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2)-

마태복음 10장

9.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10.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11.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12.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고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참조구절;사도행전 20:17-38 중,

17 -32절은 생략...

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의 쓰는 것을 충당하여

35.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여러분도) 수고하여 약한 사람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먼저 사도행전 20장 위 참조구절을 살펴봅니다.

바울 일행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고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가기 위하여 밀레도 항구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합니다.

이들은 에베소에 있는 각 지역의 여러 가정교회를 맡아서 양떼를 돌보는 감독자로서 장로들이었습니다. 요즘으로 보자면 각 지역교회 담임목사들이지요.

위 사도행전 20장 본문은 바울의 실천신학의 단면이 여실히 보여줍니다. 지식냄새 풍기는 현학적인 설교가 아닌, 삶이 녹아 있는 체화된 말씀입니다.

이 것은 장로들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로서, 단순히 지적 동의를 구하는 설교가 아니라, 다시 한 번 바울 자신의 모본을 따라 바르게 목회할 것을 권면하는 고별 설교입니다.

요즘 목회자들도 자주 읽고 묵상하면 어그러진 길로 가지 않을 것입니다.


32절에는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사역을 하면서 그 누구의 금품을 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장로들이 아는 바와 같이 손수 일해서 자신과 동행들의 경비를 충당했다고 말합니다.

35절에서는, 모든 일에 모범을 보여준대로 (여러분도) 수고하여-손수 일해서 물질을 얻어-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 -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 하심을 기억하라고 당부합니다.

(바울은 주로 고린도, 에베소 등지에서 사역하는 동안에 천막 만드는 일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에베소 지역교회의 장로들한테 그들도 바울 자신처럼 직접 일하면서 목회할 것을 당부합니다. 사례를 받을 권리가 있지만 민폐를 끼치지 않고 가난한 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약한 자들을 도우면서 목회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필자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자비량 목회에 대한 논쟁을 보니까, 바울은 특별한 경우로서 일반화할 수 없다고 말하더군요. 그러나 그렇게 단정짓는다면 이는 또 다른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먹고 사는 일에 있어서 어떤 정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례비를 받을 수도 있고 자비량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비량 목회를 비성경적이라고 폄훼하는 분들이 있기로 필자 나름의 성경적인 근거를 대보는 것입니다.


위 마태복음 본문에서는-
전대에 돈을 가지지 말라, 전도여행을 위해서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돈이 있어야 복음을 전하고 주의 일을 하고 목회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그런 생각을 한다면 목회나 전도나 선교가 사업이 될 수도 있습니다. 투자의 개념이 개입할 소지가 있습니다. 급부에 대한 반대급부의 여지는 첨부터 싹을 잘라야 합니다. 주님이 맡기신 일을 돈벌이 수단으로(생계의 수단) 삼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복음(말씀)전하러 갈 때는 빈 지갑으로 갔다가 올 때는 지갑을 채워서 오는 것은 삯꾼(?)들이나 하는 짓이지요. 올 때도 빈 지갑으로 와야 합니다.

'전송'이란 한자를 살펴보면 '전'이란 글자는, 먹을 '식' 변에 돈 '전'자가 두 개 붙어있습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올 차비 갈 차비 주어서 보내면(전송하면) 족한 것입니다.

그런데 스타(?) 강사들이 하는 모습을 보면 부흥회를 무슨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3일 부흥회 인도하고 2-3백만원 받는 것은 도가 지나쳐도 한참 지나칩니다.

목사나 선교사는 자나깨나 돈조심해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배낭, 두 벌 옷, 신,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배낭에 무엇을 담습니까? 여행에 필요한 비상 물품들이지요. 그리고 여벌의 옷과 여벌의 신(당시는 샌들), 그리고 여벌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당시 여행객들이 일반적으로 구비하는 것들을, 보내심을 받은 사도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먹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필요를 채워주신다는 뜻입니다.

군사로 부름받은 자는 지가 벌어서 먹고 살면서 군대생활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초대교회나 사도후 교부시대에는 자비량 사역자가 많았습니다. 혹 사례비를 받아도 최소한으로만 받았습니다. 사역을 축재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에 걸림돌이 되지 않코자 했기 때문입니다.

말세에 기독교회(특히 한국교회)가 욕을 먹는 것은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세상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교회가 돈을 사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게 되면 온갖 악한 모습이 드러나게 됩니다. 신자들, 특히 목사들은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고 주님을 섬기는 것으로 특권을 삼아야지,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세상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잘 산다고해서, 그것이 부러워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비록 가난하고 부족할지라도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낼 때, 세인들도 인정하며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복음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는, 초기 기독교역사가 증명하는 실체적 진실이었습니다.

다음으로는,
11절로 14절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합당하다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평안이란 단어도 세 번 나오고요. 그런데 본문 12절에 나오는 평안(한글성경)은, 그냥 '인사하라'는 말입니다. 원문에는 평안이란 단어가 안 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유대인의 인사란, 상대를 만나면 '샬롬!' 합니다.
평안, 평강을 비는 말이지요.

그런데 제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일은 평안을 빌기 전에, 먼저 머물기에 합당한 자를 찾는 일이었습니다. 합당한 자를 찾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머물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태복음 7장 6절

사도들은 복음을 담지한 그룻입니다. 질그릇에 거룩한 보배를 담고 있습니다. 아무 곳에나 머물 수 없습니다. 합당한 자를 찾아내야 합니다. 머물기에 합당하다는 말은 '복음의 가치를 알고 이를 받아들일만한 그릇이 되느냐'는 뜻입니다.

아무리 유대인들이 손님 대접을 잘 하는 민족이라 할라도 일반적인 관습의 기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합당한 자를 찾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복음은 싸구려 상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잡상인이 아무렇게나 취급하는 그런 유의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가치를 모르는 자의 집에 머물게 되면 나중에 분란이 일어나고 화를 당하게 됩니다. 합당한 자를 찾아내는 일은 이성적이면서 동시에 영적인 분별을 요하는 중요한 일입니다.

'믿습니다!'라고 한다고 해서 모든 일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이란,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과 의지적인 행동을 통해서 드러나는 영성을 말합니다. 물론 말씀(복음)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믿음이지요.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러야 합니다. 밥이 어떠니 반찬이 어떠니 잠자리가 어떠니...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 집이 가난하든 넉넉하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면서 먼저 인사해야 합니다.

13절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안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샬롬입니다. '평안'이란 얼마나 귀하고 중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일일이 다 설명할 수는 없고 한 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평강이 당신과(가정에) 함께 하기를!'. 그리고, '하나님과 화해했느냐? 그렇지 않다면 화해하라!는 뜻을 담고 있는 인사말 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빈 평안이 그 집에 합당하면 거기 임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품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절대로 땅에 떨어져서 밟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너무나 귀하기 때문입니다. 그 평안(평화 혹은 화평, 평강)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주어지기에 갈 곳을 찾지 못하면 기도한 자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모든 이를 위해서, 만민을 위해서 평안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도 평안이 함께 할 것입니다. (이것은 필자의 오랜 경험입니다)

14-15절은,
복음을 거부한 자들의 결국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나태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호의를 끝내 거절한 유대인들은 그들이 행했던 대로 (발의 먼지를 떨어버린 대로) 그들도 이방인처럼 버려질 것입니다.

선택받았다고 생각했던 자기 확신(선민사상)은 물거품처럼될 것입니다. 수포로 돌아갈 것입니다. 땅에 떨어져 밣힐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죄악 가운데 살다가 멸망받은 소돔과 고모라가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운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거부했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한 자들이었기에 그렇습니다.

교리에 안주하지 마시고 주의 말씀(복음)에 거하여 참된 평안(샬롬-에이레네)를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글: 구자준 목사

(창 44) 요셉의 은잔
 
20년이 더 지난 다음 한 상(床)이 아니고 요셉 따로 열 한 형제 따로 차린 상이었지만 열 두 형제들이 요셉의 집에서 그렇게 다 모였습니다. 요셉의 정체를 까맣게 몰랐기 때문에 그들은 열 두 형제가 다 모인 줄도 모른 채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였습니다. 요셉은 베냐민에게 다른 형제의 다섯 배나 주면서 애틋한 사랑을 나타내었지만 형제들이나 베냐민은 요셉이 왜 그러는지 그 마음을 알 턱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해후 아닌 해후, 만찬 아닌 만찬, 잔치 아닌 잔치를 마치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서로의 마음도 모르는 채 말입니다. 요셉은 베냐민을 그렇게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마음도 모르는 채 주님을 떠나 세상 가운데로 돌아가는지요.

요셉은 그 청지기에게 명하여 양식을 각 사람의 자루에 가득 채우고 그들이 가지고 온 돈도 도로 그 자루에 넣고 베냐민의 자루에는 자신의 은잔을 몰래 넣게 합니다. 그리고 이른 아침에 그들을 떠나보냅니다. 그리고 사람을 뒤따라 보내어 왜 은잔을 도적질하여 가느냐고 누명을 씌워 다그치고 자루를 뒤져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을 찾아낸 다음 그들을 도로 끌고 옵니다. 그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도적질한 죄를 뒤집어쓰고 요셉의 집으로 되끌려 온 것입니다. 요셉은 베냐민을 그토록 보내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은잔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이기도 하며 자신의 즐거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에 집어넣어 보낸 것입니다.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마시지 않을래? 네가 떠나가면 나는 누구와 마시겠느냐? 내가 이제 누구와 즐거워하며 잔을 나누겠느냐? 네가 떠나가면 나는 이 은잔이 필요 없다. 그러니 이 은잔을 가지고 가라.” 그런 마음이었을까요?

복음서(마26, 막14, 눅 22장)에는 주님이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과 나눈 마지막 성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떡을 떼어 나누어주시며 ‘이것이 내 살, 너희를 위해 주는 내 몸이라’ 하셨고, 잔을 나누시면서 ‘이 잔은 내 피, 새 언약’이라 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가룟 유다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3장에는 유다가 떡 조각을 받고 그 자리에서 나갔다고 기록되어 있어 유다는 그 자리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다음 주님은 남은 제자들에게 여러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26:29)

보십시오, 요셉의 앞에 앉아 함께 마신 형제들이 몇 명입니까? 주님과 함께 피의 언약의 잔을 나눈 제자의 수가 몇입니까? 똑같이 열 한 명입니다. 이런 것까지 일치하는 것이 어찌 놀랍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요셉이 자신의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에 넣은 것은 자신의 마음, 자신의 사랑, 자신의 기쁨을 넣은 것입니다. 다시 만나기 전에는 다시 즐겁게 마실 일이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두고 떠나시면서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신 것은 주님의 마음, 주님의 사랑, 주님의 심장, 주님의 생명을 우리의 자루에 넣으신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베냐민은 요셉이 그의 가장 아끼는 은잔을 자기의 자루 속에 넣은 것을 모르는 채 떠나가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은잔을 훔친 도적이 되어 도로 끌려 왔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마음을 모르는 채 세상으로 돌아간다면 주님의 잔을 훔친 도적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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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원로목사 없앴는데 후임의 그릇이 문제

5. 교회를 위한다고 물리적으로 원로 목사 될 분을 물리친 교회.

1)Dx 교회
장기 목회를 하고 원로 목사가 될 분을 교회도 부담스럽고 후임에게도 부담 준다고 물리적으로 장기 목회자를 은퇴시키고 원로 목사 없는 교회로 만든 다음 공부를 많이 하고 학위를 갖고 설교를 뛰어나게 잘하고 큰 교회의 부목 경험을 많이 쌓은 훌륭한 젊은 목사님을 모셨다. 얼마 후 교회는 분열 되었다. 그리고 또 분열되었다. 교회는 전임이 계실때보다 1/2수준으로 교세는 약하여 졌다.

원로 목사가 안 계시는데 왜 그런 결과가 초래되었는가? 그것은 후임의 설교나 학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목회가 무엇인지 목회 처신법이 어떤 것이지를 모르는 무식한 아마추어 목사이며 그의 그릇의 문제이다. 또한 장로들이 20여년 가까이 교회를 성장시키며 무난히 목회하여온 전임의 능력과 장점을 보지못하고 단점만 보고 처리한데 문제의 원인이 있다.

필자의 추리로는 그 교회는 전임 장기 목회자를 조기 은퇴시키지 말고 원로로 모셨다면 그와 같은 거듭된 분열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안정된 교회로 유지 발전 하며 최소한 현상유지는 하였으리라고 본다.
원로목사가 있는 것이 결코 교회에 불편한 것 많은 아니다. 전국 원로 목사가 있는 교회를 보라 통계적으로 보면 그래도 가장 무탈한 교회가 더 많음을 볼 수 있다. 

2) 이름을 열거하기 곤란하여 말 하지 않지만 우리 주변 지역에 원로 없는 교회가  많은데 어찌하여
왜?  불화하고, 분쟁 하고 분열하고 목회자가 자주 이동하게 되는가?

그런고로 교회도 원로목사 단점만 보지 말고 원로목사가 계심으로 후임을 지도하고 교회 어려운 문제가 발생 하였을시 바람막이 역할을 하여 교회가 요동하지 않게하고 유익하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3) 영락교회 원로목사 후임과 후임들의 그릇의 한계
영락교회 바로 후임들과 원로 목사 사후 후임들을 생각하여 보자. 개인적으로 한국 교회에 존경받고 덕망이 있고 학 박사 학위와 지명도가 높고 목회 능력이 있는 분명 비범하고 훌륭한 분들이 후임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현상유지도 못하고 교회를 평안히 장기적으로 이끌지 못하며 중도 하차 하였는가?

그분들은 일반적 목회자 기준에서 볼 때 전부가 특급이다. 그러나 분명히 아실 것은 초 특급은 아니다.

그것은 영락교회와 한경직 이란 초특급 초대형 교회의 양(量)과 설교와 정치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못 되기 때문이다. 초특급 카리스마 그 그릇은 세계 장로교 역사 이래 처음 하늘에서 내려온 목회에 관한 한 “칼빈”보다 더 큰 그릇이다.

프린스턴 신학교에 가면 세계에서 제일 큰 장로교를 만든 공로로는 한경직 목사님 한 분의 영정만이 걸려 있다. 그런고로 그 후임들이 영락교회를 평탄하게 이끌지 못하는 것이 비정상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인데 문제는 그 정상을 비정상으로 보고 대하는 그 교회가 문제이다.

그런 초 특급은 장로교 역사 이래 그분밖에 없었고 지금도 없음을 영락교회는 영락교회 앞날을 위하여 알아야 할 것이다. 앞으로 영락교회는 이 사실을 직시하지 못한다면 영락교회 앞날은 더 험난할 것이다.

6. 원로 목사와 갈등 이유는 그의 인간됨과  목회 역량
자신의 역량과 덕목이 모자라는 목사는 원로와 갈등을 빚는다. 내 위에 한 어른으로  모시면 되는 것이다. 어른으로 모시기로 하고 그 교회에 부임한것 아닌가? 
생각하여 보라 원로목사를 어른으로 모신다고 손해 볼 일이 있는가? 또한 그렇게 모신다고 윤리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 있는가? 원로를 존경하고 아니하는 것은 그의 인격에 문제이다.

교회마다 그 교회에 생리가 있다. 그것을 가장 잘 아는 분이 원로이다. 그 원로를 내 위에 한 어른으로 모시고 자문을 받으며 나아가면 후임 목사 목회에 많은 도움이 된다.
건반진 후임은 원로의 자문을  원치 않고 새물맛을 본 성도들의 즐거운 감정에 취하여 우쭐 대다가  뜨거운 감자를 먹은다음 원로에 자문을 구하는 석두도 있다.

문제는 자신의 인간됨과 역량과 덕목과 목회 능력의 그릇이다. 원로 목사 계시는 곳에서 목회를 잘할 수 있는 분은 일반 교회에 가도 잘할 수 있고 일반 교회에서 잘 할 수 있는 분은 원로 목사 계신 곳에 가서도 잘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목회 자이며 장, 단기 목회하는 목사도 마찬 가지이다.
목회에 모든 문제의 발생원인 90%는 자신의 역량과 덕목이 부족 한대서 오는 것임을 인정하여야 한다.

원로와 후임의 갈등은 부임 전 초심을 버리는데 문제가 있다. 사회학 적으로 보면 한 회사를 만들어 아무런 대가 없이 물려주지 않았는가?  인간됨이 바로 되었다면 초심으로 돌아가 원로의 지도 간섭을 받으면 될것인데 무슨 불평과 원망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원로의 지도 간섭이 교회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장기적으로 보면 그것을 수용함이 훨신 빨리가고 자신의 목회에 더 도움이 된다.
귀 없는 자들은 듣지 못 할 것이다. 배은 망덕한 초심을 버린 석두 목사가 되지말라. 행한대로 받으리라.

사단의 아젠다(Satanic Agenda)를 확산시키는 3인방! 

적그리스도 왕국의 도래를 앞두고

그동안 어떤 사단의 아젠다들이

누구에 의해 풀려 나왔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그들은 미디어를 제어하고

기독교 국가들이 타락하게 만드는 아젠다를 수행하여 왔다.


악의 문화를 포용하고 장려하는 정책들을 추진하면서

성경대로 사는 신실한 신자들을 미끄러지게 만든다.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 (엡 2:2)



1. 오바마




우선 사단의 아젠다의 확산에 가장 기여한 장본인은

적그리스도의 후보로 의심받고 있는 미국 대통령 오바마다.


그는 전통적인 기독교 국가를 이슬람화시키고

기독교 전통을 몰아내기 위해

8년동안 체계적으로 사단의 아젠다를 수행하여 왔다.


- 동성결혼을 합법화시켜 도덕성과 가족의 개념을 훼손하고

  미국 전역에 이런 규범이 확산되도록 했다.

- 성경을 폄하하고 신성모독하는 발언을 서슴치 않았다.

- 이스라엘 영토를 분리하려는 반 이스라엘 정책을 추진해 왔다.

- 시리아 반군을 지원해왔는데 이들은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으로

  아사드 정권에서 보호받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증오한다.



2. UN


반기문 총장이 수장으로 있는 유엔은

가장 유명무실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유엔은 공공의 적인 IS조차 몰아내지 못해

가장 무능하다는 평을 받을만 하다.


반총장은 한국에 있을 때만 해도

동성애나 반이스라엘에 대한 평이 없었으나

유엔 총장으로 재직하면서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사단의 아젠다에 물이 들었다.


- 이스라엘을 나누려는 결의안을 여러번 추진했다.

- 성소수자 보호를 위한 법안 통과를 여러번 언급했다.

- 시리아 해결 무능력, IS 확산 방치로

  1000만명이 넘는 난민이 발생했다.



3. 교황


- 2015년 미국과 유엔을 방문하여

이슬람의 이민을 중지하려는 트럼프의 정책을 비난했다.


- 트위터 팔로워가 3000만명이 되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유럽에 지도가가 없다'며 반이민, 반이슬람, 반세계화를 비난했다.


- 교황청은 작년 10월 '우리시대' 반포 50주년을 맞아

타종교에도 구원의 빛이 있다고 천명했다.


- 어떤 상황에서도 이슬람 난민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난민을 수용한 유럽이 이슬람화되고 있다.


- 성소수자에게 교회는 사과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말했다.



오바마가 러시아 해킹 혐의로 CIA에 대선 재조사 명령 


이들 3인방에 의한 영향력으로

세계는 사단의 아젠다가 풀어져 나갔다.


사단의 아젠다는 좀더 포용있게 받아 들여졌고

세계는 그 만큼 타락한 악의 문화를 수용했다.


최근 트럼프의 당선으로 그가 추진해 온 일련의 정책들

(오바마 케어, 친이슬람, 반기독교 정책, 난민수용)이

폐기될 조짐에 이르자 국토안보부와 CIA 국장은

대선에 개입한 러시아의 해킹을 비난해 왔고

오바마는 선거결과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에

완전한 조사를 명령했다고 어제 CNN이 메인으로 보도했다.

http://edition.cnn.com/2016/12/10/politics/donald-trump-response-russian-hacking/index.html

http://endtimeheadlines.org/2016/12/barack-obama-orders-full-review-into-claims-election-was-hacked-by-russia/



만약 오바마가 적그리스도라면

이런 상황에서 사단과 결탁하여 사단의 영을 받아들일 것이고

그 댓가로 제3의 임기를 시작할 지 모른다.


사단의 아젠다들이 풀려 나가는 상황에

교회가 대적의 영적 의도를 파악하며

경각심을 갖기는 커녕 이들 악의 문화에

동조하고 따라가느라 교회의 타락이 가속되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의 아젠다도 추진되어 왔다.

이방인 시대를 마감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유대인들이 고토로 돌아갔다.


신부들이 거처할 예루살렘성을 마련하고

신부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무형교회 파수꾼들에게

메시지를 주어 경고의 나팔을 불게 하였다.


세상에 무릎꿇지 않은 신부들을 은밀히 숨기시고

정결하게 보존하시어 주의 날에 주의 백성으로 부르신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대적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 결말에 대해서 알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지 않고

하나님의 통제하시는 아젠다에 따라

순종하며 따라갈 것이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사단과 그의 세력이

한정된 공중권세마저 빼앗기고 분내어 땅으로 내려갔다.


천국 => 공중 => 땅 => 무저갱 => 불못 


대환란과 적그리스도의 왕국,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출처: 카이로스 /
ars (acoloje)

 

 



    외롭고 힘들 때 드리는 기도

    최송연


    주님,

    우리가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나쁜 사람이라 오해받았을 때…

    우리는 무척 외롭고 힘이 듭니다.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며

    진실한 친구라 믿었던 그 사람이

    우리를 배신하고 떠났을 때…

    우리는 무척 외롭고 힘이 듭니다.

     

    우리가 낳았기에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우리의 자식들이 우리의 품을 떠나 

    먼 곳으로 가야만 할 때…

    우리는 무척 외롭고 힘이 듭니다.

     

    우리를 낳아주시고

    사랑으로 길러주신 부모님을

    죽음이 갈라놓았을 때…

    우리는 무척 외롭고 힘이 듭니다.

     

    주님,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로

    외롭고 힘이 들 때는

    낙심하지 않고

    다시 한 번 힘차게 일어설 수 있는

    굳센 용기를 주옵시고…

     

    우리를 배신하며 떠난

    야속한 이들로 인하여

    외롭고 힘이 들 때는

    우리가 당신을 배신하였을 때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셔서

    손 내밀어 주시던

    당신의 그 따뜻하신 사랑이

    기억나게 하옵시며…

     

    이유 없이 우리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외롭고 힘이 들 때는

    우리가 당신을 이유 없이

    아프게 하였을 때도

    나무라지 않으시고

    늘 감싸주시며 품어주시던

    당신의 그 넓고 따뜻하신 가슴이

    기억나게 하시사...

     

    우리도 우리에게 아픔을 준

    모든 사람을

    다시 한 번 감싸며 품어줄 수 있는

    그런...

    넓고 따뜻한 가슴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놀라운 은총 (Amazing Grace)
      백파이프 연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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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생달 

2010-12-03 04:02
 180.xxx.246
 누지문서님께
 누지문서님의 글과 신앙인격을 아주 많이 좋아하는사람입니다.
신임 관리자님이 되신 것을 진작에 축하 드려야하는데 많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축하 인사를 드리니 받아주십시요,
신임 관리자님으로 수고하게 되심을 감사드리고 진심으로 초생달은 축하를
 드리니 받아주십시요,

질문에 관해서는 이미 지나간 일이라 두번 말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누지문서님께서도 아-멘넷에서 오랫동안 신앙글을 쓰신 분이니
 이름만 대면누군지 금방 아실 것입니다,
제가 다시 거론하는 것은시끄럽게 될 것 같아서 참겠습니다,
감사하게도 그런 좋지않은 댓글을 보신 이전 관리자님이 그 정신질환자 같은
 사람의 글을 허락하지 않았고 비공개로 전환을 시켜주셔서 초생달은 많이
 감사하였습니다,
서울에서 초생달이 아-멘넷에 들어오는 것은 오-직 좋은글,은혜스러운 글 그리고 뉴-욕에 계시는 우리 교포교회의 소식도 접하고 하는 것이 즐겁기 때문입니다. 지난 며칠간도 이토록 은혜스런 별똥별님의 신앙시 아래 어지럽히는 댓글이
 달려서 보기가 안좋았는데 오늘 다시 들어와 보니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서
 많이 좋습니다.
초생달이 아-멘넷에 바라는것이있다면 누지문서님이나 별똥별님처럼
 신앙글 은혜의글을쓰시는분들이 좀 더 많았으면 좋겠고 이런 좋은 작가님들은
 보호를받아야하고 글을 올리시는데 아무런 방해가 없도록 잘 도와주셨으면
 하는것입니다. 그리고 이유도 아닌 것을 트집잡아 공격을 일삼는 나쁜 댓글자들은 아-멧넷에서 발도 못붙이게해 주십시요. 
이것이 초생달의 바람입니다,

 
 누지문서   초생달님의 격려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지적하신 사람은 누구인지 저도 짐작을 합니다.
다만 확인하려고 질문을 드렸습니다.
서울에서 오시느라 수고가 많습니다.^=^
그래도 자주 뵙기를 원합니다. 12/3 08:09
 71.xxx.173
 
      
 
 
 

이름아이콘 은하수 

2010-12-02 22:02
 74.xxx.171
 이 은하수도 같은 간구하길 소망합니다.
늘 아름다운 글 주시는 님께 감사드립니다.
 
 별똥별   별들의 고향 은하수님...
함께 생각하며 함께 기도하다가
그 나라로 돌아가야죠...ㅎㅎㅎ
항상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세요. ^^ 12/3 10:53
 67.xxx.138
 
      
 
 
 

이름아이콘 누지문서 

2010-12-02 08:25
 71.xxx.134
 [ Re]  초생달님

" [아-멘넷]사랑방에는 입에 담기조차 싫은 이상하고도 정신질환에 몸부림치듯
[별똥별]님을 비난하기 위해 순서없는 글로서
 아멘넷 게시판을 어지럽게 휘젓던 이 가 있었습니다 "  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누군지 , 어떤 비난 받을만한 일을 했는지 심히 궁금합니다.
조금 더 설명해 주실수 있는지요 ?
기다리겠습니다.  
      
 
 
 

이름아이콘 초생달 

2010-12-01 23:15
 180.xxx.246
 이 영호님 처음으로 초생달이 인사 드립니다,
님의 옳으신 말씀에 동의를 표 하고싶습니다, 얼마 전에도 신선한
[아-멘넷]사랑방에는 입에 담기조차 싫은 이상하고도 정신질환에 몸부림치듯
[별똥별]님을 비난하기 위해 순서없는 글로서
 아멘넷 게시판을 어지럽게 휘젓던 이 가 있었습니다.

언제인가 그 사람이 사라진 후에는 따끈한 이 사랑방이 다시 즐겁고도
 하나님의 은혜속에서 감사하게 지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별똥별님을 물어 뜯을 듯 ,,,하나님이 무섭지않는 것 같습니다,

초생달로서는 개인적으로 서글픈 정도가 아니요, 슬픕니다.
이러니 기독교인들이 때때로 비난을받군요,

이 영호님,
초생달은 하고싶은 말이 아직도 가득차 있습니다마는
 이성을 찾겠습니다,
이 곳은[서울]12월이라는 년말에 시끌시끌한 정국이나마
 주님에게 기도로서 우리 조국을 굽어살펴 주시기를 기도드릴 뿐입니다.
이영호 님의 가정에도 평화와 행복을 주님께서 내리시도록 기도 드립니다.

김 철민님
 초생달 인사를드립니다,
저는 [초생달]언제부터인가
[별똥별]님의 깊은 산속 옹달샘 맑은 물과도같이 순수하고도 은혜 속에 뭉친
 귀하신 복음 속에 빠져  [아-멘넷] 사랑방을 몰래몰래 얼굴을 내밀면서
 공부를 하겠끔 해주시는 [별똥별]님에게 반하여서 염치없이 드나들고
 있습니다. 별똥별님은 아멘넷의 보배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김 철민님의 말씀에 감사를 표하고저 인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은혜가 님의 가정에 내리시길 기워합니다.

 
 별똥별   늘 기도해 주시고
늘 찾아주시고
늘 격려주시는 초생달님...
초생달님은 주님께서 제게 파송하신
아름다운 천사일까요....
오늘도 피곤한 별똥별에게 힘과 용기를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려요. 한국은 많이 춥다는데...
건강 조심하십시오. ^^ 12/3 10:55
 67.xxx.138
 
      
 
 
 

이름아이콘 이영호 

2010-12-01 16:13
 69.xxx.11
 《Re》읽어주세요 님

 이보십시오, 읽어주세요님!
훈수를 두려면, 앞뒤 분별이나 제대로 알고 하십시오.
이곳은 님의 분풀이나 하는 곳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작가의 글이 뜻하는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무차별 공격성 댓글을 단 것부터가 성도의 자세가 아닙니다.
곁에서 보기에도 너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어
 저도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작가이신 별똥별님께서
 차분하게 잘 대응을 하시기에 참았습니다.
이제 그만 하십시오.
행동하는 신학은 억지성 공격성 발언에 한 마디
 해명조차 하지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뭘 모르면 가만히나 있으면 게시판이 조용하겠습니다.
관리자님께 부탁이니
 제발 이런 공격성 댓글을 삭제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아멘넷 독자들의 수준을 모두 떨어트릴 뿐입니다
 
 별똥별   저의 부족함이 많은 때문입니다.
너무 나무라지 말아주십시오. ^^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상한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 12/3 10:57
 67.xxx.138
 
      
 
 
 

이름아이콘 김철민 

2010-11-30 17:26
 66.xxx.118
 갑자기 댓글 이용에 관한 문제가 떠올랐군요. 저도 언젠가 이런 부분에 대해서 한번 쯤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먼저 한 사람이 같은 컴퓨터를 이용하여 다른 이름으로 글을 올리는 것에 대해서 저 생각을 말씀드려보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리 탓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조금만 신경쓰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 다 드러나는데,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악한 의도로 그런 방법을 이용하는 사람은 절대로 아닙니다. 저는 지금까지 그런 분들을 종종 발견했습니다. 사실 드러나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한 컴퓨터에 다른 이름으로 글을 올리는 분의 의도는 읽는 사람들에게 고정관념, 즉 이글을 쓰는 누구는 늘 이런 노선이고 이런 스타일이다 ... 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열린 마음으로 읽게하려는 의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디가지 욕설을 한다거나, 저질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진지하고 예의바른 의견개진을 지속하는 경우에 한하여 그런 좋은 의도를 가지고 새롭게 시도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특정인에게 모욕감을 주거나, 특히 자신과 다른 의견을 글로 전개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기 위해 다른 새로운 이름으로 저질적인 댓글을 남기는 경우는 다릅니다. 그런 경우는 비양심적이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추한 일입니다. 얼마전에 "솔00"이라는 필명으로 저질적이고 악한 댓글을 남기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떤 분이 그 분과 "뉴장 C...."라는 분이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밝혀내시더군요. 이런 이미 여러차례 글쓴이를 욕하고 저주하여 상처를 보냈음에도 성이 차지 않아서, 새로운 사람으로 가장하여 더한 모욕과 상처를 입히려는 악한 의도이니 전혀 다른 악한 짓입니다. 

그러나 건설적인 의견을 개진하기 위해 선입견 없이 읽도록 다른 이름을 쓰는 경우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별똥별님이 다른 이름으로 좋은 글들을 남기시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체 해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그런 마음입니다.

누구의 편을 들러드리고 싶은 마음은 아닙니다. <읽어주세요>님께서도 마음이 많이 상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이 한 이름으로만 활동하는 것이 좋다는 것에 한 표를 드리고 싶습니다. 다만 동일인이 누군가 조금 시간을 들여 추적하면 동일인이라는 것이 다 알려지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이름으로 진리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더욱 진지하게 개진하는 행동을 추하고 비양심적인 일이라고 매도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글이라 할지라도 "   "라는 표시를 하고, 또한 누구의 어디에 있는 글이라 하면서 사용하는 것도 나쁜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박사학위 논문에서도 다른 사람의 글을 이용하고 그 출처를 밝히면 되지 않습니까?  모두 좋은 하루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별똥별   예, 제대로 잘 이해를 하고 계신
김철민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려요. ^^
사실이 그렇거든요, 저는 제 본명과도 같은 별똥별을 웬만하면, 잘 사용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 이유로는 이미 몇 번이고 말씀을 드렸기에, 재차 설명하지 않겠습니다만, 한 번 더 말씀을 드리면, 저는 여러분과 마찬가지, 이 아멘넷을 지극히 사랑하는 독자의 한 사람입니다. 칼럼글을 쓰는 고정 칼럼니스트로 섬기기 그 이전서부터, 이곳 댓글객들과 힘을 합쳐 수많은 영적전쟁을 치룬 실전용사(?)이기도 합니다. 제가 다른 아이디를 사용하는 것은, 단 한 가지 목적, 상대방 논객들에게, 별똥별이 이곳 고정 칼럼니스트로서란 고정관념 때문에 활발하게 자신의 견해를 내려놓는데 부담을 드리고 싶지가 않고 누구던 자유롭게 자신의 견해를 내려놓고,  11/30 17:51
 67.xxx.138
 
 별똥별   어떤 선입견 없이 활발한 목소리를 내고, 선의의 토론을 개진하기를 바라는...오직 그 마음 하나 뿐입니다. ^^ 여러분들이 이런 제 마음을 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만, 혹여, 몰라준다고 하여도, 저는 괜찮습니다. 주님께서는 저의 순전한 마음을 아시고 계실테니까요...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 11/30 17:53
 67.xxx.138
 
      
 
 
 

이름아이콘 진설병 

2010-11-30 16:30
 173.xxx.221
 우리 별님, 오랫 만입니다.
나들이를 좀 하느라고요, 별님의 글을 많이 못 읽었읍니다.
오늘은 진정 귀한 기도 감사 합니다.
그 기도가 막상 제 기도 인것 같애서 말입니다.
기도가 어려운건 가시길이기 때문인것 같군요.
힘 내시기 바랍니다.
저도 되는대로 글 올려 볼가 합니다.
너무 귀한글, 은혜로 받고 아멘입니다.
 
 별똥별   아, 진설병 어르신 돌아오셨군요...
건강하신 것 같아 무엇보다 감사하고 반갑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너무 오랫동안 보이지 않으셔서
행여 건강에 문제라도 있으신가 ...염려가 되었는데요...
여행을 다녀오신 것이군요....^^
앞으로 좋은 글 많이 기대해 보겠습니다!
 11/30 16:39
 67.xxx.138
 
      
 
 
 

이름아이콘 김오동 

2010-11-30 03:20
 218.xxx.252
 모세가 호렙산에서 자신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 줄 이름이 무어냐고 물었죠.
그때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갈릴리바다에서 풍랑으로 고난 당할 때
 물 위로 걸어오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니(I Am)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척 힘들고 외로울 때..."
 "먼저 찾아주시고 손 내미시는 주님" 계셔서
"굳센 용기"로 "다시 한번 힘차게" 일어섭니다.

이런 은총 주심으로 나를 살려 주심은
 이 은총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하라시는 뜻이랍니다.
그래서 "은총은 곧 과제(사명)"라고 했습니다.

오늘 별똥별님의 시가 더욱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아마도 우리들의 천성 향한 여정이
 야곱처럼이나 파란만장하기 때문이겠지요.

주께서 오늘  다시 새롭게 찾아오셔서
"나 여기 있다(I Am)."고 하시니
 과연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이시군요.
 
 별똥별   감사해요, 김오동 목사님...
오늘도 먼 길을 찾아와 주시고 함께 기도해 주셔서요...
(나를 살려 주심은
이 은총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하라시는 뜻이랍니다.
그래서 "은총은 곧 과제(사명)"라고 했습니다.) 아멘입니다!
"적색은총", "녹색은총", "은총은 곧 과제"
너무도 가슴에 와닿는 은혜로운 말씀이네요...
언제나 기억해도 좋을만한....명문구입니다!!
아침에는...
마음이 좀 그랬었는데요...
목사님의 은혜로운 댓글 말씀을 다시 되새김질 하면서...
힘을 얻게 되었고요, 제가 받은 사랑을 기억하라는
주님의 음성, "은총은 곧 과제"임을 잊지 말아라,
타이르시는 성령님의 음성으로 받게되니
마음이 얼마나 뜨거운지요~!
오늘도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해 주심에 감사! ^^
 11/30 16:50
 67.xxx.138
 
 김오동   중동지방의 속담에 "매일 태양만 내려쬐면 사막이 된다."고 하는 말이 있답니다. 때로 바람도 불어야 하고, 비도 내려야 땅이 기름지게 된답니다. 심지어 온통 세상을 삼킬것 같은 태풍도 생태계에는 유익이 있다더군요.
우리 주님은 파도를 밟고 우리에게 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 여기 있다(I Am.)."고....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그리고 "우리 만남"의 장에는 좋은 친구들이 많이 있답니다. 11/30 17:50
 218.xxx.116
 
 별똥별   (우리 주님은 파도를 밟고 우리에게 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 여기 있다(I Am.)."고....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그냥...
눈물이 흐르네요...
주께서 저를 아시고 계시는 것,
저 잘 알아요....
그러기에, 때마다 시간마다, 당신의 사자를 파송해 주신다는 것도요...
감사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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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롬 장키우스(Jerome Zancius 1516 - 1590)의 절대예정론 소고

 

1. 절대 예정 회심과 구원은 그 본질적인 면에서 볼 때,

세 가지 중 하나인데

1. 반드시 홀로 우리들 만에 의해서,

2. 혹은 우리들과 하나님이 함께 함을 통해서 아니면

3. 오로지 하나님 자신을 통해서만 시행되어야 하고 또 효력이 발생되어야 한다.

 

펠라기우스파는 처음 것에 찬성한다.

알미니우스파는 두 번째 것에 찬성한다.

참된 신자들은 마지막 것에 찬성한다.

 

예정을 부인하라. 숭배할만한 신격의 완전성들을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예정 없이는 유지될 수 없기 때문에 예정은 전파되어야 한다.

 

성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 파에 맞서 쟁론하는 것이다. 그들은 은혜가 모든 인간들에게 다 똑같이 제공된다고 가르쳤고 그렇게 제공된 은혜와 구원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권한에 달려 있다고 가르쳤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조건 없이 주시는 칭의의 교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조건 없이 예정하셨다는 점에서 지지를 얻을 수 있는데, 이는 후자가 전자에 대한 원인과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를 예정하사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다(엡1:5,6)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 혹은 구원을 받게 될 자들은 그들이 선한 일을 단 하나도 이루어 놓기 이전에 [이미] 제정된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의 결과로,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구원을 얻는다.

내적인 구원의 사역은 값없이 공로 없이 오직 은혜만 하나님은 지금도, 또한 전에도 항상, 지극히 완전하게 지혜로우시므로 그가 모르고 계시거나 하나님의 아심을 피하여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하나님의 영원부터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 아신바 되었다. 하나님은 그 어느 것도 당신께서 영원부터 알고 계시지 않았거나 예지하지 않으셨던 것에 대해서는 지금도 알고 계시지 않으며 앞으로도 알지 않으실 것이다.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게 된다.”(히4:13)

그가 미래에 될 일도 예지하고 계신 것은 무슨 일이건 반드시, 또한 의심할 바 없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작정과 정하심을 성취하는 것이기는 해도 강압적으로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흔쾌히 행하는 것이다. 후자는 전자의 결과로서 비롯되며 또한 전자를 기초로 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허락 없이는 인간도 악마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허락하신다는 것은 적어도 막지는 않으신다는 것과 같으며 ‘막지 않으심’은 확실히 하나님의 의지의 행위인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이 그처럼 타락할 것으로 뜻하셨기 때문에 아담에게 죄에 빠지는 것을 허락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의지는 감추인 것과 드러난 것으로 정당하게 구별된다. 왕이 이스라엘을 가도록 해서는 안 되었던 것,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여서는 안 되었던 것(창 22:12), 그리고 베드로가 자기 주님을 부인해서는 안 되었던 것 (마26:34)등은 바로 하나님의 감추인 의지였던 것이다. 인간의 구원과 정죄에 관한 하나님의 의지는 결코 스스로 모순되지 않으며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에 대한 구원과, 그와 반대로 택하시지 않은 자들에 대한 정죄에 대해 변치 않는 작정을 하신다)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사46:10)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시33:11).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욥23:13, 14)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흡니와 비느하스가 자신들의 사악함을 꾸짖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은 것은 여호와께서 저들을 죽이기로 뜻하셨기 때문이며(삼상 2:25), 헤스본 왕 시혼이 모세가 사자를 보내 평화의 말로 이른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시려고 그의 성품을 완강케 하셨고 그의 마음을 걍팍케 하셨기 때문이다(신 2:26, 30).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의 눈은 감기시고, 또 어떤 이들의 마음은 걍팍하게 하시는 일들이 전에도 있어왔고 앞으로도 있게 될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눈멀고 마음이 완고해지기를 허락하시며 그들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와 고침을 받지 못하도록 고의로 막으시는 것이다(사 6:9, 요12:39, 40)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피조물들을 업신여기시지 않으며, 또 그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작정하시는 의지를 준행하지 않고 소홀히 한 것에 대해 변명할 수도 없다. 그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은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 주입해 넣으신 그 어떤 악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본성이 갖는 악과 그들 자신의 의지가 갖는 사악함으로 인한 부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시려고 자신에게로 초청하지는 않으신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은혜로운 감화를 주셔서 흔쾌히 하나님께 나오도록 해주시는 모든 개인은 조만간 하나님에 의해서 반드시 구원을 받으며, 그 구원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작정하시는 의지를 무시한 것에 대해 변명할 수 없다. 하나님의 나타내신 바 된 의지를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했고, 숨은 의지는 단호하고 절대적이며, 결과를 내는 데에 있어 어떤 방해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의 의지란 하나님 자신의 뜻하심을 말하며, 결과적으로 그 의지는 전능하여 좌절될 수 없다. 절대 주권적 의지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것은 무엇이건 결과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나타내신 의지에 반하여 많은 일들을 행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극히 위대하며 그의 진리는 불가침이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자신이 예지하신 경로를 따라 이끌어 가신다. ”피조물의 어떠한 자유 의지도 하나님의 의지를 저항할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결정에 대해 이를 막으려는 뜻을 품을 수도 그 결정을 헛되게 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힘을 이길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지는 만사에 있어 첫째이며 최고의 원인이다.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단 4:35) (시135:6) (마10:29)

“유효하게 하심이 되든, 혹은 허락하심이 되든 간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시기로 작정하심이 아니고는 어떤 일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루터, 반드시 견제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의지가 아니고는 아무것도 존재하거나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일이다.

하나님이 전능하지 않거나 하나님 없이도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면 그는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11:25) (눅12:32)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막3:3)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1:8)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3) 롬(9:15, 18)

각 사람이 모두 다 구원받도록 작정하지 않으셨고, 지금도 그렇게 작정하시지 않는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만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단 한 영혼도 결단코 잃어버린바 될 수 없었을 것이며(누가 그의 뜻을 거스릴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전 인류 가운데서 몇을 다시 말해서 모든 나라와 혈족과 언어들 가운데서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은혜로 택하신 자들 전부를 다 구원하신다. 하나님은 버림받은 사람들의 구원을 작정하지 않으신다. 그들을 택하시지 않은 이상, 그들이 결국에는 구원을 받도록 창조하지도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가 개인마다 다 구원 얻도록 의도하지 않으시며 아버지 하나님의 지정하심을 따라 그리스도께서는 계획적으로 피를 흘리신 것이며 그 보혈은 오직 선택하신 자들을 위해서만 유효하며 즉각적 관련이 있다는 결과가 된다. 그가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자들을 위해 죽으시도록 그의 아들을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바 된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얻는다. 오직 택하신 자들만 구원을 받는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그들만을 위해 죽으셨고 중보하심이 된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은 제외시키고 그들을 택하셨다)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즉, 다른 이들은 제외시키고 그들을 위해 죽으셨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셨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바 된 저들은 (의롭다 하심과 구속하심의 정도가 꼭 같다) 정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특권들은 택함을 입은 자들에게로만 분명히 제한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들만 의롭다 하시고, 그리스도께서는 그들만을 위해 죽으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자주적이며 자의적인 허락을 죄에 대해 내리신다고 해서, 어떤 사람에게도 결코 그 죄를 짓도록 강요하시거나 강제적 필연성을 부과하지는 않으신다. 절대로 하나님을 도덕적 죄의 창조자라고 칭할 수 없다.

죄에 대해 의도하셨다고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성적인 거룩함과 청렴함을 손상시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우리가 외적으로 행하는 일 뿐 아니라 심어지는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일들까지 모든 만사가 결국은 하나님의 예정에 따르는 것임이 판명된다. 같은 곳에서 덧붙여 말하기를 “우연이나 운명 따위는 아무 데도 없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을 알게 되고 하나님께 우리의 전적인 신뢰를 드리기 위해서는 예정론의 교리에 철저히 정통하는 것보다 더 손쉬운 방법은 없다. 시편 135:6, 마태복음 10:29, 잠언 16:1, 마태복음 26:54, 누가복음 22:22, 사도행전 4:28, 에베소서 1:11, 이사야 46:10

영원 전부터 작정하신 것이 아니고는 지금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으신다. 우리 대신 도덕법에 순종하시고 그 법의 저주와 형벌에 대해 복종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보증과 대신이 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는 우리 모두는 결단코 하나님의 미움을 초래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죄에 대해 처벌당하지도 않을 것이고, 오직 우리가 영원 전부터 그러했듯이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됨은 영원토록 계속되는 것이다.

절대적 의지는 불변하고도 전능하므로 우리는 택하심을 입은 각 사람의 구원이 절대로 변함없이 확실하며, 그 의지는 좌절 될 수도 무효화 될 수도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의도하신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의심할 바 없이 꼭 보증할 것이라는 데서 귀결된 것이다.

하나님 자신은 본질적으로 불변하신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명백히 불완전한 분이실 것이다. 이는 누구든지 변한다는 것은 더 낫거나 혹은 못하게 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더 좋게 변하실 수 없다. 만일 변하실수 있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전에는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좋지는 못하셨다는 것을 암시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더 못하게 변하실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불변하시다. 그리고 성경에서 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이것이다.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말3:6)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년대는 무궁하리이다(시102:27)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23:1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삼상 15:29)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욥23:13) ”

나 여호와가 말하였은즉 그 일이 이룰지라. 내가 돌이키지도 아니하며 아끼지도 아니하며 뉘우치지도 아니하고 행하리니“(겔24:14)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11:29)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민23:19, 삼상 15:29, 욥23:13, 겔24:14, 롬11:29, 딤후 2:13)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서게 하려 하사(롬 9:11) ?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사랑’이 하나님께 대한 서술어로 쓰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열정 혹은 애정으로서의 사랑을 소유하셨다고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에게서는 그런 뜻으로 쓰이겠지만, 만일 하나님께 대해 그런 의미로 생각되어 쓰인다면 하나님의 존재가 갖는 순전함과 완전함과 독립성을 완전히 파괴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하나님께 대한 속성으로 사용될 때, 그 의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자비, 즉 자기 백성을 해방하시고 복 주시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영속적인 의지, 목적, 결심을 뜻한다. 그들이 행한 어떠한 선한 업적도 이에 대해 ‘원인’이 되지 않는다. 그 용어는 하나님께 ‘만족, 즐거움, 허가를 의미한다.

이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자신의 택하신 자들조차도 그들 자체로서 고려해 볼 때에는 그들이 죄를 범하였으며 더러워진 죄인들이라는 점에서 그들을 사랑하실 수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께 연합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의에 함께 참예한 자들이 되었으므로 아주 영원 전부터 그 사랑의 대상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워한다는 말이 하나님의 속성과 관계되어 나타날 때는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지도 않을 것이며 영생에 관계되어 있는 저 은혜들을 조금도 입게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뜻한다.

그래서 내가 에서는 미워하였다. 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아주 영원 전부터 그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기로 하나님 자신 속에서 참으로 작정하였다고 하신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불쾌하게 여기시며 싫어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죄를 처벌하시고 멸망시키겠다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의지를 나타낸다. 내세에서 그들에게 임하는 비참한 고통은 다만 필연적인 결과이며 실제적인 집행일뿐인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을 일부를 선택하시는 바, 영원하고 주권적이며 무조건적이고 각별하며 불변하는 하나님의 행위를 나타낸다. 그것은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택하신 자들을 효과적으로 부르시어 세상으로부터 실제적이고 가시적으로 분리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요 15:19- 그 선택에 의해, 하나님께서는 강력하고도 효능있게 제자들을 회개치 않는 세상으로부터 나오도록 부르셨고 또 회심하도록 위에서부터 그들을 촉구하셨다.

외적인 부르심을 입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반드시 다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 가운데 다수가 버림을 받을 수도 있고 또 버림을 받는다.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란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등등의 말씀으로 설명하시는 것과 같다(마13:20) 13:11.40,41;24:30,31(택하신 자들)

그리고 사도는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라고 하신다. 그 이유?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요일2:19)

선택에는 가시적인 교회 안에서나 혹은 국가생활 속에서 어느 특별한 지위나 임기를 채우도록 한시적으로 지명하시는 것도 있다

유다가 사도로 선택받았으며 (요6:70)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도록 택하심을 입은 것이다.(삼상 10:24)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은 영광에로 선택해 주셨으면서 어떤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영원히 누락시키시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정하신바 저들로 불법함의 분량을 채우게 하시고 그 후에 그들의 범죄함에 대하여 공의로운 형벌을 받게 하시는 것.

예지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할 때

(1)하나님께서 아주 영원 전부터 자신께서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지, 또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이 두 가지 모두를 알고 계신바, 모든 행위들에 대하여 그것이 선하건 악하건, 혹은 자연적이건, 상관없이 모든 것들에게로 확장된다. 대상이 되는 하나님 자신의 택하신 자들을 위한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의미에서 오직 그들만을 아시며 또한 미리 아신다고 한다. ‘미리 제정하다’ ‘미리 결정하다 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창조된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예정하심의 대상이 된다. 이성적 존재이든 비이성적 존재이든,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간에 그 예정의 영향으로부터 면제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존재들은 어떤 것이든지, 가장 높은 천사들로부터 가장 하찮은 파충류에 이르기까지 가장 하찮은 파충류에서부터 가장 작은 원자에 이르기 까지 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과 특별하신 섭리의 대상들인 것이다. 교부들은 이 예정이라는 단어를 천사들이나 인간들에 대해 (선하거나 악하거나 간에)언급할 때에만 사용하고 있으며 자기 백성들을 영생으로 선택하심과 지명하심에 관련되는 한 부문을 의미하고 있다.

예정을 택하신 자들에게만 관련되는 것으로 그러면 예정의 정의는 영원하고 무조건적이며 특별하고도 파기할 수 없는 신적인 의지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 (마24:2,312) (행 13:48) (롬 8:30) (엡 1:4,5) (딤후1:9) (엡1:5,6)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면(롬11:5,6)

유기에 대해서(1)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사망으로 예정하심이 있다.(고후4:3) 정하신 것이라(벧전2:8)-1:2,9 (벧후2:12)-1:10;3:9

(택함 받은 모든 자)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유4)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계17:8) (마25:46)

누구든지 하나님의 이 의지와 작정과 예지를 부인하는 자는 암시적으로 또 실질적으로 하나님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영원 전부터 작정으로 정하셨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작정으로 정하심이 없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미리 계획하심이 없이 무엇인가를 행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명백한 비방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작정의 결과로 타락했다는 것을 우리는 이렇게 증명한다

(세 가지 중 하나인데)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타락을 원하셨거나 혹은 원하지 않으셨거나 혹은 그것에 대해 무관심하셨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이 범죄함을 내키지 않게 여기셨다면 어떻게 아담이 타락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겠는가? 피조물인 자신들을 만드신 하나님보다 인간이 더 강하거나 사탄이 더 지혜롭다는 말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다시 말하건대, 하나님께서는 이 일이 하나님께 매우 기뻐하시는 바였더라면, 저 유혹하는 자가 낙원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으셨을 수도 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천사들로 하여금 변함없이 오직 선만을 결정하며 악으로는 치우칠 수 없는 의지를 갖도록 창조하셨듯이 인간도 그렇게 창조하셨을 수도 혹은 최소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은혜와 힘이 죄의 모든 유혹에 대해 저항하기에 실질적으로 효능이 있도록 하셨을 수가 있지 않을까?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된 것이 아니며, 혹은 참새도 “너희 천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처럼 가장 하찮고 시시한 것들도 하나님의 작정이 있는데, 세상의 피조물 가운데 가장 우수한 걸작인 사람은 그 얼마나 더 하겠으며, 누구보다도 그 사람 아담은 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그가 창조주의 손으로 지음 받은 그 당시에, 그는 하나님 자신의 살아있는 형상이었던 자가 아니며, 천사들보다는 아주 조금 열등할 뿐인 자가 아니었던가! 또 그 자신의 복지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복지 역시 그의 견인에 달려 있었던 것이 아닌가? 유기

(2) 보편적으로 모든 인간이 다 구원으로 택하심을 입지는 않았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인류의 각 개인 모두를 다 구원하시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단 12:2, 마25:46, 요5:29) “멸하기로 준비된”것이며 “악한 날에 적당하게”하신 것이라는 점 더러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 있다(마 20:16)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진”(롬 11:7) 그 적은 무리(눅 12:32)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다른 이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너희에게는 허락되었다”(마13:11)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롬 11:5) 하나님이(우리를)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우리)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살 전 5:9)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려(벧 전 2:9) 하신 자들이며, 히12:23자들이다. “생명책에 있으며(빌4:3) 하늘에 기록된(눅10:20) 히12:23) “저가 별의 수효를 계수하시고 저희를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능력으로 지으신 별들과 및 다른 생명 없는 피조물들을 하나님께서 모르신다는 하는 것만큼이나 전지하신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지식에 모순 되는 말이다.

선택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것이 된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보다 가깝고 특별한 의미에서 아신다(딤후 2:19)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출33:17,19-롬9:15,30-32;출32:22) 너를 알았고(렘1:5) (눅10:20;12:7) (요13:18) (요10:4,14,26,27) (딤후2:19) 선택과 유기의 작정은 변경할 수 없고 취소할 수 없다. 만일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1) 하나님의 작정은 불확실하고 좌절될 수 있고 불명확하며 결과적으로 전혀 작정이 못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예지는 동요하고 막연하며 자칫 실망시키기 쉬운 것이 될 것이다. (사46:9,10) (롬 11:29) (요13:2) (롬 9:22) (유4) (살전2:12)

영광에 이르게 하는 분이 누구인가? (살전1:4 롬8:30,31,33,38)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신 자(롬1:28) “어떤 사람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다른 사람들에게 대한 미움은 불변하며 바뀔 수 없다”

영생에로 제정하심을 입은 자들은 그들 속에 어떤 예견된 가치가 있어 그러한 제정을 입은 것도 아니며, 어떤 선한 공덕으로 인함도 아니고 믿음과 회개와 거룩함은 영생 그 자체 못지않게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다.

(믿음은 선택의 열매? 믿게 하기 위해서 선택함인가, 믿는 자를 선택함인가?) (빌1:29) (행 5:31) (행 11:18) (롬 9:11) (요15;16) (요일4:10, 19) (막 13:20, 롬9:17, 엡1:4, 살전5:9, 살후2:13)

우리가 거룩해지도록 하시려고 우리를 택하신 것이다.(엡 1:4)?

그 아들의 형상을 본 받게 하기 위해서,미리 정하셨다.(롬1:29)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택하신 자들은 아낌없이 거저 주시는 은혜로 사랑을 받았고(호14:4), 선택을 받고(롬 11:5,6), 믿음은 택하심으로 인해 맺는 열매들 가운데 하나라는 것,

어떤 경우에도 믿음은 선택의 조건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믿음을 갖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를 선택하신다는 말씀이 아니겠는가? 영생에로 제정하심을 입는 자들은 그 수가 얼마가 되든지 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통하여 또 오직 그의 공로로 말미암아서만 영생을 누리도록 제정된다(살전5:9)

택하심 그 자체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공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직 절대 주권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있는 것임을 주의하자. 또 그 생명을 누리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모든 수단들 즉, 회개와 믿음과 거룩하게 함과 끝까지 성도들 안에 함께하는 인내(견인)도 예정된 것이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엡1:4) (엡2:10) (살전 1:4, 5:9, 4:3)

지정하신 이것 역시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을 확신시키고 있다.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2:13) (벧전 1:2)

왜 택하셨는가? (거룩은 누구의 역사로 가능한가?)

원래 정죄함의 선고를 받는 것에서 면제된 자들은 의심할 바 없이 복음을 듣도록 이끄심을 받으며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안에서 끝까지 인내하도록 만들어 주심과 또 비록 어느 때든지 곁길로 갈지라도 다시 회복되게 하심과 바로잡아 주심을 받는 것이다.

택하심을 받는 자들은 단 한명도 멸망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에로 정하신 자들이 하나라도 빠짐없이 다 영원토록 영화롭게 되어야 한다고 순전하고도 불변하게 작정하신다.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 미리 예정하신 자들은 그들이 하나님 자신의 택하신 자들인 까닭에 그 가운데 아무도 멸망하지 않는다고 하면서”그들은 예정하심을 입고, 미리 아신바 되고 목적을 따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마찬가지로 루터도 “하나님의 예정하심의 작정은 확고하고 확실하며 그것으로부터 유래된 필연성 역시 한가지로 확고하게 반드시 생기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들이 너무 약하기 때문에 만일 그 일이 우리 손에 맡겨지게 된다면 구원을 받게 될 자는 겨우 몇 명뿐이거나 아니, 하나도 없게 될 것이며 오히려 사탄이 우리 모두를 이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제, 하나님의 이 확고부동하고 분명한 목적은 그 어떤 피조물에 의해서도 파기되거나 무효화될 수 없으므로, 지금은 죄가 아무리 격렬하게 우리의 죽을 몸에 대해 맹위를 떨친다 하더라도 우리는 결국에는 죄를 이기고 승리할 것이라는 아주 확실히 보장된 소망을 우리는 가질 수 있다”고 적고 있다.

“우리를 택하사 거룩하게 하시려고”(엡1:4) 따라서 선택된 자는 모두(오직 그들만) 거룩하게 하심을 입는다. 그리고 거룩하게 된 자들은 모두 자신들이 선택되었다는 것과 확실히 구원얻을 것을 믿을 권리가 있다.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너희가 내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요10:26) 믿음은 택하심의 증거, 혹은 그리스도의 양 무리의 수에 들어있다는 증거, 결과적으로 구원의 증거인 것이다. 이는 그의 양들은 모두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요 10:28)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자신들이 생명에로 예정된 것에 대해 지식이나 확신에 도달할 수가 있으며 또 그것을 추구함이 마땅하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쟁론할 수 있을 것이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나는 내가 영생에로 제정됨을 믿는다.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따라서 나는 내가 구원받은 상태에 있음을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예정하신 자들을 부르셨고, 의롭다 하셨고, 또 영화롭게 하셨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고 또 의롭다 하셨다고 신뢰하는 이유를 갖고 이다. 따라서 나는 확신을 가지고 나에 대한 영원한 예정에 대해 거슬러 올라가 생각할 수 있고 나에 대한 확실한 영화에 대해서도 내다볼 수 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믿는 자의 양심으로 더불어 그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는 그 직접적인 증거에 대해서 전적을 동의하는 일이 빈번하다(롬 8:16, 갈4:6, 요일5:10)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눅12:32)는 사실이 변경될 수 없음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도가 가진 믿음이었다(롬 8:38, 39) 성 바울 역시 믿음을 가진 데살로니가 성도들 속에서 은혜로운 열매들을 바라보면서, 그것으로 인해 그들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임을 알았으며(살전1:4,5) 또한 에베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선택받았음도 알았던 것이다(엡1:4,5) 이상, 우리는 감히, 또는 절대로, 살아있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비록 그가 현재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사악하다 할지라도, 그가 택하심을 얻지 못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어쨌든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비록 가장 악한 죄인일지라도 택하심의 은혜에 속할 수도 있고, 또 언젠가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하심을 입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이것이다.

버리심에 관한 교리로서의 예정론 다른 이들에 대해 거절하심이 틀림없이 있다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빼놓지 않고서는 선택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타락한 후손 중에서 얼마를 그들의 죄악 중에 남겨두시기로, 또 그리스도께 관계됨과 그의 은택으로부터 제외시키기로 영원 전부터 작정하셨다.

이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모든 세대에 걸쳐 인류의 대부분은, 심지어 은혜의 외부적인 수단조차도 결핍된 상태였으며, 또 그들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거나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 계시가 주어지는 호의도 입지 못했다. 가장 적은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여러 세대에 걸쳐 내려오면서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관해 특별한 발견을 하도록 허락하시기를 기뻐하셨던 단 하나의 민족이었으며 또 우리가 주님께서 친히 자신의 공적인 사역을 그 백성들에게로 한정하셨다는 것 주님의 부활하신 후가 되기 전까지는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에게 차별 없이 복음 전하는 것을 제자들에게 위탁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많은 나라들과 공동체들이 하나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을 듣는 유익을 결코 갖지 못했었고, 결과적으로 그 말씀으로 말미암는 믿음에 관해서는 외인들이었던 것이다.

빛을 받지 못한 나라들에서 사는 개인들이 더러는 은혜로 비밀하게 택하심을 받을 수도 있고 또 믿음의 성향이 그들 안에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 일반적으로 세상 나라들은 하나님 그 자체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방법,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된 방식,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즐거움에 도달하는 수단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께서 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더라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일반적인 구원의 수단을 허용하셨을 것이 아닌가?

오늘날에도 지구상에 있는 아주 많은 나라들에 대해서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에게는 은혜의 수단을 거절하시고 그들을 총체적 어둠과 불신앙 가운데 가두어 두실 수 있다고 할진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은혜 그 자체로부터 또 은혜와 관련되는 영생으로부터 제외시키는 것이 어째서 하나님의 지극히 영광스러운 완전함에 모순된다고 생각되어야 하는 것일까?

절대주권의 감독자가 되심을 보면서 말이다. 그 양자 모두가 매우 당연하게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실제로 어떤 사람들을 끝내 회개치 않음과 불신앙에 남겨두시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이것이 그렇게 하기로 정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은 창세전부터 버리셨다고 확실하게 추측하는 것이다.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마7:23) “영원 전부터 나는 결코 너희를 사랑하지도, 승인하지도 또 내 것으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절대로” 바꾸어 말하면 “나는 너희를 미워하였다”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에서)온 인류를 크게 두 계층으로 나누신다. 그 하나를‘세상’이라 부르시고, 다른 하나는 ‘세상에서 내게 주신 자’라고 하신다. 후자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하셨다고 하시면서 심지어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자신을 사랑하신 것 같이(요 17:23) 영원하게 사랑하셨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도 그렇게 사랑하시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들을 영원 전부터 사랑하신다면, 그것은 대조법의 모든 규칙에 입각해서 하나님께서 다른 이들에 대해서는 그만큼 일찍부터 미워하셨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로마서9장)라고 하신다. 저 두 쌍둥이 야곱과 에서의 예를 통해 사도는 어떤 사람들에 대한 영원한 택하심과 나머지 모든 사람들에 대한 영원한 거절을 암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작정하셨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이 실제로 되는 것과 유다가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것을 유효하도록 허락하신 것이었다.(행4:27,28 마26:23, 24) 우리가 주님께서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 하였느나.

그러나 너희 중에 하나는 마귀니라’고 말씀하심을 들을 때에 우리는 그것이 열한제자는 은혜로 택하심을 입었으나 유다는 심판으로 택하심을 입은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유다는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그의 피흘리심의 수단이 되는 자로 택하심과 세우심을 입었다. 택하시지 않은 자들을 최후까지 회개치 않음과 죄와 불신앙을 계속해가도록 예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옥의 사망에 이르도록 공의롭게 지정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건 오직 하나님 자신의 작정의 결과로서만 행하시며, 또 행하실 것이다.(시135:6, 사46:11, 엡1:9,11)

불의한 자들에 대한 정죄는 하나님의 작정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작정하셨다면 그것은 영원 전부터 작정하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작정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만일 형벌의 불이 영원전부터 작정되어 그들을 위해 준비되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그 불을 위해 준비된 것, 즉 그 불을 위해 고안된 것이다. 이것이 내가 증명하고자 시도하는 요점.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롬 9장) 그들은 버림받은 자들이며 그밖에 달리 어쩔 수가 없는 자들인 것이다. (잠 16:4, 벧전 2:8, 벧후 2:12, 유4, 계13:8 )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 미래에 행할 믿음과 선행이 저들을 택하심에 대한 근거가 되지 아니하였던 것처럼 버리심을 받는 자들에게 미래에 행할 죄가 저들을 버리심에 대한 근거는 아니다. 전자의 선택과 후자의 버림은 순전히, 또 전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의지와 기쁘심을 따라 정하심에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뻐하심대로 저들을 영적 어둠과 자연적 사망 가운데 남겨두시기로 결정하셨고 또 실제로 남겨두신다고 하더라도 그 상태로부터 저들을 구원해야 할 의무가 하나님께는 없다. 그들을 택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그들을 정죄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범죄하였기 때문에 정죄하신다 그들이 생명책에서 탈락, 혹은 비 선택됨이 하나님 편에서 불공정하신 것은 아니다. 버리신 자들에 대한 정죄는 필연적이며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지와 작정의 결과로 말미암지 않고는 어떤 일도 생겨나지 않는다. 비 선택자들은 그들로 하여금 정죄 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결정하심이 아니고서는 정죄받을 수 없으며,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정죄 받음을 작정하시고 결정하신다면 필연적이며 변하지 않은 것이다.

스스로를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이 되게 만들었으며, 하나님께서 그 죄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에게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주시기로 작정하지 않으셨으므로 그러한 고집 센 죄인들에 대한 형벌은 공정할 뿐 아니라 그만큼 필연적이기도 하다.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7장)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친히 선언하신 말씀이다. 타락한 죄인은 자신 스스로 은혜로운 성품을 산출할 수 없고 은혜로운 행위들을 발휘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출32:22;33:19) 어떤 성인도 그러한 품성들 없이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요2:25;3:3,5;마13:21)

결과적으로 버리신 자들은 타락하고 열매 없는 자들로서 반드시 찍혀 불에 던짐을 당해야 하는 것이다. 죄에서 구원을 얻지 못하는 자들은 반드시 멸망당함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버림받은 자들은 죄에서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버리신 자들로 하여금 죄에 빠지게 하여 결국은 그들의 의지에 반하여 비참해지도록 강요하신다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본성이 부패함의 결과로 인해 그들은 자발적으로 치우쳐 죄짓기 쉽게 되는 것이다.

택하신 자들의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궁극적 의도는 그들을 구원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 은혜와 사랑의 측량할 수 없는 부요함을 증거하고 알리시는 것이었으며, 비선택자들을 창조하심은 하나님의 공의, 권세, 절대적 주권, 거룩함과 진리를 나타내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장)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멸하기로 준비하신 진노의 그릇, 오래 참으심과 관용하심을 나타내신다. 택하신 자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예비하셨는데 ‘그 영광의 부요함’을 드러내시기 위한 것이다. 거부된 자들, 남겨진 자들이라 부르고 있다.

버리신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부당하신 것은 아니며 또 부당하실 수도 없다. 그것은 ‘여호와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행사에 은혜로우시기 때문. 하나님 편에서 부당한 일이 아니라면,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그렇게 결정하시는 것이 하나님 편에서 부당한 것이 될 수는 없다. 영원 전부터 그것을 결정하시고 작정하신다고해서 하나님 편에서 부당한 것일 수 없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토기장이가 한 덩어리의 진흙을 가지고 더러는 귀히 쓸 그릇으로, 또 다른 것들은 천하게 쓸 그릇으로 만드는 것만큼이나 부당하지 않은 것이다. 모든 피조물에 대해서 절대적인 주가 디시므로 하나님 자신의 것을 가지고 그의 뜻대로 처분하심에 대해 부당하다고 비난받을 수 없다. 버리심의 작정이 폭군적인 것도 아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육체와 영혼에 대해 절대불문의 무한권리를 가지신다. 어떤 사람들은 은혜로 구원하시고 다른 사람들은 공의로 처벌하심을 통해 그 권리를 명하시고 나타내신다면 우리가 누구관대 감히 하나님께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버린 자들에게 대한 작정 안에는 하나님의 그 속성들이 갖는 완전함과 충돌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타락한 인류 가운데 일부를 내버려두시며 그들의 죄로 인해 그들을 처벌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더더욱 그 속성과 충돌될 수 없다.

또 구원하시는 은혜를 어떤 사람들로부터는 박탈하신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에 불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은혜를 주실 의무를 지시지 않는다는 것을 볼 때 더욱 그러하다.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할 의무가 없으신 것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다 택하시지 않은 것은 불공정하시다고 비난하듯이, 같은 이유를 들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능력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을 천사로 만들지 않으신 것에 대해 불공평하다고 버릇없이 비난할지도 모른다.

더욱이 비선택자들의 죄가, 택하심을 입은 자들의 죄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속함을 입었듯이 그렇게 속함을 받지 않았는데, 바로 그 죄 때문에 비 선택자들을 정죄하시는 또 정죄하기로 결정하시는 것이 어찌 하나님의 정의를 파괴하는 일이 될 수 있겠는가?

주권적으로 선택에서 탈락되게 하심과 죄에 대해 공의롭게 정죄하심에 관한 작정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어찌 모순이 된다는 말인가? 조금도 모순이 아니다. 전혀 모순되지 않기 때문에 만일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지 않고 또 죄를 처벌하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실 수 있는지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게 된다. 또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와 성실에도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왜냐하면 최후까지 사악한 자들이 만일 정죄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땅에 떨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어떤 자들을 버리신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잔인한 역할을 하시는 것은 아니다. 누구든지 일단의 극악한 죄인의 무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해서 또 그들에게 법의 선고가 내려져 그들이 처형되게 하였다고 해서 최고 판사를 잔인하다고 고발하는 자가 과연 있겠는가? 실로 만일 판사가 그들 가운데 일부에게 동정 베풀기를 기뻐하여 그들의 벌을 경감한다면 우리는 그의 관대함에 갈채를 보낸다. 그의 긍휼은 값없이 베푸시며 또 자의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뻐하시는 자에게로 긍휼을 확장하실 수도 있고 혹은 그에게서 긍휼을 박탈하실 수도 있다.

또 만일 우리가 땅에 있는 최고 판사가 가지는 것으로 인정하는 동일한 특권과 자유를 천지를 다스리시는 전지하신 통치자이신 대 주지께 대해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면 이는 참으로 슬픈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선택하시고 다른 사람들은 거절하신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차별대우하시는 분이 되시는 것도 아니다.

천벌은 사악한 자들에게 채무와 공의와 응징으로서 주어지는 것인 반면, 은혜는 구원받은 자들에게 값없이 공력 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천벌을 받는 죄인은 그의 형벌에 대해 자신은 벌 받을 만하지 않다고 우겨댈 수 없으며 또한 성도들도 마치 자신이 상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인양 허풍 떨거나 자랑할 수 없다.

어떻게 버리심의 교리가 미래의 심판 교리와 조화될 수 있겠는가 이 두 가지를 조화시키는 것은 전혀 수고로운 일이 아니다. 처음 창조부터 마지막 만물의 완성까지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영원하고도 불변하는 목적의 결과로서 그의 택하신 자들 안에서 또 그들에 대하여 자비롭게 역사를 행하시며 버리신 자들에 대해서는 묵인하시는 가운데 그들을 강퍅하게 하신다.

그러나 마지막 날이 이르러 섭리와 은혜의 모든 계약이 끝맺음되면, 그때에는 그리스도께서 심판자로서 좌정하실 것이 확실하다. 택하신 자들의 육체와 영혼을 영광에로 받으시고, 버리신 자들에게는(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어서 행했던 일들 때문이 아니라)오직 그들이 하나님의 일들을 고의적으로 무시한 것과, 그들의 철저한 불신앙과 그들이 도덕적 의무를 불이행한 것과 반복적으로 범한 그들의 불법함과 범죄함 때문에 심판의 선고를 내리심으로써 그의 영원하신 작정을 공개적으로 공포하시고 엄숙히 비준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은 택하신 자들은 아무도 망할 수 없고 또 버리신 자들은 누구도 구원 얻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서의 모든 교훈들과 책망들과 권고들, 혹은 인간 편에서의 기도들이 당연히 소용없고 헛되며 하찮은 것이 되지는 않는다.

택하신 자들에 관해서는 이것들이 헛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택하신 자들로 하여금 진리에 관한 지식에 이르도록 하는데 필요한 수단이며, 나중에 가서는 그들의 정결한 마음을 각성시켜서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또 그들이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 안에 세워지도록 교화하고 확립시키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오, 인간이여 계명은 그대가 무엇을 가져야만 할 것인지 말해줄 것이며, 책망은 그대에게 무엇이 부족한 것인지를 보여줄 것이고 기도는 그대가 원하는 것들을 누구로부터 받아야만 하는지를 그대에게 가르쳐줄 것이다. 이것들은 버리신 자들에 관해서도 헛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훈과 책망과 권고는 마땅히 그것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도덕적, 외적 행동을 예의범절과 공평과 질서의 규칙에 따라 조정하도록 조심하게 만들어주는 수단이 되어 그들 스스로 겪을 많은 불편과 사회에 끼칠 손실을 예방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과 그의 사도들의 모범을 통해 입증하는 바는 절대예정은 설교와 권고 및 그 밖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거절하지도 않으며 또 불필요하게 여기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 모두는 절대예정 조항을 가르치고 주장했다. 구원이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며 하나님의 주권적 처분에 인간들은 스스로는 영적으로 선한 일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자기의 기쁘심을 따라 뜻을 갖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반박할 수 없도록 나타내 보여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또한 자신의 청중들이 이성과 양심을 소유한 존재라는 것에 대해 역설하기를 소홀히 하지도 않았으며 그러한 존재로서 그들이 가지는 의무에 대해 기억하게 해 주는 일을 빠뜨리지도 않았다.

죄와 위험에 대해 그들에게 구원의 길과 방법을 그들 앞에 제시하고, 우리 구주께서도 분명하게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시면 아무도 구주께로 올수가 없다고 확증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성취한 것이라고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이것 때문에 그들을 신랄하게 꾸짖는다. 구원은 하고자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다고 선언하면서도 상을 얻도록 달음질할 것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권면하고 있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한다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나님의 견고한 터, 혹은 주의 작정은 확실하게 서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온다”고 말하면서도 지혜가 부족한 자들은 하나님께 그것을 구하라고 권고한다.

따라서 이 모든 것들은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빈번히 비추어주는 수단이면서 그들이 은혜로 말미암아 믿게 된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져 가게 하는 수단이 되고 그들을 은혜 안에서 마지막까지 견인케 되도록 해주는 수단인 것이다. 이것들은 전혀 무익하거나 무의미하지 않다. 크게 유용하며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그래서 성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말씀을 선포해야 하며 반드시 책망해야 하며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 그 이유는 비록 은혜를 받지 못한 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지만 은혜를 받은 자들은 그대로 듣고 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예정의 교리는 전적으로 발표를 금하여 제쳐둘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학자들과 사변가들만의 탐구대상으로 제한해 둘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공개적으로 설교강단에서 가르치기도 하고 출판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예정의 진리에 관해서 다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교리를 전파함에는 분별력과 신중함을 갖고 하도록 하라.

즉 설교자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그대로 그 교리를 전하도록 하라. 복음은 전파되어야 한다. 지상명령은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정론의 특징적인 교리 없이는 복음 교리도 그 안에 순수성과 일관성을 갖고 선포될 수가 없다. 선택은 기독교 체계 전체를 관통하여 꿰는 황금 실이다. 예정론은 전체 기독교 체계를 서로 연결하여 유지시키는 묶는 띠로서, 이것이 없다면 그 체계는 일종의 모래 알갱이 체계처럼 언제라도 산산이 흩어지게 될 것이다. 대사는 자신에게 맡겨진 메시지 전체를 다 전달하여야 한다.

그 메시지의 어떤 부분도 생략해서는 안 되며 오직 그가 대리하는 그 주권자의 생각을 완전히, 남겨두지 않고 다 선언해야 한다. 다수의 타락한 인간들로부터 어느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전혀 낫지 못한데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뻐하시는 자들을 얼마가 되든 간에 사랑하시고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누구를, 또 얼마나 많이, 선택에서 제외하실 것인가 하는 하나님의 선택권에 대해서도 아무런 불공평의 흔적이 벗다. 그들을 택하시지 않음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의 결과였다.

그들이 죽은 후 마지막 날에 가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정죄하시는 것은 그들이 택하심을 입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택하심을 입지 못한 것이 그들의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오직 그들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범죄함에 대한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광스럽게 해야 할 극히 중대한 이유를 갖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가를 아는 지각이 그들로 순종케 하는 가장 강한 동기가 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버림을 받은자 들은 불평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정당하고 옳기 때문이며 예정론은 이것을 계시를 나타내는 교리요,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있는 교리이며 택하심을 입은 자들의 회개와 위로와 거룩하게 함에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공헌하는 교리이고, 심지어 경건치 않은 자들조차도 핑계치 못하게 만들어 놓는 교리인 것이다.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회개하였으리라(마11장) “천지의 주재인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그 일에 대해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부당하다고 고함치며 편파적이라고 비난한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마13) “내 좌 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영광 가운데 있는 그 자리들은 나의 아버지의 의도하심과 목적하심에 따라 오래 전에 준비되었다.

나는 다만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그 자리에 앉도록 준비된 사람들에게 그 자리들을 줄 수 있을 뿐이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으니라 복음의 소리가 들리는 곳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을 것은 아니며 다만 생명으로 택하심을 입은 자들만 얻을 것이다.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마24)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심으로 보아 그리스도께서는 두 가지 사실을 가르치고 계신 것이 분명하다. 은혜와 영광으로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의 정해진 숫자가 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미혹을 받아 총체적 혹은 궁극적 배교를 하게 되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10)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12)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눅6)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8)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15)

저희가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요12:37, 40) 예정 없이 특정한 미리 아심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예언과 미리 아심과 예정의 성취를 위해서 이 사람들이 믿을 수 없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명백히 말해주는 것이다.

그들은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요한의 복음서에는 거의 한 페이지도 빠뜨리지 않고, 분명하게 혹은 암시적으로 택하심과 버리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25절), 즉 그에게 작정된 형벌의 장소로 갔다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행2)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행4) 예정된 일은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 13): 생명으로 예정된, 운명지어진, 혹은 작정된 자들이다. 사도바울에 관해서는 내가 무슨 말을 할까? 그의 서신들을 읽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서신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예정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고 있다.

“하나님이 미리아신 자들로 (혹은 미리 사랑하신 자들‘이다. 이는 성경에서 ’안다‘는 말은 자주 ’사랑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갈1) 에베소서의 첫 장은 거의 전부가 택하심과 예정에 대해 다루고 있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

성 유다는 버리신 자들을 가리켜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로 묘사하고 있다.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그의 소유된, 하나님의 사유재산과 소유물이 되도록 사신 바 된 백성이다(벧전2:8,9)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계17:8) 여기서 ‘진정한 겸손’이란 스스로를 구원할 희망이 없는 자들을 의미, 자신의 구원은 자신이 가진 힘이나 책략, 시도, 자유의지 혹은 행위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한분만이 가지신 자유로운 기쁨, 목적, 결정과 및 효능에 의존하는 것임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진정으로 참회하고 겸손해 졌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이 하나님의 진리들을 아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겸손해지고, 스스로를 비우고 말하자면 하나님 존전에서 아무것도 아닌 자로 낮아져서, 영원한 영광을 가지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요, 회개한 자들이 은혜의 약속에 친숙하게 될 수 있도록 해주고, 하나님께 기도로써 그 약속을 구하도록 해주며, 은혜의 약속들을 그들 자신의 것으로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 루터-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과 관련되는 것이오. 비록 하나님께서 비교적 적은 수를 구원하시고 상당히 많은 수를 정죄하실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무한히 자비하시다는 것과 하나님 자신의 의지로 인류 가운데서 그 숫자만큼은 필연적으로 영벌에 처해지도록 하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엄격하게 공평하시다는 것을 확고부동하게 믿는 이것은 믿음의 가장 고차원적인 수준들 가운데 하나이다.

버리신 자들에 관련되는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보여주시는 진노와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신성불가침하게 공평하게도 하시며 무한히 자비롭기도 하신 가를 분명히 발견하는 것이 내 능력 안에 있다면 믿음은 (역할이) 거의 없어지거나, 무용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현재의 불완전한 상태에서 우리가 이런 것들을 충분하게 이해할 수는 없으므로 믿음이 발휘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부처도 루터와 의견을 같이하는데 특히 에베소서 1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공공연하게 택하심에 대해 언급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단정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복들에 대해서는 발표를 금할 것이 아니라 주장해야 하고, 또 그것들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야 하는 것이며, 또한 그렇다면 생명으로 예정하시는 복은 모든 축복 중에서도 가장 큰 복으로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영생으로 지정하심에 대해 숙고하는 것이야말로 의심에 찬 악한 추측들을 하는 것과 불신앙 가운데 남아있는 것에 대항하는 최선의 해독제인 것이다. 이 최고 특권에 대해 우리가 완전히 소망과 확신을 갖지 못한다면 미래의 축복됨에 관하여 도대체 무슨 확고하고 편안한 기대를 마음에 품을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나님을 은혜로우신 아버지로 또 그리스도를 우리의 변함 없으신 구주로 간주할수 있겠는가?

만일 하나님께서 일어날 모든 일에 대하여 영원 전부터 확실하게 예지하지 않으시고 또 예지하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의 지력은 무한하지 못할 것이고, 유한한 지력을 가진 분이라면 결코 하나님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결정하시는 의지 외에 과연 무엇이 예정이겠는가? 대 원인이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으신다는 것 그리고 때가 이르면 어떻게 행하실 것인지를 영원 전부터 작정하셨다는 것,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들에 대해 불변하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서 하나님의 작정들과 하나님의 본질은 일치 하며 그리고 그가 가진 의지가 변하기 쉽고 동요하며 불확실하다면 그 존재는 참 하나님이 될 수 없다.

계획하시는 예정이 없이, 그리고 그 계획을 집행하시는 섭리가 없이, 과연 무엇이 하나님의 전능이 되겠는가? 도대체 자기가 만든 바로 그 피조물들에게 좌절당하고 파기 당할 수도 있는 그런 종류의 전능이란 도저히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무릇 기뻐하시는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시135)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 되셔서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나님의 순전하신 긍휼과 자발적인 은혜로써 구원하시고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기에 제외시키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기시는 자들은 (그들의 죄로 인해) 마땅하게 정죄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정이 없다면 주권적 긍휼이나 자발적 은혜와 같은 것들은 전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작정 외에, 과연 무엇이 예정이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 안에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셨다고 말씀하신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그 후로는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것이다. 성 어거스틴은 이점을 잘 논하고 있다.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을 바로 예배할 수 있는지에 대해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듣고 교훈을 얻도록 독실한 경건의 의무에 대해 선포해야 하는 것처럼, 또한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듣고 어떻게 하여야 성화를 이룰 수 있는지 가르침을 얻도록 순결함을 공공연하게 권면하고 강화해야 하는 것처럼 그리고 더 나아가,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듣고 하나님과 자기 이웃에 대한 열렬한 사랑이 불일 듯 하도록 설교 강단에서 박애를 강권해야 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들을 귀 있는자들은 듣고 영광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 안에 있음을 알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하시는 자들에 대해 가지신 예정도 공공연하게 전파되어야 한다. 택하심을 입은 자들의 영화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안에서 매우 확실하게 정해져 있으므로 그들 중 아무도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중생한 사람들이 듣고 믿을 수 있게 될 때, 그리고 중생한 사람들이 자신들을 실제로 그리스도의 택하신 공동체(몸)에 속해 있는 자들로 생각하기에 이르게 될 때, 그 무엇이 그들의 믿음을 이와 같이 확립해주고, 강화해 주고, 확정해 줄 수 있는가?

또한 그러한 신앙이 뻔뻔스러운 것도 아니다. 이는 회심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택하심을 받은 것으로 결론지어도 되며, 또 마땅히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존경할만한 개혁가들은 우리의 39개 조항 가운데 17번째 조항에서 (거의 같은 말을 써서) 바로 똑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예정과 우리를 택하심에 대한 경건한 생각은 경건한 자들에게는 완전히 감미롭고 유쾌하며 이루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영원한 구원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크게 확립해주고 확인해주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오직 성부하나님께 택하심을 입고 성자 하나님께 구속함을 입은 자들만을 성령 하나님께서는 새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인 것이며,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속에 부은바 된’(롬 5:5) 자들이 마음에 품는다면 절대로 실망 가운데 끝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과연 어디서 누가 그들을 정죄한단 말인가? 누가, 또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을”것인가? “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하나님)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는”것이며 “내가 확신하노니, 나는 매우 명백하고도 확실하게 자신한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의 (견고한)터’, 즉 택하심에 따른 그의 작정, 혹은 목적은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예정론이 없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과 긍휼을 약동적으로 보고 경험하는 것을 누릴 수 없다. 구별이나 예외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베푸시는 복은, 기증자에게 있어서 특별한 사랑의 증거도 아니며, 받는 자에게 있어서 특별한 놀라움이나 감사를 일으키도록 기대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모두 중에서 선택하시는 것과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도록 자비롭게 죄와 형벌로부터 분리해 놓으시는 것은 가장 장엄하고 전적으로 무한하게 값없이 주시는 것임을 드러내시는 주권적인 선이었다. 예정론은 강조되어야 한다. 뵈트너는 말하기를 “ 이 교리는 비단 칼빈뿐만 아니라 루터, 쯔빙글리, 멜란히톤, 불링거, 부처 또한 종교개혁에 있어서 여러 지도자들에 의해서도 가르쳐진 것이다. 그 후 장키우스, 오웬, 화이프필드, 롭 레디, 하지, 댑니 컨닝햄, 스미스, 세드, 워필드, 카이퍼 등이 이교리를 신봉하고 또한 주력하여 이것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 교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도록 가르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인간이 하나님 앞에 겸비한 자가 되도록 가르친다. 칼빈의 예정론에 대한 논쟁은 항상 구원론적 맥락에서 일어났다고 하는 점이다. 예정론은 구원론을 가장 성공적으로 방어하는 것이 된다. 예정론은 칼빈에게 있어서 구원론의 핵심이 된다고 하는 의미에서 조직적인 원칙이 될 뿐 아니라 다른 교리적 틀이 세워지는 원칙도 된다. 예정론의 주된 작업은 공로주의를 떠나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칭의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의 근본적인 교리를 보호하고 강화하는데 있는 것이다. 수많은 신학 서적 중에서 가장 순수한 기독교 신앙, 가장 순결한 성경적 진리를 집약한 책을 한권만 추천하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칼빈의 ‘기독교강요’와 칼빈의 성경주석을 꼽는다.

신학상 적인 아르미니우스는 “성경 다음에 가는 서적은 칼빈의 성경주석이니 내 제자들에게 이 책을 가장 많이 인용하라고 권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예정론은 칼빈의 창작이 아니라 오직 성경에 분명히 나타난 교리를 조직적으로 진술한 것뿐이다. 그는 성경에서 이 교리를 발견한 제일 처음의 사람도 아니었다. 그가 태어나기 천년 전에 어거스틴이 이 교리의 요소를 가르쳤고 종교개혁 운동의 지도자가 다 그러하였다. 개 교회의 부흥과 성장에만 주력하다 보니 정작 장로교회로서의 특성과 뿌리를 잊어버리고 비 복음적이고 잡다한 요소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도 이렇다 할 만한 비판이나 대안이 없었다. 그 본래적인 신학이나 신앙 노선을 위하여 그 뿌리를 찾아보려고 애쓰지 못했다.

문제는 신학교에서 배운 개혁주의는 하나의 교리적인 자기 입장으로 삼았을 뿐 그것이 목회 현장에서는 전혀 무관했다. 칼빈의 신학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신학이라 한다면 그 내용은 예정론에 집중된다. 주권을 믿지 아니하면 예정론을 설명할 수 없다. 예정론을 인간이 볼 때는 모순같이 생각되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에는 모순이 아니다. 항의파가 거부한 칼빈주의 명제들

①하나님은 타락 전에 그리고 인간의 창조 이전에 변경될 수 없는 작정에 의해,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영원한 저주로 예정하셨는데 그것은 의나 죄, 복종이나 불복종을 고려하지 않고 단지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기 때문이며 한 부류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의의 영광을 보이시고 다른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비를 보이시기 위한 것이다.

② 하나님은 타락의 관점에서 그리고 우리의 첫 조상들과 그들의 후손들의 공정한 정죄의 관점에서 인류 가운데 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타락의 결과들을 면제해 주어 하나님의 값없는 은총으로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정하셨으나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나이나 도덕적 상태와 무관하게 하나님의 의의 영광을 위하여 그들을 정죄에 내버려 두도록 정하셨다.

③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하여 죽으셨다.

④ 성령은 불가항력적인 은총으로 피택자들 안에서 사역하셔서 그 결과 그들은 회심과 믿음과 거룩함과 영화를 소유하게 되나, 나머지 사람들은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외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초대받을지라도, 구원에 필수적이고 충분한 그 은총은 그들에게 유보된다.

⑤ 이 불가항력적인 은총을 받은 자들은 완전히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것을 결코 잃을 수 없으나, 끝까지 같은 은총으로 인도받고 보존된다. 항의파는 이 교리들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도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에도 포함되지 않고 , 비교훈적이며 위험해서 기독교인들에게 설교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예정설을 반대하는 학설 중에는 펠라기안의 신인 협력설과 아르미니안의 만인 구원설이 있다.

예정과 예지에 있어서 큰 차이점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예정론에서는 구원의 주도권을 하나님 편에서 잡게하고 예지론에서 인간편에게 주게 된다. 예지론을 택하게 될 때 결과적으로 구원의 주도권을 인간이 잡게 된다.

아르미니안이란 화란 신학자 아르미니우스의 추종자들을 가리키는 자들로서 존 칼빈의 예정론적 교리를 반대하면서 인간의 자유 의지를 주장하는 종교개혁의 후예들, 감리교회, 성결교회와 오순절 교회등에 소속해 있는 크리스천을 의미한다고 했다. 웨슬리는 예정론을 철저히 거부했고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주정하면서 여러 주 또는 여러달 동안 전혀 죄를 짓지 않았다고 선언할 정도로 완전함을 자랑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예지에 관해 말할 때 만물이 항상 있었고 그분의 눈으로는 영원히 현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분의 지식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미래나 과거가 없고 모든 것이 현재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요6:37, 39)라고 하신다. 아르미니안주의는 구원 역사의 반은 하나님의 일이요, 반은 사람의 일이라고 말한다 (신인 협력설) 그러나 칼빈주의는 구원역사 전체가 하나님 일이요, 동시에 또한 전체가 사람의 일이라고 주장한다.

성경대로 믿는 주의가 칼빈주의다. 칼빈주의는 사람을 냉랭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인생을 바로 알고 세계를 바로 알므로 우리의 가슴이 뜨겁게 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향하여 살도록 하는 것이다. 칼빈주의는 성경적인 계시관이요, 성경적인 인생관이요, 성경적인 우주관이며, 성경적인 철학이라고 할수 있다. 죽은 칼빈주의자가 있다. 그것은 교리만 있고 생활은 없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과 헌신의 열정도 식어버린 박물관의 미라 같은 냉랭한 칼빈주의다. 그 반면 성령님의 타는 불에 점화되어 헌신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엘리야같이 주의 일에 열심이 특심하여, 사람을 사랑하고 구원하고자 몸부림치는 칼빈주의가 있다.

칼빈주의는 교의를 단순히 지적으로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이었다. 칼빈주의는 프랑스에서는 위그노(hugunots)로 화란에서는 베거(Beggars), 영국에서는 청교도(Puritan),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교, 미국에서는 순례자(pilgrim)라고 불려지고 있다. 오늘날 많은 현대 교회 중에는 표면적으로는 나타나지 않으나 내면적으로는 거의 아르미니안주의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우리는 유의해야 할 것이다. 자유주의학은 말할 것도 없고 일부 복음주의 신학마저 칼빈주의의 색채를 거의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은 매우 유감된 일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나님의 주권은 부인되고 인간의 자유와 권위를 앞세우는 인본주의로 점점 기울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장로교회는 이른바 전통적인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을 계승한 ‘도르트 총회’의 후신으로 얼마나 거기에 충실한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칼빈주의는 냉랭한 교리만 외우는 것이 아니고 명실 공히 목회의 현장, 설교의 현장, 선교의 현장, 우리의 삶의 모든 현장에서 도르트 총회에서 표현된 칼빈주의 사상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칼빈 예정론이 21세기의 앞에 선 오늘의 한국과 세계 교회를 어지럽히는 가장 큰 도전 세력인 종교 다원주의를 물리치고 신학과 신앙을 사도들의 굳건한 터 위에 세울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대안임을 알수 있다.

존 칼빈은 하나님께서는 예정하실 때 인간의 타락을 예정하셨다고 주장하고 불링거 같은 이는 타락은 정하시지 않으시고 단지 타락할 것을 예지하신 것뿐이라고 했다.

바빙크는 “타락 전 예정은 개혁파 교회의 입장이 아니고 타락 후 예정이 개혁 교회의 입장이다”라고 했다.

카이퍼는 “타락 후 예정설을 지지하면서, 만일 하나님께서 타락 전에 예정하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상반되기 때문에 모순이다”라고 말했다.

(Dik)은 “창세전 예정이 개혁주의의 정통적 고백이기는 하지만 타락 후 예정설을 지지한다고 해도 칼빈의 교훈과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두 가지 견해 중에서 어떤 편을 택하여야 할 것인가.

고등 칼빈주의, 열정 칼빈주의라고 불리우는 이 사조는 칼빈의 신학 중에서도 특정한 주체들에 집착하여 강조하는 바, 특히 “타락 전 선택설과 반 율법주의를 신봉하는 자들이요 엄격한 5대 교리주의자요, 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여 인간의 책임에 대해서 약화시키는 경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는 하나님의 주권이 100%이듯이 인간의 책임도 100%임을 믿는다. 예정론 교리는 적대시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마귀가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도구들이다.

만일 예정론과 같은 성경적 교리를 거부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삼위일체 교리를 비롯해서 모든 교리를 부인하여야만 할 것이라고 했다. 21세기 현대에 이르러 종교 다원주의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 교리를 전면 무효화시키는 반성경적 사상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모두 은혜에 순종하지 않는가? 어거스틴은 이에 대하여 예정의 교리를 가지고 답변하였다. 영원 전부터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받도록 예정되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형벌을 받도록 예정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예정된 자들의 수는 고정되어 있고 변경시킬 수도 없으며, 또한 서로 교체될 수도 없다. 예정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예정의 특별한 효험으로 인내의 은사를 주신다. 이들은 넘어지고 타락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언제까지든지 그렇게 행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거역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정되지 못한 자들의 경우는 그와 반대이다. 이 제한된 예정은 타락한 천사의 수만큼 예정한 것이라고 어거스틴은 해명하면서 바울이 딤전 2:4에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말한 것을 하나님은 선택된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펠라기우스주의자인 줄리안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부인하면서 죄는 본성 혹은 성품 속에 존재하면서 자손들에게 전수되는 것이 아니라 의지 안에 있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이 의지는 항상 중립적이다. 선악은 의지와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일 뿐으로 얼마든지 죄를 떨쳐버릴수 있다고 했다..

동방교회는 그리스 철학의 영향으로 낙관론적인 인간관을 견지했다. 펠라기우스주의는 동방신학의 산물이었다. 펠라기우스주의는 특히 스토아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칼빈주의 신학 사상의 모체에 해당하는 어거스틴과 칼빈의 신학은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가슴에서 나왔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옵소시”(눅 18:13) 펠라기우스(360-420)는 431년 에베소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529년 오렌지대회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개인적으로 받을 수도, 받지 않을 수도 있다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을 정죄하였다.

예정론을 기독교 신학에서 심각하게 다룬 최초의 학자는 어거스틴이었으며 개혁 신학은 이를 충실히 인정하며 따르고 있다. 종교개혁 시대의 철저한 예정론자는 멜란히톤이었고 오히려 루터 교회가 예정론을 철저히 다루었다. 물론 칼빈주의도 예정과 선택교리를 다른 어떤 체제보다도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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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칼빈주의자들이 모두 다 예정론자는 아니다. 워필드 박사에 따르면 예정론은 칼빈주의를 결정짓는 중요한 교리도 아니요, 칼빈주의가 발전해 나오는 근원인거나 뿌리에 해당하는 교리가 결코 아니다. 어거스틴은 어떤 사람이 개심할 때 이 개심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에 의해 유래된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누가 너를 구별하느뇨 네가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고전 4:7)라고 말씀하였다. 그러므로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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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천사가 그들의 자유의지를 사용하도록 허용하였고 그들이 자유의지를 남용한 결과가 어떠하리라는 것도 알고 계셨으며 또 범죄한 그들에게 장차 당신의 은혜의 선물이 얼마나 풍성하리라는 것을 가르쳐 줄 작정을 하셨다. “그들이 믿은 까닭에 선택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믿게 하기 위하여 선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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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쟁은 곧 교회를 보호하고 성도개인의 신앙을 지키고 그리스도교를 지키는 거룩한 싸움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논쟁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교회로부터 정죄를 당하고, 그 지역에서 추방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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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칼빈은 예정론을 설명하고 옹하는데 그렇게까지 관심을 기울였는가? 기독교 강요 - 하나님의 말씀이 나로 하여금 예정론을 주장하게끔 강권하지 않았다면 나는 결코 예정론을 입 밖에도 끄집어 내지 않았을 것이다. 칼빈은 “만일 우리가 로마서를 이해하게 된다면 전체 성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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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바울이 가르치지 않았던 것을 억지로 고안해 낸 것은 아니다. 성령과 바울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인가! 그들은 얼마나 뻔뻔스러운 사람들인가? 어떤 사람이 편견이나 호기심을 가지고 예정론을 서술하고자 한다면 그들에게 자기 나름대로 예정론을 서술하도록 기회를 준다면 이 세상의 비밀을 모조리 제거해 버릴양, 인간에게 맞게 이 교리를 변조시키려고 할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 나와 있는 예정에 관한 모든 것을 신자들에게 가르쳐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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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으면 그들로부터 하나님의 축복을 가로막는 죄를 범하게 될 것이다. 불경건한 사람은 예정론에 대하여 조롱하고, 비방하고, 공격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만일 예정론과 같은 성경적 교리를 거부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삼위일체 교리를 비롯해서 모든 교리도 부인하여야만 할 것이다.(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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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론의 역사를 말하고자 할 때 예정론은 이미 구약 성경에서 논의되어 왔고 (창세기에서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등), 신약 성경에서 복음서와 바울 서신 (특히 로마서, 에베소서)등에서 확증된 바 있다. 구원에서의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하기 위하여 고마루스의 지도아래 도르트대회(성도의 견인 혹은 궁극적 구원/즉,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 받은것)을 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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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본래 아르미니우스주의자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명확히 가르치고 있는 바는 신자의 구원은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에 의존하고 있으며 우리가 선택받은 이유는 은혜로운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 이외에는 다른 데서 이유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 자체가 그들이 믿음을 갖게 된 이유가 되었으며 선택은 순서상 믿음에 앞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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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라기안주의자들은 아담이 하나님을 택할 수도 있고 배척할 자유가 있었던 것처럼 모든 인간은 이런 자유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칼빈주의에서는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는 그런 자유가 있었으나 타락 후에는 그런 자유를 박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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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교의 신인 협력설을 칼빈주의는 반대한다. 칼빈은 믿음과 선행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했다. (요6:37-39, 요6:44, 요17:9 , 롬9:20-21, 롬11:33, 창18:10 롬 9:11 롬 9:12-13, 창 25:23) 예정교리를 놓치면 하나님의 영원한 뜻과 주권을 부정하게 된다. 예정은 하나님의 불변하신 행동이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겸손과 경고를 주는 동시에 성도들에게 자극과 위로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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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절대성과 자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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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3:14, 요5:26, 시94:8-9, 롬11:33-34, 단 4:35 시115:3 시33:11 엡1:4, 고전1:26-29, 롬1:17, 행13:48, 엡2:8 엡1:26 사43:21, 시79:13, 요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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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자와 돌트신조와 17세기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은 예정론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신학체계의 대전제로 삼았다. 그러나 1564년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 그리고 16세기 신앙고백서인 제1,제2스위스신앙고백, 39조항신앙고백은 예정교리를 신학의 대전제로 삼지 않았다. 예정론은 칼빈 신학사상에서 중심교리나 핵심주제라고는 볼 수 없으나 예정론이야 말로 우리의 신앙에 유익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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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은 예정론이 큰 유익을 준다고 말했다.

①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크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만세전부터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물줄기는 예정론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느끼는 때가 언제인가? 우리의 구원의 근거는 더 멀리 만세전부터(영원)이다.

②하나님의 영광을 높여 드릴 수 있는 것이 예정론이다.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우리를 가장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 예정론이다. 구원이 하나님의 만세 전의 주권이라면 우리는 한없이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한다.

③ 구원에 확신을 준다.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 구원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 구원이 어디까지 안전한가? 영원까지 안전하기 때문에 예정론은 구원의 확신 때문에 생긴 것이다. 예정론은 그 어떤 교리보다도 잘 알게 될 때는 신자에게 그만큼 제일 큰 유익을 주는 성경의 진리가 예정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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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교리의 기본 구조는 성경, 특히 로마서와 에베소서에 의존하고 있다. 칼빈의 최초의 주석은 로마서였는데 이 책에 대한 그의 연구는 ‘기독교 강요’의 예정교리를 정교하게 해주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칼빈은 “만일 우리가 이 서신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성경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가지게 되는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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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와 교회> 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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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4/20 02:52 답글

    ?

    Jerome Zanchius (February 2, 1516 ? November 19, 1590) was an Italian Protestant Reformation clergyman and educator.

    He was born Jerome Zanchi in Alzano Lombardo, the son of a nobleman. His father died in the plague of 1528 and his mother died only three years later. At age 15 he entered the monastery of the Augustinian Order of Regular Canons, where he studied Aristotle, languages and divinity. He also attended the lectures on Romans given by Peter Martyr Vermigli, the greatest of the Italian Reformers.

    ????
  • In 1551, under growing persecution against the Reformation, he left Italy via Geneva and eventually accepted the professorship of Old Testament at the college of St. Thomas in Strasbourg where he began to teach in 1553 and continued to give excellent instruction for nearly 11 years. In 1563 he left the College and pastored the Italian Protestant congregation in the Grisons in the city of Chiavenna. Finally, in 1567 Prince Frederick III (1515?1576) prevailed upon Zanchius to accept a divinity professorship in the University of Heidelberg, joining Zacharias Ursinus (1534?1583).
  • In the year 1568 he entered on his new duties and in the same year received a doctor's degree. He held this post for 9 years when, at the death of Fredrick III, he chose to take the pastorate of the church at Neustadt an der Haardt. He remained there until his death on November 19, 1590, while on a visit to Heidelberg.

    Zanchius was a voluminous writer whose works include, Confession of the Christian Religion and Observation on the Divine Attributes. He is perhaps best known for his book The Doctrine of Absolute Predestination, which is still in publication today.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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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제롬 장키우스(Jerome Zancius 1516 - 1590)의 절대예정론 소고 (비공개 카페)? http://cafe.naver.com/calgaryreformed/1421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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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루터의 종교개혁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길을 따라(5)

 

비텐베르크 시교회 설교 

 

루터는 몇 년 동안 라틴어 성경 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중에 하나님의 진리를 많이 깨닫게 되었다. 루터는 수도사이자, 설교가로, 그리고 신학교 교수로 3가지 직책을 수행하였다. 루터는 비텐베르크대학교의 성경 교수로 활동하면서 1517년 까지 비텐베르크 시교회(Wittenberg Stadt Kirche)에서 사제로서 목회사역도 하였다. 

 

당시 대학과 수도원의 전통적인 언어는 라틴어였고, 도시민의 언어는 독일어였다. 그 때문에 루터는 독일어로 설교했는데 이 교회는 독일어로 설교한 최초의 개신교회가 되었다. 세인트 메리 교회(St Mary Church)라고도 불리는 비텐베르크 시교회에서 루터는 매주 정기적으로 설교했다. 

 

목회자로서의 루터는 교인들의 영적인 필요에 대해 깊이 숙고하면서 자신의 설교를 통해 신자들이 성경 진리를 잘 이해하며 하나님을 추구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양떼 즉 신자들의 구원에 관심을 많이 가졌기 때문에 심방도 열심히 했다. 이러한 루터의 신학적 및 목회적 관심은 교회와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 1517년 10월 31일루터가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던 이신칭의 교리는 종교개혁의 핵심적인 진리이다. 

 

하나님의 구속의 진리와 성경의 새로운 계시의 빛이 루터에게 비취어지자 그는 곧 가톨릭교회의 오류를 보게 되었다. 그 말로 다 할 수 없는 거짓과 속임수와 그리고 온갖 위선을 깨달은 루터는 결코 침묵할 수 없었다. 그는 사람들을 어두움의 길로부터 돌이키게 하고자 결심하면서 성경 말씀에 기초하여 가톨릭교회의 비성경적인 요소들을 들추어내기 시작했다. 

 

 1517년 10월 31일, 이른 아침에 긴 사제복을 입은 루터가 어디론가 분주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조용한 대학 도시 비텐베르크 성교회(Wittenberg Schloss Kirche)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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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텐베르크 성교회     ©뉴스파워 김현배

 

대략 낮 12시가 되기 전, 루터는 가지고 온 종이 뭉치를 조심스럽게 펼쳐 들고서 라틴어로 된 95개조 논제를 비텐베르크 성교회 문에 못으로 박았다. 지금은 청동문으로 되어 있어 못으로 박을 수 없지만, 그 당시는 나무문으로 되어 있어서 못으로 박을 수 있었다. 이 95개조 반박문 문서는 공개 토론을 위한 내용이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매주 금요일마다 신학자들이 모여 신학적 문제에 대하여 토의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때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95개조 논제에 대해 아무도 그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아무런 토론도 없었다. 비텐베르크의 교수와 학생들은 그 문제에 대해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95개조 반박문이 공개 된지 2주 만에 복사되고 번역되어, 전 독일에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혜성같이 등장한 금속 활자 인쇄술로 인해 4주 만에 전 유럽전역에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마치 갑자기 핵폭탄이 터져 버린 것처럼 로마 교황청을 향해 종교개혁이라는 큰 폭탄이 터지고 말았다. 유럽과 세계사를 진동시킨 역사적인 대사건으로서 그 중심인물은 1483년에 태어난 독일사람 젊은 마르틴 루터이다. 

 

루터는 중세말의 타락한 교회를 새롭게 개혁하여 갱신하고자 했다. 루터와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영적 전쟁으로 인해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95개조 논제의 핵심 내용루터는 말씀의 진리를 위한 증거에 매우 충실했기에 교회에서 철저하게 개선되어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95개조 논제를 내걸고서 공개 토론하자는 반박문 내용의 핵심은면죄부(indulgentia) 판매이다. 면죄부 사건은 루터에게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그 이유는 기독교의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죄 용서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죄인들에게 요구되는 죄책을 제거하거나 감소시키는 면죄부에 대해 루터는 당시에 교회의 가장 큰 죄악 중에 하나라고 반대했다.

  

그 당시 교황 레오 10세가 성 베드로 성당 완공을 위하여 막대한 공사비를 필요로 할 때, 그는 건축에 필요한 재정을 모으기 위해 면죄부 판매를 강요했다. 판매 책임자인 도미니크 교단의 탁발수도사 요하네스 테첼(Johann Tetzel, 1465-1519)은 가는 곳마다 ‘면죄부를 사면, 살아있는 사람은 즉시 죄를 용서받을 것이요, 연옥에 있는 자는 그 은화가 헌금함 속에 떨어져 소리가 나는 순간, 곧 천국으로 올라 간다’고 하였다. 

 

이것은 완전 비성경적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죄인 된 우리가 십지가의 보혈의 피로 죄 사함 받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루터는 비성경적이고, 구원에 아무 효과가 없는 면죄부 판매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중세교회는 죄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용서함 받는다고 가르쳐 왔는데, 가톨릭교회는 죄를 범한 인간이 신부에게 죄를 고함으로 인해 죄 용서를 받는다는 고해성사를 주장한다. 

 

또한 교황은 예수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교회의 최고의 통치자이기에 절대 오류가 없다고 한다. 이것이 교황무오설이다. 또 성체숭배 사상이 있다. 성찬식 할 때 성도들이 받는 떡과 포도주는 실제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을 화체설이라고 한다. 화체설숭배는 잘못된 것이다. 개신교는 예수님께서 육체적으로 임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종교개혁자 칼빈이 주장한대로 영적으로 임재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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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죄부     ©뉴스파워 김현배

 

또한 가톨릭교회는 영웅적인 덕행을 실천한 사람을 성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성인 숭배 사상이 있다. 1984년 5월 교황 바오로 2세는 한국 방문 중에 103위의 성인 시성식을 행하였고, 2014년 1월 프란체스코 교황 방문 때는 124명의 시복미사를 거행했다. 

 

하지만 루터는 과도한 성인숭배를 맹렬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성상숭배 사상도 있다. 그들은 가톨릭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와 마리아, 성인들, 교황들의 형상 등을 만들어 놓고서 그 형상 앞에서 절하고 기도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 이것이 성상 숭배인데 종교개혁자들은 그런 성상들을 다 부셔버렸다. 그래서 개신교 교회는 아무 형상이 없고 깨끗하다. 

 

또한 십자가 숭배 사상이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모양을 조각으로 만들어 가지고 가정이나 성단, 교인들이 경영하는 사업장이나 병원에 달아 놓고 거기에 절하거나 기도하는 행위이다. 

 

마리아 숭배 사상도 있다. 가톨릭교회는 마리아를 신격화 하여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마리아 무죄 잉태설, 마리아 종신 처녀설”을 가르치고 있다. 마리아는 “구원의 어머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천주교회에 들어가 보면 아름다운 그림들이 많다. 그들은 그러한 종교적 그림에 절하고 기도하는 행위를 하는데 이것이 성화숭배사상이 있다. 루터는 이 모든 것들이 비성경적이라고 지적했다. 이 모든 것들의 잘못된 행동들은 그 근본이 잘못된 성경관에 기인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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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텐베르크 성교회 문에 95개 논제를 못박고 있는 루터     ©뉴스파워 김현배

 

가톨릭교회는 말씀도 좋지만 행위로 의롭게 되고 구원 얻게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철저하게 잘못된 구원관의 결과이다. 이와 같이 로마 천주교회의 부패와 종교적 타락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루터는 이러한 부패와 맞서 싸우게 되었다. 이것이 루터의 종교개혁이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이 면죄부 비판에서 출발하여 중세 제도 전체를 흔들어 놓았다. 루터는 작은 촛불을 켰는데, 그것은 그의 원래 의도를 훨씬 넘어서 칠흑같이 어두운 중세 시대에 종교개혁이라는 불꽃으로 활활 타오르면서 멀리 멀리 퍼져나가게 되었다.

 

오늘날 개신교도들은 1517년 10월 31일을 개신교 설립일로 기념한다. 금년 10월 31일은 루터 종교개혁 498년을 맞이하게 되며, 2017년에는 역사적인 500주년이 된다.

 

김현배 ⓒ 뉴스파워

출처: USA 아멘넷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최송연

                                

    나는 이렇게 땅에 엎드러져
    기어 다니고 있어야만 하는가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땅에서 기는 것을 배운 ..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는
    즐거운 때가 온답니다.
     
    이해할 없는 질문과 의심이
    안개처름 일어날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이런 수많은 고민과 고뇌들이..
    당신을 성숙으로 이끄는
    길잡이가 되어 준답니다.
     
    내가 올라가야 언덕이
    가파르고 숨이 가쁠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가파른 언덕을 조금만 오르면..
    당신의 목적지인 정상이
    바로 눈앞에 있으니까요.
     
    시련의 밤이 깊고 고통의 흑암이
    천지를 덮을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이제 새벽동이 오고..
    당신 창가에도 찬란한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릴 테니까요.
     
    가랑잎이 떨어지는 소리에도
    눈물이 나며 이루는
    밤이 늘어날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당신의 겉사람은 후패하나..
    당신의 속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날로 날로 새롭게 된답니다.(고후4:16)
     
    역사의 부조리와 천재지변이
    세상을 집어삼킬 것만 같을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역사의 주인이신 예수께서..
    하늘과 땅을 펼치시고 통치하시는
    소망의 날이 온답니다.(21:1)






         


    ------------------------------------------------------------------------


    장달윤 


    2010-11-08 07:10


     218.xxx.100


     훌륭한 님의 시에 감동을 받습니다.


    님의 시는 훌륭한 설교입니다.


    지친 목회자들에게 생수입니다.


    감사합니다.



    비둘기 


    2010-11-09 14:15


     66.xxx.79


     Re》성령의열매 ,


    근심을 함께 나누며 다정한 곳에  고통중에서도

    낙심하지 않도록  진심으로 서로가  되기를 격려하는 곳에

    주님이 도우시는 믿습니다


     우리가 여러가지 시험을 겪을수록 더욱 주님과 약속안에

    굳건히 세워가시는 주님의 섭리안에 살게 하셨기에   

    감당할 있는 시험만을 주시며 피할 길도 반드시 주실 믿습니다  

     밤은 지나가고 아침은 반드시 오듯이...


     


     성령의열매 


    2010-11-09 02:40


     24.xxx.29


     사모님 오늘 낙심에 대한 주제로 시누이와 같은 교회 친구와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어요. 서로 속상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들어주고 하면서 마음을 열어보이며 이야기를 하다 웃기도하고 눈물을


     글썽이기도하며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헤어질 시간에 우린 주님께 기도를 하고 기쁜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3주동안 우리 시누는 감기때문에 많이 아팠고 영적으로도 힘이들었다고


     했고 교회 친구는 아토피성 피부염으로 힘들어 했고 사업을 접은


     여러가지 안정되지 않은 현실에 힘들어 했습니다.


     


    우린 주님께 가까이 가자고 서로를 격려했는데 사모님 어떻게


     아시고 이렇게  위로의 말씀으로 힘을 주시는지 정말 감사해요!


       


     g2u 


    2010-11-07 06:32


     69.xxx.227


     ! 낙엽이 떨어지네요!


    너무나 아름다워서


     눈물이 납니다.


     


    크리스찬의 삶의 특징은 신사의 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도라고 생각합니다.


    사랑과 용서와 화목입니다.


     


    너무도 아름다운 시와 에세이로


      품어 주시는 별이 사모님의 마음은


     따뜻하기만 합니다.


    행복의 문을 활짝 열어 주시고


     대화에 능하신 별이 사모님은


     아멘넷에 필요하신 분이시라고


     추천합니다.


     


    개인 사정으로 글을 쓰기가 무척 힘이 들지만


     아멘넷은 자주 들려서 좋은 글들을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별이 사모님의 글은 빠짐 없이 읽고


      위로를 받습니다.


     


    저는 이제는 장성한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이들의 이름은 , , (아들)입니다.


    아름답고, 밝고, 참되라는 뜻의


     한문에서 따온 이름들입니다.


    신혼 여행에서 돌아 딸의 행복한 모습을 보며


     떠나 보내는 아쉬움에 조금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별이 사모님과 여러분들의 따뜻한 말씀에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별이 사모님의 글은 때로는


     너무나 주관적인 글인데도


     예쁘게 보이는 것은 일까요?


    문장이 짧아서 자주 뵙지 못하지만


     항상 마음에 모시고 있습니다.


    강건하시기를!


    그리고 좋은 말씀을 나누어 주시는


     아멘넷의 많은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오늘 아침엔 시간 일찍 일어나서


     교회에 준비를 하고 저의 마나님을


     깨우다가 야단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글을 시간이 되었습니다.


    좋은 주일이 되시기를!


      


    초생달 


    2010-11-07 00:04


     61.xxx.108


     초생달이 세상을 살아가고있는 


    [의미] ?  역사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거두어 주실 


     그날을 믿고 살아가고있읍니다. 


    소망의 날이 오실 것입니다.


      


    은하수 


    2010-11-06 23:04


     74.xxx.174


     ~처진 어깨를 다시 으쓱하도록 만들어 주는 ,


    아름다운 가을산과 호수의 풍경,


    그리고 은혜스러운 선율이 냉냉한 가슴을 따스하게 해주는군요.


    삶의 용기를 북돋아 주시는 님께 감사드려요.


      


    김성훈 


    2010-11-06 02:27


     69.xxx.27


     Re》김오동 ,


     " 그럼에도 불구하고"신앙이라고 합니다


     


     김오동 


     "그러므로"신앙, "그럼에도 불구하고"신앙으로

    수정했습니다. 11/6 02:39


     218.xxx.48


     


    김오동 


    2010-11-06 02:20


     218.xxx.48


     1. "그러므로" 신앙


     


     사랑의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에


     합력하여 선이 되게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현실을 참고 때를 소망합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


     


     비록 고난이나 실패가


      끝이라고 할지라도,


    그래서 의미를 이해할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조건없이)


    주님을 향한 나의 믿음은 흔들릴 없습니다.


     


    3. 주님을 향한 나의 사랑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이


     조건없는 것이기에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나는 오직 주님을 사랑할 밖에 없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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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소는 언제나 아름다워            


    소나기라도 한 줄기 쏟아져 내려준다면 좋겠다.
    오늘은 아침부터 착 가라앉은 하늘 때문인지
    후덥지근한 날씨 때문인지...,
    새들의 노랫소리마저 둔탁하게 들린다.

    이른 아침,
    집 앞에 딸린 손바닥만한 작은 공원은
    월요일인데도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댄다.

    개를 끌고 나와 볼일을 보게 하는 사람들,
    몸이 불편한지 다리를 질질 끌며 걸어가는 할아버지,
    마치 아기가 걷기 연습하듯 뒤뚱뒤뚱 넘어질 듯,
    지팡이를 의지하고 걸어가시는 뚱뚱한 할머니,
    날씨 탓일까, 한결같이 모두가 시무룩한 표정이다.

    며칠째 숨 가쁘게 뛰어다니느라 운동을 하지 못한 탓에
    몸도 마음도 찌뿌등하니 착 가라앉는 것 같다.

    운동을 해야지~~….
    기분 전환도 할 겸, 노란색 티셔츠에 짧은 반바지,
    새로 산 하얀 운동화를 졸라 신고 밖으로 나왔다.

    하루에 적어도 30분은 걸어야 한다는데…
    피곤한 마음을 다독거리며 걸어보려 하지만,
    워낙에 손바닥만한 작은 공원이라
    다람쥐 쳇바퀴 돌듯 뱅글거리자니 재미가 없다.

    모처럼 나온 산책,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느긋이 즐겨 보려 하지만,
    주위 분위기 탓인지, 날씨 탓인지, 내 마음 탓인지,
    별로 상쾌한 기분이 들지 않고 자꾸만 가라앉으려 한다.

    이런저런 떠오르는 어지러운 상념들을 떨쳐 내고
    기도로 주께 마음을 모두려 애쓰며 빠르게 걸어 본다.

    공원 한쪽에 두어 개 듬성듬성 놓여 있는 나무 벤치 옆을
    막 지나치는 순간, 그곳에 팔순도 넘어 보이는
    동양계 할머니 한 분이 운동을 마치셨는지 앉아 계셨다.

    고개만 까닥 인사를 하고 그냥 지나치려는 나를 향해,
    “굿모닝!” 큰소리로 인사하며 함박같은 미소로 반기신다.

    주름이 짜르르한 얼굴…할머님의 환한 미소….
    어둡고 둔탁하게만 느껴지던 나의 작은 뜨락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지는 느낌이다.

    “굿모닝!”
    마지못해 웃으며 답을 하던 나는 슬며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연세가 높으시고 몸도 불편하신 할머니께서
    여지껏 저렇게 환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잃지 않고 사시는
    그 비결이 무엇일까?
    무엇이 저 할머님을 저토록 행복하게 해 주고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하셔서
    운동하는 것은 생각조차 못하신 듯,
    처음부터 그곳에 그렇게 내내 벤치에 혼자 앉아 계시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기도 하고
    환한 미소를 보내어 주기도 하고...

    어쩌면, 여지껏 살아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할머니의 가슴속에 행복이 넘쳐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할머니의 밝은 미소와 반가운 인사를 받은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굳어 있던 얼굴 표정들이 스르르 풀리고,
    한 발, 두 발 떼어놓는 발걸음마저 가볍고 경쾌해 지는 것 같았다.

    그래, 그렇다.
    내가 건강하게 살아 있고 내 두 발로 걸을 수 있다는 것,
    이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하며 행복해야 하는 것인데....


    후다닥 정신이 들며, 어디선가 내 몸 안에 숨어 있던
    엔돌핀이 퐁퐁 샘물 솟아나듯 솟아 나더니

    내 작은 등줄기를 타고 시원하게 흘러내린다.


    음~~미소는 언제나 아름다워~~~~
    사랑하는 님들, 모두 모두 행복한 하루 되세요. ^^*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 가장 먼저 나타난 현상입니다.

    백악관 홈페이지에서 [동성애자 권리]에 관한 페이지가 삭제되었습니다.

    https://goo.gl/1oEBeU


    백악관 LGBT 권리 문서가 사라지다.


    이제 권력 이양이 시작되고 있다.

    먼저 백악관 홈페이지에 있던 몇몇 페이지가

    일부는 바뀌고 있고 또다른 일부는 완전히 사라지고 있다.


    그중의 하나가

    레즈비언(Gesbian,), 게이(Gay), 양성애자(Bisexual)

    그리고 성전환자(transgender) 권리에 대한 것이

    사라진 것들 중에 하나이다.


    트럼프 정부가 들어선지 이제 한시간 지난 시간에

    백악관 홈페이지는 트럼프 정부에 의해 대치되고 있다.

    더 이상 홈페이지의 과도기는 없다.


    이제 백악관 LGBT 링크는 완전히 사라졌다.

    오바마 정부는 백악관 홈페이지에 LGBT페이지를

    게이와 성전환자들을 위한 주요 입법부 업적으로

    그리고 역사적 승리의 하나로 강조해 왔다.


    이 페이지는

    “이것은 자살 충동으로 싸우고 있는

    LGBT 모임을 돕는 더없이 좋은 운동이다“라며

    게이들의 권리를 위한 어떤 운동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이글에서 보듯이 이 운동은

    “민권 강화 페이지(Strengthening Civil Rights)"

    의 문서 보관서로 옮겨졌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바뀌어야만 한다.

    그러나 LGBT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완전히 사라진 것만은 분명하다.



    자료제공: 차학연 번역팀

     

    가져온 곳: 김동욱 500 닷컴

    세계는 지금 이스라엘의 진실을 모른다!

    - 라이언 존스 (Brad TV) -


    전 세계에서 미국 워싱턴 다음으로
    기자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도시, 예루살렘
    하지만 기자들 대부분이 진실이 아닌
    자기 입맛에 맞는 잘못된 정보를 보도한다.


    그에 맞서서 크리스천의 눈으로 바라본
    이스라엘을 전하는 이스라엘 투데이의
    편집장 라이언 존스와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반기문, 한기총 예방…'신천지ㆍ통일교' 연루설 해명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한기총 등 교계연합기관을 차례로 방문해, 신천지와 통일교 등 자신을 둘러싼 이단 시비에 대해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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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한기총 이영훈 대표회장과 만난 자리에서 신천지·통일교 등 이단 연루설에 대해 해명했다.ⓒ데일리굿뉴스

     

    "종교계 역할 중요…이단 연루설은 근거 없는 비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24일 오전 10시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이영훈 대표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그분들(IWPG 김남희 대표, 세계평화여성연합 문난영 전 회장)의 부탁으로 사진을 찍어줬을 뿐 개인적 친분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의혹이 불식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반 전 사무총장은 "매년 3월 8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여성의날이다. 이날 행사에는 전 세계 수천 명의 여성지도자들이 모이며 그곳에서는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내게 와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분들(김남희, 문난영)이 내게 사진 요청을 했을 때 한국인 여성이라 반가워하기는 했지만, 신분이 무엇인지, 이름이 무엇인지도 기억할 수 없다"며 "특히 그 이후로는 개인적 만남을 가진 적도 없다"고 해명했다.

     

    반 전 총장은 이 자리에서 '사회 통합과 일치'를 위한 개신교계의 역할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개신교계가 앞으로도 사회 발전에 기여해주길 바란다"며 "민족의 화해와 통합, 높은 시민정신을 함양하는 데 종교지도자들이 함께 나서주길 부탁한다"고 전했다.

     

    이에 이영훈 대표회장은 "무엇보다 우리 사회는 소외계층을 돌아보는 일에 더욱 힘을 내야 한다"며 "개신교계는 200만 다문화가정을 비롯한 소외된 이웃들과 함께 이번 어려움을 극복하고 더 나은 내일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 사회 양극화 현상은 보수와 진보가 하나되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라며 "양 측의 입장을 모두 대변해 조화를 이루는 대권주자가 되길 바란다"고 조언했다.

     

    반기문 전 총장은 본인이 '성 소수 동성애자를 지지한다'는 소문에 대해서도 해명을 이어갔다.

     

    그는 "성소수 동성애자들의 행위를 지지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인권과 인격이 차별돼서는 안 된다는 의미"라며 "유엔헌장과 만국인권선언에도 나와있듯이 성별, 종교, 연령, 국적 등에 있어 인간이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뜻으로 그런 발언을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반 전 총장은 이날 한기총을 비롯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총무 김영주), 한국교회연합(대표회장 정서영 목사)을 연이어 방문했다. 지난 20일에는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불교계)과 면담을 가졌고 설 연휴 이후에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염수정 추기경을 예방할 계획이다.

     

    이에 정치권 일각에서는 "반 전 총장이 종교지도자들을 차례로 만나며 '반짝 표심'을 구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으나, 반 전 총장은 "어떤 의도가 있는 게 아니라 종교적 지도력을 부탁하려고 왔다"고 밝혔다.

     

    홍의현 ⓒ 데일리굿뉴스

    가져온 곳: USA 아멘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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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삐가 풀린 망아지 같고, 궤도를 벗어나 끝없이 추락하는 행성을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아슬아슬하고 위태위태한 기독교계의 현실이, 2000여 년 전, 아기 예수가 오시기 전의 그때 그 시대나,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지금 현 세상이나 캄캄한 암흑기에 진입한 것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곳곳에서 교회를 지탄하는 목소리 드높아 가고, 세상의 빛으로 밝게 빛나야 할 등불로서의 교회가 점점 퇴색되어 그 빛을 잃고 캄캄하여진 지 이미 오래다.
     
    사람의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이끌기 위해 누구보다 먼저 청결하고 정직한 삶으로 본을 보여주어야 할 영적 지도자들 중, 모두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많은 사람이, 기준도, 잣대도, text도 주어지지 않았던 암흑기, BC시대, 예수님 오시기 전 약 400여 년 전 그때 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혼돈하고 공허한 길, 넓은 길, 어그러진 길로 달려가고 있음을 보면서 안타깝다. (필자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기에 더욱 안타까운 마음임을 고백한다.)

    무엇 때문일까? 지금은 그때 그 시대와 분명히 다르지 않은가? 무엇보다 신구약 66권으로 잘 엮어진 정경, 하나님의 말씀이 손에 들려져 있는 축복의 시대에서 사는 우리다. 그럼에도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왜일까? 주님께서 두 번 오시기 전에 일어날 한 징조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겠으나, 더 근본적인 이유를 찾으라면, 무엇보다도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의 책임이 크다 하겠다.

    현대는, 주님의 말씀을 지켜나가려는 사람들보다 물질에 마음을 빼앗겨 맘몬 신에게 절하는 종교지도자들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십일조가 무슨 축복의 바로미터라도 되는 듯, 앞에서 풍월치는 그들의 욕심은 바벨탑만큼이나 높아가더니 결국 ‘십일조 폐지 운동이 곧 개혁이다.’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오늘 이 지경까지 몰고온 것이 아니겠는가?

    그뿐인가? 절제되지 못한 명예욕, 성욕, 인간의 본능으로 유혹하는 사단의 덫에 걸려서 사정없이 넘어진 목회자들이 홍수처럼 쓸려가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뒤흔들어 댄다. 또한 근세에 일어난 ‘자유주의 사상’ (자유주의 사상: 신학의 토대를 인간의 경험에 두고, 성경을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쓴 책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에, 성경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보아 성경에 나온 내용이라도 이성에 맞지 않는다면 거부하는 사상이다.)

    다음은, 생의 바퀴를 돌리며 고달픈 삶을 영위하느라고 성경을 제대로 읽지 못하여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잘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 헛점을 노려서 깊이 파고 드는 이단사설이 고달프고 굳세지 못한 이들에게 유토피아를 약속하며 어리석은 영혼을 유혹하고 사냥질 해간다.

    이렇게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삯군 목회자들의 횡포(?)를 견디다 못한 어느 성도님은 몇몇 자신을 따르는 성도들을 이끌고 교회를 뛰쳐나와 ‘평신도 교회’라는 새로운 개념의 교회를 세우고 자기 자신이 지도자, 목자가 되어 어두운 개신교를 바로잡아 보겠다고 외친다. 교계 지도자들이, 신학교가, 신학생이 모두 다 변질되었으니, 변질되지 않은 내가 어지러운 기성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모토는 잘못된 개신교의 시스템(system)을 갈아엎어야 한다는 굳은 의지를 불태우는 새로운 물결이다.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발상이지만, 놀랍게도, 현 교계의 지도자들에게 상처받은 수많은 지성인 성도들의 동의를 얻는 것 같고, 이 운동은 꽤 설득력을 지닌 듯, 여기저기 활화산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누구를 나무랄 수 있겠는가? 현실이 그러한 것을…

    변질하여가는 현 교계의 문제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으며, 목회자, 성도들의 들어나는 비리는 암덩이처럼 퍼지고 누룩처럼 번져 모든 교계를 잠식시킬 것만 같은데, 말씀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 어떤 해결책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대안이라고 여기 저기서 내어놓는 안건들이란 미흡하기 그지없고 오히려 교계의 분열만 획책하기 딱 알맞은, 아주 조잡한 것들 뿐이다.

    또 자유주의, 인본주의 사상에 젖은 사람들은 교계가 재앙을 만나게 된 원흉을 “십일조”에 두고 “개혁’이란 미명하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거나 혹은 난도질하며 폄훼하기도 한다. 이대로 더 나가다가는 우리 기독교의 밝은 미래는 기대하기 어렵다. 정말 어떤 큰 재앙이 몰아닥쳐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고 한 치 앞을 가늠하기 어렵고 두려운 현실이다.
    "기독교 이대로 가다가는 안된다. 기독교계는 개혁되어야 한다”, 의식 있는 성도들의 거센 목소리가 질풍처럼, 성난 물결, 우는 파도소리처럼 이곳저곳에서 거세게 불어친다. 다 옳은 말이다, 동의한다. 아무렴, 우리가 이대로 나가다가는 안되고말고…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모두 함께 고민하며 함께 풀어나가야 할 과제가 아닌가 싶다. 먼저, 우리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는 교계 지도자들의 자질 개혁이 절실히 요구되는 현실이다. 다음은 내가 개혁하자. 너와 나 우리 모두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자. 자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엇을 개혁해야 할 것인가? 방법론이 문제다.

    개혁(改革, reformation)을 먼저 알아야
    “제도나 기구 따위를 새롭게 뜯어고침” 이것이 개혁의 사전적 의미이다. 잘못된 관행을 바로 잡고 잘못된 종교의 교리를 정립하는 것이라고 한다. 현실에서 개혁되어야 할 잘못된 관행은 무엇이며 우리 기독교 안에서 잘못된 제도나 기구는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알아야 한다. 주먹 구구식의 개혁, 말만의 개혁은 분란만 일으킬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금껏 우리가 무흠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굳게 믿어오던 성경, 우리 신앙생활의 잣대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 옷을 재단하는 재단사는 옷을 재단하기 전, 먼저 ‘패턴’이 있어야 하고, 건축가는 빌딩을 짓기 전 ‘조감도’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세상 물질 세계에서도 무엇인가 하려고 하면 그에 합당한 ‘패턴’이나 ‘조감도 (architecture)’가 필요하다. 하물며 사람의 영혼을 바른 길로 이끌자고 호소하는데 그만한 ‘조감도’ 나 ‘잣대(Cannon)’가 없이 개혁하자고 목소리만 높인다고 되겠는가? 이런 말이다.

    게다가 완전무결하다고 할만한 ‘척도’요 ‘잣대’(Cannon)이며, 인생이 나가야 할 여정의 지도(map)며, ‘조감도(architecture)를 훼손시키고서야 어떻게 제대로 된 개혁이 이루어질 수가 있다는 것일까? 변질과 개혁을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현 교계의 제도에 문제가 있는가? 그것도 아니다. 제도, 시스템(system)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개혁교회는 거의 완벽한 수준이다. 우리 개혁교는 그리스도의 피를 기초로, 무수한 믿음의 선조들의 피흘린 발자취 위에 세워졌고, 오랜 세월을 두고 내려오면서 정과 반을 거쳐 오늘에 이른, 그야말로 더할 수 없이 멋진 교리와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기를 두고 흘러넘치는 아름답과 완벽한 생명을 소유한, 자랑스런 종교라면 종교인 것이다. (실상,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산 생명 그 자체가 아니던가!)

    성도의 삶이 변화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지, 그 맛이 변질하면 안되는 것이건만, 성도의 삶이, 종교지도자의 신앙인격이 타락하고 변질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몇 구절을 변개시키고 잘라낸다고 해서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그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 변화다. 말씀을 변질시키거나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사수하는 것이 개혁이다! 말씀 안에서 개혁되어야 하고 새로워져야 한다. 누가(who)?= 내가. 무엇이(what)? = 나의 삶, 나의 인성이, 어떻게(how)? =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러기에, 성도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불리우지 않았던가? 프론티어(the frontier), 앞서가는 개척자 선구자라고 불리우지 않던가? 우리는 앞서가는 개척자의 정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성령으로 변화된 성도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변화는 거듭난 그리스도인 삶의 표증이며 열매다. 열매없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지울 것 뿐이다. 교계 지도자들, 성도라 허울뿐인 이름을 지닌 변질한 우리들의 추한 모습, 무서운 일이다. 죄없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탓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종교 개혁, 그 시금석(試金石)
    “1517년 어느 쌀쌀한 가을날 오후, 성경을 연구하던 어떤 작달막한 수도사가 교회의 문 앞(지역 게시판)에 학문적인 토론을 위한 일련의 논제를 못으로 박아 내걸었습니다. 그는 장차 개신교 종교개혁으로 알려질 이 사건을 널리 퍼트릴 사람들이 학자가 아닌 일반 대중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이 수도사(신부)의 이름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입니다.

    루터가 진지하게 고민했던 중요한 문제는 면죄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판매했던 당시 로마 교회의 모습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 기독교권에서 가장 웅장한 건축물이었던 로마 베드로 성당의 준공이 경제적 난관에 봉착하게 되자, 교황은 죄에 대한 그리스도의 용서를 성당 완공을 위한 건축 분담금과 맞바꿔 버렸습니다. 교황의 통치 아래 있던 사람들 가운데 도미니칸 설교자였던 테첼(John Tezel, 1455-1519)이 면죄부 판매에 대해서 가장 교활했습니다. 심지어 테첼이 여행 중에 불렀던 사중주곡조차도, '동전이 금고 안에서 원을 그리며 땡그랑 소리낼 때, 한 영혼이 연옥으로 부터 튕겨져 나온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전해질 정도로, 그는 면죄부 판매에 열을 올렸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자신의 취향대로 '동전이 금고 안에서 소리를 낼 때, 교황은 더욱 부유해진다' 등과 같은 유사한 곡들을 남겼습니다.- JuNick님의 댓글 중

    루터가 종교를 개혁했다는 것은 세 살 먹은 어린 아이도 안다. 루터의 개혁은 완벽하리만큼 성공을 거두었다는 증거일게다. 그렇다면 그 루터가 외친 소리를 한 번 들어보자. 그는 개혁이 무엇이라고 외쳤는가?

    루터의 종교 개혁 5대 원칙(原則)
    1) 오직 성경(Sola Scriptura) - 성경만이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유일한 권위는 성경에 있다
    2)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 구원의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효를 덧입는 것뿐이다.
    3) 오직 은총(Sola Gratia) -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다.
    4) 오직 믿음(Sola Fide) - 구속의 은혜는 믿음을 통하여 받을 뿐이지 다른 어떤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
    5)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 모든 업적과 구원의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다음은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特徵)이다. 그 또한,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및 교회 중심적 신학을 가리킨다.

    1) 하나님 중심(God-centered)
    인간이 중심일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자연과 인간과 우주의 통치자이시며, 구원은 전적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것이 하나님 중심 사상이다.

    2) 성경중심(Bible-centered)
    성경 외의 그 어떤 것도 신앙의 표준일 수 없고 신학의 원천일 수 없다. 개혁주의는 “성경은 성경 자신이 해석한다”(Scripturae scriptura interpretum)는 원리를 고수한다.

    3) 교회중심(Church-centered)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적 삶을 추구하며 교회에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려고 힘쓴다. 지상교회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도 교회의 완전을 향한 추구를 경시하지 않는데, 이것이 교회개혁운동이다. -개혁주의마을

    개혁주의의 (튤립)이라고도 하는 5대 교리 역시 하나님 중심 사상을 기본 원리로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떤 특정 단체나 교리를 지지하자는 뜻으로 쓰는 글이 아니고 진정한 의미의 개혁이란 무엇인가? 개혁을 바로 알자는 취지에서 쓰는 글이기에, 칼빈의 5대 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 튤립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우리가 개혁을 부르짖기 전, 개혁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알아야 하고 어떤 부분을 개혁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보아야 한다. 언젠가도 한 번 말한 기억이 있지만, 재론하건데, 어떤 단체건 개인이건 뛰어 넘어야만 할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이란 것이 있고, 또 인간이 결코 넘어서는 안 될 어떤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이란 것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기준선(基準線(base line))으로 정해진 틀이 어렵기는 해도, 모두 인간 삶의 질을 높여주기 위해서,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 짜여진 것이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면서까지 필요한 것은 결코 아니란 것이다.

    특히, 종교지도자들의 도덕적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은 다른 그 누구의 것보다 높아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사회가, 교회가, 성도가, 그들에게 거는 기대다. 그럼에도, 정작 많은 종교지도자가 이런 우리 모두의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인간이라면 결코 넘어서 안 될 도덕적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을 외눈 하나 까딱 않고 넘어서기도 잘하고, 들키지만 않으면 그만이란 듯 당당하기도 하다. 들켜도 회개함 없이 “나는 용서함 받았으니, 너도 용서하라.” 가히 협박성(?) 망발을 일삼는 것을 보면서 그 파렴치함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이미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성도의 신앙양심마저 마비된 것인가, 화인맞은 것인가? 더욱 큰 문제는 오늘날 일부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말씀마저 그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을 넘어서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적 교만이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될 만큼, 수많은 목사님이 자신의 인기와 유익을 위해서라면 성경 말씀을 뛰어넘는 것쯤은 예사롭게 여기는 세상이 된 것 같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실패한 이유를 여러 가지로 들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은 기록한 말씀을 넘어간 것이라고 본다. 하여,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Do not go beyond what is written)." (고전 4: 6 중반 절) 바울 사도가 간곡히 권하고 있다. 

    우리(성도)가 개혁을 하되 개혁의 시금석(試金石)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경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개혁해야 한다. 인간 자신이, 내가 개혁해야 한다는 말이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넘어서거나 가감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인생의 잣대가 되고, 천국가는 길의 약도가 되며, 안내서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훼손시키고서야 어떤 개혁을 하고자 한들 그 개혁이 올바를 수가 있을까? 하는 것이다.

    성경은 귀와 절과 각이 서로 맞다. 구약에서 말씀되어진 내용이 신약에서 나오고 있으며 신약에서 인용되는 글이 구약에서 출처 된다.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인간 구원이다. 성경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한 사람은 각계각층의 사람이지만,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불변의 진리다!

    성경은 성령에 감동되어진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받아 기록하였다. (딤전 3: 16절 참조) 때문에 각각의 시차와 역사와 문화를 달리하여 기록된 예언이 수천 년이 지나서도 이루어지고, 성경은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경을 풀기 위하여는 성령의 감동함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이다.

    성경은 인간이 자신의 뜻대로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벧후 1: 20-21)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 다른 사상을 주입시키려 하는 것은 영적 교만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성경을 가감하려고 시도하지 마라. 십일조 낼 형편이나 믿음이 되지 않으면 내지 않아도 된다. 구원과 십일조 상관관계 없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변질시키거나 빼거나 더하려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진정한 개혁은 내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세상에 찌들리고 파묻혀서 진리를 외면하고 있던 그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진정한 개혁이다! 개혁의 시금석을 저버리고 무엇을 어떻게 개혁할 수 있다는 것인가?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개혁의 시금석이 되는 성경 말씀이 우리 손에 있음에도 그 성경을 입맛대로 풀이하거나 가감하는 자유주의신학으로 말씀을 호도하는 것이 개혁이라니, 어림도 없는 소리다.

    개혁가들을 위한 사랑의 권면:
    1. 십일조 강조하거나 강요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그런 목사들에게서 떠나야 한다.
    2. 십일조가 축복의 바로미터라고 떠벌리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그런 목사들에게서 돌아서야 한다.
    3. 내게 짐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바꾸자고 하여 말씀을 가감(加減)하거나 재단하여 잘라내는 자유주의 신학은 더욱 위험하다. 결코 따르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더 큰 재앙으로 그대를 이끄리니....
     
    지구가 궤도를 벗어날 수 없고, 양복 재단사가 '패턴'없이 좋은 옷을 만들 수 없고, 성도에게 훼손된 말씀은 생명을 줄 수 없고 쓸모 없는 휴지로 만들고서야 어찌 그분의 낯을 뵈올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바쳐서 그 흘린 피의 발자취 위에 세워진 기독교의 근간이요, 우리 생명의 양식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하는 자리는 더욱 위헙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성도가 진정한 개혁을 논할 수 있는 자격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직 성경(Sola Scriptura)!!!, 힘들지라도 성경 말씀에 내가 순종하며,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개혁이요, 성경이 개혁의 시금석(試金石)이다! 진리는 사수되어야 한다!!
     
     
    "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 3: 10-11)

     

    출처: 목양연가: 글/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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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 43장) 누구인지 모른다면

    젊은 시절 주님을 몰랐을 때 성경은 고리타분한 책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호기심에서 창세기 1장 첫머리를 읽어보았을 때 느낀 것은 무슨 종잡을 수 없는 황당하고 괴기스러운 이야기라는 것이었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고? 무슨 마술이야?" 그런데 나중에 어떤 분이 성경보다 더 재미있는 책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제가 예수 믿고 나서 다시 처음부터 읽어나간 성경은 제가 읽은 제일 재미있는 소설책 보다 더 재미있는 책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쓰신 대하소설을 넘는 장대한 초대하소설이요 우주처럼 장엄한 희곡이며 어떤 사랑의 편지보다도 더 강렬한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요셉이 미워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세겜과 도단까지 먼 길을 찾아온 그를 죽이려다가 애굽의 노예로 팔아버린 형제들, 그 형제들로 인하여 타국에 끌려가 종이 되고 감옥에 갇히는 갖은 고생과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는 천하제일의 권세의 자리에 오른 요셉의 드라마틱한 삶, 그리고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 닥친 극심한 가뭄과 기근, 그 형제들이 애굽총리가 된 요셉 앞에 나타나고, 그가 요셉인 줄은 꿈에도 모르는 형제들과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오도록 만드는 미움과 사랑의 줄다리기, 이러한 소설 아닌 소설의 줄거리와 구성은 어떤 소설가나 극작가도 흉내 내지 못 할 것입니다.
     
    야곱이 기근 속에서도 죽어도 못 보내겠다던 베냐민을 결국 포기하고 형제들에게 딸려 보냄으로 드디어 요셉은 베냐민을 만나보게 됩니다. 요셉은 베냐민이 온 것을 보고 그들을 모두 자신의 집에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정체를 숨긴 요셉의 의도를 알지 못 하는 형제들은 지난 번 곡식자루에 넣어져 있던 돈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떨며 그 자리에 나온 요셉 앞에 예물을 드리고 엎드려 절합니다.
     
    요셉은 여전히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너희 아버지 노인이 평안하시냐, 생존하셨느냐.’고 안부를 확인합니다. 베냐민을 가리켜 ‘이 아이가 너희의 작은 동생이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베냐민에게 ‘소자여, 하나님이 너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하고는 아우 베냐민을 인하여 마음이 타는 것을 누르지 못 하고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나옵니다. 그리고 그렇게 형제들의 연회, 식사자리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요셉 따로, 형제 따로, 아직 연합되지 못 하고 하나 되지 못 한 잔치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만나기는 했으나 아직 참으로 만나지는 못 한 채 말입니다.
     
    그들은 식사자리에서 요셉의 앞에 나이 순서대로 앉혀집니다. 그들을 모두 알지 못 하고서야 어찌 열 한 형제들을 모두 나이 순서대로 틀림없이 앉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애굽 총리의 정체를 알지 못 하는 그들은 이 일을 다만 이상하게 여길 뿐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그들에게 식물을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의 다섯 배나 주었습니다. 이 역시 베냐민에게만 왜 특별히 그러는지 그들은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요셉의 앞에 앉아서 함께 즐거워하였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즐거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아시는데 내가 주님을 모른다면 즐거워하는 것도 참 즐거워하는 것이 아닐 터이요 주님과의 만남도 참 만남이 아닐 것입니다. 요셉이 타는 듯 하는 마음으로 급히 안방을 찾아 울고 나왔어도 그 형제들이 몰랐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모른다면 주님의 마음이 어떠신지, 주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며 애태우며 울고 계신지도 까맣게 모를 것입니다.

    .

    루터의 회심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길을 따라(4)

     

    젊은 수도사 루터의 고민 - “영혼의 구원 문제” 

     

    젊은 수도사 루터가 고민하는 문제는 구원의 문제였다. 내가 죄 사함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가 어떻게 하여야 거룩하신 하나님을 우러러 볼 수 있는가? 나같이 추한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을까? 이러한 것들이 바로 루터의 마음과 생각을 억압했던 문제였다. 루터는 하나님께 열심히 고해를 했지만 자신이 지은 죄를 다 고백하지 못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을까 늘 두려워하였으며, 중세적인 공로 신학 체계 아래서 아직도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가운데 늘 영적인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루터는 중세교회의 성례와 행위에 의한 은혜를 통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완전한 의의 수준까지는 아직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때 루터가 이해한 하나님의 의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공로를 쌓아서 얻는 능동적인 의였고, 내가 의롭게 되는 의로움이었다. 루터는 복음 속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즉 죄인인 우리를 깨끗하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의가 복음 안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의 의미를 완전히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고 루터는 하나님의 진노는 알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알지 못했다. 

     

    중세신학은 인간이 구원에 필요한 공로를 쌓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으며, 교회가 규정한 어떤 일들을 행하라고 한다. 그래서 루터는 성실한 수도사로서 자신의 힘으로 선행을 쌓고 수도원의 엄격한 훈련과 고행을 거듭하였고 그 대가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 보려고 몸부림쳤다. 그는 자신을 구원하는데 필요한 일은 무엇이라도 열심을 다했다. 루터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 지려고 노력을 많이 했고, 죄 사함을 받기 위하여 교부들의 전통들과 교황청의 법령들에 집착했으며, 성인들의 공로에 의존했다. 

     

    또한 가톨릭교회 지도자들은 성자들의 공로가 자기 자신을 구원하고도 남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구원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고 가르쳤으며, 또한 성자들의 유물이나 유골 역시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쳤다. 루터는 이러한 유물들이 수없이 많고 거룩한 순교자들의 피가 철철 넘쳐흐르는 로마를 앙모했으며 다른 성자들의 도움을 얻어서라도 구원을 이루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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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터하우스(원래 어거스틴 수도원 건물이었음)     © 뉴스파워 

     

    루터의 로마 여행 

     

    로마 교황청이 수도원을 중앙 집권화 하려 하자 수도원장 요한 폰 슈타우피츠는 루터를 어거스틴파 수도원을 대표하여 로마로 파송하였다. 그리하여 1510년 가을, 루터는 어거스틴 수도원파의 중요한 사명을 띠고 로마로 여행하게 되었다. 그는 큰 기대를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로마순례의 길을 향하여 떠났다. 그의 업무상의 여행은 동시에 로마 기독교 성지 순례가 되었다. 

     

    로마는 성물을 포함하여 수많은 보화가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교회 지도자들이나 교도들에게 로마 순례는 하나님의 큰 소망이자 특권이었다. 왜냐하면 성자들의 유해를 숭배함으로 큰 은총을 입기 때문이다. 로마의 칼릭스투스(Calixtus) 성당의 지하실에는 40명의 교황의 유해와 7만 6천명의 순교자가 묻혀 있었다. 이러한 성물이 많은 로마를 순례하는 것은 루터에게 커다란 축복이었다. 루터는 그러한 곳에서 수도단의 업무를 하면서 순교자들의 무덤 방문과 여러 성당에서의 미사 집행 및 참회, 지하 동굴과 유물들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루터는 가톨릭교회에서 배운 대로 고행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가르침에 따라 1511년 로마 라테란성당의 ‘스칼라 산크타(Scala Sancta)’라는 거룩한 계단을 오르며 고행했다. 이곳은 28개의 대리석 계단으로서 ‘빌라도 계단’이라고도 불렀다. 당시 이 계단을 무릎을 꿇고 오르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루터는 라틴어로 된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한 계단씩 오르면서 맨 위에 까지 도달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나중에는 피멍이 들었다. 루터는 죄 사함 받기 위해서 이러한 일들을 해 보았는데도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는 나의 죄를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없는 것이었다. 당연히 기쁨이나 평강도 없었고 구원의 확신도 없었다. 루터는 자기의 괴로운 영혼을 만족시킬 영적인 평안도 얻지 못했다. 

     

    그때부터 루터는 순례나 고행이 

     

    더 나아가 루터는 로마 교황청과 고위성직자들의 사치와 타락상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였으며, 또한 사제들이 사창가를 드나드는 모습과 로마에 만연한 부패를 보면서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특히 로마교회 사제가 매우 형식적이고 성급하고 경건함 없이 미사를 끝내 버리는 것을 보면서 크게 실망하였다. 로마 방문을 통해 받았던 루터의 인상은 로마는 거룩한 도시가 아니라 타락하고 부도덕한 도시라는 것이었다. 그는 오히려 죄책감에서 자유롭고 싶다는 갈망만 더 강해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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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02년에 설립한 비텐베르크 대학교     © 뉴스파워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 루터 

     

    1512년 29세가 된 해에 루터는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이후 루터는 1502년에 세워진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교에서 신학교수로서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1513-1515년 까지 시편을 가르쳤고, 1515-1516년에는 로마서를 강의했다. 로마서 강의 이후에 루터는 1516-1517년 까지 갈라디아서를 가르쳤고, 1517-1518년에는 히브리서 강의를 하였다. 그는 가르치기 위하여 성경공부에 몰두하게 되었는데 이 성경들은 장래 종교개혁자의 사상 형성에 기초가 되었다. 

     

    수도사로서 시편 찬송으로 매일의 삶을 살아가는 루터에게 첫 번째 선택으로서 시편 강해는 매우 자연스러웠다. 영혼의 보물들로 가득하고 자신의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었던 시편을 루터는 ‘작은 성경’이라고 불렀다. 그 시편에서 신앙의 영적인 교리를 많이 배우게 되었던 루터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원수들에 대한 태도, 그리고 고난을 당할 때의 삶과 태도들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도움만을 갈망하는 모습을 배울 수 있었다. 

     

    또한 루터는 시편을 강해하면서 의한 하나님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가지게 되었으며, 특별히시편 속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시 22:1-2, 시 31:1, 시 71:2)에 대해 많은 묵상과 연구를 하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의를 죄 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 해석을 했는데 그 이유는 마지막 심판의 날에 어떤 죄인도 예외 없이 가혹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진노하시고 벌을 주시는 무서운 하나님으로 이해를 했으며 동시에 끝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루터의 탑 체험 (tower experience) -이신칭의 교리를 깨달음 

     

    교수 루터는 비텐베르크에 있는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살았다. 그 수도원의 탑 속에 난로가 딸린 그의 연구실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 연구실의 이름을 따라 ‘탑 체험’이라 불리운다. 이곳에서 루터가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고 해서 ‘복음적 해방’이라고도 한다. 사실 이 근본적이며 개혁적인 이신칭의 교리를 깨달았던 탑 체험이 언제 일어났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대부분의 교회사 학자들은 1513년에서 1515년 사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지만, 또 다른 학자들은 사실상 1517년 이후에 발생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루터가 하나님의 의에 관한 이해를 하면서 그 매듭을 푼 장소는 강의 준비를 위해 제공된 수도원 내 탑 안에 있는 자신의 따뜻한 공부방이었다는 것이다. 후에 이 탑은 비텐베르크 성의 부대시설을 확장하면서 없어졌다.

     

    시편을 마치고 루터는 로마서 강해를 시작했다. 1515-1516년 까지 강의했던 로마서 강해는 루터의 생애에 일대 전환을 가져온다. 그가 로마서를 읽은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로마서 강의를 준비하는 중에 핵심 단어는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였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 문제로 오랫동안 영적으로 고투하여왔으며, 그동안 엄청날 정도로 루터 자신을 불안하게 했던 주제였다. 루터는 어떻게 공의의 하나님이 동시에 자비로우실 수 있는지를 고심하였다. 그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로마 교회나 신앙의 선배들의 가르침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빛을 던져주고 있었기 때문에 루터는 밤낮으로 곰곰이 생각했다. 

     

    루터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얻는 데 가장 핵심적인 성경구절은 로마서 1장 17절이다. 그는 이 말씀을 가지고 묵상하고 연구하게 된 것은 복음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의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즉 칭의(Justification) 문제와 씨름하게 되었다. 신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라는 개념이 루터로 연구하도록 한 것은 바울이 하나님의 의의 계시를 복음의 내용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루터는 이제 서야 하나님의 의가 형벌 개념이 아니라 긍휼과 용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시작했다. 즉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취하신 의요,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의요, 이 의는 하나님이 죄인을 향하여 베푸시는 선의요 호의를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복음에 대한 통찰력을 얻었다. 

     

    로마가톨릭의 오류는 선행을 열매가 아닌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 것이다. 하지만 루터는 인간은 선행을 통해서 더 나은 사람으로 되거나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선행을 해도 여전히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의인은 선한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의로 산다는 것, 즉 인간은 선행이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붙잡게 되었다. 그는 복음을 참으로 이해하였다. 

     

    성경에 계시된 내용으로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인간의 공로가 아닌 그리스도의 공로라는 빛 아래서 보게 되었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우리에게 전가됨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인정받는다는 사실을 붙잡았다. 즉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통하여 우리를 보시면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포하셨음을 깨달았다. 이처럼 루터는 복음만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며, 복음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신칭의를 받는 것이 곧 구원임을 확신하였다. 드디어 루터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의신칭의 교리를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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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텐베르크 거리     © 뉴스파워 

     

    루터의 회심 -복음의 진리를 재발견함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의를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통해 성취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의 의를 소유하는 것은 믿음으로만 되기 때문에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 그리고 그 의를 소유하는 수단인 믿음마저도 선물로 주시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오직 은혜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구원은 100% 하나님의 은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값없이 주시는 의를 깨달은 루터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보았고, 십자가에서 사탄과 악한 영들의 머리를 깨트리신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러므로 루터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의,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통하여 얻어진 의라는 사실을 깨닫고 중세의 하나님의 의와 결정적인 결별을 하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의가 성취해야 할 요구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 받아들이는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러한 성경의 새로운 계시의 빛이 비추자 모든 두려움들이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 이신칭의의 신학이 루터의 마음에 자리를 잡고, 평안을 느끼고 영적인 안정감을 갖게 되었다. 결국 그의 고통의 매듭이 풀렸다. 그는 완전히 다시 태어나게 되었고, 기쁨이 넘쳐서 견딜 수 없었다. 하나님의 의를 통해 영혼의 평안과 삶의 능력을 얻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으로 선포하셨으니 더 이상 지옥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은 루터에게 믿음으로 얻게 되는 하늘의 보화가 되었고, 낙원의 문이 활짝 열려 천국으로 인도하는 문이 되었다. 루터는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은 종교 의식을 아무리 많이 행해도 죄인이 전능하신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다는 복음의 진리를 재발견한 것이다. 즉 수 백년 동안 잠자고 있던 복음의 진리를 다시 찾은 루터에게는 그때부터 성경 전체가 완전히 달리 보였다. 이것이 루터의 회심이다. 어떤 학자들은 슈토테른하임에서 루터가 벼락 사건으로 인해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원한 것을 회심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필자는 루터가 이신칭의 교리를 깨달은 탑 체험 사건을 ‘루터의 회심’이라고 부르고 싶다. 루터의 회심 체험은 중세적 경건을 뒤집었다. 곧 바로 종교개혁의 불을 지피게 되었다. 

     

    김현배  ⓒ 뉴스파워

    가져온 곳/USA 아멘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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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칭의 없이 성화 이루려한 루터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길을 따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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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르틴 루터     ©뉴스파워

     

    어거스틴 수도원에 입문한 루터 

     

    1505년 7월 2일, 천둥 번개를 동반한 우뢰로 인해 슈토테른하임에서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원한 루터는 2주 지난 7월 17일에 성 어거스틴 수도원 (Augustinerkloster)으로 들어갔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라고도 불리우는 성 어거스틴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세워진 수도원이다. 

      

    에르푸르트에는 당시 약 2000 여개의 많은 수도원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루터가 입문한 어거스틴 수도원은 규율이 엄격하고 학구적이며 개혁의식이 일어나고 있던 곳이었다. 또한 어느 수도원보다도 더 엄격한 계율과 철저한 수도 생활을 요구했다. 

      

    이러한 수도원에서 루터는 허름한 의복과 소식, 기도와 명상, 낮 시간의 노동, 예배, 찬양, 미사, 고해성사, 매일의 의무, 음식을 조달하는 방법 등에 관 규칙들을 모두 감수할 것을 서약했다. 기독교 경건의 가장 고상한 형태인 수도원 생활에서 루터는 구원을 얻기 위해 수도사가 되어야 한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그의 수도원 서약은 제2의 세례이자 새로운 출발이었다.   

      

    루터는 수도원 생활을 상세히 규정해 놓은 원칙을 정확히 가슴에 새겼으며, 수도원장이 그의 뺨 위에 입 맞추는 의식을 끝으로 1년간의 수습 수도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루터는 수도원 입교를 축하하는 행사에서 머리 중앙부를 삭발했고, 검은색의 수도원 복장을 착용했다. 수많은 수도원 규칙들을 기억하면서 루터는 날마다 새벽 일찍 일어나서 기도와 시편 묵상, 성가, 독서, 미사, 하루 7번의 기도회 등을 마치고 밤늦게 취침에 들어갔다. 

      

    특별히 루터는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통해 자신의 죄를 뉘우쳤다.  철저한 신앙 교육을 시키는 수도원에서 루터는 신앙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고, 교육을 잘 받아 나갔고, 성경을 읽었다. 또한 그는 기도문도 열심히 암송했고, 자기 몸에서 귀신들을 축출하려는 소망으로 금식도 했고, 스스로를 채찍질하기도 했으며, 불을 지피지 않은 방의 추위도 견뎌 냈다. 그는 매일 정절, 청빈, 순종, 금식, 철야, 그리고 금욕적 극기까지도 하면서 인간 스스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갖은 노력과 애를 썼다. 그의 몸이 망가져가고 있었지만 그것이 자신의 선행이 쌓여가는 증거인 것처럼 생각했다. 만약에 수도사 훈련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한다면 루터는 틀림없이 천국에 갈 정도로 엄격한 수련을 쌓았다. 당시 루터는 얼마나 수행에 열심이었는지 만성 위장병에 걸렸다고 한다. 그는 여러 수도사들 중 가장 열심 있는 수도사였다.  

      

    이처럼 루터는 자신이 구원 받는 데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떠한 고행이라도 실천했다. 루터가 그처럼 몸부림치며 자신의 죄를 보상해 보려고 했지만 이 모든 수고로 마음의 평안을 얻을 리가 없었다. 날이 갈수록 그는 인간의 구원문제에 대해 심한 갈등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루터는 수도원의 엄격한 계율 속에서 기도와 찬송, 말씀묵상, 그리고 검소한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에 대한 확신을 얻고자 했다. 

      

    그러나 루터의 영혼에 대한 고뇌는 수도원에서도 해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몸부림은 더욱 심했다. 그는 불의했고 거룩하신 하나님은 의를 요구하셨다. 그동안의 충분한 공로와 충분히 쌓은 의로운 행위로도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루터의 문제는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였다. 그는 훗날에 깨닫게 되지만 당시에는 오랜 시간 동안 계속해서 성경에 없는 가르침과 관행을 겹겹이 쌓아 올리며 복음이라는 교회의 참된 보화를 은폐하고 있었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그는 수도사의 과정을 마쳤다. 루터는 1505년부터 1511년까지 이곳에서 수도사로 머무른 것으로 유명하지만 젊은 루터로 하여금 신앙에 대해 매우 고뇌하게 했던 현장이었다.  

      

    요한 폰 슈타우피츠와 루터의 만남    

     

    1506년 4월 3일, 수도원에 들어온 지 9개월이 지난 후 루터는 요한 폰 슈타우피츠 (Johann Von Staupitz, 약 1468-1524) 원장과 만남이 이루어졌다. 슈타우피츠는 중세 수도회의 최고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루터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슈타우피츠에게 자신의 크고 작은 죄를 모조리 고했다. 슈타우피츠는 일일이 열거하고 고백하고 사죄를 받을 수 있는 죄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잘못된 인간의 타락한 성품이 있음을 알려 주었다. 슈타우피츠는 루터의 관심을 개인적인 죄에서 인간의 본성으로 돌려놓는데 큰 도움을 주었고 죄에 대한 고민의 문제를 말씀을 통해서 찾기를 권고하기도 했다.   

      

    그 후 슈타우비츠는 루터에게 성경 연구에 매진하도록 인도하였고 특히 성경의 원전으로 씨름하게 하였다. 그리고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도록 권유했다. 루터에게 정식으로 높은 수준의 신학수업이 시작된 것이다. 루터는 이 수도원 생활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을접하게 되었는데, 후일 루터 신학의 핵심이 되는 하나님의 은총론과 성도들의 믿음을 강조하는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의 영향을 반영하는 것이다. 슈타우피츠는 루터의 신앙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준 인물로서 영적 스승이었고 사랑으로 길을 인도해 준 멘토 이기도 했다. 위대한 지도자 여호수아에게는 갈렙이 있었고, 위대한 전도자 바울에게는 바나바가 있었고, 위대한 루터에게는 자신의 영적 스승인 요한 폰 슈타우피츠가 있었다.  

      

    루터가 사제 서품 받은 에르푸르트 대성당

     

    수도사 과정을 마친 루터는 드디어 사제가 되었다. 에르푸르트 돔이라 불리어지는 성 마리엔 돔(Marien Dom)은 1278년부터 1400년까지 120여년에 걸쳐 지어졌으며, 위엄있게 에르푸르트의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있는 뾰쪽한 첨탑을 자랑하는 독일 고딕 양식의 걸작품으로 에르푸르트의 랜드마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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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터가 사제 서품을 받은 에르푸르트 대성당     ©김현배

     

    건물 전면에 있는 70 계단을 올라가면 나오는 대성당 내부는 숨이 막히도록 화려하고 아름다운 고딕양식의 제단이 보인다. 이곳 대성당에서 루터는 1507년 2월 27일 부제로, 그해 4월 4일 가톨릭 신부로 서품을 받았다. 신부가 된 사람은 이제 성만찬을 집전 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미사의 신비가 신부 루터를 경외심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사제 서품을 받은 후 5월 2일에 어거스틴 수도회 소속 교회에서 첫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는 교회 제단 앞으로 나아갔다. 한 신부의 인생에서 가장 축복받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미사를 집전하면서 거룩하시고 높으신 하나님께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죄인이 감히 입을 열어 말을 한다는 사실에 겁이 났다. 루터는 괴로웠고 공포에 휩싸였다.   

     

    장래 종교개혁자로서 여러 고뇌의 과정을 거치는 루터

      

    젊은 루터가 가장 혹독한 훈련을 받은 도시는 수도원으로 가득한 에르푸르트이다. 이곳에서 루터는 장래 종교개혁자로서 다듬어지기 위해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어거스틴 수도원에서의 엄격한 생활은 22세 루터로 하여금 신앙에 대해 매우 고뇌하게 했던 현장이었다. 다행히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영적 스승 요한 폰 슈타우피츠와 만남을 통해서 신학에 눈을 뜨게 되었다. 

      

    루터가 수도원에 들어간 지 2년 뒤, 그의 나이 24세 되었을 때 에르푸르트 대성당에서 신부로 서품을 받게 된 일은 파격적이었다. 또한 신부로서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신학박사 수업을 받을 수 있게 된 일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장래 종교개혁자 루터는 준비되어 갔다. 루터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이 놀라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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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터가 수도사로 들어간 어거스틴 수도원     ©김현배

     

    마음의 평정을 찾지 못하는 신부 루터

      

    루터는 하나님을 아는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며,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수도사로서 엄격한 규율 속에서 혹독하게 자신을 훈련시켰다. 사제 서품을 받고 신부로서 미사를 집전했다. 하지만 루터는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없었으며 그토록 갈망했던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했다. 루터는 인간의 행위로는 절대 의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과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우심만이 구원을 가져올 수 있음을 몰랐다. 

      

    또한 인간이 행한 최상의 선행조차도 하나님 앞에서는 냄새나는 쓰레기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16세기 루터의 치명적인 영적 문제는 계속 칭의와 성화를 혼돈하면서 칭의 없이 성화를 이루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18세기 존 웨슬리 역시 그가 회심 전에는 칭의와 성화의 개념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신앙의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루터는 인간의 구원은 어떤 공로로 이루어지는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를 깨닫지 못하는데 있다. 루터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하심이 절실히 필요했다. 

     

    베를린=김현배  ⓒ 뉴스파워

    가져온 곳/ USA 아멘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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