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의 충격적인 확산은 단지 미국만의 일은 아니다. 중동지역 이스라엘에서 한 트랜스젠더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올 해 텔아비브에서 역사적인 미인대회가 열렸다. 역사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스라엘에서 최초로 트랜스젠더 미인 대회인 ‘미스 트랜스 이스라엘’이 열렸기 때문이다.


지난 5월 수 백명의 사람들 가운데 뽑힌 12명의 사람들이 3차례에 걸친 오디션을 통해 이 타이틀(미스 트랜스 이스라엘)‘에 도전하였다. 그 결과 21살의 Ta’alin Abu Hanna가 영광을 안았다. 


크리스찬(?)이며 아랍과 이스라엘 춤을 정공한 그녀(그)는 오는 9월 바르셀로나에서 열리는 국제 미스 트랜스 대회에 나라를 대표해서 참여하게 된다.


대부분의 중동 국가들은 동성애에 대해 비관용적이며 최악의 경우 이들에게 사형을 언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정부차원에서 스스로 성을 선택한 트랜스젠더 여성들에겐 다른 모든 여성들과 동등한 혜택을 부여하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인 텔아비브에는 많은 동성애 모임이 활성화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국가적인 지원에도 그들은 아직 가족과 공동체로부터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다고 미스 트랜스 컨테스트에 참여한 참여자들은 증언하고 있다.



 

기사원문 >> Israel’s first transgender beauty pageant



* 종말에 관한 성경의 예언들은 마지막 때가 되면 이스라엘이 치열한 영적 전쟁의 장소가 될 것이라 예언하고 있다. 러시아와 아랍세력이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진멸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곡과 마곡의 전쟁과 적그리스도와 동방의 군대들이 총동원되어 이스라엘을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아마겟돈의 전쟁이 예언되어 있고, 하나님이 보내신 두 증인이 1260일 동안 적그리스도의 세력과 영적 싸움을 벌이는 곳도 이스라엘(예루살렘)이다.


이런 이스라엘 땅이 현재는 동성애 문제로 인한 심각한 영적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스라엘의 수도 텔아비브는 매년마다 대규모로 열리는 동성애 축제로 인해 동성애자들의 성지로 변하고 있고, 이런 시대적 흐름에 맞추기 위해 ‘미스 트랜스 이스라엘’ 선발 대회까지 개최하여 보다 적극적인 동성애 홍보에 나선 것이다.


장차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통치하실 이스라엘 땅을 동성애로 더럽히기 위한 어둠의 세력들의 활동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백부장의 믿음과 아스라엘의 실패

본문읽기:마태복음 8장 8-13

8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백부장은 주님이 자신의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다고 말씀드립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거나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걸 금했습니다. 상거래는 허용했지만 식탁의 교제는 안 했습니다. 그래서, 이를 잘 아는 백부장이라 감당치 못하겠다고 말씀드린 것일까요?

백부장이 유대인의 율례를 따라 덩달아 그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집이 누추해서 모시기가 뭐해서도 아닐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백부장이 직접 예수님을 찾아가서 뵙지 않은 것으로 나옵니다. 이는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의로우신 그 분 앞에 감히 나설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바로 알기가 어렵습니다. 말씀의 거울에 비춰보지 않고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알지 못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때에야 비로소 심히 거짓되고 부패한 자신의 모습을 볼 수가 있게 되는 것이지요. 죄인을 심히 죄인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비참과 절망으로 몸부림치면서, 죄인에게 구원-사죄의 은총-을 베푸시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간구하며 고백하게 되는 것이지요.

본문에는 그런 백부장의 고백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부분적으로 생략하고 백부장의 믿음을 놀랍게 여기시는 예수님을 부각코자 했기에 저자가 선택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셈이지만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진실로-아멘입니다. 이 아멘은 구약 시편에 여러 번 등장합니다. 시편 제 1권 2권 3권 말미에는 '아멘 아멘'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아멘 아멘'(진실로 진실로)이 무려 25회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계시록 3장에는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곧 아멘이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의 말씀이 참으로 진실하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지요.

아멘을 남발한다고 좋은 신앙은 아닙니다. 예전에 신학교에 강의를 몇 년 나간 적이 있었는데 어떤 학생이 말끝마다 '아멘 아멘!'을 연발하더군요. 자꾸 들어니까 거북하더라고요. 마음으로 동의하고 속으로 아멘! 해도 될 터인데 말입니다.

성경 66권 전체를 다 아멘으로 받아야 합니다. 좋아하는 성경구절에다 밑줄을 긋는 습관은 좋지 않습니다. 제가 성경을 정독하던 시절에 골방에 들어가 작은 백열등을 켜놓고 먼저 기도하고 무릎을 꿇고서 성경을 통독했던 적이 있습니다. 모든 성경을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말씀을 가볍게 대하지 않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을 놀랍게 여기며 하시는 말씀을 차분히 읽어보면 예수님의 의도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대비시키면서 복음이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조상도 약속(언약)도 율법도 시편과 선지자도 다 유대인 자신들의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그들이 그토록 대망하는 메시야가 오셨건만 도무지 알아먹지를 못합니다.

또한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도 제사장 나라로 삼아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보내주기로 약속하신 구원자를 기다리고 바라면서 이방인에게도 이 복된 약속을 전하라고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쓸데 없는 선민사상에 젖어서 이방인을 깔보고 있었던 것이지요.

'보아라~ 너희들이 개 돼지 취급하는 이 이방인 같은 믿음을 너희 중에서는 찾지 못하였노라!'
"동 서로 부터 많은 사람이..."

해뜨는 데부터 해지는 데까지...입니다. 복음성가도 있었지요. 온 세상을 표현할 때 쓰는 언투입니다. 당시에 흔히 쓰던 관용적 표현이지요.

많은 사람이-수많은 이방인들이 유대인(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잔치에 참석하게 될 것이란 말씀입니다.

반면에 언약의 백성인 유대인들은 쫓겨난다는 겁니다. 이방인을 하나님 나라 바깥에 있는(있을) 자들로 여겨 멸시했던 그들은 정작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 어둔운데 쫓겨나 슬피울며 이를 갈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애통하고 원통했으면 이런 표현을 쓰셨을까요. 말씀을 믿음으로 화합치 않고 율법의 행위를 의지한 유대인의 결국이 이러합니다.

아무도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공로사상에 함몰되어 자신들 외는 다 죄인취급하던 그들이 슬피울며 이를 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비틀어서 지들 맘대로 억지로 풀다가 망하게 되었음을 통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잘못된 자기확신 가운데서 살다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 어둔데 쫓겨나 슬피울며 이를 갈 수도 있다는 말씀으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행위가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잎만 무성한, 다시 말해 입만 살아 있는 자리에서 우리 모두가 돌이켜야 하겠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 후손을 택하신 것은 그들을 구원의 통로로 삼고자 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었습니다. 메시야의 계보(족보)를 형성하는데는 한 줄기면 족합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는 다윗의 뿌리 말입니다. 그 줄기 울타리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었던 것입니다.그런데도 잘못된 우월적 선민사상에 젖어 교만할 대로 교만해져서 눈에 보이는 게 없습니다.

선택에 대한 성경적 이해가 절실히 요구되는 작금의 한국교계 형편이기도 합니다.

선택이란 자고로 뜨거운 감자와 같습니다. 덥썩 한입 깨물었다가는 십겁(?)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본의를 인간의 사변의 도마에 올려놓고 난도질 할 때, 선택이란 그 복된 말씀은 형체를 잃고 마는 것이지요.

로마서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이와같은 신학적 궤변이 난무하게 됩니다. 로마서를 강해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분히 풀어서 전하겠습니다.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네가 믿었던 대로 될지어다' 입니다. 과거에 확정해 놓은 그 믿음 말입니다. 초석은 한 번 놓는 것으로 족합니다. 그 위에다 믿음의 집을 지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맨날 도의 초보에 머물러 터만 닦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남의 집이 어떠니 터가 어떠니 판단이나 하면서요.

믿음의 진보를 나타내야 합니다. 백부장은 그가 믿었던(과거) 것을 바탕으로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하며 고백했던 자였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을 놀랍게 여기신 우리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마무리 하면서, 권면드립니다. 부디 살아 있는 믿음으로 주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나중에 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있을 때 잘해야지요!


예정 교리에 관한 진리 / 조엘 비키

베드로 사도는 벧전1:1-2를 통하여 예정에 대한 다섯 가지 주요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1) 죄인들은 성부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선택을 받는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이는 공의로운 정죄와 저주로부터 누구를 은혜롭게 구원하실 지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으로서의 법령적 미리 아심을 말한다. 하나님의 미리 아심은, 죄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따르게 만드는 하나님의 예정을 비롯한 그분의 주권적 계획과 목적으로부터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롬8:29). 하나님의 지식은 택한 백성들을 향한 특별하고도 부성적인 사랑과 분리될 수 없는 지식이다.

 

2) 죄인들은 성경의 성화를 통해 거룩해지지 위하여 선택을 받는다.

택자들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역사를 통하여 거룩으로 부르심을 받는다. 죄악적이고도 타락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그들을 거룩하게 하시지 않는 한 거룩한 하나님의 존전에 들어갈 수 없으며, 거룩한 삶을 살 수 없다고 확증한다. 또한 성령께서 성부가 선택하신 백성들을 위하여 이 성화의 사역을 수행하신다고 말한다. 성화의 사역은 계속되는 과정으로서, 택자들로 하여금 성령을 의지함으로써 거룩을 추구하게 한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5). 선택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들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다. 스펄전, “하나님의 선택은 선택 받은 자들을 엄선된 사람으로 만든다.” 토마스 왓슨, “성화란, 그리스도의 선택을 받은 양들의 귀표이다”

 

3) 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순종함과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선택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기 위하여, 자신에게 적용된 그리스도의 사역과 은택을 소유하기 위하여 선택받은 것이다. 피 뿌림을 위하여 선택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 즉 많은 사람의 죄 용서를 위해 흘리는 피, 새 언약의 피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선택의 열매인 용서의 보혈이 신자들의 영혼에 적용된다.

 

4) 죄인들은 모두 개인적이고도 인격적으로 선택을 받는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너희’는 특정하고도 한정적이며 번복될 수 없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결코 불의하지 않은 강렬한 개인적 선택이 포함되어 있다. 선택의 인격적인 특징은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말1:2,3)라고 말하는 구약성경에서조차 명백하게 드러난다(롬9:13). 하나님의 선택은 따뜻하고 부성적이며 가족적인 본질을 갖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수많은 자녀들을 마치 유일한 자녀처럼 대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 개수도 다 세시는 분이다. 우리의 이름이 여호와 하나님의 손바닥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 우리를 은혜 가운데 선택하신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다(롬8:28).

 

5) 죄인들은 더 크신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되기 위하여 선택을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을 영원한 생명을 위한 위대한 비가시적 교회의 한 부분이 되게 하기 위하여 택하셨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바닷가의 모래알과 하늘의 별처럼 많은 것이다. 선택은 하나님의 혹독하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광대한 관대하심을 선언하는 것이다.

 

6) 죄인들은 자신을 향한 선택을 확신할 수 있다.

 

7) 죄인들은 선택이 가져오는 은혜와 평강으로 말미암아 목회적인 영향을 받는다.

 

- 조엘 비키, 『칼빈주의』, pp 124-143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카톨릭의 본질 - 마귀의 간계 / 마틴 로이드 존스




 ‘마귀의 간계’를 주제로 한 시리즈 설교 중 하나인 본 설교에서 20세기의 영적 거장 로이드 존스 박사는 로마 카톨릭 시스템의 간교함을 조목조목 잘 보여 준다. 특별히 그는 구원에 대한 천주교 가르침이 성경 말씀 외에 다른 것을 첨가시킨 것으로서 사람의 영혼과 그리스도 사이에 파고 들어와 파멸을 가져옴을 보여 준다. 로이드 존스 박사의 성경적 천주교 분석은 과연 우리가 새로운 태도로 로마 카톨릭 주의를 포용해야 하는지 아니면 16세기 종교 개혁자들이 행한 대로 그것을 적극적으로 대적해야 하는지 잘 보여 준다.(Evangelical Press, 136 Rosendale Road, London, SE21 8LG, England)

 

  “너희가 마귀의 간계들을 능히 대적하며 서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는 살과 피와 맞붙어 싸우지 아니하고 정사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 어둠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과 맞붙어 싸우느니라”(엡6:11-12).


  현재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사건들로 인해 이제 크리스천 지성인들은 불가피하게 로마 카톨릭 주의가 무엇인지 알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로마 카톨릭 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개신교) 사이에 화해를 도모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여러 운동이 일어나고 많은 회의가 개최됩니다. 또 이 같은 일을 기뻐하는 자들은 이제 우리 즉 로마 카톨릭 교도들과 프로테스탄트들이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어떤 측면에서 서로 협력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자체가 크리스천 정신을 놀랍게 구현한 것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바로 이 같은 움직임 때문에 우리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바르게 파악해야 합니다. 앞날을 내다볼 때 이 문제가 긴급한 문제임을 금방 알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반드시 직면하게 될 모종의 개연성 때문입니다. 통계적으로 볼 때 현재의 추세가 지속될 경우 머지않아 로마 카톨릭 교도들이 다수를 차지하게 될 국가들이 전 세계적으로 상당수에 달할 것이며 그럴 경우 우리가 계속해서 민주주의의 다수결 원칙을 적용하게 되면 로마 카톨릭 교도들이 다수를 차지할 것입니다.


  이로 인해 발생될 일들을 예상해 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사실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면 비 카톨릭 국가인 우리나라 - 영국 - 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점을 다 감안해 볼 때 우리가 이 같은 입장을 점검해 보고 앞으로 직면하게 될 엄청난 사실을 주시하는 것은 필수 불가결한 일입니다.


  이 일은 싫고 좋고를 떠나서 우리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전에 이런 일을 해 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그런 일을 하는 어떤 프로테스탄트 단체에 소속된 적도 없고 그 같은 주제로 강연을 해 본 적도 없습니다. 사실 저는 로마 카톨릭 주의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 기독교의 진리와 위대한 개혁 교리를 적극적으로 선포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그 어떤 것도 이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으며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부정적으로 항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로마 카톨릭 주의에 항거하는 일이 여러 해 동안 꾸준히 지속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여러 나라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가 실질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프로테스트들의 부정적인 항거 노력은 별 효과가 없음이 기정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이처럼 로마 카톨릭 주의가 확산된 원인은 자기가 믿는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프로테스탄트들의 무지함과 무기력함 때문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제가 시간을 들여서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으로 인해 저는 이 문제 곧 정사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 어둠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의 활동들인 ‘마귀의 간계’에 대해 다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쨌든 좋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찾아내었습니까? 먼저 저는 오늘 개개인에 관해 말씀드리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는 카톨릭 신자이면서 참으로 거듭난 크리스천들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카톨릭 신자이면서 크리스천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보여 드리고자 하는 바는 카톨릭 교도로서 크리스천인 사람들은 그들이 속해 있는 체제 때문에 크리스천이 된 것이 아니라 그런 체제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문제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것은 곧 로마 카톨릭 교회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구원받아 크리스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개개인을 고려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이 문제를 정치적 관점에서 고려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적 측면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저는 지금까지 정치적 측면이 매우 중요할 수도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를 제시해 왔습니다. 우리는 로마 카톨릭 체제의 역사적 증거 기록을 알고 있고 정치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알고 있으며 그 체제가 스스로를 정치 세력이라 주장하고 있음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정치적 측면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문제가 일반 성도들과 기독교 정치인들이 관여할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직 영적인 측면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우리 앞에 제시하며 신중하게 생각하라고 하는 것이 바로 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I. 로마 카톨릭 체제


  자, 그러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살펴보고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하나의 체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는 전혀 주저하지 않고 로마 카톨릭 주의로 알려진 이 체제야말로 ‘마귀의 가장 뛰어난 걸작품’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이 체제는 기독교의 믿음과 신약 성경의 가르침에서 심하게 이탈된 체제이므로 저는 주저하지 않고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과 더불어 이 체제를 ‘배교 체제’라고 단언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보통 배교를 가리켜 ‘기독교 진리로부터 전적으로 이탈한 것’이라고 정의 내립니다. 어떤 이들은 “글쎄요, 지금 당신은 로마 카톨릭 교회를 지칭하는 겁니까?”라고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우리는 여기에 대해 무척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일 우리가 로마 카톨릭 교회를 배교 체제요, 배교 집단이라고 이야기한다면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그런가를 분명히 밝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문제를 이렇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기독교의 진리를 부인해서 배교 체제가 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진리에 무언가를 첨가하고 거기서 이탈하여 배교 체제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입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바로 이것을 통해 마귀의 온갖 간교함이 들어오며 마귀의 간계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하지 않고 바라보게 되면 로마 카톨릭 교회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정통 교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령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생각해 볼 때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정통성에는 전혀 문제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나사렛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라고 믿으며 예수님의 처녀 탄생을 믿으며 예수님의 성육신을 믿으며 예수님의 기적들을 믿으며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분의 대속(代贖) 사역과 그분의 육체적 부활을 믿습니다. 이런 점들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하늘에 앉아 계심도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에 관한 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절대적으로 정통입니다. 심지어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보다 훨씬 더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그들은 이런 점에서 정통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로마 카톨릭 주의의 입장에 대해 두려움을 갖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의 사역에 대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입장을 보더라도 그들의 정통성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은혜의 원리’에 대해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그것이 그들의 중심 교리 중 하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신적 영감과 권위를 주장하고 있으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들은 이런 면에서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단지 위와 같은 일반적인 방식으로만 바라본다면 우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세상에서 가장 정통적인 교회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에서 교활함이 들어오고 어려운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이유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이 모든 것에다 ‘저주받아 마땅한 첨가물’ 즉 전적으로 비성경적인 것들과 사실상 성경을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들을 첨가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우리가 그들이 가르치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결국에는 그 체제의 거짓말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위치로 우리를 몰고 갑니다! 다시 말해 로마 카톨릭 체제의 교리는 그럴듯한 위조품이며 성경이 기록한 대로 로마 카톨릭 체제는 다름 아닌 계시록의 음녀입니다.


  참으로 이 문제는 지극히 교활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도 ‘간교함’ 즉 마귀의 간계에 대한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간교함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다면 반드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문서를 읽어 보아야 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모든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체제는 무척 방대하고 그 체제의 간교함은 너무나도 커서 도무지 무너뜨릴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틀림없이 이런 사례를 여러 번 접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이혼을 허용하지 않으며 카톨릭 교도가 이혼한 경우 그는 교회로부터 파문 당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여러분은 신문에서 일부 고매한 카톨릭 교도들의 이혼 소식을 접하고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라고 반문하곤 합니다.


  글쎄요. 사실 그들은 이런 것을 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결코 참된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실로 그들은 무엇이든지 해명할 수 있고 따라서 그들에게는 문제가 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의 궤변 체계가 이러하며 고도의 논법이 이러하므로 그들은 동시에 모든 방향에서 오는 문제들을 다 대응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로마 카톨릭 교회는 실제로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먼저 이 나라 - 영국 - 의 로마 카톨릭 교회를 살펴보기 바랍니다. 또 아일랜드와 남아일랜드의 로마 카톨릭 교회를 살펴보기 바랍니다. 미국의 카톨릭 교회를 살펴보고 남미의 몇몇 라틴 국가들의 카톨릭 교회를 살펴본다면 여러분은 즉시 그것들이 동일한 체제라고 믿기가 매우 어려움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및 기타 비슷한 조건의 국가들의 로마 카톨릭 교회를 살펴보고 독일이나 기타 그와 비슷한 국가의 로마 카톨릭 교회와 대조해 보기 바랍니다.


  우리는 곧장 그 체제가 국가마다 서로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결코 그것이 동일한 로마 카톨릭 체제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터이지만 사실상 그것은 모두 같은 로마 카톨릭 체제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얼마든지 자기의 색깔과 모습과 형태를 바꿀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로마 카톨릭 체제는 어디서든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귀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자기 자신을 ‘빛의 천사’로 변장시키는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으며 여러분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로마 카톨릭 교회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자기를 변장하는 데는 끝도 없고 한계도 없습니다. 이 나라 - 영국 - 에서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아주 지성적인 형태로 나타나서 로마 카톨릭 교도들에게 성경을 읽도록 권장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을 금하며 또 비지성적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고의적으로 미신을 조장하기도 합니다. 또한 이 나라에서는 천주교가 관용을 베풀고 기꺼이 의견을 들어 주며 토론도 하고 양보하기도 하며 친근한 모습을 취하지만 다른 후진국에서는 아주 인내하지 못하며 사악하고도 비열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핍박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여전히 동일한 로마 카톨릭 교회요, 동일한 체제이며 동일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증거들로 인해 저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마귀의 걸작품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로마 카톨릭 시스템이라는 저 거대한 교회와 체제는 온갖 간교함과 속임수 가운데서, 성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온갖 불의의 속임수 가운데서 마귀의 간계를 온 천하에 드러내 왔으며 지금 이 시간에도 그와 같은 일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이미 성경에 분명히 예언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 즉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이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비록 이 예언의 말씀이 이것만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는 분명히 이것을 설명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거기서 여러분은 이 체제가 부상하여 권력을 장악하게 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 기관은 이미 세상의 권력을 장악해 오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은 계시록 13장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가 두 번째 짐승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또 계시록 17장에서는 일곱 언덕 위에 앉아 있는 ‘거대한 음녀’로 제시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 체제는 늘 이러했으며 지금도 이러하고 앞으로도 이러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져 왔으며 실제로 이 체제는 이런 방식으로 모든 일을 성취해 왔습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기독교회 내로 몰래 기어 들어와 한 때 기독교회 전체를 실질적으로 독점했던 체제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라는 이 체제가 천천히 간교하게 기독교회 속으로 기어 들어와 자기 방식대로 일하면서 기독교 세계를 장악했고 그 결과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제 거의 보편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세상 권력을 장악해 버렸습니다.



  II. 로마 카톨릭 교회의 중대 오류들


  로마 카톨릭 교회는 과연 어떤 일을 행했을까요? 이 문제를 적절히 다루자면 최소한 몇 달이 걸릴 것입니다. 이 설교에서 제가 관심을 가지고 행하고자 하는 바는 저의 주장이 진실임을 보여 주는 몇몇 중요한 증거들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본 내용을 세 가지 주요 제목으로 나누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첫째로 저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어떻게 우상숭배와 미신행위를 도입했는가를 보여 드리고자 합니다.


  성경에서 우상숭배만큼 크게 정죄를 받는 행위는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새긴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 교회는 형상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신도들에게 형상들에게 경배하도록 가르치고 있으며 그래서 그들은 동상과 조형물과 초상화를 숭배합니다. 여러분이 큰 천주교 성당에 가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에 가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는 사도 베드로의 동상이 있는데 여러분이 그 동상의 발가락을 자세히 보면 그 발가락 중 하나가 달아서 매끈매끈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로마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의해 희생물이 된 수많은 사람들이 그 발가락에 입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경외심을 가지고 절하면서 형상과 동상과 유물에게 경배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어떤 성인의 유물과 뼛조각과 그가 사용하던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특별한 장소에 두고 그것에게 경배하며 그 앞에 절을 합니다. 사실 이것은 전적으로 우상숭배입니다.


  2. 두 번째 커다란 오류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전체 체제와 가르침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끼어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오류들 가운데 가장 끔찍한 오류입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로마 카톨릭 교회 자체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끼어 들어오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카톨릭 교회 자체가 구원을 얻는 데 필수 조건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분명하게 “카톨릭 교회 밖에서는 결코 구원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곧 로마 카톨릭 교회가 구원을 얻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건이란 말입니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영혼 사이에 로마 카톨릭 교회를 끼워 넣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로마 카톨릭 교회는 스스로에게 그와 같은 위치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약 성경 어디에서도 그 같은 주장을 찾아볼 수 없으며 이것은 단지 로마 카톨릭 주의 안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자기만이 진리가 무엇인지 안다고 주장하며 자기만이 진리를 묘사하고 진리에 대해 정의를 내릴 수 있으며 진리를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들은 당연히 그와 정 반대로 모든 신자의 보편적 제사장 체제를 가르치며 각 사람이 스스로 성경을 읽고 성령님의 조명하에서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 사실을 절대적으로 철저히 부정합니다. 그들은 오직 로마 카톨릭 교회만이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으며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할지 바르게 말해 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자기들이 지금까지 ‘지속적인 계시’를 받아왔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프로테스탄트들이 믿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의 계시가 신약 성경의 종결과 함께 끝났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계시가 지속적으로 주어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혀 주저하지 않고 성경의 진리에다 그런 계시들을 첨가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덧붙인 전통(전승 혹은 유전)도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지니고 동일한 구속력을 지닌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로마 카톨릭 교회가 취해온 기만의 방식입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것들을 자기들의 전통에 첨가시켜 왔으며 바로 여기에 이 체제의 간교함이 놓여 있습니다.


  결국 로마 카톨릭 주의는 우리 모두에게 전체주의가 요구하는 그런 충성을 강요합니다. 그리고 이 체제는 우리가 믿는 것과 행하는 것까지 지배하려 듭니다. 그리고 또한 로마 교회는 자기가 우리의 영혼과 구원을 책임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일러 준 대로 그리고 가르쳐 준 대로 절대적으로 철저히 굴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해 로마 카톨릭 주의는 획일적인 전체주의 체제를 이루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시스템은 공산주의가 자기 백성의 혼과 자유를 유린하는 것처럼, 군국주의의 히틀러가 자신의 잔혹한 체제 안에서 사람들을 획일적으로 인도했던 것처럼 자기에게 속한 신도들의 혼을 절대적으로 얽어매고 있습니다. 실로 여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전체주의 체제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절대권위를 가진 존재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버티고 서 있습니다. 이 문제를 잘 보여 주는 두 번째 증거 혹은 이 문제로 인한 당연한 논리적 귀결은 로마 교황과 교황에 대한 온갖 가르침입니다. 교황은 보통 ‘그리스도의 대리자’라 일컬어집니다. 그들은 사도적 계승을 주장하면서 교황이 사도 베드로의 영적 직계 후손이며 사도 베드로의 모든 권위를 이어받았다고 말합니다.


  저는 결코 그들이 주장하는 베드로의 수위권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곁길로 빠지고 싶진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그들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 교황을 ‘거룩한 아버지’ 즉 성부(Holy Father)라 부르며 극도의 신성 모독을 행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아버지는 단 한 분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뿐이 없으므로 땅 위에 있는 어떤 사람도 아버지(Father)라 부르지 말라.” 이들은 이 같은 명백한 말씀을 어기면서 교황을 ‘성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황의 추기경 회의에서 “권위 있게 선언한다.”고 하면서 “교황이 절대무오하다.”고 말합니다. 비록 그들이 1870년에 교황 무오설을 교리로 규정하기 했지만 사실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그것을 믿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법적으로 그렇게 규정되었기에 그가 선언하는 것들은 절대무오하게 되어 하나님의 말씀처럼 되었습니다. 또한 교황의 선언은 그리스도 그분처럼 절대무오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대표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여러분이 보다시피 로마 카톨릭 교회의 권력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이 말씀하듯 하나님처럼 말하는 이 한 사람 밑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교황은 사람들에게 경배를 받고 있고 그들은 그 앞에서 절하며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 외에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바칠 수 없는 경의와 흠모를 그에게 표시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드러난 증거는 사제직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제들은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신자들의 ‘보편적 제사장 체계’ 즉 ‘만인 제사장 체계’를 믿지 않습니다. 그들의 제사장 즉 사제들(priest)은 오직 카톨릭 교회에서 훈련받고 카톨릭 교회로부터 성직 수임을 받은 자들로서 ‘사도적 계승’에서 나오는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2장 9절 말씀은 우리 모두가 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선정된 세대요 왕가의 제사장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특별한 백성이니”


  다시 말해 이 구절은 우리 믿는 성도들이 다 제사장 왕국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 교회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단지 평신도에 지나지 않으며 결코 제사장(사제)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 교회에서 성직 수임을 받은 이 사람들만이 사제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제들이 기적을 행하는 것과 같은 독특한 권능을 지닌 자들이라고 주장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가장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를 보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세례 받는 물에 임하도록 하기 위해 사제가 세례 때 사용되는 물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들은 사제가 ‘주의 만찬’에 사용되는 빵과 포도즙과 연관된 기적을 행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종종 화체설이라고 불립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사제가 주는 빵이 더 이상 그냥 빵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실제 몸으로 변한다고 주장합니다. 빵의 겉모습과 색깔은 그대로지만 그 본질은 변해서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이 화체의 기적이 그러한 기적을 일으킬 권능을 소유한 사제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같은 주장은 곧바로 성사(혹은 성례전)에 관한 교리로 이어집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는 일곱 가지 성사가 있지만 저는 이 중에서 특별히 세례성사와 성체성사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두 성사에서 기적이 일어난다고 서슴없이 가르칩니다. 그들의 이론은 이러합니다. 사제가 물과 빵과 포도즙에 기적을 일으키면 그로 인해 이것들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부여되며 이런 기적은 거의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같은 것을 가리켜 “ex opere operato”를 이룬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세례 성사에 적용하자면 물은 더 이상 그냥 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부여된 물이므로 그 물을 어린아이 위에 뿌리면 어린아이 안에서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혹은 천주교 성찬식의 경우 신도가 빵을 취하여 먹으면 - 주의 만찬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포도즙은 일반 성도들이 마시지 못하게 합니다 - 그가 실제적으로 그리스도 자신의 몸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이것은 마귀의 간교한 속임수이며 간계입니다. 이 모든 것은 천주교회가 첨가한 것으로서 신약 성경은 이런 것에 대해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사제에 대한 언급을 마치기 전에 우리는 이것을 꼭 기억해야합니다. 곧 신도들은 로마 카톨릭 체제의 사제 앞에 나아가 자기의 죄들을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카톨릭 교회의 사제가 면죄를 선언하고 죄들의 용서를 베풀 수 있는 권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특별한 능력을 할당받은 자들 곧 카톨릭 교회의 사제들 외에는 어느 누구도 이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도들은 성경에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가서 죄를 고백해야 한다고 교육을 받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가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거듭난 크리스천들의 교회 안에서는 서로에게 잘못을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결코 사제들에게 죄를 고백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드러난 증거가 있습니다. 저는 어떻게 로마 카톨릭 체제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교묘히 기어 들어왔는지 보여 주려 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크리스천으로서 그분께 나아가 죄를 고백하지만 카톨릭 교도들은 사제들에게 가서 고백합니다.


  이제 네 번째의 드러난 증거로 들어가겠습니다. 이것은 사실 우리를 가장 놀라게 하는 터무니없는 궤변 중의 하나입니다. 로마 카톨릭 주의의 마리아 숭배는 이제 놀라울 정도로 급격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리아를 가리켜 ‘하늘의 여왕’으로 일컬으며 우리 모두가 일차적으로 그녀에게 찾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많은 성당에서 쉽게 볼 수 있듯이 성모 마리아 상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에 의해 가려져서 뒷전으로 밀려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기에 대해 그들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성모 마리아는 사람이므로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훨씬 더 사랑스럽고 부드럽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너무 위대하고 강력하며 권위가 있으시므로 너무 엄격하신 분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가르침이며 마리아 숭배를 설명하는 내용의 전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너무도 무서운 분이시므로 우리가 그분에게 직접 다가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마리아가 거기 있는데 그녀는 사랑이 넘치며 더욱이 예수님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에 예수님께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대신해서 중보(中保)해 주시도록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이 성모 마리아가 우리 영혼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점진적으로 마리아의 권능에 무엇인가를 첨가해 왔습니다. 그들은 주후 1854년에 마리아의 ‘무염시태‘를 정식 교리로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무염시태‘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없이 태어나신 것처럼 성모 마리아도 또한 그렇게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또한 최근에 그들은 마리아의 ‘몽소승천’ 교리를 발표했는데 이것은 곧 마리아가 일반 사람처럼 죽어 묻힌 것이 아니라 자기의 아들 예수님처럼 문자 그대로 하늘로 승천했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가르침은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를 세워 주고 그녀를 부각시키며 결국 그리스도를 시야에서 가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마리아에 이어 ‘성인’ 숭배가 추가됩니다. 로마 카톨릭 교도들은 성인들에게 기도해야 한다고 교육을 받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러한 가르침이 나오게 되었을까요? 자, 그들의 가르침의 골자는 이렇습니다. 그들은 현재의 삶 속에서도 완전하게 살 수 있다고 믿으며 일부의 성인들이 이 세상에서 완전한 삶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완전한 삶을 산 결과 그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의 ‘공덕’을 획득하여 쌓아올리게 되었고 그 결과 그들은 넘치도록 공덕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나 내가 공덕이 모자라고 부족하다 할지라도 성인들에게 가서 기도하고 간청해서 그들이 보유한 여분의 공덕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이것을 ‘여분의 공덕을 나누는 일’이라 하는데 이것은 곧 성인들이 우리를 위해 중보할 수 있고 우리에게 공덕이 부족하면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자기들의 공덕의 여분을 우리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인들을 숭배하고 성인들에게 기도하며 그들에게 의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더 많은 공덕이 성인들에 의해 추가로 보충되어야 한다는 이단 교리를 접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전반적 체계 및 제도가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에 교묘히 기어 들어오는지에 대해 간단히 다섯 가지 요점만 정리해 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한 신성을 부여하고 그분의 성육신, 처녀 탄생 및 기타 다른 정통 교리들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 같은 일들을 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런 첨가를 통해 마귀의 간계가 들어옵니다. 언뜻 보면 로마 카톨릭 교회는 항상 옳은 것만을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다 너무나도 잘못된 것들을 첨가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우리는 그 옳은 것 중에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의 간계입니다.


  3. 이제 저는 세 번째 오류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를 강탈할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저 위대한 구원의 영광과 완전함과 충분함을 훼손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첫 번째 예로 그들이 칭의(Justification)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가 살펴보겠습니다. 루터가 말했듯이 칭의는 교회의 흥망성쇠를 가름하는 시금석이며 프로테스탄트를 존재하게 만든 원인으로서 프로테스탄트들의 영광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제 칭의에 관한 그들의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이따금씩 우리 프로테스탄트들이 과연 우리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곤 합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칭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 로마 카톨릭 주의가 성장한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못됩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단지 선한 삶을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로마 카톨릭 주의는 성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 주의가 전 세계 많은 국가를 휩쓸고 있다는 사실은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칭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죄성을 지닌 인간이라도 선행이나 공적을 쌓을 수 있으며 또한 사람이 자신의 칭의를 위해 무엇인가를 기여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그렇게 믿고 또 그렇게 가르칩니다. 반면에 우리 프로테스탄트들은 “의인은 없는데 하나도 없으며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누더기 같아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 기록하였듯이 배설물 즉 똥과 같고 그래서 가치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반면에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것을 전적으로 부인하며 사람의 의에도 가치가 있으며 따라서 그것이 무언가를 할 수 있고 유익을 끼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궁극적으로 사람이 세례를 통해 의롭게 된다고 가르친다는 사실입니다. 세례는 다른 모든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세례를 통해 여러분의 죄가 용서되고 여러분 안에 의가 주입되어 여러분이 의롭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비록 아무 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갓 태어난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며 그들도 세례로 의롭게 되고 원죄가 말소되며 동시에 이 같은 긍정적인 하나님의 의를 받는다고 로마 교회는 가르칩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그리스도의 의를 말하지 않고 세례 받은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의가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로 옷 입지 않고서도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게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오직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프로테스탄트 교리를 위험한 이단 교리라고 비난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 체제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아셨을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신도들이 모든 것을 교회에 의존하게 만듭니다. 과연 이런 체제 하에서 사람이 회개하고 그리스도께로 가서 그분을 믿음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에 말씀입니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사제가 베푸는 세례를 통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이 체제 안에서는 모든 일에서 교회와 사제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들 없이는 여러분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여러분은 그들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없으며 반드시 중간에 낀 중보자들을 통해서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오직 한 중재자가 있으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마리아, 교황, 사제 및 모든 고위 성직자와 하위 성직자 이들 모두가 필요하다고 그들은 가르칩니다. 이처럼 그들은 중대한 칭의 교리에서 거짓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제 크리스천의 생활 문제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삶을 강조하기보다 의식과 의례를 준수하는 것을 더 강조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거룩을 추구하고 성화에 대한 신약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미사에 참석하고 사제에게 가서 죄를 고백하라고 가르칩니다. 이 체제 속에서는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야 할 책임을 강조하거나 신자들로 하여금 성경의 가르침을 염두에 두고 그대로 실행하도록 권면 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교회의 규율에 순응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여러분은 각종 의식을 지키고 그들이 하라고 일러 준 대로 행해야 합니다. 특정한 절기에는 금식해야 하며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사제를 찾아가서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나 일단 미사에 참석한 다음에는 여러분이 하고 싶은 대로 행해도 됩니다. 미사를 통해 죄가 덮어졌고 여러분은 다시 올바르게 교정되었으므로 이제 계속해서 여러분의 길을 가도 됩니다.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거룩한 삶 즉 아주 간단한 삶 대신에 여러분은 의식과 의례와 절기를 준수해야 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또 다른 심각한 오류는 이들이 구원의 확신 교리를 전적으로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구원의 확신 교리만큼 영광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로마서 8장 16절에는 아주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당신은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십니까?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것을 전적으로 부인합니다.


  이 세상 삶에서는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느냐고 그들은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반박하는 내용이며 이것은 어느 면에서 매우 논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로마 카톨릭 체제는 마귀의 것을 확연히 드러납니다. 사실 마귀 외에는 비범한 천재성을 발휘하여 이 모든 일을 성사시킬 만한 존재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여러분의 원죄가 말소되고 여러분은 의롭게 되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됩니다. 얼마나 좋은 이야기입니까? 그렇다면 세례 받은 이후에 지은 죄들은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의 세례는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세례 받은 이후에 지은 죄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하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지금 이 시간에도 여전히 우리를 모든 죄와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시며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이루신 사역이 우리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를 덮어 준다고 가르칩니다. 즉 우리 주님께서 단 한 번 이루신 사역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교회는 “결코 그렇지 않으며 우리 주님의 십자가 사역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세례 받은 이후의 죄 문제는 전혀 다른 성격의 문제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죄들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겠습니까? 그들은 우리가 반드시 사제에게 가서 죄를 고백해야 하며 오직 그만이 이 문제를 다룰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제는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생의 종말을 맞게 되면 세례 이후에 지은 죄 문제로 인해 지옥 정죄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때 과연 그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아무 문제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고해성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만이 여러분을 위해 그것을 베풀 수 있으며 그는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고해성사를 하면서 사제에게 특이한 고백을 하게 되고 그러면 궁극적으로 면죄를 받게 됩니다. 이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우리의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 보장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이 여러분의 문제를 거의 다 풀어 주었지만 여전히 용서받지 못한 죄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들은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연옥이라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용서받지 못한 죄 즉 세례 받은 이후에 지은 죄를 씻어 버리기 위해 우리는 그곳으로 갑니다. 그러면 거기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자, 여전히 땅에 남아 있는 우리의 친척들이 우리를 위해 돈을 지불하면서 기도를 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온갖 면죄부와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와 촛불과 그들이 지불한 돈을 소유하게 됩니다. 땅에 있는 사람들이 돈을 더 많이 내면 낼수록 연옥에서 이러한 죄들이 더 빨리 처리되고 우리는 다음 장소로 속히 옮겨갈 수 있게 됩니다.


  과연 여러분은 이 같은 주장을 성경에서 발견한 적이 있습니까? 물론 전혀 없을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지금까지 자기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추가 계시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한 마디로 첨가 그 자체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역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이 모든 것들에 의해 그분의 공덕이 보충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제가 이 같은 로마 카톨릭 체제를 배교 집단이라 부른다 해도 결코 지나친 것은 아닙니다.



  III. 결론


  이 모든 것이 가져오는 결과는 무엇일까요? 로마 카톨릭 교도들은 무지 속에 갇혀 있으며 미신에 빠져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것으로 인해 그들은 우리가 종종 ‘대륙의 일요일’이라는 생활 방식에 젖어들게 되는데 이 말의 뜻은 여러분이 일요일 아침에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리기만 하면 그 날의 나머지 시간은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즉 미사 시간만 끝나면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스포츠와 쾌락을 추구하면서 그 날을 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체제를 따르면 자연히 이렇게 될 수밖에 없고 또 이렇게 되다 해도 그리 놀랄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각 사람은 중요하지 않으며 교회로부터 그리하지 말라는 호소를 받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단지 교회가 일러 준 대로 순종하고 자기 자신을 교회에게 내맡기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그들이 해야 할 일이며 궁극적으로 교회가 그들의 영혼을 돌봅니다.


  이 모든 것으로 인해 마침내 그들은 진리의 길을 걷는 자들에게 잔인한 핍박을 가해 왔으며 사실 이런 핍박은 로마 카톨릭 체제의 두드러진 특징이 되어 왔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를 흘렸고 지금 이 시간에도 여전히 기회만 주어지면 어느 곳에서나 그런 일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이제 설교를 마치면서 여러분에게 묻고자 합니다. 과연 우리는 이 설교를 들으면서 시간만 낭비했을까요? 과연 우리가 이 모든 것에 관심을 가져야만 할까요? 다른 방향에서 로마 카톨릭 주의를 접근하는 새로운 방식이 있다는 사실로 인해 우리가 기뻐해야만 할까요?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이 다 같이 크리스천으로서 공산주의에 맞설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인해 기뻐해서는 안 된단 말입니까? 여러분이 직면해야 할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저 자신은 이에 대해 답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로마 카톨릭 체제는 전적으로 공산주의보다 훨씬 더 위험한 체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체제는 위조지폐와 같이 기독교를 위조한 체제이기 때문이며 또 그들이 이 모든 일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체제는 바로 계시록 17장에 나오는 ‘자주색 옷을 입은 여자’이며 가장 끔찍한 속임수의 극치를 이룬 체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체제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 체제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이 체제가 공공연하게 그리고 명백하게 무신론을 따르면서 하나님을 닮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은 결코 편견을 지닌 열성분자들이 아니었으며 결코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성령님을 통해 그 눈이 활짝 열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루터의 눈이 열렸고 칼빈의 눈이 열렸으며 낙스의 눈이 열렸고 모든 개혁자들의 눈이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열렸습니다. 이 사람들은 눈이 열리면서 성경 속에서 이 끔찍한 괴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성경이 이 체제를 저주하며 그것에게 경고하는 것을 보았으며 그래서 목숨을 내걸고 일어서서 이 체제와 맞서 항거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이 괴물 체제가 진리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믿음으로 얻는 칭의와 성경의 절대적이고도 최종적인 권위와 모든 믿는 자들의 제사장 체계 등을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이 같은 성경의 진리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진리를 위해 용감히 죽었습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에게 엄숙히 경고하려 합니다. 여러분이 만일 로마 카톨릭 교회로 접근하려는 갖가지 시도를 기뻐한다면 여러분은 순교자들이 흘린 피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런 시도가 옳다고 생각한다면 결코 스미스필드(Smithfield) 근처도 가지 말기 바랍니다. 바로 그곳에서 성경대로 믿는 프로테스탄트들이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브래드포드와 나머지 프로테스탄트들이 로마 카톨릭 주의를 부인했다는 이유로 그곳에서 화형을 당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런 화해의 시도를 수용한다면 여러분은 이 프로테스탄트 선구자들을 부인하는 것이며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면서 “그들이 잘못했어. 그들은 실수를 범했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이런 화해론자들의 그럴듯한 논쟁에 말려들지 말기 바랍니다.


  천주교 문제가 더욱 첨예한 문제가 된 것은 무선 통신과 텔레비전 때문입니다. 대중 매체에 이들이 어떻게 비치고 있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이들은 매우 예의가 있고 친절하며 훌륭하고 무척이나 융통성 있게 보입니다. 그들은 종종 우리 프로테스탄트들보다 훨씬 더 훌륭해 보입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프로테스탄트들은 이렇게 천주교의 외양을 극구 칭찬하면서 금방이라도 로마 카톨릭 주의의 미끼를 따먹으려고 합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로마 카톨릭 교회가 지금은 많이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목사님은 과거만 보려 하고 마치 16세기에 살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지금 목사님은 20세기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에 대한 저의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로마 카톨릭 주의가 가장 큰 교만을 부리는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은 아주 거만하게 ”로마 카톨릭 교회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로마 카톨릭 주의가 변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이 체제가 변한다면 그것은 곧 자기 스스로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는 셈이 됩니다. 그러나 이 체제는 “우리는 절대무오하며 교황은 곧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결코 실수를 할 수 없다.”고 이미 굳게 선포한 바 있습니다.


  만일 로마 카톨릭 주의가 변할 가능성이 있다고 스스로 말한다면 그것은 곧 로마 카톨릭 주의의 핵심 주장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 체제는 자기가 변하고 있다고 말하지도 않으며 앞으로도 결코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항상 동일합니다. 혹시 변한 것이 있다면 상태가 더 나빠진 것뿐입니다. 실로 이 체제는 16세기에 자기가 가르쳤던 것들에다 교황의 절대무오성 같은 교리들을 추가시켰습니다.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만일 앞으로 이 땅에 하나의 거대한 세계 교회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이 교회가 나머지 다른 교회들을 흡수하고 무지 속에 있는 그들을 삼켜버렸기 때문입니다! 로마 교회가 이런 일을 하는 데는 전혀 어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카톨릭 교회야말로 위조품이요, 가짜 교회이며 가장 저질의 매춘부요, 세상에서 가장 마귀적인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이 체제는 적그리스도의 모습을 하고 있기에 우리는 마땅히 이것을 거절하고 정죄하고 적극적으로 맞서야 합니다.


  제가 처음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로마 카톨릭 교회를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경에 입각하여 바른 교리를 가르치는 기독교뿐입니다. 듣기 좋게 “그리스도께로 나오십시오.” 혹은 “예수님께로 나오십시오.”라고 선포하는 기독교는 단 1초도 로마 카톨릭 교회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은 오히려 궁극적으로 로마 카톨릭 교도들의 숫자만 불려 줄 것입니다. 복음 전도자들이 집회를 하면서 “아, 당신은 로마 카톨릭 신자시군요. 천주교회로 돌아가시면 됩니다.”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신약 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들에게 경고해야만 합니다. 이 소름끼치는 위조품 교회에 대항해서 맞설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의 가르침과 단 하나의 권능뿐입니다. 그것은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라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란 신약 성경의 진리를 성경적으로 교리적으로 신학적으로 바르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16세기 종교 개혁 시대에도 동일한 방법이 사용되었습니다. 루터는 단지 피상적인 복음 전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강력한 신학자였으며 칼빈도 그러했고 개혁자들이 다 그러했습니다.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진리의 체계를 제시하고 상세히 가르쳐 줄 때에 로마 카톨릭 교회가 타격을 받고 그 체제 전체가 뒤흔들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현재의 카톨릭/프로테스탄트 교류 및 화해 상황을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방법 중 이것보다 더 적절한 것은 없습니다. 크리스천 여러분, 여러분의 책임은 실로 막중합니다. 여러분은 진리를 알아야 하며 진리를 이해해야 하고 거짓된 가르침에 적극적으로 대항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와 같은 거짓 체제에 속아넘어가는 순진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여러분과 저의 책임은 바로 이런 사람들의 눈을 열어 주고 그들을 바르게 인도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똑바로 설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열정과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자격이 있으며 성령님의 복을 간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위에 서고 성경의 진리 위에 설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영께서 강력한 부흥과 함께 우리에게 임하실 것으로 저는 믿습니다. 오직 이 같이 강력한 부흥만이 이 가증한 체제 곧 자기를 로마 카톨릭 교회라 부르는 저 큰 음녀를 쓰러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시여, 이제 우리에게 바른 것을 보여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현 시대를 바르게 분별하게 하시며 너무 늦기 전에 우리를 깨워 주옵소서.

아멘.

출처: 물과피와성령/새언약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부정하는 정이철 목사의 이단  

 

필자는 일전에 정이철 목사의 이단성 7가지를 발표했습니다. 이유는 정이철 목사가 조금이라도 성하고 목회에만 전념토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잘못된 것은 고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자성이 아닌 오히려 궤변만 일삼은 반론이었습니다. 그가 붙인 제목도 가관이었습니다. 정이철을 이단으로 모는 김한길은 자기 무덤을 파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참으로 걸작다운 제목이습니다. 필자는 그 것을 보고서 정이철 목사가 아직도 반성과 자숙은 커녕 오히려 기세 등등함을 보면서 한편으론 안타까웠습니다.  

 

지면이 쨟기에 모두 다룰 수는 없고, 그 가운데 하나인 예수님의 시신은 썩었다 고집하는 정이철 목사와 안창모 목사의 궤변만 다루어 보겠습니다. 참고로 그 궤변적 반론은 안창모 목사와 정이철 목사 합작한 것입니다.  

 

필자는 정이철 목사의 이단성 주장 7가지 가운데 2번 항목에서 예수님의 시신은 썪지 않았 가르쳐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시편과 사도행전의 말씀들 썪지 않았다 말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이철 목사의 이단성: http://www.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5930 ) 

 

그런데 정이철 목사와 안창모 목사는 반론글에서 아래와 같이 예수님의 시신은 썪었다로 계속 주장하였습니다.  

 

안창모와 정이철의 반론글: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바로 그 앞의 말씀과 대등 접속사로 연결된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는 말씀도 당연히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예언을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서도 전혀 썩지 않았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안 된다.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는 예수님의 영혼이 3일 동안 음부에 버려졌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그의 영혼을 음부에서 이끌어 내셨다고 이해해야 하는 것처럼,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도 예수님의 죽은 시체가 무덤에 있는 동안 썩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몸을 썩음에 영원토록 버려두지 않으시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살리셨다고 이해해야 마땅하다.  

따라서 행 2:27절의 말씀을 예수님께 적용하여 바르게 해석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저주하심으로 그의 영혼을 음부에 버리셨지만, 언제까지 음부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삼 일 만에 음부에서 다시 살리시어 이끌어 내셨다. 그  예수님의 몸은 무덤에서 삼 일 동안만큼 썩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몸을 언제까지 썩음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완전한 영광의 몸으로 다시 살리셨다.”(안창모와 정이철 반론글) 

 

 저들의 반론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하면서, 대등접속사를 운운하면서, “예수님의 몸은 무덤에서 삼 일 동안 만큼 썩었으나”, 3일 동안 만큼은 썩었다고 계속 주장하면서 자신들이 틀리지 않았음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더니 8/20/2016년에 정이철 목사는 이승구 교수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 없으시나 우리와 동일한 피조된 인간으로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죽으신 후 예수님의 몸이 땅의 무덤에서 잠시 부패의 과정을 겪고 계실 때 …”(정이철의 질문)  

 

정이철 목사는 처럼 여전히 예수님의 몸이 부패의 과정을 겪고 있었다 주장합니다. 즉 썪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우리 신앙의 지침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썪지 않았다, 어떤 부패의 과정도 없었다. 3일만큼 부패하지도 않았다 말씀합니다. 이 근거가 바로 시편 16:10, 사도행전2:27, 16:32-37 말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시신에는 어떤 부패나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시편16: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행 2:27절)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이르시되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며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하나님께서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행16:32-37절) 

 

이처럼 성경은 정이철과 안창모의 주장이 틀렸음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안창모와 정이철 목사는 성경 말씀을 문자대로 보면 안된다는 궤변을 늘어 놓았는 데, 그 궤변 참으로 어리석고 우스꽝스런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문자대로 보아야지 문자대로 보지 않는다?  말세인지라,   영지주의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개혁주의와 모든 개혁 교회들의 지짐서인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예수님의 시신에 대해 어떤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인가? 6/29/2016년 김효성 역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보면 예수님의 시신은 시편의 말씀처럼 어떤 부패의 과정이나 썪었음이 없었다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대로 옮기면 아래와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직분을 아주 기꺼이 맡으셨고;186)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 율법 아래 처하셨으며187) 그것을 완전히 이루셨고;188) 그의 영혼으로 직접 지극히 슬픈 고통들과189) 그의 몸으로 지극히 아픈 고난들을 견디셨고;190)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며 죽으셨고;191) 묻히셨으며 죽음의 권세 아래 머무셨으나 썩지는 않으셨다.192) 그는 제 삼일에 고난 받으신 그 동일한 몸으로193)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고;194) 또한 그 몸으로 하늘로 올라가셨으며 그의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으셔서195) 중보의 일을 하시고;196) 세상 끝날에 사람들과 천사들을 심판하기 위해 돌아오실 것이다.19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8장: 중보자 그리스도에 관하여, 4. 낮아지심과 높아지심, 6/29/2016, 김효성 역)  

 

정이철목사와 안창모 목사는 자칭 개혁주의입니다. 바른믿음을 외치면서 개혁주의를 부르짖습니다. 개혁주의 다운 바른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아우성 입니다. 자기들의 견해에 거슬리면 어김없는 비난과 비판을 일 삼습니다. 거침없이 이단이라고 정죄합니다. 그러면서 자칭 개혁주의 정이철과 안창모 목사가 이처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반하는 이단사설을 외치니 참으로 안타까운 것입니다.  

 

개혁주의의 근간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입니다. 개혁주의 장로교에서 가장 중요 여기는 신앙고백이 바로 웨스트민스터 신조입니다. 웨스트 민스터 신앙 고백서는 예수 시신인 몸이 결코 썩지 않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런 걸 볼 때에 정이철 목사 안창모 목사는 장로교도 아니고, 개혁주의 아닙니다. 개혁주의 장로 교단은 속히  이단사설을 주장하는 정이철과 안창모를  해야만 할 것입니다.  

 

정이철 목사와 이창모 목사는 개혁주의의 근간인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8장: 중보자 그리스도에 관하여, 4. 낮아지심과 높아지심, 6/29/2016, 김효성 역 훼손하였습니다.  

 

 

관련 기사:  

정이철의 이단성:  http://www.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5930  

 

김한길 목사(은퇴) 

 남침례 한인총회 

 

주의 율례와 계명 최송연 주의 율례와 계명은 아침에 돋는 햇살처럼 찬란하며 빛 속에 드러난 보석같이 영롱하고 밤하늘의 별보다 더 반짝이나이다 주의 계명과 법도를 벗어나 사신 우상을 만들어 섬기던 열국과 열왕들의 오만함이여, 주의 손이 그들을 징계하셨도다 때마다, 분초마다, 내 영혼에 겸손의 神이신 성령으로 기름부으시사 주의 율례와 계명과 법도를 사랑하며 준행하는 은총 속에 항상 거하게 하시옵소서 2016, 8,19=열왕기 상하를 읽고

 

주의 율례와 계명
                최송연


주의 율례와 계명은
아침에 돋는 햇살처럼 찬란하며
빛 속에 드러난 보석같이 영롱하고
밤하늘의 별보다 더 반짝이나이다

주의 계명과 법도를 벗어나
사신 우상을 만들어 섬기던
열국과 열왕들의 오만함이여,
주의 손이 그들을 징계하셨도다

때마다, 분초마다, 내 영혼에
겸손의 神이신 성령으로 기름부으시사
주의 율례와 계명과 법도를 사랑하며
준행하는 은총 속에 항상 거하게 하시옵소서


                 
                         
                                 2016, 8,19=열왕기 상하를 읽고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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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브렉시트와 하나님의 계획 시간표

 

 

 

 

 


한 사명자의 고백
                  최송연
 
쪽빛으로 새파란 하늘엔
하얀 새털구름 두둥실 흐르고
살랑거리는 바람 따라
풀 내음도 향긋한 데...

풀 숲에 쪼그리고 앉아
시계꽃 넝쿨째 뜯어
손목에 칭칭 감아 팔찌 만들고...

빨간 진달래꽃
입에 물고 잘근잘근...
입안에 달착지근한 꽃잎 물,
소녀의 마음
나비 되어 춤추었습니다...

내 인생의 들녘에
봄은 그렇게 왔다 가고
오고 또 가는데...

저 멀리 메마른 광야
길 잃은 양떼의 울부짖는 울음소리
어쩌자고 귓전을 때리며 들려오는가....

그 울음소리
차마 외면치 못해
훌훌 따라 나선 이 길

가도 가도 끝없는 사막의 길,

멀고도 외로운 길,
눈물의 길이었습니다...

가야할 길은 아직도 상거가 먼데,
나는 어이하여
이리도 주저앉고만 싶어지는지….

때때로,
돌부리에 채여 넘어지며, 자빠지고,
뾰족한 가시 찔러대어 피맺힌 무릎,
고픈 배 움켜쥔 채 터벅거려도

목자의 핏빛 사랑이
나를 오라 손짓하며 부르시니
나는 힘없는 무릎 일으켜 세우고

오늘도
생명으로 생명 바꾸신
목자의 끝없는 그 사랑이야기
가녀린 목 터지도록 외쳐봅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시록2:10절)."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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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우심을 구하는 기도/최송연

 

주님,
진리와 공의 대신 부조리와 불법이
칠흑처럼 온 누리를 집어삼킨 이때,
작은 진리의 등불 하나 내게 주십시오
그리하시면,
캄캄한 흑암 중에서도
내가 주의 길을 벗어나지 아니하고
정도(正道)로 걸을 수 있겠습니다

사랑 없어 메마른 가슴들
서로 원망하며 지쳐가고 있는 이때,
주의 기이한 사랑의 빛을 내게 비추소서
그리하시면,
상처입고 우는 사람들을
향기 그윽한 미소로 품을 수 있겠습니다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어 답답한 이때
햇살 같은 주의 은총으로 나를 이끄시옵소서
주님의 도우시는 손길 없이는 도무지
의의 길, 사랑의 길로 나아갈 수 없음입니다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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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부장의 믿음을 놀랍게 여기신 예수님

본문 읽기:마태복음 8:5 -13

참조 구절:누가복음 7장 상반부

대체 어떤 믿음이었기에 예수님께서 놀랍게 여기셨을까요?

인간은 일반적으로, 보이는 세계가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갑니다. 그 와중에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알고 싶은 것에만 관심합니다. 세계관이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공무원들 특히 직업군인이나 교사들이 퇴직하고 나서 사업을 하게 되면 실패하기가 싶다고 하더군요. 상명하복의 툴에 익숙해져 있고, 학생들을 가르치기만 해서 달리 다양한 사회적 경험을 하지 못한 탓도 있겠지요. 사업에 관한한 사고의 폭이 제한적인 것이 실패의 요인일 수도 있겠습니다.

폐일언하고,

먼저 백부장의 믿음을 살펴봅니다. 본문의 병행구절인 누가복음 7장을 보면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방인, 그것도 지배국 로마군대의 백부장이 피지배국인 식민지 백성을 사랑하고 그들의 회당을 지어주었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닙니다. 대개 식민지 백성은 수탈을 당합니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 민족이 경험한 바 있어서 잘 압니다. 백부장이 한 일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팍스 로마나' 시대에 많은 식민지 백성들 중 하나인 유대인을 사랑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하나님을 알았다! 입니다.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요? 물론, 말씀을 들었을 테지요. 들었으되 그냥 흘려들은 게 아니라 귀담아 듣고 마음에 새긴 말씀을 통해서 비록 이방인일지라도,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랬기에 그 분의 백성도 사랑할 수 있었지요.

이는 일개 하인이 중풍병으로 몸져누워서 몹씨 괴로워하는(아주 심하게 괴로워함) 것을 보고 안쓰럽고 불쌍히 여겨 예수님께 나아 와서 고쳐주십사고 간구한데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중풍병이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병에 속합니다. 병이 심해서 꼼짝 못하고 드러누워있는 경우가 예전엔 흔했습니다.

하인의 입장에서는 주인을 수발들고 집안 일을 해야할 터인데 드러누워 똥오줌을 받아내고 있으니 오죽 괴롭겠습니까.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라 심적 고통도 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괴로워한다"가 완료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몹씨 괴로워함이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평소에 백부장이 하인을 어떻게 대했는 지를 행간을 통해서 살펴봅니다. 인격적으로 대할뿐만 아니라 내 몸같이 사랑했습니다. 인정머리 없는 주인이라면 내쫓았을 지도 모릅니다. 다른 하인이 똥오줌 받아내며 밥도 떠먹이고 간병을 해야 하니 보통 일이 아닙니다. 금전적으로 따져도 손해입니다. 그럼에도 백부장은 하인을 사랑하기에 돌봐주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려고 애썼던 것이지요.

사람대갈님(?) 아니, 머릿 수를 돈으로 계산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비인간적이고 윤리와 도덕이 실종된 경우일테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더러 있습니다. 마치 사람을 표로 보는 정치인도 간혹 있듯이 말입니다

"몹씨 괴로워한다"를 미완료형태가 아닌 완료형으로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백부장의 심중에 하인이 몹씨 괴로워하는 그 심정을 지금까지(예수님께 나아와 구할 때까지)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인의 아픔이 곧 내 아픔이었던 게지요.

한편, 이런 주인을 모시게 된 하인은 열심히 섬김으로서 보답코자 했지만 덜컹 중병으로 몸져눕는 신세가 되어 주인을 뵐 면목조차 없습니다. 하인 주제에 아픈 것도 제 마음대로 아플 수 없는 노릇인데 병수발까지 받다니! 그래서 그는 더욱 더 괴로워했던 것이지요.

이런 하인을 위해 예수님께로 나아 온 백부장입니다. 참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지 않는 지를 아는 길이 있습니다.

교회생활 열심히 하는 것만 보고서는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첫 째로는 돈보다 일보다 사람을 귀중히 여기는가를 보면 됩니다. 다음으로는 이웃을 진심으로 내 몸같이 사랑하는가를 보면 압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도 사랑치 못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설쳐대는 군상들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이런 백부장이라 얘수님깨서는 친히 왕림하셔서 고쳐주시고자 했습니다.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그런데 이어지는 백부장의 고백이 장관입니다. 백 명의 부하를 거느린 중대장 급 지휘관의 입에서 그것도 로마황제에게 충성하는 백부장의 입에서 나온 놀라운 신앙고백입니다.

아까 말했었지요. 군인들은 다양한 사회적 경험이 부족하다고요. 그러나 이 백부장은 달랐습니다. 요즘으로 치자면 기독교 세계관을 가진 자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바르고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군대 지휘관으로 있으면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말씀을 배운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예수님께서 놀랍게 여기실 정도로 말씀에 입각한 바른 믿음을 소유한 자였습니다. 또한 그 말씀과 신앙을 바탕으로 바른 세계관을 확립한 자였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메시야를 대망(기다릴 대, 바랄 망)하고 있을뿐만 아나라 예수님이 바로 그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그 당시 이스라엘인둘이 가지고 있던 메시야관 하고는 질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세상을- 천대받고 멸시받는 죄인들,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도-구원하러 오신 분이심을 바르게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스라엘인들은 대개가 다 정치적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로마를 쳐부수고 만국 위에 군림하는 메시야 왕국을 바랐던 것이지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또 들어갈 수 있는, 이 땅에서 이뤄질 그 나라를 꿈꿨던 겁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만물을 다스리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 그 분 자신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명확히 알고 나아와 간구하며 고백했다는 점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세 분 한 하나님-에 대해서 기회닿으면 강론코자 합니다)

바른 말씀이 바른 신앙을 낳고 바른 신앙이 바른 삶을 산출합니다.

예수님을 놀라게 한 '백부장의 믿음을 본받자'가 오늘의 주제가 아닙니다. 그런 백부장을 알아보시는 우리 예수님에 대한 바른 믿음을 가지자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냥 힘주어 믿습니다~고 외치면 믿음이 생길까요? 많은 분들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시기 전에는 죽어도 생기지 않는 게 믿음입니다. 이는 대단히 오해하고 있는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감동을 주시고 도우시지만 믿음이 있고 없고, 믿음을 가지고 안 가지고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자유의지 말입니다.

오래 참으시면서 다 회개하여 구원에 아르기를 원하시지만, 믿고 안 믿고는 인간의 책임입니다. 그러지 않고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서 '네 믿음이 크도다!' 고 하시면 하나님 스스로 자화자찬 하시는 격 이상이 아닙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거니와 말씀을 믿음으로 화합하십시오. 마음을 열고 어린 아이같이 받아들이십시오. 그래야 믿음이 생깁니다.

여러분도 얼마든지 예수님을 놀라게 해드릴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나는 믿음이 없다고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날 때부터 믿음을 가지고 태어나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믿음을 가지려고 애를 쓰면서 부지런히 말씀에 착념하고 기도하십시오. 언젠가는 믿음의 반석위에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본문 나머지 부분이 이어집니다)

구자준 목사2016/08/1609:40:28

 

 

수니파·시아파, 1400년째 왜 싸우나

이슬람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같은 수니파 국가인 바레인과 수단이 시아파 맹주인 이란과 외교 관계를 단절하겠다고 4일(현지 시각) 선언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시아파 성직자 처형으로 촉발된 사우디와 이란의 갈등이 다른 수니파·시아파 국가들이 참여하는 국제적 종파(宗派) 진영 대결로 발전하는 양상이다.

칼리프 선출 방식 異見서 출발…

사우디 "이란과 斷交"… 중동 일촉즉발

아델 알주바이르 사우디 외무장관은 3일 기자회견을 열고 "이란과 외교 관계를 단절한다"고 했다.

친(親)사우디 국가인 바레인과 수단도 4일 이란과 외교 관계 단절을 선언했고, 아랍에미리트(UAE)는 이란과 외교관계 수준을 대사급에서 대리대사(공사)급으로 낮춘다고 발표했다. /장일현 기자

▷사우디, 이란과 외교관계 단절 선언...중동 갈등 일촉즉발

수니파·시아파 왜 싸우나

중동 분쟁의 근원인 수니·시아파 갈등은 1400년 전부터 계속돼 왔다. 이들은 무함마드를 선지자로 여기고 하루 다섯 번 사우디아라비아 메카를 향해 엎드려 기도하는 똑같은 무슬림이지만, 서로를 원수로 여기며 전쟁을 거듭했다.

수니·시아파로 쪼개진 건 632년(추정) 이슬람 공동체 지도자였던 선지자 무함마드가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채 숨을 거두면서부터다.

이슬람 공동체는 스스로 후계자를 정해야 했는데, 무함마드의 혈육을 후계자로 해야 한다는 시아파, 공동체 합의를 통해 적임자를 뽑아야 한다는 수니파로 의견이 갈렸다.

인구비율은 수니 85 對 시아 15

무함마드에겐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시아파는 무함마드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립(이하 알리)을 초대 칼리프(후계자)로 추대했다. 하지만 수니파는 무함마드의 친구이자 장인(丈人)인 아부 바크르를 추대했다. 아부 바크르는 무함마드의 오른팔이었고, 둘째 딸을 무함마드에게 시집 보내 영향력도 셌다. 결국 수니파 의견이 채택돼 아부 바크르가 초대 칼리프가 됐다. 이후 시아파는 공동체 내의 큰 불만 세력이 됐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이슬람교 시아파 지도자 셰이크 님르 바르크 알님르를 비롯해 47명을 등을 테러혐의로 처형한데 대해 격분한 이란 시위대가 3일(현지시간) 테헤란 주재 사우디 대사관에 난입해 불을 지르면서 검은 연기가 건물 밖으로 치솟고 있다. /사진=AP/뉴시스

사우디 등 수니파는 능력주의…
이란 등 시아파는 혈육 앞세워

갈등이 노골화한 것은 시아파의 알리가 어렵게 제4대 칼리프에 올랐다가 곧 암살되면서부터다. 그 뒤 알리의 장남 하산마저 수니파 꾐에 넘어간 그의 아내에게 독살당하고, 차남 후세인도 수니파와 치른 전투에서 숨지면서 두 종파는 원수가 됐다.


1400년 전의 원한에서 비롯한 분쟁은 지금까지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다. 2011년부터 계속되고 있는 시리아 내전은 시아파 정권(알아사드) 대 수니파 반군, 작년 터진 예멘 내전은 수니파 정권 대 시아파 반군의 대결 구도다. 종파 전쟁 성격이 강한 내전은 다른 이슬람 국가에도 영향을 미쳐 분쟁을 확산시킨다. 현재 이슬람 신자는 수니파가 85%로 다수, 시아파가 15%로 소수이다.

사우디와 이란의 국교 단절,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외교전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는 사우디와 이란 간 갈등의 핵심은 결국 수니·시아파의 종파(宗派) 대결이다. 두 나라는 1979년 이란의 이슬람혁명 이후 갈등과 반목을 계속해 왔다. 당시 이란의 최고 지도자 호메이니가 "와하비즘(사우디의 근본 이슬람주의)은 이단"이라며 이란의 혁명을 수출하겠다고 선언해 대결의 길로 들어섰다.

양국은 1987년 7월 발생한 사우디 메카 시위 사건 때 국교를 단절했다. 메카 성지를 순례하던 시아파 신도들이 반(反)사우디 왕정 시위를 벌였고 경찰과 충돌 과정에서 400여명이 사망했다. 이 중 275명이 이란 시아파였다. 양국은 1988년부터 3년간 국교를 끊었다.


사우디-이란 분쟁일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2일(현지 시각) 저명한 시아파 지도자인 셰이크 님르 알님르를 사형시키자 이를 비판하는 이란 국민이 테헤란에 있는 사우디 대사관 앞으로 몰려가 항의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알님르의 사진을 붙인 팻말을 들고 사우디 국기를 불태웠으며 대사관을 향해 화염병을 던졌다. 사우디 정부는 3일 이란과 외교 관계를 단절하겠다고 선언했다. /AP 연합뉴스

사우디, 이란 급부상에 위기감…
중동 兩强 자존심 충돌

전문가들은 이번 양국 갈등이 그때보다 심각하다고 진단한다. 이희수 한양대 교수는 "시위·폭동이 원인이었던 30년 전과 달리 이번엔 사우디 왕정이 심각하게 존립 위기를 느끼고 있다"고 했다.


사우디 위기의 가장 큰 배경은 이란의 부상이다. 수니파 국가들은 지난해 서방과 핵 협상을 타결한 이란이 경제 제재라는 올가미를 벗은 뒤 석유 수출 등을 통해 중동의 강국으로 떠오를 것을 걱정하고 있다. 이란은 인구가 8000만명으로 사우디(3000만명)를 압도하고, 군사력은 중동 지역 최강으로 평가된다. 원유 보유량도 사우디 못지않게 풍부하다.


미국이 중동에서 예전과 다른 행태를 보이는 것도 사우디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 사우디는 이란이 테러를 지원하고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했는데도 미국이 적극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있다. 사우디는 미국이란 방어벽이 약화돼 국제무대에서 자신의 영향력이 떨어질까 봐 불안해하고 있다.


사우디 왕정을 지탱했던 자금력도 흔들린다. 국제 유가 하락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사우디 주요 유전 지대가 동부 지역에 몰려 있는 것도 문제다. 전체 인구의 15%인 사우디 시아파가 이곳에 몰려 있다. 이란 사주를 받은 시아파가 유전을 장악하면 사우디 왕가로선 치명적이다. 서정민 외대 교수는 "사우디는 이란 시아파의 국제적 영향력 차단과 국내 시아파 세력 단속을 정권 유지의 관건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


중동 등 이슬람 국가들은 수니파와 시아파로 갈려 대진표를 형성하고 있다. 바레인과 수단, UAE 등은 4일(현지 시각) 이란과 외교 관계를 단절하는 등 사우디 편들기를 명확히 했다. 걸프 지역 수니파 왕정 6개국 모임인 걸프협력회의(GCC)와 친사우디 성향의 아랍연맹(AL)은 '사우디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맞서 이란·이라크·레바논 헤즈볼라 등 시아파 진영은 사우디에 보복을 선언했다.

사우디 왕정 지탱해 온 자금력,
저유가에 큰 구멍 나며 흔들려

이란은 미국과 핵협상 타결로
경제 제재 풀려 국제사회 복귀

이런 갈등은 중동 전체의 격동과 불안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사우디와 이란 대리전 성격을 띠고 있는 예멘과 시리아 내전에선 정부군·반군의 전투가 격화될 전망이다. 서방은 양국 갈등이 이슬람국가(IS) 등 극단주의 세력을 키워 반(反)IS·반(反)테러 노력이 물거품이 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이라크에서 시아파 정부와 수니파 주민들 간 적대감이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조직인 IS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로선 양국 갈등을 중재할 국가는 눈에 띄지 않는다. 냉전 땐 미국·소련 영향력이 막강했지만 지금은 누구도 양국 행동을 제지할 힘이 없다. 하지만 사우디와 이란 갈등이 무력 충돌로 이어지지는 않을 전망이다. 사우디가 미국 지원 없이 군사적 행동에 나서기 어렵고, 이란도 이제 막 국제사회에 다시 발을 내딛는 중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기나긴 '발 들어 올리기' 끝에

야곱이 발행하여 동방사람의 땅에 이르렀습니다. ‘필 발, 갈 행’, ‘발행(發行)’이라고 쓰니 이해가 좀 어렵습니다. 우리말로 신문이나 잡지를 ‘발행’하는 것도 똑같은 ‘발행’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영어성경(NIV)을 보니 'Then Jacob continued on his journey.' '그리고 야곱은 그의 여정을 계속하였다‘고 쓰고 있습니다. 성경 원어 히브리어를 찾아보니 ’브이샤 야콥 라갈라인 브일레크‘, ’야곱이 발 들어올리기를 계속했다.‘고 되어 있네요. ’발 들어올리기를 계속했다.‘, 길을 가는 모습을 발을 계속 들어 올렸다고 표현하니 재미있습니다. 어쨌든 야곱은 부모를 떠나 무려 700 km를 '발 들어올리기'를 계속하여 동방사람들의 땅에 도착하였습니다.

"There he saw a well in the field." 거기에서 그는 들에 있는 우물을 보았습니다. 그 우물곁에는 양 세 떼가 누워서 목자들이 우물을 덮은 돌을 치우고 물을 먹여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물은 히브리어로 ‘브엘’입니다. 돌은 ‘에센’입니다. 우물은 생명수를 담고 있습니다. 돌이 치워지면 양들은 생수를 마실 것입니다. 우리는 앞서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이삭의 아내 될 여자를 얻으려고 하란 땅에 왔을 때 리브가를 우물가에서 만난 것을 압니다. 우리는 또 출애굽기를 통하여 반석이 갈라지고 생수가 터져 나오는 것도 읽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이 이런 광경을 의도적으로 이렇게 묘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반석과 그 반석의 깨어짐, 그리고 깨어지고 갈라진 반석을 통하여 흘러나온 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압니다. 야곱이 염소고기와 털로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받으며 집을 떠나 아내를 얻으러 가는 길에 돌(에센)베개를 베고 자다가 꿈에 사닥다리와 그 위에서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뵙고 이제 하란 땅에 이르렀는데 이번에는 돌로 덮은 우물곁에서 양떼와 목자들이 기다리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고 이렇게 성경에 기록된 이 모든 이야기들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야곱은 거기에서 자기의 외사촌이며 아내가 될 라헬을 만납니다. 야곱은 처음 만나는 라헬이지만 입을 맞추고 소리 높여 울며 자신이 라헬의 고모가 되는 리브가의 아들임을 밝힙니다. 라헬은 아버지 라반에게 달려가 고하고 라반이 달려와 야곱을 영접하여 안고 입 맞추고 집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야곱은 자기의 모든 이야기를 하고 라반은 “너는 참으로 나의 골육이로다.” 하고 야곱은 그렇게 외삼촌 집에서 살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부터 외삼촌 라반이 야곱에게 노동을 요구하고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하여 칠년 무료봉사를 제안하면서 야곱이 네 아내와 열 두 아들을 얻게 되는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됩니다. 우리는 또한 먼 훗날 주님께서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여인을 만나셨을 때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2천리 가까운 머나먼 길을 ‘발 들어올리기’를 계속하여 걸어온 야곱이 마침내 돌 덮힌 우물가에서 라헬을 만나 그에게 입 맞추고 소리 높여 우는 모습에서 우리는 길고 험한 여정 끝에 마침내 목숨을 바쳐 사랑할 연인을 만난 감동적인 모습을 봅니다. 우물가에서의 만남, 그것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이신 예수님과의 만남, 신랑과 신부의 만남을 뜻하는 것일 것입니다. 기나긴 광야길 끝에서 안식과 생명과 영원한 약속의 땅에 다다른 성도의 모습을 봅니다. 주님께서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이 낮은 험한 땅에 그런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신 것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라헬과 라반이 야곱을 반겨 맞아 집으로 영접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주님을 맞아들이는 영접의 기쁨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을 위하여 20년 세월을 일하면서 열 두 아들을 낳게 되지만 우리 주님은 그 귀한 몸을 십자가에 찢으시고 피흘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기나긴 '발 들어 올리기' 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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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녀의 작업 공간에 성경 말씀을 붙여놓은 것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거부한 일로 인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이제 한 때 해병대 일원이었던 그녀는 대법원에 이 일에 대해 항소하길 바라고 있다.


지난 주 미국 군 소송 법원(CAAF)은 군법회의를 열어 상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책상에 있는 성경 구절 포스트를 제거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해병대원 Lance Corporal Monifa Sterling의 보직을 해임하였다.


Sterling의 변호를 맡은 자유위원회 소속 변호사 Mike Berry씨는 법원이 그녀의 믿음이 ‘종교자유 헌장(RFRA)’에 의해 보호받을 수 있다는 주장을 법원이 무시했다고 말하고 있다.


“군대에서 군법회의에 회부되는 것은 일반인들이 연방법을 위반한 죄로 소송을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녀는 상관의 명령에도 성경 말씀을 제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연방법을 어긴 죄인처럼 취급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그는 설명하고 있다.


미국 군 소송 법원(CAAF)은 Sterling의 사례가 성경구절을 나누는 것은 “종교 시스템과 신념의 일부인” 종교적 행위 요건에 해당되지 않기에 ‘종교자유 헌장(RFRA)’에서 보호할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Berry 변호사는 그런 결정 자체가 “조잡한 결정”이며 “우리는 (군사) 법원이 많은 실수를 했으며, 우리는 대법원에 이에 대해 살펴줄 것을 요청할 계획”이라 주장하고 있다.


기사원문 >> Posting a Bible verse – a federal crime?



* 차별금지법으로 발현된 오바마의 반기독교적 정책이 미국 사회 곳곳에서 갈등과 마찰을 일으키는 가운데, 성경말씀이 적힌 메모지를 책상에 붙여놓았다는 이유만으로 군법회의에 회부하는 극단적인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오바마와 그를 뒤에서 후원하고 있는 세계정부주의자들(일루미나티들)이 얼마나 기독교를 미워하고 차별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인 것이다. 


지금은 단순한 차별과 핍박이지만, 조만간 저들이 원하는 세상(NWO)이 도래하면 그 다음엔 공개적으로 기독교인들을 FEMA 수용소에 가두고 단두대에서 처형하게 될 것이다.


핍박은 이미 시작되었고, 본격적인 환난의 때가 눈앞에 와 있는 것이다.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먼 곳에서 다른 이들의 생각을 조종하는 것은 공상 과학 영화의 단골 소재였는데, 최근 유전학과 신경과학의 발전으로 이것이 실제로 가능하게 될 날이 곧 오게 될 것으로 보인다.


10년 전 생물 엔지니어 전문가인 Karl Deisseroth와 스탠포드 대학에서 일하는 그의 동료들은 시각적 자극을 통한 뇌 컨트롤(현재는 optogenetics라고 불리는)에 대한 논문을 발간한 바 있다. 이는 빛을 통해 뉴런이 자극받는 패턴을 연구한 것이다.


이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그들은 algae에서 찾아낸 channelrhodopsin로 불리는 생체분자의 유전자를 조작하여 쥐의 뇌신경세포(뉴런)들을 개량하였다. 


Channelrhodopsin은 빛의 에너지를 사용하여 이온을 충전함으로 이것이 세포에 침투될 수 있도록 작용한다. 이 때 충전된 이온들은 뉴런의 전기적 활동을 대체할 수 있다.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동물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지만, 이런 시스템들은 뇌의 활동을 보다 정확하고 상처 없이 조절(조작?)할 수 있도록 돕게 될 것이다. 이런 연구들이 발전되면 머지않아 인간에 대한 마인드 컨트롤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과 로봇 기술과 마찬가지로 이 기술도 인간의 생활을 향상시키는데 이바지하도록 사용되어야 한다.


기사원문 >> Remote control of the brain is coming: how will we use it?



* 눈에 일정한 빛의 신호를 보내 사람의 생각을 조절(조작)하는 마인드컨트롤 기술이 조만간 구현될 것이라 한다. 뇌신경에 문제가 있는 환자를 치료하는 목적으로 개발하고 있다고 주장하나, 이는 기술 개발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핑계일 뿐 결국 이 기술은 권력을 가진 자들이 대중들을 선동하고 컨트롤하는 도구로 쓰이게 될 것이다.


스스로 특별한 존재라고 믿는 엘리트(일루미나티)들이 대중들의 생각을 조작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는 도구로 쓰기 위한 기술들이 하나 씩 그 정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


일루미나티 카드에도 빛(레이저)을 이용한 마인드컨트롤 기술이 소개되고 있다.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교과서가 미쳤다 ⑤ '종교 다원주의' 주입시키는 교과서

'모든 종교는 동등하다'며 반기독교 정서 확산시켜...


현재 우리나라의 교과서들은 종교를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뉴스윈코리아가 현행 고등학교 ‘생활과 윤리’ 교과서와 ‘사회·문화’ 교과서를 분석한 결과, 일부 교과서들이 ‘종교’ 관련 단원에서 종교다원주의를 학생들에게 주입시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천재교육과 미래엔 출판사가 발행한 위의 교과서들은 종교 간 갈등의 원인으로 ‘타 종교에 대한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태도’를 제시하고, 종교 간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타종교에 대해 ‘개방적이고 관용적인 태도를 가질 것’과 ‘적극적으로 종교 간 대화에 나설 것’을 가르치는 등 종교다원주의의 구원관과 선교관을 앵무새처럼 똑같이 반복하고 있었다.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는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사상이다(교회용어사전). 19세기와 20세기 초 자유주의 신학 운동에서 유래했으며, 단순히 여러 종교가 공존하는 종교다원화 상황을 가치중립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종교는 공존할 수 있으며 공존해야 한다’는 가치판단이 포함돼 있다.


다시 말해, 회교의 알라, 유대교의 야훼, 힌두교의 브라만, 유교의 상제 등 모든 종교가 말하는 신들이 궁극적으로 동일한 신이며, 종교 간 반목과 대립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을 먼저 비판한 뒤에 서로 대화를 통한 소통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종교 다원주의는 ‘예수만이 구원’이라는 성경의 진리를 정면으로 부인하며, ‘만민에게 복음을 증거하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무화시킨다. 그리고 예수님의 존재를 ‘신화이자 상징’으로 격하시켜 신성을 부인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교과서에 나타난 종교다원주의'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미래엔 출판사의 고등학교 사회·문화(강운선 외, 2013) 교과서는 199쪽에서 ‘종교적 갈등의 양상’이라는 소제목 아래 “배타성은 자기 종교에 대한 절대적 확신을 강화하고 다른 종교를 경시하게 만들어 종교 간 갈등을 유발하기도 한다”며 종교 갈등의 원인으로 ‘타 종교에 대한 강한 배타성’을 지적했다.


이어 200쪽에서 종교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타 종교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와 종교 간의 적극적인 교류와 대화를 가질 것을 주장했다. 더욱이 이 교과서는 종교다원주의를 상징하는 삼소회와 불당에 선 천주교 신부에 대한 사진과 글을 싣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천재교육 출판사의 고등학교 사회·문화(구정화 외, 2014) 교과서 역시 종교 갈등의 원인으로 ‘자신의 종교만이 절대적인 인식과 배타적 태도’를 지적하고, 종교 간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타 종교에 대한 ‘개방적 태도’를 가질 것을 주장했다.


이 교과서는 208쪽에서 우리나라는 여러 종교가 공존하는 ‘다종교 사회’라며 “다른 종교를 무시하고 자기 종교만이 우월하고 옳다는 사고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특히 세계화로 다른 종교 집단 간의 접촉이 빈번해지는 상황에서 개방적 태도는 더욱 중시되고 있다”며 종교다원주의를 전파했다. 또한 같은 페이지 하단에서는 종교 간 통합을 꾀하는 '한국 종교인 평화 회의'의 홈페이지(www.kcrp.or.kr)에서 발췌한 ‘이웃 종교 스탬프 투어’에 관한 글을 싣고 있었다.



▲ 천재교육 출판사의 고등학교 사회·문화(구정화 외, 2014) 교과서 208쪽.


미래엔 출판사의 고등학교 생활과 윤리(정창우 외, 2013) 교과서는

240쪽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졌던 폭력과 인권 침해는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었으며 종교적 독선으로 인해 야기된 종교 간의 갈등은 사회적 혼란을 가져오기도 했다”며 종교의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한 뒤, 종교 간 갈등이 발생하는 원인으로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와 ‘다른 종교에 대한 무지와 편견’을 지적했다(242쪽).


이어 종교 간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첫째,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타 종교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가질 것과 둘째, 종교 간에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협력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것 등 종교다원주의의 선교관을 그대로 기술했다(243쪽).


특히 이 교과서는 “종교의 자유는 인간이 지닌 기본적인 권리 중 하나로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 종교에 대한 신앙을 강요받지 않을 권리, 종교를 가지지 않아도 되는 권리 등을 포함한다”며 “종교가 다르거나 종교가 없는 사람에게 자신의 믿음을 강요하는 것은 독선과 폭력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 미래엔 출판사의 고등학교 생활과 윤리(정창우 외, 2013) 교과서 244쪽


더 나아가 이 교과서는

244쪽에서 법정 스님과 김수환 추기경의 가상 대화(경향신문, 2010년 6월 4일)를 소개하면서 “신앙의 대상이나 믿음의 형태 등 성직자로서 걸어가는 길을 달랐지만 자비와 사랑, 진리를 추구하는 궁극의 목적에 대해서는 기꺼이 소통했던 두 인물의 가상 대화를 통해 종교 간 대화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자”고 촉구했다.


교과서 본문에서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은 “하나님의 사랑이나 부처님의 자비나 모두 한 보따리 안에 있다”며 “자기 종교의 틀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고 종교 다원주의의 구원관을 피력했다.


또한 “이웃 종교를 서로의 완성을 위한 상보적 관계로 파악하며 통합적으로 사고해야 한다”며 “종교 간의 대화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등 종교다원주의의 선교관을 주장했다.


천재교육 출판사의 고등학교 생활과 윤리(변순용 외, 2013) 교과서는

197쪽 ‘종교와 윤리’ 단원에서 종교 간의 갈등은 다른 종교나 다른 교리를 믿는 사람을 배척하는 ‘독선적이고 폐쇄적인 종교인의 태도’에서 나온다며 ‘세계화와 더불어 다종교 사회의 현실을 받아들여 다른 종교와 조화를 추구하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더욱이 이 교과서는 “종교를 믿을 자유가 있는 것처럼 종교를 믿지 않을 자유도 있다”며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자신의 종교를 강요하는 것 역시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탄숭배자이자 뉴에이지 운동의 대모인 엘리스 베일리(1880-1949)는 ‘10가지 반기독교전략’에서 ‘전략은 노인을 상대하지 않고 어린아이들을 공략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그녀는 ‘다른 종교들을 관용하고 높여 기독교와 대등하게 만드는 종교통합운동을 일으키라'고 주문했다.


오늘날 우리나라 전국 캠퍼스의 복음화율은 고작 3.7%에 불과하다는 말이 있다.


한국대학생선교회(CCC) 학원사연연구소가 '2013~2015년 대학 신입생들의 종교의식'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2015년 88.6%의 학생들이 종교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였으며 전체 응답자 중 평균 8.9%만 기독교를 종교로 선택할 의향이 있다고 대답했다.


다음세대의 이같은 탈종교 현상과 반기독교 정서에 현행 교과서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출처: 뉴스윈코리아 http://www.newswinkorea.com/news/article.html?no=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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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인식에의 길 (The ways to self- knowledge) "네 자신을 알아라" 라는 말은 좋은 충고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안다는 말이 자신을 분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마음대로 분해하고 다시 끼워 맞출 수 있는 기계인 것처럼 생각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생애 중에 겪게 되는 어려운 시기에 우리를 위기에 처하게 한 사건들을 우리가 어느 정도 상세하게 분석해 보는 것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고, 또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생명이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흔히들 고독, 침묵, 그리고 기도가 자기자신을 알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고독, 침묵, 기도가 우리 인생의 복잡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 즉 우리의 지성소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이 지성소는 분석할 수 없습니다 이곳은 우리가 동경하고, 감사하며, 찬양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마음의 소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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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꿈

 독일이 낳은 걸출한 철학자요 사상가요 극작가인 괴테가 쓴 ‘파우스트’라는 희곡을 보면 주인공 파우스트는 박식한 학자이지만 속세적인 지식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영혼과 악마가 가진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금지된 지식을 교환하는 계약을 하게 됩니다.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 또는 메피스토로 불리는 이 악마는 계약기간 동안 흑마술(검은 마술, 黑魔術)로 파우스트의 욕심을 충족시켜 주지만, 계약기간이 끝난 후 파우스트의 영혼은 악마 메피스토의 소유가 되고 영원히 저주받게 됩니다(실제 희곡에서는 이 때 천사가 파우스트를 구해내지만).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에게 이 세상 누구도 가져보지 못 한 지위와 명예와 부귀와 권력을 준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영화로운 삶을 누리게 해 준다면 파우스트처럼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영원한 지옥에 가시겠습니까?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인생이래야 고작 70년, 80년인데 지옥의 고통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런 어리석은 거래를 하겠습니까? 이걸 거꾸로 뒤집어서 여쭤볼까요? 이 세상에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고 억울함과 불태우고 목 잘리는 죽임을 당하고 영원한 생명과 천국을 누리는 조건이라면 당신은 어찌 하시겠습니까? 선뜻 대답 못 하고 망설여집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짧은 이 세상의 복락을 영원한 생명과 맞바꾸고 있습니다.

 야곱은 복을 원했습니다. 아버지의 축복을 받으려고 팥죽으로 형의 장자권을 사고 염소가죽으로 아버지를 속여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복은 어떤 복이었을까요? 야곱은 아버지 이삭이 축복한 그대로 이 땅에서 하늘과 땅의 기름짐과 권세와 섬김과 소유를 누리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 된 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려고 하는 참된 복은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 곧 하나님과 동행하며 이 세상을 건너 하나님의 집에 이르러 영원히 함께 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이제부터 하나님을 향하여, 영원한 생명을 향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의 모든 고난과 아픔과 슬픔을 넘어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에게 쫓겨 집을 떠납니다. 700 km나 떨어진 머나먼 하란 땅 외삼촌댁으로 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것을 야곱이 알았을까요? 야곱은 자신이 그토록 받기 원했던 아버지의 축복, 하나님의 복이 그런 고난의 광야길인 줄을 알았을까요?

 야곱은 하란을 향하여 가는 길에 루스라는 곳에서 돌베개를 하고 잠을 잡니다. 꿈에 보니 사닥다리가 땅에 놓였는데 하늘에 닿았습니다. 그 위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하나님이 서셔서 야곱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 것이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그런데 하나님이 '너와 네 자손에게 땅을 주겠다' 하심이 야곱을 엄청난 부자요 대지주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약속이었을까요?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받을 복’이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참 된 복은 오직 하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늘에 이르는 생명의 길입니다. 이 세상 모든 부귀영화가 헛것이로되 오직 예수님만이 참되고 영원한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복을 지금 야곱에게 약속하고 계신 것입니다.

 먼 훗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한복음 1장 51절).”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다니요? 그렇습니다. 야곱이 꿈에 본 사닥다리, 하늘에 연결된 그 사닥다리가 바로 인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사닥다리는 주님입니다. 주님이 달려 피흘리시고 천사들이 안절부절 못 하고 오르락내리락 하던 십자가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사닥다리는 하늘나라에 이르는 오직 한 길 십자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이셨습니다. 야곱이 꿈에서 본 사닥다리는 오직 하나 참된 복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것을 야곱은 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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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영상은 '미국을 위해 행동하라' 단체의 대표인 브리짓 가브리엘의 간증이다. 자신은 기독교 국가였던 레바논에서 태어났는데 어떻게 기독교 국가였던 레바논이 이슬람 국가가 되었는가를 이야기 하고 있다. 충격적이다! 내용이 길어서 중간까지만 캡처했다. 

전체영상은 : https://youtu.be/TXUtoz6Uc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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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푸아 사람들(Papuans)

파푸아뉴기니

남태평양 남서부에 있는 나라.

위치 : 남태평양 남서부
면적 : 46만 2840㎢
인구 : 492만 7000명(2000)
인구밀도 : 10.6명/㎢(2000)
수도 : 포트모르즈비
정체 : 입헌군주제
공용어 : 영어

파푸아뉴기니 주민의 대부분은 멜라네시아계(系)의 파푸아족(族)이며, 이것은 다시 500여 부족으로 세분된다. 따라서 공용어는 영어이지만 원주민들은 파푸아어를 사용하는데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지역에 따라 큰 차이가 있으며, 언어를 통일하는 일이 앞으로의 큰 과제이다.
파푸아인은 단신·장두(長頭)에 고수머리를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원시적인 인종의 하나로 간주된다.
여러 부족은 해안과 산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데 같은 부족끼리는 단결력이 강하지만 다른 부족에 대해서는 배타적 경향이 짙다. 산지 주민은 미개하며 체격도 빈약하고 각 마을마다 다른 언어와 특이한 풍습을 보존하고 있다.(내용은 인용 하였습니다.)



 



















































 

 

 

 

무화과야, 무화과야~

 

새로 이사를 온 교회의 앞마당에 무화과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쏟아지는 뙤약볕 아래 익어가는 무화과,

올해는 유난한가? 가지마다 주렁주렁 흐드러졌다.

토요일 날 한 광주리 따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오늘 주일 날 성도들과 나누어 먹고도 또 한 광주리가 남았다.

잘 익은 무화과를 한 입 깨물면 향긋한 향과 함께 얼마나 달콤한지

 

우리 주님께서는 시장하실 때 무화과나무에 가셔서 열매를 찾다가

단 한 개의 열매도 얻지 못했다는데

 

무화과야, 무화과야

창조 주 하나님께서 찾으실 때

이토록 달콤한 열매를 썩 내드렸으면 좋았을 것을

어쩌다 한 개의 열매도 맺지 못하여

영원토록 저주를 받고 말았단 말인가?"

달콤한 무화과를 입에 넣을 때마다 무화과 한 개를 드시지 못한

우리 주님 생각에…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 든다.

 

그 때 그 무화과나무는 제 철을 만나지 못해서 그렇다치고,

나는 우리 주님 찾으실 때 내어드릴 열매가 무엇이 있을까?

달고 맛있는 무화과가 목으로 쉽게 넘어가질 않네....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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