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같은 기나긴 기다림

 

하나님은 아브람만을 구원하려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죄인,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이 구원을 이루시려고, 그 혈통을 그리스도의 계보로 만드시고 마침내 때가 차매 그리스도를 그 후손으로 보내시려고, 그리하여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시려고 아브람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없는 아브람에게 믿음을 심고 믿음을 기르시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아브람의 후손들”의 믿음이 아니라 “한 후손, 곧 그리스도”의 믿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밤하늘의 별을 보이시며 “너의 한 후손이 저같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너의 후손들이”라고 하신 게 아닙니다. 한 후손, 곧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십자가에서 찢어지고 흘러내려 온 세상을 뒤덮고 그 살과 피를 먹고 생명을 얻은 자들이 하늘의 무수한 별처럼 될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아마 아브람은 하나님이 왜 ‘너의 후손들’이라고 하시지 않고 ‘너의 한 후손’이라고 하셨는지 이해하지 못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그냥 믿었습니다. “아니, 후손들이라고 하지 않고 왜 한 후손이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은 문법도 모르십니까?” 하고 따져 묻지 않고 그냥 그대로 믿은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셈이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너를 이끌어낸 여호와로라.” 하고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증표를 요구하는 아브람에게 삼년 된 암소, 암염소, 수양과 비둘기를 준비하게 하시고 그 쪼갠 사이로 지나시는 확실한 맹세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다음 그러나 하나님은 부르신 아브람과 그 후손들에게 즉각적인 복과 영광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왜 하나님은 택하시고 부르신 자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기나긴 400년 세월의 고난을 받게 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그 이유를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러셨을까요? 겪어보지 않고서는 알지 못 합니다. 아픔과 슬픔을 당해보지 않고 어찌 짐작만으로 알 수 있으며,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고서 어찌 배고픔과 삶의 무게를 알며, 죄악과 병과 죽음과 사랑과 이별의 고통을 당해보지 않고서야 어찌 인생의 의미와 아픔과 슬픔과 죽음의 무서움을 알겠습니까? 인생에 고통이 없다면 즐거움과 기쁨 또한 없을 것입니다. 고통과 죽음과 멸망의 무서움을 모른다면 생명의 감격과 구원의 감사도 모를 것입니다. 애굽의 고통 없이 그대로 가나안 땅을 얻어서 행복하게 살았더라면, 하나님 없는 무서움, 죄악과 죽음, 원수의 핍박과 저주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무서운 것인지를 그들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애굽에서의 죽음과도 같았던 사백년의 기나긴 압제가 없었더라면, 혹은 그 압제가 그저 몇 년이나 몇 십 년 잠시 지나가는 맛보기였다면, 열 가지 재앙으로 원수들을 징치하고 그들을 구원해 내신 하나님의 유월절의 감격과 홍해의 기적도 그들에게 큰 감사가 되지 못 하였을 것입니다.

 사백년이 얼마나 긴 시간이었을까요? 애굽의 종이 되어 채찍질당하며 할아버지가 죽고, 아버지가 죽고, 아들이 죽고, 또 손자가 죽고.... 아무 소망이 보이지 않는 기나긴 세월, 하나님께서 잊어버리신 것만 같은, 떠나버리시고 영영 다시는 오시지 않을 것 같은, 하나님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계시지도 않는 것 같은 고통과 침묵 속에서, 오직 믿음만을 붙잡고 대대로 죽어가고 묻혀지고 썩어지고 사라져가야 하는 그 기나긴 세월 동안 백성들은 얼마나 지치고, 얼마나 절망하고, 얼마나 의심하였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고통의 사백년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기나긴 기다림은 연기 나는 풀무와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약속”이었습니다. 절대로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 말입니다. “사백 년 동안”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자라면 누구에게나 있어야 하는 기다림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다만 '젖과 꿀이 흐른 가나안 땅'의 복이었다면 그렇게 기다리게 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의 복이었기 때문에 사백년을 기다리게 하신 것일 것입니다. 고통을 아는 자만이, 슬픔을 아는 자만이, 생명을 갈구하는 자만이 죽음과 같은 기다림을 그리스도의 소망으로 이겨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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