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우호 목사의 방언부정론 과연 성경적인가?(上-)김동수 교수(평택대 신학과)
성령론 2015. 4. 7. 16:38최근 노우호 목사의 방언 검증론에 대한 논쟁이 페이스북(facebook)을 뜨겁게 달구었다. 사실 공개적으로 책은 발간되지 않았지만(회원에게만 판매 됨), 그의 강의가 유투브에 올라와 있었고, 그의 책 요약본이 페이스북에 돌면서 이에 대한 논쟁이 일어난 것이다. 그의 주장을 한 마디로 말하면 방언은사 부정론이다. 그 동안 방언에 대한 반대는 주로 은사중지론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은사중지론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본래 성령의 은사인 방언이 있었지만 사도들이 죽으면서 같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 목사의 주장은 은사중지론을 넘어선다. 방언의 은사는 본래부터 없었다는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사정을 잘 몰라 잠시 착각하여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생각했었으나(고린도전서 12-14장) 나중에 그 실상을 알고 그것이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고린도후서 11장) 그의 주장이다.
필자는 페이스북을 통해서 논란을 바라보고만 있다가 최근에 그의 책 『방언을 검증하자』(경남: 에스라하우스 2014)를 입수해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해 보았다. 방언을 검증하자는 그의 주장과 논점을 성경에 근거하여 면밀히 분석해 본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의 주장은 완전히 틀렸다. 게다가 논리 또한 허점투성이다. 그런데 그의 생각에 동조하는 이들은 노우호 목사의 주장이 과연 올바른 성서적 근거에 기인했는지 여부를 잘 모르는 것 같다. 또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 역시 그의 주장에서 무엇이 문제인가를 잘 파악하지 못하는 듯하다. 단지 “그 사람은 체험이 없어서 엉터리 해석을 하지.”라고만 생각하는 것이다. 필자가 그의 주장을 분석해 본 결과, 그의 주장은 성서적으로, 신학적으로, 크리스천의 상식으로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방언은사 부정론
노우호 목사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현대 교회에서 행하지는 방언은 100% 가짜다. 자신이 현대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방언의 은사를 검증해 본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현대 교회의 방언은 100% 가짜라는 것인가? 그에 의하면 고린도교회에는 방언의 은사가 본래 없었고, 바울이 말하는 방언은 외국어였다. 그런데 현대 교회의 방언을 검증해 본 결과 외국어는 없었다. 그래서 현대 교회의 방언은 100% 가짜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매우 단순하다.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현대인들에게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단순한 주장에는 많은 논리적 오류와 비약, 왜곡된 지식과 편향된 해석이 자리 잡고 있다.
방언이 외국어라고?
노우호 목사 주장의 가장 큰 문제는 그가 순환논법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는 방언을 외국어라고 전제하고 현대 교회의 방언은 가짜라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외국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은 전제와 똑같다. 그는 자신이 전제하는 것, 즉 바울이 말하는 방언이 외국어라는 것을 선언할 뿐, 바울의 편지글을 통해서 이를 증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증명되지 않은 전제를 통해 방언을 검증했다. 노 목사는 ‘방언’을 가리키는 ‘글로사’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가 ‘지방어’이기 때문에 방언은 실제 언어인 외국어라고 주장한다. 바울이 ‘글로사’의 의미를 일반 용법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우호 목사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헬라어에서 ‘글로사’의 기본 뜻은 ‘혀’다(막 7:33). 영어에서 모국어를 ‘mother tongue’이라고 하여 ‘언어’를 의미하듯이, 헬라어 ‘글로사’도 ‘언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행 2:11). 또 환유에 의해 이것이 ‘공통 언어를 쓰는 나라 혹은 백성’을 의미할 수 있다(계 5:9). 바울이 ‘방언을 말하다’라고 할 때 사용한 단어 ‘글로사’는 새로운 의미를 지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가 방언을 성령의 은사 중 하나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 12:8-10). 바울이 열거한 9가지 성령의 은사는 모두 초자연적인 성령의 나타남(고전 12:1, 7)을 의미한다. 그런데 학습이 가능한 외국어가 성령의 은사 목록에 들어있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또 바울이 설명한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전 14:2)는 구절에서도 방언은 인간의 언어가 아님을 암시한다. 아울러 방언이 이성이 아닌 영으로 말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방언을 통역하기 위해서 그 언어를 잘 아는 통역사가 아닌 통역의 은사가 필요하다는 것은 이것이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는 또 하나의 증거다.
이어서 바울은 방언이 공적으로 행해졌을 때의 무익함을 설명하면서(고전 14:6-19), 인간의 언어도 그 뜻을 알지 못하면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서로 외국인이 된다고 비유하는데(10-11절), 통역되지 않은 방언을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방언이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는 뜻이다.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해 비유를 사용할 때는 둘 사이에 공통점이 있으면서도 다른 점이 있어야 한다. 통역되지 않은 방언과 외국어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서로 교통이 안 되는 공통점이 있지만 본질은 다르다. 외국어가 인간의 언어라면 방언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어야 한다.
방언을 외국어인가로 검증한다고?
위에서 본 대로 방언이 외국어가 아니라면 노우호 목사가 방언을 외국어인가 아닌가로 검증했다는 것은 무의미한 말이 된다. 그는 37년 동안 방언을 바울이 말하는 방언이 아닌 것으로 검증하느라 헛수고를 한 것이다. 방언의 진위 여부를 그것이 실제 외국어인가 아닌가로 증명한다는 자체가 엉뚱한 생각이다.
노우호 목사는 방언 통역 은사의 목적이 방언의 진위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이것은 바울이 말하는 통역의 은사의 목적과 전혀 다른 것이다. 바울은 예배 가운데 예언이 방언보다 더 큰 은사라고 하는데, 그 조건은 그것이 통역되지 않았을 때다(고전 14:5). 만약 통역이 되면 방언은 예언과 같은 효과를 내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하는 사람들에게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했다(고전 14:13). 예언이 위로, 책망, 권면을 통해 듣는 사람을 세워주는 것이라면(고전 14:3), 방언도 통역을 통해 사람들을 세워 주는 은사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방언 통역의 목적은 예언의 목적과 같은 것이다.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바울은 방언의 은사를 검증하라고 한 일이 없다. 만약 있다면, 방언을 비롯한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가 올바로 신앙고백을 하는가에 해당할 것이다(고전 12:1-3).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고 부를 수 없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를 주라고 부르면 그 사람은 성령의 사람이고, 그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가 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만약 올바른 신앙고백도 없는 어떤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와 비슷한 영적인 현상이 나타나면 그것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방언의 은사를 검증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울이 9가지 성령의 은사 중 하나로 제시하는 영 분별의 은사다. 영 분별의 은사란 이성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으로(고전 12:7) 어떤 사람에게 일시적으로 임하는 은사다. 다른 이에게 나타나는 영적 현상의 출처가 성령인지 악령인지를 즉시 분별해 내는 것이다. 바울이 첫 선교 여행지인 구브로에서 거짓 선지자 바예수를 만나자마자 보였던 반응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는 바예수를 향해 “모든 거짓과 악독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행 13:11)고 말했다. 바울이 바예수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토대로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여 볼 때 이런 말이 바울의 입에서 나왔던 것이다(행 13:10). 그래서 혹 어떤 사람의 방언이 마귀로부터 온 것이라면 영 분별의 은사를 통해서 분별해 낼 수 있다.
노우호 목사는 방언을 녹음해서 여러 사람에게 들려주어 그 해석이 동일해야만 참 방언의 은사라고 하는데, 이 역시 방언통역의 실체를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그의 주장 자체가 방언이 외국어라는 전제에 기인한다. 실제로 방언이 외국어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신자의 기도라면 통역의 범주는 그 기도 전체라기보다 그 사람의 위로와 책망과 권면의 필요에 따른 일부분이다. 또 통역의 은사 자체도 그것이 통역자라는 인격을 통해서 표출되기 때문에, 같은 성서를 읽어도 다른 설교가 나오듯이, 같은 방언이라도 통역하는 사람의 언어와 신학으로 표현이 달라질 수 있다.
노우호 목사가 제시하는 방언 검증의 원리로 제시된 사랑과 교회건덕(96-98)도 검증의 원리로써는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체험한 사람들에게 사랑의 길을 따라 그것을 사용하라고 하는데(고전 12:31), 그 전제는 그 은사가 진짜라는 것이다. 은사의 진위는 사랑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비록 어떤 사람이 진정한 은사를 체험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무용지물이 된다고 바울은 말하는 것이다(고전 13:1-3). 바울은 은사를 체험한 사람들에게 사랑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지, 사랑이 없이 사용되는 은사가 가짜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또 한 가지, 바울은 방언이 통역되지 않고 개인적으로 사용할 때는 자신을 세운다고 했지 교회를 세운다고 하지 않았다(고전 14:4). 그러므로 교회를 세우는가의 여부로 방언의 진위를 증명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다.
또 예배 가운데 일어나는 영적인 일에 대한 분별은 개인이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 공동체가 함께 하는 것이다. 두 세 사람이 방언이나 예언을 하면 예배에 참여한 나머지 사람이 그 예배 가운데 그 영의 출처를 분별하는 것이다(고전 14:29).
바울이 방언의 은사를 취소했다고?
노우호 목사의 주장 중 그가 매우 중점을 두는 것 중 하나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방언의 실상을 잘 모르고 처음에는 은사로 인정했다가 후에 취소했다는 것이다. 성경에 방언의 은사가 없다고 하는 그의 주장은 방언의 은사를 성령의 은사 가운데 하나로 열거하는 고린도전서 12장 10-12절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이를 비껴가기 위해 노 목사는 역사비평적방법론을 사용한다. 처음에는 바울이 지식과 정보의 부족으로 인해 고린도교회의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인정하는 실수를 저질렀으나 고린도후서 11장에 가서 실상을 알고 은사로 인정한 사실을 취소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린도후서 11장에 바울이 뭐라고 했기에 노우호 목사는 바울이 방언을 취소했다고 주장하는가? 흥미롭게도 고린도후서 11장에는 방언이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가 주목한 구절은 두 절이다. 첫째, 고린도교인들이 다른 복음을 전해도 잘 용납한다는 것이요(고후 11:4), 둘째,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고후 11:13)이라는 것이다. 노 목사에 의하면 여기서 말하는 속이는 일꾼(그는 개역한글번역을 사용하여 “궤휼의 역꾼”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이 바로 고린도교인들이다.
이러한 주장은 고린도후서를 심각하게 잘못 해석한 것이다. 그는 “궤휼의 역꾼”을 고린도교인 전체로 해석하여 바울이 고린도교인 전체를 부정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고린도교인들이 하는 모든 것을 바울이 부정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방언도 그 중의 하나다. 그러나 이것은 고린도후서에 대한 그야말로 엉터리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은 고린도교인들이 아니라 고린도교회 외부에서 침투해 들어온 자들이었다(고후 10:12, 18). 바울은 이들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신약학자들은 이들을 바울의 반대자 혹은 대적자라고 부른다. 최근 발행된 한 신약개론 책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이 대적자들은 분명히 당시에 회중들 사이에서 활동하던 방문자들로서, 그들은 회중과 함께하는 바울 사역에 어떤 위협을 초래”했던 자들이다(I. Howard Marshall 외, 『서신서와 요한계시록』 [서울: 성서유니온선교회, 2007], 162. ). 이들이 정확히 어떤 사람들이었는지에 관해서는 주석자들 가운데 많은 논란이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들은 고린도교인 전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거의 없다. 신약개론 책이나 고린도후서 주석 책 한 권만 읽어도 해결되는 문제를 노우호 목사는 말도 안 되게 풀고 있는 것이다.
표적으로서의 방언은 그친 것이라고?
노우호 목사는 사도행전과 마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방언은 표적이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일어났던 일이고 그 후에는 그쳤다고 말한다. 그는 표적이 나타날 때의 순간성과, 이 표적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계속 나타날 필요성을 착각한 것 같다. 표적이 일어날 때는 그것이 순간적이지만, 그 체험은 다른 곳에서 성령이 임할 때 얼마든지 계속 될 수 있다. 만일 노 목사의 주장대로라면 마가복음 16장과 사도행전에서 각각의 저자는 이러한 표적이 일시적으로 존재하다가 그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본문을 썼다는 것인가? 필자의 견해로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또한 성령이 임하는 곳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기록한 것이다. 마가복음 본문(16:9-20) 저자는 예수 믿는 곳에 방언을 비롯한 여러 표적이 나타난다고 본 것이고, 누가는 성령이 임하는 곳에 사람들이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고 본 것이다(행 1:8).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노우호 목사의 주장은 매우 단순하고 엉뚱하다. 성서적 근거도 설득력이 없고, 논리적 비약도 심하다. 그런데 노우호 목사의 주장이 일부 사람들에게 어필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첫째, 그가 오랫동안 성경을 가르치는 일로 얻은 신뢰일 것이다. 둘째, 그는 한국 교회 대다수의 신학적 지지를 얻고 있는 칼빈을 신봉한다. 성령의 은사에 대한 설명에서는 그는 매 은사마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라는 어투로 칼빈의 주장을 소개한다(70-83). 셋째, 그의 주장이 체험보다는 성경 해석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헬라어 단어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신약 성경 구절에 대한 자신만의 새로운 번역을 제시할 뿐 아니라 신약 성경에 대한 역사적, 나아가서 비평적 해석까지 곁들여 자신의 주장이 합리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애를 썼다. 아마도 이런 점들이 독자들로 하여금 그의 주장을 일정 부분 신뢰하도록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성서 해석은 초보 수준에 불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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