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送舊迎新) 예배, 그 허와 실
최송연의 신앙칼럼 2010. 1. 19. 16:05
“좋은 글 감사합니다. 송구영신 예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질문에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아래 서 목사님의 말씀에 힘을 받아 질문 드려봅니다. 송구영신 예배도 세시풍속의 또 다른 이름이란 생각이 스쳐서요.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것은 바울 사도가 기울인 노력을 헛되게 하는 것이란 말씀도 생각이 납니다.” 지난 칼럼 글 아래 어느 독자가 남긴 질문이다. 참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필자가 보고 느낀 점도 있고 하여 함께 송구영신예배의 그 허와 실을 잠시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란 생각에, 성령님의 조명하심으로 무리없이 이해되고 나누어졌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정리해 본다.
부정적 견해:
송구영신(送舊迎新)예배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세계 역사를 살펴볼 때, 다른 나라의 성도들이 송구영신 예배를 드렸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만 행하여지고 있는 특이한 현상인 것 같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처음 시작은 글자 그대로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면서 그 시간을 주님께 드리자는 좋은 취지로 생겼을 것 같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마음을 이용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려는 상혼, 그동안 무속신앙에 젖어 살던 우리 민족들이기에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부추기는 교묘한 악의 축이 교회 안에서도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교회에서는 해마다 송구영신 예배 때, 말씀 뽑기를 하고 있다는 소리도 들려온다. 강대상 앞에 바구니를 놓고 그 안에 긍정적이고 축복된 성구들만을 성경에서 골라 뽑아 담아 놓는다. 목사님이 예배를 인도하고 나서, 모든 성도들을 한 사람씩 강대상 앞으로 나오게 하여, 바구니 속에 들어있는 성구들 중 한 개를 집어 내도록 권한다고 한다. 그러면, 그 성도가 집은 그 성구가 곧 그 해 그 성도와 그 가정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이다!
과거 우리나라는 새해가 되면 그해의 운수를 알아보기 위해 돈이 있는 자들은 유명한 점술가들, 혹은 유명한 절을 찾아 액을 물리치는 굿도 하고, 비싼 부적을 사서 1년이면 12달 그것을 몸에 지니고 다닌다. 또 가난한 사람들은 길가에 앉아 있는 점술가들을 찾기도 한다. 그들은 그해의 운수를 적어놓은 글귀들을 바구니에 담아놓고, 잘 훈련된 새 한마리가 나와 그 사람의 운수가 담긴 글귀를 물어다 준다. 그러면 그것으로 그해 그 사람의 운수를 가름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샤머니즘 신앙에 찌든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하기 위해, 어느 머리 좋은 인쇄소에서 그런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현대 교회에서 그런 사악한 무속신앙을 그대로 흡수, 접목하여 송구영신 예배 시간에 버젓이 행하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무속 신앙의 최고 절정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 얼마나 어리석고 이 얼마나 개탄할 일인가?
성도는 날마다 성경을 읽는 가운데, 설교 말씀을 듣는 가운데, 혹은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님의 음성을 '레마'로 들어야지 제비뽑기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어떤 교회는 마지막 주일에 신년감사헌금 봉투를 두 개씩 나누어 준다고 한다. 하나는 신년 첫 주에 드리는 헌금봉투이고 다른 하나는 송구영신예배 때 드리는 헌금봉투란 것이다. 그러면서 송구영신 때에 드리는 헌금봉투에는 기도제목을 적어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일 년 동안 담임목사가 개인적으로 기도해 주겠다는 말을 첨부한다. 헌금을 내지 않으면 담임 목사가 기도를 해 주지 않는다는 것인지….
이런 경우 교회를 자기의 영달을 위하여 이용하는 무당 신앙으로 변질시킬 위험이 크고, 이런 기회를 '수입'을 꾀하는 수단으로 사용함으로 역시 기독교의 무속화를 부채질하는 부작용이 일어나 성경적 개혁신앙이 설 자리가 좁아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악한 행위를 교회에서 감행하는 한, 주님께서는 결코 그 예배를 통하여 영광 받지 않으실 것이다.
주님 앞에서 시간은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질 뿐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 90: 2절 말씀).” 이런 세계관으로 온 세상의 일들을 바라보고 이해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의 주인이시지만, 우리 이방인들에게도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 성령으로 임재하셔서 우리의 왕으로 즉위하셨고 통치하시며 다스리신 지가 이미 2009년이나 지나갔다. 이렇게 주님께서 친히 인간을 다스리시기 위해 오신 해(AD= Anno Domini)는 그때나 지금이나 영원부터 영원의 연속이다. 성도의 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혼합종교 풍토다. 주님의 교회가 더 이상 이런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내가 잘 사는 ‘넓은 길'보다는 내가 조금 어렵고 힘이 들어도 십자가의 길 "좁은 길'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긍정적 견해:
예배란 어떤 예배던지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마음,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마음이면 모두 아름답다. 절기에 얽매이거나 억지로 드리는 마음이 아니라면 송구영신 예배도 아름답다고 본다. 우리가 어떤 마음 자세로 주님께 나아가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요 4:24절 참조). 예수님을 바로 이해하고 섬기는 사람들은 송구영신 예배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변경'하여 드림으로 '시간 중심'의 송구영신, ‘절기중심’의 송구영신, ‘기복사상 중심’의 송구영신 보다는 '주님 중심'의 송구영신, 즉 옛 것을 버리고 새 것을 영접 하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 것이요,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옛 것이란 단순하지만 불변의 진리인 성경적 가르침에(고후 5:17)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한 간점선에서, 뒤돌아보며, 지난 한해를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 그리고 또 앞으로 나가야할 다른 한해에도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묵은 해의 마지막 끝자락과 새로 맞는 한해의 새벽 미명 첫 시간을 주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드려진다면 송구영신 예배도 아름다운 것이다. 예배는 언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드려지면 좋고, 그것이 형식에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면, 더 많이 드리면 더 많이 드릴수록 더 좋다.
일 년이면 열두 달 내게 주어진 시간을, 오직, 내 가족,내 육신을 위하여만 사용하는 시간으로 보내고 있다면, 우리의 예배를 흠향하시기 기뻐하시는 주님께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매일 예배를 드리면 더욱 좋지만, 그럴 여건이 되지 않는 우리다. 어느 특별한 날자, 어느 중요한 한 시간을 따로 떼내어 그날만이라도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고 구속의 은총에 감사를 드리는 예배 시간을 갖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시간은 또 절기에 얽매이는 것으로 간주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그 자체를 부정하게 생각하는 것, 역시 옳은 처사가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지난 날, 잘못 살아온 내 삶을 성찰하는 마음으로 돌이켜 회개하고 남은 여생을 주님 앞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 갈 것을 새롭게 다짐하는 각오와 연약한 나를 주님께서 도와주십시오, 서원하는 마음이라면, 송구영신 예배,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는 것 같고, 오히려 아름다운 예배가 될 것 같다는 것이,성경 말씀을 토대로 살펴본 필자의 견해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 90: 1-2절 말씀).”
아멘넷, 별똥별/최송연 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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