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부장의 믿음을 놀랍게 여기신 예수님

본문 읽기:마태복음 8:5 -13

참조 구절:누가복음 7장 상반부

대체 어떤 믿음이었기에 예수님께서 놀랍게 여기셨을까요?

인간은 일반적으로, 보이는 세계가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갑니다. 그 와중에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알고 싶은 것에만 관심합니다. 세계관이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공무원들 특히 직업군인이나 교사들이 퇴직하고 나서 사업을 하게 되면 실패하기가 싶다고 하더군요. 상명하복의 툴에 익숙해져 있고, 학생들을 가르치기만 해서 달리 다양한 사회적 경험을 하지 못한 탓도 있겠지요. 사업에 관한한 사고의 폭이 제한적인 것이 실패의 요인일 수도 있겠습니다.

폐일언하고,

먼저 백부장의 믿음을 살펴봅니다. 본문의 병행구절인 누가복음 7장을 보면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방인, 그것도 지배국 로마군대의 백부장이 피지배국인 식민지 백성을 사랑하고 그들의 회당을 지어주었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닙니다. 대개 식민지 백성은 수탈을 당합니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 민족이 경험한 바 있어서 잘 압니다. 백부장이 한 일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팍스 로마나' 시대에 많은 식민지 백성들 중 하나인 유대인을 사랑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하나님을 알았다! 입니다.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요? 물론, 말씀을 들었을 테지요. 들었으되 그냥 흘려들은 게 아니라 귀담아 듣고 마음에 새긴 말씀을 통해서 비록 이방인일지라도,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랬기에 그 분의 백성도 사랑할 수 있었지요.

이는 일개 하인이 중풍병으로 몸져누워서 몹씨 괴로워하는(아주 심하게 괴로워함) 것을 보고 안쓰럽고 불쌍히 여겨 예수님께 나아 와서 고쳐주십사고 간구한데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중풍병이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병에 속합니다. 병이 심해서 꼼짝 못하고 드러누워있는 경우가 예전엔 흔했습니다.

하인의 입장에서는 주인을 수발들고 집안 일을 해야할 터인데 드러누워 똥오줌을 받아내고 있으니 오죽 괴롭겠습니까.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라 심적 고통도 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괴로워한다"가 완료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몹씨 괴로워함이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평소에 백부장이 하인을 어떻게 대했는 지를 행간을 통해서 살펴봅니다. 인격적으로 대할뿐만 아니라 내 몸같이 사랑했습니다. 인정머리 없는 주인이라면 내쫓았을 지도 모릅니다. 다른 하인이 똥오줌 받아내며 밥도 떠먹이고 간병을 해야 하니 보통 일이 아닙니다. 금전적으로 따져도 손해입니다. 그럼에도 백부장은 하인을 사랑하기에 돌봐주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려고 애썼던 것이지요.

사람대갈님(?) 아니, 머릿 수를 돈으로 계산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비인간적이고 윤리와 도덕이 실종된 경우일테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더러 있습니다. 마치 사람을 표로 보는 정치인도 간혹 있듯이 말입니다

"몹씨 괴로워한다"를 미완료형태가 아닌 완료형으로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백부장의 심중에 하인이 몹씨 괴로워하는 그 심정을 지금까지(예수님께 나아와 구할 때까지)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인의 아픔이 곧 내 아픔이었던 게지요.

한편, 이런 주인을 모시게 된 하인은 열심히 섬김으로서 보답코자 했지만 덜컹 중병으로 몸져눕는 신세가 되어 주인을 뵐 면목조차 없습니다. 하인 주제에 아픈 것도 제 마음대로 아플 수 없는 노릇인데 병수발까지 받다니! 그래서 그는 더욱 더 괴로워했던 것이지요.

이런 하인을 위해 예수님께로 나아 온 백부장입니다. 참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지 않는 지를 아는 길이 있습니다.

교회생활 열심히 하는 것만 보고서는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첫 째로는 돈보다 일보다 사람을 귀중히 여기는가를 보면 됩니다. 다음으로는 이웃을 진심으로 내 몸같이 사랑하는가를 보면 압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도 사랑치 못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설쳐대는 군상들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이런 백부장이라 얘수님깨서는 친히 왕림하셔서 고쳐주시고자 했습니다.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그런데 이어지는 백부장의 고백이 장관입니다. 백 명의 부하를 거느린 중대장 급 지휘관의 입에서 그것도 로마황제에게 충성하는 백부장의 입에서 나온 놀라운 신앙고백입니다.

아까 말했었지요. 군인들은 다양한 사회적 경험이 부족하다고요. 그러나 이 백부장은 달랐습니다. 요즘으로 치자면 기독교 세계관을 가진 자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바르고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군대 지휘관으로 있으면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말씀을 배운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예수님께서 놀랍게 여기실 정도로 말씀에 입각한 바른 믿음을 소유한 자였습니다. 또한 그 말씀과 신앙을 바탕으로 바른 세계관을 확립한 자였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메시야를 대망(기다릴 대, 바랄 망)하고 있을뿐만 아나라 예수님이 바로 그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그 당시 이스라엘인둘이 가지고 있던 메시야관 하고는 질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세상을- 천대받고 멸시받는 죄인들,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도-구원하러 오신 분이심을 바르게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스라엘인들은 대개가 다 정치적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로마를 쳐부수고 만국 위에 군림하는 메시야 왕국을 바랐던 것이지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또 들어갈 수 있는, 이 땅에서 이뤄질 그 나라를 꿈꿨던 겁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만물을 다스리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 그 분 자신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명확히 알고 나아와 간구하며 고백했다는 점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세 분 한 하나님-에 대해서 기회닿으면 강론코자 합니다)

바른 말씀이 바른 신앙을 낳고 바른 신앙이 바른 삶을 산출합니다.

예수님을 놀라게 한 '백부장의 믿음을 본받자'가 오늘의 주제가 아닙니다. 그런 백부장을 알아보시는 우리 예수님에 대한 바른 믿음을 가지자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냥 힘주어 믿습니다~고 외치면 믿음이 생길까요? 많은 분들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시기 전에는 죽어도 생기지 않는 게 믿음입니다. 이는 대단히 오해하고 있는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감동을 주시고 도우시지만 믿음이 있고 없고, 믿음을 가지고 안 가지고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자유의지 말입니다.

오래 참으시면서 다 회개하여 구원에 아르기를 원하시지만, 믿고 안 믿고는 인간의 책임입니다. 그러지 않고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서 '네 믿음이 크도다!' 고 하시면 하나님 스스로 자화자찬 하시는 격 이상이 아닙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거니와 말씀을 믿음으로 화합하십시오. 마음을 열고 어린 아이같이 받아들이십시오. 그래야 믿음이 생깁니다.

여러분도 얼마든지 예수님을 놀라게 해드릴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나는 믿음이 없다고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날 때부터 믿음을 가지고 태어나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믿음을 가지려고 애를 쓰면서 부지런히 말씀에 착념하고 기도하십시오. 언젠가는 믿음의 반석위에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본문 나머지 부분이 이어집니다)

구자준 목사2016/08/1609:4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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