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움의 장소 - 13. 예수님께서 평화를 위하여 오셨는가? 도움의 장소 / 챔버스의 글들

 13. 예수님께서 평화를 위하여 오셨는가?

 

이사야 9:6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성탄 메시지 (예언이 아니라 선포임)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눅 2:14).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기독교에 관한 여러 관점들은 다시 분명히 확인하여 볼 때 틀린 내용들이 더러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관점은 평화를 위한 종교이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종교이며 국가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종교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러한 관점이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솔직한 비평가들이 질문합니다. 평화라구요? 평화의 왕, 예수님이 오시고 천사가 평화를 예언한지가 벌써 2000년이 지났는데 도대체 평화가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성경은 천사가 평화를 예언한 것이 아니라 평화를 선포했다고 말합니다.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즉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자들에게 평화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하는 사실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 1:23).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하신 존재입니다. 그분은 -인(God-Man)이십니다. 그분에 의하여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패턴을 따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계시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아오면 다른 영역으로 거듭나게 되며 그의 모든 관점이 바뀌게 됩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거듭남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물론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났다는 뜻은 거듭난 그 사람이 그분의 아들의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성탄의 메시지는 모든 것을 정화합니다. 육체로 오신 하나님은 구속을 근거로 하여 살아가는 모든 자들에게 가장 심오한 것까지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위협 (엄포가 아니라 인격적인 힘임)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4).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이렇게 생각합니까? 예수님의 오심에 관한 일반적 관점은 예수님께서 전 세계에 사랑과 평화를 알리시기 위하여 오셨다고 합니다. 그분은 온유하시고 친절하시고 자상하신 성품을 지닌 분으로서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하시기 위해 오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바가 아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배운 것 위에 우리의 생각을 세우는 경향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온유하시고 사랑이 많으시다고 배웁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 중심은 하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열정으로 불타시고 있다는 사실을 매번 잊습니다. 성전에서 우리는 온유하시고 친절하시고 자상하신 예수님이 아니라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돈 바꾸는 사람들을 내어 좇으시는 분노하신 분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온유하심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지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신이 원하시는대로 그분의 아들에게 행하셨습니다. 아들은 완벽한 온유함 가운데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 성령께서 전에 우리가 알지 못하던 진리를 깨닫게 하시면 우리의 마음에서는 평화는 사라집니다. 대신 죄책감이라는 검이 당신을 찌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임하심은 화평이 아니라 소요를 불러 일으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는 모든 평화를 향하여 칼을 드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죄책감으로 마음의 평화를 잃으면 오직 다시 평화를 찾는 길은 거룩 외에는 없습니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라고 바울이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순간 마음의 평화는 산산조각이 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길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라고 하셨습니다 (참조, 요 15:22). 그렇다면 주님은 왜 오셨습니까?

 

사람들은 말합니다. 산상수훈은 내가 행하기에 충분합니다. (정말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속죄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왜 선포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산상수훈을 통하여 어디에서부터 그 교훈을 따라 행하여야 하는지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요구는 예수님만큼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에 있어서 눈보다 더 희어져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순결해야 한다고 합니다. 당신의 마음은 너무나 순결하여 정욕이 전혀 틈타지 못합니까? 당신의 마음 그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책잡으실 만한 것이 없습니까?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신 일이 우리가 이룰 수 없는 이상을 세우신 것이라면 우리는 그 이상을 모르는 것이 더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첫째 이유는 가르치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주님 자신의 성향을 넣어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에 의하여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생명으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가책으로 사람은 자신을 정확하게 인식하게 되고 거듭나야 할 필요를 깨닫게 됩니다. 이 자리에 이르면 주님께서 말씀합니다. 너는 복이 있나니.  한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것은 그의 머리로 믿는 바가 아닙니다. 그의 마음 안에 새롭게 침투된 새로운 성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사람의 삶의 가장 중심된 자리로 임하십니다. 기독교의 바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자신으로서는 할 수 없는 그것을 하시기 위하여 나를 위하여 오셨다는 점입니다. 기독교는 어떤 원칙이나 프로그램을 고수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가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주님과 관계가 맺어진 성도의 마음 속에서 성령께서 임의로 역사하시면 그의 삶은 세상 사람들에게 일관적으로 보이지 않아서 세상 사람들은 그를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신조와 같은 믿는 바에 일관적인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 안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에 일관적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의미 (설교가 아니라 순결임)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고후 5:17).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뜻은 멸망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정죄를 받아 마땅한 것은 알면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거듭난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기독교 관점을 어느 정도 취하지만 결국은 내가 믿는 바에 그 관점들을 바꾸어 버립니다.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말합니다. 그럼요, 나는 구원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열매를 보이십시오. 당신은 구원 받지 못한 사람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들처럼 이해타산이 생기면 다투지 않나요? 만일 당신이 믿는다고 하는 기독교가 당신의 금전 문제와 결혼 문제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결국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에 대하여 알고자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은 질문합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것이 참입니까? 실제입니까? 현실의 삶에 얼마나 영향을 미칩니까? 그러나 만일 누구든지 주님의 구속을 근거로 하여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다면 그 사람의 삶과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자세는 반드시 바뀔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화를 위하여 오셨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주님 자신의 평화이지 다른 평화가 아닙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요 14:27).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외부 상황에 의하여 오는 평안이 아닙니다. 이 평안은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누릴 수 있는 평안으로서 예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근거로 한 평안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

 

, 우리 구세주께서 주시는 평안!

전에는 알지 못하였던 평안!

 

이 평안이 성경이 알리는 평안입니다. 인간의 영혼 가장 깊은 곳에서 누릴 수 있는 평안이며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전능한 평안입니다.

생명수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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