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장 52-55절)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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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자에게 갈등은 반드시 일어나야 합니다.
복음을 듣고도 마음의 갈등이 일어나지 않고 사람들 간의 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무엇인가 잘못 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을 보면 주님은 불을 땅에 던지려 왔노라 하시고 주님의 말씀 때문에 분쟁과 다툼이 일어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진리와 비진리, 빛과 어두움, 생명과 사망 간의 영적전쟁이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 주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대인들 가운데, 영어성경을 보니 'sharp'라고 되어 있지요? sharp한, 날카로운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 다툼은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살을 먹으라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것이지요.

우리는 여기에서 이들 유대인들을 강퍅하다 비난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의문과 다툼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자기 살과 피를 먹으라니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
예수님을 알지 못 하기 때문에 일어나야 하는 다툼입니다.
그 다툼은 오늘날에도 복음을 전해 듣는 사람의 마음속에, 그리고 많은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설명을 하지 않으십니다.
친절하시고 훌륭하신 선생이신 예수님이 왜 여기에서는 구체적이고 자세한 설명을 아니 하시는 것일까요?
“이보게, 다투지들 말게.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란다. 너희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어야 한단다. 너희를 살리려면 그 길밖에 없단다. 그것을 믿는 것이 곧 내 살과 피를 먹는 거란다,” 왜 이렇게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시지 않느냐 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하나님께서 내어주신 화목제물입니다.
그 때문에 오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죽어주시는 것 외에는 우리를 구원할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을 먹지 않고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도 없고 생명을 얻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일이 이루기까지 그 말씀을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러 오셨다는 것을 알지 못 했습니다.
예수님 자신 얼마나 답답하셨겠습니까?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12:50)

예수님이 그 비밀을 처음, 조금 밝히신 것은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가셨을 때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하였을 때 교회와 천국열쇠를 말씀하시고 비로소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 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에게 핍박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만류하였고 주님은 꾸짖으셨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그러므로 지금 주님은 그 비밀, 그리스도의 구원의 비밀을 유대인들에게 설명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멸시 당하시고, 배척당하시고, 욕설과 침뱉음 당하시고, 채찍 맞으시고, 가시관을 쓰시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모욕과 조롱을 받으시며 목마름과 고통 속에서 죽임 당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신다 해도 유대인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것은 지금은 이들이 알아듣지 못 한다 해도 이 유대인들 가운데에 나중에 믿음으로 구원 받을 자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십자가 처형과 부활승천 후에야 비로소 깨닫고 통곡하며 주님 앞에 엎드릴 자들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훗날 이 성경의 기록을 보고 믿음으로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고 영생을 얻어야 할 저와 여러분 같은 신약성도들 때문일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우리가 받아먹는 주님의 살과 피는 만나와 전혀 다릅니다.
만나처럼 배고픔이나 해결하고 육신의 생명이나 연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생명입니다.
그 생명은 주님과 연결되고 하나님과 이어지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 내 안에 주님의 생명이 들어오고, 내 안에 주님이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거하고, 그리하여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 영원히 거하는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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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라 불리며 팔리는 여성들!

취급 당하는 임신 여성들


북한 인권의 참상에 관한 두 가지 장면을 소개한다. 아래는 탈북시인 장진성의 저서 ‘경애하는 지도자에게’ 중 일부로서, 장 시인이 중국에서 조선족·탈북자와 주고받은 이야기다.


인권의 과잉과 오남용 홍수에 휩쓸린 남한은 소위 동성애차별금지법 제정 등 자신이 자신의 성(性)을 결정할 자유도 인정해 달라는 주장까지 판을 치나, 정작 북한은 기본적인 인간의 존엄과 가치도 보장되지 않는 곳이다. 남한 사람의 이기적이고 왜곡된 인권담론이 보편성을 잃게 되는 또 다른 이유가 여기 있다.


1. 돼지라 불리며 팔리는 여성들


“여기 중국에서 탈북 여성은 돼지라고 해요. 중국 시골은 돼지가 재산이거든요. 그래서 돼지라고 해요. 나이나 생김새에 따라 등급이 정해지는데 1등급은 2만 위안, 2등급은 1만5000위안, 3등급은 1만 위안 정도 해요. 브로커가 거기서 절반을 가져가죠. 그러니깐 미국 돈으로 계산하면 1등급은 1500달러 되려나, 2만 위안에 팔려가는 정도면 그래도 좀 나은 집에 가요. 그 이하의 여성들은 중국에서도 제일 외진 시골이나 장애인들에게 가죠. 거기 가면 평생 썩어야 되요.


중국 시골은 아직도 미개해요. 듣자니 여자가 도망치지 못하게 밤이면 발목에 쇠고랑을 채운 다네요. 생각해보세요. 저들은 큰 맘 먹고 돈 들여 샀지만 국경까지 넘어온 북한 여자들이 그러고 살겠다고 하겠어요? 그래서 자꾸 도망치니깐 그게 소문나서 애 낳고 마음 붙일 때까지는 가두어 놓는다네요.” 신 모는 중국에 떠도는 탈북자 여자들 숫자만 자기가 알기로는 10만 명 정도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조선족 탈북자 브로커 신 모의 증언)


2. 개 취급당하는 임신 여성들


“먼저 여자들만 따로 모아 옷을 다 벗기고 손가락을 집어넣어 생식기 안까지 뒤져요. 감춘 돈이 있나 해서요. 임신한 여자들은 완전히 개 취급당해요. 내가 북송될 때에도 한 여자가 임신 7개월이었는데 중국 놈 씨앗을 배어 갖고 왔다면서 군홧발로 마구 걷어차서 그 여자는 기절했었는데 끝내 죽었어요.


보위부 감옥에 끌려가면 그땐 더 죽고 싶어요. 며칠 동안 잠 안 재우고 고문하면서 단순 탈북인지 아니면 한국이나 미국에 가려고 했는지부터 조사해요. 그런 다음 한국에 가려고 했던 사람들은 정치범수용소로 보내고 나머지는 노동교화소 3년짜리 보내는데 교화소 간 사람들도 못 견디고 그 안에서 죽거나 병신 되고 말아요.


그래서 저는 거기까지 못 가겠더라고요. 죽자고 하니깐 살게 되더라고요. 자살하려고 머리핀을 먹었죠. 놈들이 시병원에 실어갔는데 침대에 누워서 가만히 들으니깐 ‘이런 지독한 년은 무조건 남조선 가려고 했을 것’이라면 ‘눈만 뜨면 6개월짜리 예심실로 이송하라’고 하더군요.


마침 밤이어서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도망쳐서 또 강을 넘고 말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신기해요. 그때 머리핀을 뽑고 대충 실로 꿰맨 배가 다시 벌어졌는데도 강을 넘을 때까지 이상하게도 아프지 않더라고요. 정말 안 아팠어요.” (함흥 출신 한 탈북자 여성의 증언)



출처: 리버티헤럴드 (http://libertyherald.co.kr/article/view.php?&ss[fc]=2&bbs_id=libertyherald_news&doc_num=10969)




말도 안나오는 끔찍한 일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와 가장 가까운 저 북녁땅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북한정권과 북한주민을 구별하지 못하고

북한을 바라보는 관점이 제대로 바뀌지 않으면,

북한은 영원히 저런 저주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이 정말 정신차리지 않고, 분별하지 못한다면,

교회(그리스도인)가 분별하지 못하고, 관심갖지 않고,

회개치 않고, 이런 상태로 계속 나아간다면,

하나님이 북한땅을 여실리 만무합니다.

되려 우리에게 심판이 임할까 두렵습니다.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도

이땅의 교회와 성도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통회와 자복하며 행동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심판을 부르는 한국교회 지도자들!

 

 




끊이지 않는 살육!

 

끊이지 않는 살육 속에서 북한 주민들이 절규합니다. 말을 할 수 없는 탄식 속에서 북한 주민들은 절박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북한 정권의 철권통치 아래서 극도로 신음을 하며 소망이라곤 전혀 없는 처절한 지옥같은 상황 속에서 북한 주민들은 발버둥칩니다.

 

끔찍하게 죽어가는 북한 주민들에 대한 하나님의 무너진 마음 그리고 북한 주민들의 신음과 핍박 그리고 아픔들이 바로 남한 교회를 향한 심판의 다림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북한 주민들의 인권유린에 대하여 경종을 울리지 않고 침묵하는 수많은 남한 교회들에게 진노하고 계십니다.

 

북한 정권의 칼부림 아래서 극도로 탄식하는 북한 주민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북한 정권과 거짓 평화를 외치며 북한 정권을 어르고 달래는 것은 개인적 차원의 악독함을 넘어서는 국가적 차원의 악독함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다가 걸리면 총살당하는 처절한 상황 속에서 풀을 뜯어먹으며 연명하는 북한 주민들을 애써 외면하고 김일성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봉수교회에 남한 교회 성도들의 헌금을 바치는 사역자들은 무슨 연유인지 이에 대하여 무감각합니다.

 

적그리스도의 영으로 창궐한 영적 불모지 북녁 땅을 위한 기도보다 이땅에서의 안위를 위해 기도하는 우리의 악독함을 하나님은 조명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잔인한 이기심입니다. 수천만명을 학살한 짐승같은 정권과 무슨 경제협력이며 수백만명을 굶겨 죽인 사탄 정권과 무슨 연방제입니까?

 

한낱 인간에 불과한 김일성을 신으로 숭배하는 북한 정권은 무너져야 합니다. 북한 정권을 협력의 대상으로 보는 인본주의 시각은 부서져야 합니다. 종북좌파 세력은 무너져야 합니다.

 

철권통치 아래서 극도로 신음하는 북한주민들의 탄식에 대한 남한 교회의 태도가 바로 남한을 향한 심판의 다림줄입니다. 현재 남한 교회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남한 교회는 이것을 뼈저리게 자각해야 합니다.

 

 

글 출처: '예슈아 제4권' 수록글 (예슈아 출판사)

http://cafe.daum.net/biblemunjanara

 

 

지옥의 사자들!


"저희에게 임금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 음으로 이름은 아바돈이요 헬라 음으로 이름은 아볼루온이더라" (계시록 9:11)


오늘날 현실주의자들은 영생과 지옥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영생이 없다면 지옥도 없으며, 예수께서 오셔야 할 이유도 없었으며 십자가의 공로도 없을 것이며,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며 주께서 다시 사셔야 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옥과 대치되는 천국도 그 매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므로, 이 땅에서 낙원을 건설하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큰 모순이 될 것이다.


성경에는 지옥을 몇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우리가 말하는 보편적인 지옥인 ‘음부’는 ‘하데스’(Hades)로서 구약의 ‘스올’(Sheol)과 동일하다(사 14:15). 이곳은 구약의 백성들도 모두 들어갈 ‘영혼들의 임시거처’로서 고통의 공간과 위로의 공간으로 나뉘었다. (눅 16:23-31).


예수님은 ‘하데스’라는 단어를 4번 사용하셨는데 누가복음 16장에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간 곳에서 두번 인용하셨고 또 가버나움을 향해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까지 낮아지리라’(마 11:23)고 하셨으며,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8)고 말씀하셨다.


또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음부의 열쇠를 갖고 계시다’(행 2:27)고 선언하였고 사도 요한도 ‘주께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다’(계 1:18) 기록하였으며 ‘바다와 사망과 음부가 그 가운데 죽은 자들을 심판대로 내어주며,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져진다’고 기록되었다. (계 20장)


계시록에 7번이나 소개된 ‘무저갱(abusso/구덩이)’은 땅 속 중심부 깊은 곳에 있는 지옥으로 멸망받은 귀신들의 처소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제 내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지우리로다’ (사 14:13-15)고 기록하였으며, 유다서에는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다’고 기록되였다.


누가복음 8장에는 거라사인 땅의 무덤에 있던 군대귀신 들린 사람 속에 있던 귀신이 주 앞에 무릎을 꿇고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고 있다. 또한 계시록 17장에서는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가 소개되었으며, 마귀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에게 결박되어 무저갱에 던져진다(계 20:1-3).


그러나 천년 후 사단은 잠시 풀려 나와 세상을 미혹한다. 성경에는 또 마지막 날에 적그리스도가 들어갈 ‘게헨나’(Gehenna/유황지옥)가 소개되어 있다. 이곳은 귀신들을 가둔 무저갱이나 죽은 자들의 영혼이 임시 거처인 하데스와 달리 적그리스도와 그 추종자들이 형벌을 받는 유황지옥으로 666 표를 받은 영혼들이 들어갈 곳이다(계 20:15).


또한 흥미로운 곳은 ‘타르타스’(Tartatus / 감옥)이다. 베드로는 주께서 음부에 내려가셨던 일을 기록하여 ‘저가 또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고 기록하였으며 ‘그들은 노아의 날 방주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의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한 자들이라’ (벧전 3:20)고 증거하었다.


따라서 이곳은 창세기 6장에서 언급된 타락한 천사들을 가둔 곳으로 오늘 계시록 9장에서 소개된 여섯째 천사의 나팔과 함께 풀려날 유브라데스 강에 결박한 천사들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그 어떤 지옥도 두려워 할 것이 없다. 이미 예수께서 내가 너희의 처소를 준비하러 아바지께로 가니 준비하면 다시 데리러 오리라고 하셨다. 사단 권세를 이긴 예수님은 ‘내가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다(계 1:18)고 하였다.


그러므로 지옥의 사자들은 주를 믿는 자에게는 전혀 관계가 없다. 우리에게는 천국이 예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상실치 않기 위해서는 더욱 더 경건하고 굳건한 믿음 위에 서야 할 것이다. 아멘, 아멘!


- 이요나 목사님



출처: 동성애탈출 탈반시티 원문보기   글쓴이: 요나짱

안토니 후크마(Anthony A Hoekema, 1913-1988)의 기독교 역사 해석

 

 

1. 역사는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서 움직여진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역사를 그의 목적을 따라 역사하신다. 창조, 구원, 심판 모든 것이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목적으로 되어진 사건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이 사건들을 단지 저절로 이루어졌거나 자체적으로 해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그의 말씀에서 계시하셨지만 성경에 기록된 그 사건들에서 먼저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계시는 말씀과 사건들을 통하여 나타났다고 후크마는 강조한다.

 

 

2.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만 아니라 모든 민족 모든 나라를 주관하시는 분이다. 그리고 인간의 되어지는 모든 일들도 주관하신다. 물론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시지는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에 역사는 의미가 있고 일정한 방향을 가지고 있다고 후크마는 강조한다.

 

 

3.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심이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오스카 쿨만은 예수의 초림은 전쟁에 있어서 승리를 결정짓는 D-day였다고 하면 예수의 재림은 적들이 완전히 항복하는 V-day라고 말한다. 성도들은 이 두 날 사이에 살고 있다고 한다. 예수의 오심이 역사의 중심이라고 하는 것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 전의 모든 예언이 성취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래의 일들이 결정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인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전히 지배되고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고 후크마는 강조한다.

 

 

4. 새 시대는 이미 도래한 것이다.

 

신약 성도들은 자신들은 마지막 때, 마지막 시간에서 살고 있다고 믿었다. 후크마는 이 사실을 세례 요한에 관한 예수님의 평가에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눅7:28)라는 말씀에서 요한은 비록 메시야를 예비한 자이지만 이 전 시대에 속한 자이고 이제 그리스도가 도입하는 새 시대에 속한 자는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큰 자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골1:13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말씀한다. 이미 우리는 이전 시대(the old aeon)에서 새 시대(the new aeon)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또 ‘육체’(flesh)와 ‘영’(spirit)의 구분이나 옛사람과 새 사람의 구분 역시 이전 시대와 새 시대의 구분이라고 한다.

 

 

5. 역사의 모든 것은 목표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즉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비록 그리스도가 이미 새 시대를 불러왔지만 마지막 완성의 때는 아직 미래에 있다는 것이다. 이 완성의 때는 비단 인간의 구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우주적 차원에서 (천사와 마귀도 포함하여) 하나님의 심판과 다스리심 아래 있게 되는 것이다.

 

 출처: (안산) 회복의 교회/전상범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3. 신율법주의의 칭의론 / 박재은



신율법주의는 네오노미아니즘(neonomianism)으로도 불립니다. 개념적으로는 반율법주의(안티노미아니즘)와 반대입니다. 반율법주의가 칭의의 방정식에서 인간의 행위를 배제하기 위해 노력하는 신학적 방향성을 가진다면, 신율법주의는 인간 행위의 필요성을 새로운 방식으로 강조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법, 예수 그리스도


청교도였던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년)의 칭의론이 신율법주의로 평가되곤 합니다. 백스터에 의하면 죄인이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이중적(twoford) 의가 필요합니다. 첫 번째로 필요한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새로운 법"(new law) 입니다. 두 번째로 필요한 의는 죄인의 믿음과 회개입니다. 죄인은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 "새로운 법"에 순종할 수 있게 되고, 이를 통해 의롭게 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법에 믿음으로 순종함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백스터의 가르침은 대니얼 윌리엄스(Daniel Williams, 1643~1716년)에 의해 더 구체적으로 발전합니다. 독립파였던 아이작 초운시(Isaac Chauncy, 1632~1712년)는 백스터의 칭의론을 반대하면서 윌리엄스와 정면으로 부딪힙니다. 초운시가 생각할 때 백스터의 칭의론은 또 다른 형태의 율법주의였습니다. 왜냐하면 초운시는 만약 새로운 법을 순종하는 데 인간의 믿음. 순종. 회개가 꼭 필요하다면, 그것은 칭의의 "조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행함"으로 칭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율법주의의 또 다른 형태라고 본 것입니다.


백스터의 신율법주의적 칭의론은 존 페스코(John Fesko), 제임스 패커(James Packer), 한스 부르스마(Hans Boersma) 같은 학자들에 의해 비판을 받습니다. 새로운 법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칭의의 조건으로 강조되면 율법주의적 칭의론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유려 때문입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있습니다. 티머시 보거(Timothy Beougher) 같은 경우에는, 백스터가 강조하는 믿음과 회개의 행위가 칭의의 공로적 원인이 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백스터를 신율법주의로 간단히 규정하는 것에 대해 경계를 표하기도 합니다.


행함의 역할 강조


신율법주의의 칭의론과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은 칭의에서 적어도 인간의 역할에 주목한다는 측면에서는 비슷합니다. 그러나 그 둘은 동일하게 보면 안 됩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은 인간이 믿는 "행위"가 공로적 조건으로 사용되어 그 중요성이 꽤 크다고 본다면, 신율법주의의 칭의론은 새로운 법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행위가 의롭다 칭함을 받기 위해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율법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은 인간 역할의 중요도에서 정도의 차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겠습니다. 신율법주의는 반율법주의의 칭의론과 비교해서는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더 강조하는 칭의론입니다.


신율법주의가 칭의의 방정식에서 새로운 형태로 인간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했다면, 다음에 살펴볼 하이퍼 칼빈주의의 칭의론은 극단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역할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더 강조하려고 노력합니다. 이처럼 교회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 강조와 인간의 책임 강조 사이의 시소게임이 의와 관련해 끊임없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박재은의 '칭의, 균형있게 이해하기'에서 발췌(33-36p)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그야말로 쟁반같이 둥그런 보름달이 샛노란 빛을 발하여 더욱 청승스런 기운을 뿜어내는 늦가을 밤, 갈바람 소리 스산해서인가 밤이 깊어가건만 어인 일인지 통 잠을 이룰 수 없다. 오지도 않는 잠을 청하느라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뒤척이고 있으려니까, 새까만 밤하늘의 별들처럼 두 눈은 점점 더 초롱거리고 머리는 더욱 맑아진다. 이런 때는 차라리 귀뚜라미의 합창소리나 들으며, 성삼문의 詩라도 한 편 읊어보리라, 창문을 드르륵 열고 쏟아져 내리는 달빛 속에 베토벤의 교향곡만큼이나 가슴 설레일 귀뚜라미들의 합창 소리를 기대하며 귀를 쫑긋 세워보지만, 귀뚜라미 소리는커녕, 개구리 한 마리 우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아뿔싸,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지금 시골 고향 집에 내려와 있는 것이 아니다. 도심의 밤, 하늘은 고향 하늘이고 달빛도 그 달빛이건만 그토록 청아하던 귀뚜라미의 노랫소리는 간곳없고, 여태껏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객들이 무섭게 밟아대는 자동차 엔진의 시끄러운 소리만 정적을 깨트리고 들려오는 삭막한 현실, 갑자기 으스스 한기가 느껴진다.

이기적 발로, 육신의 편리만을 위해, 온갖 욕심을 따라, 자연 생태계를 모두 망가뜨린 인간이 순수 자연의 소리를 그리워한들 되돌리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은 아닐까? 이대로 가다가는 인간은 지구의 자연 생태계를 모두 망가뜨리고 말 것이다. 삶의 질을 올려줄 자연 생태계를 오염시키고, 변질시켜 버린 인간에게 자연은 또 어떤 재앙으로 보복을 가할는지, 파괴, 변질, 폭동, 이런 무서운 단어들이 이 밤에 홀로 깨어 있는 나를 더욱 울적하게 만든다.

변질한 생태계, 엘니뇨 현상, 태풍과 지진, 이 모든 것이 인간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이라고 하지 않던가? 이런 것이 어찌 자연계에만 국한된 것일까? 어느 분야이건 변질된다는 것은 두려운 것이다. 자신의 편리와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지켜나가야 할 질서도 무너뜨리고 갖추어야 할 예의범절도 한 순간에 짓밟아 버리는 험한 세상이다. 누가 말했던가? ‘우리는 진리가 길거리에 버려지는 세대에 살고 있다.’라고… 매 순간마다 그 말을 절감케 하는 현실임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으리라.

최근, 암담한 교계의 현실을 반영이라도 하듯, 우리 게시판에는, 주의를 요망하기에 충분한 호소문이 하나 올라와 있다. 내용인즉, 어느 교회 담임 목사가, 성경 말씀이 아닌, 자기 자신의 잣대(?)에 비추어 잘못된 성도들을 치리 하기 위해 개 교회 종교재판을 열었다는 충격적인 호소문이다. 뿐만아니라, 법정 효과(?)를 높이기 위해 물리적인 힘을 동원, 교회 문을 닫아걸고, 그들을 가두었다는 말도 있다. (얼마나 신빙성 있는 이야기인지는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거나 가슴이 아프다. 읽는 내내 분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이 무슨 회괴한 일이란 말인가?

또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삯군 목회자들의 횡포(?)를 견디다 못한 어느 성도님은 몇몇 자신을 따르는 성도들을 이끌고 교회를 뛰쳐나와 ‘평신도 교회’라는 새로운 개념의 교회를 세우고 자기 자신이 지도자, 목자가 되어 어두운 개신교를 바로잡아 보겠다고 외친다. 교계 지도자들이, 신학교가, 신학생이 모두 다 변질되었으니, 변질되지 않은 내가 어지러운 기성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모토는 잘못된 개신교의 시스템(system)을 갈아엎어야 한다는 굳은 의지를 불태우는 새로운 물결이다.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발상이지만, 놀랍게도, 현 교계의 지도자들에게 상처받은 수많은 지성인 성도들의 동의를 얻는 것 같고, 이 운동은 꽤 설득력을 지닌 듯, 여기저기 활화산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누구를 나무랄 수 있는가? 현실이 그러한 것을…

변질하여가는 현 교계의 문제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으며, 목회자, 성도들의 들어나는 비리는 암덩이처럼 퍼지고 누룩처럼 번져 모든 교계를 잠식시킬 것만 같은데, 말씀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 어떤 해결책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대안이라고 여기 저기서 내어놓는 안건들이란 미흡하기 그지없고 오히려 교계의 분열만 획책하기 딱 알맞은, 아주 조잡한 것들 뿐이다. 이대로 더 나가다가는 우리 기독교의 밝은 미래는 기대하기 어렵다. 정말 어떤 큰 재앙이 몰아닥쳐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고 한 치 앞을 가늠하기 어렵고 두려운 현실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모두 함께 고민하며 함께 풀어나가야 할 과제가 아닌가 싶다.

제도(system)가 문제인가, 신앙인격이 문제인가

과연 그들, 자칭 평신도 지도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정말 기존 교회의 시스템(system)이 갈아엎어 버려야 할 만큼 썩고 잘못된 것일까? 필자는 결코 그렇게 보지를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현 개신교계에 문제가 많기는 하지만, 그 문제가, 교리적으로나 시스템(system)적으로 일어나는 문제라기보다는, 그 안에 몸담고 있는 개인 신앙인격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선교사로 헌신된 남편과 함께, 아주 젊은 날부터, 이곳저곳 여러 국가를 다니면서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었다. 만나본 사람들은,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인 대통령, 과학자, 교수들, 정치인들, 사업가, 농사꾼, 학생들, 혹은 평민들 등등…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과 예수님에 관한 대화를 나누어 보았지만, 놀랍게도, 그들 중 예수님이 싫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던지, 믿지 않는 사람이던지, 그들의 종교가 무엇이든지 간에, 예수님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칼하게도 그들 중 상당수가, 교회 다니는 사람들,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싫고, 그래서 교회 나가기조차 싫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한결같이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을 종합해 보면, 한 마디로, 변질한 성도들의 삶이 역겹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은 이타적인데, 예수를 따른다는 ‘예수 따르미’들의 삶은 철저하게 이기적이란 것이다. 입은 아주 믿음이 좋은 신앙인인데, 말과 행동은 다르다는 것이다. 말 따로, 행동 따로, 따로 국밥의 신앙,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변질한 신앙인의 형태, 가라지 신앙인일뿐, 아무것도 아니다. 아니, 이런 것은 신앙이 아니라, 철저히 배척받아 마땅할 종교적 행위자라고 규정짓고 탄핵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 되기를 포기했는가? 어쩌자는 것인가? 가장 많이 예수님을 닮아야 할 오늘날 교계 지도자들은 밥그릇 싸움이나 한다는 지적을 받고, 성추행, 간음, 횡령, 폭행, 사기 등등…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행위를 하고도 당당하다. 정말 기막히다. 그 옛날 주님께로부터 “독사의 자식”이라 책망받던 과거 바리새인이 밟고 가던 그 길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 바리새인들의 특징은 무엇이었던가? 그들은 머리와 입으로만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도 머리로만 알았을 뿐, 행동과 실천 신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었다. 그들의 또 다른 특징은 종교적인 우월감이었다. 그들은 본질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 ‘변질’해 버린 것이다 고로, 현대 기독교가 배척을 받는 것은 분명, 제도적, 시스템적 문제가 결코 아니란 것이다!

제도, 시스템(system)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개혁교회는 거의 완벽한 수준이다. 우리 개혁교는 그리스도의 피를 기초로, 무수한 믿음의 선조들의 피흘린 발자취 위에 세워졌고, 오랜 세월을 두고 내려오면서 정과 반을 거쳐 오늘에 이른, 그야말로 더할 수 없이 멋진 교리와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기를 두고 흘러넘치는 아름답과 완벽한 생명을 소유한, 자랑스런 종교라면 종교인 것이다. (실상,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산 생명 그 자체가 아니던가!)

그러면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성도는 변화를 받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그 맛이 변질하면 안 되는 것이건만, 성도의 삶이. 지도자의 신앙인격이 타락하고 변질된데서 오는 것이다! 변화는 새로워지는 것이다. 변화는 거듭난 그리스도인 삶의 표증이며 열매다. 열매없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지울 것 뿐이다. 교계 지도자들, 성도라 허울뿐인 이름을 지닌 변질한 우리들의 추한 모습, 무서운 일이다.

행동하는 신앙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거듭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지도자가 되었건, 평신도가 되었건, 우리는 모두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산다. 행동하는 신앙인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고, 옛사람 그대로인 채, 다른 곳, 신사도 운동, 평신도 교회, 치유사역, 예언자 학교, 이런 곁길에서 대안을 찾으려고 한다면, 앞으로는 기독교인 수가 점점 더 줄어들 뿐만 아니라, 지금보다 훨씬 더 무서운 대재앙을 맞게 될 것이다.

디트리히 본훼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는 독일 대학에서 강의할 때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여기에 대답하는 것이었고 그가 나치 감옥에 갇혔을 때도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 그리고 그에 응답하는 삶을 살았고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삶으로 생을 마감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언제나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를 강조, 그리스도가 인간 존재와 역사의 중심이고, 神과 자연의 중보자란 것이었으며, 그리스도가 ‘나를 위하여 (for me)라기 보다 ‘우리를 위하여 (for us), 결국에는 ‘타인을 위하여 (for others) 살아가셨던 분이라고 정의했다. 특히, 그는 ‘예수 따르미’의 숭고한 사상으로는 ‘남을 위한 존재 (dasein for andere, being for others)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고 그런 삶을 살다 끝내 희생되었다. 후대는 그런 그를 가리켜 ‘행동하는 신학자’, '실천하는 신학자' 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예는 아니지만, 행동하는 삶의 좋은 예가 더 있다. 우리나라 육군 사관 학교에 가면, 교정에 높은 기념비가 하나 우뚝 세워져 있다고 한다. 그 기념비의 주인공은 계급이 남달리 높았거나 부유층이었거나, 참모총장이어서가 아니라, 기념비적 삶을 살다간 강재구 소령의 덕을 기리기 위함이다. 보통 남자라면, 특히, 군인이라면, 우리나라 60만 대군이 한결같이 그 어깨에 별(star)을 달아 보기를 소원할 것이다. 또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겠지만, 그 소원하던 별(star)이 되었다고 하여, 훗날에 그 별(star)을 기념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유없이, 별(star)이라고 무조건 기념을 해 준 예는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홀로 우뚝 선 기념비, 그는 과연 누구한 말인가?

1965년 10월 4일 월요일 오전 10시 37분, 힘과 신념으로 옹찬 스물아홉의 한 젊은 장교가 수류탄 투척 훈련을 시키던 중, 부하 한 명의 실수로 수류탄 1개를 오발, 병력 대부분이 유효반경 내에 있었기에, 큰 살상이 예상되었다. 이것을 지켜보던 그는 자기 부하들의 목숨을 구하려고 자신의 몸으로 그 수류탄을 덮쳤고, 수류탄과 함께 일순간에 산화했던 것이다.

이름없는 무명의 용사, 강재구 소령, 그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그의 삶이 기념비로 남게 된 것은, 그가 남보다 높은 학벌의 소유자였기 때문도 아니고, 뛰어난 재능을 소유했거나 인물이 특출해서가 아니라, 그는 바로 행동하는 군인이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고로, 행동하는 신앙이란, 남을 위해 사는 삶, 열매를 맺는 삶이며, 그리스도를 따르는‘예수 따르미”들이 반드시 본받고 실천해야 할 거룩한 성도의 참모습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끝으로, 오래 전, 아멘넷 게시판에 평신도 교회를 지지할 수 밖에 없다는 어느 독자, 한 독자님께서 가슴에 절절하게 와닿는 간곡한 부탁의 댓글을 남기셨기에, 우리 모두 함께 귀기울여 들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여기 옮겨본다.

(자기 자신에게 꼭 물어보십시요.
"하나님을 경외하는가?"
"목회가 교회중심인가? 예수중심인가?"
우리는 늘, 넓은 문과 좁은 문의, 선택의 갈림길에서
무엇이 주님이 기뻐하실 일인지,성령님의 인도를 간구하며
믿음의 분별과 신앙의 양심에 따라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믿음=분별"이라 생각합니다.
분별을 잃어버린 세대...
우리 모두 그분의 긍휼로, 은혜로, 세상과 가치관이 분별된 믿음을 위해 회개해야할 때입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줄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약 2: 1-26)


별똥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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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 때와 매우 유사한 현재 한국 상황”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일이 형통하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을 순간 저버리고 교만하고 음란해져서 바벨론 사신들에게 궁과 내탕고를 열어 다 보여준 일이 있었다. (열왕기하 20:12-21)


절대 섞이지도 말고 화친하지도 말아야 할 바벨론에게 문을 열어주는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히스기야 왕에게 선지자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무릇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두었던 것을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러한 경고를 받았음에도 히스기야는 어리석은 답을 한다.

"만일 나의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찐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 하니라."


이번 동계 올림픽에서 북한 정권에 대해 문을 열어주고 그들의 주도하에 연합을 하려고 한다. 바벨론이 어떤 존재인지를 몰랐던 것처럼, 북한 정권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고 그들과 위장된 평화를 이끌어내고 화합하려 하고 있다.


이런 순간적인 평화(환란 전야와 같은)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히스기야의 오판으로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문을 열어주었을 때, 머지 않아 바벨론이 다시 쳐들어와 나라가 처절하게 패망하고 모든 것을 빼앗기며, 자손들은 그들의 노예로 전락되었는데, 어쩌면 앞으로 한국에 있게 될 일들에 대한 예표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히스기야를 이어서 악명 높은 아들 므낫세가 집권하였고, 아버지 시대에 없앴던 우상을 다시 세우고, 자녀들을 불가운데 지나게 하고(낙태, 동성애) 하나님의 율법을 거역하면서 가장 악한 일들을 행하였다.


바벨론의 영이 이스라엘을 점령한 것같이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영이 한국땅을 점령하려 하고 있다. 깨어 있는 성도들은 어느 때보다 나라와 다음 세대의 미래를 위해 애통하며 기도할 때, 이사야와 같은 주의 종들과 요시아와 같은 나라의 지도자들이 일어날 것이라 믿는다.



출처: 김정환 목사님 페이스북




자유를 구걸하는 현실!



매일 집에 갈 때

골목에서 깡패를 만나는데

깡패가 위협하니까 무서워서

돈도 주고 잠바도 벗어줬다.


그래도 매일 위협한다.

돈 더 안내놓으면 더 혼난다고...


그렇게 고생하면서도 매번 돈을 쥐어준다.

싸우면 나도 다칠테니까 무서워서...


그런데 나와 친한 형이 등치가 크다.

그 형이 대신 혼내준다고

그 깡패한테 야단치니까 오히려

그형을 참견말라며 그 형과 절교를 하고

깡패를 집으로 초대해서 돈과 선물 한보따리를 쥐어준다.


그리고 매번 그 깡패형이

골목에서 돈을 뺏으려고 막대기를 가지고 와서

위협해도 친한 형에게 도움을 거절하고

깡패한테 상납하면서 살아간다.


이런 바보같은 사람이 어디있겠느냐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입니다.


전쟁이 무서워서 북한에 자유를 구걸하고

우리를 도와주는 미국은 남처럼 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끼리 잘해보자면서

매번 북한의 천문학적인 자금을 쥐어줍니다.


북한의 인민들은 영문도 모른채

노예세대를 3대나 겪으면서

고통받고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무런 대가없이

자유와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요?


북한 정권은 타일러서 될 집단이 아닙니다.

더 강한 힘으로 제압해야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외치지만

왜 미국에 쏘지 못하나요?


그만큼 미국의 힘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강한 안보만이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길입니다.


주여, 어느때까지니이까!

저 북한의 사악한 정권을 멸하여 주옵소서. 마라나타!


[펌글]

💖행복한 삶은 자신이 만들어라💖


가슴에 기쁨을 가득 담아라
담은 것만이 내 것이 된다
좋은 아침이 좋은 하루를 만든다
하루를 멋지게 시작하라

얼굴에 웃음꽃을 피워라
웃음꽃에는 천만 불의 가치가 있다.
남이 잘되도록 도와줘라
남이 잘되어야 내가 잘된다

자신을 사랑하라
행운의 여신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세상을 향해 축복하라
세상은 나를 향해 축복해 준다

기도하라
기도는 소망성취의 열쇠다
힘들다고 고민 말라
정상이 가까울수록 힘이 들게 마련이다

준비하고 살아가라
준비가 안 되면 들어온 떡도 못 먹는다
그림자를 보지 말라
몸을 돌려 태양을 바라보라

남을 기쁘게 하라
10배의 기쁨이 나에게 돌아온다
끊임없이 베풀어라
샘물은 퍼낼수록 맑아지게 마련이다

안될 이유가 있으면 될 이유도 있다
될 이유만 말하라
약속은 꼭 지켜라
사람이 못 믿는 사람 하늘도 못 믿는다

불평을 하지 말라
불평은 자기를 파괴하는 자살폭탄이다
어디서나 당당 하라
기가 살아야 운도 산다

기쁘게 손해를 보라
손해가 손해만은 아니다
요행을 바라지 말라
대박을 노리다가 쪽박을 차게 된다

밝고 힘찬 노래만 불러라
그것이 성공 행진곡이다
슬픈 노래를 부르지 말라
그 노래는 복 나가는 노래다

푸른 꿈을 잃지 말라
푸른 꿈은 행운의 청사진이다
감사하고 또 감사하라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겨난다

남의 잘함만을 보고 박수를 쳐라
그래야 복을 받는다
좋은 말만 사용하라
좋은 말은 자신을 위한 기도다

희망의 꽃을 피워라
희망의 꽃만이 희망의 열매를 맺는다

좋은 글 중에서

 

 

유태인의 인생지혜 


① 그 사람의 입장에 서기 전에는 절대로 그 사람을
     욕하거나 책망하지 말라.

② 거짓말쟁이에게 주어지는 최대의 벌은 그가 진실을
     말했을 때에도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이다. 

③ 남에게 자기를 칭찬하게 해도 좋으나 자기 입으로
     자기를 칭찬하지 말라. 

④ 눈이 보이지 않는 것보다 마음이 보이지 않는 쪽이
     더 두렵다.  
 
⑤ 물고기는 언제나 입으로 낚인다. 인간도 역시 
    입으로 걸린다.   
 
⑥ 당신의 친구가 당신에게 있어서 벌꿀처럼 달더라도
     전부 핥아 먹어서는 안된다. 

⑦ 당신이 남들에게 범한 작은 잘못은 큰 것으로 보고
     남들이 당신에게 범한 큰 잘못은 작은 것으로 보라. 

⑧ 반성하는 자가 서 있는 땅은 가장 훌륭한 성자가
    서 있는 땅보다 거룩하다. 

⑨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는 좋은 아내를 얻은
     사람이다.  
⑩ 술이 머리에 들어가면, 비밀이 밖으로 밀려 나간다.

 * 가야할 길 멈추지마라

    비가와도 가야할 곳이 있는 새는 하늘을 날고

   눈이 쌓여도 가야할 곳이 있는 사슴은 산을 오른다.

   길이 멀어도 가야할 곳이 있는 달팽이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길이 막혀도 가야할 곳이 있는 연어는 물결을
   거슬러 오른다.

 * 인생이란 작은 배
   그대, 가야할 곳이 있다면 태풍 불어도 거친 
    바다로 나아가라.

   오늘 그리고 이 시간을 사랑하고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오늘 하루도 스치는 인연의 소중함을
   새기면서 파안대소하며 멋지게 출발 하시기
   바랍니다~~♡♡

* 청춘과 노화
           쉬면 쉴수록 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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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미국 LA 교민이 송부한 가슴뭉클한 글 

<제목 : 필리핀을 닮아가는 영원한 내 조국 대한민국>


과거 우리나라 대한민국 박정희 대통령 시절,

박정희 대통령이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
필리핀 대통령이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무시하여

영빈관 숙소조차 안 내어 주어 가면서

나의 영원한 조국인 대한민국 박정희 대통령조차
만나 주지 않은 채,
격을 낮춰 필리핀 총리로 하여금 대신 만나게 했던 나라.

우리보다 훨씬 잘 살았던 나라.
6.25 동란(動亂) 중에 우리에게 육군을 파병해 주고,
6.25 동란(動亂) 후에는 우리에게 경제원조까지 해 주었던
우리가 선망했던 필리핀 이라는 나라.

그런 나라가 반미 좌파정권이 완전히 장악한 이후,

오늘날 과연 어떤 나라로 변신되어 가고 있는지,

내 조국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께서는
부디 똑똑히 두 눈을 부릅뜨면서
이를 잘 살펴보기 바란다.

1980년대 중반 필리핀의 마르코스가 미국 망명에서 귀국하는 정적 아키노 상원의원을 마닐라 공항에서 암살한 결과,

이에 분노한 좌파 국민들의 엄청난 시위로 인해,
마침내 마르코스가 권좌에서 쫓겨났다.

그 사건을 피플 파워로 미화하여
한국의 DJ가 1987년 대선에서 이를 이용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때 필리핀 시위 군중이 들었던 노랑리본과 입었던 노랑셔츠의 색깔을 DJ가 평화민주당 기본 색깔로 썼고,
바로 노무현을 거쳐,
오늘날 세월호 리본으로까지 계속적으로 연계된 계기이다.

마르코스가 축출되고,
아키노의 부인인 코라손 아키노가 대통령이 되면서
필리핀도 민주화를 내세워 건방을 떨기 시작했는데,


그 첫번째가 "양키 고우 홈" 이었다.

(얼마 전 우리나라 광주 시내에 "미군놈들 물러가라"는
대형 플랭카드가 걸려 있는 것을 영상매체를 통해
이 곳 미국에서 시청해 보면서 과거 필리핀을 보는 것 같아
그만 소름이 끼쳐 미처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슴)

한편 아이러니컬 하게도
아키노 대통령 역시 대 사탕수수밭의 지주로서
필리핀의 대 부호라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말해,

오늘날 한국의 "강남 좌파" - (강남에 살고있는 부유한 좌파 판검사 국회의원 정치인들) - 인 것이다.

필리핀의 반미정책에 식상한 미국이 1992년 거주 인원만
무려 수백만 명에 이르는 해군기지와 클라크 공군기지를
단번에 철수시키면서 필리핀에서 빠져 나갔다.

미국이 전략상 절대로 빠져 나가지 못할 것이라고,
그동안 큰 소리를 치면서 속으로 "설마"해 왔던 좌파들은
정말로 미군이 빠져 나가자,

"닭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어
허탈감과 무력함에 빠져 들었으며,
곧바로 이에 대한 효과가 초래되었는데,

미군이 철수하자 마자,
필리핀의 바로 코 앞에 있는 스카보로섬에 대해,
중공이 무력으로 강탈해 갔다.

필리핀이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여 승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공이 오히려 그 섬에다
아예 군사 활주로까지 만들어
현재 남중국해 군사 요충지로 사용 중이라는 엄연한 작태로서
역시 '국제 관계는 힘의 논리일 수밖에 없다'는 냉엄한 현실이다.

이를 직시하지 못하는 나라나 민족은 결국에는 쇠퇴와 멸망의 길로 퇴출되어 나갈 수 밖에 없다는 현실 인식이 무엇보다도
매우 중요한 사실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미군 철수와 함께 필리핀에 들어와 있던
외자(外資)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가면서 필리핀 경제는 하루 아침에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등 멋모르고 건방을 떤 댓가를 톡톡히 치뤘고,

지금도 7백만 명이나 되는 필리핀 여성이 외국에 나가 가정부(옛날 식모) 등으로 돈을 벌고,

몸까지 팔아 가면서 번 돈으로 겨우 나라를 지탱해 나가고 있는 실정인데,

더 웃기는 것은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외국에 가정부 등으로 나가는 여성들이 대부분 대졸 출신의 고학력 출신으로
좌파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드 가지고 장난치는 걸 보니,

한미동맹 파괴와 주한미군 철수가 목표인 것은 확실한 것 같고,

솔직히 아쉬울 것도 없는 미국도
대충 이제 맘을 정리하는 것 같다.

미군이 철수하면 경제적 추락은 차치하고,
당장 우리 조국의 안보가 작살날 것은 분명하다.

북한이 쳐내려 올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나,
그건 그만 제쳐두더라도,

서해는 중공의 바다와 어장으로 변하고,
동해는 일본 바다가 되고,
독도에 일본 해군이 주둔하는 건,
그야말로 시간문제라 할 수 있다.

중공은 지금도 서해를 인구와 땅덩어리 기준으로 3/4이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고 있는데,

만약 주한 미군이 철수하면,
해병대가  지키고 있는 백령도를 무력으로 점령하지 말라는 보장도 없다.

주한미군이 없으면,
일본이 독도를 무력으로 빼앗으려 들어도 속수무책일 것이다.

일본과 한판 붙는다면 해상전이 될 텐데,
지금의 우리 해군 전력이면,
우리 해군은 일본에 반나절이면,
괴멸된다는 시뮬레이션 결과가 나와 있다.

이런 일이 소설같고,
영화에나 나올 것 같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교만(驕慢)한 매국노(賣國奴)로서

                    It should be coming soon.

이다.

나는 이 곳 미국 로스앤젤스에서 평안히 살면서도, 

배가 기우는 줄도 모르고 희희낙낙하는 선객들로 가득한,
나의 영원한 조국인 내 나라 우리 대한민국에 대해 안타깝고 안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내가 지금 우리 조국에 가서 간증이라도 하고픈 절박한 심정이다.

 

-지인에게서 카톡으로 받은 글 


나이를 먹으면 신진대사 능률이 떨어진다. 이로 인해 체중이 증가하고 다양한 질환이 발생할 위험이 커진다.

여성은 성인이 되면 매년 평균 0.7㎏씩 체중이 늘어난다. 또 호르몬이 급변하고 근육이 소진되면서 지방을 태우기 더욱 어려운 상태가 된다.

나이를 먹으면서 신진대사가 느려지고 살이 찌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건강한 다이어트 전략을 통해 신진대사를 향상하고 체중 증가를 예방할 수도 있다.

'프리벤션닷컴'에 따르면 다이어트를 할 때 신진대사를 늦추는 몇 가지 실수를 피하면 성공적으로 체중을 감량할 수 있다.

1. 너무 조금 먹는다

살을 빼려면 먹는 양을 줄여야 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칼로리를 제한하면 오히려 신진대사 기능이 떨어져 다이어트를 방해 받게 된다. 여성의 경우 하루에 1200칼로리보다 더 적은 양의 식사를 하면 신진대사 기능에 제동이 걸린다.

우리 몸은 부족한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근육에서 에너지를 꺼내다 쓰면서 근육 손실을 유발한다. 건강한 다이어트를 하려면 한 끼 400칼로리가 넘는 식사를 유지해야 한다.

2. 차를 전혀 안 마신다

녹차나 커피 등 차에 들어있는 카페인은 우리 몸의 중추 신경계를 자극해 신진대사를 5~8% 정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신진대사 기능이 이만큼 향상되면 하루에 98~174칼로리를 더 소모할 수 있다.

일본의 한 연구팀에 따르면, 매일 우려낸 차를 한잔씩 마시면 신진대사 기능이 12% 상승한다. 차 속에 들어있는 항산화 성분인 카테킨이 이와 같은 역할을 돕는다.

3. 철분, 단백질 섭취가 부족하다

다이어트를 할 때 소모되는 근육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단백질 섭취가 중요하다. 식사 후 견과류 2티스푼, 저지방 요구르트 200g 등을 먹으면 단백질을 보충할 수 있다.

철분 역시 다이어트를 할 때 필수적인 영양 성분이다. 철분은 근육에 산소를 운반해 지방을 태울 수 있도록 돕는다. 특히 여성들은 폐경기까지 매달 생리로 인해 철분 소비가 크므로 조개, 콩, 살코기, 시금치 등을 통해 철분을 보충해야 한다.

[사진=아이클릭아트]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요6:48-49)
.........................................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리시면서 시험을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출16:4)"

무슨 시험이었습니까?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의 시험이었습니다. 믿음의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만나를 먹으면서 믿음은 버렸습니다.
열 정탐군의 말을 듣고 ‘우리가 메뚜기로구나, 다 죽는다, 애굽으로 돌아가자,’ 울면서 돌아섰습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그리하여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군사들이 40년동안 광야를 헤매다가 죽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린 양식 만나를 먹었으면 그 만나가 믿음이 되어야 하는데, 그래서 그 믿음으로 가나안에 들어가야 하는데, 만나를 그렇게 먹고도 그 만나가 전혀 믿음이 되지 못 한 것입니다.

왜 주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 하시며 만나와 비교하셨을까요?
그렇습니다. 만나는 광야에서 굶주림을 면하게 하는 식량은 되었지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나를 40년 동안 먹었어도 결국은 죽었습니다.
만나는 예수님의 예표였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 주님의 살과 피는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입니다.
주님은 지금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을 살리는 참된 양식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말씀을 이해라지도 믿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 말씀이 우리에게 던지는 또 하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 곧 주님의 살과 피를 먹어도 그것이 믿음이 되지 못 하고 생명이 되지 못 한다면 만나를 먹고 광야에 엎드러진 이스라엘 백성과 다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예수 딱 한 번 믿으면 주님의 생명을 가진 자가 되고 천국시민이 됐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럴까요?
그럴 것 같으면 만나도 일회용으로, 딱 한 번만 먹으면 평생 다시 안 먹어도 배고프지 않았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런 만나를 내려주셨으면 딱 한 번 내려주시기만 해도 되었을 것이고 그러면 백성들도 편하고 하나님도 편하셨을 텐데 말입니다.
하나님은 왜 만나를 매일같이 가나안 들어갈 때까지 지겹도록 40년 동안이나 내리셨을까요?
하나님께서 딱 한 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실 능력이 없으셔서 그러셨을까요?

우리는 믿음으로 거듭 납니다. 예수 믿어 새 생명 얻습니다.
그런데 딱 한 번 믿으면 끝나는 겁니까?
만나를 딱 한 번 먹으면 가나안 들어가는 믿음이 되고
예수 딱 한 번 믿으면 천국 가기까지 더 이상 아무 것도 필요없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 생명의 떡은 매일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내 안에서 믿음이 되고 생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40년 세월 만나를 매일매일 먹은 것 처럼 매일매일 말씀을 먹고 날마다 새사람으로 변화되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날마다 날마다 말씀을 먹어 날마다 날마다 주님을 닮아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도 거룩하라,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신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닮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말씀을 먹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매일 먹기 싫어합니다.
40년 동안 지겹게 먹기는 더더욱 싫어합니다.
어떻게든 일회용으로 딱 한 번 먹고 모든 것이 해결되고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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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지금이

마지막 세대라고 믿고 있다.


우리 세대에는 기독교외에도

이슬람, 힌두교, 불교, 무신론자들이 있지만
성경은 특히 계시록에서 이들에 대한 심판을

특별히 기록하지는 않고 있다.


성경에는 한 곳만 예외적으로

심판의 대상으로 지목하고 있는데 바로 음녀 바벨론이다.


도대체 음녀 바벨론이 누구이기에

계시록 16장, 17장, 18장, 19장까지 

무려 4개의 장에서 언급하고 있을까?


심지어 구약의 이사야, 나흠, 예레미야에서도

음녀 바벨론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고 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종교를 초월하여 무신론자를 포함하여

모든 인류가 음녀 바벨론의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의미다.


음녀 바벨론은

마지막 때의 전 인류가 추구하는 시대정신이다.


최초 바벨탑을 쌓은 니므롯으로부터

고대 바빌로니아, 신바빌로니아를 거쳐

음녀 바벨론의 성을 쌓으면서 도도한 역사로 계승해 왔다.


이 종교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음녀 바벨론은

모든 제국과 인류의 정신과 삶의 지표로

자리잡아 온 번영과 풍요의 신의 대명사다.


음녀바벨론은 세계에서 가장 큰 종교다.
음녀의 음행에 가담한 인류가

약 70억의 신도를 가진 가장 큰 종교로 부상했다.


가상화폐 비트코인 열풍과

아파트 한 채에 수십억씩 하고 수백억달러를 가진 부자들도 많다.

부자 클럽에 가입하려는 열망과 열풍은 엄청난 기세로 폭증한다.


이 종교가 추구하는 교리는

사치와 부귀, 부의 축적, 쾌락인데

이것이 왜 그렇게 큰 죄의 목록에 들어가는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니면 재물이라는 지적에서 알 수 있다.


강력한 두 신, 하나님인가 or 재물의 신인가?

돈의 속성은

사탄의 영역 아래에 맡겨진 하나의 권세다.


최신 유행하는 이 신흥종교의 교주가 음녀이고

배후에는 붉은 용 사탄이 있으며
이 음녀가 사는 성을 바벨론이라 하는 미스테리의 성이다.


모든 인류가 시대의 여왕이자 음녀가 주는

포도주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다.


예수님은 또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노아의 때처럼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가고 사고 팔면서'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음녀 바벨론의 포도주에 취한 모습이다.


과연 종교에 관계없이

무신론자는 물론이고 모든 인류는

돈과 사치부귀를 삶의 가장 가치있는 목표로 추구한다.



물론 음녀 바벨론의 포도주가 사치부귀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을 반대하는 세상의 악한 아젠다가 다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 포도주에 만국이 미혹되었으며
세상정부, 유엔, 상인, 자유인, 종교인이 모두
큰 성 바벨론에 다스리는 진영에 가담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저지른
음행과 가증한 일과 불의한 일을 기억하시고
이들을 심판한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게 하실 것이다.

우리 시대에 바벨론이 등장했고 번성했다는 것은
이 때가 최종세대라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조차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며 이 시험을 받았다.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

예수님은 이 시험에서 승리하셨지만 현대인류는 다 넘어갔다.
"주 너의 하나님만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겨라"

만약 예수님께서 시험 받으신
그 세 가지(정치,경제,종교권력)를 가지고
메시아로 오셨다면 세상은 예수님을 환영했을 것이다.

세상방식은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인정받지 못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많이 재물에 대해 언급하셨다.

1. 하나님과 재물의 두 주인 중 하나를 선택하라 (마 6:24)
2. 은밀하게 구제하라 (마 6:2~4)
3. 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마 6:19~21)
4. 오병이어로 가난한 자들을 먹이셨다 (마 14장)
5. 부자청년의 실패 (마 19:16~30)
6. 구제로 양과 염소가 분리 (마 25:31~46)
7. 부자와 나사로 (눅 16:19~31)
8. 불의한 청지기 비유 (눅 16:1~13)
9. 가난한 과부의 헌금 (눅 21:1~4)
10. 어리석은 부자 (눅 12:116~21)
11. 형의 유산을 나누어 달라는 요청 (눅 12:13~15)

재물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

1. 돈을 하나님보다 더 간절히 추구하는가?
2. 내 소득의 일부분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구제하는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사람들의 재물에 대한 애착은 매우 크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
소득의 몇%를 구제로 내놓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재물은 마음이고 내 추구가 어디에 있는지 가늠하는 측정지표다.

만약 측정할 수 없다면
그는 하나님이 아닌 재물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어느 종교보다 교회는 구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더 많이 흘려 보내야 하고
탐심을 버리고 자아를 실현하려는 자기의를 내려놓아야 한다.

바울도 초대교회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데 관심을 가졌다.
온 인류가 음녀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부자는 과도하게 통장의 잔고를 쌓아놓으면서
가난한 자들에게 흘려보내지 않는다.

한쪽에서는 끼니가 없어 굶어죽는데
통장에 수십억의 잔고를 쌓아놓고
"노후 준비가 되었어" 말하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다.
그 통장의 잔고들이 마지막 날에 증인이 될 것이다.



출처: 카이로스 / ars

 


 
 

꽈르릉 쾅쾅!” 무서운 천둥소리와 함께 새파란 하늘에서 날벼락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렇지 않아도 갑자기 들이닥친 스바인들의 무지막지한 칼이 두려워서 한 판 승부를 겨루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한 목자들은 속수무책 그 많던 주인의 가축을 몽땅 빼앗긴 채 나머지 짐승들을 제대로 돌아볼 겨를도 없이, “걸음아 날 살려라!” 광야의 험한 길을 달려 도망치던 중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수십만 볼트가 넘는 벼락이, 눈이라도 달린 것일까, 달아나는 목자들과 허둥거리는 나머지 가축을 무섭게 그리고 정확히 따라 덮쳐 순식간에 새까만 재로 태워 그 자리에서 화장시켜버린다
.

고향에는, 중무장한 “갈대아” 인들이 떼로 몰려들어 평화로운 동네를 쑥대밭으로 만들며 휩쓸었고, ! 비명 한 번 제대로 질러볼 사이도 없이 집 안팎 구석구석에 감추어둔 각종 보화와 남녀 종들을 강탈하여 바람처럼 사라져버린다. 때마침, 그날은 10명이나 되는 그의 아들딸 중, 가장 맏아들의 생일이다. 동네에서도 형제들의 우애가 좋기로 소문난 그들, 초청을 받은 형제.자매가 한 명도 빠짐없이 큰형님 댁에 모두 모여, 화기애애잔치를 배설하고 즐거운 음악 소리와 함께 “까르르~” 웃음꽃이 온 동네로 퍼져 나가던 지극히 흐뭇하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

바로 그때, 어디서 불어온 것인지, 갑자기 거친 들에서 대풍(tornado?)이 불어오더니, 집 모퉁이를 !” 하고 내려쳤다. 그 속도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초광속이었던지, 고래 등 같은 큰 집이 썩은 나무 등걸이 쓰러지듯 와르르~폴싹!”무너져 내렸다. 앗 뿔 사! 그 집 안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애지중지, 사랑하는 아들딸이 있질 않은가? 안타깝게도 그들 중 단 한 명도 살아나오지 못하고 무너진 집채 아래 모조리, 한꺼번에 산채로 매장되고 말았다는 슬픈 비보가 날아든다. 정말 어이없다. 말만 들어도 가슴이 갈기갈기 찢겨나간다
.

이토록 끔찍한 이야기가 픽션(Fiction)이냐? 아니다. 그럼, 저주받은 죄인의 집이었나? 그것은 더더욱 아니다. 놀랍게도 이 이야기는 실화(Nonfiction). 하루아침에, 이토록 끔찍한 참사를 당한 사람은 누구냐? 그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 동방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 불리던 의인, 욥이었다!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한 번쯤은 “이라 불리는 이 의로운 사람의 엄청난 무게의 고난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

이스라엘 역사는 한마디로 말해 고난의 역사. (물론, 우리나라 역사도 그렇지만…) 애굽에 내려간 이스라엘 민족이 요셉이 살아 있는 날 동안은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잘 지냈다. 그러나 요셉이 세상을 떠나고 요셉이 세운 공훈을 알지 못하는 바벨론 왕이 즉위한 후, 노예 생활로 전락해버렸고, 그 당하는 고난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후대에 이스라엘은 또 바벨론에 잡혀가서 70년 동안 포로로서 핍박을 받은 것을 우리는 잘 안다
.

우리나라 또한 고난으로 점철된 역사다. 38년이란 긴 세월 동안 나라를 잃고 일제 치하에서 당한 설움과 고난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 세대인 우리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역사를 배울 때나, 또는 고난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위안부할머님들의 참상을 눈으로 직접 보고 들을 때, 우리는 분노하게 되고, 나라를 잃었기에 당했던 그분들의 어려움이 어떠했던가, 가히 짐작하고 남을 만하다. 뿐만이 아니다, 6.25동란 역시 고난의 역사를 대명하고 엊그제가 바로 그 고난의 시기, 6.25동란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6.25는 동족상잔의 뼈아픈 날이요, 결코 그 고난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을 새롭게 하는 날이 되어야 하리라
.

이렇게, 고난이란, 남녀노소, 빈부귀천에 관계없고, 개인에게도 찾아오지만, 국가적으로도 찾아오며 또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불신자에게도 예외 없이 찾아오는 불청객이다. 물론, 고난도 형편과 처지에 따라서 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고난 없이 한평생 살아갈 수 있다는 보장받고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래서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옛 성인들이 말했던 것일까
?

사람이 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고난이라는 복병을 만나게 되고, 고난을 만났을 때, 나타나는 반응(reaction)은 사람마다 제각각 다르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고난 앞에서 싸워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무조건 무릎을 꿇어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어둠을 뚫고 솟아오르는 태양처럼 고난과 역경을 딛고 당당하게 승리하는 것을 보고 감탄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고난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서 그 인생의 성패가 좌우된다고 하여도 결코 과장된 말은 아닐 것이다.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 고난이라면, 나도 예외일 수 없고, 그렇다면 내게 닥쳐온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것이 최대의 관건이겠다


고난이라고 하여도 모두 같은 고난이 아님을 알아야 하고, 내가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의 출처가 어디로부터인가 분명한 이유를 분석해야 그에 대한 대비책도 다르게 세울 수 있겠지만, 문제는, 사람들이 거기까지는 생각조차 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내가 당하는 이 고난이 어디로부터인가? 사람이 어려움에 빠지고 고난을 당하는데는 대개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 찾을 수 있다
.

자신의 죄(실수건 고의건)의 결과로, 혹은 실수를 통해서 오는 고난이 있다
.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겪게 된 그 엄청난 고난은 순전히 다윗 자신의 잘못 때문에 온 것이다. 충신 우리야의 아내를 취한 것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죄다. 그 죄 때문에, (죄를 지으면 죄(사단)가 그 문 앞에 엎드린다( 4: 7절 참조))그 죄의 값으로 그 가정과 국가에 큰 환난을 겪게 된 것이다. 죄의 결과는 이처럼 무섭다. 죄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거나 왠만큼 그냥 슬쩍 넘길 수 있다고 생각지 마라. “네게 이르노니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여서는 결단코 저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12: 59 절 말씀)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

그러나 또 어떤 고난은 죄가 아닌, 자신의 무지나 실수로 오는 것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한 사업가가 사업을 위해서 자본을 빌렸으나 그 사업 경영을 잘못하여서 엄청난 빚을 지게 되고 빚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크게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빚 때문에 자신도, 가족도 극심한 고난 속에 빠진 분들을 나는 여럿 보았다. 이런 것은 악한 뜻이 아니기에 죄라기보다는 능력 부족혹은 실수라고 봐야 한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도 팔자 탓, 혹은 재수가 없는 탓이라고 돌려버리지만ㅠㅠ
)

그렇기 때문에 지금 고난 속에 빠졌다면.ㅡ 먼저 자신의 고난이 어디로부터인가? 먼저 고난의 원인(출처?)부터 규명하는 것이 지혜다. 자기 자신의 잘못을 통해서 겪게 되는 고난이라면 속히 자수하여 광명을 찾자? ㅋㅋ. 그런 때는 속히 그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는 길만이 사는 길이다. 실수로 오는 고난이라면 그 실수한 부분을 통해서 배우고 깨달아 다시 일어서기 바란다. ^^ 문제는 불가항력의 고난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

오늘 “욥”이 당한 고난이 바로 이런 고난이다. 이런 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 나는 자기 죄로 오는 것, 혹은 실수때문에 겪게 되는 고난에 관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불가항력의 고난, 이유를 알 수 없는 이런 고난을 당했을 때 우리가 처해야 할 바른 자세를 좀 배워보자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내가 태어나 보니까, 나는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은 ‘장애인’이더라. 내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나에게 어려움이 닥치게 된다면 이런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

1)
불가항력의 고난이 닥쳤을 때 원망이나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이란 본래 형통할 때는 기뻐하지만, 어려움이 있을 때는 대개 불평과 원망을 품기 쉽다
. 어떤 사람은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다.” 원망과 불평으로 자신을 더 어렵게 하는 것을 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괜스레 죄 없는 하늘과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한다. 그 때문에 닥친 고난이나 어려움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져서 헤어나기 어렵게 된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다. 하나님의 약속 위에, 하나님의 인도 하심을 따라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모두 떼죽음을 죽은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광야에서 모두 엎드려져 죽은 이유가, 적군의 칼과 창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원망한 이 어이없는 사실 때문이란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반면, 인간 이성으로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극심한 고난, 이유를 알 수 없는 큰 고난의 수렁에 빠진 사람, 욥의 고백을 들어보자.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 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기 1 21-22) 정말 대단한 믿음의 고백이다! 이런 고백이야말로 이 세상과 오는 세상, 세세 무궁토록 빛날 고백이며, 한낮 일개 촌부였던 그를 믿음의 거장이란 타이틀을 획득하게 한 위대한 믿음의 고백이다
!


2)
불가항력의 고난을 겪을 때,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 극심한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자칫, 삶의 의욕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절망이란 묘한 감정이어서 절망과 친하면 친할수록 주위가 점점 더 새까맣게 둘러쳐진 압박감을 받게 된다. 그 감정이 점점 더 강해지면, 어떻게 하든지 현실에서 도피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런 마음을 사단이 붙들고 충동질한다. 자살미수에 그친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개 같은 상황인데, 실제로, 마음속에서 어떤 강렬한 음성이 들렸다고 한다. “죽어라! 죽는 것만이 너의 최선이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거다.” 이런 음성이 선명하게, 강하게, 극렬하게 들려오기도 하고, 또 더 심하면,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죽을 것까지 환상으로 보여 주기도 한단다. 이런 페닉(Panic) 상태가 길어지거나, 심각해지면, 자살을 선택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어리석고 애석한 일인가?

3)
() 속에서 피는 꽃을 배워라


모든 만물이 하얗게 꽁꽁 얼어붙은 겨울이라고 하여도 복수화(福壽花, Adonis amurensis Regel et Radde 일명 빙량화(氷凉花), 아직 추운 2월 말 3월 초에 눈을 뚫고 새순이 나고 꽃이 피어나므로 설연(雪蓮)이라고도 함)는 핀다는 것을 아는가? 복수화는 우리나라, 중국 등지에서 노란색, 서구에서는 빨간색으로 아름답게 피는 겨울꽃이다. 기나긴 겨울의 끝자락에, 새하얗게 눈 덮인 대관령을 오르노라면 놀랍게도 그곳에서 눈을 뚫고 피어난 진기한 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아쉽게도, 나는 한 번도 그 진기한 꽃을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ㅠㅠ). 빙량화(氷凉花) 듣기만 하여도 멋진 꽃일 것 같지 않은가? 눈 속에서 피어나는 꽃이기에, 그 아름다움이 더욱 애잔하고 더욱 찬란하게 보일 것 같다
.

믿음도 마찬가지다. 믿음이란 안전하고 평안한 가운데선 그 빛을 발할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믿음은 눈() 속에 피는 꽃이라고 말하고 싶다!! 환난이 없으면 그의 믿음이 큰지, 작은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주님께서는 믿음에도 경중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말이다. 믿음이란 입술의 유희가 아니다. 말로만 내가 잘 믿는다고 해서 그 믿음의 진가가 들어나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믿음은, 눈 속에서 피는 꽃과 같고, 환난과 역경 속에서 달구어지는 정금과도 같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각 사람의 믿음을 시험(temptation이 아닌 test)하시고 독수리가 그 새끼를 업고 강한 훈련을 시키듯, 주께서는 그 자녀들의 믿음을 키우기 위한 강훈련을 시키심을 알아야 한다
.

성경 66권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다. 구약에서 믿음의 선진들이 모두 고난과 역경 속에서 그 믿음의 진가를 인정받았고 빛을 발한 사람들이다. 요셉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다. 다윗 왕이 그랬고, 다니엘이 그랬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그랬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도 바울이 그랬고, 스데반 집사가 그랬고, 베드로, 요한 야고보 모두 그랬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예수, 하나님의 아들 그 자신도 고난의 골짜기를 통과하신 후에, 구속주로서 그 빛이 세세 무궁토록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다. 신구약 66권을 통털어 고난 없이 그 믿음의 빛을 발한 사람이 누가 있더란 말인가
?

성경을 떠나 인간 역사를 잠시만 그슬러 올라가 보아도 알 수 있다. “북풍이 바이킹을 만들었다 (The north wind made the Vikings)” 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속담이다. "북풍이 바이킹을 만들었다" 무슨 뜻인가? 그 뜻은 그들에게 험한 북풍이 있었기에 강력한 군대, 강력한 인간을 만들 수 있었다는 뜻이다. 북풍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그들은 세계 최강의 배를 만들 수 있었고 거친 기후와 거친 땅 이라는 악조건이 있었기에 일찍이 새로운 세계로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 있어던 악조건은 그들을 더욱 강하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

바이킹은 9-11세기 독일, 영국, 프랑스, 스페인 연안을 휩쓸고 북미와 그린랜드까지 진출할 정도로 강력했었다. 그들은 세계 최강의 배를 건조했고 바이킹이란 말은 전진과 모험의 상징이 되었다. 바이킹, 그 위대한 이름이 환난과 고난 속에서 꽃피운 이름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

개인이라면, 고난을 겪게될 때 자연의 이치와 조화를 생각하는 것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자연은 밤이 있으면 낯이 있다. 어둠이 있으면 빛이 있고, 맑은 날과 흐린 날이 있어야 자연의 조화가 깨어지지 않듯, 삶도 그러하다는 것만 깨닫고 명심한다면 가족에게 상처를 주고 영원토록 지옥 형벌을 자취하는 그런 어리석은 선택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실존철학자 키엘케골이 말한다. “절망은 죽음으로 이르는 병이다.”라고그리고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갈고 닦아서 예리한 조각품으로 만들어야 하는 존재이지 모서리를 깎아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존재가 되어선 안 된다.”라고, 그런고로, 고난을 당할 때, 절망은 금물이다. 주님께서는 다윗의 입을 의탁하여 권고하신다.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119: 71 ),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기 1 21-22)
 
: 별똥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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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장]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

다음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붙잡아 임금 삼으려던 그들이 다시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섰습니다.
전날 예수님이 그들을 피해 산으로 올라가시고 제자들만 배를 타고 떠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은 열심히 배를 저어 오병이어의 잔치가 벌어졌던 곳으로 다시 찾아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산으로 올라가서 이리저리 찾아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나 허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도로 배를 저어 가버나움으로 돌아왔더니 거기에 예수님이 와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랍비님, 언제 여기로 오셨습니까?”

아침부터 갈릴리 바다를 가로질러 12 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노를 저어 왕복하고 산에 올라가 헤매기까지 했으니 그들은 땀깨나 흘렸을 것이고 헛수고 했다는 생각에 약도 오르고 화도 많이 났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 자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헬라어 원어를 보면 “짐승처럼 처먹고 배때기가 부른 까닭이로다.”라는, 그런 뉘앙스입니다.
생명은 찾지 아니하고 썩을 양식을 그토록 열심히 찾아다니니 짐승이나 다를 바 없다는 뜻입니다. 그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주님은 다시 자신을 ‘인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을 잘 아는 유대인들이 ‘인자’라는 소리를 들으면 땅에 납작 엎드려야 옳습니다. 구약성경이 말하는 ‘인자’는 육신을 입고 오실 메시아이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다니엘은 말세의 환상 가운데 인자를 봅니다.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요한계시록 1장을 보면 사도요한은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인자 같은 이, 곧 예수님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붙잡아 임금 삼으려는 유대인들은 “인자”라는 소리를 듣고도 끄떡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에게 요구합니다.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당신이 인자라면 시시하게 오병이어 기적 같은 거 말고 모세처럼 만나를 내려 보시오.'라는 뜻입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오병이어 같은 일회성 이벤트 말고 날마다 만나를 내려달라고 요구하는 이 무리를 보면서 여러분은 혹시 “저런 악한 사람들 같으니라구.”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예수님을 믿었을 것 같습니까?
그 악한 무리들, 유대인 뿐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예수님을 안 믿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 그 때도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조차 안 믿었는데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다 해서 예수님을 믿었을 것 같으냐 말입니다.
제자들이 온전히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고 성령님이 오신 다음이었습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믿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눈앞에 오셨다 해도 스스로 믿어서 구원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놀라운 표적을 보고 오병이어를 받아먹었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붙잡을 지혜를 가진 인간도 없습니다.
만일 자기 힘, 자기 지혜로 믿어서 구원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천국에 가서 ‘내가 믿어서, 나의 공로로’ 구원을 받았노라고 자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호히 말합니다. "자랑할 수 없느니라." "없나니 하나도 없다."
왜 그럴까요?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Total Depravity)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죽어있기 때문입니다.
죽어있기 때문에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깨달을 수도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게 죄인입니다.

성령님의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성령님의 하시는 일은 죄로 죽어있는 자의 눈을 열어 보게 하고 귀를 열어 듣게 하는 일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던 그 때, 수면 위를 운행하심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음성이 메아리쳐 울릴 수 있게 하신 성령님, 그 성령님께서 우리의 죽어있는 마음 위를 운행하심으로 닫힌 눈을 열어 보게 하시고 귀로 들어 깨닫게 하시고 마음을 울리게 함으로써 믿음으로 이끌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먹게 하지 않으셨다면 어느 누구, 단 한 사람도 예수님을 알지 못 하였고 영생을 얻지 못 하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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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직제일치 금지와 WCC를 탈퇴하지 않는 이유!


2018년 1월 18일, 서리집사인 필자와 한국교회진리사랑연합회 회원들은, 통합 교단의 본부인 서울 종로 100주년 기념관에 갔다.



(예장 통합의 본부가 있는 서울 종로의 100주년 기념관)


가톨릭과 기독교의 신앙-직제 일치에 반대하는 한국교회진리사랑연합회(목회자와 평신도들의 모임)를 만나지 않으려는 통합의 최기학 총회장이, 총회장실에서 다른 분과 대화 후, 우리 연합회 회원들이 그때 마침, 잠깐 서 있던 곳의 문을 우연히? 총회장이 여는 바람에,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갈까 하고, 망설이던 필자에게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

그래서 총회장께 
'최기학 총회장님, 기독교와 가톨릭이 같은가요?
어찌 이단 정도도 아니고 완전 타종교인 가톨릭과 어떻게 일치를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두렵지 않습니까?"

라고 말하니,
미안하다 아니면 기도회에 참석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등의 대답은 하지 않고, 먼저 필자가 누구인지 묻는다.


그래서 '서리집사요' 라고 말했더니,  
최 총회장은 총회장인 자신에게 왜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고 말하냐며, 대답은 커녕 도리어 언잖아 한다.   

(필자가 기독교와 가톨릭이 같은가?를 물어보면서 오른쪽 다섯쨰 손가락을 올렸다가 살짝 내리는 동작을 했는데, 이를 본인에게 손가락으로 가리켰다고 생각한 것임. 필자는 상대방을 모욕하기 위해 검지 손가락만 내민 것이 아님) 

이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며, 이 땅에서 총회장으로서의 명예와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 같은 존재로 있는데, 감히 계급(?)으로 보면 보이지도 않는 50대 후반의 서리집사가 감히 손가락질하며 훈계를 하는 것 같으니 참으로 어이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누구보다도 가톨릭은 타종교임을 알면서도 여전히 배도를 멈추지 않고 회개의 마음이 전혀 없는 총회장에게 분노가 일어나기에, 네 하나님 만날 준비를 하라고 외치고 나왔었다.



(통합의 총회장실 문이지만 만나려면 바로 옆의 사무총장에게 먼저 면담 요청을 해야 했다.)


통합은 사무총장인 변창배 목사가 일치 기도회에 총회장 대신 참석을 하였는데, 한국교회진리와사랑연합회와의 대화에서 사무총장 자신이 가톨릭과의 일치가 얼마나 허항되고 터무니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총회장을 대신하여 참석하는 것을 보고,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보다 세상의 명예와 직위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며 이들을 지도자로 모시고 신앙생활를 하는 WCC 회원교회 성도들과 목회자들을 생각하니 참으로 기가막힌다.



(한국교회진리사랑연합회 대표 김정한 목사(통합교단 소속,오른쪽 2번째)와 사무국장 안천일 목사(통합교단 소속, 오른쪽)가, 통합의 사무총장인 변창배 목사(왼쪽)를 만나, 통합이 가톨릭의 신앙 직제일치에 참여하지 말 것을 강력 항의하고 있다. wcc 한국지부 회원교회들 가운데 통합만이 유일하게, 이를 반대하는 참 목회자와 참 장로들이 있다.)


순진한 성도들은 같은 교단의 총회장 목사까지도 참석을 했으니, 기독교와 가톨릭과의 하나됨이 좋은 줄로 생각을 하는 성도들도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들이 말하는 믿음이 과연 무엇일까?

예수님을 시인한다고 말했으니, 교단 전체가 구원 없는 가톨릭에 흡수되어도 그 구원은 잃어버리지 않는단 말인가?



서울 종로 가회동 성당의 복도에 이 모임이 단순한 기도 모임이 아닌

가톨릭과 기독교의 일치를 위한 기도 모임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가톨릭과 기독교가 모인 가회동 성당에 가서 팜플렛을 보니, 2018년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회라고 적혀 있었고, 모든 순서가 천주교 미사 형태로 진행되는 것이 아닌가?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타종교인 가톨릭과의 신앙 직제 일치에 참여한, wcc 한국지부의 교단장 및 사무총장, 카톨릭 교인들

 

WCC 한국지부인 NCCK 교단의 대표로 통합, 감리교, 기장, 구세군, 성공회 등 WCC 한국지부 NCCK의 교단장들이나, 혹은 사무총장들이 타종교인 가톨릭과의 일치 모임에 교단을 대표하여 참석하였기에, 이는 교단 전체가 참여한 것이 되었고, WCC 회원교회 성도 개개인이 모두가 참여한 것이 된 것이다.

이들은 WCC가 한국교회 안에서 이단으로 판명이 되었고, 심지어 WCC 회원교회의 교회에서조차, WCC를 아직도 옹호?하는 간 큰 목회자들은 거의 없을 정도로 한국교회 안에서, WCC 자랑을 하는 교회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단적으로 WCC탈퇴하지 않고, WCC의 주 목표인 기독교를 없애고 가톨릭에 합치려는 배교를 지속하는 주된 이유는, 매년 교단 총회에 총대로 참석하는 장로나 목사들이,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 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사 56:10-11)



(저들이 아예 드러내고 가톨릭과 기독교의 배교 일치 기도회를 사탄에게 드릴때, 같은 시간대에 가톨릭의 가회동 성당 앞에서, WCC 한국지부의 회원교단들의 WCC 탈퇴 촉구와 NCCK 해체를 요구하며, 한국교회의 배도를 대신하여 회개하며, 기도회에 참가한 하늘의 성도들의 모습.)

 

특히나 1 년에 한번씩 여는 각 교단별 총회에서 장로들이 일어나고, 목회자들이 일어나서 성경의 사소한 해석도 잘못 해서  하면 이단으로 정죄하는 우리네 교단이, 어찌 오직 예수님의 구원을 부인하는 WCC를 왜 지금까지도 탈퇴하지 않는지를 묻고, 어찌 마리아를 하나님과 예수님처럼 숭배하는, 타종교인 가톨릭과의 일치행위를 멈추지 않는가를 물어서, 교단장들이 향후 가톨릭에 기독교를 넘기려는 신앙 직제일치 기도회에 계속 참석하게 되면, 그때는 그에 대한 책임을 엄하게 묻겠다고 경고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 했다면 신앙 양심상 잘못된 것임을 알고도, 타종교인 가톨릭과의 일치 기도회에 교단 대표로 참석하는 것이 교단 전체가 배교에 참여하게 되는, 이런 뻔뻔한 짓은 벌써 근절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는 WCC에서도 탈퇴했을 것이다.


한국교회가 WCC 부산 총회와 타종교인 가톨릭과의 일치에,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한 비느하스처럼 하나님의 분노로 일어나서, 교단 총회에서 적극 반대 했다면, 어찌 감히 타종교인 가톨릭과의 일치를 계속하는 이런 뻔뻔함이 지속될 수 있겠는가? 

 

교단의 총대들인 목사와 장로들이여!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오직 예수님만의 구원을 시인하지 못한 책임을 심판대에서, 반드시 벙어리 목사들과 장로들에게 묻지 않으시겠는가?

 

그저 경치 좋은 호텔이나 큰 교회에서 좋은 음식으로 대접받고, 지역교회들의 대표로 총회에 왔으니 점잖고 거룩한 체면?에 서로 언쟁이 되는 부분은 피하고, 대충 넘겨 버리며, 좋은 것이 좋은 것이야 라고 말하며 지내왔겠지만, 이들은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던가? 점잔을 빼고 거룩한 척을 하지만, 정작 짖어야 할 때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들이 아니던가?

 

그러면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 바리새인 등 종교지도자들에게

(요즘으로 말하면 목회자, 신학자)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외친 
세례요한이나 예수님은 점잔하지 못해서 그런 말씀을 하셨겠는가?
 


이 글을 읽으면서 혹여 신앙생활이 얼마되지 않은 분들은 서리집사가 어찌 목회자들의 대표인 총회장께 어찌 감히 저럴 수가 있는가? 라고 생각하는 성도들도 있을 것이다. 

성경에 보면 
갈 6: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딤전 5:17 "잘 다스리는 장로(목사)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셨기에 참 좋은 목회자들에게 좋은 것을 함께하고, 배나 존경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한다.


그러나 목사 장로 권사 집사라는 직분은 군대처럼 계급이 아니다. 성도들을 섬기라고 주신 직분이다.

여기에서 필자가 말하고 싶은 부분은 교회의 존재 이유인 오직 예수님만의 구원을 부인하는 WCC나 가톨릭과의 일치는 잘못이라고 인지한지가 적어도 몇 년 이상 되었음에도 여전히 동조하거나 침묵으로 동의를 하는 목사 장로들에게 하는 것이니 오해 없기를 바란다.



(상단 왼쪽 위 부분에 희미하지만 2018년 한국그리스도인 일치기도회라고 안내문에 적혀 있다.)

 

다음은 이번 가회동 성당에서의 신앙-직제 일치 팜플렛을 보면서 느낀 것이다.

기독교는 들러리고 천주교가 주도적으로 모든 것을 진행하였다.
이것은 가톨릭에서 작성한 예배 순서지를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이들이 작성한 안내문에 보면 하나님을 하느님으로 표현하였고, 카톨릭과 기독교가 다르지 않은데 서로 양분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신앙과 직제 이 모임을 교황 프란치스교가 진심으로 격려하고 지지 한다고 말하며 합쳐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 (합치게 되면 기독교는 가톨릭에 흡수되어 없어지고 가톨릭만 남게 된다.



(2018년 가톨릭과의 신앙과 직제일치에 참여한 교단들)


가톨릭은 그러한 작업을 보수교단들의 모임인 합동, 성결, 침례교 등의 교단이 소속한 한기총까지 해 왔으며, 한기총은 WEA을 통하여 가톨릭과의 일치를 꾀하고 있다.

지금 한국교회 안에서, 가장 믿음이 좋을 것 같고, 본이 되며,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할 높고높은(?) 총회장 목회자들과 큰 교회 등의 목회자들과 장로들의 모습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이 떠 오르면서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필자인 서리집사만의 생각일까?

눅 18:8. "그러나 인자(예수님)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출처: 한국교회 진리사랑연합회 / 전형구



이 글은 65년 전에 쓰여진기독교를 대적하는 사탄숭배자요 지도자였던 앨리스 베일리의 글을 요약한 내용이며월간JESUS ARMY(2014. 7)에 실렸던 글입니다. 5월호의 뉴스인 부모의 신앙교육 공격자녀의 체벌 금지초등학생의 임신 출산에 관한 내용들의 영적인 배경 글이기에 싣습니다.

 

앨리스 베일리(1880-1949)는 역사상 최고위급 사탄숭배자들의 지도자요귀신의 능력에 매우 민감한 영매였다기독교를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적대자였던 그녀가 책을 쓴 목적은 세상으로 하여금 기독교를 대체할 수 있는 대체 가치체계를 만들게 하는 것이었다그녀는 자신의 책에 기록된 모든 것들은 영계로부터 직접 왔고 자신의 창작물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그녀에게 책의 내용들을 받아쓰도록 구술한 세 마리의 주신급(主神級영들이 있었다고 한다또한 엘리스 베일리가 기독교 가치체계를 악한 것으로 대체하는 데 실천적으로 사용했던 전략은 노인을 상대하지 않고 어린아이들을 공략하는 것이었다.

   
▲ 앨리스 베일리(1880-1949)는 역사상 최고위급 사탄숭배자들의 지도자요, 귀신의 능력에 매우 민감한 영매였다.

앨리스 베일리가 65년 전에 주창한 ‘10가지 전략을 살펴보면오늘날 각국 의회와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정책들과 꼭 같음을 알 수 있다앨리스가 수립한 이 전략의 핵심은 사회 각 분야에서 하나님을 추방하여 기독교적 전통을 말살하고 건전한 가정을 파괴하며 음란과 퇴폐의 영을 퍼뜨려서 국가와 사회를 타락시키는 것이다아래는 앨리스 베일리의 10가지 전략이다

 

1. 교육시스템으로부터 하나님과 기도를 제거하라.

커리큘럼을 변경시켜서 기독교 문화의 속박으로부터 아동들을 해방시켜라아동들이 학교에 가는 목적은 인생을 직면할 준비를 갖추기 위함이고 아동들은 학교와 교사를 신뢰하며 거기에 우월적 가치를 둘 것이기 때문이다그런데 교육으로부터 하나님을 제거한다면아동들은 인생을 직면하는 데에 있어서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다는 신념을 무의식적으로 갖게 될 것이다아동들은 진급하는 데 있어서 학교당국이 중요하다고 인정하는 것들에 초점을 맞출 것이며하나님에 관하여는 그저 부가적인 존재 정도로 여기게 될 것이다.

현실: 1962년 6월 25일 미 대법원은 판결을 내려 정교분리’ 원칙을 이유로 하나님과 성경을 공립학교에서 금지시켰다또한 오늘날 각 학교에서는 초월명상을 가르치고 있는데이는 아동들을 의식전이 상태로 유도하여 귀신들과 접촉하게 하는 것이다초월명상이 말하는 안내자 영은 곧 귀신이다.

 

2. 아동들에 대한 부모의 권위를 축소시켜라.

부모와 자식 사이에 의사소통을 끊어라부모들이 자신들이 지키는 기독교적 전통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지 못하게 함으로써 부모의 전통이라는 속박으로부터 아동들을 해방시키기 위함이다아래는 앨리스 베일리가 제시한 구체적인 방법들이다.

첫째아동권리를 과잉되게 신장시켜라: 현실: 1997-1998년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은 UN이 제정한 유니세프 헌장의 아동권리를 국내법으로 만들었다오늘날 아동은 부모에게 나는 그런 것 듣고 싶지 않아요내게 말씀하는 대로 하고 싶지 않다고요라고 말할 수 있다교사들은 아동들을 야단칠 수 없다아동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는 권리가 있습니다내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라고 말한다.

둘째체벌을 폐지하라:현실이는 세계 각국에서 이미 법제화되었다.

셋째교사들은 10가지 전략의 실행 요원이다: 워크숍에서 교사들은 아동들에게 네 부모는 너에게 기도하라거나 성경 읽으라고 강요할 권리가 없다너는 너 자신이다너 자신의 권리를 갖고 있다너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자기표출 자아실현 자아성취 등은 다 즐거운 언어들이다너는 그것들을 이루어야 한다라고 가르쳐라.

현실서양에서는 아동이 일곱 살이 되면 교사가 너는 부모의 신앙을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할 권리를 가졌다부모는 자기 신앙을 너에게 강요할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다라고 가르치기 시작한다

 

3. 기독교 가정 구조 또는 전통적 기독교 가정구조를 파괴하라.

전통적 기독교 가정구조의 억압은 견딜 수 없다가정이 국가의 핵심이라고 볼 때 만일 가정을 깨트린다면 국가를 깨트리는 것이다이런 감금상태의 구조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켜라이를 위해 앨리스 베일리가 제시한 구체적인 방법들이다.

첫째성 문란을 조장하라: 젊은 층들로 하여금 혼전섹스를 유행시키고 프리섹스 하게하고 섹스를 즐기는 쾌락이 인생 최고의 기쁨이라고 미화시키고 장려하라그리고 모든 사람이 심지어 혼외정사에서조차 성적 능동성을 보이는 것에 긍지를 느끼도록 조장하라.

성경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엡 5:3, 5)

둘째광고 산업미디어-TV, 잡지영화 산업을 이용하여 섹스 하는 쾌락이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즐거움이라고 부추겨라(선전전략).

현실저들은 성공했는가목적을 이루었는가광고업계에 가 보라그들은 당신의 주의력을 끌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는데오늘날 섹스 코드가 빠진 광고는 하나도 없을 정도이다심지어 아이스크림 광고에서조차 여성의 허벅지와 비키니 차림을 보여주어야 한다

 

4. 프리섹스 사회를 만들라낙태를 합법화하고 낙태하기 쉽게 만들라.

낙태 병원을 세워라학교 안에도 진료소를 만들라사람들이 섹스의 쾌락을 누리려면 그에 따르는 불필요한 두려움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다시 말해서 원치 않는 임신으로 인하여 그들의 섹스가 훼방 받지 말아야 한다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낙태 금지는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며 이는 우리의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다아이를 가질지 말지에 관해서 선택할 권리는 우리에게 있다한 여성이 임신을 원치 않는다면 그녀는 고통 없이 가능한 용이하게 그 임신을 지워버릴 자유를 가지는 것이 마땅하다.

현실오늘날 낙태는 그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강제 추진되는 경우가 많다낙태는 콘돔 및 피임약 사용과 함께 인구 조절의 유력한 수단이 된 지 오래다

 

5. 이혼하기 쉽게 만들고 이혼을 합법화하라평생결혼의 개념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켜라.

사랑은 사랑결합이라는 신비로운 연결을 가졌다그것은 마치 난소로부터 발생하는 난자와 같아서 당신이라는 시스템을 경유하면서 당신 안에서 사랑의 호의를 클릭하는데세상에는 당신의 그 사랑결합에 응답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있다당신이 그 사람을 만나면 당신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클릭하게 되며 이때 만나는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의 남자(또는 여자)이다만일 당신이 그 사람을 놓치면 그 사랑결합 사이클이 지나갈 때까지 수 년 간 결코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그러므로 당신이 행복하려면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그 사람을 붙들어라그 남자(또는 여자)를 기혼자 상태에서 빼내는 것이라 할지라도 당신의 남자(또는 여자)인 그(또는 그녀)를 붙잡으라(또는 그녀)가 엉뚱한 곳에 있다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다그리고 만일 일정 기간 함께 살다가 그 사랑이 이미 죽었음을 알게 된다면 당신은 기독교적 가치 같은 속박에 얽매이지 말라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쉽게 이혼할 수 있는 방법과 그리고 또 다른 사랑결합의 생성을 허용하는 것이다이것은 마치 하나의 난자가 발생하는 것과 같다그래서 사랑결합이 생성되면 당신은 다시 한 번 인생을 즐기게 될 것이다.

성경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하노라 (말 2:16)

 

6. 동성연애를 대체 생활방식으로 만들라.

섹스 하는 쾌락이 인간 최고의 즐거움이어서 누구도 이런 즐거움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되며 누구도 그 즐기는 방법에 제약을 받아서는 안 된다사람들은 그들이 원해서 선택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동성연애든지 근친상간이든지 수간(獸姦)이든지 아무튼 쌍방이 합의하기만 하면 여하한 형태의 섹스도 허용되어야 한다.

현실동성연애와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법을 통과시키는 나라가 다수 있다이제는 동성연애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것이라고 말한다거나 동성연애를 언급하는 성경구절들을 공공연하게 낭독하면 이는 증오 발언으로 분류되어 불법행위로 간주되고 있다오늘날 교회는 게이들이나 레즈비언들의 결혼을 주례를 거부하면 처벌을 받게 된다.

 

7. 예술의 품격을 떨어트려라 미친 예술 되게 하라.

예술이야말로 문화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열쇠이다인간의 상상력을 더럽히고 타락시키는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장려하라왜냐하면 예술은 영의 언어로서 당신은 안에 있는 그것을 회화음악드라마 등의 형태로 끄집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이런 유()의 예술과 음악과 영화들이 표현하고 있는 품격과 영성과 메시지를 살펴보라.

 

8. 미디어를 활용하여 선전하고 인간의 사고방식을 바꿔라.

인간의 태도를 바꾸는데 가장 효과적인 최대의 경로는 미디어다신문라디오, TV, 영화를 이용하라미디어만이 아니라 광고회사옥외 광고판잡지 등을 통하라.

현실미디어를 통하여 폭력물음란물기타 자료들을 광고하고 퍼뜨리는 일에 엄청난 액수의 재정이 투입되고 있다혼외 섹스 장면이 혼내 섹스보다 80~90배 더 많이 당신 얼굴을 향해 퍼부어지고 있다성 문란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조장되고 있고 집안에서 TV로 동성 섹스 장면을 시청할 수 있어서 자녀들의 마음은 이런 해괴한 일들에 대한 민감성이 점점 무디어져 가고 있다.

 

9. 종교통합운동을 일으키라.

다른 종교들을 장려하여 기독교와 동등이 되도록 하라자신들만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기독교의 주장을 분쇄하라그리함으로써 기독교는 격하될 것이고 여타 종교들이 신장될 것이다인간이 자신의 미래와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인간의 중요성을 부각시켜라(인본주의).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 선택할 권리가 인간에게 있으며 또한 그렇게 되도록 스스로 만들 능력이 있으며 자신의 목적을 결정할 권리를 인간이 가지고 있다고 말해 주라.

 

10. 각국 정부로 하여금 위의 모든 사항들을 법제화 하도록 하고 교회로 하여금 이러한 변화들을 추인하도록 하라.

교회는 위의 사항들을 수용하도록 교리를 변경시켜야 하며 사람들을 변화에 적응시켜서 이러한 구조와 체제 안으로 편입시켜야 한다.

현실정부들이 성경에 반하는 법률들을 제정하고 있으며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타협해 나가고 있다현재 이 중 다수의 조항들을 법률로 만든 국가가 많다이러한 일은 다수의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한 가운데 슬금슬금 증대되었다이러한 상황은 마치 물 항아리에 빠진 개구리 이야기가 떠오르게 한다펄펄 끓는 물 항아리 속에 개구리를 넣는다면똑똑한 개구리는 끔찍한 위험을 즉시 감지하고 바로 물 밖 안전한 곳으로 뛰쳐나갈 것이다그러나 만일 물의 온도를 조금씩 매우 느리게 올린다면 개구리는 현재 진행 중인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여 몸이 서서히 익어서 죽게 될 것이다오늘날 많은 이들이 서서히 익어서 죽어가고 있는데도 그들은 전에 있던 자리로부터 얼마만큼 멀어졌는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천헌옥 choug2@hanmail.net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성경으로 영의 세계를 분별하라!


요즈음 인터넷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몸소 체험한 영의 세계를 전파합니다.


그러나 거의가 지극히 개인적이요 부분적인 간증이며

성도들은 그와 같이 특별한 입신의 체험 없어도

언제나 원하는 시간에 성경 안에서 천국과 지옥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영의 세계를 알 수 있는

신령한 은사와 영안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고전 2:13)


영의 세계는

한 영혼이 사망하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말씀처럼

곧바로 천국과 지옥으로 구분이 되며

캐톨릭이 중세기에 면죄부를 팔기 위해

만들어낸 연옥과 같은 장소는 없습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에서 충성된 종들에게

열고을 또는 다섯 고을의 권세를 나누어 주심은

이 땅의 헌신과 순종에 따라서 각 사람이 받는

상급의 차이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눅 19:16-17)


여기에 주님께서 종에게 말씀하시는

지극히 작은 일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 뜻은 곧

각 사람의 사명에 크고 작음을 떠나

가정이나 직장 또는 목회자와 같이

어떠한 일이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천국의 상급은 포도원의 일꾼들에게

품삯을 계산해주신 방법과 동일하며

얼마나 많이 일을 하는가 이전에

어떠한 동기와 목적으로 했는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마 20:15-16)


이렇듯이 주의 나라와 이 세상의 다른 점은

한시적인 육체와 천사와 같이 영생하는 영체의 차이일 뿐이요

모든 행정과 오감의 느끼는 감정이 현세와 같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으로 지옥은 꺼지지 아니하는 불 가운데

영원히 고통 당하는 장소임을 전하고 있습니다.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에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막 9:47-48)


성령의 사람들은

신령한 눈으로 말씀 안에서

영의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성경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인간의 이성으로 수용할 수 없는 기적의 책입니다.


홍해의 기적과 처녀 마리아의 잉태와 함께

주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오시며

죽은 나사로가 나흘만에 다시 살아난 일들을

이 땅에 누가 의심 없이 받을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우리가 믿는 것이 아니요 곧 믿어지는 은혜입니다.

(엡 2:8)


이러한 체험은

지난날의 불신자 시절을 생각하면

내 자신이 살아있는 증인일 것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들이

성경말씀을 깊이 연구하면

영혼을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들과

시대의 흐름은 물론이요 세상 모든 사물을

통찰하여 볼 수 있는 시각이 열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떠한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 4:12)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는

사람의 생각이나 그 무엇도 숨길 수 없으며

성도들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원인은

영적인 일을 세상 지식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성경으로 영의 세계를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고전 2:15)



출처: 예수 생명 원문보기   글쓴이: 황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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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증자료 토대로 관련자 신원 확인 후 소환 방침
'친박계' 조원진 대한애국당 대표 소환도 불가피
경찰 "김정은 명예훼손 고발 접수되면 수사 가능"

【서울=뉴시스】김진아 기자 = 대한애국당 조원진 대표을 비롯한 보수단체 회원들이 22일 오전 서울역 광장에서 평창올림픽 반대 긴급기자회견을 갖고 김정은, 한반도기, 인공기 화형식을 하고 있다. 2018.01.22. bluesoda@newsis.com

【서울=뉴시스】박준호 기자 =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 사진과 인공기를 불태우는 집회를 벌인 국내 한 보수단체에 대해 경찰이 수사에 본격 착수했다.

경찰은 우리나라 국민이 김정은 위원장의 사진을 불 태운 행위에 대해 고발할 경우에도 명예훼손 혐의로 수사에 착수할 방침이다.

22일 경찰에 따르면 서울 남대문경찰서는 대한애국당이 사전에 신고하지 않은 집회를 개최한 혐의(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위반)로 수사에 착수했다.

대한애국당은 이날 오전 서울역 광장에서 현송월 북한 삼지연 관현악단 단장 등 북측 예술단 파견 사전점검단이 도착할 무렵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를 반대하며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 사진, 인공기 등에 대해 화형식을 강행했다.

경찰은 현장 채증자료 분석을 바탕으로 불법 집회를 주도한 관련자를 선별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신원이 확인되는 대로 빠른 시일 내에 소환해 조사할 방침이다.

경찰 관계자는 "미신고 집회인 만큼 불법 집회로 볼 수 있으며 누가 주도했는지 확인 중"이라며 "현행법상 불법 집회를 주도한 단체의 대표에 대해 처벌이 가능하다"고 전했다.

경찰은 대표적인 친박계로 대한애국당의 대표를 맡고 있는 조원진 국회의원에 대해서도 소환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보수단체에서 김정은 위원장의 사진을 불에 태운 것과 관련, 만약 우리나라 국민이나 시민단체 등에서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해올 경우에도 수사에 착수한다는 방침이다.

현행법상 모욕죄는 친고죄인 반면, 명예훼손 혐의는 반의사불법죄로 친고죄에 해당되지 않아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우리나라 국민 또는 시민사회단체와 같은 제3자가 고발 가능하다.

【서울=뉴시스】김진아 기자 = 대한애국당 조원진 대표을 비롯한 보수단체 회원들이 22일 오전 서울역 광장에서 평창올림픽 반대 긴급기자회견을 갖고 김정은, 한반도기, 인공기 화형식을 하고 있다. 2018.01.22. bluesoda@newsis.com

경찰 관계자는 "김정은 위원장 사진을 불 태운 행위를 문제가 있다고 보고 우리나라 국민이 고발장을 제출하면 형식상 수사에 착수할 수 있다"면서 "법리적으로 수사하는 데 문제는 없다"고 설명했다.

일부 진보 계열 시민사회단체에서는 보수단체의 화형식 퍼포먼스에 대해 공식적으로 문제제기하는 방안을 검토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진보연대 관계자는 "오늘 보수단체의 화형식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지 내부적으로 회의를 열고 논의하고 있다"면서 "대응할 가치가 없다고 보고 논평조차 내지 않는 방안이나 경찰에 고발하는 방안 등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앞서 북한은 과거에도 국내 보수단체의 인공기 등의 소각 행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며 반발한 바 있다.

북한은 2003년 8월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를 앞두고 보수단체가 마련한 '반김 반핵 8·15국민대회'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 초상화와 인공기 등을 소각한 것을 두고 체제 모독을 이유로 대회 불참을 시사한 바 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유감을 표명하면서 사태가 수습됐다.

pjh@newsis.com

 






어느 목사님과 아들이 제게 상담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목사님의 입장에서 합리적(?)으로, 아들에게 권면하고...

아들은 아들의 입장에서 합리적(?)으로 아버지에게 요구하는...


목사님은 아들을 사랑한다는 전제,

아들은 목사인 아버지를 존경한다는 입장을 내세우며

몇시간을 서로 옥신각신 했습니다.


마주보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다른 세상 얘기를 하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두 사람을 바라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

도무지 합의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나라(입장)의 말을 합니다.

서로 못 알아 듣습니다.


저도 이전에는

누구보다 말이 안 통했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아내가 좋은 신앙인이 되길 바랬었고,

아들들을 잘 키워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고

잔뜩 부담만 주는 몹쓸 남편이자 아버지였습니다.


사람들은 상대가 바뀌길 바라지만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길 바라십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의 은혜입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마 7:5)


대화는 한국말(영어)로 서로 잘 알아듣고 하는 듯 하지만

서로의 마음을 읽지 못하면 아무리 유창하게 말해도

서로의 뜻이 전달 안되니 결국 대화가 통하지 않게 됩니다.


대화가 통하지 않으면 참 많이 힘듭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아니고는 아무리 유창한 말과

지식이 있어도 복음이 쉽게 전해지지 않습니다.


영안은 상대방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는 것입니다.


이웃(형제)을 알아볼 수 있는 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길 간절히 사모할 때입니다.

은혜를 알면 알수록 내가 없어지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타납니다.


강도 맞은 죄인들에게는 사랑으로,

스스로 의롭다는 바리새인들에게는

무관심한 듯 때가 찰 때까지 인내하며...

그리스도인은 분별의 영이 임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처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출처: 짐바브웨 선교-그리스도의 마음이 있는 자가 <선교사>입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김명호

뉴저지 체리힐에서 수십 년 동안 목회를 했으며, 뉴저지교협 회장을 역임했던 이 모 목사가 지난해 11월 12일 한국 춘천과 가평을 잇는 다리 밑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1월 20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강변의 미스터리 가평 목사 부부 사망 실종 사건”이라는 제목의 내용을 방송했는데, 이 목사가 이단에 빠져 2014년 교회를 팔고 한국에 간 후 이 목사는 죽고 사모는 행방불명되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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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화면 캡처
 

이 목사는 2014년 10월 18일 미국에서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고 전쟁예언을 한 임 모 여인에게 빠져 집과 자동차 등을 헐값에 팔고, 예언 2일전인 16일 아들과 딸과 함께 한국으로 갔다가 3년만에 비극을 맞이했다. 이 목사를 아는 사람들은 4대째 목회자 집안 출신이며 강직했던 이 목사가 어떻게 이단에 빠졌는지 이해가 안된다는 반응이다.

 

한국에서 2007년 목사안수를 받고 성도들을 미혹하다 1년 만에 교단에서 영구제명을 당한 임 모 여인은 2009년부터 미국으로 오가며 예언기도를 했다. 그리고 따르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거룩한 무리’(the holy group)라는 이단 집단을 만들었으며, 2010년말 이 목사를 소개받았다. 이 목사는 처음에는 임 여인을 탐탁하지 않게 생각했지만 자신이 젊었을 때 한 영적인 체험을 알아 내는 임 여인에게 빠져들었다.

 

한국 검찰은 임 여인과 이 목사의 딸을 자살방조와 자살교사 혐의로 구속했다. 이들은 이 목사의 주검이 발견되기 하루 전 이 목사와 사모를 각각 강가로 데리고 나갔다. <그것이 알고 싶다>는 처음에는 유명 목사인 이 목사의 배경이 도움이 되었지만, 임 여인이 전쟁이 난다고 추종자에게서 받은 1억원을 돌려주지 않자 사기죄로 1년 징역형을 받고 출소하여 새롭게 신도들을 모으는데 이 목사를 방해물로 여겼을 수 있다고 방송했다.

 

이단에 빠진 이 목사의 가족은 큰 비극을 맞았다. 이 목사는 익사했으며, 사모는 생사도 모르는 채 행방불명이며, 아들은 임 여인의 실체를 알고 집에서 나와 노숙인으로 지내며 가게에서 음식을 훔치다 잡혀 외국인 보호소에 구금되어 강제퇴거 직전이며, 딸은 아버지의 자살방조 죄로 구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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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을 조심해야 한다. 교회밖 은밀한 성경공부 등은 피해야 한다
 

뉴저지교협은 21일 신년감사예배 및 하례만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배포된 주소록 역대회장 페이지에는 2대 회장인 이 목사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뉴저지교협은 한선희 목사를 강사로 초청하여 이단대책 세미나를 2월 7일부터 8일까지 소망교회에서 연다고 광고했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예정론 3: 왜 누군 믿고 누군 믿지 않는거지?

 

이 예정론 시리즈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일은 행하고 어떤 것은 믿지 않는다고 말하기 전에 우리가 확고한 기본적이고 성경적이며 복음적인 진리들 위에 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 진리들이란 우리는 죄인이고, 하나님은 공평하시며 사랑이시라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성경적이요 현명한 방법이라고 믿는다. 예정론을 오해하고 조롱하는 경우가 많은 상황에서 우리는 이 교리를 온화한 태도로 설명해야 한다.

이번 글에서 나는 또다른 기본적 진리들의 토대를 마련해 보려 한다. 이 진리들은 예정과 관련하여 그 대상과 의미, 시기와 이유 등 실제적인 주제들로 인도해 줄 것이다. 인간의 죄,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 등을 알고 있는데도, 왜 누군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또 누군가는 믿지 않는 것인가? 예수님의 부르심에는 두개의 반응이 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 3:18, 36)

예수님께서 오천명(여자와 어린아이들을 제외하고 계수한 인원)을 먹이시고 난 후  무리들은 뿔뿔히 흩어지고 가룟 유다를 포함한 제자들만 남게 되었다. 예정의 이유를 살펴보면서 믿음이 무엇이며, 믿음과 예정의 관계는 어떠한가를 이야기해 보자.

 

* 믿음이란 무엇인가?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문제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믿음의 본질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자신의 모든 신념, 소망을 내려놓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자기자신이 아닌 예수님께 맡기는 것이다. 

믿음의 선조들은 믿음을 말할 때 복음을 “받는다(receiving)”고 하거나, 좀더 인격적인 측면에서 예수님을 “영접한다(embracing)”고도 표현했다 (도르트신조 1.4항). 이것은 중요한 부분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나 자주 믿음을 어떤 정신훈련이나 하나님, 혹은 예수라는 천상의 존재와 연결되는 것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받는다”, “영접한다” 등의 말 이면에는 어떤 뜻이 숨어 있는가? 믿음은 인격적이기 때문에 그 말은 인격성을 일깨우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받되 그분이 나의 모든 것 되심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공허한 신학적 주장이 아니다. 요한복음 1:11-12에서 요한은 이렇게 진술한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것이 믿음이다. 이러한 묘사가 자기자신과 예수님 사이의 관계를 묘사해 주고 있는가? 예수님이 나의 모든 것이 되신다는 것을 받고 영접하고 있는가?

 

* 왜 믿음이 필요한가?

가장 단순하게 말해서, 믿음으로 멸망치 않고(요 3:16), 영생을 얻으며 (v. 16), 구원얻을 수 있기 (v. 17) 때문에 그 믿음은 필수적이다. 바꿔말하면,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멸망하고 정죄받을 수 밖에 없다. 아니, 사실상 하나님의 진노는 이미 우리 머리위에 임하였다 (v. 36).

믿음이 필요한 까닭은 그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인들의 세상에 속한 우리가 죄악의 처지와 그 가운데 행하는 일, 임박한 정죄 등을 위한 치료책이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에 (히 11:6), 그것은 중요한 것이다.

 

* 믿음의 복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예수님께서 “저를” (v. 16), “아들을” (v. 36) 믿는 것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것은 믿음의 복들에 관한 것이다. 복(단수)은 예수님 당신이시고, 복들(복수)은 예수님이 주시는 것들이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영원한 정죄와 진노에 대비하여 영생의 복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믿음이라는 방편을 통하여 우리가 정죄와 진노, 멸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진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받고 영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롬 5:9). 예수님을 받고 영접하는 것은 우리가 영생을 얻는 것을 뜻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즉, 영원한 사망, 혹은 정죄)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 6:23). 아래 찬송가의 가사를 보라.

“내 죄를 사하여 안위하시고 주 친히 오셔서 인도하네 오늘의 힘되고 내일의 소망 주만이 만복을 내리시네”

 

*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기본적인 성경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어떻게 믿음이 하나님의 예정 사역과 연관되는지 설명해 보려 한다 . 다음의 의문을 설정하여 설명을 이어가 보자. 만약, 믿음이란 예수님을 받고 영접하는 것이라면, 믿음이 없이는 멸망할 수 밖에 없을 만큼 중요한 것이라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복을 받는 것이라면, 그 믿음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 초두에 그리스도를 받는 모든 자, 곧 그를 믿는 모든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요 1:12)고 설명하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고 있다. 그는 믿는 자들에게 앞서 발생하는 일을 언급하며 심화된 내용을 설명한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1:13). 여기서 “하나님께로 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것은 요한복음 3:6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거듭남은 위로부터 난다는 것인데, 즉 하나님께서 친히 새로운 생명을 주신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과 3장은 자연스럽게 인간의 죄성 안에 불신앙의 원인과 잘못이 포함되었음을 함의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 있을리 없고,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일 수 없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요일 1:5) 야고보는 이렇게 진술한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니라” (약 1:13). 불신앙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로 태어난다 (엡 2:1-3). 우리의 본성은 훈련되지 않은 개와 같아서 사납고 통제 불능이며 본능대로 행동한다. 우리는 그렇게 본성과 실재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훈련받지 않은 개는 따로 달리라는 명령을 내릴 필요가 없다. 그 개는 그냥 달리고 싶을 달릴 뿐이니까 말이다. 이것은 우리를 예수 안에 믿음을 놓으려 일하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과 다름 없는 것이다. 

반면, 믿음의 원인은 우리 안에 있지 않고 하나님 당신 안에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생명을 살리신다 (엡 2:4). 에베소서 2:8-9은 이렇게 말씀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29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것은 예수님을 믿을 뿐 아니라 그분을 위해 고난도 받게 하려는 것이라고 쓰고 있다. 또한 누가는 사도행전 13:48에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모든 이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의 선물을 받는 이가 있는가 하면 받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왜 그런가? 분명한 것은 아이들이 부모들에게 받는 선물 같은 것도 아니요, 이 어른들이 저 어른들보다 훌륭하기 때문에 받는 것도 아니다.

 

* 믿음의 영원한 근원

 누구는 믿고 또 누구는 믿지 않는지, 그 이유를 믿음의 영원한 근원이신 하나님 당신 안에서 찾을 수 있다. 에베소서 1장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신령한 복을 내려주시는 것을 인하여 찬송하는데 (v. 3), 여기서 그 모든 신령한 복은 예정의 복 (vv. 3-6),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복 (vv. 7-12),  영원한 구원을 보증하시는 성령의 인치시는 복 (vv. 13-14) 등으로 묘사된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v. 4)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v. 4) 사랑 안에서 예정하시는 복 (v. 5)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기쁘신 뜻대로” (v. 5) 그 일을 행하신 것이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은 임의적이거나 우연이라거나 혹은 무작위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담긴 의지에 따른 선택인 것이다.

11절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기업”을 얻은 이들이라고 증거한다. 이것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소유와 그 유익을 우리가 물려받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어떻게 그 기업을 물려받았는가? 11절은 계속해서,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었다”고 말씀한다. 이 말씀은 내가 진리와 믿음에 대해 씨름하고 있을 때 말그대로 외면하던 구절 중 하나였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기로 예정하신 까닭으로 그리스도의 소유를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우리를 예정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역사하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겠는가?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목적하신 바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 안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 강퍅한 마음을 누끄러뜨리시는 하나님

“만약 하나님께서 믿음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예정하셨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에게 이를 고민할 필요성이 없는 것 아닌가?” 이 의문이 바로 일반적인 반론, 혹은 오해이다. 그 답은 영원한 예정을 하시는 하나님은 또한 잠시 마음을 누그러뜨리시는 분이시기도 하다는 것이다. 믿음이 어떠함에 상관없이 우리를 선택하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당신을 믿게 만드신다.

믿음의 영원한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인들에게 일시적인 믿음으로 이끌 수 있다는 말인가? 사도행전 13:48을 기억해 보라. 바울은 “영생을 주시기로 작성된 자는 다 믿더라”는 말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있다. 그 관계성을 발견할 수 있는가? “하지만, 어떻게 이방인들은 때맞춰 영원한 작정으로 믿음을 얻게 되었는가?”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쓰고있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행 16:14).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주시기로 루디아를 예정하셨고, 바로 그 동일한 하나님께서 그녀의 마음을 열어주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도르트신조가 놀라운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한 까닭이다. “그 결정하심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강퍅한 자들을 선택하셔서 그들의 마음을 누그려뜨리시는 은혜를 베푸사 믿음을 얻게 하신다.” (1.6항)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영접하는 필수적인 방법인 믿음을 요구하시는데, 또한 바로 그 동일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어  돌같이 굳은 마음을  누그러뜨리시고 그 아들을 믿게 하시는 것이다. 믿는 자들에게 이 얼마나 놀라운 보증인가? 그리고 이것은 그런 역사를 하실 수 있고 기꺼이 행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게 만드는 놀라운 격려가 아닌가?

가져온 곳 : 
카페 >(안산) 회복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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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안식| 원글보기

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기독교를 계시의 종교라 함은,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계시로만 알려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죄로 하나님에 대해 무지해졌을 때만 아니라 타락 전에도, 그의 생득적 지혜로는 완전한 하나님 지식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적 계시(existence revelation)'가 있었고, 하나님의 신성이 내재된 만물계시(롬 1:20)도 있었지만, 그것들만으로는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크고 광대하셔서, 인간의 하나님 지식은 장님 코끼리 만지듯 편린적이어서, 2위 성자의 말씀(λόγος, logos)의 계시 없이는 제대로 알려질 수 없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삼위일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분 하나님이신 성부, 성자, 성령 각 위(位)는 오직 삼위일체적으로만 알려지십니다. 흔히 삼위일체 하면 고도의 신학 수련을 받은 전문 신학자들의 사변적 지식인 줄 아나, 사실은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의 보편적 지식입니다. 만일 누가 삼위일체적으로 하나님을 모른다면, 그는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그런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성자 그리스도가 창세 전부터 말씀(λόγος)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요 1:1) 이유도, 성부 하나님을 계시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크신 하나님은 성자 로고스(λόγος)를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으며, 그 없이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신다면 인간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히 12:19)."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동원된 '말씀(히 11:3, 벧후 3:5)'이 바로 '성자 로고스'였습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창 1:3)"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이 '성자 로고스'였고, 그 로고스로 인해 빛이 생겨났습니다.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골 1:16)"고,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고 한 말씀이 그 뜻입니다.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에 대해 깜깜해진 후에는,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이 알려졌습니다. 그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인간에게 말씀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 25:22)",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행 28:25)",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히 1:1-2)".

성육신하신 2위 성자도-성부가 그랬듯이-육체로 나타난 그의 '존재적 계시(existence revelation)'만으로는 온전히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2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을 때, 그를 알아보고 영접하는 자들이 없었습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 1:10-11)".

성자는 오직 아버지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삼위일체적으로 알려지도록 경륜되었습니다.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 인줄 아노라(요 5:31-32)",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요일 5:7)".

많은 사람들이 성육신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도록 나타난 하나님의 '존재적 계시(existence revelation)'로 알지만, 사실 성육신의 근본 목적은 계시가 아닌, 육체에 죄를 담당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계시가 목적이었다면 당연히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알아봤어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골 1:15) 이스라엘 땅을 밟고 다니셨지만, 성부와 성령의 계시를 받은 소수 외는, 그를 하나님으로 알아보는 이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향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고백한 베드로를 보고,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라고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직 아버지의 성령으로만(삼위일체적으로) 알려진다는 뜻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를 자기보다 앞서 계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알아 본 것도 성령으로 말미암았고(요 1:29-34), 다음의 구절도 동일한 어조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하나님이 보이는 사람의 육체를 입고 나타났음에도, 그의 정체성이 사람들에게 가려졌음은, 삼위일체적 계시 없이, 위(位)의 '존재적 계시(existence revelation)', 곧 보고 듣고 만져지는 육체의 현현만으로는 알려질 수 없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그 몸의 못자국과 창자국을 본 후에야 비로소 예수를 하나님으로 알아 본 도마를 향해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되도다(요 20:29)"고 하신 것은, 오감에 의존된 그의 믿음의 불완전성을 타박한 말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다고 한 것은, 드러난 그의 육신을 본 때문이 아니라, 삼위일체적 계시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고 한 것은,-자신이 예수님을 직접 본 것은 사도됨의 확증이라는 뜻이지만-삼위일체적 계시로 알려진 예수 이해는 마치 보고 듣고 만지는 오감의 체험처럼 확실하다는 뜻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자신이 예수님과 동시대에 태어나 예수님을 오감으로 직접 경험했다면, 지금보다 더 예수를 잘 믿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가 유대인들 앞에 나타났을 때, 그를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 더 북돋아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혼란에 빠뜨려졌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요 10:24)."

이는 보고 듣고 만지는 오감이 진정한 신앙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는 반증입니다.  만일 우리의 신앙이 보이는 것에 좌우된다면, 성육신하기 전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보고 즐거워했던 아브라함이나(요 8:56), 그리스도를 보지 못함에도, 믿고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벧전 1:8)고 가르친 베드로는 다 실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믿음에 확신을 북돋도록 보냄을 받은 성령의 사역도(살전 1:5) 불필요해집니다.

제자들의 경우에도, 성자 그리스도가 복음을 이루시고 승천하므로, 오감의 기능이 불필요해지고,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성령을 힘입었을 때, 오히려 믿음이 더 확실해졌습니다.

끝으로 3위(位)인 성령 역시,-성부와 성자가 그랬듯이-스스로 자신을 나타내지 않고, 그리스도의 증거에(삼위일체적 증거에) 의존되어 있음을 말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성령이 자신을 나타내는 방식은, 선포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므로 자신을 드러내는, 상호 교호적(interactive) 방식입니다. 알기 쉽게 풀어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누군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면, 성령이 그것을 듣고 "아 저건 내가 증거 해 주어야 하는 말이네" 라며 그 말에 찰싹 붙어 증거해 주는데, 그 증거 과정에서 성령이 복음을 말하는 자와 듣는 자에게 현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군가에 의해 복음이 선포되지 않으면, 성령은 복음을 증거할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이 복음을 증거할 기회를 얻지 못하면, 성령이 자신을 나타낼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복음 선포'와 '성령의 나타남'은 불가분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말하지 않으면 성령을 실업자로 만들고, 그의 나타나심도 봉쇄당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복음전파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이룰 뿐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의 첩경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령 체험을 원하며, 그것을 획득할 수만 있다면 어떤 희생도 각오하겠다는 결연성까지 보입니다. 그들 중에는 다행히 좋은 교사를 만나 건전한 성령체험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신비주의자나 종교다원주의자들에게 낚여 영적 파산을 당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진정한 성령체험이란, 한 마디로 성령의 증거에 수반되는 성령의 현현에 연루되는 것입니다. 복음 증거를 첫째 사명으로 삼는 성령은, 그 어디에서보다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 자신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이는 가장 안전하고도 확실한 성령체험의 방법이며, 또한 성경의 약속이기도 합니다(요 15:26). 그리스도의 복음과 연관성 없이 발생되는 성령체험은 신뢰할만한 것이 못됩니다. 칼빈(John Calvin)도 언제나 성령과 말씀을 연관지었으며, 그에게 붙은 '성령의 신학자'라는 별명은 '말씀의 신학자'라는 별명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존 번연(John Bunyan),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같은 청교도들의 성령체험 역시, 복음이 말해지는 강단과 전도 현장에서 연루된 경험이었습니다.

오늘 누가 성령 체험을 하기를 원한다면, 이상한 방법을 쓰지 말고 지금 밖으로 나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우리 죄값을 지불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말하십시오, 그러면 성령께서 당신이 전한 그 복음을 증거해 주시며, 당신에게 자신을 나타내 주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들은, 한 분 하나님의 각 위(位)는 삼위일체적으로만 알려진다는 사실들을 설명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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