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감리교(UMC) 뉴욕연회 한인목사들의 모임인 한인코커스는 11월 28일 뉴욕그레잇넥교회에서 이종식 목사(베이사이드장로교회)를 강사로 초청하여 목회자 세미나를 열었다.  

 

[관련기사] 

이종식 목사 “왜 교인 40, 80, 150 명 고개를 넘기 힘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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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식 목사 “교회문을 닫아야 할 위기에서 전환점 2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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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째 기사이다. 이종식 목사가 자신의 목회 전환점이라고 가장 먼저 소개한 내용은 자신이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전한다는 자세의 전환이었다. 그런 자세는 강도사로 목회를 시작한 30대 초반의 경험없는 목회자에게 큰 자신감을 가지게 했다. 더 나아가 이런 자세는 성경이 말하는 것은 하고 성경이 하지 말하는 것은 하지 않는 목회지침을 가지게 했다. 구체적으로 나오는 헌금과 바자회에 대한 목회지침 등은 도전을 준다.

 

목회 전환점은 아니지만 이종식 목사의 2세 목회에 대한 관점도 소개한다. 이 목사는 자신이 공부할 때 필라 지역에는 150여개의 중국교회가 있었는데 현재는 2개만 남았다며 그 이유를 설명하고, 한인교회의 미래를 위해 2세들에게 투자하고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그 내용들이다.

 

1.

 

처음에 교회를 개척할 때 걱정이 되는 것이 기라성 같은 목사들이 많은데 성도들이 말을 안듣고 권위도 안서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경험도 없는 32세 강도사로 개척하려고 했는데 누가 말을 들어줄까 하는 걱정이 되어서 산에 올라가서 금식기도를 했다.

 

“하나님, 사람들이 제가 말해도 안들어 주면 어떻게 하죠”라며 그것이 걱정된다고 간절히 기도했다. 3일째 되는 날 하나님께서 마음에 응답을 주셨다. “네가 말하면 안들을 것이다. 그런데 네가 내 말을 그대로 전하면 그들이 들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너무 심플한 것인데 큰 깨달음이 왔다. 제가 제 말을 안하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면 교인들이 다 말을 들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고민에 대한 자유함을 얻었다. 세상에서 이렇게 쉬운 일이 어디에 있는가? 나는 그냥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이대로만 하자고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반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은 무슨 일이든지 하지 말자고 했다.

 

그래서 바자회를 하지 않았다. 저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아버지 밑에서 장사를 배워 굉장히 장사를 잘했다. 제가 만약 바자회를 한다면 누구보다 잘할 것이다. 재고품을 사다 가져다 놓고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것이라며 성도님들에게 원가에 사라고 하면 엄청나게 살 것이다. 쌓인 것이 재고품들인데 돈이 빤히 보이는데 못하는 것은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셨다.

 

처음에는 여러가지 편리를 위해서 그렇게 했는데 나중에는 장사속이 생기고 예배와 기도보다 장사에 더 집중하다 보니 교회가 장사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못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결심한 것은 교회에서는 어떤 것이라도 팔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선교회에서 김치를 만들어 파는 것도 하지 말라고 했다. 아무것도 팔지 말라고 했다. (심지어 찬양사역자들이 교회에 와서 집회를 열어도 찬양 CD를 팔지 않는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성도는 성도답게 드려야 할 예물을 드리면 된다. 십일조하고 감사예물을 하면 된다. 그것만 다 하면 교회는 특별헌금을 할 필요가 없이 차고 넘친다. 그런데 그것은 하지 않고 김치를 팔겠다고 하면서 여러가지 문제도 생기니 그것은 교회가 할 일이 아니다. 교회는 장사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제 목회의 지론이었다. 그런데 어렵게 시작했지만 하나님께서 너무 채워 주셨다.

 

온전한 십일조, 온전한 감사헌금, 그리고 절기헌금을 드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강조하는 것이 있다. 건축을 한다고 성도들이 한 번에 헌금을 하는 것은 너무 힘들다. 우리 교회는 건축을 3-4번하고, 예배당도 2배 확장하고, 건물만 3만 스퀘어피트 되는 미션센터를 건축하는데 얼마나 돈이 많이 들어가겠는가? 하지만 특별헌금이나 작정헌금을 안하고 하루에 커피 한잔만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다. 하루에 1불이다. 커피를 마시면서 하나님께 한 잔의 커피만 드리면 된다.

 

1일에 1불이면 적을 것 같은가? 계산해 보라. 1년이면 365불이다. 4가족이면 1년에 1,460불이다. 건축헌금할 때 1400불 내는 가정이 그렇게 많지 않다. 100명이 드리면 36,500불, 5백명이 하면 182,000불이다. 지난해 그렇게 1일 1불 헌금으로 들어온 것이 32만불이었다. 1일 1불 헌금은 샘에서 물을 퍼는 것 같다. 샘에서 물을 퍼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또 채워진다. 드리기도 편하고 기억하기도 편하다. 어떤 성도들은 1년치 365불을 다 낸다. 어떤 분은 자신이 살 날짜를 계산해서 한 번에 다 드리는 경우도 있고, 교회를 등록한 후 지난 날을 계산하여 드리는 가족도 있다.

 

저는 단순히 하루에 커피 한 잔을 드리라고 했는데, 1불은 작은 것이지만 모아지면 파워가 있다. 그리고 기득권 세력이 없어진다. 한 사람이 큰 액수를 내서 문제를 일으킨 교회가 많다. 그런데 1일1불 헌금은 동시에 거의 다 드리니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모든 일을 성경적으로 하되 지혜롭게 하자는 것이다.

 

보통 건축을 한다고 하면 특별한 순서가 있다, 부흥회를 열어 교인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헌금을 하게 한다. 사정이 생겨 작정헌금을 하고 안내면 문제가 생기고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많다. 건물을 다 지으면 교회 시설에 대한 헌금을 따로 해야 한다. 이것이 지금까지 해오던 패러다임이었다. 저는 나는 이러한 패러다임을 깨고 작정헌금은 없애고 1일1불만 하자고 했다. 그대신 모두가 참여하자고 부탁했다. 제가 권장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하자는 것이다. 장사식으로 하지 말고 제대로 교인들을 훈련시켜서 헌금을 제대로 하게 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주정헌금 그런 것 없다. 십일조를 못내는 분들이 마음에 위로를 받기위해 한 주에 온전한 십일조가 아니라 일부를 헌금하는 경우도 있다. 십일조를 안드리려면 하나님 앞에 쇼하지 말고 드릴려면 제대로 드리라고 한다. 십일조를 하지 못하면 기도하라고 주정헌금을 다 없애버렸다.

 

어떤 성도가 헌금채를 돌리는 것이 예수님 시대와 안맞는다고 지적했다. 성경에는 과부가 헌금하는 것을 예수님이 보셨다고 나온다. 헌금함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헌금채를 안돌리고 헌금함에 헌금하게 했다. 처음에는 헌금채를 안돌리면 헌금을 안낼 것이라고 일부가 반대했다. 그런데 오히려 그날 헌금을 못가져와서 못내는 사람은 아무 때나 와서 헌금을 넣을 수 있다. 그래서 헌금함을 놓았는데 헌금이 안줄어 들고 오히려 더 늘어났다. 새벽예배에 와서도 헌금을 내는 성도들도 있고, 첫날 수입은 하나님께 헌금을 하는 성도들도 있다.

 

제일 먼저 저의 목회의 전환점은 네가 말하지 말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것이다. 아무리 하고 싶어도 성경적으로 해석이 안되는 것은 하지 않으려 했다. 누가 성경적으로 지적한다면 고쳐야 하고, 나의 유익을 위해 억지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안되는 것은 안되는 것이다. 돈이 아무리 들어와도 성경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면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성경적으로 해석이 안되는 것은 안하고 해석이 된다면 했다. 저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성경적으로 이상이 있으면 아무리 보잘 것 없는 분이 와서 말해도 내가 분명이 듣고 바꿀 것이다. 그런데 성경적이 아닌 것을 무더기로 와서 바꾸라도 해도 못 바꾼다. 힘으로 나를 누르려고 하지 말고 성경으로 증명하라. 협상은 절대 없다.” 그렇게 말한 후 단체로 오는 분은 없다. 그래서 교회분열이 없다. 성경적으로 하려고 하니 그렇다.

 

2. 

 

2세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다. 한국도 출산을 안해 인구가 준다고 한다. 이민은 안 오고 역이민이 더 많다. 미국 한인이민교회들은 성도들이 줄어들고 있으며, 고령화가 되고 있다. 다른 지역 한인교회를 보니 평균연령은 60~65세가 넘어간다. 곧 뉴욕이 이렇게 될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 교회가 빌텐데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가?

 

아이들이 많이 들어와도 결국 소통의 문제가 생길텐데, 앞으로는 한국어 회중(KM)이 영어 회중(EM) 보다 작아지고 EM이 더 커질텐데 이를 위해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베장의 토요학교 비전은 1-2세가 소통되기 위해 한국어를 가르친다. 4분의 3은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인데 한국어를 잘해서 설교를 들을 정도는 된다.

 

소통이 되지만 그래도 영어가 편하다. 영어를 하는 아이들이 섬기는 부서마다 재작년부터 도전한 것이 있다. 아이들에게 목사와 선교사가 될 사람을 콜링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15사람이 모였다. 요한 웨슬리는 옥스포드대에서 홀리클럽을 만들었는데 사명자들 모임이었다. 15사람에게 도전했다. “여러분들은 목사와 선교사로 헌신한 사람들이다. 여러분 위해 교회에서 최선을 다하겠다. 신학교에 들어가 돈이 없다면 장학금을 대 주겠다. 선교사가 되기 위해 선교지에 가서 공부하고 싶으면 무조건 보내준다.” 그들에게 도전을 하고 기도하고 있다.

 

2세들이 성장하고 학교를 졸업하면 그들중에서 EM을 하는 사람도 나올 것이다. 이렇게 해서 2세들을 준비하지 않으면 미국의 한인교회들은 소아시아 7교회가 지금 없는 것처럼 그렇게 되고 말 것이다. 필라에서 공부할 때 보니 중국교회가 150여개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중국교회가 2개 교회 밖에 없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나?

 

그들의 생각은 영어를 하는 사람들은 영어 목회하도록 독립시켜 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다 없어졌다. 미국교회에 간 것도 아니고 교회자체가 없어졌다. 문제는 중국교회가 2개밖에 안 남았다는 것이다. 그때 느낀 것은 한인이민교회는 영어하는 자녀들을 교회에서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동거를 해야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인교회 안에서 그들의 언어를 인정해주고 그들의 모임을 가지게 함으로서 1세들의 신앙을 물려받게 하고 같이 소통하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후임자는 영어와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사람을 세워 브리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KM이 작아지고 EM이 커진다면 교회를 맡을 리더십이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생각한 것은 다음 세대를 위해 후임자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그것에 투자해야 한다. 그것에 투자를 않는다면 1세 목회자와 전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리더십이 되고 교회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여태까지 세워놓은 한인교회들이 흔들려서 안되니 최선을 다해 준비해야 한다.

 

(이종식 목사의 세미나에 대한 마지막 기사는 이 목사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제자훈련에 대한 내용입니다. 기도해주세요.)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성경은 주님의 재림 전에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성도들 외에

모든 '기독교인들'이 배도한다고 말한다.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교황의 이름으로 카톨릭과 한 몸이 되는 연합은

경악할 만한 배도임에도 불구하고

왜 미국의 유명 사역자들은 이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가?


수년 전부터 야금야금 이런 예언들로

그들의 마음이 적그리스도의 영에게

아주 조금씩 조금씩 땅따먹기 당해왔기 때문이다.


미국의 은사주의(신사도 계열) 뿐 아니라

복음주의 계열의 많은 사역자들 역시 

이 카톨릭과의 연합에 함께 하고 있다.


아래 영상은,

하이디 베이커가 입신 중에 보고 들었다는

여러 교단들과 카톨릭까지 함께 하는 연합이다. (3:35부터)



(미혹주의!) 하이디 베이커의 환상 "카톨릭과 함께 하라"


이 연합에 대해

하나님께서 비웃으신다는 내용을 들을 때는

개인적으로 아래의 말씀이 떠오른다.


어찌하여 뭇 나라가 술렁거리며,

어찌하여 뭇 민족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어찌하여 세상의 임금들이 전선을 펼치고,

어찌하여 통치자들이 음모를 함께 꾸며

주님을 거역하고, 주님과 그의 기름부음 받은 이를

 거역하면서 이르기를 "이 족쇄를 벗어 던지자.

이 사슬을 끊어 버리자" 하는가?

하늘 보좌에 앉으신 이가 웃으신다.

내 주님께서 그들을 비웃으신다. - 시편 2:1-4


아래의 기사를 보면 알겠지만,

카톨릭과의 이런 미혹된 연합은

이미 오래전에 윗선에서 작업이 다 끝났고,

이제 서서히 현실로 다가오는 과정에 있다


기사 보기: 이미지 클릭!


이것을 참 연합으로 보는 사람들은
이 큰 배도의 주인공들이 될 것이고
이 배도를 거절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된 신자들은
데이비드 윌커슨 목사님의 예언처럼
이제 카톨릭교와 개신교 교단들을 떠나서
일종의 지하교회 형태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데이비드 윌커슨 목사의 예언은
먼 나중에나 일어날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지금 우리들에 대한 예언이었다.



글쓴이: 박성업 선교사님





말세에 등장하는 두가지 다른 종류의 교회!

-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 -




1973년 데이비드 윌커슨이 예언한

말세에 전세계적으로 등장하는 두가지 종류의 다른 교회.



최근 벌어지고 있는 교황의 이름으로

카톨릭과 개신교가 한 몸이 되는 종교적 연합과

카톨릭을 비롯한 개신교 교단을 초월한

성령 안의 연합은 정말 비슷한 것처럼 보이지만

천국과 지옥 차이만큼 다르다.


간혹 교황 안에서 카톨릭과 한 몸되는 연합이

배도가 아니라 데이비드 윌커슨이 예언한 것이라고

착각하는 분들이 있어서 정리해서 올린다.


우선 데이비드 윌커슨이건, 가브리엘 천사이건 상관없이

그들이 전하는 메세지가 성경과 다르면 거절해야 한다.

하지만 이 예언이 성경적이라는 가정하에

이 예언만 두고 분별해 보더라도

지금 벌어지는 카톨릭과의 연합을

괜찮은 것이라고 보는 분들은

데이비드 윌커슨의 예언을 잘못 알아듣고

반대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교황과의 만남에 대해 해명한

마이크 비클의 영상을 보신 분들이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의 영상을 본다면,

더 소름이 돋을 수도 있다.


(참고) 교황과의 만남에 대한 IHOP 마이크 비클의 해명!


글 출처: 여호와께 충성 (http://blog.naver.com/up0124/221151068800)

현대판 '미녀와 야수' (개신교회 말살)


카톨릭(천주교)와 개신교의 결혼.

마지막 때의 배도(배교) 완성.





요즘 일어나고 있는
카톨릭과의 연합이 배도인가 아닌가?


물론 워낙 유명한 사역자들과 단체들이

주도하고 있는 움직임이기 때문에

섣불리 배도라고 믿기 힘든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만약 정말 그들이 하는 일이 배도가 맞다면

이것을 읽는 본인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반드시 기도하면서 정말 그러한가 아닌가를 꼭 확인해야 한다.


그냥 주변 사람이 하는 주장만 듣고

쉽게 넘기고 넘어가면서 이 배도에 참여하게 된다면

그 결과는 여러분이 영원히 이를 갈며 후회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 무엇보다

'사람의 미혹'을 주의하라고 하셨다.


마치 유대인들이 랍비들을 말씀보다 더 신뢰하는

'사람의 미혹' 때문에 말씀이 명백히 증거하는

예수님을 못 믿고 못 보는 것처럼

이 카톨릭 배도 사건도 이미 '사람의 미혹'에 눈이 가려져서

이런 것을 진지하게 보려고 들으려고 하지 않는 분들이 있겠지만

본인의 영혼을 위해서 꼭 확인하도록 추천해줘야 한다.


아래의 자료들 중 편집된 것들은

본인이 직접 다 조작한 것들이고 음모론이라는 색안경,

"이 사람, 이 단체는 신뢰할 수밖에 없다"는 등의

'사람의 미혹'을 다 내려놓고 기도하면서

진지하게 아래 영상들을 확인해 보라.


보는 모든 이들에게 충격적이겠지만

부디 영적인 눈이 열리길 기도한다.




카톨릭과 언약 맺고 연합하는 배도에 대해서

순진하게 속는 분들이 있다.


요즘에는 카톨릭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나는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가 하는 연합은 카톨릭 전부와 하는 것이 아니라

카톨릭 중 카리스마틱, 즉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과만 연합하는 거라고...

(실제 카톨릭 전체 및 교황과 언약 맺어 한몸 된 것이라 선포하고

그렇게 행동하면서도 말이다.)


혹은 카톨릭도 이제 '오직 예수'라고 고백하니 뭐가 문제가 되냐?

위와 같은 어리석은 논리로 카톨릭과의 언약 및 연합을

배교(배도)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사랑의 연합으로 여긴다.


자기의 인본적인 판단이 아니라

제발 하나님께서 답을 주실때 까지 한번만 겸손히 여쭙는다면

그런 소리 안할텐데...


아래영상은 소위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하는,

그리고 카톨릭의 전부가 아닌 연합맺는 일부라고 하는,

카톨릭 내 카리스마틱(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 천주교인 5만명이

2014년 6월3일 로마에 모여서 하는 집회이다.



영상 57초부터 보면

무대에 가증한 음녀 마리아가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일 것이다.

이게 바로 카톨릭이 고백하는 '오직 예수'의 실체다.


2016년 4월 9일 LA에서

루잉글, 신디제이콥스, 스테이시켐벨, 마이크비클, 체안 등등

미국의 유명한 사역자들이 한데 모여

교황과(대리인을 통해) 한 몸이 되기로 언약을 맺었다.




위 영상만 보면 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인간적으로 보면 얼마나 듣기 좋은 소리이고 아름다워 보이는가?


하지만 하나님 앞에 선언된 이 집회의 엄밀한 결론은

교황과 한 몸이 되기로 언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8:19에 보면, 교황과 대리인을 통한 언약.

9:40에 보면, 언약 안에서 연합.


아무리 광명한 천사의 얼굴로 다가오더라도

결국 나오게 되는 결론이 무엇인가를 보면

그 광명한 얼굴을 한 목적을 알 수 있다.


'연합'은 인본적인 기준에서 보면 그져 좋아 보인다.

하지만 만약 하나님의 자리에 '연합'이 앉는다면

그때부터는 미혹이 판을 친다.


이들은 '연합'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고

그것을 '절대선'으로 여기면서

그에 반대되는 '분열의 영'을 대적한다.


특히 이들이 대적하는 '분열의 영'은

사실 종개개혁을 이끈 성령이다.


Kairos 2017 홈페이지 - https://www.kairos2017.com



아래 영상을 확인해 보라.

(각각 영상에 함께 써 있는 소개글도 확인하길 바란다.)

이들이 대적하는 '분열의 영'은 바로 종교개혁을 주신 '성령'이다.



이런 배도의 집회에 장소를 빌려주고

그들과 함께 하고 있는 아이합(IHOP)의 마이크 비클은,

논란이 일자 해명 영상을 올렸지만 오히려 더 혼란스럽게 한다.


왜냐면 자기 입으로도

교황이 한 입으로 두말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자기가 누구기에 그 말을 판단할 수 있겠냐며

교황의 그 말을 믿겠다는 뉘양스로 흐지부지 끝내버린다.



위 영상에서 마이크 비클은

마치 바티칸 방문이나 교황을 처음 접한 듯이 말했지만

사실 연합을 가장한 이런 배도는 무려 20년 넘게

마이크 비클을 비롯한 미국의 유명 사역자들이

바티칸 교황과 준비해 온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함께 한다는 카리스마틱 카톨릭 교도들의 집회에는

'마리아 우상'이 버젓이 자리하고 있다.



이 미국 사역자들은

개개인이 예수님과의 관계 맺는 구원에 대해

교황이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실제 교황의 공식 선언은 전혀 다르다.



이들이 언약으로 한몸 된 카톨릭 종교의 실체는 아래와 같다.



이외에도 수많은 자료들이 있지만

일단 이것으로도 많은 분들이

기본적인 분별은 그래도 가능할거라 믿는다.


수년간 수많은 소위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한

표적과 기적과 예언들을 통로삼아서

우리에게 배도하는 적그리스도의 영을

계속 조금씩 받아들이게 함으로서 배도는 준비되었다.


이런 이교도 집단과 언약하여

한 몸이 되겠다는 것은 분명한 '배도'이다.


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전세계적 배도는

바로 이것을 가르킨다.


정신차리라!

배도에서 돌이키라!

배도에 참여하지 말라!

자신의 영혼을 지키라!

주님이 곧 오신다!



출처: 박성업 선교사 블로그 (http://blog.naver.com/up0124/221136785544)

미남침례회 뉴욕한인지방회는 새해 들어 첫 월례회를 1월 16일(화) 오전 에벤에셀선교교회(최창섭, 이재홍 목사)에서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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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박진하 목사의 인도로 진행된 월례회 회무를 통해 지난 12월 12일 뉴욕마하나임선교교회에서 67명이 참가한 가운데 송년 및 성탄축하 모임이 열렸음이 보고됐으며, 지방회 시취위원회 규약을 ‘임기 3년’과 ‘연장자 순으로 3년조로 운영하되 윤번제’로 하기로 수정했다. 또 회원교회 목회자 자녀로 대학교에서 풀타임 재학중인 학생에게 1인당 5백불의 장학금을 2월에 지급하기로 했으며, 2월 월례회는 원로 방지각 목사를 초청하여 목회자 세미나로 새시대교회에서 열린다고 공지됐다.

 

교단의 모임은 주로 회무로 진행되어 삭막한 감을 주기 쉬운데 이날은 3가지 감동적인 순간이 있었다. 이를 소개한다.

 

1.

 

1부 예배에서 지방회의 원로급인 백창건 목사(새시대교회)가 출애굽기 4:1-7을 본문으로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했다. 백 목사는 하모니카로 찬양하며 감성적인 설교를 했다. 백창건 목사는 본문을 통해 △내 손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손에 있는 것을 던져라 △던진 다음에는 하나님이 다 하셨다는 3가지 포인트를 가지고 목회의 단면을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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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목사는 먼저 “내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고 “목회자 마다 각자 잘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갈고 닦아서 더 잘할 수 있도록 힘쓰라. 그러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특별히 잘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은 힘써 배우면 된다. 남한테 배우지만 배우면 내 손에 있게 되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내 것이 된다. 그렇게 하면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목회를 할 수 있겠는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개발하고 없으면 자꾸 배우라”고 부탁했다.

 

백 목사는 “둘째, 버려야 한다”라며 디모데후서 2:16의 말씀대로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고 부탁했다. 구체적으로 “합당하지 않는 말은 버려야 한다”며 나이든 성도들에게 반말하는 자세, 목회자로서의 헛된 자존심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백 목사는 “저에게 어려운 것은 항상 버려도 또 들어오는 교만이다. 버릴 것을 많이 버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목회를 할 수 있다”고 부탁했다. 그리고 “목회를 하다보면 분노도 많이 생기는데 범사에 감사하라고 설교를 많이 하는 목사가 먼저 감사를 실천해야 한다”고 부탁했다.

 

백창건 목사는 마지막으로 “셋째,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부탁했다. 백 목사는 “바울이 배를 타고 로마에 간 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며, 요셉이 누명쓰고 감옥에 들어 간 것도 다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목회하다보면 어렵고 힘든 일이 많은데 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말했다. 백 목사는 간증하며 “미국교회를 빌려 사용하다 부흥회를 했는데, 미국교회 목사가 시비를 걸어 성도들이 열을 받아 돈은 없지만 힘을 합쳐 예배당을 사자고 해서 산 것이 지금 건물이다. 미국목사가 그런 자세를 취한 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고 말했다.

 

2.

 

뉴욕지방회는 각 교회 목사들의 나눔을 통해 목회의 아픔을 공유하고 도전을 받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이번이 두 번째 시간이었다. 먼저 퀸즈침례교회 박진하 목사가 나누었는데 박 목사는 나눔 도중 눈물을 흘리는 진솔함이 있었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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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에 와 처음 초심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다짐하고 개척했다. 열심히 하고 잘 성장해 나가는 기쁨이 있었다. 하지만 교인간의 불화로 교회가 어렵게 되고 목회의 어려움을 경험하게 되었다.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으며, 끝까지 인내하려고도 했으나 결국 뉴욕으로 와 퀸즈침례교회를 개척했다. 개척하면서 무엇보다 무릎으로 목회해야겠구나 하고 기도원을 많이 찾았다. 그리고 아는 사람 중심으로 목회하는 것이 아니라 새생명에 모든 것을 투자했다. 고향을 떠나는 아브라함의 마음으로 개척했지만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이 예비하심을 믿고 믿음으로 목회를 해 나갔다. 더 좋은 환경으로 청빙하는 교화가 있었지만 하나님과 약속했는데 초심을 버리고 떠날 수 없었다. 그런 자세를 하나님이 기뻐 받아주셨다.

 

현재 교회상황은 자랑할 것이 없지만, 하나 있다면 감사하는 마음을 주셨다. 처음 목회를 하면서 사례를 안받고 주님만 바라보며 눈물로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필요를 채워주셨다. 아내의 헌신적인 봉사와 헌신이 있었다. 감사한 것은 교회에서 어릴때부터 성장한 차세대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계속 교회에 출석하여 요즘 교회에 애들이 많다. 목회자는 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종이기에 주님의 일을 한다. (눈물) 그래서 후회 할 일이 없다. 어려운 환경은 하나님이 시험해 보시는 것이고 시험에 통과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신다. 어렵다고 변하지 않고 인내하면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나타날 것이다. 뉴욕이 목회하기 참 어려운 곳이다. 하지만 인내하며 성도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며 끝까지 나아가자.

 

퀸즈침례교회

36-06 Prince St., Flushing, NY 11354

917-620-8964

 

3.

 

이어 뉴욕안디옥침례교회 한필상 목사가 나누었다. 한필상 목사는 전임 이선일 목사가 소천을 받고 2016년 12월 담임목사로 취임했기에 부임한지 1년이 되었다. 다음은 나눔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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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하고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교회의 5대 기능을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첫째, 예배의 회복이었다. 부임시 주일예배 외에는 아무런 사역이 없는 상태였다. 공예배를 회복하자고 했다. 예배순서를 바꾸고 함께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회복하자고 해서 금요기도회를 시작했다. 그리고 매일 저녁마다 교회를 열어 기도할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아무도 안 나오는 때도 있지만 자리를 지키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이 많은 은혜를 주셨다.

 

둘째, 친교의 회복이다. 예배후 친교는 식사 공동체를 선언하고 잘 준비해 식탁을 나누었다. 수요일과 금요일에 교회에 올 때마다 음식을 준비해서 같이 식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절기 때는 풍성하게 준비했고, 특히 추수감사절 같은 경우 혼자 있는 성도님들을 위해 같이 모여 식사를 했다. 셋째, 교육의 회복이다. 말씀공부는 수요일 저녁에 예배대신 말씀을 공부한다.

 

넷째, 전도와 선교이다. 부임후 1년 동안 전도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성도들의 마음이 먼저 회복되어야 교인이 새로 와도 정착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제 많이 회복되었으니 올 초에 처음으로 전도하자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동안 해외에 나가있는 선교사들이나 저희 교회보다 연약한 교회들을 저희가 가진 예산안에서 섬기고 도왔다. 그래서 그런지 1년이 지났는데 재정이 늘어나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경험했다. 그 열매를 보고 성도들이 기뻐했다. 다섯째, 봉사(섬김)은 화요일에는 전도사와 아내와 함께 양로원 사역을 나간다. 말씀을 전하고 선물도 전한다. 성도들이 많이 동참해서 한다.

 

그리고 주보에 목회자 나눔을 통해 일주일에 한번 글을 쓴다. 말하기 곤란한 부분을 글을 써서 올린다. 1월 14일 주보에는 “영적인 아비로 좋은 말씀으로 먹이고 싶은 것이 목회자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특별히 교회의 지체들이 믿음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회자 입니다. 잘난 자녀보다는 조금 부족한 자녀에게 관심과 사랑을 더 표현하는 것이 아비의 마음인 것 같이 우리 지체 가운데 목회자의 눈으로 부족함을 느끼는 성도에게 마음이 더 쓰이는 것이 목회자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부족함을 조금이라도 회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번 집회를 준비하고자 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1년 전 부터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우리 교회에서 집회를 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지체들 가운데 이렇게 작은 교회에 성도도 몇 명 안되는데 무슨 집회냐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집회를 통하여 한 영혼이라도 은혜 받고 인생이 변화 받는 다면 족할 것입니다. 이번 집회는 여러분 일평생에 경험해 보지 못한 집회가 될 것이며 인생의 이정표가 되는 집회가 될 것입니다”라는 내용이 나누어졌다.

 

주보에 특징 중 하나는 헌금란에 수입과 지출 등 재무 기록을 구체적으로 적는다. 그래서 교회의 재정보고를 따로 하지 않고 매주 하는 셈이다. 그렇게 하니 성도들에게 도전이 되고, 성도들도 투명하다고 생각하니 헌금이 훨씬 늘었다. 20여명이 출석하지만 재정적인 어려움은 별로 없다. 지난 1년간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를 허락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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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안디옥침례교회

35-70 160th st. Flushing NY11358

한필상목사(201-675-9591)

nyabc1988@gmail.com

주일예배 오전 11시, 말씀과 삶 공부 수요일 오후 8시, 금요기도회 오후 8시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주님은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고 오히려 불꽃이 활활 타오르도록 불씨를 입으로 후후 불어주신다. 꺼져가는 등불은 불빛이 희미하고, 불꽃을 제대로 피우지 못하고 연기만 뿜어댄다. 하나님의 자녀 역시 처음 회개하고 나서 가진 첫 믿음은 연약하기 그지없다. 그들의 영혼은 마치 연기를 뿜어내는 등불처럼 여전히 온갖 부패에 찌들어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꺼져가는 등불과도 같은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처음의 은혜가 미약하다고 해서 낙심하지 말고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가 되기 위해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의 불완전한 시작을, 겸손한 마음을 유지하며 완전을 향해 나아가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로 받아들이자. 낙심될 때는 주님이 우리를 소중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주님은 마땅히 되어야 할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시며, 우리를 택하실 때 주님의 전적인 은혜로 택하신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ㅡ리처드 십스


 

오늘 아침 출애굽기를 읽으며 묵상을 하니 참 은혜로웠다. '시선'의 중요성을 새삼 느낀다. 내가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선포하면 세상의 미움을 받겠지? 이정도는 예상을 했었다.


하지만 질투? 그것이 인간이란 존재의 심연에 얼마나 뿌리깊은 문제인지는 미처 깨닫지 못했었다. 갑자기 교회들이 나를 초청하면서 대학의 기획부처장직을 감당할 수 없을만큼 바빠져서 사임했다.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사임하면서 나를 신뢰해주셨던 분들에게 정말 미안했다.


내 평온하던 일상은 금방 전쟁터처럼 바뀌어버렸고 과로에 시달렸지만 그만큼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감당했다. 내가 집중하면 약속을 잊어버리는 학자적 특유의 건망증 때문에 교회에 실수하면 안 된다는 이유로 아내는 직장을 사임했다. 우리 부부에게는 고되고 어려운 일들이었고 처음 경험하는 상황이라 힘이 들었다. "오직 주만이~" 이 기도로 버틴 시간이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새로운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가시밭길이라 여겼던 그 과정을 전문적으로 하고 싶어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목사도 아니요 신학자도 아닌 내가 그 일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더 위험해 질 수 있다는 것을... 이 현상을 "이정훈 교수가 떴다"라는 표현을 들으면서 이해했다.


나는 하와이에서 학술대회 참가 그리고 미팅들, 제주도에서의 집회, 국회에서의 양심적 병역거부 발제를 마치고 14일만에 스윗홈에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누구시냐?"라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우리집 야옹이와 마추쳤을 때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대략난감이었다.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조용한 일본의 온천마을로~ 아내와 둘이서 겨울이면 찾던 그 조용한 마을로 가서 이틀이라도 쉬고싶다. 국회발제는 시차와 기온차로 독감에 걸린 상태로는 무리였으나 교회와 나라를 위해 빠질 수 없었고, 이 자리에서도 예전 나의 주장과 이론을 스스로 반박해야 하는 고통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나의 고통들은 작은 것이고 교회와 나라가 사라진 뒤의 회한은 이 생에 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이리라.


이것은 비판이 아니다. 나를 공격하는 목사님들 그리고 신학자들께서 자신의 역할을 올바로 해주셔서 내가 교회강연에 가지 않아도 되길 기도한다. 나는 법학자답게 국회발제, 서울대 트루스 포럼 강의같은 것에만 집중하고 싶다. 실제로 위기를 알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집회 초청에 응했으나 이제는 대폭 행보를 줄여야만 한다.


교회를 위해 "나를 소비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드린 적이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교회는 더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스스로를 진보적 기독교인이라고 자청하는 분들은 이 체제가 붕괴되면 교회의 존립기반이 사라진다는 것을 아셔야만 한다. 교회개혁한다고 교회해체세력과 동역하고 정치개혁한다고 체제붕괴세력과 동역하면 결국 교회도 나라도 여러분의 생존기반도 사라지는 것이다.


나라는 존망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사람들은 지금 자신이 보는 것, 그리고 보고 싶은 것에만 몰두한다. 기도를 드릴 때마다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내 개인의 평온하고 행복했던 일상을 바랄 수 없는 상황이다.


내가 미국과 일본의 리더들과 교류하면서 느꼈던 공포를 아는 한국인이라면 지금 그렇게 태평하게 지낼 수 없을 것이다. 평창의 거짓 평화에 속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두렵다. 우리 부부는 부자는 아니어도 각자 일이 있기에 생계를 꾸려가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둘이서 집근처 해운대 해변을 산책하고 맛있는 것 먹고 얼마든지 소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어제 저녁 아픈 나를 보살펴 주는 아내의 피로를 느꼈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세상에서 욕먹고 교회 내에서 욕먹고 과로로 병든 남편에게 "우리 이런 것 다 하지말고 예전처럼 조용하고 행복하게 살면 안 돼?" 이렇게 묻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나는 오늘도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오직 한분 뿐이신 그 진리를 바라본다. 주여~ 저와 제 나라를 구해주시옵소서"하고 감옥에서 기도하던 이승만 박사의 영성을 떠올리며 속죄와 기도의 시간을 갖는다.



출처: 이정훈 교수님 페이스북

그런 무리, 그런 믿음 없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풀밭 위에 앉히십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는 사람들, 예수님의 속마음을 알지도 못 하는 제자들....,
자신들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 자신들을 위하여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풀밭 위에다 앉히고
그리고 떡과 고기를 나누어 주십니다.
원대로 나누어주십니다. 달라는대로, 먹고 싶은대로 나누어 주십니다.

어떻게 나누어 주셨을까요?
떡과 물고기를 한 사람에게 주고 나면 똑같은 떡과 물고기가 또 생기고 또 생기고.... 그랬을까요?
떡과 물고기가 뻥튀기처럼 펑펑 생겨나고, 뭉실뭉실 커지고, 뭉게뭉게 부풀어났을까요?
저도 몹시 궁금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복음서 어디에도 그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런 건 궁금해 하지 마라,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하다면 왜 안 적었겠느냐? 하는 것 같습니다.
천국에 가면 알아보고 싶은 궁금 리스트에 올려 놨습니다.

11절을 보면 축사하시고, 감사기도, 축복기도 하시고 나누어 주셨다고만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 원어를 보면 디아도켄, NIV영어성경을 보면 distributed, 나누어 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4장 19절을 보면 좀 다릅니다.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답니다.
떼어, broke, 부수어, 뜯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제자들이 다시 무리에게 떼어서, 뜯어서 나누어준 것입니다.
그런데 떼어내고, 잘라내고, 부수어내어 나누어 주어도 끝없이 남아있는 떡과 물고기...
오히려 더 커지고 불어났는지 그러고도 제자들에게 열 두 광주리가 가득하게 남은 떡과 물고기....

떼어서 나누는 것은 성찬식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몸을 떼어서, 그 생명을 나누어주신 것을 기념하는 것.
천주교는 성찬식할 때 보면 신도가 무릎을 살짝 꿇고 앉으면 신부나 사제가 동그란 조각을 입에 넣어 주지요.
루터교회의 성찬식도 비슷합니다.
전에는 안 그랬는데 오늘날에는 많은 개신교 교회들도 천주교, 루터교회와 마찬가지로 그릇에다 조그많고 납작한 빵 조각들인지 빵 동전들인지를 담아서 한 개씩 집어들도록 하여 성찬식을 합니다만, 
저는 한 개의 큰 빵이나 떡을 가지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직접 떡을 떼어내면서 “내가 지금 내가 살겠다고 주님의 몸을 내 손으로 떼어내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하고 고백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시면서 떡을 떼어 나누어 주시면서 이것이 내 몸이라 하시고 잔을 가지사 이것이 내 피라 하셨습니다.
떡은 떼고, 포도주는 잔에 담아 주셨습니다.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마14:19)
마태복음14장 19절을 보면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면서 떡을 떼어서 그렇게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조그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떼어져서 제자들의 손에 나누어졌을 때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고도 광주리 가득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오병이어.......
그것은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풍성하게, 원대로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주님의 몸이었습니다.
온 인류를 살리는 참생명이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였습니다.
그들은 이 놀랍고 두려운 광경 앞에 엎드려 떨며 울었어야 옳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먹기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실컷 배부르게 먹고 나서 한다는 소리가 무엇입니까?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예수님을 붙잡아서 임금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을 붙잡아 임금으로 세우면 식량난 하나는 깨끗이 해결될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15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그토록 풍성한 성찬식을 베푸신 다음 혼자 쓸쓸히 산으로 피해 떠나시는 주님......
그 무리 중에도, 제자 중에도, 아무도 참 떡, 참 생명이신 주님,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을 따라 산으로 간 사람이 없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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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트루스포럼에서 기획한 전 전대협 연대사업국장 이동호 씨의 강연 내용을 옮긴 글입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이동호라고 합니다. 제 오늘 강연의 제목은 ‘좌파의 불편한 진실’입니다. 


저는 연세대학교 재학 시절, 학생 운동에 몸을 담았습니다. 당시 연세대학교의 학생운동과 총학생회를 지도하는 비밀 지하조직이 있었습니다. 저희는 이 조직을 가리켜 《Secret Union》, 비밀학생회라고 불렀는데요. 제가 중앙위원으로 있었고, 그 때 제 지도를 받던 후배가 지금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로 있는 우상호입니다. 


이후 저는 전대협 연대사업국장을 맡았습니다. 당시 전대협 연대사업국장은 서총련에서 대행했기에, 저는 서총련 사업국장과 전대협 연대사업국장을 겸임했습니다. 

그 때 전대협 1기 의장이 지금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인 이인영이고, 2기는 오영신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도 익숙한 이름이겠지만, 제가 전대협 3기 의장 교육 훈련에 들어가서 교육한 친구가 바로 임종석입니다. 


이 배후조직 가운데 제일 큰 조직이 반미청년회였습니다. 이 반미청년회의 의장이 조혁이라는 고려대학교 친구였고, 그 밑에서 조직책임을 맡고 있던 친구가 얼마 전 더불어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 출마했던 충남도지사 안희정입니다. 저는 조통그룹이라는 조직에서 활동했습니다. 임수경 씨를 북한으로 참가시킨 단체입니다. 


《주사파들의 역사인식》

학생운동 시절, 저는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공부한 바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이름을 가진 일본군 장교 출신이었습니다. 그걸 대학에 들어와서 처음 알았어요. 

이승만이란 사람은 평생 동포의 후원금으로 생활한 사람이라고 가르치더군요. 저는 정말 그런 줄 알았고... 게다가 ‘대한민국은 미국의 식민지이다’라고 말했어요. 저는 정말 그렇게 믿었습니다. 

이후 한국현대사도 다시 봐야 했고, 철학도 다시 봐야 했습니다. 그때 박정희를 다시 봤어요. 이승만도 다시 보고... 

이승만을 다시 접하고서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척박한 나라에 하늘이 이런 위인을 준비했구나... 이 분 덕분에 아무 것도 모르는 조선 백성들이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이고 실천할 수 있었구나... 

그 다음에는 박정희로 갔죠. 아니, 민중을 수탈한다는 나라에서, 점점 더 부익부 빈익빈이 된다는 나라에서, 대한민국의 중산층은 계속 커져갔어요. 

내가 배운 책에 따르면 분명히 이 나라는 망해야 되는데....국민들의 삶은 날로 풍요로워졌어요. 과거 필리핀이나 라틴아메리카 가운데 대한민국처럼 발전한 나라는 단 하나도 없었어요. 

중국에서는 등소평이  대한민국의 발전방식을 따라 하기 시작했어요. 베트남 또한 대한민국의 개발방식을 따르고 있어요.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또한 박정희식 경제 개발 모델을 따르죠.

민중의 수탈자로 알고 있었던 박정희가, 수탈자이기는 커녕 5천 년간 그 지독한 가난에 허덕이던 나라를 완전히 새로운 나라로 만들었더라고요.  그 분 영전 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어요. “내가 틀렸습니다. 당신이 옳았고, 나는 바보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동안 제가 살아왔던 이야기입니다.

최근 이야기를 잠깐 해볼게요. 제가 얼굴을 아는 많은 친구들이 이번 ‘촛불시위’에서 광화문 광장을 장악하고 난리가 났더군요. 

이거는 체제전복 활동입니다.  이 체제전복운동을 주도하는 핵심세력은 80~90년대에 훈련된 사람들입니다. 

  전교조요? 저희가 많이 키워서 보냈습니다. 주체사상과 북한의 혁명역량으로 그 사람들을 무장시켰어요. 바로 저희가 했던 일입니다. 

언론계는 물론이고, 법조계도 많아요. 민변 아시잖아요. 문화계에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들이 지금 각 분야에서 이 사회를 좌편향으로, 투쟁일변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2016년도에는 최순실 사건이 터졌어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 이름도 최서원으로 바꿨더라고요. 그런데 왜 최순실이라고 부르나요? 최순실이라고 불러야 멍청해 보이잖아요. 뭔가 촌스러워 보이고, 무지한 여자라는 느낌이 들고..

그런데 최서원 씨는 외국에 유학도 다녀왔더라고요. 압구정동에서 학원을 해서 성공하기도 하고. 그런데 완전히 아무 것도 모르는 일자무식의 여자로 몰아 갔잖아요?

그리고  k-sports 재단의 정동춘이라는 사람은 최서원 씨가 다니던 안마시술소의 원장이었다고 모든 언론이 난리였죠. 

나중에 얘기 들어보니까 멀쩡하게 서울대 나온 사람이더라고요. 서울대에서 체육학을 전공해 박사학위까지 받은 서울대 체육학 박사였어요.

그리고 헌법재판소를 협박하기 시작했어요. 헌법재판소가 그 협박에 굴복했고, 결국 대통령은 아직 자신의 죄가 뭔지도 모르는채 탄핵을 당해서 감옥에 가 있어요. 본인은 부인하고 있잖아요. 그러면 확정되기 전까지는 무죄추정 아닌가요? 

이렇게 그들은 전략전술을 따르고 있다는 겁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쉽게 선전, 선동에 넘어갑니다.

80년대 학생운동은 70년대와는 또 다릅니다. 70년대에는 공산주의 운동인 맑스주의와 레닌주의가 주축이었지만, 80년대 중반에 학생운동에 스며든 것은 다름 아닌 북한의 주체사상이었습니다. 

주사파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84년도 학생운동 당시, 서울대 김영환 그룹이 학생운동 내부 주도권 다툼에서 밀렸습니다. 

이후 이들은 단죄사상 연구라는 조직을 만들어서 단파라디오로 북한 방송을 청취하기 시작합니다.

통일혁명당의 하부세력에 있던 사람이 누구인지 아시나요? 한명숙과 그의 남편입니다. 한명숙이 바로 통일혁명당의 하부 조직원이었습니다.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으로 통일혁명당의 기독교책이었던 박성준이라는 사람이 한명숙을 끌어들였습니다. 

한명숙이 부패 혐의로 감옥에 들어갈 때 국회의원들이 한 오육십 명 떴을 걸요? 왜 그랬을까요? 남한 주사파의 원조니까요. 울고불고 난리가 났죠. 

그동안 한국의 적화통일은 과연 어디까지왔나?

1.●미군철수( 와해단계)

2.●국정원폐지(완성 )

3.●국가보안법폐지(완성)

4.○동성애합법화(추진중)

5.○우익단체사살(추진중)

6.●기독교분열(거의완성)

7.●언론접수(완성)

8.●노조접수(완성)

9.●사법부접수(완성)

10.●행정부접수(완성)

11.○연방정부수립-(완성단계로 감)

-지방선거에 헌법개정

12.●우익인사수감(완성)

13.●원전파괴(에너지종속 국가)

14.●좌우이념대립 갈등심화(완성)

15.●역사왜곡(완성)

16.●국회장악(완성)

17.●시민단체장악(완성)

18.●국가경제파탄(완성단계)

19.●사회시스템을 자본주의-공산국가 계획경제(완성단계로)

20.●군병력감축(완성)

21.●군장성잡아두기(완성)

22.●경찰공권약화(완성)

23.●인민 노동자 농민사회(완성)

24.●공산혁명정부(완성)

25.○딱하나 남은 것은 미군철수

그리고 멀지않아 사회가 혼란하다고 군과 경찰을 동원하여 국민을 통제할것이다. 국민들이 저항 한번 못하고 꼼짝없이 자연스럽게 국가가 전복되는 것이다

2. 반율법주의의 칭의론 / 박재은



반율법주의자들(anti-nomian)은 기본적으로 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었습니다. 반율법주의자들은 칭의에서 인간의 행위가 어떤 형태로든지 공로적 형식으로 참여하는 것을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반율법주의자들에게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은 반드시 배격해야 할 신학 사상이었습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은 인간의 믿는 행위가 칭의의 방정식 안에서 공로적 원인으로 참여한다고 보기 때문이었습니다.


반율법주의는 안티노미아니즘(antinomianism) 혹은 율법폐기론으로도 불립니다. 여러 신학적 관점에서 이런 용어들을 해석할 수 있겠지만, 특별히 칭의론의 관점에서 이런 용어들을 해석하면 죄인이 의롭다 칭함을 받기 위해 인간의 어떤 행동도 필요 없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행동이란 그 어떤 형태의 "믿는 행동", "율법을 행함", "인간의 노력" 등을 포함합니다. 즉, 반율법주의자들에게 칭의는 인간이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완전한 형태의 "무상(free)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반율법주의자들이 가장 많이 쓰는 단어는 바로 "무상 칭의"(free justification) 입니다. 반율법주의의 칭의론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먼저 반율법주의의 원류와 성격 들을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반율법주의의 원류


반율법주의는 1630-1640년대의 영국에서 크게 유행했습니다. 학자들은 반율법주의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 원류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고민의 결과 크게 세 가지 정도의 의견이 주류를 이룹니다. 첫째, 일부 학자들은 반율법주의의 사상적 원류를 초대 교회의 각종 신비주의나 중세의 미신적 사상들, 혹은 16-17세기의 각종 분파 사상들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둘째, 보즈먼(T.D. Bozeman) 같은 경우에는 반율법주의의 원류를 반청교도주의(anti-Puritanism)라고 봅니다. 즉 청교도주의가 성경에 근거한 매우 높은 수준의 삶과 행함을 요구했기 때문에, 청교도주의를 일종의 율법주의로 인식해서 그것을 경계한 사람들에 의해 반율법주의가 생겨났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셋째, 데이비드 코모(David Como)는 반율법주의를 극단적 칼빈주의(extreme Calvinism)로 이해합니다. 코모에 의하면 반율법주의는 칼빈주의와 많은 부분에서 신학적 연속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지나치게 드높인 나머지 인간의 역할과 책임을 일정 부분 경시합니다. 이런 의견들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반율법주의의 원류에는 어떤 형태로든지 "극단성"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반율법주의의 성격


반율법주의는 비록 "~주의"라는 접미사로 표현되기는 하지만, 어떤 특정 형태의 교단이나 종교 그룹이 일치된 교리적 논제를 가지고 잘 짜인 조직과 구성 아래서 펼친 정밀한 신학적 운동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17세기 영국의 반율법주의는 넓은 스팩트럼을 가진 다양한 신학적 성향들 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코모는 반율법주의자들을 단순화하여 보는 것 대신에 "전가적"(imputative), "내재적"(inherent) 혹은 "완전주의적"(perfecttionistic)이라는 카테고리로 나누어 다양한 스팩트럼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칭의된 자는 이제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는 것을 설명할 때 전가적 반율법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었으므로 더 이상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이지 실제적/문자적으로 아예 죄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 반면, 내재적 혹은 완전주의적 반율법주의자들은 칭의된 자에게서 실제적/문자적으로 더 이상 죄를 찾을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이처럼 반율법주의 안에도 신학 사상의 정도 차이가 존재했으며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존 이튼의 칭의론


반율법주의자 중 하나였던 존 이튼(John Eaton, 1619년경 사망)의 칭의론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튼의 칭의론에서 우리는 반율법주의적 칭의론의 핵심 요소를 쉽게 발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튼의 칭의론은 그가 죽은 뒤인 1642년에 출판된 그의 책 [무상 칭의의 달콤함](The Honey-Combe Free Justification)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튼의 반율법주의적 칭의론을 신학적 원인, 내용, 결과의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이튼이 [무상 칭의의 달콤함]을 쓴 이유는 칭의의 방정식에서 모든 형태의 인간의 이성. 감정. 노력, 심지어는 믿음의 역할까지 제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튼은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의 감정"이나 "믿음"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만" 가능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이튼에게 칭의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이튼은 칭의가 반드시 "무상 칭의"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튼이 무상 칭의론을 전개한 이유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칭의를 위한 인간의 내적 준비가 필요함), 개혁신학의 가르침(믿음은 도구적 원인), 그리고 아르미니우스주의의 가르침(인간의 믿는 행위를 강조) 전체를 비판하기 위함입니다.


둘째, 반() 로마 가톨릭, 반()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을 펼치기 위해 이튼의 결혼식 예복 은유를 사용합니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가 우리에게 전가될 때 우리는 거룩한 "결혼식 예복"을 입게 되고, 이 결혼식 예복을 입은 자의 죄는 "완전히" 깨끗하게 됩니다. 완전히 깨끗한 결혼식 예복을 입는 행위는 "하나님의 눈"에서, 완전히 "무상"으로 이루어집니다. 인간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튼에게 믿음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믿음은 결혼식 예복을 입는 것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할까요? 그렇습니다. 이튼에게 결혼식 예복을 입는 것(즉,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어서 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과 믿음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믿음이 하는 역할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결혼식 예복을 입었다는 그 사실"을 믿는 것뿐 입니다.


특별히 이튼의 죄에 대한 이해는 개혁신학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이튼은 하나님이 결혼식 예복을 입은 자에게서 더 이상 죄를 찾지 않으신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이튼은 하나님이 결혼식 예복을 입은 자들의 죄를 깊은 바다 속에 다 던져 버리셨기 때문에, 더 이상 그들에게서 아무런 죄의 흔적이나 부산물을 찾지 않으신다고 강조합니다. 이와 반대로 개혁주의 청교도 신학자 토머스 베이크웰(Thomas Bakewell, 1618년경 출생)은 하나님이 칭의된 자의 죄를 회심 전.후에 다 보신다고 주장합니다. 이튼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칭의된 자의 죄는 완전히 깨끗하게 되었으므로, 죄 용서를 위해 매일 드리는 기도가 더 이상 필요 없을 수도 있다는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청교도 개혁신학자 버지스는 죄 용서를 위해 매일 드리는 기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매일 "새로운 죄를 지으므로" 반드시 "매일 그 새로운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이튼의 이런 죄와 칭의 개념 이해는 신학적으로 부정적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인해 무상으로 결혼식 예복을 입은 자는 완전히 의롭게 되어 더 이상 죄가 없다는 가르침은, 자연스럽게 칭의에서 인간의 역할이나 책임 혹은 성화에 대한 요구를 약화시킵니다. 마치 "한번 칭의된 자는 막 살아도 된다"는 식의 도덕적 방종과 무책임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튼도 성화의 필요성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나 칭의된 이후의 삶 속에서 죄를 찾을 수 없다는 가르침은 성화의 필요성에 대한 요구와 근본적으로 묘한 신학적 긴장을 이룹니다.


이튼의 무상 칭의에서 가장 약화되는 것은 믿음의 역할입니다. 사람이 믿음과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됨으로써 결혼 예복을 입는 순간 완전히 외롭게 되기 때문에, 종교개혁적 칭의의 원리인 "오직 믿음을 통해"(sola fide) 의롭게 된다는 원리는 무시됩니다. 칭의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극단적으로 드높인 결과 인간의 역할과 책임이 경시되고 무시된 것이 바로 이튼의 반율법주의적 칭의론의 문제점이라고 지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강조, 인간의 역할 약화


인간의 역할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킨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과 대적하기 위해, 반율법주의자들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과 반대로 인간의 역할을 약화시키고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칭의론을 전개했습니다. 그들의 동기 자체는 칭찬받을 수 있겠지만, 반율법주의는 지나치게 하나님의 주권"만"을 강조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칭의에서 인간의 역할과 책임이 경시되었습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와는 반대 방향으로 추가 기울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기울어진 추의 균형을 돌려놓기 위해 또 다른 신학 사상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다음에 살펴볼 신율법주의의 칭의론입니다.



재은의 '칭의, 균형있게 이해하기'에서 발췌(26-3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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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교회와 국가를 파괴하려는 쓰나미가 몰려온다!

- 이정훈 교수님 (제주도 동성애 반대집회) -



(요6:1-4)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십니다.
2절을 보니 큰 무리가 따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뭐라고 써져 있습니까?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니라.’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는 표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거나 따르기 때문도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가르침을 받고 배우려고 해서도 아닙니다. “봄이니라.” 곧 “구경함이라.”입니다.

우리 어릴 적 시골엔 별 구경거리가 없었습니다. 그 땐 TV도 없고 영화관도 없었습니다. 어쩌다 시골동네에 서커스단이 오면 온 동네 아이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동네어귀에 장대에다 확성기를 달아서 세우고 동네가 떠나가도록 틀어댔습니다. “동춘 서커스, 와서 보시라, 기가 막히는 곡예, 원숭이쇼도 있습니다.”
병을 고치겠다는 간절한 바람으로 오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신기한 구경꺼리였던 셈이지요.

3절을 보니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셨습니다.
그런데 4절이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필이면 유대명절인 유월절에 예수님은 디베랴 바다 건너편 산에 오르시고 수많은 무리들이 그리로 몰려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리는 그들 자신이 왜 그리로, 예수님께로 몰려오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다만 예수님께서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에 몰려오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유월절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출애굽 유월절, 그 밤에 양을 잡아 피를 문에 바르고 구워서 먹는....
요한복음 기자는 지금 그들이 유월절 어린양을 잡아먹으려고 몰려오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6:5-7)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찌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5절을 보니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십니다.
몰려오고 있는 무리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그 모습, 예수님의 그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그들을 위하여 예비된 유월절 어린양이신 것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아버지께서 이를 위하여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것도 모르고 표적을 구경하려고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살리려고 자신의 몸을 찢어 주셔야 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나중에 결국 유대인들은 어린양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게 되지요.
사람들은 예수님을 잡아 채찍질하여 예루살렘 한 가운데에 피를 뿌리고 그를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불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뜨거운 태양으로 예수님을 구웠습니다.

예수님이 빌립에게 물으십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오병이어의 표적을 행하실 것을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이 기록한 오병이어의 기적은 단순히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오천 명에게 먹이신 기적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표적과 축복에 맞추어놓고 보면 이 사건이 갖는 참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미리 아셨다는 것이 어떤 아이가 보리떡과 물고기를 가지고 왔고, 그걸 내어놓을 것이고, 그러면 예수님께서 능력을 발하셔서 오천 명이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뻥튀기를 하실 것을 미리 계획하셨다는 그런 단순한 뜻이 아니란 말입니다.
오병이어,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유월절 어린양이신 자신을 온 세상 죄인들에게 나누어 먹이시는 예표의 표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서 내려온 참 떡, 생명의 떡이라는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빌립을 시험코자 함이라.... 무슨 시험요?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제자라면 최소한 스승 예수님이 누구신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빌립은 전혀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찌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이백 데나리온....... 큰 돈입니다. 품꾼 200명의 일당입니다.
오천명을 먹여야 하니, 조금씩만 준다 해도, 한 사람당 도시락 오천원씩만 잡아도 이천오백만원, 맥도널드 햄버거 샌드위치를 Meal로 하나씩 나누어주려면 7~8만불은 있어야 합니다. 엄청난 돈입니다. 여자와 아이들을 빼고도 말입니다.
삼년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의 대답은 이렇게 현실적이고 계산적이었습니다.
주판이 좌르르 튕기고 계산기가 도르륵 돌아간 것입니다.

(요6:8-9)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이번엔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구해왔습니다. 주판부터 튕기고 머리부터 굴리는 빌립 보다는 낫습니다. 그거라도 찾아내어 주님께 가지고 왔다는 사실이 매우 기특합니다. 그런데 그 안드레의 믿음 역시 거기서 거기입니다.
“그것이 이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되겠삽니이까?”

제자들은 예수님을 모르고 있습니다.
'선생님,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 이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여러분의 믿음도 혹시 이 정도 수준 아닙니까?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이렇게 능력 없고 보잘것없습니까?
지금 우리가 가진 복음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복음은 온 인류의 생명을 살리고 세상을 뒤집는 능력의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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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지도자들의 각성이 절실한 때다!


필자는 지난 1월 10일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열린 <국가별 정례인권검토(Universal Periodic Review, 약칭 UPR) 심의 후속조치를 위한 간담회>에 참석했다. 이 자리는 쉽게 말해 UN 인권이사회가 요구하는 사항들에 대해 한국 정부가 수용할지 말지, 어떤 조치를 취할지 다양한 시민단체의 목소리를 듣는 자리였다.


3시간 동안 비공개로 진행된 회의의 순서는 정부 각처의 발표, 그리고 시민단체가 요구하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회의 중 고성이 오가는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지만 필자에게는 대한민국이 지금 어떤 영적 상태에 있는지 분명히 확인하는 자리였다.


회의 내용은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군형법 92조 6항 폐지(성추행처벌), 병역법 88조 1항 폐지(대체복무제), 사형제 폐지, 낙태죄 폐지, 부부강간제 신설, 핵무기금지조약 체결, 국가보안법 폐지, 북한인권법 폐지 등이었다.


잘 알려진 수십 개의 좌파 시민단체들은 정부를 강하게 압박했고, 정부 역시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필자가 보기에 이 회의는 정해진 각본에 의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이유는 대다수가 좌파 시민단체였다는 점과 발언권이 요구서를 제출한 좌파의 순서대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 간담회를 좌파 시민단체 중심으로 진행하길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시민의 제보로 이 사실을 알게 된 소수의 보수단체는 부랴부랴 참석했다. 당연히 요구서를 제출하는 것도 몰랐고 주어진 발언 시간조차도 절대 부족했다.


필자는 이대로라면 한국도 유럽과 미주의 참상에서 예외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제대로 아는 교회 지도자가 얼마나 될까? 그런 차원에서 이 시대의 교회 지도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몇 가지 제시하고자 한다.


1. 새로운 세대의 새 판이 짜졌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잠잠하나 한동안 할랄 단지, 수쿠크 금융, 무슬림의 유입 등과 관련한 이슬람 문제가 한국교회를 술렁이게 했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여러 해악을 끼치는 동성애 문제로 인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연이어 낙태법 폐지도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이 모든 것은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목적하고, 궁극적으로 성평등을 헌법에 탑재하기 위함이다. 이런 현상들은 지난 세기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다. 왜 갑자기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판이 재편되어 새 판이 짜졌기 때문이다.


새판이 짜졌다는 말은 지난 30년간 사회주의와 포스트모던 사상에 세뇌되어 자란 새로운 세대들이 대세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들은 기존의 보편가치나 윤리를 거부한다. 이들은 니체와 프로이트의 자유로운 성개념에 충실한 본능세대들이다. 그러다보니 전통적인 기독교 가치관의 거부는 필연적이다.


오늘의 교회 지도자들의 착각이 이것이다. 점차 좌파 세대들이 주축을 이루는 시대를 맞고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보수 우파가 뼈를 깎는 회개와 갱신을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재집권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유는 자신을 뒷받침할 세력이 소수이기 때문이다.


이제 좌파 교육을 받은 세대들이 주체가 된다. 우파가 이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여기에 교회의 영적 딜레마가 있다. 더불어 젊은 교회 지도자들 역시 그 영향 하에서 자랐다는 점이다. 과연 지금과 같은 안일한 자세로 교회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2. 종말적으로 이데올로기의 영향은 더욱 심화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필자는 “때가 어느 땐데 공산주의냐, 설마 그런 일이 벌어지겠느냐, 왜 이념논쟁을 부추겨 분열시키느냐”는 조소를 듣는다. 결코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지도자들에게 영분별의 능이 필요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정말 공산주의가 사라졌을까? 이념이 약화되었을까? 세계 지도를 한번 보라. 좌파 정부가 들어선 나라가 얼마나 되는지 확인해보자. 미국을 제외한 북미와 중남미는 전부 좌파정부다. 유럽 역시 사민당이 절대다수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역시 좌파가 잡고 있다.


결국 세계는 지금 좌파 사상이 지배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교회 지도자들 중 좌·우파가 무엇인지 제대로 분별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그러면서도 “왜 때 아닌 이념 타령이냐”고 비아냥거린다.


좌파는 근본적으로 칼 마르크스 사상에 뿌리를 둔 다양한 변이 사상을 쫓는 이들을 가리킨다. 100년 전부터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 붕괴를 위해서 가족, 국가, 종교를 전복시키려 노력해왔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결말이 하향 평등의 전체주의 국가가 될 것을 알면서도 믿고 밀어붙였다.


저들은 신좌파의 옷으로 갈아입고 지난 30년간 자유, 인권, 평등이라는 프레임으로 성주류화(Gender Mainstreaming)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그 구체적인 수단들이 동성애, 낙태, 이슬람 같은 것들이다. 그것을 위한 실천 지침이자 가이드가 바로 ‘족자카르타 원리(the Yogakarta Principles)’ 29가지이다.


이에 반해 우파는 기존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자유시장경제를 지지하는 이들로서, 기독교 가치관과 보편 윤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대한민국이 그동안 추구한 기반이 이 체제이지만, 이 나라에는 보수라는 이름의 부패와 무능으로 점철된 수구세력들이 집권했기에 어찌 보면 붕괴는 예견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로 인해 대한민국은 지금 체제전복이라는 심각한 위기에 있다. 좌파를 지지하는 세대로 새 판이 짜지고, 부패한 수구세력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를 이용하여 집권한 좌파 정권은 이제 칼자루를 쥐고 있다. 마음껏 날 수 있는 날개를 달았다.


과연 앞으로 이 민족은 어떻게 될까? 이념이 구시대의 잔재인가? 성경적이고 종말론적 시각에서 미래를 예견해 보라. 과연 세상과 좌파가 상상하는 지상 유토피아가 가능할까?


성경은 주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그리스도인들의 환란과 핍박을 예고하고 있다. 결코 죄인이 바라는 지상낙원은 오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악한 영은 앞으로 이념을 더욱 부추기고, 권력을 이용하여 배교자를 양산하려들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믿음의 저울 위에 올려져 자신의 신앙을 증거해야만 하는 상황을 피할 수 있을까? 오직 준비된 자만이 통과하게 될 것이다.


3. 교회 지도자들이 심각한 안일함에 젖어있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현 정권을 지지하는 국민들의 마음을 이해한다. 과거 수구세력의 부패에 대한 분노의 골이 너무도 깊기 때문이다.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주체사상과 맑시즘이 혼재되어 있는 좌파 정부로 인해 겪을 고통을 모르고 있어 답답하다.


이는 교회 지도자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특별히 신학자들의 상태는 심히 걱정된다. 세계의 영적 흐름을 모니터링하면서 바른 방향을 제시해주어야 할 지성인들이 자신들의 신학논쟁의 리그에서만 안주하려고만 하고, 일부 학자는 한국교회를 지키려 애쓰는 일반 신자들의 헌신을 평가 절하하는 무책임마저 보이고 있다.


신학적 논쟁과 유희도 안정된 자유민주주의체제에서나 가능하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동안 쌓여온 한국교회의 부패는 청산해야 마땅하다. 뼈를 깎는 교회 내부적 갱신을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교회 밖에서 지금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필자는 앞서 언급한 법무부 주관 UPR에 참석하면서 국가인권위원회 관계자의 태도에 세계 좌파의 오만함을 확인했다. 정부 각 부처는 국가인권위의 지시와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 정부가 국가인권위의 위상을 헌법 위의 초법적 기구로 격상시키려 한다는 것이 실언은 아닌 듯싶다. 현재와 같은 교회 지도자들의 무반응과 무감각이 지속된다면 차별금지법 제정은 시간문제다.


6월에 있을 지자체 선거에서 성평등이 탑재된 개헌이 이루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유럽교회가 우리의 미래 자화상일 것이다. 최근 중남미 선교사에 보고에 의하면 과테말라, 온두라스, 코스타리카, 볼리비아 등에서 동성혼이 합법화되었고, 동성애가 죄라는 설교를 하면 7-12년의 징역형에 처해지는 악법이 통과되었다고 한다. 꿈쩍하지 않는 오늘의 교회 지도자들의 무사태평과 무감각이 놀라울 뿐이다.


언제까지 정치에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소신을 고수할 것인가?

그런 소신(?)을 교회 갱신과 성경적 목회에 쏟아 부었더라면 지금처럼 세상의 힐난과 손가락질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 기억하자. 세계는 지금 좌파 사상이 지배적이다. 교회 지도자들 역시 자신은 인지하지 못하나 적잖이 좌경화된 사상에 세뇌되어 있을지 모른다.


필자도 동성애 배후의 사상에 대해 연구하지 않았다면 이런 글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UN과 EU는 이미 68혁명 세대가 장악했다. UN은 더 이상 그 옛날의 보편가치를 추구하던 UN이 아니다. 이 말은 UN의 요구는 반드시 따라야 하는 절대기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좌파의 30년의 치밀한 전략에 의해 세계는 지금 총체적으로 좌클릭해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상식적인 성주류화(GM) 쓰나미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구체제는 전복되어가고, 점차 회복 불능 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지금과 같은 교회 지도자들의 무반응과 무책임이 지속된다면 이 민족과 교회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우리의 후손들에게 참 신앙을 전수하고 싶은가? 그러려면 교회 지도자가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빠지고 만다.


갈수록 암울해지는 유럽의 현실을 진단해보라. 하나님의 교회는 영원하지만 믿음이 없는 곳에는, 진리를 파수하고 전수하려는 실천적 의지가 없는 곳에는 가시적 교회도 사라질 수 있음을 교회 지도자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 교회 지도자의 영적 각성에 이 민족의 생사가 달려있다.



- 박광서 목사님 (코닷연구위원, 큰사랑교회 담임)



출처: 코람데오닷컴 (http://m.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12455)

'자유'를 뺀 민주주의는 전체주의다!


“(개헌) 자문위는 최종보고서에서 핵심인 권력구조 개편은 결론 내지 않았고, 대신 전문(前文)에 있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표현을 뺐다.” 조선닷컴 1월 10일자 기사다.


우리 평생 ‘대한민국=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나라’라고 당연시해 온 게 결국은 일장춘몽이었나?


필자는 1980년대 중반 어느 날 관악구에 있는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강의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한 유인물을 우연히 발견했다. 들쳐본 필자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유인물은 자유주의 타도, 개량주의 타도를 외치고 있었다.


보통 사태가 아니라고 느꼈다. 학생운동이 마침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구현이나 그 테두리 안에서 ‘진보’를 추구하는 단계를 지나, 전체주의 극좌노선으로 내닫고 있음을 그 문건은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타도’는 군사권위주의 반대로만은 안 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세계시장 체제도 타도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개량주의 타도라는 것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존중하는 진보로는 안 되고 오직 극좌 전체주의 혁명이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이 문건에 반영된 당시 학생운동의 트렌드를 목격하면서 필자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제헌헌법 정신의 장래에 짙은 먹구름이 낄 것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이런 트렌드의 20대 학생들이 향후 40대 50대가 되어 대한민국의 각계각층을 접수하면 이 나라는 저절로 ‘그런 그들의 체제’로 변질할 것임이 너무나 자명했기 때문이다.


당시 필자의 그런 예감은 오늘날 위 조선닷컴 기사대로라면 거의 맞아떨어지고 있는 것 아닐지?


필자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존중하면서 추구하는 중도-진보 정책은 그것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를 떠나, 그야말로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면 그 입장 자체는 헌법적으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정도를 넘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아예 배척하고 그 어떤 종류의 것이든 전체주의적 변혁으로 넘어가려는 것에는 단호히 반대한다. 이건 필자 개인의 양보할 수 없는 양심의 자유다. 많은 동시대인들깨서 같은 입장에 서계실 것이라 믿는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설마…하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려 하고 있다면 과잉반응일까? 상당수 대중은 이 비상시국을 실감하지 못한 채 그냥 하루하루를 무심히 소비하고 있는 것 같다.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정말 어디로 가시나이까?



-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






첨부파일 의인이면서 죄인-임시.hwp


가져온 곳 : 
카페 >개혁주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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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송다니엘| 원글보기

 

[요한복음 5:31-32]
31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32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시니 유대인들이 가만 있을 리가 없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네가 하나님과 동등하냐?”고 살기등등하게 따지고 덤빕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씀을 계속하셨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하시는 것을 보고 그대로 한다. 아들은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그대로 한다. 아들은 아버지와 똑 같다. 아버지가 죽은 자를 살리시니 나도 죽은 자를 살린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심판을 맡기셨다.......”

심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맡긴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심판은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하며 모든 사람의 폐부를 감찰하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심판은 생사화복의 주관자, 천국과 지옥의 주관자, 우주의 주재자, 곧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심판을 맡겼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다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을 죽이고 살리는 일까지 자신에게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대답을 하시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곧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벌벌 떨며 예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이는 유대인들로서는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기등등하게 덤비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주님께서 계속 자신의 정체를 밝히시면서 하신 “증거”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심판주시라면 그것을 누가 어떻게 증명하느냐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 자신이 예수님 자신을 증거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기적과 표적도 예수님께서 자신을 증거하기 위하여 행하신다면 그것은 참 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증거하기 위하여 표적을 행하셨다면 진작 마귀가 시험할 때 돌을 떡으로 만드시고 성전에서 뛰어내리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병고침과 살리심과 표적과 기사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하여 행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또한 세례요한도 예수님의 증거는 아닙니다.
세례요한은 다만 앞서 보내심을 받은 사자요 광야의 소리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명백하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시고 그 보내심의 증거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자신을 증거하지 않으셨습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마침내 그를 증거하셨습니다.
증거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자, 지금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눈을 치켜뜨고 죽이겠다고 덤비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명백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증거는 하지 않으십니다. 유대인으로서는 미칠 노릇입니다. 증거를 보이지 않으니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은 과대망상증 환자이거나 광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정할 수도 없는 것이 38년 된 병자를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게 하였으니 예삿인물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네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것을 보니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때 예수님이 자신을 증거하셔서 하나님의 아들, 전능자로 나타내셨다면 얼마나 통쾌하고 속시원하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벌벌 떨며 엎드렸을 것이며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사람, 그렇습니다,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 세상을 구하러 오신 그리스도인 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마 16:16).
증거 없이 말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우주의 비밀입니다. 그 믿음이 구원의 열쇠입니다.
믿음은 증거를 보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보고 믿는 것은 이미 믿음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는 뱀의 거짓말을 믿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네가 이 열매를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뱀에게 증거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증거를 보여라. 네 말이 사실이라면 선악과 따먹고 하나님 같이 된 사람 데리고 와서 보여라. 아니면 네가 선악과 먼저 따먹어 봐라. 어디 하나님과 같이 되는지 보자.”
아담과 하와가 진작 이렇게 증거를 요구할 정도로 총명하고 영리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런 증거도 없이 뱀의 말을 믿어버리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렇게 죄인이 된 아담의 후손들, 유대인들이 뒤늦게 똑똑해져서(?) 정작 예수님의 말씀에는 안 속겠다고 증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똑똑하게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린 것입니다.
아, 그 때 뱀을 못 박아 죽여 버렸었더라면, 그걸로 뱀탕 만들어 남편과 나누어 먹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ㅋㅋ

예수님은 이러한 유대인들, 아니 죄인들에게, 믿지 말아야 할 것은 믿고 정작 믿어야 할 것은 믿지 못 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성경이 증거라는 것입니다.

성경 또한 예수님이 쓰시거나 보이시는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많은 선지자들로 하여금 쓰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이 증거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성경을 읽어도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증거가 마음에 들어가 믿어지지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님이 막상 눈앞에 오셨는데도 그들은 알아보지 못 하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 말씀이 너희 속에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체험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믿음을 위하여 기적을 요구하고 초자연적인 기도응답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해 주시면 믿겠습니다, 하지도 마십시오. 그것이 증거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체험이나 초자연적인 기적과 응답은 분명히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살아계시고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체험이나 초자연적인 기적을 보고 나서 믿겠다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말씀을 믿으십시오. 말씀이 증거입니다. 성경이 증거입니다.
그 말씀, 그 증거가 마음에 들어가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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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 / 박재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이란 네덜란드 신학자였던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의 이름을 딴 칭의 개념입니다. 아르미니우스의 사상은 후일에 아르미니우스주의로 불렸고 그 사상적 후예들은 항론파(remonstrant)라고도 불렸습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의 파급력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전통적 칼빈주의와 대비되는 가르침을 설파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칼빈주의의 가르침에 이의를 제기해 항변서 형식으로 다섯 가지 논제를 주장했는데, 그것은 바로 부분적 타락, 조건적 선택, 보편적 속죄, 가항력적 은총, 구원의 탈락 가능성입니다. 이런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 사상은 그 당시 유럽 전체 개혁교회의 신학 사상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으며, 그 반응으로 도르트회의가 소집되어 결국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정죄와 비판을 받게 됩니다.


칭의의 행위적 조건인 믿음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에서 핵심은 "믿음"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은 인간의 믿는 행위를 강조합니다. 이 믿음의 행위는 인간의 자유 선택의 능력에서 비롯됩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은 인간이 믿기로 자유롭게 선택하는 그 행위 "때문에" 우리가 의롭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칭의의 행위적 "조건"이 됩니다. 얼핏 보면 큰 문제가 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개혁주의자들이 강조하는 것이 바로 칭의는 오직 믿음(sola fide)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칼빈주의 사이에는 미묘하고도 중대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칭의의 4중 원인 개념이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칼빈주의가 믿음의 역할에 대해 갖고 있는 개념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칭의의 4중 원인


세상의 모든 일에는 다 원인(cause)이 있습니다. 만약 밖에 비가 내린다고 생각해 봅시다. 비는 스스로 내릴 수 없습니다. 다양한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비가 내린다"는 결과가 도출되는 것입니다. 신학자들도 복잡한 신학 개념을 다룰 때 기본적으로 원인을 네 종류로 분석하여 신학 개념을 설명하곤 했습니다. 사실 이런 4중 원인론을 사용하는 것의 원류는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였습니다. 그는 현상의 원인을 질료인(質料因), 형상인(形相因), 목적인(目的因), 작용인(作俑因)으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신학자들도 각종 신학 개념을 4중 원인으로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신자의 구원을 설명할 때 유효적 원인은 하나님의 선한 의지나 즐거움이고, 형상적 원인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도구적 원인은 복음이며, 마지막으로 목적 원인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이런 원인을 칭의에 적용시켜 봅니다. 개혁주의 청교도 신학자인 앤서니 버지스는 그의 책 [참된 칭의 교리]에서 칭의를 다음과 같이 4중 원인으로 설명합니다. 칭의의 유효적 원인은 삼위일체 하나님이고, 형상적 혹은 공로적 원인은 그리스도의 의와 그의 능동적/수동적 순종이고, 도구적 원인은 믿음이며, 목적 원인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런 설명은 개혁주의 진영 안에서 보편적으로 가르쳐진 칭의의 4중 원인입니다.


그러나 칭의의 4중 원인에 대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생각은 사뭇 다릅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도구적 원인(instrumental cause)에 대한 것입니다. 개혁신학에서 믿음의 역할은 도구적 원인으로 이해됩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할 때 그 믿음 자체는 어떤 능력이나 힘, 공로가 없습니다. 믿음은 공로적 원인인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는 유익을 인지하고 믿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칭의의 전적인 공로는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공로가 없습니다. 칭의는 우리의 믿음 "때문에" 혹은 "덕분에"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도구를 "통해" 그리스도의 의의 공로에 근거할 때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믿음을 도구적 원인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을 형상적 혹은 공로적 원인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아르미니우스주의적 칭의에서 "믿는 행위"는 칭의의 조건이 되며 자연스럽게 칭의의 공로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믿는 그 행위로 인해" 칭의되었다고 볼 수 있으므로, 인간의 역할과 행동이 칭의의 방정식에서 사뭇 중요해집니다. 그러므로 아르미니우스주의를 깊이 연구한 키스 스탱글린과 토머스 맥콜은 아르미니우스주의에서 "믿음은 칭의의 조건이다"라고 바르게 언급합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가 믿음을 도구적 원인으로 이해하지 않고 형상적/공로적 원인으로 이해한 것에 대해 그 당시에 많은 비판이 있었습니다. 만약 그렇게 될 경우 칭의에서 그리스도의 역할과 공로는 작아지고 오히려 인간이 믿는 행위의 역할과 공로는 상대적으로 커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장 1절은 칭의 때 믿음이 하는 바른 도구/수단적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효력 있게 부르신 자들을 또한 값없이 의롭다 하시되, 그들 속에 의를 부어 넣으심을 통해서가 아니고 그들의 죄를 사하시며 그들 자신을 의롭게 여기시고 받아들이심을 통해서이며, 그들 안에 이루어진 혹은 그들에 의해 행해진 어떤 것 때문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며, 믿음 자체 즉 믿는 행위나 다른 어떤 복음적 순종을 그들의 의로 그들에게 전가시킴을 통해서가 아니고 그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지할 때, 그의 순종과 만족을 그들에게 전가시킴을 통해서인데, 그 믿음도 그들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장 1절에서 칭의 때 믿음이 하는 역할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가르치는 것과 다릅니다. 칭의는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며, "믿음 자체, 즉 믿는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지할 때" 가능하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믿음은 어떤 공로도 없는데, 왜냐하면 그 믿음이 우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중간지식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나 구원에서 인간의 공로적 역할을 강조하기 때문에 신인협력설(synergism)이란 단어로도 표현됩니다. 신인협력설은 신인협동설이라고도 하는데, 기본적으로 인간의 자유 선택 의지/능력과 하나님의 은혜가 협력하여 구원을 이루어 나간다는 이론입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적 신인협력설을 주장하기 위해 중간지식(scientia media)은 매우 유용한 개념입니다. 중간지식은 본래 예수회 신학자였던 페드로 데 폰세카와 루이스 데몰리나에 의해 발전된 개념입니다. 아르미니우스도 중간지식 개념을 차용하여 자신의 구원론을 전개합니다.


그렇다면 중간지식이란 무엇일까요?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지식은 크게 "자연적(혹은 필연적) 지식"과 "자유 지식"으로 나뉩니다. 자연적(혹은 필연적) 지식이란 하나님이 스스로의 본성에 의해 자신뿐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에 대해 필연적으로 다 알고 계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에 반해 자유 지식이란 하나님의 의지에 근거한 지식으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하나님의 의지 안에서 실체화되는 지식입니다. 하지만 예수회 신학자들이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이 두 가지 지식 외에 또 다른 지식을 추가합니다. 이 지식은 의도적으로 자연적/필연적 지식과 자유 지식 사이에 위치하여 미래의 우연성에 대해 설명하려고 하는 개념입니다.


중간지식을 구원론에 적용해서 이해해 보겠습니다. 구원에 대한 전통적 시각에서, 하나님은 구원받을 자를 하나님의 선한 의지와 자유 지식에 의해 영원 전부터 주권적으로 선택하십니다(엡 1:4, 9, 11; 롬 8:30; 딤후 1:9; 살전 5:9; 벧전 5:10). 하지만 중간지식 개념에서의 구원은 인간의 선택 행위를 포함합니다. 인간이 은혜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거부하느냐 하는 "조건에 근거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실행됩니다. 중간지식 개념에서는 인간이 선택할지 여부가 하나님의 지식 바깥 영역에 있는 미래의 우연적 사건들입니다. 결국 중간지식을 차용한 구원론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인간의 선택에 의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미래의 우연적 사건들에 기초한 "조건적 구원론"이 됩니다. 그러므로 중간지식 개념은 구원의 방정식에서 인간이 구원에 대해 자유 선택할 수 있는 공간을 부여한다는 측면에서 인간 중심적 구원 지식론입니다.


개혁신학은 중간지식 개념을 반대했습니다. 하나님의 자연적/필연적 지식이나 자유 지식은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다 염두에 두는 포괄적 지식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는 우연성에 근거한 그 어떤 형태의 중간지식 개념을 위한 자리도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예를 들면 개혁주의 신학자들이었던 프란키스쿠스 투레티누스(Francis Turretin, 1623-1687년)나 윌리엄 트위스(Willian Twisse, 1578-1646년)는 중간지식 개념이 하나님의 속성인 전지(全知, 모든 것을 다 앎)를 무너뜨리고, 구원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키는 이론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인간의 역할 강조, 하나님 주권 약화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은 인간의 역할을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키는 우를 범했습니다. 믿는 행위를 칭의의 조건으로 여김으로써 인간의 믿는 행위에 칭의의 공로를 부여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믿음을 칭의의 도구적 원인으로 이해하지 않고 형상적/공로적 원인으로 이해한 결과 그리스도의 의의 공로는 약화되었습니다. 결국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사이에서 균형 잡기에 실패한 칭의론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에서 약화되었던 하나님의 주권을 다시 높이기 위한 신학적 바람이 일어나는데, 이 신학적 바람은 다음에 구체적으로 살펴볼 반율법주의의 칭의론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박재은의 '칭의, 균형있게 이해하기'에서 발췌(18-26p)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오직 은혜로 (Sola Gratia)

 

  

 

 

 

저자: 라일 비에르마 (Lyle D. Bierma, 미국 칼빈 신학교 역사신학 교수)

번역: 태동열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박사과정 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마틴 루터는 이 찬송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만일 그것을 알았더라면 기쁨으로 찬송했을 것이다. 루터는 은혜의 소리가 언제나 그렇게 달콤한 것은 아니었던 신학적 전통에서 공부했다. 그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행위로 구원의 은혜를 얻을 가치가 있는 사람들에게만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주신다고 배웠다. 그의 스승들은 야고보서 4장 8절을 인용하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라 그러면 그가 네게 가까이 다가 올 것이다" 라고 그에게 말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선물이기보다는 보상이었다.  


   그래서 루터는 그것을 시도했다. 그는 수도사가 되어 빈곤, 순결, 순종에 대한 서약을 했다. 끊임없이 기도했고 자신이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죄까지 고백했다. 스스로에게 매질했고 잠을 자지 않았고 너무 심하게 먹지 않아, 어떤 기록에 따르면, “배꼽이 그의 등뼈에 닿았다.” 그러나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기보다는 멀리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로마서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시작하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눈 앞에 우리가 의롭게 서는 것은 우리의 행위에 따른 댓가로 얻어야 하는 게 아니고 오직 은혜 (값없이 거저 주시는 호의) 에 의한 (sola gratia; by grace alone)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루터는 나중에 “나는 한번에 (all at once) 거듭 났고 열린 문을 통해 천국에 들어갔다" 라고 회고했다. 은혜가 그처럼 감미롭게 들렸던 적은 결코 없었다.


   오직 은혜로 인한 구원 (salvation by grace alone) 에 관한 종교개혁의 강조는 이내 개신교인들이 더이상 선행 (good works) 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값싼 은혜를 원한다는 가톨릭 반대자들의 비난을 유발하게 되었다.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은 제 86문에서 이렇게 그런 염려를 정리했다: “우리가 우리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비참한 상태로부터 구원을 받았다면, 왜 우리는 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그 교리문답은 이 질문에 관한 대답에서 “오직 은혜로 (sola gratia)” 에서의 “오직 (sola)” 은 착한 행실이 더이상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걸 의미하지 않음을 명료하게 한다. 우리의 행위가 구원을 얻을 만한 공로가 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우리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께의 감사의 표현이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자신의 믿음이 참된 믿음임을 확인하며, 이웃을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이 점에 있어 그 교리문답은 에베소서 2장 8-10절에 부합한다. 거기서 바울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즉시 덧붙여 말하기를,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 라고 한다. 선행은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 그 열매이다.

 


“오직 은혜로 인한 (sola gratia) 구원”에 관한 이 교리의 핵심은 하나님의 본성 뿐 아니라 인류의 상태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그것을 매우 필요로 하기 때문에 참으로 놀랍다. 루터가 한때 배웠던 바와는 반대로, 우리에겐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 있는 내적인 능력이 없다. 타락한 피조물로서 우리 각자는 우리 존재의 가장 중심에서 거짓되고 (렘 17:9절), 영적으로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었다” (엡 2:1절). 우리는 깊은 구덩이에 빠져 바닥에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사람들과 같다.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에게 내려와서 우리를 소생시키고 우리를 자유로 끌어 내는 누군가에 의한 위로부터의 구출이다. 도르트 신경이 말하듯이, 인류는 “중생케 하는 성령의 은혜가 없이는 [우리가] 기꺼이 하나님께 돌아가려 하지 않고 돌아갈 수도 없는” 그런 비참한 상태에 처해있다 (제 3조, 3항).


   안타깝게도 은혜에 의한 구원의 진실은 북미권 문화에 매우 반대되기 때문에 북미 기독교에서 종종 빛을 잃는다. 우리 사회는 “할 수 있다는 정신 (a can-do spirit)” 이 지배적인 성과-지향적인 사회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농구 코트에서 승리를 거둔다. 장학금을 두고 경쟁하고 직장에서 성과급을 얻기도 하며 잘못을 행하는 경우엔 벌도 받는다. 이 모든 노력과 성취 가운데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필요,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평안을 누리지 못함에 관한 한, 우리 스스로는 절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외부로부터의 도움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이것이 루터가 500년 전에 재발견한 그 은혜가 참으로 놀라운 이유이다. 우리 스스로는 그 은혜를 누릴 만한 자격이 없다. 우리가 그것을 획득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기꺼이 구원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 오직 은혜로 (sola gratia) - 실제로 구원하신다.



http://reformedjr.com/board05_02/7297

출처: 영적 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탈북여성 12명이 어제 라오스 국경 메콩강을 건너다 배가 뒤집어져 2명이 사망했습니다. 사망한 여성이 국내 인권단체로 보낸 편지엔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윤동빈 기자의 보도입니다.

 

[리포트]
탈북여성 12명이 탄 버스가 지난 주 라오스를 향해 출발할 때만 해도 기쁨과 환호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탈북을 도운 국내 인권단체가 확보한 휴대폰 카메라 영상엔 탈북여성들이 "이제 한국가요"라고 외치는 장면도 있었습니다.

중국 산둥성에서 집결해 남쪽으로 간 이들은 라오스의 메콩강을 건너 태국으로 들어가려 했습니다. 탈북민들의 주요 탈출 경로입니다.

하지만 5명이 타는 작은 쪽배에 12명이 타는 바람에 배가 메콩강에서 뒤집어지면서 두 명이 익사했습니다.

사망한 50대 탈북여성 이모씨는 함경북도 청진 출신으로 지난 2007년 중국 허베이성 한족 남성에게 팔려갔다가 최근 유선암 선고를 받고 한국행 결심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씨가 국내 인권단체에 보낸 편지에는 '한국에 가서 암 치료도 받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내용 적혀 있었습니다.

이씨는 예전에 탈북 후 중국에서 머물다 공안에 체포돼 북송된 경험도 있었습니다. 구조된 10명의 탈북 여성들은 현재 태국 경찰서에서 신변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TV조선 윤동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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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억달러 UAE 원전 수주도 거저 된 걸로 보일 것이다.>

[양상훈 칼럼]

조선일보UAE가 한국에 총 400억달러의 원전 건설을 발주하겠다고 통보해 온 것은 2009년 12월 15일이다.

공식 발표 때까지 비밀을 지켜달라고 당부했다. UAE는 프랑스로부터 강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

이미 수개월 전에 프랑스 원전을 사겠다고 프랑스 측에 통보해 양국이 서명할 날짜까지 정해졌다.

그런데 한 달여 만에 역전이 이뤄졌다. 우리 산업사(史)에 남을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UAE가 프랑스에 원전 건설을 맡기기로 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세계 원전 시장은 미국, 프랑스, 일본이 나눠 갖고 있었다. 캐나다는 보유 기술이 노후했고 러시아는 원전 사고로 위축돼 있었다.

한국은 어디에도 이름이 없었다. 원전 수출 경험도 전무했다. 기술과 노하우 문제만이 아니었다.

경쟁국은 국제적 영향력에서 한국과 비교할 수 없는 선진국이다.

프랑스 원전을 사면 부수적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한국에는 기대할 수 없었다.

처지를 바꿔 우리가 '한국' 같은 나라로 결정했으면 국회 청문회감이었을 것이다.

UAE는 2009년 11월 초 유명환 외교부 장관을 초청해 "프랑스로 결정했다"고 통보했다.

원전 수출에 또 고배를 든 것이다.

보고를 받은 이명박 대통령은 UAE의 실력자인 무함마드 왕세제와 마지막 통화를 시도했다.

통화는 자꾸 미뤄졌다. 피하는 것이 분명했다. 외교 예의가 아니었다. 참모 중에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는 사람들도 있었다.

며칠 만에 이뤄진 통화에서 이 대통령이 경제 개발과 교육 지원 외에 안보 협력 카드를 던졌다.

UAE는 부(富)는 큰데 인구와 방위력은 작은 불균형의 나라였다.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는 프랑스도 UAE에 파격적 군사 협력 카드를 제시했다.

프랑스는 최첨단 전투기, 핵잠수함, 항공모함, 실전 능력을 갖춘 부대를 보유한 세계적 군사 강국이다.

프랑스는 군사 기술 이전과 함께 UAE에 '핵우산' 제공을 제안했다는 설(說)까지 돌았다.

UAE는 이란의 핵 개발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재선을 앞둔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도 가능한 모든 카드를 던졌을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에 약점이 있었다. UAE의 가상 적국인 이란과도 관계가 깊다는 사실이었다.

이 대통령이 안보 협력을 제안하자 UAE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북한과 오랜 유대를 맺어온 이란은 북한과 여러모로 비슷한 군사 체제를 갖고 있다. 무기 체계도 유사하다.

더구나 UAE와 이란 사이의 좁은 바다에 우리 서해 5도와 같은 섬까지 있다.

안보 수요가 한국과 일치하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UAE는 며칠 동안 이 문제를 깊이 검토한 것 같다.

UAE 왕세제는 이 대통령과 통화한 지 5일 만에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입찰을 연기하기로 했다."
파리 개선문 바로 앞에 가 있던 400억달러 UAE 원전이 서울로 방향을 튼 것이다.

한승수 전 총리와 관계 부처 장관들이 참여한 대표단 40명이 급히 구성돼 11월 18일 UAE를 방문했다.

이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이때까지도 UAE가 프랑스와 약속을 파기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대표단에는 우리가 수주할 가능성이 커졌다고 했다'고 썼다.

이 거짓말 덕분인지 대표단은 정말 열정적으로 UAE를 설득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 UAE는 한국 손을 들어주었다.

선진국들이 핵실험을 할 때 원자력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한국이 세계 4대 원전 수출국 반열에 올랐다.

지금 영국, 사우디 등의 원전 수주에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UAE 역전 드라마가 발판이 된 것이다.

새 정부 국방부 장관이 UAE에 가서 당시 맺은 군사 협력 조항에 손을 대려다가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아마도 국방부 적폐청산위에서 비공개 협약을 발견하고 '또 한 건' 잡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군사 협력을 '자동 개입'이라면서 '용병'이라는 식으로 비난한다.

국회 동의 없이 단 한 명도 파병할 수 없는 나라에서 자동 개입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UAE는 한국만이 아니라 많은 나라와 군사 협력 관계를 맺고도 있다.

새 정부 인사들은 무엇을 건설한 것이 아니라 그 옆에서 훈수 두고 비난하던 사람들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세계 최빈국이 극소수 선진국의 전유물인 원전 시장에 올라선 것도 그들에겐 그냥 된 것으로 보일 것이다.

UAE가 한국에 동북아 거점 원유 저장소를 짓고 자국 내 유전 개발권을 준 것이나, 군수 지원 협정을 통해 한국 무기를 엄청나게 구입한 것도 모두 거저 된 걸로 보일 것이다.

이 기회에 치열한 국제 경쟁 현실 속에서 국가 경영이 어떤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기를 바랄 뿐이다.

*開城工團 再開 絶對 해서는 안되는 理由..!!

開城工團
入住業體 서승만 代表였던분의 主張...!!

"절대 개성공단 재개하면 안된다"
문재인 제발 경거망동하지 말라!! 
간곡히 충고 한다.

자유대한민국 국민이 피해를 보지않도록 널리널리 전파하시기 바랍니다.
-서승만-

 

◀ 노무현 귀신이 어른거리는 문재인

*開城工團 再開 絶對 해서는 안되는 理由..!!

개성공단 입주했던 업체대표로서 절대 반대 합니다.

노무현정부에 속아서 피같은돈 30억 버리고 2009년1월 피눈물 머금고 자진철수 했습니다.

철수한 이유를 아래와 같이 팩트를 고합니다.

하나 : 사업의 가장 중요한 연속성이 불가 합니다.

아시다시피 북한에서 출입중단 수시로 시켰죠.. 남한에서두 중단시켰죠..

한번 중단하면 바이어에 납기 어기게되고 바이어는 판매기회상실로 크레임 청구하고 다시 재개되면 불안해서 한번 당한 바이어 다시 돌아오게 하기 어렵습니다 ..

다시 바이어 구해야하고 대책없는 반복사항 입니다.

둘 : 인력수급이 참으로 힘들다.
1) 개성공단만 해도 우리가 요구 하는 근로자 제공 못해 줍니다.

그런데 문재인후보 현재의 10배? 참 기가 막힙니다.

왜? 제공 해주지 못하느냐구요?

개성시내와 개성공단거리 10km(추정) 정도인데 도로가 엉망이라 1시간 이 걸립니다.

2) 개성 인구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많아야 10만? (우리남한의 접경지역 주민 생각해보심 이해될겁니다)

다른지역에서 데리고 오면 되지않느냐구요? 10km도 한시간 소요되는데 남한돈으로 고속도로까지 놔주어야 하겠죠 .. ㅜㅜㅜ

셋 : 요즈음 세계 어느곳에서 사업 하면서 인터넷불가? 핸드폰 불가?

말이 됩니까? 진출전에 노무현정부 설명 곧 된다고 했었습니다.

그러니 업무용사진하나 메일로 보낼수도 없고 택배로 보내든가 직접 갖고 갈수 밖에 없읍니다.

넷 : 이런등의 사정으로 인건비보다 간접비가 국내보다 상식을 벗어나게 소요됨.


예를들어 모든연락 국제전화로 하기때문 (fax도 국전전화료) 한국에서 월 20만원내의 통신비가 200만원이 훨씬 더 소요됨.

다섯 : 기업으로서 인력운영 최악!

1) 채용시 면접 불가
인력요청하면 공급인원도 턱없이 부족 하지만 달랑 북한측에서 제공하는 인수인계서류에 성명.성별.나이.전직 이 전부 입니다.
그내용이 맞는지도 확인불가

2) 100명 주면 100명 다 받든가 다 않받든가 택할 수밖에 없음.
만삭이된 임산부는 곤란 하다 난색에 그럼 전부 받지 말라는 협박? 울며 겨자 먹을수 밖에요

3) 인력 요청하면 언제 가능한지 계획통보 전혀 없어 언제 가능한지 예측불가

4)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잘하는 사람 승진 시키고 차별 상여금 이라도 주어서 동기부여도 하고 그로인해 생산성도 향상 시키는 등 나름 당연히 강구 해야 하나 모두 불가함.

5) 개별면담 불가

6) 전체인원 의 12%~14% 인원이 매일 결근함 (당의 지시에 의해)

한사람이 10일 보름후에 결근하고 나오고 사유 물어보면 100% 가 아팟슴다 끝..

얼굴은 검게 타가지고 와서는 (당의 동원인력에 다녀왔을 것으로 추정만 할 수밖에 방법이 없슴
(당사는 500명 채용에 거의 매일 60~70명이 결근 이었습니다)

7) 한국인이 직접 북한근로자에게 작업지시 금지
(북한에서 나온 북한공산당 간부를 통해서 전달형식으로 하게함)

여섯: 공포 분위기의 공단 주변

- 공단 주위는 삥둘러 북한 초소가 있고 북한군이 집총하고 보초를 서고 있습니다.

일곱 : 북한과 북한의 근로자가 모두 갑이다.

옆의 공장의 사례 입니다.
한국에서 올라간 공장장이 말일이 지나 달력을 무심코 찟어서 휴지통에 버렸던 일이 있었습니다.

북한근로자가 보고 벌떼같이 소리지르고 데모해서 결국 공장장 다시 못오게 되었습니다.

(북한달력에 김일성.김정일 사진 조그맣게 들어 있습니다) 그 위대한 사진을 휴지통에 버렸다는것이죠.

올림픽때 서울와서 인공기인가/ 김일성사진인가 비에 젖었다고 울고 불고 난리친거 기억 하시나요? 딱 그겁니다

여덟 : 내공장 내가 맘대로 못가

공장 가려면매번 7~10일전에 가는날 가는시 오는날 오는시 적어서 통일부에 신청 하면 통일부는 북한에 요청 승인받아 출입이 이루어 지는데 업무가 덜끝나도 그시각에 무조건 돌아와야 합니다

아홉 : 국민들은 개성공단 진출업체가 국가로부터 특혜를 받았다?

피가 거꾸로 솟을 억울한 사실 입니다.
아니 오히려 역차별을 심하게 받았습니다.

代表的인 逆差別 事例

1. 국내에서 공장부지사고 건물짓고 기계설비하면 투자금액의 70~80%는 무난히 대출을 받습니다.
(30억 투자하고 12억 대출 받았습니다 …)

2. 국내에서는 담보물 설정하면 그것으로 이자만 내면 되지요?
여러분 집담보로 대출 받는것과 또 같습니다

서로 자기들 은행에서 받으라고 하지요
개성공단은 우리은행 한곳 밖에 없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3. 담보 설정할꺼 다하면서 개성공단은 만약의 경우 우리은행이 자산행사를 못하니 신용보증기금의 보증서를 발급 받아 오도록 합니다.
(신용보증에 보험료 납부는 물론이구요)

신용보증기금에서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수출입은행에 보험을 들어야 보증서를 발급해준답니다.
(수출입은행에 보험료 또 납부 해야됨)

보증서를 발급 받아 오도록 합니다.
(신용보증에 보험료 납부는 물론이구요)

신용보증기금에서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수출입은행에 보험을 들어야 보증서를 발급해준답니다.
(수출입은행에 보험료 또 납부 해야됨)

여기서 두군데 내는 보험료만 은행이지와 맞먹습니다

4. 어렵게 대출 받고 나니 기업신용등급이 내려갑니다.

개성공단의 위험성 때문 이라더군요
가기전 신용등급 bb+ 에서 b- 까지 점차 내려 갑니다. 당연히 이자율 올라 가지요

5. 자진 철수 하니 보험료 지급 대상 아니랍니다.
당시에는 3개월 조업을 못하게 되어야 보험금 지급 되었습니다.
나중에 1개월로 조정 되었구요

결국 유도탄 날라다니고 25명 우리 직원들 불안해하고 ..한푼도 못건지고 그것도 철수 한다면 위해 당할까봐 몰래몰래 자진철수 했습니다.

그러니 국가혜택 받았다는 ..개성공단업체들 돈좀 벌었지 않느냐하고 언젠가 티비조선에 나와서 정동영씨 헛소리 하는데 흥분되서 응급실 갈뻔 했습니다. 제발 현혹 되지 마십시오.

이렇게 개피보구 철수하고 하소연도 보상도 못받은 이런 힘없는 놈이 감히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거짓말도 힘있는 사람들이나 하는것이지요. 
“서승만-개성공단 입주업체 대표였던분의 주장"
"절대 개성공단 재개하면 안된다"

문재인제발 경거망동하지 말라!!간곡히 충고 한다.

*망하고싶으면 투자하슈*개성공단 재개 절대 해서는 안되는 이유

애국 동지 여러분, 페친님들 아래 링크로 가셔서 찬성 눌러 주세요.

택도 없는 개성공단 재개를 넘어 확장 한다니 문재인은 현실을 무시한 몽상가일뿐입니다. 개성공단 막아야 합니다.

이웃 블로그/푸른솔


                                   


 

미국에서 1년에 4번씩 발행되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패션 잡지 Teen Vogue“Anal Sex: What You Need to Know(항문성교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들)”이라는 특집 기사를 게재하였다.

 

남자와 여자의 생식기를 그려 넣은 사진과 함께 항문성교를 하는 구체적인 방법과 그 즐거움(?)을 설명하는 상세한 글을 올려놓았다.


 

한참 성적인 호기심이 강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잡지에다 항문성교의 구체적인 방법과 그 쾌락을 찬양하는 글을 올려놓음으로 청소년들이 동성애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세대를 책임질 청소년들에게 항문성교(동성애)를 권장하고 가르치고 있는 이 세대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한(필요한) 롯의 때가 아닌가?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 예레미야 -


북한이 평창올림픽에 선수단을 비롯, 응원단, 예술단, 태권도단, 참관단 등 대규모 인원을 파견하기로 했다. 이미 충분히 예상됐던 일이다. 평창올림픽 참가는 북한에게 잃을 것은 하나도 없고, 얻을 것만 잔뜩 있는 최고의 ‘꽃놀이패’이기 때문이다. 

 
평창올림픽 참가로 북한이 얻는 이득은 계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대하다. 북한은 이미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과 2003년 대구하계유니버시아 대회에서 소위 미녀응원단 파견으로 재미를 본 전력이 있다. 
돈 한푼 안들이고 남의 잔치를 자신들의 체제 선전무대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번 역시 대규모 응원단과 예술단을 통해 평화공세를 펼치며 독재자 김정은의 위상강화와 체제 선전의 장으로 톡톡히 활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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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에 대한민국과 북한이 동시에 입장 하는것을 환영한다  그런데 문제는 개막식 입장식에 대한민국  국가의 상징인 태극기를 들고 입장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기를 들고 입장을 한다고 한다

평창동계올림픽 주최국가인 대한민국 국가를 상징하는 태극기를 적국인 북한때문에  태극기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북한에게  굴복 또는 항복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한반도기는 도대체 어느나라 국기라는 말인가?

주최국가인 대한민국이 3수 끝에 어렵게 유치한 평창동계올림픽을 북한 때문에 태극기까지 포기 할 것이 아니라 양국의 국기인 태극기와 인공기를 각자 들고 입장할 것을 강력히 제안한다 

2018년 1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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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국인 손종익


 


                사진: USA아멘넷 기사 중

 

 

새해에 새 소망

 

벽에 뎅그러니 매달린 한 장의 달력, 그것도 마지막 날짜를 의미하는 숫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괜스레 마음이 착잡하다. 엊그제가 희망찬 1월이었고, 마음마저 한껏 부풀어 있었던 것 같았는데 무엇하나 제대로 이루어 놓은 것도 없건만, 벌써 이 한해도 이렇게 떠나겠다며 속절없이 고별인사를 건네고 있는 것이다.

 

아쉬움 반, 후회 반, 알 수 없는 초조함 같은 것이 등줄기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느낌이 싫어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 마지막 남은 그 한 장을 북~ 뜯어내고 새로운 숫자가 반짝이는 새 달력으로 바꾸어 걸고 나니까 기분이 한결 산뜻해진다. 낡고 찌든 해(), 가라! 이제는 대망의 새해가 눈앞에 펼쳐졌다!!

 

지난해를 돌이켜 보니 글자 그대로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한해였다. 개인적으로 지난해처럼 폭풍의 눈 속을 통과하듯 어렵고 힘든 일들을 많이 겪었던 시기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해가 갈수록 사람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평화는 오지 않고, 희망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멀리 달아나는 쌍무지개와 같은 것일까? 열심히 사느라 살았건만 만나는 사람마다 한결같이 살기 어렵다고 아우성이다. 세상이 그만큼 각박해지고 있다는 뜻일 게다.

 

해 아래 새것이란 없다. 세기를 두고 가고 오고, 오고 가는 해(), 숫자적 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새해(New Year), 그 속에서 세상 모든 사람이 걸어간 그 길을 우리도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문제 속에서 우리 조상님네들은 문제와 함께 허우적대다가 모두 각기 자기 갈 곳으로 떠나갔다. 우리라고 하여서 다를 것이 뭐가 있을까? 새해에도 우리가 지나는 길에 예기치 못한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에 차이는 돌멩이처럼 수두룩 널려 있을 것이고 때로는 우리가 감당하기조차 버거운, 마치 거대한 바위 같고 태산 같은 시련이 앞을 가로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고난과 역경도 상대적인 것, 우리의 삶이 비록 고달프고 어렵다고 하여도 큰 재난을 당한 필리핀 국민만큼이야 어렵겠는가? 우리가 아무리 힘들다고 하여도 전쟁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중동 지역의 백성만큼이야 어렵겠는가? 아무리 고통스럽다고 하여도 가족을 호스피스에 보낸 분들만큼이야 고통스럽겠는가? 누군가 말했던 것 같다. 인생은 고해(苦海)라고나만 당하는 고난이 아니란 것이다.

 

새해라고 하여 다를 것 없이, 어차피 걸어야 할 길, 피할 수 없는 어려움이라면,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승리의 방법을 배우는 것이, 가만히 앉아서 오지도 않을 유토피아를 바라다가 절망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지혜로운 사람이 아닐까? 하늘이 어둡고 캄캄한 때일수록 밝은 등불이 필요하듯, 다가올 캄캄한 세상을 이기고 믿음의 길에서 승리의 개가를 부르려면 새해는 새 소망으로 가슴 한가득 채워야 할 것이다. 잠시 있다 사라질 이생의 안목으로서 희망이 아니라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참된 소망, 새 소망으로 무장해야 한다. 이런 암흑기에 새 소망이라니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새 소망이란 과연 무엇이 있을까?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새해 새 소망으로 삼으라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딤전 1: 1)

 

여기에서,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라고 바울 사도는 분명하게 말씀해주고 있다. 성도에게 소망이 가장 절실한 때는 안일한 때가 아니라 극한 환난을 통과해야 할 때이다. 믿음의 장이라고 하는 히11장을 보면, 구약 시대의 성도들이나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으로 삼고 온갖 고난과 고통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믿음의 길을 지켰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삶과 현대 신앙인들의 삶을 비교해 보면 우리가 얼마나 다른 길, 곁길, 어그러진 길로 달려가고 있는지를 알고 놀라게 될 것이다. (11: 12: 12-13절 참조 )

 

믿음의 선진들은 신앙생활 그 자체가 목숨과 맞바꾸겠다는 단호한 의지와 결단 없이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들은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살 소망마저 끊어졌으나 그럴수록 더욱 그들의 소망은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했다. 세상은 그런 그들을 싫어하였다. 세상은 그들의 신앙을 포기하도록 하려고 온갖 악형의 고문으로 핍박하고 저주했다.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고 목 베이는 참형을 당했다. 그러나 그들은 악형을 견딜지언정 비굴하게 세상이 내어 거는 조건을 수락하거나 석방운동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담대하게 찬양하면서 죽음을 맞이하였던 것을 역사가 증명한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건강한 몸으로 이렇게 좋은 환경에 살면서도 어렵게 느껴진다는 것은 어쩌면 그것이 실제 어려움의 무게일 수 있고 어쩌면 신앙의 성숙도까지 갈 것도 없이 정서적, 인격적 소양의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사람이 나이가 한 살씩 더 먹어갈수록 느끼는 것은 세상만사 별것 아닌데 작은 이권에 아웅다웅 잡아 죽일 듯 목숨 걸고, 진리 수호란 명제 아래 신의를 저버리기를 무 자르듯 쉽게 하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일이 허다한 것을 보면서 이것이 과연 신앙인의 길이란 말인가씁쓸해진다.

 

또 생각해보니 우리가 젊어서는 작은 여드름 하나에 웃고 울고 한 것이다. 그때는 그만큼 순수했었거나, 아니면 젊은 시절은 그만큼 평화스러운 시기였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여드름 같은 작은 문제 따위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닌, 극히 작은 문제(miner things)란 것을 알게 된다. 날마다 눈앞에 닥쳐오는 문제들이 그만큼 더 무겁고 큰 것들이기에 그러하다. 우리가 문제 앞에서 크게 당황하고 고통스럽게 여기는 것은 고난의 실제 무게일 수도 있고 어찌 생각해보면 너무도 안일하게 사는 탓에 느껴지는 성숙하지 못한 감정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현대 신앙가들의 실상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현대인은 초대교회 성도님들과 같은 불같은 시련은커녕, 기복신앙으로 길들어져 편하게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착각하고, 십자가의 길이란 믿음의 선조님들의 전설같은 이야기일뿐, 십자가는 그저 하나의 장식 목걸이 정도로 착각하는 우리네들, 내가 잘하면 복 주고 내가 잘못하면 당장에 저주하는 하나님, 불교의 인과응보 사상을 짬뽕시켜서 헌금을 강요하는 목사란 직책을 남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하늘에서 죽어서나 만나보는 염라대왕쯤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초대교회 성도들과 비교하면 지금 우리 믿음의 길은 어떤가? 얼마나 나약하고 얼마나 안이한 삶을 추구하는지, 넓디넓은 길, 그것을 믿음의 길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나 않은지, 지금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의 끝(last destination)은 어디가 될 것인지, 내가 가는 이 길의 끝이 어디로 연결돼 있는지, 한 번쯤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여러분과 내가, 오직 우리 구주 예수님 한 분만을 절대 소망으로 삼고 환난 중에서도 담대하고 어려움을 당하여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면, 바른길, 옳은 길, 의의 길을 잘 달려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전에는글쎄다.

 

새 소망을 바라는 이는 위엣 것을 찾는 사람들이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로새서 3:1)

 

본문에서 우리(성도)가 나가야 할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여기서 위엣 것을 ‘찾으라, 찾는다.’라는 말의 원어는 제테오이며 그 뜻은 ‘탐구한다, 얻기 위해 애쓴다, 열망한다.’ 이고, ‘생각 한다.’라는 것은 원어로 프로네오, 즉 ‘마음에 둔다, 마음을 기울인다.’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무엇을 찾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에다 마음을 기울이는지 비례하여 그 사람의 길이 정해질 것임이 틀림없다.

 

예를 들자면, 날마다 생각하는 것이 향락이면 향락의 길을 택할 것이다. 다윗이 위대한 왕이었지만 남의 아내 밧세바를 생각하다가 금지된 성()을 취하고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그녀의 남편이자 자신의 충성스런 부하 장수, 우리아를 전쟁터로 내보내 죽이는 비행을 저지른다. 삼손은 나실인이었으나, 이방 여인이요, 기생이었던 ‘들리라’를 마음에 두고 날마다 생각하다가 두 눈 모두 빼이게 되었고 결국 하나밖에 없는 목숨마저 잃게 되었다.

 

그러나 매일같이 생각하는 것이 위엣 것, 위에 계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얼굴빛을 구하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형이상학적인 삶, 믿음의 삶, 역동적인 삶, 창조적인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저 위에는 우리의 산 소망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시며 응원해주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는 사람에게 소망이 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Your word is a lamp to my feet and a light for my path. ( 119: 105)"

 

세상이 캄캄하다고 불평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캄캄함을 밝혀줄 빛(등대)에 기름을 채워야 한다. 불평한다고 키를 한 자라도 더 크게 할 수 있는가? 없다. 불평보다는 차라리 해법(solution)을 찾아라.

 

D.L 무디의 성경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부흥사 "D.L 무디", 그의 성경에는 구구절절 색연필로 그어져 있었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곳곳에 [T.P]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고 하는데, 그 의미는 "Tried and Proved(시도해 보았고, 입증되었다)"라는 뜻이다. 무디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어느 말씀, 어느 구절 하나라도 생활 속에 적용될 수 없는 말씀이 없으며, 그 말씀은 곧 그대로 그에게 생명과 능력과 광명이 된 것을 체험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우리 주위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그 말씀이 하나님 약속의 말씀인 것을 믿는다고도 한다. 그러나 실상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 약속의 말씀이 뿌리내리고 열매를 맺을 자리가 전무함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한 번 생각해 보자, 여기, 유리알처럼 맑고 깨끗한 시냇물이 내 앞에 시원한 소리를 내면서 흘러가고 있다고 하자. 나는 목이 마르다. 시냇물이 제아무리 시원하게 흘러가고 있지만 내가 그 물을 떠서 내 입으로 마시지 않는다면, 그 시냇물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처럼 하나님 약속하신 그 말씀이 내 마음속에 전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성경 말씀이 그저 먼 이야기, 하나의 고서(古書)로 느껴질 뿐이라면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도 그 약속 중 어떤 것 하나라도 이루어 주셔야 할 아무런 의무 또한 없으시다. 그렇지 않은가?

 

가시덤불 같은 재리의 염려, 돌짝 밭 같이 딱딱한 마음, 이런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모두 막혀버렸으니 말씀의 능력도 죽은 것이다. 그 약속이 효력발생 무()가 되고 만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어려움을 이길 수 있을까? 안타깝기 그지 없다. 새해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속에 먼저 뿌리내리고 자랄 수 있도록 말씀에 착념하는 것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내가 먼저 인내의 말씀을 지키려는 결단 없이는 환난날이 와도 그 환난을 이길 힘을 공급받을 수 없다고

 

“네가 나의 인내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3: 10절 말씀)

 

 

결론적으로 정리하자면, 모진 겨울은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이다

 

초저녁 어스름 달빛은 그래도 운치가 있다. 그러나 새벽 동이 트기 전의 짙은 어둠은 무섭기까지 하다. 어찌보면 인생은 늘 고해 속에서 고통 받는 중, 내일이면 오늘보다 나은 날이 오겠지, 기대하다가 오지 않는 유토피아로 점점 더 짙은 절망감에 시달리다 끝내 영원히 사그라져 버리는 별똥별 같은 것이 아닐까?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현명한 독자님들은 지금쯤 결론을 이미 내리고 계실 것도 같다. 한 마디로, 죄지은 인간, 그 자체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태어나서 죽을 힘을 다하여 달려가다가 어느 한순간에 이르면 시커먼 흑암 같은 병마가 생을 덮치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영원한 지옥 형벌로 이어지는 참담한 것이 죄지은 인생의 결국이란 것이다!!

 

뭔가 새로운 소망(희망)을 가지기 전, 인생은 어렵다. 그런데 새로운 것이 뭐가 있을까? 해 아래 새것이란 없다. 모든 사람이 간 그 길을 우리도 가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인간)에게는 정말 희망이란 없는 것일까? 그 답은 미안하게도 인생에 희망이란 없다.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하여서, 나는 염세주의자도 아니고 인생의 깊이를 논하는 철학자도 아니다. 다만, 인생이란 무엇인가? 잠시 생각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일반적인 생각을 체계화시켜 본 것뿐이다.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면 모르겠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문제 투성이인 인간이 보일 것이다. 지식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고민은 더 많아지고, 그리고인생의 결국은 슬픔과 고뇌뿐임을 고백하게 될 것이니까!

 

성도라고 하여서 다를 바가 없다. 인생의 가는 길은 언제나 화창한 봄날만 있는 것도 아니고 노력한 만큼 열매를 풍성하게 거두어 드릴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주님의 신부, 주님께로 사랑받는 자요, 주님이 어여삐 보시는 성도들에게도 겨울의 혹한 같은 시련과 고통을 만날 수 있지만 그런 때도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 나에게 닥쳐온 이 모진 겨울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새봄이 오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내면을 갈고 닦고 착실히 준비하는 기간임을 믿으며, 다가올 새봄(그리스도)을 바라보고 소망하며 힘껏 믿음의 발을 내디뎌야 한다.

 

성경에서 1518번이나 재림을 약속하고 있으니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신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산 소망이시며 우리가 품어야 할 새 소망이 되신다. 온 천지가 둘러 꺼지고 멸망한다고 하여도,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 있는 사람은 소망이 있다. 주 안에서의 소망은 잠시 있다 사라져버릴 세상적 희망과는 다르며, 이 땅 위에 속한 것이 아니기에 든든하고 성령 안에서 영원히 보장된 소망이기에 확실한 근거가 된다.

 

날마다 주님의 뜻을 바라면서 그 얼굴빛을 항상 구하며 그분이 기뻐하시는 사랑 안에서 행하는 길을 택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생의 푯대로 삼고 달려가는 사람은 새해는 새 소망으로 채워지는 넉넉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소망되신 주님을 바랄 때 우리 눈앞에 펼쳐진 2014, 이 한해를 승리하는 해로 이끌어 갈 수 있다고 확신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로새서 3: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딤전 1: 1)

 

출처: 목양연가/ 글: 최송연의 신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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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끈따끈한 글입니다^^

정은이가 핵포기하면 적화통일 입니다
정은이가 계속 핵공갈이면 북한체제 괴멸 대한민국 해방입니다

저들의 평화통일 현혹에 속지 맙시다^^

문죄인이여! 마지막 죽음의 생일잔치 거창하게 축하 하시라!^^

주사파는 천민 사회주의, 천민 공산주의 사상이다^^

아무리 같은 민족이라 하더라도, 자유 민주주의의 이념과 공산주의 이념은 공존할 수 없고, 서로 죽이고 죽여 상대방을 죽여 제거하고 힘으로 제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명백하다

내 나라,  내 가족, 내 자신이 살고자 하면 주사파를 척살하라.

이념에는 동족, 그런 거 없습니다. 같은 가족이라도 이념이 다르면 적입니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야하는 전쟁 중 입니다

저들은 대한민국에 당당하게 선전포고를 하며 대통령을 포로로 잡아 미완의 전쟁을 마무리 지으려 하고 있습니다. 겁쟁이 정치인들이여! 그대들이 나라를 살리겠느냐? 그대들은 이래나 저래나 양쪽으로 죽게 되어 있소이다?

반벙어리가 억울합니까? 차라리 반신불수가 되었더라면 저들이 살려둘지도 모릅니다?


 
지인이 나에게 질문 합니다:
왜 어찌하여 빨갱이에 그토록 극단적으로 반응하느냐?

대답합니다:
나의 친부가 1.4후퇴 때에 부역에 연루되어 경찰서에 끌려가 소식도 없이 죽음을 맞이하고 나는 출생 3개월만에 아비없는 자식이 되었습니다.

나는 태생적으로 종북 빨갱이야만 하는 천민 소작인의 자식었습니다.

제가 장성하여 하나님을 알게되며 공산주의 사상과 주체사상이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유물론 사상, 인본주의를 근본으로 하는 악한사상임을 알게 됩니다. 설마하는 우익으로부터 극단우익분자로 매도 당함을 기뻐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나는 한분 하나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으며 그 분만이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유일하신 분으로 믿고 신앙으로 고백하는 기독교 장로 입니다

반 종북주의는 나의 신앙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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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설교를 들으러 올까?

참된 설교를 하면 사람들이 온다는것 그것도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언제나
그러했다는 것을 저는 역사적 증거를 통해
이미 입증한바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설교를 하면 반드시 사람들이 온다'라고
믿지 못한다는것은 결국 성령과 그분의 역사를
거의 배제한채 이 문제 전체를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오랜시간이 걸릴수도
있으며 실제로도 오랜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설교는 하나님이 친히 주신 방법이기에 효과가 있으며 열매가 있고 영광이
있다는것 반드시 그렇다는 것이 저의 전체적인
논지입니다
우리를 설교로 부르시고 우리에게 설교를 맡기신분이 하나님이시니 그가 친히 그것을
높이실 것입니다

결국 불완전한 설교관을 가지고 불완전한 설교를 한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다루어온
대부분의 문제들을 불러일으켜왔으며
믿는자들이 근심하고있는 어려운 상황을
몰고 왔습니다

설교와 설교자 ㅡ마틴로이드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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