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주의

이단경계 2011. 4. 7. 03:22



영지주의

 

-라은성 교수(국제신학대학교)-

 

 

1.1. 정의


        영지주의(Gnosticism)는 신비하고 비밀적인 지식을 또는 ‘영지’(gnosis)를 통해 구원이 이뤄진다는 종교적 철학적 이원론을 철저하게 표방하는 운동이다. 이 운동은 영지주의자 발렌티우스(Valentinus, c. 105-c. 165)에 의해 설립된 로마학파와 알렉산드리아학파들이 2-3세기의 그레코-로만 (Greco-Roman) 세계에 그 절정과 그 번영을 나타내면서부터 알려지게 되었고 그 이후 이 운동은 기독교에 큰 충격을 준 신비적 종교운동이 되었다. 이 운동이 번영했던 시기는 교회교부들―이레니우스(ca. 120-203), 히폴리투스(d. 235), 터툴리안(ca. 150-160~ca. 220-240) 등―이 활동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그들은 영지주의의 위협을 느끼고 간과하지 않았던 것이다. 교부들이 초긴장을 하며 대응했던 이유는 대부분의 영지주의자들이 기독교인임을 고백한다고 가정하면서 초대교회에 정통 기독교와는 너무나도 다른 신앙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지주의자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이원론에 입각하여 모든 물질적 실체는 사악하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갇혀있는 영혼을 자유롭게 하므로 구원은 이뤄져야만 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어떻게 영혼들이 갇히게 되었는지, 영혼들이 어떻게 인도를 받는지에 대한 신화적 설명들이 덧붙여진다. 먼저 초월하신 하나님은 ‘이온들’(aeons)이라 불리는 영원한 존재들과 관련을 맺고 있을 뿐 모든 물질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발산된 이온들은 남녀성의 짝을 이룬다. 대체적으로 그 짝은 30종이나 되고 그들은 ‘플레로마’(pleroma)를, 즉 신격의 ‘충만’(Fullness)을 구성한다. 물질적 우주와 인류가 구원받아야하는 곳은 ‘플레로마’에 들어가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 안에 신적 씨앗을 간직하고 있다. 구원의 목적은 이런 신적 씨앗을 상실된 물질로부터 인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신화적 상술을 가지고 2-3세기에 신비적 종교운동으로 발돋움한 영지주의자들은 대체적으로 기독교를 표방했다.


        위에서 언급한 ‘영지’의 의미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지식보다는 산만하고, 분석적이고, 추상적인 지식이라기보다는 지성적인 이해를 넘어선 실재에 대한 통찰력을 의미한다. 신비한 영역이나 알 수 없는 영역에 대한 지식이다. 신비한 영역에서 오는 신적 존재의 ‘섬광’(spark) 또는 ‘씨앗’(seed)은 전적으로 악한 물질세계에 주어졌다. 그 섬광들 또는 씨앗들은 인간의 몸에 갇혀 있다. 하지만 ‘신비한 지식,’ 즉 ‘영지’로 다시 일깨워진 신적 요소는 사람들을 초월적 영적 영역에서 적절한 보금자리를 갖도록 한다.


        영지주의자 또는 ‘알고 있는 자’는 지속적으로 신비한 영지의 새로운 통찰력을 받는다. 그들은 영구적으로 정착되지 않고 늘 지속적으로 더 높은 차원을 이해하기 위해 현재의 영지를 새롭게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 즉 구원은 하나님, 최상의 존재와 연합하는 것이고, 그로부터 발산되는 모든 것의 실재를 보는 것이다. 더 이상 추구하지 않을 수 있는 완전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 영지주의의 궁극적 목적이다. 이것을 또한 구원받는다고 하는데 이 구원은 믿음으로가 아니라 지식으로 말미암는다. 오직 ‘신비한 지식’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신비한 지식’을 가지는 자는 영적으로 성숙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완전한 성숙에 이르는데 요구되는 특별한 지식을 수용할 수 있는 자들은 ‘엘리트들’(elites)이다. 이렇게 더 높은 영지를 가진 자들만 사악한 세상으로부터 자유하게 된다.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영지주의자들은 세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 ‘영적인 자들’(pneumatic)인 영지주의자들 또는 구원을 확신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영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에 구세주를 인식하고 그에게 일치한다. 둘째, 완전한 영지주의자들은 아니지만 지식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심령자들’(psychic)이 있다. 이들은 첫째와 둘째 부류의 사람들 사이에서 주저하지만 구세주에게 가까이 가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셋째, 구원을 받지 못하는 자들인 ‘물질인들’(hylic)은 물질에 지배를 받고 있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은 금욕을 지나치게 행하여 영의 지배를 받으려고 노력한다. 이들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열매를 통해 알 수 있다.

 


1.2. 특징


        초대교회에 있었던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최고의 기독교 변증자는 이레니우스였다. 그의 책 Adversus Haereses에서 영지주의자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 

 

1. 30개의 ‘이온들’이 시공간의 초월한 ‘플레로마’ 안에 존재한다.
2. 여신 지혜는 ‘조물주’(demiurge)를 만들었다. 그는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신이며 이온들의 독재자이다. 그는 사람을 창조했고 지혜는 사람에게 영혼을 주었다.
3. 어떤 이들은 선행을 충분히 행하면 구원받을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지옥에 가기로 예정되었다.
4. 영지주의자들은 지혜로부터 발산된 영들을 갖고 있다. 구원받기로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상실할 수가 없다. 그들이 선을 행하든 악을 행하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대부분의 완전자들은 악한 일들을 행할 수도 있고 자신들이 개종시킨 여인들의 순결을 빼앗아도 된다고 한다.
5. 결국 모든 물질은 악과 함께 멸망당하고 구원을 얻을 수 없다.
6. 영지주의자들은 영혼들이 되어 천사들과 결혼할 것이다.
7. 그리스도는 세례 시 예수님에게 강림했고, 예수님이 음모를 받기 전에 떠났다. 지혜는 그리스도에게 고통을 허락하지 않는다.
8. 그들은 자연에 영향을 끼치는 mantras를 언급한다.
9. 영들은 성육신한다.
10. 완전한 지식은 세례, 영적 결혼과 마지막 의식들을 통해 얻는다.
11. 지혜는 미카엘이란 천사 또는 Samael이라는 천사, 즉 뱀을 에덴동산으로 보내어 아담과 이브를 자유토록 했다. 그들이 금지된 실과를 먹으므로 참된 영지를 얻었고 자유하게 되었다.
12. 지혜는 악한 조물주가 일으킨 대홍수로부터 노아를 구원했다.
13. 조물주는 여러 회 강제적으로 이브와 성적 교제를 가졌다. 그리하여 이브는 악한천사들을 낳게 되었다.
14. 죽을 때 어떤 영들은 중간 상태에 들어가서 ‘플레로마’에 들어갈 때까지 동물의 본성을 정결케 한다.

 

위의 특징들에 비해 현대 학자들은 조금 다르게 상술하기도 한다. 영지와 영지주의가 다르다는 견해도 있지만 영지주의가 철저한 이원론 위에 서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논란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원론을 강조하면서 요나스는 하는 말이 “타락한 신 없이, 어리석은 창조자와 불행한 피조물 없이, 낯선 영 없이, 우주적 포로와 비우주적 구원 없이, 신성의 스스로의 구원 계획함 없이, 즉 신적 슬픔이 없는 영지는 설명될 수 없다”고 한다.

 

 

 

1.2.1. 우주론


        불교처럼 영지주의는 지상의 삶은 고통으로 가득 차있다. 아르콘들(Archons)이 지배하고 감독하는 사악으로 가득 찬 이생에서 자신을 육성하기 위한 삶의 모든 형태는 서로를 소멸시키고 만다. 그 결과 고통, 두려움, 그리고 죽음이 있게 된다. 소위 자연재해들인 지진, 기근, 화재, 화산폭발과 같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우리들의 삶을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이런 것에 대한 이유와 해결하는 길에 대한 갈급함이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것과 정반대의 설명이다. 창세기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때 선하였던 것이 인간의 타락의 결과로 빚어진 결과라고 우리는 본다. 이와는 달리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의 타락이 아니라 물질세계의 사악성과 모든 불행들의 근원을 조물주에게 돌린다는 것이다. 선한 하나님이 아닌 악한 조물주에 의해 창조된 세상이기에 불행한 일들이 발생한다. 그는 7번째 영역에 있는 자이다.


        언 듯 보면, 이런 아이디어가 창세기의 상술과 유사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두드러진 차이점은 발렌티누스의 ‘플레로마’ 아이디어부터 위와 같은 창조론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더 높은 세계로부터 소피아가 떨어져 나와서 세상을 존재케 했다는 것이다. 유대학자인 필로(Philo, 20 B.C.-A.D.50)에 의하면, 플레로마 사상은 플라톤 철학에서 빌려온 것이라고 한다. 악으로 가득 찬 세상의 기원을 선하신 하나님께 돌릴 수 없기 때문에 소피아의 타락이 요청되고 인간의 타락이 요청된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우주의 창조는 무에서 창조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 우주를 창조한 조물주가 아닌 최상의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알아보자.


 

1.2.2. 신론


        영지주의 사상의 또 다른 핵심인 완전히 초월적인 최상의 존재가 있다는 것이고, 이 하나님과 세상을 중재하는 연속적인 존재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에 덧붙여 구원론을 설명하기 위해 그들은 물질세계가 악하다는 전제를 갖고 그 기원을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그 설명을 위해 영지주의자들은 근거도 없는 복잡한 신화를 발전시킨다. 기원적으로 알 수 없는 초월적 하나님이 있었는데 그는 모든 창조된 우주 너머 계신 분이고, 어떤 것도 창조하지 않았다. 이런 참된 하나님은 어떤 것도 형성시키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발산하여 가시적이고 불가시적인 세상의 모든 것들의 본질들을 존재토록 했다. 초월적이고 알 수 없는 하나님은 발산하여 저급한 신성들의 연속들을 만들므로 ‘계급제도’(hierarchy)가 도입된다. 이러한 연속들을 가리켜 ‘이온들’이라 부른다. 이들은 참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신성들이다. 이들은 참된 하나님과 함께 신성들이 완전하게 활동하는 ‘충만’(pleroma)의 영역을 약속했다. 그 ‘충만’은 공허한 우리의 상태와 잘 비교된다. 참된 하나님이 발산한 저급한 본질들, 즉 신성들 중 제일 마지막에 위치한 신성은 소피아, 즉 ‘지혜’이다. 그 지혜는 알 수 없는 최상의 하나님을 알려는 또는 하나님이 되려는 욕망으로 가득 찼다. 이것은 합법적이지 않는 욕망으로서 결국 사악한 신인 동시에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즉 ‘조물주’(demiurge)를 잉태하고 산출하여 우주를 창조토록 한다. 인류 가운데 있는 신적 섬광들은 이런 우주 안에 있거나 아니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최상의 하나님으로 인해 우주, 즉 세상으로 보내질 수도 있었다. 영지주의자들은 구약성경의 하나님을 사악한 신으로 단정하고 난 후, 이 신은 인류를 하나님에 대해 무지가운데 있도록 하여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받지 못하고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들은 아담과 이브를 낙원에서 추방시킨 것이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으로 이런 관점으로 이해했다.

 


1.2.3. 인간론


        영지주의에서 주장하는 인간은 이 물질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고 더 높은 하늘 세계에 속했다는 전제를 세운다. 자연스럽게 이원적 인간론을 갖는다. 이런 인간론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은 발렌티누스에 의해서이다. 이원론적 인간론을 기초하여 사람을 세 부류로 나누는 그는 인간이 부분적으로는 거짓 신인 조물주에 의해 만들어지고, 부분적으로는 참된 하나님의 빛을 갖고 있다고 한다. 본래 사람은 신적 본질의 파편인 영적 요소만 아니라 육적이고 심적인 요소를 함께 갖고 있다. 영적 요소를 가리켜서 ‘신적 섬광’(divine spark)인 상징적으로 부른다. 그래서 하늘의 이원성과 세상의 이원성을 함께 취하고 있는 셈이 된다. 인류는 본래 자신들 안에 있는 신적 섬광을 일반적으로 모른다. 이런 무지는 거짓 신인 조물주와 저급한 지배자들인 ‘아르콘들’로 인해 싹텄다고 한다. 그들은 남녀들을 참된 본성과 운명들에 대해 무관심하도록 했다. 지상적인 것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모든 것은 저급한 아르콘들에 종노릇하도록 할 뿐이다. 죽음은 신적 섬광을 인간의 몸에 갇혀있는 데서 벗어나게 한다. 하지만 죽음보다도 영혼에 의해 시작된 영지의 본질적 사역이 없다면 그러한 벗어남은 신적 섬광을 추방시키는 것에 불과하고 육적 세상에 노예로 다시 보내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1.2.3.1. 신과 동등


        영지를 가진 사람은 자신 안에 갇혀 있는 ‘신적 섬광’ (또는 ‘영혼’)을 발견하고 해방시킨 후, 신적 본질로 신비적으로 상승하고 빛의 영역을 향하여 계속적으로 나아간다. 자신이 경험한 신적 계시의 지식으로 말미암아 그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신의 기원을, 즉 하나님과 같은 자신의 본질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과 인간은 하나가 되어야함을 주장한다. 이것 역시 영지주의의 핵심적 사상인데 Apocryphon of James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아버지의 뜻을 행한다면, 그리고 사탄에게 유혹을 받는 동안, 그로부터 선물로 주어지지 않은 너희들의 공로가 무엇이냐? 아버지의 뜻을 너희들이 행하고, 사탄으로부터 너희들이 핍박을 받고 억압을 받는다면,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사랑하실 것이고, 너희를 나와 동일하게 만드실 것이고, 너희를 자신의 섭리를 통해 사랑받는 자로 여기실 것이다.


또 The Tripartite Tractate에서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모든 자들은 영원토록 태어날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돕도록 태어난다. 발산들이 무제한적이고 수없이 일어나기 때문이고, 자신과 동일하거나 자신과 유사한 것을 태어나기 위해 그로부터 오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아버지 편에서는 아무런 시기가 없기 때문이고, 그가 자신을 태어나게 하고 계시하는 ‘전체들’(Totalities)에 존재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아버지이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이신 그 분이 바라시는 사람들과 그 분이 ‘전체들’로 만드시고자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온들 또는 자녀들이며,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자들에게 자신을 보이신 자들이다. 그래서 그로부터 나오는 자들은 그가 되는 것이다.

 

 

1.2.3.2. 엘리트의식


        신비적 영지, 즉 지식은 엘리트들만 가지는 것이다. 그들은 앞에서 말한 ‘영적인 자들’로서 이성의 능력과 육체를 넘어선 특별한 재능을 소유한 자들이다. 이런 특별한 재능은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빛의 영역으로부터 빛의 섬광을 소유한 메신저로 인해 부여받은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의 목적은 그 영지로 인해 내적 인간이 해방되어 빛의 영역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각자는 종교생활에 있어 실제 세상을 떠나 자기중심주의(narcissism)를 형성한다. 영지주의의 본질이 자기에로의 여행하면서 완전, 불멸, 신성, 그리고 육체와 세상에서 떠난 경건한 엘리트 형태를 취한다. 자신들과 같은 사람들만 사랑한다. 영지주의 문서들 중 하나인 The Gospel of Thomas를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의 영혼과 같은 형제들을 사랑하고, 너희 눈에 맞는 자들과 같은 형제를 보호하라’”고 되어있다. 이런 형태는 마치 ‘유아론’(solipsism)과 같이 스스로 자만하여 구원받은 자들만 세상에 살면서도 별거하여 사는 것처럼 자신들만 교제하는 독특하다. 그래서 사회적 관계나 연맹에 얽매이지 않으려하고, 교파의 벽을 무너뜨리고, 건전한 교리와 종교성에서 벗어나야만 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엘리트 의식을 갖게 되면, 기독교들은 하나님과의 내적 궁정에 들어가서 안식하려고 하지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힘든 길을 걷지 않으려 한다. 믿음보다는 ‘해탈의 경지’(nirvana)를 주관적으로 경험하기를 원한다. 인격적 발전보다는 영적인 것에만 관심을 갖는다.

 


1.2.4. 구원론
        인간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이기 때문에 고향 또는 집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는 전제를 영지주의자들은 갖고 있다. 궁지에 빠져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참된 기원, 본질, 그리고 궁극적 운명에 대해 전혀 모르는 육적 존재를 갖고 있다. 이런 궁지에서 해방되기 위해 인류는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자신의 노력이 요청된다. 인류를 돕기 위해 처음에 참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빛의 메신저들이 있었다. 그들은 영지주의 설명에 의하면, 셋(Seth), 예수님, 그리고 선지자 마니(Mani)가 있다고 한다. 이런 자들 가운데 대부분의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을 대표적 구세주로 본다.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구원은 죄로부터 구원이 아니다. 죄가 결과인 무지로부터 구원을 말한다. 무지, 즉 영적 실체들에 대한 무지는 영지에 의해 일소되어지고 영지의 계시는 빛의 메신저들로 인해 전달된다. 특별히 참된 하나님의 로고스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전달된다. 그의 죽으심이나 고난을 통해서가 아니다. 그리스도가 구원의 사역을 위해 수행했던 신비들을 이룩하고 그것에 대한 가르침으로 구원은 이뤄진다. 구원에 대한 개념은 매우 희미하다. 단순히 운명에서 벗어남이고, 이생의 압력으로부터 해방만을 의미한다. 한 편으로 볼 때, 영지주의 구원은 자신이 계획한 영적 기획과 같은 것이거나 아니면 아무도 개입하지 않는 개인적 경험에 근거하는 듯싶다. 영지에 대한 잠재력과 구원에 대한 잠재력은 모든 남녀들에게 있으며 구원이 대리적이 아니라 개인적임을 고수한다. 동시에 그들은 영지와 구원이 인식 안에서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시적이 되어야만 하고, 또는 동시적일 수도 있다고 한다. 이런 동시성은 빛의 메신저들에 의해 주어진다.


        대부분의 영지주의자들이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여기고 있지만 몇몇 기독교적 요소들을 비기독교적 영지주의 문서들 속에 넣었다. 기독교적인 체 하고 있다. 기독교 영지주의자들은 신약의 하나님을, 즉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구약의 하나님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아무렇게나 해석한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묵시적 복음서들, 예를 들면, Gospel of Thomas와 Gospel of Mary에서 부활한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참되고 영지적인 해석을 알렸다고 주장했다. 신적 영이신 그리스도는 인간 예수님의 몸을 취했지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니고 지상 사역을 마친 후 신적 영역으로 승천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과 죽으심을 그리고 육체의 부활을 거부한다:


구세주는 죽음을 삼키셨다. . . 그는 멸망하는 세상에 관심이 없었다. 자신이 불가시적인 것으로 인해 가시적인 것을 삼키신 후 자신을 타락하지 않는 이온으로 변화시키고 일으켰다. 그래서 우리에게 불멸성에 이르는 길을 주었다. . . . 하지만 우리가 그를 입을 수 있는 이 세상에 나타난다면 우리는 그의 광채며 이 세상에서 우리가 죽게 될 때까지 그로 인해 보호를 받는다. 그로 인해 태양의 광채처럼 들림을 받는다. 이것은 육체적인 것과 함께 하는 심성적인 것을 삼키는 영적 부활을 말한다.


게다가 복음서에 대한 정통적 해석들을 거부했다. 특별히 Gospel of Thomas를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를, “자신의 손으로 소유하는 사람은 더 많이 받을 것이다. 소유하지 못한 자는 소유한 것까지 빼앗길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를, “너희가 만일 너희들 안에 남아있는 것을 가지게 되면 너희에게 주어지는 것은 구원이다. 만일 너희들 가운데 이것을 갖고 있지 못하면 너희는 죽을 것이다.”

 

        신약학자 브루스 (F. F. Bruce)는 이 구절에 대하여 평하면서 “41장은 하늘의 빛을 언급하는 듯하다. 그것을 소유하는 자는 구원을 받는 것이지만 잃어버리는 자는 멸망을 받을 것이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펑크와 후버에 의하면, 사람의 구원은 신적 모습, 즉 거룩한 섬과, 빛의 파편, 높으신 하나님께 기원을 두는 것, 조물주를 포함한 다른 신성들의 궁극적 근원을 소유하는 것에 달려있다는 영지주의적 아이디어를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영지주의자들은 구원은 전적으로 자신 안에 존재하는 빛이다. 빛을 의미하는 지식이 없으면 멸망한다고 한다.

 

1.2.5. 의식들


        어떤 영지주의자들은 모든 성례들을 거부하지만 일부 다른 영지주의자들은 세례와 성체를 유지한다. 왜냐하면 성례는 영지를 깨닫게 하는 상징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들의 성례를 갖고 있는데 ‘진리의 세례’(baptism of truth)라는 것이다.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세상을 포기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생수’(living water), 즉 영지의 선물로 여겨지는 것으로 붓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영지주의 의식들은 인간의 영에 있는 신적 요소를 영적 영역으로 상승시키는데 유용하도록 고안되었다. “기도하는 자세로서 양손을 뻗치고” 찬양들과 마술적 의식들은 하나님의 환상을 성취하는데 도움이 되기에 음창한다. 또 장례식에서 상승된 영혼을 포획할 수 있고 다시금 몸에 가두어놓게 하는 귀신들을 격퇴하기 위해 여러 의식들을 행한다. 발렌티니안 종파는 ‘신혼방’(bridal chamber)이라는 특별한 의식을 행하는데 하늘의 짝과 상실한 영혼이 재결합하는데 요청되는 의식이다. The Gospel of Philip 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이브가 아담으로부터 분리되었을 때 기원적 남녀양성의 연합은 파괴되고 말았다.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은 아담과 이브를 다시금 연합시키는데 있다. 남편과 아내가 신혼방에서 연합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에 의해 이뤄지는 재연합은 신혼방에서 성례가 일어난다. 그곳에서 사람은 천사적이고 하늘의 짝과 함께 궁극적으로 연합하는 것을 확신하고 그것을 미리 맛본다.

 

        계속하여 그 곳 성전의 신혼방은 셋으로 나누고 있다 :

 

“결혼의 신비는 얼마나 위대한지! 그 결혼 없이 세상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 .”
“예루살렘에는 희생을 위해 특별히 세 개의 건물이 있었다. 하나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성소’(holy)라고 부르는 곳이다. 다른 하나는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성소 중 성소’라 부른다. 나머지 하나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지성소’라 부른다. 이  곳은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세례는 ‘성소’라는 건물에서 거행된다. 구속은 ‘성소 중 성소’에서 거행된다. 그리고 ‘지성소는 신혼방이다. . .
“그리스도는 시작부터 있었던 분리를 치유하러 왔다. 다시금 분리된 것을 연합시킨다. 분리의 결과로 죽어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고 그들을 연합시켰다. 여인은 신혼방에서 남편에게 연합된다. 신혼방에서 연합했던 사람들은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 . .” “만일 어떤 사람들이 사제직의 명령을 받고 있다면, 그들은 대제사장과 함께 그 베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 . . 그곳은 영광위에 영광이 있는 곳이다. 그곳은 능력위에 능력이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일들은 감춰진 진리와 함께 우리들에게 개방되었다. 지성소는 계시되었고 신혼방은 우리를 초청했다.”

 

1.2.6. 윤리


        영지를 소유한 ‘영적인 자들,’ 즉 엘리트들은 아르콘들이 지배하는 세상과 분리하여 살아야만 한다. 영적인 자들은 우주적 ‘운명’(heimarmene)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도덕율과 같은 율법에 얽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경멸하고 세상을 향한 적대심을 가져야만 한다. 더욱이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영들이 이 세상과 완전히 결별한 상태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그 안에서 행했던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고수한다. 니콜라이탄들, 오파이트들(Ophites), 카르포크라티안들(Carpocratians) 등 과 같은 영지주의자들은 구약성경의 도덕율들을 대체적으로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인류를 가두어두기 위해 사악한 신이 사용하는 틀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지주의의 윤리적 가르침들은 금욕주의에서 자유사상(libertinism) 또는 허무주의적 요소를 갖게 된다. 몸과 물질적 세상이 사악하다는 교리는 여인들을 ‘사탄의 일’로 여기기 때문에 세베루스를 주장하는 3세기의 마르시온파들은 결혼을 사탄의 일을 성취하는 것이라 보았다. 이런 자세는 수도원제도의 금욕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조물주와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물질을 형성하는 육체를 증오하여 음식이나 성적 교제를 저버리는 자세는 유대인들의 에센파와 같은 현상이라 하겠다.


        윤리 또는 도덕성이란 말이 규칙의 체제와 같은 의미로 여겨진다면 영지주의는 그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한 체제들은 대체적으로 조물주와 함께 시작하고 그의 목적들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한 편으로 볼 때, 도덕성은 사람 안에 내재해 있는 섬광이 조명되면서 일어나는 내적 고결성을 의미하며, 영지주의자들은 존재론적인 윤리를 이상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은 계명들과 규칙들을 지키므로 구원을 이룰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것들이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본다. 행위 규칙들은 질서 있고 평화로운 사회를 구성하고, 사회단체들 가운데 있는 조화를 이루는 유지와 같은 수많은 목적들을 성취해낸다. 하지만 규칙들은 구원과 무관하다. 구원은 오직 영지로 인해서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덕성은 일시적이고 세속적인 의미로 여겨진다. 그것은 개인들의 영적 발전에 따라 수정되고 보완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세 부류의 사람에서 ‘물질인들’은 도덕성에 그렇게 관심을 많이 가지지 않는다. 심령자들은 가끔 그것에 중요성을 둔다. 하지만 영적인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더 높은 다른 문제들에 관심을 쏟는다.         

 

 

1. 영지주의자들

 

1.1. 니콜라스
        영지주의 기원에 전통을 보면, 요한계시록(2:6, 15-17)에서 사도요한은 에베소교회와 버가모 교회에 경고를 주면서 니골라당을 언급한다. ‘니골라당’(Nicolaitans)이란 이름은 니콜라스(Nicolas)라는 이름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는 안디옥 출신으로 사도들에 의해 수임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아름다운 아내를 두었기 때문에 육체를 경멸하라는 교훈들에 관해 반항적인 해석을 피력했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이후 니골라당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사람은 저스틴(Justin Martyr, d.c. 165)이었다. Trailians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그는 “니골라당을 멀리 하십시오.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쾌락을 사랑하지만 중상적인 혀를 놀립니다”고 했다. 이레니스(Irenaeus, c.125–c.202)는 자신의 책 Adversus Haereses 에서 그들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니골라당은 사도들에 의해 집사를 처음으로 받은 자인 니콜라스를 추종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절제적인 방종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의 특징에 대해서 요한 계시록에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계속하여 이런 자들은 영지주의자들이라고 칭하고, 익나티우스와 동일하게 시몬과 메난더를 근거하고 있다고 한다. 역사가 소크라테스 (Socrates the historian, 5C.)는 요한일서 4:1-3이 니골라당을 두고 하는 말이면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성과 분리하려고 하는 자들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니골라당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격을 반대하고 반율법적인 경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리멘트는 Carpocratians이 니골라당의 견해를 갖는다고 했다. 모세임 (Mosheim)도 니골라당을 영지주의자들과 연관시키고 있다. 

 

1.2. 시몬 마구스
        영지주의의 창시자는 대체적으로 시몬 마구스(Simon Margus)라고 한다. 사도행전 8:9-13에 나오는 시몬 마구스가 영지주의 창설자라는 설명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리멘트의 Recognitions와 Homilies에 나타난 묵시적 작품들에서 비롯된다. 사두개인들의 유대 종파의 설립자로 가끔 여겨지는 도시데우스(Dositheus)가 시몬의 스승이었다고 하는데 도시데우스와 시몬의 근거를 두는 단체는 사마리아에서 설립되어 ‘사마리아인들’(Samaritans)이라 불렀다.


        시몬 마구스는 로마제국의 황제 클라디우스 시대에 사마리아 지타(Gitta) 출신으로 마술을 행하는 자였다. 스스로 인간 형태를 가진 신이라고 주장했다. 신으로서 자신은 경배를 받아야 하고 유대인들 가운데 메시아로 나타났다고 했다. 시몬은 자신이 죽은 후 무덤을 파헤치라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3일 안에 부활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자신을 사마리아인들에게 그리스도로 나타내었던 것이다. 두로에 가서 시몬은 헬렌이라는 매춘녀를 만나 구입하여 그녀와 함께 즐겼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그녀를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헬렌을 가리켜 자신의 영의 첫 사상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길 잃은 양과 비유된다. 이 어두운 세상의 타락한 신적 영의 최초의 모습이다. 자신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형태로 성육신되었다. 영지주의 체제에서는 반드시 요구되는 요인이다. “시몬 자신이 실제로 하나님이고 외형으로만 사람인 것처럼, 자신의 십자가에 못 박힘과 죽음도 단순히 외형으로 나타났을 뿐이라고 시몬은 가르쳤다. 그래서 그노시스주의가 그리스도가 단순히 인간인 것처럼 보인다고 말하는 교리인 “가현설(docetism, 헬라어 doketio, ‘나타나다,’ ‘. . . 처럼 보인다’)”의 서론이 시작된 셈이다.”


        시몬은 니콜라스보다 한층 더 영지주의의 선구자로서 구체화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그의 제자들 중 한 사람 메난더(Menander)에 의해 나타났다. 메난더는 사마리아인으로 Capparetia 출신이었다. 주로 안디옥에서 활동했으며 스스로 불가시적 능력을 받은 구세주라고 천명했다. 시몬의 사상은 앞으로 등장하게 되는 이단운동에 끼친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

(1) 이교도와 근동으로부터 나온 주제들과 성경적 사상들을 섞은 혼합주의적 현상;
(2) 본질상, 순수한 영적 성부와 구별되어 소망 없는 물질세계로 보는 이원론적 해석;
(3) 인격적 구세주가 세상에 임하셨다는 가르침;
(4) 유대인의 성경을 거짓되고 사악한 것으로 보고 거절함;
(5) 비밀적 지식만 아니라 마술에 대한 관심.

 


1.3. 케린투스
        케린투스(Cerinthus)에 관해서는 이름 외에는 개인의 사생활에 대해서 우리는 아는 바가 없다. 1세기 말 요한의 작품들을 반대하는 자들은 그 기원을 케린투스에게 두었다. 그는 유대인이었고 종말론에서 천년왕국설 신봉자였다고 한다. 이레니우스에 의하면, 만일 최상의 존재가 세상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가르쳤으며, 최상의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려는 능력이 세상을 창조했으며, 그리고 다른 천사가 율법을 만들어 유대인의 하나님이 되었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최상의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능력, 즉 덕은 세례 시에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인 예수님에게 부어졌다. 이런 주장은 후에 선재하는 이온들에 대한 영지주의 이론을 낳도록 한다. 인간 예수님만이 죽음을 경험했고 부활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부르짖었던 “나의 하나님”을 표현을 ‘나의 능력’으로 본다. 그는 마르시온을 따르는 자로서 역시 이원론을 고수한다. 로고스를 역시 ‘8인조’(ogdoad)에서 태어났다고 보고, 아버지로부터 세상에 오기 전에 지혜를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견해는 요한서신을 통해 공격을 받았다(요한 1서 4:3; 요한 2서 7). 7명의 천사들에 의해 세상이 창조되었고 마지막으로 창조된 인간은 신의 형상을 가졌다고 한다. 이런 인간은 더 높은 능력이 부어지기 전까지 바로 설 수 없다. 그래서 빛의 섬광이 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 빛은 바로 구세주로서 그리스도이다. 이 세상에는 천사들에 의해 창조된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그는 사악한 자들, 사람들, 그리고 귀신들을 멸망시키고, 선한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결혼과 자녀들을 낳는 것은 사탄의 일이고 사악한 일이다. 어떤 면으로 볼 때, 케린투스는 기독교 영지주의자라고 할 수 있고 후에 등장할 사투르니누스의 초기 형태를 보는 듯싶다.

 


1.4. 사투르니누스
        바실리데스와 동시대 인물인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또는 Saturnilus, 117–138)에 대해서는 히폴리투스가 쓴 Refutation of all Heresies 16장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는 시리아의 안디옥 출신으로 메난더가 주장했던 것과 거의 유사한 견해를 가졌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한 아버지는 천사들, 본질들, 또는 능력들을 창조했다. 7명의 천사들에 의해 세상과 사람이 창조되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우리들의 형상과 모양은 천사들의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의 모습이 지렁이에 지나지 않지만 위로부터의 ‘생명의 광채’(scintillation)로 인해 인간은 활력을 갖게 되었다. 천사들에 의해 두 종류의 인간이 창조되었다. 하나는 선한 영적 인류와 다른 하나는 악한 지상적인 인간이다. 이렇게 인간에 대해서 두 종류의 인간임을 말한 자는 사투르니누스가 처음이다. 하나님은 태어나지 않고, 형상을 가지지 않은 구세주를 사람인 것처럼 하여 보내셨다고 한다. 이렇게 가현설을 주장하면서 그에 의하면, 구세주는 유대인의 하나님의 던져버리기 위해 와서 자신을 믿는 자에게 구원을, 즉 생명의 광채를 되찾아 주는 것이다. 이상에 볼 때 그의 사상을 세 가지로 다시 요약할 수 있다:

 

(1) 성부와 세상 간에 다소간 타락하기 쉬운 중개자의 하강하는 사슬의 개념; 이러한 것을 “시대”라 번역되는 헬라어의 어원을 가진 “이언들(aeons)”은 신과 같은 영적 실재라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유대인들의 하나님과 천사들은 타락하고 기본적 이언들이고 그 가운데서 선한 이언이 그리스도이다.


(2) 영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간의 이원론이 이런 사슬에 포개진다. 영적인 실재인 이언들은 선하거나 악할 수 있지만 물질세계는 악한 이언들의 산출이고 그 자체는 악하다.


(3) 특별히 구원에 대한 이러한 영지주의적 개념은 육체적 감옥으로부터 구현된 인간 영혼들의 자유와 성부에로의 귀환을 의미한다. 하지만 신약성경과 너무나 다른 이 개념은 육체의 부활만 아니라 영혼의 생존을 필요하게 된다.

 


1.5. 바실리데스
영지주의의 창시자이며 최초의 영지주의 조직신학자인 바실리데스(Basilides, d. 140)는 알렉산드리아인이었다. 개인의 생애에 대해서 전혀 알 수 없으나 그의 아들 Isidore가 있었다는 것을 사료들을 통해 알 수 있을 뿐이다. 그의 아들 Isidore는 바실리데스의 교리를 발전시켜 제자들을 이끌었다고 한다. 바실리데스는 베드로의 해설자로 알려진 Glaucias의 제자라고 자청하면서 자신의 가르침들은 그에게서 배웠다고 했다. 또 다른 곳에서는 바실리데스가 Barcabbas와 Barcoph라는 선지자들을 만들고 사도 Matthias의 구두적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Epipahnius에 의하면, 사투르니누스와 함께 안디옥의 메난더의 제자로서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마제국의 황제 하드리안(Hadrian, 117-138)과 황제 피우스(Antonius Pius, 138-161)시대에 가르쳤다.


Agrippa Castor에 따르면, 그의 저서들이 현존하지 않지만 복음서에 관해 24권을 썼다고 한다. 하지만 남아있는 사료를 통해 그의 사상에 대해서는 우리는 알 수 있다. 모든 것이 순수한 무의 상태 또는 무존재(nonentiry)이다. 이레니우스에 의하면, 바실리데스는 태어나지 않은 아버지로부터 이성(nous)이 처음 나오고, 이성으로부터 로고스, 로고스로부터 신중(phronesis), 신중으로부터 지혜(sophia)와 힘(dynamis), 지혜와 힘으로부터 능력들, 본질들, 그리고 천사들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런 천사적 존재들로 인해 가장 높은 하늘, 즉 첫 번째 하늘이 만들어졌다. 이들의 발산으로 인해 형성된 다른 능력들은 첫 번째 하늘과 유사한 또 다른 하늘을 창조했다. 첫 번째와 거의 유사한 모양이다. 또 다시 세 번째 하늘, 네 번째 하늘, 등등으로 만들어져서 마침내 365개의 하늘까지 만들어졌다고 한다. 제일 마지막 하늘을 붙잡고 있는 천사들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었다. 모든 것의 주인은 유대인의 하나님이다. 이제 천사들 중 가장 높은 아버지는 유대인들이 자신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했으나 모든 군주들이 그에게 항거하고 반대했다. 그래서 태어나지 않는 아버지는 이러한 불운을 보시고 처음 태어난 이성, 즉 그리스도를 세상으로 보내어 세상을 지었던 천사적 존재들의 능력을 받아 자신을 믿게 하셨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사람으로 보이고, 이적을 행했지만 고통을 당한 것이 아니고 구레네 시몬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혔다. 예수님은 하늘로 되돌아왔다. 시몬은 예수님의 형상을 가진 자이다. 그리스도의 영지(gnosis)를 통해 사람들의 영들은 구원을 받지만 육체는 멸망을 당한다.


Epiphanius와 Pseudo-Tertullian에서도 이와 비슷한 묘사를 읽을 수 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 즉 태어나지 않은 아버지는 신비한 존재인 Abrasax를 가졌다고 한다. 이레니우스에 의하면, Abrasax는 365개의 하늘을 낳았다. 일 년 365일의 수와 같다. 또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고백하고 순교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구레네 시몬이 대신하여 죽은 것이기 때문에 그를 위한 것이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실리데스는 이렇게 가현설을 주장한다.


히폴리투스가 바실리데스의 원리에 관하여 말했던 곳은 「모든 이단들에 대한 반박들」(Refutation of all heresies)이다. 히폴리투스에 따르면, 그의 체제는 범신론적 일원론이었다. 모든 것은 태어나지 않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그 하나님은 시공을 초월하는 모든 것의 순수한 형태이다. 그는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범주를 뛰어 넘어 있다. 하나님은 비존재이시라고 하며 모든 것의 태아로부터 낳으신다. 그 태아에는 3중아들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 안에 있는 우주적 영(pneuma)으로서 비존재의 근원이다. 둘째는 하나님 아래에 있는 우주적 아들로서 비존재의 기반이 된다. 영과는 구분되지만 능력 자체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 셋째는 세상의 혼란에 떨어져 있다. 왜냐하면 물질과 영혼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퍼져있는 영혼의 분자들은 부분적으로만 되돌아올 수 있다. 이런 귀환은 영이 물질의 짐을 잊어버리는 개인적 정결의 과정이다. 신적인 우주적 씨앗-영혼-빛의 혼란-물질-어두움으로 결합하게 되면 빗과 어두움의 전쟁이 일어난다. 이 전쟁으로 영혼의 분자들을 물질의 혼란으로부터 석방시키고 영혼을 기원적 근원으로 귀환하게 된다.

 

1.6. 카르포크라테스
        바실리데스와 동시대 인물은 카르포크라테스(Carpocrates)는 영지주의에 분명히 속하는 자이다. 그는 시몬 마구스의 후계자들인 바실리데스와 사투리누스와 같은 자이며 영지주의자들의 아버지라 불린다. 이레니우스에 의하면, Carpocrates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태어나지 않은 아버지보다 못한 천사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로서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다. 비록 강하고 순수한 영을 가지고 있었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우수하게 보인다. 또 알렉산드리아의 클리멘트는 그가 모든 사람들을 동등하다는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빈부나 귀천, 어리석은 자나 총명한 자, 남자나 여자, 주인이나 종, 그리고 백성들이나 통치자 간에 아무런 구별이 없다고 했다. 그가 자유방임하는 운명주의를 지향한다고 했다. 유대 학자 필로 (Philo, c. 20 B.C.-A.D. 50)에 의하면, 율법의 신비들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율법을 업신여기고 있는 어떤 자들은 “A.D. 40년에 이르러 자유사상(libertinism)이 알렉산드리아 유대주의 내에서 지성적으로 존경받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일세기 후 그 사상은 카르포크라테스 운동을 통해 알렉산드리아에서 영지주의의 원리들 중 하나가 되었다”고 했다. 카르포크라테스에게는 Epiphanius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17세에 죽었다. 그러자 Samos라는 섬에 그의 제자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전을 지었다고 한다. 그를 추종하는 자들은 “Pythagoras, Plato, Aristotle, 그리고 Christ를 숭배하고, 그들을 위해 전을 건축했다.” 그런데 최근에 발견된 “Secret Gospel of Mark”에 대한 클리멘트의 서신에서는 카르포크라테스가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어느 장로로부터 비밀 복음서(secret Gospel)의 복사본을 받았는데 그것을 그는 참람하고 육욕적인 교리에 따라 해석할 뿐만 아니라 흠도 없고 거룩한 말씀들을 오염시키고 혼합시켰다“고 되어있다.

 

1.7. 마르시온
        2세기의 다른 어떤 이단보다 기독교에 위협을 주었던 것은 마르시온(Marcion, d. 160)과 그의 추종자들이었다. 그가 쓴 작품들도 현존하지 않지만 그를 비판한 자료들을 통해 그에 대한 것을 사상들을 만들어낼 수 있으며 특별히 터툴리안의 작품에서 잘 엿볼 수 있다. 마르시온은 약 85년에 Pontus의 Sinope (흑해 근교)에서 부유한 선박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역시 그는 감독의 아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감독이었다고 한다. 성스러운 처녀를 미혹했다는 혐의를 물어 부친은 그를 교회로부터 추방시켰다. 그는 135-140년에 로마를 방문했다. 그 곳에 있는 교회에 200,000 sesterces를 헌납했다. 자신의 신학을 발전시키면서 영지주의 교사 Cerdo의 사상을 구체화시켰다. 그에게서 그는 이사야 39-66장의 말씀 해석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신을 추종하는 자들-Marcionites-을 거닐었다. 그 결과 그는 장로들에게 의심을 받아 144년 출교를 받았다. 하지만 계속하여 자신의 가르침을 널리 확산시켜 나갔다. 저스틴 마터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 아니라고 가르쳤고,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 그리스도가 그의 아들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폴리캅은 그를 가리켜 “사탄의 맏아들”이라고 했다. 마르시온은 약 160년경에 죽었지만 그를 추종하는 자들은 3세기까지 지속했고, 4세기에 이르러서는 마니교에 연합되었다.        


        마르시온의 사상은 영지주의임이 틀림없다. 그의 사상을 몇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그는 구약성경을 자체를 포기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은 유대인들의 역사이고 조물주의 이야기이기 때문이었다. 바울만이 진실한 사도이기에 그가 쓴 디모데 전후서와 디도서를 제외한 서신들만 성경으로 봐야한다고 했다. 또 그는 누가복음만이 유일한 복음서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의 인용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2) 이 세상을 창조한 조물주는 하나님이지만 높으신 하나님과는 구별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것 외에는 그 높으신 하나님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 조물주는 공의의 하나님이지만 매우 엄격하고 힘들게 하는 신이다. 이에 반해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은 새로운 왕국을 선포하셨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조물주가 행했던 것과는 정 반대의 일들을 수행했다. 조물주를 믿는 자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의도된 것이었다. 그렇게 해야만 조물주로부터 사람들을 속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을 구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성육신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그 결과 그는 가현설주의자가 되고 만다.” 우리는 여기서 사랑의 하나님과 조물주, 복음과 율법을 대치시키는 그의 이원성을 엿볼 수 있다. 둘째, 육체의 부활은 없고 최후의 심판도 없다.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사람들은 반드시 엄격한 금욕적 삶을 살아야만 한다. 결혼을 해서는 안된다. 결혼했던 자들은 헤어져야만 한다. 먹고 마시는 것에도 절제해야만 한다. 순교를 즐겼다.

 

 

1.8. 발렌티누스
        시몬, 바실리데스, 그리고 마르시온 이후 영지주의 신학자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자는 이집트 델타(Delta)에서 태어난 발렌티누스(Valentinus, ca. 100-ca. 175)였다. 그는 이집트 종교 철학가이며, 영지주의 로마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창시자이고, gnōsis 또는 ‘신비한 지식’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가진 종교적 이원론의 체제를 만든 자이다. 그의 제자들에 의해 설립된 발렌티니안 공동체는 2-3세기 기독교 신학에 큰 도전을 안겨다 주었다. 발렌티누스는 헬라 문화의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 근교에서 철학을 배우면서 바실리데스를 만난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바실리데스는 그 곳에서 가르치고 있었다. 아마 그에게 영향을 받으면서 플라톤주의에 매력을 느꼈고, 성경에 대한 헬라적 유대 해석을 가미하였다. 그 후 교사로서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하면서 아마도 책을 출판했을 것이다. 그의 제자들은 그가 사도바울의 제자인 Theudas에게서 교육을 받았고, 기독교인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2-3세기 파편으로 된 신학자들의 문서들에 의하면, 발렌티누스는 약 136년 로마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로마감독 히기우스(Hygius, c.136-140) 아래 가르쳤고, 로마감독 피우스(Pius, ca 150-155) 아래서 눈부시게 활약했고, 그리고 로마감독 아니케투스(Anicetus, ca. 155-160) 때까지 활동했다. 기독교 영지주의 가르침과 동방 영지주의 가르침의 종합을 상술하면서 25년 동안 그곳에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로마감독이 되려는 열망을 품은 그는 약 140년 감독직을 넘겨받았으나 그의 가르침으로 인해 정죄를 받고 기독교 공동체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약 160년 Cyprus를 위해 로마를 포기한 발렌티누스는 지속적으로 신비적으로 유래된 종교 철학에 대한 자신의 체제를 발전시켜 나갔다. 그의 모든 사상들은 플라톤과 Pythagoras에게서 가져온 것이다.


        그는 Gospel of Truth의 저자였다. 그 책은 영지주의 원리들이 담긴 기독교 바울신학과 혼동될 수도 있다. 또 그는 설교집, 서신들, 찬송, Treatise of the Three Natures와 Revelations 또는 Visions를 썼을 것이다. 더욱이 4세기 이집트 파피루스인 Jung Codex(1946년 발견)는 발렌티누스의 본문의 Coptic 역본으로서 자신의 교리에 대한 것이다.


        발렌티누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자제력도 없고, 이해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그리고 들을 수도 없는” 최상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믿었다. 그는 무한하고, 시작도 끝도 없고, 그리고 모든 것들의 궁극적인 기원이다. 그에게 속하지 않는 것이 이 세상에 없다. 세상의 있는 것은 그의 한 부분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단일성을 유지하시면서 존재의 다수성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혼합된 남성과 여성을 모두 지니고 있는 남녀성의 이원 일위(dyad)이시다. 아버지가 본질을 우주에 제공하시는 측면은 여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침묵, 은혜, 그리고 사상으로 불린다. 침묵은 평정과 자기 인식에 대한 하나님의 원시적 상태이다. 침묵은 창조적이다. 사상은 본질적인 이온의 모든 연속적인 상태를 말한다. 우주에 형태를 주는 하나님의 남성적 측면은 형용할 수 없는 ‘심연’(abyss)과 최초의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불려진다. 심연은 너무 깊어 불가해적 존재며, 신성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 심연은 본질적으로 수동적이다. 그의 여성인 사상에 의해 행동되어질 때에만 그는 우주에 형태를 준다. 히폴리투스에 의하면, 아버지의 단일성을 강조한다. 신성의 이와 같은 두 가지 측면은 결코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신격 안에 있는 존재로서 동시에 존재한다. 물과 축축함과 같거나 동전의 두 면과 같은 것이다. 그것들은 분리될 수도 없으며 둘 중에 하나가 없을 수도 없다.


·        우주의 기원은 신격에서 나온 존재의 연속적인 상태의 발산과정으로 묘사된다. 태초에 아무 것도 없었다. 아버지는 비활성적 존재로 계셨다. 우주는 잠재적으로만 존재한다. 창조의 과정은 신격 편에서의 자기 제한이 필요하였다. 이온들의 연속적인 상태가 그로부터 분리되기 위해 아버지는 제한이나 한정을 창조하셨다. 모든 것을 견고케 하고 형용할 수 없는 위대함 밖에 모든 것을 지키는 것은 제한의 능력이다. 제한은 두 가지 기능을 행한다. 아버지로부터 ‘영적 세계’ (충만, Fullness)를 분리시켜 힘을 제공한다. 그 이후 아버지는 발산의 과정을 통해 가해적인 형태로 자신을 명시하신다. 아버지는 자신을 알 수 있는 자신의 사상을 통해 지식의 영을 낳았다. 그 영은 지식 안에 있는 ‘독생자’(Only-Begotten)이다. 그 독생자도 하나님처럼 남녀성의 이원일위로서 일반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독생자의 이온 또는 독생자의 남성적 측면은 마음이다. 그의 여성적 측면은 진리와 모든 것의 모친이다. 그것들은 어떻게 진리가 진실한 의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지를 의미한다. 독생자는 모든 것의 시작이다. 아버지와 독생자는 이따금 기원적인 넷, 즉 심연, 침묵, 마음, 또는 진리로 언급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독생자는 이원일위이기 때문이다. 독생자 (예를 들면, 마음과 진리)는 하나님의 불가해적 측면들의 가해적인 형상이다. 우리가 최상의 신을 알 수 있는 것도 독생자의 중재로 말미암는다. 독생자와 아버지의 관계는 인간의 마음과 무의식의 관계와 비교될 수 있다. 독생자는 아버지께 안겨 있으며 그분 안에 있다.


        아버지에 의해 영감 받은 남녀성을 가진 독생자는 자신의 인격 내에 내재하는 에너지를 명시하는 과정을 시작한다. 그는 4개의 이온들을 발산한다. 첫 번째 짝은 말씀(남성)과 생명(여성)이다. 그것들은 심연과 침묵의 모양으로 창조되었다. 두 번째 짝은 인류(남성)와 교회 (여성)이다. 그것들은 마음과 진리의 모양으로 창조되었다. 또 교회에 결합된 인류의 자연적 상태를 나타낸다. 본래의 기원적 4개의 이온들과 그것들에서 나온 4개의 이온들은 모든 것들의 근원이며 본질이다. 이 ‘8인조’(ogdoad)의 이온들에 미치지 못하는 이온들이 탄생하게 된다. 말씀과 생명에서 10개의 이온들, 인류와 교회에서 12개의 이온들이다. 이리하여 모두 30개의 이온들 또는 신적 속성이 완성된다. 이것을 가리켜 ‘플레로마’(pleroma)라 부른다. 이것들은 모두 독생자의 본성의 다른 측면들을 명시한다. 신적 충만의 자기 계시과정은 씨앗에서 나무로 자라나는 것으로 비교될 수 있다. 또 태양에서 나오는 빛의 관성과 같은 것이다. 독생자가 아버지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이온들의 충만도 독생자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온들의 다수성 안에 신격의 단일성은 유지된다. 발렌티누스가 쓴 Gospel of Truth 안에서 독생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묘사된다. 개인적으로는 완전한 것이 아니지만 전체적으로는 완전한 이름을 구성하고 있다. 그래서 이온들은 함께 신격의 완전한 충만을 구성한다. 마르쿠스 (Marcus)에 따르면, 30개의 이온들은 나름대로 수많은 이온들을 가질 수 있다. 마치 글자와 같아서 글자들이 합쳐 또 다른 단어들을 만드는 것과 같다.


        독생자만이 최성의 아버지의 완전한 지식을 갖고 있다. 그는 다른 모든 이온들에게 여전히 불가시적이고 불가해적이다. 이온들은 독생자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모든 이온들은 자신들이 나온 분을 알기를 갈망했다. 이것을 발렌티누스는 자신의 Gospel of Truth에 묘사하고 있다 : “모든 것은 자신들을 낳으신 분을 찾고 있다. 모든 것은 그 안에 있다. 불가해적이신 그 분은 모든 사상보다 훨씬 뛰어나신다.” 그에 따르면 아버지를 찾고자 하는 이온들의 갈망은 결국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절망적이다.


        그래서 발렌티누스는 지혜의 신화를 만들어 낸다. 아버지를 알고자 하는 바람이 지혜에 넘쳐났다. 지혜는 12개의 이온들 중 제일 어리다. 완전한 충만을 위해 지혜는 최성의 부모를 알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녀는 독생자의 중재가 없이 하나님을 알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그 결과 그녀는 자신의 관계에서 벗어나게 되어 오류와 고통의 상태로 처하게 되었다. 이는 마치 창세기의 이브의 타락과 흡사하다. 그 결과 지혜는 아버지와 같이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빚어진 낙태를 가리켜 지혜의 결핍된 생각이라고 한다. 이러한 부족 속에 지혜는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혼란 속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슬픔 속에 그녀는 회개하고 도움을 청한다. 다른 이온들도 역시 슬퍼하며 그녀의 청원에 관심을 갖는다. 제한 또는 두 번째 한계의 도움을 받아 지혜는 더 높고 더 낮은 수준으로 나눠진다. 더 낮은 수준 또는 낙태는 고통을 가지면서 충만에서 배제되었다. 더 높은 지혜는 강하게 되어 하나님께서 알 수 없는 분이심을 확신하고 되돌아온다. 지혜의 이런 행위는 충만에 있는 결핍을 분리시켰고, 밖으로 향하게 했다.

 

        이런 위기가 다시 일어나지 않기 위해 독생자는 자신을 그리스도(남성)와 성령(여성)이라는 형태로 다른 이온들에게 자신을 명시했다. 그리스도가 된 독생자는 다른 이온들에게 아버지가 불가해적이고 자신을 통해서만 진리를 이해할 수 있음을 계시했다. 성령은 그들에게 감사를 가르쳤고, 모두가 동등하게 창조되게 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세례이다. 이것은 인간 교회만 아니라 이온들에게도 해당되었다 : “아버지는 자신의 사랑을 보이셨다. 이제 그의 사랑은 성령으로 나타난다. 그는 자신에게 감추어져 있는 것을 계시하신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독생자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자비로 인해 이온들은 그를 알게 되고 아버지를 찾는 수고를 그만두게 되었고, 그 안에서 쉼을 얻게 되었고, 그리고 안식을 취하게 된다.” 모든 이온들은 함께 뭉쳐 구세주라 불리는 독생자와 연합하게 되었다. 모든 이온들에게서 나온 완전한 이름을 구세주만이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에 아멘이라고 부른다. 구세주는 역시 제한 밖에 있는 타락한 지혜의 동반자가 되기로 되어있다.


        타락한 더 낮은 지혜는 또는 낙태당한 생각은 고통이 있는 더 낮은 영역에 갇히게 되었다. 부족 또는 더 낮은 영역은 물질적 우주이다. 충만이 독생자의 산물이고 그 안에 있는 것처럼 부족의 영역은 충만의 산물이고 그 안에 있다. 부족은 지식에 관해서 충만 밖에 있다. 부족은 무지의 결과이다. 그리스도를 알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단히 헛수고를 계속하는 지혜는 제한으로 인해 충만에 상승하지 못한다. 무지의 결과로 인해 그녀는 슬픔, 두려움, 그리고 혼돈을 경험한다. 세상이 환각임을 경험하면서 무엇이 실재인지 무엇이 환각인지 구별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상태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이제 지혜는 회개하게 되고 자신에게 생명을 주신 분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기쁨을 다시 회복한다.


        지혜의 회개로 인해 구세주는 자신을 비워서 충만 밖으로 나와 천사들의 수행원과 함께 부족으로 하강했다. 그와 지혜는 함께 이온들의 짝처럼 결합했다. 영원한 영역을 알게 되므로 지혜는 환각과 고통에서 자유하게 되었다. 지혜는 구세주와 천사들의 수행원을 보고 기뻐하고 자신의 형상으로 영적 씨앗들을 낳는다. 이런 씨앗들은 모든 기독교인들 안에 있는 영적 요소가 된다. 이런 이유로 씨앗들은 교회에 맡겨진다. 씨앗들은 충만한 가운데 있는 선재한 교회의 형상으로 여겨진다. 이리하여 지혜에서 나온 세 가지 존재 상태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하나는 무지와 고통에서 나온 세속적인 존재를 특징짓는 환각, 다른 하나는 무지와 지식 간에 있는 중간 상태를 말하는 회개와 기쁨, 마지막은 영적인 씨앗이 지혜의 지식에서 나오는 것 등이다.


        영적 씨앗이 아직도 성숙하고 훈련을 받기 위해 물질세계가 필요하게 된다. 지혜가 이 세상을 직접 창조할 수 없기 때문에 물질세계를 형성할 수 있는 장인에게 영향을 끼친다. 장인을 통해 지혜는 하늘과 땅을 창조했다. 장인은 자신의 모친을 모르고 자신 혼자 행했다고 생각한다. 장인은 7개의 천사적 존재 또는 하늘들을 창조하여 그것들 위에 군림한다. 이런 이유로 그는 일곱 번째라 불린다. 장인의 7개의 천사들은 창세기에 나오는 7일을 의미한다. 장인의 모친인 지혜와 구세주는 8번째 하늘에 있어 그보다 위에 군림한다. 이런 8가지 하늘들은 충만 가운데 있는 8개 이온들의 형상이다. 지혜와 구세주는 비밀적으로 장인에게 영향을 끼쳐 물질우주를 완전의 형상으로 만들도록 했다. 그래서 진리는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현현한다. 사람들은 장인에 의해 선재하는 인류(Humanity)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사람들은 귀신적 요소, 물질적 몸, 이성적 영과 영적 씨앗으로 구성한다. 영적 씨앗은 예수님의 중보를 통해 하나님의 지식 (영지)을 얻을 수 있다. 지식을 받은 각 사람은 부족의 부분을 제하여 버리고 신격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된다. 세상의 종말은 영적인 모든 것이 지식으로 채워질 때 오게 된다. 영혼들은 동물의 영들을 버리고 자신들의 모친인 지혜와 더불어 충만으로 들어간다. 지혜는 새 예루살렘이 되고 신랑, 즉 구세주를 맞이할 준비가 된다. 영혼은 천사들에 가입하게 된다. 세상에 감추어진 불은 모든 물질을 활활 태워버리고 무로 나타난다. 육체적 세상은 사라진다. 부족도 사라져서 회복의 과정은 완성될 것이다.

 

 

[출처] 영지주의 - 라은성 교수
[작성자] 제자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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