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직 목사님의 목회 처신 법 두 가지만.

한경직목사 하면 교계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이 거이 없을 만큼 유명한 어른이시다. 미국 프리스톤 신학교에 가면 한 목사님의 두루마기 입으신 영정이 있다. 거기에 모셔진 분들은 장로교회를 가장 빛내고 공헌이 있는 분들에게 수여되는 템플상을 받은 분들이다. 목사님이 템풀 상을 받은 것은 그 당시로서 세계에서 장로교회로는 최고의 영락교회를 만드셨기 때문이다.

필자는 신학교 다닐 때 기회가 되면 늘 영락교회를 갔다. 이유는 설교가 너무 멋이 있고 생명력이 넘쳐 감동을 주었고 갈증나는 심령에 시원한 생수를 먹여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어른의 설교는 3대지 “원” 포인트 설교이다. 1대지, 2대지, 3대지를 구분하여 설교 한 다음 “원” 포인트로 결론을 맺을  때는 그의 몸짓은 적을 쳐부수는 용맹한 장군 갖고  그의 음성은 깊은 산속 호랑이가 큰 소리를 부르짖는 것 갖고 청중들의 가슴에는 그 메아리의 산울림이 가슴을 치는것 같았고 교회를 떠나 집에 올 때까지 가슴은 시원하였고 큰 은혜의 보따리를 안고 오는 것 같았다.

그러기에 청중들은 그의 설교에 빨려 들어갔고 구름떼처럼 몰려 들었다. 그의 설교에는 생명력이 약동 하였고 설교 시간에는 요즈음 목사들 처럼 아멘을 유도 하지도 않았고 방언도 하지 않았고 박수를 치거나 춤도 추지 않았다. 오직 말씀과 성령님의 역사와 감동이었다. 그 어른의 설교시간은  언제나  25-30분 내로 압축하여 액기스를 먹이고 끝낸다.

설교를 잘 못하는 사람은 압축 능력이 없어 언제나 지루하게 질질 끌고가서 교인들을 실증나게 만든다. 필자도 압축 능력이 없어 30분을 넘을 때가 많았는데 한 목사님에 대한 선입견이 있어 30분이 초과하면 바로 중단하고 결론맺고 끝낸다. 교인들은 잘른줄도 모른다.  간단해서 은혜롭고 좋다고 한다. 길게 한다고 사례도 더 주는것 아니고 교인들은 싫어하는데 왜 길게하나?

필자가 잘 아는 합동측 목사가 그 교회 장로들이 설교를 30분내로 끝내어 달라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에게 짧게하라고 하였으나 필자말도 듣지않고 장로들이 목사권위에 도전한다고 하면서 고집 부리다가 기타 고집과 합하여 쫒겨났다. 미련한 목사는 길게하는 사명감에 취하여 혼자 충만하여 시간은 관계없이 준비한것 다 해야 교인들이 은혜받는 줄로 착각하고 있다.

필자는 지금까지 한경직 목사님 보다 설교를 더 잘 하시는 분을 본 적이 없다. 그런 위대한 세계적인 목회자가 어떻게 처신 했는가 두 가지만 소계하고자 한다.

첫째 : 어느 글에서 읽었다. (이글은 필자가 저술한 "성공적 목회를위한 목사처신법"에도 실려있다)  한번은 당회에서 장로들이 뜻을 모아 한 목사님의 약점을 22가지로 요약하여 정리 한 것을 낭독 한 후 목사님이 이렇게 처신하면 됩니까?  앞으로 고처 주세요 하는 것이었다. 한 목사님은 고개를 숙이시고 22가지를 다 들으신 다음 고개를 드시고 웃는 얼굴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장로님들 제 부족을 잘못 알아습니다. 제 부족을 자세히 조사하여 보면 220가지도 넘슈다. 앞으로 고치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하셨다는 것이다. 그 말씀에 당회원들은 유구무언이 었다고. 한 목사님은 상대에게 정조준의 사격을 받았다. 한 목사님은 상대의 조준을 방어할 무기도있었고 상대를 완전히 제압할 능력과 권위를 갖고계셨다. 그런데도 두손을 높이들고 항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왜 그런 비굴한 항복을 하였을까? 지는 것이 이기는것 과 목사의 승리의 비결과  진리를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 목사님의 목회 처신 법이다.

필자 같은 소인배 였더면 얼굴이 불그락 푸르락 하였을 것이고 얼굴 근육에는 경련이 일어 났을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당신들은 온전하오? 그레도 나는 당신들 보다는 더 났소, 하면서 이것은 아무 장로소리지요, 이것은 아무장로 말이지요. 내가 안 들어도 다 알아요. 당신들은 무엇이 잘났소. 내가 그렇게 싫으면 다른 교회로 가시오. 이 교회는 내가 개척하여 부흥시킨교회요 하며 주먹을 휘젖으며 삿대질을 하며 당신들 같은 사람들이 무슨 장로요, 평신도 보다 헌금도 못하는 주제에 장로라고 행세만 하는 오만 방자한것 같으라고, 하며 고함을 질렀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 다수의 수준 미달 목사들은 이런 함정에  빠저 허우적 거리는것을 많이 볼수 있다.

독자 여러분이 한 목사님 같은 위치에서 그런 수 만명의 수동적 성직자의 권위로서 그 자리에 이셨다면 후배 목사님들은 어떤 얼굴을 하고 어떤 태도를 취했을 것 같습니까?

그 어른은 남이 세워놓은 교회에 부임하지도 않았 습니다. 자신이 영락교회를 개척하여 세계적인 교회를 만들고 세계 일등 목사가 된 분인데도 자존심을 다 내려 놓으시고 종의 자리에 내려 앉았습니다.

요즈음 어떤 목사들은 되지도않은 능동적 권위를 세워 사용하려 하는데 한 목사님은 능동적 권위자가 아니라 수만명이 부여한 수동적 권위자로 국가위에 군림 하였다. 能動的 權威보다 受動的 權威가 훨신 크고 위대하다. 목사의 권위는 受動的 권위여야 한다. 능동적 권위는 세상적 권위이다. 성직자의 能動的 권위는 바리새 권위이다.

그러나 한 목사님은 그 수동적 크고 위대한 권위를 사용하시지 않으셨다. 이것이 세계 제일가는 장로교회를 만드신 한 목사님의 당회에서 목회 처신 법이 었다.

예수께서 “으뜸이 되고자하는자는 낮아지라” 하신 말씀을 실천하신 분이시다. 우리는 입으로는 많이 외치지만 정작 자신은 낮아지지 않은데 문제가있다. 바리새는 바로 그런 자이다. 예수님 당시에예수께서 책망하신 바리새는 바로 그런 자들이 었다.

기독교 역사에 교회를 무력하게 만들고 혼탁하게 만들고 권모술수하고 매관 매직하고 타락시킨 자들은 전부 바리새 들이다. 필자도 한국 교회에 바리새 중 한 사람으로 먹고살기 위하여 목회하지 않았나 반성 하고있다. 

둘째 : 영락교회 장로님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는데 다니로 와서 은퇴 후 남한 산성 영락 동산에 계시는 한 목사님을 찾아가 뵈었더니 한 여름 더위에 에어콘도 없이 부채를 부치고 계시기에 목사님이 부채를 부치고 계시다니요 하면서 에콘을 한대 놓아 드리려 하였으나 나는 부채로서도 족합니다 그돈 있으면 농어촌 교회 가난한 목회자에게 보내주세요 하면서 완강히 반대하는 데도 그 장로님은 설치하여 드리고 가셨는데 그 다음 날 관리 집사를 불러 에어콘을 뜯어다 주고 돈을 받아와서 시골교회 어렵게 사는 목회자에게 보내 주었다는 것이다. 그 장로님이 나중 아시고 기사를 쓴 것을 필자가 보았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그 위대한 목사님, 부자 영락교회  원로 목사님, 내가 원한것도 아니고 상대가 날 위하여 하여 준 것을 고맙다고 하고 그대로 수용 한들 무슨 잘못이 되는가?
그런 생활 처신이 한경직, 한경직, 한경직, 목사님의 "목회 처신 법"이었습니다.

아무리 풍요하여도 교인들의 눈 높이를 벗어나지 않으셨다. 1년전 K 지방교회(타교단) 7백명 교회를 수년 만에 3천여명 교회로 부흥시키셨다. 그는 설교를 아주 잘하고 리더십이 강하였다. 교회부흥과 대 교회건축에 자만심이 생겨 목에 힘을넣고 에쿠스를 사달라고 당회에 청하였으나 그 교회 장로들은 대체로 서민틍이 다수였다. 에쿠스 때문에 도화선에 불아 붙어  갈등을 빚다가 쫓겨난 경우가있다.

필자는 그 교회를 가 보았다. 넓은 대지에 어마 어마한 교회와 교육관을 지어 놓았다. 그는 세상적으로 보면 목회 성공한 젊은 목사의 한 사람이 었다. 그는 거기서 종신토록 목회할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큰 착각을 한 것이다. 그는 아프리카 초원에 메두기때 같이 가득찬 덩치 크고 힘이 넘친 "누우" 때만 보고, 숲속에 숨어 그의 생명을 도사리고 있는 사자와 호랑이는 보지 못하고 능동적 권세를 사용 하였고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였다가 쫓겨나고 말았다. 오늘날 이런 함정에 빠지는 젊은 목회자들이 너무도 많음을 안타갑게 생각한다. 에쿠스 타기 위하여 교회 부흥 시킨것이 아니잖아요.

그러기에 한 목사님은 위대하시고 성자로 호칭을 받으신다.

필자 방에는 에어콘이 있다. 이런 말 할 자격도 없다 하지만 그 어른의 당회 앞에서 비굴한 종의 항복의 자세와 교인들의 눈 높이를 벗어나지 않은 삶은 우리 모두 본 받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한 목사님의 이 두가지 목회 처신법 만 실천 할 수 있다면 우리도 한 목사님의 반열에 들어갈수 있을 것이고  우리가 목회하는 교회에서 존경을 받을 것이고 수동적 권위가 부풀어 오를 것이고 한국교회는 빛나고 부흥할 것이고 땅에 떨어진 불신자들의 교회 이미지가 달라질 것이다. 그러면 3백만 전도운동이 쉽게 될 것이고 5백만 전도 결실도 가능 할 것이다.

위대하신 세계적인 한경직 목사님의 두가지 목회 처신 법. 후배 목사님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씀 좀 하여 보세요.

 

출처: USA 아멘넷/장달윤 목사

목회자가 갖추어야 할 3가지-인성

인성(人性)이란 사람의 성품이나 각 개인이 지닌 사고와 태도 및 행동 특성을 말한다. 인성은 보편적으로 한 인간의 기본적 자질과 품성을 말한다. 우리가 흔히 '될 사람' 또는 '사람다운' 이라고 할 때 그 사람이 사회적, 환경적 요구간의 조화를 이룬 상태에서 개발되어 굳어진 습성을 나타내며 개인과 환경간의 역동적 상호작용 상태를 말한다.

사람이면 누구나 인성이 좋다고 평가 받아야 하겠지만 그 중에 정직, 용서, 배려를 기본으로 삼아 강조하고자 한다.

1. 정직

천사가 아닌 사람이 성직자가 되었기에 실언, 실수, 실족 할 수 밖에 없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보다 민감하게 깨닫고 즉시 그리고 진솔하게 인정하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사람에게 사과해야 한다.

요즘 한국에서 성직자의 논문표절로 교계는 물론 사회에서도 여론이 비등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성직자는 성직을 맡은 자이기에 그런 것에 연류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신이 아닌 인간이라 실수를 했을 때에 정직하게 인정하고 그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남 달라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부언하면서 논문표절이 사실이라면 교회를 사임하겠다고 한 것이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그 후 연이어 거짓말을 하여 성직자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고 악취를 풍겨 전도와 선교의 문을 막았다.

절도란 물질 뿐만 아니라 남이 애써 해둔 지식을 수고 없이 표절하는 것도 절도이다. 당연히 하나님께 회개하고 사람앞에 사과한 후 그 학위를 반납하고 직분에서 물러나야 할 것이다. 그랬을 때 회복의 길은 열릴 것이다.

'거짓' 은 성령님이 아닌 악령의 전용물이다. 예수님은 마귀를 '거짓의 아비'(요 8 : 44)라고 하셨다. 논문 표절이나 대필보다 더 크고 무서운 죄는 거짓의 아비인 마귀가 시키는 대로 거짓말을 반복하는 것이다.

사람은 에덴 낙원에서 부터 오늘까지 마귀의 달콤한 감언이설에 유혹되어 타락한다. 육신의 건강도 단 것 보다 쓴 것이 좋다고 하듯이 영혼도 마귀의 감언보다 하나님의 고언을 듣는데 익숙해야 살 수 있고 건강해 질 것이다

목회자가 학력이 부족하더라도 정직해야 한다. 며칠 전 네부부가 모이는 모임에서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은 적이 있었다.

종로 거리를 지나다가 어느 교회의 담벽에 부착된 게시판을 보게 되었는데 설교자가 김ㅇㅇ 박사로 되어있어 속으로 '설교는 박사가 하는 것이 아니고 목사가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고 말하자, 옆에 있던 나구용 목사님이 자신의 이야기를 해서 죄송하지만 자신은 '설교를 할 때는 목사 가운을 입지 학위 가운을 입지 않는다' 고 수긍을 하셨다. 사실 나 목사님은 귄위있는 학교에서 Ph.D 학위를 받으신 분이었다.

자신의 수고없이 남의 수고로 받은 학위는 정직성이 없다는 것을 안다면 목사의 특권인 설교를 할때는 목사가운을 입고 부끄럽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2. 용서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용서의 종교이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해서만 받을 수 있는 용서이다.

죄의 댓가는 죽음이므로 죄인된 인간은 죽어야 한다. 그러나 죄인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은 죄 없는 예수님을 대신 죽게 하신 것이 십자가이다. 거기에는 죄인을 죽이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죄인을 용서하여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모두 만족되고 충족되었다. 인간이 죄 값으로 죽는대신 범한 죄를 용서받는 유일한 조건은 '회개' 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첫 설교를 보면 알 수 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 동시에 제자들에게도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눅17:3,4)고 하셨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따르면 '회개'가 먼저이고 '용서'는 그 다음이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회개없이 '용서' 를 바라거나 요구하는 일은 잘못일 뿐아니라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행위이다. 뿐만 아니라 회개하고 사과함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지 않는 것도 잘못이라고 하시면서 '용서하라' 고 명령하셨다.

주님은 산상설교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마6:9,12)라고 가르치셨다.

성직자는 자신의 허물을 비록 작은 것이라도 엄격히 다스리고 남의 허물은 비록 크다 할지라도 관용(빌4:5)해야 존경받는 인격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사람에게 대한 사과는 지도자 자신의 몫이므로, 용서와 관용은 자신이 아닌 다른사람에게 해야 할 몫으로 삼을 때 목회자의 권위는 세워질 것이고, 그 권위(권위주의가 아님)로 목회를 하게되면 행복한 목회와 건강한 교회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3. 배려

배려란 상대방의 입장과 형편을 보살펴 사랑으로 도우려는 마음가짐을 말한다. 어떤 종교이든 '배려'는 미덕으로 강조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세계의 상대적인 배려가 아닌 하나님의 인간에게 배푸신 절대적인 사랑에서 출발된 배려를 실천하는 덕목이다.

지도자중에서도 성직자로서의 지도자는 남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이 더 많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형편과 가난한 성도들을 배려하지 않고 자신의 대우에만 관심을 가지고 마음쓸 뿐아니라 발언권이 강한 평신도 대표들에게 아첨까지 하면서까지 받을 생할비 인상을 유도하려는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오래전 일이다. 어느 교회 임시 당회장이 되어 1년이상 도운적이 있었다. 전임 목회자가 없는 자(물질,학력)는 관심이 없고 있는 자에게는 자주 심방하고 전화를 하자 성도들이 당회원에게 시정해 줄 것을 목회자에게 요청했다. 그러나 바꿔지지 않았고 그 후 억지로 몇년을 버티다가 사임을 한 적이 있었다.

성경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강조하셨고 천사는 "고넬로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외었다"(행10:4)고 하였다. 배려에는 수고와 희생이 따른다. 모든 성도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처럼 가진 자는 없는 자를 배려하여 유무상통의 아름다운 배려의 모습을 본 받아야 할 것이다 그 중에 목회자는 성도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회에서는 가진것이 적고 배운 것이 없고 지위도 없어 소외당하는 자라도 교회에 와서는 따뜻하고 포근한 배려를 받게 해야 교회다운 교회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회와 교회가 다른 것이 없을 것이다.

목회자는 지역사회를 위하여 배려할 형편이 되면 해야 할 것이다. 건물이 있고, 빌린 공간이라도 지역 사회를 위하여 한출처:글 학교나 방과 후 학교 등 문화공간을 위하여 배려 할 수 있어야 한다.

김정국 목사
해외한인장로회 증경 총회장
뉴욕교협/뉴욕목사회 증경회장

 출처: USA 아멘넷

탁월함은
좋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탁월함은 충성됨에서 나온다.
충성된 사람은 주인을 위해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충성된 사람은 좀 더 잘 섬기기 위해
그 일을 연구한다.
이것이 탁월함을 가져온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렇게 충성될 때,
하나님께서 그 위에 축복하신다는 것이다

요셉은 누가 주인이든지
그 주인에게 충성되고,
무슨 일이든지 그 일에 탁월했다.
그러나 요셉이 진짜로 대면했던 것은
인간 주인과 세상일이 아니었다

요셉이 진짜로 대면했던 것은
하나님이었다.
그의 진짜 주인은 하나님이었다.
요셉이 이렇게 고백한다
-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 창 50:18-21 .
-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산 사람이었다.
이것이 요셉이 복의 근원이 된 이유다.
당신은 누구 앞에서 살아가는가?
결국 여기서 모든 것이 결정된다

아무도 봐주는 사람이 없는 곳
아무도 인정해주는 사람이 없는 곳
거기서부터 시작하라

거기서 혼자서라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행하라.
거기서 혼자라도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충성되게 감당하라

아멘~아멘~
펌글

 
출처: 사모님사모님/ 민들레홀씨되어

도널드 트럼프가 1월 20일(금) 제45대 미국 대통령에 공식으로 취임했다. 트럼프는 취임식에 앞서 백악관 뒤편의 세인트 존스 교회를 찾아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취임식에서 성경위에 손을 얹고 선서를 했다. 성경은 두 권이었는데, 링컨 대통령이 사용했던 성경과 트럼프 당선인이 1955년 주일학교를 졸업할 때 어머니로부터 받은 성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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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있는 성경이 트럼프 대통령이 자마이카에 있는 교회에서 주일학교를 졸업하며 어머니로부터 선물받은 성경이다. (유투브 동영상 캡처)

 

트럼프는 뉴욕에서 성장했다. 트럼프는 스코트랜드에서 온 이민자인 어머니에 손에 이끌려 자마이카에 있는 제일장로교회 주일학교를 다녔으며 그 곳에서 세례를 받았다. 또한 트럼프 타워가 바로 보이는 맨하탄 5애브뉴 장로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두 교회는 모두 미국장로교 소속이다. 취임식을 2일 앞두고 이 두 교회의 담임목사들이 트럼프 당선자를 방문하여 기도를 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이 두 교회가 속한 미국장로교 뉴욕시노회 노회장 당선자 박성갑 목사는 “노회소속 두 목사가 트럼프 당선자를 20여분간 만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 교단의 멤버라고 스스로 말하고 친근감을 보이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대통령이 도움이 필요하면 기도하며 영적인 인도를 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또 트럼프가 교회에 나가 정기적인 주일예배는 드리지 않았지만, 부정기적으로 편하게 생각하는 미국장로교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렸다는 소식은 듣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시편 133:1 말씀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는 성경말씀을 들어 미국의 연합을 강조했으며, 신의 가호를 받고 있는 미국은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말했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트럼프 취임식서 6명의 종교지도자가 기도

역대 최대 인원...각기 60-90초씩 기도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에 6명의 종교지도자가 초청받아, 각기 60-90초씩 기도를 하게된다.

 

미국 대통령 취임식으로는 이례적으로 6명이라는 최다 인원을 초청, 순서를 맡긴것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의 다양성 표출, 각 종교분야를 모두 아우르러는 의도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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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임 하루를 앞두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     © 크리스찬투데이

 

기도순서를 맡은 6명은 다음과 같다. 가톨릭계에서는 뉴욕 대주교인 티모시 돌란 추기경, 기독교계에서는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와 라울라 화이트 목사, 사무엘 로드리게스 목사, 웨인 잭슨 주교. 유대교에서는 마빈 하이어 시몬 비젠탈센터 소장. 반면 이슬람과 불교계에서는 참석자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레이엄 목사는 그 부친도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 자주 참석하였던 인연을 갖고 있으며 웨인 잭슨 주교는 흑인계에서 영향력이 지대하다. 로드리게스 목사는 보수성향이며 북남미에 1억명 이상의 신자를 통해 영향력을 끼지고 있는 전미 히스태닉기독교지도자 컨퍼런스(NHCLS) 대표 자격으로, ‘번영신학’을 주창하는 여성목사회자 파울라 화이트 목사는 텔레반겔리스트로 명성을 올렸기에 초청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레이엄 목사와 화이트 목사에 대해 케빈 크루즈 교수(프린스턴대학교 역사학)는 "그레이엄 목사는 기독교 민족주의를, 화이트 목사는 기독교 자본주의 사상을 포용하는 트럼프의 이데올로기를 상징적으로 대변해주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 크리스찬투데이

가져온 곳: USA 아멘넷

마르틴 루터, 튀링겐에서 빛을 발하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길을 따라(2)

 

아이제나흐에서 젊은 루터의 고된 훈련  

  

독일의 중부 튜링엔의 아담한 도시 아이제나흐(Eisenach)는 루터 당시 4,500명의 아이제나흐 인구 중 400명 정도가 수도사내지는 수녀들이어서 성직자들의 서식처(Pfaffennest)로 블리워졌다. 이곳에는 루터의 외갓집이 있었고, 루터가 청소년 학창시절을 보냈다. 14살 청소년 루터는 음악을 좋아하고 목소리가 뛰어났다. 그는 명문 귀족 집들을 찾아다니며 노래를 부르고 류트(lute)를 연주하면서 생활고를 해결했다. 어느날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 아이제나흐에서 가장 부유하고 상류 귀족인 우르술라 코타 (Ursula Cotta) 부인은 루터의 아름다운 노래에 감동되어 자기 집으로 초대하였다. 루터는 코타 부인의 사랑스런 섬김 속에 하숙생으로서 코타 하우스(Cotta Haus)에서 기거를 하게 되었다. 광산촌 서민 출신이었던 루터는 부유하고 교양있는 귀족들의 상류세계를 접할 수 있게 되었고, 학생으로서 루터는 이곳에서 1498년부터 1501년 까지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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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터가 청소년 시절 보냈던 게오르겐교회     © 뉴스파워

 

루터가 학창시절에 행복하게 살았던 이 루터하우스 (Luther haus)는 후에 아이제나흐의 목사관으로 쓰여지다가 지금은 루터의 학창시절과 그 생애, 지역교회의 역사를 기념하는 박물관으로 쓰여지고 있다. 루터하우스는 이 도시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독일 전통가옥 (Fachwerkhaus)중 하나다. 또한 루터가 살던 집 옆의 거리 구석에는 작은 사과나무 한 그루가 심겨져 있고 그 밑에 다음의 글이 쓰여져 있다. "Und wenn ich wusste, dass morgen die Welt unterginge, wurde ich doch heute ein Apfelbaumchen pflanzen".- Martin Luther (내일 세계의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적은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는 구절과 루터의 이름과 문장이 적혀있다. 우리가 대부분 이 말이 스피노자 (Spinoza, 1632-1677)가 한 말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루터의 말이었다. 스피노자는 루터보다 뒤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해 보면 스피노자가 인용했으리라 본다. 루터의 표현이 원조인 셈이다. 

  

또한 이 도시에는 1498년 마르틴 루터가 청소년 시절을 보낸 게오르겐 교회(Georgenkirche)가 있는데 루터는 이 교회에서 약 3년 동안 소년성가대원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 당시 폰 카이저베르크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신앙에 눈을 뜬 루터는 그 이후 광명의 빛을 느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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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터가 청소년 시절 살았던 코타하우스     © 뉴스파워 

 

슈토테른하임 - “루터 인생의 결정적인 전환점”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신다. 심한 폭풍 가운데서 나타나서 욥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지축을 흔드는 천둥과 번개로 루터에 나타나셨다. 명문 에르푸르트 대학원에서 법률 공부를 시작한 루터는 부모님을 찾아뵙고 먼 길을 걸어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친구와 함께 들판을 걷고 있던 루터는 폭우를 만났고, 그때 옆에 있던 친구 (후에 알렉시우스라고 불려짐)가 천둥 번개 속에서 벼락에 맞아 죽는 사건을 겪게 되었다. 천둥 번개는 그 자체로는 하나의 자연현상에 불과하지만, 루터 시대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벼락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상징이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벼락에 맞아서 죽은 한 친구의 죽음은 루터의 일생 중에서 가장 두려웠던 경험이었을 것이다. 번개가 번쩍하는 사이에 루터는 허겁지겁 들판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평소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루터는 그만 땅바닥에 꼬꾸라지고 만다. 그는 생명의 위협을 온 몸이 떨리도록 느꼈다. 그리고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다급한 심정으로 그는 성 안나를 향해 앞으로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원을 한다. 당시 광부들의 수호성인으로 알려진 성 안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를 한 것은 그가 아직 주님과의 만남이 분명치 않음을 짐작하게 한다. 1505년 7월 2일 폭우가 쏟아지는 날, 루터의 서원은 하나님의 섭리적인 환경에 의해 일어났다.   

  

루터는 단 한 번의 벼락 사건 때문에 훌륭한 법률가가 되겠다던 인생의 목표를 일순간에 수도사로 바꿔버렸다. 루터는 결코 소명감에서 비롯된 결단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 그리고 다가올 심판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때문이었다. 또한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수도사가 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슈토테른하임(Stotternheim)의 체험은 루터 생애에 있어서 놀라운 전환점이 되었다. 루터처럼 우리들도 생의 전화점이 되는 슈토테른하임이 있어야 할 것이다. 가슴 설레이고 감격스럽고 역사적인 현장인 슈토테른하임의 주위는 넓고 푸른 들판이었다. 이곳에 이 위대한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1917년 높이 2m의 비석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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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5년 7월 2일 친구가 벼락을 맞아 죽은 것을 보면서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원한 루터의 기념비     © 뉴스파워 

 

루터의 서원 기념비에 새겨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거룩한 땅

종교개혁의 전환점

  

하늘에서 이곳에 떨어진 번개가 젊은 루터에게 그 길을 보여주었다

  

2. Juli. 1505 

  

1505년 7월 2일

“도우소서, 성 안나여,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튀링겐에서 빛이 발하다

  

빛이 밝아오는 중세 암흑기 - “종교개혁의 불이 붙기 시작하다” 

  

초대교회 당시,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많은 전도자들의 복음 전파로 인해 타올랐던 복음의 등불은 중세기 유럽에서 점점 꺼져가고 있었다. 중세 암흑기는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진리가 완전히 가리어져 있었고, 교회들이 참된 영적 생명과 활력이 없었다. 교회가 부패한 상태로 타락되어가고 있었다. 아직 개신교 설교자가 없던 시기이며 그 누구도 복음을 선포하지 않았던 시대였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로마 가톨릭교회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오랜 동안 종교적인 불만 및 소란함이 쌓이고 쌓였다. 중세교회의 억압은 깨트려지고 닫힌 문이 열려져야 한다. 이제 종교개혁자들이 나타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악행을 정화하여 철저하게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종교개혁이 필요했다.   

 

하나님은 부패한 중세시대를 마무리 하시기 위해 젊은 루터를 고된 시련을 겪게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경건한 가톨릭 신자였던 루터는 신앙 교육과 삶의 시련으로 훈련되어져 가고 있었다. 경건한 평민에 속한 젊은 루터는 수준 높은 교육의 결핍과 많은 시련을 겪었지만 오히려 그의 얼굴은 더욱 더 강인해 졌고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전투적인 성품을 가지게 되었다. 루터는 무엇인가 살아있는 신앙을 원하고 있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신앙의 개혁이었다. 에르푸르트대학원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있던 루터는 벼락 사건으로 인해 법관으로서의 희망을 포기했다. 그의 부친은 루터가 수도사보다는 변호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루터는 장차 법률가가 되기를 꿈꾸었던 아버지를 크게 실망시키면서 결국 어거스틴 수도원을 향하게 된다. 역사학자들은 사실상 루터의 종교개혁의 불은 슈톤테른하임에서부터 타오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렇다. 종교개혁의 불이 붙기 시작했다. 

 

김현배 ⓒ 뉴스파워

가져온 곳: USA아멘넷

전 세계 순교자 수, 10년간 '90만 명'

지난 10년간 기독교 신앙으로 인해 순교한 크리스천의 수가 90만 명에 달한다는 보고가 발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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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포스트>에 따르면, 미국 고든-콘웰 세계기독교연구센터는 ‘박해 받는 크리스천에 대한 연례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2016년 6분마다 한 명의 크리스천이 신앙을 이유로 목숨을 잃어 총 90,000명이 순교했다”고 밝혔다.

 

고든-콘웰 센터는 크리스천 순교에 관한 역사적인 고찰을 통해 현대 실정을 분석하는 데 주력해 왔다. 이를 바탕으로 “2016년뿐 아니라 2005년부터 2015년까지 매해 약 90,000명의 크리스천이 목숨을 잃어 약 900,000명이 순교한 것으로 집계된다”고 발표했다. 

 

연간 90,000명이란 숫자는 종교와 연관된 테러에 의한 희생도 포함하고 있으며, 이는 총 희생자 수의 30%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나머지 70%는 아프리카에서 부족 간의 충돌로 인해 발생한 숫자다.

 

일각에서는 “아프리카 부족 간의 충돌로 발생한 희생자는 순교가 아니라 폭력의 희생자로 구분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있다.

 

이에 고든-콘웰 센터는 “이번 연구에선 ‘순교’란 단어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이유로 적대적인 폭력에의 희생’이라고 정의했다”며 “’순교’는 전쟁과 전투, 우발적 살인과 집단 학살을 포합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크리스천 박해 감시기구 오픈도어스에 따르면, 2015년 11월 1일부터 2016년 10월 31일 사이에 약 1,200명의 크리스천이 신앙을 이유로 살해됐다.

 

오픈도어스의 수치가 낮은 이유는 집계에 공식적으로 보고된 사건만을 포함시키고 북한을 포함해 이란과 이라크에서의 사망자 수는 제외했기 때문이다.

 

오픈도어스는 “지난 3년간 크리스천 박해는 전세계적으로 증가했으며 2016년은 ‘박해가 최악’에 달했다”고 전했다.

 

백유현 ⓒ 데일리굿뉴스

가져온 곳: USA 아멘넷

2. 원로목사와 장기목회자 후임 지침서

3. 원로목사 없는 교회에서는 장기 목회가 가능한가?

원로목사 이유 대는 목회자는 원로목사 없는 교회에 부임 하였다면 모두 장기 목회를 무사히 하여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그 증거로 원로 목사가 없는 교회에서 수많은 목회자들이 어찌하여 순탄한 목회를 하지 못하고 시비와 원망과 분란을 일으키고 불편한 교회를 만들고 단기 목회로 단명 하는가?

예를 들어보자.

1) S교회 A목사
전남 이리에 S교회 A목사님은 30여 년의 장기 목회로 2,500여 명의 대교회를 만들어 놓으시고 갑자기 유명을 달리하시자 후임이 부임하여 얼마 되지 않아서 갈등을 빚고 떠나고 그 다음 후임도 자주 갈리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죽은 전임목사 영혼이 와서 훈수 뜨기 때문인가?

그곳을 떠나는 목회자들은 원로목사 없으니 아무런 말없이 떠났는가? 그렇지 않다고 추리한다. 자기 부족은 모르고 아무 x 장로가 나빠서 나는 당하고 떠난다고 했을 것이다.
아무런 말없이 내가 부족하여 떠난다고 하는 목사가 과연 있었겠는가?
필자는 아직 그런 말을 남기고 떠나는 목회자를 보지 못하였다.
내 그릇이 적어 떠난다고 말한 자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원로 목사가 없는데 어찌하여 배척을 받았는가?
원로 목사가 없으니 갈등이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자질과 그의 목회 그릇 문제이다.
그래도 통계적으로 원로 목사 계신교회 후임 재직기간이 일반교회 보다는 길다. 원로목사의 잘 닦아 놓은 터 덕분에 바람막이가 되어주기 때문에 그만 큼이라도 하는 것이다.
2)서울에 중형 J교회는 몇 년 사이 목회자가 세 사람이 교체되었다. 원로목사가 없는 교회인데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나? 누구 탓을 할 것인가?

4. 원로목사 후광을 업고 장기목회 잘하는 목사들 ?.
원로 목사를 모신 후임 목사가 원로목사를 존경하며 원로 목사에게 칭찬을 들으며 유대 관계를 잘 갖고 지도를 받으며 교회를 부흥시키며 교인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목회를 잘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분들은 어떻게 그럴까?

다음 실례를 3곳을 들고자 한다. 안동교회. 수산교회. 광주 서림교회.

1) 안동교회 김광현 원로 목사 후임 김기수 목사
안동교회 원로목사 후임 김기수 목사님은 25년이 넘도록 원로 김광현 목사님과 한 울타리 안에 사시면서도 아무런 불평의 소리 없이 교계와 사회의 존경을 받으시며 교회를 3배나 성장 시키시며 목회 하셨다.
원로 김광현 목사님은 후광이 되어 주시고 김기수 목사님은 선배 김광현 목사님이 35년 동안 큰 기업을 만들어 물려준 은인으로 생각하시고 존경할 뿐만 아니라 아버님 처럼 모시고 자신을 후임으로 삼아 주신데 대하여 늘 고맙게 생각 하심으로 전국 교회에 선배와 어른 존경의 효시가 되었다.
그러므로 선배의 후광을 입으시고 목회만 잘 하실 뿐만 아니라 증경 총회장으로, 총회 원로로 존경받으셨다.

문제는 상대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내게 있는 것이다. 나를 낳아주신 은혜로 부모님을 모시기도 힘이 드는데 어찌 힘 드는 일이 없었다 하겠는가!
인간이 은혜를 모른다면 하등 동물 보다도 못한 자가 아닐까?
힘 드는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자라야 큰 일을 할 수 있으며 그 “큰 은혜의 보좌”를 감당할 수 있다.
인자무적(仁者無敵)이란 무슨 뜻인가? 그 반대는 악자유적(惡者有敵)이 아닌가!

필자가 생존하여 계실 때 전화 통화를 하였는데 김기수 목사님은 원로 목사님과 관계에서 한 번도
마음이 상하여 본 적이 없으셨다고 하셨으며 25년 동안 종종이 아니고 매주 예배시간에는 같이 강단에 올라 가셔서 축도는 원로 목사님이 하시도록 하셨다고 하셨다.
장로들이 이제는 원로 목사님이 연세도 많으시고 하니 담임 목사님이 다 하시라고 건의 하였으나
그것은 내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라고 하셨다고 하였다.
그리고 축도는 원로 목사님이 하시는 것이 더 축복되고 교인들도 더 은혜롭게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선배 어른을 존경하는 예의이며 또한 어른을 모시는 일은 우리의 고유한 문화요 풍속인데 얼마나 아름다우냐고 하셨다.

김기수 목사님은 이어 요즘 젊은이들은 선배와 어른을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한데 목회자 세계에서부터 본을 보이고 사표가 되어야 되지 않겠는가 하시며 아쉬워 하셨다. 그러나 원로나 후임이 다 같이 잘 하여야지 한쪽 만 잘하여서도 안 된다고 덧 붙이시고 말씀을 마치셨다.

◈ 원로 김광현 목사님의 대담
원로 김광현 목사님의 말씀을 빌리면 은퇴 후 처음은 예배 후 교회 앞에서 인사를 하였으나 교인들이 담임 목사에게 집중되는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 같아서 중지하였으며 후임 목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것은 일체 중지하고 모든 것에 침묵하였다. 당회 참석이나 결혼 주례 등도 일체 사양하였고 원로 목사 사무실도 주었으나 후임에게 해가 되는 것 같아 사양하였다고 하셨다.

그리고 후임 김기수 목사님에 대한 칭찬이 지금도(당시) 자자하시다. 어디 갈 때나 갔다 와서는 아버님께 하듯 인사하고 보고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새해 첫날은 반드시 부부가 세배하러 온다는 것이다.

이런 아름다움이 안동교회 원로 목사와 후임 목사 간에 인격과 덕성, 예의와 범절, 장유유서의 위계질서가 온 교인들에게 본을보이시고 존경을 받고 안동교회를 작은 천국을 만들고 부흥과 발전을 거듭하고 전국 교회에 모범을 보였으며 안동교회는 세계 교회에 없는 2대 생존 원로 목사를 배출한 유일한 교회로 기네스북에 올린만 하다.(살아 계실때 대담)

모든 문제는 내게 있다. 김기수 목사님은 훌륭한 인격과 예의를 갖춘 장유유서의 인격을 가지신 목사였기 때문이다.
상대는 내 모습의 반사경이다.
원로 후임 자라면 상대를 원망 말고 내 모습을 교정하고 아량을 넓히고 신앙에 덕성을 쌓아 모든 성도들이 존경 할만한 후임 목사가 되어야 한다.

안동 교회는 원로와 후임이 25년이 넘도록 한 울타리 안에 사택에 살면서 이런 관계를 갖고 지낸 것은 성직자다운 구별된 모습이며 세계 기독교사에 빛나는 유일 무이한 사례라고 생각한다. 성직자라면 일반 인들과는 다른 대가 있어야 되지 않은가?
나는 무엇이 다른가?
원로 대업의 후광을 입으시고 덕목을 갖추시고 아버님 처럼 원로목사님을 섬기신 김기수 목사님과
후임의 목회를 위하여 아버님처럼 배려하시는 김광현 목사님은 정말 훌륭한 분들이시며 모든 원로와 후임 목사들이 본받아야 할 분들이시다.

2) 서울 수산교회 백용종 원로 목사 후임 하용삼 목사님과 대담.
백용종 목사님의 후임으로 부임하신 하용삼 목사님은 원로 백 목사님의 도움을 입고 목회를 평안히 하시다가 원로 목사님이 갑자기 유고로 돌아가시자 원로 목사님이 계실 때에 많은 도움이 되었고 목사님이 살아 계셔서 뒤에서 도와 주실때가 훨씬 좋았다고 하였다. 원로 목사를 어렵게 생각 말고 존경하면 어느 원로 목사라도 다 그렇게 도와 줄 것이다.
하 목사님은 원로 목사님이 돌아가시자 심한 홍역을 겪으시고도 평탄한 목회 중 곧 원로가 되신다. 선량한 장로님들이 교회를 위하여 많이 협조를 하셨겠지만 장기 목회를 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그릇과 인격, 그의 덕목과 목회 능력에 정비례한다.

3) 광주 서림교회 장동진 원로 목사 후임 송재식 목사
서림교회는 장동진 목사님이 27여 년의 목회와 총회장을 역임하시고 총회 적으로 존경 받으시는 원로로 계시는 교회인데 후임은 송재욱 목사님이시다. 송 목사님은 목회경험이 전혀 없고 공부만 하고 호신(湖神)교수로 계시던 젊은 40대 목사이신데 부임하셔서 교회를 3배나 부흥시키시고 원로목사님을 존경하고 그의 자녀인 장로와 권사들과도 형제처럼 지내고 있으며 그 어른이 계시는 것이 목회에 유익 하다고 하시고 한자리에 자주 앉아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눔으로 목회에 많은 도움을 입는다고 하였다. 어쩌다가 원로목사님이 출타하셔서 교회 출석을 못하였을 경우 빈자리에 허전함을 느낀다고 하였다.

원로 목사와 같은 자리 하는 것이 불편한 자리가 아니라 한자리에 마주 앉는 것이 유익하고 도움이 된다고 하였다.
요즈음 후임들의 불평을 들으면 한자리에 앉는 것이 부담스럽고 싫다고들 하였다. 서림교회 송목사님과는 정반대의 말이다. 왜? 무엇때문에? 그런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자신의 오만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또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자신의 성품과 예의와 인격과 그릇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그의 인격이요, 그의 인간성이요, 그의 덕목이요, 그의 목회 그릇이다.
그의 목회 그릇의 크고 작음과 인간성의 문제이다.
전임 목사보다 그릇이 크면 전임의 목회를 담고 남음이 있을 것이고 그릇이 적으면 전임의 목회를 담을 수 없어 넘어지고 자빠지고 쏟아지고 부서지는 것이다. 송 목사님은 그릇이 크기에 교회와 전임을 담고도 교회가 3배나 더 성장하였으며 그가 말하기를 문제는 자신의 인격과 역량에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맞는말이다.

송 목사님은 필자와 대담 당시에 원로목사 퇴임 시 10년 사례 일시불로 드렸는데 10년이 넘도록 생존하여 계시니 당회에서 의논하여 다시 생활비를 책정하여 드려야 되겠다고 말하였는데 그 생각도 송목사의 덕목과 그릇의 크기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 장동진 원로 목사님과의 대담
서림교회 장동진 목사님은 퇴임 후 그날부터 설교. 결혼주례. 길흉사. 교회 앞에서 인사, 축도를 하신 일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하셨다. 부탁과 요청이 있었으나 단호히 거절하셨다. 이유는 물러났으면 후임에게 힘을 실어주어 모든 것이 집중되게 하여야지 교인들의 마음이 갈라져 후임이 일하는데 부
담을 주어서는 아니 되며 후임 목사가 일을 전적으로 소신껏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 야지 원로 목사가 이것 저것 간섭하고 참견하는 것은 교회를 위하여 바람직한 처신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얼마 전 처음으로 원목의 외유로 교회가 비어 여러 목사가 초빙되는 과정에 설교를 부탁받고 한 번 한 것이 전부라고 하셨다. 얼마나 존경스러운 처신이시며 얼마나 존경받을 아름다우신 분이신가!
원로 장 목사님과 후임 송 목사님은 정말 인격적으로 존경받으실 만한 분들이며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한번 생각하여 볼 분들이시다.

이상 원로후임 세분들은 자기우에 어른이 한분 계시는 것을 당연시하고 인정하는 반면 불평하는 후임들은 자기우에 어른이 한분 계시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이 교회에서 최고 자라는 인식에서 불평이 나오는 것이다.
군대에 상사가 있다고 불평할수 있는가? 원로는 내 우에 상사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가 무슨 군대입니까?  할수 있겠지. 군대는 아니지만 그런 마음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는 무형의 구조이다.  군대와 같은 유형에 계급 사회는 아니지만 무형의 계급이 존제 한다. 어른 존경하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원로 후임 목사들은 이상 논한 세분 후임들의 인격과 아량과 덕목과 예의를 배워야 할 줄 안다.
원로 후임들은 아무수고 없이 다 차려놓은 밥상을 받는 격인데 그 은혜를 잊고 어떤 이유로든 배은 망덕자가 되어서는 아니된다. 부임할때 초심은 어떠 하였는가?

글 쓰기 편하게 "목사"란 칭호는 생략 합니다.

양해 바랍니다.  


정이철에게 묻는다. 답변 바란다.


1. 정이철목사는 미국 미시간 디트로이트 앤아버장로교회를 하는 동안 CRC 교단의 개척기금을 받아 썻다. 맞나? 틀리나?

 

2. 그러다가 CRC 교단을 탈퇴하였다. KAPC에 가입하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도 가입을 안 하였기에 무소속 교단이다. 맞나? 틀리나? 
이에 대해 분명히 답하길 바란다.

 

3. 정이철은 최근 예장합동 "서울 남노회 소속"이고, 예장 합동에 소속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미국 영주권(혹은 시민권)을 가진 정이철이가 어떻게 예장합동이며?,

합동 남노회 소속이라고 말 할수 있는 지, 거기에 대한 근거를 밝히기 바란다.


4. 예장합동은 미국에 살며 목회하는 정이철목사를 예장합동소속이라고 할 수 있는지?

그 근거가 무엇인지 밝혀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 정이철이가 한번 밝혀 보라.


5. 예장합동은 "두날개"를 옹호한다.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한다. 여기에 대한 정이철의 견해는 무엇인가?


6. 정이철은 지금까지 두날개에 이단성이 있다고 비판/비난하여 왔다.
그렇다면 예장합동 소속이라는 정이철은 무엇인가?  교단에 역행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정이철의 입장은 무엇인지 밝혀라.

 

7. 예장합동 서울 남노회 소속이라는 정이철은 앞으로도 두날개를 공격할 수 있는가? 없는가?

솔직한 답변을 기대한다.

 

8. 두날개를 공격한 정이철의 친구들은 예장합동 소속인 림헌원, 이창모, 조덕영, 등이다.

그렇다면 합동은 교단 방침에 역행한 정이철과 함께 노는 림/이/조 에 대해선 어찌 할 것인지 알고 싶다.

정이철이가 한 번 대표로 답해 보기 바란다.   
 
9. 정이철은 두날개를 적극 공격하는 자이다. 반대자이다. 지금 정이철의 엡사이트가 그것을 증명한다.  
반면 합동이대위 위원장이 된 진00 목사는 두날개를 옹호하는 합동 목사이다.
이 두 사람이 서로의 목적을 따라 정치적으로 합할 수 있는 지? 알고 싶다. 답변하기 바란다
.


10. 예장합동은 밖에서(해외) 개인적으로 문제를 만든 목사를 적극 옹호, 비호해 주는지?  알고 싶다.

교단 없는 무소속 목사가 합동소속이라고 말만 하면 무조건 법적으로도 옹호/보호해 주는 지? 알고 싶다.

이에 대한 Regulation이 합동 교단 법에 있는지 알고 싶다

합동소속이라는 정이철이가 그 법적 Regulation을 찾아 밝혀주길 바란다.  


정이철에게 부탁 사항:

두날개에 이단성이 있다고 하였으면 끝까지 이단성이 있다고 주장하길 바란다.

개인의 소욕을 따라 진목연을 배신/배반하였듯이, 두날개를 옹호하는 쪽으로 회귀하지 

말길 바란다. 

나이의 굳은 심지 끝까지 지키기 바란다. 의리와 지조와 절개를 지키는 싸나이가 되길 바란다. 

성경에서 배신과 배반의 화신은 누구인가? 예수님을 팔아 먹은 가롯유다가 아닌가 !!  

 

은퇴 목사: 김한길

 

 

길을 보여주어라

지난해를 돌이켜 보니 글자 그대로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한해였다. 누구든지 그렇겠지만, 개인적으로 지난해처럼 어려웠던 때, 폭풍의 눈 속을 통과하는 듯, 모질고 힘든 일들을 많이 겪었던 시기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해가 갈수록 사람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평화는 오지 않고, 희망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멀리 달아나는 쌍무지개와 같은 것일까? 열심히 사느라 살았건만… 나만 그런 것이 아닌 듯, 만나는 사람마다 한결같이 살기 어렵다고 아우성이다. 세상이 그만큼 각박해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게다가 우리나라를 비롯한 국제 정세는, 정치에 관심이 없는 나 같은 아녀자가 보기에도 위태롭고 위기감마저 느끼는 요즘이다. 깊은 혼란과 혼돈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세상을 바라볼 때, 신약시대 바울 사도가 죄수로 끌려가며 탔던 배, 풍랑을 만나 좌초될 뻔한 ‘알렉산드리아’ 호가 오버랩되기에 몇 자 적어본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던 바울이 그 동족에게 시기와 질시, 미움과 핍박을 받고 신성모독죄와 소란죄로 피소되어 로마 총독에게 끌려가 몇 번씩이나 심문을 받다가 유대 땅에서는 공정한 재판을 기대하기 어려움을 알고 ‘가이사’ 황제에게 직접 심문받기 위하여 로마로 호송되어 가던 중이었다. 바울이 탄 배가, ‘미항’이란 곳에 도착했을 때, 10월 초에 있는 ‘대속죄일’을 그 항구에서 보내게 되었다. 이 대속죄일 후에는 대개 풍랑이 거칠어서 항해하지 않던가, 항해를 하더라도 아주 조심해야 한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직시한 바울이 ‘미항’에서 겨울을 지난 후 떠나자고 권유했다. 그러나 선장은 자기가 선장이란 자부심 때문인지, 죄수복을 입은 바울의 말을 무시하고 작은 ‘미항’ 보다 더 큰 ‘뵈닉스’ 항으로 떠나겠다 고집한다. 이런 때, 죄수들의 총 책임자인 백부장 ‘율리오’에게 결정권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바울의 말보다 그 배의 선장과 선원들의 말을 더 경청했고 결국은 그들의 뜻대로 ‘뵈닉스’ 항을 향해서 떠났던 것이다.

항해를 시작한 처음 며칠 동안은 남풍이 순하게 불었다. “저희(선장과 선원, 그리고 백부장 율리오)가 득의 한 줄 알고(행 27 : 13)”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돌아가고 있을 때, 갑자기 ‘유라굴로’라고 하는 무서운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고, 배는 큰 위기에 빠졌다. 잘못 생각하는 지도자들의 잘못된 선택으로 ‘알렉산드리아’ 호는 좌초하기 직전의 위급함에까지 빠져들게 된 것이다. 작금의 우리나라 사태가 그때 그 ‘알렉산드리아’ 호의 신세처럼 좌초하기 직전의 상태와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유라굴로’는 동풍을 의미하는 라틴어 ‘유루스’와 북풍을 의미하는 라틴어 ‘아킬로’의 합성어로 ‘동북풍’을 뜻한다고 한다. 이런 폭풍은 그곳의 전형적인 지형 때문에 형성되는 돌풍으로서 그레데 섬의 한가운데 솟아 있는 ‘이다(Ida)' 산맥에서 형성된 두 반대 기류가 맞부딪칠 때 발생하는데, 순한 남풍이 이런 돌풍과 겹쳐 북풍으로 급격하게 변하기 때문에 그 위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고 한다. 한 번 이 바람에 휩싸이면 배가 방향을 잃고 속수무책으로 표류하다 결국은 파선될 수밖에 없다. 이런 무서운 풍랑 속에 알렉산드리아 호가 빠져들었다.

기록을 보면, 알렉산드리아 호 승객은 죄수를 포함해서 276명이 타고 있었다고 하니 지금부터 약 2,000여 년 전의 배치고는 어마어마하게 큰 배였던 것 같다. 그 속에 탄 사람들의 신분도 가지각색이었다. 따라서 그들 정신세계, 사상의 세계도 가지각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크게 나누어 보면 두 부류가 거기 있었을 뿐이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백부장 ‘율리오’를 비롯한 군인들, 선장을 비롯한 뱃사람들이 지배자라면, 바울을 포함한 모든 죄수가 피지배자들이라 하겠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들은 비록 지위가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현대 젊은이들의 표현대로라면 ‘금수저’ ‘흙 수저’로 나누어지겠지만, 그래 봤자 같은 배를 탄 사람들은 모두 같은 운명이란 사실이다. 배가 풍랑을 만나면 그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가 그 배와 함께 풍랑을 겪어야 하고, 배가 파선하면 그 안에 탄 사람들은 직위, 지식, 부와 빈에 관계없이 같은 처지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알렉산드리아 호에 탄 사람들의 공동운명이다.

당시에 내가 지배자란 마음으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 했던 선장과 그의 말에 부화뇌동(?) 됐던 백부장 ‘율리오’를 보게 된다. 피지배층인 바울의 말은 무시해도 된다는 교만한 지도자들이 배에 탄 모든 승객의 목숨마저 위험에 빠트리게 된 것이다. 현대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그런 정치인들이 민중을 선동하고 자기 유익을 위해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달랐다. 자신이 처한 환경을 탓하지도, 원망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살 길을 보여주는 용기있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바울에게는 남다른 무엇이 있었는가? 참 흥미롭다.

밤낮 사흘을 풍랑과 싸운 뱃사람들은 이제 더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망적 상황 앞에서 기진해 갔다. 행여나 살 길이 있으려나? 선장과 선원들의 얼굴을 바라보았으나 그들이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으랴. 사도행전 기자 누가 선생은 “ 구원의 여망이 없어졌더라.” 하고 그 당시의 절망적 상황을 사실적 표현으로 잘 기술하고 있다, 이처럼 풍랑을 만나게 된 것이 순전히 지배자들의 잘못이지만 문제는 피지배자들의 태도이다. 잘못된 선택을 하는 지도자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들만 원망하고 있다면 달라질 게 무엇이 있겠는가? 이런 때 바울처럼 살 길을 보여주는 용기있는 그리스도인은 없는가?

오늘 우리도 누구 때문인지 모르지만 여러 가지로 어렵고 위험한 항해를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때일수록 국가의 권력자들이나 정치인들은 자기 살 길을 찾아 달아날 생각을 하지 말고 불안에 떨고 있는 민중들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칠 각오를 한다면 좋을 텐데….서로 잘못이 없다고 상대를 향해서 손가락질만 해대니…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부패했다고, 캄캄하다고 불평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캄캄함을 밝혀줄 빛(등대)에 기름을 채워야 한다. 불평한다고 키를 한 자라도 더 크게 할 수 있는가? 없다. 불평보다는 차라리 해법(solution)을 찾아라. 우리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지배자들과 달라야 하고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 비록 작은 무리이며 약하고 천대받는 피지배층이라고 할지라도 분연히 일어서서 외쳐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속에 살 길이 있노라고…”

어느 나라에서나 기독교인은 사람의 영혼을 주께로 인도할 사명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그 바람을 이용하여 더욱 거세게 몰아가는 이들에게 편승하여 배를 더욱 위기에 몰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언제 어디서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 무장하여 자기가 먼저 든든히 서고, 그리고 흑암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에게 살 길을 보여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바울은 말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행 27 : 25)" 신실하신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해주시겠다 약속하신 하나님, 그분이 말씀하셨으니 내 실생활에서 그대로 될 줄을 믿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다! 우리 앞에 펼쳐진 2017년 새해, 이 한해는, 나도 살고, 너도 살고, 다른 모든 이에게도 살 길을 보여주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 믿음의 용장들이 나라마다 교회마다 동네마다 우후죽순으로 일어나기를 바라며 소원해 본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Your word is a lamp to my feet and a light for my path. (시 119 : 105)"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행 27: 20- 26)"

 

출처: 목양연가/글: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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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 사는 인생

 

은혜는 돌에 새기고
원수는 물에 새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크게 나누면 딱 두 부류라고 하겠습니다.
 
한 부류는
작은 은혜를 받고서도 그 은혜를 늘 기억하며
비록 갚지는 못해도 가슴 깊이 감사를 느끼는 사람이고,
다른 한 부류는 큰 은혜를 입고도
자기에게 불리할 때는
그 은혜를 헌신짝처럼 던져버리는 사람입니다.
 
어릴 적 읽었던 이솝 이야기 중
개미와 포수의 이야기가 기억나는군요.
비둘기에게 은혜를 입은 개미가
포수의 손에서 비둘기를 구한다는...
 
한낱 미물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으려 한다는 것을 예로,
우리에게 바른 삶, 인간의 도리를 가르치려 한
어른들의 지혜로운 이야기일 것입니다.
 
조금 못나고 부족한 것은 용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이 배우고 똑똑한 사람이라 자랑하여도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은 한낱 미물보다 못한 사람입니다...
 
내가 받은 사랑, 부모 친척, 스승 그리고 내 이웃의 호의를
은혜로, 가슴 속에 늘 간직하는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은혜로 사는 인생이니까요.
 
무엇보다도,
우리는 평생 갚아도 갚지 못할
그리스도의 사랑을 은혜의 선물로 받은 성도들입니다.
오늘을 사는 삶이 비록 버겁고 어려워도
주님의 크신 은혜만은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명심하는 자가 복된 자일 것입니다.
 
주님의 크신 은혜를 심비(心碑)에 새기고,
날마다 십자가의 험한 길을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고 멸망의 길로 간
가롯 유다의 어그러진 길을 걷지 않기를...
 
 


글/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 지옥으로 가는 죄인들아,
주 예수께로 돌아오라! -

38년 전, 제가 20대 후반에 체험한 이야기입니다. 간혹 개인에게나 몇이 있는 자리에서는 간증을 했었지만 공개적으로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자랑거리도 아니요, 내세울 것도 없는 자의 개인적 체험이라서 나이가 들수록 말하기가 조심스럽더군요. 

제 신앙이력을 간략하게 적어봅니다. 

외조부의 영향으로 초등학교 때부터 예수님을 믿었지만 십오리 안에는 교회가 없었고 게다가 가족도 아무도 믿지 않아서 교회 출석을 못하고 있다가 중학교를 도회지에서 다니면서부터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었지요. 

믿음도 없이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좋아서 그렇게 고등학교 때까지 교회를 다녔습니다. 군대 가서 세례를 받았지만 믿음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조차도 잘 몰랐습니다. 군대란 곳이 세례 실적 쌓기라도 하듯이 아무에게나 세례를 주더군요. 그 틈에 저도 세례를 받은 셈이지요. 그러니 교회 출석인들 제대로 했겠습니까. 

제대하고 서울 올라와서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고, 마침 믿는 가정에서 하숙을 하게 됨에 따라, 
그동안 잘 나가지 않던 교회도 다니게 되었습니다만 간증서적들을 읽으면서,  '아! 하나님이 살아계신가 보구나'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저를 주님은 불쌍히 여기셔서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79년 10월20일 경, 그러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흉탄에 쓰러지기 며칠 전이었지요. 새벽기도라고는 고등학교 때 두어 번 나가고(아, 군대서 한 번) 그 뒤로는 한 번도 안 나가던 제가 새벽기도를 다 나갔습니다. 

교회 정문이 모서리에 있었는데 양쪽 모서리 기둥보다 키가 더 큰 시커먼 두 놈이 서 있더군요. 
2미터도 넘어 보이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다가가니까 양쪽으로 부리나케 도망을 가는데 정말 바람처럼 사라지더군요. 발자욱 소리도 안 나고...좀 이상하다 싶긴 했지만 분별력이 없는 저로서는 그저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새벽기도가 끝나고 작은 전구 하나만 켜놓고 어두컴컴한 가운데서 다들 열심히 개인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기도를 했지요. 

'주님, 저도 성령 주십시오!'
남들이 예수 믿으면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무작정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아! 그런데 말입니다. 
저는 남들이 들을 새라 목소리도 작게 '주님 저도 성령 주십시오!' 라고 딱 한 번 기도했는데 그만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빛이 나타났습니다. 어디서 비춰오는 빛이 아니었습니다. 온통 빛 천지였습니다. 저도 없고 다른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빛만 보였습니다. 빛이 어찌나 밝은지 표현이 불가능합니다. 햇빛보다 만 배나 밝다고 해야 하나....
거기다가 그지없이 투명했습니다. 

빛을 보는 순간 저는 심장이 멎을 것같았습니다.
얼마나 엄위롭고 강렬하고 두려운지 지금도 필설로는 형언키 어렵습니다. 두려우면서도 경외감이 넘쳐흘렀습니다.(정확히 2초를 넘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심장이 멎어 죽을 것 같은 마음이 드는 순간 그 빛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발걸음이 이상했습니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같더군요. 그 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씀을 접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임재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집 세고 더디 믿는 제게 그런 체험을 하게 하신 주님의 심정을 세월이 지나서야 헤아릴 수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대단한 존재인 줄로 착각했습니다. 저 같은 놈한테는 그런 강렬한 체험이 있어야 했기에 그러셨다는 걸 깨달은 것은 햇수가 좀 지났을 때였습니다. 

그 후로, 한 달이 채 안 되었을 때, 새벽기도 시간에 기도하는 중에 입에서 이상한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몇 마디 나오고는 그쳤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며칠 후 집에서 기도를 하는데 방언이 터졌습니다. 저는 그 당시 방언받기 위해서 (지금의 기억으로는) 별로(?) 기도한 적이 없었습니다. 무슨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는 방언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던 교회였습니다. 

하숙집 집사님이 방언 받은 걸 축하해 주더군요. 
그래서 열심히 방언기도를 했습니다. 물론 개인기도 시간에만... 첨에는 유창한 방언이 아니고 마치 '가갸 거겨 고교 구규 그기....'하듯이 방언이 서툴게 나오더군요. 한마디가 두마디가 되고 세마디가 되고...그러면서 점차 방언이 익숙하게 나오더라구요.(제법 문장을 이루 듯이요) 

지금은 아주 유창한 방언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남들이 뭐라 하든 말든, 필자는 개인기도 시간에 (은밀히) 방언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도 또 특별한 체험을 했습니다. 목구멍에서 향기가 올라왔습니다. 달콤하기가 그지없고 무척 향기로웠습니다. 세상에서 그런 향기를 맡아본 적이 없습니다. 목에서 입으로 코로 은은한 향기가 퍼져나갔습니다. 참으로 신기했습니다. 한 보름 간 간헐적으로 향기가 나더니 그치더군요.(하루에 몇 번씩)

지금 생각해 보면, 죄인 살리는 생명의 향기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라는 예조(예언적 징조)가 아닌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1979년 10.26 사태 이후 어수선한 정국과 전두환 등이 그해 12월, 12.12 쿠데타를 일으키고 나서 80년 정초에 있었던 일입니다. 80년 1월 5일경, 밤 12시 30분까지 성경과 신앙서적을 읽다가 잠이 쏟아져서 잠시 기도하고는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자다가 오늘 밤 꼭 죽을 것만 같더군요.

 '이상하네? 아직 서른도 안 된 나이고 아주 건강한 내가 자다가 죽는다는 마음이 왜 자꾸 들까?' 

그런 마음이 들면서도 전혀 두렵지가 않더군요. 
이미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모셔 들였고, 나름대로 죄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함께 회개가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자꾸 자다가 죽을 것만 같아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잠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도 말입니다. 

일어나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밤 제가 자다가 꼭 죽을 것만 같습니다. 죽으면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러자 죽는다는 마음이 사라지면서 편히 잠이 들더군요.
 
아~~ 그런데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옥이 보이더군요. 첨엔 그것이 지옥인지 몰랐습니다. 맨 앞쪽에 있는 것들이 머리가 있고 몸통과 팔 다리가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직감적으로 사람들이구나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광경은 실로 무시무시했습니다. 온통 시커멓고 붉은 불꽃만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다 내 쪽을 바라보면서 풀쩍풀쩍 뛰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제자리에 서 있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너무나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어 한없이 고통스러워하면서 온 사지를 흔들며 풀쩍 풀쩍 뛰고 있더군요. 마치 나이트 클럽에 많은 사람이 빽빽히 들어차서 어두컴컴한 불빛 아래서 광란의 춤을 추듯이 말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는 자들의 숫자였습니다. 멀리 뒷 쪽을 보니까 사람들의 머리가 마치 바닷가 모래알처럼 보였습니다. 끝이 안 보였습니다. 지평선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좌우가 안 보였습니다. 너무 너무 많은 수의 사람들이 새까맣게 탄 모습으로 고통 가운데 울부짖으며 (소리는 안 들렸지만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옥에 있는 영혼들의 수가 수억, 수십억도 더 되는 것 같았습니다. 지옥에 대한 간증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고 성경을 통해서 지옥이 있다는 것만 알았지 지옥이 그런 곳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지옥은, 어둠과 붉은 불꽃과 시커멓게 탄 영혼들의 절규하는 모습, 그 세 가지 이상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모래알 같이 수없이 많은 사람들 머리 위로 시뻘건 불꽃이 풀풀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좀 특이한 것은 지옥에 있는 자들과 저 사이에 빈 공간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지옥에 있는 자들은 그 공간을 전혀 침범치 못하고 마치 일렬횡대로 선 것같이 끝없이 좌우로 펼쳐져 보이더군요. 뒤로도 끝이 없이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있었고....수많은 영혼들이 한결같은 고통 가운데 있는 것을 생생히 목도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아! 마침 어떤 젊은 여자(30대 초중반)가 지옥으로 떨어지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 참혹한 광경을 목도한 저로서는 그 여자가 거기 빠지면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하고 그 여자의 팔을 붙들고 얼른 내 뒤로 제쳤습니다.

그 뒤 곧바로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눈에서는 눈물이 마구 쏟아졌습니다. '아 내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저 지옥에 갈 것이 아닌가!' 엎드려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시계를 보니 12시 40분이었습니다. 기도하고 잠이 든 시각이 대략 12시 35분 경 이었는데, 그 5분 사이에 엄청난 일을 체험한 것이었습니다. 깨어나서도 그것이 생시 같았습니다. 얼마나 충격이 컸던지 그 충격이 장장 6개월이나 지속되었습니다. 

길을 가다가도 차를 타고 가다가도 밥을 먹을 때도 일을 할 때도.... 시도 때도 없이 그 광경이 선명히 눈앞에 펼쳐지곤 했습니다. 

(표현의 한계로 이 정도로 적지만 저는 그 당시 쇼크로 심장마비를 일으킬 뻔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 후 심장병이 생겨 십 수 년을 고생했습니다. 지금은 건강합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기까지 주님은 불같은 시련의 용광로에서 저를 연단하시더군요) 

그 때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 안 믿으면 불 못에 간다'는 사실을... 

예수 믿지 않는 자들을 바라보는 저의 시각이 바뀌었습니다. 180도로 바뀌었습니다. 불쌍해서 미칠 지경이었다면 좀 과장된 표현이고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 뒤 한 보름 지났을 때,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고향집에 가고 싶었습니다. 예사로 생각하고 있는데 또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번에도 그 마음이 쓸데없는 생각이라 여겨 무시했습니다. 세 번째 그 마음이 들자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열흘 남짓이면 구정(당시는 설을 구정이라 했다)에 고향에 갈 터인데 지금 왜 가고 싶은 마음이 들까... 길이 천리인데...차비도 꽤 들고...그러나 마음은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3일 휴가계를 내었더니 물어보지도 않고 다녀오라고 하더군요. 고향에 계신 어머니와 남동생 여동생을 전도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기에 큰 아버지를 전도했습니다. 

워낙 완고하신 분이사라 목침에 맞을 각오로 마음을 굳게 먹고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성경도 선물하고 '예수님 영접기도문'도 적어드렸습니다. 

서울에 올라와서 한 열흘 뒤 구정(설)에 다시 고향집을 찾았습니다. 아! 놀랍게도 가족이 다 교회에 나갔다고 하더군요. 생긴 지 몇 해 안 되는 아랫마을 장로교에 출석한다고 하더군요. 

더 놀라운 사실은 큰 아버지의 말씀이었습니다. 
제가 적어드린 예수님 영접기도문을 읽는데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 읽다가 보니까, '아 이것이 내가 살 길이구나' 하면서 믿어지면서 예수님을 영접하셨다는 것입니다. 

교회 문턱에는 가 본 일도 없는 분(지역에서는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좀 부정적인 면에서 유명한 분이었음)이 돌아오는 주일, 의관정제 하고 즉시로 교회에 나갔으니 온 동네와 아랫마을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두어 번 나가시다가 주변 시선이 좀 뭐해서 그랬던지 수 십리 밖에 있는 교회에 버스타고 다니셨다고 하더군요, 

설 쇠고 삼월달이 되었을 적에 그만 큰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지병을 앓고 있었는데... 

전보를 받고 울고 있는 제게 성령님은 감동을 주시더라구요. '너희 큰아버지는 구원 받았느니라 그러니 슬퍼하지 말아라'는 마음이 강하게 들더군요.

저도 신앙이 어리고 잘 모르던 초신자 시절이라 장례식에 가서 동생들한테 임종 때의 상황을 물어보니까 임종하시기 두 시간 전까지 엄청난 고통 가운데서 몸부림치다가 임종 두 시간 전에 '내가 두 시간 뒤에는 잘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평온을 되찾고 편안히 숨을 쉬다가 두 시간 후에 잠을 자듯이 고요히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 때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복음은 그 어떤 죄인도 구원하는 능력이 있구나' 

그 이후로도 하나님은 예수님을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사랑 갚을 길이 없고 멸망으로 치닫는 영혼들이 너무나 불쌍해서 불타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전도지를 12만장 정도를 자비로 찍었습니다. 
A4 양면에 빼곡히 아주 구체적으로 복음을 소개했습니다. 예수님 영접기도문도 적었습니다. 
인쇄된 전도지를 붙들고 눈물로 적셨습니다. 땀으로 전도지를 범벅을 했습니다. 간절히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 전도지로 복음을 전하오니, 부디 이 전도지를 통하여 많은 영혼들이 구원받게 하소서' 

'저 영혼들을 제게 붙이지 않으시려면 차라리 저를 데려가소서' 

울부짖으며 정말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간절히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루에 많게는 1500장, 적게는 300장 정도 돌렸습니다.
 
첨엔 좀 부끄러운 마음도 없잖아 있었으나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강권했습니다. 

담대히 외쳤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구원받으십시오!' 

주로 지하철 안에서, 2호선 1호선에서....
그리고 영등포역에서 많이 전했습니다. 
서울역 청량리역 강남터미널에서도 전했습니다.
경부선 호남선 경춘선 등등을 통해서 전도지가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어떻게 아냐구요? 주머니에 넣거나 가방에 넣는 모습을 수없이 봤거든요. 

제가 직접 돌린 전도지가 아마도 10만장 가까이 될 것입니다. 옆에서 조금 거들어 준 것까지 합하면요. '예수 믿고 구원 받으십시오'란 말은 얼추 20만 번 정도 했울 겁니다. 

1500장 정도 전도지를 돌릴 때는 입이 굳어져서 말이 안 나왔습니다. '예수..."하고는 전도지를 돌렸습니다. 전도지 준다고 다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두세 명에 한 명꼴로 받으니 20만 번 정도 '예수 믿고 구원 받으십시오' 라는 말을 한 셈이지요. 

놀라운 것은 그 전도지가 땅바닥에 버려지는 것이 백장에 한두 장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버리지 말고 집에 가지고 가서 가족들도 읽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주님이 그것까지 세밀히 응답하시더군요. 

그리고 전도지를 읽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어떤 자매님은 애를 업고서 음료수를 사다가 주시면서 고생하신다고 격려할 때는 참 힘이 났습니다.(그런 분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핍박도 많이 받았습니다. 욕도 많이 얻어먹었습니다. 청소하는 아주머니한테서 빗자루로 얻어맞기도 했습니다. 저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전도의 미련한 방법을 통해서
죄인 구원하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습니다. 

기도하고 성령을 의지하여 복음을 전하면 지금도 구원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주님의 마음을 품고 복음을 전해보십시오. 구원의 역사가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복음 전함은 나의 소관이 아니라고 치부하지 마십시오. 전도는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주신 지상명령입니다. 

이 글을 읽으신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이 구령의 열정과 복음전함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전도하는 제게 하나님은 놀라운 기적 같은 응답을 여러 번 주셨습니다. 다음 기회에 간증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필자는 신비주의나 표적신앙을 쫓는 자가 아닙니다. 다만 위와 같은 채험을 제 의지와 상관 없이 했을뿐입니다. 그러니 다소 생각이 틀리더라도, '이런 경우도 있구나' 하고 너그럽게 받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부족한 저의 전도로 예수님을 영접한 분들이 많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복음을 전한다면 구원의 역사가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한국교회도 역사가 길어지면서 원로목사 후임교회와 장기목회자 후임이 점점 많아지는데 거기에 대한 신학교 교육이나 책이 없기 때문에 지식 부족에서 오는 많은 시행착오의 문제가 파생되는 것 같아 원로목사 후임지침서와  장기목회자 후임  참고서를 9회에 걸처 시리즈로 쓸것입니다.
웜로목사 후임들은(장기목회자 후임들도 같이) 참고하시고 취사선택을 바랍니다.

Ⅰ. 원로 목사와 후임과의 갈등과 평화

원로 목사 후임과 갈등, 또는 전쟁과  평화란 글을 쓰려고 하는데 동기는 원로 목사와 후임과의 관계가 교회에 갈등으로 비춰지는 것이 다수 교회이기 때문에 문제의 요인을 생각하여 보고 각자 참고하여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데서 이 글을 쓰는 목적이 있다.

필자는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정상적인 당회가 구성되어 있고 역사가 있는 교회에서 10년 이상 순탄하게 목회 하였으면 그 목사는 목회에 관한 한 "도사"가 된 분이라고 정의한다. % 따진다면 한국 교회 목사들을 총 망라하여 수만 명인데 통합 측 교회만 하더라도 목사가 1만6천명이 넘고 원로목사는 61명(2010년도)인데 한 교회에서 10년 이상 장기목회 한분이 몇%나 되겠는가? 통계가 나오지 않아 모르지만 일반 관점에서 볼 때에 (수백명?)그 수는 그리 많지않다고 추리된다.

인생이 전쟁이라면 목회도 전쟁이다. 칼빈은 교회를 전투하는 교회라하였다. 원로 목사란 한 교회에 부임하여 20년 이상 시무하고 교회의 동의를 얻어 추대 받은 백전노장의 장군이다. 원로 목사가 장기 목회를 하고 물러간 그 자리를 무난히 메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고로 20년 이상 목회 한 원로 목사의 그 자리를 매우려면 예의와 지혜와 목회 능력과 처신의 인간관계가 탁월하여야 가능하다.

어떤 목사라도 그 자리를 이어 받았다면 눈물과 피와 땀으로 절타 탁마의 인고의 세월을 경험한 자이거나 아니면 지금부터 절타 탁마를 견디어 낼수있는 자여야 전임의 목회를 연속 할 수 있다.
명장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당회가 구성된 교회에서 20년 이상 목회 하였다면 그는 명장이다. 그런고로 많은 시간과 난관을 거쳐 많은 수련을 쌓아야 원로의 자리를 무난히 매워 갈 수 있다. 수련을 쌓는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다. 타고난 달란트와 인격과 그릇이 커야한다.

우둔한 단기 목회의 종지기 그릇의 소양을 가진 목회자는 어떤 지혜를 공급 받아도 감당치 못하고 중도 패전하여 탈락할 것이다. 전쟁은 적을 알고 전술이 뛰어난 자가 승리한다. 상대를 먼저 알고 전쟁을 치르는 자가 승리하는데 종지기 그릇의 소양을 가진 자는 멀리, 넓게, 깊게, 높게 볼 관찰력이 없고 전략의 능력과 시력도 없고 좁은 소견에 인내력도 포용략도 부족하기 때문에 그 자리를 지탱 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

그런고로 확실한 승리의 전술과 지식을 갖지않은 자는 노 하우를 배워서 가든지 아니면  그 자리에 아예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 그 자리에 들어가지 말아야 할 자가 들어앉으면 전쟁은 반드시 일어나고 교회는 시련을 격는다.
앞으로 원로 목사와 장기 목회자가 점점 많아지는 것이 현실이기에 “원로 후임과 전쟁과 평화”라는 글을 통하여 최소한 전쟁을 막아 보자.

2. 비범한 인성과 목회철학과 능력을 가진 자만이 원로 목사 자리 감당

1) “도사 기질”을 가진 자만이 원로 자리 무난히 연속 할 수 있다
목회 초보자라도 그 자리를 무사히 이어가는 목회자는 “도사”가 될 수 있는 소양을 가진 자이다.
그는 비범한 천부적 목회 달란트와 탁월한 적응력의 지혜와 그릇을 가진 자이다.
그렇지 않고 평범한 달란트를 가진 좁은 소양의 목회자가 설교 한번 잘하고 인물 좋고 학벌 좋고 "증" ? 하나로  부임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는 거기서 그 자리를 지탱하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비범한 “도사” 기질과 뛰어난 적응력의 지혜와 그릇이 큰 자는 그 도사의 자리를 무난이 이어 갈 수 있다.

2) 원로목사  때문이란 용어를 입에 담지 말라.
근간에 원로 목사 후임들이 원로목사 간섭과 시집살이 때문에 목회가 힘들고 어렵다고 당사자들의 입과 그 교회를 통하여 곳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원로목사 재도 반대운동까지 일어나고 있다. 헌법이 개정되기 전에는 반대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원로 목사는 장기간 그 교회를 사랑하고 키웟다. 그는  후임 목사가 목회를 잘하도록 도와야 되겠다는 마음에서 그 교회를 떠나지 않고 있거나 그리고 마땅히 갈 교회가 없기 때문에 그 교회에 출석하는 분도있다. 그 교회를 출석 않는다 하더라도 멀리서 교회를 살피고 어려움이 없기를 바라며 어려움이 있으면 돕는 마음을 갖고있다. 자기가 섬기든 교회를 해꼬지 하겠다는 목사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배은 망덕한 버릇없는 후임들이 원로목사를 귀찬케 여기는데 문제가있다.

후임에게는 원로만큼 부담스러운 존재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비중이 크고 시어머니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후임은 그분의 비중을 인정하고 들면 문제가 되지 않은데 그분의 비중을 인정 않을려는데 문제게있다.

원로후임은 그 원로목사가 없어도 다른 대상(장로)이 그 후임 에게 똑같은 비중의 부담스러운 존재가 된다는 사실도 알아야 된다.

속담과 같이 큰 말이 나가면 작은 말이 큰 말 행세 한다는 말이 잊지 않는가? 반드시 말의 무리 가운데는 지배하는 큰 말이 있기 마련이다. 인간 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을 비 정상으로 볼것이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이 인간 공동체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지금 후임이 원로가 되어도 마찬가지이고 원로장로가 되어도 마찬가지가 된다.

담임 목사는 큰말 탈수 있는 능력 자라야한다. 그리하여야 그 다음 큰 말도 탈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마찬가지로 바로 그분은 그 교회에 큰 공로자 이기에 큰 말이 되어 큰 말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큰 말 탈수 없는 자는 자기가 큰 말을 탈 능력이 부족한 자로 알고 원로 목사 또는 장로 때문이란 그 용어를 입에 담지 말아야 한다.

3) 원로는 하나밖에 없는 은인 중 은인이다.
원로는 세상 말로 하면 기업을 만들어 물려준 은인이다.
교회가 아니라면 자식에게 물려줄 것이 아닌가? 어떤 분은 자식에게 물려주기도 하지만.
그런 원로목사의 뜻을 100% 수용한들 어떠하랴!
그런 분을 평생 상전으로 모신들 그 은혜를 갚을 수 있겠는가?
그 많은 목사 중에 내가 서도록 직간접으로 협조하신 분인데 얼마나 고마운가!
그분이 후임 결정에 권리가 없었다 하여도  뒤에서 반대 하였다면 과연 그 자리에 올수 있었겠는가?
그분이 후임 부임에 전혀 무관하다 하였을 지라도 그분이 이룩한 교회에 후임이다.
그분의 은혜도 모르고 약간의 부담스러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분을 원망 불평하면 어떤 이유로든 그는 배은망덕 자가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 목사들에게 속된말로 평생토록 원로목사 종노릇하여도 후임되겠다는 목사가 99.999999%가 될것이다. 그도 그런 마음으로 그 교회에 부임하였을 것이다.

원로에 배은망덕 자는 하나님의 은혜도 인간의 은혜도 모르는 저질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목회자로서의 섬기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종의 자격이 없는자며 먹고살기 위한 직업인의 차원을 넘지 못한 지극히 세상적인 사고 자라고 생각한다.

부임 전에는 원로 목사나 장로에게 손발을 비비며 내가 부임하면 잘 섬기고 잘 하겠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부임하지 않았는가? 그런 생각않고 부임한 목사가 과연 있는가? 실제로 그렇게 빌고 부임하는 목회자도있다.

그리고서 부임 한 후에는 딴 짓거리를 하는 고얀ㄴㄴㄴㄴㄴ-많다.

일부 중직 자들에게 원로목사에 대한 장기간 쌓여진 불만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이 정상이다. 후임에게는 그런 불만자가 앞으로 없겠는가? 그것을 생각 못하는 목사는 석두 목사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불만 그룹들과 연대하여 원로에게 도전하는 것은 부도덕 중 부도덕이며 있을 수 없는 배은망덕 행위이다. 배은 망덕의 행위를 하였을 때에 교회는 혼란하여 지고 그 그 교회에서  목회하기가 심히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되며 교인들을 골탕 먹이게 된다. (천호동 ? 교회!!!)
후임 목사들은 자기에게는 반대 그룹이 형성되지 않는다고  착각하지 말라. 착각자는 석두이다.

그분은 그대에게 한 분 밖에 없는 은인이다.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선배에 대한 예우를 깍듯이 하는 것이 목회에 기본 도리이며 하나님께도 인정받고 교인들에게도 인정받고 축복받을 일이며 원로에게도 많은 도움을 받고 사랑받을 조건이다. 장기목회에 실증자와 불만자가 많아도 50%이상이 그의 폔임을 알아야한다.

그런고로 원로목사 때문에 힘들다는 말은 입 밖에 내지말라.

4) 원로목사 때문이란 불평하는 자는 그 교회를 담을 그릇이 못되는 자가 부임 하였다. 원로목사 후임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원망하며 물러가는 그 목회자가 원로 목사 없는 그 만한 규모와 역사를 가지고 당회가 구성되어 있는 어떤 교회에 부임 하였어도 그 사고가 승화되지 않는 이상 그 목사는 원로없는 그런 교회를 감당 할 수 없는 자이다.

목사는 자기 그릇 이상의 양을 담을 수가 없다.
목회 학에서 교회는 목사만큼 자란다고 한다.
그 교회를 담을 그릇이 못되는 자가 그 교회에 후임이 되어 고통하고 갈등한다면 잘난척 거만 떨지말고 자신의 그릇에 대하여 깊이 자각하고 반성하고 부족을 시인하고 낮아져서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

비범한 목회철학을 갖지 못한 자는 20년 이상의 그 “거대하고 광활한 자리를” 물려받았다 할지라도 지탱할 수 없다.

원로목사 후임 자리를 잘 지탱하며 연속하는 후임자는 그릇이 크며 첫째 선배에 대한 예의가 바른 비범한 목회자이다. 요즈음 젊은 후임들은 선배 원로에 대하여 무례하며 예의가 부족한데서  선배를 섭섭게하며 많은 문제를 야기하는 것 같다.
귀찬 스러운 존제, 간섭하는 존제, 안보이는 존제가 되었으면!!!!!!!!!!!!!. 이는 배은 망덕 자이다.

앞으로 필자는 원로목사에 대해서만 아니고 장로와의 인간관게 예의 범절에 대하여도 심도있게 다루려고 한다.

 

출처: USA 아멘넷/장달윤 목사

(창세기 43장) 잃게 되면 잃으리라.

“애증(愛憎)”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과 증오”라는 말이지요. 한 사람이 또 다른 한 사람에게 견딜 수 없이 불타오르는 사랑과 또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증오의 감정을 동시에 가졌다면, 마음속에 그 서로 다른 두 가지의 감정이 격렬하게 소용돌이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주제를 다룬 소설이나 영화도 많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막히게 잘 만든 소설이나 영화라도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애증의 스토리, 그 참혹한 십자가의 피로 클라이막스를 이루는 성경에 비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인이 된 인간을 얼마나 미워하셨는지, 그러나 또한 얼마나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셨기에 아들을 내어 주셨는지, 이보다 처절한 애증의 스토리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만일 당신이 요셉이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은가요? 열일곱 살 앳된 나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브엘세바에서 세겜, 그리고 다시 도단까지, 그 먼 길을 형들을 찾아갔는데 그 형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고, 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져 넣고, 그리고는 노예로 팔아버린 그 일을 어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울부짖는 동생에게 잔혹하게 그 일을 해치운 형들, 그리하여 아버지를 영영 다시 볼 수없는 먼 곳에서 비참한 노예생활과 옥살이를 해야 했던 긴 세월, 그렇게 꽃다운 나이를 캄캄한 어둠 속에서 보내야 했던 그 일이 어찌 잊어질 수 있겠습니까?
 
요셉은 그 형들을 다그쳐 정탐일 것이라고 하면서 붙잡아 삼일동안 가두었지만 그 정도로 그 사무친 원한이 풀릴 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시므온을 다시 잡아 결박하여 가둔다고 마음이 가벼워지거나 위로가 될 리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아버지와 동생 베냐민을 향한 불타는 그리움과 사랑이 더욱 회오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원망스럽고 미운 형들이라 할지라도 한 핏줄이요 지금 기근으로 고통 받으며 식량을 구하러 온 그들을 매몰차게 내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혼자 방에 들어가 남모르게 울며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리고 시므온을 남겨두게 하고 나머지 형제들에게는 말째 동생을 데리고 다시 돌아오라 하면서 그 속에 그들이 가지고 온 돈뭉치와 식량을 채운 자루들을 지워 가나안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너희가 말째 동생을 데리고 오지 아니하면 내 얼굴을 보지 못 하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은 베냐민을 결코 보내려고 하지 않고 형들은 식량을 구하러 내려오지를 못 합니다.
 
말째 동생을 데리고 오라는 것, 숨겨놓은 가장 귀한 것, 가장 아끼는 것을 내어놓으라는 요셉의 요구는 요셉이 당한 고통, 요셉이 겪은 배신과 버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지도 모릅니다. 야곱의 베냐민에 대한 집착은 가장 귀한 것은 내어놓지 않으려는 죄인 된 인간의 심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도 가장 귀한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주님의 얼굴을 보지 못 할 것입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품을 떠나 요셉보다 더욱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고 요셉에 비할 바 아닌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장 귀한 것, 가장 아까운 것만은 숨기고 내어놓지 못 하고 포기하지 못 하면서 헛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가장 아까운 것을 포기하지 못 한다면, 주님 앞에 내어놓지 못 한다면 생명을 얻지 못 할 것입니다. 다시 애굽에서 가져온 식량마저 떨어져 갑니다. 그러나 야곱은 베냐민을 포기하지 못 합니다. 보다 못 한 유다가 말합니다. “아버지, 베냐민을 포기하세요, 지체하지 않았더라면 두 번 갔다 왔으리다.” 그렇습니다. 주님 앞에 온전히 포기해야 삽니다. 그 포기와 내려놓음은 일찍 할수록 좋습니다. 미루면 미룰수록 고통만 더 할 뿐입니다.
 
계속되는 기근으로 목숨이 위태로워지고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결국 야곱은 베냐민을 붙잡고 있는 것을 포기합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라. 그리고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준비하라.” 그들은 유향(myrrh), 꿀, 향품, 몰약, 비자(피스타치오 너트), 파단행(아몬드) 같은 가나안 땅의 소산과 귀한 선물을 준비하고 돈(은)도 배나 준비해서 다시 애굽으로 향하게 됩니다. 야곱은 모릅니다, 그 아들들도 모릅니다, 그들이 이렇게 하여 동방박사들이 아기예수님, 곧 구세주에게 드린 예물과 비슷한 예물을 준비하였다는 사실을. 야곱은 베냐민을 데리고 가라 하면서 말합니다, “네 아우도 데리고 가라. 잃게 되면 잃으리라.”

‘잃게 되면 잃으리라’는 야곱의 말은 ‘죽으면 죽으리라’ 하며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았던 에스더의 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나의 생명을 포기하고 온전히 맡기는 일입니다. 이러한 결단 없이는 아무도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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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정책 '잘못' 7차례 사용, 존경 표하면서도 혹평
냉랭한 美-獨관계, 순탄하지 않은 美-EU관계 전망도

(베를린=연합뉴스) 고형규 특파원 = 냉전 시기 미국 데탕트 외교와 국제질서 대변화를 주도한 '외교의 달인'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어느 순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미국 대통령이) 유럽과 대화하고 싶을 때 누구에게 전화해야 하는가?"

유럽 최대 발행 부수를 자랑하는 독일 대중지 빌트가 영국 일간지 더타임스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을 그의 뉴욕사무실에서 합동 인터뷰할 때 카이 디크만 빌트 발행인이 키신저 전 장관의 이 말을 옮기며 트럼프 당선인에게 물었다.

16일(현지시간) 자 빌트에 실린 문답을 보면, 디크만 발행인이 "누구 전화번호로 전화하겠는가"라고 묻자 트럼프 당선인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라는 대답을 기대한 질문임을 눈치채고는 메르켈 총리와 유럽연합(EU)에 대한 자기 생각을 가감 없이 밝힌다.

트럼프 당선인은 "나는 메르켈이 (세계의) 가장 중요한 정부수반들 중에서도 현저하게 중요한 한 사람이라고 말하겠다"고 답하고서 묻지도 않은 EU로 화제를 돌려 "영국을 보라, 그리고 EU를 보라"면서 "EU는 독일이다. EU는 독일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당선인은 그러고는 영국의 EU 탈퇴를 뜻하는 브렉시트를 "현명한 결정"이라고 보는 자신의 관점을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재차 브렉시트 결정 이후의 상황을 두고 "잘 돼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디크만 발행인에게 "메르켈 총리는 잘 지내고 있느냐"라고 안부를 묻는 걸 잊지 않은 트럼프 당선인이지만, 이미 메르켈 총리의 '레거시'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개방적 난민정책에 대해서는 혹평을 쏟아냈다.

임기말 고별 방문지로 베를린을 찾아 총리직 4연임 도전에 나선 메르켈 총리를 만나서 "나라면 메르켈 총리에게 한 표를 던지겠다"고 했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미국의 차기 대통령 트럼프 당선인이었다.

트럼프 당선인은 "당신도 오바마처럼 메르켈에게 표를 주겠느냐"라는 질문에 "글쎄, 일단 나는 (오는 9월 독일 총선에서) 메르켈의 경쟁자가 누구인지 모르고, 또한 메르켈 역시 모를 뿐 아니라 그를 만난 적도 없다"고 운을 뗐다.

이어 "그가 훌륭한 지도자라는 느낌이 있지만, 그러나 그는 최악의 재앙적 실수를 했다"고 말하고 "모든 불법자를 독일로 유입되도록 허용한 것"이라며 메르켈표 난민정책에 대한 평소 생각을 밝혔다.

조부가 독일 출신인 트럼프 당선인은 그러면서도 앞서 문답에서 독일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거나, 독일은 자신에게 전적으로 특별한 그 무엇이라고 말한 것처럼 메르켈 총리에 대해서도 "존경하고, 좋아한다"라고 호감을 거듭 표했다.

트럼프 당선인은 그러나 어디 출신인지 아무도 모르는 난민을 받아들인 것은 "큰 실수였다"고 또 지적하는 등 모두 7차례 '실수(잘못·mistake)'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는 특히, "사람들이란 실수를 하는 것이지만, 그건 아주 큰 실수였다고 나는 생각한다"고도 말하고 독일로 가장 많은 난민 유입 부담을 안긴 시리아에 '안보(안전) 구역'을 둬 난민 문제에 대응했어야 대가를 덜 치렀을 것이라는 견해도 내놓았다.

트럼프 당선인은 "당신에게 전형적인 독일다움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고는 "나는 '질서정연함'(orderliness)을 선호하고, 힘(strength)을 좋아한다"고 답했다.

앞서 일요신문 빌트암존탁이 여론조사 전문기관 엠니트를 통해 조사한 결과로는 응답자의 68%가 트럼프 취임이 미-독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리라 전망했다. 반대로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는 쪽은 16%에 불과했다.

un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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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야 물러갈지어다-

36년 전, 그러니까 1981년 어느 늦가을 밤,
기도하려고 산에 올라갔습니다.

밤 10시 조금 넘어서 집에서 출발해서 골짜기로 한참 들어가다가 산에 올라 중턱을 지나 산꼭대기로 가던 중 꽤 넓고 비스듬한 바위를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 엎드렸습니다.(근교에 살던 집 근처 산이었음)

전혀 인적이 없는 곳이라서 첨엔 으스스했습니다. 마음을 다잡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11시 쯤 기도를 시작했지요.

혼자서 산기도 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산기도 하는 목회자나 성도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도 분주한 일상을 떠나 밤이 맞도록 산에 가서 혼자 기도하셨다는 성경의 기록이 있어서 그랬는지, 아무튼 산기도 가는 것이 무슨 특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힘 좋은 20대 후반의 청년 시절이라 무서울 게 없었습니다. 인적이라고는 없는 깊은 산 중에서, 그것도 밤 중에 혼자 기도하면 마음놓고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새벽 2시 경,
생사의 갈림길에 서는 일생일대의 위기가 닥쳤습니다. 산짐승이 무서운 것도 아니고 사람이 무서운 것도 아닌 저였습니다.

갑자기 시커먼 놈이 등 뒤에서 나탔습니다. 집채만 해 보였습니다. 형체만 보였지 구체적인 모습을 묘사하기가 어렵군요. 그 놈이 저를 한 입에 삼키려고 달려들었습니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는 베드로 전서 5장 9절의 그 말씀과 어찌 그리 똑 같던지요.

아! 이제 죽었구나! 꼼짝없이 죽었구나! 등골이 오싹했습니다. 머리털이 서고 온 몸에 솜털이 일제히 솟았습니다. 무서움을 동반한 엄청난 공포가 마음과 전신을 휘감았습니다. 온 몸이 얼어붙었습니다.

마음 한켠에서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잖아' 그러면서 죽기를 각오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이 들면서 너 한테는 안 죽겠다는 오기와 담대함이 생겼습니다.

그 시커먼 엄청난 놈을 정면으로 대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하노니 마귀야 물러갈지어다!' 그런데 입이 얼어붙어서 모기소리보다 조금 더 큰 소리밖에는 안 나오더라고요.ㅎ

그러자 그 엄청난 놈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공무니를 빼면서 슬그머니 물러가는 것이었습니다.

승리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기쁨과 평안이 강물처럼 밀려왔습니다. 온 몸에 긴장이 풀리면서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평온한 가운데 더 깊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새벽 다섯시가 지나서 찬송하면서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그 뒤에도 몇 번 산기도를 갈 기회가 있었는데(다른 산으로) 8-9시간 밤새 기도해도 전혀(별로) 무섭지가 않았습니다. 한 번은 산 능선 묘 옆에서 엎드렸는데(20시-05시까지) 산짐승이 다가와서 숲에서 부시럭거릴 때는 겁이 좀 나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한겨울에 바위에 8시간 동안 엎드려 기도할 적엔 정말 고통스럽더군요.

예전에는 산기도 가서 기도하다가 마귀에 사로잡혀서 정신이 이상하게 된 분들이 가끔 있었습니다. 산기도 가지 마시라고 올리는 글이 아닙니다.

담력을 키우고자 한다면 산기도도 때로는 필요하겠지요. 무슨 능력받기 위해서 산기도 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믿음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산기도는 담력이 약한 분들은 분명히 삼가야 합니다. 산기도 한다고 능력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왜 이런 간증을 하냐 하면 신앙생활 하면서 말씀을 통해 점점 알게 된 사실은 마귀란 놈은 너무나 간교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숨기고 사람이나 일을 통해서 시험을 해 오는데 정말 깨어서 기도하고 말씀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속아넘어가기 쉽상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무시로 기도해야 합니다. 언제 어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공격해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악은 모양이 없다는 말씀대로 가족이나 이웃을 통해서 미소지으며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제 경우, 그 체험 이후에도 마귀가 시커먼 형상으로 계속 공격해 왔다면 무서울 게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물리친 경험을 바탕으로 또 대적하면 되었겠지요.

하지만 마귀의 공격은 다시는 그런 식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마귀를 대적해서 이겼다는 자신감이 생기자 이제는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엉뚱한 모양으로 공격해 왔습니다.

주로 사람을 통해서 시험을 해 왔습니다.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것이 마귀의 시험인 줄 알아차리지 못하게 공격해 왔습니다.

마귀를 물리친 그 일이 있은지 몇 해 후, 모함과 비방을 받아 몹씨 괴롭고 힘이 든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도 다 교회 집사인데 그렇게 하더군요.

저는 아무 변명도 않고 저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몰라서 그러니 용서해달라고....사랑을 품고 기도하니 미움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변명이나 하고 같이 대적하여 싸웠다면 일이 더 어렵게 되었을 것입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참으니까 다 해결되더군요

그 분들이 어느날 제게 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더군요.

주님은 자녀들이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는데
한 피받아 한 몸 이룬 지체들끼리 서로 싸운다면 얼마나 주님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마귀는 이간질하고 남의 허물을 들춰내게 하고 험담하고 비방하게 만듭니다. 그런 마음이 들면 마귀가 시험하는 것인 줄 알고 말씀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제가 신학을 시작한 것이 83년도였습니다. 신학을 마친 게 97년도였습니다. 안수는 2000년도에 받았습니다.

목회자의 길을 가고자 한지 17년 만에 목사가 된 셈이지요. 공부를 많이 해서 기간이 길어진 것이 아닙니다. 80년대 중 후반에 한 몇년 공백이 있었습니다. 돈 벌어서 어려운 목회자나 선교사를 돕는 것이 목회자가 되는 것보다 낫겠다 싶어서 돈버는 데 나서서 그렇습니다. 돈을 벌기는커녕 쫄딱 망해서 고생만 잔뜩했습니다.

처음 목회자의 길을 가고자 했을 때 제게는 이미 목회의 야망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신학을 갖 시작한 놈이 벌써 큰 교회를 이룰 꿈을 꾸기 시작했던 게지요.

주님이 그런 자를 쓰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런 제게 돌아온 건 시련과 실패 고난과 연단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음 등등....

그런 가운데서 신학을 마치고 간절히(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창자가 끊어질 정도로) 기도하니까
응답을 하시더군요. 일평생 그 때 딱 한 번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를 쓰리라!"
"양떼를 맡기리라!"
(1-2초 간의 시차를 두고 말씀하시더군요)

놀라운 체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음성이 가슴에 떨어져 들리더군요. 분명히 하나님께로부터(위로부터) 왔는데 가슴에서 들리더라고요. 중후하고 묵직하고 위엄있고 온유하고....
글로서는 표현이 제대로 안 되는군요. 귀로나 머리로 들리는 음성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요즘에 유행하는 하나님의 음성듣기는 제 경험과 말씀에 비춰볼 적에 신빙성이 별로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진리의 말씀에 설 수 있도록 인도하시지 맨날 음성을 들려주셔서 신앙이 자라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도인 베드로나 바울도 못한(안 한) 일을 현대교회의 어떤 분들은 추구하고 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음성을 듣겠다고 설치면 말씀에 깊이 뿌리내리는 신앙으로 성장할 수도 없거니와 자칫 잘못될 수도 있으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필자는 고난과 실패, 연단의 과정을 지내오면서모든 것,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어느 정도는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목회의 야망과 성공, 그리고 명성은 확실히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마음이 사라지니까 관심조차고 없어지더군요. 겨우 8-9년 전부터 입니다. 참 더디 변하는 제 모습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성화란 단번에 되는 일이 결코 아니더군요. 주님이 오래 참으시면서 우리를 다듬어가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체득하는 실제였습니다. 이제는 그저 이름도 없이 빛고 없이 작은 것에 충성하는 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주님이 맡기신 사역이 얼마나 귀하고
또한 성도들이 얼마나 귀하게 여겨지는지 모릅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따르겠다고 고백을 예전에는 왜 안 했겠습니까.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는 말씀을 늘 마음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욕심의 배후에는 우리로 범죄케 해서 도적질 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마귀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절대로 욕심이 생기도록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말씀을 빙자하여 성공과 번영 축복을 받으라고 욕심을 부추기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십시오.

말씀으로 말미암는 전신갑주로 무장하고 성령 안에서 늘 기도하여 승리하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길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첨언하자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복음)의 능력은 실로 대단한 것임을 살아오면서 더욱 절감합니다. 마귀와 죄와 사망을 이기는 능력은 우리에게서는 결코 나오지 않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모기소리같은 목소리에도 도망가던 마귀였습니다.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세상이지만 작은 목소리로 외치는 복음이 오히려 세상을 이깁니다.

성화(주님을 닮아가는)의 과정도 오직 복음으로만 됩니다. 성화를 위한 우리의 의지나 노력 또한 주님 안에서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나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백만 남게 되는 것이지요.

종(노예)이 할 일을 다 했다고 주인이 사례하겠습니까. 세상에 그런 주인은 없습니다.

할 일을 다 한 후에 엎드려서
'할 일을 했을뿐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종이 참된 종입니다. 여기서 무익하다는 본 뜻은 비참하다는 말입니다. 노예가 얼마나 비참한 신분입니까.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고... 그러면서 인격적으로 대하는 주인 앞에서 할 수 있는 고백이라고는 '그 고백'밖에는 없는 것이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더하여 우리 모두는 그 분을 섬기며 뜻(명령)을 받드는 종입니다.

중심을 잡고 자신의 위치를 지킬 줄 아는 종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샬롬!

글/구자준 목사

마르틴 루터, "나는 농부의 아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길을 따라(1)

 

시대적인 상황

 

중세시대 1,000년을 타락하고 부패한 암흑기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여러 가지 신학적, 교회적, 윤리적 악습들이 난무하고 진리가 어두워지고 교회가 타락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교황이 온 유럽을 다스리고 있던 중세시대는 교황의 권세가 대단했다. 당시 교황권의 지배를 받던 모든 사람들이 교황 제도와 교황의 부당한 요구에 대해 불평했다. 독일 교회도 교황의 통치 아래서 결코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독일 사람들은 교황제도로부터 자유와 독립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를 원했다. 이처럼 중세는 교회의 부패와 교황의 권위로 가득했지만 어두움을 물리칠만한 구원의 빛은 보이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제 어두운 중세시대를 마무리하시기 위해 독일의 한 젊은이를 부르셨다.  루터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지배하는 세상에 태어났다. 개혁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어디선가 큰 빛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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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슬레벤의 루터 생가  ⓒ뉴스파워 김현배

 

루터 생가 - 아이슬레벤

 

구워 먹을 수 없는 백조가 탄생한 곳, 루터 생가이다. 16세기의 중심 인물이 된 루터는 (Martin Luther, 1483-1546) 1483년 11월 10일, 과거 동독의 작센 지역인 아이슬레벤(Eisleben)이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첫째 아들(혹은 둘째)로 태어났다. 마르틴 루터는 그 시대의 관습에 따라 출생 다음날인 11월 11일 성 베드로- 바울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그가 세례 받은 날이 교회력으로 ‘마르틴’ 성자를 기르는 날이어서 세례명으로 마르틴(Martin) 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성 베드로-바울교회는 루터가 유아세례를 받은 세례대가 원형으로 보존되어 있다.

 

루터가 태어난 지 6개월 쯤 되어 루터의 부모는 약간의 돈과 재산을 가지고 고향을 떠나 큰 광산지역인 만스펠트(Mansfeld)로 이사하여 정착하였다. 루터의 어린 시절은 혹독한 가난과 싸우던 시기였다. 그의 부모는 교육받지 못한 하급 신분으로 경제적 여건이 좋지는 않았지만 정직하고 부지런하며 경건한 사람들이었다. 루터는 촌스러운 자신의 배경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평소 “나는 농부의 아들이며 (ich bin eins Bauern),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선조들은 모두 정직한 농민들이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곤 했다. 하지만 그는 일생동안 농민들의 사상과 감정과는 대립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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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터의 부모     ⓒ뉴스파워 김현배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은 젊은 루터 

 

종교개혁을 위한 루터의 훈련은 엄격한 부모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당시 교육 기술의 주요 수단은 체벌이었으며 루터의 부모도 매우 엄격한 훈육으로 교육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의 부모는 루터가 약간만 잘못했어도 혹독한 체벌을 했기 때문에 루터는 힘겨운 젊은 시절을 보냈다. 또한 학교에서도 교사들은 어린이들을 구타하면서 라틴어 초급 문법을 가르쳤다. 루터도 학교에서 매를 맞으며 교육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아무리 루터의 어린 시절이 혹독했다 할지라도 그는 부모의 훈육이 오직 사랑 안에서 행해졌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경건한 기독교인 어머니 마가레테(Margarete)는 그를 어릴 적부터 철저한 신앙생활을 가르쳤는데,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소년 루터는 요리문답,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과 그리고 라틴 문법과 독일어 찬송을 배웠다.

 

한편 아버지 한스(Hans Luther)는 루터가 법학을 공부하여 만스펠트 백작의 법률고문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교육에 집념이 강한 아버지는 어린 루터를 라틴어 학교에 입학 시켰다. 그리고 루터가 14살이 되었을 때 부친은 그를 아이젠나흐에 있는 라틴어 학교로 전학시켰다. 그 학교에서 루터는 종교, 도덕, 정확한 문법, 라틴어, 논리학, 웅변술, 시, 음악 등을 배웠다. 이런 과목들은 장래 루터가 신학자로서 활동과 종교개혁을 수행하는데 효과적인 기본 도구들이 되었다. 초등학교 교육을 만스펠트, 막데부르크(Magdeburg), 그리고 아이제나흐(Eisenach) 등지에서 받았다.

 

1501년, 학문에 대한 열정이 점점 뜨거워진 18살의 루터는 당시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명문 에르푸르트(Erfurt) 대학교에 입학했다. 이곳 대학에는 스콜라 철학자들과 인문주의 학문의 권위자들로 존경받는 학자들이 많이 있었다. 라틴어 실력이 탁월한 루터는 고전 라틴 작품들, 중세 철학, 스콜라 철학, 논리학, 변증법, 수사학, 물리학, 형이상학, 라틴어 성경, 고대의 고전에 대한 연구, 그리고 자신이 원하던 문학을 공부하였다. 특히 루터는 언어를 성령의 검을 보관하는 칼집으로 여겼으며, 대학 도서관에서 라틴어 성경 전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루터는 열의를 다하여 공부를 했고 좋은 성과를 얻었는데 4년 후인 1502년에는 인문학 학사학위를 받고, 1505년에는 인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루터는 그의 아버지의 큰 기대에 따라 법률가가 되기 위해 에르푸르트 대학교의 법률대학원에서 법률 공부를 하게 되었다. 드디어 아버지의 꿈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부친은 루터가 세속 법률 교육을 받도록 학비를 계속 지원했고, 심지어는 턱 없이 비싼 책인 법전까지 사 주었다. 루터는 1505년 부활절부터 법학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하지만 루터는 갑자기 법률 공부를 그만 두었다. 신기하게도 루터에게 돌연한 방향 전환이 생겼다. 루터는 같은 해 7월 17일에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Augustinerkloster) 의 문을 두드렸다. 루터는 신학으로 기울어졌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새로운 그의 인생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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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터의 생가(박물관)     ⓒ뉴스파워 김현배

 

*김현배 목사는 총신대 신대원을 졸업하고 영국에서 영국 부흥운동사를 공부했다. 현재 유럽성시화운동본부 상임회장 겸 독일 성시화운동본부 대표회장을 맡아 유럽 재복음화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뉴스파워 유럽 본부장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영국 부흥의 주역들>이 있다.

 

김현배  ⓒ 뉴스파워

가져온 곳: USA아멘넷

 

 

'요요현상" 없이 확실하게 뱃살 빼기

많은 사람들이 나잇살 때문에 고민한다.
나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위장이 약해서
조금만 많이 먹어도 제대로 소화가 안되고
아무리 맛난 음식,
또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하여도
만든 음식 이틀만 넘어가면 먹을 수 없다.

남의 집 가서 오래된 음식을 모르고 먹는날이면...
밤새도록 복통에다 심하면 토하기가 일쑤고
머리는 방망이로 두들겨 패듯 고통이 일주일씩 간다.
그러니 많이 먹지 못하고 조심조심....혼자 황녀다.
젊어서부터 그런 상태인 때문에 살이 많이 찔 새가 없다.

문제는,
남편이다.

먹는 것을 즐기는 편이고
심방이나 구역예배에 가면
맛난 음식들을 푸짐하게 차려놓고
먹으라 강권하는 곳은 많고

맛난 음식보면 절제가 안 되는 양반이라
밤이 늦어도 잘 먹고 소화도 잘되는 것 같다.

그런데, 사십이 넘어가면서부터 몸이 나기 시작,
몸만 나는 것이 아니라 성인병도 이것저것 발병했다.

어느날 주치의가 경고했다.
"당신 이대로 가면 당뇨 합병증이 온다
운동도 더하고 살을 더 많이 빼야 산다."

그때부터
살빼기 노력을 피나게 이것저것 시도 했건만...
얼마 못가서 도로아미가 되고 말았다.
뺀 다음,
관리가 되지 않아 그런지 이전보다 더 찌고
그것을 가리켜 "요요현상"이라고 한다.

이제
나이는 점점 더 많아지는데...
정말 이대로 가다가는 큰일이다.
우리 가정과 교회를 이끌어나갈 역군,
귀중한 내 남편의 건강을 지켜줄 방법이 없을까?
기도하며 연구하며 .....
찾았다! 나 혼자만의 비법을!!!

영양을 골고루 섭취하되 손 쉬워야 하고,
무엇보다 큰 돈이 들어가지 않아야
지속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남편은 30파운드나 뺏고, 1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탈이라면, 이전 옷은 너무 커서 하나도 못입는 게 탈.^^)

우리 독자님들 중에서 살 때문에 고민하는 분들이 계실까 하여
여기도 올려보니까 도움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요요현상 없이 살빼는 비법
1, 음식을 배불리 먹고자하는 느낌과 허기(배고픔) 증세를 잡아라.
그것은 인체에서 필요한 단백질 보충만이 길이다.
매일 저녁 식사는 계란 흰자 3개, 콩 두유(직접 껍질채 간 것)
한 잔이건 두 잔이건 큰 컵으로 양껏 마시면 된다.
매일 저녁 자기 전, 콩을 물에 담구어 두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으나 일상화 되면 쉽다.

2. 아침 식사는 삶은 팥과 녹두를(이것도 저녁마다 담구어 둠)
한 그릇(배가 불룩해져도 좋다.)듬뿍 먹고, 고구마 한 개를 먹는다.
(양이 큰 사람은 고구마 한 개, 나 같은 경우에는 고구마 반 개.ㅎ)

3. 점심 식사는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먹는다.
대신, 탄수화물은, 밥이나 국수 원하는 음식을 먹되
될 수 있는 대로 밥 한공기 이상 넘기지 않는 것이 좋고
각종 야채, 고기, 생선 등등 평소에 먹고 싶은 것을 양껏 먹는다

물론,
당뇨가 있는 사람은 단 것을 주려야 하는 것은 기본 상식이죠.
이렇게 하면 1개월이면 표가 나기 시작한다.
콩과 계란 흰자는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해주기에 여성이라면
다이어트 중에 얼굴이 못쓰게 되지 않고 머리결도 상하지 않는...
미용도 좋아지고 건강도 좋아지니 일석이조다.
무엇보다도 충분한 단백질 보충으로
배가 고프지 않으니 식탐도 줄어드는 듯...

모든 독자님들, 새해에는
애물단지 살도 빼시고 건강도 좋아지셔서 더욱 행복하세요.^^

팁~
(단, 목회자 가정이라면,
심방 약속 등 먹을 약속이 있으면 모두 점심 시간으로 미루어야죠.)
저녁에 있는 잔치 집 같은 것은 가서 먹되 탄수화물은 피하고
단백질 함류된 고기와
야채 쪽을 찾아서 배불리 먹어라..
마켓에 가면 얼마든지 싸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이고
쉬우니까 혼자 식사를 해결해야 하는 남자분들도
자기 전에 담구어 놓았다 끓이기만 하니 손쉽게 할 수 있다.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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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의 권위는 어디서 오나?
대통령의 권위는 권세에 있고 군인의 권위는 계급과 총칼에있고 사장의 권위는 돈에있다.

그렇다면 목사의 권위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

목사의 권위는 당회장이기 때문에 오는것이 아니고, 교회규모가 크기 때문에 오는것도 아니고, 학벌과 학위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말 잘 하는데서 오는 것도 아니고, 목에 힘을 넣고 거룩한 목소리로 거만 떠는데서 오는것도 아니고, 부정한 방법으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슨 감투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이상과 같은 것들에서 권위가 온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착각이며 그것들은 전부 가짜 권위이다. 만일 그런것 때문에 나는 권위가 있는 목사라고 생각하면 그는 마귀에게 홀린 얼 빠진 21세기 바리새 권위 인줄 각성 하여야 한다.

혹자는 그런데서 권위가 오는 줄로 착각하고 3천만원 이상의 막대한 외화를 지불하고 가짜박사증을 사기도 하여 당회장실에 모시고 자랑하기도 하고 불법을 자행하며 감투를 스기도한다.

언젠가 신문에 대형교회 목사들도 가짜 박사가 많다고 기사화 된 것을 본 기억이 난다. 도대체 이게 뭡니까? 어느 교단에서는 감투 때문에 재판을하고 일간 신문에도 계속 나고있는데 과연 교회를 위한 처신들인지, 개인문제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한국교회를 어떻게 보고있는지 좀 생각 해야한다. 한국교회 신임도가 땅에 떨어저 있는것을 땅 밑으로 처 넣고있는 행위 들이다.

어느 시골교회에 담임목사 모시기로 광고를 내었는데 이력서에 거이가 박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장로님은 요세 목사들은 박사가 왜 이렇게 많은지 하면서 쓴웃슴을 웃으셨다.가짜는 포장이 화려해야 잘 팔린다. 오늘날 교회는 내용보다 포장을 중요시 하는데서 이런 가짜 문화가 발전한 것이다.
어느 박사 장사가 날 보고 박사 하나 해보라고 권하면서 도와 주겠다고 하였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영어로 논문 한 폐지도 쓸줄 모르는 무식자인 고로 박사 학위를 공짜로 주어도 나는 싫다고 하였다.

그런 박사 학위증을 어디다 놓고 보며 그런 가짜 후두를 걸치고 어떤 양심으로 강단에 서는가? 이렇게 수준 이하의 양식을 갖고 어떻게 성직 자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러기에 오늘날 목사의 존중도가 삭발자 보다 훨신 뒤 떨어저 있다.

수준 이하의 교인들은 속아 좋게 보아주고 높여 줄런지 몰라도 어느정도 상식수준 이상 이라면 말은 않지만 다들 비웃고 있는 줄 알아야 한다. 가짜박사 사가지고 와서 교회에서 잔치까지하는 사람들도 있다. 도대체 무엇하는 짓들인가? 이렇게 감각없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데 오늘날 한국 교회에 심각한 문제가있다.

목사의 권위는 섬김과 정비례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높고자 하는자는 낮아자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자는 너희의 종이 되라고 하셨다. 목사들은 이말씀을 다들 암송하고 있는 줄 안다. 이 말씀으로 너무도 많은 설교를 했기 때문에.

필자는 심방을 할때 국 그릇이 목사 앞에 맨 먼저온다. 나는 그 자리에 나 보다 나이 많은분이 계시면 남녀 직분을 떠나 그분 앞에 맨 먼저 놓게한다. 그러면 한참 시글 벅적 하지만 거기에서 권위가 온다. 그것이 우리 문화요 예의가 아닌가. 냉수 한 그릇도 선후가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목사는 이조시대 왕이 아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들은 자가가 당회장인고로 왕인 줄 착각하고 있다. 당회장은 행정 상 수반이고 목사의 처신은 종이여야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

필자는 서울 무궁교회 부임하여 처음부터 그 교회에서 가장 목사를 괴롭혔다는 년세 많은 장로님의 신발을 돌려 드렸더니 아버지 벌 되시는 그 어른이 돌아가실 때 까지 나의 신발을 돌려 주셨고, 나는 그 어른을 하나님 처럼 대해 드렸더니 그 어른은 나를 하나님 처럼 섬겨주셨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니까. 예수께서 말씀 하시기를 어린아이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목사의 권위는 억지로 거만 떨고 고집 부리고 독제 하며 반대자를 내어 쫒아버리는 데서 오는것이 아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낮아저서 종이되는 데서 오는 것이다.

필자는 필자가 운영하는 목회 상담원 입구에 이런 비문을 하나 세워 놓았다

그 비문은
“군림하지 말고 장로의 종이 되라.
봉사는 하지않고 행세만 하는 장로들은 지옥 불을 면키 어려 우리라“.

그 문구를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잘못 된 것 처럼 놀란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이 예수님 말씀이 아닌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예수님 말씀하신 너희가 누구인가? 모든 성도들을 다 가르친 말씀이 아닌가?
교회에서 진정한 으뜸자, 권위자가 되고 싶으면 종이 되면 권위가 온다. 필자는 목회 하면서 나이 많은 어른들에게 세배하였다. 그러면 그분들이 목사를 없인 여기는 것이 아니라 더 높여 주고 존중하여 주었고 필자가 내는 안이면 거이가 따라 주었다.
필자는 학벌도 없고 지식도 없고 3천만원짜리 가짜 박사학위도 없다. 설교도 잘 못하는 목사이다. 30년동안 장기목회를 하면서 맨날 했던소리 아브라함, 다윗, 나사로. 욥셉을 재탕 3탕을 하며 죽을 수었지만 그러나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은 없었다. 설교를 좀 잘 해주었으면 하는 소리는 있었지만.

필자는 부 목사들에 겐 무조건 장로님들을 찾아 세배케 하였다. 어떤 부 목사들은 어떻게 목사가 장로들에게 세배를하는가 언잔케 생각하는 자도 느꼈으나 원목이 하라니 할수 없이 하는자도 있었다. 권위가 거기서 오는 줄울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낮아 짐과 섬김이 예수님 말씀인데.

목사들이 종을 크게 외치면서 정작 자신은 종의 자리에 내려앉지 않고 실은 상전의 자리만 누릴려고 하고 왕 노릇 하는데 문제가 있다. 그런 사고와 처신은 예수님의 말씀을 거스리는 목사이다.

권위 주의자로 상대의 의견을 무시하고 독주를 하지말고 진정으로 종의 자리에 내려앉아 예수님 말씀을 실천 하여보라. 권위가 온다.

합동 측 큰 교회 젊은 부목사가 학벌도 좋고 설교도 잘하고 인물도 출중하여 치열한 경쟁을 뚤고 단임 목사로 선발되었다. 목회에 자신 만만햐였다. 안하 무인으로 종횡 무진으로 속도전을 펄쳤다. 그런데 갈등이 일어나고 중직들의 원성은 많고 충성된 중직이 교회를 떠나고 세월이 흘런는데 교회는 부흥되지 아니하니 그 다음은 본인이 지처 버렸다.

그는 지처 부부간에 필자의 강의를 들으러왔다. 강의를 듣고 필자의 저서 “성공적 목사 처신법”을 읽고 목회 파라다임을 완전히 바꾸었다. 그리고 그는 얼마 후 전화가 왔다. 목사님 너무 감사합니다. 낮은자리에 서니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고 중직자들이 그렇게 좋아 할 수가 없다며 교파도 다른데 목사님은 나의 잊을수 없는 은인 이라고 하면서 장로 안수식을 하는데 와서 축사를 하여 달라고 부탁하였으나 그 교단은 통합목사를 강단에 세우는것을 꺼려하는고로 그 젊은 목사를 위하여 사양하였다.

목사의 권위는 섬김과 정바래하고 종의 자리에 내려 앉이므로 얻어지는 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권위이다. 그것을 의론 적으로는 알고 가르치기까지 하면서 정작 본인은 하지않고 하는 줄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병폐이다. 바리새 인은 그러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책망을 들었다.
목사의 권위는 그 어떤 것에서도 오지 않은다.
권위를 세우려고, 붙드려고 하지말고 권위가 스스로 오게하라.
목사의 권위는 오직 종으로서 섬기는 데서만 오는 것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목사의 권위는 섬김과 정비래하고
상전 행세자는 권위주의자로 타락한다. 권위주의 자는 바리새이다.

 

출처: USA아멘넷/장달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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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의 열쇠인 복음 (그레엄 골즈 워디)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것 같더라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5:1-6,9)

 

 

                                                어린 양과 사자

 

묵시는 종교적인 글들을 기록하는 일종의 문체로서 기원전 약 2세기경부터 유대인들 사이에 성행했습니다. 이 묵시의 특성 중 하나는 환상을 본 자가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에게서 그런 계시를 받았는지를 서술하며(묵시는 '계시'를 뜻하는 헬라어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또한 두루마리에 써서 계시할 때가 이르기까지 봉해 놓도록 명령받은 것으로 되어 있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그 두루마리의 공표는 때가 이미 이르렀고 그 비밀이 드러났음을 의미합니다. 요한은 요한계시록 5장에서 바로 이러한 특성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두루마리에는 하나님의 메시지, 즉 그분의 나라에 관한 진리가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펼칠 수 있겠습니까? 요한은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에 관한 진리를 펼칠 합당한 자가 없고, 그렇게 되면 두루마리가 봉해진 채로 있게 될 것 같아서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에게 기쁜 소식이 들려 옵니다. 어떤 분이 이기었는데, 그분이 그 두루마리를 펼칠 수 있는 분이라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분은 유다 지파의 사자(the Lion)이시며 다윗 왕가에서 나온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간단한 묘사를 듣자 요한은 엄청난 위엄과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압도되고 맙니다. 여기서 그분은 자신의 칼에 적의 피를 묻힌 채로 싸움터에서 갓 돌아온 전사(戰士)이신 왕(the warror-king)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분은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정복자이십니다. 그래서 그분께 대적하려던 모든 자들은 공포에 질리게 되었고, 결국 패하여 도망쳤습니다. 이처럼 승리를 이루어낸 자신의 능력과 권세로 인하여 그 사자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모든 사람에게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고개를 돌려 그 사자를 보았을 때 그는 그런 영광스럽고 위엄 있는 모습은 전혀 볼 수 없었습니다. 그가 본 것은 오히려 '마치 죽임을 당한 것 같이' 서 있는 어린 양이었습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 묵시의 전형적인 이 수수게끼 같은 표현조차도 동물의 왕인 사자로 묘사된 주님의 이미지(image)를 산산이 부숴 버리는 효과를 증대시킬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것을 이기고 하나님의 나라의 진리를 우리 손이 미치는 곳에 놓아둔 승리의 표현입니다. 이처럼 요한은 묵시의 이미지를 능숙하게 사용해서 복음의 핵심적인 파라독스(paradox)를 예증합니다. 즉 하나님의 승리는 그분의 아들의 낮아지심과 죽으심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승리하기 위하여 사자는 어린 양의 온유함을 취하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이로써 이제 그 두루마리는 펼쳐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한 소리가 찬양으로 들려옵니다.

 

당신은 그 두루마리를 취하여 그 인봉들을 떼기에 합당하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일찍 죽임을 당하사...(때문입니다)

 

그 어린 양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으로 인하여 이제 하나님의 계시자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제목이 붙은 것(계1:1)은 매우 적절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모든 진리의 열쇠가 곧 이 땅에서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이 사실을 묵시적 어법으로 엮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진리를 드러내 주시기에 합당하신 유일하신 분을 죽임 당한 어린 양이라고 묘사한 것입니다. 그는 이런 어법으로 요한계시록의 중심 사상은 복음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한계시록의 의미를 풀어내려면 오로지 이 땅에서 구원 사역을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곧 참된 말씀이며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도 역시 복음에 대한 해설입니다. 물론 요한계시록이 복음의 어떤 함축적인 의미들을 강조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복음에 관한 책이라는 점에서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윌콕(Michale Wilcock)은 요한계시록의 기록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다시 말씀과 증언, 즉 하나님으로부터 참된 메시지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머지 않아 영감된 그 밖의 성경책들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모임에서 큰 소리로 읽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그가 이미 소유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간추린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진리의 패턴(pattern)을 되풀이 하시는 것은 그 때가 마지막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엄청남 권능과 형용할 수 없는 영광을 보이시며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우선 복음 중심 사상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복음은 실제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2천여 년 전에 팔레스타인에 오셔서 그분 자신과 그분의 사역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 복음 사건의 효과들은 과거와 현재, 미래에까지 미치게 됩니다. 그러나 효과들 그 자체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가 믿고 있는 복음은 아닙니다. 따라서 복음의 효과들 또는 열매들과 복음 자체를 구별하는 것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거듭남, 믿음, 성화는 복음의 열매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복음의 열매들인] 믿음이나 거듭남 또는 성령을 주심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나의 대속자로서 사시고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우리는 구원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조차도 복음은 아닙니다. 그것은 복음의 한 열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이 다시 오실 것을 믿음으로써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음을 믿어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 이 사실은 복음을 성부 하나님이나 성령님의 사역이라고 못박아 말할 수 없다는 데서 잘 드러납니다. 복음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분 안에서 일어난 완전하고 완성된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우리 안에서 일어난 사역이 아닙니다. 이러한 복음, 이것만이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근거인 것입니다. 바울의 서신들에서는 이 후자의 사실을 가리켜 종종 의롭게 여김(칭의)이라고 말합니다. 의롭게 여김이란 어떤 사람에게 올바르다 또는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리자이신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가진 죄인에게 그리스도의 공로를 그대로 옮겨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죄인을 의롭게 여기시는 것은 순전히 그 죄인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서 계신 분이 계시다는 사실에 근거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 죄인이란 믿음을 가진 죄인을 뜻하는데, 그(또는 그녀)는 이땅에 실제로 오셨던 그리스도를 하나님 앞에 서 계신 자신의 대리자로 의뢰하는 것입니다. 이 역사적인 인물인 그리스도는 지금도 살아 계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 땅에서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 우리를 위한 실제 대리자이셨다는 이유만으로 지금도 우리의 대리자로서 그곳에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 중심 사상을 말할 때, 그것은 곧 우리 구원의 모든 것이 복음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복음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시고 회개시키시고 성화시키셔서 마침내 영화롭게 하시므로, 복음은 진정 하나님의 능력임을 뜻합니다. 또한 그것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사시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온 역사와 인간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셨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복음이 그리스도인 생활의 시작과 계속과 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유일의 방편이라는 사실을 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뽑아 버려야만 할 잘못된 사고는 복음이란 단지 우리를 회개시키는 데 쓰이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생각입니다. 한번은 제가 어떤 선교사의 보고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는 선교지에 파견된 한 목사님이 자기의 교인들에 대해 선교본부에 써 보낸 편지를 보고했는데, 그 내용은 "우리는 이제 복음을 압니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더 확고한 것을 향해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고는 복음을 그리스도인의 체험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영생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보고 일단 우리가 그 관문에 들어선 후에는 우리를 계속 전진시킬 수 있는 어떤 확고한 실재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성화 또는 거룩하게 되는 것 또한 그리스도인의 신앙 성장 등을 종종 회개한 후에 도달해야 할 새로운 단계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단계에 이르는 방법들이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온전한 헌신" 또는 "스스로를 비움" 또는 "옛성품을 죽임"으로 그곳에 이를 수 있다고 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극적인 체험을 분명히 경험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서적들과 설교는 "더 깊은 삶으로 나아가는 단계들" 또는 "풍성하고도 승리하는 삶의 열쇠" 등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여기서 저는 그러한 경건에 관한 표현이나 용어들을 흠잡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문제 삼고 있는 점은 단지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 - 우리를 회개시킨 그 복음 - 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성화에 이르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가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났음을 뜻한다는 사실입니다.

 

 

                                                  복음 중심 사상

 

또한 우리의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과 연관하여 복음 중심 사상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복음 중심 사상은, 신구약성경에 제시된 하나님의 모든 목적의 궁극적 목표는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신 것이라고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알파와 오메가로서 그리스도의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는 창조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창조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충분히 파악하려면, 창조와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구절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요한복음 1:1-2은 우리에게 육신이 되어 나사렛 예수로서 오신 그 말씀이 곧 창조자이셨음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골로새서 1:15-20에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신 그리스도(골1:20)가 곧 창조자이시며 창조의 목적이시며 목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죄가 창조계를 망치자 하나님께서 계획하여 내신 일종의 사후대책이 복음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복음은 창조 이전에 세워진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모든 만물을 궁극적인 목표에 이르게 하려는 분명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2. 그리스도는 구약성경의 언약들과 율법의 의미입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이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 역사의 진행 과정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언약 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언약이란 하나님과 그분의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과의 관계의 본질을 밝혀 놓은 일종의 규약인 셈입니다. 그리고 모세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구원 사역으로 수립된 이 언약관계를 가장 포괄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신약성경에서는 이 언약을 주제로 삼았으며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이 언약의 성취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탄생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모든 언약의 약속들의 성취로서 묘사됩니다(눅1:46-55, 68-79; 2:29-32을 보십시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율법을 성취하셨다(마5:17)는 것은 그분께서 하나님의 언약 파트너(covenant partner)로서 [그 언약이 요구하는] 삶을 완전하게 살았다는 뜻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에게 받으신 그분의 세례는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는, 인간으로서 취한 선택을 완전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례를 받으실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참 아들이시며 사랑하는 아들로 선포되셨습니다. 이 점과 연관지어서 누가는 계보를 열거하는데(눅3:22-28), 이러한 계보의 열거를 통해서 누가는 "너는 내 아들이라"는 말씀의 의미를 알려줍니다. 참 인간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38절의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는 의미는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는 예언의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선지자(들)'에 대해서 "내가 그것들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왔다"(마5:1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선지서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메시아에 관한 어떤 예언들을 성취하러 오셨다는 뜻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포괄적인 것으로서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죄에 대한 심판을 예언한 말씀은 십자가 상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성취됩니다. 그리고 새 언약, 새롭게 회복된 하나님의 백성들, 사람들 안에 거하실 하나님의 새로운 처소에 관한 모든 약속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됩니다. 이처럼 이 모든 것들은 복음 사건 속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을 수 있으므로 이후에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설명할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예언의 약속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예'(yes)가 된다"(고후1:20)는 바울의 확신을 살펴봅시다. 사실 바울은 이러한 확신을 안디옥에서 행한 설교에서 이미 표현하였습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노니 곧 하나님께서 예수를 일으킴으로써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그들의 자녀인 우리를 위하여 성취하셨다"(행13:32-33).

 

4.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내게는 산다는 것이 곧 그리스도이다"(빌1:21)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빌립보서 2장에 묘사된 그리스도로서, 육신의 고통을 받으시고 영광된 처소로 올라가 하나님과 더불어 계신 그분입니다(빌2:6-11). 따라서 주님은 곧 복음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로 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구원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피조물 간의 참된 관계를 계시하시며 다시 세우심으로써 인간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자기 자신 안에서 이 일을 이루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구원 사역을 값없이 선물로 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죄인에게 그 일을 행하십니다. 그래서 그런 죄인은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으로 그러나 죄는 없이 완전하게 순종하심으로써 소유하게 된 똑같은 상태를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골3:4)라는 바울의 표현 외에는 달리 더 잘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삶과 죽음의 결과로써, 그분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심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죄 없는 아들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참되신 언약의 파트너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사랑받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외롭고 거룩하신 분이시며 심판받으신 죄인이시며 새 생명이시며 성령이 총만하신 분이시며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바로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 즉 복음이 존재한다는 사실로 인하여 그리고 오로지 이 사실에서만 우리 그리스도인의 존재 동기와 원동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복음의 열매는 바로 글자 그대로 즉 복음에서 나오는 열매인 것입니다. 거듭남, 믿음, 성화, 끝까지 인내함, 이 모두는 복음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더 깊은 헌신"이나 "전적인 헌신"을 이루어 내려고 가하는 율법주의적인 요구들이나 감언이설 또는 위험들은 복음의 은혜에서 벗어날 경우 단지 낙담과 환멸, 배반만을 산출하는 몹쓸 잡초일 뿐입니다.

 

5. 그리스도는 재림의 의미입니다

복음 사건인 그리스도의 초림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의미를 이미 세워놓은 것입니다. 아마도 요한계시록을 곡해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의 관계를 파악하지 못해서 생기는 듯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관계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드리려 합니다. 먼저 말씀드릴 것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까닭은 새로운 또는 다른 사역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영광 가운데 다시 돌아오셔서 이미 그분의 삶과 죽음, 부활을 통해 성취하신 사역을 궁극적으로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 그분은 자신의 모든 영광 가운데 오셔서 모든 권세와 권능을 가진 자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따라서 믿는 자가 지금은 맏음으로 붙잡고 있는 것이 그 때에는 모든 이의 눈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믿는 자가 지금은 믿음으로 소유하고 있으며 믿는 자의 대리자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그 때에는 믿는 자 안에서 실재로서 완전해질 것입니다. 즉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갖고 있는 신분이 그 때에는 우리들 자신 안에 갖춰져서 실재의 상태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이 자기 사고의 구조로 삼고 있는 초림과 재림 간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고통받는 그리스도와 영광 가운데 임하시는 그리스도 간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 어린 양(the Lamb)과 사자(the Lion)와의 관계입니다. 여기서 사자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 중에 나타나실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메시아/왕으로서 지닌 위엄의 상징인 것입니다. 반면에 어린 양은 고난 받으신 나사렛 예수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 사자를 보려는 자는 먼저 어린 양 안에서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의 메시아 왕국은 오직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으로만 그 실재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광의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난 때문에 높아지셨으므로 여전히 어린 양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림 때에는 그 어린 양으로부터 사자의 위엄이 발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복음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재로서는 사자의 영광이 가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오직 믿음만이 복음을 통해서 그 영광을 감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왕이신 그리스도로 묘사하는 신약성경의 증거는 믿든지 아니면 거부하든지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성질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에 대한 객관적인 증거는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사복음서를 예수님의 삶과 죽음,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관한 기록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의 구원이 그러한 역사적 사건에 달려 있다고 인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믿도록 확신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믿는 것일 뿐, 그 외의 방법으로는 그런 인식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복음서를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각각 다르게 반응한 사실이 나타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분을 거짓 선지자로 몰아 배척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분이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해주거나 자신들의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줄 인물이라고 생각하여 그분을 좇기에 열광적이었습니다. 단지 소수의 사람만이 그분 안에 이스라엘의 참된 영적 소망의 해답이 있음을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분의 제자들조차도 그분의 말씀 중 어떤 것들은 오해하기도 했습니다. 사실상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오해했던 말씀들을 마침내 제대로 이해한 것은 오순절에 성령님이 임하신 이후였음을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맏는 자들의 현재의 삶을 유목민처럼 장막에 거주하는 자들에 빗대어 묘사합니다.

 

우리가 이 장막에 있는 동안 짐을 진 것처럼 탄식하는 것은 그것을 벗고 싶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하늘 집을 입음으로 죽을 것이 생명에 의해 삼켜지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목적을 우리로 이루도록 하셨으며 그 보증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할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이 육체의 집에 사는 동안은 주님에게서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는 우리가 보이는 것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고후5:4-7).

 

이처럼 주님에게서 떨어져 있는 데서 우리가 미완성이라는 느낌과 인식이 비롯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결코 모호한 정의를 가진 개념이 아닙니다. 믿음은 언제나 그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유지시키시는 그리스도, 즉 복음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복음으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에게 성령님이 주어진 것은 마침내 주님과 떨어져 있는 일이 결코 없는 그 나라에 믿는 자가 참여하게 될 것임을 보증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성령님은 이러한 보증으로서 어떠한 일을 하십니까? 그분은 우리가 믿음으로 살 수 있도록 하는 일을 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위해 사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믿게 하시며 의지하게 하십니다. 이처럼 성령님의 일은 우리가 믿음 그 자체나 성령님 자신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을 믿는 믿음을 힘있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주님에게서 떨어져 있지만, 우리는 주님이 곧 우리를 위해 구원을 이루신 나사렛 예수시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으로써 지금은 이 구세주가 모든 것을 정복하신 사자, 즉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주님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가 그분을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분께서 어린 양으로서 고난을 당하심으로 모든 것을 정복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과 우리 그리스도인의 현재의 삶에 미치는 구원의 결과에 대한 이와 같은 가르침들은 신약성경 안에 진부하리 만큼 수없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렇지만 요한은 이런 가르침을 한 번 더 제시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구약성경에 쓰인 표현과 이미지로 다시 옷 입혔던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우리가 이후에 알게 되겠지만, 우리에게 대단히 큰 가치가 있는 어떤 목적을 이루고자 한 것입니다. 이 목적이란 오스틴 패러(Austin Farrer)가 묘사한 것처럼 이미지(image), 즉 지나간 과거의 문화와 사람들이 사용하던 옛 이미지들을 되살림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획의 장엄함을 살짝 그러나 새롭게 들여다보고 놀라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수시로 갈등을 겪는 일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이미지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시각에서 벗어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우리로 하여금 그 어린 양의 받으신 고난 때문에 믿는 자 각자의 고난도 그것이 작든 크든 간에 무의미의 늪 속에 가라앉힐 수는 없는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간추림

 

사자는 영광스러우시며 모든 것을 다스리는 그리스도의 이미지입니다. 그분만이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열어 주실 수 있고, 그것의 실재를 알려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처럼 우리가 그 사자를 볼 수 있으려면 그분께서 먼저 죽임 당한 어린 양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 나라의 계시를 풀 수 있는 열쇠는 복음 사건,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라고 지적합니다. 이것은 또한 요한계시록의 열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 상징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모든 존재의 의미는 복음 안에 계시되어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통하여 그 나라가 임하는 것과 계속되는 현재 질서 사이의 긴장 속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곧 복음으로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요한계시록의 주제인 것입니다.

 

 

* 중심주제 *

어린 양과 사자 사이의 긴장은 복음이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 유일한 열쇠임을 보여 준다.

 

 

그레엄 골즈워디의 [복음과 요한 계시록] 중에서 발췌(25-39p)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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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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