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는 훌륭한 장로님이고, 권사님이고, 여전도회장입니다. 그런데 밖에서는 완전 달라요.” “아무개 집사님은 매일 교회서 살다시피 하는데 그의 삶은 정말 기막혀요.“ 잘 아는 어느 권사님의 한탄 섞인 음성이다. 어찌 그 권사님만의 한탄일까? 우리 모두 입으로 말은 하지 않지만 같은 탄식이 쌓여가고, “어찌 저럴 수가!!” 마음속에 분노로 끓어오름을 꿀꺽 삼킬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믿음의 선조 님들이 피 흘리며 지켜왔고 2,000여 년 간 생명으로 전수해 내려온 교회, 무엇이 잘못되었길래 이런 황망한 이야기들이 계속 들리는 걸까? 교회 안에 가짜가 많다고 하신 어느 목사님의 설교처럼 교회 안에 정말 가짜가 많아서일까? 교회 안에서 누가 가짜인지 진짜인지 우리가 판단할 수는 없지만, 종교개혁 500주년, 그 의미가 퇴색된 지 이미 오래고 우리는 지금 초대교회 선조들의 신앙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곳으로 한참 많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현실이다.

우리 신앙생활의 잣대(cannon)인 성경을 자신의 입맛대로 마구 비틀어 전하고 행하는 것, 육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사람이 사역자 중에서도 많은 것은 사실이다. 육신의 사람이 빚어내는 잡다한 소식들이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것은 아닐 텐데 …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일까?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 다 함께 고민해 봐야 한다. 교회는 개인이 교회라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한 공동체가 가시적 교회인만큼 한두 사람이 저지르는 비행이 모든 공동체를 병들게 한다. 나 한 사람이 병들면 너도 병들고 더 나아가 우리 모두 병드는 것, 이것이 바로 공동체 운명이다. 곳곳에서 교회가 개혁해야 한다는 소리는 드높은데, 너 자신이 개혁하라고 외치는 것도 좋지만, 나 자신이 먼저 개혁하고서야 다른 사람을 위해서 목소리를 높일 수 있지 않겠는가?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을 잠시 눈여겨 살펴보면 여러 형태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성품이 다르고 지식수준이 달라서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고, 성경말씀을 근거로 모든 성도를 크게 나누면 다음 두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1. 육신에 속하여 육신의 길로 달려가는 사람.  2.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영의 사람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은 물질적인 존재인 동시에 영(靈)적인 존재로서 두 세계에서 共存한다. 주님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이런 인간의 본질을 “몸(Soma, carnal) 육적인 사람(고전3: 1-3) 또는 "혼(Psyche, natural) 자연적인 사람" (고전2 : 14), 영(Pneuma) 영적인 사람"(고전3:1)이라고 표현하셨다.

교회 안에서 모두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하지만 육신을 쫓는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 육신으로 너무 기울어져 있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의 빛이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탄핵의 대상이 된 것이다. 나부터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롬 8 : 13)"고 하신 하나님의 경고 말씀을 매 순간 기억하면서 살아간다면 좋을 텐데....심히 안타깝다.

육신으로 사는 사람

본능은 쾌락을 원하고 육신은 편하기를 소원하기에 육신 스스로 쾌락이나 탐욕을 제어할 능력이 없다. 과거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웠던 많은 제국들이 멸망한 원인을 육신적인 욕구를 절제하지 못한 것에 그 이유를 찾아도 좋을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 뿐 아니라 인류 최초로 문명의 발산지가 되었던 메소포타미아, 지혜의 대명사처럼 불리우던 ‘수메르 인’들마저 동성애와 우상숭배가 극에 달했다는 것을 읽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과거 왕이나 백성이 성적타락, 동성애, 음주, 폭력 등 육신의 쾌락에 빠져 기강이 해이해지고, 근면 성실하게 일하기 보다 한탕주의나 불로소득을 추구했기 때문에 모두 멸망했다면 너무 억측일까?

그렇다고 하여서 육신은 죄악이고 영은 깨끗하다는 이분법적 사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초대교회 사에 가장 큰 골칫거리였던 영지주의(Gnosticism)는 육신은 멸망할 것,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행동했다.

그들은 오직 영적인 사람들, 자신들만 빛을 소유한 자들로서 그들 내부에 이미 빛의 요소를 갖고 있으며, 그 사실을 깨닫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사람을 나누기 좋아했는데, 자신들보다 열등한 사람 ”혼에 속한 사람(psychikoi)”과 단지 물질로만 구성된 ‘육적인 사람(sarkikoi)’, 즉 짐승과 같은 사람으로 구분지었다. 혼에 속한 사람들은 그래도 구원받을 가능성이 조금 있지만, 육적인 사람은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고 파멸만이 기다리고 있을것 뿐이라고 정죄했다.

이 얼마나 오만하고 무서운 신학적 오류인가? 이런 영지주의적 사상은 헬라문화와 유대교 유일신 사상과 바벨론의 점성술, 그리고 근동지방의 이원론적 신앙이 혼합된 퓨전신학의 대표다. 육신은 죄악된 것이고 영혼은 선한 것, 이런 논리는 성경이 말씀하는 바른 신학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을 창조하셨고 이 육신으로 선한 일에 봉사하도록 지으셨다. 육신 속에 성령이 거하신다(고전 6장 19절 참조). 따라서 육체를 죄악시 해서 안 된다. 육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선하게 사용하면 선하게 되고 악하게 사용하면 죄의 도구 노릇을 할 수 밖에 없다. 육신에 속한 사람(육신으로 기울어진)은 사망의 길로 나가고 영에 속한 사람은 생명과 평안의 길로 나간다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롬 8: 13).

어쨌거나 이런 인간의 특수성은 사람을 때때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하는 성향을 띌 수 있는데, 우리는 육신적으로 너무 치우친 사람을 “몸(Soma, carnal) 육적인 사람 (고전3: 1-3)이라 부른다. 육체의 길과 성령의 길을 구별하는 것은 필요하다. 내가 어느쪽으로 더 기울어지는가? 생각해 볼 문제다.

영으로 사는 사람

영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육신 그 자체를 죄악시하라는 것이 아니다. 죄악으로 달려가기를 즐거워하는 육신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성령의 인도 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도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 기다린 분이 있었다. 누구인가? 성령이었다. (눅 4: 18 참조)  여기서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시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기다리신 것은 무엇이 모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무슨 일이건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전 섣불리 결정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또 예수님은 기도를 받아야 마땅한 성자 하나님이시지만 늘 기도하기를 쉬지 않으셨다. 이 또한 육신을 가진 인간이 기도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본으로 보여주기 위하심이다.

우리가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 속에 성령 하나님의 운행 하심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 성령님께 물어보고 성령님과 함께 모든 일을 시작하고 모든 일을 그분이 일하시기 전 내가 먼저 앞서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결정한다면 결코 성령의 뜻을 이룰 수가 없다. 성령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순간순간 육신의 생각이 그를 장악하기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신으로 마칠 수 있다. 여기는 사역자도 그렇고 직분자들도 그렇고 평신도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자고 하면,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 것 같다.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에, 성령의 사역을 모른다. 성령의 사역을 모르니까  흉내쟁이 사탄의 장난질에 미혹되어 엉터리 예언을 주저리주저리 쏟아놓는다. 그의 영이 무엇인지, 어디로부터인지 분별하지 못하니까 지레 겁먹고 성령의 사역 그 자체마저 멸시하는 목회자들이 있어서 은사중단론까지 발전한 것이 현대 교회의 가장 큰 맹점이 아니겠는가? 그들 거짓 영의 장난질에 얽매인 자들 때문에 참된 성령의 사역마저 멸시함을 받고 있다. 제발 분별하자. 분별의 영을 달라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어야 산다.

한국의 박 아무개 권사란 사람은 작년 12월에 성령을 빙자하여 예언을 했다. "내 년 3월에 일본 열도가 바닷속으로 가라앉는다." 또 홍 아무개 전도사란 여인은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한국에 몇 월 몇 시에 전쟁이 일어나니까 빨리 피하라고 하신다." 이런 엉터리 예언을 성령의 사역이라고 믿고 재산을 팔고, 하던 일을 접고, 해외로 도망을 간 사람들이 평신도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목회자 중에도 많이 있었다는 것은 정말 기막힌 일이다.

그러나 그 모든 예언이 불발로 끝나는 바람에 정작 타격을 받는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 진리의 영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진실한 성도들이다. 처음부터 성령의 속성도, 성령의 하시는 사역도 모르는 무지가 이런 해프닝을 만드는 것이다. 성령을 따라 살려고 하면 먼저 그분의 속성과 하시는 사역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성령을 오해하면 성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무조건 영적인 일을 쫓다가 사탄이 쳐둔 함정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다. 성령으로 살아가는 것을 꼭 환청이 들리고 환상이 보여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오해다.

그런 것은 설사 성령님의 열매라고 하더라도 성령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일 뿐,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생활이 될 수 없다. 성령은 지정의(知情意)를 온전히 갖춘 전능한 하나님이시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 길을 인도하시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도우신다.  그분이 하늘 저 끝에 계신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계심을 믿어야 한다.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 27)

보혜사 성령님의 하시는 사역은 많지만 우리를 견인하시고 이끌어주시기를 그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하신다. 성령 하나님은 결코 기록된 성경을 넘어 가지도, 상충하지도 않는다. 이런 상식 없이 영의 세계에 너무 심취하게 되면, 자칫 사탄에게 영혼을 내어주고 헛된 예언을 쏟아내기 쉽상이다. 성령은 우리를 깨끗게 하신다. 맑은 물이 모든 더러운 것을 씻어 깨끗게 하듯 성령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더러워진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씻어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에 비추어 잠시만 살펴보아도 현대 교회서 성령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거짓되고 변질한 것인가? 하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환청인가? 아니다. 성령님은 내 속에 계시기 때문에 나의 깊은 자아(ego)를 깨우쳐 주신다. 죄를 사랑하던 마음이 사라지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육신을 따라 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싶어진다면, 그런 상태가 곧 ‘영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육신을 가진 사람이 개혁 하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것뿐이다.  개혁은 다른 데서부터 찾는게 아니라 나 개인이 개혁되어야 하고 나부터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면, 한 사람이 두 사람 되고 두 사람이 세 사람 되어 결국은 온 교회가 정화될 수 있을 것이다. 날마다 때마다 성령에 이끌림을 받는 사람, 영으로 사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 5-9)"

 

출처: 목양연가/최송연

세계적인화산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라는 유명한 희곡을 쓴 
테네시 윌리암스는 아래와 같은 명언을 남겼습니다.
"돈 없이 젊은 시절을 보낼 수는 있지만 돈 없이 노후를 
보낼 수는 없다." 


늙어서 돈은 신분입니다. 지위이고 계급장입니다. 
돈이 없으면 모두에게 냉대와 무시를 당합니다. 
그러나 돈이 전부는 아닙니다. 
돈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수는 없습니다.



97살 까지 산 "첼로의 성자" 파블로 카잘스는
"선생님께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첼로리스트로 손꼽히시는데 
아직도 하루에 여섯 시간씩 
연습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라는 기자의 질문에 의욕이 가득 찬 
즐거운 나날을 보냅시다.



"나는 지금도 연습을 통하여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96세에 세상을 떠난 유명한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타계 직전까지 집필을 계속했는데 



"아직도 공부하시냐?"는 질문에 
"인간은 호기심을 잃는 순간 늙는다.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청춘은 인생의 어느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가짐에 있다.>
라는 사무엘 울만의 詩와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라는 팝송은 
우리의 心琴을 울리는 名詩이며 노래입니다. 



돈은 넘쳐 나는데 그것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아니 돈이 많은 사람일수록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온갖 고생과 근면 절약을 하여 
어렵사리 돈을 벌었기 때문에 돈 버는 것 외에는
아무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젊은 시절 취미 생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이지요.
옛 양반들은 鄕里에 전답이 있어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으니까 적당한 시기가 되면 벼슬을 
고사하고 아무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文, 史, 哲 즉 文學과 
歷史와 哲學을 論하고 서로 지은 詩, 
書, 畵를 품평하고 樂, 歌, 舞를 즐기며 
인생의 완성을 추구하였다 합니다.



여기에 射(요즘 말하면 골프?)와 御(말을 
다루는 것이니 요즘은 車)도 즐겼습니다. 




은퇴하고 나면 30년, Golden Age를 
열정과 취미 생활을 즐기면 늙지 않습니다. 
열정을 가지면 마음이 늙지 않고 마음이 늙지 
않으면 육체도 건강해 집니다.



<居室 男>, <파자마 맨>, <停年 미아>, 
<三食 이>, 이 되면 
순식간에 늙어버리고 맙니다. 
만나보면 금방 얼굴에 쓰여 있습니다.
분명히 은퇴 후 제2의 인생은 있습니다. 



흔히 "앙코르 인생"이라고도 하고 
은퇴 후 생을 마감할 때 까지는
8만 시간이 있다고 합니다. 



 

관련

싸우는 이유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성미가 급하고 화를 잘
내기로 악명이 높습니다
한번은 토스카니니가 연주중에 냉정을 잃고

격분하여 밖으로 나가버렸고

단원 한 명이 사과하려고 뒤따라 나와 물었습니다


"선생님 어디가 잘못되었나요?"
토스카니니가 대답했습니다
"여러분은 잘못한것이 전혀없습니다
제가 잘못 한것입니다."

문제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토스카니니는 자신이 만족할만큼 지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화가 났고
자신과 싸웠으며
그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며
그들과도 싸웠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싸우는 이유는
자신과 싸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전반적인 문제가 아닙니까?
인간은 하나님과 화해하기전에는

절대로 자기자신과 화해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에서 자신을 바로보기
전에는 언제나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야망과 질투심과 라이벌의식이 있습니다
이 모두가 우리에게서 안식과 평안을 빼앗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는 순간
자신과 화해하고
자신과
삶과
세상의 대상과
목적도
바른 시각으로 봅니다

자아로부터 자유로운 마음
우리에게 이런 마음이 있습니까?

생수로 채우라 ㅡ마틴로이드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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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이 ‘성경말씀’ 수상소감, 온라인서 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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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가수 비와이가 수상소감에서 성경말씀을 인용해 온라인 SNS와 크리스천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방송 캡처 화면 

 

지난 22일 ‘2017 가온차트 K-POP 어워드’에서 ‘올해의 발견상 힙합부문’에 선정된 비와이가 수상소감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해 온라인 SNS는 물론 크리스천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비와이는 수상소감에서 “음악을 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나서 어릴 때부터 꿈꿨던 것이 있었다”며 “그것을 오늘 전해보려 한다. 오늘 꿈을 하나 이루고 내려갈 것”이라고 밝혔다.

 

“제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저는 여기서 말하고 싶었어요. 많은 분들이 제가 하는 음악과 제 신념을 되게 많이 비웃으시지만 저는 이게 멋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것을 오늘 말하고 내려가려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 말씀이 저에게는 굉장히 큰 감동이었어요. 저는 사장님도 없어요.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서 감사드릴 분은 하나님뿐이고 진심으로 저를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들어오게 해주신 것에 감사드리고 이 상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리고 여기 와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비와이의 수상소감은 온라인에 빠르게 퍼졌고, ‘공개석상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다니 용감하다’, ‘주님 고백하는 모습 멋있다’는 등 호응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에는 관심도 없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런 말 들으니 기분 나쁘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한편 지난 해 Mnet <쇼미더머니 시즌5>에 출연해 자신의 신앙 이야기를 담은 랩으로 화제를 모은 바 있으며, <데이 데이>, <자화상> 등의 노래가 음원차트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김주련 ⓒ 데일리굿뉴스

가져온 곳: USA 아멘넷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우리는 항상 자신에게 말하며 살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1분당 평균 150~200개의 단어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과 대화할 때엔

엄청난 속도로 1분당 1,300개의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처럼 빠른 속도로

자신과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놀랍게도 연구가들에 의하면

우리는 자신과 긍정적인 대화보다 부정적인 대화

스스로 자신을 패배시키는 대화를 많이 나눈다고 합니다


영적 침체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자신과 부정적으로 대화함으로써

더욱 낙심하며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자신과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부정적인 대화를 긍정적인 대화로 바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정적인 대화를 되풀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의식적으로 자신의 긍정적인 모습

성취한 일, 성장한 모습, 가능성,

 


구원받은 자녀로서 영원한 신분에 생각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을 채우며

긍정적으로 자신과 대화를 나눕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말씀에 의거해 자신과 긍정적인 대화를 나눠야 합니다


- 담아온 글-


 

 

 

<노후에 꼭 다니고 싶은 대학>

요즘 노인들 사이에 노년생활을 대학에
비유한 말이 유행이라고 합니다.

"서울공대" - 서럽고 울적해서 공원에 다니는 것
"동경대" - 동네 경로당 다니는 것
"부경대" - 부부가 경로당 같이 다니는 것
"전국대" - 전철과 국철로 시간을 보내는 것
"연세대" - 연금으로 세상 구경하면서 노년을 보내는 것
"고려대" - 고상하게 여행을 다니면서 지내는 것
"서강대" - 서로 위로하며 건강하게 사는 것
"건국대" - 건강하면서 국민연금으로 사는 것

요즘 뜨는 최고로 좋은 대학은 "해병대"라고 합니다.
해피하게 평생 병 안 걸리는 대학이랍니다.
우리 모두 남은 여생 "해병대"로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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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이유는

수백가지가 넘는다.

수백가지 이유로 하나님을 떠난다.

수백가지 이유로 지옥에 들어간다.


그래서 지옥은 항상 만원이다.

너에게 옳은 것은 너에게만 옳고,

나에게 옳은 것은 나에게만 옳다면,

절대진리란 있을 수 없다.


어떤 것은 한 사람에게는 참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거짓이 될 수 있다는식의 주장은

자기 모순적이며 진실에 도달할 수 없다.


인간이 만들어 낸 그릇된 지식은

책임전가를 꾀한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댓글을 다는데

그 중에는 동성애가 정신질환이 아니라

정상적인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분도 있고,

또 한 사람은 능력의 부족이나 환경의 차이로

지옥에 보내는 것은 살해하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이것들은 기독교를 혼란에 빠트리기 위한

새롭게 등장한 이론들이다.


악이 존재한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지옥에 보낸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부정한다.


이런 관점을 신봉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좋을 만한 일종의 핑계거리다.


이런 형식의 논증은 역사도 오래되었고,

다양한 사상가들이 다양한 형식으로 제시해 왔다.


특별히 기독교가 비판의 중심이 되는 이유는

기독교만이 죄를 지적하고 지옥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계만 하더라도

선와 악, 범죄와 선행이 함께 존재하는 것은

전혀 모순이 되지 않는다.


만약 완벽한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도덕규범을 주시고 단 하나의 길이 있다고 해서

배타적이라 바난받을 일이 아닌 것은,

내가 아는 지식이 완벽하지 않은데다

각자의 불순종으로 죄를 현실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악과 불공평이 존재함으로

하나님이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이유는

악과 죄의 존재가 구원을 수반했다는 것과

선을 더욱 선되게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주적인 더 큰 선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어떤 구체적인 선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악이 필요한지

판단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다.


이것은 믿는 자에게 전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에게 문제가 되기 때문에

그들은 이 문제를 이슈화했다.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

- 사두개인은 부활이 없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거부했고,

- 바리새인은 안식일과 율법 때문에,

- 부자들은 돈을 포기할수 없었기 때문에,

- 나사렛 고향 사람들은 같은 동네 사람이라는 이유로 예수님을 배척했다.


현재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복음을 거절하는 목록이 더 많아졌다.


- 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

-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으시다.

- 거짓지식(진화론,무신론,인본주의)에 미혹되어서

- 동성애를 반대하는 성경 때문에

- 성경의 권위를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 그리스도인의 부도덕한 행실 때문에

- 헌금과 십일조가 부담되어

- 잘못된 교리 때문에


이런 이유들로

하나님과 복음을 거부하는 것을 두고 성경은 어떻게 진단하는가?


예수님은 억지로 이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하지 않으셨다.


표적을 구하며 하나님의 신임장을 요구하는

바리새인들의 요구를 거절하셨다.

성경은 이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세계인류 중에는 의인과 악인이 있고,

양과 염소가 있으며,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가 있고,

알곡과 쭉정이가 있고, 천국의 아들들과

악한 자의 아들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첫째, 그들은 이 세상의 신, 세상의 영으로부터 미혹되었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마 16:6)


누룩이란 세상으로부터 나온 거짓지식,

세상의 가치기준으로 판단하는 교훈을 말하는 것으로

이 세상의 지혜와 지식은 어리석게 자기꾀에 빠진다.


인간이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시키기 위해

스스로 어떤 기준이나 표준을 설정할 수 없다.


인간의 표준은 언제나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법에 근거해야만 하는 이유는

그가 존재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선의 기준은

하나님이 그것을 선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선이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다.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믿으면 영생이요, 믿지 않으면 심판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복음은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체험적 증거인데,

어리석은 자들은 이론적 변론과 다툼거리를 일삼는다.


내가 만약 마귀라도

성경보다 다른 이론이나 논리들에 더 관심 갖게 만들 것이다.



둘째, 가라지라는 나쁜 씨가 뿌려졌다.


사탄이 뿌려놓은 많은

나쁜 씨(거짓이론,사상,논리)를 마음밭에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위에서 언급한 하나님을 거절하는 목록들이다.

악한 자들, 멸망할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이런 거짓논리에 더 끌린다.


나쁜 씨가 뿌려진 사람을 가라지라고 하는데,

성경은 이들을 일컬어 악한 자의 아들들이라고 한다.

 

미혹의 역사를 보내는 이유는

악한 자들이 그것을 믿고 심판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다.


진리를 믿지 않고

거짓이론을 좋아하는 자들은 심판을 받게 한다.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구별하는 방법이 있는데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에 속한 자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이 속한 말을 선호하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에 순종하기보다

불법을 행하기를 좋아하는데 불법은 죄다.


 

셋째, 길에 뿌려진 씨앗은 사탄이 빼앗아 버렸다.


길위에 뿌려진 씨앗도 있고,

돌밭에 뿌려진 씨앗,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앗,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이 있다.


오직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만이

30배, 60배, 100배로 결실한다.


잘못된 마음밭에 뿌려진 씨앗들은

사탄이 빼앗아 가버리거나

어려움이 닥치면 넘어지거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으로 결실하지 못한다.

 

세상은 악의 지배 영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류가 포진해 있다.


이들은 여러기 올무를 놓아 사람을 타락시키거나

미혹하여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게 만든다.


은근히 진리를 탐구하는 척 질문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자기들의 거짓사상을 선전하고 미혹하는 역할을 하는 자들이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요 6:65)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자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고 다시 그와 함께 하지 않았다.


왜 예수님은 이런 위험한 말씀을 하셨을까?


지금도 이런 이유를 들어

하나님의 공평을 의심하는 빌미를 주고 있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다.

천국의 시민은 하나님께서 선택할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 말씀하셨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한다" (요 6:37)


떠나갔던 사람들은 스스로 떠난 것이지

예수님이 그들을 내쫓은 것이 아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 (요 5:24)


미혹의 영에 미혹되는 것은 자신이다.

죄를 사랑하여 죄에서 떠나기를 싫어하니,

각종 반이론을 만들어낸다.

자신이 악하므로 거짓 이론에 더 끌리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스스로 돌이키고 살라' 말씀하신다.


우리가 자기 중심적으로 세상 바라보기를 멈추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 중심적으로 볼 때

비로소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방식에 순종할 수 있다.



출처: 카이로스 / ars

신년 말 시리즈 ② 비판하는 말을 하지 말자

지난 해 10월, 이철호 목사가 인도하는 부흥성회가 "입술의 열매로 복과 행복을 누리고 삽시다(잠언 18:20-21)"라는 주제로 뉴욕과 뉴저지에서 열렸다. 10월 2일부터 3일간은 뉴저지 필그림교회에서, 16일부터 3일간은 뉴욕만나교회에 열렸다. 강사 이철호 목사는 예장 합신 총회장을 역임했으며, 강성장로교회 담임목사로 33년동안 목회를 하고 있다.

이철호 목사는 성회를 통해 저주 받는 말, 축복을 받는 말, 행복을 주는 말, 불행을 주는 말에 대해 설교하며, 신앙생활을 할때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선포해 나갔다. 이 목사는 성경적인 근거와 함께 자신의 경험을 숨김없이 나누어 큰 도전을 주었다. 이 목사는 우리들은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을 하는데 ①판단하는 말 ②비방(비판)하는 말 ③대적하는(거스리는) 말 ④원망(불평)하는 말 등이 있다고 전했다. 신년에 사용하리라고 저장해 놓은 파일을 통해 4번에 걸쳐 신년 시리즈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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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교회 성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이철호 목사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민수기 12:1)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민수기 12:8)

하나님께서 이집트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시는 것을 보면서, 4번째까지는 애굽의 술사들이 흉내를 냈는데, 그 다음부터는 흉내가 안된다. 일방적으로 애굽이 당한다. 당시 대제국이었던 애굽의 신은 최고의 신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그 신이 여지없이 여호와께 깨지고 있다. 이집트 원주민들과 이집트에 와 살고있던 여러나라 사람들은 끝내는 항복을 하고 출애굽을 시키는 것을 보면서 여호와 하나님이 진짜 신이고 최고의 신이라고 믿고 자신들도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애굽까지 따라나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광야에 들어가 광야생활을 하니 너무 고달팠다. 예수믿으면 좋겠다고 믿기 시작했는데, 금방 힘든 일이 생기면 하나님을 믿어도 안된다며 떨어지는 사람이 나오는 것 처럼 따라나온 사람들에게서 먼저 불만불평이 터졌다. 그 섞여있는 자들의 불만을 들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화뇌동해서 같이 원망불만을 터트렸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섞여있는 무리가운데 구스 여자, 즉 이집트 여자를 모세가 취했다는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교회이다. 교회 지도자가 이방 여자를 취했다. 그러니 시대개념으로 보면 잘못했다. 그런데 아무도 이야기를 못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받고 능력이 나타났기에, 뒤에서 불만불평은 터트리지만 누구도 대적하기 쉽지 않았다. 아무도 말을 못하니 미리암과 아론이 나섰다. 미리암은 모세의 누나이고, 아론은 모세의 형이다. 항상 주모자는 앞에 기록된 사람이다. 미리암이 나선것이다. 아론에게 "동생 모세가 잘못했는데 누군가 나서야 하지 않겠느냐. 지도자가 잘못했으면 누군가가 나서야 하는데 누가 나서나. 우리밖에 나설사람이 없지 않느냐"고 하자, 아론이 "맞아. 우리밖에 없다"고 했을 것이다. 아론은 동생밑에서 제사장 노릇을 하고 있었지만, 이때는 형으로서 누나로서 가서 잘못했다고 이야기를 한 것이다.

그러면 보라. 잘못한 것을 잘못했다고 이야기를 한 것을 무슨 말이라고 하는가. 바른 말이다.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고 하는 말이 있다. 바른 말이다. 그런데 성경은 바른 말을 했다고 안하고 비방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다음에 보니 누가 화를 냈는가. 비방을 받은 모세가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미리암에게 저주가 임하는데 문둥병에 걸렸다. 아론도 모세앞에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한다. 아론은 두 아들이 제사장으로 제사드리다가 잘못 제사드리다가 죽었다. 아론은 하나님앞에 망령된 것이 대적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을 아니 아론은 딱 엎드렸다. 중요한 것은 미리암은 여성 지도자이다. 출애굽기 15장에 홍해를 건너고 찬양할때 미리암은 맨앞에 찬양을 인도했던 여성 지도자였다. 그런데 이 사건이후에 미리암은 사라진다.

바른 말은 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진노하시는가. 그것도 교회를 정화시키기 위해, 교회를 바르게 세우기 위해 총대를 맨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진노를 하신다. 앞에서 말씀드린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교회를 주관하는 이가 있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오늘도 그분이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주권자임을 믿는가. 정말 믿는가. 하나님이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고 계시는데 왜 네가 나서는가 하시는 것이다. 심판해도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이다. 모세가 잘못했으면 하나님이 그에게 재난을 주신다는 것이다. 내가 나서서 개혁을 하겠다는 것은 성경적인 방법이 아니다.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태복음 7: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마태복음 7:3-4)

주님께서 마태복음 7장에서 비판을 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다. 비판은 남이 잘못한 것을 지적하는 것인데,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리고 비판하지 말라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주님이 네 눈에는 들보가 들었다고 하신다. 기둥 하나가 들어있으니 앞이 잘 안보인다. 희끗보니 김집사 눈에 티가 보인다. 그래서 "김집사. 어떻게 눈에 티를 넣고 살아. 내가 빼줄께" 그럴 수가 있는데, 주님은 비유로 그럴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이유는 들보가 들어있어 제대로 안보이는, 가끔가다 살짝 보이는 그 눈을 가지고 김집사 눈의 작은 티를 뽑다가 눈알을 뽑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런짓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님은 오히려 네가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나는 죄수중의 괴수"라고 고백한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신다. 자기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다른 사람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겠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누구를 비판할 의로운 존재가 없다. 주님은 그 말씀을 하고 계신다. "너는 지금 들보와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남의 티를 뽑겠다고 나서는가. 주제파악을 좀 하라. 너는 남을 판단하고 비방할 자격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엣날 재래식 화장실에는 구더기가 산다. 구더기들중에 시멘트 벽을 타고 올라오던 구더기가 아래에 있던 구더기를 보고 "어떻게 인생 그렇게 더럽게 살아"라고 말한다면, 그것을 보고 "너는 참 깨끗하니 어서 올라와라"라고 말할 것인가. 우리끼리 보면 좀 더 성화되고 안되고, 우리끼리 보면 좀 더 고상하고 안하고, 우리끼리 보면 좀 더 믿음이 있고 없지만 하나님이 보시면 다 죄인이다. 누가 누구한테 "인생 그렇게 살면 안된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이다. 철학자의 말이 아니라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얼마나 죄인인지 보라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하루동안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 것을 영상화시켜서 주일예배후 상영한다고 하면 친구들을 초청할 수 있겠는가. 제가 하루동안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 것을 영상화시켜 주일예배후 상영한다면 저는 은퇴해야 한다. 만약 상영하려고 하면 결사반대할 것이다. 목사... 생각하는 것 추하다. 꼴사납게 굴면 무시하고 멸시할 때도 있고, 화가 나면 나도 모르게 저주가 나간다. 몇일전에 혼자 맨하탄에 있는 박물관에 가서 관람하고 왔는데, 백인여자들을 보면서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것으로 끝나는가. 저런 여자와 살면 어떨가를 생각하게 된다. 순간순간 무슨 생각을 안하는가. 주님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네 속이 썩어있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이 지금 그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셋째 형의 집에 있던 아들 성민이를 찾아와서 단칸방에 누워 있자니 정말 모든 것이 한심했다.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정신, 육체 훈련을 받고 나온 나는 삼청교육대 훈련으로 인해 사회의 어느 부분에도 소속될 수 없었고 오히려 대인 기피증마저 생긴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마음 가운데는 죽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정신적인 공황이 왔다. 무엇을 해도 만족이 없고 조바심이 늘 나를 괴롭혔다. 집중을 할 수 없었고 늘 안절부절했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느낌이었다. 
  
사회의 냉대는 물론 친형님들을 비롯한 가족들의 눈초리도 따갑기만 했다. 삼청교육대에 강제로 끌려갔다 온 일에 대해서 억울하게 생각하며 나를 위로해 주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어머님조차도 혹독한 대가를 치뤘으니까 이제는 제대로 정신차리고 잘 살아보라는 말만 하실 뿐이었다.  
  
아무것도 내 의지와 생각대로 할 수 없었다. 나는 점점 무기력한 장애자와 같이 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순간순간 나를 이렇게 만든 삼청교육대의 조교들과 전두환을 죽이고 싶도록 증오하는 마음이 들곤 했다. 
  
삼청교육대의 악몽에서 벗어나는 데 나는 25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물론 아직까지도 그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정신적인, 또는 육체적인 불구자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따지고 보면 사람의 인생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인생을 내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인생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성경의 역사, 그리고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역사의 많은 부분은 인권 유린으로 점철되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권과 자유가 보장되고, 존중된 시기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인생을 우리 스스로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하다. 하나님으로부터 간섭과 통제를 받지 못하는 인생은 결국 악의 세력으로부터 간섭과 물리적인 통제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 이 시간에도 영계에서는 한 영혼을 간섭하기 위한 치열한 영적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엡 6:11). 보혜사 성령님께서는 한 영혼이라도 더 하나님의 영역 안에 들어와서 구원을 받게 되길 바래서 탄식하며 중보의 기도를 올리고 있는데(롬 8:26), 선한 길과 악한 길을 선택하는 것은 결국 개인의 자유 의지에 달려있다.  
  
일단은 나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인정하는 그 영접의 행위가 있을 때, 비로소 나의 인생은 하나님의 간섭과 보호 아래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근대사 가운데 한국 민족은 악의 세력들에 의해 인권이 유린되고 생명의 존엄성이 한순간에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경우가 여러 차례 있었다. 그중 가장 가까운 예가 바로 삼청교육대 사건이며, 일제시대 일본 군인들에 의한 강제 징용, 정신대, 인체 실험 등의 만행이 그에 속한다. 그리고 구 소련제국의 독재자 스탈린에 의해 강제이주 되었던 30여만 명의 재소 한인 동포들의 운명도 결국 악의 세력들에 의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철저히 유린당한 대표적인 경우라 말할 수 있다.  
  
스탈린에 의한 강제 이주의 역사는 한민족의 눈물의 역사다. 일제 치하를 벗어나 만주와 연해주 쪽에 거주하고 있던 30여만 명의 조선 동포들은 1937년 겨울, 단 열흘 만에 살고 있던 지역에서 기차에 실려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중앙아시아 사막 한 가운데 버려지는 비운을 당했다. 본인들의 의견은 온데간데 없었다. 타인의 결정에 의해 자신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그 당시 이러한 조치에 대해서 누구 한 명 항변조차 할 수 없었고 20여 일 동안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중앙아시아 철도를 달려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는 소금 사막의 땅에 그야말로 인간쓰레기처럼 버려졌다. 스탈린 정부는 이들의 생존 여부에 일말의 관심조차 없었다. 단지 저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일본의 연해주 쪽 세력 확장을 어떻게 해서든지 저지하는 데 있었다. 그들은 한민족을 그 땅에서 쫓아냄으로써 자기들이 우려했던 일본 비밀 스파이들이 다 사라지게 될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나는 삼청교육대에서 본인의 의지, 행실에 관계없이 폭력에 의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가 유린당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역사의 폭력에 의해 70여 년 전 중앙아시아 땅에 버려졌던 불쌍한 우리 고려인 후손들을 기억하게 되었다. 
  
소련이 만주, 연해주 한민족 강제 추방이라는 인권 유린의 만행을 저지르는 동안 일본은 한국을 식민통치하면서 한국의 젊은 청년들을 강제로 군대에 입대시키고, 또 한편으로는 젊은 처녀들을 군 위안부인 정신대로 강제 징용해서 한민족의 인권을 가장 처참하게 짓밟았다. 그런가 하면 군사 무기를 개발하면 서 한국사람들을 인체 실험용으로 잔인하게 사용하기도 했다. 몇 세대를 지나와도 일본이라고 하면 먼저 불편한 민족 감정이 앞서게 되는 것도 모두 이때 당한 억울한 감정들이 한민족의 핏속에 고스란히 스며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일본군에 의해 강제징용 당했다가 2차 대전의 종전과 함께 사할린 땅에 남겨진 5만여 명의 한인 동포들은 부조리한 역사의 희생자들이었다. 일제시대에 강제 징용된 사람들의 삶도 처절한 것이었다. 주로 군수물자 공급을 위해 탄광 노동자, 또는 나무채벌공 등 육체적으로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다. 물론 임금 지급이 없는 것은 당연했고 끼니마다 식사를 제때 공급받지 못해서 많은 사람들은 영양실조와 과로로 공사장에서 노동을 하다가 싸늘한 시체로 죽어갔다. 강제 징용된 사람들에게 인간의 가치, 개인의 의지는 이미 사전에 없는 단어들이었다. 그곳에는 일본군의 끊임 없는 노동력 착취와 개 다루듯 업신여기는 인간적인 모욕만이 넘쳐흘렀다. 한국 민족의 핏속에는 일본에 대한 원한과 철천지 원수처럼 미워할 수밖에 없는 반일 민족감정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장종택 목사 “믿음은 암기하는 것이 아니다”

 

지난 2016년 많은 집회에 참여하여 취재를 했지만 가장 인상에 남는 몇 개를 꼽으라면 12월 16일(금) 뉴욕어린양교회(박윤선 목사)에서 열렸던 장종택 목사 찬양집회도 반드시 들어갈 것이다. 장종택 목사는 ‘은혜로다’, ‘다윗처럼’, ‘생명과 바꾼’, ‘내 선한 목자 되신 주’, ‘내 삶 속에 주님 없었다면’ 등 찬양을 만든 찬양 사역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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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날 집회는 찬양집회가 아니라 간증집회였다. 2005년 1월 ‘항NMDA수용성뇌염’이라는 희귀병에 걸려 딸 온유가 입원하고 일어났던 고난과 하나님의 역사를 간증하는데 시간의 대부분을 할애했다. 그리고 말씀집회였다. 믿는다고 하지만 삶속에서는 전혀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지 않는, 삶의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이 세대를 질타했다. 집회는 거의 자정까지 길게 이어졌다. 

 

1.

 

온유를 돌보며 중환자실에 죽음과 삶의 현장을 보게 되고 처절한 마음을 가졌다. 그때 깨닫은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었다. 하나님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입장을 잘 생각을 안한다. 나도 그랬다. 하나님은 ‘갑’이신 분이시다.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소유하신 분이시기에 우리는 ‘을’이라고 생각하고 항상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의 입장이 아니라 내 이야기만 하고 내 처지와 내 절박함만 이야기했다. 제가 그랬다. 하지만 죽어가는 온유를 보면서 내 찢어지는 가슴에 붙잡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죽이셨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얼마나 작은 별인지 아는가? 지구가 속해있는 은하계인 태양계는 2천억 개의 별이 모여서 조그마한 은하계를 만든다. 태양계에서 가장 큰 별은 지구를 비교하면 20만 배 크다. 하나님은 그 지구라는 작은 행성에 사는 인간을 위해 자기 아들을 보내셨다. 태양계에서 가장 가까운 은하계는 2백만 광년이 떨어진 안드로메다인데 2~4천억 개의 별이 있다. 그런 은하계가 수천 개 모이면 은하단이 된다. 그 안에 있는 지구가 얼마나 작은지 알겠는가.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인간에게 주셨고 그냥 주신 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온갖 수모를 당하시고 채찍에 맞아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당하셨다. 십자가에 달려서도 안죽으면 죽이는 방법이 정해져 있다. 밑에서 대각선으로 창을 찔러 심장을 관통하게 만든다. 그렇게 찔려 피와 물을 쏟으시는 것을 하나님이 보고 계셨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그런 아픔과 예수님의 찢어지는 심장을 통해서 여기에 앉아있는 것이다. 우리는 은혜라는 단어와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 천박하게 다루고 있다. 그래서 요한복음 3:16에 나오는 “이처럼”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절실히 깨닫았다.

 

2.

 

온유는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나를 보지 못했다. 그것을 보고 미칠 것 같은 안타까움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안타까움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지 못하고 눈만 떠 있는 온유가 바로 저였다. 오늘 우리들은 세상을 열심히 살고 있는데 그런데 과연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고 있는가? 아니다.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거짓말과 불법을 저지를 때 하나님께서는 안된다고 그렇게 소리치시는데 그런 하나님을 뒤로하고 살아간다. 그런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들통이 나야 형통에 이른다.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잘 모르고 살아간다. 최근 한국에서 1만 명이 모이는 교회에서 집회하면서 이런 메시지를 전했다. 오늘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였는데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이 교회를 다닌다는 명목아래 그리스도인 것처럼 앉아있는 가짜가 많다고 했다. 솔직히 말해서 여러분들에게 살면서 스마트폰 보다 하나님이 덜 귀중하지 않는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 증거를 대라고 하면 말을 못한다. 그냥 교회를 다니면 구원을 받겠지 그렇게 알고 교회를 다닌다. 단지 들통이 안 나는 것이다. 우리들이 교회에 앉아 있는 모습은 진정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다. 교회에서는 웃으며 섬기지만 진실한 모습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 앉은 이 모습이 우리의 진짜 모습인 줄 안다.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하다.

 

내가 교회를 다닌다는 말을 안하면 세상도 내가 그리스도인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성경에 보면 열처녀 비유가 나온다. 어리석은 5처녀는 비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열 처녀 모두 예수님을 기다렸지만 어리석은 5처녀들은 준비를 못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자리에 앉아있다고 다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다. 특히 이민교회는 믿음보다 다른 목적으로 교회에 많이 온다. 오늘 여러분의 정체가 무엇인지 들통이 나야, 내가 거짓 그리스도인 것이 들통이 나야 다시 회심이 일어난다. 하나님이 아무리 불러도 사망의 잠을 자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된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온유의 모습이 제 모습이었다.

 

 

▲어린양교회와 장종택 목사의 찬양

 

3.

 

달라스에서 13년을 살았다. 영주권이 나오고 한국에 나갔는데 10여년 만에 한국교회가 뭔가 이상해졌다. 제가 신학교에서 배운 것과 제가 추구했던 예배와 달랐다. 제가 배운 기독교 신앙은 예배당에서 고백했던 것이 삶에서도 여전히 이어지는 것이라고 배웠다. 삶의 예배를 배웠다. 그렇게 하려 노력했다. 그런데 10여년 만에 한국에 가니 예배당에서의 삶과 밖의 삶이 다른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이중적인 삶을 산다. 그래서 그때 ‘개독교’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목사를 보고 쓰레기에서 딴 ‘목레기’라는 말을 듣고 충격이 컸다. 한국 기독교가 이것이 뭐지 라는 놀라움이 있었다. 큰 캠프를 초청을 받아 갔는데 참가한 사람들이 막 뛰면서 예배했다. 1995년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미국에 왔는데 당시만 해도 한국은 찬양할 때 박수치면 순복음교회이었을 정도였다. 고신 합동 통합 등 장로교단들은 모두가 경건하고 조용한 예배를 드렸다. 12년 만에 가니 미국처럼 뛰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고 감동했다. 그런데 감동이 짧게 끝났다. 열심히 찬양하던 아이들이 찬양이 끝나고 말씀을 전하기 위해 목사가 올라오니 3분의 2가 핸드폰을 꺼내 딴 짓을 하고 놀았다. 예배팀은 나가 안 들어왔다.

 

그런 것을 보고 미국에 다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기도했다. “하나님, 이것이 무엇입니까? 한국교회의 예배가 무엇입니까? 한국교회는 삶의 예배의 부흥이 아니라 어쩌면 종교행위의 부흥 혹은 예배음악의 부흥입니까? 그러면 제가 한국에 가겠습니다”라고 서원을 했다. 영주권도 버리고 한국에서 오라는데도 없었지만 친구에게 보증금 3백만 원을 빌려 동두촌에 방을 얻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며 보냈다. 그때 온유가 태어났다. 곰팡이가 가득한 방에서 아이가 천식에 걸려 어려워했고 불치병도 걸렸다. 너무 하나님께 화가 나 이럴 수 없다고 울부짖었다.

 

4.

 

그때 깨달은 것은 믿음은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신천지와 다를 바 없다. 신천지는 일주일에 4-5번 교육받으러 가 성경비유를 배운다. 오전오후 공부하며 세뇌 당한다. 우리도 다를 바 없다. 주일에 가서 성경공부와 제자훈련할 때 세뇌 받는 것 아닌가. 암기하는 것 아닌가. 주일학교에서도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고 암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천지보다 암기를 덜하고 세뇌를 덜 받는다. 열정이 그들과 비교가 안된다. 그런데 달라져야 할 것은 그들의 교주는 이만희이고 죽을 인생인데 우리는 우리를 만드신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그것이 삶에 드러나야 되는데 안 그러니 신천지와 비교하면 더 못한 것이다. 그냥 암기했던 것이다. 저도 그렇게 살았다. 그러니 화가 나는 것이다. 내가 배운 것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며, 하나님은 언제나 은혜가 풍성하시고 좋으신 분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이제 나를 힘들게 하는 하나님으로 다가왔다. 내가 배운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으로 오신 것이다. 저는 이때까지 내가 만든 하나님을 생각한 것이다. 암기한 하나님.

 

5.

 

그래서 믿음은 암기하는 것이 아니구나. 삶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 닫았다. 그래서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때 음성이 하나 들렸다. “너 이래도 나를 신뢰하느냐?” 그 소리가 내 가슴을 쾅 쳤다. 우리 집안은 4대째 예수를 믿은 집안이다. 늘 들었던 말이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합니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음성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너 이래도 나를 신뢰하느냐”라는 말씀을 들으면서도 온유의 처참한 모습을 보면 대답을 바로 하지 못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너무 쉽게 말했던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이 이렇게 두렵고 무거운 단어인데 함부로 내뱉은 내가 순간 부끄러워 답하기를 주저했다. 그 다음으로 들려온 음성은 “네가 한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지”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하나님께 많은 이야기를 했다. 찬송하며 ‘주 예수보다 귀한 것이 없다’고 고백했다. 설교를 들을 때 ‘아멘’으로 고백했다. 그러면서도 처참한 환경에 있는 딸을 보면서 믿음이 안간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까지 지었는데도 책임을 안지고 있었던 것이다.

 

 

▲장종택 목사의 눈물의 간증 

 

6.

 

왜 세상은 우리 보고 개독교라고 하는지 아는가? 왜 목사를 보고 쓰레기라고 하는지 아는가? 세상은 우리가 교회에서 어떤 말을 하는지 안다. 그래서 “너희들은 교회가서 예배할 때 무엇이라고 하는가. 정직해야 한다고 순결하게 산다고 불법을 안 저지른다고 이웃을 사랑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말한 것들을 지키니. 왜 그렇게 한 말을 안 지키고 책임을 안지고 사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이 더하고 자기유익을 위해 남을 짓밟는다. 교회에서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아 세상이 던진 말이 개독교이다. 아닌가? 예배당에서 그렇게 하나님께 고백한 다음에 예배당 떠나면 어떻게 하는가? 불법을 저지르지 않는가? 회계사 사무실 3년을 일하면서 수많은 크리스찬들이 거짓말하는 것을 보았다.

 

예배당에서 하나님께 고백한 말을 공수표를 던지듯이 던지고 내 마음대로 살지만 입으로는 주예수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절대가치로 두고 살겠다고 고백하지만 삶은 다른 절대가치 돈과 성공을 위해 살아간다. 그렇게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았던 사망의 잠을 잤던 우리에게 하나님이 하고 싶었던 말씀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주셨다. (중보기도에 대한 정종택 목사의 새로운 시각에 대한 기사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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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걸 목사 ② 목회 위기관리 / 교회규모에 관계없이 목회자의 생활은 만나

    지난해 10월, 35년의 목회를 마치고 은퇴한 이용걸 목사(필라영생장로교회 원로목사)가 “실천적 이민목회의 철학과 교회부흥”라는 주제로 2월 20일(월) 뉴욕교협 사무실에서 목회자 세미나를 인도했다. 이용걸 목사는 △바울의 목회철학 △목회 위기관리 △레위기에서 본 목회자상 이라는 제목의 3가지 목회철학을 나누었다. 다음은 “목회 위기관리”에 대한 두 번째 강의내용이다. 첫 번째 강의를 먼저 읽기를 권한다. 첫번째 강의 보기(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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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걸 목사를 존경하여 교회집회에도 초대하고 이제 뉴욕교협 회장이 되어 목회자 세미나 강사로 초청한 김홍석 목사와 이용걸 목사 부부 

     

    스트레스 ② 인간관계

     

    목회에서 제일 어려운 것은 인간관계이다. 교인들 간의 분쟁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A라는 교인을 편들 수 없고 B도 편들 수 없다. 필라지역 어느 교회 목사는 교인간의 분쟁을 해결하려고 A를 만나서는 A의 주장을 동의하고 B를 만나서는 B의 주장을 동의했다. 그러다 A와 B가 만났는데 대화하다 보니 들통이 나 양쪽을 다 잃어 버렸다. 목사가 중요한 것은 주관이 있어야 한다. 교인 간에 싸우더라도 누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잘못했다고 말을 해주어야 하고, 아니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하지만 가서 말을 들어주는 것은 좋다.

     

    사실 목사는 말을 안해도 성도들은 목사가 했다고 한다. 나는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지만 목사님이 그랬다고 한다. 목사님이 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도 뒤늦게야 알게 된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렇게 말한 교인에게 가서  따지지 않았다. 35년간 한번도 “내가 언제 그랬니. 왜 그런 이야기 했니. 나는 그런 말 안했다”라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다 아시니 때가 되면 다 알게 된다. 시간이 필요한 것이지 자연적으로 알게 되고 그것을 알게 된 사람은 다음에 절대 오해를 안한다. 인간문제는 이렇게 문제가 참 많다. 그래서 목사가 교인들 사이를 화해시키는 것이 참 어렵다.

     

    옛날 젊었을 때 기도원에 가면 원로들에게서 “이 목사, 장로들과 눈싸움에서 이겨야 해. 눈싸움에서 지면 지는 거야”라는 말을 들었다. 무슨 이야기인지 몰랐는데 목회하면서 보니 그것도 맞는 이야기이다. 한번 장로에게 지면 계속해서 양보해야 한다. 그러면 장로가 주관을 가지고 목사를 부리는 경우가 많다. 목사는 웬만한 것은 다 양보를 하지만 선을 넘으면 가차 없이 잘라내야 한다. 제가 나가라고 한 장로들도 있었고 내 보낸 집사도 있었다. 목사는 보스 기질이 있어야 하고 종의 기질이 있어야 한다. 두 가지 기질이 다 있어야 한다. 목사가 인내할 수 있는 선을 넘을 때는 가차 없이 짤라내야 한다. 그리고 웬만하면 다 종이 되어야 한다.

     

    제직회 같은 모임에서 목사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제직회를 하면 마당을 펴고 쓸데없이 발언을 많이 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니 문제이다. 가능하면 회의는 적게하라. 영생교회는 제직회를 6월에 한 번 한다. 그리고 연말에 예산 세우는 제직회와 연초에 제직 임명하는 제직회로 모인다. 원래 제직회는 6월에 한 번 하는데 우리 법을 보면 사실 안할 수도 있다. 그래서 제직회를 만약에 자주 한다면 무슨 방법을 통해서라도 가끔씩 하도록 하라. 제직회는 짧게 해야 하고 기도회는 오래 해야 한다. 제직회를 하면 쓸데없이 말을 하게 되고 교회가 말을 하게 되면 말이 번져 나간다. 가능하면 말거리를 주지 않는 것이 좋다.

     

    목사가 회의에서 무슨 안을 제시했다면 그것은 그대로 통과되어야 한다. 통과하지 않을 것은 아예 말도 하지 않아야 한다. 35년 동안 영생교회에서 제가 제시해서 통과 안된 것이 하나도 없다. 만약에 당회에서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기도로 연기하자고 하면서 독대로 만나 설명하면 다 해결된다. 그런 경우가 서너 번 있었다. 그러니 목사가 당회나 제직회에 안건을 낼 때 앞뒤를 재고 이것은 누가보아도 다 동의한다고 할 때만 제안해하지 번복되거나 반대되거나 하면 습관이 된다. 그래서 눈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는 이야기가 이제는 이해가 된다.

     

    그리고 목사는 무엇보다 정직하고 진실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기에 정직해야 한다. 빌립보서 4:8을 보면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무엇이든지 경건한 것과, 무엇이든지 옳은 것과, 무엇이든 순결한 것...”을 생각하라고 했다. 하나님이 99세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정직하고 진실해야 한다.

     

    우리 지역에 있는 교회의 장로님이 목사님을 내쫓는데 도와달라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목사님이 목회학 박사학위를 공부한다고 해서 타주에 있는 신학교에서 공부하도록 교회에서 도왔다. 그런데 그 목사는 공부하러 가지 않고 다른 곳에 간 것이 드러났다. 아무도 모를 텐데 교회 차를 타고 가서 사고가 났기에 보험 처리하는 과정에서 장로가 알게 되었다. 분명히 다른 주에 있는 신학교에 공부하러 간 사람이 엉뚱한 주에 간 것이 들통이 났다. 친구가 와서 놀러간 것.

     

    그러면서 결국은 장로가 저한테 목사를 내보내는데 도와달라고 했다.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고 하니, 장로는 목사가 거짓말을 한 것을 안 이후에는 목사의 설교에서 은혜를 받을 수 없다고 했다. 그 말을 여러분에게 전해주고 싶다. 우리 목사가 거짓말을 하면 그것이 탄로가 나면 교인들에 설교로 은혜를 끼칠 수 없다. 그래서 결국 그 목사는 교회를 쫓겨나 한국으로 돌아갔다. 목사는 어떻게 하던지 정직하고 진실해야 한다.

     

    스트레스 ③ 설교

     

    목사들은 설교에 많이 스트레스를 받는다. 목사가 설교를 잘하면 교인들이 불평이 없다. 애가 배고프면 우는 것처럼 목회자가 설교를 잘하면 불평이 없는 것이다. 목사가 설교를 잘하면 웬만한 것은 다 커버가 된다. 그래서 목사는 설교를 잘해야 한다. 그런데 설교는 은사도 은사이지만 자기 훈련도 필요하다. 저 같은 경우 중학교 때부터 웅변을 하고 바닷가나 산에 가서 소리도 지르고 했다. 또 문학을 좋아했다. 책을 보고 문학을 하는 것이 목회에 도움이 된다.

     

    의사나 목사가 다 스트레스를 받는다. 저는 수술실에 교인과 같이 한번 들어간 적이 한국에서 있다. 내가 없으면 수술을 안하겠다고 해서 같이 들어가 수술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지켜보는 것이 힘들었다. 수술이 끝나고 의사는 수술한 후 비린내가 나서 담배를 피거나 술을 마셔야 한다고 했다. 의사는 스트레스를 그렇게 해결한다. 목사나 의사나 스트레스를 동일하게 받는다.

     

    목사는 설교에 부담을 가지지 말고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되어야 한다. 설교해야 하는 시간이 왜 그렇게 빨리 오느냐는 생각이 들면 설교가 스트레스이다. 설교시간이 기다려져야 한다. 그저 나 설교 안시키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로 기다려져야 한다. 그리고 설교시간이 즐거워야 한다. 그래서 설교를 통해 오히려 스트레스를 풀어야지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된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자신이 없다고 하면 위기가 온다. 다른 사람이 와서 강단에 안지켜주나 하는 생각이 들면 위기가 온다. 

     

    설교하면서 먼저 내가 은혜를 받아야 한다. 내가 은혜를 받으면 성도들이 다 은혜를 받는다. 제가 미국에 오기전 목회했던 후암제일교회에 처음 가니 80명이 모였다. 5년을 목회하면서 장년 출석이 760명이 되었다. 당시 제일 많이 모인 교회는 영락교회나 충현교회는 1천1백~1천2백 명이 모이는 정도였다. 당시 우리 신학생들의 목표가 다 1천명이상 목회하는 것이라고 했다. 졸업반 설교학 시험은 설교를 하며 교수와 학생들이 채점을 한다. 여러 지적들이 나오는데 설교학 교수는 저에게 1천명을 목회할 전도사라고 칭찬했다. 열심히 설교를 개발해야 하고 열심히 설교를 준비해야 한다.

     

    항상 설교하고 나 잘했다고 하면 발전이 없다. 못한 것을 자꾸 개발해야 한다. 한국에서 목회할 때 설교를 잘했다고 생각하고 강단에서 내려오는데 전임 목사에게서 그 따위로 설교하면 되겠느냐는 호통을 받았다. 큰 소리로 했는데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그 다음부터는 설교하고도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항상 겸손하게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설교가 개발된다.

     

    제가 전도사 때부터 친구로부터 설교 코치를 받았다. 오늘날은 사모님들이 남편 목사의 설교를 코치를 해주어야 한다. 목사 본인이 설교하고 본인이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정착되면 설교를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아닐 수 있다. 교인들은 목사의 설교를 비판하기가 힘드니 사모가 그 역할을 해야 한다. 아내는 저의 설교에 대해 비판을 많이 한다. 토시 하나 틀려도 뭐라고 한다. 1부에서 설교하고 2부 예배에 들어가기 전에 방에 들어와 “목사님, 성도들 톨비가 아깝지 않도록 설교하세요!”라고 지적하며 설교교정을 해 준다. 우리 교회는 델라웨어나 뉴저지에서 오기에 톨비를 내야하는 교인들도 있다. 아내의 지적 때문에 자꾸 저의 설교가 발전한다. 배우자에게 자꾸 설교지적을 당해야 설교가 발전이 있고, 설교가 발전이 있어야 설교 스트레스를 안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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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강사 우창환 장로, 이용걸 목사, 김경원 장로


    스트레스 ④ 건강

     

    한인 이민 목회자는 통계가 없어 모르겠지만 한국 목회자의 30%가 건강문제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대표적인 건강문제가 간이다. 1980년에 미국에 와서 신학교에 만난 40대 목사는 간계통 질환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내 손목을 붙잡고 “이 목사님, 목회는 마라톤이니 건강 유의하세요. 열심히 하는 것만 중요한 줄 알았는데 먼저 갑니다. 건강관리 잘하세요” 라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심각하게 들었다.

     

    어떻게 하던지 정기진단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필요하면 조기 치료를 받으면 된다. 왜 요즘같이 좋은 건강보험 시스템에서 정기진단을 안 받는가? 목사가 건강을 잃고 떠나면 제일 불쌍한 사람이 사모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누가 돌보아 주겠는가? 어느 교회에 가니 목사가 떠나고 6개월 만에 사모에게 사택을 비워달라고 하는 것을 보고 눈물이 나려고 했다. 목사가 건강해서 오래 즐겁게 목회해야 하니 건강에 유의하라.

     

    목회하면서 교인들을 보니 항상 하나님이 사인을 주신다. 뭔가 피곤하고 어렵다 하면 멈추어야 한다. 미국 사람은 눈을 치우다가 사인이 오면 그대로 멈춘다. 그래서 회복되는 시간을 가지는데, 우리는 마저 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일하다 쓰러지고 만다.

     

    스트레스 ⑤ 경제문제

     

    대부분 목회자가 경제적인 문제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이민 목회자의 사모 40%가 교회밖에서 풀타임으로 일하고, 12%가 파타임으로 일한다. 일을 안하는 사모는 48%이다. 이민 목회자의 경제적인 안정에 대한 질문에서 괜찮다 18%, 보통이다 8%, 어렵다 74%이다. 목사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우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뿐만 아니라 목사는 교인들이 어려울 때도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에 61%가 동의했다. 강하게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에 20%, 상관없다는 1.2% 이다. 교인이 어려울 때 목사의 80% 이상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다.

     

    들은 이야기인데, 뉴저지에 사는 목사의 아들이 책을 사달라고 했는데 목사가 돈이 없어 못 사준다고 하니, 아버지는 왜 책을 사느냐 하면서 아버지 서재를 불을 질러 버렸다. 아버지가 충격을 받아 죽었는데, 장례식때 마지막으로 가족들이 관에다 꽃을 놓는데 아들이 침을 뱉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정이 경제적으로 어려우니 자녀들도 어려워진다. 

     

    그러면 경제적인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경제적인 문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첫째, 빌립보서 4:13에는 나에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바울은 이런 저런 형편가운데에서도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했다. 우리 목회자의 생활은 만나이다. 제가 개척할 때 받은 사례나 교회성장후 받은 사례는 다 같은 것이다. 그저 그것이 그것이다. 하루 세끼도 교인이 많으면 잘못 먹는다. 교인이 많아지면 그만큼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니 목회자 생활은 만나이다.

     

    둘째,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책임지신다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리고 싶다. 성전을 건축하면서 가진 모든 것을 다 바쳤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통해 엘리야를 먹이셨는가 체험해보자고 다 바쳤는데 하나님이 역사하셨다. 아내가 어느 날 “목사님, 나는 두렵습니다”라고 말했다. 자신이 필요한 것을 생각만 하면 다 응답이 온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까지 아시는 하나님이시다.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의 생각까지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생각만 해도 은혜를 주신다.

     

    셋째, 목회자의 경제문제는 교인들이 부자되도록 기도해 주어야 한다. 처음 교회를 시작하고 어느 교회 부흥회를 갔는데 십일조가 1만 불이 나오는데 우리교회는 1천 불도 안될 때였다. 그렇게 십일조를 드릴 수 있는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응답해주셨다. 어느 교회는 한 교인이 1만 불을 십일조를 한다고 해서 우리 교회도 그렇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다 응답해주셨다. 교인이 부자이면 목사도 부자이다. 경제문제를 위해 계속 성도들이 잘되도록 기도하기 바란다.

     

    될 수 있는 한 사모는 일하지 않는 것이 좋다. 아무래도 사모가 일하면 목사가 목회에 전념할 수 없다. 두 사람이 올인하다 만일 먹지 못해서 굶어 죽는다면 순교이다. 그래서 부부가 열심히 목회하는 것이 좋다. 그렇다고 지금 일하는 것을 당장 때려치라고 하지는 마라. 어느 교회에 가니 예산을 세울 때 사모의 수입을 참고해서 목사의 사례를 정한다고 한다. 가능한 두 분이 열심히 목회에 전념하기 바란다.

     

    스트레스 ⑥ 가정문제

     

    사모들과 이야기하다 보니 제일 사모가 답답하고 안타까운 것은 목사님이 너무 TV와 비디오를 많이 보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 오래전 필라 지역에 있는 사모가 교회 앞에서 남편 목사는 가짜라고 양심선언을 했다. “목사가 좋지 못한 TV와 비디오만 보고 기도도 안하고 성경도 안본다. 다 다른 교회에 가라. 여러분들이 불쌍하다”라고 말하고 이혼하고 가버렸다. 목사님들 조심해야 한다.

     

    남편 목사가 심방을 억지로 한다는 것도 사모님들의 고민이다. 심방을 억지로 하지 말라. 저는 배달부처럼 심방을 했다. 교회개척하면서 오전 9시부터 심방을 했다. 그래서 계속해서 하루종일 심방을 했다. 위기는 누구에게나 다 있다. 큰 교회 목사일수록 위기가 더 많고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는다. 배구할 때 상대가 강 스파이크를 날리면 블러킹해서 막아내야지 받으면 내가 죽는다. 스트레스를 스폰지처럼 받으면 목사는 죽는다. 그러나 빗물이 창가를 흘러내리듯이 내 보내면 산다. 중요하다.

     

    흑인가를 심방하면 아이들이 계란을 자동차에 던진다. 차에 뭍은 계란은 닦기 힘들다. 내려서 싸울 것인가 아니면 집으로 갈 것인가 하는 선택이다. 저는 집에 가서 닦았다. 우리 지역에서 권사 한 분이 흑인이 비즈니스에 들어와 난리치니 화가 나서 권총을 들고 나가지 않으면 죽인다고 위협했다. 그러다 흑인 여자가 권사의 총을 뺏어 권사를 쏘아 죽였다. 그리고 정당방위로 처리됐다. 스트레스를 받느냐 쳐 내느냐는 여러분에게 달려있다. 

     

    그러면 우리 목사들이 어떻게 스트레스를 쳐 내는가 하는 것은 기도제목이다. 하나만 알려드린다. 저는 매일 아침마다 어려운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네가 그 문제 때문에 그렇게 마음이 아프냐. 원래부터 죄인인 네가 죄인취급을 당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 죄 없으신 주님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일부러 죄인이 되셨는데 원래부터 죄인이 네가 그것가지고 섭섭하게 여기면 되겠느냐"하며 스스로 기도하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며 오늘까지 목양의 길을 걸어 왔다. 그러니 지금 72세인데 건강을 주셨다. 중요한 것은 목사는 스트레스를 받지 말아야 한다.

     

    예정된 강의 시간이 지나 이용걸 목사는 “스트레스 ⑦ 성공과 명예” 부분을 생략했고, 그리고 결론인 △사명감 확인 △영성개발 △적당한 휴식도 언급하지 못했다. 이 부분은 제목을 놓고 이용걸 목사가 하고자 하는 강의내용이 무엇일까 묵상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페북, "동성애는 혐오스러운 것" 게시글 삭제

     

    페이스북이 ‘사전검열’ 논란에 휘말렸다. 성경을 인용해 동성애 반대 견해를 피력한 한 크리스천 여성의 계정을 중지시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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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 삭제 안내와 그에 대한 답변 

     

    미국에 거주하는 엘리자베스 존스톤이란 여성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레위기는 동성애를 ‘가증’하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내용의 글을 게재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의 글은 약 6개월 정도 게재됐으나, 페이스북은 지난 9일 해당 게시물이 ‘페이스북의 지역사회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삭제 조치했다. 

     

    페이스북은 인종, 국적, 종교, 성 정체성, 성, 장애, 질병에 대해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내용의 증오연설을 삭제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페이스북에서 '엄마 운동가'라는 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는 존스톤은 “페이스북의 이번 조치로 자신의 페이지가 3일 동안 정지돼 76,000명이 자신의 게시물을 열람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3일 후 계정이 원상 복구되자, 존스톤은 다시 동일한 글을 올렸고 페이스북 측은 존스톤의 계정을 7일 동안 정지 조치했다.  

     

    존스톤은 자신의 글이 “특정 집단이나 인물은 진술하지 않고 단지 성경 구절을 인용했을 뿐”이라며 “페이스북의 조치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서는 “페이스북이 사전검열을 하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고 있다.

     

    지난해에도 페이스북은 ‘트렌딩 뉴스’란에 보수적인 의견을 담은 글을 집중적으로 삭제한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보수적 의견을 의도적으로 억압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에 페이스북 측은 “페이스북은 모든 생각을 수용하는 매체가 되는데 주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논란이 가중되고 있는 가운데 페이스북 측은 존스톤의 계정을 정지한 명확한 이유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있다.

     

    백유현 ⓒ 데일리굿뉴스

    가져온 곳: USA 아멘넷

    정치적인 혼란속에서도 뉴욕교계 단체들 성숙한 모습 보여

     

    조국 대한민국의 혼란속에 특히 대통령 탄핵 결정을 앞두고 “탄핵을 탄핵하자”라며 탄핵을 반대하는 태극기 시위가 2월 18일(토)과 19일(주일) 연속으로 열렸다. 주일 오후 4시 노던 155가에서 한인자유민주수호회 주최로 열린 태극기 시위에 뉴욕교계의 한 단체가 단체차원에서 참가한다는 정보를 듣고 처음으로 시위 취재를 나갔다.

    뉴욕교협, 뉴욕목사회, 뉴욕장로연합회 등 뉴욕교계 단체들은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에서도 정치적으로 어느 한쪽의 편을 들지 않고 하늘만 바라보며 조국을 위한 기도를 계속해 왔다. 그런데 한 단체가 단체의 이름을 걸고 특정 성향을 띈 시위에 참가한다는 것은 심각한 분열을 가져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오해였다. 그 단체가 참가한 것이 아니라 회원들이 개인의 양심의 자유에 따라 참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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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극기 집회 사진들은 아멘넷의 입장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날 태극기 집회에서는 10여명의 목회자들과 다수의 장로들이 참가했다. 또 상당수의 성도들도 참가하여 태극기를 흔들었다. 또 일반 교계단체가 아니라 우측 색깔을 분명히 한 회원들로 구성된 이승만 박사 기념사업회 뉴욕지회(회장 안창의 목사)에서는 회원들이 피켓을 직접 만들어 참가했다. 안창의 목사와 현영갑 목사는 강단에 나와 탄핵을 적극 반대하는 발언을 하고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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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극기 집회 사진들은 아멘넷의 입장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아무리 크리스찬이라고 해도 개인의 양심에 따라 태극기나 촛불 시위를 하는 것은 말릴 수 없겠지만, 뉴욕의 교계단체들은 한순간의 울분이나 정치적인 목적으로 단체를 이용하는 것을 자제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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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goo.gl/photos/WRVVhiu1L4ua2Axq9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권력과 폭력의 힘에 의해 개인의 삶이 굴절되는 모습을 잘 그려낸 영화로 안소니 퀸이 주연한 '25시'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던 무렵 루마니아의 산골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루마니아 폰타나의 농부 요한(안소니 퀸 분)은 독일 나치가 마을을 침공하면서 자신의 인생이 하루아침에 박살나는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된다. 아내 스잔나의 미모를 탐낸 경찰서장 도브레스코의 계략으로 자신이 유태인이라고 상부에 거짓으로 보고되어 강제 노동소에 보내진다. 게다가 도브레스코는 스잔나에게 그녀가 남편과 이혼하지 않으면 전 재산을 몰수하겠다고 위협한다. 그의 위협에 지친 스잔나는 요한을 위해 이혼을 하고 서장의 아이까지 갖게 된다. 억울한 누명을 쓴 요한은 수용소를 탈출하는데 성공하지만 또다시 검거되어 독일로 끌려 가게 된다. 그러나 독일 친위대 대령에게 외모상 아리안족의 순수혈통을 가진 영웅 일원으로 인정받아 수용소 소장에 임명된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인생이 자신 쪽으로 풀려나가는 것도 잠시였다. 얼마 후 소련이 루마니아를 침공할 때 요한은 미군 포로가 되어 독일을 도운 전범자로서 군사 재판을 받게 된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독일군 수용소 소장 일을 했던 것이 그토록 기다렸던 연합군에게 전범으로 몰리게 되는 증거가 된 것이다. 요한은 연합군 수용소 생활 끝에 마침내 고향 땅에 돌아왔지만 그곳에는 그를 반겨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전쟁과 폭력은 순박한 농부 요한의 일생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쓰레기처럼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었다. 순박한 루마니아의 농부 요한은 본인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세상을 움직이는 부조리한 힘에 의해 이리 저리 굴절되면서 처절한 무기력감에 빠지고 좌절하게 된다. 그는 착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세상은 그를 예외로 놓아두지 않는다. 세상의 권력은 그의 인생을 마음대로 들었다가 내팽개치기도 하면서 마음대로 농락했던 것이다. 
      
    루마니아의 농부 요한이 겪은 무기력함과 세상 권력의 부조리하고 잔인한 모습은 삼청교육대 안에서 일어났던 일들의 좋은 표본이다. 빨간 모자의 조교들은 삼청교육대 안에 들어 온 사람들을 훈련시키다가 죽여도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날마다 입소자들에게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신체적 고통을 가했다. 저들은 타인을 학대할 때 느끼게 되는 쾌감을 더욱 즐기기 위해 고문과 체형의 강도를 날마다 더해갔다. 따라서 고문을 당하다가 기절하거나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 았던 것이다. 폭력을 가하는 사람들의 쾌감은 일시적인 것이지만,폭력의 피해자가 된 사람들의 마음의 상처는 평생 동안 지속된다. 당시 삼청교육대에 강제로 끌려갔던 피해자들은 아래와 같이 하소연한다. 
      
    "25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생각했다. 내가 왜 삼청교육대에 끌려갔을까. 하지만 길가던 나를 잡아 가둔 이유를 지금도 도무지 알 수 없다. 내 머리카락이 길어서 잡아간 것일까? 이유만이라도 알 수 있다면…" 
      
    "광주항쟁 때도 힘겹게 살아남았는데 꼭 한 달 만에 아무 이유 없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 9개월 동안 매일 얻어맞고 인권을 철저히 유린당했던 그 이후로 열 번 이상 자살을 시도했다. 아직까지 죽지 못한 것이 원통할 따름이다." 
      
    소련 땅에서 벌어졌던 강제 추방이나 일제의 강제 징용, 인체실험 등의 인권 유린 만행은 그래도 다른 민족들에 의해 우리 민족에게 가해진 사건들이라는 점에서 이해가 된다. 그러나 삼청교육대 훈련 동안 가해진 인권 유린 행위는 같은 민족 사이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한편 삼청교육대의 피해자들은 사건이 발생한 지 25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렇다 할 피해보상이나 명예회복을 위한 정부의 조치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피해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삼청교육대 인권연합위원회 웹사이트(httpy/www.3chung.or.kr)를 통해 피해자들의 피해 사항을 계속 접수하고 있으며 피해 보상을 위한 여러 가지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아래 인용한 글은 삼청교육대 인권연합위원회에서 최근에 발표한 대정부 성명문이다. 
      
    "삼청교육대 훈련은 삼청학살 기획 주모자인 전두환 추종자들, 대한중앙노인회 회장 안필준과 같은 5공 세력에 의하여 자행된 한국판 아우슈비츠 학살사건이었습니다. 삼청교육대 인권위원회는 여러 인권단체 동지들의 투혼의 열정과 양심에 호소하여 전두환과 안필준에 의하여 자행된 삼청교육대 실종자 1만여 명에 대한 학살 및 소각사건에 대하여 진실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삼청민주인권 운동연합은 역사와 진실을 민족 앞에 올바로 세우기 원합니다. 그리하여 억울하게 개처럼 죽어간 삼청 희생자의 원혼을 뒤늦게라도 위로하게 되기 바랍니다. 삼청교육대는 역사의 위선자 그리고 역사의 이단자 전두환의 지시로 1980년 5.18 학살사건 이후 국민에게 위협감과 공갈성을 내세워 열악해진 국정과 여론 등을 무마하기 위하여 1980년 8월부터 짧게는 1개월, 길게는 7~8년간 무고한 시민 범법자로 몰아 세 워 철저히 인권을 유린했습니다. 삼청교육대 학살과 시체 소각사건은 나치의 학살과 만행에 버금가는 것이었습니다. 삼청교육대 학살과 소각사건 만행의 역사의 현장은 1980년 당시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5사단 의무대 내에 귀속된 한탄강 부근 3,000여 평입니다. 그곳에 삼청학살 사망자 사체소각처리공장을 운영하여 학살된 사체에 대한 소각처리가 이루어졌다고 당시 소위 유경종은 고백하였습니다. 이 삼청학살 사망자 사체소각처리공장에서는 하루에 적게는 30여 명에서 많게는 80여 명까지 학살된 사체를 소각처리하였습니다. 인근 마을 주만들은 소각처리된 사체의 그을린 연기가 하루 종일 전곡읍 한탄강 하늘을 희뿌옇게 물들였고 살 태우는 역겨운 냄새에 몸서리를 쳤다고 합니다. 민주화 동지 여러분! 우리는 힘을 모아 역사의 단죄와 왜곡된 역사를 바로 세우고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는 삼청교육대의 학살사건의 소각 피해자 여러 영령들과 영혼들이 언젠가는 반드시 안식을 누릴 수 있도록 진실과 정의의 수호 궐기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지난해 10월, 35년의 목회를 마치고 은퇴한 이용걸 목사(필라영생장로교회 원로목사)가 “실천적 이민목회의 철학과 교회부흥”라는 주제로 2월 20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뉴욕교협 사무실에서 목회자 세미나를 인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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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강사 우창환 장로, 이용걸 목사, 김경원 장로. 영생교회 백운영 담임목사도 세미나에 참가하여 인사했다.

     

    이용걸 목사는 △바울의 목회철학 △목회 위기관리 △레위기에서 본 목회자상 이라는 제목의 3가지 목회철학을 나누었다. 또 영생교회 부흥사례 발표를 통해 김경원 장로는 영생교회 부흥비결로 예수사랑 총동원주일 사례발표를, 우창환 장로는 전도의 방법으로 새생명운동 사례발표를 했다. 뉴저지교협도 이용걸 목사를 초청하여 같은 세미나를 5월 1일(월) 개최한다. 먼저 목회 위기관리를 두 번에 걸쳐 소개한다.

     

    - 이용걸 목사의 세미나와 성회 아멘넷 기사보기(22개) 

    - 전체 이용걸 목사에 대한 아멘넷 기사 보기(88개)

     

    목회 위기관리 ①

     

    목사는 자신을 잘 다스리는 가운데 무엇보다 감정을 잘 다스려야 한다. 목회하면서 화를 낼 수 있다. 그런데 화를 내면 결과는 어떤가? 이익이 하나도 없다. 어떤 교인은 아무개 장로가 기도하는 주일은 교회에 안 나온다. 그 장로가 화를 낸 것이 인상이 박혀서 기도하면 은혜가 안 되어서 아예 안 나온다고 한다. 목사가 아무리 감정이 날지라도 화를 내면 안된다. 화를 내고는 유익이 하나도 없다. 목사는 자기를 잘 다스려야 한다. 

     

    오래전에 버지니아에서 목사가 장로를 총으로 쏘아 죽였다. 그리고 장로가 하는 비즈니스에 가서 불을 지르는 대단한 사건이 있었다. 너무 큰 충격이었다. 장로가 그 목사를 얼마나 힘들게 했으면 그런 결정을 할까 한편으로는 이해도 되지만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어떤 목사는 너무 화가 나서 장로를 외딴 곳에 불러 오늘은 목사장로 간판 떼고 한판 붙자고 했다고 한다. 그러자 놀란 장로가 미안하다고 사과했다고 한다. 여러분은 그렇게 하지 말고 목사는  감정을 잘 다스려야 한다.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고 화가 났을 때 화를 다스리는 것이 문제이다.

     

    한 의학박사는 우리 몸에는 스트레스를 담는 통이 있어 웬만한 것을 그곳에 담는데 넘칠 때는 병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통이 차면 쓰레기를 버리듯이 통을 비워야 한다. 즉 우리안의 스트레스를 빨리 버려야 한다는 이론을 발표했다. 목사는 목회의 어려움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잘 다스려야 한다. 그리고 자기 절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린다. 

     

    목사가 어렵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 어떻게 이것을 해결해야 하는가? 디모데 후서 1:6 “그러므로 내가 그대에게 말합니다. 내가 그대에게 안수할 때 하나님이 그대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을 불일듯 되살아나게 하시오.(현대인의 성경)”을 보자. 목회자는 날마다 안수 받을 때 감격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정말 눈물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런데 그때의 감격을 바울 사도는 계속 반복하라고 말한다. 그것이 우리 목사들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이다. 목사가 믿지 않는 사람처럼 술을 마시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 않는가.

     

    목회를 할 때 1년에 15번 부흥회를 했다. 2년 전부터 부흥회 약속을 했는데 부흥회 6개월 전쯤에 일정을 확인하면 보통 1년에 2-3교회는 집회를 못한다. 그 이유는 목사가 떠나는 경우도 있고, 교회에 어려움이 새롭게 생겼기 때문이다. 이민교회가 2년을 버티는 것도 힘들다는 것을 느끼면서, 그런 상황에서 목사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이 현실이다.

     

    목사들이 교계신문을 보면 목사구인 광고를 가장 먼저 본다. 혹시 좋은 교회에 자리가 나왔는가 보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자기가 목회하는 교회에 만족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 지금 있는 교회에서 만족하고 충성하고 성실하게 섬기면 하나님이 보시고 때가 되면 하나님이 목회지를 옮겨 주신다. 그런데 우리가 옮기려고 일부러 하다 보니 섬기는 교회에 모든 힘을 쏟지 못한다. 한 모퉁이에서 목회하는데 누가 알겠느냐 하지만 다 안다. 하나님이 아시고, 적은 일에 충성하고 그릇이 되면 하나님께서 보내시니 너무 다른 교회와 다른 목회자 부러워하지 말고 내게 주신 양에게 최선을 다하라. 비록 몇 명이 안 되지만 설교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축복이다. 감사하면서 목회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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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사의 기능

     

    목사의 영적 기능은 설교와 예배와 교육과 전도이다. 목사의 목회적 기능은 심방과 상담과 돌봄과 훈련과 인관관계이다. 행정적 기능은 교회행정과 당회운영과 인사관리와 재정관리이다. 목사는 이 모든 면에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다 보니 얼마나 목회가 힘들겠는가. 의학적으로 보면 다양한 분야의 전문의사가 있다. 그렇게 본다면 목회도 설교, 행정, 심방 등 한 가지씩 전문가가 담당해야 한다. 한 분야를 담당하기도 힘든 것이 현실인데 많은 분야를 다 하려니 스트레스를 받는다. 목사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 위기가 온다. 

     

    이병욱 장로는 외과의사로서 1천명의 암환자를 수술했다. 그런데 수술후 보니 항암치료로 삶의 질만 떨어지고 결국은 거의 몇년 안에 죽는다고 한다. 장로로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암환자를 수술해서 고치려 하지 말고 예방을 시키겠다고 결심하고 예방의학자가 되었다. 그러면서 암을 이기는 5가지 방법을 이야기했는데 ①기뻐하기 ②감사하기 ③기도하기 ④잘먹기 ⑤잘자기이다. 이 5가지만 잘하면 암 예방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들에게 매일 암세포가 생기지만 하나님께서는 암세포를 잡아먹는 세포도 만들어 주셨는데, 위의 5가지를 할 때 그 세포가 활성화가 되어 암세포를 잡아먹는다고 한다.  

     

    암에 안 걸리려면 기뻐해야 하고, 눈물이 날정도로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목회자들은 모든 스트레스를 기도로 하나님께 다 맡겨야 한다. 그래서 목사는 새벽기도를 못하면 목회를 못한다. 그리고 암으로 절대 안 죽으니 잘 먹어야 한다. 그리고 잘 자야 한다. 이 5가지를 교인들에게 가르쳐 주라. 목회자들도 이런 자세를 가지고 목회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이겨야 한다.

     

    목회를 하다 보면 관계가 나쁜 사람이 전화오거나 만나자고 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이런 분들은 참 만나기 싫은 사람이다. 저도 1980년에 미국 와서 처음 간 교회의 장로가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모른다. 시간이 지나 용서는 했지만 지금도 만나기 싫은 감정이 있다.

     

    목사에게 스트레스가 누적되면 먼저 신경질적이 된다. 그러면 목사는 교인에게 스트레스를 풀지 못하니 가족에게 신경질적으로 푼다. 그래서 사모가 힘들다. 사모는 남편 목사와 교인 양쪽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저는 될 수 있으면 교회 일을 아내에게 이야기 하지 않는다. 교회 일을 가정에 가지고 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면 가정이 문제가 생긴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목회에 대한 적극성이 사라지고 대충 한다. 그리고 기쁨이 없어지고 감사도 없어진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누적되면 건강이 약해진다. 그래서 목사 중에 손을 떠는 사람이 있고 우울증이 생긴다. 목사가 교회를 떠나고 싶게 만드는 스트레스 몇 가지가 있다.

     

    교회성장 스트레스

     

    목사가 가장 많이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교회성장이다. 교회성장이 힘들다.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은 적고 나가는 사람이 많다. 교회가 성장이 안되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한 사람을 전도해서 교육을 시키면 이사 가고 다른 이유로 교회를 떠나갈 때 목사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가. 제가 목회한 35년 동안 영생교회를 떠난 사람은 1천명이상 될 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교회를 떠난다. 떠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다른 교인들과의 인간관계 때문에 떠나도 목사를 걸고넘어진다.

     

    아무리 그래도 교인이 떠난다고 하면 반드시 심방하고 축복해준다. “그동안 나 같은 사람에게 신앙지도를 받으려고 얼마나 힘들었느냐. 고맙다”하고 축복하면 두 가지 유익이 있다. 다른 교회에 가도 담임목사 욕을 안한다. 다른 하나는 다시 교회로 돌아 올 수 있다. 장로님들 가운데에서도 떠났다가 다시 돌아 온 사람이 있다. 돌아올 때는 혼자오지 않고 대부분 데리고 온다. 떠날 때 그냥 보내는 경우가 많은데 잘 보내야 한다. 축복해주면서 보내기 바란다. 

     

    한국 총신 선후배 동창생들을 만나면 사실 열 받는다. 과거에는 동창생들 중에 쟁쟁한 사람들이 미국에 왔다. 80년에 미국에 올 때 동기들이랑 부러워했다. 그런데 요즘은 반대현상이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청빙을 받아 들어가면 다 부러워한다. 시대가 바뀌었다. 요즘 한국가면 동창들이 얼마나 잘사는지 모른다. 최신형 고급차를 타고 이민목회가 얼마나 힘든가 하면서 퍼 준다. 목사는 그런 것이 비교되고 어렵다.

     

    그리고 세미나 가서 강사가 아주 그럴듯하게 이것을 하면 교회가 부흥할 것같이 이야기하면 그것에 꿈이 부풀어서 교회에 돌아와서 바꾸려 하다가 어려움을 당한다. 너무 세미나만 쫓아다니지 말고 주어진 시간에 더 심방하고 더 성경 많이 보고 더 설교준비 충실하게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다. 그래서 교회성장에 대해서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 아니라 교회성장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니 하나님이 부르실 때까지 기다리면서, 내게 맡겨주신 양에게 나에게만 주신 은사를 가지고 목회에 충성한다면 교회성장에 대한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가 받은 은사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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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가 교회부흥에 50% 영향

     

    어떤 분은 설교로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다고 한다. 신학교 다닐 때 설교학 교수였던 이성헌 목사에게서 당시에는 목회성공은 70%가 설교에 있다고 배웠다. 그런데 제가 볼 때 지금은 그렇게는 안되는 것 같다. 그러나 50%는 좌우되는 것 같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목회하는 시간의 50%를 설교에 투자해야 한다. 그리고 설교에 은사가 있는 사람이 있다. 신학생들한테 기회가 있으면 문학을 많이 하라고 한다. 문학을 한 사람은 대개 설교를 잘하고 목회를 잘한다.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설교를 잘하는 전도사는 어른을 목회해도 설교를 잘한다.

     

    설교는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교해야 한다. 설교가 어려우면 실패이다. 회중들이 듣다가 저것이 무슨 소리이지 생각한 이후부터 설교가 안들어 온다. 설교는 쉽게 해야 한다. 그래서 요한 웨슬리 같은 사람은 하녀에게 설교를 먼저 했다. 하녀가 알아들으면 되고 못알아 들으면 안된다. 그래서 신학교 교수의 설교가 은혜가 안된다고 흔히 말한다. 어렵게 하려니 은혜가 안되는 것이다. 쉽게 부담 없이 설교하라. 화장실에 가는 것도 ‘화장실’ ‘남자여자’라는 단어가 너무 부담스러워 글로 표시하지 않고 그림으로 보여준다. 부담 있는 설교를 하면 안된다. 

     

    은사를 개발하라

     

    설교에 은사가 있는 목사이면 좋고, 설교에 은사가 없다면 교회가 부흥이 안되는가? 아니다. 심방을 철저하게 해야 한다. 나는 심방이 참 중요하다고 본다. 만약 담임목사와 부목사나 갈라진다고 할 때 교인들이 누구 편에 서겠는가? 설교 잘하는 담임목사 편에 서겠는가 아니면 심방 잘하는 부목사 편에 서겠는가? 교인들은 부목사 편에 가서 선다. 부목사가 어려울 때 가서 심방했기 때문이다. 심방은 담임목사가 해야 한다.

     

    임동선 목사를 만나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의 앞머리가 하얀 것은 장로들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당회를 하다가 한 장로라 화를 내고 나가버렸다. 당회가 끝나고 임 목사가 그 장로의 집을 찾아갔다. 목사가 그렇게 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찾아갔는데 그 장로가 없었다. 기분전환을 위해 가족을 데리고 바닷가에 낚시하러 간 것이다. 낚시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니 차고 앞에 차가 하나 서 있었다. 누구 차인가 보니 임동선 목사가 차에서 자고 있었다. 장로가 돌아올 때까지 오랫동안 기다리다 잠인 든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장로가 무릎을 꿇고 “목사님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라고 사과했다.

     

    이만큼 심방이 효과가 있다. 다시는 그 장로가 임 목사를 괴롭히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 우리 목사 가운데 그런 상황이 된다면 안가던가 다른 장로님들이 보기 때문에 억지로 갔다가 없으면 잘되었다 하고 돌아 왔을 것이다. 하지만 임동선 목사는 밤새도록 장로가 돌아올 때까지 차에서 자면서 까지 기다렸다. 그것이 결국은 장로의 무릎을 꿇게 했다. 그러니 심방을 잘해도 목회에 성공할 수 있다.

     

    행정과 교육을 잘해도 목회성공이 가능하다. 누구라 이야기를 안 하겠지만 설교 잘한다는 말은 못 들었어도 행정과 교육이 능해 그 교회는 성장했다. 워싱톤DC 지역에 교회가 분쟁나면 교인들이 이원상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로 간다. 고 이원상 목사가 설교를 잘한다는 말은 없다. 그러나 입을 가진 사람이면 이원상 목사가 “훌륭한 사람이다. 진실한 사람이다. 인격이 훌륭하다”라고 다 이야기한다. 그러니 무엇이든지 자기가 받은 은사로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다. 그래서 내가 받은 은사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목회 위기관리 2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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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멘넷 뉴스(USAamen.net)

    트럼프의 반 동성애 정책 본격 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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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럼프 정부가 트랜스젠더(성전환자) 학생들의 학교 내 화장실 권리보호 지침을 폐기한다. 트랜스젠더 학생 화장실 권리보호 지침은 전임 오바마 정부에서 성전환 학생이 자신의 성 정체성에 맞게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한 조치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침 폐기를 승인했으며, 법무부와 교육부는 일선 학교에 관련 서한을 발송하여 2월 21일부터 적용된다. 이에 따라 친동성애자 정책을 펼쳐온 오바마와는 달리 반동성애 견해를 밝혀온 트럼프 대통령의 다음 행보가 관심을 끌고 있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창 46) 형통만이 축복일까요?

      [창 46: 1-4]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발행하여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 아비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니,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시고 불러 가라사대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

      야곱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찾아 이제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 아들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다니, 이 극심한 기근에서 자신과 모든 식솔들을 건져낼 막강한 실력자가 되어 있다니 꿈만 같았을 것입니다. 야곱은 모든 소유와 식솔들을 이끌고 출발하여 아브라함부터 살아왔던 브엘세바에 이르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립니다. 그 밤에 하나님께서는 이상중에 야곱에게 나타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애굽에 내려가시겠고 먼 훗날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너의 눈을 감길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야곱의 일생과 그 마음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싶습니다. 야곱은 차자(次子)였습니다. 형 에서가 장자(長子)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의 장자권을 샀고 염소고기와 털로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형 에서를 피하여 도망하여 외사촌 라반의 집에서 뼈 빠지는 고생을 하였고, 네 아내로부터 열 두 아들을 얻었으나 외삼촌과 외사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형 에서가 온다는 두려움에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하였으며, 세겜에 주저앉았다가 엄청난 일을 당하였고, 아버지의 집이 가까운 베들레헴 길가에서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잃었고, 다음에는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었고 지금까지 한탄과 아픔 속에 세월을 보내었으며 다시 극심한 기근을 당하였습니다. 어쩌면 130세가 된 지금까지 그의 일생은 고난과 아픔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열 두 방백을 낳았고 번성하였습니다. 그 동안 이삭은 에서와 이삭 둘만 얻었을 뿐입니다. 에서는 열 한 족장을 낳았고 유력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동안 야곱은 외삼촌 집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네 아내로부터 열 두 아들을 얻기는 했지만 7년의 수고를 수일처럼 여겼던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잃었고 또 요셉을 잃은 아픔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과연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기편이시고 자기를 지키시고 사랑하신다고 확실히 믿었을까요? 혹시 형이 허기진 틈을 타서 팥죽으로 장자권을 사고 염소고기와 염소털로 눈이 안 보이는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그 야비한 사기행위를 하나님이 과연 용서하셨을까 하는 의구심으로 불안해하고 의심하지는 않았을까요? 어쩌면 자신이 일평생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던 것이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시거나 버리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요?

      하나님이 택하시고 사랑하신다고 해서 형통과 번영이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마엘이 번성하고 에서가 형통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도우시고 그들을 택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이미 야곱을 택하셨고 야곱의 일평생 야곱을 떠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일평생은 험한 세월, 나그네길이었습니다.

      형통만 좋아하지 마십시오. 야곱의 일생을 보면 어쩌면 형통은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저주요 고난이야말로 죽자 사자 하나님을 붙잡게 만든 축복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당신의 나그네길은 어떤가요? 고난 속에서 하나님만 붙잡는 축복을 누리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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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파키스탄 한국대사관'은 지난 2009년 3월 20일 '사기결혼'에 대해 공지하며 "최근 한국에 체류하는 파키스탄인들이 한국 여성들과 사기결혼을 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어, 특별한 주의가 요망되고 있다"고 했다. 파키스탄인들은 산업연수생(일정기간 기술연수후 취업) 자격으로 입국하고 불법으로 체류하고 있다고 한다.

       

       

      "파키스탄 이슬람 호적법은 아내를 4명까지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처·자식이 있는 파키스탄 노동자는 기혼임을 숨기고 한국인(여성)을 유혹, 결혼하려 합니다. 이들은 서류상 미혼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위조하여 제시하는 방법으로 사기결혼 하는 사례가 많이 있습니다. ... 이들은 취업 기간이 끝난 후에도 귀국하지 아니하고 불법체류하면서 우리 국민을 대상으로 사기를 치거나 위장결혼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파키스탄 노동자와 결혼한 우리 국민들이 시집 방문 후 비참한 가정 사정을 목격하거나 남편에게 처·자식이 있음을 알고 후회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우리 국민이 이혼하고자 해도 남편이 동의하지 않아 정신병자가 되거나, 매를 맞는다고 울면서 귀국시켜 달라고 대사관이나 동포들에게 하소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2015년 6월 27일에 '이슬람 바로알기' 강연을 하면서 다문화 학생들과 나눈 간담회 내용을 전한다. 강연자는 어떻게 어려운 재정국가에서 많은 국비장학생이 나올 수 있는지 질문했다. 대답은 간단했다. 그것은 쉽게 비자를 받기 위해 기록하는 "서류를 쓴 것일 뿐"이고 원래는 이슬람 포교단체인 '자카트'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현지 여성과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6천만원이 더 나옵니다"라고 대답했다.

      노니 다르위시는 이슬람의 샤리아적 결혼관을 상세히 설명한다. 샤리아 결혼이란 가족들 사이의 법적·금전적 계약이다. 계약은 보통 신부의 집에서 이뤄진다. 신부는 격리된 방에서 기다리고, 정부 관리 앞에서 신랑이 계약서에 서명하면 이어서 신부가 서명한다. 그 계약서에 기록된 것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슬람 샤리아식 결혼을 마친 후 신부가 떠날 무렵에는 누군가가 신부의 처녀성을 증명하는 피 묻은 흰 천을 흔들며 나온다. 신부의 처녀성 증명은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공개한다. 모든 전통 이집트 결혼식은 처녀성 검사를 한다. 처녀성을 잃은 여성은 살해당할 수도 있다. 교육받은 층에서는 더 이상 그 검사를 공개적으로 하지 않는다고 한다.

      위와 같이 이슬람식 결혼의 의미는 매우 독특하다. 여성의 몸 전체를 성(sex)으로 대하는 무슬림 남성들은 결혼 비용으로 반드시 신부의 몸값을 지불해야 한다. 신부 몸값(우주루, ujur, 품삯)을 이집트에서는 메흐르(mahr)라고 한다. 메흐르는 여성과 즐기는 대가로 여성에게 전달하는 돈을 의미하는 전문용어이다.

      샤리아식 일부다처제 결혼은 Sura 4:3에 근거한다: "만약 너희가 고아들을 (과부들을) 공정하게 대처하여 줄 수 있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면 좋은 여성과 결혼하라. 두 번 또는 세 번 또는 네 번도 좋으니라. 그러나 그녀들에게 공평을 베풀어 줄 수 없다는 두려움이 있다면 한 여성이거나 너희 오른 손이 소유한 것이거늘 그것이 너희를 부정으로부터 보호하여주는 보다 적합한 것이라."

      이슬람 샤리아식 결혼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1. 법원에 기록되는 결혼

      신부들을 네 명까지 둘 수 있고 위와 같은 결혼식 절차를 밟는다. 필자는 UAE에서 11명의 아내를 국내외에 둔 한 경찰관의 아버지 이야기를 들었다. 이와 같이 많은 부인을 둘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로는 13명의 정식 부인을 두었던 교조 무힘마드의 본을 따르는 것이다.

      2. 일시적인 결혼

      이는 Sura 4:24에 근거를 둔 결혼이다. "... 간음이 아닌 합법적인 결혼을 원할 경우 지참금을 지불해야 되나니 너희가 그들과 결혼함으로서 욕망을 추구했다면 그녀들에게 지참금을 줄 것이라 그 의무가 행해진 후에는 쌍방의 합의에 의한 것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죄악이 아니거늘 실로 하나님은 만사형통 하심이라." 이 일시적인 결혼은 비록 꾸란이 허락 할지라도 수니파에 의해 엄격하게 거절된다고 한다. 그러나 시아파에서는 이 권리를 사용하고, 한 남자와 한 여자는 일정한 시간 동안 결혼 할 수 있다.

      3. 노예와의 결혼

      위 꾸란 구절 4:3에 "너희 오른손이 소유한 것"이란 개념이 나온다. 이는 보통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으로써 과부들이나 10대 소녀들이며, 물건과 별 다름이 없다. 이 여성들과는 결혼을 하든지 안하든지 이들의 포주가 되든지 간에 무한대로 자유롭다. Sura 24:33 "... 현세의 이익을 얻으려 하녀들에게 간음행위를 강요하지 말라. 그들은 순결을 지키고자 하니라. 만일 그들에게 강요하는 자가 있어 강요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녀에게 관용과 자비를 베푸시느니라".

      안타깝게도 지금도 우리는 수단의 핍박받는 비무슬림 노예여성들과, UAE에서 고통 받고 있는 필리핀 가정부들에 관해서 이런 이야기들을 듣는다. 진 세손(Jean Sasson)이 지은 <술타나>라는 번역서가 금년에 문학세계사를 통해 출판되었다.

      책의 내용은 1983년 사우디 파이잘 국왕 전문병원에서 알게 된 사우디 공주가 겪은 실화이다. 이 책에는 해외 취업 목적으로 리야드에 하녀로 지원해 온 여성들이 비밀리에 당하는 신체적 폭력과 성폭력에 관해서 기록되어 있다. 한 필리핀 하녀는 본래 두 아들의 性 대상으로 고용되었는데 아버지가 먼저 강간했고, 어떤 인도여성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강간을 당했다. 그렇게 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모든 이교도들이 창녀라는 것이다.

      4. 아내들의 교환

      아내 교환의 근거 역시 꾸란에 의존하여 행한다. Sura 4:20: "만일 너희가 아내를 다른 아내로 다시 얻으려 할 때 너희가 그녀에게 준 금액 가운데서 조금도 가져올 수 없노라. 너희는 그것을 부정하게 취득하려 하느뇨 그것은 분명한 죄악이라". 아내는 언제든지 다른 아내로 대체될 수 있다.

      아내 교환 건에 관해 꾸란은 간통 개념이 없고, 다만 아내를 바꾸면서 탐내는 지참금 착취 죄만 거론하고 있다. Sura 66:5은 무함마드가 (불편스러운 아내들과) 이혼한다 해도 알라가 그들보다 훌륭한 아내들로 대체해 주신다는 뜻을 묘사하고 있다. "그가 너희와 이혼한다 해도 주님께서는 너희보다 더 나은 부인들로 너희 자리를 대체하여 주시니 그녀들은 보다 순종하고 믿음에 충실하며 헌신하고 회개하며 겸손하고 믿음을 위해 이주하며 단식하는 기혼의 여성이나 미혼 여성이라".

      샤리아의 결혼 계약서는 결코 영구적인 언약이 아니다. 남편이 일방적으로 이혼을 선포하면 이혼(talaq)이 된다. 남편이 두 증인 앞에서 "나는 당신과 이혼한다!"고 세 번만 말하면 이혼이 성립되며, 이혼권은 남자들에게만 있다. 꾸란은 한 무슬림 남성의 한 아내와 두 번 이혼할 수 있고 그녀와 두 번 재혼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만일 그 남성이 그녀와 세 번째로 이혼 했다면 그녀를 다시 데려올 수 없다. 만일 그가 그녀를 다시 데려오려면 그 이혼녀가 다른 남자와 일정기간 동안 결혼 했다가 그와 이혼 한 후에야 다시 데려올 수 있다고 지시한다(Sura 2:229-230).

      이와 같이 여성은 무슬림 남성에게 하나의 거래물이고 장난감 같은 물건이다. 그녀를 하나의 영혼과 희망과 기대를 가진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슬림 아내들에게는 항상 두려움과 불신이 따른다. 그러나 모든 무슬림 남성들이 그렇게 살지는 않는다. 꾸란과 샤리아보다 더 의롭게 사는 무슬림들도 많다.

      위와 같이 꾸란은 '일시적 결혼'과 '아내 바꿈'이라는 상식적으로 무서운 간통죄들을 합법적인 결혼으로 만들어서 영원히 간음죄를 제거하였다. 그리고 일부다처제의 의미는 아내가 언제든지 다른 아내로 대체될 수 있다는 것이며(Sura 66:5) 계속적인 간음죄를 종교법으로 인가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무슬림 여권 운동은 일어나지 못한다. 무슬림 여성들이 샤리아에 대항하는 것은 가족을 대적하고 남성을 대적하고 정부를 대적하는 것이며, 그리고 최악의 경우 알라와 이슬람 그 자체를 대적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서방의 무슬림 여권운동가들이 "무슬림 여성들에 대한 종교법을 종식시키고 평등한 대우를 하라"고 공개적으로 과감하게 요구하면 대부분 '파트와'의 희생자가 되어 배척과 조롱을 받을 분만 아니라, '배교자'로 칭할 것이다.

      이슬람 대처 방안과 결론

      폭력적인 지하드와 비무슬림 증오행동을 부추기는 모스크와 이슬람 학교의 선동을 경험한 샤피이학파 샤리아의 통치를 경험한 노니 다르위시가 미국과 서구의 이슬람화의 초기 상황을 지켜보며 그의 저서에 옮긴 '미국국제종교자유위원회(The U.S. Commission on International Religious Freedom)'의 보고서를 필자도 '폭력적인 지하드의 가르침에 대한 온건한 대책'의 한 샘플로 여기에 옮겨 적는다.

      "2008년 6월 11일 미국 국제종교자유위원회(The U.S. Commission on International Religious Freedom)는 알렉산드리아와 버지니아에 있는 사우디 이슬람 학교가 '국제 인권규정에 어긋나며 극단적인 문제를 야기하는 구절들'이 포함된 교과서들을 사용한다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 학교에서 사용되는 교과서들은 다른 종교에 대해 폭력을 선동하고 불관용을 부추기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그 학교의 1999학년도 졸업생 대표인 아흐메드 오마르 아부 알리(Ahmed Omar Abu Ali)는 알카에다에 가입했고 조지 W. 부시 대통령 아살을 모의한 혐의로 2005년에 유죄가 선포됐다.

      그 위원회는 가장 문제가 많은 교과서들을 직접 가져온 것이 아니며 오히려 꾸란과 그 밖의 이슬람 문헌들에 대한 사우디 정부의 특별한 해석이 포함된 구절들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했다. 그 교과서들이 꾸란에서 직접 가져온 것이 아니고, 오히려 사우디 정부의 해석을 반영한다는 주장은 그 위원회가 사우디 정부보다 꾸란의 진정한 의미를 잘 이해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위원회에 따르면 다음 두 가지 예에서 볼 수 있듯 일부 구절들은 분명히 독자들로 하여금 폭력적인 행위를 하도록 강력히 권하고 있다."

      12학년 타프시르(tafsir, 꾸란 해석) 교과서에서, 저자는 배교자(이슬람에서 개종한자), 간통자, 또는 고의적으로 믿는 자를 살해한 자를 무슬림이 살해하는 것을 허용된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무함마드: 그에게 찬미가 있기를)는 정당한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금지한다." 정당한 이유란 "이슬람을 믿은 다음에 배교, 간통, 믿는 자를 고의로 살해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12학년 타우히드(Tawhid, 유일신주의) 교과서는 "주요 다신교도들을 대상으로 한 살해와 재물약탈은 허용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이슬람 법률용어에서 무슬림이 죄가 있다고 생각되는 어떤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취해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우디 이슬람 해석에서 '주된 다신숭배자들'은 시아파와 수피 무슬림들이 포함되는데, 수피 무슬림들은 기독교인들, 유대인들 그리고 불교인들과 마친가지로 성인들의 중재를 구하는 기도를 하러 시전을 방문한다.

      위 보고서는 미국에서 이슬람 종교교육이 이루어지는 모스크와 이슬람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들을 알게 되면, 우리가 방심하고 방관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

      노니 다르위시는 그의 책에서 하나의 강대국이었고 기독교국이던 이집트가 어떻게 이슬람화됐는지 잘 진술했을 뿐 아니라, 무슬림들이 그들의 교육기관에서 청소년들에게 비무슬림들을 향해 무엇을 선동하고 분노하게 하고 충동을 느끼게 하는지 알게 했다. 이제 이슬람화 초기단계에 처한 한국과 한국교회는 그들의 타끼야 평화선전에 방심하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최근 한국에 외래 종교인 이슬람이 들어와 그들의 모스크를 짓고, 차세대 무슬림들을 위한 학교들을 짓고, 곳곳에 기도처를 요구하고, 할랄음식을 요구하고 있다. 또 이슬람 자금 대여, 무슬림들의 사법부 시리즈 강연, 문화선교, 매스컴 선교, 배꼽춤 강습 원조, 이슬람 국가들과의 친선과 친교, 무함마드 생일 축하 피켓시위, IS 살해대상자명단 통보, 장기체류용 결혼, 일부다처제 결혼, 그 피해사례들, 수 배로 늘어난 이슬람 지역 노무자들의 강간죄 통계 숫자 등, 최근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모든 일들이 한국을 이슬람화하고, 한국에 샤리아를 입법화하려는 자료들이 될 것이다.

      우리는 무슬림의 국회, 사법계, 정치계, 교육계, 경제계 등의 고지점령 진출 목적을 간파하고, 그들과 그들의 법이 우리의 통치자로 군림하지 못하도록 대비해야 할 것이다. 무슬림들이 한국을 이슬람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타끼야 평화종교 선전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에 대처해야 한다.

      한국에 샤리아가 입법화되는 날부터, 한국 여성들과 기독교인들에게 대재앙이 임한다는 사실도 깨우쳐야 한다. 우리는 구미 대륙에서 이미 경험한 관용의 결과를 거울삼아, 다문화주의를 이용하는 무슬림들의 배후 전략을 깨닫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 방향감각 없는 얄팍한 다문화주의적 동정과 인권주의를 한국의 이슬람화를 위해 사정 없이 이용하고 있는 무슬림들의 행태가 구미 대륙의 형편과 병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도 그와 같이 되지 않도록 대비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종교다원주와 문화다원주의에 심취하고 안일할 때, 이슬람은 그들의 역사 시종을 불신자와의 전쟁과 세계 이슬람화를 위한 교육으로 '성전' 준비를 해 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금이라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과거 기독교의 땅 터키와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교회들이 지금 어떻게 됐고,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박해를 견디며 사는지를 관찰하여, 그런 사태가 오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책을 세워야 한다.

      우리는 아프카니스탄의 영혼을 사랑하고 선을 행한 사람들이 겪었던 역사적 사실을 보았다. 지금도 이슬람권에 가서 선교하는 선교사들의 삶이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참고하면 좋겠다. 한국교회가 세계를 위한 선교 교회로 지탱하려면, 현대의 안일주의, 무지주의, 쾌락주의적 삶은 차세대를 위해 무서운 죄악이 될 것이다. 현세대에 사는 우리로 인하여 차세대에 이러한 일어나게 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타끼야 정책을 잘 알고 경계해야 한다. 문제는 타끼야의 원인이 되는 꾸란 자체의 내용을 교회는 물론 일반적으로 무슬림 자신들도 잘 모른다는 것이다. 꾸란과 이슬람교는 모르는 것에 대한 질문이 절대 금지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슬림들은 꾸란과 샤리아의 비인간성, 잔인성, 야만성 등을 보지 못한다.

      그들이 알아야 하는 종교와 율법에 관한 부정적인 문제점들도 결코 그들의 경전이나 샤리아에서 찾지 않는다. 대신 오직 외부에서 모든 잘못을 찾아낼 뿐이다. 또 모든 무슬림들은 샤리아를 만든 자를 '알라'라고 믿기 때문에, 오직 복종만 한다. 때문에 판단력이 정지됐다. 오직 복종만 허락되는 무슬림에게는 결정권이 없고, 샤리아와 무함마드의 전통에 완전히 통제받는다. 무하마드는 "내게 복종하는 자는 알라에게 복종하는 자라"고 했다.

      우리는 꾸란이 주장하는 불신자와 개종자 살해 명령과 세계 정복 명령을 알아야 하고 사법계에 접근하는 무슬림들의 숨은 계획을 간파하고, 한국의 미래를 이슬람화와 샤리아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야 한다.

      우리는 이슬람과 샤리아가 한국 고지를 점령하여 한국의 주인 종교가 되도록 허락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국교회는 차세대 성도들의 영혼이 노략질 당하지 않도록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 파수하고 온 세상에 전달할 수 있는 교회로 머물러 있도록 파수해야 한다. 우리 교회가 안일하게 머물러 이슬람의 정복을 앉아서 쳐다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한국 정부는 더 세심한 주의력으로 이민 정책을 세우고 난민들을 수용할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현재 국정원에서 입국해서는 안 될 블랙리스트에 있는 사람들을 잘 막아주고 있어 감사하다. 우리는 모든 비무슬림 지역을 "전쟁의 집"으로 간주하고 '성전'시 행하는 고도의 타끼야(위장) 전술에 순진하게 속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무슬림들은 비이슬람 세계가 존재하지 않도록 까지 싸우는 사람들이다. 마치 북한이 통일준비와 전투훈련으로 70년 간 경직된 역사를 이뤄온 것 같이, 무슬림들 역시 오직 알라를 기쁘게 하려고 1,4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비무슬림들과 싸우고 죽고 죽이며 경직된 삶을 살아왔다.

      그들의 전술과 전쟁의 삶은 대단히 노련한 것이다. 위장과 거짓에 노련하고, 양심에 가책을 받지 않고 지하드와 살해를 해 왔고, 합법화한 간통죄와 일부다처제, 여성차별로 무수한 여인들의 영혼을 죽이고, 지하드의 노획물로써 이방 여인을 강간하고, 아내를 바꾸며, 무슬림 남자들은 엄청난 육적 쾌락을 누리는 문화와 전통을 남겼다.

      노무자로 외국에 입국한 남자 무슬림들은 외부 문화를 이해할 수 없다. 노출이 심한 현대 여인들은 다 창녀로 보이고 또 그렇게 대해주는 사람도 상당히 있다. 그러나 이들도 역시 지하드의 피해자들이고 꾸란과 샤리아의 피해자들이다. 불행히도 이들이 무슬림으로 태어났고 그렇게 교육받았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제 우리 한국으로 노무자들과 이민자들과 난민들이 몰려오고 있다. 이들이 알라에게 충성하고 속히 이슬람 세계가 이루어지도록 한국에서도 1,400년간 연습해 온 전투적인 삶을 살 것 아니겠는가? 한국은 이들을 위해, 그리고 자국민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한국 정부는 국가보안 차원에서 이들을 얼마나 이해하고 준비하고 이들을 맞아들이는가?

      탈북민들을 위해서는 하나원이 준비되어 있다. 무슬림들을 위해서는 무엇이 있는가? 독일 정부는 필자가 유학생활을 할 때, 현지인들과 결혼한 간호사들이 10년이 돼야 비로소 시민권을 획득하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했어도 이제 독일 정부는 2050년 독일이 이슬람국이 된다고 발표했다.

      우리나라가 샤리아국이 되지 않고 중동이나 북부아프리카 같은 이슬람국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이민 정책을 엄격히 마련하고 입국 무슬림들에게 일부다처제 국제결혼 지원자 추방, 남녀 성의 동등성과 인격의 존귀성(남녀는 하나님의 형상)에 동의, 하나원 훈련 같은 현지 적응훈련 기간 엄수, 성범죄자 추방과 재입국 금지에 동의, 샤리아법 입법화 거부, 이슬람 선교 행위자 추방에 동의 등을 이민지원 양식서에 추가하여 서약을 받도록 해야 한다.

      한국 정부는 이러한 양식 서류를 빈틈없이 준비하고, 한국교회는 열심히 기도하며 오직 삼위일체 한 분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의 왕이 되시고 우리 민족과 교회를 보존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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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병 3기까지 앓았던 나는 가슴을 칼로 후벼내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면서 순간 정신을 잃었다. 숨을 쉴 수 없었다. 나는 정신이 몽롱해지며 '나도 이렇게 매 맞아 죽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나를 구타하던 소대장은 보이지 않고 주위에 사람들이 둥그렇게 나를 둘러싸고 근심스런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이 사람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하네." 
        
      가슴 명치를 졸지에 얻어맞은 충격으로 인해 나는 얼마 동안 숨을 쉬지 못하고 그렇게 혼절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 나는 그런 일련의 일들이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영적 싸움이었다. 삼청교육대라는 곳에서 악의 세력과 선한 세력 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영적 전쟁이 배후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앱 6:12). 
        
      지옥 훈련이 끝난 후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부대에 도착하던 첫날과 같이 400여 명의 훈련원들을 연병장에 도열시켰다. 그리고 나서 중대장이 단위에 서서 훈련을 제대로 마쳐서 사회로 귀환하게 될 사람들의 명단과 제2차로 훈련을 더 받게 될 사람들의 명단을 호명하였다. 
        
      나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대표기도를 열심히 했기 때문인지 사단장이 수여하는 표창장까지 받으면서 삼청교육대를 떠날 수 있었다. 
        
      자신의 이름이 불려진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하고 기뻐했다. 이제 이 지옥 같은 훈련소에서 빠져 나갈 수 있다는 기쁨 때문에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들 가운데 100여 명 정도는 2차 훈련소로 보내졌다. 순화교육 기간 동안 성적이 좋지 않다는 이유였다. 천국과 지옥이 갈라지는 순간이었다. 
        
      아니 이곳에서 무엇을 잘하고 잘못한다고 성적을 나눌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죽기 아니면 살기로 젖먹던 힘까지 다해서, 또 구타당하기 싫어서 훈련에 임했을 뿐이었는데.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었고, 또다시 지옥으로 돌아가게 되어 절망 가운데 빠져 있는 나머지 동료들에게 너무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날 연병장에서 별 3개를 단 사단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또 한 번 일장 연설을 해댔다. 
        
      "여러분들은 사회에 적응하는 정신, 육체 훈련을 받았다. 앞으로 다시는 사회의 질서를 거슬리는 범법행위를 하지 말고 건전한 사회인이 되길 바란다. 전두환 대통령 각하의 크신 은혜가 있어서 대부분의 여러분들은 오늘을 기해서 사회로 환원하게 되었다. 부디 나라와 민족을 위해 근면, 성실한 삶을 살기 바란다." 
        
      이제 자유의 몸이 된 사람들 사이에서 수군 수군하는 술렁임이 있었다. 아니 전두환이라는 괴물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런 고생을 했는데, 그 놈의 은혜라니 …. 아무리 권력 앞에 모든 것이 충성을 서약하고 무릎을 꿇어야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시대라고 해도 마음 속에서는 무언의 분노가 용솟음쳤다. 
        
      우리를 태우고 왔던 버스는 또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똑같은 장소에 우리를 던져 놓았다. 구치소에 도착하자 관리들이 뛰어나와 우리들을 환영(?)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우리도 어쩔 수 없었다. 아직까지 계엄령이 발효되고 있는 시기이니 몸조심하고 다시는 잡혀 오는 일이 없게 되길 바란다. 그리고 당신들은 아직 블랙리스트에 이름들이 올라 있으니 앞으로 6개월 동안은 어디로 이동할 때 반드시 거주지를 경찰서에 신고해야 한다." 
        
      이거야말로 병 주고 약 주는 일이 아닌가. 무고한 사람들을 무조건 잡아 구치소에 보내고 강제로 사회적응훈련이라는 것을 받게 하고서는 나는 어찌할 수 없었다고 오리발을 내미는 모습이라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인생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겨 놓고 "나는 어찌 할 수 없었다"라고 변명을 한다니 도대체 말이 된단 말인가. 
        
      나는 그래도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함께 훈련을 받던 사람들 가운데 삼분의 일 정도는 계속 군 부대에 남아 강제 노동에 투입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들 가운데는 군부대를 거쳐 청송보호감호소까지 만 3년 이상 삼청교육대 훈련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강제로 3년 동안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던 사람들이 사회로 돌아왔을 때 사회는 오히려 이들을 철저히 배척했다. 소위 말하는 사회적응훈련을 다 마쳤으니까 이제는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삼청교육대에 강제로 끌려가기 전보다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적응하기 힘들게 되었던 것이 었다. 또한 나를 포함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정과 사업체가 삼청교육대 훈련으로 인해 박살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곳에 강제로 끌려갔다 온 사람들은 비록 가정이 유지되고 있었다고 해도 삼청교육대의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가정을 이룰 수가 없었다. 
        
      삼청교육대는 애매한 시민들의 권리와 인권을 완전히 묵살하고 권력의 칼을 마음대로 휘둘렀던 전두환 정권의 상징이었다. 
        
      삼청교육대 지옥훈련 후유증은 내 인생 전체에서 지난 25년을 사로잡고 있었다. 비록 죽거나 불구자가 되어서 나오지 않은 사실만으로도 감사했지만 그곳에서 나온 후로 세상이 전과 같지 않았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려웠과 그저 혼자만 있고 싶었다. 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대인기피증이 생겼다. 
        
      가장 먼저 집으로 달려가 보니 아내와 두 살 난 아들이 온데 간데없이 사라졌다. 이웃 사람들에게 수소문을 해서 알아보니 아내는 아이를 셋째 형님 집에 맡기고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처음에는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들어 어떻게든지 도망간 여편네를 찾아서 분풀이를 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지나 면서 그런 아내가 이해되었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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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은 성전이시다 / 샘 스톰스

       

       

      내가 인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예들 중 하나를 들면, 많은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참된 성전이시며 구약 시대 성전의 물리적 구조가 예수님 안에서 완벽하게 구현된다고 단언한다. 그런데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종말에 나타날 사건들과 더불어서 또 하나의(제3의) 물리적 성전이 세워지는 것을 승인하고 감독하시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해석 원리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기 위해 이 주제를 잠시 검토하겠다.

       

      이 중대한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은 구약 성경의 서사(narrative)인데,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광휘, 하나님의 장엄하고 빛나는 영광이 자기 백성 중에서 가시화되는 광경, 곧 하나님의 '쉐키나'를 목격한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광휘와 영광, 즉 '쉐키나'가 없다면 이스라엘 자손은 이방 세계를 특징짓는 어둠 속에 있었을 것이다. 솔로몬 성전이 건축되기 전에, 하나님은 모세가 지은 장막 곧 성막에서 자기 영광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오시고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고 자기 백성을 더불어 만나시려는 곳이 바로 성막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게 할지니라"(출25:8)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곳에서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섰고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셨다"(출33:9).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한"(출40:34) 곳이 바로 성막이었다.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었다(참고. 레9:23; 민14:10).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머무는 동안 성막에 적용된 원리는 솔로몬 성전에 훨씬 잘 적용된다.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그 처소, 곧 본전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로 메어 들였을 때"(대하5:7),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는데, 왜냐하면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했기 때문"(대하5:14).

       

      바로 이런 예비적 배경을 바탕으로, 우리는 사도 요한의 다음과 같은 놀라운 선포를 듣는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거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스케누)는 문자적으로 "장막을 치다" 또는 "천막에 거하다"라는 뜻인데,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모세가 지은 천막 곧 이동식 성막과 최종적으로 솔로몬 성전을 처소로 삼았던 구약 성경을 다시 상기시키는 것이 분명하다.

       

      사도 요한이 말하려는 요지는 하나님이 이제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되 더 인격적인 방식으로, 곧 육신이 되신 말씀으로(예수님 안에서!) 그렇게 하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말씀이신 나사렛 사람 예수는 하나님의 참되고 궁극적인 '쉐키나' 영광, 곧 자기 백성 중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철저하고 완전하게 나타내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거처는 자기 아들의 육신이다! 지금 성육신하신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로 구체화된 대단히 탁월한 영광에 비하면, 과거에 신비로운 구름으로 갈진 천막/성막/성전 안에 간직되었던 그 영광은 단지 예시적으로 깜빡거리는 램프의 불빛 불과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참고. 골1:19).

       

      하나님은 더 이상 사람의 손으로 지은 천막이나 장막에 거하시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시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스럽고 분명한 현존은 대리석과 황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성전에서 발견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 예수님은 인간의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며, 하나님이 그 안에서 최종적으로 완전하게 자기 장막을 치시는 분이다.

       

      요지는 옛 언약에 속한 성전이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모형 또는 전조였다는 것이다(모형론에 대해서는 아래서 좀 더 살펴볼 것이다). 성전은 바로 모세 율법이 보관된 장소였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그 율법의 성취이시다. 성전은 계시와 관계의 장소였는데, 하나님은 성전에서 자기 백성과 함께 만나시고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과 만난다. 성전은 제사의 장소였는데, 죄 용서는 성전에서 이루어졌다. 이제 우리는 죄 용서를 위해 예수님께 나아간다(막2:1-12을 보라). 이스라엘 자손은 예루살렘에 세워진 성전에서 예배하고 절기를 기념했다. 오늘날 우리는 지리적 장소와 상관없이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참고. 요4:20-26).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만나고 하나님과 이야기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사람의 손으로 지은 특정 건물이나 장막이나 구조물로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간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성전이다! 게리 버지(Garry M. Burge)의 다음 진술은 옳다. "신성한 공간은 더 이상 어떤 장소가 아니라 한 사람에게 있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교회인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거하기를 기뻐하시는 성전으로 여겨진다. 여호와 하나님의 '쉐키나'는 이제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영구적으로 능력 있게 깃들인다. 바울은 에베소의 신자들에게 쓴 편지에서 이 사실을 설명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잇돌이라고 부르는데, "그의 안에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엡2:21-22).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처소는 "예루살렘에 세워진 문자적인 성전도 아니고 단순히 하늘도 아니며, 소아시아에 있는 이방인 신자들이 일부를 이루는 교회다."

       

      이 성전의 설립은 계속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프로젝트이며 지속적인 과정이다(또한 엡4:15-16을 보라). 비록 지속적인 "성장'을 경험하는 "건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될 수도 있지만, 바울은 우리가 교회를 유기체로 이해하기를 원하는 것이 분명하다. 베드로도 다소 역설적인 어법을 사용해서 신자들을 "살아 있는 돌들"(벧전2:5)이라고 언급한다는 점을 상기하라!

       

      바울은 이 진리를 근거로 고린도의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다시 호소한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 바울은 성적 순결을 요청하는 대목에서도 다음과 같이 거듭 호소한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또한 이 진리를 생생하게 묘사하는 벧전2:4-10을 보라).

       

      우리는 이 모든 논증을 통해 고린도후서 6장 16절 후반부에 나타난 바울의 최종 선포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바울은 이런 논지를 보강하기 위해 장차 올 성전에 대해 예언한 구약 성경의 여러 본문(레26:11-12; 사52:11; 겔11;17, 20:34, 41; 삼하7:14)을 종합하는데, 그중 하나인 에스겔 37장 26-27절에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선포하신다.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게 번성하게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에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내 처소가 그들 가운데에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거두절미하고 요지를 말하겠다. 하나님은 자신이 영원히 거하실 종말론적 성전에 대한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시작하여 부활에서 완성함으로써 성취하고 계신데, 거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점진적으로 세우는 일이 포함된다.

       

      그러면 예루살렘에 세워진 문자적이고 물리적인 성전은 어떻게 될까?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이 정하신 구속 목적에서 영적인 중요성을 상실했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우리는 마태복음 23-24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검토해야 한다(나는 이어지는 두 장에서 이에 대해 많이 언급할 것이다).

       

      예수님이 유대 백성에 대해 심판하실 때, 성전 건물들은 예수님이 감람산으로 가기 위해 떠나시는 그 순간에 물리적.영적 측면에서 모두 주님께 버림받는다. 예수님은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23:38)고 말씀하신다. 그리하여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기를 그친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을 때"(마27:51), 하나님은 성전을 자기 현존으로 축복하거나 성전을 이가봇(영광이 떠났다)이 아닌 다른 것으로 인정하기를 영원히 그만두신다.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과 성전에 극적으로 들어가신 것(마21:1-7. 소위 "개선 입성식")과 똑같이 극적으로 예루살렘과 성전을 떠나신다. 한 때 웅장하고 영화로웠던 이 하나님의 집은 이제 이방인들에게 완전히 넘겨진다("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너희에게 버려진 바 되리라"[마23:38]. 강조는 필자의 것임). 에스겔이 본 환상에서 성전을 떠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에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진다(겔10:18-19, 11:22-23을 보라). 주후 70년에 성전이 로마군에 의해 물리적으로 최종 파괴되는데, 이로써 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영적인 유기가 외형적으로 완결된다. 이제 예수님은 성전을 떠나서 결코 되돌아가시지 않는다. 참으로 성전을 떠나 감람산에 앉으시는(마24:3) 예수님의 행동은 에스겔 11장 23절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읍 가운데에서부터 올라가 성읍 동쪽 산에 머무르고."

       

      이것은 오늘날 바위 돔 사원이 서 있는 장소 근처인 예루살렘에 세워질 것으로 흔히들 생각하는 미래의 성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이 장차 성전 건물을 짓고 그 안에서 종교 활동을 재개하는 일도 전적으로 가능하다. 그 일이 가져오게 될 종교적 열광은 말할 것도 없고 거기에 함축된 정치적.군사적 파장 또한 명백하다. 이 일이 앞으로 언제 발생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비록 실제로 발생하더라도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세우는 일 외에 다른 어떤 종말론적.신학적 의미는 전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현재와 미래에 영원히 거하기를 기뻐하시는 유일한 성전은 예수님과 그분의 영적인 몸인 교회다.

       

      하나님이 장차 성전 재건을 승인하시리라고 제한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구속과 관련해서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퇴행을 나타내는 터무니없는 발상이 될 것이다. 그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태도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교회를 부인하는 처사가 될 것이며, 그리하여 고린도후서 6장의 이 대목과 다른 곳에서 바울이 명시적으로 단언하는 내용을 모욕하는 처사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후서 6장의 이 구절에서 밝히는 현실적인 주장을 놓쳐서는 안 된다. 우리가 우상 숭배와 관련된 어떤 표현도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교회로서 하나님의 현존을 오늘날 세상에 나타내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순히 또 하나의 문화 단체나 우리 이웃의 "체감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사회봉사 집단"이 아니다. "대신에 교회는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으로서, 예수님 안에서 공통의 신원으로 연합되고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다 같이 예배하고 경외하는 일을 중심으로 모이는 '하나님의 가족'이다. 우리의 삶이 그처럼 영광스럽고 고상한 신원을 늘 반영하기를 기원한다.

       

       

      샘 스톰스의 [개혁주의 무천년설 옹호]에서 발췌(21-2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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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생지옥이었던 삼청교육대에서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강제입소된 지 10여 일 정도가 지났을 때, 하루는 전체 입소자들 4백 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중대장이 "여기 예수 믿는 사람 있는가?" 하고 공개적으로 묻는 것이었다. 그 당시 나는 교회에 다니는 신자도 아니었고, 더욱이 예수를 믿지도 않았지만 뭔가에 이끌리듯 손을 번쩍 들고 "예,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럼,너 기도할 줄 아나?" 
      "예." 
      "오늘부터 네가 매일 저녁마다 대표기도를 한다.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은 기도가 끝나면 모두 아멘을 복창한다. 알겠나!" 
      "예." 
      "자,그럼 한 번 대표기도해 봐." 
        
      그때 첫 기도를 어떻게 했는지 나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몇 마디 짧은 기도를 하는 동안 온몸에 진땀이 얼마나 홀러 내렸던지 입고 있던 군복이 흥건히 젖을 정도였다. 그래도 그날부터 나는 저녁 점호시간에 기도하는 동안만이라도 공식적으로 말을 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받은 셈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기도를 마칠 때 유일하게 "아멘"이라고 입을 열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 것이다. 삼청교육대 안에서 내가 대표기도 훈련을 받게 되리라고 과연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은 참으로 놀라우신 분이다.  
        
      그 당시 나는 거의 비슷한 내용의 대표기도를 계속 반복했다. 주로 회개의 기도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게 해달라는 내용의 기도였다. 
        
      "하나님 아버지,참 감사합니다. 너무나도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살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 역하며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불신 가운데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항상 원망과 불평과 짜증만을 토하며 우리들 멋대로 살아온 것을 회개합니다. 이 시간 여기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우리 400여 명에게 회개의 영을 부어 주시옵소서.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잘못한 것, 부모에게 잘못한 것, 아내에게 잘못한 것, 사회에서 잘못한 것 모두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회개합니다. 여기 잡혀 온 우리들은 죄 많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여 주시고 우리의 병든 심령을 고쳐 주시옵소서. 우리를 고쳐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때까지만 해도 교회와의 인연이라고는 어렸을 때 부활절, 크리스마스 등 절기 때마다 선물을 받기 위해 동네 주일학교에 나갔던 것이 내 신앙 경력의 전부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의 부족한 입을 통해서 죄를 고백하는 회개의 기도와 치유의 기도를 하게 하셨던 것이다. 이는 참으로 기적이었다. 하나님을 완전히 알지도 못하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한 적도 없었지만 대표기도를 하면서 나는 내면으로부터 진정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알기 원하는 그런 간절한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돌이켜 생각해 볼 때 아마도 그 중대장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것 같다. 자신이 비록 삼청교육대를 지휘하는 장교의 입장에 있기는 했지만 자신의 신앙에 비춰 마음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는 입소자들에게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 주기 위해 대표기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 했던 것 같다. 물론 모든 조교들이 하나같이 악랄하고 못됐던 것은 아니었다. 조교 가운데는 입소자들에게 인간적으로 동정을 표시하고 절대로 구타를 하지 않는 그런 신사적인 조교들도 있었다. 어느 날 하루는 잠자고 일어나 보니 머리맡에 건빵 한 봉지와 메모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메모를 읽어보고 나는 누가 그런 호의를 베풀었는지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이곳에서 훈련받는 것이 많이 힘들겠지만 당신이 기도하는대로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앞으로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요. 조금만 더 인내해서 꼭 건강하게 가정으로 돌아가게 되길 바랍니다." 
        
      나는 그 메모 내용으로 미뤄 그가 기독교 신자인 것을 금방 알 수 있었고 또한 누구일 것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선한 인상에 눈빛이 다른 조교들과는 많이 달랐던 그는 절대로 구타하거나 욕설을 내뱉는 일이 없었고, 내무반 점호시간에도 이 조교가 점호를 하는 날이면 가장 쉽게 넘어갔다. 물론 단체기합이나 구타가 없어서 좋았고 그는 늘 "이제 이곳에서 조금만 고생하면 곧 사회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용기를 불어 넣는 말을 해주곤 했다. 지금까지도 나는 이 세상에서 선한 사람의 모습을 그려보라고 하면 그 조교의 얼굴을 떠올린다. 황량하고 삭막한, 그리고 공포 분위기만 조성되고 있었던 삼청교육대 안에서 그런 조교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사막 한가운데서 오아시스를 찾은 것과 같은 기쁨이었다. 그리고 저런 양심적인 사람이 있기 때문에 우리도 살아 나갈 가능성이 있다는 소망을 키울 수 있었다. 
        
      매일 저녁마다 하는 대표기도를 일주일 정도 했을 때였다. 어느 날 하루는 점심식사를 30초 만에 마치고 모두 다시 훈련장으로 집합했는데 소대장이 험악한 인상을 하고 고함을 질러댔다. 
        
      "너희들 중에 매일 대표기도 하는 놈이 누구냐?" 
      "예, 접니다." 
      "그래,너 이리 나와봐. 이 자식이, 너 여기가 무슨교회나 종교집단인 줄 알아?" 
        
      가슴 정중앙으로 돌맹이 같은 주먹이 날아왔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뒤로 나가 떨어졌는데, 다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일어나, 이 새끼야. 네가 하나님을 믿는 놈이면 지금 기도 열심히 해서 내가 너를 못 때리도록 한 번 해봐. 이 망할 놈의 예수쟁이야." 
      그는 평소에 기독교인들을 무척이나 혐오해왔고 점호시간에 대표기도를 한다는 것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해서 언젠가 중대장이 없는 틈을 타서 대표기도 하는 놈을 잡아 해코지를 하려고 작정하고 있던 터였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자 곧바로 다시 가슴 정곡을 주먹 으로 가격했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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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의 날과 트럼프 대통령

      a7c82eafeab4548f8cf1452afaa8d8b2_1487394874_13.jpg2월은 미국 대통령 여러 명의 생일잔치로 분주한 달이다. 내가 생일상을 차려줄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는 말이다. 연방 공휴일 프레지던츠 데이는 그래서 2월에 지켜지고 있다. 

       

      우선 배우 출신 40대 로날드 레이건 대통령의 생일은 2월 6일이다. 9대 대통령 윌리암 해리슨의 생일은 9일이고 링컨 대통령은 12일이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생일은 22일이다. 워싱턴의 생일도 2월이고 가장 존경받는 링컨의 생일도 2월이니 한꺼번에 몰아서 정해놓은 기념일이 ‘대통령들의 날’이다.

       

      지금까지 미국 역사엔 모두 44명의 대통령이 존재해 오고 있다. 현재 트럼프 대통령을 포함해서다. 이들 가운데 “나는 무신론자”라고 선언했던 대통령은 한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무신론자가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라는 게 미국의 역사였다. 대부분 기독교 신자였지만 그중에서도 캐톨릭 신자가 대통령이 되기는 존 케네디가 최초의 일이었다. 따라서 개신교 신자가 가장 많았던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 기독교 신앙이 돈독했던 대통령을 꼽으라면 조지 워싱턴을 포함하여 대개 8명의 대통령을 꼽는다.

       

      미국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대통령에 오른 조지 워싱턴은 모든 군대가 매일 공식적인 아침기도로 일을 시작하도록 했다고 한다. 모든 장교들은 기도를 인도하도록 명령하기도 했다. 수정헌법을 통해 정교분리 원칙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요즘 같았으면 아마 탄핵요건이 될 법도 하다. 워싱턴은 미국 독립전쟁의 승리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었다고 믿었다니 얼마나 믿음 좋은 장군이었는가?

       

      2대 존 아담스 대통령은 ‘파운딩 파더스’중 한사람으로서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건국의 밑그림을 그려간 인물이다. 조지 워싱턴 밑에서 역사상 최초의 부통령이 되었지만 허우대가 크기로 유명했던 워싱턴의 허리정도 크기로 체구가 작은 것으로 유명했다.

       

      ‘백악관을 기도실로 바꾼 대통령’이라고 찬사를 받는 제16대 링컨 대통령은 째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변호사를 거쳐 대통령으로 출세했으니 개천에서 용이 난 셈이다. 흑인노예해방이란 미국 역사상 최고의 업적을 남겨놓은 그가 읽던 성경은 지금도 역대 대통령 취임식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금년 1월 대통령취임식에서 트럼프도 링컨의 성경과 자신의 어머니가 물려준 2권의 성경 위에 손을 얹고 취임선서를 했다.

       

      제4대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은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최초로 주창한 대통령이긴 했지만 그 역시 신실한 대통령이었다.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대통령 재임 중 결혼하여 첫째 딸 루스를 얻었는데 그만 12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딸을 잃은 슬픔을 하나님께 의지하여 위로를 받았다고 하는데 땅콩과 캐러멜로 만들어 지금은 스위스 ‘네슬(Nestle)’사가 소유하고 있는 유명한 캔디바 ‘베이비 루스(Baby Ruth)는 바로 클리블랜드 대통령의 그 딸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은퇴 후에 소속된 침례교회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할 만큼 신실한 믿음의 대통령이었다. 집집마다 문을 두드려 축호전도를 했고 대통령 집무실에서도 매일 성경을 읽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니 참으로 존경할 만 하다.

       

      로날드 레이건 대통령도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공립학교에서의 기도가 법적으로 불허되었지만 이를 반대하고 나섰고 낙태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악이라고 맞섰던 대통령이었다.

       

      조지 워커 부시 대통령은 연합감리교인으로서 어느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서슴없이 하나님이란 말을 즐겨 꺼냈고 “하나님은 내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원하시고 계심을 믿는다”고 고백함으로 대통령을 하나님의 부르심의 자리로 받아들였다. 이라크와 전쟁을 벌일 때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테러와 싸워 이길 수 없다고 고백했던 대통령이다. 이상 8명의 믿음의 대통령 반열가운데 이제 취임 한 달째를 앞두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도 끼어들 수 있을까나?

       

      지난 2월 2일 워싱턴 힐튼호텔에서 열린 제65차 미국 조찬기도회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존슨수정헌법을 철폐하겠다고 밝혔다. 이 수정헌법은 1954년에 발효된 비정부기구의 정치참여를 금지하는 법이다. 이 법이 폐지될 경우 여러 부작용도 발생하겠지만 강단에서 동성애 반대를 외치다가 면세박탈 위협을 당하는 등 그동안 복음주의권의 불만을 달래주는 발언으로 해석된다. 트럼프는 이날 지난 대선 캠페인 도중 자신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준 말은 바로 이 말이었다고 간증했다. “나는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어요(I am praying for you).” 수많은 지지자들의 이 짧은 다섯 마디 때문에 자신은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고 간증하는 트럼프 대통령. 아니 그간 들어난 스캔들과 막말 등을 종합해 보면 “무늬만 크리스천”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진짜 신실한 그리스도인? 그의 고백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기도란 말은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나 보다.

       

      그가 쏟아내는 행정명령으로 나라가 온통 반반으로 갈라지고 있는 판국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하나님 두려워하며 더욱 겸손하고 균형잡힌 안목으로 국정을 살펴서 손을 얹고 취임선서를 했던 그 성경의 주인공 링컨 버금가는 독실한 크리스천 대통령으로 기억되면 얼마나 좋으련만.

       

      ⓒ 크리스천위클리 /조명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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