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의 끝자락에서
최송연의 신앙칼럼 2018. 1. 1. 05:23
다사다난했던 이 한해도 몰아치는 세찬 바람에 휩쓸려 날아가듯 속절없이 저물어 간다. 이제 며칠 있지 않으면 2017년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한해의 끝자락에 서게 되면 괜스레 마음이 초조해지는 것은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한해의 시작이 씨앗이었다면 한해의 마지막을 결실로 보아야 할 것인가? 그것이 자연의 순리이겠지만 인생이란 대개 그 반대이다. 한해의 시작은 쌍무지개 뜨는 희망의 언덕을 찾을 수 있을 것처럼 마냥 부푼 마음으로 오색찬란한 꿈과 소망으로 멋진 미래를 설계해 보지만 정작 한해의 끝자락에 서게 되면 대개는 이상과 현실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의 벽에 부딪혀 낙담하게 되는 때가 다반사이다.
나는 어릴 적,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매일 일기를 쓰고 매일 조금씩 주어진 숙제를 차곡차곡히 잘 해나가겠다는 결심을 곧잘 하기도 했다. 그러나 초의 결심과는 달리, 방학이 시작되는 그 시간부터 부모님께는 곤충채집이란 핑계로 둘러대고 온 여름 내내 산으로 들로 개울가로 꽃과 나비, 풀벌레들, 때로는 올챙이의 뒷꽁무니를 쫓아다니느라 정신없이 헤매며 놀다가 개학이 시작되는 며칠 전서부터 초조해지기 시작하여 하루 온종일 책상에 붙어앉아서 밀렸던 일기를 한꺼번에 써내려 가보지만 이미 날짜는 너무 많은 갭이 생겨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는지 난감했던 기억이 있다.
(맑음: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양치질을 하고 밥을 먹고 …) 그말이 그말인 내용을 적어나가다가 어린 마음에도 이건 아닌데 정말 난감했던 기억을 시작으로 어른이 되어서도 연말이 되면 언제나 마음은 급하고 초조해지지만 정작 무엇을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마무리, 성취감에 뿌듯한 마무리를 할 수 있을 것인지 대책이 서지 않고 시간시간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ㅠㅠ
한해의 끝자락에 서게 되면 괜스레 마음도 몸도 추워지면서 때로는 자신이 무지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한해를 시작할 때 먹었던 결심들, 이번만은 알차게 가꾸어 나가리라 설계하며 계획했던 모든 꿈이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낭패감, 그리고 나이를 먹음과 동시에 한 발짝 죽음의 문턱에 더 가까워졌고, 평생을 사모하며 그리던 사랑하는 주님을 만나뵈어야 하는 날이 점점 다가오는데, 그분에게 이렇다 하게 내어 드릴 일도,이루어놓은 일 하나 제대로 없이 이대로 늙고 병들어 갈 것이란 두려움이 가끔은 밀려오기도 하지만, 정작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속수무책이란 생각에 마음도 몸도 무거워지는 것이다.
또 한 편, 해마다 이맘 때가 되면, “내가 조금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지나간 일들에 대한 후회, 회한의 감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맹렬한 속도로 달리다가 인생의 끝자락에 서게 되었을 때, 그때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이것은 인생의 끝자락을 생각하며 살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일 수도 있지 않을까? 제법 철든 생각도 해 보게 되는 것이다.
몇 년 전, 권세의 상징, 강한 힘의 상징이랄 수 있던 북한의 김 정일 국방위원장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보게 되면서 더욱 더 사후 세계에 대한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세계의 관심은, 그의 뒤를 이을 후사 문제에 대한 중차대한 부분에 집중되고 있겠지만, 그보다도 그를 애도하는 물결의 통곡이 과연 진짜냐 가짜냐 언론이 시끌벅적 재밌는 현상도 일고 있음을 본다.
그만큼 그의 삶이 진실하지 못했던 때문일까? 그가 죽은 후, 그를 추종하던 각료, 그의 뒤를 이어갈 집권 세력들은 “백두산 천지에 있는 얼음이 동시에 깨어졌다. (누가 그 시간에 그곳, 백두산 천지 연못에 가서 의도적인 관찰을 했다는 것인지, 실소를 금치 못하겠다.) 비둘기 두 마리가 그의 장례 장을 들어오려고 애를 쓰다 안되니까 맞은 편 나무에서 구슬피 울었다. 날씨가 연례 없이 맑고 좋았다. 등등... ” 여러 가지 자연 현상마저 동원, 조작하여 죽은 그를 신격화하는 운동이 활발하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그의 지금 심경은 어떨까? 인간의 육신은 흙으로 빚었기에 흙으로 돌아가지만, 인간의 영혼은 불멸이어서 하나님 앞에 돌아가 누구던지 그가 살아 생전 선악간에 행한 그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고 성경은 분명히 경고해 주고 있다. 불멸의 세계, 생각지도 못했던 사후 세계, 자신이 그토록 무시하던 하나님의 얼굴과 영벌의 세계를 맞딱트렸고 그 앞에서 당황하며 절망스러울 수밖에 없는 그의 모습이 눈에 보이듯 선하다.
반대로, 인생의 끝자락에 서게 된 사도 바울의 고백을 한 번 들어보자.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 4: 67)
* 선한 싸움을 싸웠다 ( I have fought the good fight)
* 달려갈 길을 마쳤다 ( I have finished the race)
* 믿음을 지켰다 ( I have kept the faith )
바울, 그는 한해의 끝자락에서뿐만 아니라, 인생의 끝자락에서도 후회함보다 영광으로 그 광채를 더하여 간다. 날마다 그분 앞에서 살았기에 너무도 당당할 수 있는 백전노장의 모습을 보면서 많이 부럽다. 이런 바울의 고백에서 우리가 나가야 할 길을 배워둔다면 한해의 끝자락 뿐 아니라, 인생의 끝자락에 서게 되었을 때 한점 후회함이 없을 것이란 생각이다.
비욘드 라이프(Beyond Life), 죽음과 사후세계를 준비하라
"인생은 B(Birth)로 시작해서 D(Death)로 끝난다” 프랑스의 실존철학자 싸르트르(1905-1980)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굳이 철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한 시도 멈추지 않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문제는, 인생은 과연 B (Birth) 플러스 D(Death)로 끝날 것인가? 이런 것은 단지 믿지 않는 불신자들의 통상적인 사후관념일 것뿐이다.
그러기에,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죽음을 가리켜서 사망(死亡)이란 단어를 쓴다. 사망이란 단어를 살펴보면, 참 재미있다. 사망, 죽을 사(死)자, 망할 망(亡)자, 즉 ‘죽음’이란, ‘죽고 망한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믿는 사람 중에서도 사후의 세계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 자살을 하는 사람들의 내면에도 역시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이 깔렸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사람들이 힘든 상황에 부딪히게 되면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문제에서 도피하는 길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자살이라는 극단적 이기적 행동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사후세계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 27), 인간이 죽으면 끝이 아니라, 육신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 부활의 때를 기다리고 있고, 영혼은 그 주신바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전도서12: 7절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은 믿는 사람들의 죽음을 가리켜서 사망, ‘죽고 망한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성도에게 있어서 죽음은 쉬는 것이요,‘잠자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 내가 들으매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계14:13절)” 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 28절).”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친히, 영은 불멸하며 사후에는 선악 간에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증거하셨다.
죽음 앞에서 만민은 평등하다. 그러나 사후 세계에서는 분명히 다르다. 사후 세계에서는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어주신 대속주, 그리스도(Christ) 그분의 은총과 은혜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마음속에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흔히들 말하는 그 DNA가 엄연히 다르다. 사후세계는 영원한 지옥이냐, 영원한 천국이냐…가는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있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으로,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은 영원한 백보좌 심판대 앞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이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 시간으로 이 한해의 끝자락을 마무리 하는 사람이라면 지혜로운 마무리가 잘 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 26-27절 말씀)”
필자가 좋아하며 아끼는 외국 詩 한 편을 소개해 드리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The Paradoxical Commandments - Kent M. Keith)
역설적 계명 - Kent M. Keith
People are illogical, unreasonable, and self-centered.
Love them anyway.
사람들은 종종 비논리적이고 불합리하며 자기중심적이다
그렇더라도 그들을 사랑하라.
If you do the good, people will accuse you of selfish ulterior motives.
Do the good anyway.
네가 선(善)을 행하면 이기적이거나 무슨 저의가 있을 거라고 탓할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선을 베풀어라.
If you are successful, you will win false friends and true enemies.
Succeed anyway.
네가 성공하면 거짓된 친구나 진짜 적을 얻게 된다.
그렇더라도 성공하라.
The good you do today will be forgotten tomorrow.
Do the good anyway.
네가 오늘 한 선행을 사람들은 내일 잊어버릴 것이다.
그렇더라도 선을 행하라.
Honesty and frankness make you vulnerable.
Be honest and frank anyway.
정직하고 솔직함이 그대를 속상하게 할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정직하고 솔직해라.
The biggest men and women with the biggest ideas can be shot down by the smallest men and women with the smallest minds.
Think big anyway.
큰 생각을 가진 큰 사람들은 편협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당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크게 생각하라.
People favor underdogs but follow only top dogs.
Fight for a few underdogs anyway.
사람들은 약자의 편을 들지만, 결국 강자만을 쫓는다.
그렇더라도 소수의 약자를 위해 싸워라.
What you spend years building may be destroyed overnight.
Build anyway.
네가 수년간 쌓아 올린 것을 누군가 밤새 무너뜨릴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그것을 쌓아라.
People really need help but may attack you if you do help them.
Help people anyway.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네가 돕더라도 그들이 너를 공격할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도와주어라.
Give the world the best you have and you'll get kicked in the teeth.
Give the world the best you have anyway.
네가 가진 최고의 것을 세상에 줘도 하찮은 결과로 네게 돌아 올 수 있다.
그렇더라도 네 최고의 것을 세상에 주어라.
출처: 목양연가/ 글: 최 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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