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자녀가 고난당할 때
주경신학 2014. 3. 9. 04:46하나님의 자녀가 고난당할 때
호라티우스 보나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에게 가족의 의미
성도들을 가족이라는 이름 외에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그러한 이름들은 가족이면 마땅히 그러해야 할 모든 것들을 다 표현해 주지는 못한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그분의 “양떼”라고 부르시는데, 이는 성도의 편에서는 하나님의 인자하신 보살핌을 느끼게 하고, 하나님의 편에서는 우리들의 연약함을 느끼게 한다. 하나님은 또 자신의 자녀들을 “포도나무”라고도 부르시는데, 이것은 우리의 하나 됨을 나타내면서 또 나무의 원줄기로부터 가지로 순환되는 끊임없는 자양분 공급을 표현한다. 또 하나님은 성도들을 “성전”이라고도 부르시는데, 이는 건물의 튼튼함과 균형 잡힌 설계, 아름다운 외양, 그리고 또 무엇보다도 그 주거 기능과 주께 예배드리기에 적합한 조건들이 갖추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그분은 또 성도들을 “몸”이라 부르기도 하신다. 이는 각 지체들의 적절한 기능 분배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 놀라운 일체성과 함께 각 지체가 깨어 움직이는 활동력을 나타내고, 더 나아가 서로 서로 연락되는 가까운 연관성과 상부상조하는 여러 가지 모습들을 나타낸다. 주님은 또 성도들을 “도성”이라고도 부르신다. 이는 위임된 특권, 개인의 권리, 그리고 잘 조직된 정부가 있는 행복한 공동체, 치안과 평화와 사람들이 누리는 부요함과 쾌활한 인사와 서로 서로 사랑으로 사명들을 떠맡는 그러한 공동체를 암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왕국”이라고도 부르시는데, 이것은 사람들의 고귀함과 영광스러운 지위, 존귀함과 영광의 통치권, 그리고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받은 상속자로서의 신분을 나타낸다.
이렇게 다양하고 표현력이 넘치는 이름들은 다 우리들이 잘 아는 것들이지만, 그 어느 것도 완전하지는 못하다. 이러한 이름들은 마치 어떤 공동체의 외형적인 모습만을 나타내는 이름들처럼 어느 한 부분만 묘사해 주는 이름들일 뿐이다. 이러한 이름들은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내면에 자리 잡은 중심, 즉 영적 존재로서의 우리의 내면세계는 전혀 나타내 주지 못한다. 하나님이 교회 안에서 보시기에 아름답고 따사로우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사랑스럽고 사랑할 만 한 그 모든 것들을 나타내 주는 유일한 이름, 그 신비한 이름은 우리 귀에 낯익은 “가족”이라는 이름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교회에게 사랑을 쏟아 부어 주시고, 그 사랑이 거침없이 흐르고 순환되는 광경을 교회를 통해서 보기를 기뻐하시며, 또 교회로부터 그 사랑의 물줄기가 바깥으로 흘러나가기를 기대하고 계신다.
가족에 대해서 생각하노라면, 머리 속에 즉시 떠오르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주님께서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갖고 계시는 특별한 관심을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점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그들을 내가 지키었고 멸망의 아들 외에는 그들 중 아무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였으니...”(요 17:12 한글킹제임스성경). 가족 감정이라는 것이 이토록 애틋한 것일까? 식구들 각자의 이름이 너무나 친숙하고 그 얼굴 모습들이 너무나 선명히 마음에 새겨져 있어서 식구 중 누구 하나 아무리 작고 어린 자라도 잠시 못 보면 금새 그리워 못 견디게 되는 법이다. 각자가 앉아 있는 장소, 각자가 차지하고 있는 방, 각자가 아침에 집을 나셨다가 저녁에 귀가하는 시간, 각자의 얼굴 모습과 습관, 그리고 목소리, 이 모든 것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마음에 새겨져 있어서 그 누구 한 사람이라도 잠시도 눈에 띄지 않으면 금방 그리워 못 견디게 되는 것이다. 가족 중 한 명이 비워 놓은 자리는 아무도 대신 채워 줄 수가 없다. 다른 사람 누구도 대신 채워 주지 못한 채 그의 빈 자리는 그저 텅 빈 공간으로 남게 된다. 친척이나 동네 이웃이 다녀갔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렇게 그리워지지는 않는다. 그 사람들이 앉아 있던 자리는 금새 다른 사람이 채워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구는 그렇지가 않다. 식구가 떠나면 마음이 텅 비고 울적해진다. 만약 죽음이 형제 중 한 사람을 데려가 버리기라도 하면, 만약 죽음이 자매 중 한 사람이나 부모 중 한 분을 데려가 버린다면, 그가 있던 방을 그 누가, 그 무엇이 대신 채워 줄 수 있겠는가? 꽃 한 송이가 시들면 다른 송이가 또 피고, 오히려 더 싱싱하고 더 향기로울 수가 있을 테니 먼저 시든 꽃이야 금방 잊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식구라는 꽃 한 송이가 져 버리면, 그 뒤를 이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식구라는 꽃 한 송이가 떨어지면, 그 곳에는 영원한 빈 자리가 남고 만다. 예수께서 거대한 식구들을 보살피실 때도 이와 똑같은 심정이 아니시겠는가? 한 사람 한 사람 그 낯익은 얼굴들을 하나 하나 헤아려 보신 뒤, 누구 하나도 잃은 자가 없다는 걸 아시고 그분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아버지께서 주신 식구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라도 없어지면 도저히 견딜 수 없으시다는 듯이 말이다.
예수님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쏟으시는 그 마음은 얼마나 깊은가! 그것은 실로 식구들 각자를 일일이 개인적으로 대해 주시는 특별한 애정이다. 우리들은 이 사실을 깜빡 잊어버리는 바람에 손해를 많이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인간 세상살이 중에서도 우리는 이것을 자칫하면 간과해 버리기가 쉽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들 각자에게 개별적으로 대하는 이 감정을 두고 우리는 사랑이라고 말한다. p.24-27
가족의 표식 - 시련
사도 바울이 진정한 아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표식으로 고난을 달고 다녔다는 사실은 아주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는 고난을 하나님 가족의 표식으로 삼은 것이다. 그는 실제로 우리 혈토의 적법성 여부를 이 표식으로 시험하고 있다.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느냐?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는 징계를 너희가 받지 않는다면 너희는 사생아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7-8 한글킹제임스성경). 이 얼마나 강력한 표현인가! 영감 받은 사도가 아닌 다른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쓸 데 없는 소리는 하지 말라고 고함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 말씀 그대로 받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징계란 우리 출생의 정통성과 영광의 법적 지위를 증명해 주는 가장 중요한 표식들 중 하나이다. 성도에게서 이러한 특성을 찾아볼 수 없다면,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증거 할 증명서 하나를 상실한 셈이 되어서 자녀로서의 합법성을 의심받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의 출생을 밝히기 위해, 그리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편에서 친권을 인정하실 수 밖에 없는 보증서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이 가족의 표식을 달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 자체가 실로 엄숙한 일이다. 그래서 육이나 혈은 이렇게 생각하기를 꺼린다. 고난을 모면할 길이 없을까 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정말 그래야만 하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리지만, 다른 도리가 없다. 그것을 기피해 보려고 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오히려 기운이 생기기도 한다. 시련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친자식이라고 인정하는 증명서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련 가운데 처해 있을 때, 오히려 기운이 솟아나게 된다. 시련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자 삼으셨다는 증명서와 같으니, 이 얼마나 안심이 되는가! p.45-46
하나님의 연단의 목적은 훈육임
“아이를 그가 마땅히 가야 할 길로 훈육하라”(잠 22:6)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면하시는 말씀이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에 적용하시는 원칙이기도 하다. 그분은 이 땅에서 자신의 자녀들을 연단하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녀들과 가지시는 교제의 참된 특징이다. 성도들을 교육하시겠다는 것이 그분께서 세우신 목표다. 이것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연단이요, 영원한 생을 살기 위한 필수 교육이다.
그러므로 이 연단은 너무도 중요하다. 성령을 통하여 연단을 진행하고 게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며,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이 이 연단의 대상이다. 교회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갖추도록 하는 것이 이 연단의 목적이다.
수많은 아들들을 영광 가운데로 데려오기 위해서 구원의 대장이신 예수님도 먼저 고난을 통해 완전해지셔야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연단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셨던 것이다. 하나님 편에서는 도저히 이 연단을 경시할 수도 없고, 의미 없다고 할 수도 없으셨다. 이것을 깨달았던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를 경시하지 말고, 책망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 12:5). 이는 지극히 엄한 명령이기에 가볍게 여길 수 없고, 너무나 중요해서 그냥 간과해 버릴 수도 없다.
가족을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영광의 상속자가 될 준비를 갖추게 하는 과정이다. 이 연단은 우리가 거듭났을 때 즉,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순간에 시작된다. “그가 받으시는 아들마다 매질하시느니라”(히 12:6). 그러나 이 연단의 과정이 반드시 눈에 띄는 것은 아니며, 항상 의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쨌든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을 갖게”(벧전 1:3)하신 바로 그 날로부터 하나님의 채찍질은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연단은 우리가 생을 마감할 때, 또는 교회가 “공중에서 주와 만나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려올라”(살전 4:17)가게 될 때에나 비로소 끝나게 된다. 이는 평생 동안 계속되는 과정이며, 한시도 쉬지 않고 매일 매순간마다 계속된다. 매를 맞고 있구나 하고 항상 눈치 채지는 못하더라도, 연단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p.48-49
시험으로 드러나는 성도의 죄악
옛 성도들이 시험받았던 경우를 살펴보면, 그들 가운데에서 그냥 보통 죄악이 드러난 것이 아니라, 우리로서는 도저히 예상하기 어려운 죄악까지 드러났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노아는 절제심과 자기 억제력을 죽을 때까지 잃지 않았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고 많이들 알고 있다. 그는 방탕하고 음란하며 죄악으로 숨이 막히는 세상 가운데 홀로 서서 사람들의 방탕과 음란을 꾸짖으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혹적인 환경에 처하자 그도 넘어지고 말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노아가 곤드레 만드레 술 취하고 만 것이다.
또 아브라함은 어떤가? 그는 믿음과 용기에 있어서 걸출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이집트와 그랄 지방에 갔을 때, 겁이 난 나머지 믿음은 내팽개쳐 버리고 그만 거짓말을 내뱉고 말았다. 롯은 소돔의 음란과 더러움에 대항해 싸운 인물이었고 의로운 혼을 간직하고 있어 사람들의 가증스러움을 한탄했다. 하지만 그러한 그도 소돔의 멸망으로부터 구해냄을 받자마자 멸망당한 사람들과 똑같이 술 취함과 정욕에 넘어지고 말았다.
또 욥은 그 인내심에 있어 특출한 사람이었지만, 시련의 날이 계속되는 동안 그 인내심을 끝내는 저버리고 말았다.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온유했던 모세도 노기를 드러내며 그 입술로 범죄하고 말았다.
돌맹이 한 개와 돌팔매 끈 하나만 들고 골리앗을 무찌르러 나아갔을 정도로 용맹했던 다윗마저도 사울왕을 피해 도망하여 가드왕 아키스에게로 갔을 때, 적이 너무 무서워서 미친 사람 행세를 하고야 말았는데, 이 때에 그의 용감성은 어디서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엘리야는 왕들 앞에서 전혀 떨지 않고 판결문을 큰 소리로 읽었고, 하늘 문을 닫았으며, 수 천 수만의 사람들 가운데서 혼자 하나님의 복수의 칼을 휘둘렀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도 한 여인의 협박에 겁먹고 도망하더니, 생명을 건지려고 모든 것을 팽개치고 말았다.
에스겔 또한 그 거룩함과 순종함에 있어 빛나는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을 받고 보내심을 받았을 때, 불순종함으로써 자신의 기록에 먹칠을 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 영이 나를 들어올려 멀리 데리고 가시기에 내가 괴롭고 내 영이 화가 났었으나 주의 손이 내 위에 강하게 임하시더라”(겔 3:14 한글킹제임스성경)고 그는 고백하고 있다.
베드로는 열성적인 제자였지만 주님을 부인했다. 요한은 주님께 가장 사랑받은 제자였지만, 사마리아에 하늘로부터 불이 떨어지기를 원했던 장본인이기도 했다.
참으로 인간이란 이 정도밖에는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시험을 당하여 그 속이 속속들이 드러날 때 인간의 마음은 - 성도의 마음마저도 - 겨우 이런 정도인 것이다. 존 베릿지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 너, 마음아! 너는 도대체 어떤 존재냐? 바로 천치 덩어리가 아니더냐? 만물 가운데 가장 거짓되고, 간사하고, 악하고, 어리석은 자로다! 몰래 숨어 있던 죄악아! 이기심과 자존심아! 거칠은 성깔, 세속적인 욕망아! 하나님의 매가 영혼 깊은 곳을 치신다고 해서, 어쩌면 그렇게 순식간에 고개를 쳐들고 나온단 말이냐?”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와 정직성을 굳게 잡고 욥은 얼마나 오랫동안 참고 견뎌냈던가! 얻어맞고 또 얻어맞는 고난 가운데 처참하게 땅바닥에 나가떨어져 뻗었어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하지만 그의 내면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던 “자아”에는 아직 하나님의 매가 미치지 않았던 것이다. 역겨운 질병이 엄습하여 그를 더러운 거름 무더기로 처박았을 때, 그리고 친구들이 덤벼들어 하나님의 정죄를 받은 자로 그를 낙인찍었을 때, 그도 별 수 없이 자신의 믿음과 인내심을 저버리게 되었다. 하나님의 매가 그의 중심을 시험하자, 그는 안달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불신의 물줄기가 마음속으로부터 터져 나오고 만 것이다. 그를 시험하기 위해서는 활을 힘껏 당겨서 마음의 심연까지 깊이깊이 꿰뚫고 들어갈 아주 날카로운 화살이 필요했던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의 질병이 자리 잡고 있는 마음속 깊이까지 찌르고 들어가자 그의 진짜 본성이 마침내 드러나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성도들의 마음속으로부터 고개를 들고 나오는 모든 죄악들 가운데 가장 악하면서도 공통적인 것은 바로 하나님을 불의하신 분으로 여기는 생각이다. 과거에 우리가 불신자였을 때에나 가졌던 생각이다. 그때는 하나님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데 바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게 하셨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참으로 좋으시고 선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결코 홀대 받으실 만한 분이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라는 사실을 알려 주셨다.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헤아릴 수 없이 크신 놀라운 사랑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것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우리의 과거의 불신에 대해 부끄럽게 여겼다. 우리는 그 때, 이제부터는 결단코 하나님을 나쁘게 생각지 않으리라며, “그분이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 분을 신뢰하리라”고 마음먹기도 했다. 고난을 당하면 오히려 더 그분께 매달리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자마자 예전의 생각들이 다시 고개를 든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이렇게 대하신단 말인가?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에 대해 의혹을 품게 된다. 주님의 은혜를 꼭 붙잡고 있던 손이 느슨해지면서 급기야는 그 은혜가 모두 다 달아나 버리고 마는 것이다.
우리들은 시들어 버린 박넝쿨 아래에 있었던 요나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회가 날 때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한다. 처음 하나님을 믿었을 때, 그분의 사랑을 맛보았지만, 이제는 그 사랑의 하나님이 전과 같지 않다고 여기고 만다. 마침내 우리 마음 가운데 숨어 있던 배교가 반역을 일으키기 시작하는 것이다! “무조건 하나님을 섬기리라”던 것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는 사실도 무참히 드러난다.
하나님이 우리를 훈계하시며 이렇게 물으신다. “네가 성내는 것이 잘하는 것이냐?” 이런 질문을 받으면, 우리 입에 그 무슨 말이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불법을 용서해 주시고 말끔이 도말해 주셨거늘, 우리가 화를 내거나 낙담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겠는가? 이 악한 현 세상에서 우리를 구해 주시고, 다가올 진노로부터 우리를 구해 주셨으며, 우리의 친구 되신 예수님이신 그 큰 바위에 우리를 숨겨 주셨거늘, 그래도 우리가 성을 내는 것이 잘하는 일이겠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하게 소유하고 있고, 그 아들의 왕국을 영원한 유업으로 받았거늘, 우리가 성을 내는 것이 과연 잘하는 짓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제 밤이 다 지나갔고 낮이 가까워져, 저 멀리 동쪽 하늘의 구름자락이 붉게 물들고 태양이 곧 떠오를 때가 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우리가 성이나 내고 있는 것이 정말 잘하는 일이란 말인가? p.85-88
하나님의 책망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의 책망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주님께서 주시는 시련은 아무리 작은 음성일지라도 마치 천둥 번개와 지진이나 되는 것처럼 여겨야 한다. 가벼운 시련들의 의미와 용도를 배워야 한다. 아무리 가볍고 일시적인 아픔이나 슬픔을 당하더라도 그것을 의미심장한 것으로 알고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렇게 하면 많은 고난을 모면할 수가 있다. 또한 가벼운 책망으로도 우리는 좀 더 편하고 쉽게 하나님의 교훈을 배울 수가 있다. 아무리 가벼운 고통일지라도 은총의 향기를 가득 담고 온다. 그런데 그것을 가볍게 여기고 내팽개쳐 버릴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되고 그분의 사랑을 더 많이 알게 되는 계기를 무시하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란 말인가? “이 가벼운 십자가를 잘 활용하여라. 그러면 무거운 십자가를 지지 않아도 되리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런데도 우리는 귀를 막고 외면함으로 얼마나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있지는 않는가!
한편, 가벼운 고통에 대해서 귀를 틀어막고 있었기 때문에 더 무거운 고통을 초래하게 되는 것만은 아니다. 무거운 고통에 대해서조차 우리는 너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보다도 더 무거운 고통을 스스로 초래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안일한 태도로 시련을 극복하려 하는데, 이것은 아주 어리석을 짓이다. 시련을 당하는 순간에는 감정이 격렬하게 복받쳐서 울고불고 야단을 하지만 그것은 그때뿐이고 마음 속으로는 깊이 그 시련의 의미를 새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 시련이 곧 또 닥쳐올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시련을 마음 속 깊이 엄숙하게 받아들이는 것과 감정적이 되어 울고불고 하기만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감정을 폭발시키기만 하는 사람들을 보면, 거듭되는 고통과 고통의 막간에는 아주 태평하고 유쾌하게 지내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게 되면 시련자체가 영혼에 큰 손상을 입힐 뿐만 아니라 면역이 생겨 버려 별 효과를 내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또 다른, 훨씬 더 아찔하게 아픈 주먹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가짐이 아주 심각한 상황이라고 여기시게 되면, 시련에 시련이 거듭거듭 꼬리를 물고 쉴 새 없이 닥치게 하시거나, 하나의 고난이 지겹도록 오래 지속되게 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 너의 하나님께서 그 길로 너를 인도하셨을 때 네가 그를 버림으로써 이것을 네 자신에게 자초하지 않았더냐?”(렘 2:17 한글킹제임스성경)는 말씀은 이러한 우리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파도에 파도가 거듭거듭 우리를 덮쳐 오지만,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폭풍을 자초한 결과이다. 파고가 더욱 거세게 높아져서 결국 우리가 거의 압도되어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기 전에 하나님께 즉시 굴복하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대로 우리에게 복 주시도록 했더라면, 파도는 한 번으로도 족했을 것이고, 하루 해가 지기도 전에 폭풍은 잠잠해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위로가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거친 항해를 자초하긴 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고향을 향해 가고 있다. 이 모든 폭풍과 파도들은 가나안을 향해 불어 닥치고 있기에 결국 우리는 그곳으로 밀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파도치지 않는 잔잔한 바다에 떠 있을 때보다 이따금씩 파도 꼭대기로 높이 치받쳐 올라갔을 때, 우리는 저기 떨어져 있는 영원한 유업의 불빛을 더 밝게 볼 수 있게 된다. 그 불빛이 폭풍의 암흑을 밝혀 주고 있는 것이다. 파도가 아무리 사나울지라도 그럴 때마다 본향으로 좀 더 가까이 떠밀려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는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가 있으며, 물결이 세찰수록 우리는 더욱 빠르게 그리운 항구를 향하여 항해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p.94-96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고통을 주시는 의도
우리 자신을 “그의 거룩하심에 동참하는 자들”이 되게 하려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크신 뜻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했다. 이 표현에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본성에 동참하는 자”(벧후 1:4 한글킹제임스성경)라는 말씀과 상응한다. 이 말씀은 대단히 우리를 높이 올려 주는 복된 무엇인가를 나타낸다. 하나님의 목적이 단순히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라고 말했더라면, 아만큼 깊은 의미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주님 자신의 거룩함 - 바로 그 분의 본성-에 동참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천사들의 영광보다 훨씬 더 큰 영광이다. 이것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구속받은 자들 -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에게는 대단히 특별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 가운데 포함된 단순한 평안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평안이며, 주님의 주시는 단순한 즐거움이 아니라 그분 자신의 즐거움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것이 단순한 거룩함이 아니라 그분 자신의 거룩함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동참자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 얼마나 깊으신 뜻인가!
이것만 있어도 다른 모든 것은 내팽개쳐 버려도 될 만한 아주 엄청난 상급이다! 이 훌륭한 상급의 모든 가치를 우리가 깨닫고 우리 마음이 온통 그것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충돌이라는 절차가 남아 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리에게 가장 주고 싶어 하는 복이기 때문에 그것을 전해 주시려면 불가불 몸을 구부리고 우리에게 가까이 접근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과 어떤 지점에서 딱 만나게 되면 이 충돌은 끝이 난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방법을 사용하시는데, 실은 우리에게도 그게 최상의 방법이다. 우리를 죄로부터 건지기를 원하시고, 우리들 또한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이렇게 하나님과 우리의 뜻이 일치하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는 주님의 목적에 대해서 우리가 뜨거운 열망으로 진실하게 응하게 되다니, 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바로 이 순간에 하나님의 풍성함이 우리의 영혼 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이것을 막을 수 없다. 이렇게 되기까지 이형적인 고통을 겪어야 했지만, 이제는 영광으로 가득 찬,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즐거움이 우리의 거룩해진 영혼을 가득 채우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무거운 것과 쉽게 에워싸는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하자. 그리고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보다. 그는 자기 앞에 놓인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견디시고 수치를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 한글킹제임스성경). 고통이 아니고는 그 어떤 것도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 못한다. 고통은 세차게 휘몰아치는 바람과 같아서, 나무가 더 깊이 뿌리를 내리게 한다. 고통은 잔디를 깎아 주는 것과 같아서, 뿌리가 더 왕성히 뻗게 하고 잔디 잎이 더 푸르르게 해준다. 고통이란 횃불을 휘휘 내젖는 것과 같아서 불빛이 더 환하게 비치도록 해 주는 것이다. p.105-106
하나님의 잠자는 성도 깨우기 ; 고난의 의도
성령께서 죽음의 깊은 잠에서 우리를 흔들어 깨우신 지가 언제였는가! 우리는 다시는 그토록 깊은 잠에 곯아떨어지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한다. 우리를 깨워 주셨던 주님은 우리를 데리러 오실 때까지 우리를 계속 깨어 있게 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더 이상 잠을 자지 못한다.
하지만 아직도 상당히 졸릴 대가 있다.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지난 날의 졸음이 자꾸만 다시 엄습해 오는 것이다. 이 세상 것들이 여전히 매혹적으로 보여서 거기에 한눈 팔다 보니 자꾸만 눈이 감기는 것이다. 우리의 감각은 술 취한 듯 하고, 의식은 몽롱하고, 힘이 빠진다. 그래서 우리는 망대에 올라가 보초를 서고 있으면서도 잠에 곯아떨어져서 밤이 다 지나고 아침이 밝아 오는 것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곯아떨어져 있거나 꾸벅꾸벅 졸고 있는 동안 모든 것이 잘못 돌아가고 만다. 움직임은 둔해지고 생기를 잃는다. 믿음은 희미해지고 사랑은 식어 버리며 열정은 점점 차갑게 가라앉는다. 전에 있었던 싱싱한 활력은 사라져 없어지고, 담대한 용기도 떠나 버린다. 계획을 짜도 온통 허점투성이고 일을 진행해도 졸린 사람이 비틀거리듯 허술하기만 하다. 하나님을 위한 사역은 진전되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 자신이 그것에 방해가 된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그것을 질질 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을 그냥 놔둘 수가 없으시다. 자신의 사역을 위해선, 우리 성도들을 위해서라도 사태가 이런 지경에 놓여 있는 것을 용납하실 수는 없으신 것이다.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우리가 다시 잠에서 깨어나게 하셔야만 한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잠자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않은 빛의 자녀들이요, 낮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늘 깨어서 정신을 차리고 있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인생을 한가롭게 즐기며 흘려버리도록 놔두지 않으시는 것이다. 그런 낭비적인 삶을 하나님은 용납하실 수가 없으시다. 게으르고 김빠진 임무수행, 성의 없는 기도, 별로 꾸짖을 데 없이 반들반들 길이 들어 뭐라고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자세, 하는 말마다 매끄럽고 지혜로운 것 같지만 실상은 깊이가 업고 진실 되지 못해서 무게가 없는 언행, 이런 것들이 성도들에게 엿보인다면 하나님은 참으실 수 없다.
이렇게 싸늘하게 죽어 있는 자세를 일컬어 주님께서는 사데 교회를 향해서 “만일 네가 깨어 있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같이 네게 임하리니 어느 때에 너에게 올 것인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 3:3)고 하셨다. 또한 그런 미지근한 태도를 지닌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는 “네가 그처럼 미지근하여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기 때문에 내가 너를 내 입에서 토해 내겠노라”(계 3:16)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실 때, 처음에는 아주 살살 깨우신다. 향나무 아래에서 잠자던 엘리야에게 천사가 그랬듯이, 부드러운 손으로 우리를 흔들어 깨우신다. 너무 마음 푹 놓고 깊이 잠들었다 싶으시면, 가벼운 재앙을 보내서 깨우신다. 소란한 소리가 멀리서 귀에 들려오도록 해 주시는 것이다. 그것이 때로는 국가적인 소동일 수도 있고, 기근 소식일 수도 있고, 전쟁일 수도 있고, 또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 발생한 역병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이런 모든 것들이 아무런 효과가 없을 수도 있다. 전이나 다름없이 우리는 안전하다 생각하고 마냥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여전히 맥 풀려 있고 생기가 돌지 않으면 하나님은 더 가까이 다가오셔서 우리 이웃이나 친척들 가운데 어떤 일을 일으켜 가까운 소리로 들리도록 음성을 약간 높이신다. 그래도 효과가 없으면 이번에는 더욱 가까이 다가오신다. 때가 급한데도 성도들은 여전히 잠자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아주 우리 귀에다 대고 소리를 지르시는 것이다. 연약한 곳을 매로 때려서 온 몸을 뒤흔들고, 심장이 펄떡 뛰게 하고, 맥박이 빨라지게 하시는 것이다. 비로소 우리 영혼은 수천 발의 화살을 맞은 것처럼 아픔을 느끼며, 그제서야 놀라서 긴 잠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어쩌다가 이토록 긴 잠에 곯아떨어졌던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게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잠에서 완전히 깨려면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얻어맞아야 한다. 일단 깼다가도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니 말이다. 그래서 잠을 깨우기도 해야겠지만 또한 깨어 있도록 계속 지키고 있어야 한다. 이 졸음 때문에 우리가 겪어야 하는 고난, 그 찢어지듯 아픈 가슴의 상처는 또 얼마나 큰가! “시온성에서 평안히” 여러 해를 푹 빠져 있던 우리들의 호사스런 삶의 대가는 엄청나게 비싸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삶에 대해 생각하라”는 격언은 사려 깊은 독일인들에게는 아주 깊은 의미를 담고 있었죠. 이 격언을 인용하면서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불행한 자라고 여겨지는가? 그렇다면, 그대의 인생은 한가한 꿈이 아니라 엄숙한 현실이라네. 그 인생은 그대 자신의 것이라네. 그 인생 전부를 마주 대해야만 한다네. 그러므로 일하게나. 결코 서두르지는 않되, 그렇다고 쉬지도 않는 ‘별’처럼 말일세.”
일은 하는 것 같은데 도무지 깨어 있는 사람 같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더러 있다. 말은 사명을 그럭저럭 수행하고는 있지만, 발걸음은 지쳐 있고 힘이 없다. 열정 없이 마지못해 움직인다. 선한 일도 제법 하고, 그럴 듯한 계획들도 많이 세우는가 하면, 훌륭한 말도 깨 한다. 그러면서도 열정적인 삶의 힘찬 맥박은 뛰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열정, 불타는 열정, 활기찬 열정, 이것이 도무지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을 불태우지도 않거니와 다를 사람들에게 불을 지피지도 않는다. 그들에게는 도무지 ‘별’다운 데가 없고 싸늘하기만 하다. 아마도 곧 날카로운 징계가 내려질지 모르며, 사실 이들에게는 그것이 필요하다.
또 어떤 이들은 이따금 생각난 듯이 발작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순간적인 기분에 따라 열을 올리기 때문에, 무슨 짓을 벌일지 안심이 되지 않아 마음 놓고 무엇을 맡길 수가 없다. 자신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성격이 아주 충동적이다. 또 그런 성격을 십자가에 매달아 버리거나 스스로 억제하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는다. 이렇게 간헐적으로 깨어 있는 것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어떤 때는 소용이 있기도 하다가 또 어떤 때는 아무 소용이 없는 상태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집을 세우기도 하고 또 무너뜨리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도 ‘별’다운 데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그 들쭉날쭉한 성격을 일관성 있도록 고치고 영적인 변덕을 없애기 위해서는 아주 쓰라리고도 오래 계속되는 고난이 필요하다.
이와는 약간 달리 항상 깨어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법석만 떨고 요란한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휘젓고 다니면서 일을 꾸미지 않고는 못 배기며, 여기 저기 뛰어 다녀야 직성이 풀린다. 기질적으로 신경이 예민하고 겁이 많으며 참을성이 없어서 좀 쉬라거나 한 발짝 물러서라고 하면, 크게 제지를 당한 듯 속상해 한다. 이런 사람들은 실상은 자기가 하는 일은 별로 없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한시도 가만있는 것을 못 보기에 그들을 들볶아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킨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 충만과는 거리가 멀다. 외적인 것에만 치중하다 보면 영적 성장 면에서는 손실이 크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이런 모습에는 ‘별’다운 데가 있기는 하다. 잠자는 법 없고 쉴 새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워낙 성급하게 허둥대는 바람에 차분히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오히려 지혜롭지 못하게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그릇된 열성을 털어 버리고 성도라는 이름에 걸맞은 진정한 영적 고요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는 깊은 데를 찌르는 날카로운 채찍이 필요하다. 이들의 진정한 영적 성숙을 위해서는, 아주 뼈저린 징계가 있어야 한다.
항상 꾸준하게 일하고 또 열정 또한 분명히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과 교제를 나눠 보면 그들 역시 진정으로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일은 많이 하지만 기도는 별로 하지 않기 때문에 머지않아서 그릇에 담긴 기름이 다 떨어지고 만다. 이들은 앞서 예를 든 사람들 보다는 낫지만, 역시 잠에서 더 깨어나야만 한다. 쉬지 않고 일하면서 설쳐대지도 않는다는 점에서는 ‘별’다운 데가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들의 불빛이 아직은 미약하다. 어두운 세상에 반사되는 빛이 희미하고 가냘픈 것이다. 이들에겐 좀더 깊은 영적 삶과 경험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그들에게도 역시 부딪혀야만 하는 아픈 고통이 마련되어 있다.
진정으로 깨어 있다는 것은 위의 예들과는 사뭇 양상이 다르다. 그것은 강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그런 것이다. 어딘지 늘 조용한 분위기를 띠면서도 내면에서 발산되는 위엄이 은은히 감돈다. 불처럼 뜨겁지만 열광적으로 흥분하지는 않으며, 힘이 넘치지만 날뛰지 않는 그런 모습이다. 하는 일이 신속하면서도 결코 허둥대지 않고, 신중하지만 그렇다고 부끄러워하거나 이기적이 아니다. 결단력 있고 두려움이 없으면서도 경솔하지 않으며,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는다. 입을 다물고 있는 듯 하지만, 주위 사람들 모두가 그의 영향력을 느낀다. 즐거움과 화평으로 충만하면서도 밖으로 떠벌이는 법이 없다. 따사로움과 사랑이 넘치면서 동시에 또 신실하고 진실된 그런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깨어 있는 삶이다! 아, 그러나 이렇게 온전해 지려면, 얼마나 많은 역경들을 거쳐야 하는지!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하지 않는 육신적인 본성이 고개를 들고 반발한다. 우리 자신을 마땅한 산제사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해서 초래되는 고난을 또 얼마나 많이 거쳐야 하는지!
징계로 우리를 졸음에서 깨워 주셔서 우리는 더욱 활기 넘치고 근면해지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전보다 훨씬 더 많은 기도를 드리게 된다는 점이다. 잠에서 깨어났다는 사실을 가장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마도 많은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시련만큼 기도를 되살려 주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시련에 부딪히면 우리는 즉각 무릎 끊게 되고 골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기도하게 된다.
번영하던 시절에는 즐길만한 일들이 너무 많았고 몸을 숨길만한 피난처가 여기저기에 있었다. 그러나 고난의 시절에는 우리에게 오직 한 분, 하나님 밖에는 없다. 비통함이 너무 깊어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줄 수도 없고, 또 너무 아픈 것이어서 그 누구도 위로해 줄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 기도를 드린다. 전에는 무슨 특별한 일이나 되는 듯 싶어서 별로 기도를 드리지 않았지만, 이제는 기도가 전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인간의 팔이 부러지면, 기댈 곳은 하나님 밖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전보다 몇 갑절 더 어둡게 느껴지는 이 세상 한 가운데에서 빛이 비치는 곳이라곤 정말이지 우리의 기도실 밖에는 없다. 바깥은 사방이 음침하고, 구름이 온 지면을 덮고 있기 때문이다. 문을 걸어 잠그고 기도드릴 골방만이 밝고 조용하다. 얼마나 열심히, 얼마나 감사한 마음으로 이 기도실에 우리 자신을 맡기고 있는가! 기도의 골방은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 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 주신 행복한 섬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모든 시간을 다 써 버려도 아깝지가 않다. 어쩌다가 피치 못해 여기를 잠시 떠났다가도 다시 이리로 돌아 올 때면, 얼마나 마음이 가뿐한가! 이곳에서 유일한 친구인 하나님과 함께 보내는 조용한 시간들이 그 얼마나 행복한가! 구름은 아직 걷히지 않았고 폭풍우는 아직도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다 잊어버릴 수가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기도가 훨씬 현실감 있게 느껴진다. 기도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하지만, 또 현실적으로 절실히 필요해졌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를 드릴 수 밖에 없고, 기도를 통하여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부르짖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는 기도가 진짜 간구가 되었고 진짜 간청이 된 것이다. 격식도 없다. 탄원을 올릴 때마다 새로운 생명, 새로운 에너지, 그리고 새로운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많이 쏟아 부어지는지 모른다!
이제는 입으로 말하지 않고 마음으로 말한다. 우리 마음의 갈망을 표현하기가 불가능하여 이제는 복바쳐 오르는 것들이 “말할 수 없는”신음뿐이어서, 이 신음소리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의 귀에 상달된다. 전에는 입은 있으되 마음은 없었지만, 그러나 우리는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라는 말씀의 뜻을 알게 된다.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과 가까워진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제는 훨씬 더 의식할 수 있는 현실이 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새로운 화제들이 거론된다. 새로운 소망들이 샘솟아 오르고 새로운 바램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완전히 비워진 우리의 마음 앞에 하나님의 풍성한 충만하심이 생생하게 나타난다. 깊은 영적 갈망들이 불타오르고, 우리 마음은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을 외쳐 부르짖는다. 다윗의 가슴을 기도로 가득 차게 했던 것도 고난들 때문이었다. 요나가 하나님께 큰 소리로 외쳐 부르짖은 것도 물고기 뱃속에서였다. 그리고 므낫세가 기도를 배우게 된 것도 광야의 가시덤불과 바빌론의 압제 가운데서였다.
교회여, 주님의 택함 받은 상속자여, 이제 잠에서 깨어나도록 하자!
빛과 낮의 자녀들이여, 이제 모두 일어나자1
긴긴 겨울밤은 거의 끝났다. 이제는 낮의 별이 막 떠오를 때가 되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라”(벧전 4:7), “어찌하여 너희는 자고 있느냐? 너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일어나 기도하라”(눅 22:46). 이제는 이 말씀들에 우리 모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p.107-115
고난, 우리의 이기심을 깨는 하나님의 방법
‘진리’가 마음을 몽땅 점령하고 있어서 진짜 진리이신 “참되신 분”을 깡그리 망각하고, ‘사역’이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어서 개인적으로 상대해야 될 대상을 놓쳐 버리며, 주님의 일이랍시고 거기에만 매달려 있는 바람에 인격적인 그분과의 개인적인 교제의 필요성을 간과해 버리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이들이 그리스도의 ‘사람’되심을 아예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하나의 사실로만 간주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기껏해야, 언젠가 주님과 얼굴을 맞대고 앉아 있게 되면, 그때 그분을 개인적으로 상대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자신들에게 영생을 가져다주기 위한 사역을 주님께서 다 이루셨기에, 주님의 “실체”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여기는 모양이다. “우리는 죄사함을 받았다. 우리는 평안을 얻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잘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값을 치르고 이 복을 우리들에게 사 주신 주님이시건만, 주님과 나와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 따위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이다. 속죄 받았으니 다 되었고, 속죄하신 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더라도, 아주 조금 밖에 관심이 없다. 주님의 사역이 충복된 것만 중요하고 주님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기심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스도의 역사하심으로부터 가능한 한 모든 은총을 취해 버리고는 주님 혼자 남겨 놓고 떠나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기심이 비슷한 양상의 또 다른 이기적 행동과 생각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교리의 틀이 어떤 것인지는 얼마든지 파헤칠 수 있다. 그들의 구속관부터가 아주 이기적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목적을 어떻게 성취하셨으며 그 영광이 어떻게 드러났던가에 대한 원리를 토대로 삼지 않고 단지 죄인이 어떻게 구원받게 되는가 하는 원리만 토대로 교리의 틀이 짜여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기적인견해가 죄인을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빼앗아다가 죄인 자신의 손에 갖다 놓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이기적이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에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 아닌가? 그런데도 이 절대적 필요성을 축소하고 그 대신 인간 자신의 의지와 판단이 구원에 매우 중요한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획책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기적 교리관을 채택하지 않는 곳도 물론 많다. 그러나 그런 곳 사람들마저도 이러한 이기적 성향이 잠재해 있는 것을 많이 보게 되는데, 이것은 다 인격적 존재로서의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데에서 기인한 것이다.
하나님의 징계는 이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징계를 통해 주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서만 위로를 얻고 힘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다른 경우보다 더 심하게 다루신다. 살아 계신 주님과 내가 개인적으로 접촉하게 되었다는 것을 더욱 실감하게 되는 때가 고난의 세월 말고 또 언제이겠는가? 고난에 처하게 되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뿐이라고 느끼게 된다. 진리도 귀하다. 그분의 사역도 아주 귀하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그분 “자신”이 가장 귀하다. 다른 것은 못하더라도 주님과 함께 꼭 붙어 있는 일만은 절대로 양보할 수가 없다. 우리의 고난들을 모두 쏟아 버릴 곳은 오직 그분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기심의 뿌리를 겨냥하여 고난이 닥쳐온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만 의지할 수밖에 없구나 하는 그 복된 필요성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내가 아닌 또 다른 나, 훨씬 더 영광스러운 “자아”를 우리 앞에 갖다 놓고 그 새로운 자아가 비참한 나 자신을 흡수해 버리고,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 자신이 모두 녹아 없어지게 해 주는 것이다. 우리를 그리스도 그분 자신과 가장 친밀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고난 외에 다른 것이 없다. 우리들 자신을 뿌리 째 뽑아 없애는 데 고난만큼 큰 효력을 지닌 것이 없다. 이것이 우리의 이기심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우리의 것이 아니,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구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진리를 뛰어 넘어 “진리이신 그분”께로 데려다 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p.128-130
세상을 닮은 성도는...
성도들 사이에도 세상을 닮아가는 모습들이 많이 엿보인다. 모슨 일을 하는 동기를 보거나 행실을 보아도 그렇고,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을 보아도 그렇고, 집안을 다스리는 것이나 가족들을 교육하는 것에 온통 세상적인 요소들이 구석구석 배어 있다. 독서나 대화에서도 세상의 냄새를 풍기는 성도들이 많다. 돈 쓰는 것도 세상적 이어서 자신을 위해서는 펑펑 허비하면서 하나님을 향해서는 구두쇠가 된다. 그리스도를 위해서나 동료 형제들에게 봉사하면서 일하고 수고하고 돈을 쓰고 또 고통을 감수하는 일은 하기 싫어하고, 심지어는 신앙적인 계획이나 선교단체들과 관련된 일에서도 그들은 세상 방식대로 움직인다.
한 마디로 모든 처신들이 세상 사람들을 닮아 있어서 세상 것들을 뛰어 넘는 성도들만의 평안과 고요는 찾아 볼 수가 없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불안해하고 안달하고 야단법석이다. 세상 냄새는 풀풀 나지만, 하늘나라 향기는 전혀 안 난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방식에 대해서 머지않아 자신들이 들어가게 될 썩지 않을 유업에만 늘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사람들처럼 아주 요지부동이지만, 하나님 일이라면 뒤로 발을 빼고 겸양한다. p.132
고통으로서의 광야생활의 의미
“그가 그의 경이로운 일들로 기억되게 하셨으니“(시 111:4 한글킹제임스성경). 그렇다. 그것은 영원히 기억될 일들이다. 그 경이로운 일들을 이루신 의도부터가 기억되도록 하기 위하심이었기에 망각이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것들은 한갓 이야기처럼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가장 경이로운 일들 가운데 하나가 징계다. 징계만은 특별히 기억하게 된다. 이것만으로도 징계는 가치가 있지 않은가? 그 징계가 우리와 연관될 때는 더욱 가치가 높다. 징계만큼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은 없다. 다른 것은 징계만큼 우리 마음 가운데 그토록 깊이 새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징계는 지난 날 우리가 두려워했고 또 소망했던 모든 것들과 얽히고 설켜 있다. 그래서 그것들은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 영원히 새겨져 있다. 그 어떤 펜을 가지고 써도 고난만큼 지워지지 않게 영혼 속에 써넣을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의 심정을 피력하셨을 때, 바로 이점을 지적해서 말씀하셨다. “주 너의 하나님께서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너를 인도하셨던 모든 길을 너는 기억하라. 이는 너를 겸손하게 하시고 시험하사 네가 주의 계명들을 지키는지 그렇지 않은지 네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알려 하심이니라. 주께서는 너를 겸손하게 하시고 너를 배고프게 하셨으며, 너도 모르고 네 조상도 모르는 만나로 너를 먹이셨으니, 이는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을 너로 알게 하심이니라.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옷이 낡아 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어오르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자기 아들을 징계하는 것같이, 주 너의 하나님께서도 너를 징계하시는 것을 네 마음 속에 생각할지니라”(신 8:2-5 한글킹제임스성경)고 말씀하셨다.
광야에서의 이런 기억들을 이스라엘 백성의 가슴 속에 영원토록 새겨놓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사막을 방황하면서 그분과 가졌던 교제의 은총을 그들이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잊어버리기에는 너무나 고귀한 기억들이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다양하게 하나님과 가까이서 홀로 가졌던 사십 년 동안의 교제는 그들에게 하나님에 관해서, 그리고 또 그들 자신에 관해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기억들은 영원토록 간직해 둘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지명 하나 하나마다 경이로운 광경이 담겨 있었고, 바위 하나 하나마다 거기에 들려 줄 이야기가 서려 있었다. 적들과 위험들, 배고픔과 목마름, 만나와 물, 불평들과 감사의 기도들, 여행과 야영 생활들, 해지지 않던 옷, 쇠와 놋쇠 같이 닳지 않았던 그들의 신발, 부어오르지 않았던 발, 그리고 무엇보다도, 머리 이에 떠돌던 구름들과 그들 한 가운데에 펼쳐졌던 하나님의 성막, 이 모든 것들이 기억되어야 할 장면들이었다. 광야 생활 이전에는 한 번도 이와 같은 놀라운 교제들이 한꺼번에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일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억되어 그들의 자녀들에게, 자녀들의 자녀들에게, 두고 두고 물려 줄 고귀한 유업이 되었던 것이다. p.136-139
고난이 무겁지 않은 까닭
고난이 죄를 없애고, 죄에 물든 몸가짐과 성격들을 제거할 수 있는 수단이기에, 일생 고난에 처한들 그게 그렇게 길고 무거운 것은 아니다. 죄들 제거하고 더욱 거룩해지며 더욱 경건해지고, 주님의 모습을 더욱 닮아 가게 되는 수단이기에, 일생 겪는 고난이라도 그렇게 길고 무겁지가 않다. p.149
성도가 고난당할 때 성령께서 우리의 위로자로 계신다!
주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씻는 일에 전능하시듯, 우리를 위로하시는 일에도 전능하시다. 주님은 우리 안에 영으로 거하시며, “위로자”라 불리신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일 외에도 우리의 영혼을 향하여 직접 능력의 손을 뻗어서 낙심하고 고통당하고 있는 그 영혼을 꼭 붙잡아 주시고 힘을 불어 넣어 주신다. 우리의 상한 영혼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에 감싸여 있고, 그 전능하신 손으로 우리를 지탱해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 내면에 있는 슬픔의 샘, 바로 그것을 말려 버리신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는 정말 헤아릴 수 없이 큰 위로를 받게 된다. 고난에 짓눌려서 땅에 엎드려 있을 때야 말로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지 않는가? 우리의 영혼 속으로 직접 다가와서 영혼을 일으켜 세우고 힘을 북돋아 줄 수 있는 그런 도움 말이다. 인간의 위로는 이럴 때 아무 소용이 없다. 친구들이 우리를 위로해 주기 위해 별별 말을 다 해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마음 속에 숨어 있는 슬픔의 근원까지 손으로 어루만져 줄 수는 없다. 기진맥진해 있는 육신을 팔로 안아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쇠잔해진 영혼을 안아 줄 수는 없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이 계시다. 성령께서 우리를 영원한 팔로 감싸 안으셔서 단단히 붙잡아 주신다. 그분이 우리를 붙잡고 계시고, 우리를 위로하시며 마음을 북돋아 주시기에, 우리는 주저앉을 수가 없다. 우리를 어떻게 붙잡아 주는 것이 좋을지, 어떻게 위로하여 기쁘게 해줄 수 있을지, 그 방법을 그분만큼 잘 아시는 분이 어디 있겠는가? p.151-152
고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셋이나 노아, 또는 아브라함이 걸어가야 했던 그런 순례의 긴 여정이 우리들에게는 남아 있지 않다. 우리의 순례의 길은 그들의 것과 비교해 볼 때 한 뼘 밖에는 안 된다. 우리의 온 생애가 곤비한 날들과 잠 못 이루는 밤들로 가득 차 있다 할지라도, 그 고난의 나들이 며칠 안 되고, 깨어 있어야 할 밤들이 몇 밤 남지 않았다. “우리는 잠시 받는 가벼운 환난” 가운데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짧은 수명도 수명이지만,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가까이 다가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이 점이 또한 위로가 된다. 환난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과 승리의 시작이 눈 앞에 있음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개인의 고통에서 벗어나 안식하게 된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의 안식과 구원이 함께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때가 되면, 우리들 “그리스도의 몸”은 깨어 있든지 잠들어 있든지 영광스런 주님의 몸으로 변모되어 영광된 주님과 함께 영광을 얻게 될 것이요, 영원한 즐거움이 우리들 머리 위에 머물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잠든 사람들을 애도하는 사별의 슬픈 날들을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 이 위로는 특히 귀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들어 있는 자들을 주님께서 함께 데리고 오실 테니까 말이다. 주님이 가까이 와 계시다는 사실은 그들과 재회하게 될 날도 머지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이른 저녁에 잠자리에 누운 사람은 온 밤 전체를 잠을 자야 하지만, 아침이 가까워진 시각에 잠든 사람은 채 한 시간도 안 되어서 새벽이 그를 깨울 테니까 말이다. 이 마지막 날들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자들도 마찬가지다. 지금이 벌써 밤 사경 쯤 되었고 해가 떠오를 준비를 이미 하고 있으니 그들은 오래도록 잠자지 않아도 된다. 이 얼마나 큰 위로인가! 사별의 아픔을 얼마나 달래주는가! 상한 영혼을 얼마나 북돋아 주는가!
“잠깨어라, 노래하라, 너희 흙 속에 거하는 자들아.”라는 말이 이제는 우리의 매일 매일의 표어다. 우리는 망대 위에 올라서서 한밤중 어두움 속에 비쳐 오는 아침의 첫 햇살을 기다리고 있다. 땅에 귀를 대고 가만히 들어 보면 주님 오시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벌써 오래 전에 약혼했던 신부가 온 마음을 다하여 소망하면서 눈물과 고독 속에서 그토록 여러 세대, 여러 세기 동안 기다려 왔던 젊은 날의 신랑이 이제 곧 신부의 가슴으로 찾아오실 것이다. p.152-153
출처: 네이버/긍휼의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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