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님 장모님 우리 장모님>
구자준 목사 2016. 9. 5. 10:35<장모님 장모님 우리 장모님>
-베드로의 장모의 섬김, 예수님의 섬김-
마태복음 8장 14-17
14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15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베드로의 고향은 가버나움에서 그리 멀지 않은 벳새다입니다. 그러나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어딘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필자가 추정키로는 가버나움이나 그 인근 마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벳새다는 헤롯 빌립의 영지이고 가버나움은 헤롯 안디바에 속한 지역입니다. 둘 다, 대 헤롯(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헤롯대왕)의 배 다른 소생들입니다. 다음 기회에 헤롯 가문을 한 번 파헤쳐(?) 보도록 하겠습니다.
뱃새다에서 고기를 잡아 큰 시장인 가버나움으로 가져와서 팔게 되면 통관세를 물어야 했기에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거처를 옮겼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에는 베드로의 집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우리 장모가 병들었다'고 말씀드리거나, '우리 집에 한 번 오십사'고 요청했다는 그 어떤 시사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능동적으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운 것을 '보신' 것도 능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시시콜콜 자잘한 이야기는 생략합니다. 그렇지만 읽는 자들로 하여금 전후사정과 본문의 배경을 유추해 볼 수 있도록 여유공간을 제공합니다. 소위 말하는 행간읽기이지요.
마태복음 19장 27절에서는 베드로가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습니다.
마태복음 4장 19절에,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라..." 하시니, 베드로는 그의 형제 안드레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던지다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처자도 생업도 뒤로 한 채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런 베드로의 헌신을 외면하실 주님이 아니십니다. 베드로의 집안 형편을 아시는 주님은 몸소 베드로의 집에 심방하셔서 장모님을 고쳐주셨습니다. 베드로의 시름과 걱정을 덜어주셨습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일하는 자들을 모른 채 하시는 우리 주님이 아니십니다.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고 채워주십니다. 근심 걱정 주께 맡겨도 괜찮을 정도가아니라 넉넉히 돌봐주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장모의 입장에서는 딸자식과 손주들을 외면키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위집으로 와서 살림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처음부터 오갈데 없는 장모를 모셨을 수도 있고요. 그래서 오늘 제목을 '장모님 장모님 우리 장모님'으로 정해 본 것이지요.
성경은 베드로가 배를 처분했다든지 가솔의 생계는 어떻게 해결했다든지 등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다만 주님은 그 사정과 형편을 다 알고 계실뿐 아니라 금세와 내세에 복된 약속의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베드로!
집을 나온 지도 어언 반 년이 넘어 일 년이 다 되어 갑니다. 자주 집에 가 볼 형편이 아닙니다. 인편으로 소식을 가끔 들을뿐입니다. 장모가 병들어 누워있건만 약 한 첩 사들고 찾아가서 병문안하고 처자식과 오랫만에 회포를 풀 수 있는 입장도 못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열병으로 누워있는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잡으십니다. '일어나라!'고 말씀으로 명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냥 손을 만지셨습니다.
그렇지만, 먼저 베드로의 장모의 눈을 보셨습니다. '여자여~ 네 심정을 내가 아노라! 나와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사위를 대신해서 가정경제를 책임지고 처자를 돌보는 너야말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나를 위해 헌신하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주여~ 이 미천한 여종을 몸소 찾아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야말로 해야 할 것을 하고 있을뿐 무익한(비천한) 종입니다'
무언의 대화가 오갑니다. 눈으로 말하고 손으로 서로간에 교감합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라고 말씀하지 않으셔도 베드로의 장모는 이미 심령으로는 일어났습니다. 병은 마음으로 이기지 못하면 육신으로는 못 이깁니다.
열병이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 열병에 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 열병'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열병의 배후에 있는 귀신을 나타내고자 함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 합니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와 복음을 훼방하는 마귀의 궤계를 꿰뚫어보시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우리도 주님을 닮아갈수록, 마귀의 악한 궤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주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두고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내가 이렇게 봉사하는데 내가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데...이런 날 좀 봐주세요~'라고 안 해도 주님은 다 아십니다.
주님을 섬기는 가운데, 시장에서 좌판을 펼쳐놓고 생선을 팔든 채소를 팔든, 그 것이 나 자신 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거룩한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성도가 공사판에 나가서 열심히 땀흘려 막노동하는 것도 주님이 보실 때는 거룩한 일입니다.
저희 교회는 가난한 성도가 믿음으로 드리는 십일조를 축복기도 한 다음에 돌려줍니다. 거기다 십만원 정도 보태서요. 주님이 돈이 없으서, 돈을 좋아해서 가난한 자들이 드리는 돈을 받으시겠습니까. 믿음과 정성, 그리고 헌신만을 받으시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베드로의 장모도 시장바닥에서 생선장사를 했었는 지도 모르지요.
누가 큰 자입니까. 돈 많은 자? 권세와 부귀공명을 누리는 자? 그 누구도 아닙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에 해당하는 자가 진정 큰 자입니다.
제가 예전에 복음을 전할 때, 장바닥에 앉아서 물건을 파는 할머니나 아주머니들이 하는 말이 '교회도 돈이 있어야 나가겠습디다. 돈없는 우리들은 사람취급도 안 하데요?'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목사들이 돈을 밝히는 세태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제 눈에는 그런 목사가 안 보입니다. 일부 그런 분들이 언론에 오르내리지만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정말 성실히 직분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밝힐 돈이 없어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인 것은 확실합니다. 죽을 적에 한 푼도 가져가지 못하면서 왜 다들 돈에 눈이 어두운지... 주님의 사랑에 눈먼 우리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바울이 말했었지요.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 자나 깨나 돈조심해야겠습니다. 이 말세지말에!
여인이 일어나 수종듭니다. 이 수종듦이 미완료로 되어 있습니다.
수종은 기분 좋을 때나 남이 알아 줄 때나 넉넉할 때에만 수종드는, 그런게 아닙니다. 비가오나 눈이오나 고달프거나 돈이 있으나 없으나 변함없이 주님을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 수종은 섬김을 말합니다. 달리 말해서 봉사한다는 말입니다. 내 형편 아시는 주님이 날 찾아오셔서 일으켜 세우셨으니 이제 무슨 조건이 필요하겠습니까. 그저 감사해서 기쁜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지요. 죽을 때까지... 그것도 종의 자세로 말입니다.
여러분, 조건부 신앙을 아십니까. '내가 이러 이러한 일을 했으니 주님, 복주세요~' 애들이나 하는 짓(?)이지요. 심부름했으니 용돈주세요~나 다를 바 없습니다.
받은 바 은혜에 감사해서 기쁜 맘으로 자원해서 끝까지 섬기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베드로의 장모의 섬김은 바로 그런 섬김, 미완료의 섬김이었습니다.
칼럼: 구 자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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