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예정론 소고-제롬 장키우스(Jerom Zancius)
예정론 2017. 1. 28. 20:44제롬 장키우스(Jerome Zancius 1516 - 1590)의 절대예정론 소고
1. 절대 예정 회심과 구원은 그 본질적인 면에서 볼 때,
세 가지 중 하나인데
1. 반드시 홀로 우리들 만에 의해서,
2. 혹은 우리들과 하나님이 함께 함을 통해서 아니면
3. 오로지 하나님 자신을 통해서만 시행되어야 하고 또 효력이 발생되어야 한다.
펠라기우스파는 처음 것에 찬성한다.
알미니우스파는 두 번째 것에 찬성한다.
참된 신자들은 마지막 것에 찬성한다.
예정을 부인하라. 숭배할만한 신격의 완전성들을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예정 없이는 유지될 수 없기 때문에 예정은 전파되어야 한다.
성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 파에 맞서 쟁론하는 것이다. 그들은 은혜가 모든 인간들에게 다 똑같이 제공된다고 가르쳤고 그렇게 제공된 은혜와 구원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권한에 달려 있다고 가르쳤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조건 없이 주시는 칭의의 교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조건 없이 예정하셨다는 점에서 지지를 얻을 수 있는데, 이는 후자가 전자에 대한 원인과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를 예정하사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다(엡1:5,6)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 혹은 구원을 받게 될 자들은 그들이 선한 일을 단 하나도 이루어 놓기 이전에 [이미] 제정된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의 결과로,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구원을 얻는다.
내적인 구원의 사역은 값없이 공로 없이 오직 은혜만 하나님은 지금도, 또한 전에도 항상, 지극히 완전하게 지혜로우시므로 그가 모르고 계시거나 하나님의 아심을 피하여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하나님의 영원부터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 아신바 되었다. 하나님은 그 어느 것도 당신께서 영원부터 알고 계시지 않았거나 예지하지 않으셨던 것에 대해서는 지금도 알고 계시지 않으며 앞으로도 알지 않으실 것이다.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게 된다.”(히4:13)
그가 미래에 될 일도 예지하고 계신 것은 무슨 일이건 반드시, 또한 의심할 바 없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작정과 정하심을 성취하는 것이기는 해도 강압적으로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흔쾌히 행하는 것이다. 후자는 전자의 결과로서 비롯되며 또한 전자를 기초로 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허락 없이는 인간도 악마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허락하신다는 것은 적어도 막지는 않으신다는 것과 같으며 ‘막지 않으심’은 확실히 하나님의 의지의 행위인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이 그처럼 타락할 것으로 뜻하셨기 때문에 아담에게 죄에 빠지는 것을 허락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의지는 감추인 것과 드러난 것으로 정당하게 구별된다. 왕이 이스라엘을 가도록 해서는 안 되었던 것,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여서는 안 되었던 것(창 22:12), 그리고 베드로가 자기 주님을 부인해서는 안 되었던 것 (마26:34)등은 바로 하나님의 감추인 의지였던 것이다. 인간의 구원과 정죄에 관한 하나님의 의지는 결코 스스로 모순되지 않으며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에 대한 구원과, 그와 반대로 택하시지 않은 자들에 대한 정죄에 대해 변치 않는 작정을 하신다)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사46:10)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시33:11).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욥23:13, 14)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흡니와 비느하스가 자신들의 사악함을 꾸짖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은 것은 여호와께서 저들을 죽이기로 뜻하셨기 때문이며(삼상 2:25), 헤스본 왕 시혼이 모세가 사자를 보내 평화의 말로 이른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시려고 그의 성품을 완강케 하셨고 그의 마음을 걍팍케 하셨기 때문이다(신 2:26, 30).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의 눈은 감기시고, 또 어떤 이들의 마음은 걍팍하게 하시는 일들이 전에도 있어왔고 앞으로도 있게 될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눈멀고 마음이 완고해지기를 허락하시며 그들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와 고침을 받지 못하도록 고의로 막으시는 것이다(사 6:9, 요12:39, 40)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피조물들을 업신여기시지 않으며, 또 그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작정하시는 의지를 준행하지 않고 소홀히 한 것에 대해 변명할 수도 없다. 그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은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 주입해 넣으신 그 어떤 악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본성이 갖는 악과 그들 자신의 의지가 갖는 사악함으로 인한 부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시려고 자신에게로 초청하지는 않으신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은혜로운 감화를 주셔서 흔쾌히 하나님께 나오도록 해주시는 모든 개인은 조만간 하나님에 의해서 반드시 구원을 받으며, 그 구원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작정하시는 의지를 무시한 것에 대해 변명할 수 없다. 하나님의 나타내신 바 된 의지를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했고, 숨은 의지는 단호하고 절대적이며, 결과를 내는 데에 있어 어떤 방해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의 의지란 하나님 자신의 뜻하심을 말하며, 결과적으로 그 의지는 전능하여 좌절될 수 없다. 절대 주권적 의지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것은 무엇이건 결과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나타내신 의지에 반하여 많은 일들을 행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극히 위대하며 그의 진리는 불가침이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자신이 예지하신 경로를 따라 이끌어 가신다. ”피조물의 어떠한 자유 의지도 하나님의 의지를 저항할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결정에 대해 이를 막으려는 뜻을 품을 수도 그 결정을 헛되게 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힘을 이길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지는 만사에 있어 첫째이며 최고의 원인이다.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단 4:35) (시135:6) (마10:29)
“유효하게 하심이 되든, 혹은 허락하심이 되든 간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시기로 작정하심이 아니고는 어떤 일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루터, 반드시 견제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의지가 아니고는 아무것도 존재하거나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일이다.
하나님이 전능하지 않거나 하나님 없이도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면 그는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11:25) (눅12:32)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막3:3)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1:8)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3) 롬(9:15, 18)
각 사람이 모두 다 구원받도록 작정하지 않으셨고, 지금도 그렇게 작정하시지 않는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만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단 한 영혼도 결단코 잃어버린바 될 수 없었을 것이며(누가 그의 뜻을 거스릴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전 인류 가운데서 몇을 다시 말해서 모든 나라와 혈족과 언어들 가운데서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은혜로 택하신 자들 전부를 다 구원하신다. 하나님은 버림받은 사람들의 구원을 작정하지 않으신다. 그들을 택하시지 않은 이상, 그들이 결국에는 구원을 받도록 창조하지도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가 개인마다 다 구원 얻도록 의도하지 않으시며 아버지 하나님의 지정하심을 따라 그리스도께서는 계획적으로 피를 흘리신 것이며 그 보혈은 오직 선택하신 자들을 위해서만 유효하며 즉각적 관련이 있다는 결과가 된다. 그가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자들을 위해 죽으시도록 그의 아들을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바 된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얻는다. 오직 택하신 자들만 구원을 받는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그들만을 위해 죽으셨고 중보하심이 된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은 제외시키고 그들을 택하셨다)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즉, 다른 이들은 제외시키고 그들을 위해 죽으셨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셨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바 된 저들은 (의롭다 하심과 구속하심의 정도가 꼭 같다) 정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특권들은 택함을 입은 자들에게로만 분명히 제한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들만 의롭다 하시고, 그리스도께서는 그들만을 위해 죽으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자주적이며 자의적인 허락을 죄에 대해 내리신다고 해서, 어떤 사람에게도 결코 그 죄를 짓도록 강요하시거나 강제적 필연성을 부과하지는 않으신다. 절대로 하나님을 도덕적 죄의 창조자라고 칭할 수 없다.
죄에 대해 의도하셨다고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성적인 거룩함과 청렴함을 손상시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우리가 외적으로 행하는 일 뿐 아니라 심어지는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일들까지 모든 만사가 결국은 하나님의 예정에 따르는 것임이 판명된다. 같은 곳에서 덧붙여 말하기를 “우연이나 운명 따위는 아무 데도 없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을 알게 되고 하나님께 우리의 전적인 신뢰를 드리기 위해서는 예정론의 교리에 철저히 정통하는 것보다 더 손쉬운 방법은 없다. 시편 135:6, 마태복음 10:29, 잠언 16:1, 마태복음 26:54, 누가복음 22:22, 사도행전 4:28, 에베소서 1:11, 이사야 46:10
영원 전부터 작정하신 것이 아니고는 지금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으신다. 우리 대신 도덕법에 순종하시고 그 법의 저주와 형벌에 대해 복종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보증과 대신이 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는 우리 모두는 결단코 하나님의 미움을 초래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죄에 대해 처벌당하지도 않을 것이고, 오직 우리가 영원 전부터 그러했듯이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됨은 영원토록 계속되는 것이다.
절대적 의지는 불변하고도 전능하므로 우리는 택하심을 입은 각 사람의 구원이 절대로 변함없이 확실하며, 그 의지는 좌절 될 수도 무효화 될 수도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의도하신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의심할 바 없이 꼭 보증할 것이라는 데서 귀결된 것이다.
하나님 자신은 본질적으로 불변하신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명백히 불완전한 분이실 것이다. 이는 누구든지 변한다는 것은 더 낫거나 혹은 못하게 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더 좋게 변하실 수 없다. 만일 변하실수 있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전에는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좋지는 못하셨다는 것을 암시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더 못하게 변하실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불변하시다. 그리고 성경에서 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이것이다.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말3:6)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년대는 무궁하리이다(시102:27)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23:1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삼상 15:29)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욥23:13) ”
나 여호와가 말하였은즉 그 일이 이룰지라. 내가 돌이키지도 아니하며 아끼지도 아니하며 뉘우치지도 아니하고 행하리니“(겔24:14)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11:29)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민23:19, 삼상 15:29, 욥23:13, 겔24:14, 롬11:29, 딤후 2:13)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서게 하려 하사(롬 9:11) ?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사랑’이 하나님께 대한 서술어로 쓰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열정 혹은 애정으로서의 사랑을 소유하셨다고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에게서는 그런 뜻으로 쓰이겠지만, 만일 하나님께 대해 그런 의미로 생각되어 쓰인다면 하나님의 존재가 갖는 순전함과 완전함과 독립성을 완전히 파괴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하나님께 대한 속성으로 사용될 때, 그 의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자비, 즉 자기 백성을 해방하시고 복 주시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영속적인 의지, 목적, 결심을 뜻한다. 그들이 행한 어떠한 선한 업적도 이에 대해 ‘원인’이 되지 않는다. 그 용어는 하나님께 ‘만족, 즐거움, 허가를 의미한다.
이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자신의 택하신 자들조차도 그들 자체로서 고려해 볼 때에는 그들이 죄를 범하였으며 더러워진 죄인들이라는 점에서 그들을 사랑하실 수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께 연합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의에 함께 참예한 자들이 되었으므로 아주 영원 전부터 그 사랑의 대상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워한다는 말이 하나님의 속성과 관계되어 나타날 때는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지도 않을 것이며 영생에 관계되어 있는 저 은혜들을 조금도 입게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뜻한다.
그래서 내가 에서는 미워하였다. 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아주 영원 전부터 그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기로 하나님 자신 속에서 참으로 작정하였다고 하신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불쾌하게 여기시며 싫어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죄를 처벌하시고 멸망시키겠다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의지를 나타낸다. 내세에서 그들에게 임하는 비참한 고통은 다만 필연적인 결과이며 실제적인 집행일뿐인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을 일부를 선택하시는 바, 영원하고 주권적이며 무조건적이고 각별하며 불변하는 하나님의 행위를 나타낸다. 그것은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택하신 자들을 효과적으로 부르시어 세상으로부터 실제적이고 가시적으로 분리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요 15:19- 그 선택에 의해, 하나님께서는 강력하고도 효능있게 제자들을 회개치 않는 세상으로부터 나오도록 부르셨고 또 회심하도록 위에서부터 그들을 촉구하셨다.
외적인 부르심을 입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반드시 다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 가운데 다수가 버림을 받을 수도 있고 또 버림을 받는다.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란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등등의 말씀으로 설명하시는 것과 같다(마13:20) 13:11.40,41;24:30,31(택하신 자들)
그리고 사도는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라고 하신다. 그 이유?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요일2:19)
선택에는 가시적인 교회 안에서나 혹은 국가생활 속에서 어느 특별한 지위나 임기를 채우도록 한시적으로 지명하시는 것도 있다
유다가 사도로 선택받았으며 (요6:70)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도록 택하심을 입은 것이다.(삼상 10:24)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은 영광에로 선택해 주셨으면서 어떤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영원히 누락시키시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정하신바 저들로 불법함의 분량을 채우게 하시고 그 후에 그들의 범죄함에 대하여 공의로운 형벌을 받게 하시는 것.
예지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할 때
(1)하나님께서 아주 영원 전부터 자신께서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지, 또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이 두 가지 모두를 알고 계신바, 모든 행위들에 대하여 그것이 선하건 악하건, 혹은 자연적이건, 상관없이 모든 것들에게로 확장된다. 대상이 되는 하나님 자신의 택하신 자들을 위한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의미에서 오직 그들만을 아시며 또한 미리 아신다고 한다. ‘미리 제정하다’ ‘미리 결정하다 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창조된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예정하심의 대상이 된다. 이성적 존재이든 비이성적 존재이든,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간에 그 예정의 영향으로부터 면제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존재들은 어떤 것이든지, 가장 높은 천사들로부터 가장 하찮은 파충류에 이르기까지 가장 하찮은 파충류에서부터 가장 작은 원자에 이르기 까지 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과 특별하신 섭리의 대상들인 것이다. 교부들은 이 예정이라는 단어를 천사들이나 인간들에 대해 (선하거나 악하거나 간에)언급할 때에만 사용하고 있으며 자기 백성들을 영생으로 선택하심과 지명하심에 관련되는 한 부문을 의미하고 있다.
예정을 택하신 자들에게만 관련되는 것으로 그러면 예정의 정의는 영원하고 무조건적이며 특별하고도 파기할 수 없는 신적인 의지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 (마24:2,312) (행 13:48) (롬 8:30) (엡 1:4,5) (딤후1:9) (엡1:5,6)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면(롬11:5,6)
유기에 대해서(1)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사망으로 예정하심이 있다.(고후4:3) 정하신 것이라(벧전2:8)-1:2,9 (벧후2:12)-1:10;3:9
(택함 받은 모든 자)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유4)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계17:8) (마25:46)
누구든지 하나님의 이 의지와 작정과 예지를 부인하는 자는 암시적으로 또 실질적으로 하나님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영원 전부터 작정으로 정하셨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작정으로 정하심이 없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미리 계획하심이 없이 무엇인가를 행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명백한 비방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작정의 결과로 타락했다는 것을 우리는 이렇게 증명한다
(세 가지 중 하나인데)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타락을 원하셨거나 혹은 원하지 않으셨거나 혹은 그것에 대해 무관심하셨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이 범죄함을 내키지 않게 여기셨다면 어떻게 아담이 타락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겠는가? 피조물인 자신들을 만드신 하나님보다 인간이 더 강하거나 사탄이 더 지혜롭다는 말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다시 말하건대, 하나님께서는 이 일이 하나님께 매우 기뻐하시는 바였더라면, 저 유혹하는 자가 낙원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으셨을 수도 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천사들로 하여금 변함없이 오직 선만을 결정하며 악으로는 치우칠 수 없는 의지를 갖도록 창조하셨듯이 인간도 그렇게 창조하셨을 수도 혹은 최소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은혜와 힘이 죄의 모든 유혹에 대해 저항하기에 실질적으로 효능이 있도록 하셨을 수가 있지 않을까?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된 것이 아니며, 혹은 참새도 “너희 천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처럼 가장 하찮고 시시한 것들도 하나님의 작정이 있는데, 세상의 피조물 가운데 가장 우수한 걸작인 사람은 그 얼마나 더 하겠으며, 누구보다도 그 사람 아담은 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그가 창조주의 손으로 지음 받은 그 당시에, 그는 하나님 자신의 살아있는 형상이었던 자가 아니며, 천사들보다는 아주 조금 열등할 뿐인 자가 아니었던가! 또 그 자신의 복지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복지 역시 그의 견인에 달려 있었던 것이 아닌가? 유기
(2) 보편적으로 모든 인간이 다 구원으로 택하심을 입지는 않았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인류의 각 개인 모두를 다 구원하시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단 12:2, 마25:46, 요5:29) “멸하기로 준비된”것이며 “악한 날에 적당하게”하신 것이라는 점 더러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 있다(마 20:16)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진”(롬 11:7) 그 적은 무리(눅 12:32)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다른 이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너희에게는 허락되었다”(마13:11)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롬 11:5) 하나님이(우리를)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우리)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살 전 5:9)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려(벧 전 2:9) 하신 자들이며, 히12:23자들이다. “생명책에 있으며(빌4:3) 하늘에 기록된(눅10:20) 히12:23) “저가 별의 수효를 계수하시고 저희를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능력으로 지으신 별들과 및 다른 생명 없는 피조물들을 하나님께서 모르신다는 하는 것만큼이나 전지하신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지식에 모순 되는 말이다.
선택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것이 된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보다 가깝고 특별한 의미에서 아신다(딤후 2:19)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출33:17,19-롬9:15,30-32;출32:22) 너를 알았고(렘1:5) (눅10:20;12:7) (요13:18) (요10:4,14,26,27) (딤후2:19) 선택과 유기의 작정은 변경할 수 없고 취소할 수 없다. 만일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1) 하나님의 작정은 불확실하고 좌절될 수 있고 불명확하며 결과적으로 전혀 작정이 못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예지는 동요하고 막연하며 자칫 실망시키기 쉬운 것이 될 것이다. (사46:9,10) (롬 11:29) (요13:2) (롬 9:22) (유4) (살전2:12)
영광에 이르게 하는 분이 누구인가? (살전1:4 롬8:30,31,33,38)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신 자(롬1:28) “어떤 사람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다른 사람들에게 대한 미움은 불변하며 바뀔 수 없다”
영생에로 제정하심을 입은 자들은 그들 속에 어떤 예견된 가치가 있어 그러한 제정을 입은 것도 아니며, 어떤 선한 공덕으로 인함도 아니고 믿음과 회개와 거룩함은 영생 그 자체 못지않게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다.
(믿음은 선택의 열매? 믿게 하기 위해서 선택함인가, 믿는 자를 선택함인가?) (빌1:29) (행 5:31) (행 11:18) (롬 9:11) (요15;16) (요일4:10, 19) (막 13:20, 롬9:17, 엡1:4, 살전5:9, 살후2:13)
우리가 거룩해지도록 하시려고 우리를 택하신 것이다.(엡 1:4)?
그 아들의 형상을 본 받게 하기 위해서,미리 정하셨다.(롬1:29)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택하신 자들은 아낌없이 거저 주시는 은혜로 사랑을 받았고(호14:4), 선택을 받고(롬 11:5,6), 믿음은 택하심으로 인해 맺는 열매들 가운데 하나라는 것,
어떤 경우에도 믿음은 선택의 조건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믿음을 갖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를 선택하신다는 말씀이 아니겠는가? 영생에로 제정하심을 입는 자들은 그 수가 얼마가 되든지 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통하여 또 오직 그의 공로로 말미암아서만 영생을 누리도록 제정된다(살전5:9)
택하심 그 자체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공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직 절대 주권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있는 것임을 주의하자. 또 그 생명을 누리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모든 수단들 즉, 회개와 믿음과 거룩하게 함과 끝까지 성도들 안에 함께하는 인내(견인)도 예정된 것이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엡1:4) (엡2:10) (살전 1:4, 5:9, 4:3)
지정하신 이것 역시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을 확신시키고 있다.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2:13) (벧전 1:2)
왜 택하셨는가? (거룩은 누구의 역사로 가능한가?)
원래 정죄함의 선고를 받는 것에서 면제된 자들은 의심할 바 없이 복음을 듣도록 이끄심을 받으며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안에서 끝까지 인내하도록 만들어 주심과 또 비록 어느 때든지 곁길로 갈지라도 다시 회복되게 하심과 바로잡아 주심을 받는 것이다.
택하심을 받는 자들은 단 한명도 멸망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에로 정하신 자들이 하나라도 빠짐없이 다 영원토록 영화롭게 되어야 한다고 순전하고도 불변하게 작정하신다.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 미리 예정하신 자들은 그들이 하나님 자신의 택하신 자들인 까닭에 그 가운데 아무도 멸망하지 않는다고 하면서”그들은 예정하심을 입고, 미리 아신바 되고 목적을 따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마찬가지로 루터도 “하나님의 예정하심의 작정은 확고하고 확실하며 그것으로부터 유래된 필연성 역시 한가지로 확고하게 반드시 생기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들이 너무 약하기 때문에 만일 그 일이 우리 손에 맡겨지게 된다면 구원을 받게 될 자는 겨우 몇 명뿐이거나 아니, 하나도 없게 될 것이며 오히려 사탄이 우리 모두를 이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제, 하나님의 이 확고부동하고 분명한 목적은 그 어떤 피조물에 의해서도 파기되거나 무효화될 수 없으므로, 지금은 죄가 아무리 격렬하게 우리의 죽을 몸에 대해 맹위를 떨친다 하더라도 우리는 결국에는 죄를 이기고 승리할 것이라는 아주 확실히 보장된 소망을 우리는 가질 수 있다”고 적고 있다.
“우리를 택하사 거룩하게 하시려고”(엡1:4) 따라서 선택된 자는 모두(오직 그들만) 거룩하게 하심을 입는다. 그리고 거룩하게 된 자들은 모두 자신들이 선택되었다는 것과 확실히 구원얻을 것을 믿을 권리가 있다.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너희가 내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요10:26) 믿음은 택하심의 증거, 혹은 그리스도의 양 무리의 수에 들어있다는 증거, 결과적으로 구원의 증거인 것이다. 이는 그의 양들은 모두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요 10:28)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자신들이 생명에로 예정된 것에 대해 지식이나 확신에 도달할 수가 있으며 또 그것을 추구함이 마땅하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쟁론할 수 있을 것이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나는 내가 영생에로 제정됨을 믿는다.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따라서 나는 내가 구원받은 상태에 있음을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예정하신 자들을 부르셨고, 의롭다 하셨고, 또 영화롭게 하셨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고 또 의롭다 하셨다고 신뢰하는 이유를 갖고 이다. 따라서 나는 확신을 가지고 나에 대한 영원한 예정에 대해 거슬러 올라가 생각할 수 있고 나에 대한 확실한 영화에 대해서도 내다볼 수 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믿는 자의 양심으로 더불어 그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는 그 직접적인 증거에 대해서 전적을 동의하는 일이 빈번하다(롬 8:16, 갈4:6, 요일5:10)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눅12:32)는 사실이 변경될 수 없음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도가 가진 믿음이었다(롬 8:38, 39) 성 바울 역시 믿음을 가진 데살로니가 성도들 속에서 은혜로운 열매들을 바라보면서, 그것으로 인해 그들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임을 알았으며(살전1:4,5) 또한 에베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선택받았음도 알았던 것이다(엡1:4,5) 이상, 우리는 감히, 또는 절대로, 살아있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비록 그가 현재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사악하다 할지라도, 그가 택하심을 얻지 못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어쨌든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비록 가장 악한 죄인일지라도 택하심의 은혜에 속할 수도 있고, 또 언젠가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하심을 입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이것이다.
버리심에 관한 교리로서의 예정론 다른 이들에 대해 거절하심이 틀림없이 있다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빼놓지 않고서는 선택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타락한 후손 중에서 얼마를 그들의 죄악 중에 남겨두시기로, 또 그리스도께 관계됨과 그의 은택으로부터 제외시키기로 영원 전부터 작정하셨다.
이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모든 세대에 걸쳐 인류의 대부분은, 심지어 은혜의 외부적인 수단조차도 결핍된 상태였으며, 또 그들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거나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 계시가 주어지는 호의도 입지 못했다. 가장 적은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여러 세대에 걸쳐 내려오면서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관해 특별한 발견을 하도록 허락하시기를 기뻐하셨던 단 하나의 민족이었으며 또 우리가 주님께서 친히 자신의 공적인 사역을 그 백성들에게로 한정하셨다는 것 주님의 부활하신 후가 되기 전까지는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에게 차별 없이 복음 전하는 것을 제자들에게 위탁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많은 나라들과 공동체들이 하나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을 듣는 유익을 결코 갖지 못했었고, 결과적으로 그 말씀으로 말미암는 믿음에 관해서는 외인들이었던 것이다.
빛을 받지 못한 나라들에서 사는 개인들이 더러는 은혜로 비밀하게 택하심을 받을 수도 있고 또 믿음의 성향이 그들 안에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 일반적으로 세상 나라들은 하나님 그 자체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방법,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된 방식,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즐거움에 도달하는 수단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께서 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더라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일반적인 구원의 수단을 허용하셨을 것이 아닌가?
오늘날에도 지구상에 있는 아주 많은 나라들에 대해서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에게는 은혜의 수단을 거절하시고 그들을 총체적 어둠과 불신앙 가운데 가두어 두실 수 있다고 할진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은혜 그 자체로부터 또 은혜와 관련되는 영생으로부터 제외시키는 것이 어째서 하나님의 지극히 영광스러운 완전함에 모순된다고 생각되어야 하는 것일까?
절대주권의 감독자가 되심을 보면서 말이다. 그 양자 모두가 매우 당연하게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실제로 어떤 사람들을 끝내 회개치 않음과 불신앙에 남겨두시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이것이 그렇게 하기로 정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은 창세전부터 버리셨다고 확실하게 추측하는 것이다.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마7:23) “영원 전부터 나는 결코 너희를 사랑하지도, 승인하지도 또 내 것으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절대로” 바꾸어 말하면 “나는 너희를 미워하였다”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에서)온 인류를 크게 두 계층으로 나누신다. 그 하나를‘세상’이라 부르시고, 다른 하나는 ‘세상에서 내게 주신 자’라고 하신다. 후자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하셨다고 하시면서 심지어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자신을 사랑하신 것 같이(요 17:23) 영원하게 사랑하셨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도 그렇게 사랑하시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들을 영원 전부터 사랑하신다면, 그것은 대조법의 모든 규칙에 입각해서 하나님께서 다른 이들에 대해서는 그만큼 일찍부터 미워하셨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로마서9장)라고 하신다. 저 두 쌍둥이 야곱과 에서의 예를 통해 사도는 어떤 사람들에 대한 영원한 택하심과 나머지 모든 사람들에 대한 영원한 거절을 암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작정하셨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이 실제로 되는 것과 유다가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것을 유효하도록 허락하신 것이었다.(행4:27,28 마26:23, 24) 우리가 주님께서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 하였느나.
그러나 너희 중에 하나는 마귀니라’고 말씀하심을 들을 때에 우리는 그것이 열한제자는 은혜로 택하심을 입었으나 유다는 심판으로 택하심을 입은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유다는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그의 피흘리심의 수단이 되는 자로 택하심과 세우심을 입었다. 택하시지 않은 자들을 최후까지 회개치 않음과 죄와 불신앙을 계속해가도록 예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옥의 사망에 이르도록 공의롭게 지정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건 오직 하나님 자신의 작정의 결과로서만 행하시며, 또 행하실 것이다.(시135:6, 사46:11, 엡1:9,11)
불의한 자들에 대한 정죄는 하나님의 작정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작정하셨다면 그것은 영원 전부터 작정하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작정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만일 형벌의 불이 영원전부터 작정되어 그들을 위해 준비되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그 불을 위해 준비된 것, 즉 그 불을 위해 고안된 것이다. 이것이 내가 증명하고자 시도하는 요점.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롬 9장) 그들은 버림받은 자들이며 그밖에 달리 어쩔 수가 없는 자들인 것이다. (잠 16:4, 벧전 2:8, 벧후 2:12, 유4, 계13:8 )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 미래에 행할 믿음과 선행이 저들을 택하심에 대한 근거가 되지 아니하였던 것처럼 버리심을 받는 자들에게 미래에 행할 죄가 저들을 버리심에 대한 근거는 아니다. 전자의 선택과 후자의 버림은 순전히, 또 전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의지와 기쁘심을 따라 정하심에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뻐하심대로 저들을 영적 어둠과 자연적 사망 가운데 남겨두시기로 결정하셨고 또 실제로 남겨두신다고 하더라도 그 상태로부터 저들을 구원해야 할 의무가 하나님께는 없다. 그들을 택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그들을 정죄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범죄하였기 때문에 정죄하신다 그들이 생명책에서 탈락, 혹은 비 선택됨이 하나님 편에서 불공정하신 것은 아니다. 버리신 자들에 대한 정죄는 필연적이며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지와 작정의 결과로 말미암지 않고는 어떤 일도 생겨나지 않는다. 비 선택자들은 그들로 하여금 정죄 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결정하심이 아니고서는 정죄받을 수 없으며,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정죄 받음을 작정하시고 결정하신다면 필연적이며 변하지 않은 것이다.
스스로를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이 되게 만들었으며, 하나님께서 그 죄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에게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주시기로 작정하지 않으셨으므로 그러한 고집 센 죄인들에 대한 형벌은 공정할 뿐 아니라 그만큼 필연적이기도 하다.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7장)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친히 선언하신 말씀이다. 타락한 죄인은 자신 스스로 은혜로운 성품을 산출할 수 없고 은혜로운 행위들을 발휘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출32:22;33:19) 어떤 성인도 그러한 품성들 없이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요2:25;3:3,5;마13:21)
결과적으로 버리신 자들은 타락하고 열매 없는 자들로서 반드시 찍혀 불에 던짐을 당해야 하는 것이다. 죄에서 구원을 얻지 못하는 자들은 반드시 멸망당함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버림받은 자들은 죄에서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버리신 자들로 하여금 죄에 빠지게 하여 결국은 그들의 의지에 반하여 비참해지도록 강요하신다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본성이 부패함의 결과로 인해 그들은 자발적으로 치우쳐 죄짓기 쉽게 되는 것이다.
택하신 자들의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궁극적 의도는 그들을 구원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 은혜와 사랑의 측량할 수 없는 부요함을 증거하고 알리시는 것이었으며, 비선택자들을 창조하심은 하나님의 공의, 권세, 절대적 주권, 거룩함과 진리를 나타내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장)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멸하기로 준비하신 진노의 그릇, 오래 참으심과 관용하심을 나타내신다. 택하신 자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예비하셨는데 ‘그 영광의 부요함’을 드러내시기 위한 것이다. 거부된 자들, 남겨진 자들이라 부르고 있다.
버리신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부당하신 것은 아니며 또 부당하실 수도 없다. 그것은 ‘여호와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행사에 은혜로우시기 때문. 하나님 편에서 부당한 일이 아니라면,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그렇게 결정하시는 것이 하나님 편에서 부당한 것이 될 수는 없다. 영원 전부터 그것을 결정하시고 작정하신다고해서 하나님 편에서 부당한 것일 수 없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토기장이가 한 덩어리의 진흙을 가지고 더러는 귀히 쓸 그릇으로, 또 다른 것들은 천하게 쓸 그릇으로 만드는 것만큼이나 부당하지 않은 것이다. 모든 피조물에 대해서 절대적인 주가 디시므로 하나님 자신의 것을 가지고 그의 뜻대로 처분하심에 대해 부당하다고 비난받을 수 없다. 버리심의 작정이 폭군적인 것도 아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육체와 영혼에 대해 절대불문의 무한권리를 가지신다. 어떤 사람들은 은혜로 구원하시고 다른 사람들은 공의로 처벌하심을 통해 그 권리를 명하시고 나타내신다면 우리가 누구관대 감히 하나님께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버린 자들에게 대한 작정 안에는 하나님의 그 속성들이 갖는 완전함과 충돌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타락한 인류 가운데 일부를 내버려두시며 그들의 죄로 인해 그들을 처벌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더더욱 그 속성과 충돌될 수 없다.
또 구원하시는 은혜를 어떤 사람들로부터는 박탈하신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에 불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은혜를 주실 의무를 지시지 않는다는 것을 볼 때 더욱 그러하다.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할 의무가 없으신 것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다 택하시지 않은 것은 불공정하시다고 비난하듯이, 같은 이유를 들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능력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을 천사로 만들지 않으신 것에 대해 불공평하다고 버릇없이 비난할지도 모른다.
더욱이 비선택자들의 죄가, 택하심을 입은 자들의 죄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속함을 입었듯이 그렇게 속함을 받지 않았는데, 바로 그 죄 때문에 비 선택자들을 정죄하시는 또 정죄하기로 결정하시는 것이 어찌 하나님의 정의를 파괴하는 일이 될 수 있겠는가?
주권적으로 선택에서 탈락되게 하심과 죄에 대해 공의롭게 정죄하심에 관한 작정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어찌 모순이 된다는 말인가? 조금도 모순이 아니다. 전혀 모순되지 않기 때문에 만일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지 않고 또 죄를 처벌하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실 수 있는지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게 된다. 또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와 성실에도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왜냐하면 최후까지 사악한 자들이 만일 정죄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땅에 떨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어떤 자들을 버리신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잔인한 역할을 하시는 것은 아니다. 누구든지 일단의 극악한 죄인의 무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해서 또 그들에게 법의 선고가 내려져 그들이 처형되게 하였다고 해서 최고 판사를 잔인하다고 고발하는 자가 과연 있겠는가? 실로 만일 판사가 그들 가운데 일부에게 동정 베풀기를 기뻐하여 그들의 벌을 경감한다면 우리는 그의 관대함에 갈채를 보낸다. 그의 긍휼은 값없이 베푸시며 또 자의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뻐하시는 자에게로 긍휼을 확장하실 수도 있고 혹은 그에게서 긍휼을 박탈하실 수도 있다.
또 만일 우리가 땅에 있는 최고 판사가 가지는 것으로 인정하는 동일한 특권과 자유를 천지를 다스리시는 전지하신 통치자이신 대 주지께 대해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면 이는 참으로 슬픈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선택하시고 다른 사람들은 거절하신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차별대우하시는 분이 되시는 것도 아니다.
천벌은 사악한 자들에게 채무와 공의와 응징으로서 주어지는 것인 반면, 은혜는 구원받은 자들에게 값없이 공력 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천벌을 받는 죄인은 그의 형벌에 대해 자신은 벌 받을 만하지 않다고 우겨댈 수 없으며 또한 성도들도 마치 자신이 상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인양 허풍 떨거나 자랑할 수 없다.
어떻게 버리심의 교리가 미래의 심판 교리와 조화될 수 있겠는가 이 두 가지를 조화시키는 것은 전혀 수고로운 일이 아니다. 처음 창조부터 마지막 만물의 완성까지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영원하고도 불변하는 목적의 결과로서 그의 택하신 자들 안에서 또 그들에 대하여 자비롭게 역사를 행하시며 버리신 자들에 대해서는 묵인하시는 가운데 그들을 강퍅하게 하신다.
그러나 마지막 날이 이르러 섭리와 은혜의 모든 계약이 끝맺음되면, 그때에는 그리스도께서 심판자로서 좌정하실 것이 확실하다. 택하신 자들의 육체와 영혼을 영광에로 받으시고, 버리신 자들에게는(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어서 행했던 일들 때문이 아니라)오직 그들이 하나님의 일들을 고의적으로 무시한 것과, 그들의 철저한 불신앙과 그들이 도덕적 의무를 불이행한 것과 반복적으로 범한 그들의 불법함과 범죄함 때문에 심판의 선고를 내리심으로써 그의 영원하신 작정을 공개적으로 공포하시고 엄숙히 비준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은 택하신 자들은 아무도 망할 수 없고 또 버리신 자들은 누구도 구원 얻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서의 모든 교훈들과 책망들과 권고들, 혹은 인간 편에서의 기도들이 당연히 소용없고 헛되며 하찮은 것이 되지는 않는다.
택하신 자들에 관해서는 이것들이 헛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택하신 자들로 하여금 진리에 관한 지식에 이르도록 하는데 필요한 수단이며, 나중에 가서는 그들의 정결한 마음을 각성시켜서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또 그들이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 안에 세워지도록 교화하고 확립시키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오, 인간이여 계명은 그대가 무엇을 가져야만 할 것인지 말해줄 것이며, 책망은 그대에게 무엇이 부족한 것인지를 보여줄 것이고 기도는 그대가 원하는 것들을 누구로부터 받아야만 하는지를 그대에게 가르쳐줄 것이다. 이것들은 버리신 자들에 관해서도 헛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훈과 책망과 권고는 마땅히 그것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도덕적, 외적 행동을 예의범절과 공평과 질서의 규칙에 따라 조정하도록 조심하게 만들어주는 수단이 되어 그들 스스로 겪을 많은 불편과 사회에 끼칠 손실을 예방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과 그의 사도들의 모범을 통해 입증하는 바는 절대예정은 설교와 권고 및 그 밖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거절하지도 않으며 또 불필요하게 여기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 모두는 절대예정 조항을 가르치고 주장했다. 구원이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며 하나님의 주권적 처분에 인간들은 스스로는 영적으로 선한 일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자기의 기쁘심을 따라 뜻을 갖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반박할 수 없도록 나타내 보여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또한 자신의 청중들이 이성과 양심을 소유한 존재라는 것에 대해 역설하기를 소홀히 하지도 않았으며 그러한 존재로서 그들이 가지는 의무에 대해 기억하게 해 주는 일을 빠뜨리지도 않았다.
죄와 위험에 대해 그들에게 구원의 길과 방법을 그들 앞에 제시하고, 우리 구주께서도 분명하게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시면 아무도 구주께로 올수가 없다고 확증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성취한 것이라고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이것 때문에 그들을 신랄하게 꾸짖는다. 구원은 하고자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다고 선언하면서도 상을 얻도록 달음질할 것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권면하고 있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한다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나님의 견고한 터, 혹은 주의 작정은 확실하게 서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온다”고 말하면서도 지혜가 부족한 자들은 하나님께 그것을 구하라고 권고한다.
따라서 이 모든 것들은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빈번히 비추어주는 수단이면서 그들이 은혜로 말미암아 믿게 된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져 가게 하는 수단이 되고 그들을 은혜 안에서 마지막까지 견인케 되도록 해주는 수단인 것이다. 이것들은 전혀 무익하거나 무의미하지 않다. 크게 유용하며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그래서 성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말씀을 선포해야 하며 반드시 책망해야 하며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 그 이유는 비록 은혜를 받지 못한 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지만 은혜를 받은 자들은 그대로 듣고 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예정의 교리는 전적으로 발표를 금하여 제쳐둘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학자들과 사변가들만의 탐구대상으로 제한해 둘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공개적으로 설교강단에서 가르치기도 하고 출판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예정의 진리에 관해서 다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교리를 전파함에는 분별력과 신중함을 갖고 하도록 하라.
즉 설교자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그대로 그 교리를 전하도록 하라. 복음은 전파되어야 한다. 지상명령은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정론의 특징적인 교리 없이는 복음 교리도 그 안에 순수성과 일관성을 갖고 선포될 수가 없다. 선택은 기독교 체계 전체를 관통하여 꿰는 황금 실이다. 예정론은 전체 기독교 체계를 서로 연결하여 유지시키는 묶는 띠로서, 이것이 없다면 그 체계는 일종의 모래 알갱이 체계처럼 언제라도 산산이 흩어지게 될 것이다. 대사는 자신에게 맡겨진 메시지 전체를 다 전달하여야 한다.
그 메시지의 어떤 부분도 생략해서는 안 되며 오직 그가 대리하는 그 주권자의 생각을 완전히, 남겨두지 않고 다 선언해야 한다. 다수의 타락한 인간들로부터 어느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전혀 낫지 못한데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뻐하시는 자들을 얼마가 되든 간에 사랑하시고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누구를, 또 얼마나 많이, 선택에서 제외하실 것인가 하는 하나님의 선택권에 대해서도 아무런 불공평의 흔적이 벗다. 그들을 택하시지 않음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의 결과였다.
그들이 죽은 후 마지막 날에 가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정죄하시는 것은 그들이 택하심을 입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택하심을 입지 못한 것이 그들의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오직 그들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범죄함에 대한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광스럽게 해야 할 극히 중대한 이유를 갖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가를 아는 지각이 그들로 순종케 하는 가장 강한 동기가 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버림을 받은자 들은 불평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정당하고 옳기 때문이며 예정론은 이것을 계시를 나타내는 교리요,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있는 교리이며 택하심을 입은 자들의 회개와 위로와 거룩하게 함에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공헌하는 교리이고, 심지어 경건치 않은 자들조차도 핑계치 못하게 만들어 놓는 교리인 것이다.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회개하였으리라(마11장) “천지의 주재인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그 일에 대해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부당하다고 고함치며 편파적이라고 비난한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마13) “내 좌 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영광 가운데 있는 그 자리들은 나의 아버지의 의도하심과 목적하심에 따라 오래 전에 준비되었다.
나는 다만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그 자리에 앉도록 준비된 사람들에게 그 자리들을 줄 수 있을 뿐이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으니라 복음의 소리가 들리는 곳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을 것은 아니며 다만 생명으로 택하심을 입은 자들만 얻을 것이다.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마24)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심으로 보아 그리스도께서는 두 가지 사실을 가르치고 계신 것이 분명하다. 은혜와 영광으로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의 정해진 숫자가 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미혹을 받아 총체적 혹은 궁극적 배교를 하게 되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10)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12)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눅6)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8)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15)
저희가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요12:37, 40) 예정 없이 특정한 미리 아심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예언과 미리 아심과 예정의 성취를 위해서 이 사람들이 믿을 수 없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명백히 말해주는 것이다.
그들은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요한의 복음서에는 거의 한 페이지도 빠뜨리지 않고, 분명하게 혹은 암시적으로 택하심과 버리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25절), 즉 그에게 작정된 형벌의 장소로 갔다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행2)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행4) 예정된 일은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 13): 생명으로 예정된, 운명지어진, 혹은 작정된 자들이다. 사도바울에 관해서는 내가 무슨 말을 할까? 그의 서신들을 읽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서신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예정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고 있다.
“하나님이 미리아신 자들로 (혹은 미리 사랑하신 자들‘이다. 이는 성경에서 ’안다‘는 말은 자주 ’사랑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갈1) 에베소서의 첫 장은 거의 전부가 택하심과 예정에 대해 다루고 있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
성 유다는 버리신 자들을 가리켜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로 묘사하고 있다.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그의 소유된, 하나님의 사유재산과 소유물이 되도록 사신 바 된 백성이다(벧전2:8,9)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계17:8) 여기서 ‘진정한 겸손’이란 스스로를 구원할 희망이 없는 자들을 의미, 자신의 구원은 자신이 가진 힘이나 책략, 시도, 자유의지 혹은 행위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한분만이 가지신 자유로운 기쁨, 목적, 결정과 및 효능에 의존하는 것임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진정으로 참회하고 겸손해 졌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이 하나님의 진리들을 아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겸손해지고, 스스로를 비우고 말하자면 하나님 존전에서 아무것도 아닌 자로 낮아져서, 영원한 영광을 가지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요, 회개한 자들이 은혜의 약속에 친숙하게 될 수 있도록 해주고, 하나님께 기도로써 그 약속을 구하도록 해주며, 은혜의 약속들을 그들 자신의 것으로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 루터-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과 관련되는 것이오. 비록 하나님께서 비교적 적은 수를 구원하시고 상당히 많은 수를 정죄하실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무한히 자비하시다는 것과 하나님 자신의 의지로 인류 가운데서 그 숫자만큼은 필연적으로 영벌에 처해지도록 하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엄격하게 공평하시다는 것을 확고부동하게 믿는 이것은 믿음의 가장 고차원적인 수준들 가운데 하나이다.
버리신 자들에 관련되는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보여주시는 진노와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신성불가침하게 공평하게도 하시며 무한히 자비롭기도 하신 가를 분명히 발견하는 것이 내 능력 안에 있다면 믿음은 (역할이) 거의 없어지거나, 무용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현재의 불완전한 상태에서 우리가 이런 것들을 충분하게 이해할 수는 없으므로 믿음이 발휘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부처도 루터와 의견을 같이하는데 특히 에베소서 1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공공연하게 택하심에 대해 언급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단정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복들에 대해서는 발표를 금할 것이 아니라 주장해야 하고, 또 그것들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야 하는 것이며, 또한 그렇다면 생명으로 예정하시는 복은 모든 축복 중에서도 가장 큰 복으로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영생으로 지정하심에 대해 숙고하는 것이야말로 의심에 찬 악한 추측들을 하는 것과 불신앙 가운데 남아있는 것에 대항하는 최선의 해독제인 것이다. 이 최고 특권에 대해 우리가 완전히 소망과 확신을 갖지 못한다면 미래의 축복됨에 관하여 도대체 무슨 확고하고 편안한 기대를 마음에 품을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나님을 은혜로우신 아버지로 또 그리스도를 우리의 변함 없으신 구주로 간주할수 있겠는가?
만일 하나님께서 일어날 모든 일에 대하여 영원 전부터 확실하게 예지하지 않으시고 또 예지하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의 지력은 무한하지 못할 것이고, 유한한 지력을 가진 분이라면 결코 하나님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결정하시는 의지 외에 과연 무엇이 예정이겠는가? 대 원인이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으신다는 것 그리고 때가 이르면 어떻게 행하실 것인지를 영원 전부터 작정하셨다는 것,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들에 대해 불변하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서 하나님의 작정들과 하나님의 본질은 일치 하며 그리고 그가 가진 의지가 변하기 쉽고 동요하며 불확실하다면 그 존재는 참 하나님이 될 수 없다.
계획하시는 예정이 없이, 그리고 그 계획을 집행하시는 섭리가 없이, 과연 무엇이 하나님의 전능이 되겠는가? 도대체 자기가 만든 바로 그 피조물들에게 좌절당하고 파기 당할 수도 있는 그런 종류의 전능이란 도저히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무릇 기뻐하시는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시135)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 되셔서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나님의 순전하신 긍휼과 자발적인 은혜로써 구원하시고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기에 제외시키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기시는 자들은 (그들의 죄로 인해) 마땅하게 정죄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정이 없다면 주권적 긍휼이나 자발적 은혜와 같은 것들은 전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작정 외에, 과연 무엇이 예정이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 안에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셨다고 말씀하신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그 후로는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것이다. 성 어거스틴은 이점을 잘 논하고 있다.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을 바로 예배할 수 있는지에 대해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듣고 교훈을 얻도록 독실한 경건의 의무에 대해 선포해야 하는 것처럼, 또한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듣고 어떻게 하여야 성화를 이룰 수 있는지 가르침을 얻도록 순결함을 공공연하게 권면하고 강화해야 하는 것처럼 그리고 더 나아가,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듣고 하나님과 자기 이웃에 대한 열렬한 사랑이 불일 듯 하도록 설교 강단에서 박애를 강권해야 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들을 귀 있는자들은 듣고 영광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 안에 있음을 알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하시는 자들에 대해 가지신 예정도 공공연하게 전파되어야 한다. 택하심을 입은 자들의 영화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안에서 매우 확실하게 정해져 있으므로 그들 중 아무도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중생한 사람들이 듣고 믿을 수 있게 될 때, 그리고 중생한 사람들이 자신들을 실제로 그리스도의 택하신 공동체(몸)에 속해 있는 자들로 생각하기에 이르게 될 때, 그 무엇이 그들의 믿음을 이와 같이 확립해주고, 강화해 주고, 확정해 줄 수 있는가?
또한 그러한 신앙이 뻔뻔스러운 것도 아니다. 이는 회심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택하심을 받은 것으로 결론지어도 되며, 또 마땅히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존경할만한 개혁가들은 우리의 39개 조항 가운데 17번째 조항에서 (거의 같은 말을 써서) 바로 똑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예정과 우리를 택하심에 대한 경건한 생각은 경건한 자들에게는 완전히 감미롭고 유쾌하며 이루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영원한 구원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크게 확립해주고 확인해주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오직 성부하나님께 택하심을 입고 성자 하나님께 구속함을 입은 자들만을 성령 하나님께서는 새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인 것이며,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속에 부은바 된’(롬 5:5) 자들이 마음에 품는다면 절대로 실망 가운데 끝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과연 어디서 누가 그들을 정죄한단 말인가? 누가, 또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을”것인가? “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하나님)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는”것이며 “내가 확신하노니, 나는 매우 명백하고도 확실하게 자신한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의 (견고한)터’, 즉 택하심에 따른 그의 작정, 혹은 목적은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예정론이 없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과 긍휼을 약동적으로 보고 경험하는 것을 누릴 수 없다. 구별이나 예외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베푸시는 복은, 기증자에게 있어서 특별한 사랑의 증거도 아니며, 받는 자에게 있어서 특별한 놀라움이나 감사를 일으키도록 기대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모두 중에서 선택하시는 것과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도록 자비롭게 죄와 형벌로부터 분리해 놓으시는 것은 가장 장엄하고 전적으로 무한하게 값없이 주시는 것임을 드러내시는 주권적인 선이었다. 예정론은 강조되어야 한다. 뵈트너는 말하기를 “ 이 교리는 비단 칼빈뿐만 아니라 루터, 쯔빙글리, 멜란히톤, 불링거, 부처 또한 종교개혁에 있어서 여러 지도자들에 의해서도 가르쳐진 것이다. 그 후 장키우스, 오웬, 화이프필드, 롭 레디, 하지, 댑니 컨닝햄, 스미스, 세드, 워필드, 카이퍼 등이 이교리를 신봉하고 또한 주력하여 이것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 교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도록 가르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인간이 하나님 앞에 겸비한 자가 되도록 가르친다. 칼빈의 예정론에 대한 논쟁은 항상 구원론적 맥락에서 일어났다고 하는 점이다. 예정론은 구원론을 가장 성공적으로 방어하는 것이 된다. 예정론은 칼빈에게 있어서 구원론의 핵심이 된다고 하는 의미에서 조직적인 원칙이 될 뿐 아니라 다른 교리적 틀이 세워지는 원칙도 된다. 예정론의 주된 작업은 공로주의를 떠나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칭의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의 근본적인 교리를 보호하고 강화하는데 있는 것이다. 수많은 신학 서적 중에서 가장 순수한 기독교 신앙, 가장 순결한 성경적 진리를 집약한 책을 한권만 추천하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칼빈의 ‘기독교강요’와 칼빈의 성경주석을 꼽는다.
신학상 적인 아르미니우스는 “성경 다음에 가는 서적은 칼빈의 성경주석이니 내 제자들에게 이 책을 가장 많이 인용하라고 권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예정론은 칼빈의 창작이 아니라 오직 성경에 분명히 나타난 교리를 조직적으로 진술한 것뿐이다. 그는 성경에서 이 교리를 발견한 제일 처음의 사람도 아니었다. 그가 태어나기 천년 전에 어거스틴이 이 교리의 요소를 가르쳤고 종교개혁 운동의 지도자가 다 그러하였다. 개 교회의 부흥과 성장에만 주력하다 보니 정작 장로교회로서의 특성과 뿌리를 잊어버리고 비 복음적이고 잡다한 요소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도 이렇다 할 만한 비판이나 대안이 없었다. 그 본래적인 신학이나 신앙 노선을 위하여 그 뿌리를 찾아보려고 애쓰지 못했다.
문제는 신학교에서 배운 개혁주의는 하나의 교리적인 자기 입장으로 삼았을 뿐 그것이 목회 현장에서는 전혀 무관했다. 칼빈의 신학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신학이라 한다면 그 내용은 예정론에 집중된다. 주권을 믿지 아니하면 예정론을 설명할 수 없다. 예정론을 인간이 볼 때는 모순같이 생각되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에는 모순이 아니다. 항의파가 거부한 칼빈주의 명제들
①하나님은 타락 전에 그리고 인간의 창조 이전에 변경될 수 없는 작정에 의해,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영원한 저주로 예정하셨는데 그것은 의나 죄, 복종이나 불복종을 고려하지 않고 단지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기 때문이며 한 부류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의의 영광을 보이시고 다른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비를 보이시기 위한 것이다.
② 하나님은 타락의 관점에서 그리고 우리의 첫 조상들과 그들의 후손들의 공정한 정죄의 관점에서 인류 가운데 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타락의 결과들을 면제해 주어 하나님의 값없는 은총으로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정하셨으나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나이나 도덕적 상태와 무관하게 하나님의 의의 영광을 위하여 그들을 정죄에 내버려 두도록 정하셨다.
③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하여 죽으셨다.
④ 성령은 불가항력적인 은총으로 피택자들 안에서 사역하셔서 그 결과 그들은 회심과 믿음과 거룩함과 영화를 소유하게 되나, 나머지 사람들은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외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초대받을지라도, 구원에 필수적이고 충분한 그 은총은 그들에게 유보된다.
⑤ 이 불가항력적인 은총을 받은 자들은 완전히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것을 결코 잃을 수 없으나, 끝까지 같은 은총으로 인도받고 보존된다. 항의파는 이 교리들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도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에도 포함되지 않고 , 비교훈적이며 위험해서 기독교인들에게 설교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예정설을 반대하는 학설 중에는 펠라기안의 신인 협력설과 아르미니안의 만인 구원설이 있다.
예정과 예지에 있어서 큰 차이점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예정론에서는 구원의 주도권을 하나님 편에서 잡게하고 예지론에서 인간편에게 주게 된다. 예지론을 택하게 될 때 결과적으로 구원의 주도권을 인간이 잡게 된다.
아르미니안이란 화란 신학자 아르미니우스의 추종자들을 가리키는 자들로서 존 칼빈의 예정론적 교리를 반대하면서 인간의 자유 의지를 주장하는 종교개혁의 후예들, 감리교회, 성결교회와 오순절 교회등에 소속해 있는 크리스천을 의미한다고 했다. 웨슬리는 예정론을 철저히 거부했고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주정하면서 여러 주 또는 여러달 동안 전혀 죄를 짓지 않았다고 선언할 정도로 완전함을 자랑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예지에 관해 말할 때 만물이 항상 있었고 그분의 눈으로는 영원히 현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분의 지식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미래나 과거가 없고 모든 것이 현재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요6:37, 39)라고 하신다. 아르미니안주의는 구원 역사의 반은 하나님의 일이요, 반은 사람의 일이라고 말한다 (신인 협력설) 그러나 칼빈주의는 구원역사 전체가 하나님 일이요, 동시에 또한 전체가 사람의 일이라고 주장한다.
성경대로 믿는 주의가 칼빈주의다. 칼빈주의는 사람을 냉랭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인생을 바로 알고 세계를 바로 알므로 우리의 가슴이 뜨겁게 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향하여 살도록 하는 것이다. 칼빈주의는 성경적인 계시관이요, 성경적인 인생관이요, 성경적인 우주관이며, 성경적인 철학이라고 할수 있다. 죽은 칼빈주의자가 있다. 그것은 교리만 있고 생활은 없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과 헌신의 열정도 식어버린 박물관의 미라 같은 냉랭한 칼빈주의다. 그 반면 성령님의 타는 불에 점화되어 헌신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엘리야같이 주의 일에 열심이 특심하여, 사람을 사랑하고 구원하고자 몸부림치는 칼빈주의가 있다.
칼빈주의는 교의를 단순히 지적으로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이었다. 칼빈주의는 프랑스에서는 위그노(hugunots)로 화란에서는 베거(Beggars), 영국에서는 청교도(Puritan),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교, 미국에서는 순례자(pilgrim)라고 불려지고 있다. 오늘날 많은 현대 교회 중에는 표면적으로는 나타나지 않으나 내면적으로는 거의 아르미니안주의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우리는 유의해야 할 것이다. 자유주의학은 말할 것도 없고 일부 복음주의 신학마저 칼빈주의의 색채를 거의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은 매우 유감된 일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나님의 주권은 부인되고 인간의 자유와 권위를 앞세우는 인본주의로 점점 기울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장로교회는 이른바 전통적인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을 계승한 ‘도르트 총회’의 후신으로 얼마나 거기에 충실한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칼빈주의는 냉랭한 교리만 외우는 것이 아니고 명실 공히 목회의 현장, 설교의 현장, 선교의 현장, 우리의 삶의 모든 현장에서 도르트 총회에서 표현된 칼빈주의 사상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칼빈 예정론이 21세기의 앞에 선 오늘의 한국과 세계 교회를 어지럽히는 가장 큰 도전 세력인 종교 다원주의를 물리치고 신학과 신앙을 사도들의 굳건한 터 위에 세울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대안임을 알수 있다.
존 칼빈은 하나님께서는 예정하실 때 인간의 타락을 예정하셨다고 주장하고 불링거 같은 이는 타락은 정하시지 않으시고 단지 타락할 것을 예지하신 것뿐이라고 했다.
바빙크는 “타락 전 예정은 개혁파 교회의 입장이 아니고 타락 후 예정이 개혁 교회의 입장이다”라고 했다.
카이퍼는 “타락 후 예정설을 지지하면서, 만일 하나님께서 타락 전에 예정하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상반되기 때문에 모순이다”라고 말했다.
(Dik)은 “창세전 예정이 개혁주의의 정통적 고백이기는 하지만 타락 후 예정설을 지지한다고 해도 칼빈의 교훈과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두 가지 견해 중에서 어떤 편을 택하여야 할 것인가.
고등 칼빈주의, 열정 칼빈주의라고 불리우는 이 사조는 칼빈의 신학 중에서도 특정한 주체들에 집착하여 강조하는 바, 특히 “타락 전 선택설과 반 율법주의를 신봉하는 자들이요 엄격한 5대 교리주의자요, 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여 인간의 책임에 대해서 약화시키는 경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는 하나님의 주권이 100%이듯이 인간의 책임도 100%임을 믿는다. 예정론 교리는 적대시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마귀가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도구들이다.
만일 예정론과 같은 성경적 교리를 거부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삼위일체 교리를 비롯해서 모든 교리를 부인하여야만 할 것이라고 했다. 21세기 현대에 이르러 종교 다원주의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 교리를 전면 무효화시키는 반성경적 사상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모두 은혜에 순종하지 않는가? 어거스틴은 이에 대하여 예정의 교리를 가지고 답변하였다. 영원 전부터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받도록 예정되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형벌을 받도록 예정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예정된 자들의 수는 고정되어 있고 변경시킬 수도 없으며, 또한 서로 교체될 수도 없다. 예정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예정의 특별한 효험으로 인내의 은사를 주신다. 이들은 넘어지고 타락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언제까지든지 그렇게 행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거역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정되지 못한 자들의 경우는 그와 반대이다. 이 제한된 예정은 타락한 천사의 수만큼 예정한 것이라고 어거스틴은 해명하면서 바울이 딤전 2:4에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말한 것을 하나님은 선택된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펠라기우스주의자인 줄리안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부인하면서 죄는 본성 혹은 성품 속에 존재하면서 자손들에게 전수되는 것이 아니라 의지 안에 있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이 의지는 항상 중립적이다. 선악은 의지와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일 뿐으로 얼마든지 죄를 떨쳐버릴수 있다고 했다..
동방교회는 그리스 철학의 영향으로 낙관론적인 인간관을 견지했다. 펠라기우스주의는 동방신학의 산물이었다. 펠라기우스주의는 특히 스토아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칼빈주의 신학 사상의 모체에 해당하는 어거스틴과 칼빈의 신학은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가슴에서 나왔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옵소시”(눅 18:13) 펠라기우스(360-420)는 431년 에베소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529년 오렌지대회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개인적으로 받을 수도, 받지 않을 수도 있다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을 정죄하였다.
예정론을 기독교 신학에서 심각하게 다룬 최초의 학자는 어거스틴이었으며 개혁 신학은 이를 충실히 인정하며 따르고 있다. 종교개혁 시대의 철저한 예정론자는 멜란히톤이었고 오히려 루터 교회가 예정론을 철저히 다루었다. 물론 칼빈주의도 예정과 선택교리를 다른 어떤 체제보다도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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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칼빈주의자들이 모두 다 예정론자는 아니다. 워필드 박사에 따르면 예정론은 칼빈주의를 결정짓는 중요한 교리도 아니요, 칼빈주의가 발전해 나오는 근원인거나 뿌리에 해당하는 교리가 결코 아니다. 어거스틴은 어떤 사람이 개심할 때 이 개심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에 의해 유래된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누가 너를 구별하느뇨 네가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고전 4:7)라고 말씀하였다. 그러므로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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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천사가 그들의 자유의지를 사용하도록 허용하였고 그들이 자유의지를 남용한 결과가 어떠하리라는 것도 알고 계셨으며 또 범죄한 그들에게 장차 당신의 은혜의 선물이 얼마나 풍성하리라는 것을 가르쳐 줄 작정을 하셨다. “그들이 믿은 까닭에 선택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믿게 하기 위하여 선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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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쟁은 곧 교회를 보호하고 성도개인의 신앙을 지키고 그리스도교를 지키는 거룩한 싸움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논쟁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교회로부터 정죄를 당하고, 그 지역에서 추방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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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칼빈은 예정론을 설명하고 옹하는데 그렇게까지 관심을 기울였는가? 기독교 강요 - 하나님의 말씀이 나로 하여금 예정론을 주장하게끔 강권하지 않았다면 나는 결코 예정론을 입 밖에도 끄집어 내지 않았을 것이다. 칼빈은 “만일 우리가 로마서를 이해하게 된다면 전체 성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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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바울이 가르치지 않았던 것을 억지로 고안해 낸 것은 아니다. 성령과 바울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인가! 그들은 얼마나 뻔뻔스러운 사람들인가? 어떤 사람이 편견이나 호기심을 가지고 예정론을 서술하고자 한다면 그들에게 자기 나름대로 예정론을 서술하도록 기회를 준다면 이 세상의 비밀을 모조리 제거해 버릴양, 인간에게 맞게 이 교리를 변조시키려고 할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 나와 있는 예정에 관한 모든 것을 신자들에게 가르쳐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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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으면 그들로부터 하나님의 축복을 가로막는 죄를 범하게 될 것이다. 불경건한 사람은 예정론에 대하여 조롱하고, 비방하고, 공격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만일 예정론과 같은 성경적 교리를 거부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삼위일체 교리를 비롯해서 모든 교리도 부인하여야만 할 것이다.(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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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론의 역사를 말하고자 할 때 예정론은 이미 구약 성경에서 논의되어 왔고 (창세기에서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등), 신약 성경에서 복음서와 바울 서신 (특히 로마서, 에베소서)등에서 확증된 바 있다. 구원에서의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하기 위하여 고마루스의 지도아래 도르트대회(성도의 견인 혹은 궁극적 구원/즉,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 받은것)을 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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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본래 아르미니우스주의자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명확히 가르치고 있는 바는 신자의 구원은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에 의존하고 있으며 우리가 선택받은 이유는 은혜로운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 이외에는 다른 데서 이유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 자체가 그들이 믿음을 갖게 된 이유가 되었으며 선택은 순서상 믿음에 앞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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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라기안주의자들은 아담이 하나님을 택할 수도 있고 배척할 자유가 있었던 것처럼 모든 인간은 이런 자유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칼빈주의에서는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는 그런 자유가 있었으나 타락 후에는 그런 자유를 박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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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교의 신인 협력설을 칼빈주의는 반대한다. 칼빈은 믿음과 선행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했다. (요6:37-39, 요6:44, 요17:9 , 롬9:20-21, 롬11:33, 창18:10 롬 9:11 롬 9:12-13, 창 25:23) 예정교리를 놓치면 하나님의 영원한 뜻과 주권을 부정하게 된다. 예정은 하나님의 불변하신 행동이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겸손과 경고를 주는 동시에 성도들에게 자극과 위로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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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절대성과 자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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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3:14, 요5:26, 시94:8-9, 롬11:33-34, 단 4:35 시115:3 시33:11 엡1:4, 고전1:26-29, 롬1:17, 행13:48, 엡2:8 엡1:26 사43:21, 시79:13, 요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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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자와 돌트신조와 17세기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은 예정론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신학체계의 대전제로 삼았다. 그러나 1564년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 그리고 16세기 신앙고백서인 제1,제2스위스신앙고백, 39조항신앙고백은 예정교리를 신학의 대전제로 삼지 않았다. 예정론은 칼빈 신학사상에서 중심교리나 핵심주제라고는 볼 수 없으나 예정론이야 말로 우리의 신앙에 유익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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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은 예정론이 큰 유익을 준다고 말했다.
①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크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만세전부터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물줄기는 예정론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느끼는 때가 언제인가? 우리의 구원의 근거는 더 멀리 만세전부터(영원)이다.
②하나님의 영광을 높여 드릴 수 있는 것이 예정론이다.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우리를 가장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 예정론이다. 구원이 하나님의 만세 전의 주권이라면 우리는 한없이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한다.
③ 구원에 확신을 준다.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 구원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 구원이 어디까지 안전한가? 영원까지 안전하기 때문에 예정론은 구원의 확신 때문에 생긴 것이다. 예정론은 그 어떤 교리보다도 잘 알게 될 때는 신자에게 그만큼 제일 큰 유익을 주는 성경의 진리가 예정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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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교리의 기본 구조는 성경, 특히 로마서와 에베소서에 의존하고 있다. 칼빈의 최초의 주석은 로마서였는데 이 책에 대한 그의 연구는 ‘기독교 강요’의 예정교리를 정교하게 해주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칼빈은 “만일 우리가 이 서신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성경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가지게 되는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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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와 교회> 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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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ome Zanchius (February 2, 1516 ? November 19, 1590) was an Italian Protestant Reformation clergyman and educator.
He was born Jerome Zanchi in Alzano Lombardo, the son of a nobleman. His father died in the plague of 1528 and his mother died only three years later. At age 15 he entered the monastery of the Augustinian Order of Regular Canons, where he studied Aristotle, languages and divinity. He also attended the lectures on Romans given by Peter Martyr Vermigli, the greatest of the Italian Reformers. - In 1551, under growing persecution against the Reformation, he left Italy via Geneva and eventually accepted the professorship of Old Testament at the college of St. Thomas in Strasbourg where he began to teach in 1553 and continued to give excellent instruction for nearly 11 years. In 1563 he left the College and pastored the Italian Protestant congregation in the Grisons in the city of Chiavenna. Finally, in 1567 Prince Frederick III (1515?1576) prevailed upon Zanchius to accept a divinity professorship in the University of Heidelberg, joining Zacharias Ursinus (1534?1583).
- In the year 1568 he entered on his new duties and in the same year received a doctor's degree. He held this post for 9 years when, at the death of Fredrick III, he chose to take the pastorate of the church at Neustadt an der Haardt. He remained there until his death on November 19, 1590, while on a visit to Heidelberg.
Zanchius was a voluminous writer whose works include, Confession of the Christian Religion and Observation on the Divine Attributes. He is perhaps best known for his book The Doctrine of Absolute Predestination, which is still in publication today.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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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제롬 장키우스(Jerome Zancius 1516 - 1590)의 절대예정론 소고 (비공개 카페)? http://cafe.naver.com/calgaryreformed/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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