가 되었듯이 한 사람의 부활이 우리가 다시 살아나는 이유가 된다. 아담과 그리스도는 두 머리다. 두 뿌리요 두 첫 열매다. 아담과 그리스도 모두 대표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선포하기 위함이 아니었는가?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분이 높임을 받고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 아니었는가? 그것이야말로 다른 모든 이유 가운데 가장 주된 이유다. 그것에 주목하라. !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그분에게 영광과 찬양을 올려 드리라. 이 놀라운 일을 묵상하고 반추하라. 생각하라. 그리스도의 이름에 모든 존귀와 영광을 올려 드리라!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는가?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2:9). ! 그렇다면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 아이작 암브로스, 예수를 바라보라 2, pp 245-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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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가 되는 조건(1)

 

최낙재 목사

(사람의 일을 생각지 말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할 것)

마 16:13~28

 

예수 그리스도는 홀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고 양육하시고 생명과 영광의 길로 인도하시고,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를 때에만 생명과 영광에 이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그 터 위에서 우리가 이 말씀을 할 수가 있습니다.

 

방금 낭독한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대화하는 대화의 두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데 각각 놀라운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 장면에서는 열두 사도 가운데 베드로 가 하는 대답을 예수께서 잘 대답하였다고 인정을 하시고 칭찬을 하셨는데 놀라운 말씀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둘째 장면에서는 뜻이 깊고 오묘한 진리의 사실을 알려 주시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인간적인 충정에서 거기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으려 할 때에 사단이 거기서 활동하고 있다고 책망하시고, 그들을 바른길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먼저 베드로가 내놓은 그 대답을 보십시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는 예수께 관하여서 믿고 아는 바를 말하였습니다. 주 예수께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중보자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돌보실 자임을 말하였습니다.

 

열두 제자나 베드로가 이러한 신앙 고백을 한 것은 매우 특별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다른 많은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여건 하에서 살았고 같은 시대에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게 됐는데, 그러나 자기 동족들보다 훨씬 뛰어난 지식과 깨달음을 가지고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처음에는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고, “이에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하고 대답을 하자, 또 이어서 물으시기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능력과 기사와 표적을 행하셨을 때에 무리들, 일반 대중도 제자들과 함께 듣고 보고 뭔가 큰 감명과 인상을 받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이 메시야를 보내시고 세상에 어떤 큰 변혁을 일으키시고 새로운 시대가 오게 하시려나 보다. 그러시기에 앞서서 엘리야를 보내신다고 하지 않았던가? 모세 때부터 말한 그 선지자나 대 변혁기에 그 선지자 예레미야가 나타났는가?’ 하나님이 메시야를 보내셔서 일대 변동을 일으키시고 새 시대를 오게 하실 그 기미를 느끼고, 그러기 위해서 쓰시는 선지자인가 보다 하는 만큼 생각들을 하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공생애 초기부터 예수의 행하신 일을 보고 어떻게 하면 저를 죽일꼬 하고 원수같이 여기고 죽일 꾀를 생각해내느라 모의하곤 하였지만 일반 대중은 그렇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큰 인물이라, 선지자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고 생각하지는 아니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세례 요한이 앞서 나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외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난 그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메시야를 위하여서 백성을 예비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삼십여 세 되셨을 때에 요한에게 나아가서 세례를 받으셨고, 요한에게 모여든 소수의 백성 가운데서 따르는 자들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세례 요한의 뒤를 이어서 백성들 앞에 천국 복음을 전하시며 병자들을 불쌍히 여겨서 낫게 하시고 큰 능력들을 행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표적이 될 만한 일들을 행하실 때에 이들 군중들은 이것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고 멀리서 따라왔고, 제자들은 훨씬 더 가까이 따르며 배우고 보고 들었습니다. 출발부터 이 제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세례 요한이라, 엘리야라, 예레미야라, 또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말할 때에 이 제자들은 그리스도라 하고 말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렇게 갈라서 물으심으로 다 같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뿐 아니라 바짝 따르지 아니하고 멀찍이서 따르며 환영하는 그 무리와는 달리,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예수께 가까이 밀착해서 따르는 제자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한자요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나타내 주시려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지 아니하고,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신 뒤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렇게 갈라서 물으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실 때에 그를 중보자 그리스도로 믿고 분별력이 있어서 영접하는 사람은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의 백성이 되는 특권을 얻을 사람입니다.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많은 사람이 다 같이 그리스도의 권능 행하심을 볼지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고 겸손해져서 회개하고 믿는 자에게 그리스도를 계시하여 주시고, 구원을 얻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다 같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접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계시의 빛을 비추어 주신 자가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이외의 다른 사람은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아무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알게 하신 자들은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인데 이들에게 그리스도께서는 또 아버지를 알게 하여 주십니다. 오직 이들만 하나님을 알고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고백한 것에 대하여서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하고 말씀하신 것은 구원의 은혜의 선포요, 하나님의 백성된 것을 확증하시는 말씀입니다. 큰 칭찬의 말씀입니다.

 

또 이것은 신자가 하나님과 말씀을 주고받고 사귈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고 영원한 생명을 받은 것임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다” 하고 후에 사도들은 말하였습니다. 주 예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와 이 제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 주셨고 그리스도께서 이들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계시하여 알게 하여 주셨습니다. 이러한 의미심장한 칭찬의 말씀을 믿음이 있는 베드로와 다른 사도에게 하셨고, 이러한 신앙의 소유자인 사도들의 터 위에 주의 교회를 세우실 것과 그들에게 천국열쇠를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주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이때로부터 당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셨다” 하는 점과 이를 “그리 마옵소서” 하고 말리는 그 베드로를 아주 호되게 책망하신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이시라고 믿는 믿음을 가진 것은 진리를 안 것이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으로서 많은 외면적 유대인, 외면적 아브라함의 자손과는 달리 참 이스라엘인이요 하나님의 백성이요 구별된 백성이 된 것을 표하는 것이라고 칭찬을 하셨는데, 그 이외에 중대하게 가르치실 것이 있어서 가르치셨다는 그 사실과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인간적인 생각으로 가로막으려 하였을 때에 크게 책망하신 사실은 우리가 깊이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첫째,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사람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는 것을, 그것을 제자들이 더 배우고 알아야 했습니다. 제자들이 이미 영생에 이르는 구원의 지식을 가졌을지라도 아직도 더 배울 진리가 있고 그리스도의 하실 일과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알아가는 데에 진보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어둠에서 빛으로 찾아 나왔으면 그것이 큰 은혜이지마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고 그것으로 다 되었다고 자만할 수가 없고, 더욱 진리를 배우고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크신 중보자 그리스도이시므로 그의 위대하심과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가에 관하여서 배워야 할 것이 신자에게는 많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에게 주신 그 대사명,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신의 이름 안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세상 끝날 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 말씀을 하셨는데 이 제자를 삼는 일, 제자를 삼아서 세례로써 하나님의 백성된 표와 인을 치는 일이 있고, 그리고서는 그리스도의 가르치신 것, 명령하신 것을 모두 다 가르치는 일이 있습니다. 그 직분을 맡은 사람은 그렇게 할 것이고, 그러면 신자들에게는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은 다음에는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교훈과 명령을 배워서 지키는 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바울 사도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 앞에서 이르기를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하였고,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하였습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해야 하는 것이에요. 숨김없이 다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모든 하나님의 자녀된 신자는 하나님의 뜻을 다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회 전체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서 이제는 어린아이가 아니고 온전한 사람, 장성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고, 그리스도의 장성의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자라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고 신자가 된 다음에 열심히 진리를 탐구하고 남보다 앞서서 진리를 알고서 믿음의 진보를 나타내더니 어떠한 수준에 이르니까 ‘이제는 알 만큼 알았으니 봉사에 힘쓰자. 나의 사명을 찾아서 사명을 수행하고 나아가자’ 하고서 그리스도를 배우고 그의 은혜 가운데 자라나는 일은 할 만큼 했으니 이제는 그 일을 쉰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로 그렇게 선언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 마음에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어요. 참 딱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희에게 있을지어다.” (벧후 3:17,18)

 

서신으로서는 베드로 사도가 마지막으로 한 말씀입니다. 한편으로 무법한 자들의 무법한 말과 행동으로 믿음에 굳게 서서 나가는 신자를 자꾸 옆에서 이렇게 건드리고 저렇게 건드리고, 이렇게 시험하고 저렇게 시험해서 곁길로 가게하고 넘어뜨리는 일이 세상에 많이 있으니까 주의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욱 받으며 자라가고 그를 배우고 아는 데서 자라가라그렇게 권하는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나 유대주의나 헬라의 문화에 풍부한 지식과 소양이 있었지만 그리스도를 배우고 아는 일에는 평생 쉬지 않고 정진하여 나갔습니다. 빌립보서 3:5 이하의 몇 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백발이 된 사도가 그리스도를 더욱 알고 그의 능력을 더욱 알아서 의지하고 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을 여기서 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사명을 받아서 이루고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봉사할 일이 있으면 하는 것이 좋은 일입니다마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가고 그리스도를 배우고 아는 데에서 자라가면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자라가는 것을 일단 중지하고서 봉사하는 봉사란 없는 것이에요. 예수 그리스도는 중보자요, 중보자는 크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등이 아니시면 우리에게 중보자의 일을 하실 수가 없으신 것입니다. 크신 중보자이심을 우리가 더욱 배우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큰일을 우리를 위해서 하셨는가? 지금도 행하고 계신가? 우리는 자꾸 배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판단하실 때에 제자들이 동족 중 다른 사람과는 달리 그리스도를 알았을지라도 그리스도에 관하여서, 그리스도의 하시는 일에 관하여서 더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유념해야 하는데, 베드로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그리스도가 가시는 길을 가로막아 서는 것을 크게 책망하신 것을 보면 그 가르치시려 한 것이 얼마나 중대하였던가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로 알았다고 칭찬을 받은 베드로가 깨닫지 못하므로 걸림돌이 되는 것을 보면 베드로나 제자들 앞에 있는 그 문제가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닌 것을 짐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그리스도께서 하마터면 넘어질 뻔 하셨단 말씀입니다. 이것은 복을 받은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이 큰 무지 가운데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고, 이것은 또한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일은 아무도 도울 이가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홀로 짊어지시는 짐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오시고 특별히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오셨지마는 다들 깨닫지 못하고 심히 반대하고 죽이려는 사람도 있고, 소수 제자들도 그리스도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말씀하셨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막아선다면 천지간에 하나님의 일을 함께 이룰 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이 아닙니까? 오직 그리스도 홀로 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 그 일을 이루시러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때에 책망을 들음으로써 주를 따르는 제자로서 부족한 것이 무엇이고, 장성하기 위하여서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잘 드러났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고 책망하셨습니다. 사람으로서 도덕적으로 저급한 일을 생각한다든지 주를 따르는 일에 비겁하다든지 해서 책망하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태도는 인간 사회에서는 오히려 고상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후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께서 잡히실 때에 그 검 하나를 가지고서 그리스도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 많은 군사들과 그냥 싸우려고 한 것을 보면 그는 용기 있는 사람이고 또 주를 위해서 헌신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인간적으로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계시의 빛 가운데서 움직이지 아니하고, 주를 따르지 않는 동족들과 같은 평면에서 생각하고 움직이고 하였을 뿐인 것입니다.

 

동족들도 악한 일만 일삼아서 그리스도를 배척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다 애국을 할 줄 알았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처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바로 들을 귀가 없어서 말씀을 깨닫고 순종하는 대신에 들을 귀가 없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오해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여 버리고 사람의 계명으로 바꾸어 가르치고 바꾸어서 지켰던 것입니다. 십계명 하나라도 마음으로부터 깨닫고 지키지를 못하고 외형적으로만 지켰습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다니 이놈 혼 좀 나봐라’하고 이제 누가 법정으로 끌고 간다며는 그러한 경우에 끌려가서 처벌을 받지 않을 정도로 그만큼만 지키면 지켰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수준에서 살았던 것이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받고 산 이스라엘의 대중들이었습니다.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따르며 빛을 받아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왔지만, 일상생활에서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교훈을 받고 고침을 받아서 바르고 선하고 아름답게 되었느냐 하면 아직 그러지를 못하고 일반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준에서 왔다갔다 활동을 하고 살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 때도 있었던 현상으로서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책망하시고 고치라고 하셨던 점입니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사55:6-9)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일이 있고, 이스라엘을 포함해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경영하시며 행하시는 일이 있는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이 그것은 생각지도 않고, 그것은 전혀 모르고 그냥 인간적이며 세상적인 평면에서 선한 것과 의로운 것, 아름다운 것과 진실 된 것을 찾고 그것을 세워 나간다고 아무리 힘쓰고 애쓴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겠습니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그냥 넘어지고 무너질 뿐입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의 경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해요. 사람의 생각으로 이렇게 하면 도움이 되겠다 해서 여러 가지 프로그램도 만들고 세상 학문의 도움도 받고 그러지만 그런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이루지 못하고 그냥 넘어지게 하고 무너지게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에는 이미 예부터 가르쳐지고 예고되었던 바입니다. 잠언 19:21,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 사람의 생각과 이 세상 나라가 경영하는 일들은 언뜻 보기에 좋은 것 같고 곧 이루어질 것 같지만 이 세상과 인생사를 다스리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 하나님이 생각하시고 경영하시는 일이 이루어지고 그 일만이 마침내 이루어지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지는 하나님의 백성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온 생각이나 위대한 사상이라도 어떤 선행이나 영웅적인 행위도 주 예수께서는 다 물리치시고, 오직 하나님의 경영하시는 일에 소망을 두고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이루는 데 자신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할 일임을 뚜렷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명백하게 드러내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사단은 한사코 하나님의 경영하시는 일,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것을 막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훌륭한 생각, 도둑질하려는 생각이 아니고 이 사회를 위해서 어떻게 할 건가. 염려하고 의를 행하고 선을 쌓는 일, 그런 일을 자꾸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에요. 다만 하나님의 생각하는 것, 하나님이 지금 이루시려고 도모하는 것 그것만은 생각하지 마라라 그것입니다. 사단의 속임이란 그런 데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행동, 베드로의 주님을 만류하는 것. 그것 참 인간 사회에서는 아름다운 일 아닙니까? 다만 예수님의 가르침, 하나님의 일을 지금 예수님께서 계시하여 주시는데 그것만 막는 것입니다. 거기는 가지 마라라. 자꾸 선을 행하고 하라. 그런 데에 사단의 시험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텐데 그것이 곧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은 이미 그리스도 당신에 관하여서 가르치기 시작하시면서 하신 그 말씀에서 나타내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그렇게 하셨어도 무방한 듯한데, “살아나야 하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뜻, 특별히 자기 백성에게 언약하신 바를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므로 반드시 이뤄지는 그 필연성을 표시하는 말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항상 ‘이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이뤄지리라. 이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이뤄지게 하리라’ 하는 이 거룩한 필연성에 자신의 발걸음을 항상 맞추셨습니다.

 

당신을 가리켜서 ‘인자’라 칭하신 것도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신 것을 성취하시는 자로서의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하신 말씀입니다. 다니엘서에 예언된 바 세상 나라가 한때 기세를 올리지만 그 악함과 강포로 인해서 다 차례로 하나님의 심판에 해당하는데, 그런 가운데서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어서 영원한 나라의 권세와 영광을 받는 사실이 이제 바야흐로 이루어진다는 뜻으로서 다니엘의 본 바 그 환상 가운데서 이 인자의 칭호를 만드시고 당신을 위해서 그 칭호를 사용하셨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선을 추구하고 자선을 행해서 자기의 의를 쌓는다하여도 자기나 이 세상의 중생을 그 죄에서 또 사망에서 구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구원의 일을 이루려 하실 때에 먼저 선지자들을 통하여서 예언으로 알리시고 이 큰일을 인류 역사의 가도에서 일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아모스 선지자의 말씀입니다.(3:7) 예언은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따라서 예언은 현실 세상에 확실히 실현되고 열매를 맺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은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으로써 널리 온 세상에 전파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눈을 사람의 일에서 하나님의 경영하시는 일로 돌리려 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신자가 장성하기 위하여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이 어떤 생각을 하시는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라고 능력이 있으려면 그리스도를 부지런히 가르치고 그리스도 안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깊이 있게 풍부하게 전파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에 힘 있게 전파되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빛을 발휘하던 1세기에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그렇습니다.

 

복습문제

 

1. 제자들이 자기 동족보다 훨씬 더 뛰어난 지식과 깨달음을 가지게 된 배경을 정리해 보십시오.

2.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3. 예수님의 칭찬 후에 이어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부활을 가르치신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첫째로 알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4. 교회 안에서 지극히 안타까운 일은 무엇이고, 누구보다도 그리스도를 풍부하게 알았던 백발이 된 사도도 어떻게 하였습니까?

5. 그리스도의 길을 가로 막으려고 하였던 베드로의 태도에 대한 사회적인 평가와 그러나 이에 대한 그리스도의 책망이 가지는 의미, 그리고 교회에 대한 사단의 은밀한 속임은 어디에 있는가를 간단히 정리해 보세요.

6. 신자나 교회가 장성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입니까?

가져온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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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Jennifer| 원글보기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vs Sola Ecclesia,,,

흔히들 종교개혁자들이 종교개혁을 성취할 수 있었던 형식규범을 꼽아보세요, 라고 질문하면 "오직 성경" 혹은 "오직 성경으로"라는 격언을 취한다. “오직 성경”의 원리 아래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와 “오직 그리스도”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실질적인 내용을 견고하게 취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올바른 입장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오직 성경”...이라는 명제를 내세웠을 때, 그 반대편에 “오직 교회”라는 명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으면, 그 진의가 파묻히는 사태에 직면할 수도 있다.

“오직 교회”라는 명제는 중세의 교회적 삶의 근간을 보여주는 핵심적 지위를 차지했다. 중세교회는 “오직 교회”의 원리 아래 다스려졌다. 키프리아누스를 통해서 적어도 이단들과 유사기독교가 출몰하던 그 당시의 문맥에서는 합당하게 강화되기 시작한 감독직의 기능이, 10세기를 넘어서면서 교황권의 강화로 변질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런 흐름에서 중요한 교회 인식이 나타나는데, 교회의 본질을 정의할 때 회중을 소외시키고 일차적으로 직분자에게서 파악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어느 덧 교회라는 말을 쓸 때, 자연스러이 이원화된 상을 동반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교훈하는 교회”(ecclesia docens)와 “교훈받는 교회”(ecclesia audiens)로 교회를 구분했는데, 전자가 직분자이고, 후자가 평신도들이다. 이 둘의 관계는 계급적이어서, 직분자가 높은 질서를 점유하며 동시에 본질적인 요소이고 평신도는 낮은 질서를 차지하며 이차적인 요소로 밀려나게 된다.

그리고는 교훈하는 교회에 7성례를 귀속시켰다. 세례성사로부터 종부성사에 이르는 일체의 신앙의 과정에, 쉽게 말하여 신앙에 입문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일체의 과정에 은혜의 직접적인 매개자인 직분자가 개입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평신도는 직분자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접근할 수조차 없게 된 것이다. 역으로는 하나님도 직분자를 매개로 삼지 않고서는 어떤 은혜도 그의 백성들에게 전하지 못하는 상황을 맞은 것이다.

이것은 비단 은혜와 관련된 일만은 아니다. 인격(persona)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말한다면, 로마 가톨릭 교회는 한 인격적 존재의 지배 아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평신도, 일반성직자, 감독, 주교, 추기경이라는 계급질서적인 교회의 수장인 교황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실질적인 “유일한 인격”이다. 교황이외의 다른 인격들은 사유하고 행동하는 주체로 인정되지 않는다. 다만 교황이라는 한 인격의 결정을 다양한 인격의 양상(樣相)을 통해서 실행에 옮길 뿐이다. 그러니까 교황이라는 한 인격적 주체의 다양한 양상들이 교황 이외의 인격자들의 현주소인 셈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교황은 천상의 그리스도의 실질적인 성육신으로서 연장된 그리스도(the extended Christ)라고 불릴 수 있다. 물론 이 사실은 교황은 자기 인식을 철저한 그리스도 따름에서 찾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전제한다. 따라서 교황이 정상적일 때는 그나마 로마 가톨릭 교회의 상황이 괜찮을 수 있으나, 비정상적일 때는 문제가 심각해진다. 한 인격적 주체와 함께 다 무너지게 되니까 말이다. 교리적으로나 삶에 있어서나 그 영향력은 실로 심대하다 하지 않을 수 없고, 바로 그 부패되고 왜곡된 양상이 종교개혁시대전야에 만연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오직 성경”의 원리에 의해서 전복되었다는데 있다. “오직 교회”라는 원리를 “오직 성경”이라는 원리로 대체했다. 이런 점에서,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는 교직제도의 한 대표적인 양상으로 교황제도를 꼽았고, 교회의 유일한 머리로서 그리스도를 외치게 된 것이다. 교황과 추기경과 주교와 감독과의 관계성 가운데 의존적으로 실존하는, 무/비인격적 인간의 굴레를 깨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 구성원 각각의 인격적 실재를 인정했고, 이로써 교회 구성원인 개개 그리스도인을 인격적 주체로서 하나님 앞에 곧바로 설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오직 성경”의 원리를 따라 교회를 재형성한 것이다.

인간론적인 면에서 본다면, 교황이라는 한 인격적 주체의 존재와 사유의 양상으로 단순히 존재하던 무인격적인 인간을 인격적인 인간으로 복원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형성해갈 수 있도록 한 것이 종교개혁인 셈이다. 중세적 인간이해에 배태된 집단인격의 담벼락을 헐고 개인의 주체성,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야 하는 인간을 발견하고 일깨운 운동이 종교개혁이었다.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직접 설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에로 인간을 끌어냈다는 점에서, 종교개혁은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진정한 인간 주체성의 재발견을 꾀한 운동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오직 성경”은 성경해석의 주체로서 교황을 비롯한 교회의 직분자의 지위에 대한 문제제기를 노정했다. 왜냐하면, 과연 직분자로서의 교회가 “성경”과 “전통”을 매개하고 그 의미를 권위적으로뿐만 아니라 창조적으로까지 종합할 수 있는 지위를 점하는가에 대하여 종교개혁교회는 의심했고, 직분으로서의 사도직의 계승을 사도적 가르침의 전통의 계승이라는 내용차원으로 잡아 끌어당겨 높아진 직분을 상대화하여 “오직 성경”의 원리 아래 놓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니까 성경을 사도적 교훈의 전통을 통하여 해석해야 한다는 큰 흐름을 정당화하고, 또한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원리를 세움으로써 “쏠라 에클레시아”의 해석적 권위를 해체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성경을 평신도에게 돌려주는 위업을 이루었다.

확인했듯이, “오직 성경”은 형식적인 원리이면서 실질적인 원리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여, “오직 성경”을 형식원리로 내세울 경우, 바로 그 동일한 원리를 가지고 실제 삶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둘이 실제로 통합되지 않고 분리되는 현상, 즉 “오직 성경”을 외치면서 “오직 교회”를 취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종교개혁의 상속자가 아님을 보이거나, 혹은 미성숙한 상속자임을 드러내거나, 혹은 이익에 기댄 기회주의적 처신임을 스스로 증언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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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미니우스주의의 5대 강령과 칼빈주의의 5대 강령 / 제임스 보이스

제임스 보이스의 개혁주의 핵심” [1. 복음주의에 왜 칼빈주의가 필요한가]중에서 발췌

 

[아르미니우스주의의 5대 강령]

 

이 책의 핵심은 성경을 근거로 한 은혜의 교리에 대한 해설이다. 그러나 이 교리들을 철저하게 성경적으로 변호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복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문제가 되는 신학적 주제를 요약해 주는 간략한 설명을 제시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은혜의 교리는 교회 역사 내내 가르쳤지만 이른바 칼빈주의 5대 강령은 야코뷔스 아르미니우스의 신학에 대한 반응으로 전개되었다. 아르미니우스는 라이덴 대학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그가 죽은 뒤인 1610년에 그의 추종자들은 그의 구원에 대한 관점을 요약한 5개항의 신조를 작성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라고 불리게 된 그들은 이 교리를 네덜란드에 항의(또는 항변)의 형식으로 제출하면서 네덜란드 신앙 고백서는 자신들의 견해에 맞게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 내용은 다섯 항목으로 된 그들의 신학적 강령이다.

 

이 신조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I. 하나님은 예견된 믿음 또는 불신앙을 바탕으로 선택하시거나 문책하신다.

 II. 비록 신자만이 구원을 받지만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과 각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III. 인간은 너무 부패해서 믿음이나 어떤 선한 행실에는 신적인 은혜가 필요하다.

IV. 이 은혜는 인간이 거부할 수 있다.

 V. 참되게 거듭난 모든 사람이 확실히 끝까지 믿음을 지킬지의 여부는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한 쟁점이다.

 

이러한 진술들의 공통점은 은혜 안에서의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대한 반신반의이자 몇몇 대목에서는 그에 대한 저항이다.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취하는 입장의 핵심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어떻게 해서든 인간의 능력에 맞추어야 한다는 주장이 깔려 있다. 선택과 유기는 하나님의 작정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선택에 기초한다. 속죄의 효력은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믿음과 회개에도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완고하게 거부하는 이들을 이길 만큼 강력하지는 않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끝까지 인내할 지 그렇지 않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견인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보다는 그리스도인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런 교리들은 뚜렷한 교리적 문제이지만 모든 인간에게 자신의 영적인 운명을 결정하게 할 만큼 예정을 경시하려는 공통된 관심사로 서로 연결된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항변은 개혁주의 교리에 대한 국제적회의인 도르트 총회에서 절정에 이르는 신학적 논쟁의 폭풍을 몰고 왔다. 각국 대표들이 7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함께 모였을 때 그들의 논쟁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입장을 명확히 하는 역할을 했다. 약간의 반대되는 재확인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 대표들은 마침내 아르미니우스주의는 다음과 같은 신학적 함의를 피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1. 인간의 능력.

 

인간 본성은 타락으로 손상되었지만 완전히 무능해지지는 않았다. 우리가 설령 기본적으로 선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우리는 완전히 악하지는 않다. 의지는 죄에 예속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거듭남 이전에도(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 믿지는 못하지만)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죄인은 하나님 편에 서든지 하나님을 대적하든지, 성령과 협력하여 구원에 이르든지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하여 저주에 이르든지 선택할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2. 조건적 선택.

 

  특정한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택은 예견된 믿음, 즉 그들이 자유롭게 복음을 믿으리라는 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기초했다. 선택은 궁극적으로 개인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서 조건적이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들만이 하나님이 믿을 것으로 미리 아신 이들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미리 아시는 믿음은 오로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인간의 결정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궁극적 원인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죄인의 선택이다.

 

3. 비한정적 속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은 구원을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게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누군가에게 실제가 되게 하지는 않는다. 십자가형으로 인해 하나님은 용서를 베풀 수 있게 되었지만 용서는 오직 개인적 믿음을 조건으로 해서만 베풀어진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그러나 믿는 이들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따라서 속죄는 누군가가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할 경우에만 효력 있게 된다.

 

4. 저항할 수 있는 은혜.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은 외적으로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부르심 받는다. 성령은 모든 심령에 말씀하시며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도록 설득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신다. 그러나 죄인들은 성령을 거역할 수 있으며 회개하지 않으면 회개할 때까지 거듭나지 못할 것이다. 이 점을 달리 표현하자면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대한 성령의 적용은 죄인이 먼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성령은 죄인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면 새로운 영적 생명을 주실 수 없다.

   

5. 거부할 수 있는 은혜.

 

그리스도를 믿고 진실로 구원받은 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에서 떨어져 나감으로써 구원을 완전히 최종적으로 상실할 수 있다. 영원한 생명은 죄인이 그리스도께 올 때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그리스도께 대한 그리스도인의 신실함에 달려 있다.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고 모든 아르미니우스주의자가 최소한 여기서 기술된 바와 같은 앞의 다섯 가지 교리 모두에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요약한 내용은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믿는 바를 표현한 것이다. 이 다섯 가지 교리 모두가 공유하는 점은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을 어떤 식으로든 인간의 선택의 자유로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거듭남, 선택, 속죄, 영화 등 구원의 핵심적인 국면들의 효력은 하나님에게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죄인의 협력에도 의존한다. 데이비드 스틸과 커티스 토머스는 <칼빈주의 5대 강령>에 대한 연구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가 보기에 구원은 (주도권을 쥐신) 하나님과 (반응해야 하는) 인간의 공동 노력을 통해 성취된다.”고 결론지었다. “인간의 반응은 결정적인 요소다. 하나님은 무두를 위해 구원을 제공하셨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자신의 자율의지로 하나님과 협력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하는 이들에게만 효력 있게 된다. 핵심적인 점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누가 구원의 선물을 받을 것인지를 결정한다. 

 

이는 현대 복음주의 안에서 왜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이 이토록 우세한가를 설명하는데 도움이 된다. 아르미니우스주의의 경우 인간의 의사 결정은 구원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이는 오로지 하나님 중심적인 신학이 아니라 자아의 방향으로 뒤틀린 신학으로 귀결된다. 물론 이는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것이다. 이탈 근대적이고 점점 탈 기독교적으로 변하는 시대에 사람들은 관심을 요구하고 있다. 사람들은 세속화 되고 인간화 되고 상대화된 영적 체험을 찾고 있다.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오늘날의 복음주의가 요구하는 바로 그것, 즉 개인적 선택에 결정적 역할을 맡기는 복음을 제공한다.

  

 

[칼빈주의의 5대 강령]

 

이와는 대조적으로 칼빈주의는 구원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로 말미암는다고 주장한다. 구원은 어느 모로 보나 선물, 즉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아니면 구속받을 수 없는 합당치 못한 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 선물은 하나님이 선물(구원)을 주시기로 택하신 이들에게 주어진다. 이 선물은 모든 이들에게 제안되지만 모두에게 주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선물을 주기로 작정하시면 효력 있게 선물을 자녀의 손에 쥐어 주신다. 이 선물은 한 번 받으면 결코 잃어버리거나 도난당하거나 손상되지 않는다. 참으로 그것은 하나님이 계속해서 주시는 선물이다!

 

이 은혜로운 원리들은 도르트 총회 신경에서 정의되고 변호되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국제적인 신학자 집단이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입장을 살펴보기 위해 도르트에 모였다. 그들의 심의는 종교개혁의 위대한 진리들에 대한 한 세기에 걸쳐 성숙된 신학적, 실제적 사고를 대표하는, 조심스럽게 표현된 일련의 교리적 명제들로 귀결되었다. 요컨대 도르트 총회는 선택과 유기의 작정이 예견된 믿음이나 불신앙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기초해 있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모두에게 충분하지만 오직 택함받은 이들에게만 효력이 있으며, 인류는 타락으로 인해 완전히 부패했고 따라서 거듭나기 전에는 구원을 선택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는 불신자를 회심시키는데 효력이 있고, 하나님은 신자들이 결코 완전히 은혜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신자들을 보존하신다고 결론지었다. 이 다섯 가지 기본적인 요점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전적 타락이라는 말은 구석구석 만연해 있는 죄 또는 영적인 일에 있어서의 인간의 무능이라는 교리를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우리 모두가 더 이상 악해질 수 없을 만큼 악하며 모두가 똑같이 죄로 가득하다는 암시를 주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죄를 짓고 그 죄로 인해 지옥에서 더 큰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신학자 존 거스너가 말해온 바와 같이 우리는 더 이상 악해질 수 없을 만큼 악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 안에는 더 악해질 수 있는 무한한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전적 타락 교리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그가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전적으로 악함을 뜻한다기보다는 그가 하는 어떤 일도 결코 완벽하게 선하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죄는 우리의 육체적, 정신적, 정서적 구조의 모든 부분에 만연해서 우리에게는 죄가 건드리지 않은 부분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므로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근본적 타락, 포괄적 죄악 또는 죄의 만연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낫다. 우리의 동기는 결코 완전하게 순수하지 않으며 따라서 어느 정도 우리의 모든 행동은 악한 욕구로 부패해 있다. 이러한 부패는 우리의 존재의모든 측면에 침투해서 우리의 존재나 행위의 어떤 것도 완벽하게 죄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런 불행하고 속속들이 죄에 물든 상태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찾으려는 성향이 전혀 없고 그래서 하나님을 찾거나 심지어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졌을 때 복음에 반응할 수도 없다.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서 우리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거나 영접하는일에 관한 한 자유의지가 없다. 사실 우리는 죄에 철저히 예속되어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영적인 이해력을 주시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믿음조차 선물로 찾아온다.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 이전에는 우리의 부패성이 우리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협력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2.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인류의 상태가 성경의 타락 교리가 가리키는 것만큼 나쁘다면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어야 한다.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 편에서의 어떤 도움도 없이 성취하시고 적용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어야 한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이므로 (실제로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셔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다가오심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이러한 다가오심의 첫 번째 단계는 그 일을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정이며 선택이라는 말은 바로 이 결정을 가리킨다. 선택이란 한 개인의 구원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세상이 생겨나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작정을 세우신 하나님의 사전 결정에 의해 결정된다는 의미다. ‘무조건적이라는 말은 이 결정이 하나님께서 죄에 물든 피조물 속에서 예견하셨을만한 어떤 것과도 관계없이 이루어졌음을 가리킨다. 만일 선택이 죄인이 그렇게 되거나 행할 만한 어떤 것에 바탕을 두었다면 궁극적으로 구원은 인간의 공로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선택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서 나온 자비로운 행위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선택의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 중에 하나다.

 

3.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튤립이라는 약어로 요약되는 다섯 가지 교리 중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가장 어려운 것이 제한 속죄 교리다. 문제는 용어 자체에도 일부 있다. 이 용어는 사실 오해의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제한속죄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무언가 할 수 있거나 해야 할 모든 역할을 다 하지 않았고 어떤 면에서는 효력이 없는 것 같은 암시를 준다. 그러나 그것은 제한 속죄 교리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다. 개혁주의자들이 이 용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속죄는 창세전에 성부가 성자에게 주신 이들의 구원이라는 구체적인 목표를 염두에 둔 것이며 그 사람들을 구원하는데 효력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교리는 한정적 속죄 또는 특별 구속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특별 구속이란 그리스도의 죽음이 택함 받은 자들에게만 구원의 효력을 가진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자신을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을 위한 완벽한 대속 제물로 드리면서 죄를 속하셨다. 그러므로 구원의 계획에 따라 그리스도의 죽음은 택함 받은 자들의 죄는 속했지만 한 번도 믿음으로 그분께 나아오지 않은 이들의 죄는 속하지 않았다.

   

4.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able Grace)

 

속죄의 유익은 어떤 식으로든 택함 받은 이들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이 일은 성령의 사역이며 성령의 내적인 역사는 죄인으로 하여금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한다. 모두에게 주어지는 복음의 외적인 부르심 외에 성령은 내적인 부르심을 주신다. 이 내적인 부르심은 오직 택함 받은 이들에게만 임하며 필연적으로 그들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이끈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그들을 구원하시므로 그들이 이 효력 있는 부르심을 영구적으로나 효과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며 당해날 수 없다. 성령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들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 속에서 구원의 목적을 반드시 성취하신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도 성령의 은혜롭고 효력 있는 사역을 바로 그와 같이 기술한다. “하나님이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모든 이들, 오직 그들만을 하나님은 스스로 정하시고 받아들이신 시간에 말씀과 성령으로 그들이 본래 처해 있는 죄와 사망의 상태에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구원으로 효력 있게 부르시고, 그들의 생각을 영적으로 구원 얻도록 조명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게 하시며, 그들의 돌 같은 마음을 제하시고 그들에게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며, 그들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을 선한 것에 이르도록 작정하시고 효력 있게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끄시되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자발적인 상태에서 가장 자유롭게 나아오게 하시기를 기뻐하신다.”(101)

 

5. 성도의 堅忍.(Perseverance of Saints)

 

때때로 이 교리는 영원한 안전의 교리라고 불린다. 이 교리는 다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1)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오래 참으신다. 2)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오래 참으심으로 그들 또한 오래 참는다. 성도들은 단순히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이 그 아들의 사역을 통해 거룩하게 여기시는 이들이다. 성도의 견인은 사실 성도의 보존이다. 성도의 견인은 하나님의 보존하시는 은혜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성도들을 영광으로 인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실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이다.

 

 

이 다섯 가지 교리는 각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독특한 기여를 한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각 교리는 개별적으로 분석할 수도 있고 개별적으로 변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다섯 가지 교리는 논리적, 신학적으로 상호 관련되어 있다. 이 교리들은 모두 구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워필드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이 5대 강령은 유기적인 통일체, 하나의 진리 체계를 이룬다. 이 교리들은 성경에서 풍부하게 지지하는 두 가지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첫 번째 전제는 인간의 완전한 무능이며 두 번째 전제는 은혜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다. 다른 모든 것은 여기서 도출된다. 이 두 기초적 진리가 만나는 곳이 복음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했다면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주권적이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부패함 가운데 은혜를 거부하고 구속받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은혜의 교리는 함께 운명을 같이 하며 함께 구원은 전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므로 은혜에서 비롯되며, 전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하나의 핵심적 진리를 가리킨다.

 

은혜의 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충분히 인식하려면 칼빈주의 5대 강령에서 삼위일체의 각 위격의 역할을 인식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선택은 성부 하나님의 선택이다. 속죄는 성자 하나님의 희생 제사다.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며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견딜 수 있게 하는 은혜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다. 따라서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그래야 하듯이 구원은 전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사역-삼위 하나님의 협력 사역-이다. 생각해 보라. 만일 우리가 실제로 죄로 죽어 있다면(근본적 타락) 하나님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실 수 있고(무조건적 선택),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속하실 수 있으며(특별 구속), 성령만이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실 수 있고(효력 있는 은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보존하실 수 있다(보존하는 은혜). 그러므로 모든 찬양과 영광은 하나님께만 속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11:36).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최후의 상급 (에우세비우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5-36).

우리 가운데 참된 평화와 다른 사람들을 향한 지치지 않는 사랑이 있습니까?
우리가 어떤 잘못을 책망할 때 우리 목적은 사람을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격려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징계는 가혹하게 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만 신실한 믿음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도 신실함을 보이고 있습니까?
우리는 불행한 이들을 긍휼히 여깁니까?
우리는 기만과 위선 뒤로 악을 은폐하는 것을 미워하는 꾸밈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참 하나님과 그분의 나뉨 없는 주권을 인정합니까?

  이것이 참된 경건이며 진실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신앙입니다. 하나님께 헌신을 고백하는 이들은 쉽게 분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궁핍의 압박 속에서도 고결하게 처신합니다. 그들의 헌신을 시험하는 시련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통하는 통행 허가증입니다. 하나님은 탁월한 인간의 행동을 기뻐하신다는 점을 우리는 의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권세 있는 자나 비천한 자나 자기를 돕는 이들에게 감사하고 그 보답으로 자기도 그들을 돕는데 지극히 높으신 주권자이시며 선 그 자체이신 분이 그와 같이 보상해 주시기를 소홀히 하신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하나님은 평생토록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가 선을 베풀 때마다 우리 가까이 계시며 우리의 의와 순종을 받으시고 보상해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삶의 모든 행동을 다 살펴보실 때까지는 완전한 보상을 미루십니다. 그때가 되면 거리낄 것이 없는 이들은 영생의 상급을 받지만, 악인들은 자신이 받아 마땅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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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옥타비우스 윈슬로우)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오늘 본문에 기록된 대로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도에 들어갈 담력을 얻습니다.
이 피는 예수님께서 신성의 모든 위엄과 능력을 소유하신 채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흘리셨던 피입니다. 이 피를 힘입어 우리는 성소에 나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간다는 것은 정확하게 무슨 뜻입니까?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우리의 기도는 과연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까?

첫째로,  '예수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줌으로써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없는 사람으로
서도록 만들어줍니다.

잘 아시는 대로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으면
우리는 결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죄로 가득 찬 우리가 어떻게 감히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은 마치 나방이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거니와 죄를 씻지 않고서는 절대로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히 12:29)

죄를 씻지도 않고 거룩해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존전으로 나아가는 일은
끔찍한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씻고 우리의 모든 허물을 도말함으로써
가로막혔던 모든 담을 허물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끗하게 씻긴 상태로 지성소에 나아가게 됩니다.

겸손히 그리스도만을 소망하는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드리신 희생 제사에
모든 소망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 여러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주목하십시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여러분의 발목을 잡던 모든 어려움들이, 여러분의 길을
가로막아놓던 높은 담들이 다 제거되고 허물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이 모든 일을 성취하였습니다.

이제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 많은 여러분 사이에는 막힌 담이나 장애물이 없으며
걸리는 것도 없습니다.
용서받는 죄인으로써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여러분을 가로막아 설 것은
이제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가장 친밀하고도 달콤하며 거룩한 교제를 나누려는 여러분을
가로막고 방해할 것은 더 이상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여러분의 죄를 깨끗이 씻었고 여러분의 죄책을 제거하였으며,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를 갈라놓는 유일한  장벽인 죄를 제거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예수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케 씻어 줌으로써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성소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거 되지 않은 죄에 대한 죄책이 양심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도 양심에 죄를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고
씻음 받지도 않은 죄를 가지고 잇으면, 지성소에 들어간다는 것이
정말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죽음을 새롭게 인식하고 붙잡게 되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로 자신의 양심을 가지고
나와 정결하게 하는 샘에 자신을 씻고 그리스도의 보혈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면,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그를 막고 방해했던 것들은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보혈에 적셔진 마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보이지 않는
거룩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게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거룩한 교제를 나누는 일의 가장 위대한 비밀입니다.
바로 우리의 양심을 그리스도의 보혈의 샘물에 씻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에서 상함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피에 우리의 양심을 적시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자신이 너무나 무가치한 죄인이라는 생각에  휩싸여
하나님께 나아갈 용기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이 영적으로 너무나 멀리까지 나아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러분을
받아 주지 않을까 봐 걱정이십니까?

두려워하지도 걱정하지도 말고 그리스도의 삽자가 아래로 나아오십시오.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인하여 이제 여러분은
얼마든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이것을 경험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우리의 기도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대하여
한 가지 견해가 더 있습니다.
'예수의 피'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과 담력을 주는 공로를 우리에게 제공해 줍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 내세울 만한 공로가 전혀 없습니다.
오직 속죄하신 구세주로부터 제공되는 공로만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피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피의 공로로 우리의 인격이 하나님 앞에 용납을 받고 우리의 기도가 들으심을 얻으며,
우리의 간구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우리의 유일한 공로는
우리자신의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신적인 공로입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공로가 전혀 없으며 하나님의 진노 외에는 달리 무엇을 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피에 우리를 의탁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주는
모든 공로를 그리스도로부터 얻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피'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사용할 수 있는 탄원과
논증도 제공해 줍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하면, 수천가지의 생각들이 들고 일어나서
우리의 의지를 꺽어 놓고, 수천 가지의 어려움이 합세하여 우리의 길을 가로막습니다.
헤아리 수 없이 많은 우리의 죄와 단점, 결점과 부족이 갑자기 한꺼번에 몰려들어,
마치 집요하게 나타나는 유령들 처럼, 우리를 정면으로 노려보면서,
우리 같은 사람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자격도  없다고 공격을 퍼붓습니다.

이 때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붙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치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히 여자를 예수님 앞으로 끌고 나와 정죄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아무말 못하고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듯이,
우리를 방해하던 모든 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오직 우리와 주님만 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로써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우리를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물리치고
제거하셨습니다. 오직 한 가지로써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 한 가지는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흠없는 어린양의 피! 우리의 모든 죄를 씻는 피! 은혜의 보좌를 적시는 피!
휘장 안쪽에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는 피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이렇게 우리를 위하여 일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죄가 아무리 많고
악하다고 할지라도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지요!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 가운데 다른 모든 복보다 뛰어난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단연코 예수님의 피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자신의 많은 죄와 허물 때문에
지성소로 감히 들어가거나 눈을 들어 바라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그저 밖에서 서성이는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피가 얼마나 큰 능력이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니오.
예수님의 피는 여러분의 모든 죄를 씻고도 남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면, 그 피는 여러분을 하나님의 임재로 인도하고
여러분의 모든 죄를 확실하게 사해 주며, 죄로 말미암아 혼란스럽던 여러분의 마음에
평강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화목하신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을 활짝 열어 줄 것입니다.


십자가 곁에 서 있는 여인들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 19:25)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경건한 구경꾼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모여 있는 장소는 슬픔의 장소이면서도 말할 수 없이 소중하고
바람직한 장소였습니다. 전에도 예수님이 피곤하고 궁핍할 때 여러 번 일꾼으로 섬기면서
예수님을 가까이 모셨던 적이 있었던 이들은, 여성에게만 있는 매우 섬세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조용하고도 온유하게, 약간의 거리를 두고, 예수님으로부터
복을 얻거나 예수님을 섬기기 위하여 예수님을 가까이하였습니다.

이들의 사랑은 다른 사람들에게 과시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이들의 섬김은 쓸데없이 참견하거나 다른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섬김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온화하면서도 아침 이슬처럼 촉촉한 사랑과 섬김으로, 조용하면서도
밝은 햇빛처럼 원기를 북돋아 주는 사랑과 섬김으로 예수님의 외롭고도 참혹한
공생애 길을 하면서 거룩한 동정심으로 그 길에 광채를 더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극도로 궁핍해지고 기진맥진하실 때마다 '자기 소유로'(눅 8:3)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는 암울한 시간이 되자, 죽는 한이 있어도
예수님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따르겠노라고 맹세하고 다짐하던 제자들이 하나 둘씩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떠나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이 경건한 여인들은 예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서 십자가를 지키는
파수군처럼 십자가 아래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는 고통과 어둠과 출혈 속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는 동안 예수님의 생명이 서산의 지는 해처럼
서서히 꺼져 가는 것을 지켜 보았습니다.

이들이 십자가 아래 이렇게 모이게 된 것은 거듭나지 앟은 사람에게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깊은 사랑과 고차원의 생명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이 여인들에게 은혜의 기적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본래 이 여인들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길을 잃고 영원한 지옥으로 달려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죄인이었던 그들을 찾아주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 여인들이 둘러 있는 바로 그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죄를 감당하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받아야 할 모든 저주를 예수님이 하나도 남김없이 감당하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받아야 할 모든 고통과 형벌을 그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대신 받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모든 고통은 바로 이 여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영혼에 깊은 슬픔을 겪으신 것도, 십자가  상에서 피를 흘리신 것도,
그리고 마침내 죽으신 것도 모두 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형벌을 받고 사람들로부터 고문을 당하며 친구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원수들로부터 모욕을 당하는 동안, 그것도 칠흑 같은 어둠과 지진 속에서,
모욕과 저주 속에서 그 모든 고난을 담당하시는 동안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서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광경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 19:25).

아, 이 여인들은 참으로 명예로운 여인들이었습니다!
이 여인들이 모여 있는 장소는 참으로 모든 성도가 부러워할 만한 장소입니다!
그곳은 얼마나 풍성한 영적인 교훈을 내포하고 있는지요!
이제부터 전심을 다하여 그 곳에 내포되어있는 풍성한 교훈을 배우도록 합시다.


십자가 아래서의 죄 사함


인생에서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한 가지 질문이 있다면,
그것은 "나는 죄 사함을 받았는가? 내 죄는 용서받았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하나남과 사람 사이에서 가장 큰 문제가 다름 아닌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죄를 용서받는다면,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손상시키지 않는 정당한 방법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가장 큰 문제가 종결되고, 하나님과 죄인이 완벽한 화목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완벽하게 설명해 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게에서는 얼마나 놀랍고
기이한 사랑과 긍휼과 얼마나 거대한 능력이 함께 만나는지요!
십자가에서 만나는 이 모든 것들은 무한히 부요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 줍니다.
또한 죄인들의 죄를 사해 주시는 하나님의 뛰어난 위대하심도 함께 보여줍니다.


1. 죄사함의 은혜를 받는 자들

예수님이 피를 흘리며 매달려 계시던 십자가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속성을 가진 사람들이 거기에 모여 있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타락한 본성을 가진 사람들이 거기에 모여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우리를 대표하는 것이며, 그러하기에 실상 우리가
거기에 서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철저한 죄인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적의를 가지고 십자가 아래 모여든 사람들 중에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죄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죄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그 입에는 저주하는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얼마나 끔찍한 설명입니까! 우리가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우리의 위로와 소망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는 죄인이지만, 그것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은 죄인을 위한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는 도덕적으로 흠이 많고 추하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에서
제외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비참한 죄인들을 위한 긍휼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죄인이지만, 그것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 받을 수 없는 영역으로 밀려나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의가 하나도 없는 죄인들을 위한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기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공개적으로 대적하는
원수들이었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생명과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죽인 잔인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 사람들보다 죄가 덜한 사람들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의 삶을 계속 살아간다면, 결국 우리는
영광의 주님을 죽인 이 살인자들의 범죄를 인정하는 셈이며, 사실상 우리 자신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면 이런 사실이 우리의 마음에 얼마나 강력하고도
엄숙하게 뼛속 깊이 느껴지게 되는지요! 또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살인자가 바로 우리 자신임을 얼마나 처절하게 느끼게 되는지요!

은혜로 그 마음이 새로워진 사람은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살인자라는 사실을 뼛속 깊이 느끼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중에서도 자신이 가장 우두머리 범죄자였다고 느끼게 됩니다.
자신의 모든 죄가 예수님에게 전가된 것과 자신이 죄 사함을 받게 된 것은
구주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사실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고 엄숙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그러하기에 은혜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다음과 같이 절규하게 됩니다.

" 내 죄가 생명과 영광의 주님을 죽였구나. 예수님의 머리를 가시 면류관으로 찌르고
예수님의 손과 발에 대못을 박고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것도 결국 나였구나."

아! 우리는 죄 사함을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지요! 우리는 철저한 죄인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죄 사함의 은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여러분의 범죄가 그리스도의 피로 사해지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빌라도 법정 밖에서 "그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막 15:13)라고
목청 돋우어 외쳤던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될 것입니다.

2. 우리의 대언자가 되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

두 번째로 숙고할 것은 죄인들을 위하여 죄 사함의 은총을 간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게 무지막지한 죄인들을 위하여 성부하나님께 죄 사함의 은총을 간구하신 분은
어떤 분이십니까?

험한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받으시는 구주, 고통 속에 죽어 가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저 무지막지한 죄인들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고통을 가하고 있었던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저 무지막지한 죄인들이 조롱 섞인 말들로 쉼 없이
괴롭히고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며 여러 말들로 그분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 27:40)

"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막 15:31)

그런데 이렇게 비열한 조롱을 들으신 바로 그분이 무지막지한 죄인들의 죄 사함을 위하여
간구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주님이 자기 백성을 위하여 행하시는
공식적인 직무가 얼마나 놀랍고도 소중한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자기 백성을 위하여 '대언자'의 직무를 늘 감당하십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일 2:1)

십자가의 모진 고통 속에서도 성자 하나님과 성부 하나님 사이에는 여전히
상호 신뢰감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주목하십시오.
비록 성부하나님이 자신의 얼굴빛을 가리시고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지 않으셨으며,
마치 전쟁에 사옹되는 개들처럼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덤벼드는 원수들의 능력에
자신의 아들을 내어 주셨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굉장히 감동적이고도 귀중한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징계와 고난 중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여러분의 손에 있는 고난의 잔을
입에 대기가 두려울 때, 고통스러운 일들이 연이어 생기는데도 하나님게서
얼굴빛을 가리고 여러분을 홀로 그 음산한 길을 걷도록 내버려 두실 때,
그 순간에도 여전히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또한 아무리 짙은 먹구름이 여러분을 덥고 아무리 혹독한 징계가 여러분에게 임하더라도,
하나님을 여러분의 아버지로 굳게 신뢰하며, 사랑과 은혜가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따뜻한 품에 여러분의 지치고 상한 영혼을 쉬게 하는 것이 여러분의 특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이제는 대언자이신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우리를 위하여 변론하셨는지를 주목해 보십시오.
옛님께서 죄사함의 은총을 간구하셨던 제단, 우리를 위하여 죄 사함의 은총을
호소하셨던 변론의 장소는, 자기 자신도 피를 흘리며 고통 속에 죽어 가고 있던
십자가 위였던 것입니다.

아, 십자가! 그곳은 위대한 대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철저히 부패하고
타락한 죄인들을 위하여 죄 사함의 은총을 간구하시기에 가장 적절한 장소였습니다.
갈보리 십자가 위의 예수님은 바로 죄인들을 위하여 자신의 보배 피를 흘리고 계셨기에
얼마든지 그런 기도를 올릴 수 있었습니다. 갈보리 십자기 위의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법정에 서 있었던 것이기에 우리를 위하여 그런 기도를 올릴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 사함의 은총을 간구할 수 있었던 근거는
바로 주님 자신이 짊어지셨던 십자가였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님이 여러분을 위해서 간구사하시는 귀한 은혜들은 한결같이 주님의 속죄 제사에
근거하고 있으며, 또 주님이 죄인들을 대신하여 받으신 고난과 죽음에 근거하고
응답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 몸에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으며 그 심령에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주님은 사람의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사랑으로 자신의 원수들을 위하여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기이한 광경을 바라보면서도 여러분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분명하고 또 얼마나 광대한지를 아직도 의심하고 염려하십니까?
이제는 그 모든 의심과 염려를 다 내려놓으십시오.
십자가에서 나타난 주님의 한량없는 사랑의 깊은 바다에 푹 빠지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외치십시오.

" 아, 주님의 사랑은 넓고도 깊어서 내 모든 죄를 덮고도 남는다.
주님의 그 사랑이 내 모든 죄를 도말한다. 다시는 그 어느 한 가지라도 보이지 않도록 하신다. "

주님은 자신을 죽이는 원수들을 향해서도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친구들을 향해서는 얼마나 더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 주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천국에서도 여러분을 마음에 품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영광 중에서도 여러분을 위해 중보하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시고,
여러분의 원수들이 이기지 못하도록 기도하시며, 하늘과 땅에 속한 모든 복들이
여러분의 것이 되도록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을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십자가 아래서 (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저)
가져온 곳 : 
카페 >그리스도의 몸인 형제사랑의집
|
글쓴이 : 형제사랑| 원글보기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마이클 호튼 저 (김성웅 역)

현대 교회의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증상
문: 사탄이 한 도시를 완전히 장악하면 어떤 모습일까?
답: 교회는 매주일 문전성시를 이룰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가 선포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는 사탄이 만들려고 하는 교회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리스도로 충만한 교회인가, 아니면 '그리스도 없는 교회'인가? 호튼은 이 물음에 대해 오늘날 미국 기독교의 현실을 한 마디로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라고 진단한다. 이것은 자유주의 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자유주의와 복음주의를 막론하고 미국 교회 전반에 대한 진단이다. 참으로 충격적인 선언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어떠할까? 우리는 미국 교회와 다르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미국 교회에서 만든 제품을 가장 빠른 시간에 직수입해서 쓰고 있는 한국 교회는 미국 교회의 쌍둥이라 해도 좋을 터인데, 호튼이 말하는 미국 교회의 현실이 한국 교회에서도 그대로 복사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바짝 긴장하고 호튼의 말에 귀 기울여 들어 볼 필요가 있다.

호튼은 현재 미국 교회의 메시지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막론하고 "더 열심히 하세요. 더 노력하세요" 일색이며, 보수 진영에서 자유주의 진영에 이르기까지, 로마 가톨릭에서 재세례파에 이르기까지, 뉴에이지에서 남침례교에 이르기까지, 미국 교회의 '영성 탐구'에 대한 열광적 분위기에서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의 증상을 발견한다. 16세기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그리스도 없는 중세 교회를 '바벨론의 포로 된 교회'라 불렀듯이 호튼은 '그리스도 없는 미국 기독교'를 '미국 문화의 포로 된 교회'로 생각한다.

1. 펠라기우스주의적 도덕주의
  호튼은 미국의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증상을 질병명을 사회학자 크리스천 스미스가 말한 '도덕적이 심리적인 이신론'이라고 규정한다. 스미스가 말하는 '도덕적이고 심리적인 이신론'의 핵심 내용은:

첫째,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둘째, 하나님은 사람들이 착하고, 멋지고, 서로 공평하기를 원하신다.
세째, 인생의 중심 되는 목표는 행복이고, 자신에 대해 뿌듯하게 느끼는 것이다.
넷째, 하나님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할 때 외에는 사람의 삶에 굳이 간섭하지 않는다.
다섯째, 착한 사람은 죽어서 천국에 간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사람을 착하게 만들었으며, 그러므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덕적이고 심리적인 이신론'의 신학적인 명칭은 펠라기우스주의다. 호튼은 미국 교회가 펠라기우스주의로 심하게 기울기 시작한 것은 2차 대각성 이후 즉 찰스 피니의 등장이라고 말한다. 찰스 피니는 미국 교회에 펠라기우스를 유행시킨 전도사였다. 오늘날 미국 기독교의 심각성은 찰스 피니의 이러한 펠라기우스주의적 경향이 미국 교회에 전반에 스며들어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명목적으로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들까지도 일부 침투했다는 점이다. 미국 기독교에서 현저하게 나타나는 펠라기우스주의적 경향은 종교개혁에 역사적 뿌리를 둔 교회들에서조차 드러나고 있다. 크리스천 스미스와 제임스 헌터와 같은 종교사회학자들은, 루터파 교회와 개혁 교회의 평신도들이 이와 똑같은 전제들을 공유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기억시킨다. 로버트 슐러도 그렇지만, 노만 빈센트 필이 미국 개혁 교회에서 안수받은 목사였음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서 좀 더 보수적인 장로교와 개혁교회들에서도 스미스가 지적한 도덕론적이고 심리요법적인 이신론에 딱 맞아떨어지는 설교들을 들을 수 있었다. 시카고 대학에서 가르치는 주류 교단의 신학자인 브라이언 게리쉬는 위기의 본질을 이렇게 진술한다. "은혜에 대한 개혁주의자들의 증언이 16세기보다 현재 더 절박하게 필요하다. 지금은 개혁교회들에서도 펠라기우스주의가 버젓이 활개를 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2. 조엘 오스틴 비판
  오늘날 미국 교회에서 이러한 펠라기우스주의적 도덕주의를 가장 강력하게 전파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조엘 어스틴이다. 조엘 어스틴은 베스트셀러가 된 <긍정의 힘>과 <잘되는 나>라는 책과 레이크우드 교회에서 전하는 메시지를 통해 미국과 전 세계에 이러한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확산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다.

호튼은 '개신교 자유주의에서 나온 일종의 부드러운 도덕주의가 슐러를 통해 복음주의의 주 메뉴가 되었고' 어스틴은 "입으로 시인하고 믿음으로 얻어라"라는 형통주의 철학을 주류의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이라 말하면서 어스틴의 신학은 '펠라기우스주의의 자기 계발과 영지주의의 자기 신성화가 접목된 형태'라고 진단한다. 조엘 어스틴의 책은 미국 교회만이 아니라 한국 교회에서도 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한국 교회에도 조엘 어스틴의 긍정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병의 심각성에 대해 경고한 사람도 별로 없고 이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치료책을 제시한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이 심각한 병은 점점 더 많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전염되고 있다. 물론 왜 조엘 어스틴의 <긍정의 힘>과 <잘되는 나>에서 가르치는 자기 계발식 메시지가 문제가 되는가?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하고 항변을 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말하고, 긍정적으로 살면 된다는 조엘 어스틴의 메시지는 무엇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 호튼은 이 문제에 대해 명쾌한 대답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어스틴과 요즘 활동하는 다른 많은 설교자들이 약속하는 것들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리스도가 없어도 된다. 유명한 자기계발 강사 토니 로빈스처럼 성경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복음서들에 약속된 구속과 같은 것도 필요 없다. 삶을 좀 더 긍정적으로 전망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하나님이 필요할 데가 어디 있을지 분명하지 않다... 미국인들에게는 더 나은 가정, 재정, 건강 혹은 나아가서 도덕성을 함양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예수가 필요 없다.

3. 맥클라렌의 이머징 교회 운동 비판
  최근 미국 복음주의에서는 맥클라렌 같은 인물이 주도하는 다소 자유주의신학적 성향과 신비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이머징 교회 운동이 떠오르고 있다. 호튼은 '조엘 어스틴의 형통복음에 나타나는 자기도취와 개인주의와는 동떨어져 있기는 하나 맥클라렌의 메시지는 중요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어스틴이 말하는 죄와 구원은 하나님에서 도덕적 개선을 통한 자아의 행복과 향상으로 옮겨갔다면, 맥클라렌에게서는 지구 온난화, 가난, 에이즈 그리고 자본주의적인 탐심으로 옮겨간 정도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스틴은 구원을 전적으로 지금 여기에서의 형통이라 말하는 반면 맥클라렌은 주로 지금 여기에서의 평화와 정의라고 말한다.' 이 두 경우 모두 구원을 가져오는 것은 사람의 몫이다. 형동 복음을 주장하는 조엘 어스틴 류의 <믿음의 말씀 운동>이나 맥클라렌 류의 <이머징 교회 운동>의 가장 결정적인 문제점은 무엇인가? 호튼은 이들은 복음과 율법을 혼동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복음을 "지금의 길에서 돌이켜서 새로운 길을 따르라"고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초대 (맥클라렌)라고 규정하든, 혹은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어스틴)라고 하든, 우리는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고 있다. 복음은 그리스도가 죽음, 정죄 그리고 죄의 폭정을 종식시켰고, 장차 영광과 권세 가운데 다시 오셔서 먼저 심판하신 후 이어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는 하늘의 선언과 함께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4. 영지주의와 닮은 꼴인 미국 기독교 영성
  펠라기우스주의적 도덕주의와 더불어 최근 미국 기독교에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은 영지주의적 영성이다. 영지주의는 오늘날 '뉴에이지' 혹은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미국 종교 시장의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이 되고 있다. '영성에 대한 탐구'가 미국의 시사 잡지 커버스토리에 자주 등장하고, 역사학자, 사회학자, 소설가 등이 '영성'이라 부르는 영지주의적 탐구에 열을 올리고 있다.

호튼은 복음주의자들이 자주 진리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실은 복음주의자들의 예배, 전도, 영성은 역사적인 기독교라기 보다 여러 면에서 몰몬교나 뉴에이지 그리고 자유주의자를 닮았다고 말한다.

미국 영지주의 전문가 브룸에 따르면 고대 영지주의는 즉 브룸은 유대교와 기독교 신비주의, 피오레의 요아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재세례파, 천년왕국 열광주의자, 내면의 빛 분파주의자, 미국의 모든 초월주의 (위트만, 소로 그리고 에머슨), 몰몬주의, 그리고 뉴에이지 운동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역사를 통해 계속적으로 다양한 변종의 모습으로 지속되어왔다. 그렇다면 최근 미국의 영성이 고대 영지주의자와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요소란 무엇일까?

호튼은 고대 영지주의와 최근 미국의 영성을 이렇게 비교한다. 루프가 고대 이단에 관해 논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시대 미국 영성에 관한 기술은 영지주의의 주요 특성들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그 특성들로는, "교리보다 경험을 우위에 둔다, 공적 제도가 아니라 사적이다, 인식의 문제를 피하고 신화적이고 몽환적이다, 공공의 종교가 아니라 대중의 종교를 지향한다, 부드럽고 마음 써 주는 신관을 가지고 있다" 등이다.

고대 영지주의처럼 우리 시대 미국인들이 영성에 접근하는 방법은 전형적으로 개인적인 관계의 축으로서 내면의 영을 강조한다. 보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변형판들마다 표면적으로 조금씩 다를 수 있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호튼은 영지주의적 관점에서 미국 기독교를 관찰했을 때, 오늘날 개신교 자유주의와 개신교 복음주의는 정도 차이는 있지만 그 기본적인 종교 형태에서는 다르지 않다고 한다.

5. 미국제 기독교의 특징: 펠라기우스주의와 영지주의의 결합
  호튼은 현재 미국제 종교의 특징을 도덕주의와 신비주의의 결합으로 본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펠라기우스주의와 영지주의의 결합이다. 현대 미국 기독교는 바로 이 두 가지 이단이 결합한 절묘하게 결합한 형태라는 것이 호튼의 주장이다. 펠라기우스주의는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로 귀착된다. 구세주가 아니라 좋은 모범이 필요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에 이르는 영지주의의 길은 선한 창조주, 죄를 부른 타락,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처참한 죽음 그리고 육체의 부활 이야기를, 한 악신, 물질을 악하게 한 타락, 내면적인 계몽으로 인한 구속이라는 신화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에게 구원을 위해서 우리 밖을 보도록 하는 반면, 펠라기우스주의와 영지주의는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 안을 들여다보도록 한다. 이 둘은 합쳐서 미국제 종교라는 완벽한 기습작전을 성공시켰다.

6. 교회가 그리스도를 다시 회복하는 길
  펠라기우스주의건 영지주의건 이 모든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복음이 없다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고, 결국 각기 독특한 복음 없는 율법을 주장한다.

호튼은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는 것은 타락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향이며, 기독교라고 전혀 말할 수 없는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는 어떤 형태의 자력구원을 가정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호튼은 교회에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복음과 율법이란 무엇인가? 호튼은 복음과 율법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율법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하지만, 복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말한다. 율법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을 말한다. 이 둘은 아주 다른 말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수많은 성도들이 지쳐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호튼의 진단에 따르면 복음이 강조되지 않고 복음없는 율법만 강조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위대한 복음의 이야기를 강조하기 보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해야 할 일, 우리가 이웃을 위해서 해야 할 요구사항만 자꾸만 늘어놓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벗어나 다시금 그리스도 충만한 기독교로 변화될 수 있을까? 질병의 원인을 정확하게 진단해야 바른 치료를 할 수 있다.

호튼에 따르면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라는 증상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복음과 율법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율법과 복음을 혼동한 것이며, 결국 교회가 복음을 복음답게, 율법을 율법답게 선포하지 못하고 복음 없는 율법만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호튼의 해결책은 명확하다. 복음과 율법의 차이를 바로 알고, 복음과 율법을 바르게 선포하며 복음을 복음답게 율법을 율법답게 하는 길이다.

호튼의 책을 읽고 나면 호튼의 다음과 같은 말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줄 것이다. 율법은 복음이 아니다. 이 차이를 자각하고 나면, 복음은 복음, 율법은 율법으로 대접할 수 있을 것이다. 율법은 율법, 복음은 복음이 되게 하자. 이제부터 호튼의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먼저 다음의 질문에 답해보라.

첫째,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둘째, 율법이란 무엇입니까?
셋째, 복음과 율법의 차이는 무엇이며, 복음과 율법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면 우리 또한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의 일원으로 살아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과 율법의 의미를 정확하게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복음의 원수로 살아가는 것 곧 성경이 말하는 '다른 복음'을 믿고 살아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까지 호튼의 여러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도움을 받은 것 중의 하나는 바로 이 '복음과 율법'의 의미였다. 그동안 호튼의 <세상의 포로된 교회>, <언약의 하나님: 언약신학 입문서>등을 통해서 복음과 율법의 의미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성경을 읽고 신앙생활을 하고 목회를 하는데 있어 중요한 전환점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이번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통해서 교회사의 모든 이단들이 사실 이 복음과 율법의 의미를 혼동한데서 비롯되었으며, 자유주의와 복음주의를 막론하고 오늘 우리 시대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만든 가장 중요한 뿌리요 원인이 '복음과 율법의 혼동'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호튼의 기존의 책들을 통해 복음과 율법의 원리를 배웠다면, 이번 호튼의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통해 복음과 율법의 실전을 배운 느낌이다. 복음과 율법은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요, 그리스도로 충만한 교회를 형성하는 데 기초다. 앞으로 호튼의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가 우리 한국 교회가 다시금 복음과 율법의 참된 의미를 깨달고 복음의 중심인 그리스도로 충만한 기독교가 되는 불씨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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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스라엘 사람(1:43-51)


  요한복음 135-5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애 초기에 제자들을 부르신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일 먼저 35절에부터 42절까지에는 세례요한의 소개로 안드레와 요한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을 기록하고 있으며, 그 다음에는 안드레의 전도를 받고 그의 형인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인 43-51에 보면, 안드레와 베드로의 전도로 빌립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또 그 다음에는 빌립의 전도로 나다나엘이라고 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제자가 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이 본문에 나오는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 나다나엘이란 사람의 이름은 이 본문에만 한 번 나오고 성경의 다른 곳에는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성경학자들은 이 나다나엘이 예수님의 12제자 중에서 바돌로매라고 하는 제자와 동 일한 인물일 것으로 추정을 합니다(10:2-4). 왜냐하면 사실상 바돌로매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의 실제적인 개인 이름이 아니고 돌로마이라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오늘 본문에서 보면 나다나엘, 즉 바돌로매가 예수님을 처음 만나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믿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건의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을 먼저 믿게 된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와서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하니까, 처음에 나다나엘은 그 말을 곧이듣지 않았습니다. 즉 빌립이 말하기를 성경에 약속되어진 메시아 즉 그리스도를 내가 만났는데, 그분은 요셉의 아들로서 나사렛 사람인 예수다.” 그렇게 말하니까, 나다나엘은 아니,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정색을 하며 반문을 합니다. 그러나 그래도 한번 와서 보라고 권하는 빌립의 말을 듣고 그럴 리가 없지하면서 따라갔던 나다나엘은 거기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그 예수님이 정말로 그리스도란 것을 믿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날부터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제자, 12사도 중에 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애초에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물었던 것은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갈릴리 지방을 천한 지역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나사렛은 그런 갈릴리 지역 중에서도 아주 작은 마을로서 그런 곳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가 나오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실상 예수님은 엄밀히 따진다면 나사렛 예수가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서 다윗 왕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대부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나사렛 예수라고 멸시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다나엘도 처음에는 예수님이 메시아이라고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가서 만나보니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라고 하는 것을 깨닫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처럼 반신반의하며 예수님께 나왔던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고 하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그 날까지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이 예수님 앞으로 나오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의 이름뿐만 아니라 그가 어떤 사람이며, 예수님께 오기 전에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까지 다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처음 보는 나다나엘을 보시고,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안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사람의 깊은 곳까지 통달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갖고 계신 것을 보여줍니다. 즉 예수님은 그 자신이 하나님으로서 나다나엘의 성품과 인격까지도 다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자기를 알아보시자 나다나엘은 깜짝 놀랍니다. “아니,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이번에는 더 놀라운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나다나엘아,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는 것도 내가 다 보았노라

여기서 나다나엘은 더욱 놀라서 자기 앞에 서있는 이 분이 정말로 메시아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은 선생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신 것을 제가 이제야 알겠습니다하고 외치게 됩니다. 이러한 나다나엘의 놀라움에 가득찬 외침,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신 것을 내가 믿습니다.”고 한 고백이야말로 성경에서 나오는 가장 위대한 신앙고백 중의 하나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왕, 즉 그리스도이십니다. 조금 전만 해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의심을 했던 나다나엘은 이처럼 예수님을 대면하자 그가 누구신지를 깨닫고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로부터 나다나엘은 그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하는 영광된 신분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나다나엘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을 보고 한마디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구약시대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구약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를 하며 온갖 죄를 저질렀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오히려 배척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자만과 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껍데기만 하나님의 백성인 거짓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땅에 가득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스라엘 땅에 와서 너무나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참된 이스라엘 사람이 왜 이리도 없는가 하는 슬픔으로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찾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예수님의 눈앞에 나타난 나다나엘을 보시자마자, 예수님은 그가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보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나다나엘이 보여준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서의 성품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무엇보다도 그것은 간사함이 그 속에 없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간사함이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참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가리켜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하셨을 때 이 간사하다는 말은 헬라어로는 돌로스(dolos)’로서, 그 원래의 뜻은 고기를 낚을 때 사용하는 미끼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러분 중에 낚시를 즐기는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낚시라는 것이 인간들 편에서는 재미있고 고상한 취미인지 몰라도, 물고기들 입장에서 보면 낚시라는 것은 미끼를 던져서 어리숙한 물고기를 유인해 낚아채는 아주 교활한 속임수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돌로스라고 하는 단어는 미끼라고 하는 뜻 외에도 교활함, 속임수, 또는 잔꾀라고 하는 의미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 이스라엘 사람은 간사함이 없어야 한다는 말은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은 거짓이나 위선, 또는 잔꾀를 부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하는 말입니다. 간사함이 없는 인격, 이것은 참 이스라엘 사람, 즉 참된 하나님 백성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시편 32:2에서 시편기자는 말하기를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는 자가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간사한 사람입니까? 여기서는 이렇게 말하고 저기서는 저렇게 말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간사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의 면전에서는 간을 내 줄 듯이 친밀하게 굴면서도 뒤로 돌아서서는 흉을 보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그런 사람은 간사한 사람으로 참 이스라엘이 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진실히 살기보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행동을 하는 사람, 그런 사람도 간사한 사람입니다. 내가 좀 손해를 볼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얄팍한 잔꾀를 부리는 사람, 그런 사람은 간사한 사람입니다. 약속을 해놓고서도 형편이 달라지면 내가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약속 어기기를 식은 죽 먹듯이 하는 사람, 그런 사람도 간사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참 이스라엘 사람이 될 수가 없고, 진정한 주님의 일군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때때로 잔꾀를 잘 부리는 사람이 유능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더라도 교회만은 세상과 달라야 하겠는데도, 교회에서도 보면 거짓말할 줄 모르는 진실한 사람보다도 잔꾀를 잘 부리는 사람이 더 인정을 받는 것을 때때로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시는 순간 그의 중심을 보시고 그가 간사함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 보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다나엘은 간사함이 없었다고 하는 것과 함께 오늘 본문에 살펴보면 나다나엘이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가졌던 또 하나의 귀중한 특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진심으로 기도하는 사람이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을 보고 빌립이 너를 만나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던 것을 내가 보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그리고 왜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자 크게 놀라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로 인정하게 됩니까? 이것은 한마디로 나다나엘이 조용한 곳에서 기도하는 사람임을 예수님께서 알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열대 지방입니다. 그래서 그처럼 더운 지방에 사는 유대인들은 흔히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의 그늘 밑에서 쉬기도 하고, 경건한 사람들은 거기서 말씀을 묵상하기도 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보고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고 하신 것은 나다나엘이 빌립의 인도를 받아 예수님께 나오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서 기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은 늘 기도하기에 힘쓰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이 알고 계셨다고 하는 의미도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나다나엘이 사람들이 보든 안 보든 한적한 곳을 골라서 늘 기도하기에 힘쓰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나다나엘을 보고 참 이스라엘이라고 인정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참 이스라엘이 될 수 있습니까? 기도하는 사람이 참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든 안 보든, 아니 오히려 골방과 같은 장소에서 홀로 하나님 앞에서 무릎 꿇는 자세로 기도하는 사람을 예수님은 오늘도 찾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나다나엘이 무화과 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신 데에는 나다나엘이 늘 기도에 힘쓰는 사람인 동시에 자나 깨나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기도하는 사람이었음을 아시고 계셨다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열왕기상 425절에 보면 솔로몬 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아래와 무화과 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는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솔로몬 왕 당시에 이스라엘 나라가 태평성대를 누렸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의 민족의 역사는 조용한 날이 없는 역사였습니다. 강대국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지정학적인 이유로 이스라엘 민족은 늘 주변 열강들의 침략을 받으며 전쟁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한때 아주 태평하고 번영하는 그런 시대가 있었는데, 그때가 바로 솔로몬 임금이 통치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솔로몬 임금의 통치 시대가 마치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 것과 같은 태평성대였음을 묘사하는 표현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아래와 무화과나무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런 태평성대는 오래 가지를 않습니다. 솔로몬 임금이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며 의지하는 동안에는 이스라엘이 번영하고 강대국이 되며 또 태평성대를 누렸지만, 솔로몬이 말기에 우상숭배를 하며 범죄하자 하나님은 솔로몬 이후에 이스라엘을 남북으로 분열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점점 더 타락하면서 국력도 약화일로의 길로 걷다가 마침내는 앗수르와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남북 왕조가 다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그리고 나서 이스라엘은 그 이후로 독립국가로 살아본 적이 없이 페르시아나 헬라, 또는 로마 제국 등 강대국의 식민지가 되어서 억압을 당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이런 역사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제 메시아가 오셔서, 이스라엘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고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아무런 전쟁이나 재앙이 없는 태평성대를 다시금 누리게 되기를 고대했습니다. 그러면서 특별히 그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은 무화과나무 아래로 가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솔로몬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편안히 지냈던 그 시절을 회상하며 그런 평화의 나라, 즉 전쟁도 없고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나오기 바로 직전에도,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고 하는 말은 나다나엘은 늘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고대하며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이 그처럼 하나님 나라를 향한 진실한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이란 것을 아시고, 그를 가리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칭찬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 가장 큰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오늘 무엇에 대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 썩어질 세상과 부패한 세상을 바라보면서 정말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그런 소원으로 기도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이야 어떻게 되어가든 여러분 육신만 편하고 여러분 가정만 복 받기를 바라십니까?

  나다나엘과 같은 참 이스라엘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깨어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보든 안 보든, 아니 오히려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골방에 들어가 죄악된 이 세상의 모습을 바라보며 말할 수 없는 탄식과 슬픔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 하나님,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속히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렇게 간구하는 사람을 가리켜 예수님은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오늘 여러분이 예수님 앞으로 나간다면 에수님은 여러분을 보시고 무어라고 하실 것 같습니까? 여러분을 보시고 너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구나. 너의 속에는 간사한 것이 없구나하고 인정해 주실 것 같습니까?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런 인정을 받을 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아직까지도 그런 인정을 받을 수 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변화가 되어야만 합니다. 모든 간사함과 거짓됨과 잔꾀를 부리는 옛 습성을 버리고 진실하고 참된 이스라엘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가리켜 간사함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구약시대의 야곱이란 인물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이 확실합니다. 본문의 50절과 51절에서 보면 나다나엘은 자기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알고 계신 사실에 무척이나 놀랐는데, 여기 대해서 예수님은 네가 이 정도로 놀라느냐?” 하시면서 네가 장차 앞으로는 하늘문이 열리고 천사들이 인자 즉 예수님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되리라는 말씀을 해 주십니다.

  이것은 구약시대 때 야곱이 형님과 아버지를 속여서 축복을 가로채고 나서 자기를 죽이려는 형 에서를 피해 도망을 가다가 벧엘의 들판에서 잠을 자던 중 꿈속에서 사닥다리 위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았던 사건을 빗대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즉 구약시대의 야곱은 사닥다리 위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았지만 이제 이 신약시대에 예수님을 믿는 참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 위로 하늘문이 열리고 천사들이 왕래하는 더 놀라운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이야말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사다리처럼 우리의 유일한 참 중보자가 되시며 그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하늘의 비밀과 영광을 보게 될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간사한 것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런 놀라운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놀라운 체험을 하며 이런 영광스러운 은혜를 받으려면 우리는 먼저 참 이스라엘 사람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야곱과 같은 옛 사람의 모습으로서는 이런 놀라운 은혜의 세계를 볼 수도 없고 맛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인 야곱에게는 두개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야곱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은 그가 태어날 때부터 갖게된 육신적인 이름으로서, 이 야곱이라고 하는 이름이 갖고 있는 뜻이 간사하다, 간교하다, 잔꾀를 부린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그 이름대로 간교한 사람이었습니다. 형님을 속여먹고 눈먼 아버지를 속여먹은 사기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야곱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여러 가지 인생의 고난을 통해서 연단을 시키시고, 마침내는 얍복 강가에서 그의 인격을 완전히 변화시키시고야 말았습니다.

  얍복 강가에서 야곱은 밤새도록 하나님과 씨름을 하다가, 환도뼈가 부러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보내드리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끝내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날로써 그의 이름이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변화된 것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자기 육신의 지혜와 잔꾀로 살아가던 야곱이 이제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진실하게 살아가는 이스라엘이라는 새 사람으로 변화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에 야곱은 하나님께 얻어맞아서 환도뼈가 부러져, 그 후 일생동안 그는 절름발이로 살게 되었지만, 그것은 영광의 상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간사한 옛 사람이 변해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새 사람이 된 표적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우리 일생에 한번은 하나님과 맞닥뜨려져야 합니다. 그래서 야곱과 같은 우리의 옛 성품이 깨어지고 간사함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거듭나야만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늘문이 열리고 예수님의 영광된 모습 위로 천사들이 왕래하는 것을 목격하는 신령한 세계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참 이스라엘 사람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참된 일군으로서 우리의 일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들 대부분은 아직도 야곱과 같이 육신적이고 간사한 성품을 계속 가진 채로 주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시고자 하는 기회에 하나님을 만나면 됩니다. 우리의 환도뼈가 부러지는 것 같은 고난을 통해서라도 우리의 간사한 옛 성품이 바뀌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반드시 축복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반드시 받아야 하는 축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건강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 꼭 받아야 할 축복은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간사한 것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라면 환도뼈가 아니라, 목뼈가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축복을 사모해야만 할 줄로 압니다.

 

  오늘 많은 기독교인들은 고난과 환난이 없는 평안함이 축복인 줄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축복을 간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받아야 할 진정한 축복은 우리의 근본적인 성품의 변화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그런 내면적 성품의 변화를 위해서, 그래서 우리가 참 이스라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어쩌면 고난은 우리가 반드시 통과하고 졸업해야 할 인생의 학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고난 없이 옛 사람의 성품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제 아무리 세상에서 많은 것을 소유하고 성취할지라도 실패한 인생입니다. 반면에 고난을 통해서든지 아니면 말씀의 연구와 기도를 통해서든지 그런 근원적인 성품의 변화가 이루어져 간사함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 된 사람은 성공한 인생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주님으로부터 나다나엘과 같은 칭찬과 인정을 받고 싶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을 보시고 보라. 이는 참이스라엘 사람이로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구나하는 인정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거짓되고 간사한 성품을 하나님께 내어놓으며, “하나님 축복해 주십시요. 이 간사한 성품이 변해서 새 이스라엘이 되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만으로 나의 의지를 삼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진실로 기도하는 참 이스라엘이 되게 해 주옵소서.” 이렇게 간절히 간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교회는 나다나엘과 같은 참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드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와 우리 성도들의 가정이 나다나엘이 하나님께 나아가 홀로 기도했던 그 무화과나무 아래와 같은 곳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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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boaskorea| 원글보기

 

 

 

 

 

빛 가운데로 행하면 예수의 피로 깨끗함을 얻는다?

 빛 안에 있는 사람 VS 어두움에 있는 사람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장 7>

 

 

 

개역개정은 요한일서 17절을 빛 가운데에 행하면, 예수의 피로 깨끗하게 해주실 것이다.”라고 번역했다. 빛 가운데에 행하는 것”을 예수의 피로 깨끗하게 씻김을 받는 것의 조건으로, 깨끗하게 되는 것을 미래의 일로 말이다. 만약 이러한 개역개정의 번역이 맞다면 두 가지 의문이 생긴다.

 

의문 하나는 예수의 피로 깨끗함을 얻는 데에 있어서 선행되는 조건이 믿음이 아니라 빛 가운데에서 행함이 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빛 가운데에서 행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요한일서 17절은 예수의 피로 깨끗함을 받는 조건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피로 깨끗함을 받은 자의 현상(모습, 행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구절이다.

 

또한 개역개정은 "깨끗하게 하다"라는 헬라어 단어 "카다리제이(kaqarizei)"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미래형으로 번역을 했지만, 헬라어 원문은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능동태 직설법 3인칭 단수"로 쓰여져 있다. 그러므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가 아니라 "깨끗하게 하고 있다"라고 번역해야 바른 것이다.

 

두 번째 의문, 빛 가운데에 행하는 것의 의미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의로우심”과 같이 행하는 것, 다시 말하여 거짓을 말하지 않고 진리를 따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요한이 말하고 있는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빛 가운데에 행한다는, 짓을 말하지 않고 진리를 따르는 것의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이며, 빛 안에 있는 것과 어두움 안에 있는 것의 의미가 무엇일까? 아래에서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어두움 안에 있는 자 vs 빛 안에 있는 자

 

1. 하나님은 누구이시며, 그를 따르는 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분 안에는 어두움이 전혀(하나도) 없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신실하고, 의로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고 그 안에 어두움이 전혀 없으시므로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도 어두움에 있지 않고 빛 안에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의로운 분이시므로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람도 신실하며, 의롭습니다. 신실하다는 것은 거짓이 없다,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의롭다는 것은 불의가 없으며 진리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빛 안에서 행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자신은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다”, “빛 안에 있다”, “구원 받았다고 소리 높여 말할지라도 거짓을 말하고, 진리를 따르지 않고 있다면 하나님 안에, 빛 안에 있는 것이아니라 어두움에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시기에 하나님 안에 있는 자들도 거짓을 말할 수 없고, 진리를 따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빛 가운데로 행한다는 것이며, 빛 안에 있는 것입니다. 빛이신 하나님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은 어두움에 있고, 어두움에 있는 자는 거짓을 말하고 진리를 따르지 않습니다.

 

 

2. 자신에게 죄가 없다 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속이고,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사람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하는 사람은 첫째는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자기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자신이 그동안 어떤 생각을 해왔으며,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서는 세상 아무도 몰라도 오직 자신은 정확하고도 확실하게 잘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한 적이 있는지 없는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압니다. 즉 하나님께 범죄했다는 것을 자신은 알고 있는데 범죄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범죄를 알고 있는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범죄했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3:23, 5:12).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했다고 말씀하시고, 우리는 하나님께 범죄한 적이 없다고 한다면 하나님과 우리 중에 한쪽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한 적이 없다는 우리 말이 맞다면 당연히 하나님은 거짓말쟁입니다. 정말 우리가 아닌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진리가 안에 없는 사람

우리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저런 실수를 하기는 했지만 고의는 아니었고, 특히나 지옥에 갈만큼, 천국에 가지 못할 만큼 죄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여도, 모든 사람이 불의한 죄인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자신이 불의한 존재라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지만 진정으로 깨닫지는 못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 사람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죄와 죄 아닌 것을 구분하는 기준입니다. 의와 불의를 구분하는 그것을 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올림픽 100미터 달리기 시합을 하기 위해 운동장에 트랙을 그어야 한다고 합시다. 트랙을 긋는데 100미터 짜리 줄자가 있다면 자기가 그은 선의 맞고 틀림을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줄자가 없다면 맞고 틀림을 알 수 없습니다. ‘진리는 줄자 같은 것입니다. 맞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죄인지 아닌지, 의인지 불의인지를 가늠하는 것을 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며,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만약 우리 안에 진리가 있다면 우리가 죄인이며, 불의한 자라는 것을 선명하게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없다면 우리가 지옥에 갈만한 불의한 자라는 것을 알기는 알아도 깨닫지를 못합니다.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신이 지옥에 갈만한 불의한 존재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 안에 진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3.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운 분이시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불의한 것을 정확하게 판단하십니다. ‘신실하다는 것은 거짓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불의를 정확하게 판단하십니다. 그리고 말씀(로고스, 예수)은 하나님의 ’ 자체이시기 때문에 말씀에서 벗어난 모든 것이 '불의'입니다거짓을 말씀하지 않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범죄한 죄인이라고 말씀하셨고(3:23, 5:12), 불의를 정확하게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기준으로 우리 모두 불의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14:33:10).

 

 

4. 어두움 안에 있는 자 vs 빛 안에 있는 자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한 죄인임을 인정치 않고, 우리가 불의한 존재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속이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고, 우리 안에 진리가 없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거짓말을 하는 신실하지 않은 자이고, 불의한 존재임을 알지 못하는 진리가 없는 자라면 하나님 안에 있지 않은 것이며, 하나님 안에 있지 않다면 빛 안에 있지 않고 어두움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한 것을 깨닫고 죄인임을 고백하고 있다면, 또한 자신이 의롭지 않으며 지옥에 갈만큼 불의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면 어두움에 있지 않고, 빛 안에 있는 것입니다. 어두움에 있지 않고, 빛 안에 있는 자들은 이미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깨끗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이미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깨끗하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미래에 혹은 다른 조건이 충족되면 깨끗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고 현재에도 계속해서 깨끗하게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는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더럽게 하는 모든 불의로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여기서 모든 불의라고 하는 것은 앞으로 있게될 것까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범죄한 죄인이라는 것과 불의한 자신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사람은 빛 안에 있기에 예수의 피로 깨끗함 가운데에 있으며, 죄 용서를 받았으며,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5. 오직 성령과 말씀으로

우리는 모두 어두움에서 벗어나 빛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가 우리 안에 임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이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했다는 것과 지옥에 갈만큼 불의한 존재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과 내가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우리 자신의 지식과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어떤 지혜로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주셔야만 가능 한 일입니다.

                     [스가랴 4:6]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요한복음 16:7,8]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또한 줄자가 없으면 맞고 틀린 것을 알 수 없듯이, 말씀이 우리 안에 진리로서 임해야만이 우리가 불의한 것인지 아닌지, 불의한 존재라면 얼마나 불의한 존재인지를 밝히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말씀을 진리로 임하게 하시는 이 일 또한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14: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이 모든 은혜를 입기 위해서 첫째는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믿는 마음으로 읽고, 듣고, 공부하며, 깨닫게 해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알고, 불의함을 깨닫는 방편은 오직 성령과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방편들을 사용하기만 하면 기계적으로 무조건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구하고 노력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지 않으시면 이 모든 노력이 소용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은혜를 입고 싶다면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이 전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옥에 갈만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옥에 보내시는 것이 전혀 불공평하지 아니하고, 당연하고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아직 자신의 신분과 처지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고,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야만 하는 의무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범죄하고 그를 대적한 자들로서 도리어 버림받아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공명정대(公明正大)한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개들에게 허락되는 부스러기 은혜를 간구하는 가난한 마음, 거지와 같은 마음,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죽을때까지 은혜를 베풀어 주지 않으시더라도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십시다.

 

 

6. 그 은혜에 합당한 감사를

자신이 하나님 앞에 범죄한 죄인임을 깨닫고 고백한 분들은 어두움에서 벗어나 빛 안에 있게 된 상태입니다. 빛 안에 있다는 것은 빛이신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의로움이 전혀 없는 불의한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면 그것은 여러분 안에 말씀이 거하므로 진리를 따르게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이 이처럼 빛 안에 거하게 되고, 진리를 따르게 된 것은 여러분의 공로와 지혜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역사하심과 그 말씀의 임하심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랑 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모든 영광과 감사를 하나님께 돌리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어두움에 있지 않고, 빛 안에 거하게 되어 하나님께 죄들을 용서 받고, 모든 불의로부터 깨끗하게 되어 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미 깨끗하게 된 분들은 하나님의 그 은혜에 합당한 감사를 더욱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를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그의 영광스런 빛 안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그 탁월하심을 전파하는 데에 더욱 열심을 내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경이로운 빛에 들어가게 하신 분의 탁월함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2:9)

 

 

 

 

 

 

 

※ 아래는 헬라어 번역 비교.

    검정색은 개역개정번역이며, 푸른색은 나의 번역.

 

 

 

요한일서 15-10

  

       5절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들어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분 안에는 어두움이 하나도 없다."

 

6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만일 우리가 (빛이신) 하나님과 함께(안에)하고 있다고 말은 하지만 어두움에 머물러 있다면 진리를 따르지 않고, 거짓말을 한다."

 

       7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러나 하나님이 빛이신 것처럼 우리가 그 빛 안에 거하고 있다면 하나님과 함께(교통)하고 있으며, 그분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깨끗케 하고 있다."

 

       8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진리가 우리 안에 없다는 것이다."

 

       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만일 우리의 그 죄들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그 죄들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로부터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

 

       10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만일 우리가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말한다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고,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없는 것이다."

 

 

 

 

 

* 이미지 출처 :

http://www.infochurch.net/board/user/view.php?board_name=%C0%CC%B9%CC%C1%F6&bbs_no=5279&julgi_name=&keyfield=bbs_title&keyfield=bbs_title¤t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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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능력과 기쁨은 하나님과의 계속적인 관계와 행함에 있다 / 프란시스 쉐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 하심을 일단 받은 후에도 우리는 매순간 주님과의 초자연적인 교제를 나누며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전류가 흐르도록 플러그가 끼워져 있는 전등 같아야 한다. 성경은 우리의 기쁨과 영적 능력이 하나님과의 계속적인 관계에 달려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만큼 주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주님께 의지하지 않는다면 플러그는 뽑히고 영적 능력과 영적 기쁨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한다. 바울이 기도 중에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 진술하는 것을 상기해 보라. 우리 안에 거하시며 삼위일체 전체의 대리자이신 성령의 교통하심의 실재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계속적인 실재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면 우리는 순간순간의 삶 속에서 그 사실에 따라 행동해야 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마리아는 수태 예고를 들었을 때,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 나는 당신의 손에 내 몸을 드립니다. 뜻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적극적 수동이었다.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갖게 하는 부분에서 그녀는 수동적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의지 안에서는 수동적이지 않았다. 이와 같은 상황이 그리스도인인 우리 각자에게도 매우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만일 내가 순간순간 자신을 그리스도의 품에 맡기면, 그는 나를 통하여 이 비참하고 손상된 세상에 그분의 열매를 맺으실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분을 의지하여 행동하지 않는다면, 나는 비신앙의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내가 믿음에 따라 행동하지도 않으며,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고 말하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나를 통해 열매를 맺게 하지도 않는다면 그것을 비신앙이라 해야 되지 않을까? 현재의 삶에서 초자연적인 분께 의지하여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는 비신앙 속에서 사는 것이다. 비신앙은 기독교를 단순한 철학으로 변질시킨다. 순간순간 당신이 음식을 먹는 데에 사용하라고 있는 은수저를 나사를 푸는 드라이버로만 사용하기 위해 공구함에 넣어두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당신이 우주에는 영적 영역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에 따르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우주에 대해 이교도보다 모르는 상태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주의 교회에서 왜 우리가 종종 무미건조함, 비현실성, 그리고 추상적인 느낌을 갖게 되는가? 우리가 믿는다고 여전히 말하는 교리가 한 때 살아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인공 모조품의 박물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비신앙은 바로 유물론자의 의자에 앉아 있는 그리스도인이다. 실존적으로 매 순간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앞에는 두 개의 의자가 있는 것이다. 주어진 순간마다 살아 있는 그리스도께 내 삶을 굴복시키든지 그렇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이 의자가 아니면 저 의자이다.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머리로 믿는 것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그 믿음에 따라 믿음으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참된 영성은 주어진 순간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가 믿는다고 말한 교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복음주의 교회는 개혁-부흥과 더불어 건설적 혁신을 이루어낼 수 있다.

 

- 프란시스 쉐퍼, 『개혁과 부흥』, pp 116-126

 

 

출처: 청교도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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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소금물에서 태어난다

아기가 자라는 엄마 뱃속의 양수는 바닷물과 같다.
소금물이 아니라면 아기는 안전하게 자랄 수 없다.
사람 몸 안에도 소금이 들어 있다.

인체내 혈액의 염분농도는 0.9%이고, 세포의 염분 농도 역시 0.9%이다.
그 0.9%의 소금이 혈액의 산성화를 막아주고 신진대사를 주도한다.

별의별 암이 다 있지만 “심장암”은 없다.
심장에는 암이 생기지 않는다.

심장은 소금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심장을 “염통(鹽桶)”이라고 불렀다.
소금통이라는 뜻이다.

사람은 음식을 안먹고도 일정기간 동안 살 수 있지만 숨을 쉬지 않거나 소금을 먹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소금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수억만 년 전부터 이땅에 존재해온 바닷물이 “생명의 고향”이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인간 생명의 고향인 “엄마의 뱃속” 역시 바닷물(양수)이다.
엄마 뱃속이 바닷물이 아니라면 아기는 자랄 수 없다.

2. 인류의 역사는 소금의 역사

* 샐러리(Salary)의 어원은 소금을 뜻하는 라틴어 ‘Sal'이다.
로마 시대에 공무원의 봉급을 소금으로 지급했는데, 이를 라틴어로 ‘Salarium' 이라고 했다.
이것이 영어의 샐러리 어원이 되었다.

* 군인(Soldior)도 봉급을 소금으로 받았다.
라틴어 ‘Slodior'는 소금으로 봉급을 받는 군인을 뜻한다.

* 샐러드(Salad)도 소금에서 나온 말이다.
채소에 소금을 뿌린 음식을 ‘Salade'라고 했다.

* 실크로드 이전에 이미 ‘Salt Road'가 있었다.
로마제국이 건설한 세계 최초의 무역로인 살라리아 가도(Via Salaria)는 바다로부터 소금을 나르는 소금길이었다.

* 히말라야 고산지대에는 지금도 소금길이 있다.
유목민들이 야크떼를 몰고 목숨을 걸고 수백km 떨어진 소금 호수에 가서 소금을 채취해 시장으로 운반했다.

* 고대 이집트에서는 시신을 소금물에 절인 뒤, 미이라를 만들었다.

3. 소금의 비극, 소금의 누명

“하루에 소금 3g을 줄이면 한해에 9만 2천명의 목숨을 살릴 수있고, 240억 달러의 예산을 절감할 수있다“

지난 1월 캘리포니아 대학교 커스틴 비빈스-도밍고 박사 연구팀의 논문의 요지이다.

어떻게 이런 무지막지한 결론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소금의 비극은 ‘염화나트륨(Nacl)'에서 시작된다.

그들이 말하는 소금은 천일염이나 죽염이 아니라, 정제염 또는 암염이다.

정제염이나 암염은 순도 99%의 염화나트륨 덩어리다.
소금을 염화나트륨으로만 섭취하면 당연히 혈압이 올라간다.

나트륨은 혈압을 올리고 칼슘과 칼륨은 혈압을 내린다.

정제염이나 암염은 염화나트륨만 있고 칼슘이나 칼륨과 같은 미네랄은 거의 없다.

그런데 천일염 쪽으로 오면 사정이 달라진다.
바닷물은 그 자체가 미네랄의 보물 창고다.

바닷물을 말린 천일염 역시 미네랄 덩어리다.
즉 천일염에는 염화나트륨만 있는게 아니라 각종 미네랄이 다양하게 함유되어 있다.

따라서 많이 섭취해도 칼슘, 칼륨, 인, 셀레늄, 망간, 아연 등의 미네랄이 작용하여 몸안에 과다하게 들어온 나트륨을 배설 시키기에 문제가 없다.

특히 한국의 천일염은 세계 최고의 미네랄 함유율을 자랑한다.

프랑스 게랑드 천일염 보다도 미네랄 함량이 3배나 더 높다.
우리나라 서해안 천일염의 연화나트륨 함량은 80-85%이고, 나머지 15-20%는 미네랄 성분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소금을 먹고 있는가?
서양사람들과 똑같은 소금을 먹고 있다.
시중의 각종 식품은 거의 대부분 정제염을 사용하고 있다.

잘 알다시피 한국인의 소금 섭취량은 세계 최고 수준.
미네랄이 결핍된 채 염화나트륨만 잔뜩 몸안에 집어 넣고 있으니 비극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염화나트륨 소금에서 ‘미네랄 소금’으로 돌아 간다면, 비극은 막을 내릴 것이고 위와 같은 끔직한 연구결과도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이다.

정제염을 쓰는 집에서도 김치만큼은 국산 천일염으로 담근다.

왜 그럴까?
정제염으로 김치를 담그면 얼마 안가서 김치가 물러 터져 버린다.

중국산 천일염을 써도 비슷한 사태가 벌어진다.
그러나 질좋은 국산 천일염 또는 죽염으로 김치를 담그면, 김치가 오래 간다.

한국 천일염은 미네랄이 풍부한 데다 알카리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소금이 신진대사를 주도한다.
사람은 바닷물(소금물)에서 태어난다.

아기가 자라는 엄마 뱃속의 양수는 바닷물과 성분이 비슷하다.
(두산백과사전)

양수의 소금농도=0.9%,
사람 핏속의 소금농도=0.9%,
세포의 소금농도=0.9%,
링거주사액 소금농도=0.9%.
즉 소금농도 0.9%는 생명의 기준이다.

만약 소금 농도가 0.9%에 미치지 못하는 양수에서 자란 아이는 뇌와 뼈, 생식 기능이 선천적으로 약한 체질로 태어나게 된다.

초등학교 4학년 교과서에서는 소금을 이렇게 가르친다.

소금이 몸에 들어오면 위액의 염산이 되어 살균작용이나 소화작용을 돕는다.

또한 소금은 피와 섞여 몸 구석구석을 돌면서 세포 속의 노페물을 새 물질로 바꾸어주어 신진대사를 촉진한다.

이밖에도 소금은 신경이나 근육의 움직임을 조절하기도 한다.

소금은 단순한 염분이 아니라 ‘생명물질’ 이라는 이야기다.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음식을 먹고 분해시켜서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것을 신진대사라고 한다.

신진대사가 멈추면 사람은 죽는다.
그 신진대사를 주도하는 것이 바로 소금이다.

만약 몸 안에 소금이 부족하여 신진대사가 원활하지 못하면 혈액이 산성화 되고, 면역력이 약해져 병들게 된다.

사람이 밥을 먹고 소화를 시킬 수 있는 것도 소금 때문이다.

소금 속의 염소 성분은 위액의 재료가 된다.
만약 소금 섭취량이 부족하면 위액의 농도가 묽어져 소화에 장애가 발생한다.

천일염이나 죽염을 먹으면 소화가 잘 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치다.

ㅡ월간 “인산의학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의 '산상수훈 강해' 머리말 中에서|
coldblooded | 조회 164 |추천 0 | 2006.02.08. 15:34

 

 

....이처럼 산상수훈에 대한 사회복음적 접근 방법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전적으로 거부하고 교회의 선언이 갖는 소위 "정통적" 측면들만의 중시하는 세 가지 잘못된 접근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오류들도 결국은 예수께서 율법적 체계가 아닌 새로운 삶을 촉구하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첫 번째 오류는 산상수훈을 율법주의와 동일시하는 복음 설교의 형태에서 발견됩니다. 이 같은 사고 유형에서는 산상수훈이란 단지 구약 율법의 재판으로서 그것을 조금 더 잘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과 갈보리에서 있은 대속의 역사에 배치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산상수훈에 대한 이 같은 오해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크나큰 무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제 2의 율법 부여자 -모세와 같은 - 로 묘사된 것은 사실이지만 비교의 요체는 대부분 대조의 영역에 있습니다. 5장 안에서만 예수께서는 여섯 번씩이나 "...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21,27,,31,33,38,48절)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그의 더 크고 독자적인 권위를 암시하며, 5장의 마지막 자체가 구원의 수단으로서 인간의 의를 내세우려는 모든 노력을 부정하는 가장 반(反) 모세적인 진술, 즉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5:48)는 말씀으로 종결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주의나 구약 율법의 재판이 아닙니다. 이것은 율법주의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어떤 노력도 정죄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 안의 믿음으로써 하나님께 다가가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행할 수 있는 새 생명을 받기 위한 길을 열기 위해서 입니다. 산상수훈을 율법주의와 동일시한다면 이는 주님이 하신 말씀의 심오한 뜻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윤리는 모세의 율법을 넘어서는데 이는 우리를 복음 앞에 무릎 꿇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산상수훈에 대한 또 하나의 거부하는 태도는 거기에 제시된 기준들이 달성 불가능하고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도 없다는 느낌에서 기인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최소한 산상수훈에서 발견되는 엄청나게 높은 기준들을 인식하고는 있으나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불가능한 기준에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 또는 그들이 그 같은 기준을 달성하도록 도우시기 위해 그들에게 성령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산상수훈을 이런 식으로 거부해 버린다면 이는 성경을 도저히 정당화될 수 없는 교만한 태도로서 접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자유주의의 오류로서, 자유주의란 자의적으로 성경의 어느 한 부분은 취하고 어느 한 부분은 버리는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에 대한 이 같은 견해나 자유주의는 성경에 자신을 전적으로 복종시키지 않습니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자유주의는 윤리(또는 그것의 한 부분)를 중시하고 복음은 거부하는데 반해 이 같은 형태의 보수주의는 복음만을 중시하고 윤리는 거부한다는 점입니다.

 

성경에 "모든 성경은 ...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라고 하였는 바 이는 산상수훈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중략)

 

아마도 산상수훈에 대한 모든 다양한 이견들을 해결하는 길은 성경을 근거로 하는 이 뉴 스코필드 성경의 이야기에 달려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 시대에 산상수훈을 연구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적어도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산상수훈은 우리에게 거듭남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산상수훈의 기준에 따라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코 산상수훈을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거나 그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거짓말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떠나서 의로워질 것을 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에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로 인간을 정죄하고 그런 다음 그를 십자가 앞으로 맹렬히 몰고 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로워질 수 있도록 우리를 그리스도께 데려가는 몽학선생이 바로 율법이라고 말합니다(갈 3:24). 대체로 외형적인 구약의 율법이 몽학선생이라고 한다면, 이 산상수훈의 경우는 더 당연히 몽학선생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산상수훈은 거듭난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순수한 의를 요구합니다.

 

둘째, 산상수훈은 다른 모든 성경 말씀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주기 때문에 오늘날도 연구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문학연구나 역사 연구에도 해당하는 사실입니다. 어떤 문서든지 그것을 집필한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서는 충실한 연구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영적인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상수훈이 상당한 정도까지 우리를 주 예수와 그의 본성에 깊이 접촉하게 해 준다는 것을 깨달음이 없이 본문에 대한 깊은 이해에 다다르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될 것입니다. 산상수훈을 주시는 주 예수는 산상수훈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단히 주님과 친밀한 접촉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산상수훈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을 받는 길을 알려 주기 때문에 우리가 연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이 산상수훈의 원칙을 따라서 행복을 찾는 것입니다. 복된 사람으로 불리고 있는 사람들은 가난한 자(오만하지 않은 자), 온유한 자(교만하지 않은 자), 긍휼히 여기는 자(잔인하지 않은 자), 화평하게 하는 자(선동하지 않는 자)등 입니다.

 

마지막으로, 산상수훈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길을 알려주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인 우리가 그것을 연구해야 합니다. 우선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지 않는 한 그를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 그것은 거듭남으로 인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그의 가족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를 기쁘시게 하는 것은 특권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음으로써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을 깨달을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고난의 목적 - 자신에 대한 내적 성찰

호라티우스 보나르

 

 

 자기 자신만큼 많은 착각과 실수를 일으키게 하는 대상도 없습니다. "모든 것들 중 가장 거짓되고 지극히 사악한 것" 마음이며, 더구나 ‘죄의 거짓됨과 부패’는 불가사의한 것으로서 찾아낼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마음의 거짓됨과 죄의 거짓됨이 결합하는 것이 자신에 대한 무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해 조금도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죄의 거짓과 부패를 찾으려는 의지조차 없습니다. 그러한 성찰이 가지고 올 결과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죄사함을 받았다는 의식으로 인하여 이러한 거리낌은 상당 부분 해소되기도 합니다. 빛으로 인해 드러난 부패의 정도가 아무리 심각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과의 단절을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확신을 가진 이상, 적어도 우리는 최악의 상황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것을 피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과 함께라면 어떤 상황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뿌린 피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 번 다시 진노하실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따라서 죄 사함 받은 자의 복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자라면, 적어도 그의 영은 ‘조금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해 아무 것도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거리낌이 없으며 솔직하고 정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한 내적 성찰은 여전히 고통스러운 작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한 그 일을 뒤로 미루려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충격과 수치를 안겨 줄 수많은 것들을 빛으로 드러나게 할지도 모릅니다. 비록 우리를 정죄에 이르게 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러한 내적 성찰은 여전히 우리에게 막강한 죄의 영향력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경고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우리에게 붙어 있는 악에 대해 성찰하기를 주저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자신에게 이러한 악이 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 잘 모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도 매우 피상적으로만 인식하고 있으며, 영과 육의 갈등에 대해서도 생각처럼 맹렬하거나 심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수많은 죄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났을 뿐 아니라 남아 있는 죄의 세력에서도 적절한 방식으로 신속하게 벗어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내면에 잠복해 있는 죄의 깊이에 대해서도 측량해 본 적이 없으며, 자신이 얼마나 가증한 자인지를 밝히려는 시도조차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단지 천국을 향하여 순탄한 여정을 하는 가운데서 이따금씩 ‘우리의 여정이 왜 옛 성도들과 다를까?’라는 의구심을 가질 뿐입니다.

 

 또한 우리는 자신의 부패성을 상당 부분 극복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만약 죽은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우리를 기만하기 위하여 죽은 척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욕망은 줄어들었고, 우리의 성품은 훨씬 나아졌으며, 우리의 영혼은 전보다 평온하고 차분해졌고, 우리의 요새는 든든히 서 있으며, 우리는 ‘결코 요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또한 우리는 어느 정도 자아와 죄를 극복하고 승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는 소경입니다. 자신에게 완전히 속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를 찾아온 시련은 마치 먹구름과 같이 우리를 휩쓸고, 우박처럼 휘몰아쳐서 우리를 좌절과 실의에 빠뜨렸습니다. 그러자 마치 외부의 소란에 반응이라도 하듯이 옛사람이 다시 살아나 더욱 사나운 기질을 분출하였습니다.

 

 우리는 마치 하늘의 사방 바람이 풀려나 우리의 깊은 내면에 사정없이 휘몰아치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요새와 같은 마음에는 불신이 생기고, 영혼 깊은 곳에서는 도처에서 반역이 고개를 들고, 죽은 것처럼 보였던 정욕이 활개를 칩니다.

 

 우리는 이처럼 놀라운 상황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실로 우리는 하나님이 그렇게 허락하실 때까지 죄의 힘이나 마음속에 있는 악에 대해 무지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방식입니다. 그분은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들을 광야로 몰아내셨습니다.

 

 너는 주 네 하나님께서 이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너를 인도하신 그 모든 길을 기억할지니 이것은 그분께서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또 네가 그분의 명령을 지키려 하는지 그렇지 아니한지 알고자 하심이라.”(신 8:2)

 

 하나님은 광야의 시련을 통해 그들을 시험하셨고, 이 시험을 통해 그들이 가진 많은 허물이 드러났습니다. 이전에는 알지 못하였던 숨은 죄가 수없이 드러난 것입니다. 시련이 악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시련은 단지 겨울잠을 자고 있던 뱀처럼 인식하지도 느끼지도 못하였던 존재를 노출시켰을 뿐입니다.

 

 계속해서 마음의 깊은 샘이 터지고, 지옥과 같이 검고 더러운 온갖 것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사막의 바람 가운데서 이집트의 풍성함을 떠올릴 때 그들에게 반역, 불신, 원망, 무신론, 우상 숭배, 고집, 자만심, 쾌락 추구와 같은 것들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시험을 받았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내면에 숨어 있는 악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를 연단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에 채찍질을 하시면 우리는 곧바로 반기를 듭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육, 옛사람이 큰 상처를 받고 즉시 살아나 이전의 힘을 발휘합니다. 자고 있을 때는 몰랐지만, 그것이 깨어 일어나자 우리는 여전히 살아 있는 그 힘에 전율하게 됩니다.

 

 바다가 요동하는 한, 그 물이 진흙과 오물을 늘 솟구쳐 내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사 57:20). 바다가 잔잔할 때에는 모든 것이 맑고 깨끗하며 청명하고, 푸른 물결만 넘실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면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소용돌이가 치면서 모든 것이 돌변합니다.

 

 성도의 삶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련과 환난이 폭풍처럼 몰아치면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악이 살아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전에 인식하지 못했던 죄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온갖 악을 쏟아 낼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완악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자제력을 잃고 무신론적인 불평과 원망을 쏟아 내면서 그분의 지혜와 사랑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드러냅니다. 그렇게도 분명한 형태로 매 순간 나타났건만 “사랑과 지혜의 하나님이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다루시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하였던 것입니다.

 

 불신과 의혹으로 가득 찬 우리는 그분의 뜻을 좇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토록 심한 징계와 고통을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마치 얼마 동안 하나님에 대해 악한 생각만 할 뿐 좋은 생각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다가 이윽고 평정이 찾아오고 자신의 반역에 대해 수치심과 두려움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근원을 알 수 없는 악의 깊이에 대해 배웁니다. 그리 한편으로는 놀랍고도 불가사의한 우리의 죄성에 대해,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한량없으신 은혜에 대해 더욱 깊은 통찰력을 얻습니다. 또한 보혈의 샘을 더욱 귀히 여기며 다시 한 번 보호하심을 얻기 위해 그분의 의에 호소하게 됩니다.

 

 옛 성도들이 시험을 받을 때 일반적인 죄 외에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던 죄가 드러난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노아가 평생 경건하고 절제된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사치스럽고 관능적이며 향락적인 세계에 홀로 남아 그들의 음란하고도 퇴폐적인 삶을 정죄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유혹에 빠질 수 있는 환경에 처하게 됩니다. 바로 술에 취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 역시 용기 있는 신앙의 사람이지만 이집트와 그랄에서 그의 신앙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으며, 두려움으로 인하여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롯은 무법으로 가득한 음란한 소돔에 살면서 그들의 가증함으로 인해 의로운 심령에 큰 상처를 받았으나 소돔의 멸망에서 벗어나자마자 그들과 마찬가지로 술과 욕정에 빠져 들었습니다.

 

 욥은 인내의 사람이었지만 고난을 당할 때에 조급함을 견디지 못하였으며, 모세는 지면에서 가장 온유한 자였으나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자기 입술로 분별없이’ 말하고 말았습니다(시 106:33).

 

 다윗은 이스라엘에서 여호와의 전쟁을 가장 용감하게 수행한 사람 중 한 명으로서, 물맷돌 하나로 골리앗과 맞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사울을 피해 가들의 아기스 왕을 찾아갔을 때 그의 용기는 사라지고 대적을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미친 척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왕들 앞에서 두려움 없이 심판을 선포하였으며, 하늘을 닫고 여호와의 칼을 휘둘렀으며, 혼자서 수만 명의 군사와 맞선 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한 여인의 위협을 두려워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기를 구하였습니다. 에스겔은 경건함과 순종으로 빛나는 성품을 지녔지만,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외로 불순종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따르는 마음이 특심하였으나 나중에는 그분을 정면으로 부인했습니다. 요한은 온유와 사랑의 면에서 주님과 가장 닮은 성품을 지녔으나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사마리아를 태워 버리자고 구하기도 하였습니다.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시험을 통해 드러난 인간, 특별히 성도의 마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존 베리지(John Berridge)는 자신에 대해 “오 마음이여 마음이여, 너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어리석고 불합리한 덩어리, 세상에서 가장 헛되고 간사하며 악하고 어리석은 것이 바로 너로구나”라고 말했습니다.

 

 영혼의 깊은 곳을 휘저으면 깊이 숨은 악과 이기심, 자만심과 못된 성품과 세속적인 것들이 얼마나 많이 쏟아집니까?

 

 욥이 얼마나 오랫동안 하나님에 대한 순전함과 확신을 견지하면서 인내하였습니까? 그는 계속되는 고통과 시련으로 지쳤지만 절망과 눈물 가운데서도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 시련이 그의 자아의 내면 깊은 곳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끔직한 질병이 그를 거름 더미에 앉히고, 친구들이 그를 조소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몰아세우자, 그의 신앙과 인내는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존재 깊은 곳이 침략을 당하여 시험대 위에 드러나자, 그의 조급함과 불신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날카로운 화살이 그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을 관통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하나님은 그를 돌아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병상에까지 이르러야 했으며, 그 실상이 낱낱이 빛으로 드러나야 했던 것입니다.

 

 성도의 마음에서 드러난 모든 죄악 가운데 가장 악하고도 흔한 죄가 하나님에 대한 완악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사실 믿지 않던 시절에 우리의 영혼은 이러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모두 악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강력한 변화의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즉, 그분은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선하게 대하셨는지를 보여 주심으로써 그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신 것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사랑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지금까지의 불신앙을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다시는 하나님에 대해 악한 생각을 품지 않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분께서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분을 신뢰할 것이요.” 우리는 어떠한 고난도 우리로 하여금 그분께로 한 걸음 더 다가서게 할 뿐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징계가 시작되자마자 즉시 우리의 옛 생각이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다루시는지 궁금해 하면서 그분의 사랑과 신실하심에 대해 의심합니다. 또한 그분의 은혜를 붙들고 있는 손이 느슨해지고 때로는 완전히 놓아 버린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마치 시들어 버린 박 넝쿨을 들고 있는 요나와 같습니다. 죽기까지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앞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가 처음 믿을 때, 그분의 은혜로우신 손길로부터 죄 사람을 받을 때의 그 사랑의 하나님이 아닌 것 같습니다.

 

 결국 우리의 마음은 배신의 의도를 드러냅니다! 아무 조건 없이 하나님을 섬기려는 의도가 없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우리를 타이르시면서 “네가 분노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냐?”라고 물으십니다(요나 4:9).

 이 질문이 우리의 입을 영원히 닫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동에서 서가 먼 것처럼 여러분의 죄를 던져 버리셨는데도 어떻게 화를 내거나 낙담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 악한 세상과 앞으로 다가올 진노에서 구원을 받고, 예수님과 함께 구원의 반석 아래 숨어 있으면서도 화를 냅니까? 여러분은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왕국을 영원한 상속으로 받았는데도 화를 냅니까? 밤이 깊고 새 날이 가까워 멀리 동녘 하늘에 노을이 지고 샛별이 여명을 밝힐 준비를 하는데도 어떻게 화를 낼 수 있습니까?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 / 호라티우스 보나르(지평서원)
고난의 목적-자신에 대한 내적 성찰(99~108p에서 발췌)    


'대체신학'이란 용어 사용은 정당한가? | 이필찬 교수의 신학 일기
이필찬 | 조회 99 |추천 1 | 2013.05.14. 17:31 http://cafe.daum.net/pcleeschool/4bCZ/363

 

인트레이터는 9장에서 최초로 ‘대체 신학’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대체신학이란 말 그대로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이 ‘대체 신학’에 대해서 “만일 교회가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 편에 선다면, ‘대체신학’은 근절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120쪽). 그러나 대체 신학은 근절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대체신학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 신학이란 용어는 혈통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설정한 용어일 뿐이다. 이것은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자신들이 주장하는 천년설이 없다 하여 무천년설이라고 말한 것과 동일한 패턴이다. 사실 무천년설은 정확한 말이 아니다. 무천년설이라는 신학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천년설이란 말의 뜻은 천년왕국이 없다는 뜻인데 소위 무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천년왕국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주장하는 그 천년왕국이 없을 뿐이다. 무천년설은 지금 초림과 재림 사이의 이시대가 천년 왕국 시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무천년설이라는 용어보다는 ‘현천년설’(present millenium)이란 용어가 정확하다. 


이러한 패턴이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한다고 하여 대체 신학이라고 주장하는 경우에도 발생한다. 사실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하는 측면은 있다. 그러나 인트레이터가 주장하는 방식의 대체가 아니다. 인트레이터가 대체라고 할 때에 그것은 구약과 신약과의 관계에 불연속성만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둘 사이에 그러한 불연속성이 존재한다. 신약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이스라엘이 경험할 수 없는 탁월한 시대를 경험한다. 이러한 면에서 세례 요한은 자신을 신부의 친구라고 하고 예수님과 신약의 교회 공동체를 신랑과 신부로 비유하면서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요 3:29)고 말하면서 마침내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는 멋진 말을 남기고 있다. 이것은 신약의 교회와 구약의 이스라엘 사이에 불연속적인 측면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와 이스라엘 사이에 연속성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과 교회와의 관계는 약속과 성취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약의 여느 약속과 신약의 성취와의 관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연속의 중간에 바로 예수님이 계신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오셨다고 하면서 끝내는 12사도를 세우셔서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작업을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 자신이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을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신다. 예수님을 통해 구약의 약속들이 신약에서 재해석되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신약 성경 저자들은 문맥에 따라 구약과 신약 사이에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에에 연속성이 강조되기도 하지만 또한 불연속성이 강조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 둘 사이에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이 모두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대체 신학’이란 적절한 말이 아니다.

 

 

출처: 이필찬교수의 성경 연구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하나님 믿음’과 ‘예수 믿음’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예수 없는 기독교 주장하는 ‘신 중심의 신학’ 주의해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가? 예수를 믿는 사람인가? 일반적으로 교회에서는 이 두 ‘믿음’이 서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고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 두 ‘믿음’은 다를 수도 있고, 같을 수도 있다.

 

대부분 현대의 신학계에서는 이 두 믿음을 구별하는 것이 일반화되고 있다. 종교다원주의 사상의 도입으로 말미암아 이 두 ‘믿음’은 언제부터인가 한 믿음이 아닌 두 개의 구별된 믿음 개념이 되어버린 것이다. 즉 ‘예수 믿음’과 ‘하나님 믿음’을 구분해서 사용해야 한다.

 

‘하나님 믿음’에는 ‘예수 믿음’이 내포되었다. 그러나 ‘하나님 믿음’을 강조하는 종교다원주의 진영에서 ‘예수 믿음’이 아닌 ‘절대자 하나님 믿음’ 만을 강조하게 되어 부득이 분별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의 이면에는 현대의 기독교 신학에서 ‘예수 없는 기독교’의 시대가 시작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즉 신 중심의 신학(God-centered Theology)에서는 예수 없는 기독교마저도 가능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 믿음’이란 절대자의 은혜, 절대적인 사랑과 무한한 은혜가 조건 없이 수여됨이 강조되며, ‘오직 믿음으로’(sola fide)가 강하게 주장되면서 몰입과 집중이 강조된다. 반면에 ‘예수 믿음’은 믿는 자의 몰입과 집중이 아닌, 믿음의 대상에 대한 명료화를 강조한다. 믿음으로 믿음의 대상인 예수의 인격과 실체를 더욱 명확하게 알아 가는 은혜를 받는다. 따라서 ‘오직 믿음으로’(sola fide)가 강하게 주장됨은 구주 예수를 더욱 붙들도록 훈련한다.

 

전자, 즉 ‘하나님 믿음’은 믿는 자의 몰입과 집중으로 흐름이 강조되고 후자, 즉 ‘예수 믿음’은 믿는 자에게 믿음의 대상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지식이 강조된다. 전자의 믿음은 모든 종교에서 가능하기 때문에 종교다원주의가 가능하고, 후자의 경우 믿음의 대상은 ‘오직 예수’이기 때문에 종교다원주의는 허용될 수 없다.

두 믿음은 차이가 없다고, 즉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Christ-Centered Theology)과 신 중심의 신학(God-centered Theology)에는 차이가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신 중심 신학에서는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과 현격한 구별을 확정짓고 말았다. 때문에 우리는 더욱 더 ‘하나님 믿음’과 ‘예수 믿음’을 구분해서 사용해야 한다.

 

두 구별된 믿음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의 목회자와 성도들이라면 공히 구별된 이 두 ‘믿음’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교회의 지도자라면 자신이 말하고 있는 믿음이 ‘하나님 믿음’인지, ‘예수 믿음’인지를 구별해서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또한 교회의 지체들 역시 목사가 말하는 믿음이 하나님 믿음인지, 예수 믿음인지를 구별할 수 있어야 비로소 바른 성도의 교제를 이룰 수 있다.

 

교회는 오로지 하나의 믿음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두 가지 믿음이 한 교회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 두 가지 서로 다른 믿음은 교회의 통일성을 해치기 때문이다. 한 교회에서는 오직 하나의 믿음만이 고백될 뿐이다.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머리이신 ‘구주 예수 믿음’의 체계를 더욱 확고히 해야 한다. ‘오직 믿음으로’를 외치는 것에서 ‘오직 예수 믿음으로’를 외쳐야 한다. 교회는 예수의 십자가와 그 구속의 제사로 말미암은 죄사함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었으며, 예수의 중보 없이는 그 누구도 아버지 하나님께로 나아갈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행 4:12).

 

구주의 중보 사역은 영원한 사역이 되어 구원받은 백성에게 영원한 찬양을 받는다. ‘할렐루야’로 영원한 찬양을 드리는 백성이라면 자신이 드리는 영원한 찬양의 대상을 바르게 아는 것이야말로 믿음의 필수 사항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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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인간론  

                                                               - 박일민(칼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사람은 누구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또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좋은 사람을 만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매우 적다. 왜 우리는 기대와 현실에는 이처럼 많은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죄가 사람의 본성과 운명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과 관련하여서, 죄와 죄의 해결 문제에 최대의 관심을 보인다. 이제 성경의 최대 관심사인 죄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죄의 개념
죄는 특정한 사람들만의 관심거리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죄에 대한 관심사가 있다. 그러나 동일한 사안을 두고 어떤 사람은 심각한 죄라고 강력하게 비난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죄가 아니라고 태연해 하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는 누가 보기에도 분명한 죄를 범하고도 태연해 하거나, 더 큰 악을 막기 위해 부득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하면서 죄를 정당화하려는 경우까지도 있다. 각자의 처한 상황이나 이해 관계에 따라서 다양하게 죄를 이해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결과다. 그러나 죄에 대한 성경의 기준은 단 하나다. 그 기준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내용이 고려된다.  
  
죄는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다. 성경은 죄를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죄로 여겨지지 않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로 간주되는 일이 많다. 그래서 시인은 고백하기를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시 51:4)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흔히 상대적인 관점에서만 죄를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들이 죄"라고 한다(롬 14:23).
  
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위반이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생각이나 하시는 일은 다 선하다. 죄는 이러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르지 않거나, 하나님의 뜻의 표현인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그래서 죄는 불법 또는 반역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죄는 도덕적인 것이다. 죄는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재난이나 육체의 질병과 다르다. 자연적인 재난이나 육체적인 질병에는 의지가 개입되지 않는다. 그러나 죄는 의지와 연관이 되어 있다. 넓게 보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죄의 악한 영향을 입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무의식적이고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들에는 죄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거센 비바람에 집이 무너지거나, 어둠 속에서 돌에 걸려 넘어져 무릎에 상처가 난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고의적인 부실공사로 집이 무너지는 것이나, 고의로 상대방을 밀어 뜨려 다치게 하는 것은 죄이다.
  
죄는 의지와 관련되어 있기에 책임을 수반한다. 의지에 따른 행동의 결과는 책임을 면할 수가 없다. 사업을 게을리 하면 부도의 책임져야 한다. 공부를 게을리 하면 낙제를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울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라도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 죄가 져야 할 책임은 죽음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 6:23) 여기서 죄로 말미암은 사망이란 육체적인 사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망에는 세 가지의 의미가 있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육체적인 사망,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이 두절되는 영적인 사망,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내어 쫓겨나 지옥의 고통 속에서 슬피울며 이를 가는 영원한 사망이 그것이다. 죄의 책임으로서의 사망은 이 세가지 사망을 모두 포함한다. 사망 가운데 있는 사람은 생명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그러기에 다만 죄만을 생각한다. 죄에로만 더욱 깊어진다.


죄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성경은 사람이 속으로 품은 생각까지도 죄로 지적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죄를 범한 것으로 여긴다(마 5:28). 겉으로 형제를 해하는 자만이 아니라,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한다(마 5:22). 마음으로 악한 생각을 품었지만, 실제 행동에 옮기지 않았다고 하여서 죄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악한 행동을 하기 이전의 동기부터 죄로 여겨진다. 또 아무리 선해 보이는 업적을 이루었거나 그 동기가 선했다고 하더라도, 그 목적이 잘못되어 있으면 역시 죄로 취급한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사람이 가진 악한 성향마저도 죄로 여긴다. 사도 바울께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 5:24)고 했다. 이 말씀 속에는 사람의 감정과 육체의 기질도 죄로 취급되어진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죄는 중간자를 허용하지 않는다. 죄이면서 동시에 죄가 아닌 것, 또한 죄도 선도 아닌 중간적인 것은 있을 수 없다. 죄이면 죄이고, 죄가 아니면 선이다. 이것은 마치 천국과 지옥 사이에 중립 지역이 없는 것과 같다. 죄인이 가야 할 곳은 오직 지옥이다. 의인이 가는 곳은 천국뿐이다. 또 다른 장소는 없다. 또 빛과 어두움 사이에 중간자가 있을 수 없는 것과도 같다. 빛이 없는 것이 어두움이다. 빛이 있으면 어두움은 사라지고 만다.
  
2. 죄의 종류
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죄를 종류별로 나누어 보는 것이 좋다. 죄는 먼저 원죄와 자범죄(본죄)로 나누어진다.
  
1) 원죄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12)고 했다. 사람은 모두가 죄인이라는 말이다. 이는 모두가 실제로 경험을 통해서 확인하고 있는 바다. 왜 한 사람 예외 없이 모두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사람들에게 본성적으로 죄의 쓴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쓴뿌리를 원죄라고 부른다. 이 죄를 원죄라고 부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죄는 우리들 각자가 범한 죄가 아니라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범한 죄이기 때문이다. 아담은 인류의 조상이요, 대표자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죄는 온 인류에게 악영향을 미쳐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만든다. 둘째, 이 죄는 우리가 나기 전부터 선천적으로 가진 죄이기 때문이다. 원죄는 후천적으로 얻어지는 죄가 아니다. 셋째, 모든 자범죄의 원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2) 자범죄
성경에서 각 개인이 실제적으로 범한 자범죄와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는 죄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죄인 줄 알면서도 범한 죄가 있다(知識罪). 이 죄는 죄인 줄 모르고 범한 죄보다 죄책이 훨씬 더 가중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주인의 뜻을 알고도…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눅 12:47∼ 48)고 했다.
  
죄인 것을 알지 못했기에 범한 죄가 있다(無識罪). 그러나 죄인 것을 몰랐다고 해서 죄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모르고 행했다 하더라도 죄는 죄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는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 2:12)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몰랐다는 핑계가 소용없음을 깨닫고, 무엇이 죄인지를 알기 위해서 힘써야 한다.
  
사람이 실수하거나 연약해서 범한 죄가 있다(過失罪, 軟弱罪). 죄인 것을 알면서도 연약하고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범한 죄이다. 연약죄도 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하고 담대하기를 힘써야 한다. 믿음의 장성한 분량은 연약죄를 얼마든지 감소시킬 수 있다.
  
죄인 것을 알면서도 고의로 범하는 죄가 있다(故犯罪). "무릇 짐짓 무엇을 행하면 여호와를 훼방하는 자니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민 15:30)고 한 말씀 중에서, 짐짓 범한 죄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 죄는 고범죄라고 불려진다. 고범죄는 연약죄에 비해서 죄책이 훨씬 더 가중된다. 사도 바울께서는 이러한 죄를 범한 사람은 그 죄가 드러날 때, 먼저 심판에 들어간다고 했다(딤전 5:24). 그러므로 다윗 임금은 고범죄를 범치 않음으로써, 큰 죄과에서 벗어나지기를 간절히 기도했다(시 19:1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사함을 위한 속죄제물이 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용서함을 받는다. 그 용서에는 예외가 없다. 무식죄만 아니라 지식죄도 용서를 받는다. 연약죄만 아니라 고범죄도 용서를 받는다. 제아무리 주홍 같은 죄라도 다 양털같이 사함을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무리 막중한 죄라도 동에서 서가 먼 것처럼 기억도 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성경에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다고 하는 말씀이 있다. 그래서 요한 사도께서는 그러한 죄를 범한 자를 위해서는 기도할 필요도 없다고 한다. 그러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란 과연 무엇인가?
  
3) 용서받지 못할 죄(不可赦罪)
성경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를 말씀하고 있는 곳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2)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보임이라"(히 6:4∼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한 자를 소멸할 불만 있으리라"(히 10:26∼27)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한 것을 보거든 구하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요일 5:16)
  
이 구절들에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성령훼방죄, 다시 타락한 죄, 짐짓 범한 죄, 사망에 이르는 죄 등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표현들을 잘 비교해 보면 무엇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지가 밝혀진다.
  
"한 번 비췸을 얻고 …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라는 표현과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라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전혀 기독교 밖에 있는 자들의 죄가 아니다. 상당한 체험과 지식을 가진 자들이 범하는 죄이기 때문이다. 또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는 표현과 "성령을 거역하면"이라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성령의 역사와 관련이 되어 있다. 또 "짐짓 죄를 범한 즉"이라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고의적인 죄이다. 그리고 "구하라 하지 않노라"하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회개와 무관한 죄이다. 따라서 용서받지 못할 죄란, 실상은 구원을 받지 못했으면서도 성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인 줄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그 역사를 방해하면서,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죄라고 할 수가 있다.
  
대부분의 경건한 성도들에게는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상당히 심각하다고 여겨지는 죄를 범하고 나면, 이것이 바로 혹시 용서받지 못할 죄가 아닌가 하여서 고민을 한다. 경건의 성숙도가 더한 사람일수록 작은 죄에도 불구하고 그 고민은 더 심하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용서받아지지 못할 죄가 없다. 그러므로 죄가 생각나거든 고민하지 말고 즉시 회개를 해야 한다. 용서받지 못할 죄는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함부로 어떤 특정한 행위를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정죄해서도 안 된다. 우리의 성급한 생각 때문에 죄인을 회개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방해하려는 것은 큰 잘못이다. 주님을 맹세코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에게도 하나님께서는 회개의 기회를 허락하셨다. 뿐만 아니라 회개한 베드로는 범죄하기 이전보다 더 신중하고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졌다.
  
3. 죄의 판단기준과 율법
성경은 죄를 불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법이 없으면 불법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죄도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설명은 죄를 가능하게 하는 법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1) 율법의 개념
나라들마다 법을 가지고 있다. 날이 갈수록 그 법은 더 많아지고 있다. 또 국제간에도 법이 생겨난다. 그런데 법은 그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의 공통된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강제력을 부여하여서 그 의지를 반드시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삼고 있다. 하나님의 법도 이와 같다.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반드시 그 의지가 반영되도록 요구한다. 따라서 율법의 요구에 대한 불순종은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불순종이 된다. 이 불순종이 바로 죄다. 성경은 빈번하게 죄를 불법, 법에 어긋남, 빗나감 등으로 표현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2) 율법의 종류
하나님의 율법에는 문서의 형태로 기록되지 않은 불문법(不文法)과 문서의 형태로 기록되어진 성문법(成文法)이 있다.
  
불문법에는 자연법과 도덕법이 있다. 자연법이란 자연계나 사람의 본성 속에 주어져 있는 자연의 법칙을 말한다.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은 기쁨의 단을 거둔다. 좀더 졸고 자자고 하는 사람에게는 빈궁이 찾아든다. 열심히 연구하고 지능을 개발한 사람은 많은 지식을 깨닫게 된다. 이 모두가 자연법에 해당된다. 도덕법이란 사람의 양심에 새겨진 법을 가르킨다. 사람의 양심에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잘 반영되어 있다. 자연이나 양심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은 죄가 된다.
  
성문법은 문서, 즉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법을 가리킨다. 성경은 그 전체가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율법 형식을 가진 부분만을 제한해서 본다면, 하나님의 법은 세 가지로 구분이 되어진다. 기본법과 의식법과 시민법이다. 기본법은 십계명을 가리킨다. 십계명은 모든 사람들에게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이 적용되는 하나님의 법이다. 십계명은 그 공포나 보관 방법이 다른 법들과는 달리 매우 독특했다. 그래서 황금률이라고도 부르게 된다. 우리는 십계명을 대할 때, 단지 문자적으로만 대할 것이 아니라 최소한 다음 몇 가지 원리들에 더 유의를 해야 한다.
  
순서의 원리: 먼저 주신 계명은 나중에 주신 계명보다 우선해서 지켜져야 한다. 만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지만, 이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는 일에 장애가 되는 일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일은 당연히 없어야 한다. 그러나 죄악된 세상에서는 가끔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이때 고려되는 것이 순서의 원리이다.
  
대표의 원리: 십계명은 문자대로 지켜야 한다. 그러나 그 문자 안에는 대표의 원리가 들어 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아버지와 어머니만을 공경하라는 말이 아니다. 부모라는 말에는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삼촌, 고모, 이모 등 웃어른을 대표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도 살인의 결과만 금한 것이 아니다. 살인 계획이나 분노, 미움, 모욕 등의 감정, 그리고 살인의 수단이나 과정까지 금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칭의 원리: 십계명은 그 문자적인 내용과 대칭 되는 의미까지를 고려해서 지켜야 한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은 안식일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엿새 동안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에는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라는 의미가 함께 들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네 이웃을 해하지 말라는 계명에도 부정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대칭적 의미인 네 이웃을 내몸 같이 사랑하라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다. 그러므로 살인이나 거짓 증거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거나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도 죄가 된다.
  
성문법에는 십계명 이외에도 의식법이 있다. 의식법은 제사의 종류, 절차, 재료, 방식, 출애굽 당시의 진행 방식, 위치, 역할, 할례와 유월절 의식, 절기를 지키는 시기나 절차 등에 관한 법이다. 이 모든 의식법들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다. 그러므로 의식법을 지키지 않으면 죄가 된다. 의식법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말미암는 사건들을 예표한다. 따라서 의식법은 실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가 되어졌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금의 우리는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이 법을 지키고 있다(히 8:6∼7).
  
시민법은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회 생활에서 지켜야 했던 법, 즉 재산의 분배나 가정 생활이나 범죄의 형량, 또는 병든 자의 격리와 회복자의 수용 절차 등에 관한 법이다. 시민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 법에도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 법의 위반도 역시 죄가 된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이 다른 형편에까지 시민법을 문자 그대로 적용시킬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따라서 그 원리만을 살리는 것으로도 족할 것이다.
  
3) 율법의 기능과 역할
율법은 은혜 아래 있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 종교 개혁자들 이후로 다음 세 가지 의미가 강조되고 있다.
  
첫째,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보여준다.
율법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또 어떻게 그것을 이루어 가시는지 하는 것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기 원하면, 그리고 하나님의 솜씨인 피조물들 또는 하나님이 일하신 흔적인 역사를 바로 알기 원하면, 율법을 깊이 연구해야 한다.
  
둘째,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준다.
율법은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된다. 그리고 죄의 결과가 죽음임을 말해 준다. 따라서 율법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해준다. 또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의 어리석음도 보여준다. 동시에 율법은 무엇이 우리의 살 길인지를 찾게 해준다. 그래서 성경은 율법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인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부른다(갈 3:24).
  

셋째, 율법은 구원받는 자의 삶의 표준이 되어 준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은 이제 사나 죽으나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인가. 율법은 바로 그 방법을 제시해 준다. 그러므로 율법은 은혜를 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은혜의 완성이 된다.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이제는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자원하여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여서, 율법과 상관이 없이 우리의 마음대로 살아도 무방하다고 하는 생각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상한 심령을 찾으신다. 상한 심령이 되기 위해서는 죄를 알아야 한다. 죄를 알기 위해서는 율법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 앎은 단순히 지식적인 이해나 암기가 아니다. 가슴을 찢는 앎이다. 우리에게는 늘 다윗과 같은 기도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하나님이여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하나님은 찢어진 가슴을 싸 메시고, 애통하는 마음을 복되게 여겨서 위로와 평안의 복을 주시는 분이시다(마 5:4).  

 

출처: 개혁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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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열매 맺는 가지에도 타락의 잔재가 있는가? / 토마스 굿윈

 

 

1) 칭의의 은혜를 분명히 알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부패한 습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비록 육신을 입고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성령을 따라 행하는 그들에게는 결코 정죄가 없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은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동시에 이 놀라운 은혜를 찬양하게 만드는 것이다. 처음에 회심하여 모든 죄짐을 그리스도에게 내놓을 때 임하는 용서는 물론 그 후에 다시 타락하여 넘어질 때마다 일으켜 세우고 새롭게 회복시키시는 무한한 은혜를 찬양하게 만드는 것이다. 날마다 빚진 삶을 사는 우리가 언제나 손을 내밀어 용서하시는 은혜와 사랑, 육신을 입고 있는 한 영원히 넘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를 향해 끝없이 베푸시는 그 은혜와 한없는 사랑을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 견인의 은혜와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기 위하여이다.

우리의 견인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 있다. 벧전1:5은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으로 철통같은 보호하심을 받는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이렇게 강력한 보호막이 필요한 것은 곁길로 빠질 수 있는 중대하고도 분명한 위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위험에 빠지게 하는 것이 바로 ‘타락의 잔재’이다. 그 타락의 잔재가 아직도 우리의 영과 싸워 우리를 넘어 뜨리려고 기를 쓰고 달려드는 것이다. 우리의 행위가 완전하지 않고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그분의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무리 자주 좌절하고 넘어질지라도 여전히 그들 안에는 ‘하나님의 씨’(요일3:9)가 거한다. 그것이 복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3) 더욱 영광스럽고도 진정한 성도의 승리를 위하여이다.

만일 우리가 회심하는 순간에 즉시 모든 죄가 제거된다면, 마지막 날에 마귀도 크게 당황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승리도 그처럼 극적이거나 영광스럽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상에 존재하는 그분의 교회를 세워 나가실 때 그것을 대적하는 외부의 세력이 훨씬 더 크고 집요하더라도 교회를 굳게 세우시고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시는 것같이’(시110:2), 동일하게 신자들의 마음을 다스리신다. 비록 그들 안에서 은혜는 희미한 불빛처럼 흔적만 남아 있는 반면 부패성은 그것을 가득히 둘러싸고 있는 연기와 습기 같을지라도, 세찬 비바람 속에서도 소켓 속의 전등처럼 은혜가 마침내 환한 빛을 비추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승리이다.

  4) 성도를 거룩하고도 겸손하게 만드시기 위하여이다.

하나님께서는 남아 있는 부패성을 통해 더욱 큰 은혜를 주시고 마귀를 부끄럽게 만드실 뿐만 아니라 성도를 향한 거룩한 목적을 이루어가신다. 첫째, 하나님은 남아 있는 부패성을 통해 성도들을 영적 자만으로부터 지키신다. 처음부터 풍성하고도 온전한 은혜를 받은 천사들도 타락하고 말았다. 성경은 그들에 대해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났으며’(유1:6), 교만으로 인하여 정죄를 받았다고 말한다(딤전3:6). 하물며 죄로 가득했다가 이제야 온전하게 된 인생에게 교만의 문제는 얼마나 심각한 것이겠는가?

  우리에게 전가된 의는 우리를 온전히 의롭게 하셨기 때문에 그 안에는 그러한 위험이 없다. 이 의는 전적으로 우리 밖에서 들어온 것이므로 쉽게 자만할 수도 없다. 문제는, 내부에서 진행되는 역사와 관련하여 우리에게는 자신을 과대평가하며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습성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부패성이야말로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적절한 수단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나안 사람들을 모두 좇아내지 않고 남겨 두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게 하심으로써 그들을 겸손하게 만드셨다. 이 땅에서 죄로 말미암아 철저하게 겸손해진다면, 성도가 천국으로 가는 길에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다. 죄만큼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내재적 은혜를 위해 그분을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신다. 우리는 받은 은혜를 얼마나 빨리 잊어버리는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본성에는 선한 것이 없다.

  셋째, 하나님은 남아 있는 부패성을 통해 우리를 낮추심으로써 자기 부인의 기회를 얻게 하신다. 하나님은 이러한 경험 없이 지극히 많은 일을 하는 사람들보다는 자신을 부인하는 사람을 더욱 기쁘게 받으신다. 그들에게 이러한 은혜에 대한 ‘백배의 축복’의 위대한 약속이 주어진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은혜이다.

  자신의 부패성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범죄한 자들에 대해 관용과 자비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6:1).

  하나님은 참열매 맺는 가지를 결코 제거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열매를 맺는 참된 가지가 비록 여전히 부패성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결코 그것들을 제거하거나 자르지 않으신다. 깨끗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결국 열매 맺지 않는 가지를 제거하신다.

그들은 버림받고 마르고 모아서 불에 던져 사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는 성도 여러분, 참으로 열매 맺는 자기가 되시라.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꺽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롬11:20). 그러므로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한다. 하나님을 위해 모든 일을 하며, 그분을 여러분의 목적으로 삼고서 날마다 더욱 풍성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리고 여러분의 열매가 더욱 신령하게 자라야 한다. 외적인 고백을 통해 위를 향해 자라는 만큼 내적인 거룩을 통해 아래로 더욱 깊이 뿌리내리고, 계속해서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 토마스 굿윈, 『그리스도인의 성장』, pp 48-74

 

 

출처: 청교도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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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가 용서 받았다는 여부를 어떤 식으로 알 수 있습니까?(리차드 십스)

내 죄가 용서받았다는 여부를 어떤 식으로 알 수 있습니까?
(다음에 나오는 두 가지 기준을 시금석으로 삼으면 여러분의 죄가 용서받았는지 그 여부를 알 수 있습니다.)
1) 죄사함을 받기 전에 일어나는 일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2) 죄사함을 받은 후에 일어나는 일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만일 여러분이 겸손하고 진실하게 죄를 고백한다면 여러분의 죄는 용서받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그러므로 내가 죄 용서받았다는 것을 느낌으로 경험하든 그렇지 못하든 만일 내가 진심으로 철저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죄를 고백했다면, 내 죄는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만일 죄 용서 받았다는 느낌을 우리가 손쉽게 경험하게 된다면 우리는 사탄의 유혹에 대해서 지나치게 자신만만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지혜와 긍휼 가운데 우리가 그런 느낌을 경험하는 것은 잠시 보류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우리 죄를 고백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약속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 죄를 사하셨다는 것을 믿어야만 합니다. 만일, 내가 진심으로 죄를 고백하고 시인해 놓고서도 하나님께서 차용증서를 소각하지 않으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죄를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 사람의 죄는 틀림없이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시면 그와 동시에 (죄에 반기를 들 수 있는)능력도 그 사람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마 9:2,6).
하나님께로 돌이킬 힘이 있다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순종할 힘이 있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계속 영위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 사람의 죄는 용서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항상 그를 앞으로 인도하는 믿음의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능력이 자신 안에 발휘되고 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정말 죄사함을 받았는지 그 여부에 대해서 의심을 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죄를 제해 주시고 용서 해 주시게 되면, 불의를 모두 제해 달라는 기도를 들으신 후에 '우리에게 선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증거는 (죄사함을 받으면) 양심에서 어느 정도 평안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죄사함을 받은 사람도 어쩌면 양심의 평안을 많이 누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절망하지 않을 정도만큼의 평안은 틀림없이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인해서 우리의 죄가 사면되었으니,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담대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정도의 화평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안에 있는 하나님을 감히 바라볼 수 있는 담대함이 어느 정도 있다면, 이것은 그 사람의 차용증서가 소각되고 그 모든 죄가 사해졌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시금석입니다.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이나, 아히도벨 같은 사람이나, 사울과 같은 사람은 그 마음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편안한 마음으로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 정도의 담대함을 가지고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넷째로, 죄를 용서받으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많이 넓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머리에 향유를 붓고 눈물을 뿌리며 머리카락으로 발을 씻어주는) 여인을 향해서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눅 7:47).

그러므로,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뜨거울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영혼 위에 빛나셨고,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죄사함에 대한 확신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 사랑의 분량에 비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죄사함의 확신을 더욱 더 많이 얻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더욱 불타오르도록 만들기 위해서 말입니다.
분노하시고 성이 나 있고 진노가 가라앉지 않은 하나님을 영혼이 사랑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니, 그런 경우에 오히려 영혼은 아예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이 사람의 경우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기 때문입니다.

 

다섯 번째로, 또 죄를 용서받으면, 그것은 그 사람을 적당하게, 즉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하고 인자하고 용서를 베풀 줄 아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줍니다. 대개의 경우 자기 자신의 양심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온화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한 사람들은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했다는 것을 증거 합니다.
반면에 잔인하고 인정머리 없는 사람의 경우, 바로 그런 됨됨이가 그 사람의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인식으로 뜨거워지거나 녹아내린 적이 전혀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골로새서 3장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 입고."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자비로운 태도를 취하는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지체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입증합니다.

가장 시급한 일은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애쓰도록 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의 권세를 제거하시고 굴복시키시도록 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와 그에 따르는 모든 심판을 완전히 제하시도록 합시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이 세상의 모든 쾌락을 한 몸에 누리며 산다 해도, 우리는 단지 비참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사람에게 있어서, 이 세상의 모든 쾌락을 한 몸에 누리며 사는 것은 사형 선고를 받은 역적(逆賊)이 감옥 안에서 누리는 자유에 불과합니다. 비록 이 사람이 원하는 모든 것이 완벽한 서비스와 함께 하나도 빠짐없이 조달된다 해도, 그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게 되면 그의 마음은 얼어붙게 되고 그의 용기는 꺾여집니다. 그리고 그는 감옥밖에 있는 가장 미천한 짐마차의 마부나 맥주 잔을 나르는 사람(tankard bearer)이 자신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고 그리고 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처지를 부러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여 자신의 죄를 사면(赦免) 받지 못하고, 하나님과 화해하지 못한 사람의 형편도 이와 똑같습니다.
자신의 죄가 하나님의 장부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자신을 대적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그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을 무장시켜서 자신을 대적하여 복수를 감행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이상 그 사람에게는 아무런 위안도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영혼 사이에 있는 분쟁을 멈추지 않는다면(take up) 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재인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죄사함을 확신하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비참한 경우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얻기까지 한 시간도 편안한 마음으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의 삶은 불확실하고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지옥이나 파멸과 우리 사이에는 한 걸음 차이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간구하여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쉴 새 없이 간구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렸을 때 지은 죄와 성인이 된 후에 지은 죄, 알고 지은 죄와 모르고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무슨 죄든지 다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모든 불의를 제하소서'라고 말입니다.

-돌아오는 배역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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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미니안주의의 ‘조건적 선택’에는 세 가지 문제점이 있다 / 조엘 비키

 첫째로, 조건적 선택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근본적인 선택을 인식하지 못한다. 성경의 선택 교리는 땅의 기초가 세워지기 아주 오래전에 설계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부를 자유롭게 선택하신다는 교리이다(계7:9-17).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구원 얻을 방편을 마련해 놓으셨다(엡1:4,5). 하나님은 그들을 구속하고 믿음과 회개로 이끌어 의롭다 하시고, 거룩하게 하고 보존하시며, 그 택한 자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또 그를 통하여 영화롭게 하신다(롬8:28-39,살후2:13,14,딤후1:9,10). 그리고 불신앙을 고집하는 자들을 죄 가운데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신다(롬9장).

 

선택은 무조건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 안에 있는 어떤 내재적인 선함 때문에(고전1:27-31), 혹은 그들이 언젠가는 믿을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로, 조건적인 선택은 우리의 전적 타락과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의 범위를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영광을 가로채고 만다. 반면에 무조건적인 선택은 인간의 전적 타락 교리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은혜 교리에서 비롯되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만일 우리가 성경이 말씀하는 바와 같이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라면, 우리의 구원은 결코 우리 자신에게서 시작될 수 없다. 우리는 본질상 ‘허물과 죄로 죽었던’(엡2:1)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택자를 위하여 자신의 독생자를 고난과 죽음에 내주셨던, 주권적으로 선택하시며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다. 왜 그런가? 우리가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진노를 받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택’이 없다면 구원도 없다.

 

스펼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나는 인간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죄와 저주를 받아야 하며, 구원은 그 시작에서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발견한다. 하나님께서는 멸망받을 자를 멸망받도록 선택하신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기로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셋째로, 조건적 선택은 실제로 아무도 구원하지 못한다. 조건적 선택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타락한 인간 존재에 구원의 기초를 두기 때문에 결국 인간을 파멸로 이끌게 되는 것이다. 반면 무조건적인 선택은 인간을 파멸로 이끌지 않고, 천국에 있어야 할 것 같은 사람들을 천국에서 물리치시고 천국에 가지 못할 것 같은 사람들에게 천국문을 열어 놓으시는 하나님의 복이다. 그러므로 경이로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어떤 죄인들을 의롭게 거절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단 한사람의 죄인이라도 구원하신다는 사실이다.

 

어거스터스 스트롱, “우리는 하나님께서 너무나 적은 수의 사람을 구원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불의하시다고 건방지게 비난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더 찬미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덕이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불의와 사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을 선택하신다는 이 신비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존 라일, “자기 자신의 마음을 진정으로 아는 신자는 선택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미하게 될 것이다.”

 

- 조엘 비키, 『칼빈주의』, pp 121-123

 

 

출처: http://blog.daum.net/kds2012/245

생명나무 쉼터/한아름님

 

  ** 마태복음 강해 67 (마13:31-34) **

박윤선 박사


 

<본문>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또  비유로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한 누룩과 같으니라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이루려 하심이니라


<강해>

짧은 구절이지만 본문에는 세가지 주제가 나온다.

즉 1. 겨자씨의 비유 2.누룩의 비유 3.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이다.

여기에서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거의 같은 의미의 교훈을 가진 비유이며 천국의 또다른 특징을 가르쳐 주시는 가르침이다.

 

 


1. 겨자씨의 비유

이 겨자씨의 비유는 작은 씨가 자라서 새들이 깃들일 만큼(3.3m) 커지는 천국의 확장성(성장)을 말하고 있다.

비록 천국(하나님의 사역)은 작게 시작 되지만 결국 상상할 수 없는 결과를 얻게 된다는 가르침이다.

따라서 이 비유의 말씀에서 받는 교훈은


 1) 항상 작은 것이라도 심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고후9:6)

 심는대로 거둔다 는 진리는 만고 불변의 진리이다.

따라서 작은것이라도 심는 자가 거둘 수 있으며 더우기 천국의 사역을 작지만 시작하는 자는 엄청난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언제나 작게 보이는 일이라도 먼저 심는 것, 시작하는 것이 중요함을 가르쳐 준다.


 2) 따라서 작은 것을 소홀히 하거나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

 요긴한 것은 약한것 이란 말씀도 있듯이 작은 것이 더욱 값진 것임을 잊지말아야 한다.

 큰것 만 바라지 말고  작은 것 에 충실한 사람이 큰것을 얻는 사람인 것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마25:21)

작은 것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후회하게 되고 결국 멸망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맡은 사명이 작은 것이라 해서 소홀히 한다면 큰 사명은 맡겨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작은 것을 불평없이 감당할 때 큰 것을 맡기시는 주님임을 잊지말아야 한다.


 3) 작은 것에서 큰것을 보는 소망을 가지고 일해야 한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 지라도 큰 기대를 가지면, 소망이 있으면, 그일을 기쁨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예) 달걀 두개 - 부자의 꿈


 4) 작은 봉사가 큰 축복을 얻는 것이다.

봉사는 멀리가서 많은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값진 봉사인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중에 지극히 작은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마25:34-36)


 5) 스스로 작은 자임을 고백할 줄 알아야 한다.

작은 것은 겸손을 상징하지만 큰 자인줄로 착각하는 것은 교만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의 집을 허물어 뜨리신다.(잠15:25)

마음의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다.(잠18:12)

스스로 겸비하여 자신을 작게 아는 자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이다.

솔로몬은 왕상 3:7에서  종은 아이라 출입할 줄 알지 못하고... 라고 말한다.

이런 솔로몬을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셨다.(왕상3:13)

천국은 이런 작은 자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2. 누록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가 외형적인 성장을 말하는 것이라면, 누룩의 비유는 내적인 성장, 즉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누룩이 반죽에 들어감으로서 커다란 빵이 되는 것처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누룩이 된다면 세상은 변화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이다.


 1) 개인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무식한 베드로 한번 설교에 3천명이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였다.

일자 무식 무디의 설교에도 수많은 사람의 회개가 뒤따랐던 것이다.

죄인중의 괴수라고 고백한 바울은 그가 달라지고 온 세계에 복음의 위대한 사도가 되었다.

복음은 마치 누룩의 발효처럼 한 인간이 삶을 놀라웁게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2) 사회를 변화 시킨다.

영국이 해적의 나라에서 신사의 나라가 된것은 복음 때문이다.

미국이 세계 제일의 나라가 된 것도 복음으로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복음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누룩인 것이다.


 3) 주님은 내가 변화되기를 먼저 바라신다.

누룩은 비록 작은 것이지만 일단 가루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엄청난 힘을 기지는 것이다.

복음이 먼저 내심령속에 들어와 내가 변화되고 내가 변화됨으로 사회가 변화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3.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무리들을 가르치실 때 예수께서는 많은 비유를 사용하셨다.

본문도 그 비유의 말씀중의 하나이다.

왜 예수께서 비유를 사용하시었는가 하는 것은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섭리를 쉽게 가르치시기 위해서

진리의 말씀들을 듣는 사람들은 일정한 계층의 사람들이 아니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다.

이들 모두가 보편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드릴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의 하나가 바로 비유이다.


 2) 진리를 흥미있게 전달하기 위해서

진리는 그 전달하는 방법에 따라 쉽고 흥미있게 전달될 수 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 잃은 은전의 비유, 앞서 말씀하신 가라지의 비유, 누룩과 겨자씨의 비유등은 진리의 말씀은 쉽고 흥미있게 전달하는 방법이었다.


 3) 예언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시78:2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

본문에서는 이사야의 말씀으로 말하고 있으나 이는 구약의 예언을 이루심을 강조하는 것이 더 강하다.

즉 예수님의 비유의 가르침은 이미 예언되었던 말씀을 가르치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마태는 여기에서도 예수께서 메시야,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4) 알아 듣지 못하게 하기위해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마13:11)

불신자들에게는 복음이 오히려 조롱거리가 되고, 무가치하게 여기기 때문에 돼지에게 진주를 던질 수 없으셨던 것이다.

우리 택함받은 자들에게 비유의 말씀은 참가치가 있는 것이다.


         ****************  교        훈  **************


1. 항상 작은 것이라도 심는 자가 되어야 한다.

2. 작은 것을 소홀히 하거나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

3. 작은 것에서 큰것을 보는 소망을 가지고 일해야 한다.

4. 작은 봉사가 큰 축복을 얻는 것이다.

5. 스스로 작은 자임을 고백할 줄 알아야 한다.

6. 주님은 내가 변화되기를 먼저 바라신다.

7. 진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말씀이다.

 

 

출처: 박윤선 박사 주석에서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박혜근 교수, 알파코스는 개혁신학 아니다
논평 : “개혁주의 입장에서 본 알파코스의 성경관과 구원론”
 
리폼드뉴스 기사입력  2008/11/29 [10:09]
알파코스(the Alpha course)는 1995년부터 004년까지 보수와 자유주의 진영을 막론하고 개신교의 대부분의 교파와 로마 카톨릭 교회 등에서 28,000번이상 채택되었고 약 10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참여 했을 만큼 세계적인 교회 성장 프로그램이 되었다.[Alpha News (2002) July-October: pp. 31-32.] 그러나 이런 세계적인 위상에도 불구하고 알파코스는 어떤 진영으로부터도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을 정확하게 대변하는 것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신학부 알파코스 문제 공청회 모습     © 리폼드뉴스

 
 
 
 
 
 
 
 
 
 
 
 
 
 
 
 
 
 
 
 

 

그 이유는 오늘의 알파코스를 체계화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니키 검블(Nicky Gumbel)이 처음부터 “대중적인 기독교”를 지향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누구에게도 거부감을 주지 않는 최소한의 기독교 진리를 제시하는 대신 교파와 교단을 초월하는 대중성을 얻고자 했기 때문에 주요한 교리적 논쟁점들은 의도적으로 지양했던 것이다. 그러나 모두에게 호소력을 갖는 초교파적 전도 프로그램이랑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중대한 신학적 문제점을 노정하게 될 수밖에 없다.

알파코스의 대중성은 정련된 신학적이고 지적인 내용보다는 토론토 블레싱(the Toronto Blessing)과 같은 은사주의운동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성취된 것이었다. 1998년 전후로 토론토 블레싱이 교회와 정통신학의 신랄한 비판을 받게 되면서 급속히 쇠퇴하게 되었다. 바로 이 시기에 알파코스가 등장하게 되면서 꺼져가는 은사주의운동의 불씨를 다시 일으키는 그러면서도 대중적으로 보급할 수 있는 돌파구를 열게 된다.

다시 말하면 실로 괴이하다 할 황홀경을 수반하는 은사주의운동에 대한 신학적인 비판을 잠재우면서도 그것을 지속적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보다 체계적인 모범교안이 등장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검블의 알파코스인 것이다.[토론토 블레싱의 은사주의 운동에 흔히 수반되는 극도의 열광주의적 다양한 현상에 대해서는 다음의 자료들을 참조하라. P. Richter, "God Is Not a Gentlemen!" in The Toronto Blessing Or IsIt, ed. S. Porter and P. Richter (Longman & Todd, 1995); J. Hunter, Evangelism: The Coming Generation (Chicago: Chicago University Press, 1987); M. Poloma, Main Street Mystics: The Toronto Blessing and Reviving Pentecostalism (New York: Altimira Press, 2003).] 검블은 출판물과 같은 문서화된 도구가 은사주의운동의 매우 유용한 방어책이 된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었고 그것을 매우 효과적으로 다룰 줄 알았던 인물이었다.[N. Gumbel, Telling Others: The Alpha Initiative (Eastbourne: Kingsway, 1994), 120.]

알파코스는 은사주의운동이 단순한 비교적(秘敎的) 현상에서부터 성경공부와 기본적인 복음적 진리를 제시하는 하나의 체계화된 시스템으로 반전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이 은사주의운동이라는 알파코스의 근본적 성격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이 알파코스의 근본적 성격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이 알파코스는 본질적으로 열광적 은사주의운동을 이론화한 결과였던 까닭에 주로 은사주의교회를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채택되었고 그리고 이 교회들이 다른 일반의 개신교회와 로마 카톨릭, 성공회, 심지어 제칠안식일재림교에게까지 알파코스를 확산시키는 전초기지가 되었던 것이다. 한국교회에서 알파가 급속히 확산되었던 이면에도 이미 1990년대 중반에 이미 빈야드 운동(the Vineyard Movement)이나 토론토 블레싱의 은사 운동에 대한 경험이 중요한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언급한 이런 정도의 알파코스의 역사적인 기원과 발전 과정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만 있어도, 알파코스의 신학사상이 근본적으로 개혁주의의 신학적 입장에 부합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신학부 알파코스 문제 공청회에서 알파코스 문제를 논평하고 있는 박혜근 교수     © 리폼드뉴스
본 논문의 저자인 서창원 목사는(편집자 주: 서청원 목사의 <개혁주의 성경론과 구원론의 입장에서 본 알파>에 대한 박혜근 교수의 논평글) 검블의 성경관과 구원관이라는 두 가지의 주제에 한정한 비판적 분석을 수행하였다. 저자는 검블의 저서들 가운데서 현재 우리말로 번역된 저서들을 대부분 검토하였고 두 가지의 주제와 관련한 검블의 신학사상을 전통적인 개혁주의의 입장과 비교하고 그 차이를 규명하고자 시도하였다.

단정적ㄷ으로 말하자면, 알파코스의 성경관과 구원관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은 저자가 주장한 대로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은사주의자로서 검블은 기본적으로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와 관련하여 연속주의자 혹은 회복주의자의 입장에서 성경의 완료성을 제한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참조. S. Ferguson, 『성령』(The Holy Spirit). 김 재성 역(서울: IVP, 1999), pp. 237-274] 예언의 은사와 관련하여 그는 오늘날에도 성령의 계속적인 사역으로 인해서 예언, 꿈, 환상 그리고 주위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체적인 지시가 중단 없이 주어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요한복음 14:12의 무리한 해석 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형식적인 원리에서는 성경이 완료되었으나, 실제적으로는 성경은 개인의 체험 속에서 개별적인 성령의 지도로 보충되어야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검블은 이런 개인적 체험의 내용에 오류가 있을 수 있고 따라서 성경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는 단서를 붙이기는 한다. 그러나 체험의 유용성에 대한 알파코스의 강조는 필연적으로 성경의 탁월한 지위를 손상시키는 결과를 야기한다. “왜 그리고 어떻게 성경을 읽어야 할 것인가?”라는 제목 하에서 그는 “성경은 오류가 없으며 신조와 행위에 관한 최고의 권위를 갖는다.”라고 하면서도 “오직 성경만”(Sola Scriptura) 그러한 신적 권위를 갖는다고 명시하지는 않고 있다.

검블의 성경관의 문제는 바로 이것에서 비롯된다. 성경만이 유일한 신적 권위를 행사하는 것이라고 명시하지 않을 때 개인의 체험이나 확신은 얼마든지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지게 될 수도 있고 로마 교회의 외경들이나 심지어 이단들이나 소위 예언은사자들도 성경과 마찬가지로 권위적인 것이 될 수가 있다. 만일에 어떤 결론이나 결정이 성경의 진리에 근거한 사고에 따른 것이 아니라면, 성경의 권위는 훼손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성경 이외의 것을 성경보다 더 상위에 두기 때문이다.

이런 우려는 성경에 대한 검블의 저급하고 비평적인 입장을 고려한다면 더욱 설득력을 갖게 된다. 예를들면 성경은 도덕적인 문제가 있고 또한 역사적인 문제를 갖고 있다거나, 성경이 가이드북이라거나, 혹은 성경보다는 하나님은 상식을 통해서 중대한 결정을 내리도록 하신다는 등의 주장은 성경의 충분성과 완전성을 훼손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참조. Dusty Peterson, New Age of Alpha: A Critique of The Alpha Course For Those Who Know Their Bible, retrieved May 7, 2008, from
http://www.inplainsite.org/html/new_age_of_alpha.html] 성경이 하나님의 완전하고 무오한 계시로서의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신앙체험의 유용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하였다면 성경이 갖는 유일한 최고의 권위는 필연적으로 손상될 수밖에 없다고 할 것이다.

더욱이 검블은 성경은 기본적인 원리를 제공하는데 그칠 뿐 개별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말해 주지 않으므로 성령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할 때, 성경은 질적인 원리에서도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알파코스에 참여하는 독자들이 성겯ㅇ을 읽을 때 과연 성경이 무엇을 뜻하고 또, 어떻게 적용할지에 대한 적절한 원리도 모른다는 현실을 감안할 때, 막연히 성령의 구체적인 인도하심을 구하라고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감정이나 직관을 성경의 특정한 본문이 의도한 진의로 오인하게 되는 위험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성경의 바른 해석과 작용은 장기간 전문적인 교육을 요구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알파코스는 독자가 원하기만 한다면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처럼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성경은 해득되어야 하기보다는 참조되어야 할 대상쯤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검블의 성경관은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을 성령의 연속적인 사역으로 정당화하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은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대로 과연 이것을 두고 알미니안적 태도라고 해야 할지는 의문이다.
 
▲ 알파코스 문제 공청회에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여 강의를 경청하고 있다.     © 리폼드뉴스
한편 알파코스의 구원관은 탈현대적 사회에 상관성을 갖고자 하는 동기가 검블의 복음제시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서 본 논문이 검블의 구원관을 논의하면서 단지 개혁주의의 그것과 다르다는 서술적인 비판에 그친 것은 좀 아쉽다고 하겠다.

예를 들어 저자가 지적한 대로 검블의 죄의 이해는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분명 신학적으로 퇴행적이다. 검블에 따르면, 죄는 삶을 온통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것이며, 펠라기우스의 입장과 유사하게 의지에 따른 행동으로 구현되지 않는 한 죄가 되지 않는ㄱ 것으로 간주된다. 또한 지옥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단지 “텅 빈 도시”이며 그것은 “파멸의 날” 정도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죄와 지옥에 대한 검블의 이해는 성경의 그것에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음이 자명하다. 성경은 인간의 죄행 뿐 아니라 마음의 뜻과 생각 그리고 인간의 본성까지도 죄의 범주에 포함하고 있으며(창 6:5; 출 20:17; 마 5:28; 갈5:20; 엡 2:3), 지옥은 불못이며(계 20:15) 영벌(마 25:46)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런 느슨한 죄나 지옥의 이해는 회개의 필요성이나 복음의 긴급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실제로 그의 구원관을 평가하자면, 검블의 구원관은 오직 은혜에 근거하여,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하여서만,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만 획득하는 의로움이라는 개혁주의의 독특한 구원이해를 적절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또한 중생의 의의와 중요성을 평가절하하거나 혹은 간과하고 있다. 이같은 알파코스의 구원관의 문제는 분명히 인간의 전적부패와 전적 무능력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서 탈선할 때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검블의 구원관의 이러한 결점은 이 시대의 문화적인 상관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그의 의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 탈현대적 사회는 어떤 형태의 윤리성이라도 윤리적이라는 점에서 쉽게 용인하며, 특히 본 훼퍼(Bonhoeffer)가 주장한 대로 “죄인”이라는 말은 사람들에게 모욕감을 불러일으키는 매우 도발적인 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동시대의 문화에 상관성을 확보하고 현대인들을 있는 그대로 포용하자면 검블은 죄에 대해 극히 종교적으로 절제되고 문화적으로 정제된 표현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 결과 탈현대사회에서 누구에게도 위협적이지 않고 노골적이지 않은 문화화 된 프로그램이 되고자 했던 알파코스는 결국 불가피하게 사람들에게 참된 회개를 요구할 수 없는 중대한 장애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한 마디로 검블이 죄와 구원에 관련하여 신학적으로 퇴행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저변에는 “대중 친화적인 기독교의 부흥”이라는 알파코스의 근본취지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알파코스는 기독교의 복음을 21세기 탈현대적 사회에 문화적으로 순치시킨 결과물이다. 동시대의 문화에 적응하고 그것의 지시를 받고자 하는 의도로 인해서 알파코스는 성경적인 죄의 이해에서 벗어났고 그 결과 믿음보다는 감정과 자아를, 회개보다는 회오를, 그리고 성화보다는 대중성을 더욱 강조하게 된 것이다. 이 점을 혹평한다면, 알파코스는 정통과 이단의 혼합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알파코스는 종종 너무 광ㄷ적이며, 성장에 집착하고 체험을 강조하는 등 기업가정신에 깊이 물들어 있다는 비판을 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화적 친화성을 교리적 정통성보다 더 우선하는 알파코스가 개혁주의 신앙을 신봉하는 교회에서도 무분별하게 채택되고 있다는 사실은 겉으로는 보수적인 모양을 띄지만 실제로는 현대 문화에 동화되지 못해서 안달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국교회 안에도 죄에 대한 설교를 기피하고 청중들을 불쾌하게 하는 언사를 지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이미 만연하고 있다. 회개를 촉구하기 보다는 위로와 격려 그리고 자아완성 등에 관하여 주로 설교하고자 하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청중의 지지와 승인이 없으면 교회의 성장은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문화적인 일치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교회의 존립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던 계몽주의 시대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신념은 소멸된 것이 아니라 21세기에도 여전히 그 추종자를 더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무지가 때로 죄를 낳기도 하지만, 그러나 탐욕은 필연적으로 죄를 낳는다. 교회의 양적 성장을 무한히 추구하는 것은 목회 역시 얼마든지 탐욕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목회자의 정신과 자세가 사도적인 모범에서 벗어나 현대주의에 물들때 신학은 필연코 부차적인 것이 되고, 교회는 현대 문화의 한 단층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마지막으로 결어에서 저자가 언급한바 목회에서 무엇보다 신학이 중요하다고 한 점, 그리고 알파에 대한 진지한 신학적인 검증을 요구한 것은 지극히 옳다고 할 것이다. 논평자 역시 목회에서의 신학이 차지하는 최우선적인 중요성에 대한 목회자의 심각한 인식결여가 오늘날 현대교회가 정체 현상을 보이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믿고 있는 바이다.
 
목회에서 신학이란 고작 부가적이거나 혹은 “신학교의 일”라는 신학의 중요성에 대한 저급한 인식이야말로 실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작금의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매우 다양한 이단들과 현대주의의 다양한 도전으로 인한 혼란의 한 중대한 원인은 단적으로 신학의 부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신학이 신앙의 체계적인 표현이라면, 신학은 신앙인들에게 불가피한 것이며 그것의 건전한 수립과 발전은 진리를 보전하고 전파하는 일에 필수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교회의 제도와 조직 그리고 목회적인 실천의 기법과 장치들은 반드시 신학적인 검증을 거쳐야 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 과정에서 성경의 승인과 지지를 얻을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된다면 마땅히 거부되어야 한다. 그것이 얼마나 실제적으로 효과가 있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진리란 그 본질이 실천적인 효용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계시성에 있기 때문이다.
 
복음이 갖는 시대적인 상관성과 사회적인 효용성이란 교회의 전도전략이나 원리 혹은 기술의 완성도에 달린 것이 아니라, 단순히 복음이 진리라는 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진리야 말로 가장 실천적이며 효과적이다. 우리는 성령께서 복음이 실효적인 것이 되도록 보증하신다는 믿음에서 출발해야 하며, 성령께서 사람의 창의적인 고안물이나 프로그램에 의존하지는 않으신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해야 한다.
 
<박혜근 교수> 영남대학교 전자공학과(B.E.)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Th.M.)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Ph.D.) 현,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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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11/29 [10:09]  최종편집: ⓒ 리폼드뉴스

 

 

출처: 영적분별력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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