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조차 없는 믿음의 계보

 

 2년이 지나도 세월호 사고의 여파는 아직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300명 넘는 생명들을 바다에 수장시키고 그들의 교주 유병언을 피신시키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구원파의 교리는 “죄사함의 비밀”과 “의인됨”입니다. 구원파 박옥수 목사가 즐겨 하는 단골메뉴 설교가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예수님께 세상죄를 지우는 안수를 하였고 그 죄를 지시고 주님은 3년 동안 돌아다니시다가 십자가에 죽으셨으며 누구든지 이것을 깨달으면 의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 보세요. 오른손의 죄가 왼손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러면 오른손에는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 보세요. 여러분의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는 죄가 남아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렇지요. 죄가 넘어갔다면 죄가 없지요. 이것을 믿으면 죄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 없는 사람은 무엇이 됩니까? 그렇습니다.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믿음의 코드만 꽂으면 자신의 모든 죄가 예수님에게 넘어가고 자신은 의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설교는 특히 구원의 확신이 없는 연약한 기성교회 교인들에게 잘 먹혀 들어갑니다. 이 비밀을 깨닫기만 하면 의인이 된다니, 그것이 죄사함의 비밀이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이며 충격이며 감격이겠습니까? 구원파들이 기성교인들을 공략할 때 잘 써먹는 말이 있습니다. “구원 받으셨습니까?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연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두려움을 주는 질문들입니다. 그 질문들 앞에 믿음이 연약하고 구원의 확신이 없는 기성교회 교인들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요한의 세례가 인류의 죄를 예수님께 떠넘긴 안수식이었을까요? 그들의 “죄사함의 비밀이니 거듭남의 비밀”이란 요한의 세례를 "죄 넘기기 안수"로 바꾼 교묘한 말장난으로 만들어내는 착각과 모순의 교리입니다.

 그들은 “죄사함의 비밀”을 깨달아 “의인”이 되었다고 하지만 의인이 구원을 의미하는 동의어는 아닙니다. ‘죄사함의 비밀“을 깨달았다고 스스로 의인이 되고 스스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깨달았으니 나는 의인이 되었고 무조건 구원 받았다.“니, 자기가 무슨 심판자입니까? 그들이 말하는 ”깨달았으니 죄사함 받은 의인 되었고, 의인 되었으니 구원 받았다."는 것은 제멋대로 생각, “아전인수(我田引水)”입니다. 제맘대로 죄를 씻고 의인이 되면 무조건 하나님께서 구원하셔야 한다면 하나님이 의인에게 복종이라도 하셔야 한다는 말인가요? 성경이 그렇게 말씀합디까? 설사 당신이 의인이 되었다 할지라도 구원하고 말고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일입니다. 제가 뭘 깨달았다면서 하나님께 구원을 요구하다니,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무서운 죄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죄인이었던 자가 박옥수, 유병언이 설교 한 번 듣고 “죄사함의 비밀”을 깨달았다고 의인이라면서 하나님 앞에 나서서 얼굴을 쳐들고 구원을 마음대로 결정하다니, 구원파란 실로 뻔뻔스러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 "죄사함의 비밀"을 모르고 의인이 되지 못 한 기성교회 교인들이 금수, 곧 짐승들입니다. 유병언이 죽었지만 지금도 구원파 교인들은 그들만의 이 믿음과 비밀을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구원파 교리가 어떻게 소위 똑똑한 사람들에게까지 먹혀드는지 어이가 없습니다.

 구원파 이야기가 좀 길었군요. 아무튼 구원, 그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 받는 자의 뜻과는 아무 상관없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입니다. 창세 전에 택하시고 택하신 자를 부르시고 아들을 내어주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인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후손의 약속, 즉 그리스도의 약속을 하신 것도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입니다. 쪼갠 고기 사이를 연기 나는 풀무와 타는 횃불로 지나신 것은 하나님이셨지 아브라함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뭔지도 모르고 그저 순종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영원히 변함없고 변개함 없는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람의 뜻이나 행위로 변경되거나 달라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자,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약속하셨으니 아브람과 사라가 할 수 있는 일은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이 하시고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전망이나 예상이 아닙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느껴지는 것, 예감조차 없는 깜깜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에게나 사래에게는 그 믿음이 없었습니다. 하란땅을 떠날 때 65세였던 사래는 그 사이에 76세나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후손이 하늘의 별 같아지리라 하셨건만 할머니에게 후손이라니, 다 늙어빠진 두 사람에게 후손이란 그야말로 아무런 전망도 없고 가능성도 보이지 않는 그런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지 못 한 사래는 자신의 몸종 애굽여자 하갈을 남편에게 주었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서, 자기가 나서서 무엇인가를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아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감히 전능하신 하나님을 돕기로 한 것입니다.

 당시 풍습으로 자신의 몸종을 남편에게 주어 후사를 잇도록 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종은 주인의 소유이며 주인이 뜻대로 사용할 수 있고 종을 남편에게 주어서 낳는 자녀도 자신의 자녀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래는 '이것이 아무래도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하여 그렇게 한 것일 것입니다.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돕기로 한 사래의 아이디어, 그리고 이를 수락하는 아브람. 그들의 이러한 생각과 행동은 그러나 씻을 수 없는 아픔과 후환을 남기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루실 일을 자신들의 일로 끌어내리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하갈이 잉태하면서 바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잉태함을 알자 주인인 사래를 멸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자신의 조그만 공로나 우월함으로도 즉각 교만함이 드러나는 죄악 된 존재입니다. 화가 난 사래는 남편 아브람에게 따집니다.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사래의 말이 맞습니다. 사래의 잘못이 아닙니다. 잘못이라면 하나님과 아브람의 약속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자신의 여종을 남편에게 준 것뿐입니다. 아브람은 대답합니다.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여종과 짝지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부부는 한 몸입니다. 아브람과 사래는 한 몸이며 이들의 잘못 된 결정과 행동은 그들의 공동책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지 못 한 행동의 결과, 곧 죄의 열매인 것입니다. 아니, 결정적인 잘못은 한 몸 아닌 몸종을 통하여 하나님이 약속하신 후사를 얻겠다고 합방한 아브라함에게 있다 할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믿음조차 없었고 계보로의 자격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계보를 통하여 마침내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믿기만 하면 의인이 되고 구원을 받는다고요?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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