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5:9-10]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주님께서 베데스다 못 가에 38년이나 죽치고 누웠던 병자를 고친 일로 분란이 일어납니다.
유대인들이 시비를 건 것입니다.
무슨 시비를 걸었느냐, 병 고침을 받은 자에게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고 시비를 건 겁니다.

만일 이런 시비를 걸어온다면 저라면 그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아니, 뭐라고요? 그럼 제가 멀쩡해졌는데 안식일이라고 거기 계속 자리를 깔고 누워 있었어야 한다는 겁니까?”

그런데 이 친구, 대답하는 거 보세요.
“저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했습니다.”
안식일 범한 죄의 원인을 예수님에게 떠넘깁니다. 비겁합니다.

생각나는 거 없습니까?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남에게 떠넘기는 것, 이게 죄인의 야비하고 비겁한 모습인가 봅니다.

그런데 당당하지 못 하고 비겁하고 야비하면 오히려 더 책 잡힙니다.
꼬투리를 잡은 유대인들이 계속 다그칩니다. "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이 친구 우물쭈물합니다. “잘 모르겠는데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주님이 그 후에 성전에서 그 비겁한 자에게 나타나셔서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고 자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병 고치는 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인간의 진정한 변화 없이 병만 고침 받으면 그것은 더욱 죄를 짓게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38년 동안 중풍병자로 있을 때 못 해 본 짓들을 할 수 있게 되었다면,
고침 받은 건강한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지 못 하고 주님을 위해 쓰지 못 한다면, 그가 하게 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은 그에게 그 말씀을 하신 것일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그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병을 고쳐 주신 분, 38년 동안 절망 속에 있던 자신을 구원해 주신 분이 주님이신 것을 그 사람이 모른다면 그 사람의 고침 받은 다음의 삶이 어떻게 되겠으며 그 고침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주님은 숨어서, 어두움 속에서 선행이나 베푸시는 분이 아닙니다.
병이나 고치는 것이 주님이 오신 목적이 아니란 말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들로 주님을 믿게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주님 자신을 드러내셔야 하는 것입니다.

지구상에는 가난과 질병으로, 전쟁과 기아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그들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구제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주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오늘 말씀에서 안식일 문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은 십계명의 제4계명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 20: 8-11)

주님께서 오셨을 당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유대인과 바리새인들에게는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고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심으로 유대인들과 정면충돌을 하신 것입니다.
제칠일안식일교는 지금도 안식일을 지키면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우리 정통기독교회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왜 하필이면 그 안식일에 양문 곁 베데스다 못가에 오셔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을까요?
다른 날에 오셨어도 될 텐데 왜 그렇게 하셔서 유대인들로부터 안식일을 범하였다는 비난을 받고 미움을 사셨을까요?
결국 이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아닙니까?
구태여 그렇게 하셔서 분란을 일으키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신 것 맞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고 완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피조물인 우리 인간에게 함께 안식하자고 하신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죄로 인하여 쉬지 못 하게, 안식을 못 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인간과 모든 피조물이 인간의 죄악으로 인하여 죽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때로부터 하나님도 쉬지 못 하고 다시 일을 시작하셔야 했습니다. 그것은 구원사역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원사역은 창조사역보다 훨씬 더 험악하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집이 망가져 엉망이 되면 차라리 집을 허물고 새로 짓는 것이 고치는 것 보다 낫습니다.
하나님께도 깨끗이 싹 쓸어버리고 새로 창조하시는 편이 훨씬 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시 시작하신 일은 원수 된 죄인을 용서하는 일이었습니다.
엉망이 되어버린 죄인들을 다시 고쳐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는 일이었습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습니까?
그것은 가슴을 찢는 고통과 처절한 피눈물의 가시밭길이었습니다.
독생자를 참혹한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아버지께서 지금 하고 계시는 그 고통스러운 사랑의 일을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안식일과 명절의 규례를 정해주셨습니다.
안식일에는 아무 것도 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섬기라........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일, 안식년, 희년, 그리고 모든 유대인의 명절의 참뜻은
구세주, 메시아, 주님이 오실 때 죄악과 저주와 죽음의 사슬에서 풀려나는 날을 기다리라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안식일은 장차 오실 주님의 예표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주님이 오시면 폐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안식이요 안식일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안식일을 깨뜨리셔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전도 무너뜨리셔야 했습니다. 주님이 참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안식일과 성전을 가지고 안식일의 주인이시요 참성전이신 주님을 대적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들이 지켜온 안식일과 성전제사와 율법들이 자신들이 쌓아온 공로요 근거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들을 버릴 수가 없었고
그것을 허무시는 주님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그리고 끝내 진짜 안식일과 진짜 성전을 십자가에 달아 죽여버린 것입니다.

(시2: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이응한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병이어(1)  (0) 2018.01.18
증거를 대라  (0) 2018.01.16
하나님 데리고 와 봐!  (0) 2018.01.01
복음의 능력  (0) 2017.12.30
지구에 매장지가 없어서.......?  (0) 2017.12.21
가상화폐란?

원숭이가 많은 한 마을에 어떤 사업가가 와서, 한 마리당 100만원을 주겠다고 잡아다 달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반신반의 하면서 널리고 널린 원숭이를 잡아다 사업가에게 줍니다.

사업가는 약속대로 100만원을 지불합니다.

원숭이 개체수가 점점 줄어들자, 사업가는 이제 200만원을 주겠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기를 쓰고 잡아다가 줍니다.

물론 사업가는 약속대로 200만원을 지불하지요.

더더욱 줄어든 원숭이는 이제는 마을에서 찾아보기도 힘들어 집니다.

사업가는 가격을 더 많이 올립니다

이제 이 마을에는 애 어른 할 거 없이 모두 다 원숭이 잡기에 혈안이 되어 난리가 납니다

완전히 씨가 말라버린 원숭이를 사업가는 800만 원까지 제안합니다

하지만 이제 이 마을에 원숭이는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마을사람들은 고민하게 됩니다

사업가는 잠시 도시로 나가고  그 밑에 있던 부하직원이 와서 말합니다

내가 1마리당 500만원에 그동안 잡은 원숭이를 줄테니,
나중에 사장 오면 800만원에 팔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열광하고 감사하며 빚을 내서라도 그 원숭이들을 사들입니다
그리고, 그 직원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합니다

원숭이를 모두 처분한 직원은 어느날 갑자기 사라집니다
물론, 도시로 나간 사업가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마을은 다시 원숭이로 넘쳐납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제 돈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빚만 남고 말았습니다

- 요즘 '비트코인'을 비롯, 가상화폐가 장안에 화제입니다.

 

가상화폐를 알기 쉽게 예를들어서 설명하는 글이 있어 공유하고자 가져왔으니 참고하세요
 

성경을 읽다보면 참으로 흥미롭게 반복되는 복음의 패턴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성취될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의 복음을 인류의 역사 속에 끊임없이 반복되도록 삽입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라는 거시적인 패턴에서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하루의 삶 속에서도 미시적으로 반복되어지고 있습니다. 낮과 밤이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죽음과 부활을 날마다 연습할 수 있도록 우리의 인생을 그렇게 설계해 놓으신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여호수아로 이어지는 고대 역사 속에서도 복음이 어떻게 나타나 반복적으로 예표되고 있는지를 그 패턴들을 살펴보면 참으로 흥미롭고 의미심장한 복음의 흐름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1. 천지창조 (창조)

2. 인간의 범죄 (죄)

3. 여자의 후손으로 오심 (성육신)

4. 가죽옷, 뱀의 머리를 밟으리라 (십자가와 부활)

5. 에녹의 승천 (심판 전 교회의 들림사건)

6. 노아의 홍수 (대심판과 환란성도들의 보호)

7. 무지개 (새하늘과 새땅)


1. 셈 (새로운 시작)

2. 바벨탑 (하나님을 향한 반역)

3. 아브라함의 이삭번제 (십자가 대속의 사랑)

4. 요셉의 감옥생활 및 애굽총리가 됨 (장사되었다가 부활)

5. 7년풍년과 7년흉년 (교회의 성장과 마지막 7년대환란)

6. 형들에게 정체를 밝힌 요셉 (예수님의 재림)

7. 야곱을 애굽으로 데려옴 (영원한 천국)


1. 애굽종살이 (죄와 사망권세 아래 사는 옛생활) 

2. 홍해의 기적과 출애굽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칭의)

3. 광야생활을 통한 세대교체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는 성화의 과정)

4. 요단강을 건넘 (재림을 바라보며 영화의 단계로 나아감)

5. 라합의 구출 (교회의 들림사건)

6. 여리고성의 무너짐 (세상의 종말)

7. 약속의 땅을 정복하여 거주함 (천년왕국)


이러한 패턴들은 사사기 이후에도 또 다시 반복되어 끊임없이 나타납니다. 억지로 끼워맞추지 않더라도 성경을 쭈욱 읽어내려가다보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러한 복음의 패턴들이 무한반복 되풀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반복되어지는 패턴들마다 약간씩의 관점과 포인트는 다르더라도 동일한 패턴으로 반복되어지는 복음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반복된 패턴들을 보여주시는 이유는 앞으로의 인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어질 것인지에 대한 지혜와 통찰력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 칠 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수 6:4)


오늘 여호수아 7장에 나타난 여리고성 함락사건은 마지막 때의 끝자락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메세지를 전달해 주며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나팔 소리만 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여 제사장들로 하여금 양각나팔을 불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이것은 이 마지막 때에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알리고 적극적으로 선포하라는 엄중한 총사령관의 명령입니다. 


여리고성을 묵묵히 일곱번 도는 행위는 기도에 깨어 있는 성도의 모습이며, 양각나팔을 부는 행위는 재림하실 예수님을 선포하는 마라나타 신앙입니다. 이렇게 깨어 기도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선포하며 살아가는 것이 오늘날 마땅히 취해야 할 믿는 자들의 태도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취하고" (수 6:16,20)


이 말씀은 (살전 4:16-17) 말씀과 정확하게 오버랩이 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실 거라는 그 약속을 여리고성 전투를 통하여 이미 수천년전에 하나의 예언적 사건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전 15:51-52)


사도 바울 역시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되어 부활하게 될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 사건은 추상이 아닌 생생한 실제적 사건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잠들지 말고 깨어 기도하며 나팔을 불어야 합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마지막 때의 징조를 알리는 무수히 많은 나팔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1900년 동안 지구상에 흔적없이 사라졌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났으며(무화과 나무 가지가 연하여져 꽃이 피는 사건),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고 나라간, 민족간의 크고 작은 전쟁이 있으며, 전세계적인 배도의 물결(종교통합의 움직임)이 휘몰아 치고 있습니다.

또한 전세계가 무선인터넷과 최첨단 아이티기술로 빠르게 소통되고 통합되는 세상으로 바뀌어, 다니엘의 예언한 바 사람들간의 왕래가 빨리질 거라는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동성애'라는 가증한 죄악의 흐름이 유럽과 미국을 장악하고 이제 마지막 때의 신부의 나라인 대한민국을 집어삼키기 위해 음흉한 미소를 띄우며 침을 흘리고 있습니다. 무서운 속도로 종말을 향해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는 이 시점입니다. 이렇게 크고 작은 나팔소리가 울려퍼는 이 때에 우리는 마땅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 (눅 21:31-32)

이 세대가 가기 전에 반드시 다 이루리라는 말씀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고전 14:8)

지금은 나팔소리를 분명히 내야 할 시기입니다. 마지막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오기 전에... 한 사람이라도 더 흔들어 깨우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두려움 없이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주님과의 깊은 사랑의 관계 속으로 손을 잡고 함께 들어가야 할 때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일 4:18)

<적용>
오늘 하루가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겠습니다. 오늘 내게 주어진 하루의 삶 속에서 내가 하는 모든 삶들이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하며 사는 하루가 되어야겠습니다.

<기도>
사랑하는 주님, 매일의 삶 속에서 좌우로 고개만 돌려도 그 곳에 복음이 있습니다. 새벽에 눈 뜨고 일어나 부활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아침밥 숟가락을 뜨면서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 하셨던 주님의 사랑을 떠올립니다.

걸어가는 길가에 스치는 아스팔트 위의 들풀 한포기에서 돌짝밭 같은 제 마음에 피어나는 말씀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공중에 나는 새 한마리를 보며 참새 한마리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먹이시고 입히시는 주님의 공급하심을 느낍니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뭇가지... 봄이 되면 돋아날 새싹들을 생각하며 재림과 천국을 꿈꾸게 됩니다. 내게 주신 마지막 날...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며 그 사랑이 흘러가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곰팅이의 하늘우체통

대한민국의 상황은 '한국교회' 영적 상황의 사영이다. 여기서 '한국교회'는 대한민국 내의 모든 교회들을 총망라한 전교회적 차원의 범위이다. '한국교회'는 하나의 유기적 통일체이다.


그 유기적 통일체 안에서 우상숭배에 동의한 교단와 교회, 선교단체들이 또 하나의 유기적 결합체로 모여 또 다른 '한국교회'의 이름과 자격으로 공식적인 우상숭배를 했다는 것은 '한국교회'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차원에서 두 유기체가 충돌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한국교회'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죄악의 벽 뒤쪽으로 소멸되어 사라진 것과 같은 상황인 것이다.


정체성의 붕괴는 곧 메타 코스모스의 붕괴다. 성령의 결합이 아닌 우상과 뒤섞인 몸으로의 변질 말이다. 통일 대한민국을 부르짖는 모든 깨어있는 이들은 이 구조 안에서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한국교회'의 일부 기관일 뿐 몸으로서의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끼리 모인다 하여 우리가 '한국교회'의 몸을 초월한 주체적 자아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속한 교회가 WCC에 귀속되어 당신이 그 죄를 막는 중보자로 섰다고 한번 생각해보자. 교회와 하나님과의 사이에 서서 죄에 쏟아지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내고 회중에게는 회개를 외쳐 돌을 맞는다. 대신 죄를 짊어져 금식으로 나아가고 부르짖는다.


그러나 교회가 끝내 회개를 이루지 않겠다고 결정한다면, 당신의 모든 중보가 교회와 무슨 상관이 있게 되겠는가? 당신은 중보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해지고 영적으로 깊어지며 지경도 넓어질 수 있다. 그리고 교회의 죄악도 당신이 중보하는 동안만큼은 씻겨져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사 존재인 교회가 계속 그런 죄악에 머무르고 있다면, 중보는 사실상 별다른 소용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중보는 끼리끼리 모여 부르짖는 차원을 넘어서야만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한국교회'로서 전교회적인 회중을 모이게 하여 유기적 통일체로써 회개의 주체적 존재로 세워서 또 다른 '한국교회'인 유기적 결합체, 즉 우상 세력을 반드시 교회안에서 내치도록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중보가 이것을 할 수 있도록, 방향 전환을 할 수 있도록 조명해줘야 한다.


중요한 것은 '한국교회'의 현 상황은 그 존재 자체가 이미 없어진 것과 다름 없다. 이미 존재하는 '한국교회'가 모여서 그 안에 있는 죄를 씻자는 차원이 아니라 '한국교회'를 다시 만들도록 모이게 해야 한다.


회중이 만들 유기적 존재는 회중의 인식과 믿음 안에 있는 상정된 존재로 이뤄진다. 믿음을 두고 바라보는 포커스가 현 상황에 대한 어물쩡한 믿음으로부터 야기된 것이라면, 다시 말해 '한국교회'의 존재 자체가 박살난 현상황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한국교회'로서 모이자는 대주제 아래 만들어질 그 어떤 '한국교회'라는 존재도 어물쩡한 존재가 되버린다.


유기적 존재들의 충돌 현장에서 상반된 두 존재에 대한 인식이 회중에게 필요하다. 유기적 결합체의 정체성은 특정한 개별 존재를 초월한 곳에 있다. 그것은 존재들끼리의 결합을 형성하고 있는 연결고리, 사슬이다. 즉, 회중의 인식을 위해 유기적 결합을 이루는 사슬을 조명해야 한다.


유기적 존재를 나누는 잣대 역시 이 사슬을 드러내는 것이고 충돌시키는 것이다. 사슬의 충돌은 사슬끼리 이뤄진다. 유기적 차원의 문제는 유기적 잣대가 있어야만 드러난다. '한국교회'는 오직 예수, 그분을 알리는 성령의 결합체이다. 


그런데 예수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있다는 것이 교회안에 우상숭배자들의 사슬이다. 회중의 믿음 가운데 이 사슬의 충돌을 인식시키려면 '한국교회'의 깨져버린 사슬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어둠의 사슬을 덮고 있는 가증한 덮개가 걷혀져야 한다.


'한국교회'에 일어난 공식 우상숭배의 죄악으로 미혹의 역사가 대부분의 회중 가운데 계속 역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미혹의 영을 걷어내지 않으면, 회복해야 할 '한국교회'는 영영 회복하지 못할 수 없다.


가증한 덮개는 곧 그들이 '한국교회'인 척 하게 만드는 가증한 옷이다. 그것이 그들의 유기적 결합을 합당하게 여기게끔 하는 기능을 한다. 따라서 유기적 차원을 이루는 각 존재들의 사슬에 대한 조명은 '한국교회'로서 분명한 잣대(오직 예수)를 세우는 것과 더불어 그들의 사슬을 덮은 가증한 옷을 치우는 것, 그리고 유기적 존재의 에토스와 페르소나를 박살내는 것에 있다.


그렇다면 그 가증한 옷이 무엇일까?

바로 WCC와 세월호 참사의 영적 인과를 덮은 가증한 의, 그것을 수놓은 노란 리본이다. 그것이 최초의 겉옷이다. 이 인과 관계를 밝혀 가증한 옷을 벗기는 것이 저들의 유기적 에토스를 박살내고 그 밑에 있는 사슬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WCC를 덮고 있는 가증한 옷을 드러내야 저들의 사슬이 드러난다. 어둠의 사슬이 드러나야 가증한 옷 가운데 함께 얽혀져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회중이 깨닫기 시작한다. 회중이 인식해야 '한국교회'를 이루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본래의 사슬에 대한 잣대로써 끊어버릴 수 있는 현장이 보이기 시작한다.


공식 우상 숭배에 대한 회개는, 회중이 이룰 유기적 존재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당사 차원의 존재가 아니다. 우리끼리 부르짖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매듭의 사영은 실제 매듭이 있는 차원에서 해결해야만 한다.


현 상황에서 방법이 없는 것 같아도 길은 있다. 아직 우리가 행하지 않아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 뿐이다.


대한민국과 연결된 것은 '한국교회'이지 그 일부인 우리가 아니다. '한국교회'의 존재 자체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과 그 차원의 범위에 맞는 대응과 중보가 필요하다. 전교회적 범위 차원의 존재에 포커스를 제대로 맞춰야 그에 따른 대응의 길이 보인다. 우리는 우리만의 중보를 넘어서서 회중 차원의 사슬과 부딪쳐야만 한다.



글 & 이미지 출처: InSung Koo님 페이스북






 

독일이 통일되던 때에 서독 수상 헬무트 콜은
미국을 수시로 드나들며 독일의 통일을 호소하였습니다.

콜 수상은 미국만이 독일의 통일에
긍정적이라는 점을 간파하였기 때문입니다.

독일 주변 나라인 프랑스, 영국, 러시아는
독일 통일에 반대하였습니다.

후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영국 측에서는 러시아를 찾아가 전쟁을 하더라도
독일 통일은 막아야 한다고 했을 정도로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독일 통일을 긍정적으로 보고,
서독 수상의 간청에 응하여 통일을 이루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독일에서 활약하고 있는 박선규 교수는 이 점을 주목하고
한반도 통일에도 미국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중요함을 지적합니다.

이웃나라 중국은 한반도의 통일을 싫어합니다.

통일 한국이 강한 나라가 되어
중국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기 때문입니다.

그 점은 베트남의 경우에서 현실로 드러났습니다.

중국은 베트남의 통일운동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베트남이 통일된 이후 두 나라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전쟁 상태에까지 치달았습니다.

지금도 베트남은 미국과 연대하여
반중국전선(反中國戰線)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중국은 한반도도 통일 이후 중국의 영향권을 벗어나
미국 측에 줄을 서는 상황이 될 것을 염려합니다.
그래서 중국은 한국의 통일에 부정적이고 반대합니다.

가까운 나라 일본 역시 한반도의 통일에 반대합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어두운 역사가 있는지라
통일 한국이 강력한 나라가 되어
일본에 위협적인 세력이 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경우는 어떨까요?
러시아는 지금 과거 소련시대의 러시아가 아닙니다.

2016년 러시아의 경제력은 한국의 수준에도 못 미쳤습니다. 그러니 한국의 통일에 러시아가 영향을 줄 처지가 못 됩니다.

한반도의 통일에 큰 힘을 써줄 나라는 역시 미국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미국의 힘을 인식하고
미국과의 관계를 소중히 하면서 그 힘을
한국의 통일에 사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국가대전략의 핵심사항입니다.

나아가 한미일 동맹을 존중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한국 안보의 지름길이요 최선의 길입니다.

우리는 일본과의 관계에서 과거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한일관계에서 반일(反日)할 것이 아니요
친일(親日)할 것 역시 아닙니다.

용일(用日)하여야 합니다.
즉 이용을 하여야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친일파도 아니고 사대주의자도 아닙니다.
또한 정치가도 아니고 일반 국민 기독교인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시대의 안목을 바라 볼 때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포로되어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여서 그 당시 지도자들이
요즘 말로 반역자로 여겨 웅덩이에 집어 넣어 버렸습니다.

예레미야는 시대의 안목을 바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시대의 안목을 바라 볼 줄 모르고 반미운동을하고
북한정권의 속내를 모르고 친북주의자들이 있다는 것은
심히 개탄할 일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시대의 흐름을 바로 볼 줄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 줄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나라의 흥망성쇠를 주장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여서 이 난국을 헤쳐 나아가야겠습니다.

오늘도 이 땅에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는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있기에 이 나라가 지탱하는 줄 믿습니다.

기도합시다 이 나라가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도록 더욱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평강이 이 땅에 가정에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카톡에서 받은 글

설교자체를 포기해야 하는가

지금부터는 교회자체가 장애물이 될수 있기때문에 진정 복음을 전파하려면 교회부터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들이 주목한것은 교회 출석인원이 점점 줄어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고 싶다면
그들과 섞여 살면서 삶을 공유하며 하나가 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어야한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들이 성경과 기독교교리를 계속 전하는한 다른 결과를 기대할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교회와 목회자의 주된 임무

교회와 목회자의 주된 임무는 다름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성경은 이에대해 어떤 답변을 제시할까요?

주님의 사역은 두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주님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요한은 그런 기적을 표적이라고 불렀습니다
주님이 이런 표적을 자주 행하셨으나 이런일은
부차적인 일이지 주된일이 아니었습니다
오천명을 먹이신후 사람들이 왕으로 삼으려 할때 주님은 혼자 산으로 떠나셨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곁길로 세게하는 유혹으로
여기셨습니다
이런것들을 추구하는 일은 교회와 목회자의
주된 역할이나 주된 임무가 될수 없습니다

한남자가 예수님께 찾아와 부탁을 드렸습니다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누게 하소서
예수님은 그에게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예수님은 그런일을 하려고 천국을 떠나 이땅에
오신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오순절날 성령으로 충만해진
즉시 설교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있는
한남자를 고친 것을 보고 흥분하여 관심을 가졌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으로 여겨 큰 혜택을 얻지는 않을까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설교로 그들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면서 방금 행한 기적보다 훨씬
중요한 그리스도와 구원에 관한 진리로 관심의
방향을 즉각 돌려버렸습니다
사도들이 강조한 것은 바로 이것이였습니다

행4장에서 당국자들은 무엇보다 가르치거나
설교하지 못하게 하려고 노심초사했습니다
기적보다도 '이이름'으로 설교하고 가르치는 일을 큰 문제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보고 들은것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수 없는 심정을 느꼈습니다


초대교회에 한가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헬라파과부들은 끼니를 잇지 못할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그것은 긴급하고 예민한 사회문제 였습니다
이것은 교회출범 즉시 찾아온 중대한 시험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굶고 있고 실제적인 고통을 격고있는데도 설교를 계속해야 하겠습니까?
성령의 인도를 받은 사도들은 그위험성을 간파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우리는 오직 기도하는 일과 말씀사역에 힘쓰리라
이로써 교회의 영원한 우선순위가 정립되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부흥

교회사를 조감해볼때 교회역사상 위축된 시기는 항상 설교가 쇠퇴했던 때입니다
매번 종교개혁과 부흥의 새벽을 알렸던 현상이
무엇입니까?
설교가 새로워진 것입니다
교회역사상 위대한 운동이 일어날것을 알렸던
전조현상은 언제나 참된 설교가 되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설교와 설교자 ㅡ마틴 로이드존스

 

 

http://v.media.daum.net/v/20180109135751938


이지예 입력 2018.01.09. 13:57



【서울=뉴시스】이지예 기자 = 세계유대인회의(WJC)의 로널드 라우더 회장은 8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뛰어난 식견과 지성'을 갖춘 사람이라며 트럼프의 정신 건강 이상설을 부정했다.

【워싱턴=AP/뉴시스】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6일(현지시간) 트위터에 자신은 똑똑하고 정신적으로 안정된 천재라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 5일 메릴랜드주(州)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리는 공화당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워싱턴에 있는 백악관을 떠나고 있다. 2018.01.06


라우더 회장은 이날 성명을 통해 "내가 아는 대통령은 뛰어난 식견과 지성을 겸비한 분"이라며 "그가 일개 정치인이 아니다보니 비판가들이 헷갈리고 있다"고 주장했다고 타임스오브이스라엘(ToI)이 보도했다.

라우더 회장은 "트럼프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진부하고 헤묵은 방식으로 말하길 거부한다"며 "비판가들은 이를 두고 그가 무언가 잘못됐다고 생각하곤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인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진짜 방식으로 이 나라를 향해 얘기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난 트럼프를 50년 넘게 알고 지냈다. 펜실베이니아대학 학생일 때부터 그를 알았다"며 "지금 나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외교적 도전 속에서 그와 함께 일한다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앞서 언론인 마이크 울프는 트럼프 당선의 뒷얘기를 폭로한 책 '화염과 분노'를 통해 트럼프의 정신 건강 이상설을 제기했다. 그는 트럼프의 주변인 모두가 트럼프의 지성과 대통령으로서의 적합성에 의문을 품고 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에 "난 매우 성공적인 사업가에서 미국 최고 TV스타까지 됐다"며 "이는 내가 총명할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매우 안정된 천재임을 보여준다"고 반박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6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지역인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공인하는 등 국제사회의 기존 외교 질서를 뒤집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강경파 유대인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옳은 결정을 내렸다고 감싸고 있지만 이슬람 국가들은 물론 유럽, 러시아, 중국 등에서도 미국의 예루살렘 조치에 따른 중동 정세 악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ez@newsis.com


 

 

 

- -◆ 축의금 만삼천원 ◆-

10년 전 나의 결혼식 날이었다
결혼식이 다 끝나도록 친구 형주가 보이지 않았다

'이럴리가 없는데... 정말 이럴리가 없는데...'

바로 그때 형주 아내가 토막 숨을 몰아쉬며
예식장 계단을 급히 올라왔다

"고속도로가 너무 막혀서 여덟시간이 넘게 걸렸어요.
어쩌나, 예식이 다 끝나버렸네..."

숨을 몰아쉬는 친구 아내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석민이 아빠는 못 왔어요. 죄송해요...
대신 석민이 아빠가 이 편지 전해드리라고 했어요"
친구 아내는 말도 맺기 전에 눈물부터 글썽였다

엄마의 낡은 외투를 뒤집어쓴 채
등 뒤의 아가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 철환아, 형주다
나 대신 아내가 간다

가난한 내 아내의 눈동자에 내 모습도 함께 담아 보낸다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사는
리어카 사과 장사이기에 이 좋은 날,
너와 함께 할 수 없음을 용서해다오

사과를 팔지 않으면 석민이가 오늘 밤 굶어야 한다
어제는 아침부터 밤 12시까지 사과를 팔았다
온종일 추위와 싸운 돈이 만 삼천원이다

하지만 힘들다고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지랑이 몽기몽기 피어오르던 날
흙 속을 뚫고 나오는 푸른 새싹을 바라보며
너와 함께 희망을 노래했던 시절이 내겐 있으니까

나 지금, 눈물을 글썽이며 이 글을 쓰고 있지만
마음만은 기쁘다

'철환이 장가간다... 철환이 장가간다... 너무 기쁘다'

아내 손에 사과 한 봉지를 들려 보낸다

지난 밤 노란 백열등 아래서
제일로 예쁜 놈들만 골라냈다
신혼여행 가서 먹어라

친구여, 오늘은 너의 날이다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 있다

이 좋은 날 너와 함께 할 수 없음을
마음 아파해다오

-해남에서 친구가- 』

편지와 함께 들어있던 만원짜리 한장과 천원짜리 세장...

뇌성마비로 몸이 많이 불편한 형주가
거리에 서서 한겨울 추위와 바꾼 돈

나는 웃으며 사과 한 개를 꺼냈다

"형주 이 놈, 왜 사과를 보냈데요...
장사는 뭐로 하려고..."

씻지도 않은 사과를 나는 우적우적 씹어댔다
왜 자꾸만 눈물이 나오는 것일까...
새 신랑이 눈물을 흘리면 안 되는데...

다 떨어진 구두를 신고 있는
친구 아내가 마음 아파할텐데

멀리서도 나를 보고 있을
친구 형주가 마음 아파할까봐,

엄마 등 뒤에 잠든 아기가
마음 아파할까봐, 나는 이를 사려 물었다

하지만 참아도 참아도 터져 나오는 울음이었다
참으면 참을수록 더 큰 소리로
터져 나오는 울음이었다

나는 어깨를 출렁이며 울어버렸다
사람들이 오가는 예식장 로비 한가운데 서서...

- <곰보빵>中 ,이철환 -

'좋은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운명을 바꾸는 작은 습관 20가지''  (0) 2018.02.15
20년 품삯과 바꾼 ‘세 가지 충고’  (0) 2018.02.07
아끼지 마세요  (0) 2017.11.15
비교하면 멀어지는 행복  (0) 2017.06.22
친구는 재산이다  (0) 2017.05.22

<어느 골수 좌파 신학자의 고백>
  - 매우 길지만 읽을만한 글 -

"나는 왜 좌파 사상을 버렸나"
(김철홍,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저는 1962년생이고 대학 학번은 81학번입니다. 386세대 중 앞쪽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초등학생 시절 저의 어렸을 때 꿈은 농학을 연구하는 과학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1970년대 초반에 우리나라는 아직 쌀을 자급할 수 없어서 분식, 혼식을 장려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하루는 텔레비전 뉴스를 보는데 농업연구소 연구원들이 통일벼 품종 개량에 성공해서 앞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쌀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그 뉴스를 듣고 저는 “바로 저거다. 내가 앞으로 할 일은 바로 농학을 연구하는 과학자가 되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쌀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천성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제가 커서 공산주의 이론에 관심을 갖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좌파 사상에 빠진 친구들 상당수가 사실 가난한 사람들의 고난에 공감하고 그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공감능력이 좋은 사람들이, 소위 공감지수가 높은 사람들이, 민중의 삶의 고난에 공감(compassion)을 하게 되다가 공산주의 이념을 접하게 되면 그 이념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복음으로 들리게 됩니다. 민중의 편에 서서 민중을 고난으로부터 구원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신념과 행동이 도덕적으로 옳고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제가 좌파 서적을 처음 접한 것은 중고등학생 때였습니다. 당시 저의 아버지는 강원룡 목사가 원장으로 있는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1976년 11월에 창간한 『대화』라는 월간지를 구독하셨고 나는 밤에 아버지 몰래 공부를 하는 척하면서 내 방에서 그 책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 책 중에서 내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글은 유동우씨라는 청계천 피복 공장 노동자가 처참한 노동현장을 고발하는 체험 수기, “어느 돌맹이의 외침”이라는 글이었습니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중학교 3학년 때인 1977년 1월부터 3월까지 3회에 걸쳐 월간 『대화』에 연재된 그 글을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읽었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을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고용주들을 향해 분노했습니다.

저는 광화문에 있는 새문안교회에서 자랐고, 1970년대 말 광화문에는 ‘논장’이라는 서점이 있었습니다. ‘논장’ 서점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좌파 사회과학서적들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던 곳이었습니다. 교회에 가는 날이면 ‘논장’에 가서 사회과학이라는 신세계를 접하면서 입시공부에 찌들었던 저는 묘한 흥분을 느꼈습니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2학년 때에는 백기완 씨가 쓴 책,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같은 책을 읽고, “우리가 민족 통일을 이루더라도 민중해방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런 민족 통일은 아무 의미가 없다. 통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민중해방이 중요하다” 이런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내가 살아야 할 올바른 삶은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삶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게 되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택시운전이라도 하면서 노동자와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시절에 저는 감성적인 좌파가 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좌파들은 이런 감성적 좌파 단계를 초반에 다 거칩니다. 대학생들의 경우 상당수가 1-2학년 때 감성적 좌파가 되는 경험을 합니다. 제가 보기에 현재 나이 20-40대 중에는 감성적 좌파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감성적 좌파 단계에서 머물고, 어떤 사람은 그 단계를 거쳐 공산주의 이론을 학습하면서 이념가로 성장하게 됩니다.

1981년에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했고, “메아리”라는 오픈 써클에 들어갔습니다. 메아리는 흔히 운동권 가요를 부르는 동아리로 알려져 있지만, 민중가요를 발굴, 보존할 뿐만 아니라 창작하고 보급하는 문화운동 단체입니다. 그 때에 민중가요에 푹 빠져서 1-2학년을 보냈고, “신작로”라는 제목의 노래를 직접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 노래는 2학년 때에는 구로동에 있는 공장의 여공들을 조직하는 것을 도와달라는 어떤 누나의 요청 때문에 여공들을 만나고 나서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에서 영감이 떠올라 만든 노래입니다. 노래뿐만 아니라 군대에 다녀와서는 영화에도 관심을 갖게 되어서 학교 밖에 있는 영화팀에 잠시 있기도 했습니다.

서울대 뿐 아니라 대부분 대학에는 노래, 탈춤, 민요, 연극, 영화 등 당시 다양한 문화, 예술운동 단체들이 만들어졌고, 이런 동아리들은 결국 좌파들이 문화 예술계를 장악하는 데 일조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생 시절에는 학과공부보다는 좌파 이념 서적들을 중심으로 해서 다양한 책들을 읽고 학습했습니다. 소위 당시 운동권 정규 커리큘럼을 물론, 철학, 역사, 문화예술론 등 다양한 좌파 서적들을 미친 듯이 탐독했습니다. 물론 동아리에서도 학습을 했지만 저는 주로 혼자서 학습하는 것이 더 많았고, 그때까지만 해도 공산 이념으로 완전히 무장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지도휴학을 받고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지도휴학은 학교에서 강제로 휴학을 시켜서 운동권 학생을 강제로 군대에 가게 만드는 제도입니다. 1983년 초에 메아리 노래책 6집을 제가 새로 편집해서 출판해서 전국적으로 보급하게 되었는데, 그 책에 80년 광주사태 당시 전남매일신문에 실린 김준태 시인의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라는 시를 실은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군생활은 철원에 있는 3사단 백골부대 23연대에서 소총수로 근무해서 병장으로 제대했습니다. 군복무 중 군 보안대에서 실시하는 소위 녹화 사업이라고 해서 서울 세운상가 쪽에 있던 보안대 분실에 끌려가 약 열흘간 녹화교육도 받았습니다. 원래 저는 극렬 운동권 학생도 아니고, 원래 등급은 제가 보기엔 c급이라서 자대 보안대에서 며칠만 받으면 되는데, a등급으로 잘못 분류되는 바람에 보안대 본부에서 열흘간 받았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결코 이름을 날리는 유명한 운동권 학생이 아니라 소심하고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1985년 12월에 제대하고 1986년 1학기에 복학했습니다. 그 무렵 사회학과 동기 중 두 명이 당시 경인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저를 찾아와 합류할 것을 권하기도 했습니다. 그 중 한 친구는 지금 해산된 통합진보당 대표직무대행도 지낸 사람입니다. 만약 그 때 그 친구와 합류했다면 저도 통합진보당 소속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제안은 별로 마음이 끌리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내가 공장에 들어가 한 명의 노동자가 되어 노동자를 조직하는 노동운동을 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시급한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던 중 새로운 제안이 들어왔고 그 제안은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 제안은 한 마디로 남한에서의 공산혁명을 지도할 “공산당”을 조직하는 사업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공산혁명운동 역사를 연구해보면 혁명운동은 공산당을 조직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당을 만들지 않고 공산혁명을 할 수 없고, 당의 올바른 지도 없이 혁명이 성공할 수 없으므로 공산당을 만드는 것이 당면한 가장 급한 사업이라는 것이었고, 저는 그것에 적극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당을 만드는 방법은 매우 간명합니다. 제일 먼저 당 중앙위원회를 구성해야 하고, 그 다음에 는 중앙위원회에서 시작해서 위에서 아래로 조직을 해나가면 됩니다. 절대로 민주적으로 아래에서 위로 하지 않습니다. 그럼 누가 중앙위원회를 조직하느냐? 그 대답은 “당을 조직할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 즉 우리가 한다”였습니다. 제가 속한 그룹은 중앙위원회 구성을 목표로 해서 활동을 시작했고, 우리가 직접 중앙위원회를 조직하려면 우리 스스로가 먼저 혁명의 지도역량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매우 집중적으로 사상 학습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한 학기 만에 학교를 휴학하고 사상 학습을 시작했습니다. 그 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학습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일본에서 출판된 정치경제학 원론을 읽고 공부했다면, 이때에는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영어번역으로 직접 밤을 새워 읽고 토론했습니다. 매일같이 만나서 하루 종일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마르크스의 정치 수필들과 레닌, 마오쩌뚱의 글 등을 함께 공부하면서 사상적 기초를 단단히 닦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매일 오전에는 그 날 신문들을 펴놓고 정세분석을 하면서 투쟁의 방향을 토론하기도 하면서 직업적 혁명가로서 자신을 훈련하였습니다.

우리가 공산당을 만들 경우 과거 일제시대 때 조선공산당 창건 시도가 대부분 일제정보 경찰에 의해 발각되어 검거되거나 조직이 무산되었던 것을 감안하여 앞으로 혁명 지도를 지속적으로 그리고 안정적으로 하기 위해 중앙위원회는 중국이나 연해주에 두는 방안에 대해서도 연구를 했습니다. 과거 학생운동 조직이 보안과 비밀유지의 원칙을 지키지 않아 줄줄이 검거되었던 것을 감안해서 우리는 처음부터 실명을 사용하지 않고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서로 개인적인 사항에 대해 깊이 서로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았습니다.

혁명가로서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기밀을 유지하고 보안을 지켜 절대로 검거되지 않는 것이고, 검거되더라고 점조직으로 되어 있으면 그 본인만 검거되고 끝나므로 보안 유지에 신경을 썼습니다. 저도 그 당시에 가명을 사용했고 지금도 당시 사람들의 본명을 모릅니다. 제 추측에는 우리 그룹 말고도 우리 그룹과 같은 다른 그룹들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시절에 저는 완전히 공산주의자가 되었습니다. 대학 1학년 시절부터 시작해서 그 동안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모든 지식이 이제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되면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공산주의 이론은 인간의 역사, 정치, 경제, 문화를 모두 통합하는 이론으로서 이것으로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신문을 읽으면 모든 것이 다 이해되고 설명이 됩니다. 이론이 주는 힘은 내가 세상의 가장 높은 산의 꼭대기에 서서 내 발 아래에 있는 온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주는데, 그것이 주는 기쁨은 말로 설명이 불가합니다.

내가 드디어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고 확신하는 순간 그것은 엄청난 자신감을 주고, 한 평생 직업적 혁명가로서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줍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은 종교적 개종과 매우 유사한 경험입니다. 종교사회학에서 이것을 정치적 개종(political conversion)이라고 부르는 데, 공산주의 이념을 받아들이는 것은 종교적 개종보다 훨씬 더 강력한 변화를 사람 안에 일으킬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 이념은 그런 면에서 매우 강력한 종교적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얼마나 마르크스의 책에 미쳐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지금도 생각하면 웃음이 나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하루는 자본론을 읽고 토론하는데 아무리 읽고 노력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마르크스가 무슨 뜻으로 이 말을 한 것인지 설명이 안 되어서 해결하지 못하고 지나갔는데, 그 날 점심을 먹고 1시간 낮잠을 자는 시간에 꿈에 칼 마르크스가 나타나서 그 문장들의 뜻을 저에게 상세히 설명해주었습니다. 잠에서 깨어서 그 내용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해주었더니 다들 완벽한 설명이라면서 좋아했습니다. 그 후부터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나오면 동지들이 저더러 잠깐 마르크스를 직접 만나서 그의 대답을 듣고 오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공산주의 이론에 완전히 빠져서 정치적 개종을 경험하면서 저는 공산주의자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공산혁명을 위해서라면 저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고, 혁명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영광된 죽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잘 진행되고 있었고 2-3년 내에 중앙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하면서 지내던 중 구성원 중 한 사람이 토론 시간에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들어보니 주체 사상을 따르는 주사파의 주장과 유사했습니다. 몇 번 그런 일이 반복되자 내부에 논쟁이 발생하였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분명히 그 동지는 주체사상에 오염되어 있다고 판단되는데, 자신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20여 일간의 사상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소위 ‘사투’라고 하는 겁니다. 공책을 사서 서로 하는 말을 일일이 기록하면서 서로 논리적으로 싸웠는데, 결국 그 동지가 스스로의 입으로 자신은 주체사상을 따른다는 자백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주체사상과의 대결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정통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따르고 있었는데, 우리가 지도이념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주체사상이 우리 조직에 침투한 것입니다. 제 추측에는 그 사람이 처음부터 주사파였던 것 같지는 않고, 우리와 조직 사업을 하던 중 주사파에 포섭을 당한 것 같았습니다. 과거 주사파가 자주 써먹던 방식으로 우리 조직을 접수하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저도 물론 그 전에 주체사상 문건들을 읽어보았습니다. 저는 그 책들의 앞부분을 읽자마자 크게 실망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를 읽자마자 저는 “이건 유물론이 아니다. 이건 Materialism이 아니고 Humanism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하부구조, 즉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조합이 인류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봅니다.

물론 마르크스를 비판하면서 상부구조, 즉 인간의 정신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좌파 이론들도 있습니다만 “사람이 주인이다”라든가,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명제는 분명 유물론의 원칙을 위반한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주체사상의 저열함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주사파의 지도자였던 김영환씨는 나중에 북한에 가서 직접 보고 북한체제에 회의를 느껴 전향했다고 말합니다만 저는 북한의 상황은 굳이 가서 직접 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체사상의 후진성을 보면 북한이 얼마나 원시적 후진성에 머물고 있는지 그 수준이 그대로 뻔히 보입니다.

원래 공산주의자가 되려면 공부 엄청 해야 합니다만, 주사파 하려면 공부 많이 하면 안 됩니다. 주사파처럼 공부 안하고 무식하고 몸으로 때우는 사람들이 혁명에 성공하면 얼마나 후진적인 나라를 만들지 뻔히 보입니다.

여하튼 유물론 철학만이 옳다고 믿고 있었던 당시 저는 주체사상을 강력하게 비판하였고, 결국 그 친구가 사상투쟁에서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승복하였습니다. 원래 주체사상과 같은 3류 이론이 마르크스의 이론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친구는 그 다음 날 자필로 된 자기비판 문서를 작성하여 오기로 약속을 받았고 약 20일 간의 사투가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그 친구는 자기비판 문서를 써오지 않았고, 새로운 주제로 논쟁을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는 혁명의 지도노선을 둘러싼 논쟁이었는데, 그 친구는 들고 온 새로운 주제는 혁명 전략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남한에서의 공산혁명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는 이미 무장투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데 이미 동의하고 있었습니다.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공산혁명을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인 무장 폭동을 일으키는 것이 기본적인 혁명 전략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그것을 비현실적인 혁명전략이라고 비판했습니다.

80년 광주사태는 기본적으로 민중의 무장봉기였지만 결국 실패했다는 겁니다. 제가 한국에 돌아와서 보니 광주사태를 민주화운동으로 부르고 있는데 당시 우리들은 광주사태를 민주화운동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광주인민무장봉기라고 불렀습니다. 공산 혁명가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광주사태는 실패한 무장 봉기입니다. 시민군이 무기고를 털고 아무리 장갑차를 탈취해서 무장을 해도, 진압하기 위해 들어오는 정규군의 무력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겁니다. 미제국주의의 주구 노릇을 하는 군사정권의 무력도 감당할 수 없다면 혁명적 상황에서 미제국주의의 보다 더 강력한 무력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민중 봉기로 혁명세력의 주적인 미국의 항공모함을 동원한 무력에 맞서 싸워 이길 수 없다. 실행 불가능한 혁명전략이다. 이렇게 비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물었습니다. 너는 무슨 대책이 있느냐? 그 친구의 대답은 “북쪽에 있는 무력을 동원하는 것 외에 우리가 남조선에서 공산혁명을 완수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다”였습니다. 북조선에 이미 준비되어 있는 무력, 즉 인민해방군을 동원하는 것 외에는 미제국주의와 군사 파쇼의 무력에 대항하여 혁명을 성공할 다른 길을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우리가 이렇게 공산당을 만들게 아니라, 북조선 노동당과 긴밀한 협조 하에 남조선 혁명 사업을 함께 해나가는 것이 현실적인 혁명 전략이라는 겁니다. 사실 무장 투쟁론의 관점에서 보면 이 말이 맞습니다.

솔직히 당시로서는 반박불가였습니다. 문화투쟁 같은 거요? 그람시의 진지이론 같은 건 사실 선전선동술이고, 무장투쟁의 관점에서는 별로 설득력이 없는 주장입니다. 무장투쟁 없이, 사람을 죽이지 않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공산혁명은 불가능합니다.

주체사상은 이미 85년부터 대학교 이념 서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해서 매우 빠른 속도로 학생운동 조직을 장악했습니다. 당시 아침 인사는 “어제 밤 대남방송 들었냐?”는 것이고, 듣지 못한 사람은 들은 사람에게 그 내용을 전달받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습니다.

1987년 대통령 직접선거를 관철시킨 민주화 투쟁 당시 이미 주사파는 대세였습니다. 학생운동의 70-80%는 이미 주사파였고, 노동운동 역시 빠른 속도로 주사파에 의해 장악되었습니다. 1988년부터 상당수의 사람들이 노동운동과 각종 조직 운동에서 주사파에 밀려나, 학교로 언론기관으로 각종 시민운동 단체로 흩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운동권이 급속히 주사파 천하로 바뀌고 비주사파는 조직에서 추방되었을까요? 주체사상이 워낙 뛰어난 이론이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이론적으로 볼 때 주체사상은 약점이 많은 혁명이론입니다. 주사파와 비주사파의 사상투쟁에서 주사파가 승리하고 조직을 접수할 수 있었던 근본적 이유는 주사파의 혁명 전략 때문입니다. 북조선의 노동당과 인민해방군과 힘을 합쳐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그나마 혁명이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사파는 그 태생부터 종북 세력, 친북 세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사상투쟁에 서 저 같은 비주사파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주사파가 되어 북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을 조국으로 삼고, 북조선 노동당의 혁명 지도 노선을 충실히 따르면서 김일성 수령 동지를 중심으로 혁명사업을 하는 길을 택하든지, 아니면 남한 내에서의 우리의 단독 역량으로 혁명적 봉기를 일으키는, 어떻게 보면 매우 비현실적인 노선을 선택하든지 둘 중 하나였습니다.

마치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는데, 출구다운 출구가 없는 상황과 같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모든 문제가 북한의 존재 때문에 왜곡되는 현상이 있다고 말하는데, 심지어 공산혁명을 추구하는 세력 내에서도 북한의 존재 때문에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설 수 있는 자리가 없었습니다.

오직 가능한 옵션은 주체사상을 따르는 것뿐이었습니다. 그 대목에서 제가 공산주의자로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이 막혀버리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제가 속했던 조직은 주체사상의 침투로 인해 결국 조직을 해산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어차피 그 조직은 주사파에게 조직이 드러났기 때문에 유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언제 배신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즉각 해산하였고, 그 이후 때를 보아서 다시 재건하기로 했지만 저는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고 한 때 신문사 기자가 되려는 생각도 했지만, 결국 신학교로 진학하기로 했습니다. 왜 갑자기 신학교로 가게 되었느냐? 간단히 말하면 초월의 세계와 만나는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와서 공산주의 사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많은 사상적 정신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1991년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신약성경 중 바울신학을 공부하면서 모든 사상적 방황이 끝나고 정리가 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2007년에 유학생활을 마치고 16년 만에 고국인 대한민국에 돌아와 장신대 교수로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미 오래전에 정치문제에 관심을 갖거나 정치적 활동같은 것은 하지 않고 학교에서 바울신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조용히 지내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정말 조용히 지냈습니다. 그런데 조용히 지내야겠다는 저의 결심을 흔드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2013년 8월부터 언론에서 공개된 이석기와 RO조직 회합 사 건이었습니다.

저는 집에서 텔레비전에서 이석기와 RO조직 회합 사건에 대한 뉴스를 듣고 그 날 밤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솔직히 2007년 귀국 직후부터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매우 좌경화되었다는 것은 쉽게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2007년에 돌아와서 제가 경험한 대한민국은 1991년에 제가 떠났던 그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마치 타문화권에 들어온 선교사가 느끼는 그런 동일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문화적으로 너무 많이 왼쪽으로 가 있는 겁니다. 하지만 심각한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석기와 RO조직 회합 사건은 저의 생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석기가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이후인 2012년 5월 12일에 합정동의 어느 가톨릭 성당에서 소위 RO조직(Revolutionary Organization, 혁명가 조직) 모임을 했습니다. 그 모임의 주제는 남조선 해방을 위한 혁명적 상황이 곧 발생할 것인데, 그 때 혁명가들은 각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경찰서, 무기고, 통신. 유류시설 등 국가기간 시설을 습격하여 파괴하는 방안을 협의한 겁니다. 그리고 북한 혁명가요인 '적기가'(赤旗歌)를 불렀다는 겁니다.

제가 놀란 것은 이런 것 때문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날 그 자리에 소위 자칭 혁명가라고 하는 사람이 130명이나 모였다는 겁니다. 130명이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고 서로 본명을 공개하고 함께 모였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뭐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지하 조직 운동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조직은 점조직으로 서로 본명을 모르는 사람들끼리만 만나서 가명으로 사업을 하고, 절대로 3-4명 이상이 한 자리에 모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10명이 모인다? 10명이 모이게 하면 그것은 보안원칙에 당연히 위반되는 것이며, 해당행위로서 징계사유가 됩니다. 그런데 10명도 아니고, 20명 도 아니고, 130명의 직업적 혁명가들이 보안이 확보되지도 않은 공개된 자리에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한 자리에 모여서 토론을 했다? 이것은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미친 짓입니다. 그러면 이 혁명가분들이 보안원칙을 교육받지 못해서 그렇게 한 걸까요? 이 분들이 갑자기 미친 겁니까? 그런 게 아닙니다. 이분들이 합정동에서 130명이 모여서 회합을 한 이유는 그들이 보기에 지금 이미 남조선 혁명의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들은 항상 정세판단이란 것을 하는데 혁명에는 간조기와 만조기가 있다고 봅니다. 간조기 때에는 보안을 철저하게 유지하고 지하에서 혁명을 준비하는 작업을 하고, 혁명의 만조기 때에는 바깥으로 나와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활동을 해도 된다고 봅니다.

2012년에 이분들은 이제 더 이상 우리가 가명을 쓰고 점조직으로 모여 비밀리에 혁명 사업을 할 필요가 없다. 때가 이미 무르익었으므로 이제는 실명을 쓰고 130명이라고 하는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회의를 해도 괜찮다. “우리는 지금 혁명의 만조기 상황에 있다”라고 정세 판단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분들의 정세판단이 틀린 겁니까?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분들의 정세판단이 틀렸을까요? 저는 그 사람들의 정세 판단이 매우 정확했다고 봅니다. 뒤집어서 생각하면 지금 우리 대한민국이 이미 2012년도에 매우 심각한 위기에 빠져있었다는 뜻입니다. 제가 재작년(2015년) 말에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 때문에 글을 쓰게 된 것도 이런 위기의식 때문입니다. 이번 대통령 탄핵 사건을 경험하면서 새롭게 깨달은 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우리나라의 상황이 훨씬 더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원래 공산 세력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면 경찰, 검찰, 안기부 같은 정보기관이 국가 안보의 최전선에서 이들과 싸워야 합니다.

그래야 저 같은 사람이 마음 놓고 바울신학을 가르치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세 가지 조직이 무력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종북 세력이 이미 침투하여 활약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자유경제원에서 남파 간첩 이동식 선생님을 초청한 특강에서 북한의 대남사업부에서 남한의 자생적 공산주의자들을 포섭해서 사법, 교육, 정치, 문화, 예술, 언론 등 각종 영역에 침투시킨 것을 말씀해주셨는데, 사실 그런 이야기는 제가 조직 활동을 하던 1986년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특별히 군대에 침투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러시아 혁명 때 볼셰비키가 혁명에 승리한 결정적 이유 중 하나는 러시아 백군에 볼셰비키들이 미리 입대해 들어가서 초급 장교들이 되어 있었고, 이들이 혁명적 상황에서 지휘관을 처단하고 군대를 적군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점에 주목해서 우리도 군대에 사람을 보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군대에도 적색분자들이 반드시 있다고 가정해야 합니다. 군대는 국가 안보의 최후의 보루인데, 지금은 군대도 100% 신뢰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저 같은 바울신학을 가르치는 신학교 교수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도달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제는 여러분의 직업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가정주부라 할지라도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나와 싸우지 않으면 이 나라의 미래를 낙관할 수 없는 것이 정확한 현실입니다.

대한민국이 처한 이념적 위기는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경각심을 잃어버린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경각심을 잃어버린 계기는 아이러니 하게도 1987년 민주화운동이었습니다. 대통령 직선제 헌법 개정을 관철시킨 이 운동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싸웠던 운동권 세력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주아 계급 독재로 보고 부정할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인 인민민주주의야 말로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들 중 압도적 다수는 주사파, 종북 세력이었습니다.

저는 1987년 민주화 운동 가두시위에 단 한 번도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신문에서는 가두시위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위대가 마치 자유민주주의의 실현을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떠들어댔지만 당시 제가 보기에는 그 시위를 조직하는 사람들이 꿈꾸는 것이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인민민주주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87년 민주화 운동이 성공하고 난 뒤 공산주의 혁명을 추구하던 세력, 북조선과 연합하여 남조선 인민 해방을 추구하던 세력이 소위 “민주화 세력”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고 사회 각계각층으로 흩어져 갈때 머지않아 우리나라에 어떤 위기가 오게 될 것인지 그 때 이미 볼 수 있었습니다.

1987년의 민주화 투쟁은 겉으로 보기에는 넥타이 부대의 참여로 인해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하고 군부독재 세력이 패배한 것으로 보이지만, 길게 보면 누가 패배하고 누가 승리했습니까? 제가 보기에 결국은 자유민주주의 세력이 패배하고 주사파가 승리했고 공산세력이 승리했습니다. 왜냐하면 87년 이후부터 이 종북세력과 공산세력을 우리 사회에서 손을 볼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손을 보려고 하면, 이것을 민주세력을 탄압하는 것으로 호도하여 선동을 하면 대부분의 국민들이 선동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종북세력과 공산세력이 이들이 30년 동안 자유롭게 혁명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0년 동안 이들을 내버려두고 손보지 않은 결과가 무엇입니까? 바로 작금의 대통령 탄핵 사건입니다.

80년대 초반에 대학에 들어온 사람들이 이제 나이를 먹으면서 저처럼 50대 중반의 나이가 되어 우리 사회의 중추세력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의 각 분야에서 드디어 종북 세력, 공산세력의 본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고편이 끝나고 본 영화 상영이 시작된 겁니다. 예를 들어 신문사를 예로 들면 지금 저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이 논설주간을 하고 계신데, 이분들이 곧 은퇴할 때가 옵니다. 그러면 누가 그 자리를 채우느냐? 바로 386세대 본진이 그 자리를 채웁니다. 그리고 그 세대 밑으로 15-20년 정도는 똑같은 사람들이 올라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치계, 법조계, 문화예술계 모두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현 20대 국회는 과거 어떤 국회보다 전대협 출신들이 가장 많이 진출한 국회고, 전대협은 학생운동의 주류였고, 그 주류는 주사파였습니다. 전대협 출신 국회의원들이 과연 사상적으로 얼마나 전향했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과연 전향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이 되어서 지금 국회의원 뱃지를 달고 있을까요?

공산당을 만들기 위해 제가 속했던 조직을 해산할 때 앞으로 절대 이 조직 활동에 대해서 발설하지 않기로 서약하고 헤어졌습니다. 제가 오늘 이 서약을 스스로 깨고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대한민국이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민주주의가 위협당하고 있지 않다면 제가 오늘 이런 자리에 나와서 이런 강연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저는 학생운동 출신의 명망가가 아닙니다. 저는 a급이 아니고 소심한 c급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학생운동의 언저리에 있던 저 같은 사람이 이렇게 시뻘건 공산주의자가 되었다면 1986년 이후 학생운동의 핵심적 지도부에 있었던 사람들, 주사파 조직 지도부에 있던 사람들은 어느 정도 빨간 사람들인지 여러분 이제 가늠이 좀 되십니까?

지금은 인민민주주의냐 아니면 자유민주주의냐? 이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 어느 편에 설 것인지 여러분 스스로가 결정해야 할 시점이 되었습니다.

지금 중립 중립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분들에게 드릴 말은 “중립은 개나 줘라”입니다. 이념문제에서 중립은 기회주의에 불과합니다. 저는 이념의 스펙트럼에서 왼쪽 끝까지 가본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저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고 제 말을 잘 들으시길 부탁드립니다.

끝으로 “문제는 자본주의다. 사회주의가 답이다”라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떡이는 젊은 세대를 향해 한 말씀드립니다. 제가 왜 좌파 이념을 버렸느냐?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에 비해 열등한 제도일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는 이룰 수 없는 꿈을 미끼로 해서 인민을 속이고 착취하는 사기이란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은 사회주의 제도의 우수성과 궁극적 승리에 관한 교리를 가르치지만 이 이론은 아직 실증적으로 옳은 것으로 증명되지 못했습니다. 20세기 사회주의 국가들의 실패는 오히려 그 반대의 증거만은 양산했습니다.

현재의 중국, 북한 등 사회주의 국가들은 정치적으로 인민민주주의지만, 경제적으로는 실제로는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입니다. 국가가 모든 생산수단을 독점하는 대자본가가 되어 노동자와 인민들을 체계적으로 착취하고 있는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의 기형적 형태에 불과합니다. 공산사회가 되면 착취가 없어진다고 선전하지만 공산주의야말로 노동자들을 제도적으로 착취하는 시스템입니다.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를 노동자에게 돌려주어야 착취가 없어집니다.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공산주의의 실현을 위해 당분간 국가가 자본가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선전합니다. 그리고 확대재생산을 위해서 잉여가치를 통해 발생한 이윤을 모든 노동자들에게 나누어줄 수 없고 자본 축적을 하는데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국가의 역할을 대행하는 정부 관료와 고위 공산당원 계층이 아무런 제약 없이 마음껏 프롤레타리아들을 착취하고 치부(致富)하고 있습니다. “축적을 위한 축적”을 무한대로 실시하면서 사실상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수준의 착취와 치부가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쉬차이허우(사진 徐才厚)라는 중국의 인민해방군 장군(상장)의 호화 주택을 압수 수색한 결과 605평 규모의 지하실에서 위안화, 미국 달러, 유로화가 나왔는데, 너무 양이 많아서 세는 것은 포기하고 저울로 달았더니 1톤이 되었다는 것 아십니까? 보물은 말할 것도 없고요. 현금과 보물을 옮기는 데 군용 트럭 10대를 동원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 같은 시장경제제도에서는 이런 부정부패가 불가능합니다.

이상득 의원이 7억 5천만원 정치자금 받은 것 때문에 구속되어 감옥에 갔을 때 중국 사람들이 한 말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첫째로 어떻게 대통령의 형이 감옥에 가냐? 중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둘째로 어떻게 겨우 7억 5천만원 받았다고 감옥에 가냐? 중국에서는 그 열배를 받아도 아무도 감옥에 안 간다. 이처럼 자본주의 제도에는 부패를 방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있고, 기능을 하고 있지만 공산주의 제도는 공산당 일당 독재이기 때문에 아무도 부패를 감시할 수 없습니다.

가끔 터져 나오는 부정부패 사건은 공산당 내부 권력투쟁의 과정에서 나오는 겁니다. 부패의 상징처럼 된 보시라이 (薄熙來) 전 충칭시 서기는 1조 5천억원의 비자금을 갖고 있었다고 하는데, 보시라이가 어떤 사람이었냐 하면 시진핑이 정권을 잡기 전 기준 당시 당 지도자들 중에서 가장 청렴하고 부정부패를 하는 당원들을 색출해서 처벌할 것을 가장 많이 주장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해되십니까?

사적소유제도를 폐지하고 산업을 국유화한 그 결과로 국가의 부(富)를 사적으로 마음껏 도용(盜用)하는 집단이 등장하게 하고, 결국 개인은 그 집단과 공산 이념의 실현을 위해 살아가는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합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또 다른 절대왕정에 불과합니다. 한 명의 왕 대신 왕노릇 하는 집단이 프롤레타리아들을 노예로 부리는 독재다. 이것이 집단주의에 근거한 공산주의 이념이 궁극적으로 보여주는 미래의 청사진입니다. 사회주의에 대해 핑크 빛 이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문제는 자본주의다. 사회주의가 답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이 말을 듣고 쉽게 동감하는 사람들에게 저는 ‘이것이 진정 당신들이 원하는 것인지?’ 진지하게 묻고 싶습니다.

사유재산제도가 폐지되면 개인의 자유는 끝장이 납니다. 경제적으로 독립한 개인은 사라지고, 국가에 모든 것을 의존하는 개인, 즉 집단에 예속된 개인만이 남고, 그 개인은 결국 노예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도 “사회주의가 답이다”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나라의 좌파들은 시대에 뒤떨어져 있습니다. 시대에 뒤떨어진 좌파는 천민 사회주의요, 주사파와 같은 천민 공산주의입니다.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21세기에 “사회주의가 답이다”? 한심한 소리입니다. 이것은 마치 노래방에서 나훈아의 “물레방아는 도는데”를 부르는데, 뒤 배경화면에는 걸그룹이 댄스하는 장면이 나오나오는 것과 똑같습니다. 전근대적인 사고 속에서 헤매고 있는 젊은 분들이 빨리 생각을 바꾸기를 부탁드립니다. 제가 좌파 이념을 버린 이유 중에 종교적인 이유도 있지만 이 점에 관해서는 당장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지금은 자유의 위기상황에 우리는 몰려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의 위기이고, 자유시장경제제도의 위기입니다. 그리고 이 위기의 본질은 이념 전쟁입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이미 내전상태에 돌입하였습니다. 6.25는 이념 전쟁이었습니다. 동족상잔의 전쟁이 아닙니다. 아무리 같은 민족이라 하더라도, 자유 민주주의 이념과 공산주의 이념은 공존할 수 없고, 서로 죽이고 죽여 상대방은 제거하고 힘으로 제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명확하게 보여준 전쟁입니다. 이념에는 동족, 그런 거 없습니다. 같은 가족이라도 이념이 다르면 적입니다. 이 전쟁은 내가 원하지 않아도 이미 시작된 전쟁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예전에 신문에 쓴 글을 소개하며 이야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대한민국은 이미 오래전에 내전(內戰)의 상황으로 들어갔다. 현재의 좌우(左右) 대립은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을 전후로 한 시기의 좌우 대립을 이미 넘어섰다. 내가 보기에 지금 대한민국의 상황은 거의 6.25 직전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그 때는 공화국에 핵무기가 없었는데, 지금은 있다는 것이다 …. 대한민국은 휴전선 너머에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지금 휴전 상태이지만, 우리 내부에 있는 자유민주주의의 적들은 한 번도 우리에게 휴전회담을 제의해 온 적이 없다. 그들은 지금 당당하게 선전포고를 하면서 미완(未完)의 전쟁을 마무리 지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미 내전은 시작되었다. 아직은 총이 아닌 펜을 들고 싸운다. 부디 불가피하게 총을 집어 들어야 하는 상황이 절대로 오지 않기를ㅠ 바라지만 남과 북이 총을 들고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럴 수 있을까? 의문이다.”

지인이 카톡으로 보낸 글

 

거짓선지자


이단 사이비 교주들의

하나같은 공통점은 바로 교만입니다.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모르신다는

세상 마지막 때와 시기를 자신들만 알고 있노라며

순진한 영혼들을 멸망의 길로 몰아갑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성경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예언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마 24:36-37)


이단들의 유형을 살펴보면

살기가 어려웠던 시절에는 복을 강조했습니다.


그들은 곧 신앙촌 박태선 교주를 비롯하여

엘리야 선교단과 같은 단체들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지식이 높아지고

생활이 윤택해지자 왜곡된 말씀으로 미혹하며

거짓 선지자들은 결국 '신.천.지의 출연으로'

그 정점을 찍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진리에 바로 서지 않으면

신앙을 지키기가 매우 어려운 시대이며,

주의 자녀들과 사단 마귀와의 첨예한 전쟁은

바로 말씀의 전쟁인 것입니다.


더불어 성경은

성도들의 구원을 빼앗아가는

악한 세력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눅 10:41-42)


이 좋은 편이란 과연 무엇인가요?

그것은 곧 주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오직 하나뿐인 내 영혼보다

더 귀한 것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마귀는

여전히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아다니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면

거짓 선지자들에게 시험을 당하는 것입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마 24:24)


이처럼 이단들도

얼마든지 질병을 치유하며

기적을 행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다가오는 세상 종말의 시기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먼저는 우리가 모든 사명을 마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다음은 성경의 약속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임하시는 날입니다.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우리는

개인적인 종말의 신앙을 지향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영혼을 미혹하는 말씀은

예나 지금이나 종말의 시기입니다.


그러나 오늘 하루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날마다 깨어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이 세상의 종말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의 삶의 목적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한분에게만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주의 자녀들에게

그 무엇보다 영분별이 가장 필요한 시기요,

이 시대의 적그리스도는 성경을 가감하여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요일 4:1)



출처: 한국영성아카데미(성경열기.영성치유) 원문보기   글쓴이: 전도자

설교야말로 사람의 소명중에 가장 고귀하고
위대하며 영광스러운 소명입니다
또한 참된 설교야말로 오늘날 교회에 가장
긴급한 필요일뿐 아니라 세상의 가장 큰 필요임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현대 교회와 현대사회에 설교가
설 자리라는 것이 과연 있을까요?

설교의 쇠퇴와 몰락

설교가 한때 교회의 삶에서 차지했던 위치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위치에서 추락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설교를 쇠퇴시킨 교회의 태도

첫번째로 꼽는 요인은 성경의 권위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고 진리에 대한 신뢰가 약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위대한 교리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면서
설교는 윤리적인 담화나 도덕적훈계 정치적 담론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습니다

두번째는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위대한
강당꾼들이 참된 설교에 끼친 악영향에 관련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쇼맨쉽이 상당했을뿐만 아니라 회중을 다루며
그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일에 전문가들이었습니다
내용보다 형식이 중요해졌고 웅변과 수사가
그자체로 중요한 문제가 되었으며 설교는 결국
오락의 한 형태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진리를 언급하는 경우에도 지나가면서 잠깐
다루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마지막 요인은 설교문이 진정 무엇인지
에 대해 잘못된 개념이 형성되었다는 것
따라서 설교행위가 진정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잘못된 개념이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설교집의 인쇄와 출판도 설교에 나쁜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문학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들로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메시지의 진실성
보다는 문학적인 표출에 더 큰 강조점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설교자라기 보다 수필가에 가까웠습니다
이모든 일의 결과로 설교에대한 새로운 개념이
들어왔는데 설교 대신 강연에 언급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위협하는 요소들

그에 더하여 예배의식 흔히 예배의 요소라고 불리는 부분이 새롭게 강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추세입니다
즉 설교가 쇠퇴하면서 예배의 형식적인 요소가
강화된 것입니다
설교가 퇴조하면서 성공회의 예배형식으로 부터 점점 더 많은 아이디어들을 빌려오고 있으며 회중이 예배에 더 많이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교독문을 도입하고 음악과 노래와 성가대 찬양의 비중을 늘립니다
이것은 설교에 대한 반작용의 일부입니다

더 나쁜 변화는 공예배에 오락적인 요소가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영화가 도입되며 말씀과 기도는 심각할 정도로 축소된 반면 노래에는
더많은 시간이 할애되고 있다는 것은 메시지를
경시하는 전반적인 풍조를 보여주는 한가지
현상입니다

이모든것에 더하여 설교자들이 점점더 간증할
사람들 특히 각분야에 유명인들을 많이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제가 이모든것들을 오락이라는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음을 눈치채셨습니까?

또한가지는 이른바 개인사역 내지는 상담이
점차 강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가 쇠퇴하면서 개인상담이 상승세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삶에는 새로운 스트레스와 긴장과
어려움들이 있기때문에 좀더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고 각 사람의 어려움을 파악해서 다루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입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불신자가 아닌 교회의
가치를 믿는 사람들 실제로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입니다

설교와 설교자ㅡ마틴로이드존스

정통 교회에 속하여 하나님을 삼위일체적으로 안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오소리 다리처럼 들쭉날쭉하여 균형 잡히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중심'을 외치는 건전한 신앙인들 중에도 적지 않게 발견됩니다. 이는 하나님 중심이-성자와 성령이 배제된-유대교의 일신론처럼 왜곡되어있기 때문입니다.

 

-->

여기에는, 성자 그리스도를 단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비인격적인 통로(through)로 간주하는, 성자 경시(輕視)도 한몫 합니다. 그리스도의 중보(mediator)직은 성경의 핵심 사상이지만, 그것이 성부와 분리된 비인격적인 통로가 될 때 성자는 삼위일체 지위를 상실합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통로 개념이 극대화될 때, 그리스도의 용도는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만 유효하며, 하나님을 만난 후에는 용도 폐기됩니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의 첩경을 예비한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 강림 후 순교로 생을 마감하게 된 것에 비견되고, 극단적인 세대주의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이단이, 안식교에서 이탈하여 '엘××선교원'을 세운, 박XX입니다.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하나님께 도달하는 수단이고, 성부 하나님을 돋보이게 하는 장식물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아들을 내어준 성부의 희생을 극대화하는 드라마틱한 주제일 뿐,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에 대해선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그에게는 오직 성부의 사랑만 있을 뿐,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를 향해 했던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갈 2:20)"이라는 절절한 고백 같은 것은 없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고, 성자와 성부가 분리될 수 없는 일체 임을 부정한 데서 나온 결과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mediator)가 분명하지만(딤전 2:5), 중보 대상인 하나님과 분리될 수 없는 일체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중보자인 동시에 중보를 받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이중적 지위는 성경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제물인 동시에 그 제물을 갖고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대제사장으로(히 9:24), 기도의 중보자인 동시에 기도 응답자로(요 14:13), 제물의 요구자인 동시에 제물의 제공자로(창 22:13-14) 나타났습니다.


 

왜곡된 중보자 개념은, 근본 삼위일체의 부정에서 온 것이지만, '통로(through)'와 '목적지(the end)' 의 통념을 '중보자(mediator)' 그리스도와 '궁극(finality)'인 성부께 무차별 적용시킨 원인도 있습니다.


 

예컨대 '통로(through)'와 '목적지(the end)'는 거리차가 있고, 각각에 도달하는 데도 시간차가 있다는 통념이, 중보자(mediator) 그리스도와 궁극(finality)인 성부는 거리가 있고, 둘을 조우하는 데는 시간차가 있다는 추정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중보자' 그리스도와 '궁극'인 하나님은 일체이시고,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계시기에 둘 사이에는 거리가 없으며, 둘의 조우(遭遇)에도 시간차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조우할 때 이미 하나님을 조우합니다. '중보자' 그리스도와 '궁극'인 성부의 관계를, '통로(through)'와 '목적지(the end)'라는 통념에 적용시킬 수 없습니다.


 

한편 그리스도를 통로로만 보는 그리스도 경시적(輕視的) 입장과는 상반되게, 그리스도를 왜곡되게 중시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는 소위 '구속사적 성경해석' 혹은 '구속사 신앙'을 부르짖는 이들에게서 종종 발견됩니다.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만 강조되면 뭐든 정통 신앙인인양 간주되며, 그들의 말, 설교, 어법은 온통 예수로 덧칠되고, 반면 성부와 성령은 홀대를 받습니다. 성경 해석 원리 역시 "오직 예수(마 17:8)"이며, 모든 성경을 이 원리에 맞추어 풀려다보니, 억지스러운 풍유적 해석들이 난무해집니다.


 

여기서 진일보한 극단의 '오직 예수주의(pure Jesuism)'가 있습니다. 이는 '오직 예수'가 이데올로기처럼 경화된 것입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드러내지 않지만 이면에서는 그런 낌새가 물씬 풍깁니다. 이는 '오직 예수(Jesus only)'를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 삼위일체 무용론까지 들먹이는 그들의 태도에서 확인됩니다. 삼위일체 개념이 '오직 예수'의 초점을 분산시킨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이들은 앞서 언급한, 유대교의 일신론적인 '하나님 중심'과 유사합니다.


 

또 한 부류의 왜곡된 예수 강조자들이 있는데, 곧 자유주의와 계몽주의 신학자들입니다. 그들이 강조하는 예수는 삶의 모범자로서의 인간 예수이며, 그의 이타적이고 모범적인 삶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살아있는 예수에게만 관심이 집중되고,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에게는 흥미를 못느낍니다.


 

설사 그것에 관심을 나타내는 경우에도, 그것이 입혀주는 구속의 은혜 때문이 아니라,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십자가를 지신 목적이 정치적인 것이든 종교적인 것이든지를 불문하고-그의 이타적인 행위 자체를 칭송하고 본받기 위해섭니다.


 

그러나 예수가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 세상에 오신 것은, 삶의 활동을 통해 뭔가를 보여주고 이루기 위함이 아니라, 한 마디로 죽기 위함이었습니다(마 20:28). 곧 자기 육체에 우리 죄를 담당시켜 죽으므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섭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 8:3)." 성경이 그의 죽으심에 모든 초점을 맞추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최근 어떤 유력한 성경연구 단체가 쓴 "아직도 그리스도의 대속에만 매달립니까?"라는 글을 대하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2천년 전 과거사일 뿐, 현대인들에게 흥미 없는 주제라는 것과, 더불어 오늘 교회 강단의 메시지가 어떨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게 했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예수의 하나님 됨에 대해서도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예수가 하나님인 것보다 자신들과 같은 인간이기를 바랍니다. 그래야만 이질감 없이 그를 모범자로 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동시에 하나님이심을 말하며(요 20:28, 요일 5:20), 그의 점 없고 흠 없는 피 만이 우리 죄를 속량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벧전1:18-19).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셔야 하는 이유는, 그를 대신하여 오시는 성령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삼위 성령은 2위 그리스도의 바톤을 이어받아 오시기에, 삼위 성령이 오시려면 2위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야 합니다.


 

단지 인간 예수의 죽음으로는 성령을 오시게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이는 성령은 그리스도의 죽으심 위에 오시고, 그의 죽으심을 근거로 역사하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구약 시대에 송아지의 피가 뿌려진 속죄소 위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고(출 25:22), 제물 위에 하나님의 불이 임한 것은(레 9:24, 왕상 18:38), 그리스도의 피 위에 성령이 부어진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은 언제나 함께한다는 것을 예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는 간과된 채, 성령만을 추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신비주의자들과 종교다원주의자들이 그들입니다. 그들이 펼치는 성령 운동에는 그리스도의 피가 없습니다.


 

그들의 하나님 조우 방법도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가 아닌, 소위 침묵, 관상, 센터링 기도, 참회 같은 다양한 '영성적 기술들(Spiritual arts)'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에 근거하지 않는 성령추구는 이방 종교들의 접신 추구와 다를 바 없으며, 그렇게 하여 만난 신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영입니다.


 

루터가 "십자가가 없는 곳에 임하는 영은 악령"이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임재 원리는 단순합니다. 하나님은 무슨 특정한 훈련이나 영적 기술을 통해서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입니다. 이는 그분의 약속입니다.


 

자신은 죄인이며, 그리스도의 대속 외는 구원받을 길이 없음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기 죄 값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하나님은 임재하십니다.   


 

성찬식 때 떡과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죄값으로 받아들인다는 신앙고백적 행위이며, 그렇게 그리스도의 죽음이 받아들여지는 곳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임재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6:56)."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07571

 추처: 영적 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십자가의 비밀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내시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 시대에 로마의 학정에서

고통받고 있는 유대인들도 그 옛날 모세와 같이

자신들을 구해줄 수 있는 메시야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그러나 모세가 육신적인 구원자였다면

예수께서는 죄의 댓가로 죽어야만 하는

율법의 요구를 갚으시려고 십자가의

대속 제물로 오신 진정한 메시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내가 율법을 온전케 하려고

세상에 왔노라고 말씀하십니다.

(마 5:17)


이와 같이 모세의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요,

세상 죄에 대하여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매우 유익한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 (딤전 1:8)


더불어 기독교는 세상의 논리와는 다르게

죽어야 사는 역설적인 신앙이며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주님의 십자가에 감추어진 비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곧 죽음을 의미하며 모든 성도들에게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 9:23)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날마다 내려주신

만나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어제 받은 은혜로

오늘 당하는 시험을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길고 긴 신앙 여정을 방해하는

사단 마귀는 천국 문 앞까지 따라옵니다.


바울은 자신이 날마다 죽노라는 고백과 같이

우리 역시 날마다 죽어야 할 것은

그 십자가가 곧 승리이며 택함 받은 성도들의

영원한 부활에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골 3:4)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으며

내게 주신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고 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늘의 큰 상급을 예비하실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8)



출처: 한국영성아카데미(성경열기.영성치유) 원문보기   글쓴이: 전도자

 

북한 정권이 던진 미끼 무나?


북한은 이를 핵무기 보유와 한미동맹 해체의 주장을 남한이 수용한 것으로 이해할 것이다.


1. 청와대는 1일 평창 동계올림픽에 대표단을 보낼 용의가 있다는 북한 김정은의 신년사에 대해 “환영한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청와대 박수현 대변인은 이날 춘추관 브리핑에서 “오늘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신년사에서 남북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평창올림픽 대표단 파견 용의를 밝히고 이를 위한 남북관계 만남을 제의한 것을 환영한다”며 “평창올림픽이 성공적으로 개최된다면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 더 나아가 세계평화, 화합에 기여할 것”이라고 했다.


박 대변인은 이어 “청와대는 그간 남북관계 복원과 한반도 평화와 관련된 사안이라면 시기·장소·형식에 관련 없이 북한과 대화 의사가 있음을 밝혀왔다”며 “남북이 국제사회와 긴밀히 협력하면서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한편 한반도 문제의 직접 당사자로서 남북이 책임 있는 위치에 앉아 남북관계 해법을 찾기를 바란다”고 했다.


2.

청와대는 “국가 핵무력 완성의 역사적 대업을 성취했다”는 핵 폐기 의사가 없다는 북한의 주장과 “외세와의 모든 핵전쟁 연습을 그만두어야 하며, 미국의 핵 장비를 끌어들이는 행위를 일체 집어치워야 한다.”는 북한의 한미군사훈련 중단과 한미군사동맹 해체 등의 주장에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청와대 대변인 발언이 정부의 공식 입장이라면, 사실상 무조건 대화에 응한 것이다. 북한은 이를 핵무기 보유와 韓美동맹 해체의 주장을 남한이 수용한 것으로 선동할 것이다.


3. 반미 민족공조, 긴 호흡에서 한미동맹은 끝을 향한다. 미국의 북폭이 있다면 동맹이 해체된 후일 것이고, 혹 미국이 타협을 한다면 역시 동맹은 해체될 것이다. 격랑의 2018년을 지나 2019년이 왔을 무렵 모든 것이 정리돼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 연방제인가? 전쟁인가? 아니면 김정은 체제의 초월적 종식인가?

복음통일, 자유통일을 위한 절호의 찬스는 짧게는 2개월 길게는 1년 정도일 것이다.



출처: 리버티헤럴드 / 김성욱 대표

왜 철지난 이데올로기 타령이냐 생각하는 영적 지도자들을 위해 …


무슬림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는 두 가지의 경우가 있습니다. (1) 복음과 성령의 역사에 의해 개종하는 경우. (2) 드물지만 코란과 하디스를 연구하다 경전의 모순과 거짓에 회의를 느껴 개종하는 경우.


사실 두 경우 모두 성령의 은혜입니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분명한 신앙인이 됩니다. 확신하기 때문이지요.


저 역시 최근 좌파에 대한 비판의 글을 포스팅을 하는 이유가 후자의 경우이기 때문입니다. 제 지인들이 안 그러던 사람이 왜 정치적 언급들을 포스팅할까 궁금해할지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다수의 목회자들이 그렇듯 정치나 이념에 대해 중립적이었고 표현도 자제했습니다. 저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성애를 비롯하여 이슬람과 관련한 이해할 수 없는 비상식적 현상들에 의문이 들었습니다. 파멸이 분명한데 왜 저럴까?... 그래서 지난 1년 반 동성애의 배후 사상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적지 않은 자료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다 깜짝 놀란 것은, 그 배후에 이념이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공산주의,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네오막시즘, 신좌파 등등 어떻게 불리든 결국 근본 맥은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자본주의, 그리고 기존의 보편윤리와 체제를 붕괴하려는 무신론적 인본주의 즉, 마르크스의 변종 이념들이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간혹 ‘철 지난 이데올로기’, ‘실패한 공산주의’를 왜 이제 와서 들먹이느냐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요 환상입니다. 공산주의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버전이 다른 강력한 옷을 입고 은밀히 우리를 공격해 왔습니다.


진정 시대의 징조를 분별할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좌,우파가 뭔지도 몰랐습니다. 사실 그다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온전히 목회에만 마음을 두었고, 대다수의 목회자들처럼 대형교회들의 스캔들이 나면 비판하는 매체들에 동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체제를 붕괴하려는 무리들의 주밀한 전략이 깔려 있었습니다.


물론 교회의 부패는 회개하고 고쳐야 마땅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된 참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정말 좌파들이 체제전복을 원하는가? 동성애나 이슬람이 저들의 도구인가? 그래서 좌파의 자료들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정말 그렇게 주장하고 믿고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저런 것이 믿어지지? 또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영적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이단에 빠진 이들의 경우, 피해자들이 이단의 파괴성에 대해 단 한번도 들어보지 않았을까요? 알면서도 당합니다.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빠져나와도 유사 이단을 전전합니다. 이유는 미혹되었기 때문이요, 중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의 영적 강도가 아니면 만족하지 못합니다. 좌파 사상도 그렇습니다. 전향하지 못합니다. 전향했어도 그들의 마음에는 언제든지 열리는 잠재적 좌파의 방이 하나 존재합니다. 그래서 피보다 이념이 진하다고 저들은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목회자들은 시대를 분별하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성장을 위해 열심을 내면 유토피아가 올 것처럼 열심을 내던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어떤 사상이 어떻게 역사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혈육이 서로를 고소하고 죽이는 시대가 온다했습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해하는 시대, 사람들에게서 사랑이 식어져 가는 현상에 주목해야 합니다. 파수꾼이 되어야 할 목회자들이 교인들만도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젊잖은건지, 순진한건지 아니면 무지하고 나태한 것인지 안타깝습니다.


신학자들은 시대의 흐름은 관심 없고 저들만의 리그에서 논쟁에 열심입니다. 좌파들은 그것을 원합니다. 자신들의 정체와 전략을 알기를 원치 않고 끓는 물에 담긴 솥 안의 개구리처럼 서서히 죽어가길 원합니다. 그래야 자신들이 원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목표가 분명합니다. 그래서 잘 뭉치고 희생하고 헌신합니다. 그러나 우파나 기독교인은 뭉치지 못합니다. 목표가 제각각이요, 저마다 자기가 대장되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쉽게 와해되고 패배하게 됩니다.


좌파는 인권, 혐오, 성적 지향, 자유, 평등 등등 언어의 힘을 너무 잘 압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젠더라는 말을 썼나요? 제가 왜 이런 말을 합니까? 제대로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젠더 이데올로기가 한국에서는 성평등이라는 이름으로 헌법에 탑재시키려 발악을 합니다.


왜 철지난 이념 이야기 하냐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조금만 관심을 가져보세요. 앞으로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말입니다. 유럽교회와 사회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세요. 그러면 다시는 그런 소리하지 않을 겁니다.


복음은 모두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죄 값을 담당하셨습니다. 그런데 거짓복음은 혐오라는 옷을 입혀 한편만 사랑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을 죽이려 듭니다. 또 거짓복음은 창조질서를 왜곡시켜 사랑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혐오의 사악함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 파괴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념은 철지난 것이 아니고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더 강력한 버전과 업그레이드를 통해 이 사회와 교회를 허물려고 덤벼들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의 터키나 이집트처럼 되고 맙니다.


한국교회가 영원할 것이라 착각하지 마십시다. 과거 터키나 이집트는 기독교가 부흥했던 지역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슬람 국가가 되고 말았습니다. 영적 분별력과 복음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우리도 저 지경이 될지 모릅니다.


지금은 비둘기 같은 순결함과 뱀 같은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사랑의 복음을 강조합니까? 그렇다면 정말로 그 복음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저들의 사악함도 이길 수 있습니다.



글: 박광서 목사님

대홍수 사건 이후 노아는 까마귀와 비둘기를 여러 차례 방주 밖으로 내보내어 상황을 살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비둘기가 물고 온 올리브 잎으로 물이 빠져가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둘기가 금방 딴 올리브 잎을 부리에 물고 있었으므로, 노아는 땅 위에서 물이 빠진 것을 알았다." (창 8:11)


그러나 노아는 방주 밖을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결정할 수 있는 사인은 '보이는 환경과 자기 생각, 이성'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물이 빠졌지만 결국 방주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결정은 자신을 방주 안으로 들어가라 하신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내와 아들들과 며느리들을 데리고 방주에서 나가거라." (창 8:15-16)


3. 오직 믿음이란 "생각하지 않는 신앙"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리 판단은 필요한 것이고 예의주시 할 수 있는 분별력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주님이 원하시는 신앙의 모습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려는 자세'인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태도'인 것입니다.


2018년도의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힘들 것입니다. 국제정세를 비롯하야 각 개인들의 삶 또한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정치, 경제, 문화, 세계관, 다음 세대들, 교회 등 모든 기준과 가치가 지금보다도 더 맞고 틀리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만 피해 보지 않으면 되는 것으로 가치 기준이 더욱 틀어져 갈 것입니다. 그야말로 앞으로 세상은 '노아의 대 홍수'와도 같은 총체적 난국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노아처럼 사리 판단을 분명히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아가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 즉 말씀을 구하며 기다릴 줄 아는 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진짜 지식은 결국 보여지는 태도로 나타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 1:7)


노아가 까마귀와 비둘기를 통해 상황과 환경을 살폈던 것처럼 2018년 주변을 살필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하십시오.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있음으로 방주의 문을 열고 나왔던 노아와 그의 가족들처럼 '성령님의 최종 사인'을 구하며 기다리는 "신앙의 태도"를 굳건히 세워나가시길 축복합니다.


"인간의 이성을 너무 중요시 여김으로 우리는 오늘날 이렇게 되고 말았다!"라는 유럽의 어느 리더십의 자기 고백을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때입니다. 보이는 것들로 미혹과 두려움들을 일으켜 절벽 끝으로 달려가는 들소 떼처럼 사회를 조장시키려는 '마지막 시대의 특성'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기에 노아가 보여준 신앙의 태도를 익혀야 살 수 있습니다. 자기 생각(이성)이 아닌, 결국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때"를 최종 결정으로 삼았던 노아를 통해 "오직 믿음! 오직 은혜!"가 무엇인지 배워야 할 마지막 때란 것을 깊이 인지하셔여 합니다. 외딴 곳에서 전하는 말이지만 한번 즈음 들어봐 주셨으면 합니다. 마라나타!



출처: 김영표 목사님 페이스북

'은혜의 단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0) 2018.01.20
십자가의 비밀  (0) 2018.01.05
제 삶에는 은혜를 찾아볼 수가 없어요!  (0) 2018.01.03
감사해야 할 이유  (0) 2018.01.03
성탄의 계절에  (0) 2017.12.02

제 삶에는 은혜를 찾아볼 수가 없어요!

손바닥만 한 구름에도 감사하라.


마가복음에 보면 하나님 나라를 다음과 같이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 막 4:26-29


우리는 흔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한 것은 이미 얻은 줄로 믿어라!”라는 말씀과 같이 이미 이루어진 것을 그려보고 기대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씨를 뿌리지만 우리가 응답받고자 하는 것은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지 새싹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마가복음의 말씀처럼 한순간에, 그것도 당신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 당신이 원하는 만큼 뚝딱 응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된 것인지는 알지 못해도 하나님의 은혜로 처음 나오는 것이 바로 싹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심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기도하고 기다리며 소망할 때 처음 눈에 보이는 것은 단지 싹일 뿐입니다. 싹은 완전한 식물의 생김새와는 전혀 다릅니다. 심지어 잡초와도 잘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싹을 알아보는 자만이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싹은 마치 이미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엘리야가 일곱 번이나 기도했을 겨우 얻은, 사람 손바닥만 작은 구름과 같은 것입니다. 싹을 알아보는 자만이 더 큰 믿음을 가지게 되며 곧 이루어질 실상과 증거를 더 확실하게 붙들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싹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는 잡초인 줄 알고 밟아버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이삭에 충실한 곡식만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찾지 못하면 또 다른 씨를 심기만 합니다. 행여나 이번에는 곡식을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비결은 매일 , 손바닥만 구름을 찾고 그것에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씨를 붙잡고 믿음으로 계속 기도하기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고 부정하기 전에 당신의 삶에 돋아난 수많은 싹을 찾고 기록해보십시오. 그리고 그 싹들에 대해서 감사할 때 놀라운 은혜가 자라나게 됩니다. 싹들을 찾고 기록하고 감사하는 일이 많아질수록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에 대한 의심은 사라집니다.


믿으면 믿을수록 더 큰 믿음이 생기듯이,
은혜를 발견하고 감사하면 더 큰 은혜를 가져옵니다.


‘급한데 이웃이 엘리베이터의 문을 잡고 기다려주었다.’
‘뜻밖에 반가운 이메일을 받았다.’
‘누군가가 물건 싸게 사는 법을 알려주었다.’
‘페이스북에서 꼭 필요한 정보를 알게 되었다.’
‘주차장에 마침 빈자리가 있었다.’
‘함께 식사한 사람이 점심 값을 내주었다.’
‘길가 포장마차에서 군것질을 했는데 아저씨가 덤으로 하나 더 주었다.’
‘내가 한 작은 일에 대해서 그 사람이 정말 기뻐했다.’
‘전화 통화를 하는 중에 내게 꼭 필요한 정보를 듣게 되었다.’
‘나에게 꼭 필요한 물품이 홈쇼핑에 나왔다.’
‘신호등을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길을 건너는데 차가 서주었다.’
‘내가 정류장에 가자마자 버스가 왔다.’
‘식당에서 핸드폰을 두고 일어섰는데 누군가 알려주었다.’


우리 하루의 삶은 없는 은혜로 가득 있습니다그런데도 우리는 없는 것과 부족한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것만을 바라보며 삽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만 열면 이미 주어진 은혜의 조각들이 차고 넘친다는 것에 놀라게 것입니다. 오늘 하루 마음의 눈을 뜨고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를 발견해보십시오!



출처: 갓피플 말씀테마 (http://gp.godpeople.com/archives/category/theme)

'은혜의 단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십자가의 비밀  (0) 2018.01.05
노아에게서 베운다  (0) 2018.01.04
감사해야 할 이유  (0) 2018.01.03
성탄의 계절에  (0) 2017.12.02
총살 앞에서 신앙을 지킨 두 소녀!  (0) 2017.11.28

제3차 세계전쟁(WW3)이 예루살렘 때문에 일어나고 이 전쟁으로 인류의 1/3인 25억명이 사망한다. WW3는 재래식 무기가 아니라 처음으로 핵무기가 사용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Phase I : 취하게 하는 잔(cup of Trembling)- 예언 성취 


유엔의 대다수 나라들이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단독 수도로 인정하는 것에 반대하는 표를 던졌다.​ 이는 스가랴 12장 2절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그 사면 모든 민족에게 취하게 하는 잔(cup of trembling)이 되었다. 이 예언은 2017년 성취되었다.

Phase II : 무거운 돌(an immovable rock) - 예언 미성취


"그 날에는 내가 예루살렘을 모든 민족에게 무거운 돌(an immovable rock)이 되게 하리니 그것을 드는 모든 자는 크게 상할 것이라 천하 만국이 예루살렘을 치려고 모이리라" (스가랴 12장 3절)


취하게 하는 잔에 가담한 국가는 128개국이었고 무거운 돌이 된 예루살렘을 옮기려고 하는 이방나라들을 벌하실 것이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움직일 수 없는 견고한 바위처럼 이스라엘의 수도로 정하셨다는 뜻이고, 예루살렘을 두 국가의 수도로 옮기려고 이스라엘을 치는 이방나라 128개국을 벌하실 것이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의 이는 멸망하고 삼분의 일은 거기 남으리라" (스가랴 13:8)


유엔에 가입한 회원국은 193개국인데 2/3는 128개국으로 이는 이스라엘에 반대표를 던진 나라수와 같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무섭게 성취되고 있다.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간 나라들은 멸망할 것이라고 성경은 예언한다. 한국도 이들 국가 리스트에 들어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이방 나라들을 그 날에 내가 멸하기를 힘쓰리라" (스가랴 12장 9절)

그런데 1/3 국가들은 어떻게 될까?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스가랴 13장 9절)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간 국가가 128개국일지는 모르지만, 이미 그들은 이스라엘에 반대 투표에 가담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었다.


128개국은 전쟁에서 처참하게 패하고 적그리스도에게 통치권을 이양할 가능성이 높다. 가담하지 않은 1/3의 65개국은 대부분 기독교 국가들로 적그리스도의 치하에서 연단과 시험을 받을 것이란 말씀에서 적그리스도에게 미움과 박해를 받을 것이다. 스가랴서는 우리 시대를 예언하고 있다. 



만약 말씀대로 그 날에 천하 만국이 예루살렘을 치려고 모여 든다면 어떤 계기로 그런 일이 일어날까?


다음은 가능성을 추정한 것이다​.


1. 두 국가 해법을 위해 예루살렘 수도 분할에 반대하는 경우.

2.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내전 격화로 팔레스타인이 열세국면이 전개 될 경우. 

3. 이란과 이스라엘 전쟁, 이슬람세계와 전쟁 확산.

4. 예루살렘에 제3성전을 건축하기 위한 모종의 액션.




제3성전을 건축 시기에 대해서는 예루살렘이 공격받기 전일지 후일지 확실하지는 않다.


만약 트럼프가 현재의 성전산 터의 황금돔 옆에 제3성전 건축을 위한 모종의 행동을 한다면 세계국가들이 이번 결의안을 통과시킨 것처럼 예루살렘 공격을 위한 결의안을 통과시킬 수 있을 것이다. 



● 예루살렘 예언, 스가랴 12장 2절의 성취

http://blog.daum.net/bk1981/19938


랍비 250명 예루살렘 예언성취 확증-종료-전환

http://blog.daum.net/bk1981/19964

전율의 잔(cup of trembling)에 가담한 국가 리스트

http://blog.daum.net/bk1981/20046



글 출처: 카이로스 / ars



 

감사해야 할 이유

미국의 실업가 중에  '스탠리 탠'이라는 박사가 있습니다.

그는 회사를 크게 세우고 돈을 많이 벌어서 유명하게 되었는데, 1976년에 갑자기 병이 들었습니다.

척추암 3기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당시 척추암은 수술로도 약물로도 고치기 힘든 병이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그가 절망 가운데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몇 달 후에 그가 병상에서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출근했습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아니 어떻게 병이 낫게 된 것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스탠리 탠은 “아 네, 전 하나님 앞에 감사만 했습니다.

그랬더니 병이 다 나았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전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병들게 된 것도 감사합니다.

병들어 죽게 되어도 감사합니다.

하나님, 저는 죽음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할 것밖에 없습니다.

살려 주시면 살고, 죽으라면 죽겠습니다.

하나님, 무조건 감사합니다.”

매순간마다 감사하고 감사했더니 암세포는 없어졌고 건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가 다시 회복하게 된 것은 '감사'때문이었습니다.

요즘 미국의 정신병원에서는 우울증 환자들을치료하기 위해서 약물치료 보다는 소위 '감사'치유법을 더 많이 사용한다고 합니다.

환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에서 감사한 일들은 무엇일까를 찾아내게 하고 감사를 회복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약물치료보다도 이 감사치유법이 훨씬 더 효과가 탁월하다는 것입니다.

이 감사치료법은 단지 정신과적인 치료에만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

'스탠리 탠'의 경우와 같이 육체의 질병에도 대단한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일본 해군 장교인 가와가미 기이찌 씨는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고향에 돌아오고 나서 하루하루 사는 것이 짜증이 났고 불평 불만이 쌓여져 갔습니다.

결국 그는 전신이 굳어져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불치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 때에 그는 정신 치료가인 후찌다 씨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후찌다씨는 그에게 “매일 밤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만 번씩 하세요” 라고 처방했습니다.

기이찌 씨는 자리에 누운 채로 매일 밤 계속해서 “감사합니다.” 라는 말만 계속했습니다.

매일 “감사합니다”를 했기 때문에 감사가 몸에 배여 있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들이 두개의 감을 사와서 “아버지 감을 잡수세요”라고 말했는데 그 때 아들에게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손을 내밀었는데 신기하게도 손이 움직였고 차츰 뻣뻣하게 굳어져  있었던 목도 움직여지게  되었습니다.

말로만 하던 감사가 실제 감사가 되었고 불치병도 깨끗이 낫게 한 것입니다.

사람의 병은 대부분 스트레스에서 옵니다.

스트레스의 원인은 마음의 상처와 부정적인 생각입니다.

그래서 감사의 마음을 가지면 모든 스트레스와 병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암전문 병원인 미국 텍사스 주립대 MD앤더슨 암센터에 31년간 봉사한 김의신 박사는 신앙이 암 치료에 실제적인 효과가
있다고 소개하면서 교회 성가대원들과 일반인들을 비교해보니, 성가대원들의 면역세포(일명 NK세포) 수가 일반인보다 몇 십 배도 아닌,
무려 1000배나 많은 것으로 측정되었다고 합니다.

감사로 찬양하고 사는 것이 그만큼 건강에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스트레스를 완화시키고 면역계를 강화하며 에너지를 높이고 치유를 촉진합니다.

감사는 정서에 좋은 반응을 일으켜 혈압을 떨어뜨리고, 소화 작용을 촉진한다고 합니다.

1998년 미국 듀크 대학 병원의 해롤드 쾨니히와 데이비드 라슨 두 의사가 실험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매 주일 교회에 나와 찬양하고
감사하며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평균 7년을 더 오래 산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존 헨리 박사도 “감사는 최고의 항암제요, 해독제요, 방부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감기약보다 더 대단한 효능을 가진 것이 감사약입니다.

우리가 기뻐하며 감사하면 우리 신체의 면역 체계를, 강화시켜 준다고 합니다.

매일 감기약이 아니라 감사약을 먹어야 합니다.

우리가 1분간 기뻐하여 웃고 감사하면 우리 신체에 24시간의 면역체가 생기고, 우리가 1분간 화를 내면 6시간 동안의 면역 체계가 떨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매일 기뻐하고 감사하며 감사약을 먹으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잘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탈무드에도 보면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칭찬하는 사람이요,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건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항상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지금 호흡이 있나요?
그러면 감사하세요.

지금 걸어 다닐 건강이 있나요?
그러면 감사하세요.

지금 살아서 움직이며
할일이 있나요?
그러면 감사하세요.

왜냐하면 아직도
하나님이 살아 있도록
생명과 건강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건강이 없어서
마음의 소원은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한채
죽음만 기다리는
죽은 사자 같은 모습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그러나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생명을 주셔서
아직도 살아 있도록
해 주셨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인에게서 받은 글입니다!^^

최근 어느 분은

지인에게 전도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나 잘 믿으세요"


그 지인이 이렇게 말한 이유 중 하나는 

교회가 명성을 잃어버린 행위 때문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들은 "정작 우리 교회는 큰 문제없어요"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잠재적 그리스도인을 전도 못하게 영향을 끼친 것이다.


최근 이단 교파들이 오히려 더 부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진리와 말씀에 대한 기갈,

기성교회에 대한 실망감,

그들은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이단에 정착한다.


그들이 지혜가 좀 있더라면

기독교 신앙이 말씀에 그치지 않고

삶의 변화와 열매가 없으면 가짜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살해해도 된다.
코란에 기록된 말이고,

무슬림들은 기회가 되면 이것을 실천하려 한다.


무신론자도, 불교인도, 힌두인도, 동성애자도,

기독교인에 대한 적대감이 매우 크다.

(편집자 주: 물론 이것의 근본적인 배경은

진리 vs 反진리연합의 영적싸움이라고 볼 수 있다.)

유영철은 한 때 교회도 다니고 절에도 기웃거렸지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만 골라

반젤리스의 음악을 틀어놓고 살인했다고 고백했다.


1999년 미국 컬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에릭과 딜런이라는 두 학생은

900여발을 발사해 13명을 살해했다.

그때 신앙이 좋은 캐시버넬이라는 여학생을 지목해 물었다.


"Do you believe in God?"
"Yes" 라고 대답하자 방아쇠를 당겼다. 

금년 12월 17일 성탄절을 앞두고

파키스탄 교회에 IS의 자살폭탄으로

9명이 사망하고 50여명이 부상했다.


테러범들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수 백명의 신도들이 예배를 보고 있는 교회를 표적으로 삼았다.


보안 요원들의 저지로 한 명은 입구에서 사망했다.

다른 한 명은 내부로 진입했으나

보안 요원의 저지 과정에서 부상을 입어

본관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폭탄을 터뜨렸다.


2013년에는 파키스탄 페사와르 교회에서

600여명이 예배를 드리는 중에

자살폭탄으로 61명 이상이 사망하기도 했다.



기독교인이 거의 없는 터키에는 기독교 마을이 있다.

동방박사 세 사람이 베들레헴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
돌아오는 길목에 세워진 세인트 메리교회는
3세기에 세워진 매우 오래된 교회로
작년 인근에서 자살폭탄테러로
교회의 창문이 다 부서지고 5명이 사망했다.


지하교인 약 50만명 추산,
기독교 박해 국가 1위 북한은
종교활동 중 체포되면 수용소에 강제 수용된다.
지금까지 16,000명 이상이 처형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청진에서 나고 김일성 대학을 졸업한 한 사람이
정치범 수용소에 보내 졌을 때
그곳에서 북한 기독교인들을 볼 수 있었다.

그 수용소에는
6,000여명이 수용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경제학부를 졸업한 덕에 회계업무를 맡았다.

그런 이유로 여러 작업장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는 한 공장에서 하늘에 미친 정신병자들을 보았다.

그곳은 1500도 이상이나 되는 용광로 공장이었는데 
일하는 작업자들은 머리카락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얼굴은 해골같았고 이빨도 남아 있지 않았으며
키는 줄어들어 120~130cm 크기로 보였다.

그곳에 들어올 때는 정상인이었는데
하루 16시간 고열속에서 일하다 보니
척추는 녹아 내려 등에 혹처럼 붙어 있었고
몸은 다 휘어져 가슴과 배가 붙어 있어 기형아처럼 보였다.

교도관들은 말로 일을 시키지 않았다.
소가죽 채찍을 윙윙 휘두르고 다니면서
작업자들을 사정없이 때렸다.

예수를 믿는다는 그들은 옷을 입지 않았다.
처음에 그들을 보았을 때
모두 다 검은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
맨 몸에 검은 고무 앞치마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용광로에서 뛰는 뜨거운 불꽃들이
앙상하게 말라붙은 피부에 튀고 또 튀어
딱지가 앉고 다시 쇳물이 떨어져서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었고 마치 짐승 가죽같아 보였다.

어느날 오후, 공장 문을 열고 들어섰는데
공장이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교도관 두 명이
수백명의 작업자를 모아놓고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수령님 대신에 하늘을 믿는 미친 정신병자놈들아
지금이라도 하늘을 믿지 않고
수령님을 믿겠다고 하면 자유롭게 풀어주겠다."

그런데 수백명의 사람들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독이 오린 교도관은 닥치는대로 때리더니
그 중 8명을 끌어다가 바닥에 엎어놓았다.
그리고는 구두발로 내리밟고 짓이겼다.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고 뼈들이 부서져갔다.

그들은 짓밟힐 때마다 신음소리를 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였다.

미쳐 날뛰던 교관들은
"우리가 사는가 하늘을 믿는 너희가 사는가 보자" 하면서
용광로의 펄펄 꿇는 쇳물이 담긴 통을 끌어왔다.
그리고 그 쇳물을 피투성이가 된 그들 위에 부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살이 녹고 뼈가 따면서 숯덩이가 되어버렸다.

그는 처음으로 눈 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곳을 어떻게 뛰어 나왔는지 기억도 없었다.

그 충격으로
눈만 감으면 숯덩이로 변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 후 그는 수용소에 풀려나와 기독교인이 되었다.
                        


미스 이스라엘과 미스 이라크는
함께 사진을 찍었다는 이유만으로
고국에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 가족들은 도망가야 했다.

동성애는 죄라고 설교했던 영국목사가 체포되었고
스웨덴 법정은 교회에서 동성애는 죄라고 설교했던
에이크 그린 목사에게 징역 1개월을 선고하였다.

1948년 남북이 분단되고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 9월 9일 북한정권 수립) 
내년이면 대한민국 건국 70주년이 된다.

한쪽에서는 안락함이 넘쳐나고
다른 쪽에서는 순교의 피를 흘리고 있다.

세상은 다원주의와 다문화주의로 요지경이 되어가고
기독교는 세상에 대한 영향력이 점점 쇠퇴하고 있다.

해방의 숫자 70년이 되면 한반도 자유통일과 더불어,
이 세상의 구원자, 유일한 솔루션 예수 그리스도가
속히 오셔서 세상을 정리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출처: 카이로스 / ars (acoloje)

 

 


 

관련


 

 

 

“하나님이 참말로 계신다면 어디 내 앞에 데리고 와 봐요!!"
“하나님이 공중에 나타나시거나 뉴욕 하늘이나 버즈 칼리파 꼭대기에 천사들을 보내서 나팔을 불게 하시면 사람들이 놀라서 다 하나님을 믿을 게 아닌가! 이 세상 되어가는 꼴 보면 하나님은 없는 게 분명해.”
글쎄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정말 하나님 없는 거 같네요.

성경을 보면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가 된 것은 "하나님을 배반하였기 때문' 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뱀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죄인이 되어 모든 인간, 죄인들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하신다면
뱀이 하나님께 뭐라고 할까요?
“이 뱀의 말은 듣기만 하고도 믿던데.... 하나님은 안 보고는 못 믿겠다는군요. 후후후.”

하나님은 절대로 안 나타나실 것입니다,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기까지는.
공중에 천사가 나타나 나팔을 불고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 때가 오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아무것도 안 보이고 하나님이 없는 것 같더라도.

'이응한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증거를 대라  (0) 2018.01.16
하필이면 안식일에 고치셔서...  (0) 2018.01.11
복음의 능력  (0) 2017.12.30
지구에 매장지가 없어서.......?  (0) 2017.12.21
거대마젤란망원경.....  (0) 2017.11.24

 

 

지난 한해 베풀어주신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얼마남지 않은 이 해, 은혜롭게 마무리 잘 하시고

주 안에서 복된 새해,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시기를...

사랑하며 축복합니다!!

 

목양연가 섬기미: 최송연 드림.^^

 

다사다난했던 이 한해도 몰아치는 세찬 바람에 휩쓸려 날아가듯 속절없이 저물어 간다. 이제 며칠 있지 않으면 2017년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한해의 끝자락에 서게 되면 괜스레 마음이 초조해지는 것은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한해의 시작이 씨앗이었다면 한해의 마지막을 결실로 보아야 할 것인가? 그것이 자연의 순리이겠지만 인생이란 대개 그 반대이다. 한해의 시작은 쌍무지개 뜨는 희망의 언덕을 찾을 수 있을 것처럼 마냥 부푼 마음으로 오색찬란한 꿈과 소망으로 멋진 미래를 설계해 보지만 정작 한해의 끝자락에 서게 되면 대개는 이상과 현실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의 벽에 부딪혀 낙담하게 되는 때가 다반사이다.
 
나는 어릴 적,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매일 일기를 쓰고 매일 조금씩 주어진 숙제를 차곡차곡히 잘 해나가겠다는 결심을 곧잘 하기도 했다. 그러나 초의 결심과는 달리, 방학이 시작되는 그 시간부터 부모님께는 곤충채집이란 핑계로 둘러대고 온 여름 내내 산으로 들로 개울가로 꽃과 나비, 풀벌레들, 때로는 올챙이의 뒷꽁무니를 쫓아다니느라 정신없이 헤매며 놀다가 개학이 시작되는 며칠 전서부터 초조해지기 시작하여 하루 온종일 책상에 붙어앉아서 밀렸던 일기를 한꺼번에 써내려 가보지만 이미 날짜는 너무 많은 갭이 생겨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는지 난감했던 기억이 있다.

(맑음: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양치질을 하고 밥을 먹고 …) 그말이 그말인 내용을 적어나가다가 어린 마음에도 이건 아닌데 정말 난감했던 기억을 시작으로 어른이 되어서도 연말이 되면 언제나 마음은 급하고 초조해지지만 정작 무엇을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마무리, 성취감에 뿌듯한 마무리를 할 수 있을 것인지 대책이 서지 않고 시간시간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ㅠㅠ 

한해의 끝자락에 서게 되면 괜스레 마음도 몸도 추워지면서 때로는 자신이 무지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한해를 시작할 때 먹었던 결심들, 이번만은 알차게 가꾸어 나가리라 설계하며 계획했던 모든 꿈이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낭패감, 그리고 나이를 먹음과 동시에 한 발짝 죽음의 문턱에 더 가까워졌고, 평생을 사모하며 그리던 사랑하는 주님을 만나뵈어야 하는 날이 점점 다가오는데, 그분에게 이렇다 하게 내어 드릴 일도
,이루어놓은 일 하나 제대로 없이 이대로 늙고 병들어 갈 것이란 두려움이 가끔은 밀려오기도 하지만, 정작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속수무책이란 생각에 마음도 몸도 무거워지는 것이다.

또 한 편, 해마다 이맘 때가 되면, “내가 조금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지나간 일들에 대한 후회, 회한의 감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맹렬한 속도로 달리다가 인생의 끝자락에 서게 되었을 때, 그때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이것은 인생의 끝자락을 생각하며 살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일 수도 있지 않을까? 제법 철든 생각도 해 보게 되는 것이다. 


몇 년 전, 권세의 상징, 강한 힘의 상징이랄 수 있던 북한의 김 정일 국방위원장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보게 되면서 더욱 더 사후 세계에 대한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세계의 관심은, 그의 뒤를 이을 후사 문제에 대한 중차대한 부분에 집중되고 있겠지만, 그보다도 그를 애도하는 물결의 통곡이 과연 진짜냐 가짜냐 언론이 시끌벅적 재밌는 현상도 일고 있음을 본다.

그만큼 그의 삶이 진실하지 못했던 때문일까? 그가 죽은 후, 그를 추종하던 각료, 그의 뒤를 이어갈 집권 세력들은 “백두산 천지에 있는 얼음이 동시에 깨어졌다. (누가 그 시간에 그곳, 백두산 천지 연못에 가서 의도적인 관찰을 했다는 것인지, 실소를 금치 못하겠다.) 비둘기 두 마리가 그의 장례 장을 들어오려고 애를 쓰다 안되니까 맞은 편 나무에서 구슬피 울었다. 날씨가 연례 없이 맑고 좋았다. 등등... ” 여러 가지 자연 현상마저 동원, 조작하여 죽은 그를 신격화하는 운동이 활발하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그의 지금 심경은 어떨까? 인간의 육신은 흙으로 빚었기에 흙으로 돌아가지만, 인간의 영혼은 불멸이어서 하나님 앞에 돌아가 누구던지 그가 살아 생전 선악간에 행한 그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고 성경은 분명히 경고해 주고 있다. 불멸의 세계, 생각지도 못했던 사후 세계, 자신이 그토록 무시하던 하나님의 얼굴과 영벌의 세계를 맞딱트렸고 그 앞에서 당황하며 절망스러울 수밖에 없는 그의 모습이 눈에 보이듯 선하다.

반대로, 인생의 끝자락에 서게 된 사도 바울의 고백을 한 번 들어보자.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 4: 67)

* 선한 싸움을 싸웠다 ( I have fought the good fight)
* 달려갈 길을 마쳤다 ( I have finished the race)
* 믿음을 지켰다 ( I have kept the faith )

바울, 그는 한해의 끝자락에서뿐만 아니라, 인생의 끝자락에서도 후회함보다 영광으로 그 광채를 더하여 간다. 날마다 그분 앞에서 살았기에 너무도 당당할 수 있는 백전노장의 모습을 보면서 많이 부럽다. 이런 바울의 고백에서 우리가 나가야 할 길을 배워둔다면 한해의 끝자락 뿐 아니라, 인생의 끝자락에 서게 되었을 때 한점 후회함이 없을 것이란 생각이다.

비욘드 라이프(Beyond Life), 죽음과 사후세계를 준비하라

"인생은 B(Birth)로 시작해서 D(Death)로 끝난다” 프랑스의 실존철학자 싸르트르(1905-1980)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굳이 철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한 시도 멈추지 않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문제는, 인생은 과연 B (Birth) 플러스 D(Death)로 끝날 것인가? 이런 것은 단지 믿지 않는 불신자들의 통상적인 사후관념일 것뿐이다.
 
그러기에,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죽음을 가리켜서 사망(死亡)이란 단어를 쓴다. 사망이란 단어를 살펴보면, 참 재미있다. 사망, 죽을 사(死)자, 망할 망(亡)자, 즉 ‘죽음’이란, ‘죽고 망한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믿는 사람 중에서도 사후의 세계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 자살을 하는 사람들의 내면에도 역시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이 깔렸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사람들이 힘든 상황에 부딪히게 되면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문제에서 도피하는 길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자살이라는 극단적 이기적 행동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사후세계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 27), 인간이 죽으면 끝이 아니라, 육신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 부활의 때를 기다리고 있고, 영혼은 그 주신바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전도서12: 7절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은 믿는 사람들의 죽음을 가리켜서 사망, ‘죽고 망한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성도에게 있어서 죽음은 쉬는 것이요,‘잠자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 내가 들으매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계14:13절)” 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 28절).”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친히, 영은 불멸하며 사후에는 선악 간에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증거하셨다.

죽음 앞에서 만민은 평등하다. 그러나 사후 세계에서는 분명히 다르다. 사후 세계에서는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어주신 대속주, 그리스도(Christ) 그분의 은총과 은혜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마음속에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흔히들 말하는 그 DNA가 엄연히 다르다. 사후세계는 영원한 지옥이냐, 영원한 천국이냐…가는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있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으로,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은 영원한 백보좌 심판대 앞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이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 시간으로 이 한해의 끝자락을 마무리 하는 사람이라면 지혜로운 마무리가 잘 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 26-27절 말씀)”

필자가 좋아하며 아끼는 외국 詩 한 편을 소개해 드리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The Paradoxical Commandments - Kent M. Keith)
역설적 계명 - Kent M. Keith

People are illogical, unreasonable, and self-centered.
Love them anyway.
사람들은 종종 비논리적이고 불합리하며 자기중심적이다
그렇더라도 그들을 사랑하라.


If you do the good, people will accuse you of selfish ulterior motives.
Do the good anyway.
네가 선(善)을 행하면 이기적이거나 무슨 저의가 있을 거라고 탓할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선을 베풀어라.


If you are successful, you will win false friends and true enemies.
Succeed anyway.
네가 성공하면 거짓된 친구나 진짜 적을 얻게 된다.
그렇더라도 성공하라.


The good you do today will be forgotten tomorrow.
Do the good anyway.
네가 오늘 한 선행을 사람들은 내일 잊어버릴 것이다.
그렇더라도 선을 행하라.

Honesty and frankness make you vulnerable.
Be honest and frank anyway.
정직하고 솔직함이 그대를 속상하게 할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정직하고 솔직해라.


The biggest men and women with the biggest ideas can be shot down by the smallest men and women with the smallest minds.
Think big anyway.
큰 생각을 가진 큰 사람들은 편협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당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크게 생각하라.

People favor underdogs but follow only top dogs.
Fight for a few underdogs anyway.
사람들은 약자의 편을 들지만, 결국 강자만을 쫓는다.
그렇더라도 소수의 약자를 위해 싸워라.

What you spend years building may be destroyed overnight.
Build anyway.
네가 수년간 쌓아 올린 것을 누군가 밤새 무너뜨릴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그것을 쌓아라.

People really need help but may attack you if you do help them.
Help people anyway.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네가 돕더라도 그들이 너를 공격할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도와주어라
.

Give the world the best you have and you'll get kicked in the teeth.
Give the world the best you have anyway.
네가 가진 최고의 것을 세상에 줘도 하찮은 결과로 네게 돌아 올 수 있다.
그렇더라도 네 최고의 것을 세상에 주어라.

출처: 목양연가/ 글: 최 송연

'최송연의 신앙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雪) 속에 피는 꽃  (2) 2018.01.25
새해에 새 소망  (0) 2018.01.13
우리가 따를 길  (0) 2017.11.30
성경이 답이다  (1) 2017.11.26
학습으로 되어지는 방언?  (6) 2017.10.31

 

 

제 3성전 재건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두마에 관한 경고라 사람이 세일에서 나를 부르되 파숫군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파숫군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파숫군이 가로되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네가 물으려거든 물으라 너희는 돌아올지니라" (사 21:11-12)


본문에 나오는 이사야의 예언은 에돔에 주어진 경고로서 앗수르 침략이 끝났을 때 겨우 숨을 돌리기도 전에 바벨론 침공이 계속해서 임하게되는 사건을 경고한 내용이다.


그래서 이제 겨우 평화가 시작되나보다 생각하기도 전 바로 그 때에 더 큰 재앙이 임하게되는 말세의 시나리오를 암시하고 있어 마지막 때의 교회는 파숫꾼의 사명을 잘해야 된다는 메세지를 받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AD 70년 8월 9일에 로마의 베스페시안 황제의 아들인 디도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함락시키는 사명을 기어코 완수하고 말았다. 헤롯 왕에 의하여 건설되었던 영광스러운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 터에 지어졌던 두번째 성스러운 성전이었다.


첫번째 성전은 주전 1000년에 솔로몬 왕에 의해 세워졌다. 그러나 BC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 그만 파괴되고 말았다. 그리고 제 2성전은 BC 536년 바벨론 포로생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수룹바벨과 유대인들에 의해 재건되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에서는 아주 놀라운 제3성전 재건 계획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제3성전 재건의 사건은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이스라엘을 침공하는 곡과 마곡의 전쟁에 버금가는 중요한 성경 예언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예수님의 지상재림 전에 예루살렘의 성전터에는 제3성전이 서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제3성전 재건이라는 사건은 예수님의 재림의 시기가 그만큼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1948년에 독립하여 내년이면 70주년 개국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고토로 돌아와 나라를 세우는 것을 보는 세대는 마지막 세대이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앞에 이른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마 24:30-34)


제3성전의 재건은 마지막 세대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35에이커의 성전터는 아랍 사람들에게 행정권이 주어져 있다. 1967년 6일전쟁 이후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성전터를 포함하여 예루살렘을 통제해오고 있다. 무슬림이 성전 터를 컨트롤하는 것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언의 성취이다.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눅 21:24)


제3성전 재건 계획은 여러가지 정치적, 종교적 긴장을 넘어서서 유대주의 안에 오래동안 풀지 못하는 딜레마가 도사리고 있다. 먼저 유대인들의 입법기관에서 가장 최고의 기관인 산헤드린이 소집되기 전에는 제3성전을 재건할 수도없고 성전제사를 드릴 수도 없다. 결국 레위 제사장 제도를 재수립하기 위해서 산헤드린 소집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말씀 가운데 마지막 때에 산헤드린이 그 임무를 수행하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앞으로 있게 될 적그리스도의 핍박에 대해 경고하였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마 24:20)


이 예언은 지난 15세기 동안 없었던 산헤드린이 이스라엘이 독립할 때의 세대에서 다시 재소집하게 될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 즉 앞으로 다가오는 대환난 기간 중 안식일에는 여행이 1000보 이내로 제한될 것이 암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세대에는 산헤드린이 존재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프스의 기록에 의하면, 감람산 정상에서 성전터까지의 거리가 1000보로서 안식일에 허용된 여행길이라고 말했다.


제3성전 재건의 움직임은 교회의 휴거와 7년 대환란 후에 있게 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재림이 심히 눈앞에 가까이 다가와 있다는 사실을 징조로 보여주고 있다. 


1.성전 없는 이스라엘 


바벨론에 의하여 솔로몬 성전이 파괴된 후 AD 70년 로마에 의하여 또 다시 파괴된 제2 헤롯성전 사이에는 656년의 역사가 흘러갔다. 바로 그날부터 유대인들의 영적 생활의 센터인 성전이 다 사라져버렸다.


제2성전이 훼파된 후 지금 거의 1900여년이 지나는 동안 유대인들은 망명생활을 하면서 늘 예언대로 그들이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기도를 드려왔다. 그들은 매년 유월절 명절 기간 중 “Next Year in Jerusalem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 명절을 지키자”라는 기도를 드렸다.


이같은 희망과 병행하여 그들은 제3성전 재건과 메시아왕국 건설을 위하여 오래동안 기다려왔었다. 수세기동안 유대인들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제3성전이 재건되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하며 기도해왔다. 그들은 오늘의 세대들이 그들의 염원이었던 제3성전 재건의 꿈이 실현되는 사명을 받게 되었다고 굳게 믿고 있다.


2. 성전 건축을 위한 하나님의 명령


제3성전 재건은 유대인들의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소망의 가장 중심이 되는 핵심신앙이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출 25:8) 이 하나님의 이 명령은 오늘날 제3성전 재건을 위해 있는 유대인들에게 적용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하늘의 성전을 본 딴 성막을 건축하라고 자세한 패턴을 보여주셨다. 성막에서 쓰던 성물과 제사기구들은 나중에 솔로몬 성전에서도 사용되었는데 특히 언약궤는 영원한 하늘성전의 모형을 모델로 하여 모세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찌니라" (출 25:8-9)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과 솔로몬 왕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모리아산에 성전을 건축하라고 자세한 계획을 계시하셨다. 지금은 솔로몬 성전과 나중에 헤롯에 의하여 건축된 제2성전도 다 파괴되었다. 그러나 아직 예수님이 사역하시던 중에는 성전이 존재해 있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찐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 (마 24:15-16)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전에 대한 예언은 다니엘이 말한 멸망의 가증한 것이 예루살렘에 서 있는 성전에서 성취될 것이다. 예수님의 예언과 다니엘의 예언은 둘 다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유럽과 지중해를 컨트롤하기 전에 제3성전이 재건될 것임을 암시해주고 있다.


사탄은 마지막 후3년반 중에 성전의 지성소를 더럽힐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파트너인 거짓 선지자는 성전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처럼 예배를 받도록 강요할 것이다.


3. 성전 재건의 쟁점 


지금 중동에서 계속되는 충돌의 비극은 아랍과 이스라엘 모두가 다 예루살렘과 성전터와 성지의 소유권을 주장하고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장차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재림하셔서 그곳에 보좌를 세우고 세상을 다스리게될 곳이기도 하며 또 하나님께서 몇 천년 전에 이미 그의 선지자 를 통하여 그 곳에서 인류의 운명이 결정될 곳이라고 예언하신 곳이기도 하다.


결국 예루살렘이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평화의 도성이라는 뜻이다. 여러분과 저는 인류의 운명을 위한 절정에 도달하는 최후의 투쟁을 목격하게 될 세대의 한 부분에 속해 있다. 아마겟돈 최후 전쟁터에서 선악의 세력 대결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세계적인 재난이 발생하면 아마겟돈을 들먹거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쟁을 이끄는 쟁점은 역시 예루살렘,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성전터로 그 초점이 맞추어지게 될 것이다. 이 지상에서 가장 논쟁의 대상이 되는 부동산은 역시 곧 재건될 제3성전이 될 것이다. 이는 성경에 예언된 사실일 뿐 아니라 지금 이스라엘의 랍비들, 성전연구소, 고고학자들이 자세한 건축계획을 세우고 성전제사 때 쓰여질 성물들을 제작하며 옛성전에서 잃어버렸던 보물들을 찾고 있다. 


놀랍게도 앞으로 제3성전 제사 때 사용되어질 모든 성물들이 지금 거의 다 제작되었다고 한다. 정동파 유대교도의 종교지도자들이 제3성전 재건을 위해 준비하는 모든 활동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있는 실정이다.


4. 성전터 템플 마운트를 누가 컨트롤하나?


1967년 6월, 6일전쟁 기간 동안 유대인들이 거의 승리를 거둘 마지막 시기에 이스라엘의 국방장관 모세 다이앤이 무슬림 최고회의에 속한 5명의 지도자들과의 중요한 회동을 위해 알 아크사 이슬람 사원으로 갔다.


그동안 성전터는 1948년부터 1967년 이스라엘 방어군이 점령하기 전까지 20년동안 요르단군이 예루살렘을 통제하고 있는 동안 이슬람 최고회의의 절대적인 통제하에 있었다. 모세 다이얀 장군과 이슬람 지도자들간의 회의에서 템플 마운트에 대한 이스라엘의 종교 및 정치적 정책이 수립되었으며 그 때에 결정된 합의서가 아직 오늘에 이르까지 변동이 없이 지내왔다.


비종교적 유대인인 모세 다이얀 장군은 성전터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랍사람들에게 행정권을 포기하고 말았다. 불행하게도 아랍측은 유대인들의 가장 성스러운 성지를 포기하는 행위를 이스라엘 결의의 취약점의 징후로 해석하고 말았다.


다이얀 장군은 황금사원에 휘날리던 이스라엘 기를 제거하도록 명령하였다. 그후 성전터에 대한 모든 행정권이 요르단이 콘트롤하는 Waqf 무슬림 신탁 최고회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 유대인들에 의한 성전터의 출입은 제한되었으며 유대인이나 크리스챤에 의한 성전봉독도 금지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 다이얀 장군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성전터를 공적으로 이스라엘의 가장 성스러운 성지라 부르는 것을 거절했다. 불행하게도 모세 다이얀 장군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들은 성전터의 영적 종교적 가치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오직 역사적 가치만 중요하게 여겼을 뿐이다. 


이같은 유대인들의 양보에도 불구하고, 또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성지인 성전터가 아랍 사람들에 의하여 행정권이 행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제3성전을 재건하도록 그의 백성들을 부르고 계신다.


제3성전 재건의 발전은 성경 예언의 성취에 치명적으로 중요할 뿐 아니라 주님이 지상재림하시기 전에 제 3성전이 재건되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 예루살렘 제3성전 연구소에서는 레위인 제사장들의 훈련이 실시되고있으며 오랫동안 실종되었던 옛성전의 성물들이 발견되고 있으며, 언약궤가 발견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소문이 꾸준하게 전해지고 있다.


지금 이스라엘에는 새로운 산헤드린이 자리를 잡고 있으며, 500명의 레위인들이 성전 제사에 필요한 훈련을 받고 있다. 지금 솔로몬 성전 때에 사용되었던 성물이 하나하나 발굴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 있으며, 성전 터에 하나님의 성전이 재건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꿈이 아닌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지난 1900여년의 오랜 기간동안 그들이 기도하며 기다리고 꿈꿔오던 성전 재건축의 꿈이 예루살렘에서 실현되는 최종적이 사명이 주어져 있는 상태이다.


제3성전 건축 계획은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오늘의 세대들은 예루살렘 모리아 산 성전터에 서 있는 하나님의 성전과 이스라엘의 왕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위에 앉아 왕국을 수립하기 위해 오시는 재림주로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성전이 서기 훨씬 전에 공중으로 들림받아 올라가게 될 것이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살전 4:16-18)



: 시애틀 늦은비교회 전윤근 목사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