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을 읽어나가면서 우리가 발견해야 하고 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구약성경 속에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 곧 예표(豫表), 그리고 하나님의 한결같은 구속사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여자의 후손,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하셨고 이를 위하여 아브람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람에게는 아무 공로도 없고 게다가 늙어서 쓸 만한 구석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부르심, 그리고 도우심과 쓰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또 아브람이 복을 받은, 또 반드시 복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불러내실 때에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의미하신 복은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부귀영화나, 장수나, 후손이 아닙니다. 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브람은 복의 근원, 곧 예수 그리스도의 통로, 곧 구세주의 계보로 쓰임 받으려고 불러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에게는 복을 받을 자격, 복의 근원이 될 자격,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믿기는커녕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도 못 했고 예수님의 이름도 몰랐습니다. 코앞의 후사 걱정, 아들 없이 죽는 걱정으로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하늘의 무수한 별을 보이시면서 ‘네 후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후손은 ‘후손들’이 아닌 ‘후손’, 단수명사였습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후손을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의미하신 '후손'은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은 이를 정확히 지적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후손’이라고 말씀하신 그 ‘후손’은 복수명사 ‘후손들’이 아닌 단수명사 ‘한 후손’이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아브람은 “아니, 하나님, 왜 ‘후손들’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후손’이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은 기초문법도 모르십니까?”라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하신 말씀을 그대로 믿기만 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셈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를 “아브람의 의”로 여기실(인정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만일 아브람이 굳이 따져서 ‘후손’이 아닌 ‘후손들’의 약속을 받아내고 믿었더라면 의로 여기심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브람이 ‘후손’, 곧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자 그제야 하나님께서는 “나는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여호와로라.” 하심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하신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었다면 더 할 게 없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하고 증거를 요구하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도 믿지 못 하는 악하고 약한 존재인가 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증거, 예언, 계시 같은 것을 요구하는가 봅니다. ‘나는 여호와로라.’ 하시면서 자신의 이름을 거신 하나님으로서는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믿음 없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화도 안 내시고 아브람에서 삼년 된 암소, 삼년 된 암염소, 삼년 된 수양, 그리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하라고 지시하십니다.

  아브람은 이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히브리어로 ‘브릿트’하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습니다. 아브람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솔개가 내려앉을 때 쫓았습니다. 그러다가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밤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고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났습니다. 히브리어 “브릿트”는 같은 발음이지만 ‘쪼개다’라는 단어도 되고 ‘약속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도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중요한 약속을 할 때 짐승을 쪼개어놓고 그 사이를 함께 지나면서 약속을 합니다. 그 약속을 어길 경우에는 그 짐승처럼 쪼개어져 죽임당하겠다는 뜻이 됩니다. 목숨을 거는 약속인 셈입니다. 거기를 하나님이 연기 나는 풀무와 타는 횃불로 지나신 것입니다. 아브람은 그리로 함께 지나지 않았습니다. 정작 그 복을 받을 당사자인 아브람은 자빠져(?) 잠자고 하나님 혼자서 ‘하나님의 목숨을 건’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왜 삼년 된 희생물들일까요? 그것들은 삼년 공생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새는 왜 쪼개지 아니하였을까요? 비둘기는 성령을 뜻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솔개는 왜 덤벼들었을까요? 솔개는 훼방하고 의심케 하는 사단의 무리였을 것입니다. 그것을 쫓는 것은 아브람의 몫이었습니다. 그리고 타는 횃불, 한없이 뜨거운 사랑과 ‘열심’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이 그 사이를 지나셨습니다. 그것은 그 아들을 참혹한 십자가에 내어주실 약속이었습니다. 아들을 쪼개어 지성소의 장막을 가르고 부르신 자들이 그리로 지나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실 것을, 죄인들이 피 흘려 죽으신 그 아들의 몸을 지나면서 그 피로 모든 죄를 씻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복되게 하실 것을 아브람에게 보여주시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람이 그걸 이해했을까요? 못 했겠지요. 그러나 그 광경은 결코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뇌리에 깊이 박혀 일평생 한시도 잊지 못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광경은 피가 흐르는 참혹한 십자가의 광경의 예표였기 때문입니다. 구속함을 받은 모든 성도들에게 일평생 결코 잊혀질 수 없는 그 참혹한 십자가의 광경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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