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 믿음 없는 자에게

애굽으로 내려갈 때는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할 만큼 비겁하고 연약하던 아브람이 318명의 가신들과 동지들로 적을 파하고 조카 롯과 인민들을 구출하고 빼앗겼던 모든 재물을 되찾아 왔습니다. 겁쟁이 아브람이 믿음과 용기로 나설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이기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멜기세덱을 예수님의 예표로, 소돔왕을 세상임금의 예표로, 그리고 아브람을 그들 앞에 개선장군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이 후에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이상 중에 임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니,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아브람이 왜, 무엇을 두려워했단 말입니까? 아브람이 얼마나 두려워했기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셔야 했을까요?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은 하나님께 자신에게 후사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아브람이 두려워한 것은 바로 후사가 없다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후사가 없는 것이 왜 그렇게 큰 두려움이 되는 것일까요? 인간은 누구나 죽습니다. 인간 뿐 아니라 짐승도, 벌레도, 나무도, 꽃도, 모든 동식물도...., 산 것들은 다 죽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씨를 퍼뜨리고 새끼를 낳습니다. 그렇게 생명이 이어져 내려갑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때, 모든 사람들은 사람도 그렇게 후사를 남겨야 자신의 생명이 이어져 내려간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후사가 없는 것, 대가 끊어지는 것이 죽음 보다 더 두려웠는지도 모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불러내셔서 함께 하시는데도, 그 하나님이 “얘, 너는 이제부터 나와 영원히 함께 있는 거야.” 하시는데도, “얘, 그런 게 이젠 문제가 아냐. 내가 있으면 다 해결 돼. 너에게 내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아니? 얼마나 굉장한 일인지 아니? 내가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란다.” 하고 말씀하시는데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 하는 아브람은 눈앞에 닥친 문제, 후사가 없이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 앞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있으면 다른 아무것도 더 필요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외에는 아무것도 우리를 만족하게 할 수 없습니다. 주님만 있으면 어떤 고난도, 환난도, 죽음까지도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이 전부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아브람에게 화를 내시지도 아니하시고 꾸지람하지도 아니하십니다. “아브람아, 그런 거 걱정 마라. 네 몸에서 후사가 난다니까.” 여전히 이해하지 못 하고 믿지 못 하는 아브람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이끌어 밖으로 나가 별을 보여주십니다. “저 별들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절을 보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무지 믿지 못 하고 두려워하는 아브람, 답답하고 속 터지는 아브람을 찾아오셔서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상급이다. 네 몸에서 후사가 날 거야, 저 별들 봐라, 저렇게 된다니까......” 어르고 달래고 가르치고 보여주시며 일일이 설명한 끝에 아브람이 믿으니 그 작은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억지로 믿음을 집어넣어주시고 이끌어주시고 나서 그 겨자씨처럼 작은 믿음을 기뻐하시며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억지춘향’이요 ‘엎드려 절 받기’입니다.

아브람더러 뭐랄 거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믿음 있었습니까? 우리가 아브람보다 나은 게 있었습니까? 우리는 복음을 듣고 성경말씀들과 수많은 선지자와 전도자의 가르침을 받고 수많은 순교자들의 흘린 피를 보면서도, 또 하나님의 먹이시고 입히시고 공급하시는 기이한 일들을 보면서도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와 동행하시며 수없이 말씀하시며 가르치시며 "두려워 말라. 내가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믿음으로 세우고 계시는데도 말입니다. 아, 우리의 믿음 없음을 용서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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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다닥! 인기척에 놀란 다람쥐가 새까만 눈망울을 굴리며 나무 뒤로 달아났으나 조용한 휴식을 방해하는 발자국 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못내 궁금한 듯, 나무 사이로 빠끔히 내어다 보는 한가로운 가을, 건강을 위한 등산을 목적으로 우거진 가을 숲을 찾는 사람들의 여유로움과는 달리 허기진 배를 안고 식용 버섯이라도 채취해서 먹어볼까 하고 산을 찾던 일가족이 그날 저녁 모두 유명을 달리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 듣고 가슴이 아팠던 적이 있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남편과 나)가 러시아에 선교사로 가 있는 동안 종종 들을 수 있던 허망한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더랬는데, 2년 전인가 3년 전인가 우리나라 영덕에서도 유사버섯(독버섯)을 식용버섯인 줄 알고 채취해다가 끓여 먹고 일가족 3명이 그날 밤 한꺼번에 절명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어느 신문에선가 읽고 슬펐던 기억도 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유사하다고 하여서 함부로 먹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은 버섯의 인공재배가 많아 시장에서 다양한 버섯들을 많이 볼 수 있고, 버섯이 가지고 있는 순기능 때문에 건강기능식품으로의 역할도 점점 커지고 있기에 인기가 많지만, 버섯은 그 종류가 다양하여, 우리나라만 하여도 1,680여 종이 있다는데, 이중 약 10% 정도가 독버섯에 해당한다고 하니 버섯을 단순히 보고 관찰하는 것이나 재미로 채취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럴듯하게 생긴 버섯들이 상대적으로 치명적인 독성을 갖고 있는 버섯도 많으니 자연산 버섯을 주의하는 각별한 노력이 필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문제는, 우리가 어릴 때 독버섯은 화려하고 예쁜 것이라고만 학교 교과서를 통해서 잘못 배웠던 탓도 있다.그러나 알고보니 색깔과 모양만으로는 절대 구별하기 어려운 유사버섯이 심각한 독버섯 중에도 많이 있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다. 독버섯이 위험한 가장 큰 이유는 먹을 수 있는 식용버섯과의 구별이 어렵다는 점 때문이라고 한다. 아예 종류가 다른 버섯이면 상관이 없겠지만, 유사버섯(독버섯)과 식용버섯은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의 눈으로는 비슷비슷해 보이고 그 모양새나 색깔은 전문가들조차도 구분이 어려운 것이 많다고 하니 먹어보겠다고 버섯을 채취하려는 분들이라면 각별한 주의가 요망된다.

그러나 한 편, 인간사에서는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Different doesn’t Mean Wrong)라는 말이 있다. 그 말도 맞다. 인간의 외모 혹은 인간의 정신세계에서는 그러하다는 것이다. 사람의 생김새가 다르고 생각이 다를 수 있다. 나와 다르게 생각하고 나와 다르게 생겼다고 하여서 틀린 사람이라고 몰아가거나 틀린 생각이라고 공격하는 것은 옳지가 않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장애인들은 우리와 다른 육체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하여서 그분들이 우리와 틀린 것인가? 그렇지 않다. 비록 우리와 약간의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여서 그분들을 우리와 틀린 사람이라고 말하면 안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진 만물의 영장이며, 예수님을 개인의 구세주로 믿고 영접한 사람이라면 모두 우리의 형제요 자매들이다. 그렇지 않은가?

실력으로 따진다면 장애인들이 정상인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실력을 갖춘 분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음도 우리는 안다. 출생할 때부터 장애인으로 태어났거나 살다가 어떤 사고를 만나 장애인이 되어 비록 외형적으로 보이는 그 모습이 우리와는 약간 다르다고는 하나 그분들도 타고난 재능에 따라 노력하기만 하면 그 결과는 얼마든지 뛰어날 수 있고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늘의 별처럼 밝게 빛날 수 있음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헬렌 켈러 여사가 그랬고, 음악의 거장 ‘베토벤’이 그랬다. 우리나라에도 수많은 장애우님들이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그 중 한 분을 소개하자면 이희아 씨가 그렇다. 손가락이 다섯 개인 우리와는 달리, 손가락 4개만으로 태어난 이희아 씨, 그런 그녀가 웬만한 피아니스트들도 소화하기 어렵다는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능수능란하게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밀려드는 감동으로 가슴이 먹먹해지며 눈앞이 뽀얗게 흐려졌던 기억이 있다.

그렇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영혼의 길에서는 어떠한가? 과연, 구원의 길마저 “그렇다.” 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NO!, 결코, 그럴 수 없다!”이다. 무엇 때문인가?

영적 세계에서는 다른(유사(similarity))것은 틀린(wrong) 것이다!

영적 세계는 사각지대가 있을 수 없고, 조금이라도 다른 것은 틀린 것이다! 왜 그런가?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경고해 주고 있기에 그렇다. 영적 세계에서 ‘다르다'(異)고 하는 것은 곧 '틀리다'(誤(오))류란 뜻이다. 영적 세계, 구원의 길에서는 다른 길은 죽음과 직결됨을 알아야 한다. 구약 성경 레위기에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말씀이 있다. 함께 읽어보기로 하자.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레 10: 1-2) 하는 말씀이 있다.

내용인즉슨, 대제사장 아론의 두 아들이며 제사장이었던 나답과 아비후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성소의 불을 켤 때, 성소의 불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번제단의 불만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없신 여기고, ‘번제단의 불’이 아닌 ‘다른 불’을 드렸다. 불은 불이나 다 같은 불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불은 거룩한 불이며 인간이 마음대로 변개시키거나 뚯대로 바꾸면 안 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불이라면 인간이 보기에 하나님의 불과 유사할지라도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인간적인 지혜와 지식, 인간이 만든 우상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명하신 것 외에 다른 불로 제사드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성소에 밝히는 불이라면 더욱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불로 드려야 마땅하다.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인간이 마음대로 밝힌 불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교만한 그들의 생명마저 취해가셨던 것이다. 인간이 만든 불은 하늘에서 내려온 거룩한 불(레 9:24)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온 것, 땅에서 온 불이기에 그 불은 속죄의 근거를 갖지 못한 불이었다. 영적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지시하신 신령한 불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태워 인간에게 허락하신 속죄의 불이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만한 성령의 불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외에는 인간에게 구원을 주실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행 4: 12절 참조)

W.C.C.는 다른 신(神)을 용납하기에 틀린 것이다

W.C.C.가 종교다원주의임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7차 총회 때 있었다. 한국인 참가자 정현경 이화여대 교수가 성령의 강림을 부르느라 소복차림으로 사물놀이패를 앞세우고 무대에 나타나 춤을 추었고, 춤을 추고는 초혼 문을 읽으며, 초혼제를 진행하였던 것이다. 특히 정 교수는 이 특강에서

“한이 많은 영혼의 울부짖음을 듣지 않고는 성령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고 하면서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다음은 정교수의 특강 일부분이다.

『오소서! 애굽인 하갈의 영이여!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인 아브라함과 사라에 의해서 착취당하고 버림받은 흑인 여성입니다. 오소서! 우리아의 영이여! 당신은 다윗 왕에 의하여 전쟁터로 파병되어 살해된 충성스러운 군인입니다. 다윗의 음욕이 당신을 죽게한 것입니다. 오소서! 예수 탄생시 헤롯 왕의 군인들에 의하여 살해된 어린 아기들의 영이여! 오소서! 잔 다르크의 영혼과 중세기에 화형으로 살해된 무당들의 영이여! 오소서! 십자군 때 죽은 사람들의 영이여! 오소서! 토착민의 영이여! 식민지 시대와 기독교 선교시대에 죽어간 영혼들이여!

오소서! 히틀러 유대인 학살 당시 가스실에서 죽어간 영혼들이여! 오소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자탄에 죽어간 사람들의 영혼들이여! 오소서! 인간들의 금전욕에 의해서 고문당하고 착취당한 흙, 공기, 물의 영들이여! 오소서! 걸프전에서 죽어가는 군인들, 민간인들, 해양생물들의 영혼들이여! 오소서! 십자가상에서 고문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신 우리 형제이신 해방자 예수의 영이시여! 』

정 교수는 기독교에서 금하는 초혼제를 드렸으며, 민중 신학자들이 주장하는대로 ‘해방자 예수’를 주장하고 있으며, 한(恨)의 신학을 주장하고, 더욱이 성령과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들을 동일시하였다. 또한 한국기독교교육협의회의 홈페이지 기도자료실에 올려져 있는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겸임교수인 구미정 교수의 “생명의 강 살릴 종교 여성 공동기도문”에도 이와 유사한 혼합주의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오 하나님, 부처님! 살려 달라 매달려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인데, 거꾸로 당신이 우리를 향해 애원하시다니요? 무력한 당신, 한 없이 작은 당신, 아직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당신, 한 중생이라도 더 구제하기 위하여 극락 언저리를 서성대는 당신,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아래로 아래로 오랜 세월 흐르는 강물은 바로 당신의 눈물입니다. 사랑이고 자비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 부처님, 성모마리아님과 소태산 재조사님의 마음에 연하여 오늘 4대 종단의 종교여성이 일심으로 간구하오니 부디 이 땅에서 죽임의 굿판 대신에 신명나는 살림의 굿판이 벌어지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나무아미타불, 아멘』 - 김길성, “WCC 한국총회를 앞둔 한국교회의 방향과 전망”, WCC는 우리와 무엇이 다른가?" , WCC대책위원회편,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부, 2011), p. 39

그런고로 우리는 다른 것은 모두 양보하며 살아갈지라도 신앙만큼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다른(異)것, 유사한 것이라고 하여 용납하거나 따라가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구원자는 오직 우리 주 예수님 한 분 뿐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온 인류가 망하고 죽게 된 그 첫 번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음성과 ‘유사 음성을 분별하려 하지 않고 유사 음성을 그대로 용납하고 수용하였던 때문이다! 기차노선이 두 갈래로 나 있다고 하여서 그 길의 끝이 모두 한 곳에 닿지는 않는다. 철로길이 유사하다고 하여서 서울 가야 할 사람이 부산 가는 열차를 타면 안 된다.

우리가 성도라면 매사에 조심하며 오실 그분을 사모하여야 하겠으나 무엇보다도 유사음성을 주의하여야 한다! 성령의 흉내를 내는 사단의 음성도 있다. 가짜가 있으면 진짜가 있는 것이다! 도금한 것이 화려하고 번쩍거린다고 하여서 순금은 아니다. 종교는 모두 다 같다고 하는 미혹의 음성, 각종 유사(類似) 음성이 만연한 세대다. 이런 혼탁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 삶의 잣대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별하자. 거짓의 아비, 미혹의 영이 활개치는 이런 것이 모두 말세적 한 징조임을 깨닫고 혼미한 세계를 벗어나 항상 깨어서 기도하는 성도만 살아남을 수 있다! 우리들의 주께서 권면하신다. "너희는 유사(類似)음성을 주의하라"고...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고후 6: 14- 16)


USA 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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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지리아, 끔찍한 핍박 불구 무슬림의 기독교 개종 늘어”

강혜진 기자 입력 : 2016.02.25 22:19

오픈도어, 보고서 발표하고 국제사회에 관심 호소


▲나이지리아 난민캠프 안의 한 교회. ⓒ오픈도어선교회

나이지리아에서는 지난 2009년부터 2014년까지 약 11,500명의 기독교인들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13,000여 교회가 불타고 130만여 명의 기독교인들이 인근 국가로 피신한 상태다.


 

주로 나이지리아 북부에서 활동하는 보코하람(수니파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은 2014년 전 세계 테러지수(Global Terrorism Index)에서 가장 악명이 높은 단체로 꼽혔다.


국제오픈도어선교회가 최근 발표한 ‘2016년 박해국가리스트’에 따르면, 작년 나이지리아에서 살해된 기독교인은 4,028명이었고, 공격을 당한 교회는 198개였다.


오픈도어와 나이지리아기독협회(CAN)는 최근 나이지리아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발생한 끔찍한 폭력을 다룬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나이지리아 기독교인들의 희미한 희망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나이지리아 기독교계에서 가장 큰 연합기구인 CAN은, 북부 나이지리아의 교회를 다시 살리기 위해 풀뿌리 운동과 외부 활동 등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이들은 UN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큰 상실감을 느끼고 있는 기독교인 난민들에게 관심을 기울여 줄 것을 호소했다.



소외·차별·폭력에 노출된 기독교인들

영국&아일랜드 오픈도어의 리사 퍼스(Lisa Pearce) 대표는 “나이지리아는 세속적인 연방주들로 구성돼 있으며, 종교의 자유를 헌법으로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북부 나이리지아의 현실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지적했다.


그녀는 “이 지역의 기독교인들은 수십 년간 소외와 차별로 고통을 당했으며, 폭력의 표적이 되어 왔다. 이슬람의 압력이 심한 먼 북쪽의 샤리아(이슬람 율법) 주에서 뿐만 아니라, 샤리아가 공식적으로 적용되지 않는 미들벨트에서도 이 같은 일이 발생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사실은, 보코하람과 같은 근본주의 무슬림들을 지지하는 이들, 북부의 무슬림 정치·종교 지도자들, 하우사-풀라니 목동들이, 자신들의 이익과 정체성과 지위를 지키기 위해 하나로 뭉쳐서 북부 기독교인들에게 지속적인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이들의 핍박으로 인해 특정 지역에서 흩어진 기독교인들이 양산되고, 현재 기독교의 모습은 실제 멸종되거나 점진적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또한 무슬림과 기독교인 간의 사회적 공존도 깨져 버렸다.


보고서는 “무슬림과 기독교인은 상호 신뢰가 사라지고, 점점 별도의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무슬림들의 공격으로 인해 나이지리아 북부의 기독교인들은 모두 고향으로 떠났으며, 대중적인 삶을 살거나 영향력을 미칠 수 없게 됐다”고 밝혔다. 오픈도어가 만난 122개 교회 지도자들 중 4분의 3은 “전망이 매우 흐리다”고 답했다.


그러나 보고서는 희망의 여지도 남겼다. 교인들이 폭력과 박해로 떠나가고 있지만, 신앙을 포기하지는 않고 있다. 대신 보다 안전한 환경 속에서 눈에 띄지 않게 예배에 참여하고 있다. 비록 나이지리아 북부 주민들은 정치에 참여할 수도 없고 생존 환경도 열악하지만, 미들벨트에서는 기독교인들의 정치 참여가 증가하고 있다.


또한 도피하지 않기로 한 이들은 신앙에 대한 새로운 열정을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무슬림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북부의 교회가 성장하고 있는데, 이들은 주로 예수님이 나오는 꿈을 꾸고 이 같이 변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보고서는 “많은 무슬림들이 기독교인이 되고 있다. 그러나 동료 무슬림들에게 살해당하거나 압박을 받을까 두려워하고 있다”면서 “교회 정책 결정자들, 나이지리아 정부 관리들, 국제단체들이 나이지리아에서 발생하고 있는 폭력을 인식하고 힘을 합쳐 대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저작권자 ⓒ 크리스천투데이>

벧전 3:19절의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 하시니라”는 무슨 뜻인가?                                김선기 목사

벧전 3:18-20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벧전 3:19은 흔히 난해 구절로 취급되며 참으로 오해하기 쉬운 곳입니다. 우리 성경으로 보면 특히 그렇습니다.

벧전 3:19절의 .옥에 있는 영들은  노아시대에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을 때 순종하지 않고 홍수에 멸망한 사람들 곧 순종치 않고 지옥에 간 ( 노아의 8명 식구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영으로 지옥에 있는 노아 시대의 불신자들에게 전도하셨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많은 모순이 따릅니다. 주님께서 죽으신 후 왜 하필 노아 시대에 지옥간 자들에게만 전도하셨습니까? 더욱이 이미 지옥에 간 자들에게도 전도가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옥에 있는 영들이 노아 시대에 불순종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그 시대에 사람들을 멸망의 길로 이끌었던 타락한 천사들을 말합니다. 우리말의 구조와 헬라어의 구조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 구조를 무시한 채  나온 오역의  결과로 엄청난 혼동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벧전 3:19~20절을 원문으로 보면  "주님은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 곧 불순종했던 천사들에게 가셔서 선포하셨다. 그런데 이 천사들이 불순종했을 때가 노아의 시대 방주가 예비 되고 있는 동안이었으며 이 방주에서 극소수 곧 8명만이 구원 받았다." 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순종했던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불순종했던 천사들에게 주님이 선포하셨는데 그 때가 바로 노아가 방주를 예비하고 있을 때였고 노아의 방주에서 구원 받은 사람은 극소수 곧 8명 뿐 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옥은 지옥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에 한 개의 영어 단어 "hell"(지옥)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세 개의 서로 다른 헬라어 단어(게헨나, 하데스, 탈타루스)가 있는 데 영어는 모두 오직 "hell" 하나로만 번역했고 우리말도 거의 구별하지 않고 번역했기 때문에 많은 혼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곳에서의 옥은 흔히 불못이라고 말하는 “게헨나” 또는 음부라는 뜻의 “하데스”가 아니고 “탈타루스”로서 노아의 홍수 시대에 범죄했던 타락한 천사들을 가두었던 감옥을 말합니다. 이 단어가 벧후 2:4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여기에서 지옥이 원문에 “탈타루스”입니다. 또 유다서 1:6에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바로 이 범죄한 천사들을 가두어 두신 곳이 “탈타루스”입니다.

그리고 19절의 “전파하시니라”도 전도하다의 뜻이 아닙니다. 원문에는 “케뤼소”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사탄을 좇아 타락한 천사들에게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사탄의 심판과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하셨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해 볼 것이 있습니다. 과연 천사들이 어떤 범죄를 저질러서  심판 때까지 “탈타루스”에 갇혀 있게 되었는가? 여기서의 범죄가 천사장이  타락하여 마귀가 되었을 때 같이 동참하여 타락했던 천사들의 범죄가아니라 이 천사들이 노아시대에 범죄했다는 것을 본문은 명백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노아 시대에 이들이 과연 무슨 범죄를 저질렀는가? 이들과 노아홍수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리고 우리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교훈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반역하고 도전했던 사탄, 지금도 꼬리를 감추고 교활하게 하나님의 자녀들을 처참하게 무너뜨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발버둥치고 있는 사탄에 대해 하나님의 자녀들은 너무나 무방비 상태인 것 같습니다.  

페트라 성경원어 연구원 /개혁주의마을

아리랑의 비밀과 한국인의 정체성

아리랑과 성경과 민족사의 만남

 유석근

(알이랑 코리아 대표) 

 

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행마다 열자씩 4행 40자의 이 분장(分章) 가요. 이 노래를 우리는 ‘아리랑’이라고 부른다. 아리랑…. 이 노래만큼 우리 민족의 애환을 달래 온 노래도 없으리라. 슬플 때도 아리랑, 기쁠때도 아리랑…. 아리랑은 우리 겨레의 역사와 함께 민족의 한과 기쁨을 노래해온 단 하나의 노래다.

 

겨레의 노래 아리랑이 서양에 처음 알려진 것은 19세기 말.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미국인’으로 알려진 호머 헐버트(1863∼1949) 선교사는 구전으로 전해오던 아리랑을 1896년 서양식 오선지에 처음 채보해 외국에 알렸다. 그는 “아리랑은 조선인에게 쌀과 같다”고 하였다.
또한 헐버트는 팔도 어디서나 들려오는 아리랑을 두고 이렇게 예찬했다. "조선 사람은 즉흥곡의 명수로, 바이런이나 워즈워드에 못지않은 시인들이다."

 

한국인은 아리랑을 부를 때 저절로 흥이 난다. 기쁜 자리 슬픈 자리 없이 언제 어디서나 불러서 기쁘고, 들어서 정다운 노래…. 무슨 이유로 ‘아리랑’은 한국인의 마음에 그토록 크게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일까? 아득한 옛날부터 남녀노소 상하귀천 없이 입을 모아 불러 온 노래…. 들어도 들어도 싫지 않은 이 노래는 과연 언제부터 무슨 연유에서 불려지기 시작한 것일까?

 

현재까지 아리랑의 비밀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두고 오랫동안 연구가 거듭되어 왔으나 시원한 해답은 찾을 수 없었다. 

 

아리랑은 굉장히 큰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특별한 노래이다. 놀랍게도 아리랑은 셈의 후손인 우리 배달겨레의 조상들이 대홍수 후 광명의 본원지(밝달=배달)를 찾아 동방으로 천동(遷動)할 때 험한 산과 높은 고개, 그리고 고원들을 넘어오면서 부른 ‘찬송가’였다(창 10:21~30).

 

 

1.인류 최고(最古)의 찬송가 아리랑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논하려면 종교적인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 배달 동이겨레는 하느님을 섬기던 제천민족(祭天民族)으로서 단순한 정치세력(민족,국가)이 아닌 ‘종교적’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겨레는 다신숭배가 만연한 고대 세계에서 제천신앙으로 유일신 하느님을 숭배하던 독특한 민족이었다.

 

단군조선시대에는 제천의식이 북으로는 백두산에서, 남으로는 강화도 마리산 산정의 참성단에서 행하여졌다. 이 제천행사야말로 동이문화의 정수(精髓)이며, 우리 문화의 본성(本性)인 것이다. 따라서 동이의 후예인 우리가 부르는 '아리랑'도 종교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그 비밀이 드러날 것이다.


아리랑

 

가장 중요한 것은 ‘아리랑’이라는 말의 의미이다. 모든 종류의 아리랑 노래에서 변하지 않고 쓰이고 있는 후렴구가 ‘아리랑’이다. 그만큼 한국인에게 ‘아리랑’이라는 말은 특별한 뜻과 사연이 배어 있다는 증거다. 실지로 우리 한국인은 ‘아리랑’이라는 말 자체에 친근감을 느끼며 흥분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아리랑 연구가는 ‘아리랑’은 뜻이 없는 단순한 후렴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단지 흥을 돋우고 음조를 메워나가는 구실을 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아무 뜻도 없는 말이 한국인의 마음을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사로잡아 왔단 말인가? 당치도 않은 소리다. 만에 하나 그의 주장대로 ‘아리랑’이 단순히 ‘흥을 돋우고 음조를 메워나가는 구실을 하는 아무 뜻이 없는 말’이라고 치자. 그럴 경우에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왜 하필이면 그것이 ‘아리랑’인가? 꼭 그렇게 소리 내야만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차라리 ‘아리랑’은 끝까지 해명이 필요한 어떤 특별한 뜻이 있는 말로 간주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더욱이 ‘아리랑’은 후렴구이다. 후렴(refrain)이란 노래 곡조 끝 혹은 앞에 붙여 반복해 부르는 짧은 가사를 말한다. ‘아리랑’이 노래의 후렴구라는 사실은 오히려 ‘아리랑’이라는 말이 굉장히 중요한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대부분 후렴은 그 노래의 중요 메시지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리랑’에 담겨져 있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아리랑’에는 한국인의 원형과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아주 귀중한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아리랑’은 성민 한국인의 키워드(keyword)이다. 먼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아리랑은 한자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아리랑’이라는 한자가 기록된 책이 어디선가 고서(古書) 가운데 한 권이라도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리랑은 구전으로만 전해져 온 순 우리말의 민요이기 때문이다. ‘아리랑’은 원래 '알이랑'이다(알이랑=아리랑).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

그런데 오랜 세월동안 글이 없는 가운데 구전으로만 전해지다 보니,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로 부르게 되었고 결국 가사가 그렇게 굳어지고 만 것이다. 그러니까 원래의 노랫말을 잃어버린 것! 따라서 아리랑이 진정 어떤 노래인지를 알려면 먼저 가사부터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로 복원해야 할 것이다.

아리랑의 비밀을 해석하는 열쇠, ‘연음법칙’

알이랑 알이랑 알알이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우리말의 발음에는 ‘연음법칙’이라는 음절의 연결규칙이 있다.
자음으로 끝나는 음절에 모음으로 시작되는 음절이 이어질 때
앞 음절의 끝소리가 뒤 음절 첫소리가 되는 음운 규칙을 말한다.

예, “깊이→기피” “옷을→오슬” “책이→채기” “낮에→나제”
“벗이랑→버시랑” “가물어”→“가무러” “하늘이→하느리”

알이랑 → 아리랑 / 알알이요 → 아라리요

이제야 비로소 우리가 왜 “아리랑 아리랑 아리요”가 아닌
“아리요”라고 노래하고 있는지 그 의문이 해소되었다!
(지금까지 어떤 아리랑 연구가도 이 문제를 명확히 규명한 적이 없다.)

‘알이랑’은 ‘알’과 ‘이랑’으로 구분된다. ‘알’은 ‘하느님’을 의미한다. ‘하느님’이라는 신명(神名)은 처음에 ‘알’이었다. 그런데 ‘알’ 앞에 ‘한’이라는 관형사를 붙이고, ‘알’ 뒤에 ‘님’이라는 존칭명사를 붙여서 ‘한알님’이라고 했다. 그것이 [한알님→하날님→하늘님→하느님]으로 바뀐 것이다. 그래서 ‘알’은 ‘하느님’이다. 창조주 하느님을 뜻하는 원시 언어가 ‘알’이었다.

유대인의 ‘엘(EL)’, 아랍인의 ‘알아(알라)’는 바로 이 ‘알’에서 파생된 말이다(‘알라’는 아랍어로 유일신 하느님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인 아랍 사람들도 이 단어를 사용한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의 이름인 '엘로힘'(단수는 Eloah)은 '알라(alah)'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벌코프 조직신학 239쪽*크리스챤 다이제스트 간). 즉 창조주 하느님을 뜻하는 인류 최초의 신명이 우리 말 ‘알’이었는데, 노아에 의해 홍수 이후의 세대로 전해졌다.   

‘이랑’은 ‘~와 함께’라는 토씨로서(언어학자들은 ‘토씨’는 6천년 이상 간다고 한다) 영어의 ‘With’이다(예, 갑돌이랑= 갑돌이와 함께, 갑순이랑= 갑순이와 함께). 따라서 ‘알이랑’은 ‘하느님과 함께’(With God)라는 말이다.  

창조주 유일신의 이름 ‘알’

왜 ‘알’이 유일신 하느님을 뜻하는 말이었을까? ‘알’이 수많은 생명을 낳기 때문이다. 쌀도 볏알(볍씨)에서, 과실도 씨알에서 생기고, 하늘과 땅과 바다의 허다한 생물들이 또한 ‘알’에서 탄생한다. 그래서 ‘알’은 ‘모체(母體)’요, ‘근원(根源)’이요, ‘시작(始作)’과 같은 뜻을 갖는다. 따라서 창조주 하느님도 ‘알’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만물의 모체이시고 근원이시며 시작이시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 한국인은 그 ‘알’이 ‘큰 모체’이시고 ‘큰 근원’이시며 ‘커다란 시원(始原)’이시기에 ‘알’ 앞에 ‘한’이라는 관형사를 붙였다. 또한 그 ‘알’이 인격적 존재이심으로 ‘알’ 뒤에 ‘님’이라는 존칭명사를 붙였다. 그래서 창조주 유일신을 ‘한알님’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 ‘한알님’이 [한알님→하날님→하늘님→하느님]으로 변한 것이다. 따라서 ‘알’은 하느님을 뜻하는 말이다.   

더욱이 ‘하늘’은 둥굴어서 ‘알’인데, ‘하늘’이라는 말도 처음에는 ‘한알’, 즉, ‘큰 알(大卵)’이었다. 한알→하날→하늘로 변한 것이다. 만물을 내신 한알님(하느님)은 한알(하늘)에 계신다. ‘큰 알(大卵)’, ‘큰 모체(母體)’, ‘큰 근원(根源)’ 같은 뜻으로서의 ‘한알’에 ‘하늘’이라는 말의 기원이 있는 것이다. 

지난날의 우리 신화 ? 전설에서, 한 시조(始祖)의 탄생이 난생(卵生)으로 이어지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밝불거뉘)는 망아지가 알을 품고 있다가 뛰쳐 나간 그 알에서 태어났다. 그 밖에도 비슷한 이야기는 많다. 짐승이나 사람이 알을 낳는다. 너무도 이상해서 갖다 버린다. 그러면 새와 짐승들이 그 알을 보호하며 노래 부른다. 그렇게 하늘의 뜻에 따라 보호를 받으며 태어난 것이 고주몽(高朱夢)이기도 하고, 금와(金蛙)이기도 하다.

'알'이라는 것은 우리 조상들에게 있어서 사물(事物)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시작’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커다란 시원(始原)’으로서의 ‘알’이 곧 한알→하날→하늘로 된 것이다. 그러한 하늘이었기에 삼라만상(森羅萬象)은 곧 당신의 것이었다. 당신이 낳으시고, 당신이 기르시고, 또 당신이 주재하시는 것이었다. 홍수 전 사람들이 창조주 유일신을 ‘알’이라고 불렀던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느님을 뜻하는 성경 원어 ‘엘(EL)’은 바로 이 ‘알’에서 가지 쳐 나온 말이다. ‘엘’은 ‘다스리는 이’, ‘강하신 분’이란 뜻을 가진 신명(神名)으로 셈어(Shemitic)에서 전반적으로 사용된 ‘하느님’ 또는 ‘신성(Divinty)’에 관한 호칭이다. 이 ‘엘’은 바로 ‘알’의 변음이다. 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하느님을 ‘알’이라고 불렀다. 이 ‘알’이라는 단어는 창조주 하느님을 뜻하는 일종의 원형 언어로서 노아에 의해 홍수 이후의 세대로 전승되었다.

‘알’이 고대에 하느님의 이름이었음을 보여주는 언어학적 증거로서 ‘메아리’를 들 수 있다. ‘메아리’는 본래 말이 ‘뫼알이’ 이다. 이 말은 ‘뫼의 알’, 즉 ‘산신’을 말한다. 산에 가서 ‘야호~’하고 고함을 치면 ‘야호~, 야호~, 야호~’라고 산이 있는 숫자만큼 되돌아오는 소리를 우리 조상들은 산신의 소리로 연상했던 것이다. ‘엘(EL)’, ‘얼’, ‘일’과 같은 말들은 모두 바로 이 ‘알’의 변음이다.

 ‘알’에서 가지 쳐 나온 말 ‘얼’  

‘얼’이라는 토박이말도 ‘알’에서 가지 쳐 나온 말로서 역시 ‘신(神)’, ‘넋’과 같은 의미의 말이다. ‘정신 나간 사람’을 두고 ‘얼간이’(얼이 간 사람) 혹은 ‘얼 빠진 사람’이라고 하고, ‘얼떨떨함’이나 ‘얼이둥절’(어리둥절)은 ‘정신을 가다듬지 못한 상태’이며, ‘얼뜨기’는 ‘다부지지 못하고 겁이 많은 사람’을 뜻하며, ‘얼버무림’은 ‘제대로 버무리지 못함’을 이르는 말이다. 이렇게 ‘얼’은 ‘정신’을 뜻하는 우리의 훌륭한 토박이 말이다. 이 ‘얼’이라는 말의 시작이 바로 ‘알’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고대 수메르어에서도 인간의 정신(Human spirit)을 뜻하는 단어가 ‘A-LA’였다는 것이 뒷받침 해준다.   

이 ‘얼’을 드러내는 곳이 인체에 있어서는 ‘얼골’(얼골→얼굴)이다. ‘얼골’을 보면 그 사람의 영적인 상태, 즉 ‘얼’이 어떤 것인가를 대충 알 수 있다. ‘얼골’에 그것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몸 안에서 ‘얼’이 사라지면 송장이 되고 나중엔 뼈만 남는데, 그것은 더 이상 ‘얼골’이 아니므로 ‘해골’이라고 한다.   

한국인의 무덤이 동그란 까닭   

한국인의 무덤은 동그란 모양의 봉분인데, 그것은 ‘큰 알’을 뜻한다. 셈의 후손으로서 ‘한알님’께 제사지내며 생활했던 한국인의 선조들은 스스로 천손민족(天孫民族), 즉 ‘한알님’의 백성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죽음이란 ‘한알’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덤이 동그란 모양의 ‘알’인 것이다. 그들은 ‘한알님’의 백성으로서 ‘알’에서 왔으니 ‘알’로 돌아가고자 했다. 실로 한국인은 ‘알이랑 정신’으로 살고 죽는 ‘알이랑 민족’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알’이 원래 무슨 말인지 확실히 깨달았다. 그것은 홍수 이전 최초의 인류 가계로부터 내려온 지상 최초의 낱말 중 하나로서, 고대에 창조주 유일신을 뜻하는 하느님의 이름이었다. 그래서 ‘알이랑’은 ‘하느님과 함께(With God)’라는 말이다.

고개를 넘어 간다

‘고개를 넘어 간다’는 가사는 무슨 뜻일까? 그것은 고대 한민족이 이란고원을 지나 파미르고원을 넘어, 천산산맥과 알타이산맥을 넘어갔다는 말이다. 실로 수많은 고개를 넘은 것이다. ‘파미르 고원’을 지나(支那) 사람들은 총령(蔥嶺: 파총, 재령)이라고 하는데, 이는 한국어 파(蔥) 마루(嶺) 그대로 파마루(파미르)이다. 지리학에서도 역시 파미르 고원(蔥嶺)에서는 파(蔥)가 많이 야생한다고 한다. 파미르 고원은 ‘파마루’로서 파(蔥)가 많이 자생하는 산마루(嶺)이기에 파마루(파머루) 고원인 것이다. ‘파미르’의 어원이 한국어 ‘파마루’이다. 한국인은 남자를 사내라고 한다. 사내는 원래 ‘산아이’가 [산아이→사나이→사내]로 변한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고대에 산지, 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을 넘어 동방으로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언어적인 연관성은 고대 한국인이 참으로 ‘파미르고원’을 지나 ‘천산산맥’을 넘고 ‘알타이산맥’을 넘어서 동방으로 이동해 왔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고고학적 증거이다.

알타이 고개를 넘어서 동쪽으로 조금 더 이동하면 바이칼(밝익알) 호수가 나온다. 한국인의 선조들은 이 바이칼 호수를 거쳐 동쪽으로 계속 이동하다가 마침내 아시아 동녘에서 제일 높고 밝은 산인 한밝산(犬白山→白頭山)에 이르러 배달나라를 세웠던 것이다. 백두산 산정에 올라 창조주 한알님께 천제(天祭)를 드린 후에!(우리 겨레가 평지가 아닌 산꼭대기에서 드렸던 산정제사는 대홍수 후 노아가 알아랏 산정에서 거행했던 역사적 ‘제천의식’을 답습한 것이었다).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   

따라서 이 노래 가사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이요
하느님과 함께 고개를 넘어 간다
(with God, with God, with God, just God. 
 accompany with God, I will cross over the mountains)

‘아리랑’은 창조주 하느님을 섬기던 고대 한국인이 이 땅에 오기까지 수많은 산과 언덕과 고원들을 넘어 오면서 부른 ‘찬송가’였던 것이다. ‘아리랑’이 우리 겨레의 마음속에 그토록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겨레의 역사와 가장 오랫동안 함께 해온 민족의 숨결이며 역사의 맥박이기 때문이다.



아리랑의 나머지 가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후대에 가사들이 변형,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굳이 의미를 탐구하지 않아도 무방하다. 그러나 나머지 가사들을 후렴구와 연결해서 그 뜻을 해석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이란 누구를 뜻할까? 문맥상 그들은 “하느님과 함께 고개를 넘어 가는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이 된다. 왜냐하면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는 바로 앞의 가사는 “하느님과 함께(with God) 고개를 넘어 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 가사는 유일신 하느님을 섬기는 자들, 곧 천손민족의 찬송이며 믿음의 고백이었다. 그러므로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이란 창조주 하느님을 불신, 배척하는 무리들을 의미한다.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는 것은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에 대한 악담이나 저주가 아니다. 만약 노래 가사가 “나를 버리고 가는 놈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고 했다면, 그것은 실제로 발에 병이 나라고 욕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가사는 가는 놈이 아니고 가시는 님이다. 따라서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는 것은 발병이 나서라도 더 떠나가지 못하고 나의 품으로 되돌아오라는 회귀원망(回歸願望)의 연정(戀情)을 노래한 것이다.   

즉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버린 자들을 향해 다시 순수한 하느님 신앙으로 되돌아 올 것을 사랑으로 촉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겨레의 노래 ‘알이랑’에는 ‘하느님을 위한 열정’과 ‘잃은 자를 위한 연민’이 함께 깊이 배어 있다. 즉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얼이 담겨 있는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경천애인(敬天愛人)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마 22:37~40).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수심도 많다  

아리랑의 2절은 푸른 하늘의 잔별만큼이나 우리 가슴엔 수심도 많다고 노래한다. 왜 알이랑 찬송을 부르며 동방으로 천동(遷動)하던 우리 조상들의 가슴엔 그리도 근심이 많았을까? 그것은 1절의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 때문이었다. 즉 유일신 신앙(제천신앙)을 저버린 자들이 제천민족 우리 조상들의 커다란 근심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세상 근심과는 차원이 다른 ‘거룩한 근심’이었다(고후 7:10).

 


이와 같은 역사적 사연을 간직한 '알이랑' 찬송은 우리 조상들이 동방의 산지를 넘어 이 땅에 오기까지 끊임없이 불리어졌다. 그리고 오늘도 겨레의 삶 가운데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상 자세히 살펴본 바처럼 아리랑은 ‘찬송가’이다. 그래서 ‘아리랑’은 우리 한민족의 정체성을 한마디로 알려주는 ‘천손민족(天孫民族)’ 코드이다. 우리 배달겨레는 세계 만민 중 민족사를 ‘알이랑’ 곧 ‘하느님과 함께’라는 유일신 신앙으로 시작한 단 하나의 민족인 것이다.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장삿꾼이었으며, 아브라함도 처음에는 그 아비처럼 우상을 숭배하는 다신론자였다.)

 

2.알이랑 민족 한국인의 성경상의 기원


우리 겨레의 근본 사상은 ‘알이랑 정신’이다. ‘알이랑’은 ‘하느님과 함께’(with God)라는 뜻이다. 따라서 그것은 ‘하느님 중심 사상’이요, ‘신본주의 정신’이다. 홍수 후에 그렇게 철저한 유일신 신앙을 갖고서 알이랑(하느님과 함께) 고개(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를 넘어 동방으로 천동(遷動)한 족속은 누구였을까? 그들은 셈의 셋째 아들 아르박삿의 손자 에벨의 둘째 아들 ‘욕단’의 가계이다.

 

셈족의 종가(宗家) 욕단 족속  

 

창세기 10장 21절에 보면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라는 말씀이 있다. ‘에벨’은 셈의 셋째아들 아르박삿의 손자였다. 셈은 아르박삿 외에도 네 아들이 있었고(창 10:22), 따라서 셈은 이 모든 자손들의 조상임에도 틀림이 없다. 그런데도 셋째 아들 아르박삿의 손자 ‘에벨’을 먼저 언급하면서,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으로만 구별해 놓았다. 그 의미는 무엇인가?

 

셈의 후손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셈의 셋째 아들 아르박삿의 손자 ‘에벨의 혈통’이 선택된 종족이라는 것이다. 즉 셈의 하느님(창 9:26)은 이제 ‘에벨 자손의 하느님’이 되신 것이다. 그러면 ‘에벨의 자손’이란 누구인가? ‘벨렉’과 ‘욕단’ 두 형제뿐이다.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창 10:25).

 

따라서 신적 선택을 받은 종족인 ‘에벨의 온 자손’이란 곧 ‘벨렉 자손’과 ‘욕단 자손’을 말하는 것이다.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라고 했으니 셈은 곧 그 두 형제의 자손들의 조상이 된다는 말이요, 하느님은 ‘셈의 하느님’이라 했으니(창 9:26) 곧 ‘벨렉 자손의 하느님’이시요, ‘욕단 자손의 하느님’이신 것이다. 여기에서 여호와 하느님은 선택된 백성이 하나가 아닌 둘인 근거를 분명히 예비하셨다. 선택받은 백성은 ‘벨렉계 선민’과 ‘욕단계 선민’ 두 계열의 백성이 존재한다. 이와 같은 사실을 칼빈은 그의 창세기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하고 있다: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셈의 아들들에 대하여 말하려는 기회에 모세는 간단하게 서론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 서론은 다른 사건들에 대하여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 것은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이 계열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종족이기 때문에 하느님은 다른 민족들 가운데서 특별한 표로서 이 종족을 격리시키기를 원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것이 모세가 특별히 그를 가리켜서 ‘에벨 자손들의 조상’ 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이유가 되고 있다. 그것은 셈의 복이 무차별하게 그의 모든 자손들에게 내려오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한 가족에게만 그것이 상속되어 남게 되었기 때문이다.”(존 칼빈 원저, 「성경주석 창세기」, 서울: (주)성서원, 1999, P. 301)

 

셈을 “에벨 온 자손의 조상”으로만 부각시킨 까닭은 ‘에벨의 자손’이 선택된 종족이며, 셈의 복이 한 가족 ‘에벨의 후손’에게만 승계되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에 주목하라. 여기에서 '셈의 복'이란 창세기 9장 26절에 기록된 것으로서 하느님이 '셈의 하느님'이 되신다는 복이다. 즉 천손으로 구별되는 복인 것이다.

 

이 계시를 깨닫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에벨은 24절에 나오며, 24절에 에벨이 나오기 전에 벌써 셈의 후손이 여럿이 나오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냥 이름만 대고 넘어가면서 에벨만은 셈의 후손 꼭대기에다 올려놓은 것은 선민, 즉 ‘천손민족’이 에벨을 통해서 나오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에벨’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이다. 에벨은 셈의 4대손이지만 ‘천손민족의 조상’이기 때문에 21절에서 특별히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벨렉의 후손에서는 그의 6대손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부름을 받음으로서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이 탄생했다(창 11:10~32). 그렇다면  또 하나의 천손(선민)인 욕단의 후손은 어디로 갔을까? 성경은 그들이 동방의 산악 지대를 넘어 아시아로 갔다고 말한다.


“그들의 거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쪽 산이었더라”(창 10:30).

 

여기에서 ‘산’이란 히브리어로 ‘하르’라고 하는데, 그 뜻은 ‘산맥’, 혹은 ‘일정한 지역의 산들’ 곧 ‘산지’를 가리킨다. 동양에는 큰 산들이 많이 있다. 즉 욕단은 동쪽 산악 지대를 넘어서 -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 아시아로 천동했던 것이다.

 

욕단의 가계는 에벨의 혈통으로서 셈족 중에서도 특별선택을 받은 셈족의 종가(宗家)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느님을 아는 지식이 있는 백성이었고, ‘알이랑 정신’, 곧 ‘하느님 중심 사상 ? 신본주의 정신’이 가장 확고한 족속이었다! 따라서 욕단 족속은 셈족의 정통성을 승계한 백성답게 ‘하느님과 함께 고개를 넘어 간다’, 즉 ‘알이랑(With God) 고개를 넘어 간다’라고 찬송하면서 ‘스발’을 향해 동방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스발’의 위치는 어디일까? ‘스발’을 히브리어에서 음역하면 ‘새팔’이다(우리말 성경 개역판의 히브리어 음역 표기는 고대 헬라어 번역 성경인 70인역으로부터 왔다). 먼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새팔’은 결코 당시에 존재하거나 알려진 도시와 장소의 이름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홍수로 인해 지워졌기 때문이다. 욕단이 천동하기까지 동양에는 아직 누구도 살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창세기 10장 30절에 언급된 ‘새팔’은 현실적인 지명이 아니다. 그것은 ‘예시적’인 지명이다. ‘예시’란 나중에 원형으로 구체화 될 어떤 진리가 미리 ‘암시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새팔’의 원형에 해당할 수 있는 지명 및 위치를 찾아야 한다.

  

예시적 지명 ‘새팔’은 어디일까? 일단 그곳은 아시아 동쪽의 어느 곳에선가에서 추적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욕단은 동방의 산악지대(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를 넘어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과연 어디를 뜻할까? ‘시베리아’이다. 알타이산맥을 넘어 동쪽으로 좀 더 이동하면 ‘시베리아’ 벌판이 펼쳐진다. 시베리아는 고조선의 창건 무대인 만주 대륙이 연장된 땅으로 우리 한민족의 역사의 고향이다.

 

알이랑 고개를 넘어 유라시아 대륙 동쪽으로 멀리 천동한 욕단 족속은 남북만주 및 시베리아를 아우르는 동방의 새 땅을 ‘새발’이라고 하였다. ‘새발’은 ‘새벌’의 고어로서, ‘새 땅’ ‘새 벌판’이라는 뜻이다. 욕단의 목적지 ‘새팔’은 바로 우리 한민족의 발상지 ‘새발’(시베리아~만주)을 예시한 것이다. ‘새팔’과 ‘새발’은 발음이 아주 유사하다. ‘ㅍ’을 약하게 소리 내면 ‘ㅂ’이 된다. ‘ㅍ’과 ‘ㅂ’은 모두 ‘파열음’으로서 한 계통의 소리이다. 따라서 자주 혼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안팎’은 ‘안밖’이요, 동이족의 후예인 인디언은 ‘아버지’를 ‘아파치’라고 부른다. 더욱이 우리말에서 ‘벌’(발)의 옛말이나 거센말은 ‘펄’(팔)인데 “매우 넓고 평평한 땅”을 의미한다. 따라서 ‘새팔’ = ‘새발’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 알이랑 민족 한국인의 성경상의 직계 조상은 셈의 현손(玄孫) ‘욕단’이다. 따라서 동방의 한국인은 이 땅 위에 존재하고 있는 또 하나의 선민인 것이다. 여호와 하느님께서 나중에 쓰시려고 “감추어 두신 선민”이 바로 알이랑 민족 우리 한국인이다(그러나 당신이 누구이든 꽉 막힌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면, 상실되었던 계시가 드러나고 회복되더라도 결코 그것을 취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겨레가 하느님이 감추어 두신 ‘또 하나의 선민’이라는 교훈은 새로운 선민주의(particularism)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특별계시인 성경에 근거한 객관적 사실이다. 아시아 서쪽 땅 끝에 거주하는 유대인은 셈족의 현저한 ‘좌측 가지’인 벨렉의 후손이다(창 10:21,25; 11:10~32). 그리하여 그들은 천손민족이다. 아시아 동쪽 땅 끝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셈족의 현저한 ‘우측 가지’인 욕단의 후손이다(창 10:21,25,30). 그리하여 그들도 천손민족, 곧 이 땅에 존재하고 있는 또 하나의 선민인 것이다.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겉사람’과 눈에 보이지 않는 ‘속사람’이 있는 것과 같이 선민, 곧 천손민족도 겉으로 드러난 선민(벨렉 계열 유대민족)이 있고 속으로 감추인 선민(욕단 계열 한국인)이 있다.

 

창세기 10장 21절에 의하면 벨렉 계열과 욕단 계열은 셈족의 현저한 두 가지(branch)로서 신적 선택을 받은 족속인 ‘에벨의 혈통’이다. 이것은 상실되었던 진리로 마지막 때에 회복되어야 할 아주 중요한 계시이다.

 

향후 전개되는 구원사에 있어서 에벨의 자손인 벨렉계 천손민족과 욕단계 천손민족은 중요한 위치를 점할 것이었다. 전자를 통해서는 구원의 길을 여시고, 후자를 통해서는 구원사를 마무리 하신다!

 

*벨렉계열 선민(천손)→ 먼저 사용하셨음→ 구원사를 여심→ 복음의 첫번째 주자

*욕단계열 선민(천손)→ 나중에 사용하심→ 구원사를 완성→ 복음의 마지막 주자

 

밝은 땅(밝달)의 임금 욕단

 

빛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공경하던 욕단 족속은 빛이 시작되는 땅, 곧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가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아침에 뜨는 해를 따라 알이랑 고개를 넘어 쉬지 않고 동쪽으로 이동하다가, 마침내 동해에 해 떠오르는 ‘밝의 땅’, 동방의 땅 끝에 당도하였다. 그리고 백두산과 그 변두리를 근거지로 배달나라를 세운 우리 밝달겨레(배달겨레)의 조상이 되었다. ‘밝달’의 ‘달’은 ‘아사달’의 ‘달’로서 ‘땅’이라는 말이다. 양달이 양지(陽地)요, 응달이 음지(陰地)요, 빗달은 비스듬한 땅(傾斜地)이다.

 

그때에 사람들은 욕단을 무엇이라고 불렀을까? 물론 ‘밝달임금’이라고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욕단은 사람들을 ‘밝의 땅’으로 이끌고 온 ‘밝달족’(광명족)의 우두머리(Headship)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단군’이 ‘욕단’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단군’이란 칭호는 ‘밝달임금’(檀國의 君長: king of Bakdal)의 이두식 표현이기 때문이다. ‘단군’은 ‘밝달임금’ 또는 ‘배달임금’ 등으로 구전되어 내려오던 우리 동방(조선)의 고유의 호칭을 후세에 한자(韓字)로 의역(意譯)하여, ‘檀(박달)’ ‘君(임금)’ 이라고 표기하여 놓았기 때문에 비로소 ‘단군’이라는 칭호와 발음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단군’이란 이름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밝달임금’이란 뜻의 보통명사이다. ‘단군’은 한 사람이 아니고 그 자리를 물려받은 후손들 모두가 단군이라고 불리어졌다.「제왕운기」와 기타 여러 기록에 의하면 단군이 47대라고 하니, 건국한 이는 제1대 단군이고 아사달에 입산(入山)한 이는 제47대 단군인 것이다. 이른바 ‘단군’이라는 한 임금이 조선을 건국한 지 천여년만에 산에 들어가 신(神)으로 화(化)했다는 전설은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이 후대에 와전된 것이다.

 

한민족의 직계 조상 욕단은 배달나라를 세울 때 먼저 백두산 산정(山頂)에 올라 창조주 하느님께 천제(天祭)를 드렸다. 그것은 일찍이 노아가 대홍수 후 거행했던 아라랏 산정의 제천의식(祭天儀式)을 답습한 것으로서, 이렇게 ‘평지’가 아닌 ‘산정’에서 제사하는 관습은 셈족의 종가(宗家)인 욕단 족속에게는 아주 당연한 제사 방식이었다.


2편에 계속..

소제목: 번영 신학은 현대판 바알이다.

 

타락한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기적이다.  자기 만족(滿足)을 위해 끊임없이 욕심을 낸다.  이 욕심이 감추어진 체 종교들도 만들어진다.  이를 안 사도 바울은 이렇게 경고 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3:5)  탐심(貪心: greedy desire)이 온갖 우상 숭배를 강요하는 종교의 원인이요 뿌리란 뜻이다.

인간의 이런 타락한 이기심을 가장 잘 만족시켜 주는 종교가 바로 무교(巫敎: shamanism)이다.  무교는 한국은 물론 세계의 모든 종교들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이 종교는 인간의 탐심을 잘 채워주기에 인류 사회를 오랜 동안 지배한다.  한국에 들어온 모든 종교들 즉 불교나 유교도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무교에 흡수 당했다.  종교의 세속화이다.

이 점에서 한국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다.  적극적인 사고 방식을 소개한 ㅅ교회의 ㅈ목사와 그의 동역자였던 ㅊ여목사에 의해 기복주의적인 신학 즉 번영 신학이 한국 교회에 번지기 시작했다.  처음 병 고치는 기도에서 출발되었다.  이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번영 신학이 주장되었다.  이를 지지하는 성구가 요한일서 1 2절이라고 이들은 말한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번영 신학은 4중 복음으로도 설명된다.

 

구약 시대에도 기복적(祈福的)인 종교가 있었고 이 때문에 선민 이스라엘은 항상 조심해야 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직전 모세는 모압 평지에서 요단 강 건너편 약속의 땅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스라엘의 미래가 걱정되었다.  이스라엘에게 미리 경고해야 했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8:12-14)

마침내 가나안을 정복하고 안식을 얻은 이스라엘은 사사 시대를 맞았다.  이 때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종교였던 남신 바알과 여신 아스타롯을 섬기기 시작했다(2:11-13).  이 신들은 농업 신들로 구약 시대의 배금 종교(拜金 宗敎: mammonizm)였다.  창조주 하나님 대신 우상(偶像)이라는 헛된 것을 섬기는 것은 모세 율법이 금했다(20:4-5, 32:21, 삼상12:21).

그러므로 사사(士師)들과 왕들과 선지자들은 늘 바알 종교와 끊임없이 다투어야 했다.  그러나 결국 이스라엘도 가나안의 기복적인 종교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만 타락하며 멸망 했다(2:8, 19:4-5).  나라가 망하는 것은 외부보다 내부의 부패와 타락에 연유한다.  말씀의 종교가 물질숭배 종교로 바뀌자 선민 이스라엘도 영적 그리고 정신적으로 부패하며 내부적으로 서서히 무너졌다.  이 때 외부의 공격은 쉽게 이스라엘을 쉽게 무너트렸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현상이 이미 오래 전부터 한국 기독교에 나타났다.  그 결과 한국 기독교가 자신의 사회로부터도 불신(不信)을 당하고 조롱 받고 있다.  세계 교회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었던 한국 교회의 부흥기는 지났고 복음이 들어온 지 100여 년 조금 지나 이미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빨리 탄 불이 빨리 꺼지듯이……  이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기복주의적인 번영 신학에 있다.  달리 말한다면 기독교가 한국의 전통 종교인 무교를 극복하지 못한 데 있다.(*기독교와 한국인의 종교적 정서라는 글 참조. http://blog.naver.com/rassvet/40055475613)

번영 신학이 어떤 점에서 비성경적인가를 알아야 한다.  이로써 그 동안 한국 교회를 기만한 번영 신학 즉 4중 복음을 고발하기 위함이다.  오늘날의 바알인 형통 신학 즉 번영 신학으로 인해 처참하게 무너진 기독교를 새롭게 세우기 위함이다.

 

번영 신학은 신구약 성경 사이 존재하는 계시 방법과 내용상 차이를 전혀 모른다.

무슨 목적으로 하나님은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했는가?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1:26)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자신의 통치 즉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고자 했다.  하나님 나라 신학은 이미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출발되었다.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형태로 이 세상에 세워질 것이다.  이를 위한 조건으로 하나님은 선악과 규례를 인간에게 주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세워지고 보존됨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철저히 법치(法治) 즉 말씀 통치 자체이기 때문이다.  순종하면 아담과 하와는 낙원 에덴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순종한다면 이들은 낙원을 잃을 것이다.

여기 두 가지 사실이 주목된다.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이 세상에 세워질 것이며 그 나라 안에서 누리는 복도 물질적(物質的)일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이에 실패하여 낙원을 잃었다.  그리고 에덴 밖에서 경제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어렵게 살아야 했다.  타락 전후(前後) 하나님의 은혜와 복()은 이렇게 물질적인 것으로 표현되었다.

 

이런 복의 성경적인 관점은 족장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통치 즉 하나님 나라를 가나안 땅에 세우기 위해 아브람을 갈데아 우르에서 불러냈다.  하나님은 보이는 세상에서 그를 불러내 보이는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게 했다.  마침내 가나안에 살았지만 아브라함을 비롯한 이삭과 야곱은 나그네였다.  그러나 물질적인 복을 충분히 누리며 살았다.  그 조건은 믿음이었다.  믿음으로 살면 물질로 표현된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

아브라함의 소명 목적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해방시켜 가나안으로 인도했다.  그 목적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애굽의 노예로 고생한 이스라엘을 부자로 만들어 주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실현 즉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함이었다.  마침내 하나님 나라는 다윗 왕국이라는 눈에 보이는 세상 나라 형태로 가나안 땅에서 실현되었다.

다윗 왕국은 이방 나라와 구별되어야 했다.  그 구별은 하나님의 율법에 있었다.  율법에 따라 산다면 이스라엘은 이 세상에서 일등 나라가 될 것이다.  일등 나라라는 증거는 정치, 경제, 사회와 문화 등등 모든 분야에서 일어날 것이다(4:6, 28:1-14).  이렇게 보이는 형태로 하나님은 구약 시대 자신의 백성을 축복했다.

여기엔 다른 목적도 있었다.  원복음(3:15)이 약속한 메시아에 의해 앞으로 세워질 하나님 나라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예언해 주기 위함이었다.  신약 시대 세워질 하나님 나라도 법치에 근거할 것이며 그에 따라 하나님의 복이 결정될 것임을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미리 계시해 주었다.

 

다윗 왕국이 망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다윗 왕국은 결국 그림자였기 때문이다.  참이 아니었다.  참이 아닌 것은 곧 올 참 것을 위해 무너져야 한다(7:18-19, 8:13).  앗수르 제국과 바벨론 제국에 의해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은 멸망해야 했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서 한 동안 사라졌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와 복을 앞으로 외형적(外形的)인 것으로 더 이상 표현 또는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  신약 시대를 연 예수님이 그 좋은 예이다.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왕궁이 아닌 목수의 집안에 출생했다.  창조주가 이 세상에 누울 것이 없어 말 구유에 탄생한 이유였다.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 전달하려고 하는 하늘의 복은 세상 것과 완전히 달라서 세상 것으로 도저히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왕궁에서 왕자로 자라지 않았고 목수의 아들로 자랐다.  그리고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예수님은 구약에서 약속한 메시아로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나 그는 세상 권력이나 부귀영화를 전혀 요구하지 않았다.  그의 나라는 구약 시대와 달리 세상 나라에 더 이상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18:36).  그러므로 세상 나라 방식으로 즉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나 권세를 표현하지 않았다.  이렇게 신약 시대 계시의 방법과 내용이 구약 시대와 달리 완전히 바뀌었다. 이에 따라 신약 시대 하나님이 복을 주는 방법도 달라졌다.  눈에 보이는 방식에서 안 보이는 방식으로…… 

산상수훈(5-7)의 팔복(八福)은 이를 잘 증명한다(5:3-10).  팔복은 하나님 나라의 복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 복을 받을 대상은 이 세상에서 그리 사랑 받지 못할 사람들일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 마른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에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그리고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 등등……  이들은 구약 시대 찬란한 믿음의 영웅들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처럼 어디에도 잘 믿으면 잘 먹고 잘 살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더 이상 기록되지 않았다.  ㅈ목사가 4중 복음의 증거로 내세우는 성구 요일1:2절이 비교적 구약적인 표현으로 보인다.  그런데 왜 단 한번만 신약 성경에 기록되는가?  아주 중요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면 한번의 기록을 보고 구약과 같은 복을 지지한다고 감히 주장할 수 있는가?

번영 신학은 몇 가지 성구들로 지지 근거를 찾는다.  그러나 앞뒤 문맥을 무시하고 관련 성구들만 주장한다.  예컨대 눅4:18-19절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증거를 위해 그가 행할 이적에 대한 기록이지 절대로 번영 신학을 지지하지 않는다.  8:28절에서 언급된 합력한 선()은 앞뒤 성구들을 살핀다면 물질이나 경제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성도의 최종적인 구원인 영화(榮華: sanctification)와 관계된다(8:29-39).  그리고 히11:1절을 근거 성구로 들이댈 수 있다.  역시 앞뒤 성구들을 살피면 물질적으로 잘 먹고 잘 산다는 내용은 전혀 없다.  믿음으로 산 생애의 근본적인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설명하는 성구일 뿐이다.

 

놀라운 사실이 하나 발견된다.  대속 죽음과 부활로 인해 예수님은 구세주와 만왕의 왕이 되었다.  번영 신학에 의하면 예수님은 마침내 죽음으로 이 세상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부활한 예수님은 이 위대한 성공과 그 결과를 만인 앞에서 보여주며 누릴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하늘로 승천(昇天)했다. 당연히 누릴 수 있는 세상의 부귀와 영화 그리고 권세를 부활한 예수님은 완전히 부정해 버렸다.  그의 부활로 인해 이 세상에 미쳐질 하늘의 복은 세상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헛된 탐심을 품지 못하도록 부활한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 사람들 앞에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영화와 영광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의 본()을 따라 이 땅의 성도들도 세상 것을 부정하며 하늘 소망을 품고 살아야 한다.  이렇게 기복주의적인 번영 신학은 신약 시대 철저히 부정되었다.

그러나 반영 신학은 아직도 구약 성경에 연연하다.  그렇게 구약 시대 임시적으로 표현된 그림자 같은 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런 추구는 예수님의 복음과 부활로 이미 성취된 참 복을 거절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번영 신학은 비성경적이다.  재림 이후에만 나타날 영화를 소망하며 이런 거짓된 복을 거부하여야 하지만 번영 신학은 여전히 거짓 복을 추구하게 만든다.

이런 거짓 신자들을 염두에 두고 사도 바울은 진실한 성도들을 위해 이렇게 경고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고전7:29-31)

 

번영 신학은 성경 진리의 반()만 고집한 결과이다.

기복주의적인 번영 신학의 문제는 대립적인 이분법(二分法)에 따라 성경을 해석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예컨대 오래 수()를 누리고 복을 받으며 건강하게 사는 것은 좋지만 그와 반대되는 것은 안 좋다.  즉 행복은 좋지만 불행은 나쁘다.  또는 성공은 좋지만 실패는 안 좋다.  이런 식의 사고 방식을 번영 신학은 보인다.

구약 시대 이런 사고가 맞는 듯이 보인다.  족장들의 경우처럼 믿음이 좋은 신앙인들은 마지막까지 수복강령을 누리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 땅의 나그네로 살았다.  나그네는 정착 삶이 아니다.  항상 떠돌아 다녀야 했다.  어디를 가나 정착 사회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고 기근 때는 오히려 약탈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105:12, 7:4-6).  

이들은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이들의 성공과 강함이 전부는 아니었다.  이들에게도 약한 모습이 보였다.  이들은 이 세상에 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11:9-10).  물질적인 복을 누린 것을 사실이었지만 나그네 삶을 사는 데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 받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기복적인 번영 신학은 이들이 마치 이 세상에서 거부(巨富)처럼 산 것처럼 과장하여 성경을 해석한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 번영 신학은 의미를 잃었다.  구약 시대 선민 이스라엘 사회도 부패했다.  이 때 의인(義人)들은 진실한 신앙 때문에 오히려 고난을 당했다.  오늘날도 마찬 가지이지만 이런 사회에서 믿음으로 성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시대 의인들은 고난을 기쁘게 받았다. 행복은 좋고 불행은 나쁘다는 식의 이분법이 이들에게 없기 때문이다.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믿고 기뻐했다(34:19).  고난이 신앙 성장에 도움이 됨을 알았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119:67)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119:71)  그리고 구약 성경은 고난 자체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숨어 있다고까지 말한다.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첩경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종적을 알 수 없었나이다(77:19)  고통을 주는 멍에를 오히려 기뻐하라고 성경은 말한다.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입을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3:27-33)  예수님도 말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11:29-30)  이런 성구들은 구약 성경이 번영 신학을 지지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런 대립적 이분법의 문제는 많고 적음, 크고 작음 그리고 높고 낮음 같은 수준과 정도 면에서도 드러난다.  그 수준과 정도에서 클수록 좋은 것이며 작을수록 안 좋다고 번영 신학은 생각한다.  예컨대 일억 원보다 십억 원을 더 좋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은사나 능력 면에서도 나타난다.  작은 은사나 능력보다 더 큰 은사나 능력을 이들을 더 선호한다.

이에 따라 믿음의 등급과 목회자의 등급도 매겨진다.  하급자는 상급자를 지극히 존경한다.  교회 안과 목회자들 가운데 차별이 생긴다.  하나님의 은사인 능력은 성공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봉사하고 섬기는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렇게 이분법에 근거를 둔 은사론은 기독교 내에 상하계층을 만들어 목회자들을 계급화시켰다.  사도 바울이 설명한 지체이론(고전12:4-27)의 신학적인 의미를 이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사나 능력은 작은가 큰가의 문제라기보다 충성의 문제이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탈란트 비유가 이를 잘 증언한다(25:14-30).  하나님의 평가는 번영 신학의 그것과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번영 신학은 하나님 앞보다 사람들에게 과시하기를 더 좋아한다.

 

더 나아가 번영 신학은 믿음의 정도가 물질적 그리고 경제적 또는 사회적 지위도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성공과 출세의 정도가 믿음의 정도로 이해된다.  이들이 구약 식으로 믿음과 복을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다.  안 보이는 믿음을 보이는 것으로 측량하려 한다.  결국 믿음과 무관하게 부자 신자라면 좋은 믿음의 소유자로 칭찬받는다.  이렇게 기독교와 그 진리를 심각하게 왜곡시킨다.

이들의 성경 해석에 크고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이분법에 따라 번영 신학에 안 맞는 성구들을 모두 폐기된다.  강대상에서 전혀 설교되지 않는다.  그렇게 이들은 성경의 반 쪽만 갖고 신앙 삶을 기꺼이 살려 한다.  이렇게 이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파괴시킨다.  자기 마음에 드는 성구들만 설교하기 때문이다.  번영 신학은 결국 성경 말씀을 더 하거나 빼고 해석한 결과 나타난 것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다(4:2, 12:32, 30:6, 22:18-19).

그리고 번영 신학에 또 다른 문제가 발견된다.  번영 신학은 예수님의 구속의 결과만 누리려 한다.  그 복된 결과를 가져온 과정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다시 말해 구속의 결과 얻은 복만 강조하려 함으로 그 복을 초래시킨 예수님의 고난을 애써 외면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생의 복을 주려고 스스로 십자가에 죽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영생의 복을 얻기 위해 복음을 위해서라면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  번영 신학은 성공과 복만 추구함으로 복음을 위한 고난과 헌신에 무관심하다.  그리고 과정보다 결과를 즐김으로 신앙의 성숙이 없다.  그러나 신앙인들에게 삶의 모든 결과는 예수님 재림 이후 나타나고 이를 위해 성도는 복음을 위해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화의 과정이다.  그러나 번영 신학은 재림 이후에 받을 복을 미리 앞당겨 이 세상에서 누리려 한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반한다(10:38, 14:22).

 

그러나 구원 이후 성도에게 대립적인 이분법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  이 세상의 유일한 주인이 예수님의 제자이며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들이 선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리고 그에게 향한다면(11:36) 무엇이든지 예수 안에서 아니요가 아니라 가 된다.

성도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은 어느 때는 복을 그러나 다른 때는 화를 보낸다.  이 때 성도는 화를 나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참 좋은 예는 죽음이다.  성도는 죽음을 통해 천국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불신자에게 죽음은 불행 자체이지만 성도에게는 축복 자체이다.  이렇게 구원 받은 성도에게 대립적인 이분법은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 점에서 대립적인 이분법에 근거를 둔 번영 신학은 비성경적인 가르침이다.

이렇게 번영 신학은 이 세상에 관심을 두게 만들며 재림 이후 완성될 소망을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이것이 교회의 세속화(世俗化)이다.  교회가 세속화되면 영리(營利)를 목적하는 세상 조직과 다르지 않게 된다.  그렇게 부유한 자는 웃고 가난한 자는 우는 그런 곳으로 변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고를 들어보자!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6:24-26)

 

결론

번영 복음은 반쪽 진리이다.  아니 거짓 진리이다.  복음이 말하는 두 면을 모두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번영 신학이 잘못된 그리고 비성경적인 세계관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약속의 땅 가나안과 같아 4 가지 모습을 지닌다 (‘요단에서 바라본 가나안이란 글 참조. http://blog.naver.com/rassvet/40098073224).  이 세상은 애굽처럼 빨리 벗어나야 할 곳이며 동시에 광야처럼 훈련을 받아야 곳이다.  그리고 가나안처럼 하나님 나라를 세우야 할 곳이면서 아울러 앞으로 불로 심판을 받아 사라질 세상이기도 하다.

 

성경적인 세계관은 결국 두 면, 즉 낙관적인 것과 비관적인 것을 모두 보여준다.  이 세상이 성도들이 훈련을 받아야 할 곳이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할 곳이다.  그러나 성도에게 이 세상은 빨리 벗어나야 할 애굽과 같은 곳이며 그리고 언젠가 불로 사라질 곳이기에 집착하면 안 된다.

그러나 번영 신학은 낙관적(樂觀的)인 세계관만 견지한다.  한 쪽으로 치우쳤다.  그 결과 균형 잡힌 신앙 삶을 가르치지 못한다.  현세(現世)에만 집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들이 예수님의 재림(再臨)을 잘 언급하지 않는 이유이다.  예수님 당시 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여야만 포도원을 차지할 수 있었다.  마찬 가지로 번영 신학을 추구하는 목회자와 신자들은 자신들의 것을 모두 앗아갈 예수님의 재림을 싫어한다.

 

그 동안 한국 목회자들이 번영 신학의 영향을 받으며 한국 교회가 타락하고 부패했다. ㅅ교회의 ㅈ목사 탓만이 아니다.  자신의 건전하고도 참된 성경적 신학을 버리고 그의 실용적인 신학을 많은 목회자들이 추구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복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서였다.  이것이 탐심이다.  이렇게 한국 교회의 기초는 서서히 무너졌다.

이젠 신자들이 목회자 못지 않은 신앙 수준을 길러야 한다.  성도의 수준이 높아져야 비로소 목회자들이 긴장하며 그 수준도 향상될 것이다.  그렇게 한국 교회는 신자들에 의해 개혁되어져야 한다.   마라나타!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나의 교만을 제거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NO'라고 하시며
"교만이란 내가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네가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나에게 슬픔이 없게 하소서."라고 간구했더니
하나님은 'NO'라고 하시며
"슬픔은 네가 만드는 것이지
누구에게 받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나에게 고통이 없게 하소서" 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는 'NO'라고 하시며
"고통은 우리를 세상에서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하는 은혜"라고 가르쳐 주셨다.

"주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남을 사랑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소서."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는 미소를 띠며,
"이제 겨우 네가 나를 기쁘게 하는 기도를 배웠구나!"
하고 말씀하셨다.


 - 담아온 글 -

출처: 사모님사모님/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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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타주(Utah State)는

미국 50개주 가운데서 캘리포니아 주와 더불어

outdoor, 혹은 레저 스포츠의 천국으로 불리워집니다.

 

유타에는 모두

5개의 국립공원(National Park)이 있는데

자이언 캐년(Zion Canyon), 브라이스 캐년(Bryce Canyon),

캐피털 리프(Capitol Reef), 아치스(Arches), 그리고 캐년랜즈(Canyonlands) 등입니다.

 

유타의 이들 5대 국립공원은

5개 모두 지리적으로 미국 남서부(Southwest)의

그랜드 서클(Grand Circle)이라고 불리는 특정한 지역에 속해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그랜드 서클에 대해서 언급한다면

그랜드 서클은, 북쪽으로는 프로보(Provo, Salt Lake City 의 남쪽 45마일 지점)에서부터

 

남쪽으로는 아리조나의 피닉스(Phonix)까지,

서쪽으로는 라스베가스의 부근인 Lake Mead에서부터

동쪽으로는 뉴멕시코의 산타페(Santa Fe)까지

 

Nevada, Arizona, New Mexico, Colorado,

그리고, Utah의 5개 주에 걸쳐있는 광대한 지역을 아우르고 있습니다.

 

이 그랜드 서클 안에는

유타의 5대 국립공원 뿐만 아니라

그랜드 캐년을 비롯한 9개의 국립공원과

약 20 군데의 National Monument가 산재해 있는

미국 국립공원의 보고(寶庫)와 같은 지역입니다.

 

먼저, 자이언 캐년은

그랜드 캐년, 브라이스 캐년과 더불어

미국 서부의 3대 캐년 가운데 하나로 불리워집니다.

 

자이언 캐년은

4계절 어느 때 가도 좋지만

출사로 방문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은

자이언 캐년에 단풍이 드는 11월 초순 경입니다.

 

11월 초에

자이언의 Lookout Scout나

엔젤스 랜딩(Angels Landing)에 오르면

바위에 단풍나무가 어우러진 천하 절경의 사진을 담을 수 있죠.

 

또한, 자이언 캐년의 오지에 있는

일명 Subway라고 불리워 지는 곳에 가면,

다른 곳에서는 담을 수 없는 단풍이 어우러진 다층 폭포와

 

선녀탕처럼 생긴 여러 개의 소(沼)와

동굴은 아니지만 동굴처럼 생긴 진기하고 멋진 풍경을 담을 수 있습니다.

 

여름철에 방문하면,

자이언 내로우(Zion Narrow)라고 하는

버진강(Virgin River)의 협곡을 따라 내려가면서

약 16마일에 걸쳐있는 이곳의 절경을 촬영할 수가 있습니다.

 

참고로 자이언 내로우는

미국의 이름있는 수만 개의 트레일(trail) 가운데

Top 10에 드는, 미국인들에게는 매우 유명한 트레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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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년랜즈의 메사 아치(Mesa Arch)에서 본 일출 직후의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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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rgin River 와 Angel's Landing의 모습,

오른쪽에 하얗게 보이는 부분은 East Rim의 White Cliff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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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el's Landing의 정상에서 바라 본 Zion Canyon Valley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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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okout Scout에서 바라 본 Virgin River와 Temple of Sinawava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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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rgin River와 The Organ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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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 재그로 난 길은 Hidden Valley와 Observation Point 가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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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on Narrow 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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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수 만개의 트레일 가운데 Top 10에 드는 Zion Nar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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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살이 세기 때문에 물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나무 막대기로 중심을 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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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way 입구의 층층 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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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걸 어떻게 찍어야 잘 찍었다는 소문이 날까 궁리하는 사진사들의 즐거운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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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way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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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웨이로 들어가는 길에 선녀탕 같은 여러개의 자연탕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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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웨이(Sub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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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언 캐년이 남성적이라면,

브라이스 캐년은 섬세하면서도 여성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이언 캐년이

거대한 바위군으로 이루어진 반면에

브라이스 캐년은 후두(Hoodoo)라고 하는

촛대처럼 가늘고 길쭉한 형태로 이루어진 캐년입니다.

 

브라이스 캐년은

유타의 5대 국립공원 가운데서도

해발이 가장 높은 지역(평균 해발 약 8,000ft / 2,600m)에 속해 있기 때문에

 

겨울철엔

다른 지역에 비해 눈이 많이 내리며

여름철엔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덜 덥습니다.

 

브라이스 캐년은

공식적으로 8개의 뷰포인트(View Point)가 있으며,

모든 뷰 포인트마다 브라이스 캐년의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가장 멋있는 경관을 자랑하는 뷰포인트는 Byrce Point입니다.

 

겨울철에

이곳을 방문하면 춥기는 하지만

여름철의 밋밋한 후두와는 대조적으로

설경으로 뒤덮인 아름다운 후두의 모습을 촬영할 수 있습니다.

 

브라이스 캐년에서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면

Rim 아래의 여왕의 정원 길(Queen's Garden Trail)이나

피카부(Peekaboo) 트레일을 걸으면 브라이스 캐년의 또다른 모습을 촬영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유타의 5대 국립공원 지역은

여름철엔 대부분90-100도(약 32 -약 38도)를 오르 내리기 때문에

더위에 약한 사람들은 여름철 방문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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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스 캐년의 Sunset Point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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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스 캐년의 Rim Trail에서 찍은 Hoodoo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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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의 가장 높이 솟은 Hoodoo의 이름은 Thor's Hammer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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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스 캐년의 Rim 아래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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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스 캐년을 밑에서 위로 올려다 본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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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의 정원길인 Queen's Garden Trail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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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서부 국립공원의 최고 오지인 Capitol Reef 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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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피털 리프 국립공원(Capitol Reef National Park)은

유타의 5대 국립공원 가운데서도 접근하기가 가장 어려운 오지에 속해 있습니다.

그래서 방문객도 자이언이나 브라이스에 비하면 10분의 1에서 20분의 1에 불과 합니다.

 

이곳이 오지에 있는 만큼,

깊이 들어가지 않으면 좀처럼 좋은 장면을 촬영하기 힘들지만

 

멋진 경관을 자랑하는

Panorama Point나 Chimney Rock,

그리고 The Castle은 도로 인근에 있어서 힘들지 않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특히

Scenic Drive를 따라 들어간 다음에

Capitol Gorge라고 하는 협곡에 들어가면,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거대한 협곡 가운데서 절경을 촬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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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nch 뒤쪽으로 The Castle의 모습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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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itol Reef 국립공원의 goosene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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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h Hanks Tower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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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피털 리프 국립공원의 Scenic Dr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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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itol Gorge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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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땅이라 불리우는 캐년랜즈(Canyonlands)는

콜로라도(Colorado) 강과 그린 리버(Green River)가 합쳐지는 곳으로서

크게 Island in the Sky, Needles와 The Maze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Island in the Sky의

Grand View Point Overlook에 서면

저 멀리 콜로라도 강과 그린 리버의 아름다운 S 라인의 모습을 사진에 담을 수 있으며

 

Island in the Sky의

삼거리 부근에 있는 Mesa Arch는

서부 10대 일출 사진 포인트의 하나로 알려질 정도로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곳입니다.

 

The Maze는

일반 승용차로는 접근할 수가 없고

가는 모든 길이 비포장이기 때문에 오직 하이 클리어런스의 4×4 차량으로만 접근할 수 있습니다.

 

황무지처럼 황량해 보이는 The Maze이지만

Bagpipe Butte Overlook이나 Maze Overlook에서 보는 풍경은

이곳이 왜 신들의 땅이라는 별명이 붙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니들스(The Needles)는

브라이스 캐년의 Hoodoo처럼 생긴 바위들이

뾰족탑처럼 날카롭고 길쭉하게 보여서 니들스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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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a Arch 부근의 일출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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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년랜즈의 Isalnd in the Sky로 들어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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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년랜즈 평원을 비추는 아침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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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년랜즈의 Grand View Point Overlook에서 본 Junction Butte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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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찍은 Junction Butte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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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ck Canyon Overlook에서 본 모습.......

저 멀리 눈덮인 La Sal Mountain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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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Sal Mountains 의 위용...

라 살 마운틴은 맑은 날이면 캐년랜즈나 아치스에서 볼 수 있는 산맥으로서

최고봉은 Mount Peale로서 해발 12,726 feet (3,879 m)이며, La Sal은 Salt 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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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아치스 국립공원(Arches National Park)은

다양한 아치들과 특이한 모양의 바위들이 모여있는 국립공원입니다.

 

이곳의 Park Avenue는

인디아나 존스의 영화(3탄)에 나올 만큼

독특하고 신비로운 모습을 간직한 국립공원입니다.

 

Balanced Rock은

무너질듯 하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바위가

절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바위인데 겨울 석양 때 촬영하면

눈덮인 라 살 마운틴(La Sal Mountain)을 배경으로 멋진 사진을 촬영할 수 있습니다.

 

The Windows Section은

North Window, South Window,

그리고 Turret Arch로 구성되어 있는데

저마다 독특하고 멋진 모슺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치스 국립공원에서 가장 유명한 아치는

단연 유타주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는 델리킷 아치(Delicate Arch)입니다.

 

일출, 혹은 석양 때,

잘 찍은 델리킷 아치의 사진은

훌륭한 작품이 되고도 남을 정도입니다.

 

이 외에도

Devil's Garden을 따라 걸어가면

아치스의 다양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습니다.

 

유타의 5대 국립공원을

카메라에 제대로 담으려면

최소한 1주일에서 10일 정도 걸리며,

 

LA에서 출발할 경우

아무리 빨리 돌아보더라도 최소 6일 정도 소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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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anced Rock의 모습,

이름 그대로 바위가 절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언젠가 저 바위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넘어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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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Arches 국립공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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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ret Arch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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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치스에서 가장 유명한 Delicate Arch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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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uble Arch의 모습....

두 개의 아치가 함께 있어서 더블 아치라 불리워집니다.

 

큰 아치의 넓이는 144ft(49m), 높이는 112ft(33m)이며,

작은 아치의 넓이는 67ft(20m), 높이가 86ft(26m)입니다.

 

더블 아치는 Double Window,

혹은 Twin bow Bridges라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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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이곳에도 남근석이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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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Window 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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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Window의 안쪽에서 바라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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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Window와 South Window의 모습....

 

왼쪽이 North Window인데

오른쪽의 South Window는 접근하기가 어려워서 일반인들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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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dscape Arch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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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vil's Garden에서 Navajo Arch와 Black Arch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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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Window 의 겨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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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글 : 주안(power21)

단군의 연대와 욕단의 연대

 

단군의 조선 건국 연대에 대하여 지금까지는 일반적으로 기원전 2333년이라는 설이 통용되어 왔다. 이 기원전 2333년 설은 고려의 13세기 말 이승휴의「제왕운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인데, 그때 이승휴는 자기 저서에서 우리 민족의 시조 단군의 조선 건국 연대를 중국의 요(堯)임금 건국 연대와 똑같이 무진년(戊辰年)으로 본 것인데, 그것은 실제 우리나라의 그 어떤 구체적인 자료에 기초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당시 요임금을 중국 한족의 시조로 보면서 -요임금은 동이족이었다- 그의 건국 연대가 우리 단군의 건국 연대보다 앞설 수 없다는 것에서부터 그런 논법을 세웠던 것이다.

 

건국시조 단군 때로부터 상당히 긴 세월이 흐른 후세에 살던 우리 선조들은 단군이 나라를 세운 연대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였고, 다만 단군이 매우 오랜 옛적에 나라를 세웠다는 막연한 인식만을 가졌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단군의 건국 연대를 자기들이 알고 있던 가장 오랜 옛 임금에 비교하여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이요, ‘요와 같은 시대’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통용되고 있는 주전 2333년인 단군기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면 단군의 즉위 원년의 절대 연대는 사실로서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삼국유사」등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단군이 요와 동시에 즉위해 나라를 건국했다는데 의의가 있을 뿐이다. 요와 순은 이상적인 통치시대를 펼친 인물의 대명사격이다. 특히 요는 공자가 성군으로 추앙하던 인물이다. 바로 그러한 요임금과 단군이 동시대에 즉위해 조선을 건국하였다는, 즉 우리나라가 중국과 대등한 시기에 건국된 유구한 역사를 지닌 나라라는 것을 알리려는데 그 의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단군의 즉위 연대는 그 절대 연대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내세우고자 했던 의식세계를 이해하는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따라서 단군을 성경상의 셈의 현손(玄孫) 욕단이라고 단정할 때에 단군 시대와 욕단 시대의 일치 여부는 논란의 소지가 될 것이 전혀 없다. 주전 2333년이라는 단군기원은 사실로서의 연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는 그보다 훨씬 더 옛날로 소급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현재 통용되고 있는 주전 2333년인 단군기원이 성경상의 욕단의 연대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인류의 조상 아담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연대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을 역추적하여 계산해 보면 아담이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에덴에서 추방당한 타락 원년(元年)은 B.C. 4114년이 된다. 그리고 그 자손들이 타락을 계속해서 온 땅이 강포와 죄악으로 가득 차 하느님께서 큰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는데, 그 홍수가 발생한 연대가 B.C.2458년이다. 셈의 증손자 에벨은 B.C.2391년에 태어나 B.C.2357년 욕단의 형인 벨렉을 낳았고, B.C.1927년까지 살았다.

 

이 성경 연대는 성경 연구가에 따라 연대 계산에 조금씩 차이가 있어 좀 더 위로 소급되기도 하는데, 중요한 것은 정확무오한 연대 산출(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이 아니라 욕단의 연대가 바로 단군 시대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관점을 취하든 우리는 아득한 옛날 백두산정에서 창조주 하느님께 제천의식을 거행하고 조선을 건국한 밝달임금, 곧 단군이 성경에 산맥을 넘어 동방으로 갔다고 기록된 욕단이라고 얼마든지 단정할 수 있다. 

 

예수원 설립자 토레이(R. A. Torrey? 대천덕, 사진)는 셈의 세째 아들 아르박삿의 손자 에벨의 둘째 아들 욕단이 단군이 아닌가 추정해 볼 수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그 근거를 제시한다:

 

“…창세기 10:25에 ‘에벨’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그에게는 ‘벨렉’과 ‘욕단’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벨렉’이란 ‘나뉘어진다’는 뜻으로 그는 아브라함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아우 ‘욕단’은…알모닷, 셀렙 등 여러 사람들의 조상이 되고,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편 산으로 갔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동방의 산지대로 갔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셈의 족속들이기 때문에 동방 사람들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욕단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욕단이 혹 단군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도 있습니다. 정확한 계산은 할 수 없지만 단군의 시대와 욕단의 시대가 비슷한 연대입니다.”(대천덕,「우리와 하나님」, 도서출판 예수원, 1988, 163쪽)

 

그의 추측은 옳았다! 우리 알이랑민족사를 시작한 단군은 역사적 인물로서 성경상의 셈의 현손 욕단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누가 단군을 믿을 수 없다고 했는가


애석하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단군을 역사적 인물이 아닌 신화에 등장하는 가상의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때로는 ‘우리는 곰의 자식이 아니다’라며 비장한 자세로 목소리를 높이면서 단군을 부정한다. 그들은 단군을 그렇게 신화 속의 인물로 오해하게 만든 것이 일제의 식민사관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일제 식민지 지배시기에 일본인 학자들은 단군 신화가 우리 겨레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건국 사화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온갖 학설을 늘어놓았다. 그들은 단군은 원래 묘향산의 산신 또는 평양 지방의 토지신이었는데 이것이 책에 기록되었다가 뒷날 몽고의 침입 때 고려인의 일치단결을 위해 건국 신화로 고쳐졌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단군 신화는 일연 등이 날조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물론 이들의 주장은 그 동안의 연구를 통해 전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런데 왜 일본 학자들은 그토록 단군을 부정하려고 했을까? 여기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간교한 침략 논리가 숨어 있다.

 

20세기 초 조선을 강탈, 영구 지배를 꿈꾸던 일제의 가장 큰 고민은 조선이 그들보다 긴 역사를 가진 문화 민족이라는데 있었다. 구한말 조선 강점 당시 자기들의 역사는 기원 후 1700년인데 비해 조선의 역사는 기원전 단군 조선(고조선) 이래로 4200년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역사의 반에도 못 미치는 어린 역사를 가진 섬나라 일본이 조선을 강탈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할아버지와 같은 분의 멱살을 쥐고 흔드는 격으로서 그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논리적이지 않았다. 따라서 일제는 우선 그들의 역사보다 2천년 이상 앞서 있는 조선 상고사를 말살하는 것이 시급했다. 그 방법은 단군을 부정하고 단군 조선을 말살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교활한 일제는 단군을 말살하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민족의 시조가 없어지는 것이니 한국인은 단군을 하나의 조상으로 하는 단일민족으로서의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잃게 되어 그 기(氣)가 꺾일 수밖에 없으며, 또 민족이 분열되어 서로 싸우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일제 침략자들은 단군과 조선 고대사 말살 작업을 저들의 대조선 식민지 정책의 중요한 하나의 고리로 삼았던 것이다.

 

이를 위해 일제는 1920년대부터 우리의 역사를 날조?축소?왜곡?부정하는 작업을 조선 총독부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우리나라 전국 각지에서 단군 관계 역사책들에 대한 전면적인 약탈과 소각활동을 단행하였다. 일제의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찌는 헌병들을 내세워 우리나라 전국 각지의 책방들과 향교, 서원, 개인 집들을 샅샅이 뒤져 조선을 영구히 지배하는데 장애가 될 수 있다고 보이는 단군 관계 역사책들을 비롯한 우리 민족의 귀중한 역사, 문화, 지리책들을 수십만 권이나 압수하여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총 51종 20만권이나 되는 책들이 사라졌다. 그 후 일제는 유구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저들의 역사보다 뒤늦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조직적인 조선사 위조 작업을 감행하였다.

 

교활한 일제는 「조선사」를 편찬함에 있어 자료가 부족하다는 구실을 걸어 단군조선의 역사를 빼버렸으며 이마니시 류(今西龍) 같은 역사 위조의 ‘명수’들을 내세워 단군은 후세에 꾸며낸 신적 존재이며 실재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애써 ‘논증’하게하고 단군이 신화적 인물이기 때문에 「조선사」에 서술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렇게 일제는 한국 고대사를 말살하여 4천여 년 조선의 장구한 역사를 2000년으로 깎아내렸고, 자기 나라의 역사는 5백년을 소급하여 2200년 이라고 했다.

 

일제는 조선을 영구지배 하고자 그들이 만든 새로운 역사, 조작된 역사 설계도에 두 나라의 국민을 맞춰 일본을 형으로 조선을 아우로 하는 이른바 동조동근(同祖同根)의 한나라를 만드는 망상을 실현하고자 허구의 역사를 만들었던 것이다. 가소롭기 짝이 없는 소행이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현(現) 숙명여대 한국사 교수인 이만열 박사는 당시 일제 식민 사가들의 그 간교한 단군 말살 책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단군 연구가들은 단군에 관한 기록들이 신화적인 요소와 함께 사실적인 부분도 있음을 중요시 한다. 즉, ‘옛날에 단군이라는 분이 있어서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니, 중국의 요(堯) 임금과 같은 시기였다’고 한 기록은 신화적인 내용이라기보다는 사실적인 기록이라는 것이다. 이 기록에 근거해서 예부터 단군을 우리의 조상으로 인식해 왔던 것이다. 물론 신화적인 부분으로 전해지고 있는 내용에 대해서도 그것이 역사적 사실의 어떤 부분을 일정하게 반영하는 것으로 보고, 그 기록에서 신화적인 내용을 벗기고 실체의 알맹이를 찾아내려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식민주의 사관론자들은 신화에 나타난 역사적 실체를 탐구하려는 데에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신화가 곧 역사 일수 없다는 전제하에 단군에 관한 기록을 왜곡하기에 급급했다. 그들은 단군 관계 기록에서 신화적인 요인을 부정하기 위해 앞서 말한 사실적 부분도 신화와 함께 거부해 버렸다. 이렇게 거부한 것은 신화가 역사일 수 없다는 표면상의 이유와는 달리 식민지 한국의 역사가 그들의 소위 2200 여년의 역사보다 훨씬 상한선이 높다는 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는, 말하자면 일종의 왜곡된 민족 감정 때문이었다.”(이만열, 「우리 역사 5천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바다출판사, 2000, p.57)

 

단군의 고조선 개국사화에 신화적인 요소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사료적 가치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그 신화적 내용은 단순히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인의 역사적 체험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군 신화는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당시대의 역사성이란 근거위에 그 시대상이 반영된 이야기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 겨레 영아기 때의 이야기로서 한국인의 역사적 체험을 담고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따라서 그 속에 감추어져 있는 현실의 대지를 밟아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간교한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군 관련 기록을 몽땅 ‘신화’로만 해석했다. 그래야만 단군조선, 곧 고조선을 말살시키고 우리 민족사의 상한선을 내려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로 우리나라의 역사를 축소 왜곡하려는 일제 어용 식민주의 역사가들에게 ‘단군’의 문제는 늘 하나의 걸림돌이었다. ‘단군’을 역사적인 사실로 인정해 버리면 우리 겨레의 건국 역사가 무려 반만년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단군’이나 ‘단군 조선’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왜곡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한국 교회의 일부 무지하기 짝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과거 일제 식민 사학자들이 한국 상고사를 말살하기 위해 주장했던 논리를 마치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다. “단군은 신화다”라고. 이는 서글픈 일이다. 학문적 검토 없는 한국 교회의 이와 같은 태도는 기독교회가 비이성적?비애국적 집단이라는 오해를 초래하고 있다. 이것이 선교 측면에서 얼마나 부정적인 영향을 교회에 끼치고 있는지 모른다. 

 

맺는 말

 

‘아리랑’은 우리 겨레의 영아기 때의 체험을 간직하고 있는 민족의 역사노래인 동시에 현존하는 인류 최고(最古)의 찬송가로서, 한국인이 처음부터 창조주 하느님을 섬긴 욕단의 후손, 즉 이 땅위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선민이라는 사실을 규명해 준다. 그러므로 ‘알이랑’은 선민(천손) 한민족의 키워드(keyword)이다. 바로 이것이 아리랑의 비밀이다.

 

한국인의 선조인 욕단 족속은 하느님을 섬기는 일신신앙을 갖고서(알이랑) 동방 산악 지대를 넘어서(고개를) 극동의 이 땅까지 찾아왔다. 그리고 백두산과 그 변두리를 근거지로 배달나라를 세웠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이 단군신화에 나오는 태백산 천손강림(天孫降臨)의 모티브가 된 것이다. 그 나라 백성은 하느님의 백성답게 모두가 흰 옷을 입고 살았고, 오직 제천의식을 성대히 거행하여 유일신 하느님만을 섬겼다. 그래서 배달나라를 고대에 신시(神市), 곧 ‘하느님의 도성(City of God)’이라고 했다! 이것이 우리 한민족의 참모습이다!

 

알이랑! 그것은 우리 배달겨레의 근본사상이요 뿌리 정신이다. 그것은 ‘하느님 중심 사상’이요 ‘신본주의 정신’이니, ‘알이랑’은 ‘하느님과 함께(With God)’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여호와 하느님을 섬기는 유일신 신앙으로 민족사를 시작한 천손민족이라는 사실이 민요 ‘알이랑’으로 말미암아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알이랑’은 욕단 계열의 선민이 단군의 후손인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아주 분명한 ‘물증’이다. 그리하여 우리 겨레는 나라꽃까지 무궁화, 곧 ‘샤론의 장미(The Rose of Sharon)’인 것이다(무궁화의 국제적 이름은 한영사전에도 나와 있듯이 'The Rose of Sharon'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긴 세월을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한 채 고난 받으며 자기비하(自己卑下) 속에 살아왔다. 토레이(Reuben Archer Torrey ? 예수원 설립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보기엔 한국은 자신의 참모습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 흡사 기억상실증 환자와 같은 인상을 준다. 만일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한국 백성에게 공동의 선(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어떤 특별한 역할을 부여하셨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러니만큼 한국으로서의 가장 긴급한 과제는 스스로를 재발견하고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는 일이다….”(대천덕, ‘기독교는 오늘을 위한 것’, 「생명의 샘터」, 1987, 70쪽)

 

그렇다! 우리 겨레는 자신의 참모습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리고 집단적 기억상실증에 걸려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를 재발견하고 본연의 모습을 속히 회복해야 하겠다. 실로 그것은 새 천년을 맞이한 우리 겨레의 가장 긴급한 과제이다.

  

알이랑! 그것은 우리 한민족의 원형과 정체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려 준다. 알이랑! 그것은 곧 우리 자신이다. ‘알이랑’으로 민족사를 시작한 우리는 ‘알이랑’으로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알이랑’으로 살아갈 것이다.

  

알이랑! 그것은 전 세계에서 가장 긴 역사를 가진 ‘찬송가’이다. 그러므로 ‘알이랑’은 세계문화 유산이다. 우리는 이 귀한 노래 ‘알이랑’을 시편 삼아 함께 자주 불러야 한다. 우리 겨레에게 이 노래가 있는 한 여호와 하느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실 것이다.

  

동방의 성민 배달겨레여! 이제 스스로를 자각하고 다시 일어나라! 알이랑 민족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라! 민족의 주로 예수를 믿고 민족의 하느님으로 여호와를 섬기는 복음의 제사장 나라를 건설하라! 그래서 이 땅으로 다시 신시(神市), ‘하느님의 도성’(City of God)이 되게 하라! 우리는 여호와 하느님께서 나중에 쓰시려고 동방의 땅 끝에 감추어 두신 또하나의 성민 알이랑 민족이다!

 

☞ 이 글은 『또 하나의 선민 알이랑 민족』에 수록된 내용을 일부만 요약한 것입니다.

    보다 충분한 자료를 얻으시려면 이 책을 일독해 주십시오

 

백의종군

조국이 피에 얼룩진 백의를 입었나니

이 시련과 굴욕의 백의를 감추지 아니하고

그것을 자랑스레 걷어붙이고

어서 가리라, 나의 영원한 조국 바다로

조국 구원의 그날까지

겨레 부활의 그날까지

역사 회복의 그날까지

- 김성영(전 성결대 총장)의 서사시 ‘백의종군’ 중에서 -

 

04. 구원의 확신은 구원의 절대 조건이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나는 구원을 받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나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과연 어떤 태도가 구원받은 자로서의 태도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가 구원에 대해 한 말씀이 있습니다. 구원받음에는 반드시 구원받는 것에 대한 확신이 필요한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다고 해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내 믿음이 구원에 절대 조건은 아닙니다. 구원받은 것과 구원 받은 것에 대한 확신은 다를 수 있습니다.”(마틴 로이드존스. 로마서강해 5. 335). 그러면서 마틴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가 전적으로 죄인임을 깨달으면 또한 자신을 하나님 앞에 자랑하여 내세울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또한 다만 우리를 위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으로 순종하심을 이루신 역사와 십자가 나무 위에서 달려 우리의 죄를 위해 수동적인 순종 자세로 징벌을 당하신 역사만을 의지한다면 비록 구원의 확신이 없더라도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다.”(ibid., 438).

 

자 어떤가요? 그러면 웨스트민스터 제 18장의 제 1은 이렇게 말합니다.
“위선자나 그 밖에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며 구원받는다는 거짓된 소망과 속물적인 뻔뻔스런 확신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기만할 수 있다.” 이 말씀은 사람의 확신과 구원은 관계가 없을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두렵지 않습니까?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기에 구원받았다고 믿었는데 성경은 그 확신이 과연 바른 확신이냐? 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즉 구원에 대한 확신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바른 믿음에 근거한 확신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저속한 자의 희망은 무너지리니 14 그가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가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욥 8:13-14 / 13) 이 말씀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구원에 대한 바른 확신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도 구원받았다고 얼마든지 주장하기도 하며 심지어 자기 자신을 속이기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확신은 거미줄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미 3:11). 거짓 선지자들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을 말씀을 왜곡하여 거짓을 말하였으며, 사람들은 그들의 거짓에 기뻐하며 그들에게 삯을 지불하였고, 그들을 칭찬하였습니다.

 

그러니 구원을 확신하는 자들은 정말 자신의 구원이 믿음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이 구원받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거짓 위안에서 나온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요한복음 8:41). 이들은 자신들이 구원받았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들을 향해 책망하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이것이 거짓 구원을 확신한 자들이 행한 것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구원받은 자는 어떻게 해야 구원 받은 것을 확신할 수 있는지에 대한 분명한 말씀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주 예수를 참으로 믿고, 성실하게 그를 사랑하며, 그 앞에서 모든 선한 양심으로 행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자기가 은혜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확신합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요일 2:3).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24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요일 3:14, 18, 19, 21, 24 14).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이 소망 때문에 부끄러워할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믿는 자에게 부어지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2, 5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이러한 확실성은 허황된 소망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19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히 6:11, 17-19)

 

이러한 약속에 따르는 은혜의 내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 2:3).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4)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우리의 영과 더불어 증거해 주시는 양자의 영, 곧 성령의 증거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5-16)

 

성령께서 우리의 기업인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것을 보증해주십니다. 우리는 속량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습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3-14).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고후 1:21-22)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요즘 이곳저곳에 선지(예언자)학교라는 특수 학교가 세워지고 자칭 사도들, 예언자들, 선지자들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음을 본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는 현재 이곳저곳에 세워지는 선지(예언자)학교와 예언자 혹은 선지자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좀 더 좁혀 말하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언이란 어떤 것이며 예언자의 자세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영적 세계란 사각지대(死角地帶)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사람이냐, 벨리알의 사람이냐, 둘 중 하나, 영생의 길이냐, 영벌의 길이냐로 갈라지기에, 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면, 하나님 말씀 앞에서 검증이란 대단히 중요한 이슈가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1. 예언의 정의:
예언이란 우리나라 국어사전에서는 예언(豫言)과 동음어인 예언(預言) 이 두 단어의 뜻이 모두: ①앞에 올 일을 미리 말함 ②또는, 신탁(神託)을 받은 사람이 신의 말을 듣고 신의 의지(意志)를 사람들에게 전(傳)하는 일 ③또는, 그 말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대부분의 ‘예언’은 한자로 보면 예언(預言)이 아니라 동일한 동음인 ‘豫言’ (예언)을 뜻한다. 또 영어 'predict’ (prediction)이라는 단어와  'prophesy'(prophecy)라는 단어는 같은 뜻 같으나 서로 다른 의미가 있다.  ‘predict’란 미래에 있을 일을 미리 말한다.’는 의미의  단순 예언(預言)을 뜻하며,  'prophesy’란  하나님의 계시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한다.’는 의미로서의 예언 (豫言), 신탁(神託)을 뜻한다고 보면 되겠다.

2.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豫言)자의 개념:
하나님의 선견자(先見者) ‘로에’ 와 대변자 (代辯者), ‘나비’로서,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의 대변자’, 선견자란 뜻이며,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곧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예언자들의 말은 그 자신들의 영(spirit)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Holy Spirit)에 의해 말하게 한 대언이었기 때문이다(삼상 9: 9, 렘 23: 16, 겔 13: 2절 참조). 구약 시대에도 선지 학교가 있긴 있었다. 선지 학교는 사무엘시대 이후부터 세워진 기록이 있고, 아마도 사무엘이 좋은 선지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선지 학교를 세운 것 같다. 그 후로 이스라엘의 각 지역에 세워진 선지 학교에서 수많은 선지자가 배출되었을 뿐 아니라 그곳에서 양성된 선지자들은 왕실에서 혹은 동리에서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극진한 대접과 환대를 받으며 편하게 지내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 역사상 위대한 하나님의 선지자, 혹은  선견자(대선지자, 소선지자 포함)들은 선지 학교 출신들이 아닌, 평민으로부터 왕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사람들로서, 그들을 하나님께서 직접 골라 특별히 불러 세우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한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선견자나 선지자, 예언자의 특성상, 인위적인 방법으로서가 아닌, 전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신탁에 의해 주어진 말씀이어야만 했기 때문이 아닐까?

또 구약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해서 주님의 영으로 부름을 받은 특별한 대언 자가 필요했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신구약 성경이 완성되어 우리 손에 들려져 있고, 주님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속에 내주해 계시면서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도 하시고 책망도 하시고 교훈도 하시는 성령 시대에 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만인 제사장’만 성립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모두 ‘만인 대언자’가 될 수 있음도 믿어야 한다. 대언이 어떤 특정인의 전유물인 시대는 지나갔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새삼스럽게 인위적인 방법의 선지 학교나 그곳에서 배출된 선지자들, 혹은 예언자들이 필요치 않다고 보는 것이다.

신약 시대의 진정한  예언= 우리에게는 오직 무흠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요, 예언서인 신구약 66권 외에 다른 예언의 말씀이 없음을 믿어야 한다(계22:18-19절).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서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하셨다. 가장 확실한 예언은 성경 말씀이다 (벧후 1:19-20). 성경말씀을 벗어난 그 어떤 형태의 예언도 있을 수 없다. 즉, 직통계시가 없다는 말씀이다.

3.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신령한 예언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언이라기보다는 대언의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 곧 보혜사 성령님께로부터 성도가 신앙생활을 더 잘 해 나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는 것으로써,  때로는 예언적 형태를 취할 수도 있고 말씀을 로고스(레마)로 주시기도 한다. 곧 모든 양이 그 목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직통계시적 형태를 취하는 태도를 삼가야 한다. 우리(성도)가 모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며 그 음성을 들려주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의 역할이시요, 사용되는 말씀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 안에 있어야만 한다. (행27:22-25) 

참고로 알아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계시 속에는 크게 나누어 몇 가지 형태의 계시가 있는데 특별계시(예수 그리스도), 혹은 기록(문서)계시(성경),  일반(자연)계시로 나누어진다.

간단히 요약해, 특별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고, 문서 계시인 성경 말씀 역시 주제는 예수그리스도요, 핵심은 인간 구원이다. 일반계시는 자연 속에서 (롬1:19-20절 참조)하나님의 뜻을 밝혀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현 세대에서 우리(성도)는 성경을 다시 쓸 수 있는 특별 계시, 혹은 문서계시는 받을 수도 없고(계 22:18-19절 참조), 또 받을 필요가 없다. 일반 계시도 자연 속에서 찾으면 되기에 우리가 다시 재창조를 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우리(성도)가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란, 곧 성령님의 조명하에 특별계시를 통해서, 기록계시 속에서, 혹은 일반계시 속에서 찾아지고 들려질 수가 있으며 양으로서 목자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는 차원으로 해석돼야 한다. 성도는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 손에 이미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많이 읽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겸손하게 무릎 꿇고 기도하는 길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따로 선지(예언자)학교가 필요치 않다고 본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한복음14;26).” 따라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대언의 영으로 주시는 말씀도, 반드시 다음과 같은 잣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검증이 되어져야만  한다.

 a)  은사로서의 예언:
권면 하며 안위하며 덕을 세우기 위해서 대언의 영으로 증거(예언)할 수 있으나, 반드시 교회와 사람(개인)에게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말씀이 되어야 한다. (고전14:3절, 계시록19:10절 참조.) 사업이 잘될는지, 자녀가 학교에 입학 가능한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결혼은 어떤지...등등, 이런 류의 점치는 형식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b) 정확성이 있어야 한다(신명기18:18-22 ):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무릇 그가 내 이름으로 고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내가 고하라고 말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예수 그리스도)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 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

 c) 말씀을 들을 때 혹은 읽을 때 마음이 뜨거워진다:
 (때론 너무나 뜨거워서 부모가 돌아 가셨을 때보다 더 통곡을 하지만 마음은 오히려 큰 감동으로 행복감을 느낀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눅24:32절 말씀 )”.

d) 도덕적으로 흠이 없어야 한다:
자기가 기도하거나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정 반대의 생각이 머리에 주입된다. 이때 들려지는 말씀이 도덕적으로 흠이 없어야 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3절하반절)".

e) 그 생각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레마(로고스)로 머리에 정확히 떠오르거나 입술에서 터져 나온다. 성령님께서 예수님, 곧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기 때문이다. (요한복음14:26절)

f) 다른 이가 예언 은사적 말씀(성구)을 받았을 때에도 예언 은사를 받은 사람이면 그 말씀을 들을 때에 같이 마음이 뜨거워진다. (눅1:41-45절)

 g) 항상 선한 말씀이 아니고 때론 책망함과 바르게 함으로 탄식하신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6-17절)”.                               

결론적으로
이 혼탁한 세상에서 악한 영에 미혹 받지 말고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는 성령에 의해서 잘 인도되고 내 귀에 아무것도 들리는 것 없고 내 눈에 아무런 증거가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변하지 않고 온전하신 말씀 안에 내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겸손하게 주와 동행하는 성도가 복된 성도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란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출처: 목양연가: 글/최송연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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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절대로 만나서는 안 될 사람들이 직통계시자들이다.

과연 그들의 특징이 무엇일까?

부디, 아래에 언급한 유형의 사람들을 평생 만나지 마시고,

혹시 만나시더라도 ‘아 직통계시자구나’라고 생각하며 발길을 끊으셨으면 좋겠다.

1. 직통계시자는 주로 직접 하나님을 만나서 특정 내용이나

사건에 대해 직접 보고, 들었다고 말한다. 자신이 받은 직통계시의 내용에는 타인의 경조사,

생로병사·생사화복 등도 포함된다.

2. 직통계시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전달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신도들에게

절대 복종 이외의 선택이 없도록 몰아간다.


3.직통계시자는 자신의 말을 거절하거나 듣지 않으면

성령 훼방하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사람이라는 정죄를 한다.

직통계시자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공포와 두려움을 신도들에게 심어준다.


4. 직통계시자는 처음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주는

 ‘계시의 전달자’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스스로 ‘계시자’가 돼 간다.

직통계시자는 늘 하나님께서 자신을 직접 만나서

뜻과 음성을 들려주신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교만과 독선에 빠지게 되며

‘계시의 전달자’와 ‘계시자’의 경계를 허물어 뜨리게 된다.

5. 직통계시자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받은 계시를 합리화하고 수단화하는 방법으로서 성경을 이용한다.


6. 직통계시자는 진지하고 지속적으로 성경을 연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분의 음성을 늘, 직접 들려주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직통계시자 중에는 설교를 해야 할 때조차

설교를 준비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성령이 직접 할 말을 지도하시니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착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7. 직통계시자의 최종 목적은 자기 뱃속을 채우는 것이다.

 따라서 늘 거액의 헌금, 돈을 요구한다. 상대가 가난한지,

부유한지의 사정은 봐주지 않는다.

헌금을 바치지 않을 경우에도 ‘저주’가 내려진다고 협박한다.

위와 같은 직통계시자를 따르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신도들이 처음엔 “저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한다”고 생각한다.

신도들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직통계시자라는

 ‘사람’에 얽매이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의 눈치를 보는 삶,

예속된 삶을 살게 된다. 갈수록 인격적 결단력은 약해지고 삶이 피폐해진다.

 

-퍼온글

 

목양연가 / 채 님

인터넷을 통해서 배우 차인표 씨가 간증하는 것을 보았다

크로싱 얘기가 나오는 것을보니 꽤 오래 전 쯤인것 같았다
그는 조금은 흥분 된 어조로 그동안 북한 인권에 침묵한 한국 교회들을 향해 회개를 촉구했다
목소리가 상당히 격앙되어 있었다
몇만명의 탈북자들을 사랑하지도 못하면서 통일후 쏟아져오는

몇천 만명을 어찌 사랑할거냐고 따지듯
다그치며 회개하라고 한국교회들을 향해 외쳤다


그러나 그 말은 맞는 듯 하면서도 틀린 말이다
나는 감히 말한다
그는 잘못 알고 있다
6.25 이후 몇 십년 동안 북한의 자유와 민족의 자유통일을 위해 열심히 기도한 곳이 있다면

한국 교회 밖엔 없다
새벽이고 밤이고 낮이고 모여서 기도할 때 오직 빠뜨리지 않고 기도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북한동포를 위한 남북자유통일이었다


기도원에서 교회에서 성도들이 외친 것은 오직 남북자유통일이었다
교회는 왜 그랬는가?
공산주의가 왜 생겼는가 그것은 기독교 말살을 위한 사상이었다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물과 기름이다
도저히 합할 수도 나란히 앉아있을 수 없는 것일 뿐이다


한기총이 생긴 이유도 교회는 공산주의를 수용할 수 없다는 것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가 내세운 반공정책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릴 땐 나도 군사독재네 뮈네 떠들면서 박대통령을 유난을 떨며 싫어했다
지금에서 그를 낱낱히 추적해보니 그는 5천년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정치가였고 애국자였다
난 세종대왕보다 오히려 박정희대통령을 더 지지하고 존경한다 누가 손가락질을 하던말던 ㆍㆍㆍ

지금은 그를 비난하고 비판하는 자들을 나는 조롱한다
ㆍㆍㆍ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박대통령의 새마을사업은 성경의 달란트 비유를 이용해서 성공한 사업이다
그는 또한 당시에 기독교계의 가나안 농군학교를 통해서 국민들을 단련하고 교육했었다
한국의 청년들이 그곳을 거쳐가지 않은 사람들이 없을 정도였다
사실 기독교를 통해서 박대통령의 정치는 성공을 거둔 셈이다
그가 예수를 믿었다고는 말 할 수 없겠지만ㆍㆍㆍ
그만큼 기독교는 정치적으로나 국민에 끼친 영향력은 대단했다고 봐야한다
우리교회만 해도 목사님의 축도속에서

지금까지 나라와 민족과 통일을 위한 기도를 빠뜨리는 것을 듣지 못했다
ㆍㆍㆍ
그리고ㆍㆍ뜻하지 않게도 민주투사라는 이가 대통령이 되고

햇볕정책이라는 귀신 씨나락까먹는 것이 등장하면서

남북의 통일이 가까워 온 것처럼 온 국민에게 약을 먹이더니

북한을 욕해도 안 되고 비난해도 안되고ㆍㆍ안되고 안되고ㆍㆍㆍ

교회들은 다투어 북한에 도움이 되고자 물질적인 것들을 퍼나르고

뭐든지 얘기만 하라는 식의 물자와 돈을 주고ㆍㆍ주고ㆍㆍ주고
ㆍㆍㆍ지금보면 교회가 그들에게 이용만 당한 셈이다
지금도 북한인권이나 탈북자를 위한 배려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곳은 정부와 교회밖엔 없다
그 어느 개인들이나 단체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고있냐는 것이다
없다ㆍㆍ없다ㆍㆍ
차인표 씨는 온교회가 다같이 일어나서 북한인권을 위해 외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건 너무 나간 말이다 나로선 그럴 필요는 굳이 없다고 본다
하나님은 한 분이기 때문에 ㆍㆍㆍ
차인표 씨야말로 몇 십년동안 북한주민과 남북자유통일을 위해

얼마나 기도했는지나 묻고싶을 뿐이다
혼자 궁시렁ㆍㆍ궁시렁ㆍㆍ*****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독자의 소리" 글/ 채 님

 



* 요즘 VR(가상현실)이 화두가 되면서, VR 기술의 보다 적극적인 활용을 위해 컴퓨터와 연동될 수 있는 칩을 뇌에 박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뇌의 칩을 박는 기술은 어디까지 왔는지, 지난 기사들을 통해 잠시 살펴보자. (VR에 관한 글은 내일 게재합니다.)


첫 번째는 인텔이 2020년까지 컴퓨터를 움직이는 칩을 뇌에 삽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은 2009년(벌써 7년 전) 기사이고, 두 번째는 뇌의 장기 기억저장소인 해마에 칩을 박아 학습능력을 획기적으로 증진할 수 있다고 선전하는 동영상이다.


인간의 몸속에 컴퓨터와 연동하는 칩을 삽입하여 감시 통제하려는 일루미나티의 계획은 궁극적으로는 뇌의 칩을 박는 단계까지 나아가게 될 것이다.


1신 >> Intel: Chips in brains will control computers by 2020



2020년이면 당신은 당신의 컴퓨터를 사용하는데 더 이상 키보드와 마우스가 필요치 않게 될 것이라고 인텔의 연구자들을 말하고 있다. 이런 기구가 없이도 뇌파를 이용해 서류를 열람하고 웹서핑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피츠버그에 있는 인텔 연구소의 과학자들은 인간의 뇌파를 읽고 끌어내 컴퓨터와 텔레비전 그리고 스마트폰을 작동시킬 수 있는 방법을 연구 중이다. 머리속 뇌파를 끌어(읽어)내는 데는 인텔이 개발한 사람의 뇌 속에 이식할 센서(칩)가 사용될 것이다.





연구자들은 이것이 단순히 공상과학 영화속 장면도 아니며, 빅 브라더가 강제로 이 칩을 당신의 머리에 삽입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연구자들은 소비자들이 자발적으로 이 칩을 박기 원할 것으로 보고 있다.



2013년 제작된 동영상을 통해 뇌의 장기 기억저장소인 해마에 칩을 박아 기억력을 획기적으로 증강시킴으로 놀라운 학습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한 과학자가 장기 기억 저장소인 해마와 연결되는 칩을 박아 기억력과 학습능력을 획기적으로 증대시킬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뇌에 칩을 박은 아이의 한쪽 눈을 강조함으로 이 기술이 바로

적그리스도(호루스)를 위해 개발된 것임을 인증하고 있다.



뇌에 칩을 박은 아이는 그렇지 않은 아이에 비해

획기적인 학습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캠퍼스에서 만난 예수 (신앙 간증)

신앙간증 / 캠퍼스에서 만난 예수    

어머니 기도와 김요한 목사의 성경지도가 밑걸음
효도차 교회다니다 대학생되어서야 본격적 신앙구축
“하나님 앞에선 죄인... ” 고백후 회개와 감사로 범벅

나는 어려서 부터 교회에 다녔다. 크리스천이신 어머니께서 어린 나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과 예수 믿는 믿음을 넣어주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일이면 어김없이 유년주일학교에 참석했다. 교회에 안가면 어머님께 혼나니까...
수요저녁예배와 금요저녁예배는 어머님께서 원하시기에 효도하는 마음으로 가끔 한번씩 따라가곤 하였다. 새벽예배 역시 은근히 어머님이 원하시기에 잠이 일찍 깬 날 새벽엔 효도하는 마음으로 어머님을 따라가곤 하였다.

이런 생활이 유년기부터 고등학교까지 계속 되었다. 국민학교 6학년 때엔 학습과 세례/침례도 받았다. 왜냐하면 어머님이 좋아하시니까 교회에서 주는 문답지를 받아다가 달달 외워 합격한 것이다. 중등부와 고등부를 다니면서도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 하나님이 누구신지?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성령님이 어떤 분인가?”를 나는 전혀 몰랐다. 왜 믿어야 하는지도 몰랐고, 교회란 뭘 하는 곳인지에 대한 분명한 교회관도 없었다. 한 마디로 어머님의 강권에 의해 만들어진 교인이었고, 신앙관이 전혀 정립안된 선데이 크리스천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약학대학에 입학했다. 서클활동에 가입할 때 나는 기독학생회를 선택했다. 어려서 부터 교회에 다녔기 때문이고, 비록 분명한 신앙관이 없을지라도, 학습과 세례/침례를 받았고 어느덧 자칭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였기에 기독학생회에 가입한 것이다. 이 때, 나에게 하나의 문제의식이 생겼다. 그것은 자칭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내가 성경을 몰라도 전혀 모른다는 것이었다. 나 스스로 생각해 봐도 창피했다. 그래서 성경이 알고 싶어졌다.  

그러한 나날을 보내던 대학 1학년 어느 가을이었다. 하나님께선 목사님 한 분을 보내주셨다. 기독학생회에서 알게 된 친구가 목사님과 함께 우리 집에 찾아온 것이다. 그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경을 가르쳐 주겠다. 나하고 성경을 공부하자. 형제가 다니는 대학교에 대학생 사역을 하러 왔는데, 나와 함께 전도를 하자. 대학을 복음화 시키고 성서한국을 이루고 세계선교를 이루자”는 것이었다.

전도가 뭔 지도 모르고 선교도 모른 나는 왠지 모르게 그 목사님이 말씀한 “선교와 전도”라는 말에 마음이 끌렸다. 그리고 성경을 가르쳐준다고 하니 얼마나 좋은 가!! 약속을 하고 몇일 후 부터 성경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창세기, 출애굽기, 여호수아, 민수기, 사사기, 에스라, 느헤미야를 배웠다. 요한복음, 마태복음, 베드로전후서와 사도행전과 디모데전서를 배웠다. 이리하여 약 5년간 그 목사님에게서 성경을 배운 것이다.
     
이런 성경공부를 통해 나는 궁금해 하던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성령님을 알게 되었다. 교회란 뭔가도 알게 되었고 전도와 선교가 뭔가도 알게 되었다. 열거하자면 참으로 많다. 그러나 몇 가지만 써 본다.

특히 창세기를 통하여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만드신 창조주이심과 나는 그 분의 피조물임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만드셨기에 이 세상이 존재함을 알게 되었다.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며, 옆으로는 이웃을 섬기며 사랑하고, 만물을 다스리면서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신 목적이 무엇이며, 하나님 앞에 나는 어떤 존재인가도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두신 사명이 무엇인가도 알게 되었다. 이 세상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가도 알게 되었다. 이러니 얼마나 좋은가 !! 그토록 궁금해 하던 생의 목적과 존재의미를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일생 동안 추구하며 살아야 할 생의 목표가 뭔가도 알게 되니 참으로 기뻤다.      

또한 예수님이 성부하나님, 성령하나님과 함께 천지창조 사역에 참여하셨던 성자하나님이심을 알고 깜짝 놀랐다. 영원부터 존재하셨던 예수님이시라니!! 이 얼마나 놀라운 가!! 원시복음(창3:15)에 지칭된 여자의 후손이 바로 예수님이라니 놀라웠다. 야곱이 그 아들 유다에게 예언해주었던 축복의 기도에서 여자의 후손인 메시야 그리스도가 유다의 지파에서 오게 된다는 걸 보니 놀라웠다. 그 메시야 그리스도가 바로 예수님이시라니 참으로 놀라웠다. 메시야 그리스도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다는 것도 알게 되니 참으로 좋았다.

이 때 공부했던 창세기는 훗날, 전공인 약학을 버리고 신대원 공부를 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Report 작성이 쉬웠다. 목회할 때 강해설교를 준비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그 후로 부터 약 40년 후에는 어떤 선교단체의 이단성을 발견하는 데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을 통하여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되었다. 예수님의 생애와 사상과 인품과 사역에 대해 배웠다. 예수님의 제자양성의 방법에 대해서도 배웠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해서도 배웠다. 나와 온 인류를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시기로 약속했던 여자의 후손, 메시야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되었다. 영원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성자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다. 영원부터 영원토록 존재하는 전능의 예수님이심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은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1) 죄와 죽음과 영생의 문제, 2) 하나님의 심판의 문제, 3) 삶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주러 오신 메시야 그리스도 예수님이심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은 나의 죄문제를 해결키 위해 나 대신 십자가에 죽으신 생명의 은인임을 알게 되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3)일 만에 부활하신 전능의 주님임을 알게 되었다. 부활 승천하심으로 나와 온 인류에게 부활과 영생과 천국이 있음을 보여주시고, 영생과 천국을 보증해준 분임을 알게 되었다.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한 재림의 예수님은 심판의 주로 오실 것을 알게 되었다. 장차 임할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나와 온 인류를 구원키 위해 오셨던 구원의 주, 생명의 주가 바로 예수님이심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복음의 핵심인 요한복음 3:16절이 이해가 되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이런 연고로 나는 예수님을 사랑하며 나의 구세주로 영접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성삼위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그래서 나의 신앙고백은 이 것이다. 이 것이 나의 신앙관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 예수님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이처럼 신앙이 정립되고, 믿음이 자라갈 무렵인 대학 2년 여름방학 때, 나는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인식하게 되었다. 죄인됨과 죄의 고백을 하게 되었고, 나의 죄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가 바로 예수님인 것을 처절하게 깨닫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지금까지는 지식적으로 이론적으로는 내가 죄인됨을 알았으나, 아니 머리로는 알았으나, 진짜 내가 큰 죄인인 것을 처절하게 처음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그 더러운 죄들을 용서받기 위해 간절히 기도했던 사건이 있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하였던 말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하였던 말이 바로 이것이었구나를 실감하게 된 것이다.

사연은 이렇다. 여름방학 때 둘째 누나 집에 놀러 갔는데, 누나가 함께 산에 기도를 하러 가자고 하였다. 누나가 항상 잘 해주었기에, 아니 용돈을 잘 주기에, 말 대접으로 따라 나섯다. 예배를 인도하던 인도자가 이런 말을 하였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감찰하신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사람들이 숨겨 놓은 죄도 모두 다 알고 계신다. 형제님도 보기엔 법없이 살 사람 같고, 착한 사람 같으나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다. 숨겨 놓은 죄도 다 내어 놓고 회개를 해야 한다.”

그 날 따라 그 인도자의 말이 가슴에 박혔고, 찔렀다. 그렇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아신다. 내가 어려서부터 지은 모든 죄를 아신다. 내가 숨겨 놓은 은밀한 죄도 모두 아신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나의 행위가 모든 사람 앞에 드러날 것을 생각하니 괴로웠다. 보기엔 법 없이 살 수 있다는 나에게도 그런 죄가 있다니 괴로웠다. 지나온 나의 죄들을 생각하니 나 자신이 추하고 더러웠다.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숨겨 놓은 죄를 생각하니 더욱 괴로웠다. 그래서 울었다, 울부짖었다. 하나님께 죄 용서를 빌었다. 하나님께 용서를 바라면서 많이도 울었다. 하나님 앞에 울면서 기도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쨟은 시간이 아닌 오랜 시간 울면서 기도하였다. 내가 지었던 죄 때문에 울었고, 내 안에 있는 죄성들을 보면서 많이도 울었다. “하나님! 더럽고 추한 나를 용서해 주세요, 내가 나를 봐도 싫어요. 숨겨 놓은 은밀한 죄도 용서해주세요. 새로운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변화시켜 주세요.”    

오랜 시간 기도하였는 데, 그 때 성경공부할 때 배운 요한일서 1:8절 말씀이 생각 났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 나의 죄를 모두 자백하면 용서해주신다고 약속하셨으니 용서해주세요” 하면서 울었다. 약속의 말씀대로 용서해주실 것을 믿으니 마음이 편해옴을 느꼈다.

그러면서 요한일서 2:1절 말씀도 생각이 났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내가 용서 받도록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나를 용서해주실 것을 생각하니 왠 지 안심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해주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지 않으셨던가!! 생각하니 예수님이 나의 죄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데에 있어서 절대적인 분인 것이 이 때에 절실히 깨달아지게 된 것이다. 성경을 통해서 이론적으로 깨닫게 된 것 보다도, 이 때에 더욱 절실히 감동적으로 깨달아진 것이었다.      

그렇다. 예수님은 나의 죄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분이시다. 은밀한 죄도 고백하면 용서 받게 해주는 분이시다. 죄의식의 중압감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분이다. 새로운 마음으로 살고자 하면 새로운 마음을 갖도록 하고 그 길로 인도해주는 분이다. 나는 그 때에 예수님께 감사하며 평온한 마음을 갖는 가운데 살며시 잠이 들었다.      

잠이 깰 무렵이었던가? 꿈 속에 따스한 아침 햇살이 울창한 숲 사이로 스며 들었다. 그러면서 잠이 깼다. 난 또 다시 기도하였다. 회개기도와 감사의 기도를 함께 하였다. 죄용서를 받게 해주신 십자가의 주님이 참으로 감사하였다. 새롭게 살 것을 다짐하였다. 그래서 이런 찬송이 절로 나왔다.
“나의 죄를 정케 하사 주의 일꾼 삼으신 / 구세주의 넓은 사랑 항상 찬송합니다 / 죄의 짐을 풀어주신 주의 능력 크도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그러면서 감사의 기도를 하였다. 이 때 나는 나도 모르는 신비한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상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기 까지의 나의 신앙 간증이요, 고백이다. 그래서 내가 늘 즐겨 부르는 찬송은 이 것이다.
“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 날 위하여 오시었네 / 내 모든 죄 다 사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나의 구세주 / 주 안에서 거듭난 생명 도우시는 주의사랑 / 참기쁨과 확신가지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믿으며 살리”

그리고 나의 구세주 되신 예수님. 내 생명의 은인이신 예수님께 감사하며, 예수님의 아름다운 생애를 그리며 이런 찬송시를 지었다.

1. 갈릴리 바닷가 그 언덕 그 마을
  다니시며 하신 일 너무나 아름다워
  머나 먼 하늘나라 이 땅에 찾아 와
  하늘 비밀 전해준 나의 주 예수님
  하나님 독생자 그리스도 예수님
 나의 주 예수님 영원히 섬기리

2. 그 옛날 베다니 그 옛집 그 곳에
  향유 가득 준비한 마리아 있아오니
  언젠가 다시 오실 주님 사모합니다
  하늘 소망 주셨네 나의 주 예수님
  하나님 독생자 그리스도 예수님
  나의 주 예수님 영원히 섬기리

 
대학시절 나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셨던 김정일(김요한)목사님께선 지금은 하나님 곁에 계신다. 내가 실제로 체험한 목사님은 언제나 검소하셨다. 경제적으로 가난하셨다. 온유하셨다. 청년들을 사랑하셨다. 언제나 청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셨다. 설교 준비에 주력하셨다. 성경교재 만드는 데에 몰두하셨고 강의안 쓰는 걸 좋아하셨다. 대학생들을 제자로 키워 해외선교사로 파송하셨고, 목회자로 키웠다. 많은 선교학 논문을 쓰셨다. 학자이셨다. 신학교 교수셨다. 매 주일 강해설교로 파워플한 메시지를 전한 설교가였다. 교인 숫자에 연연치 않으셨다. 예수님처럼 제자양성에 주력하셨다. Campus Ministry에 주력한 대학선교운동가이셨다.

마지막 임종시에 자녀들 보다는 교회 리더들을 불러 교회와 선교를 당부하셨다. 자녀들 보다도 교회와 청년들을 더 사랑하셨다. 하나님께선 그의 생애 50년을 대학선교에 귀히 쓰셨고, 귀히 받으셨다. 50여권의 책을 집필한 김 목사님께서 마지막 남긴 저서는 “21세기 희망, 대학생선교 운동”이다. 복음주의 대학생 선교운동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다루신 책인 데 생명의말씀사에서 출간하였다.

나의 신앙여정을 되돌아보니 믿음의 길로 인도코자 하는 어머님의 노력과 기도가 있었고, 성경을 가르쳐준 목사님이 계셨기에 가능했다. 또한 그 목사님을 만나기 까지 나의 길을 인도하신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여기서 하나 언급하고픈 것은 이 시대에도 성경을 가르치는 목사님들이 많이 계셨으면 한다. 성경을 바르게 잘 가르치는 목사님이 있을 때에 한 젊은이가 올바른 신앙을 갖도록 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사님들께선 다른 프로그램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언제나 Bible Teaching에 주력하고, 설교를 위한 말씀연구에 전력을 기울여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말씀대로 바르게 살고, 바른 행실을 하면 이 시대 교계의 문제가 해결 되리라고 본다.

김한길 목사

1.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1.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들어가면서,
얼마 전 데살로니가 서를 읽는 중
게시판에서 그리스도의 편지님의 글 ‘앞서 오신 하나님’을 읽고
짧은 글에 생각이 많아 서성이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성경을 보아야 한다’ 는 몇 댓글을 읽고
상반된 글의 주장이라 즉각적인 반응은 이내 참담한 심정이 되었다.
어떻게 하나님의 시각이나 입장으로 성경을 본 다는가?

성경은 우리가 필요할 만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셨지만
올바른 지식을 배우고 깨달음은 성령님이 인도하시기에
더 깊은 믿음을 가지려면 성경을 읽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에 지식을
얻어서 믿음에 믿음을 더하여 자신을 분별하고 믿음을 확정하는 길은
이미 복음을 받은 자로서 은혜의 길이라, 받은 은혜를 나누려 하기에
이 글이 온전하여 주님의 복음에 합당한 글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여
영광이 되고 그리고 영광에 참여하는 모두가 되자는 외침이길
간절히 바라기에 성경을 읽고
또 읽고 기도하고 글을 쓰지만 이 글이 완벽한 글이 될 수도 없고  
그러나 완벽한 선이신 주님을 따라서 제자의 길을 가는 신앙의 삶에
이글의 고백이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런 바람이지
혼자 옳다는 독선은 아니나 읽기에 조금 과한 표현이 있음은
나름 성경으로 이 시대를 바라보고 적용한 복음의 바른 길에서
어그러진 길로 향한 사람들과
복음을 맹신적으로 대하고 맹신적인 순종과 헌신 더 하여 광신에 절은
분별과 치우침에 대한 경고로 인함을 밝혀둔다.

지식,
지식에 지식을 더 하여야 하는데 이 지식의 앎을 막아버린 자들과
지식을 비틀어 버린 자들이 배교를 하였고 이런 집단이 사이비가 되어
이단이 됨을 구약과 신약 그리고 교회사와 현실에서 수 없이 보는데
이제는 능력이 지식에 있지 않고 무조건 적인 순종과 헌신에 있다고
가르치고 가리키고 강요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고 이런 일들은
이미 지난 역사 속에 수 없이 많았고 지금도 맹신과 광신자를 양성하여
신도를 조종하는 수단으로 삼고
주위의 교회에도 이런 사이비 지도자는 셀 수 없이 많은데
이런 주장이 이곳에서도 수 없이 일어났고 이에 동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한탄 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 없이 믿음의 성장이 가능하다는
망언으로 설교하고 글을 쓰는가.
이 지식에 대하여
지식에 능력이 있지 않고 지식의 순종과 헌신에 능력이 있다는 주장은
옳은 것 같지만 사실은 옳지 않다.
성경의 지식은 히브리어 빈(bin)으로 분별과 이해 그리고 판단을 의미하고
이는 앎만의 지식이 아니라 분별하고 더 깊게 이해하고 판단하여 실행하는 언행까지 전체적인 총체(總體)이므로

구약에서,
하나님의 명령인 규례와 법도를 배우고 행하기까지가 지식이고 지혜라 한다.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가 들어가서 기업으로 차지할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신명기 4:5-6]
자세히 보면
어디에 앎만이 지식이라 했는가.
더 자세히 보면 ‘기업’ 이라는 단어가 눈을 끈다.
그 당시의 기업으로 차지할 땅이 가나안 땅이 이었다면
가나안 땅에서도 지혜로 지식이 되어 본으로 보이는 백성,
지혜와 지식으로
가나안의 주된 신 ‘엘, 을 비롯한
다산(多産)과 비와 풍요의 신들인 바알과 하다드 신, 엘의 아내 ‘아세라(A serah),
기술의 신‘코타르’  풍요의 여신‘아스타르테’ 재앙과 지옥을 주관하는 ‘레셰프’ 등
이방의 우상을 멀리해야 했는데
하나님의 명령을 다 지키지 못했고 가나안의 풍요한 생활은 점차 우상을
섬겼기에 하나님은 이방 족속들을 사용하여 이스라엘 민족에게 괴로움을 주고
선지자를 세워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셨다.
요즘의 표현으로
신자로 이 땅에 살면서
이곳이 가나안이며, 삶은 터전이 기업이 되어 불신자들에게 본이 되어
불신자들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로 삶을 보여주어야 하고
신자들이 모인 교회가 믿음의 공동체로 서로 형제와 자매로 말씀을 나누고
물질을 나누는 하늘나라의 모형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가?
믿는 자들끼리도 지식이 없어 분별이 없는데 어떻게 서로 본을 보이겠는가?
같이 합심하여도 모자란 시대인데
끼리끼리의 분열된 모임이 무슨 힘이 있겠고 열심을 낸들 자기들끼리의
열심인데 개혁까지 하겠다니 이런 만용이 없다.
목사는 목사 끼리, 은퇴하여도 은퇴목사 끼리
장로는 장로 끼리, 은퇴하여도 장로 끼리
이제 교회 안에서는 안수 집사끼리, 서리 집사를 나누고
높으신 회당 장 같은 당회의 당회장도 있고
중세적인 귀족과 평민을 나누는 평신도라니,
패를 나누는 패거리 교회와 교계가 되었다.  
그리고도
‘평신도를 깨우라’
‘복음의 야성을 가지라’
‘교회 중심의 주인 의식을 가지라’
개혁을 외치든 모두 헛소리 일 뿐이다.
진실로 신앙의 작고 조그마한 믿음의 양심이 있다면
본을 보이신 예수님의 본을 바라보자 !
만일, 이 시간 예수님께서 교회에 오신다면 어떻게 말씀 하실까?
자신에게는 어떻게 말씀 하실까?
이제 글 쓰는 자신은 신앙 양심상, ‘주여! 어서 오십시오’  
오래 기다린 반가움으로 영접하지 못함을 실토하고
평상시 수없이 절박한 순간과 고통의 시간에서도 도저히
‘마라나타 !’ ‘주님 어셔 오시옵소서!’
사실 그런 믿음이 없어 오히려 긍휼을 구하기에
내게는 남들처럼 ‘주님 이제 오시옵소서!’ 하는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도 없고
강건하여 준비된 세월을 보내지도 못하여 준비된 오늘 이순간도 부족지만
그래서 그런 투정을 할 수 있지도 못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공정하시고 공평하셔서 정의로우시며 오래 참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믿고, 그 사랑으로, 심판하실,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알고 마음으로 확정하고 확정하였기에
더 의문을 갖는다.
하나님은 패거리 모임을 좋아하실까?
하나님은 ‘끼리 끼리’ 의모임을 좋게 보실까?
성경으로 하나님의 의(공의)를 구하려할수록
자꾸 자꾸 세례 요한의 외침이 들린다.
‘독사의 자식들아!’
신앙이 종교가 되어 의식에 매인 종교지도자와 종교인들을 향하여
왜 세례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이라 했으며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보고 외쳤다면 무엇이라 했을까?

도대체 교회가 무엇인가?

교회의 구조와 조직에 대하여 말은 풍성하고 이론적인 정의에 대하여
늘 듣고 말하나 진정한 정체성에 대하여 고민하고 이를 교회가 실천하는 일은 찾아보기 어렵다.
아니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껍데기만 남은 교회의 건물에서 종교의식에 절은 현대의 교회는
전혀 성경이 추구하는 교회가 아니라 자기만족과 위안을 삼는 종교이지
신앙이 아니라서 지도자까지 성경을 읽지 않으면서 형식적인 성경공부를 하니,
이 이민교회와 한국교회의 수많은 목회자들은
어떻게 성경공부를 하였더니 지식에 머물러 성장이 없었다고
변명하는 목회자들의 헛소리를 셀 수 없이 들었는데
이는 자신의 무력한 진리의 깊이를 모면하려는 변명이며
자신들의 무식을 기피하려는 변명이라 이런 자들은 선생이 되면
안 될 자 들이었다.

신약에서
지식에 대하여 윗글의 신명기와 같은 구절을 보면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For to one is given by the Spirit the word of wisdom; to another the word of knowledge by the same Spirit; 고린도 전서 12:8]
이는 성령의 은사로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이나
지혜와 지식을 다른 은사로 보기도 하나 지혜와 지식은 같은 의미로 봐도 무방함은,
성령으로 말미암았고 성령을 따라야 하며 그래서
[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같은 성령으로 같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5.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지혜와 지식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따라서
일하는 직분은 다르나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은 같으며,
목사와 장로와 권사와 서리집사가 직분이 다르나 계급이 아니며
같은 신분으로 다 같은 성도로 직분이 다르며
목사나 세탁소 주인이나 직원이나 다 성도로 자기 삶의 터에서 성도로 합당한 삶을
살아가며 보여줄 의무가 있으며 특히 자칭 주의 종이라는 목사도 심판을 비켜 갈수도
없을뿐더러 결국은 판단하는 대로 판단 받고
종당에는 주님께서 판단함은 공정하시고 공평하신 하나님이신데,
목사와 교회를 비판하지 말라는 말은 전혀 옳지 않은데도 오래 동안 교회를 다녔어도
이를 이해 못한 다면, 신학을 했다면서 이런 헛소리를 한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자라 지혜가 없는 삯꾼일 뿐이다.
성경은 어느 특정인이나 집단에 해당하는 글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과거와 현제와 미래의 계시기에
마땅히 지혜와 지식으로
[6.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도 한 분이시고
성령도 한분이시라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을 위하여 오신 예수님
[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에게 유익을 주시려는 지혜의 지식이
복음이고 이 복음은 하나님의 의로, 뜻으로 공의로 이루어졌다.
그러기에 이 지식을 알아 감은 입술로 전해지며 입술에 머물지 않고
가슴의 복판, 중심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성령님을 따라서 머리에 간직하고 손과 발로 온몸으로 행하기까지를
지식이라 한다.
그래서 지혜로운 자는 지식을 입에 두지 않고
[지혜로운 자는 지식을 간직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입은 멸망에 가까우니라
Wise men lay up knowledge: but the mouth of the foolish is near destruction  잠언 10:14]
믿음에 두어 삶의 생활에 실천하고,
따라서 지식이 행위까지 듯이 참 믿음도 행위까지 포함되며  
행위의 그 공급하는 힘을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소망에 두고
성령님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한 지식과 지혜는 은사이며
우리 모두가 선물로 받은 믿음의 분별이라
믿음이 성장하면 분별력도 성장하게 된다.

지식에 대하여 만큼은 다시 쓰겠지만
지식을 입에 대기만 한 자들을 대하면 더 놀라운 괴설과 괴변으로
복음을 설명하며 복음을 비틀고
복음의 능력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복음의 능력을 감소하고
종당에 시인하는 듯 하지만 자신의 의로 부인하고 재물의 욕심으로
온 몸과 온 생활로 부인하는 자들은
한국이나 이민교회에 넘쳐 남은
교회가 세상 지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고
이런 자들은 버릇같이 ‘주의 영광’을 외치지만
실은 자기만족과 자기 합리화에 늪에 빠져서 스스로 노력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몸을 위하여 매진하는 자들이라
우리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을 알지 못하기에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But all these worketh that one and the selfsame Spirit,
dividing to every man severally as he will.]
자신의 뜻을 성경에 과녁에 맞춘
자신의 의지를 호응받기 원하기에 버릇처럼 ‘영광을 돌리자’ 한다.
이 지식은 근본은 예수님이시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지식을 우리에게 본을 보였으며
성령님께서 이를 증명하시기에 우리가 믿음의 지식을, 소망의 지식을
사랑의 지식으로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루어 져야 하는데  
어느 이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성경을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여
사이비가 되고 이단이 되어 어둠의 길로 간 사람들은 셀 수도 없고
유명한 목사, 부흥사, 은사로 사도가 되었다는 직통계시 파들 등
그들이 혼란한 교계를 만들었고 이런 자들의 공통점이 ‘하나님의 시각’이라는 교만으로
한국교회의 진정한 부흥을 막은 어둠의 세력이라
시각의 보기에 아름다고 웅장한 교회를 짓는 자들임을 안다면,
간절히 그들의 실상을 알기 원한다.
흔히 원죄라는 죄도 그런 시각으로 시작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the LORD God to grow every tree
that is pleasant to the sight, and good for food; the tree of life also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the 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
창세기 2:9]
시각으로 보면
아름다운 에덴동산 그 동산 가운데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
the tree of knowledge of good,
그리고 뱀이 있었다.
and evil.
그것을 먹으면 눈이 밝아져
eat thereof, then your eyes shall be opened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For God doth know that in the day ye eat thereof, then your eyes shall be opened,
and ye shall be as gods, knowing good and evil.  3:5]
이렇게 유혹했다.
하나님과 같이 되어,
shall be as gods,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For God doth know that ... knowing good and evil.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하나님의 시각이 된다는
하나님의 심정이 된다는.
‘하나님의 시각이나 입장’ 의 표현은 이미 믿는 성도로서의 처지를 떠난
본분을 망각한 교만하고 오만한 자세이다.
그냥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의가 무엇인지
성경을 통하여 배우고 신앙에서 구하여야 할 것을
앞서간 표현은 성경보다 앞서간 성경의 해석을 하여
과대 해석 하여 어그러진 말로 선동하는, 어그러진 패역의 길로 간 수많은 사람들을
성경이 증거하고 우리 주위에 수없이 많다.
다시 복음이 무엇이고 복음의 받은 자들의 신앙의 길이란 무엇인가
데살로니가 교회를 통하여 나누어 보고자 한다.

[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할지니라  잠언 23:19]


이 글은 뉴스앤조이 2010년 12월 16일에 김한길 목사(하이드팍침례교회)가 올린 글입니다. 

얼마 전 교계를 뜨겁게 달군 사람이 있다. 다름 아닌 인터콥 대표인 최바울 선교사다. 봉은사 땅밟기 사건으로 모든 교회가 자숙을 요할 때, 그는 “땅밟기 기도가 왜 잘못된 것이냐 할 수만 있다면 절간에 들어가서라도 기도해야 한다”는 화두를 던지면서 많은 사람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필자는 그때 최바울 대표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그의 신학 사상이 궁금했고, 그의 신앙 배경이 뭔가도 알고 싶었다. 그래서 최대표가 쓴 <세계영적도해>란 책을 꺼내 들었다. 읽으면서 맨 처음에 나오는 제1장 '하나님의사정'에서부터 막히기 시작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하면서 몇 번이고 다시 읽어야만 했다. 그런 가운데 성경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요소를 발견한 것이다.

<세계영적도해> 제1장, '하나님의 사정'에 대한 내용 분석
최 대표는 대학 1학년 봄에 처음으로 성경에 대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이 죄인임을 설명해주는 원천적인 에덴동산의 사건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그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 복잡해지는 것이었습니다.” (Page 33)

그러다가 그해 여름방학수련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을 영접하게 됐지만 에덴동산의 사건은 계속 의혹으로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대학교1학년 가을에 창세기 2장을 보면서 그 의문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창설한 에덴동산에 갑자기 등장한 인간과 뱀의 모습으로 등장한 사단이 인간에게 다가온 것과 사단이 인간을 유혹하는 사건을 그대로 지켜보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과 사단과 하나님과의 삼각관계에 모종의 실마리가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또한 이 삼각관계는 세월이 흘러 가장 고귀한 육체의 옷을 입고 오셨던 하나님과도 연결된다. 즉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과도 관련이 있다고 본 것이다. (Page34)

그래서 인간과 사단과 하나님과의 바로 그 삼각관계의 구도를 파헤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 숨은 의도와 목적을 알 때, 인간이 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는 존재인가의 이유도 알게 되고,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 가도 알게 되는 것이라고 최 대표는 본 것이다. 그래서 최 대표는 그 부분을 그의 책에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마침내 깨달은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것과 뱀이 접근해서 아담을 꼬이는 것을 보고도 침묵하고 바라만 보셔야만 했던 것 사이에 깊은 내적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셔야만 했는지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Page 34) "에덴의 사건 역시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진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정'입니다." (Page 44)

그러면 최 대표가 이해한 에덴동산의 삼각관계는 무엇인가? 하나님과 사단과의 관계는 무엇이며,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무엇이며, 인간과 사단과의 관계를 무엇이라 보았는가? 그리고 에덴동산에서 그러한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근본 이유를 무엇이라 보았는가? 또한 하나님께서 뱀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는 것을 보시면서 그대로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무엇이라고 보았는가? 최 대표는 결론을 내리기 전에 하나님과 사단과의 관계를 먼저 설명한다.

"인간을 창조하기 전부터 하나님의 사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정! 그렇습니다. 이 우주 창조 이전에 하늘에서 하나님의 사정이 있었습니다. 전능하신 창조주 우주의 왕 하나님께 사정이 있었다는 것은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Page 35)

그러면 최 대표가 발견한 하나님의 속사정은 무엇인가? 그의 주장은 인간 창조 이전에 영계·영적 세계·하늘에서는 영적 존재인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 갈등이 있었고, 그 갈등이란 하나님을 대적한 사단의 반역이며 반역한 사단은 하나님의 원수이기에 하나님께서 처벌하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최 대표는 하나님의 사단에 대한 속사정을 이렇게 말한다.

"주님은 사단을 정죄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늘에서 범죄한 사단을 영원히 저주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에덴에서 한 것입니다. 사단은 처음부터 하나님께 대적한 범죄한 천사이고 저주받아 마땅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사단을 고소하였고, 하나님은 합법적으로 사단을 정죄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사정이 풀어지는 것입니다." (Page 39)

이처럼 설명한 최 대표의 '하나님의 사정'을 생각해볼 때, 최 대표가 파헤친 에덴동산 사건의 삼각관계의 구도는 다음 세 가지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과 사단의 관계에 대한 최 대표의 견해

최 대표의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과 사단과의 관계는 우주 창조와 인간 창조 이전부터 원수 관계였다고 한다. 하나님은 사단을 처벌할 근거를 마련키 위해 에덴동산을 창설하고, 인간을 만들어 거기에 두시기로 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단이 에덴에 들어와 인간을 유혹하는 것을 허용하며, 그대로 지켜보심으로써 나쁜 짓을 하는 사단을 처벌할 근거와 이유를 마련키 위함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이 에덴동산과 인간을 만든 '하나님의 의도'요, '하나님의 사정'이라는 것이다.

드디어 사단은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에덴동산에 들어와 인간을 유혹한다. 하나님은 사단이 인간을 유혹하고 죄짓게 만드는 것을 막을 수 있었으나 처벌할 근거를 마련키 위해 그대로 지켜보고만 계신다. 마침내 인간은 사단의 유혹으로 죄를 짓는다. 그 후, 인간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든 배후의 인물인 사단을 고소하라는 요구를 하신다. “누가 너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Page37, 41)는 하나님의 두 번째 질문에 아담은 죄를 짓게 만든 사단을 고발한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그 배후를 설명하라”는 하나님의 지적에 하와는 그 배후로 뱀 즉, 사단을 지목한다. (Page 38) 인간의 고소를 받으신 하나님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여기에 근거하여 사단을 정죄·처벌·저주하신다. 이것이 최 대표가 파헤친 하나님의 속사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과 사단의 관계는 예수님에게로 연결된다. 오랜 세월이 흘러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이 사단을 멸할 마땅한 이유와 근거를 갖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사단을 정죄하셨으며 마침내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정죄된 사단의 정사와 권세를 꺾으셨습니다. 사단의 머리를 재기불능으로 상하게 하신 것입니다." (Page 46, Page 34)

이렇게 볼 때, 최 대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던 가장 첫 번째 목적을 인간 구원이 아닌 사단·마귀 멸하는 일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요한일서3:8)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최 대표의 견해

최 대표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의도’ 즉, ‘하나님의 사정론’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께서 사단을 정죄하고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만일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면 우리는 할 말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볼 때, 하나님께선 인간을 창조하신 후 많은 존재 의미와 목적을 주셨기에, 최 대표의 도구론은 나가도 너무나 빗나간 것이다. 성경 어디를 살펴보아도 하나님께서 사단을 정죄하고 처벌하기 위해 인간을 창조했다는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최 대표의 '하나님의 사정·하나님의도구론'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도구로 쓰였기에 구원 받게 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원하는 사단을 정죄·처벌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준 데에 공을 세웠기에, 그것으로써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기에, 그 공로로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최 대표는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최 대표는 하나님께서 사단을 처벌·저주하신 후, 인간에게는 처벌·저주치 않았다고 한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묻지 않으셨습니다. 죄의 결과는 그에게 있겠지만 죄의 원천적 책임을 묻고 있지는 않으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책임을 물으셨다면 아담과 하와도 같이 저주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죄의 결과에 대해서만 말씀하셨습니다. 죄의 결과는 저주가 아닌 고통입니다. 하나님은 땅을 저주하셨지 아담을 저주하지는 않았습니다. 범죄하면 우리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께로 나오면 우리를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여자의 후손이 오셔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Page 41)

최 대표는 아마도 대학 1학년 봄에 가졌던 그 궁금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그 의문의 궁금증이 여기서 풀려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풀렸다면 최 대표의 인간의 존재 의미와 목적은 하나님의 대적인 “사단 대적과 사단 박멸”에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의 사정”에 근거해볼 때,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장 최대의 일이고,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단 대적, 사단 박멸”만이 하나님의 속사정을 풀어드리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최 대표는 “하늘의 전쟁”에 대해서 언급한다. 사단이 있고 영계(영적 세계)가 있음을 언급하면서 하늘에 전쟁이 있음을 언급한다. 영계에 영적 전쟁이 있음을 언급한 후, “대적 마귀”에 대해서 언급한다. “우리는 사단을 대적해야 한다”고 한다. (Page 47)

대적해야만 하는 이유를 사단이 인간을 괴롭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 근본 이유를 하나님께서 왜 인간을 창조하셨는가에 둔다. 즉, 하나님께서 왜 인간을 창조하셔야만 했는가의 그 숨은 의도, 하나님의 사정인 마귀 박멸에 둔다.

그러면서 이 책의 제1장인 '하나님의 사정' 마지막 부분인 “성도의 권세”에서는 오늘날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영적 전쟁에 무능한 종교인이나 철학자로 전락하였음을 질타하면서 영적 전쟁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뉘앙스를 준다. (Page 47-49)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아, 하나님께서 사단을 정죄하고 처벌하는데 공을 세워 하나님의 속사정을 풀어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듯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단 대적을 위해 일어서라는 것이다. 사단을 대적하는 것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최대의 일이요, 사명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그러한 일을 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이기에, 하나님께서 사단 박멸을 하기 위해 인간을 만들었기에, 인간은 사단 박멸을 위한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한다.

그래서 최 대표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인간을 창조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이면서 동시에 동역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남겨두신 것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동역자로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셨습니다. 이것을 더 품위 있게 표현한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말입니다”(Page46, 48)라고 말한다.

이상으로 최 대표의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의 사정”을 종합해 볼 때, 최 대표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인간 창조 목적과 하나님의 인간 구원론은 이렇게 요약된다.

하나님은 사단을 정죄하고 처벌하기 위해 에덴동산을 만드셨고, 인간을 만드셨다. 인간은 사단을 처벌하는 데 쓰이는 하나의 도구이다. 인간은 사단을 대적하고, 대적하기 위해 존재할 때만이 가장 존재 의미가 있고, 거기에 인생의 목적이 있다. 그러하기에 인간은 사단을 대적할 때만이 가장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사단을 처벌하시는 일에 일조하고 동역할 때만이 가장 값어치 있는 일생을 살게 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숨은 사정에 따라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 사단에게 유혹을 받았기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 단지 죄의 결과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 죄에 대한 원천적인 책임은 사단과 하나님에게 있고, 인간에겐 책임이 없다. (Page 41) 또한 인간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사단에게 유혹을 받고, 죄짓게 만든 사단을 하나님께 고발하는 공을 세웠기에, 그 공헌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처벌치 않고 구원의 문을 열어주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도구로 이용된 인간이기에 불쌍히 여기고, 또한 동시에 하나님의 책임도 있기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구원의 문을 열어주신다는 것이다.

베뢰아 신학과 맞닿아 있는 최바울 대표의 사상

앞에서 지속적으로 언급된 최바울 대표가 사용하는 '하나님의 의도'나 '하나님의 사정'이란 개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생소한 신학적 용어는 한국 교회에서는 이단으로 지목된 베뢰아한국신학의 김기동 목사(서울 성락교회)에게서 나타난다. 이에 대한 교계의 반응과 견해는 어떨까.

베뢰아한국신학 김기동 목사의 “하나님의 의도”에 대한 한기침의 견해를 살펴보자. 기독교한국침례회 보고서(<교회와신앙> 1994. 7월호)는 “88년 기독교한국침례회총회(총회장 유광석 목사)”에서 발표한 자료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베뢰아 김기동 목사의 하나님의 인간 창조 목적은 다음과 같다. 인간 창조의 목적은 타락한 마귀를 멸망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하며, 그는 세상을, 하나님이 사단을 형벌하려고 만든 장소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 p.29 ; 신앙문답정신p.8 ; 마귀론 p.4)

"첫째, 죄짓고 오는 인간에게 상까지 주시겠다는 것은, 인간은 마귀를 멸하려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위한 사전의 안내자였기 때문입니다. 둘째, 인간은 사단을 정죄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까지 인간은 그가 오실 길을 위해 봉사한 것입니다." (마귀론 p.74 )

김기동 목사가 시무하는 성락교회의 부목사였던 이대규 씨는 김기동 목사의 인간 창조 목적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김기동은 결국 하나님이 인간을 만든 목적은 마귀를 멸하기 위하여 만든 도구에 불과한 것이며 사람은 결국 여호와의 이름을 가지고 있던 천사의 형상을 따라 지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김기동의 주장은 기독교회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비성경적이고 비신앙적이며 이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말하기를 ‘성경에서 우리는 인간의 구원을 배우지 말고 하나님의 의도를 배워야 한다. 하나님의 의도를 알지 못하고 인간 구원만 생각한다면 마치 돼지가 자기를 먹여주는 주인 아주머니를 식모로 생각하고 거름을 치워주는 주인을 머슴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고 말한다. 아담을 꾀어 사망을 가져오게 했으니 바로 사망 권세자로 합법화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귀를 합법화시킨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그를 합법적으로 심판하고 형벌하기 위한 것이기 위함이라고 한다. 김기동 목사는 신의 하늘에서의 범죄는 율법이 없었기 때문에 죄로 여길 수 없었지만 사탄을 음부에 가두어 놓은 후에 인간과 선악과를 만들어 세워 놓은 후 사탄이 마각을 드러내게 하기 위해서, 사탄을 잡은 유도 장치와 같은 이치로써 사탄을 정죄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선악과를 만들었다고 한다. … (생략)

…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오실 길로 창조되었으며, 예수가 육신으로 오신 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위하여 예비한 우편보좌에 들어가기 위하여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체험하기 위하여 죽기 위해서 오셨으며 그의 사망으로 사망 권세자 마귀를 없애기 위해서이다(히 2:14)라고 말한다. … 그는 1988년까지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제1의 목적은 마귀를 진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며, 제2의 목적은 이에 협조한 인간에게 은혜를 베풀어 덤으로 구원하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1989년도부터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제1의 목적이 마귀 진멸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들을 위하여 지으신 신의 우편 보좌를 상속받을 후사로서 오신 것이라고 개정하였다. 이에 교인들 사이에 베뢰아가 변질된 것이라는 반발이 일어나자 김기동 목사는 자신이 이전부터 이에 대해 분명한 소신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때 와서 밝힌 것뿐이라고 해명했다.

… 이러한 그의 주장은 소위 ‘후사론’을 통해 절정을 이룬다. ‘하나님은 영원 전에 아들을 위하여 우편보좌를 만들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께서 자기를 위하여 예비하신 하늘의 우편보좌에 직접 들어갈수도 있었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고 자신을 겸손히 낮추어 종의 형체를 입어 인간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죽음과 부활이란 과정을 경험하시고 우편보좌에 들어갈 것을 작정했다. 이렇게 영원 전에 작정된 길을 가는데 인간은 그 수단으로 사용되었으며 모든 만물은 이러한 길을 예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이미 영원 전에 작정된 것이며 아담의 죄와는 별개의 것으로써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다 할지라도 예수는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고 우편 보좌에 올라갔을 것이다. 구원이란 예수의 걸어가시는 길목에서 그의 이름을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주는 선물일 뿐이다." (http://newsmission.com)

그러면 이러한 최바울 대표와 김기동 목사가 주장하는 인간 창조론과 구원론에 대하여 성경은 무어라 말씀하시는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간창조론과 구원론은 무엇인가? 최 대표의 주장과 성경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인간 창조 목적과 존재 의미

하나님의 인간 창조를 다루는 창세기 1 장과 2장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고자 하는 목적과 의도를 분명히 가지셨음을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만든 에덴동산과 온 땅과 만물을 다스리게 하고, 관리케 하려는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만드셨다. (창1:25, 창2:15, 창2:19) 또한 인간에게 결혼과 가정을 주시고 에덴동산에서 행복을 누리며 살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만드셨다. (창2:8-25) 그런 목적과 의도로 만들어진 존재이기에 하나님은 처음 창조된 인간을 보시고 심히 기뻐하셨던 것이다. (창1:31)

인간의 존재 의미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따라 살아갈 때 가장 값어치가 있고, 거기에 존재 의미가 있다. 온 땅과 만물을 다스리는 사명적인 존재로 만드셨기에, 그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갈 때 가장 값어치가 있고, 거기에 인간의 존재 의미가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후 심히 기뻐하셨기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기뻐하는 일을 하며 살 때, 거기에 가장 참된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이고, 생의 의미가 있고, 참된 행복이 있는 것이다.(창1:26, 창1:28, 창2:16절)
따라서 최 대표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사정에 의한 창조 목적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완전히 위배된다. 하나님의 근본 창조 목적에서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용하여 사탄을 처벌키 위해서 인간 창조를 계획했다는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상기한 하나님의 인간 창조 목적과 존재 의미를 따라 날마다 충실히 살아가는 것, 바로 그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다. 또한 신비한 하나님의 권능, 아름다운 에덴동산과 온 땅과 만물을 주신 하나님의 은총, 행복 그 자체를 누리며 살게 하신 하나님의 배려 등을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다. 또한 죄 많은 인간을 구원키 위해 베푸신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의 은총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다. 땅 끝까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다.

따라서 최 대표의 견해처럼 사단을 대적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단을 대적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사단을 대적하기 위해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우리의 전도와 선교의 대상은 사단이 아닌, 아직도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전도와 선교로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게 해야 한다. 그러기에 전도와 선교의 대상이 사단이 아니란 것이고, 사단을 대적하기 위함이 아니란 것이다. 물론 사단이 있음을 인정한다. 사단의 유혹을 피해야 하고, 사단의 공격에 뒤로 물러서지 말고 과감하게 대적해야 한다. (벧후5:8, 엡6:11, 약4:7) 그러나 마귀와 사단을 멸하고, 마귀의 일을 멸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 (히2:14, 계20:1-3)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언제나 함께 계시기에 사단과 마귀는 걱정할 필요가 없고, 부지런히 복음 전하는 일에 전념하면 되는 것이다.(마28:18-20)

배후를 추적하고 고발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반론

문제가 되는 창세기 3:8-13절에 대한 필자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셔서 맨 처음 하셨던 질문은 “네가 어디 있느냐?” (창3:9) 이것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상실하고 숨어 살아야 하는 인간을 애타게 찾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자신의 잘못을 속히 깨닫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애절한 사랑의 표현이다.

두 번째 질문인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창3:11)는 질문은 벗었기에 숨었다고 변명한 그들에게 ‘나는 너희들에게 벗었음을 지적한 일이 없으니 변명과 핑계를 대지 말고, 솔직히 잘못을 시인하고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간절한 호소의 말씀이다. ‘먹지 말라고 한 계명을 어김으로 죄를 지었구나” 속히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모른 채 아담은 또 다시 변명을 한다. 하와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 번째 질문을 하신다.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는 이 질문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어 했던 하와의 죄, 먹음직스럽고 탐스러워 보였기에 먹고 싶었던 하와의 욕망을 솔직히 시인하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간절한 호소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와는 아담처럼 뱀(사단) 때문이라는 책임 전가의 변명만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통해 어떤 배후를 캐내려는 의도가 전혀 없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변명으로 일관한 아담 부부의 모습에서도 그 배후가 사단임을 고소하려는 흔적이 없단 사실이다. 하와가 뱀(사단) 때문이라고 한 것은 변명과 책임 전가에서 나온 말이지 결코 고소하기 위한 것이 아닌 것이다.
창세기 3:8-13절까지의 말씀은 죄지은 인간을 용서하려는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범죄한 인간이 속히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간절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솔직히 죄를 시인하고 나오는 것보다는 변명과 핑계만을 일삼는 인간의 실존을 보여주는 것이고, 범죄한 영혼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상실 가운데서 살아간다는 인간의 실존을 보여주는 말씀이지, 결코 고발이나 고소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최 대표가 주장한 하나님의 의도, 즉 하나님께서 아담 부부를 통해 뱀(사단)을 고발 받아 징계하려 했다는 것은 성경을 완전히 곡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최바울 대표에게 '인간 도구론'이 자리잡고 있는 것일까
최 대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린 벌과 사단에게 내린 벌이 다르다고 말한다. 인간 타락의 전적인 책임이 사단에게 있기에 사단에겐 저주·처벌을 내렸고, 전적인 책임이 없는 인간에겐 죄의 결과만을 물어 고통을 주셨다고 한다. (Page 41)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린 벌의 종류를 생각해볼 때, 사단에게 내린 저주보다도 더 심한 벌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삶의 고통 외에도, 죽음이 왔고, 영생을 상실했고, 에덴동산의 행복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나님과 단절되는 영적 죽음도 받았기 때문이다. (창3:16-24)

이럴진대 왜 최 대표는 인간의 벌이 더 가벼운 것이라 말 할 수 있을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 최 대표에게 하나님의 사정, 인간 도구론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나님의 의도된 계획대로 인간이 사단의 유혹을 받는 도구로 쓰였고, 사단이 범죄자임을 고발하는 데에 공헌했고, 사단의 유혹을 받을 때 그대로 방치해야만 했었던 하나님의 공범죄 의식에서 온 생각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범죄를 조장하는 분이고, 인간이 죄를 짓도록 만들기에 나쁜 분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완벽한 분이 아니고, 인간의 모든 범죄에는 하나님의 책임도 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거룩하시고 완벽한 분이시다. 죄를 조장하는 분도 아니시고, 의도적으로 죄 짓게 하는 분이 아니다. 죄 지은 인간 당사자에게 죄의 책임을 물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거듭 찾으시며 죄지은 인간에게 그 책임을 물으셨고, 그 죄의 대가로 혹독한 형벌을 내린 것이다. 죽음, 영생 상실, 행복 박탈, 삶의 고통, 하나님과의 관계 상실, 하나님으로부터 유리됨, 이보다도 더 심한 저주가 어디 있는가! 이처럼 혹독한 형벌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단이 아닌 죄 지은 당사자에게 그 책임을 직접 물으셨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 13절에서 예수께서 나무에 달리사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의 저주를 속량하셨다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신21:23) 이처럼 사도 바울도 우리의 죄의 대가가 저주임을 선포했는데, 사탄만 저주를 받고 인간은 단순히 고통만 받았다고 하는 최 대표의 주장은 과연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반문할 수밖에 없다.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인간 구원론

최 대표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사정에 의한 인간 창조 목적은 하나님의 구원론에도 많은 악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사단을 정죄·처벌하려는 목적으로 인간이 창조되었기에, 거기에 도구로 쓰임 받은 인간을 하나님은 구원하여 주셔야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단을 고소하는 데 일조했기에, 그 공로를 봐서라도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해 주셔야만 한다. 또한 하나님의 의도된 계획에 따라 인간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최 대표의 하나님의 사정에 의한 인간 창조론은 많은 모순을 지니게 되고, 자가당착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은 인간의 조건이나 공로를 보고서 구원해주시는 분이 아니다. 또한 죄의 결과만 보고서 구원해주는 분이 아니다.

로마서 3:10절 말씀은 인간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선포하고 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John Calvin은 인간은 하나님 앞에 완전 타락한 존재로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신다. 인간은 당신이 만든 최고의 걸작품이요, 당신의 형상을 지닌 고귀한 존재이기에 아주 사랑하고 아끼신다. 그래서 어떤 인간이라도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면 누구나 용서하고 구원해주신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구원론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고 하신 것이다. (요3;16, 요일1:9)

이처럼 성경에 기초한 하나님의 인간 구원은 전적인 인간의 타락과 전적인 인간의 죄에 대한 구원이지, 죄에 대한 결과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최 대표의 구원론은 성경의 구원론과는 상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최 대표도 죄인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고 나오면 구원받는다는 말은 하고 있다.(Page 41 중간) 그러나 곧 이어지는 부분에서 “전적인 책임을 묻지 않고. 죄의 결과는 있겠지만, 죄의 원천적인 책임을 묻지는 않으십니다”고 (Page 41) 하였기에, 최 대표의 구원론은 성경에 기초한 구원론과는 다른 것이라 생각된다.
인간이 짓는 죄에는 자범죄도 있고, 고의적인 죄도 있고, 사단에게 미혹 받아 짓는 죄도 있다. 최 대표의 논리에 의하면 잘 몰라서 지은 죄와 사단에게 유혹 받아 지은 죄에는 원천적인 책임이 없고, 죄의 결과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자범죄이던, 고의적인 죄이던, 사단에게 미혹 받아 죄이던 상관없이 인간의 전적인 책임을 묻고 있다.

하나님이 사단을 통해 죄를 짓도록 유도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으로서 광대무변하시다.(출3:15, 시104:1) 창조주로서 모든 것에 초월하고, 자유하시고, 어느 누구에게도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롬9:19-23) 창조주로서 모든 피조물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계4:11) 하나님은 모든 일을 당신의 뜻에 따라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엡1:11) 하나님은 공의롭고 정직한 분이시다.(신32:4, 창18:25, 삼하23:3)
하나님은 공의 그 자체이시기에 당신의 공의를 피조물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실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피조물에 불과한 사단이 영계에서 행한 반역죄 그 죄 한가지만으로도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으시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은 사단을 처리키 위한 또 다른 법적 근거를 만들 필요도 없고, 구태여 아담과 하와의 고발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죄를 조장하는 분이 아니기에(욥34:10, 사6:3, 신32:4, 약1:13)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유혹을 받아 죄를 짓도록 하였다는 것과 사단으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유도하였다고 주장하는 최 대표의 “하나님의 사정”에는 동의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에 대하여

최 대표가 Page 34에서 언급한 “세월이 흘러 하나님이 하나님을 닮은 가장 고귀한 육체를 입고 인간계에 들어오셨다”고 한 예수님의 주된 목적은 무엇인가? 최 대표의 “하나님의사정론”에 의하면 그 주된 목적은 사단 박멸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런 측면이 있긴 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셨기 때문이다.(창3:15)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주된 목적을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19:10),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막 2:17),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막10:45) 밝히셨기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가장 주된 목적은 “인간 구원”이다.

흔히 마귀론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요한일서 3:8절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였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을 보아도 인간 구원이 먼저이다. 왜냐하면 요일3:8절 말씀은 예수님의 “인간 구원”과 “마귀의 일을 멸하는 것”을 동시에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마귀의 일을 멸한다”는 것은 사단·마귀 박멸이 아닌, 마귀들이 사람들을 미혹시켜 죄짓게 하는 일을 파괴하고 하나님만을 향하도록 하기 위해 오셨음과 죄인들을 어둠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 오셨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Page 54-55, Plunner, 호크마종합주석)

요한계시록 19:20절, 20:2절, 20:10절 말씀들을 볼 때에 사단 처벌은 이미 오래 전 하나님의 작정된 계획 속에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질 운명에 처해져 있는, 하나님의 결정사항이다.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가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 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계20:10) 따라서 예수님이 이 세상이 오셨던 가장 주된 목적은 “인간 구원”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하나님의 의도'인가 최바울 대표 '자신의 의도'인가

이상을 살펴볼 때, 김기동 목사의 “하나님의 의도”는 교계의 지지를 받지 못함은 물론, 김기동 목사의 베뢰아 신학은 한국 교계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지 오래다. 따라서 김기동 목사의 신학 사상과 유사한 최바울 대표의 “하나님의 의도·하나님의사정론”은 심각하게 검토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 66권은 너무나 소중하다. 그 가운데 창세기는 두말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창세기는 모든 시작을 알려줌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든 목적(창 1:26-28)과 우리를 향한 구원(창3:15)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가르쳐 주고, 하나님과 영원한 관계 속에서 살 수 있는 비결(창 3:22-24)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귀중한 창세기 말씀을 곡해하여 버린다면 그 것처럼 비참한 일은 없는 것이다.

최 대표가 쓴 '하나님의 의도'는 이처럼 귀중한 창세기 말씀에서 너무나 빗나갔다. 한마디로 최 대표의 '하나님의 의도'는 성경에 기초한 것도 아니고, 본인 '자신의 의도'에 따라 쓴 것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에 기초하여 분석해 보았기 때문이다.

어느 신학자는 이런 말을 했다. “구약 없이는 신약이 존립할 수 없다.” 그만큼 창세기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창세기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은 1장부터 12장이고,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 1장, 2장, 3장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1장부터 3장까지는 창세기의 꽃 중의 꽃이다. 아니 신구약 66권 성경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의 근간인 신론, 인간론, 구원론, 기독론, 교회론, 종말론이 여기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세기 1장부터 3장의 말씀이 무너질 때 우리의 신앙체계는 무너질 수밖에 없고, 신앙의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의 의미와 목적도 상실할 수밖에 없고, 살아갈 소망도 잃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모르거나, 알면서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넘어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선교 단체의 대표라는 신분 때문일 것이다. 인터콥 최 대표의 모토는 “다른 선교단체의 목표는 전도와 양육이라고 한다면, 인터콥은 선교 비전 심는 데에 주력한다”이다. 이 말은 교회 안에 들어와 선교 교육을 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최 대표의 <세계영적도해> 제1 장 “하나님의 사정”에 나타난 그의 신학 사상을 볼 때 심히 우려된다. 교회는 선교단체를 아끼고 긴밀한 관련을 맺어 성도들을 교육시켜야 한다. 그러나 인터콥 대표의 신학사상이 이러하다면 우리는 반드시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목회자의 임무는 성도들을 돌보며 보호하며 양육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잘못된 신학 사상, 비성경적인 가르침으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잘못된 신학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 성도들을 교육시키도록 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목회자의 직무유기라고 생각한다. 인터콥이 다른 선교단체들보다도 더욱 교회와 긴밀한 연관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선교단체이기 때문에 나는 더욱 염려하면서 이 글을 썼다.

김한길 / 하이드팍침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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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뉴에이지 운동 - 제4제국? [下]

The New Age Movement - the Fourth Reich?

 

나치즘을 일으킨 戰前의 분위기는 - 파시즘과 나치 형태의 철학들이 자라나기에 알맞은 - 현재의 분위기와 비슷하다. 이것은 많은 정치적 사건들로 인한 실망으로 절정을 이룬 분위기였다. 독일은, 전쟁 패배와 전후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정신적) 외상과 함께 이에 따른 어려움을 겪었었다. 독일 젊은이들은 그 시대의 가혹한 일상에서 탈피하기 위해 반더보겔wandervogel이나 동양 신비주의로 눈을 돌리려고 했는데, 그들은 - 고대 숙련자adept들은 절대 패하지 않으며 패배란 정신 상태로서만 존재했던 꿈의 나라never-never land의 신화 - 독일과 노르딕 신화와 함께 이것을 탐구했다.  

 

미국도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다. 우리의 국가적 자부심은 상처받았고 베트남 전쟁의 거짓은 드러났다. 군인들은 영웅적 환영 대신 조용히 무관심 속에 돌아 왔다. 나라는 경제 문제로 심한 고통 속에 잠겼다. 특히 베트남 전쟁 후 - 심지어 전쟁 중에도 - 반더보겔과 동양 신비주의로의 대중적 선회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 전후 독일에서와 마찬가지로 - 광범위한 약물의 사용으로 가속화된 초월적 의식transcendental consciousness으로의 노정이 함께 했다.

 

신-이교주의neo-paganism의 부활과 대중들의 적극적인 동양 신비주의의 사용을 추구하던 사람들은 이런 경향을 반겼으나, 다른 사람들은 마땅히 이에 불안해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에 점령당했던 나라들의 국민들과 나치즘의 위험에 대해 체험적으로 알고 있던 유럽의 학자들 사이에는 큰 우려가 존재했다.

 

두 명의 탁월한 프랑스 학자들은, 쟝-미쉘 앙게베르라는 연서joint signature 이름으로, 1974년 맥밀란 출판사에서 영문판이 출간된 그들의 고전 "오컬트와 제3제국"The Occult and the Third Reich에서 적는다:

 

히틀러 신화는 이것을 만들어낸 특정 철학 시스템의 맥락에서 볼 때만 이해가 될 수 있는데, 이 시스템 자체도 수 세기 전으로 돌아가는 역사 전통 속의 하나의 연결고리에 불과했다.

 

독일로 하여금 스와스티카(卍)를 받아들이도록 유도한 사람들은 아직 죽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시대에 그래왔듯이, 지금도 우리 안에 있으며 의심의 여지 없이 종말까지 그럴 것이다. 그들에게 국가 사회주의는 도구에 불과했으며, 히틀러도 도구에 불과했다. 프로젝트는 실패했다. 그들이 지금 시도하려는 것은 다른 방법을 사용해서 신화를 부활시키는 것이다. (p.xvi).

또는, 라인강 계곡을 단결요소로 삼아 국가들을 연합하려는 앞서의 "하이어라키의 프로젝트"에 대해 포스테 베일리가 전에 인용한 말을 다시 적으면: "이것은 어느 제자의 시도였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나치즘과 뉴에이저들의 우주론과 우주기원론은 똑같다.

 

나치즘과 뉴에이지 운동은 공히, "초월적 의식"으로의 "노정"path을 촉진시키고 "미스테리"로에 입문을 통해 대중을 탈바꿈transformation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오컬트 교설들과 이교도적 수행들이 히틀러 통치 중에 국가의 주류 속으로 주입되었다.

 

예를 들어,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의 지휘 하에서 히틀러의 SS 친위대는 이교 미스테리에 집단 입문하도록 강요되었다. 아리안 성배 비전비법Aryan grail esoterics에 덮인채, 입문자의 목표는 심령력과 초인적 힘을 얻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오컬트국(局)Bureau of the Occult 또는 아네네르베Ahnenerbe를 세웠는데, 이것은 그가 세운 독일정부의 일부이자 동시에 SS에 소속된 독립국이었다. 러시아와의 전선에 투입하기 위해 젊은이들을 징병한 것과 마찬가지로, 주요 학자들과 지식인들은 이 조직을 위해 연구하도록 징집되었다.

 

앨리스 베일리, 벤자민 크렘, 데이비드 스팽글러와 기타 많은 뉴에이지 작가들의 교설들은 말하기를, "새 시대"(뉴에이지)에는 우리가 집단 지구적 입문mass planetary initiation 과정을 겪을 것이라고 한다. "루시퍼 입문"이라고 불리는 이 "입문"의 세부내용은 "뉴에이지의 사타니즘과 루시퍼리즘"라는 제목의 장에서 논의된다. 같은 장에서는 또한, 뉴에이지 그리스도와 "입문"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는 스팽글러의 진술에 대해서도 논한다.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에소테리시스트(秘敎주의자)esotericist들은 우주의 "대우주/소우주"Macrocosm/Microcosm로 알려진 오컬트 교리를 믿었다. 이것 역시 일반적 뉴에이지 신념이다.

 

뉴에이지 에소테리시스트들은, 뉴에이지 메시야를 우두머리로 하는 "하이어라키"Hierarchy 속에 조직된 "마스터(대사/스승)"들의 존재를 믿는다. 마찬가지로 나치 역시 뉴에이지 그리스도가 이끄는 "마스터"들의 하이어라키의 존재를 믿었는데, 그들이 뉴에이지 그리스도로 여긴 사람은 그들의 히틀러였고 히틀러 자신 역시 그렇게 믿었다.

 

이런 교리적 연속이 가능한 이유는 신-이교주의/오컬트 교설들과 동양 신비주의의 에소테릭(秘傳) 교설들이 입문자, 숙련자, 마스터들의 시스템을 통해 보존되었기 때문이다. 쟝-미쉘 앙게베르의 "오컬트와 제3제국" 서문에 번역자는 이렇게 적었다:

 

이런 발견의 의미는, 서양에서는 신-이교적 연속체 또는 전통에 대해서 말할 이유들이 유대-기독교 전통에 대한 것들 만큼 많다는 것이다. 후자처럼 전자 역시 자신의 교리, 의식ritual, 상징, 선지자, 그리고 숙련자들을 가지고 있다. 다른 모든 주요 종교들처럼 이 역시 (비교적 브릴 소사이어티, 툴레 협회, 성배 탐색자들의 소사이어티, 그리고 오르덴부르겐 학교들Vril Society, Thule Society, Society of the Seekers of the Grail, and seminaries of the Ordensburgen에 의한 나치 혈통이 보여주듯이) 성직자를 통해 자신을 존속시킨다. 이는 입문 센터들에 위치한 오컬트 파워의 집중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그 지식과 상징들에는 대적들만큼이나 일반 대중들도 접근하기 어렵다. (p.xii).

 

수백가지의 참조 포인트 중에서, 또 하나의 재미있는 참조 포인트는 뉴에이저들이 요가, 명상, 마인트콘트롤 강좌 등의 다양한 "영적(영성) 훈련"spiritual disciplines을 받음으로써 그들이 우주와 함께 공동창조자가 될 수 있다고 일반적으로 믿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런 수행(훈련)들로 자신들이 "진화"했다고 믿는다. 이런 점에서 그들의 진술과 히틀러의 언급 간에는 으스스한 유사점이 있다.

 

존 화이트는 1979년 국제협력위원회 디렉토리International Cooperation Council Directory (현재는 "다양성 속의 일치 위원회"Unity-in-Diversity Council로 알려짐)를 진행하며 말했다:

 

오늘날 발생하는 것은... 세대 차이도 소통의 단절도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종(種) 간의 격차species gap이다. 새로운 종이 지구에 나타나서 그 삶의 권리를 주장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지배 종dominant species과의 충돌species gap을 일으킨다. 그 지배 종은 죽어가는 종이다... 이런 사건들과 그리고 심리기술, 영적 훈련과 신성한 전통들에 있어서의 매우 가속화된 관심과 개발은 새롭고 더 지적인 종이, 지배 종의 저항 가운데, 나타나 존재하도록 하여 통합된 지구문명을 발전시킨다.

 

생존진화(survivolution)가 일어나는 데 있어서 강력한 도약이 있을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 사이의 커다란 선별과정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속한 종을 찾으려고 힘쓸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우주와 함께 공동창조자가 될 수 있다... 이것이 명상과 기타 영적 훈련이 추구하는 바이다...

 

새롭고 더 높은 인류의 종류가 지구를 지배함에 따라 오늘날 세계에서는 진화적 진전이 일어난다... 오래된 종이 과도한 불합리로 인해 멸종되는 반면  (그들은) 살아남는다. 겉으로는, 이 변종된 인류는 이전의 종류와 닮았다. 차이점은 내면에 있으며, 그들의 바뀐 사고방식, 그들의 의식에 있다.

 

나는 떠오르는 인류 형태를 호모 노에티쿠스Homo noeticus라고 이름짓는다. (페이지 13-15에서 발췌)

만약 이것이 나치 학자들과 비슷하게 들린다면 그 이유는 그것이 맞기 때문일 것이다. 히틀러 자신이 거의 똑같은 것을 말했다:

 

창조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인간은 앞으로도 많은 탈바꿈metamorphosis 단계를 거쳐야만 한다. 아틀란티스 이후Post-Atlantean 인간은 이미 퇴화와 쇠퇴 상태에 있으며 다만 가까스로 생존하고 있다... 모든 창조적 포스forces는 새로운 종에 집중될 것이다. 오래된 그리고 새로운, 두 종류의 인간은 다른 방향으로 급속히 진화할 것이다. 하나는 지구 상에서 사라질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번성할 것이다... 이것이 국가 사회주의 운동National Socialist Movement의 배경에 있는 참 동기다! (The Spear of Destiny by Trevor Ravenscroft, Bantam Book Edition, p. 250에 인용된 내용)

또한 그리고 아마 가장 중요하게도, 두 운동 모두 비입문자들을 오도하기 위한 "블라인드"blinds의 사용을 믿는다. 나치는, 뉴에이저들이 그렇게 하듯이, 참으로 사악한 행위들에 종종 상냥한 이름을 붙였다. 유대인과 집시들의 몰살을 살해라고 부르지 않았다. 이것은 "정화 행위"cleansing action라고 불렸다. 죽음의 수용소는 건강의 수용소로 보이도록 위장되었다. 지역 인구의 거대한 말살은 "재정착"resettlements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블라인드"의 사용은, 운동의 목표에 동감하지 않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 플랜"The Plan의 구체적인 사항들을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한 공인된 전략이다. 그런 이유로, 뉴에이저들 역시 블라인드를 사용해서 일반 대중들이 그들의 전모를 알지 못하게 한다.

 

"블라인드"는 일반 독자들의 손에 들어가기 쉬운 오컬트 문서에 포함되고 있는 일부러 거짓되고 모순된 정보로 이루어지며, 앨리스 베일리가 시간을 지정해서 문서공개를 허용한 1975년 이래 뉴에이지 문서들에 들어 있다.

 

이 기법을 사용한 한 예가 헬레나 페트로바 블라바츠키의 "시크릿 독트린"The Secret Doctrine 아디아르판Adyar Edition 제5권에서 보여진다:

 

우리가 다루는 주제의 심오한 성격을 고려하여, 현재의 문서[2부]는 이전 문서[1부]에서 모호한 채로 남겨진 일부 포인트들과 또한 모순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이는 문장들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하겠다.

 

에소테리시스트(秘傳家)들esotericists 중에 많이 있는 점성술사들은 그들의 가르침에 뚜렷이 모순되는 일부 문장들에 의아해하기 쉽다. 반면에 이 분야의 문외한들은 처음에는, 카발라와 점성술의 [외부에 알려진] 엑소테릭exoteric 시스템을 연구한 사람들이 그들에 반대하는 것처럼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인쇄되고, 방송되고, 공공도서관이나 박물관에서 누구든지 연구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정말 에소테릭한 [비밀의, 숨겨진] 것은 없으며, 도리어 의도적인 블라인드와 혼합되었거나 또는 완벽한 오컬트 용어사전 없이는 이해하거나 연구해 얻을 것이 없는 것들이다. (p.435).

앨리스 A. 베일리는, 그녀의 신비학당Arcane School 제자들에게 그리고 그녀의 책을 읽은 견습생과 입문자 지망자들에게 그녀 역시 마담 블라바츠키처럼 블라인드를 사용했음을 가르쳤다. 하지만 그들은 실은 이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 지혜를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무시한 채 - 어차피 오직 입문자들만이 쓰여진 것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뉴에이지 운동의 조직은 섬뜩하게도 히틀러의 독일을 상기시킨다. "다양성 속의 일치 위원회"Unity-in-Diversity Council와 그리고 네트워크들의 네트워크임을 천명하는 "우리가 선택하는 세계을 위한 지구 계획"Planetary Initiative for the World We Choose 같은 운동의 母위원회 말고는, 뉴에이지 운동은 자체로는 어떤 단체로 조직되어 있지 않다.  (부록 B는 그들의 목표들과 조직구성을 보여주는 "다양성 속의 일치 위원회"로부터의 샘플 자료들을 포함한다.)

 

대신 이것은 핵심에 몇 개의 중요한 중추 기구를 가진, 글자 그대로 네트워크들의 네트워크다. 그들이 채택한 특정한 조직 형태의 장점은  - 짐 존스가 그랬듯이 - 어느 한 조직이나 개인이 그들을 난처하게 만들게 되면, 그들은 재빨리 그물망 형태의 구조를 닫음으로써 그 개인이나 조직이 마치 전혀 그들의 일부가 아니었던 것처럼 그 개인 또는 조직을 제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히틀러의 나치즘과 뉴에이지 운동 사이의 더 세부적인 상호관련을 보여주는 차트다. (번역은 다음 기회로 미룸)

 

나치즘


(1) Nazism was an offshoot of occultic practices and teachings. The Nazis had a Bureau of the Occult as part of the German government under Hitler. This was known as the SS Occult Bureau. Another such agency was the Nazi Occult Bureau.
(2) Nazism taught the doctrine of Aryanism and Aryan purity and that the "New Age" would feature an Aryan mutant "master race."
(3) Nazism features hatred of Jews and an ancient occultic doctrine of a blood taint resting on the Jews and that there was a need for a final "correct solution" to this "Jewish problem."
(4) Hitler was an initiate of occultic practices, including yoga, Tibetanism, hypnotism, and the Secret Doctrine of Helena Petrovna Blavatsky and the Tibetan Masters.
(5) Nazism featured the quest for the "Holy Grail" as a path to transcendental or higher consciousness."
(6) The Nazis believed in the Law of Karma and reincarnation.
(7) The Nazis and particularly Hitler sought to embody Luciferic energies.
(8) Hitler used mescaline to speed up consciousness expansion.
(9) The Nazis thought they had evolved into a new and superior species by means of "spiritual disciplines" and "consciousness evolution."
(10) Hitler encouraged the organization of young men into the Brown Shirts for the purpose of keeping order in the cities and village neighborhoods. The Brown Shirts were trained in the martial arts such as karate and generally performed guard-type operations.
(11) Members of the SS
(Schutzstaffel), or protection squad, were inducted by a pagan-style initiation ceremony.
(12) The Nazis believed in breeding of children controlled by the state.
(13) The Nazis operated free maternity homes in the interests of breeding a master race.
(14) Hitler encouraged the recruitment and use of convicts.
(15) Nazism sought the institution of a New World Order in which the Aryan race would predominate and control.
(16) Nazism was a synthesis of occultism and gnosticism, based on The Secret Doctrine and a synthesis of the old "Mystery Teachings" and Eastern Religions.
(17) Nazism came to power by Hitler appealing to the rich that his regime would increase their control and be more efficient and telling the poor that his regime would mean sufficient resources for them to exist on.
(18) Nazi adepts believed the gods lived in Shamballa.
(19) Nazism was hostile to orthodox and fundamentalist Christianity and sought to replace the cross with the swastika.
(20) Hitler referred to his scheme to take over as "Mein Kampf" or "My Plan."
(21) Hitler forced his underlings to go through occult initiation rites.
(22) Nazis believed the roots of their Aryanism were first found in Atlantis.
(23) Hitler said in Mein Kampf that the problem with Christianity lies with its Jewish antecedents.
(24) The Nazis believed a new superior mutant species of Aryans can be brought into existence by development of "Higher Consciousness."
(25) Heinrich Himmler, like many other Nazis, had an anti-Catholic bias. He even went so far as to advocate the public execution of the Pope and to compel Catholic SS members to leave the Roman Catholic faith.
(26) The Nazis, through Heinrich Himmler, developed a secret file that eventually included a dossier on nearly all Germans.
(27) Hitler moved to disassociate himself from troublesome elements supporting him whenever they proved to be embarrassing. For example, when Rohm's Brown Shirts proved to be an embarrassment, he moved to disassociate himself from them and organized the Black Shirts
(SS) in their place.
(28) The Nazis instituted a program of quietly killing children with birth defects and mental patients. Hitler instituted this program after receiving a letter from the father of a deformed child requesting that the child be put to death. One way was to starve the child.
(29) The Nazis referred to their promotion of local antisemites murdering Jews as "self-cleansing" and the murder of Jews as a "cleansing action."
(30) A common Nazi tactic was to burn down synagogues - sometimes with people in them.

 

뉴에이지 운동


(1) The New Age Movement is based on occultic practices and teachings, particularly the writings of Helena Petrovna Blavatsky,
(especially The Secret Doctrine), and Alice A. Bailey, who claimed to be receiving telepathic messages from the Tibetan Master Dwjal Khul. All forms of occultism and mind expansion were permitted and encouraged within the New Age Movement.
(2) The New Age Movement teachings stress the doctrine of Aryanism and Aryan purity. See especially Alice A. Bailey's writings and the writings of David Spangler. The New Agers believe that through meditation and other "spiritual disciplines" that they have become a "new species" - homo noeticus as opposed to homo sapiens and that homo sapiens is a dying species. They teach that the Jews are from a different solar system
(Alice Bailey teachings) and that the orientals and blacks are from a different root race. Occidental races must control the world as they are presently our most evolved root race.
(3) The Secret Doctrine of occultism features hated of the Jews. The writings of Alice Bailey, which have been followed meticulously by the New Age Movement, state that the new "messiah" will not be Jewish as the Jews have forfeited that privilege and that they must pass through the fires of purification in order to learn humility.
(See The Rays and the Initiations by Alice A. Bailey. This particular passage regarding the New "Messiah" was written in 1949 when the entire world knew what had happened to Europe's Jewish population.) These teachings are also strongly opposed to "Zionism" and the possession of a homeland by the Jewish people. These teachings also state that what happened to the Jewish people in WWII was a result of their "bad national karma."
(4) Benjamin Creme says that "Maitreya the Christ" is a seventhdegree initiate. Entrance into the New Age requires a Luciferic initiation.
(5) The New Age Movement features the quest for the Holy Grail as a path to transcendental or higher consciousness.
(6) The New Agers believe in the Law of Karma and reincarnation.
(7) The New Agers and particularly David Spangler, one of the leading New Age spokespersons, state that the Luciferic energies are positive as they are the "energy of anticipation" and the energies that "get a person from here to there."
(8) The use of drugs as a catalyst in consciousness expansion has long been a part of the New Age Movement.
(9) The New Agers think they have evolved into a new and superior species - homo noeticus as opposed to homo sapiens by means of "spiritual disciplines" and "consciousness evolution."
(10) The New Agers through Curtis Sliwa have encouraged the organization of young men and women into the Guardian Angels for the purpose of patrolling cities and neighborhoods. The Guardian Angels are trained in martial arts such as karate and aikido.
(11) Members of the U.S. Military New Age-oriented First Earth Battalion are initiated in a pagan-style initiation ceremony.
(12) Many New Agers, and most top-level New Agers, advocate requiring people to be licensed in order to have children. Friends of the Earth are particularly vocal in this regard.
(13) The New Agers have an operation known as The Farm in Tennessee which has a free maternity home and women are told they can leave their babies for as short or as long a period as they like.
(As a practical matter, it is almost impossible from a legal standpoint to regain custody of a child left for a long period of time.)
(14) The New Agers encourage the recruitment and use of convicts. Signs of Christ by Harold Balyoz, specifically mentions it and there are many, many New Age projects designed specifically for the recruitment and conditioning of convicts to orient them to New Age goals.
(15) The New Age Movement seeks the institution of a New World Order in which Aryanism will prevail.
(16) The New Age Movement is a synthesis of occultism and gnosticism, based The Secret Doctrine, the Alice Bailey teaching, and a synthesis of Eastern religions and the old "Mystery Teachings."
(17) The New Age Movement has obtained the support of the rich and powerful, such as the Chase Manhattan Bank and heads of major corporations, by telling them that the New Age teachings are good for entrepreneur-ship and business, and many of the poor by telling them that they will redistribute the world's assets and establish a New World Economic Order.
(18) New Age initiates believe the gods are established in Shamballa.
(19) The New Age Movement is hostile to orthodox and fundamentalist Christianity and seeks to replace the cross with the rainbow and the swastika.
(20) The New Agers call their scheme to take over "The Plan" and the transmissions from "Lord Maitreya" through Benjamin Creme, Maitreya calls it "My Plan."
(21) The writings of Creme, Spangler, Alice Bailey, and other important New Agers state we will be forced to undergo initiation if we wish to enter the New Age alice.
(22) The New Agers trace their Secret Doctrine and occult teachings to Atlantis.
(23) Creme, Alice Bailey, Theodore Roszak, and other important New Age writers say the problem with Christianity is that it has presented a teaching of Christ "straight out of the old and outworn Jewish Dispensation."
(24) The New Agers believe a new superior mutant species of Aryans can be brought into existence by development of "Higher Consciousness."
(25) Benjamin Creme, the spokesman for Tara Center and "Maitreya the Christ," has publicly stated that the Pope will be forced to bend his knee to "Maitreya the Christ." Hatred of Catholicism shines through the Alice Bailey writings which are followed meticulously by the New Agers.
(26) The New Agers, through Buckminster Fuller and the World Game Laboratories, advocate computerizing all information whatever and allowing anyone who desires access to this information. For example, all purchases and resources whatsoever would be computerized.
(27) Marilyn Ferguson, writing in The Aquarian Conspiracy, said that the Movement was not dependent on any individual or organization because of its network composition. For example, the New Agers were proud to claim Jim Jones and his Peoples Temple as their own until his Guyana murder-suicide fiasco. After that, they never ever mentioned him again except to point to him as an example of the dangers of religious fundamentalism; yet the insiders in the Movement knew all along that he was one of theirs and never into orthodox or fundamental Christianity.
(28) New Agers have advocated and supported leglislation and medical practices of euthanasia and death by starvation and termination of life support systems. One rationale given for this is the will of the parents and the inability to support children with such immense needs.
(29) The New Agers believe that a "cleansing action" will be necessary to rid the world of "evil"
(defined as anything that causes separation. Separation is defined as caused by God-fearing religions - Jews, Christians and orthodox Moslems).
(30) At least one prominent New Ager, Gina Cerminara, has stated that when the people learn what the churches are really all about, they will probably burn them down.

 



Seattle Parks and Recreation은 화장실 사용에 성적 구분을 두어서는 안된다는 규례로 인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였다. 한 남자가 여성의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최근 시애틀에서는 자신이 선택한 성 정체성에 의해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도록 규례를 제정했는데, 바로 이 규례를 내세워 이 남자가 여자 탈의실에 들어와 옷을 갈아입은 것이다.


이 사건은 28일 오후 530Evans 수영장이 한참 붐빌 당시 발생하였다. Seattle Parks and Recreation 측에 의하면 수영복에 셔츠를 입은 한 남자가 여성들에 락커룸에 들어가 그의 셔츠를 벗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본 여성들이 이 사실을 스태프들에게 알렸고, 스태프는 이 남자를 내보내려 했지만, 남자는 법이 바뀌었기 때문에 나는 여기에 있을 권리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지난 월요일엔 개정된 규례를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이 모두 Olympia 모여 데모를 하였는데, 규례를 반대하는 측에선 개정된 규례가 관음증 환자들이 샤워실에 드나들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고 주장하였고, 규례를 찬성하는 측에선 현실성 없는 우려라는 주장을 펼쳤다.


기사원문 >> Seattle man in women's locker room cites gender rule



* 태생적인 남녀의 구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성차별 금지조항이 이제 관음증 환자들로 하여금 마음대로 여성의 탈의실로 들어가 벌거벗은 여성들과 함께 샤워를 즐길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




수영장 직원이 여성들이 옷을 갈아입고 있는 탈의실에 들어온 남성을 제지하려 했을 때, 오히려 법조항을 들먹이며 퇴실을 거부했다고 하니, 앞으로는 작심하고 들어온 남자들을 실질적으로 막을 방법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지인이 카톡으로 보내어온 글

최근 들어 세계정부주의자들이 중점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 이 땅을 롯의 때로 만들기 위해 펼치고 있는 동성애 어젠더와, 바티칸이 중심이 되고 있는 종교통합의 어젠더라 할 수 있는데, 설 연휴를 앞두고 이에 관한 소식이 주요 뉴스가 되고 있다.

 

첫 번째 소식은 “장난감의 성 정치학”을 운운하면서 이번 설에는 여자 아이들에게도 로봇 장난감을 선물해보고, 남자 아이들에게 인형을 선물해 보자는 기사이다. 남녀의 성 구분을 없애 결국 성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어린 아이들을 동성애로 이끌겠다는 사악한 의도가 엿보이는 기사이다.





장난감 업계에서도 남녀의 성구분을 없애려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관련기사>> “여자애도 터닝메카드 좋아하거든요” 장난감의 성 정치학, - 성 구분 없이 자유롭게 갖고 놀게 해야, (한국일보)

 

두 번째는 프란치스코 교황과 러시아 정교회의 키릴 총대주교가 오는 12일 쿠바에서 역사적인 만남을 갖는다는 소식이다. 1054년 로마 가톨릭과 정교회가 갈라진 뒤, 처음으로 이를 대표하는 수장들의 만남이 프란치스코 교황의 노력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이는 기독교 통합 더 나아가 종교통합의 상징적인 사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2013년 WCC 부산 총회 개최 이후 한국교회 안에서 불고 있는 기독교 통합 작업이 이번 교황과 러시아 정교회 수장과의 만남을 통해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로마 카톨릭 교회와 러시아 정교회 수장들의 만남은 종교(기독교) 통합의 상징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관련기사>> 1000여년 만에 교황-러시아정교회 총대주교 만난다. (경항신문).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말과는 정반대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을 일만 골라하고 있는 2016년 올 한 해엔 또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심히 우려스럽다.

 

 

- 예레미야 -

★미국 CNN에서 발표한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것 10가지.

미국 뉴스 전문 채널 CNN은
"국토 면적은 세계에서 109번째일 정도로 작지만, 레이디가가를 능가하는 K-POP 스타와 갤럭시 스마트폰을 배출하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라며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것 10가지’ 를 소개했다.

1. 예뻐지기 위해 뭐든 하는 나라

CNN은 미(美)에 있어 지구상에서 가장 진화된 나라는 한국이라고 단언한다.
“달팽이 크림(달팽이 점액을 넣어 만든 크림)이나 제주도의 화산토(火山土)를 사용해 만든 마스크 팩 등 한국 사람들은 예뻐지기 위해서라면 어떤 재료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소개했다

2. 아시아 성형수술의 중심지

CNN은 한국에서는 성형수술로 해결하지 못하는 게 없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러시아, 중국, 일본 심지어는 몽골 사람들조차 성형 수술을 하러 한국으로 몰려들고 있다고 소개했다.
CNN은 “미국에서 1만 달러(한화 약 1,040만원)가 드는 성형수술이 한국에서는 2000~3,000달러(한화 200~300만원)면 충분하다”고 전했다.

3. 미래를 체험하고 싶다면 한국으로 가라

CNN은 한국의 IT기술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전했다.
CNN은 한국인들은 스마트폰을 사용해 쇼핑하고, TV를 보며, 지하철까지 이용한다며 한국은 최첨단 기술의 선진 기지라고 소개했다

4. 세계에서 신용카드를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나라

미국인이 1년에 77.9회 카드를 사용할 때, 한국인은 129.7회 사용하고
“한국에는 상점에서 카드 사용을 거부하면 불법으로 간주하는 법까지 있다”고 소개했다.

5. 세계에서 가장 일을 많이 하는 나라

CNN은 각종 통계를 들어 한국인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 일한다고 전했다.
“한국인은 1주일에 44.6시간 일하는데, 이는 세계인의 평균보다 12시간 긴 수준”이라며 “1일 평균 수면시간도 6시간이 채 안 된다”고 보도했다.

6. 소개팅의 천국

한국 직장인은 1주일에 평균 2회 소개팅을 한다.
CNN은 한국에서 애인 없는 사람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다음 소개팅은 언제야?’ 라는 질문이라고 전하기도 했다.

7. 세계 최고의 항공 서비스

한국의 항공사의 서비스는 단연 세계 최고다.
CNN은 “세계적인 항공사들도 기내 서비스를 배우려
한국 항공사를 방문한다”며 “이런 승무원들의 친절함은 평소 승객들의 자잘한 부탁에도 친절하게 대해주는 모습 뿐 아니라, 식사 시간에 기내식으로 준비한 비빔밥이 다 동이 났을 때 마치 자살 충동이라도 느낀 듯 당황스러워하는 그들의 표정을 보면 오히려 승객이 더 당황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8. 세계 최고의 여자골퍼들을 보유

한국이 세계 정상급 여자 골프 선수를 다수 배출하고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세계 여자 골프선수 랭킹 100위 가운데 한국 여자 골프선수가 38명이 포진해 있는데 CNN은 그 비결로 ‘타이거 맘·대디(자녀를 엄격히 훈육하는 부모)’를 들었다

9. 전 세계에서 가장 앞선 게임 시장

CNN은 한국인의 스타크래프트 사랑을 전하며 “이 게임 판매량의 절반이 한국에서 이뤄졌다”며 “한국에서는 게임 중독을 막기 위해 ‘신데렐라법 (16세 미만 청소년이 밤12시부터 오전 6시까지 게임 접속을 하지
 못하도록 한 법 )’까지 생겼다”고 소개했다.

10. 독특한 회식 문화

한국인들은 이 같은 장시간 노동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폭탄주’로 풀기 때문에 대표적 소주 제조회사인 ‘진로 소주’는 11년째 세계에서 가장 많은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다고 전했다

 

누가 구구단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지?

 

 



어렸을땐 구구단 못 외운다고

손바닥 맞고

늘 학교에 남아 나머지 공부 했는데......


다 늦게 어렵게 외었더니



누가 이러캐 해놨노?



나와봐라

가만 안둔다~~~ㅠ,.ㅠ


6 × 3 = 빌 딩

2 × 8 = 청 춘

2 X 9 = 씨펄


3 × 1 = 절

5 × 2 = 팩

2 × 4 = 쎈 타

2 × 9 = 아 나

7 × 7 = 맞 게

4 × 2 = 좋 아

5 × 2 = 길 어

5 × 3 = 불 고 기

8 × 2 = 아 파

8 × 8 = 올 림 픽

9 × 4 = 일 생

3 × 8 = 광 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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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은 주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기적과 이사를 추구하는 악한 세대를

겨냥하여 미혹의 미끼를 던진사탄의 장난질이란 것을 숙지해야 삽니다!!

-목양연가 섬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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