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제자를 부르심-
구자준 목사 2016. 12. 27. 05:58-열두 제자를 부르심-
마태복음 10장
1.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3. 빌립과 바돌로메,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4. 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여담입니다만 필자는 40년 전, 군대에 있을 때 삼국지(박종화 역)를 접했습니다. 작업하다가 다쳐서 야전병원에 입원을 했었는데, 그 때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읽었지요.
도원의 결의를 통해서 유비와 관우(관운장), 장비는 삼국지의 한 축을 담당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그들이,
위 나라 오 나라 그리고 변방으로 밀려난 촉 나라의 삼분지계를 다룬 삼국지에서 중심 인물로 등장하는 이유는,
역사의 주인공이란 중원을 차지한 인물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권력을 지향하는 자들은 영원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될 것이지만,
비록 중원을 차지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대의명분에 충실한 자를 역사가 인정해 줄 것이란 인식을 갖게 된다면, 역사로부터 바르게 배우게 될 것이란 말이지요.
역사란 미화한다고 해서 좋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왜곡된 역사기록은 자손대대로 해악을 끼칠뿐입니다.
있는 그대로 드러낼 적에 후대가 역사로부터 바른 교훈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바른 역사서술이란 역사를 단순히 연대기 순으로 나열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읽는 이들로 하여금 사기를 진작시키고 또한 역사의식을 고취시켜서 각자가 역사의 일원임을 자각케 하는 것이 좋은 역사기록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잘난 자, 있는 자, 많이 배운 자들을 제자로 삼아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지 않으셨습니다.
12사도를 살펴보는 것으로 마태복음 10장을 시작합니다.
(이제사 겨우 8장부터 시작해서 10장에 왔군요. 세월은 흐르는데 필자의 붓끝은 느리기만 합니다. 힘을 낼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열두 제자를 부르신 이유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가진 신학(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아는 걸 '신학'이라 합니다)적 의미가 신약에서도 이어지고 있음을 나타내고자 함에 있습니다. 구원역사의 연속선 상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일전에 말씀드린대로 열둘(제자)은 만수(꽉 찬 수)입니다. 만민에게,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어, 모든 믿는 자들의 대표성을 지니는 숫자입니다.
신약에서는 영적 이스라엘을 나타내는 상징성을 띤 숫자이지요.
요한계시록을 보면 12와 12의 배수들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4:4절 이하, 7:4, 14:1, 21:12-17, 21, 22:2)
7장 4절에 각 지파에서 인맞은 144,000을 풀어보면, 12×12=144 ×1,000(10×10×10) =144,000이 되지요. 10의 세 제곱인 1,000은 충만 그 자체를 나타냅니다.
이는 환란에서 나오는 큰 무리를 말합니다.
인맞은 자(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따라 믿음으로 화합한 자)는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입니다.(계7장 9절)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잘 몰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구원받는 자의 수가 매우 적다고 말합니다.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의 안위를 놓치고 있는 자들이 대개 그렇게 주장합니다만, 그렇다면 그들 자신도 구원에서 제외될 확률이 높습니다
말씀을 한꺼번에 다 전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차근 차근 풀어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필자의 글을 계속 읽는 분들에게 복음의 안위가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을 품고 성경을 읽음과 함께 쉬지 않고 기도함으로써 성령, 곧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능력을 받아 복음의 증인이 다 되시기를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온전히 품기까지는 고난의 터널을 통과해야 합니다.
때로는 가난하고 병들고 힘들고 지치고 욕먹고 핍박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점차 주님의 마음을 품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사도들은 어떤 자들이었을까요?
살펴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지간으로서 어부지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어부 출신입니다. 품꾼을 부리는 것으로 봐서는 꽤 규모가 있는 어업을 영위한 것같습니다.(마가복음 1장 19-20절)
그물을 던지고 그물을 깁고... 생업의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마태의 경우도 세관에 앉아 있다가 부름을 받았지요.
빌립과 바돌로메- 역시 갈릴리 인근 출신입니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더라.
신약의 기록을 통해서 좀 더 자세히 제자들의 면면을(일부만) 살펴보자면,
안드레와 빌립은 헬라식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헬라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안드레는 어린 아이같은 순수한 면을 보입니다. 반면에 빌립은 상당히 치밀하고 계산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요한복음의 그들에 대한 기록이 그렇더군요, 필자가 보기에는.)
가나나인 시몬은-열심당원입니다. '가나나'는 아람어식 표현이고요, 히브리어로는 제롯(당)입니다. 유대 독립을 위해 활동한
과격한(무력도 불사한) 당파에 속한
자였습니다.
가룟이란 지명을 따라서 불리운 유다도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에 대해서 더 이상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제자로서 직분을 감당치 않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사명을 감당한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에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고자 해서 바벨탑을 쌓았던 창세기 11장의 기록은 복음시대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는 구호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많이 모여서 높고 큰 건물을 건축하여 이름(목사를 중심한)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면 살 수(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혹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큰 교회일지라도 흘러가는 역사 속에서 소리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죽기까지 충성한 사도들이 이름을 남기고자 했습니까. 아니면 어디 큰 교회를 이루고자 했습니까.
온 세상에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다가 다 순교했었지요. 온 지면에 흩어져서 복음으로 생육번성하여 새로운 인류가 많아지게 했던 인물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교회는 다양성 가운데서 일치를 추구해야 합니다. 현대의 에큐메니칼 운동인 wcc를 인정하자는 말이 아니라, 성도들 간에 다름을 인정하면서 믿는 자로서 상대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낮아져서 서로 섬길 때 '우리는 하나'임을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은 면면이나 성품, 그리고 삶의 정황은 각기 달랐을지라도 부름받은 자로서 주님 안에서 하나였습니다.(요한복음 17:21-22)
하나님 나라는 가루 서말 속에 퍼지는 누룩과도 같습니다. 각자가 삶의 현장에서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면서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가정이나 일터에서 보냅니다.)
듣는(읽는) 말씀이 삶 속에서 체화되는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되시기를 소원하며 축복합니다.
*1세기의 세속역사로 보자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자들이었지만, 지난 이 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첫 물줄기를 형성한 자들이었습니다. 생명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시원(시작의 원천)으로 해서 말입니다.
글/구자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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