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그리스도, 그 서곡(序曲, overture)
최송연의 신앙칼럼 2010. 2. 13. 05:28
요즘 안티기독교인들이 세계적으로 급증, 영화, 책, 음악 등 각종 예술 속으로 파고들어 연약한 영혼들을 뒤흔들어 놓으려 하고 있다. 놀랍게도 지금 자칭 안티기독교도라고 명명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도 계속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그들은 최근 '반기련' (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이란 단체를 결성했고, 자신의 개인 호주머니를 털어 '아인슈타인'을 이용한 반기독교 문구의 현수막을 만들어 몇몇 버스에 부착시키고 서울 시내를 돌며 자신들의 입지를 굳히려는 시도로 보이는 홍보활동을 벌임으로써, 이를 지켜보던 많은 지각 있는 이들, 일부 지성인들, 그리스도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현수막을 부착한지 며칠되지 않아, 그 현수막을 내리긴 했지만, 참으로 어이없는 헤프닝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반기련에 속한 사람들은 대개 나이가 많은 누리꾼들로 구성되었고 그들 중 대다수가 교회생활을 경험했던 사람들이라는 통계가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대다수가 교회생활에서 사람에게 상처를 받고 돌아선 사람들이기에, 교회의 교리를 모두 아는 듯 큰소리치며 ‘기독교교리 분석’이란 칼럼 글을 써서 인터넷 여기저기 올려놓긴 했지만, 정작,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그들이 내세운 기독교교리 분석이란, 얼마나 비성경 적이며, 그들이 깨달았다는 인생관, 지옥관, 구원관 등등… 얼마나 무지한가, 외곡되고 뒤틀린 지론을 진리인양 기염(氣焰)을 토하는 그 저속함에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그들로서는 이번에도 아주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한 것이, 최고 지성인이요, 천재 과학자라고 세상이 인정하는 ‘아인슈타인’을 이용하면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 착각한 모양이지만, 오히려 아인슈타인의 종교관도,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기독교 교리도 확실히 알지 못한 자신들의 무지를 드러낸 소치일 뿐 아무런 효과도 설득력도 기대할 수 없었고 아까운 돈만 낭비했을 것이라는 비웃음의 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잠시 살펴보는 아인슈타인의 종교관:
얼마 전에, 약 50년 전의 아인슈타인의 편지, 그러니까 아인슈타인이 그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 한 장이, 런던의 블룸스베리 경매소에서 경매에 붙여지는 일이 있었고, 그 내용으로 인해 크게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는데, 반기련에서 그 편지 내용의 일부만 보고 아인슈타인은 무신론(無神論)자라고 결론지었던 것 같다. 그러나 관련 기사에 의하면 아인슈타인이 종교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긴 하나, 그는 종교에 대해 나름대로 긍정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 예로 다음과 같은 아인슈타인의 발언을 근거 삼을 수 있다. 그는 "종교가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에 지나지 않으며 과학이 없는 종교는 눈이 먼 것과 다름없다.." Phieippe Frank,Einstein:His Life and Time,p.285 에서 인용(바로 위의 글은 1940년에 과학,철학 그리고 종교에 관한 어느 회합을 위하여 준비한 글에서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생각을 직접 밝힌 내용이다.)는 말을 남겼고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종교에 대해 호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아인슈타인은 젊어서는 과학자라는 입장에서 철저한 유물론자였던 것 같고, 무신론자이며 진화론자인 '리처드 도킨스' 처럼, 다윈(Darwin, Charles Robert, 1809~1882)의 영향력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리고 모든 과학적 탐구를 시작하여 물리적으로만 결론을 내고 싶어 한 것 역시 사실인 것 같다. 그가 주장했던 '상대성 이론'은 일부분 종교적 관점에서 시작했지만 그런 관점조차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으며, '시간은 신(神)이 아니라 물리적 이론에 의해 규정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가 인생 후반기에 이르러 신(神)의 존재를 긍정했고, 자신의 주장 중 일부에 대해 회의심을 가졌다는 기록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아인슈타인은 1955년 사망했으며, 말년에 그의 심정이 급격히 변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어쨌거나 그가 죽음 앞에서 신(神)을 부정할 수 없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있는 사건이라고 보겠다.
따라서, 아인슈타인이 아무리 천재적 과학자라고 해도 약 50여 년 전에 쓴 그의 개인 편지 한 장만, 그것도 전체 문맥을 떠나, 어느 한 구절만 붙들고 단체의 구호로 삼아, 그것으로 세상을 미혹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는 것, 그 자체가 매우 어리석은 발상이며, 이런 저급한 행위를 하는 단체를 가르쳐 진정한 지성인들의 단체라고 인정해 줄 수는 더더욱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혹세무민하는 자들이라 지탄받아 마땅하며, 이런 정도의 수준이 반기련의 정체라면, 우리 성도들은 그런 부류나 단체의 움직임은 별로 개의하거나 신경을 쓸 필요조차 없다고 본다.
정작 중요한 것은, 말세가 되면, 반드시, 적그리스도(anti Christ)가 출현할 것이란 예언이 성경에 기록되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근래 일어나는 이런 사소한 일들은 말세에 나타날 적그리스도, 그 서곡(序曲, overture)일 뿐, 그 실체는 아니란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예언에 관한 역대 설교자들의 관심:
현대도 마찬가지이지만, 역대 설교자들은 적그리스도가 누구이고 언제 도래하는가, 또한 이에 앞서 일어나는 '시대의 표징', 즉 자연의 대변혁, 전쟁, 전염병, 기근 및 다른 재앙에 대한 것은 어떤 것인가? 시대별로 따라 일어나는 자연재해와 여러 재앙들을 향한 강렬한 관심이 지속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14, 15세기에 설교자들은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적그리스도의 도래를 널리 경고했다. 종교개혁 기간에 종교개혁가들, 특히 마르틴 루터는 교황 개인을 공격하지 않고 교황제 자체를 적그리스도라고 맹렬하게 공격했다. 악이 교회의 우두머리에게서 구현되고 교황제도 자체를 '적그리스도의 몸'으로 본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 적그리스도를 강조하는 일은 점차 줄어들었으나, 최근 다시 현대 개신교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은 적그리스도를 그리스도의 주권에 저항하거나 거절하는 것, 교회와 국가의 정치권력을 신격화하는 것 등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마지막 날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을 심도높게 평가하며 주의깊게 관찰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 이유는 분명히, 적그리스도(anti Christ)란 단어와 그가 실제적으로 출현할 것을 성경이 예언해 두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예언되어진 적그리스도(Anti Christ)란?
기독교 종말론적 성구, 성경에 맨 먼저 나타난 듯한 적그리스도라는 명칭은 먼저 바울 서신서 중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에서 '저 불법의 사람'으로 암시되었다. 다음, 정확히 ‘적그리스도’란 명칭이 언급된 곳은 요1 2:18, 22, 요1 4:3, 요2서 7, )등 이며, 마지막 때에 강력한 통치자가 나타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성도들을 미혹할 것임을 경고해 주고 있다. 사실, 더 오랜 구약성서 다니엘서에서도 적그리스도의 모형이 나타나고 있다.
적그리스도에 대한 기독교의 관점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낸 바울 서신 둘째 편지)나타난 것으로. 여기서 적그리스도는 표징과 기적을 행하는 유혹자로 하나님의 영광을 차지하려는 자로 묘사된다. 또 계시록에서 적그리스도는 기적을 행하는 자, 사주자로도 나타난다. 계시록에서는 666의 표를 가진 짐승으로도 표현되고 있다.
요한 서신에서 볼 수 있는 적그리스도(이단)의 특징:
첫째는 기독론에 관한 것.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다(1요12:22, 5:1참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다(1요 4:3, 15, 5:5참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다(1요4:2참조).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 사도 요한의 반론은,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다(1요2:22, 5:1참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1요4:15, 5:5참조), 예수님은 육체로 오셨다고 하는 것이다(1요4:3, 요이1:7참조).
둘째는 죄와 구원론에 관한 것.
이단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강조하면서도 실제 생활에서 죄의 문제를 가볍게 여기고 등한히 여기도록 미혹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과 그 미혹에 넘어간 자들은 하나님의 지식을 안다고 하면서도 어두움에 거하는 행동을 하였고, 형제를 미워한다(1요3:13-19, 4:20참조). 특히, 요일2:9절을 보면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단들의 주장에 대해서 요한은 일관되게 계속적으로 말한다. 즉, 형제를 사랑하고 빛 가운데 살라는 것이다(1요2:7-11, 3:11, 4:7-21참조).
요한 서신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교훈은 기독교의 3대 핵심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즉, 신앙, 사랑, 윤리이다.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곧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며, 윤리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하는 것이며,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윤리적인 삶을 살지 않는 것은 곧 신앙생활을 못하는 것이요 잘못하는 것이다 주장한다. 이것은 비단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만을 구별해 주는 것만은 아니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과 윤리적인 삶, 즉 빛의 자녀처럼 살아가는 것과 그렇지 못한 삶, 다시 말해서, 실천신학의 열매를 보아야 하며, 그 열매들이야말로 이단들과 우리(성도)를 구별 짓는 중요한 특징이요, 바로미터가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세상을 미혹의 길, 영벌의 길로 이끌고 갈, 진짜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서곡은 이미 울려퍼졌다! 거기에 동조하는 단체인 ‘반기련’같은 단체가 결성된 것은 심히 가슴아픈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렇게까지 사악하게 된데는, 먼저 믿는 우리들의 책임이란 생각이 드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들도 처음에는 안티가 아니었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로 인해서 마음에 상처를 받았고, 목회자들 자신이 말씀을 제대로 읽지 않고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 안티들의 악성 댓글은 물론, 기독교계를 뿌리째 뒤흔들어 놓으려는 악성 댓글들일지라도 성도들이 같은 악성 댓글로 맞대응하는 것은 크게 잘못하는 것이다. 깊이 생각해 보면, 그들이 울부짖는 소리, 그들의 신음소리야말로,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주님의 고통으로 절규하시는 음성이며, 그분의 신음소리이기 때문이다.
양떼들이 흩어지고 양무리를 떠나 산으로, 들로, 이리의 발톱 아래로 떠돌아다니도록 몰아붙이는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그들 속에 너와 내가 포함되어 있다면, 그런 사람들이 바로 교회 안에서의 적그리스도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이 세상을 미혹의 길로 이끌고 갈, 진짜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서곡(序曲, overture)을 듣고 술렁이기 이전, 자신을 되돌아 보아야 한다. 이런 자세로 계속 나가다가 주님이 오신다면, 우리는 과연 그 주님 앞에서 무엇이라 말할 것인가? 우리는 그때가 오기 전, 저 흩어져서 울고 있는 양떼들의 울부짖는 소리, 고통하는 소리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돌이켜 회개해야 한다. 너와 내가 좀 더 큰 사랑으로 그들을 감싸 안아야 한다. 이것이 저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경고 소리인 것이다. 이미 울려퍼지고 있는, 안티 크라이스트(anti Christ), 그 서곡(序曲, overture), 우리 귀에 들려오고 있지 않은가?
아멘넷, 별똥별/최송연 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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