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改革), 그 시금석(試金石)
최송연의 신앙칼럼 2018. 7. 22. 22:23
고삐가 풀린 망아지 같고, 궤도를 벗어나 끝없이 추락하는 행성을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아슬아슬하고 위태위태한 기독교계의 현실이, 2000여 년 전, 아기 예수가 오시기 전의 그때 그 시대나,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지금 현 세상이나 캄캄한 암흑기에 진입한 것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곳곳에서 교회를 지탄하는 목소리 드높아 가고, 세상의 빛으로 밝게 빛나야 할 등불로서의 교회가 점점 퇴색되어 그 빛을 잃어 캄캄하여진 지 이미 오래다.
사람의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이끌기 위해 누구보다 먼저 청결하고 정직한 삶으로 본을 보여주어야 할 영적 지도자들 중, 모두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많은 사람이, 기준도, 잣대도, text도 주어지지 않았던 암흑기, BC시대, 예수님 오시기 전 약 400여 년 전 그때 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혼돈하고 공허한 길, 넓은 길, 어그러진 길로 달려가고 있음을 보면서 안타깝다. (필자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기에 더욱 안타까운 마음임을 고백한다.)
무엇 때문일까? 지금은 그때 그 시대와 분명히 다르지 않은가? 무엇보다 신구약 66권으로 잘 엮어진 정경, 하나님의 말씀이 손에 들려져 있는 축복의 시대에서 사는 우리다. 그럼에도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왜일까? 주님께서 두 번 오시기 전에 일어날 한 징조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겠으나, 더 근본적인 이유를 찾으라면, 무엇보다도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의 책임이 크다 하겠다.
현대는, 주님의 말씀을 지켜나가려는 사람들보다 물질에 마음을 빼앗겨 맘몬 신에게 절하는 종교지도자들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십일조가 무슨 축복의 바로미터라도 되는 듯, 앞에서 풍월치는 그들의 욕심은 바벨탑만큼이나 높아가더니 결국 ‘십일조 폐지 운동이 곧 개혁이다.’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오늘 이 지경까지 몰고온 것이 아니겠는가?
그뿐인가? 절제되지 못한 명예욕, 성욕, 인간의 본능으로 유혹하는 사단의 덫에 걸려서 사정없이 넘어진 목회자들이 홍수처럼 쓸려가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뒤흔들어 댄다. 또한 근세에 일어난 ‘자유주의 사상’ (자유주의 사상: 신학의 토대를 인간의 경험에 두고, 성경을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쓴 책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에, 성경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보아 성경에 나온 내용이라도 이성에 맞지 않는다면 거부하는 사상이다.)
다음은, 생의 바퀴를 돌리며 고달픈 삶을 영위하느라고 성경을 제대로 읽지 못하여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잘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 헛점을 노려서 깊이 파고 드는 이단사설이 고달프고 굳세지 못한 이들에게 유토피아를 약속하며 어리석은 영혼을 유혹하고 사냥질 해간다.
이렇게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삯군 목회자들의 횡포(?)를 견디다 못한 어느 성도님은 몇몇 자신을 따르는 성도들을 이끌고 교회를 뛰쳐나와 ‘평신도 교회’라는 새로운 개념의 교회를 세우고 자기 자신이 지도자, 목자가 되어 어두운 개신교를 바로잡아 보겠다고 외친다. 교계 지도자들이, 신학교가, 신학생이 모두 다 변질되었으니, 변질되지 않은 내가 어지러운 기성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모토는 잘못된 개신교의 시스템(system)을 갈아엎어야 한다는 굳은 의지를 불태우는 새로운 물결이다.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발상이지만, 놀랍게도, 현 교계의 지도자들에게 상처받은 수많은 지성인 성도들의 동의를 얻는 것 같고, 이 운동은 꽤 설득력을 지닌 듯, 여기저기 활화산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누구를 나무랄 수 있겠는가? 현실이 그러한 것을…
변질하여가는 현 교계의 문제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으며, 목회자, 성도들의 들어나는 비리는 암덩이처럼 퍼지고 누룩처럼 번져 모든 교계를 잠식시킬 것만 같은데, 말씀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 어떤 해결책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대안이라고 여기 저기서 내어놓는 안건들이란 미흡하기 그지없고 오히려 교계의 분열만 획책하기 딱 알맞은, 아주 조잡한 것들 뿐이다.
또 자유주의, 인본주의 사상에 젖은 사람들은 교계가 재앙을 만나게 된 원흉을 “십일조”에 두고 “개혁’이란 미명하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거나 혹은 난도질하며 폄훼하기도 한다. 이대로 더 나가다가는 우리 기독교의 밝은 미래는 기대하기 어렵다. 정말 어떤 큰 재앙이 몰아닥쳐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고 한 치 앞을 가늠하기 어렵고 두려운 현실이다.
"기독교 이대로 가다가는 안된다. 기독교계는 개혁되어야 한다”, 의식 있는 성도들의 거센 목소리가 질풍처럼, 성난 물결, 우는 파도소리처럼 이곳저곳에서 거세게 불어친다. 다 옳은 말이다, 동의한다. 아무렴, 우리가 이대로 나가다가는 안되고말고…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모두 함께 고민하며 함께 풀어나가야 할 과제가 아닌가 싶다. 먼저, 우리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는 교계 지도자들의 자질 개혁이 절실히 요구되는 현실이다. 다음은 내가 개혁하자. 너와 나 우리 모두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자. 자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엇을 개혁해야 할 것인가? 방법론이 문제다.
개혁(改革, reformation)을 먼저 알아야
“제도나 기구 따위를 새롭게 뜯어고침” 이것이 개혁의 사전적 의미이다. 잘못된 관행을 바로 잡고 잘못된 종교의 교리를 정립하는 것이라고 한다. 현실에서 개혁되어야 할 잘못된 관행은 무엇이며 우리 기독교 안에서 잘못된 제도나 기구는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알아야 한다. 주먹 구구식의 개혁, 말만의 개혁은 분란만 일으킬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금껏 우리가 무흠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굳게 믿어오던 성경, 우리 신앙생활의 잣대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 옷을 재단하는 재단사는 옷을 재단하기 전, 먼저 ‘패턴’이 있어야 하고, 건축가는 빌딩을 짓기 전 ‘조감도’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세상 물질 세계에서도 무엇인가 하려고 하면 그에 합당한 ‘패턴’이나 ‘조감도 (architecture)’가 필요하다. 하물며 사람의 영혼을 바른 길로 이끌자고 호소하는데 그만한 ‘조감도’ 나 ‘잣대(Cannon)’가 없이 개혁하자고 목소리만 높인다고 되겠는가? 이런 말이다.
게다가 완전무결하다고 할만한 ‘척도’요 ‘잣대’(Cannon)이며, 인생이 나가야 할 여정의 지도(map)며, ‘조감도(architecture)를 훼손시키고서야 어떻게 제대로 된 개혁이 이루어질 수가 있다는 것일까? 변질과 개혁을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현 교계의 제도에 문제가 있는가? 그것도 아니다. 제도, 시스템(system)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개혁교회는 거의 완벽한 수준이다. 우리 개혁교는 그리스도의 피를 기초로, 무수한 믿음의 선조들의 피흘린 발자취 위에 세워졌고, 오랜 세월을 두고 내려오면서 정과 반을 거쳐 오늘에 이른, 그야말로 더할 수 없이 멋진 교리와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기를 두고 흘러넘치는 아름답과 완벽한 생명을 소유한, 자랑스런 종교라면 종교인 것이다. (실상,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산 생명 그 자체가 아니던가!)
성도의 삶이 변화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지, 그 맛이 변질하면 안되는 것이건만, 성도의 삶이, 종교지도자의 신앙인격이 타락하고 변질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몇 구절을 변개시키고 잘라낸다고 해서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그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 변화다. 말씀을 변질시키거나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사수하는 것이 개혁이다! 말씀 안에서 개혁되어야 하고 새로워져야 한다. 누가(who)?= 내가. 무엇이(what)? = 나의 삶, 나의 인성이, 어떻게(how)? =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러기에, 성도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불리우지 않았던가? 프론티어(the frontier), 앞서가는 개척자선구자라고 불리우지 않던가? 우리는 앞서가는 개척자의 정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성령으로 변화된 성도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변화는 거듭난 그리스도인 삶의 표증이며 열매다. 열매없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지울 것 뿐이다. 교계 지도자들, 성도라 허울뿐인 이름을 지닌 변질한 우리들의 추한 모습, 무서운 일이다. 죄없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탓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종교 개혁, 그 시금석(試金石)
“1517년 어느 쌀쌀한 가을날 오후, 성경을 연구하던 어떤 작달막한 수도사가 교회의 문 앞(지역 게시판)에 학문적인 토론을 위한 일련의 논제를 못으로 박아 내걸었습니다. 그는 장차 개신교 종교개혁으로 알려질 이 사건을 널리 퍼트릴 사람들이 학자가 아닌 일반 대중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이 수도사(신부)의 이름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입니다.
루터가 진지하게 고민했던 중요한 문제는 면죄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판매했던 당시 로마 교회의 모습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 기독교권에서 가장 웅장한 건축물이었던 로마 베드로 성당의 준공이 경제적 난관에 봉착하게 되자, 교황은 죄에 대한 그리스도의 용서를 성당 완공을 위한 건축 분담금과 맞바꿔 버렸습니다. 교황의 통치 아래 있던 사람들 가운데 도미니칸 설교자였던 테첼(John Tezel, 1455-1519)이 면죄부 판매에 대해서 가장 교활했습니다. 심지어 테첼이 여행 중에 불렀던 사중주곡조차도, '동전이 금고 안에서 원을 그리며 땡그랑 소리낼 때, 한 영혼이 연옥으로 부터 튕겨져 나온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전해질 정도로, 그는 면죄부 판매에 열을 올렸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자신의 취향대로 '동전이 금고 안에서 소리를 낼 때, 교황은 더욱 부유해진다' 등과 같은 유사한 곡들을 남겼습니다.- JuNick님의 댓글 중
루터가 종교를 개혁했다는 것은 세 살 먹은 어린 아이도 안다. 루터의 개혁은 완벽하리만큼 성공을 거두었다는 증거일게다. 그렇다면 그 루터가 외친 소리를 한 번 들어보자. 그는 개혁이 무엇이라고 외쳤는가?
루터의 종교 개혁 5대 원칙(原則)
1) 오직 성경(Sola Scriptura) - 성경만이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유일한 권위는 성경에 있다
2)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 구원의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효를 덧입는 것뿐이다.
3) 오직 은총(Sola Gratia) -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다.
4) 오직 믿음(Sola Fide) - 구속의 은혜는 믿음을 통하여 받을 뿐이지 다른 어떤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
5)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 모든 업적과 구원의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다음은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特徵)이다. 그 또한,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및 교회 중심적 신학을 가리킨다.
1) 하나님 중심(God-centered)
인간이 중심일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자연과 인간과 우주의 통치자이시며, 구원은 전적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것이 하나님 중심 사상이다.
2) 성경중심(Bible-centered)
성경 외의 그 어떤 것도 신앙의 표준일 수 없고 신학의 원천일 수 없다. 개혁주의는 “성경은 성경 자신이 해석한다”(Scripturae scriptura interpretum)는 원리를 고수한다.
3) 교회중심(Church-centered)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적 삶을 추구하며 교회에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려고 힘쓴다. 지상교회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도 교회의 완전을 향한 추구를 경시하지 않는데, 이것이 교회개혁운동이다. -개혁주의마을
개혁주의의 (튤립)이라고도 하는 5대 교리 역시 하나님 중심 사상을 기본 원리로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떤 특정 단체나 교리를 지지하자는 뜻으로 쓰는 글이 아니고 진정한 의미의 개혁이란 무엇인가? 개혁을 바로 알자는 취지에서 쓰는 글이기에, 칼빈의 5대 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 튤립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우리가 개혁을 부르짖기 전, 개혁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알아야 하고 어떤 부분을 개혁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보아야 한다. 언젠가도 한 번 말한 기억이 있지만, 재론하건데, 어떤 단체건 개인이건 뛰어 넘어야만 할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이란 것이 있고, 또 인간이 결코 넘어서는 안 될 어떤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이란 것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기준선(基準線(base line))으로 정해진 틀이 어렵기는 해도, 모두 인간 삶의 질을 높여주기 위해서,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 짜여진 것이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면서까지 필요한 것은 결코 아니란 것이다.
특히, 종교지도자들의 도덕적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은 다른 그 누구의 것보다 높아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사회가, 교회가, 성도가, 그들에게 거는 기대다. 그럼에도, 정작 많은 종교지도자가 이런 우리 모두의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인간이라면 결코 넘어서 안 될 도덕적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을 외눈 하나 까딱 않고 넘어서기도 잘하고, 들키지만 않으면 그만이란 듯 당당하기도 하다. 들켜도 회개함 없이 “나는 용서함 받았으니, 너도 용서하라.” 가히 협박성(?) 망발을 일삼는 것을 보면서 그 파렴치함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이미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성도의 신앙양심마저 마비된 것인가, 화인맞은 것인가? 더욱 큰 문제는 오늘날 일부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말씀마저 그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을 넘어서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적 교만이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될 만큼, 수많은 목사님이 자신의 인기와 유익을 위해서라면 성경 말씀을 뛰어넘는 것쯤은 예사롭게 여기는 세상이 된 것 같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실패한 이유를 여러 가지로 들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은 기록한 말씀을 넘어간 것이라고 본다. 하여,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Do not go beyond what is written)." (고전 4: 6 중반 절) 바울 사도가 간곡히 권하고 있다.
우리(성도)가 개혁을 하되 개혁의 시금석(試金石)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경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개혁해야 한다. 인간 자신이, 내가 개혁해야 한다는 말이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넘어서거나 가감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인생의 잣대가 되고, 천국가는 길의 약도가 되며, 안내서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훼손시키고서야 어떤 개혁을 하고자 한들 그 개혁이 올바를 수가 있을까? 하는 것이다.
성경은 귀와 절과 각이 서로 맞다. 구약에서 말씀되어진 내용이 신약에서 나오고 있으며 신약에서 인용되는 글이 구약에서 출처 된다.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인간 구원이다. 성경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한 사람은 각계각층의 사람이지만,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불변의 진리다!
성경은 성령에 감동되어진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받아 기록하였다. (딤전 3: 16절 참조) 때문에 각각의 시차와 역사와 문화를 달리하여 기록된 예언이 수천 년이 지나서도 이루어지고, 성경은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경을 풀기 위하여는 성령의 감동함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이다.
성경은 인간이 자신의 뜻대로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벧후 1: 20-21)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 다른 사상을 주입시키려 하는 것은 영적 교만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성경을 가감하려고 시도하지 마라. 십일조 낼 형편이나 믿음이 되지 않으면 내지 않아도 된다. 구원과 십일조 상관관계 없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변질시키거나 빼거나 더하려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진정한 개혁은 내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세상에 찌들리고 파묻혀서 진리를 외면하고 있던 그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진정한 개혁이다! 개혁의 시금석을 저버리고 무엇을 어떻게 개혁할 수 있다는 것인가?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개혁의 시금석이 되는 성경 말씀이 우리 손에 있음에도 그 성경을 입맛대로 풀이하거나 가감하는 자유주의신학으로 말씀을 호도하는 것이 개혁이라니, 어림도 없는 소리다.
개혁가들을 위한 사랑의 권면:
1. 십일조 강조하거나 강요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그런 목사들에게서 떠나야 한다.
2. 십일조가 축복의 바로미터라고 떠벌리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그런 목사들에게서 돌아서야 한다.
3. 내게 짐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바꾸자고 하여 말씀을 가감(加減)하거나 재단하여 잘라내는 자유주의 신학은 더욱 위험하다. 결코 따르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더 큰 재앙으로 그대를 이끄리니....
지구가 궤도를 벗어날 수 없고, 양복 재단사가 '패턴'없이 좋은 옷을 만들 수 없고, 성도에게 훼손된 말씀은 생명을 줄 수 없고 쓸모 없는 휴지로 만들고서야 어찌 그분의 낯을 뵈올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바쳐서 그 흘린 피의 발자취 위에 세워진 기독교의 근간이요, 우리 생명의 양식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하는 자리는 더욱 위헙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성도가 진정한 개혁을 논할 수 있는 자격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직 성경(Sola Scriptura)!!!, 힘들지라도 성경 말씀에 내가 순종하며,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개혁이요, 성경이 개혁의 시금석(試金石)이다! 진리는 사수되어야 한다!!
"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 3: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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