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이야기: 천국과 지옥- 유태화 교수
종말론 2014. 7. 27. 03:42종말이야기: 천국과 지옥
기독교적 종말론을 이야기 할 때 개인의 종말과 우주적 종말을 나누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렇게 하는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 무엇보다도 천국과 지옥과 관련한 논의의 우주적 특성 때문이다. 천국과 지옥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재림직후에 있을 최후의 심판이후에 인간이 궁극적으로 상속하게 될 것과 연결된 주제이다. 그렇다면 개인의 종말과 함께 인간이 가게 될 곳은 어디이며, 그곳이 천국 혹은 지옥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복잡한 질문이 뒤따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이유로 개인의 종말과 우주적 종말을 나누어 설명하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다.
개인의 종말은 죽음에서 시작된다. 개인의 종말로서 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에서 성립한다. 육체와 영혼의 분리로서 죽음은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개인의 죽음이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육체는 흙으로 돌아간다. 육체는 정상적인 사망인 경우 무덤에 놓이거나, 화장의 경우 신체의 일부를 구성했던 뼛가루는 공기 중으로나 바다나 혹은 강물에 뿌려지거나, 혹은 바다에서 의도하지 않은 사고로 인해 죽은 후 사체가 수습되지 않아 바다에서 유실되거나 하는 방식으로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면 육체로부터 분리된 영혼은 어떻게 될까? 유교에서 이야기 하듯, 죽은 후 영혼이 살던 집 주변을 3년 정도 떠도는 신세가 되는가? 혹은 이런 착상을 가져다가 악용하여 인간이 본래 수명이 120년인데 다 못 채우고 죽은 경우 나머지 기간 동안 구천을 떠돌다가 다른 사람에게 들어가 귀신노릇하며 살면서 그 기간을 채우기라도 하는 것인가?
조금 생각을 정리하고 이야기를 계속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죽음과 함께 처하는 상태를 하데스라고 한다. 그러니까 인간의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시점이 하데스의 상태에 들어가는 시점이다. 그리스어 하데스는 히브리어로는 쉐올인데, 국역성경에서는 일반적으로 음부라고 번역되곤 한다. 그러니까 죽은 자는 음부의 상태에 들어간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음부에는 두 구별된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또한 주의력을 가지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가 파라데이소스이고, 다른 하나가 게헨나이다. 파라데이소스에는 죽은 그리스도인의 영혼이 들어가 안식하는 곳이고, 게헨나는 죽은 비그리스도인의 영혼이 거하는 곳이다. 그러면 영혼은 이곳에 언제 들어가는가?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인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는 아주 명쾌하게 죽은 그리스도인의 영혼은 육체로부터 분리되자마자 즉시로 파라데이소스에 들어간다고 고백한다. 비록 동일한 신앙고백서가 불신자의 영혼에 대하여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동일하게 죽음과 함께 즉시 게헨나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죽은 자들의 영혼이 거하는 영원한 상태는 아니다. 이곳에 거하는 기간은 그리스도인의 영혼이나 비그리스도인의 영혼이나 제한되어 있다. 일종의 막간의 기간이라고나 할까. 이곳에 거하는 기간은 개인이 죽은 날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가 재림할 때에 파라데이소스에 있는 영혼이 무덤에 있는 자신의 육체와 연합하여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홀연히 변화하여 부활한 그리스도인과 같은 상태를 누리게 된다. 그 후에 게헨나에 있던 비그리스도인의 영혼이 각각 제 몸과 연합되어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당시에 살아 있던 비그리스도인이 홀연히 변화하여 부활의 몸을 갖게 된다. 그리고는 곧바로 그리스도 예수가 친히 재판하는 최후의 심판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니까 인간은 죽음과 함께 영으로 파라데이소스 혹은 게헨나에 들어가 있다가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이 있을 때에 그 상태에서 나와서 육체와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기간은 잠정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으며, 그런 이유로 중간기 상태 혹은 잠정적인 상태라고 부른다.
그러나 파라데이소스나 게헨나에 거하는 영혼들은 각 상태의 특징에 따라 안식을 취하거나 혹은 죄악으로 인한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안식과 고통은 어떤 의미에서는 나중에 완성된 천국과 지옥에서 경험하게 될 그것과 질적으로 연속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그림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가운데 주어져 있다. 물론 이 비유는 사실관계를 언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예화인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력을 가지고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예수의 비유가 그 자체로 거짓된 내용을 끌어들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문맥상 파라데이소스와 게헨나를 설명하려는 것이 초점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후상태라는 그림을 차용하여 설명되어야만 했다는 사실은 간과될 수 없다. 이런 전제를 가지고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읽어보면, 나사로가 거하는 곳에는 안식이, 부자가 거하는 곳에는 고통이 하나의 실재로서 경험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혼이 그곳에 들어가게 되면 다시 나와서 활동할 수 있는 여지도 제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죽음과 함께 영혼이 각각 제 갈 곳으로 들어간 후에는 패자부활전과 같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각각 육체를 입고 살아갈 때에만 사후의 삶을 위한 기회를 가질 수 있을 뿐, 사후에는 사후의 삶을 다시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영영 다시 제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곳에 살고 있을 때, 이곳에서 복음을 가지고 수고하는 분들이 선포하는 말씀을 주의력을 가지고 듣고, 올바르게 반응하는 길만이 사후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파라데이소스나 게헨나는 독특한 곳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파라데이소스나 게헨나 사이는 건너가거나 혹은 건너오거나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각각 다른 질서가 지배하는 곳이어서 뒤섞일 수 없는 영역인 것이다. 파라데이소스에는 하나님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주님의 이름을 귀히 여기고 주님의 백성으로 산 삶을 위로하고 안식으로 보상하는 반면에, 게헨나에는 마귀와 그의 졸개들이 그동안 거짓으로 꾀어낸 사람들의 분노와 폭압이 지배할 뿐 자비로운 하나님의 일반은총조차도 제공되지 않아서 목마르고 고통스러운 곳일 뿐이다. 그러니 서로 다른 질서를 향유하는 사람들이 오가며 삶을 연대할 수 있는 길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라데이소스와 게헨나는 그 자체로 천국과 지옥은 아니다. 천국과 지옥은 부활한 몸을 가진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혹은 종말론적으로 상속받는 곳이기 때문이다. 부활은 고린도교인들이 오해했던 것처럼 순수한 영으로서 영원히 존속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은 인간은 부활의 날에 썩을 몸을 벗고 썩지 않을 몸을 입으며, 욕된 몸을 벗고 영광스러운 몸을 갖게 되며, 병약한 몸을 벗고 강한 몸을 갖게 되며, 육신의 소욕이 거하는 몸을 벗고 성령이 완전히 지배하는 몸을 입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부활한 몸은 지금과 연속된 차원을 가지면서 동시에 불연속된 새로운 차원을 갖는 실제적인 몸인 것이다. 천국과 지옥은 바로 이런 부활의 몸을 갖고 있는 자들이 상속하게 되는 영원한 삶의 처소를 의미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천국과 지옥은 장소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파라데이소스나 게헨나는 아직 몸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장소라고 할 수는 없고 다만 상태라고만 해도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부활이후에는 상황이 많이 달라진다. 부활한 몸을 갖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장소성을 피해갈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천국은 어디인가? 그리고 지옥은 어디에 있게 될 것인가? 성경을 읽어가면서 흥미로운 것은 그리스도인의 부활과 그들이 거할 장소에 대하여는 비교적 분명하게 말하는 반면에, 비그리스도인의 부활의 실체와 거할 장소에 관하여는 그렇게 구체적으로 언급한 곳이 많지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성경의 일반적인 특징을 잘 고려하면서 성경이 안내하는 곳까지 따라가면서 천국과 지옥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여기서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천국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이다. 천국(天國)이라는 표현은 사실 마태복음에서 거의 예외적으로 등장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곳에서는 지배적으로 하나님의 나라 곧 신국(神國)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주요 청중으로 삼고 기록된 성경이라는 사실에서, 신명(神名)과 관련한 유대인의 일반적인 관습을 잠시 기억하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을 불경하다고 여겼고, 따라서 하나님을 하늘로 부르는 습관이 생겨났다. 이런 견지에서 보자면, 마태복음의 하늘나라라는 표현은 하나님 나라와 같은 표현인 셈이다. 이런 논의를 하는 이유는 결국 성경은 하늘 어딘가에 있는 나라라는 의미로 천국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천국은 2000-4000억 개에 이르는 은하 밖의 어느 공간이라든지 혹은 태양계 밖의 어느 특정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으로서 다스리고 인간이 그분의 백성이 되기로 자처하는 곳을 의미하며 그 공간은 여기든 아니면 다른 공간이든 하등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아이잭 뉴턴의 시대만 해도 상대공간과 절대공간이라는 구별을 유지했다. 상대공간을 벗어난 공간이 절대공간이 되고 그곳이 바로 천국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때였다. 쉽게 말하면,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이 자리한 방배동은 서울이라는 상대공간 안에 있고, 서울은 대한민국이라는 상대공간 안에, 대한민국은 아시아란 상대공간 안에, 아시아는 지구라는 상대공간 안에, 지구는 태양계라는 상대공간 안에, 태양계는 다른 은하라는 상대공간 안에, 그 은하는 또 다른 은하의 상대공간 안에 있는 것으로 이어지고, 그 상대공간이 끝나는 지점이 절대공간이 시작되는 지점이고, 그곳이 바로 천국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도 그런 식으로 공간을 생각하지 않는다.
아인스타인을 거쳐 스티브 호킹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은 공간개념을 상대와 절대라는 개념에서 차원개념으로 전환해버렸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이후로 최후의 심판을 받고 인류가 다른 어떤 것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이 공간 안에 거하게 된다는 기본적인 생각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공간이 지금 현재 우리가 가진 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3차원의 삶만을 열어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의 우주는 무려 9차원 혹은 12차원까지 확장되어 이해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과 함께 부활한 인간의 몸은 3차원은 기본이고 4, 5, 6, 7, 8, 9차원에까지 참여하는 존재로 변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공간개념이 지금 현재의 개념에서는 거의 상상하기 힘들만큼 확장된다는 것이다. 적어도 하나님이 창조한 우주는 부활의 몸에 상응하는 조건으로 변화되고 또 그렇게 경험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서로 상응하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요한이나 베드로나 바울이나 심지어 예수조차도 한목소리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창조세계가 변화될 것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것과는 달리, 성경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정황이 명확한 변화를 겪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변화의 하나는 죄가 창조세계에서 제거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창조세계가 홀연히 새로워지게 된다는 것이다. 베드로나 요한이나 바울이나 예수까지도 한목소리로 만물이 변화되어 그 영광의 극치에 이를 것을 예견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이후로 죄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만물은 홀연히 변화되어 그 영광의 극치를 드러내게 됨으로써 부활한 그리스도인이 살기에 적합한 구조로 상응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장소가 어디냐가 궁극적인 관심사가 아니라 누가 중심이 되는 세상이냐가 관심사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이후 하늘의 예루살렘이 이 땅으로 내려오고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게 되고, 하나님이 친히 왕이 되어 다스림으로써 사망이나 애곡하는 것이나 눈물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는 곳으로 변화되고, 인간은 그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면서 스스로를 신하와 백성으로 인정하는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야말로 하나님이 왕이 되어 자신의 백성인 인간을 다스리는, 인간은 진정한 왕을 모시고 그 왕이 베푸는 영원히 지속하는 은혜를 받아 누리는 상태로 하나님이 창조한 이 우주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것, 이것이 성경이 열어 보여주는 천국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이다.
그러면 지옥은 어디인가? 사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그렇게 구체적인 언급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구체적인 장소라는 점과 그 장소에서 마귀와 그 졸개들과 그들을 섬겼던 악한 부활에 참여한 사람들이 영원한 형벌 가운데 거하게 된다는 사실 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성경에 제시되어 있다. 우리는 성경이 인도하는 데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 곳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지옥과 관련한 논의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성경이 우리에게 열어 보여주는 지점까지 성실하게 따라가고,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구원을 얻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한다.
기독교적 종말론을 이야기 할 때 개인의 종말과 우주적 종말을 나누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렇게 하는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 무엇보다도 천국과 지옥과 관련한 논의의 우주적 특성 때문이다. 천국과 지옥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재림직후에 있을 최후의 심판이후에 인간이 궁극적으로 상속하게 될 것과 연결된 주제이다. 그렇다면 개인의 종말과 함께 인간이 가게 될 곳은 어디이며, 그곳이 천국 혹은 지옥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복잡한 질문이 뒤따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이유로 개인의 종말과 우주적 종말을 나누어 설명하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다.
개인의 종말은 죽음에서 시작된다. 개인의 종말로서 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에서 성립한다. 육체와 영혼의 분리로서 죽음은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개인의 죽음이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육체는 흙으로 돌아간다. 육체는 정상적인 사망인 경우 무덤에 놓이거나, 화장의 경우 신체의 일부를 구성했던 뼛가루는 공기 중으로나 바다나 혹은 강물에 뿌려지거나, 혹은 바다에서 의도하지 않은 사고로 인해 죽은 후 사체가 수습되지 않아 바다에서 유실되거나 하는 방식으로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면 육체로부터 분리된 영혼은 어떻게 될까? 유교에서 이야기 하듯, 죽은 후 영혼이 살던 집 주변을 3년 정도 떠도는 신세가 되는가? 혹은 이런 착상을 가져다가 악용하여 인간이 본래 수명이 120년인데 다 못 채우고 죽은 경우 나머지 기간 동안 구천을 떠돌다가 다른 사람에게 들어가 귀신노릇하며 살면서 그 기간을 채우기라도 하는 것인가?
조금 생각을 정리하고 이야기를 계속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죽음과 함께 처하는 상태를 하데스라고 한다. 그러니까 인간의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시점이 하데스의 상태에 들어가는 시점이다. 그리스어 하데스는 히브리어로는 쉐올인데, 국역성경에서는 일반적으로 음부라고 번역되곤 한다. 그러니까 죽은 자는 음부의 상태에 들어간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음부에는 두 구별된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또한 주의력을 가지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가 파라데이소스이고, 다른 하나가 게헨나이다. 파라데이소스에는 죽은 그리스도인의 영혼이 들어가 안식하는 곳이고, 게헨나는 죽은 비그리스도인의 영혼이 거하는 곳이다. 그러면 영혼은 이곳에 언제 들어가는가?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인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는 아주 명쾌하게 죽은 그리스도인의 영혼은 육체로부터 분리되자마자 즉시로 파라데이소스에 들어간다고 고백한다. 비록 동일한 신앙고백서가 불신자의 영혼에 대하여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동일하게 죽음과 함께 즉시 게헨나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죽은 자들의 영혼이 거하는 영원한 상태는 아니다. 이곳에 거하는 기간은 그리스도인의 영혼이나 비그리스도인의 영혼이나 제한되어 있다. 일종의 막간의 기간이라고나 할까. 이곳에 거하는 기간은 개인이 죽은 날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가 재림할 때에 파라데이소스에 있는 영혼이 무덤에 있는 자신의 육체와 연합하여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홀연히 변화하여 부활한 그리스도인과 같은 상태를 누리게 된다. 그 후에 게헨나에 있던 비그리스도인의 영혼이 각각 제 몸과 연합되어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당시에 살아 있던 비그리스도인이 홀연히 변화하여 부활의 몸을 갖게 된다. 그리고는 곧바로 그리스도 예수가 친히 재판하는 최후의 심판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니까 인간은 죽음과 함께 영으로 파라데이소스 혹은 게헨나에 들어가 있다가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이 있을 때에 그 상태에서 나와서 육체와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기간은 잠정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으며, 그런 이유로 중간기 상태 혹은 잠정적인 상태라고 부른다.
그러나 파라데이소스나 게헨나에 거하는 영혼들은 각 상태의 특징에 따라 안식을 취하거나 혹은 죄악으로 인한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안식과 고통은 어떤 의미에서는 나중에 완성된 천국과 지옥에서 경험하게 될 그것과 질적으로 연속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그림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가운데 주어져 있다. 물론 이 비유는 사실관계를 언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예화인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력을 가지고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예수의 비유가 그 자체로 거짓된 내용을 끌어들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문맥상 파라데이소스와 게헨나를 설명하려는 것이 초점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후상태라는 그림을 차용하여 설명되어야만 했다는 사실은 간과될 수 없다. 이런 전제를 가지고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읽어보면, 나사로가 거하는 곳에는 안식이, 부자가 거하는 곳에는 고통이 하나의 실재로서 경험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혼이 그곳에 들어가게 되면 다시 나와서 활동할 수 있는 여지도 제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죽음과 함께 영혼이 각각 제 갈 곳으로 들어간 후에는 패자부활전과 같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각각 육체를 입고 살아갈 때에만 사후의 삶을 위한 기회를 가질 수 있을 뿐, 사후에는 사후의 삶을 다시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영영 다시 제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곳에 살고 있을 때, 이곳에서 복음을 가지고 수고하는 분들이 선포하는 말씀을 주의력을 가지고 듣고, 올바르게 반응하는 길만이 사후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파라데이소스나 게헨나는 독특한 곳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파라데이소스나 게헨나 사이는 건너가거나 혹은 건너오거나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각각 다른 질서가 지배하는 곳이어서 뒤섞일 수 없는 영역인 것이다. 파라데이소스에는 하나님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주님의 이름을 귀히 여기고 주님의 백성으로 산 삶을 위로하고 안식으로 보상하는 반면에, 게헨나에는 마귀와 그의 졸개들이 그동안 거짓으로 꾀어낸 사람들의 분노와 폭압이 지배할 뿐 자비로운 하나님의 일반은총조차도 제공되지 않아서 목마르고 고통스러운 곳일 뿐이다. 그러니 서로 다른 질서를 향유하는 사람들이 오가며 삶을 연대할 수 있는 길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라데이소스와 게헨나는 그 자체로 천국과 지옥은 아니다. 천국과 지옥은 부활한 몸을 가진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혹은 종말론적으로 상속받는 곳이기 때문이다. 부활은 고린도교인들이 오해했던 것처럼 순수한 영으로서 영원히 존속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은 인간은 부활의 날에 썩을 몸을 벗고 썩지 않을 몸을 입으며, 욕된 몸을 벗고 영광스러운 몸을 갖게 되며, 병약한 몸을 벗고 강한 몸을 갖게 되며, 육신의 소욕이 거하는 몸을 벗고 성령이 완전히 지배하는 몸을 입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부활한 몸은 지금과 연속된 차원을 가지면서 동시에 불연속된 새로운 차원을 갖는 실제적인 몸인 것이다. 천국과 지옥은 바로 이런 부활의 몸을 갖고 있는 자들이 상속하게 되는 영원한 삶의 처소를 의미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천국과 지옥은 장소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파라데이소스나 게헨나는 아직 몸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장소라고 할 수는 없고 다만 상태라고만 해도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부활이후에는 상황이 많이 달라진다. 부활한 몸을 갖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장소성을 피해갈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천국은 어디인가? 그리고 지옥은 어디에 있게 될 것인가? 성경을 읽어가면서 흥미로운 것은 그리스도인의 부활과 그들이 거할 장소에 대하여는 비교적 분명하게 말하는 반면에, 비그리스도인의 부활의 실체와 거할 장소에 관하여는 그렇게 구체적으로 언급한 곳이 많지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성경의 일반적인 특징을 잘 고려하면서 성경이 안내하는 곳까지 따라가면서 천국과 지옥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여기서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천국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이다. 천국(天國)이라는 표현은 사실 마태복음에서 거의 예외적으로 등장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곳에서는 지배적으로 하나님의 나라 곧 신국(神國)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주요 청중으로 삼고 기록된 성경이라는 사실에서, 신명(神名)과 관련한 유대인의 일반적인 관습을 잠시 기억하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을 불경하다고 여겼고, 따라서 하나님을 하늘로 부르는 습관이 생겨났다. 이런 견지에서 보자면, 마태복음의 하늘나라라는 표현은 하나님 나라와 같은 표현인 셈이다. 이런 논의를 하는 이유는 결국 성경은 하늘 어딘가에 있는 나라라는 의미로 천국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천국은 2000-4000억 개에 이르는 은하 밖의 어느 공간이라든지 혹은 태양계 밖의 어느 특정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으로서 다스리고 인간이 그분의 백성이 되기로 자처하는 곳을 의미하며 그 공간은 여기든 아니면 다른 공간이든 하등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아이잭 뉴턴의 시대만 해도 상대공간과 절대공간이라는 구별을 유지했다. 상대공간을 벗어난 공간이 절대공간이 되고 그곳이 바로 천국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때였다. 쉽게 말하면,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이 자리한 방배동은 서울이라는 상대공간 안에 있고, 서울은 대한민국이라는 상대공간 안에, 대한민국은 아시아란 상대공간 안에, 아시아는 지구라는 상대공간 안에, 지구는 태양계라는 상대공간 안에, 태양계는 다른 은하라는 상대공간 안에, 그 은하는 또 다른 은하의 상대공간 안에 있는 것으로 이어지고, 그 상대공간이 끝나는 지점이 절대공간이 시작되는 지점이고, 그곳이 바로 천국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도 그런 식으로 공간을 생각하지 않는다.
아인스타인을 거쳐 스티브 호킹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은 공간개념을 상대와 절대라는 개념에서 차원개념으로 전환해버렸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이후로 최후의 심판을 받고 인류가 다른 어떤 것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이 공간 안에 거하게 된다는 기본적인 생각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공간이 지금 현재 우리가 가진 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3차원의 삶만을 열어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의 우주는 무려 9차원 혹은 12차원까지 확장되어 이해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과 함께 부활한 인간의 몸은 3차원은 기본이고 4, 5, 6, 7, 8, 9차원에까지 참여하는 존재로 변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공간개념이 지금 현재의 개념에서는 거의 상상하기 힘들만큼 확장된다는 것이다. 적어도 하나님이 창조한 우주는 부활의 몸에 상응하는 조건으로 변화되고 또 그렇게 경험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서로 상응하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요한이나 베드로나 바울이나 심지어 예수조차도 한목소리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창조세계가 변화될 것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것과는 달리, 성경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정황이 명확한 변화를 겪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변화의 하나는 죄가 창조세계에서 제거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창조세계가 홀연히 새로워지게 된다는 것이다. 베드로나 요한이나 바울이나 예수까지도 한목소리로 만물이 변화되어 그 영광의 극치에 이를 것을 예견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이후로 죄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만물은 홀연히 변화되어 그 영광의 극치를 드러내게 됨으로써 부활한 그리스도인이 살기에 적합한 구조로 상응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장소가 어디냐가 궁극적인 관심사가 아니라 누가 중심이 되는 세상이냐가 관심사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이후 하늘의 예루살렘이 이 땅으로 내려오고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게 되고, 하나님이 친히 왕이 되어 다스림으로써 사망이나 애곡하는 것이나 눈물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는 곳으로 변화되고, 인간은 그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면서 스스로를 신하와 백성으로 인정하는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야말로 하나님이 왕이 되어 자신의 백성인 인간을 다스리는, 인간은 진정한 왕을 모시고 그 왕이 베푸는 영원히 지속하는 은혜를 받아 누리는 상태로 하나님이 창조한 이 우주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것, 이것이 성경이 열어 보여주는 천국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이다.
그러면 지옥은 어디인가? 사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그렇게 구체적인 언급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구체적인 장소라는 점과 그 장소에서 마귀와 그 졸개들과 그들을 섬겼던 악한 부활에 참여한 사람들이 영원한 형벌 가운데 거하게 된다는 사실 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성경에 제시되어 있다. 우리는 성경이 인도하는 데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 곳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지옥과 관련한 논의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성경이 우리에게 열어 보여주는 지점까지 성실하게 따라가고,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구원을 얻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한다.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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