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창조 이전의 시대에 대해서는 성경에 기록이 많지 않다.

인류 역사의 출발점인 천지창조는 창세기 1장 1절에서 출발한다.


창세기 1장 1절 이전의 시대를

신의 시대(창세전 영화의 시대)라 하고

1장 1절 이후의 시대를 인류역사의 시대로 구분한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와 요한 1장 1절의 태초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굳이 년도로 따지자면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는 기원전 4000년경의 천지창조의 때이고,

요한 1장 1절의 태초는 천지창조의 이전의 때로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신의 시대를 말한다.



세상이 존재하기 이전의 시대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몇가지 단서가 있다.


첫번째 단서: 창세 전 영화의 시대


세상이 존재하기 이전의 시대를

창세전 영화의 시대라고 부르는데,

이는 예수께서 고난을 앞두고 기도하실 때

이 말씀을 하신 것에서 유래한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 17:5)


이 말씀에서 단서는 세상이 존재하기 전,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존재하셔서

하나님과 아들이 영화로운 시대를 함께 하셨다는 것이다.


두번째 단서 : 아들이 천지창조에 참여 


또 다른 단서는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데

아들이 천지 창조의 수행자로 하나님과 함께

참여했다고 기록하는데 이는 창조의 행위가

두 분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만물이 창조될 때

아들은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으로 상징했는데

하나님과 말씀이 분리될 수 없는 상태로 하나를 의미하기도 한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8번

"하나님이 이르시되...이 있으라" 말씀으로 창조하신다.

말씀은 나중에 성육신(Incarnation)되어 구세주로 오신다.

히브리어 창조의 뜻을 가진 '바사'는 무로부터 창조를 의미한다.

현대 과학에 따르면 모든 물질은 무에서 유를 생성할 수 없다.


그러므로 무에서 우연히 출발했다는

빅뱅이나 생물의 출현은 가설 자체가 상상의 산물이다.


창세기의 창조로부터

물질, 공간, 시간,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었는데,

빛과 어둠이 가장 먼저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낮과 밤의 교대를 통해 시간의 흐름이 시작되었다는 것과

창조의 피조물들이 한시적 시간의 한계를 가진 것으로

이런 시간성의 존재는 하나님의 영원성이

사람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영생이 가능하게 하는 계획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아들에게 주셨고

아들은 생명의 원천이 되어 인류의 지배권을 갖는 동시에

그를 믿는 인류에게 생명을 주는 권세를 가지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와 구속이라는 두 개의 사건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중보자로 드러난다.

그 분은 우주의 기원일 뿐 아니라 그 목적이기도 하다.


전 우주적으로 가장 위대한 법칙이 한 가지 있다면,

만물은 그 분에게 복종해야 하며 그 분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온갖 서류를 구비하거나

심오한 지식이 아니라 인격적 신뢰가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이러한 놀라운 구도는

또다른 사건으로 차질이 발생하였다.


세번째 단서 : 천사들이 처소를 떠난 사건  


하늘에서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처소를 떠난 천사들이 생기는 사건이 일어났다(유 1:6).


천사의 최고층인 그룹에 지위에 있었던 사탄이

천사들을 충동하여 하나님께 반역한 사건이 천지창조 전에 일어났다.


이 사건이 천지창조전이라 예상하는 것은

에덴에 살고 있던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를

사탄이 유혹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에덴에 왔던 사탄은 이미 타락한 지위에 있었던 것이다.


인류가 두 개의 진영으로 분리되었다.


하늘에 있었던 반역사건이 악의 기원이었다면,

에덴에서의 선악과 사건은 죄의 기원이 되었다.


악과 죄는

인류를 두 개의 종족으로 분리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하나님을 따르며 자기 처소를 지켰던 천사들이 있었던 것처럼

인류도 하나님을 따르는 하나님이 백성이 있는 반면에,

하나님을 배반하고 사탄을 따랐던 타락한 천사들이 있는 것처럼

인류도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사탄을 따르는 사탄의 백성들로 양분되었다.


두개의 세상과 두 백성이 있다.


사탄의 백성을 불신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들이다.


사탄이 지배하는 곳을 세상이라고 일컫는데

그 세상의 임금이 사탄이다.


사탄은 만국을 미혹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방해하는 역할을 하는데,

세상에 속한 자, 어둠의 자녀, 거짓 아비의 자녀들로

거짓종교, 진화론, 무신론을 신봉하는 불신자들의 집합체를 말한다.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분리를 가져와 사망의 종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들의 특징은

사탄이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극도로 증오하는 것처럼

그의 아비의 속성을 닮아 그리스도인을 싫어하고 미워한다.

다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그리스도인만 미워한다.


세상을 같이 즐기고

세속주의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좋아한다.


모든 거짓종교(이슬람,불교,힌두교), 무신론,

공산당, 진화론자들이 신을 존재를 부인하며

공통적으로 기독교를 싫어한다.


아무리 탁월한 인격이나 지식을 가졌더라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은

모두 거짓의 아비 마귀에게 속해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권한을 아들 예수에게 주었는데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방법으로

예수를 영접하는 방법만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요,

이 빛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게 된다.


하늘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인류의 구원에 대한 권한을 부여받은 예수님은 이렇게 천명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 올 자가 없다" (요 14:6) 

  

"나를 믿지 아니하면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 8:24)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8:12)


한편 현재 불신자들 가운데서 활동하는 악령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이 세상의 임금의 영으로

이 세상을 사랑하고 풍조를 따라가게 한다.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그들은

진노의 자녀들이요,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영원한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처럼,

저들도 사탄과 세상을 따르고 하나님이 없으니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따라 살아가도록 전파하며 활동한다.


하나님의 백성을 박해하고 미워하며 반복음을 전도한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요 10:10)


예수를 믿지 아니하면

그 안에 생명의 빛이 없는 고로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모두 거짓의 아비 사탄의 자녀가 되고

그 안에 생명이 없기 때문에 사탄을 따라

그의 나라 지옥, 불못으로 들어간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임금이 지배하는 세상:

언론, 정치, 문화, 종교, 공산당, 인본주의, 무신론


이 모두 기독교를 미워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상한 현상이 아니 것이다.


그들은 사탄의 소유로 지옥에 속했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라"

(요 8:47)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요 8:44)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 15:1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 16:9) 



출처: 카이로스 / ars

다 하려 들지 마라!


영적으로도 함정이 있다.

처음에는 말씀대로 한다.

받은 은사대로 한다.


내가 할 일과, 하나님께서 하실 일,

형제들이 할 일들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다.


그래서 성과가 나고 일이 잘 되고,

열매가 맺어지면 다 하려 든다.


내 은사를 너머서서 하려 들고

형제들의 일을 대신하고

나중에는 하나님 하실 일도 대신 하려 한다.


그 선을 넘을 때,

그 일은 영적인 일이 아니라,

내 욕심을 따른 일이 된다.


빛이 사라지고 그림자가 생긴다.

하나님의 역사는 줄어들고 사람의 생각이 커진다.


내가 나오기 시작하고,

물러서기 어려워진다.

내가 정점을 찍어야 한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역사하셨지만,

이제는 내가 기도할 때마다,

내가 선포할 때마다,

하나님이 병을 고치셔야 하고,

반드시 역사하셔야만 한다.


처음에는 부분으로 시작했지만,

바뀌지 않는 전체가 절망스럽다.

더 이상, 부분으로 남는 것을 참을 수 없다.


우리가 개혁주체세력이다.

그래서 이 땅에 장로교단만 200개다.

그래서 모두 좁쌀만하다.

연합이 없다.

보이지 않는 사랑의 끈과 연대,

내가 못하는 것을 해주는 형제에 대한

경의와 사랑과 겸허함이 적다.


내가 거대한 하나님 계획의

일부라는 절제와 책임감.


하나님의 도시의 구석을 쓸다가는

작은 청소부라도 그것이 얼마나 영광된 만족인지,

그 기쁨도, 그것을 알아주는 형제들의

박수와 사랑도 아쉽다.


내가 다 하지 말자.

그것을 맡은 못하는 형제가 더 잘하도록 돕자.

연합하자. 우리는 한 몸이다.



- 채영삼 목사님 페이스북 -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해 두 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첫째는 주님의 오심에 대한 성경의 예언이 명확함에도

교회가 준비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아직도 휴거가 환란 전인지, 환란후인지

혼란스러워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휴거가 환란 전인지 환란 후인지

문자적으로 정확하게 정의를 내려주지 않은 면도 이런 혼란을 야기했다.


그런 이유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종말의 말씀을 읽고 정황을 파악하는 수밖에 없다.



 

1. 노아의 때와 같이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주님은 때에 대한 단서를 알려주기 위해 노아의 때를 말씀하셨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갈 때까지 사람들은 모두

평소처럼 지내며 시시덕거리고 즐기며 살았다.


홍수가 모든 것을 쓸어 버릴 때까지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여기서 홍수란 대환란을 의미한다.

인자의 임함이 노아의 때와 같다는 단서는

환란이 들이 닥치기전까지 평소와 다름 없는 상태에서

불시에 일어난다는 교훈을 준다.


도둑같이 오신다는 말도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노아의 때는 분명 환란전 휴거설을 지지한다.


다수는 환란이 닥쳐야 알게 된다.

미리 앞을 내다 보는 것을 선견지명이라 하고,

일이 일어나고서야 알게 되는 것을 후견지명이라 하는데,

흔히 "내 그럴 줄 알았어" 이런 말은 그 자체가 모순이다.


그럴 줄 알았는데 왜 가만히 있었어?

이런 질문에 대답할 말이 없어진다.


휴거를 준비하는 사람은 선견지명이고,

휴거가 일어난 다음에야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은 후견지명이다.

 

 

2. 심판 전 의인과 악인을 분리하는 패턴

 

성경을 읽을 때 심판에 대한 패턴을 볼 수 있는데,

심판하시기전 반드시 경고하시고

의인을 악인과 함께 심판하시지 않는다는 것이 불문율이다.


노아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 등에서 이런 패턴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실한 백성을 대환란에 몰아넣고

하나님의 진노를 쏟는 것은

이 패턴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하나님의 공의에도 어긋난다.

 

 

3.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한다.

 

이 말씀을 환란 상황에서

잡혀가는 것으로 이해하는 황당한 해석도 있다.


만약 데려가는 사람은 짐승의 표를 받지 않았고,

버려둠을 당한 사람은 짐승의 표를 이미 받은 사람으로 해석할 때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이 함께 밭에서

일을 하고, 잠을 자고, 맷돌질을 하는 것이 가능하겠느냐 의구심이 생긴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는 후절도 전후 문맥에 맞지 않는다.

이 사례는 휴거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4. "다 졸며 잘 새" (마 25:5)

 

10명의 처녀들은 신랑이 더디오자 다 졸며 잠에 빠지게 되었다.

다 졸며 자는 상황은 긴박한 환란상황을 표현한다기보다

평화롭고 안일한 일상을 그리고 있다.


70년이 한 세대에서 인내의 한계를 의미하듯,

'다 졸며 잘새'도 인내의 끝자락을 상징하고 있다.

 

 

5. 이방인 교회와 유대인

 

이 날(휴거)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데(눅 21:35)

휴거는 전지구적으로 퍼져있는 이방인 교회를 의미하는 반면,

짐승의 우상이 세워지거든 유대에 살고 있는 자들은

도망가라(마 24:15~16)는 말씀은

대상자가 유대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수신자다.


이는 휴거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긍휼이

이방인 교회에서 유대인으로 다시 회복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6. 거짓 선지자

 

휴거전 거짓 선지자는 많은 사람을 미혹하지만(마 24:11),

환란 시대의 거짓선지자(두번째 짐승)는

큰 표적과 기사를 행하여 미혹하고(마 24:24),

짐승의 우상에 경배하게 하고

짐승의 표를 받는 두 가지 목적을 위해 일한다.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은 예수님이 죽으셨던 장소에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라는 의미로 계시록의 독수리들이

유대인을 피난처로 안내할 것이라는 해석이 있고,

썩은 고기를 좋아하는 독수리들이 주검

즉 짐승을 경배하고 짐승의 표를 받는 장소에

모일 것이라는 해석도 있는가 하면,

단순히 때가 충족되면 주님이 오신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7. 더디 오리라 생각한 악한 종

악한 종은 그 날이 더디오리라고 생각하는데,

만약 이 악한 종이 환란시대의 상황이라면

짐승의 표를 받았을 것이고,

더디 오리라 생각하기에,

재림에 대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악한 종은 환란 전의 모습이고,

환란의 때에는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자들을 위해 그 날을 감한다.

(마 24:22)

 

 

8. 등불과 기름

 

적그리스도의 치하에서

성령은 이미 지구를 떠나셨기 때문에

성령충만한 기름을 준비하는

슬기로운 처녀들을 환란시대에 찾을 수 없다.


환란시대에는 성령충만함이 아니라

자기의 인내와 순교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계시록 4장 이후에

성령이 지상에서 성도와 함께 하신다는 기록이 없고

오히려 하늘에서 내려오는 예루살렘성에서 휴거자를 맞이하고 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사람들은

결코 후회하는 결말을 보는 법이 없다.

가슴 벅찬 그 날을 고대한다.



출처: 카이로스 / ars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과 교제하는 법!
너무 바빠서 기도할 수 없는 당신에게



우리는 기독교인들만 기도와 믿음생활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모든 사람이 믿음생활을 하고 기도한다.


다만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인지, 자기 나라와 의를 구하는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믿음이나 기도 없이 살 수는 없다.


기도. 단지 우리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수단인가?


특별히 그리스도인이 하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사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경우 온전한 인격적 사귐이 아닌, 자신이 주체가 되고 하나님께 자신의 문제를 올려드림으로써 그에 대한 응답, 해결, 보상만을 받고자 한다.


기도가 단지 이렇게 우리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수단이라면, 굳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거나 친밀함을 나눌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주님께 드리는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것이다. 그러려면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야 하며,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마음을 일치시켜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야 한다.


결국 기도는 자기 마음을 다스리거나 하나님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생명적 관계를 갖기 위해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구하는 것이다.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 믿는 것을 저지하지 못하면 그 다음 전략으로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최선을 다하게 하고 그 결과 바쁘게 만든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몸과 마음은 한자리에 있지 못하게 되고, 여유가 없기 때문에 풍성함을 잃어버리게 되고, 주님과 교제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너무 바빠서 기도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 너무 바쁘기 때문에 기도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6)



“문을 닫는다”는 것은 기도하는 동안 우리의 마음이 세상과 단절되어 모든 일상적이고 인간적인 활동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은밀한 중에 계신”이라는 의미는 단지 물리적 세계로부터 차단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모든 역동성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몸은 격리되었지만 마음은 언제 어디로든 갈 수 있고 무슨 생각이라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참뜻은 육신의 눈이 닫히고 마음의 눈이 열려 하나님께서 임하실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상태는 물리적으로 ‘조용한(quite)’ 곳일 뿐만 아니라 마음의 모든 역동성이 사라지는 ‘은밀한(silent)’ 곳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 기도는 육신의 생명보다 귀중한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바쁜 삶 가운데 가장 힘들고 어려운 것이 바로 마음의 모든 역동성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바로 ‘거룩한 낭비’이다. 이 훈련이 되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은밀한 곳에 머물 수 있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주님이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법!
하나님 아버지가 기뻐하고 원하시는
진짜 기도를 드려라
지금 여기 나의 삶 가운데 임한 하나님나라를 선포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실제적으로 이 땅에 실현시키는 기도
손기철 / 규장

 


† 말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 마가복음 14장 38절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 마태복음 6장 6절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 요한계시록 3장 7절,8절


† 기도
주여, 주님께서는 무소부재하시기에 모든 장소에서 저희가 하는 모든 마음과 생각과 행동을 정확하게 읽고 계십니다. 그 주님 앞에 저희가 무엇을 숨길 수 있겠습니까?


만물이 주님을 바라보며 찬양합니다. 주님, 저희에게 주님의 뜻을 따라갈 수 있는 영안을 열어 주소서. 깨어있어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 주소서.


† 적용과 결단
기도의 골방이 어디이신가요? 어느 곳에서 혼자 있을 때 주님을 묵상하시나요? 주님을 바라보는 그 시간, 그 장소를 생각하며 주님 앞에 기도하시길 원합니다.



출처: 갓피플 말씀테마 (http://gp.godpeople.com/archives/35814)




김동길 교수가 전라도인들의 원한과 울분을 이 영화를 인용하며 설명을 한 영상이라 합니다.
전라도인들의 원한이라?


(창 49) 아버지의 축복

 

“Jacob Blesses His Sons", 오늘 말씀에 NIV 영어성경은 "야곱이 그 아들들을 축복하다"라고 소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147년 동안 걸어온 인생길을 마감하는 야곱이 그 아들들을 축복합니다. 야곱 자신도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를 속이고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아버지의 집을 떠나 험하고 거친 나그네길을 걸어온 야곱입니다. 아버지 이삭은 그 뒤로도 오래도록 산 다음 180세에 죽었습니다. 눈이 어두운 채 참 오래 산 셈입니다. 계산을 해보면 이삭이 60세에 에서와 야곱을 낳았다고 했으니 이삭은 에서와 야곱이 120세 되었을 때 죽은 셈입니다.

또 계산을 해보면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간 때가 17세였고, 애굽총리 된 때가 30세, 7년 풍년과 다시 2년의 흉년 뒤에 아버지 야곱을 만났을 때가 39세, 곧 22년 후에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 때 야곱이 바로에게 '나그네길의 세월이 130년'이라고 했으니 이삭이 죽은 것은 야곱이 식솔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내려가기 10년 전, 야곱이 120세 때라는 계산이 됩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할아버지 이삭을 보고 자랐을 것이고 요셉이 보디발의 감옥에 갇혀 있고 바로의 두 관원장이 투옥될 무렵 이삭이 세상을 떴을 것이라는 계산이 됩니다. (제가 쓸데없는 계산을 했나요?)

이제 야곱이 죽을 때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을 불러 모으고 아들들에게 후일에 당할 일들을 이르며 축복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르우벤부터 시작하여 세 아들에게는 축복이 아닌 저주라 해야 할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르우벤에게 말합니다.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그러나 이어서 말합니다. ‘물의 끓음 같아 탁월치 못 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라.’ 아버지에게는 맏아들이야말로 가장 큰 기대와 사랑을 쏟는 대상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르우벤은 아버지에게 결코 용서 받지 못 할 죄를 저질렀고 그리하여 축복에서 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어서 시므온과 레위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찌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찌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바로 세겜에서 그들이 저지른 끔찍한 살육을 말하는 것입니다. 르우벤은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혀 아버지를 모멸하였고 시므온과 레위는 아버지를 포함한 온 집안을 잔혹한 살인군단으로 만들어 버렸으며 그리하여 위로 삼형제가 그들이 저지른 죄로 인하여 아버지의 축복에서 떨어진 것입니다.

십계명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 다음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이웃에 사랑을 베풀라고 가르칩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십계명을 간단히 정리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르우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고 부모를 공경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우습게 여기고 더럽혔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부모를 공경하였다면 결코 저지를 수 없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없다 하고 인륜을 저버리는 자에게 천국은 없을 것입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에서 더불어 함께 살던 이웃사람들을 잔혹하게 죽였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본다면 추호의 용서도 없는 잔혹한 복수로 되갚은 것입니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이 셋이 저지른 범죄가 십계명, 주님의 계명을 범하는 모양을 지니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받지 못 한 축복은 그 다음 아들인 유다에게 쏟아집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을 향한 엄청난 사랑과 축복이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이겠습니까? 순종함으로 쏟아질 하나님의 축복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찌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새끼로다....” 그리고 엄청난 예언이 그에게로 더 하여 떨어집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이 예언은 메시아가 유다의 계보를 따라 오실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다에게도 흠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창녀로 변장한 며느리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부끄러운 그 실족을 생명을 잇는 계보, 그리스도의 계보로 사용하셨습니다. 유다는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할 때 그를 죽이지 말고 팔자고 하여 요셉의 생명을 건졌습니다. 칠년 기근 때 야곱이 베냐민을 보내려고 하지 않았을 때 베냐민을 도로 데리고 돌아오지 못 하면 자기의 아들을 죽이라고 하면서 야곱을 설득함으로써 온 가족을 기아로부터 건져낸 셈이 되었습니다. 유다는 기이하게도 생명을 살리고 보존하는 역할을 한 셈입니다.

이어서 야곱은 다른 아들들에게 축복을 이어갑니다. “스불론은 해변에 거할 것이다.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갓은 도리어 적의 뒤를 추격하리로다. 아셀에게서 나는 식물은 기름진 것이라.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로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라.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야곱은 이렇게 열 두 아들들의 장래를 말하고 축복합니다. 평화와 풍요가 축복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우리가 보기에는 이게 축복인지 뭔지 분간이 안 갑니다. 싸움은 이어지고 이스라엘의 앞날은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끝까지 피흘리며 싸워야 할 것을 예언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메시아가 오시기까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 싸움으로 인하여 결국 온 이스라엘, 르우벤, 시므온, 레위 지파까지도 메시아의 축복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야곱의 예언과 축복의 기도를 놓고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고 연구를 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은 생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피투성이와 싸움의 축복입니다. 죄악으로부터 인류를 살리시려 피 흘려 죽으시려 유다 족속을 통하여 오실 메시아의 예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피, 그것이 축복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어 살기까지 애굽에서, 광야에서,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은 어떻게 해서든 그렇게 피흘려 싸워 반드시 살아야 하며 반드시 이겨내어서 그 생명을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축복입니다.

실로가 오시기까지 죄 많고 흠 많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마침내 싸워 이기듯, 어쩌면 죄 많고 흠 많은 죄인들의 교회가 주님 다시 오시기까지 세상과 피 흘려 믿음의 싸움을 싸워 이기는 것, 그것이 우리의 축복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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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복수, 한국의 굴종!


"로마의 복수"라는 말이 있다. 이천년 전 로마는 그들의 시민 중 단 하나라도 여행 중에 해를 입으면 그 대상을 끝까지 추적해 무자비하게 보복하는 걸로 유명했다. 로마 시민을 보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도시나 국가를 초토화하기도 했다.


그래서 어디서든 로마 시민(Civis Romanus)이라는 말 한 마디만 하면 전 세계의 협조와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우리의 시민에게 해를 입히는 순간 로마 전체를 상대해야 한다는 로마의 복수는 "나는 로마 시민이다"라는 말 한 마디에 어마어마한 권력을 부여했다.


"가죽 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서 있는 백부장 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이르되 어찌하려 하느냐 이는 로마 시민이라 하니 ... 심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시민인 줄 알고 또 그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하니라" (사도행전 22:25,26,29)


그 국민과 영토를 보호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자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이다.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면, 국민들이 세금을 낼 이유가 없고, 그들에게 부여된 국민의 의무를 수행할 이유가 없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그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나?


멀리 갈 것도 없다. 최근 몇 년 사이 굵직했던 사건들만 살펴보자. 천안함 피격사건. 북한 잠수정이 우리 초계함에 어뢰를 쏘고 도망쳤다. 한창 나이에 국가의 부름을 받아 최저임금도 안 되는 돈을 받으며 나라를 지키던 젊은이들이 죽거나 다쳤다.


전세계 전문가가 북한을 범인으로 지목했고, 각국 정부가 이를 비판하는 와중에 우리나라에서는 정치인들을 비롯한 몇몇 얼빠진 인간들이 정부의 자작극이라는 둥, 미군 잠수함의 공격이라는 둥 정신나간 소리를 늘어놓으며 북한을 변호했다. 우리 정부는 관광중단, 개성공단 폐쇄 등의 제재 말고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연평도 포격 사건은 어떤가?

휴전 이후 처음으로 북한이 우리 영토를 직접 포격한 사건이다. 그 과정에서 민간인과 군인이 죽거나 다쳤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이유만으로 사상자가 된 것이다.


갑작스런 상황이었음에도, 국군은 재빨리 대응사격을 해 원점타격에 성공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선전포고로 받아들여야 정상인 상황에 우리 정부는 공허한 비난성명과 제재로 대응했을 뿐이다.


우리가 북한에 더 큰 피해를 줬다며 자위하던 어처구니 없는 발언들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때도 일부 미친 인간들은 정부의 강경한 대북정책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며 햇볕정책을 폐기한 보수정부를 비판하고, 적 세력의 포격행위를 변호했다.


불과 일년 전에는 목함지뢰 도발이 있었다. 북한이 우리 철책선 안에 목함지뢰를 설치해서 우리 군인들이 두 다리를 잃었다. 산 날보다 살 날이 더 많은 그들은 여생을 목발에 의지해야 한다.


우리 정부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확성기를 틀었다. 걸그룹 노래와 프로파간다 따위로 대한민국의 우수성을 북한 주민들에게 전파한다는 것이다.


고작 확성기를 트는 걸 대응이랍시고 하고 있는 것도 화가 나는데, 이거 가지고 "지금 전쟁하자는 겁니까?"라며 확성기를 끄라고, 북한을 노엽게 하지 말라며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이들이 국민을 대표해 정치를 한다는 인간들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슬펐다.


북한은 한달이 멀다하고 핵실험, 불바다 발언 등 크고 작은 도발과 위협을 이어왔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 국민들이 죽거나 다쳤다. 전쟁이 일어났어도 수십 번은 더 일어났을 상황에 우리 정부는 허울뿐인 제재만을 반복해왔고, 북한 문제, 안보 문제에 진영논리가 씌워지며 정부에 대한 '반대를 위한 반대'를 위해 북한의 입장을 옹호하는 정치인들이 설쳐댔다.


게다가 북한을 편드는 진성 종북, 이적세력들은 그러한 정치인들의 그림자 뒤에 숨어, 민주주의를 방패막이 삼아 나날이 그 힘을 키워왔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 휴전 중에 적의 공격으로 국민이 다치고 죽었는데 정부가 이에 대한 단호한 대응을 하지 못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북한은 우리 정부가 어디까지 끌려오나 크고 작은 돌을 던져가며 우리의 인내를 시험해왔고, 이제는 핵무기라는, 우리를 단숨에 초토화시킬 수 있는 재앙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다. 정치인들은 북한 문제로 편나눠 싸움박질만 하고 있었고, 정부는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


이제 와서 급하게 대응책을 찾고자 방어무기 등을 들여온다고 하니, 또 정치인들과 좌익선동꾼들과 종북이적단체들이 방해하며 발목을 잡는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그 정치구조 때문에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것에 명백히 실패하고 있다.


나는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를 비롯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지켜야 할 것들을 최선을 다해 성실히 수행해왔다. 그런데 국가는 나를 지키기 위해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내가 천안함에 탔었을 수도 있고, 내가 연평도에 살았었을 수도 있고, 내가 최전방에 배치되어 목함지뢰를 밟았었을 수도 있다. 내 가족이나 친구가 그랬을 수도 있다. 국가와 국민의 관계는 쌍방향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나는 이 나라를 뜨겠다.


북한의 핵무기가 완성되는 순간 한국이 안보 문제에 있어 굴종의 길을 걷는 것도 머지않아 보인다. 차라리 전쟁을 한다면 내 가족, 친구들의 안위를 위해 기꺼이 군복을 입겠다.


그러나 북핵이 완성되고, 북한의 위협 속에 여생을 걱정하며 살아야 한다면, 나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짊어져야만 하는 그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겠다.




- 우원재 자유기고가

美노스캐롤라이나, 동성애자 차별법으로 4조원 손실?

 

미국에서 성소수자 차별법이 경제적인 손실로 이어질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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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캐롤라이나주 성소수자 차별법에 반대하는 시위 전경 

 

그간 성소수자 차별법으로 논란을 일으켜온 노스캐롤라이나 주가 4조원 대 손실을 입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노스캐롤라이나는 지난해 4월 성소수자와 관련한 법안(HB2)를 시행해 성전환자가 출생증명사상의 성별과 다른 화장실 이용을 금지하기도 했다. 이 법안은 당시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제동을 걸면서 연방정부와 주정부 간의 ‘화장실 전쟁’으로 확대되기도 했다.  

 

AP통신은 “성소수자 차별법은 오는 2028년까지 노스캐롤라이나 주에 37억 달러 (약 4조1천억 원)에 달하는 손실을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AP통신의 자체 분석으로 산출된 예상 손실액은 성소수자 차별에 반대하는 여론이 거세지고, 주요 기업체의 투자가 보류되면서 발생하는 경제적 역풍이란 분석이다.

 

특히 주요 정보기술(IT) 기업의 투자 취소가 경제적 손실의 주요 원인인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로 전자 결제업체인 페이팔이 노스캐롤라이나 주에 투자를 전면 취소했고, 독일계 은행 도이체방크도 시설 투자 계획을 번복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 프로농구협회(NBA)는 2016-2017 시즌 올스타전 개최지를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에서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로 변경했다.

 

AP 통신의 전망과는 달리 노스캐롤라이나 지역경제는 호기를 누리고 있다는 반론도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공화당 필 버거 상원 원내대표의 말을 인용해 “지역내총생산(GRDP)는 지난해 3분기 4.5% 증가해 노스캐롤라이나는 미국 동남권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지역”이라고 전했다.

 

백유현 ⓒ 데일리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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