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信仰人), 아나키즘(Anarchism) 없다.

최송연의 신앙칼럼 2010. 1. 24. 11:55


필자는 며칠 전, 우연히, 한 사이트에 들어 가볼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곳에서도 이름만 대면 알만한 한 여류 칼럼니스트가 필자의 지난 칼럼 글을 허락도 없이 가져다 삽입시켜놓고 “신앙인의 아나키즘”이란 거창한 제목과 함께 사정없이 난도질(?)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이유인즉슨, 송구영신 예배에 성경구절을 뽑아 바구니에 담아 놓고 성도들이 개별적으로 집어 낸 그 말씀이 구약의 제비뽑기와 같은 형식이며, 그 제비뽑은 말씀을 일 년 동안 개인과 가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을 타당하다고 본다는 것이고, 그것을 ‘샤머니즘적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비본질적이며,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은 편협한 사고를 가진 자요, 지식적으로 많이 부족(?)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교회를 허는 자다라고까지 심하게 몰아부치는 그런 요지와 함께, 이런 태도가 바로 '신앙인의 아나키즘’, 곧 신앙의 무정부 상태’로 본다는 것이다.

덕분에 그 칼럼니스트의 그 글이 적어도 그곳 사이트에서만은 최고 인기 뉴스로 급부상하는 영예(?)를 누리고 있었다. 어떤 마음에서 그런 터무니 없는 발상을 하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큰 관심이건 작은 관심이건 관심을 준 것은 사랑이고, 그 받은 사랑을 헌신짝처럼 내어 던지는 그 마음이 안쓰럽기 그지없다. 앞에서 당당히 말하지 못하고 뒤에서 눈 흘기는 처사나 행동은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바른 자세가 아닌 것 같아 입맛이 씁쓸한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것 때문에 이 글을 정리하는 것은 결코 아님을 주님 앞과 독자들 앞에서 밝히며 확실히 해 두고 싶다.

다른 이의 말이나 글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것은 창의적이랄 수도 없고, 그런 사람의 마음속에는 대개 상처가 많다는 것이 심리학적으로 이미 증명된 사실이기에(꼭 그 칼럼니스트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대체적으로 그렇다는 것임), 그런 사람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먼저 불쌍한 마음을 가지고 사랑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옳지 않은 말이나 폄훼하는 글은 염두에 둘 가치조차 없기에 그냥 무시하고 지나쳐 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오늘 아침 기도 중에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 주셨다. 비본질을 본질인양 말하는 것은 뒤로하고라도 우선 복음을 뒤틀어 억지 주장하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그 사람의 영혼 뿐 아니라 그 글을 읽는 다른 사람의 영혼에도 문제를 안겨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주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우리 모두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안 주시기를 바라고, 이것을 기회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바른 지표, 잣대인 하나님의 말씀 위에 내 신앙이 올바르게 잘 세워지고 정립되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다.

1. 말씀 제비뽑기는 신 구약 그 어느 곳에도 찾아볼 수 없다.

그분이 제비뽑기에 비유하면서 증거로 든 성구들은 꽤 많았다. 아래 그분의 글을 잠시 인용해 보면(그분이 먼저 시도했으니, 이해하실 듯…^^), 편의상 괄호로 표시한다.

(속죄 제물 결정등(아사셀 염소 결정: 레16:7-10) 이스라엘의 민족적 중대사를 판결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었음을 보아 제비 뽑기의 도구란 해석이 유력시 되고있다. 제비 뽑기는 그 후에도 하나님께서 출애굽 후 가나안 땅 분배시 모세에게 명하신 것으로 (민26:52-56; 수14:2)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기업의 분배 방식이었으며, 전쟁등 국가의 대위기시 (삿1:1-3; 20:27), 범인을 찾을 때(수7:14; 삼상14:41- 42; 욘1:7), 사무엘이 사울왕을 뽑을 때등 특별 인물 선출이나 레위지파의 직분 배치시(대상24:5), 신약시대엔 가롯 유다를 대신할 사도 맛디아를 선출시(행1:26) 행해졌다. 가나안 땅 분배시 땅의 크기는 인구비례제로 정해졌으나 그 위치는 제비뽑기로 결정(민26:52-56)하게 하신 것은 특정 지파에 특혜를 주는 것을 막고, 각 지파의 기업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각 지파의 특성등을 고려하여 당신의 주권에 의해 나누어주는 것임을 드러내는 행위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 분쟁이나 시비없이 감사함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또 다윗이 아론의 자손의 두 가문에게 성소의 직임을 맡길때 제비 뽑기로 결정한 것은 각 가문의 수(數)에 관계없이 성소의 직임만큼은 동등한 입장에서 결정하도록 한 것이었다(역상24:5). 그러면 제비뽑기의 근본 정신은 무엇인가?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16:33)"는 말씀이 나타내듯 제비 뽑기는 그 결과를 온전히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돌리는 신앙에 근거한 것이다. 한편 이 제비 뽑기는 고대 근동의 여러 국가들에게서도 행해졌던 것인데 그들의 제비뽑기 정신은 운명에 맡긴다는 의식에서 출발한 것이지 하나님의 주권의식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이었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위의 성구들이 나타내고 증거하듯, 구약의 제비뽑기는 대개 인간 관계에서 다툼이나 분쟁이 없도록 하기 위한 구약 법, 그러니까, 이미 받은 하나님의 말씀중 한 법이란 것이다. 이런 구약적 법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신약에 와서는 그 모든 구약 법이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뿐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히 9:10-11절 참조) 구약의 모든 법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 몸으로 완성하셨기에 더 이상 우리 성도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구약에서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말씀은 예외가 없이 주께서 택하신 선지자들의 입으로 친히 말씀하셨다.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받는 것을 제비뽑기 한 흔적은 성경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특히, 신약시대는 성령님께서 친히 우리들 속에 임재하셔서 다스리시고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며 가르치신다. “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 14:26절 말씀).” 고로, 하나님의 말씀을 제비뽑기 형식으로 받는 것은 미신적 행위일 뿐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가로채는 월권 행위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2. 신앙인(信仰人)에게 아나키즘(Anarchism)이란 있을 수 없다.

아나키즘(Anarchism)이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무정부’란 뜻이다. 그리고 그 칼럼니스트도 분명히 그런 뜻을 알고 그 단어를 취사선택한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이 과연 성경적인가? 하는 것이고 답은 ‘No, 아니다!’이다. 신앙인(信仰人)이란 a believer(or believers)로서, 물론, 여러 다른 종교에서도 사용하는 말이긴 하지만, 여기서 그리스도를 신앙(信仰)하는 사람이란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라면 ‘아나키즘’은 분명히 잘못 선택된 단어이다. 신앙인(信仰人), 신앙생활에 ‘무정부’란 있을 수 없고, 그 단어야말로 성경과는 무관한, 극히 인본주의적 단어 선택일 뿐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말로 그럴 듯하게 포장하여 내어놓는다 하여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면, 그리고 그 글이 신앙 글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기억하고 염두에 두고 선별 사용해야 하는 용어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의 text인 성경을 근거한 용어들로 기도 중에 신중히 선택되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 말 한마디에 우리의 영혼이 죽느냐, 사느냐 달렸고, 인본주의가 인간존재의 가치를 그 어떤 것보다 우위에 두려는 이념이므로 이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의 관심을 떼어 놓으려는 사단의 전략일 뿐임을 간과할 수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오늘날의 인본주의는 모든 철학 이념 종교 사상 등을 인간 잠재력 개발의 도구로 삼으려는 의도가 있기에, 이런 인본주의에 깊이 물들게 되면,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맞춰져야 할 우리 눈의 초점(focus)이 오히려 인간의 성공, 자기존중에 돌려질 수 있기 때문에 성도가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인 것이다.

그러면 성경은 이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는가? 성경에서는 신앙인, 신앙생활, 곧 영적 세계에 있어서 ‘아나키즘(Anarchism)이란 없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영의 세계에는 ‘사각지대’마저도 없다는 것 정도는 알아야 한다. 영적 지도자라 자처하는 사람이 이렇게 인간적인 생각으로 사고하고 다른 이, 곧 그리스도의 그 흘리신 고귀한 피로 값을 지불하고 사신바 된 한 형제.자매들의 글을 자세히 읽고 소화시키기 이전에, 그 글을 부정적으로 몰아가는데만 급급하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요, 매우 유감스런 일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글을 쓰건 설교를 하건 주님의 말씀이 가는 데까지만 가고 주님의 말씀이 멈추는 곳에서는 반드시 멈추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자신의 지식 자랑이나, 인기를 위해, 혹은 다른 이를 치기 위해, 말씀을 준비하거나 말씀을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끌어다 대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며 그런 것은 인본주의적 발상이라고 볼 수밖에 없고, 그런 인본주의적 사고를 버리지 않는 한, 결코 주님께서 영광 받으실 수가 없을 것이다.

3. 신앙생활, 영의 세계에는 빛과 어두움의 세력, 두 정부가 있을 뿐이다!

신앙생활에는 빛에 속한 빛의 자녀(살전 5:5절 말씀)던지, 아니면 어둠에 속한 어둠의 자식(엡 5:8절)이 있을 뿐이다. 물론, 궁극적으로 사단도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기에 영의 세계도 단일정부, 오직 그리스도의 통치권 아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사단이 이 세상 어둠의 주관자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함이라(엡 6:12절 말씀).”

우리는 빛의 자녀요, 그리스도께 속한 영적 군대들이다. 이제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빛의 자녀답게 사는 것인가? 다른 형제 자매를 시기하여 끌어내리려는 마음을 버리고 온전한 믿음과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함으로 악한 영들을 대적하고 승리하는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살전 5: 8-9절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바로 믿는 믿음과 형제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이 세상을 정복하여야 할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극히 세상적이며 짧은 지식을 가지고 형제 치기를 계속한다면 어찌 참된 그리스도의 군사라 하겠는가?

이런 사람은, 마치, 아군과 적군을 분별하지 못하는 정신 나간 군인과 같다고 보겠다. 군인이라면, 마땅히 아군과 적군을 분별하여, 손에 들려진 총칼로 아군은 옹호하고 적군을 향해 맹공격을 퍼부어야 하는데, 오히려 뒤돌아서서 아군을 향하여 총칼을 겨눈다면 어찌 되겠는가? 그런 사람이 군인이라면 치열한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영적 전투장에서도 매한가지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사랑과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이 치열한 영적 전투장에서 참패를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성도가 나가야 할 길은 넓고 안전한 길이 아니라, 좁고 협착하며 치열한 전투장임을 기억할 때, 나는 때때로 스페인의 정복자 ‘코르테즈’를 떠올리며 도전을 받는다.

1519년 스페인의 ‘코르테즈’ 장군은 멕시코 정복의 꿈을 안고 열한 척의 배에 700명의 병사들을 태웠다. 이렇게 적은 수로 멕시코를 정복한다는 것은 보통 각오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코르테즈’ 장군은 비장한 각오로 멕시코의 베라쿠르즈 항구에 도착했다. ‘코르테즈’는 자신의 군대가 너무 적고, 모든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져 있는 것을 알았다. 이 많은 멕시코 인들은 상대로 싸워 승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고, 이 전투는 무모한 것임을 느끼게 되었다. 많은 병사들은 스페인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단호한 결단을 내려야만 했던 ‘코르테즈’장군은 육지에 상륙하자마자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타고 온 배 열한 척을 모조리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돌아온 그는 이렇게 말했다. “ 자 이제 우리는 정복을 하거나 죽거나 해야 한다. 우리는 되돌아 갈 수 없다.” 칠백 명의 병사들은 생각했다. ‘더 이상 우리는 돌아갈 길이 없다. 우리가 살아남는 길은 오직 이기는 것뿐이다. 지면 죽는다. 승리가 생명이다.’ 병사들의 눈에는 불이 튀기 시작했다. 이를 악물었다. 그들의 싸움은 목숨을 건 싸움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승리는 그들의 것이었다. 목숨을 걸고 출발한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없다. 목숨 걸고 싸우는 사람을 누가 당하겠는가?

결론적으로, 신앙생활에는 사각지대 없고, ‘아나키즘(Anarchism)’상태란 더더욱 없다. 이런 영적 세계와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분별하게 되면, 결코 형제를 시기 질투하거나, 그 형제. 자매 끌어내리기 작전으로 헛된 소모전을 벌이고 아까운 시간과 힘을 분산시키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 나라를 위해 힘을 합쳐 구령 사업에 박차를 가해야 할 영적 지도자라 자처하는 사람이 형제.자매 치기에만 급급하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가르켜 과연 빛의 자녀라 말 할 수 있겠으며, 그리스도의 군사라 말 할 수 있겠는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라면, 그 마음이 비록 순간적이었다 할지라도 그 순간만은 어둠의 세력자 사단의 조종을 받는다는 것이고(마 16:22-23절 참조), 사단의 조종을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 자신에게나 타인에게 아무런 유익 없고, 우리 주님 편에서 보면 큰 손실이기에 속히 돌이켜 회개해야 된다.

고로 말세지말을 살고 있는 우리 성도는 이 악한 시대에 선으로 악을 이기는 싸움,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늘 깨어서 기도하며 자기 자신 속에, 인본주의적 사고나 육신의 생각들이 숨어 있는가 살피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자를 것은 잘라내고 걸러낼 것은 걸러내고 빛의 갑옷으로 재무장 해야 한다. 우리 성도가 자신을 이기고 승리하는 비결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를 굳게 믿는 믿음 뿐이며, 또한 신앙생활의 길에서 적과 아군을 잘 분별하여 적은 힘써 대적하고, 형제. 자매이면, 그가 비록 나와는 약간 다른 견해가 있드라도 그것이 말씀에서 증명하는 일이면 서로 격려해 주고 내 몸같이 서로 사랑하며 주님의 깃발 아래 굳게 뭉치는 것 뿐이다. 그런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최후 승리를 보장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딤후 2:3절 말씀).”"저가(예수 그리스도)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4-26절 말씀).”


아멘넷, 별똥별/최송연 칼럼 글

'최송연의 신앙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빔밥  (0) 2010.02.20
적그리스도, 그 서곡(序曲, overture)  (0) 2010.02.13
송구영신(送舊迎新) 예배, 그 허와 실  (1) 2010.01.19
처녀들... ...  (0) 2009.12.01
피그말리온(Pygmalion) 효과  (0) 2009.1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