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 꿈, 환상, 입신, 방언, 현상, 기적과 표적에 대한 단상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 행 2:17-19)


신사도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사도적 권위를 부여 받아, 사도 시대의 기적과 표적, 예언, 환상, 방언을 그대로 실천하고자 한다. 그들은 선지자 양성소를 만들어 사도적 권능을 부여 받은 선지자들을 임명하고, 그들에게 기적 표적 예언 방언에 의한 성령운동의 사역 방법을 훈련시켜 전세계에 파송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의 사역에 관하여 많은 비평이 쏟아지고 있는데 그 비평의 요점은,


첫째, 거짓 기적 표적의 사례들이 드러난다.

둘째, 기사와 표적의 많은 부분들이 비성경적이며, 하나님의 온전성과 합리성에 배치되며 하나님을 기괴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모습을 보인다.

셋째, 성령님을 감정적이며 기이한 현상들을 일으키는 존재로 오해하여 집회시 이들을 도출하려는 의도성이 엿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들은 이교적이며 무속적인 범주의 것들과 유사성을 보인다.

넷째, 감성주의적 예배와 집회를 추구한다.

다섯째, 성령이라는 이름으로 바른 교리(말씀)를 초월하려는 입장을 보인다. 천주교등 모든 교파를 초월하며, 복음에 대한 투철성이 없다.

여섯째, 번영신학을 추구하고, 성도들의 감정적 심리적 만족, 카타르시스, 치유에 사역의 포인트를 둔다.

일곱째, 번영신학과 은사주의에 입각하여 사역을 하는 많은 지도자들이 도덕적 재정적으로 부패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기적과 표적을 이야기 하지만 반면에 거짓 기적과 표적을 분별하라고 한다. 예언을 말하고 있지만 거짓 예언을 매우 증오하고 있다. 방언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방언에 대한 유의를 당부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적과 표적, 예언, 방언, 환상들에 대하여 매우 조심스러워해야 하며, 성경의 말씀에 벗어나지 않는가를 분별하여야 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님의 전권에 맡기는 자세일 것이다.


요엘 선지가는 모든 육체에게 예언, 환상, 꿈을 주리라고 하였고 하늘과 땅에 기적과 표적을 베푼다고 하였다. 사도들은 이 말씀을 실현한 장본인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이 예언에 따라 무엇을 하였는가 요약을 해보자.


1) 각나라 방언으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

2) 병고침, 죽은자 살리기, 앉은뱅이 일으키기등의 표적을 보임으로서 복음을 증명하였다.

3) 모진 고난과 핍박을 당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대부분 순교하였다.

4) 복음(정경)을 확정하였다.


사도 행전에서 예언, 환상, 꿈, 기적표적의 권능을 받은 사도들이 행한 것이 무엇인가 ?  고난과 핍박을 당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 것, 이것이 전부이다. 오늘날 집회 현장을 가보면, 예언을 한다, 기적과 표적을 행한다, 방언을 한다, 환상을 이야기 한다는 모든 것들이 과연 복음을 전파하는 일과 어떤 상관 관계가 있는지 의아심을 일으키게 한다. 예언은 마치 무당이나 주술사들처럼 앞날에 어떤 일이 일어날 일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성경에는 때로 앞날의 일을 예언하는 기록들이 있기는 하다. 사도행전에서도 한 선지자가 어느 지역의 가뭄을 예언하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이 예언은 특수한 상황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한 것이었다. 사도 시대에 사도들이 미래의 일을 점치는 예언들을 보편화하여 실행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예언은 다 천국 복음임을 알아야 한다. 요한이 쓴 요한 계시록도 바로 이 예언으로서 이루어진 것인데, 이 예언은 즉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언의 목적은 무엇인가 ?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임을 왜 깨닫지 못하는가 ? 환상과 꿈은 무엇인가 ? 우리가 밤에 날마다 꾸는 꿈이 아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꿈으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시기도 하여, 꿈꾸는 자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성도의 구원과 복음의 전파라는 목적이 아닌 것이라면 다 개꿈에 불과하다. 젊은이 들에게 부어지는 환상이라는 것은 복음을 전파하라는 사명을 뜻한다. 늙은이들에게 주는 꿈이라는 것은 어떻게 복음을 전파할 것인가에 관한 지략과 비젼을 의미한다.


신사도 운동가들은 이렇게 성경을 잘못 해석하여, 예언, 기적 표적, 환상, 입신, 방언을 집중적이며 보편화 원리화하여 시행함으로서 많은 오류를 낳고 있다. 예수님은 이땅에 오셔서 많은 것을 개혁하셨다. 예수님의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사역의 목적은 무엇인가 ?  죄로 죽어가는 인간의 구원이다. 이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복음을 남기시고 “ 내가 분부한 것(복음)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라는 유언을 남기시고 부활 승천하셨다. 그렇다면 우리의 목적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는 너무 자명하다. 예언, 환상, 꿈, 기적 표적, 입신, 방언 이러한 것들은 모두 복음의 전파를 향한 목적성을 가져야 하고, 성경의 모본을 따라야 한다. 그런데 이들이 다른 목적성을 가지거나, 성경의 모본을 따르지 않을 때는 바로 배도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은사주의 및 신사도 운동가들이 사역의 키로 생각하는 은사적 요소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본다.


1)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증거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미래를 예언(예측)하는 경우는 매우 특수한 복음적 상황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일반화 원리화해서는 안된다.


예언자들은 거짓으로 예언을 하며, 제사장들은 거짓 예언자들이 시키는 대로 다스리며, 나의 백성은 이것을 좋아하니 마지막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렘 5:31)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분명히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지금 너희 가운데 있는 예언자들에게도 속지 말고, 점쟁이들에게도 속지 말고, 꿈쟁이들의 꿈 이야기도 곧이듣지 말아라. 그들은 단지 나의 이름을 팔아서 너희에게 거짓 예언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내가 보낸 자들이 아니다. 나 주의 말이다. (렘 29:8-9)


이 예언자들이 언제까지 거짓으로 예언을 하겠으며, 언제까지 자기들의 마음 속에서 꾸며낸 환상으로 거짓 예언을 하겠느냐? (렘 23:26)


2) 방언은 성경의 말씀대로 유의하며, 개인의 신앙적 덕을 위한 은사로서 누려야 한다. 방언을 공중예배의 사역 방법으로 채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의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 고전 14:14 )

방언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 고전 14: 4)


3) 기적과 표적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법칙을 하나님 자신이 어겨가면서 특수한 시대적 필요성과 상황에서 베푸는 것이다. 또한 기적과 표적의 목적은 하나님의 증명과 하나님 말씀을 증명하는 것이다그 외의 다른 목적은 전혀 없다. 오늘날 사도 시대 이후는 예수님과 사도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확정되었다. 따라서 오늘날에 있을 수 있는 기적과 표적은 사도 시대나 예수님 공생애 시대, 예수님 초림전 시대와 전혀 다른 양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육체적 부활로서 표적을 완성하시며, 이것 밖에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셨다. 이 시대에 표적을 보이시지 않겠다라고 까지 하시며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을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계신다. 이 시대는 병고침이라든지 귀신을 쫓는 일에 있어서도 기적과 표적의 개념이 아니라 치유의 개념이며, 은사의 개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병고침과 귀신 쫓음을 기적 표적의 형태로 생각하여 드러내어 보이며 전시적인 효과를 일으키면서 사역하는 것은 잘못이다. 성경은 병든자가 있으면, 장로(목사님)들을 청하여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는 모본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기름을 바르라는 이야기는 당시의 치료적 상황에서 기름바르는 것이 치료 행위의 하나로 간주하는 것이라고 볼 때 정상적인 의사의 치료 행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수많은 기적과 표적을 기록하고 있지만, 반면에 말세에는 거짓 기적과 표적을 분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예수님의 속마음은 우리가 표적과 기적을 보고 비로서 믿거나 믿음을 굳게하기 보다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을 원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기적과 표적을 사역의 한방편으로 삼아, 이것을 집중화하고 원리화하는 것은 거짓 기적을 양산하는 결과만을 초래할 것이다.


기적은 오히려 이러한 것이다. 가을에 되면 온산이 빨갛고 누렇게 변화하는 것, 아프던 내 몸이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 치유력으로 건강하게 되는 것, 달이 한달을 주기로 이지러짐과 둥그러지는 것을 반복하는 것, 우주에는 셀수 없는 수많은 별들이 있음에도 지구가 다른 별들과 충돌하지 않고 그 궤도를 철저히 지키며 공전과 자전을 하는 것, 내가 지금 존재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고 있다는 것 그 자체...... 하나님의 창조하신 우주만물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법칙과 질서에 따라 운행된다. 이것은 놀라운 기적이다. 그런데 죄에 물든 인간은 이러한 기적을 당연한 것이라 여기고, 하나님의 법칙과 질서를 역행하는 것을 기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질서와 법칙을 자주 남발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질서와 법칙을 존중하며 이것을 기적이라고 하며 감탄하는 인간을 원하실까, 역행적 기적들을 보며 놀라워하며 그것을 좇는 모습을 원하실까 ? 잠간이라도 하나님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자. 성령님은 성부 하나님 성자하나님과 더불어 창조 사역에 참가하신 분이다. 성자하나님인 예수님의 생각이 우리가 역행적 표적을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을 원하시는데, 성령 하나님은 역행적 표적을 즐겨 베푸시는 분일까 ? 이와 같이 성령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생각은 불일치할 수 있는가 ?


<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 (마 16: 3-4)


< 예수께서  마음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 (막 8:12)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 ( 요 20:29 )


4) 꿈과 환상은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과 비젼을 의미한다.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 벧전 1:12 )


5) 입신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 앞에서 이루어지는 현상이다. 사도바울이 다메섹 석상세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 앞에서 쓰러졌다. 이러한 입신 현상은 성경에 여러차례 기록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 앞에서의 부복이라고 보아야 하며 이것이 일어난 특수한 상황이 있다. 그런데 오늘날 집회 현장에서 임파테이션( 성령 전이 )라는 사역 원리를 가지고 성도들을 쓰러트리는지 쓰러짐인지를 집중화 원리화하여 실시하는 것은 전혀 성경이 허용하지 않는다. 더욱이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이러한 쓰러트림을 행한 모본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성도와 치유 대상자들을 일으키기만 했다는 기록을 간과할 수 없다.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있어 가라사대 ( 행 9: 4)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 계 1:17)


6) 성령 집회들에 보이는 각종 감정적 현상들( 진동, 낄낄거림, 통곡, 짐승소리, 뒹굼, 몸부림 등등)이 성령의 임재할 시 일어는가에 대한 성경적 고찰이 필요하다. 이러한 현상들은 궂이 예수의 이름으로 하지 않는 다른 집회들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교적 집단에서 흔히 볼수가 있으며, 심리 치료 현장에서도 나타난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정서적 카타르시스라고 부르며, 치유의 도구로 사용한다. 왜 이런 현상들이 하나님(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집회에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해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사역하실 때 과연 이런 현상들을 도출하는 집회를 하셨는가 ? 답은 아니다이다. 그러면 성령님은 이러한 현상을 긍정하실까 ? 여기에 대해서도 아니다이다. 성령님은 지와 정과 의를 고루 갖춘 신격이시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신 분이 아니다. 특별히 감정적인 성품이거나, 기이한 것을 좋아하시는 그런분이 아니다. 온전하시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신다. 은사주의자들의 맹점은 성령님이 감정적이며 어떤 특이한 현상을 불러 일으키는 자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와 같이 감성이 풍부하시기도 하지만, 지적으로 칼같이 냉철하신 분이기도 하다. 성령의 열매의 하나로서 절제와 인내라는 것이 있다. 은사주의적 집회의 특징은 첫째 지나친 감성주의로 흐른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 감성을 절제하고 인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집회는 하나님께서 함께하는 자리이다. 이 자리에서는 사역자와 성도들이 오직 하나님만 드런내고 하나님께 마음을 온전히 드리는 모습을 보이며, 거룩한 교회의 모습이 보여야한다. 소위 성령 운동이라하며 벌이는 이 집회에는 이러한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은사주의자들은 성령이 임재하면 새술에 취한 상태가 된다고 한다. 이 말은 사도행전에 “ 저희가 새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 ( 행 2:13) 말을 인용하는 것이다. 새술에 취하게 되면 감정이 흥기되고 약간 분별력을 잃은 듯한 기분 좋은 상태가 된다. 성령의 새술에 취하게 된다고 그들이 언급하는 것은 이렇게 감정적인 상태, 어떤 황홀한 상태가 되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 그러나 성경을 보다 섬세하게 보지않으면, “ 또 어떤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라는 말씀을 놓칠 수 있다. 사도들이 각 나라 방언으로 열심히 모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행동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악한 사람들이 그들을 “조롱하여” “새술에 취하였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어떤 사람을 “성령의 새술에 취하였다”고 말한다면 그를 조롱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사도들이 새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각나라 방언으로 복음을 열정적으로 전하는 기적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어떤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행 2:13)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 신 5:32)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 신 28 : 14)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 갈 5:22-23)



나가는 말

성령의 현상은 온전함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품은 온전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에는 온전함과 거룩함이 있으며, 이 거룩하고 온전한 하나님앞에 인간들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경배할 뿐이다. 거룩함 가운데 있는 화평이요 기쁨을 누려야 한다. 지금 신사도 운동가들이 집회에서 보이고 있는 빈야드 현상들은 결코 성령의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신사도 운동가들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은사와 기적 표적에 대하여 바른 성경적 관점을 가지지 않고 그것을 집중화하고 원리화하여 성령운동이라는 것을 펼치고 있다. 은사의 남용과 오용이 흔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들은 성령에 집중하면서 성경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지 않고 유의하지 않는다. 거짓 기적과 심리적 현상들을 성령의 운동이라고 부르며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자기딴에는 진실과 충정으로 이 성령 운동에 임한다 하지만, 성경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대로 사역하지 않는 곳에는 성령께서 임하지 않을 것이다.


< 그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 ( 마 7: 22-23)


<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게 하리라 > (마 24:24>


<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 ( 고후 11: 13-15)









출처 :알파코스 원문보기 /양무리마을/ 글쓴이 : 푸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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