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터키에서 목회하는 목사님이 하신 이야기입니다. 한 번은 오병이어 말씀을 전하는데 “여자와 어린아이를 제하고 오천이었더라.” 하는 대목에서 한 여자성도가 발딱 일어나더니 “아니, 성경에서 왜 여자는 빼요? 여자는 사람 아닙니까?” 하고는 휑 나가 버리더랍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참 여자들의 한이 서린 것 같습니다. 우선 여자들은 이름도 없었습니다. 그저 누구 엄마, 무슨 댁으로 불렸습니다. 저의 조모님도 이름이 없었습니다. 백부님 이름으로 누구 엄마, 친정인 하회의 지명으로 화회댁으로 불리웠을 것입니다. 지금도 족보와 호적, 그리고 묘비에 조부님 이름 옆에 “하회 유씨”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에게는 공자의 가르침을 따라 칠거지악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아내를 쫓아내는 일곱 가지 악행이라는 겁니다. 시부모를 공경하지 않거나, 아들이 없거나, 음탕하거나, 질투를 하거나, 나쁜 병이 있거나, 말이 많거나, 도둑질을 하는 일곱 가지 중 하나라도 범했을 경우 여자를 좇아내는 겁니다. 그러나 칠거지악에 해당되더라도 삼불출이라 하여 내쫓아도 갈 곳이 없거나, 함께 부모의 삼년상을 치렀거나, 전에는 가난했다가 살림을 일으킨 경우는 쫓아낼 수 없도록 하였답니다.

 세종실록을 보면 칠거지악과 삼불거의 사례가 기록되어 있는데 좌찬성(左贊成) 이맹균(李孟畇)의 처 이씨(李氏)가 (이 분도 이름이 없군요.) 아들도 낳지 못 하고 나이가 거의 일흔이 되었는데 남편이 계집종을 총애하자 이를 질투하여 계집종을 움 속에 가두고 학대하여 굶겨 죽였답니다. 세종임금은 사간원에서 이맹균을 탄핵하는 상소를 받고 그를 귀양 보냈으나 그의 부인은 벌하지 않았습니다. 사헌부에서는 부인 이씨가 자식도 없고 질투가 심하여 계집종을 잔인하게 죽여 칠거(七去) 중 이거(二去)를 범했으니 내쫓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세종은 삼불거를 인용하여 '전에는 빈천하다가 나중에 부귀해지면 버리지 못하는 것이고, 함께 삼년상(三年喪)을 입었으면 버리지 못한다.'면서 부인을 이혼시킬 수 없다고 하였답니다. 역시 세종임금은 착하고 어질고 총명한 명군(名君)이요 특히 여자에게 너그러웠던 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래라는 여자도 자식 못 낳은 채 늙었고, 몸종 하갈이 잉태하자 하갈과 싸우고 남편에게 바락바락 대들면서 “이 욕은 당신이 먹어야 옳도다.” 하고 따졌으니 칠거지악 중 이거(二去) 내지 삼거(三去)를 범한 셈입니다. 그러나 드센 사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당신 눈에 좋은 대로 하시오.”라는 항복선언을 받아내고 배가 불렀을 하갈을 쫓아냅니다. 그야말로 남편을 공처가로 만든 순악질 여사요 당찬 여장부요 여권운동의 선구자인 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갈을 다시 주인에게 돌려 보내고 사래는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고 광야에서 돌아온 하갈을 맞아들이고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을 키우며 13년을 지났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99세 때, 사래가 89세, 때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이 오셔서 아브람에게 “너는 내 앞에서 걸어 흠이 없으라,” 하시고 “너는 아브라함이다. 열국의 아비다. 내가 대대로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할례를 받으라....”고 다시금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성경에는 이 때 사래가 곁에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일 사래가 이를 보고 들었다면 그 마음이 어땠을까요? 남편을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거칠고 메마른 가나안 땅에 와서 하마터면 바로왕의 왕비, 아비멜렉의 아내가 될 뻔도 했던 위기(기회?)를 넘기며 고생했는데, 남편의 뒷바라지를 한 것으로 만족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하는가, 결국 자신의 자리에는 몸종 하갈이 들어와 앉고 자신의 자식 대신 하갈의 자식 이스마엘이 뻐꾸기 새끼처럼 자신의 안방에 들어앉아 자라나고 후사가 되는 것인가, 자식을 낳지 못 하는 것 때문에 결국 이대로 구세주의 계보에 이름도 올리지 못 하고 죽어 사라져야 하는가, 그런 생각이 안 들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계보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가야 했습니다. 구원의 줄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래는 이미 늙었고 아무런 힘도, 희망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래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름을 사라라 하라. 열국의 어미가 되리라.” 아브라함이 기가 막혀 웃었습니다. “이스마엘이나 살게 하시지요. 하나님도 주책이시군요.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하십시오, 사람 웃기지 마시고.” 그러나 하나님은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너에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이삭, “웃긴다”고 하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만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여자의 후손의 계보로 삼으시려고 그 아내 사래도 부르신 것입니다. 사래를 부르신 것은 사래가 가진 생식능력을 쓰시려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사래를 통하여 행하시려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게 되는 그 역사를 이루실 것을, 할망구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말도 안 되는 웃기는 일"을 사라를 통하여 보이시려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 시대의 사래들이여. 그 하나님께서 그대들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대들을 불러내시고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 그대를 통하여 많은 영적자녀들이 나고 열국을 이루기 원하십니다. 그대들을 일으켜 새 이름을 주시고 힘 주시고 낳게 하실 것입니다. 그대들의 가진 능력을 쓰시려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일어나 웃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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