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성령님의 인 치시는 사역

성령님의 인치심에 대하여 간단하게 정의를 내렸으니 이제 성령님께서 인 치시는 과정에 대하여 알아보자.

1) 갑작스러운 인치심과 점진적인 역사

때때로 성령님께서는 이 사역을 갑작스럽게 진행하시기도 한다. 또 이 인치심의 깊이가 깊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신령한 은혜가 참으로 생성하며 성령님의 임재가 충만하여 이후로 결코 이 모든 것을 잃지 않을 수도 있다.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는 것이다(엡 4:30 참고).

이 인치심 역시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설교를 듣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동안 신자의 영혼이 그 내용을 이해하고 그 사실을 온전한 확신 가운데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어떤 약속이 주어지고, 그것이 마음에 새겨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많은 불쌍한 죄인들의 부드러운 마음에 결코 지워지지 않도록 성령님께서 인을 치겠다고 선포하시는 소중한 약속의 말씀이 있다.

"내게 오는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리라"(요 6:37).

이 얼마나 놀라운 인치심인가! 불쌍하고 불안해하며 고민하는 영혼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진심으로 그 영혼을 맞이할 것이며 값없이 용서하실 것이라고 선포하시며 확신을 심어 주시는 것이다. 비록 그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악하고 비참하다 할지라도, 그리고 그 영혼의 슬픔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깊다 하더라도,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로 나아오면 결코 쫓겨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이 위대한 분의 손을 통해 구속의 날을 위해 받게 되는 인치심이 아닌가!

가끔 이 인치심의 역사는 성령님께서 고민하고 있는 영혼에게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의 구주가 되신다'는 위대한 진리를 드러내실 때에 일어나기도 한다. 여러분은 하나님께로 나아갈 때 그분께 드릴 선물이나 지불해야 할 값을 준비해야 한다고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기쁘게 맞아주실 수 있을 만큼 자신이 조금이라도 덜 악하고 가치 있는 존재라고 스스로가 느끼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복되신 성령님께서는 여러분의 눈을 열어 위대한 진리를 보게 하신다.

곧 성령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롬 5:6 참고)는 것을 보게 하신다. 또한 그분이 죄인들의 구원자로서 그들을 구원할 능력을 가지고 계실 뿐만 아니라 그 일을 기쁘게 감당하신다는 것을 보게 하신다. 선물을 가져올 필요도 없고, 어떤 값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전에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얻거나 스스로 무언가를 준비할 필요도 없다. 더 악하고 무가치할수록 하나님께 나아가기에 더욱 적합하며,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더 환영하신다.

상처 입은 우리의 마음에 성령님께서 새기신 인의 자국은 얼마나 놀라운가! 불쌍한 죄인에게 아무런 값없이 완전한 용서가 주어졌고, 예수님의 피가 그의 죄를 깨끗하게 한다. 이 영광스러운 진리가 신자의 영혼에 선언될 때, 아무리 시간과 환경이 바뀐다 하더라도 성령님의 인치심을 받은 자국과 그 순간이 우리의 마음에서 결코 지워질 수 없지 않겠는가? 이것을 하나님께서 부드럽게 만드신 우리의 마음에 새겨진 용서의 도장이며, 이 인치심의 역사는 바로 영원한 영광의 전주곡, 아니 그 영광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성령님의 인치심은 대부분 좀 더 점진적인 역사이다. 여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인간의 영혼은 깊은 경험의 학교를 다니고 있으며, 그곳에서 한 걸음씩 단계적으로 그런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이를 통해 자기 자신과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증가한다. 그리고 내재하는 죄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게 되며, 자신의 마음이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점을 더욱 분명히 느끼게 된다. 뿐만 아니라 사탄의 계략이 무엇인지 더 잘 알게 되고, 하나님께서 은혜와 섭리 가운데 자신의 자녀들을 어떻게 대하시는지에 대한 비밀을 좀더 분명히 알고 이해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과정, 곧 언약의 깊고도 고통스러운 훈련의 과정을 통과해야 얻을 수 있는 결과이다.
그러므로 언약의 자녀가 성령님께서 주시는 온전한 인치심을 받기까지 수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참으로 복되신 분이심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중생은 그 자체로 완벽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신자들의 죄를 없애 주시되 철저하게 제거하셨으며, 우리는 전적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다. 그래서 비록 중생하자마자 죽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성도는 영원토록 안전하다. 십자가의 강도가 이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지 않는가?


옥타비우스 윈슬로우의 '성령님의 구원 역사' 중에서..(227-229p)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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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회가 강조하는 부활의 의미]

우리 개혁교회가 강조하는 부활의 세 가지 의미를 잠깐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부활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것을 통하여 어떠한 큰 사실을 선포하신다는 것입니다. 부활로써 선포해 주시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전히 다 이루시고 충족시켰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심으로 그 행위의 계약 아래에서도 참생명이 온전히 그리스도에게 주어졌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그 생명을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원수, 사망도 정복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죄지은 인생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그 형벌은 그리스도께서 다 받아서 깨끗이 청산되었습니다. 죄값이 완전히 지불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승인하셔서 영광으로 입혀 주신 것입니다.

또한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할 때 필요한 조건들이 다 갖추어졌습니다. 사람의 참된 생명이 약속되기 위해서는 속죄가 필요하고 또 거룩한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이 되어야 할 것인데 그런 일들이 온전히 완성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사 지옥의 고통을 다 받아 주신 것으로써 속죄의 사실이 완성되고 그리스도와의 신성한 연결이 성취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바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머리요 우리는 그의 신령한 거룩한 몸의 각 지체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조건이 다 구비되어서 이제는 부활의 영광이 비치는 것이니만큼 너희도 이 세상에서 살면서 그 영광, 영원히 꺼질 수 없는 참소망을 향하여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어떤 큰 사실들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무엇을 상징하는고 하니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의 지체인 신자들, 즉 우리들 하나하나가 공로 없이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로 없이 의롭다 함을 받을 대가로는 그리스도의 공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공로를 전적으로 믿고 의지할 때 그 의롭다 하심을 공로 없이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큰 은혜인 것입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고 하였는데 우리가 영생을 가졌다는 이것이 신앙의 한 증거입니다. 이렇게 영적인 새 생명이 우리에게 있으므로 장래에 우리는 참으로 복스러운 부활에 참여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4을 보면,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했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영혼과 육신이 나뉘어져 있는 사람이라도 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다 같이 데리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이러한 것을 약속해 주고 보증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부활의 예수님을 바라볼 때 '아, 우리도 저러한 거룩한 세계 가운데 들어가기로 작정되었구나' 하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처럼 신자들에게 의롭다 함을 받은 징표가 됩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동시에 우리들 자신에게는 칭의의 조건 혹은 칭의의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들의 중생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조금 전에 말한 것과 같이 예수님의 부활은 그 생명에 상당한 영광의 빛을 나타냄으로써 우리에게도 이미 그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고, 그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마침내 마지막에 우리가 부활할 것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하신 일을 보면 주님은 자신을 구경시키러 다니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닫지 못하고 의심하던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깨달아 알게 만들었습니다. 네가 과거에는 잘못 믿었어도 이제 분명히 보고 깨달아라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증명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너희 믿는 자들도 나와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나게 될 것이다 하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의 의미를 생각할 때 그것이 신자들의 칭의와 중생과 장래의 복스러운 부활과 더불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로마서 4:25에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해서 예수님의 부활과 칭의가 관계되어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로마서 5:10에도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은 신자의 구원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빌립보서 3:10-14을 보면 바울 선생은 어찌하든지 자기가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이르겠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자가 되겠다 하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베드로전서 1:3-4을 보면,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해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를 중생하게 해서 여러 가지 것을 약속을 하고 소망을 주며 보증해 준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를 읽을 때 그분이 어떠한 세상 어떠한 사회에서 어떻게 고생하고 살아나가셨는가, 또 그것은 왜 그랬는가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이지만, 그의 돌아가심을 좀 더 생각하되 그의 부활과 승천 그것이 우리에게 보증하는 것이 무엇이며 계시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그 영광의 몸을 생각할 때 우리도 장차 그와 같은 몸을 입을 것을 확실히 믿고, 그 정점을 향해서 우리는 날마다 나아가는 것입니다. 혹은 이 땅에 있다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육신과 영혼이 서로 갈리게 될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고전 15:51), 그래서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 것이라"(고전 15:42-44) 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러한 부활의 몸을 입으시고 하늘에 올라가시사 온 우주의 영광의 가장 높은 곳, 곧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말로 표현하는 바는 예수님의 그 영광의 사실입니다. 그러한 위엄과 영광의 주께서는 마침내 심판주로 재림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자들로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그 거룩한 생명에 상당하게 늘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생활은 그저 단순히 인간으로서 하는 생명의 활동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즉 그리스도께 속한 그의 지체로서, 그의 생명을 나누어 가진 자로서, 그와 함께 죽음에서 일으킴을 받은 자로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답게 우리는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도

거룩하신 아버님, 장차 그 거룩한 영광을 저희에게 입히시려고 그 영광의 시작이신 그리스도를 저희와 연결하여 주시고 저희가 그리스도의 부활이 보증하는 바와 계시하는 바를 깨닫고 감사하면서 꺼지지 않는 참된 소망을 가지고 부활을 향하여 늘 살아갈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과연 저희는 항상 이 거룩한 소망을 가지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돌아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 나라의 그 거룩한 영광의 사실들을 주께서 입혀 주시리라고 약속하신 바 그 거룩한 내용들을 향하여 감사하면서 나아가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로소이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도 영광을 입을 사람에 해당한 생활의 열매가 저희에게 있어야 하겠사오니 아버님 앞에서 거룩한 이끄심을 받아서 열매를 맺을 만한 생활 행보를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교회가 영광스러운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를 늘 앙모하면서 나아가되 저희 모든 지체 일만 마디가 다 주께서 내리시는 힘을 얻고, 또한 그리스도의 신의 인도를 받아서 거룩한 생활의 길로 전진함으로 그 신비하고 거룩한 교회의 본질을 땅 위에서 바로 드러내게 하시옵소서.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김홍전의 '부활의 영광' 중에서(89-95p) /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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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노래 

임 따라 나선 이길
가도가도 보이지 않는
머나먼 길

서리서리 겨울 된서리
쉴새없이 몰아치고
언 발 동동
절룩이누나

춥게만 느껴지는

모진 이 길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며
섬기는 십자가의 길이라네
더 이상은 못가겠다 떼쓰며

울고있는 나에게

사랑의 주님께서 찾아주셨네.


주님은  못자국 선명한

그 사랑의 손으로 

흐르는 내 눈물 닦아주시며,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가자.”

힘없는 무릎을 일으켜

세워 주시니


오늘도 나는

한쌍의 반구가 포구에서

사랑노래 부르듯

주님의 품을 포구삼아

사랑노래 부르며

피맺힌 십자가의 모진

이 길을...

한걸음 두걸음 가보려 하네.


참고 (반구: Turtledove (호도애) 는
비둘기과의 일종으로서 암수의 사이가 너무나 좋아
사랑의 새, 혹은 연인이라고도 부른다.)

 

 

나의 사랑,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자야

일어나서 함께가자. (아가서 2장10-13)



출처: https://lake123172.tistory.com/32?category=151296 [목양연가(牧羊戀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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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생명]

이러한 일을 위해 땅에서 어떤 일이 이루어졌는지 이미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증명하셨을 뿐 아니라 부활의 거룩한 생명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이 말씀을 우리가 늘 주의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사실을 역사(役事)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새로운 생명을 주셨다. 그 생명을 받은 새사람에게는 또한 하늘에 있는 기업을 받게 했는데 그 유산은 썩지 않고 취하지 않고 더럽지 아니한 것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이라는 사실의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사실은 지금 현재 우리의 생활에 어떻게 작용하느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그 생명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심으로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적인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창조되어 새로운 피조물로서 땅 위에서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의 그 거룩하신 생명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공급되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사실을 향해서 전진하되 건설적으로 늘 작용하고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명을 가리켜서 영원한 생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고 하신 그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고 연합되는 그 순간부터 가지는 것인데 연결이라는 사실은 곧 생명의 공급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먼저는 그 생명을 우리에게 공급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신이 우리 안에 거하시사 우리의 성품을 그리스도의 것답게 변화시킵니다. 성신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역사하심으로 우리가 일생을 걸어가는 동안에 우리 인격 전체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존재답게 아름다운 인물로 차례차례 올라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겉사람은 후패(朽敗)해 가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 가서(고후 4:16) 마침내 그리스도의 영광의 위치에 도달하는 그때까지 거룩한 성신의 역사와 그리스도의 역사가 우리에게 계속됩니다.

땅 위에 있는 동안 우리는 거룩한 계시와 성신의 유기적인 작용을 계속 받아서 삽니다. 이때 우리는 자기 육신 곧 옛사람을 날마다 죽이는 데서 그리스도께서 날마다 살아 나가십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살다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부르시면 그 영혼은 잠정적으로 그리스도의 품인 낙원에 가 있게 됩니다. 그것을 보통 천당이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정점은 아닙니다. 초창기부터 한국에서는 예수를 믿고 천당 간다는 데 다 주력을 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죽은 다음에 영혼이 가는 그곳이 마지막 완성지도 아니고 또 영구한 자리도 아닙니다. 그것은 경과의 지점에 불과합니다. 임시로 거기에 가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임시로 낙원에 있다가 예수께서 재림을 하시사 모든 악을 다 심판하시는 날, 옛 하늘과 옛 땅을 다 없이 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전체로 나타내실 때 우리는 홀연히 그리스도께서 입으신 그 몸과 같은 영광의 몸을 입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영원 무궁한 거룩한 나라가 확연히 통일된 자태로 그리스도의 통치 대권하에서 명확하게 서 있을 것입니다.


김홍전의 '부활의 참뜻' 중에서(65-67p) 
출처: 생명나무 쉼터 , 한아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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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과 죽은 후의 천당]

먼저 사람들이 왜 '에이, 죽었으면 좋겠다'든가 '죽고싶다'든가 하는 말을 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까닭과 핑계가 있겠지만 참으로 죽기를 원하는 사람이란 그리 흔치 않습니다. 흔히 이런 말을 그저 함부로 말하는 데서 나올 것입니다. 그런 말을 자주 하는 어떤 신자에게 '죽는 것이 왜 좋으냐?' 하고 물으면 '죽으면 천당에 가게 되니 좋다'고 대답하곤 합니다. 이런 말로 자기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함부로 한 말을 변호해 보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속에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천당에 가기 위해서 사는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세상에서 사는 것보다 천당에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일까요?

보통 이야기하는 천당이란 말은 사후의 좋은 세상 전부를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은 다음에 영혼이 천당 간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사람이 죽은 후 그 영혼만 임시로 가 있는 낙원을 의미하는 듯도 합니다. 여기 제1부에서는 우선 천당이란 말을 죽은 후의 좋은 세계 전부 곧 낙원과 그 후의 영광의 세계를 다 같이 포함하는 것으로 보고 이야기하겠습니다.

세상에서 사는 것은 천당에서 사는 것에 비교할 때 훨씬 못한 것일까요? 그렇게 잘못 생각하면 이 세상의 일은 다 뜬구름 같고 이 세상은 고해(苦海)와 같아서 괴롭고 허무한 것이 됩니다. 세상에서 사는 우리는 역려과객(逆旅過客)과 같으니 어서 죽어서 하나님 앞으로 가서 평안하게 '할렐루야' 찬송을 부르면서 지내야 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우리 기독교인의 사상이라면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도리와는 크게 어긋납니다.

현세의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해봅시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천당에 가서는 할 수 없고 이 세상에서만 할 수 있도록 배정해 놓으신 일이 있습니다.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고 그 영광의 위치에 이르는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장소는 천당이 아니라 이 세상입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사실, 곧 예수를 믿고 영원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천당이 아니고 이 땅 위에서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든지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형벌을 받든지 다시 말하면 영광을 얻느냐 멸망을 받느냐를 결정짓는 것은 땅에서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어떤 사람이 영원한 영광의 자리에 오르는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장소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둘째, 사람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힘써 주를 믿고 의지하며 건실한 봉사의 생활을 함으로써 사람의 도리를 다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건축자가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터전 위에 집을 짓되 가급적 영원히 변치 않을 재료로 짓습니다. 재료로는 금, 은, 보석, 나무, 풀, 짚 따위가 있습니다. 어쨌든 이 집을 짓는 공사는 천당에 가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이 땅에서만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집을 짓다가 완성하지 못했다 해서 그 나머지를 천당에 가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이 땅에서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심판의 날에 이르면 불의 심판이 있어서 어떤 집은 타고 무너지나 어떤 집은 그대로 남아 있게 됩니다. 곧 나무나 짚이나 풀 같은 것으로 지은 집이라면 심판의 불에 타서 다 없어질 것입니다. "누구든지 공력(功力)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 3:15). 그러나 금이나 은으로 지은 집은 암만 불이 나더라도 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몸만 구원받는 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불 난 속에서 자기 몸 하나만 빠져  나와 구원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금과 은으로 좋은 건물을 짓다가 완성을 보지 못했다 할지라도 천당에 올라가서 다시 그것을 완성시킬 수 있는 기회가 있느냐 하면 그런 기회는 전연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이 세상이 얼마나 귀합니까?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지으시고 이 세상 가운데 사람을 지어 놓으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올바른 생활을 하여 하나님께서 지으신 본래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땅 위에 있는 것은 결코 의미 없는 일이 아닙니다. 어떠한 잘못으로 또는 우연한 일로 사람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땅에 사람을 두신 사실에는 결정적이고도 구체적인 확실한 뜻이 있습니다. 사람이 어쩌다가 땅에 떨어졌는데 하나님께서 보시고 '거기에 있을 것이 아니므로 얼른 주어다가 천당으로 옮겨야겠다' 하신 것이 아닙니다. 결국 땅이란 하나님께서 아주 치밀한 섭리하에서 결정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으로 만드신 곳이며, 이 땅 위에 사람이 산다는 것도 아주 명확한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냥 우연히 일어난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땅 위의 생활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참된 자녀로서 또한 하나님의 충성된 종으로서 이 땅에서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 각 사람은 하나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 두신 본래의 목적과 의도가 무엇인가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지상 생활의 가치도 알 수 있고 그 의미를 확실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람의 영원한 문제는 땅의 생활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정과 영광의 상을 받을 기회가 이 땅에서 생활하는 동안에만 주어지는 것이고 일단 땅을 떠나면 그런 기회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상을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잘했도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땅에 있는 동안에 내가 너를 땅에 둔 본래의 큰 뜻을 깨닫고 그대로 살았으니 참 잘했다'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천당에 가더라도 그곳에 합당한 생활의 큰 의미와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아무 의미 없이 막연하게 앉아 있을 리가 없습니다. 천당이 좋은 곳일진대 사람이 천당에 가게 되면 의식이 더욱 분명해져서 좀 더 확실한 목적과 이상을 가지고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천당에서는 천당의 목적과 의미가 있어야지 땅에서의 목적이나 의의를 그대로 끌고 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자신의 목적과 의의를 충분히 이해하고 실천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천당에 간들 얼마나 잘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천당에서의 목적과 의의란 그가 땅 위에서 살 때 가졌던 목적과 의의의 수행 정도에 따라서 달라질 것입니다.

한 영혼이 천당에서 거할 때 그 영의 성숙성과 덕성의 정도는 그 인물이 세상에서 얼마나 성신 안에서 거룩히 장성했는가의 결실 위에 서 있게 될 것입니다. 천당에 들어갈 때 세상에 있는 동안 장성한 '새사람'을 모두 포기하고서 기본 상태만으로 들어가리라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선지자는 영감 있는 말씀과 덕을 가지고 세상을 떠나고 유치한 신자는 유치한 대로 천당에 들어갑니다. 대덕(大德)과 소인(小人)이 완전 동일한 상태로 되어 버린다면 천당은 지극히 불공평한 곳이거나 세상과 아무 상관없는 전혀 별다른 새 창조의 세계일 것입니다. 그러나 천당은 오직 인생 세계와 영원한 영광 세계 간의 중간 세계(interim state)일 뿐입니다.

천당에서 할 일은 무엇일까?

우리가 천당에 가서 할 일은 무엇일까요? 흔히 말하기를 천군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며 지내는 것이라 합니다(계 15:3-4, 14:1-5, 7:9-12). 물론 그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중요한 일은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계 7:15-17).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은 물론이고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언제나 중요한 일입니다. 천당에서 할 일과 관련하여 사람이 가지는 위치의 높고 낮음과 의의(意義)의 깊고 얕음은 그 사람이 땅 위에서 결정하게 되는 것임을 이미 앞에서 지적하였습니다. 거듭 말하면 땅에서 세운 집이 심판의 불로 타버리면 그만이고 그대로 남아 있어야만 상을 받는 것입니다. 천당에서 이런 상을 받는다면 그것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신 것이고 책망을 받는다면 그만큼 그 사람의 위치는 낮고 빈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천당에서도 계급의 차이가 있을까?

천당에서도 계급의 차이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6:19-31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보십시오. 천당(낙원)에서 아브라함과 나사로는 완전 평등의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있고 아브라함은 높은 위치에서 지옥에 있는 부자 유대인과 대화합니다. 천당이라고 누구나 평등해서 똑같은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땅 위의 생활이 천당에서의 위치를 결정해 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땅에서 실컷 죄를 짓고 아무렇게나 산 사람이나 경건하고 의롭게 산 사람이나 천당에서는 다 평등할 것이라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땅 위에서 많은 수고를 한 사람, 곧 바울, 베드로, 어거스틴, 칼빈 같은 사람이나 이 세상에서 그냥 '죽었으면 좋겠다, 죽었으면 좋겠다' 하며 아무 의미없이 살다가 죽은 사람이 꼭 같은 자리에 앉아서 영광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천당의 참 의미라는 것은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과 같이 "잘했도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했으니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라"(마 25:23)는 말씀을 듣든지 "너는 다섯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눅 19:19)든지 하는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럼 과연 언제 다섯 고을 권세를 차지하겠는가 할 때에 이것은 적어도 이 땅에서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 땅에서 이루어질 이야기가 아니라 저 먼 나라, 곧 이생 이후인 내생에서 일어날 얘기입니다. 천당 생활이 내생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생이 끝난 후 우리의 생의 결정, 곧 우리의 위치나 영광이나 의미의 중요성은 땅 위에 있는 동안의 생활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땅 위의 생활 여하는 하늘나라를 위한 준비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어떻게 하면 저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이 되고 어떻게 하면 하늘에서 빈곤하게 되는 것인지를 잘 생각해서 이생을 보내야 합니다. 덮어놓고 천당, 천당, 하며 올라가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천당에 갔을 때에 하나님께서 '네가 저 땅에서 선한 행실을 하여 많은 보물을 쌓아놓은 것이 여기 있으니 자, 이 많은 것으로써 너의 활동을 해 보아라'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너는 열 고을의 권세를 차지하게 되었다'든지 '너는 금으로 집을 지은 사람이니 자, 여기서 이 상(賞)을 받고 살아라' 하는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어쨌든 이것은 땅 위에서 결정할 문제입니다. 천당에 가서는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땅 위에서의 생의 의의를 절대로 소홀히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장래의 일을 위한 여러 가지 준비를 해야 할 것을 생각할 때에 이 땅에서의 일만 가지고 노심초사하며 애쓰고, 장래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안타깝고 원통한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자기 앞에 당한 경주 하라"(히 12:1)고 한 것입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것을 다 떨쳐 버리고 목표를 향하여 힘껏 경주로를 달려가라고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땅에서의 생활을 달음박질 마당에서 경주하는 것으로 비유했습니다. 그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 라고 표현하여 전투하는 사람 혹은 경기하는 사람으로서의 땅 위의 생활을 우리에게 효과 있게 가르쳤습니다.


김홍전의 '부활의 참뜻' 중에서(127-134p)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애굽으로 돌아가자."

 

(민수기 14장 1-5절)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성경에 기록된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애굽을 나와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앞둔 가데스바네아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정탐꾼들을 보내 가나안땅을 정탐합니다. 40일 동안 가나안을 탐지하고 거대한 포도송이까지 둘러메고 돌아온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을 혹평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의 장대한 족속들을 이기지 못 할 것이라고 보고합니다. 정탐꾼들의 보고에 놀란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죽게 하려고 이곳으로 인도하시는가, 밤새도록 소리치며 곡을 합니다. 한 지도자를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니 저들은 우리의 먹잇감이라, 두려워 말고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하였으나 그들은 듣지 않습니다. 이 패역한 백성들에 진노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다 20세 이상의 모든 남자들이 다 죽은 다음 비로소 여호수아와 갈렙에게만 광야에서 태어난 후세들을 이끌어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십니다.

 

 

두려움에 떨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밤새도록 곡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 그 백성들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저 자신을, 우리 가족을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을 따라나선 길은 평탄하고 풍요로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배고프고 목마르고 거칠고 험하고 외로운 광야길이었습니다. 시애틀에서 개척교회를 하면서 저는 병원통역 일을 하였고 아내는 아기 돌보는 일을 하였습니다. 뉴저지로 옮긴 다음에는 양로원에서 노인환자들을 지키며 밤을 새우는 일도 하였습니다. 이제 나이 들어 목회를 접은 지금은 딜리버리 일을 하면서 힘겹게 버티고 있습니다. 아이들도 제대로 공부하지 못 하고 진로를 잡지 못 하고 고생하였고 혼기를 놓쳤습니다. 내 인생이, 우리의 삶이 왜 이렇게 되었나 싶은 생각이 때때로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

그들은 원망하며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였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인들 가나안의 거인들이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인들 40년 동안 광야를 떠돌며 애굽을 떠나 온 것이 후회스럽고 애굽의 평온한 삶이 생각나지 않았겠습니까? 저도 그랬습니다. 고기와 부추와 마늘을 먹던 애굽생활이 생각나고, 그냥 그곳에서 그렇게 살았더라면 이 고생은 하지 않을 것을, 아이들도 고생에 잡히지 않았을 것을, 하는 후회의 마음이 들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따라나선 길은 되돌릴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길이었습니다. 아무리 험하고 두렵고 힘들어도 계속 가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광야길에서 불기둥 구름기둥이 되어주시고 만나를 내려주신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과 공급하심을 만일 애굽땅에 그냥 살았더라면 체험할 수 있었겠습니까? 애굽의 따뜻한 고깃국 가마솥 곁에서 평온한 삶을 살았더라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후회할 수가 없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 말할 수도 없습니다. 돌아서는 것은 곧 죽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앞만 바라고 걸을 뿐입니다. 이제 곧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밟겠지요, 하나님이 함께 계시니까요.

 

그래요. 저 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예수를 믿는 것은 돌아설 수 없는 길입니다.

저희보다 더욱 험하고 더욱 고생스러운 길을 기쁨으로 걷고 또 죽음을 당하기까지 한 사람들이 어디 한 둘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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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생 사역의 특징

2) 신령한 생명의 점진적인 성장

우리는 신령한 생명이 영혼에 처음으로 심어지는 현상이 순간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제 그렇게 심어진 신령한 생명이 대개 점진적으로 성장해 간다는 사실에 대해 살펴보자. 이로써 자신의 영적 생명이 잘 성장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질책하는 모든 사람이 큰 격려를 얻기 바란다.

영혼에 있는 신령한 지식은 종종 느리게 성장한다. 다시 말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열 한 제자들을 보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친히 말씀해 주셨는데도 그들은 그 뜻을 잘 이해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또 얼마나 느리게 성장하는 학생들이었는가! 과연 누가 그들과 같이 교훈을 배울 수 있겠는가? 제자들은 지식의 원천에서 나오는 지식을 마셨다. 그들은 태양에서 직접 발산되는 빛을 받았다. 그들은 우리의 사랑하는 주님께서 직접 행하신 사역과 교훈과 이적과 모범을 보고 배우는 탁월한 유익을 누렸다. 그런데도 그들은 주님께서 그토록 열심히 꾸준히 가르친 그 명백한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 마음으로 믿는데 얼마나 더뎠는가!

그렇다. 신령한 생명을 가지고 있는 영혼이 성장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죄와 숨겨진 악에 대한 지식,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반항심과 우리 마음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부정함과 사탄의 치밀함에 대한 지식,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고귀함에 대한 지식과 위대한 구원에 대한 관심은 하루나 일 년에 다 자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날과 수년에 걸친 노력, 오랜 시간의 고통스러운 연단, '폭풍과 광풍'(시 55:8)의 세월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영혼에 심어진 생명이 더디게 성장한다고 해서 그것이 덜 실제적이거나 덜 신령한 것은 아니다. 이 생명은 그 정도에 있어서는 미약하고 연약할지 모르나 본질적으로는 결코 소멸되지 않는 생명이다.
성령님께서 인간의 영혼 가운데 이루시는 사역을 표현하는 비유들을 보면, 자주 연약한 상태로 묘사되고 있다. 이사야 40장 11절을 보라.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들이 연약하고 힘겨워하는 모습을 그 어떤 말로 이보다 더 놀랍고도 감동적으로 묘사할 수 있겠는가?

또 이사야 42장 3절을 보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여기서 성도들을 단지 '갈대'라고만 표현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도 성도들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잘 표현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상한 갈대'라고 표현함으로써 그들을 연약한 상태 중에서도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단지 '등불'로만 표현되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작은 등불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꺼져가는 등불'이라고 함으로써 그들이 '죽게 된 것'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이 두 비유에는 영원하신 성령님께서 행하신 사역의 결과가 나타난다. 이 '상한 갈대'가 결코 완전히 부러지지 않으며, '꺼져가는 등불'도 결코 완전히 꺼지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상한 갈대를 부드러운 손길로 묶어 강하게 하실 것이며, 꺼져가는 등불을 조심스럽게 돌보아 되살아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 곧 경건한 부모에게서 양육된 자녀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지금까지 걸어온 영적인 순례 지도를 보면서 자신의 영적 삶이 시작된 지점을 더듬어 보려고 하다가 당황해하는지 모른다. 그들은 자신이 멸망의 도시를 이미 떠났으며 강하고도 능한 손에 의해 애굽에서 구출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이 경험한 인도하심이 얼마나 천천히, 그리고 얼마나 살며시 부드럽고도 서서히 이루어졌는지, 그들은 자신의 영적 삶의 동이 튼 시간을 발견하는 것이 막 태어나서 혼돈 가운데 있는 자신에게 처음으로 자연의 빛이 들어왔던 순간을 말하는 것 이상으로 어렵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났음에 틀림없다. 사람이 그 마음에 악한 원리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은 상상이 아니다. 그리고 은혜가 이 악한 원리를 정복한 것도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그가 한때 어둠의 자식이었다는 것도, 그리고 이제 빛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도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비록 자신의 영혼이 거의 발전하지 않고 성장이 지지부진하며, 여전히 믿음이 연약하고 경험한 은혜가 적으며, 자신의 부패함이 너무 크고 허물이 많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시작이 '속이는 활'(시 78:57)처럼 빗나갔을지라도,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비록 나는 주인의 괴수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 불과하지만, 또 내적으로 겸손할 수밖에 없고 외적으로 애통해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이유들을 보지만, 내가 아는 한 가지는 바로 '전에는 내가 볼 수 없었으나 이제는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제 전에는 전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있다. 나는 죄가 얼마나 가증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고, 거룩함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보게 되었다. 나는 이제 나 자신의 악함과 허무함을 보게 되었고 예수님의 고귀하심과 충만하심을 보게 되었다."

비록 미약한 은혜라 할지라도 그것 역시 참된 은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만약 영혼이 은혜에 굶주려 있고 목말라 한다면, 그리고 그 은혜가 영혼의 가장자리에라도 닿기만 한다면, 그 영혼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옥타비우스 윈슬로우의 '중생 사역의 특징' 중에서(101-104p)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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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권적 선택

여기서 반드시 지적해야 할 것이 있다. 중생의 역사 가운데 성령님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신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사역과 활동에서 주권적으로 역사 하신다. 만약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정의하실 것인지를 묻는 사람이 있다면, 다음의 말씀을 보라.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롬 9:15)

바로 여기에 주권자가 계신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하나님 자신과 부합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선택과 유기, 그리고 자신을 드러낼 것인가 감출 것인가에 대해 자신의 무한한 지혜와 사랑에서 비롯되는 은혜로운 목적에 따라 모든 일을 행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하시는 이'(엡 1:11)이시며, 천사에게 든 사람에게든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모든 일을 설명하시지 않는'(욥 33:13 참고) 분이시다.

복되신 성령님의 사역 가운데 드러나는 하나님의 주권을 주목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신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내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하나님의 주권이란 바로 이런 의미이다. 여기서 사용된 표현이 얼마나 놀라운지 보라. 인간은 바람을 다스릴 수 없다. 바람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어느 누구도 바람의 영향력을 거부할 수 없다. 우리는 바람에게 명령하거나 바람을 통제할 수 없다. 바람을 불게 하는 것이 우리의 능력 밖의 일이듯이, 바람을 잠잠하게 하는 것도 우리의 능력 밖의 일이다. 바람이 불어올 때 우리는 그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우리가 성령께서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도 저항을 받으신다. 그것도 강력하고 지속적으로 저항을 받으신다. 그러나 성령님은 그 저항에 굴복하지 않으신다. 우리 마음에 있는 모든 적대감과 육신적인 소욕이 성령님을 대적해서 일어나지만, 이 땅과 지옥의 모든 권세들은 성령님이 품고 계신 사랑의 사명에 의해 굴복되고 만다. 자신의 영원하신 목적에 따라 성령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러 오실 때, 이 모든 권세들은 성령님께 제대로 대항할 수 없다. 그분은 강력한 군대처럼 모든 대적들을 물리치시고, 모든 장벽을 무너뜨리시고,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신다. 그리고 죄인은 '주의 권능의 날에'(시 110:3)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막 5:15) 예수님의 발 앞으로 이끌려 나와 온유하고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앉게 되는 것이다.

과연 어느 누가 그분의 능력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성령님께서 부드럽고 설득력 있는 사랑의 '세미한 소리'(왕상 19:12)로 말씀하시든지, 깊고도 압도적인 죄의 각성이라는 '급하고 강한 바람'(행 2:2)의 모습으로 나타나시든지, 그분의 영향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그분의 능력은 거부될 수 없다. 그러하기에 성령님은 신자들 가운데서 효과적으로 역사하시는 분이다(살전 2:13 참고).

성령님의 사역은 그분의 능력만큼이나 주권적이다. 성령님은 자신이 원하는 사람에게 찾아오신다. 그분은 자신이 원하시는 때에 찾아오시며, 그 방식도 스스로 정하신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로 오시도록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서 우리를 떠나시는 분도 아니다. 그분은 임의로 불어오는 바람과 같다. 우리는 성령님의 소리를 듣고 그분의 사역의 결과를 볼 뿐이다. 성령님께서는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일하시며 왜 역사하시는지, 그리고 왜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일하시는지에 대해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알려 주시지 않는다.

복되고 영원하신 성령님이시여! 이는 당신이 보기에 선한 것이니이다.

진리의 말씀인 성경에는 이 진리에 대해 수많은 예들이 제시되어 있다. 그것들을 일일이 살펴보면서 이 측면을 더 확장해서 설명하지는 않겠다. 만약 성경에 기록된 예들이 지금 떠오르지 않는다면 여가를 이용하여 성경을 찾아봐도 좋다. 특히 야곱과 에서, 세리와 바리세인, 다소 사람 사울과 그와 함께 길을 가던 사람들, 십자가에 매달렸던 두 명의 강도의 경우를 살펴보라고 권유하는 바이다. 거기에는 선택에 관한 하나님의 주권과 영원한 성령님의 역사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인가? 그렇다면 성령님의 사역에 속한 주권성에 대해 논의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증거에만 머무르지 않겠다. 오히려 우리는 바로 여러분을 복된 성령님의 사역에 나타나는 주권성에 대한 증인으로 초청하고자 한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나의 증인이다"(사 43:10 참고)라고 말씀하신다. 과연 누가, 또 무엇이 여러분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게 만들었는가?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족뿐 아니라 친척과 친구들 가운데서 선별된 사람들이다. 그들 가운데 오직 여러분만이 선택되고 부르심을 받았으며, 은혜 자녀 곧 영광의 상속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여전히 허물과 죄 가운데 죽어 있다.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세상 속에서 세상을 향하여 살고 있다. 그들은 쾌락을 추구하며 자신과 계약을 사랑하고 있다. 하나님을 미워하고 그리스도를 거부하며 섭리 가운데 양심과 말씀을 통해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성령님을 대적하면서 살고 있다. 그들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자신을 막는 모든 것을 물리치고, 타락한 영혼들이 맞이하는 최후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다.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자비 영역을 지나쳐 영원으로 들어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눅 16:23) 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누구인가?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받은 죄인, 선택받고 부르심 받고 용서받고 의롭게 된 죄인이다. 여러분은 씻음을 받고 의의 옷을 입고 양자로 입양되었으며 거룩하게 된 죄인이다. 여러분은 십자가 아래로 이끌려 왔으며, 기쁨으로 예수님을 맞이하고 십자가를 질 뿐만 아니라 그분을 따를 수밖에 없게 된 죄인이다. 오, 택하심 속에 깃든 하나님의 사랑이여! 오, 예수님의 구별하시는 은혜여! 오, 영원하신 성령님의 주권적인 역사여!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롬 9:20)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굴복하고 그저 조용히 경탄하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경배하라.

지금까지이 글을 읽었는데도 이 교리를 이해하기가 어려운가? 이 교리에 대해 반대하거나 못 본 척 지나치고 싶은가? 모든 온유함과 사랑을 담아 여러분에게 진지하고도 솔직하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권하는 바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 가운데서 이 교리를 살펴보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지 않으려면 이 교리에 반대하지 말라. 성령님을 근심하게 만들지 않으려면, 또 자신의 영혼이 받은 측량할 수 없는 복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이 교리를 그냥 지나치지 말라.

오, 이 얼마나 귀중한 진리인가! 이 진리는 인간의 공로라는 교만에 흠집을 낸다. 이 진리는 자아라는 뿌리에 도끼를 갖다 댄다. 이 진리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자신을 낮추게 한다. 이 진리를 통해 우리는 자신을 비우고 스스로 낮아지게 된다. 그리고 영혼 속에 창조된 새로운 피조물에 관한 모든 찬양과 영예와 영광과 능력과 위엄과 다스림을 삼위일체 하나님께로 돌리게 된다.

성령님의 사역이 값없는 은혜라는 사실도 성령님의 주권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피조물 중 그 어떤 것도 성령님을 주인의 품으로 인도할 만한 가치를 지닌 것이 없다. 죄인에게 무슨 가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형벌이 확정된 범죄자, 법을 어긴 반역자, 불쌍한 파산자, 마음에 반역하려는 생각이 가득하고 하나님과 그분의 다스리심과 그분의 아들을 향해 적대감을 품고 있는 사람, 일만 달러트의 빚을 졌으면서도 갚을 돈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과연 은혜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겠는가? 전혀 없다. 그런데 영원하신 성령님께서 이런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죄를 각성하게 하시고, 그들의 적대감을 굴복시키고 하나님에 대한 도전을 진압시키시며, 그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시고 그 영혼에 용서와 평안의 인을 치시는 것이다. 오, 이 얼마나 값없는 은혜요 분에 넘치는 자비이며, 주권적인 사랑인가! 성령님께서 과연 어쩔 수 없이 이런 일을 행하신다고 할 수 있을까?

회심의 역사와 관련하여 성령님께서 주권적으로 회심시킬 대상을 정하실 때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닌 어떤 것을 발견하거나 반대로 다른 사람에게서 더 보잘것없는 모습을 본 것을 기준으로 삼으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결코 그렇지 않다. 성령님께서는 종종 가장 미천하거나 사악하고 타락한 사람을 선택하신다. 인간의 공로에 대한 모든 사상을 전복시켜 버리고 성령님의 값없는 은혜를 가장 찬란하게 나타내시려는 것처럼 말이다.

복되신 성령님의 사역 가운데 역사하는 은혜를 보라. 그분은 다가오셔서 문을 두드리시고 장애물을 제거하시고, 우리에게 들어오셔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신다. 이때 성령님은 피조물의 그 어떤 공로에도 관심을 두지 않으신다. 설령 우리에게 공로라고 불릴 만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말로 표현하지도 못할 정도로 너무나 미약하고 보잘것없을 뿐이다.

오, 성령님의 은혜는 얼마나 풍성한가! 불쌍한 죄인을 부르실 때 이 은혜가 얼마나 크고도 밝히 드러나며 빛나는지 모른다. 확신에 찬 영혼은 이렇게 외친다. "주님, 과연 제 안에서 무엇을 보셨기에 주님께서 저를 향하여 측은한 마음을 가지게 되셨고, 주님께서 저에게로 다가오실 수 밖에 없었으며, 저를 주님의 성전으로 만들게 되었습니까? 저에게는 그럴 만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저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궁핍함과 처량함과 비참함뿐입니다. 주님께서 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주권, 그리고 저의 공로와는 전혀 상관없는 저를 향한 주님의 자비가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복된 성령님께서 행하시는 영광스러운 사역에서 눈을 떼지 말라. 이는 인간을 겸손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폐허가 된 피조물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높이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바로 여러분이 복된 사람이다. 여러분은 가난함 속에서도 부요함을 누린다. 여러분은 낮아질 때 높아지게 된다. 하나님 안에 모든 사랑이 있고, 예수님 안에 모든 은혜가 있다. 그리고 성령님 안에 모든 자비하심이 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여러분을 위한 것이다. 고개를 들라. 그리고 진심으로 기쁨의 노래를 부르라. 비록 가난하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며, 멸시 받고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그리고 거만한 바리세인의 눈에 하찮게 보일지라도, 여호와께서는 여러분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은혜의 보물을 쏟아 부어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사랑하는 아들을 여러분에게 주셨을 뿐 아니라 복되신 성령님도 보내 주셨다.

심령이 가난한 여러분이여!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것이다. 애통하는 마음을 가진 여러분이여!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것이다. 여러분이 받을 복이 얼마나 광대한가!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3:23 참고). 여러분이 하나님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아는가? 예수님께서 얼마나 부드러운 마음으로 여러분을 사랑하시는지 아는가? 복되신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자신의 거할 처소로 만드실 때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아는가? 그렇다면 여러분는 여러분이 낮아졌다는 사실로 인하여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 57:15).


옥타비우스 윈슬로우의 '살리시는 성령님'에서(104-110p)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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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효과적인 부르심

성령님의 사역은 효과적인 사역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다루었으므로, 여기서 그렇게 깊이 살펴볼 필요는 없을 듯하다. 이 주제는 성령님의 사역에 관한 중요하고도 영광스러운 일면을 보여 준다. 그러나 우리가 중생과 관련된 성령님의 역할에 대해 더욱 확실한, 그리고 영적으로 더욱 높고도 신령한 시각을 가지지 않으면 그것을 볼 수 없다.

성령님께서는 신자가 거듭날 때 그의 영혼에서 일어나는 위대한 변화를 종종 '부르심'이라고 일컬으신다. 이 점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애써 연구하지 않더라도 성경의 몇몇 구절만 보면 증명된다. 갈라디아서 1장 15절에서 바울은 "내가 은혜로 부르심을 받았다(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라고 말한다. 로마서 8장 28절에서는 하나님의 성도들을 일컬어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말한다. 그 외에도 다음의 구절들을 보라.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벧전 2:9)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롬 8:30)
"부르심을 받은 자 곧.....예수 그리스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유 1:1)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딤후 1:9)
"하늘을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히 3:1)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벧후 1:10)

이와 같이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심을 받고 어두운 데서 건짐을 받은 거듭난 사람이 곧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 사람을 부르신 이가 영원한 성령님이다. 곧 살리시고 부르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인 것이다(요 66:63 참고). 그러므로 여기서는 특별히 성령님의 효과적인 부르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성령님의 부르심에는 외적 부르심과 내적 부르심이 있다. 먼저 외적 부르심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잠 1:2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성령님의 외적 부르심에는 다양한 방편이 사용된다. 말씀을 사용하시기도 하고 복음에 대한 영광스러운 선포를 사용하시기도 하며, 자비를 베풀거나 심판하시는 등 하나님의 섭리를 이용하시기도 한다. 또 사역자들을 통해 경고하시거나 친구들을 통해 책망하시기도 한다. 또 때로는 자연적인 양심의 각성을 일으키시기도 하는데, 이것 역시 다른 것들 못지않은 능력을 발휘한다. 성령님께서는 이런 다양한 방법들을 사용하여 죄인을 부르시고 회개시키신다(눅 5:32).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복음을 들을 뿐만 아니라 항상 은혜의 수단을 접하는 사람, 그리고 다른 사람들 모르게 쓴소리를 해줄 수 있는 신실한 사람을 곁에 두고 있는 사람은 모두 성령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부르심이 있다는 사실은 죄인들에게 두려운 책임감을 갖게 한다. 이 부르심을 거절한다는 것은 이보다 더 무시무시한 운명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진노를 부으시기 전에 항상 먼저 그들에게 평화의 손길을 내미신다. 언제나 하나님의 자비가 심판보다 먼저이다.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잠 1:24).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롬 10:21).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계 3:20).

하나님께서는 죄인들과 의논하시고 논쟁하시고 그들을 권면하신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사 1:18)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초청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들어 보자"라고 말씀하시며, 가르치시고 주의를 주시며 초청하신다. 또 의무감 때문이든지 스스로 관심이 일어나서든지 간에 회심의 필요성에 대한 가장 진지한 이유를 사람의 마음에 심어 주시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영혼이 가진 관심사를 이용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역설하신다. 그런데도 이 모든 것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것 같다.

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바 반역자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인내가 얼마나 크고도 놀라운가! 하나님은 죄인을 향해 자신의 팔을 뻗으시는 분이다. 진노가 아니라 자비를, 저주가 아니라 복을 베푸시며, 즉각적인 형벌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초청하시고 격려하시며, 죄인과 더불어 '쟁론'하시는 인내와 용서가 하나님께 있다. 오, 우리 하나님과 같은 신이 과연 어디에 있을까!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잠 1:24).

한편, 하나님의 선택에는 특별하고도 직접적이며 효과적인 성령님의 부르심이 있다.
이 부르심이 없다면 다른 모든 부르심은 헛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겔 37:14)라고 말씀하시며, 그리스도께서도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이와 더불어 성경은 성령님의 효과적인 역사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한다.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엡 3:7).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성령님께서는 진리를 도구로 삼아 사람의 영혼에 효과적으로 역사하신다. 이전의 성령님의 부르심에는 인간의 양심에 호소하는 그 어떤 내적이고도 초자연적이며 비밀스러운 부르심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효과적인 부르심에는 양심을 깨우고 우리의 마음을 깨뜨리며, 심판이 있음을 확신하게 영혼의 눈을 뜨게 하는 능력이 있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듣지 못했던 귀로 새롭게 울려 퍼지는 경고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는 능력이 있다.

이 복된 효과를 주목하라.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고, 우리 지성에 드리워져 있던 장막이 찢어지며, 마음속에 있는 깊은 악의 근원이 무너진다. 그리고 죄인은 자신이 버림받았고 멸망 가운데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자신이 용서가 없고 의도 없으며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지도 않고, 아니 하나님이 아예 계시지도 않고 구세주도 없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얼마나 끔찍한 상태인가! 죄인은 그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행 16:30)라고 외칠 뿐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멸망 가운데 있는 비참한 사람입니다.내 속을 들여다보면 어둡고 더러울 뿐입니다. 내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마치 내 마음의 고뇌를 보여주는 것만 같습니다. 위를 올려다보면 오직 나를 향해 진노하시는 하나님만 보입니다. 어디를 보든지 지옥만 보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나를 그 지옥에 보내신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정의롭고 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러나 복되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생각에 사로잡혀 그렇게 고백하는 불쌍한 영혼을 절대 절망 가운데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죄인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신실한 성령님께서는 이 일을 효과적으로 진행하시고 완성하신다(빌 1:6 참고).성령님께서는 죄인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끌고, 그의 희미한 믿음의 눈을 열어 구세주를 보게 하신다. 고난 가운데 찢끼고 피를 흘리며 죽어 가시면서도 양팔을 그에게 내미시는 구세주를 보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구세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모든 것을 너를 위해 행하노라. 이 십자가도 너를 위한 것이며, 이 모든 고난도, 내가 흘리는 피도 모두 너를 위한 것이다.
또한 내 팔도 너를 향해 내미노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사 45:22). 오직 믿기만 하라. 멸망 가운데 있느냐? 내가 너를 구원할 수 있노라. 죄를 지었느냐? 내가 깨끗하게 할 수 있노라. 가난하냐? 내가 너를 부요하게 할 수 있노라. 깊은 구덩이에 빠졌느냐? 내가 너를 건져 낼 수 있노라. 벌거벗었느냐? 내가 입힐 수 있노라. 너에게 아무런 재물도, 돈도, 선한 것도, 공로도 없어서 나에게로 가져올 것이 없느냐? 나는 그저 너의 모습 그대로를 받을 수 있으며, 또 받을 것이다. 가난하고 헐벗었으며 무가치한 사람아! 바로 이런 사람을 찾으러 내가 왔으며, 이런 사람을 부르러 왔고, 그들을 위해서 죽으러 왔노라."

이보다 더 아름다운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 불쌍한 영혼은 이에 대한 확신에 가득 차 이렇게 외친다. "제가 믿나이다. 저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주님이야말로 제가 원하는 구세주이십니다.
저는이 비열하고도 누추하며 모든 것이 부족한 저를 능히 구원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구원하실 분을 원했습니다. 저는 저를 온전히 값없이, 저에게 아무런 공로가 없어도 은혜로 구원을 주실 분을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제야 제 영혼이 사랑하는 분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이 땅에서 유한한 시간을 살아가는 동안은 물론 영혼토록 주님의 것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복되신 성령님께서는 자신의 특별하고도 직접적이며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말미암아 죄인을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기이한 빛에 들어가도록 인도하시되, 효과적으로 그 일을 감당하신다(벧전 2:9 참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사 43:13).

옥타비우스 윈슬로우의 '중생 사역의 특징' 중에서(110-115p) 

출처: 생명나무 쉼터 , 한아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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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 (아더 핑크, Arthur Pink)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것으로,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 거할 수 있기” 전에 먼저 “그분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분 안에 있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하시는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연합과 관련된 것으로 해제되거나 중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도록 결코 권면을 받지 않습니다. 신자들은 새로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그분 안에 있게 됩니다 (참조 고후 5:10; 엡 2:10).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자주 그분 안에 거하라고 권면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이 특권과 체험은 방해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계속 있고’, ‘살고’, ‘머물다’는 것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유지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거하라’는 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체험적 인식이 중단되지 않도록 늘 경계하라고 부름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분과의 의식적인 교제를 계속적으로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마음이 늘 그분에게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말하자면 가지가 포도나무를 계속 의지하듯이, 가지 안에서 포도나무의 생명과 풍성함이 순환하듯이, 매일 같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활발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주님이 요한복음 6:56에서 사용한 비유적 표현과 병행을 이룹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이 말씀은 그분으로부터 생명과 생명에 필요한 것들을 얻으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도 살아계신 구주를 믿는 믿음을 계속적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주장을 또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분에게 “오는 것”이 그분을 믿는 믿음의 최초 행위를 묘사하듯이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그분 안에 거한다는 것”은 믿음의 계속적인 활동을 묘사합니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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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머리말

어두운 영혼을 밝히 비추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위대한 빛

그동안 저는 십자가에 대한 설교가 그리울 때마다 버릇처럼 로이드 존스가 쓴 십자가 설교를 꺼내어 읽곤 하였다. 십자가에 관한 설교에 있어서 로이드 존스만큼 탁월한 설교자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옥타비우스 윈슬로우가 전한 십자가 설교를 읽으면서 ‘어쩌면 이 책이 지금까지 내가 읽었던 십자가 설교 중에서 가장 탁월한 설교가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단순히 우리의 구원이나 하나님의 사랑의 차원에서만 십자가를 말하지 않고, 우리가 처음 죄를 회개하는 순간에서부터 시작하여 믿음의 싸움을 다 마치는 순간까지 십자가가 우리의 모든 것이며 모든 중심임을 철저하게 파헤쳐 보여 준다는 것이다. 어쩌면 굉장히 방대할 수 있는 내용을 얼마나 간결하게, 그러면서도 얼마나 호소력 있게 전해 주는지, 한 편 한 편이 완전한 복음으로 다가와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니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저는 이 책의 한 편의 설교를 읽을 때마다 애통하는 마음으로 “그렇지, 정말 십자가가 내 모든 것이지. 그런데 왜 나는 십자가 주변을 멀리 맴돌았던 것일까?”라는 탄식을 토해 내었고, 동시에 “오, 주님, 이 십자가 아래 평생 머물 수 있도록 저를 붙들어 주옵소서”라고 간구하게 되었다.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인의 모든 여정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선명하게 보였고, 내가 어디에 서 있고 또 어디로 가야 하는지 길을 확실히 정하게 되었다.

이 책의 첫 장을 읽어 내려가면서 저는 “바로 이 책이다!”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책의 한 줄 한 줄이 정말 생생하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고 있었으며, 단순히 우리의 머리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 전체를 일깨우는 능력으로 십자가를 전하고 있었고, 영혼을 사랑하는 목회자의 깊은 심정으로 우리 영혼의 어두운 골목 구석구석까지 헤치고 들어와 죄의 잔재를 청소해 주고 복음의 은혜로 아름답게 해 주는 역사를 마음에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상징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십자가의 교리를 나타내며 하나님의 아들이 이루신 속죄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루신 그 속죄로 말미암아, 전에 하나님과 원수 되었고 하나님의 존재와 통치와 진리에 굴복하지 않았던 반역자인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여호와 하나님과 하나 된 상태에 있게 되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2:13)

그러나 영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표현은 성도가 십자가에서 뿜어져 나오는 도덕적인 능력을 친밀하게 체험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와 깊이 교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이 땅에서 우리가 누리는 모든 은혜의 복들이 총집결해 있고, 또 장차 영원한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게 될 영광의 첫 열매가 피어난 바로 그 장소에 성도가 믿는 마음과 겸손한 심정으로 서 있는 것을 의미한다.

십자가를 가까이하는 것!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규범이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소수의 그리스도인만이 유지하고 있는 예외적인 상태가 되어 버렸다. 십자가 곁에 서 있는 것!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외 없이 누리는 특권이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소수의 그리스도인만이 그러한 특권을 누린다. 일종의 예외적인 특권이 되어 버린 셈이다.

세상은 다양한 면에서 다양한 형태와 능력으로 그리스도인의 영혼을 십자가로부터 멀리 떼어 놓는다. 그러하기에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마음이 영적으로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어지간해서는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삶을 바라보다가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동떨어진 궤도를 따라 돌고 있음을 뒤늦게 발견한다. 처음에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자신이 한없이 즐거워하던 의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따뜻하고도 온화한 영향력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서 냉랭하고 황량한 삶을 살고 있음을 뒤늦게 발견한다.

성도의 영혼이 십자가에서 멀어지면 거기에는 기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안전보장도 없다. 우리의 심령과 삶을 거룩하게 만드는 성령의 능력이 존재하지도 않고 감지되지 않는 곳을 걷는다는 것은, 마치 지옥을 걷는 것과 같다. 이 세상의 즐거움을 좇고 육신의 쾌락을 만족시키며 살아가면, 예수님을 알 수도 없고 그의 십자가를 깨달을 수도 없으며 그의 사랑을 느낄 수도 없다.

세상에 푹 빠져 살면서도 동시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영적으로 가까이 간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여러분은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 십자가는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못 박히고 세상이 우리에 대하여 못 박히는 곳이며, 죄가 사망한 곳이기 때문이다.

경외심을 불러 일으키는 십자가의 그늘 아래 서게 되면, 거룩한 십자가 아래 서게 되면, 세상의 영광은 백지장처럼 창백해지고 죄의 능력은 마비된다. 또한 교활하기 짝이 없던 사탄도 십자가의 밝은 영광 때문에 움찔하게 되고, 십자가의 죽음과 상처 아래서 괴로워하며 자신의 먹이를 포기하고, 패배감과 절망감 속에서 자신의 은밀한 처소로 조용히 물러가게 된다.

- pp 7-21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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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도의 내용에 대한 무지와 오해

우리가 자유롭게 기도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또 하나의 문제점은, 우리에게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혜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드리는 간구의 내용을 보면 이 점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바울은 자신의 육체에 있는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했다(고후 12:7,8 참고). 그러나 결국 이 간구에서 바울이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과연 누가 이방인의 사도에게 이런 약점이 있으리라고 생각했겠는가?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사랑하는 종에게 진정으로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다. 또 하나님의 영광으로 초대되는 특별한 계시를 경험한 그를 계속 먼지와 같이 낮추기 위해서는 그에게 언약 관계 속에서 요구되는 연단이 필요하다는 것도 이미 알고 계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이 자신의 육체에 있는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세 번이나 간구할 때에도 잠시 침묵하셨다. 바울이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이 연단의 고통이라는 특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처럼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신 사도도 하나님이 거절하실 만한 것들을 간구할 수 있다는 점을 보게 된다.

하나님과의 특별한 친밀감을 경험한 다음에든지 아니면 우리 영혼을 향한 그분의 자비가 우리에게 분명하게 나타난 다음에 든지, 우리는 종종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낮추는 시험이 오리라고 예상한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린 다음에는 자기 만족에 빠지기 쉬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부드러운 손길이 우리가 자기 만족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 주셔야만 한다. 바울도 그러했다면 우리는 어떻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는 바를 주시지 않을지라도 그분은 결국 그것에 상응하는 것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확신한다.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시고는 대신 그에게 그에 상응하는 것을 주셨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거절하신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셨다. 바로 모든 것을 지원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에게 주신 것이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9).

혼자만 경험하는 무겁고도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없애 달라고 기도해 본 적이 있는가? 혹 지금도 계속 그렇게 기도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왜일까? 그 간구가 별로 지혜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그 십자가를 제거한다면, 그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자비의 통로도 닫힐 것이고, 여러분은 그에 대해 평생토록 후회하게 될 것이다.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통하여 여러분의 영혼에 주어질 보기 얼마나 비밀스럽고도 엄청난 것인지 모른다.

여러분이 건강을 달라고 자주 간구하였는데도 그 요청이 거절되었는가? 바로 지혜가 그것을 거절하신 것이다. 또 사랑이 그것을 거절하신 것이다.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 부드럽고도 변치 않는 그 사랑이 여러분의 간구를 거절하신 것이다. 지혜롭고도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건강을 얻는 것이 여러분에게 진정으로 선한 일이 아니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도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아셨던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구하는 것이 여러분을 더욱 경건하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여러분에게 주시고도 천 배나 더 주시고 싶어할 것이다. 그토록 예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고 여러분을 향하여 민감한 마음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정말 모르는가? 만약 무한한 지혜로 여러분의 영혼을 다루시고 그 모든 것을 인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과연 주님께서 여러분의 그 간구와 열망과 한숨과 눈물과 애타게 간청하는 모습을 외면하시겠는가? 오! 결코 그럴 수 없다.

대신 주님은 여러분에게 거절하신 것에 상응하는 것을 주신다. 그분께서 자신을 주시는 것이다. 과연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그분의 은혜가 여러분을 격려한다. 그분의 팔이 여러분을 지지하고, 그분의 사랑이 여러분을 달래며, 그분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위로하신다. 비록 여러분의 '고독의 방(chamber of solitude)'이 건강하고 활기차며 기쁨이 넘치는 곳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비밀스러운 곳에서 여러분은 언약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영혼 위에 부어 주시는 은혜를 맛볼 것이며, 또 여러분을 향하여 최고의 사랑을 보이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만약 그것이 여러분에게 선하다면, 왜 주님이 여러분의 질병을 단번에 치료하시지 않겠는가? 주님께 그럴 능력이 없거나 그럴 의지가 없으시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영을 구하라. 여러분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의지와 일치하는 의지를 달라고 기도하라. 남들이 알지 못하는 순종, 곧 자녀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배워야 한다. 그리하여 건강을 구하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수단으로 구해야 한다. 그럴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치유의 능력을 사용하시며,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주실 것이다.

잊지 말라. 주님은 무엇이 자신을 가장 영광스럽게 하는지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신다. 여러분은 몸이 건강해야 하나님을 더 영화롭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고독의 방과 고통의 침대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다. 복되신 성령님께서는 인내와 단념, 겸손한 순종과 아이와 같은 묵종 등의 수단을 통하여, 지금까지 그분이 여러분의 영혼에 베푸신 다른 어떤 활동적인 은혜보다 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도 있다.

때때로 신자는 잘못된 간구를 하기도 한다. 새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자신의 두 아들에 대해 주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다른 하나는 주님의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한 것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마 20:20,21. 참고). 이 간구 속에 자아가 드러난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비록 이렇게 행한 어머니의 사랑 자체는 아름답고 감동적일 수 있겠지만, 이 일은 자녀에 대한 사랑에 눈이 먼 나머지 부모가 매우 잘못된 것을 하나님께 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런 부모는 세상의 인정과 명예와 영향력과 부가 자신의 자녀에게 있기를 구하겠지만, 경건한 부모들은 결코 그런 것을 구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잘못된 간구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무한한 지혜와 사랑 가운데 이런 간구를 들어주시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요청하는 이런 간구야말로 마땅히 거절해야 할 것으로 여기셨다. 이 어머니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상적인 영광의 관점으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들이 이 영광을 나누는 것이 그녀가 가진 최고의 야망이 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이 간구를 그 자리에서 부드럽게 거절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어머니들이여, 여러분의 자녀를 위하여 영적인 복을 구하라. 그러면 그 외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주님께서 공급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에 의지하여 구하되, 회심하고 성화되며 절제하는 은혜를 끊임없이 간구하라. 그러면 여러분은 터무니없이 많은 것을 구하지도 않을 것이고, 너무 자주 지나치게 열정적으로 졸라대는 식으로 간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잘못된 간구의 또 다른 예가 있다. 욥이 하나님께 자신이 죽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구한 것은 잘못된 간구이다.

"나의 간구를 누가 들어줄 것이며 나의 소원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랴.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하나님이 그의 손을 들어 나를 끊어 버리실 것이라"(욥 6:8,9)

이것은 어리석고 죄악된 간구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놀라운 자비와 지혜로 그의 간구를 거절하셨다.

이처럼 참으로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한다(롬 8:26 참고).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아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옥타비우스 윈슬로우의 '기도의 주재자이신 성령님' 중에서(297-301p)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눈물보다 귀한 사랑 

              최송연   

당신을 사랑하는
그 마음 하나로
오늘까지 버틸 수 있었노라
당당히 말하지 말게 하소서

당신께 받은 사랑 너무 커
모진 세월마저도
진정 행복했었노라
눈물로 고백할 수 있게 하소서

당신 오시는 날
내어 드릴 수 있는 것은, 오직,
눈물보다 귀한 당신의 사랑,
그 선홍빛 사랑 하나뿐이오니...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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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생에 관한 잘못된 견해

1) 세례 중생설의 오류

가장 먼저 눈여겨보아야 할 사실은, 중생이 외적 예식이나 세례를 통해 한 개인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활동이 아니라는 점이다. 복음의 빛이 이토록 밝게 비치는 이 시대에, 성경적인 근거도 없고 영혼의 영적 유익에도 치명적인 해를 끼치는 주장을 옹호하면서도 오히려 성령님께서 그렇게 가르쳐 주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정말 믿기 힘든 현실이다. 그런데도 복음 진리를 수호한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교회의 강당과 언론에서 이런 교리를 얼마나 열심히 전파하고 있는가! 그래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 교리를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진리로 받아들이고, 파멸로 이끄는 이런 착각 속에서 살다가 죽어 가고 있다.

오, 기독교의 모든 목사들이 구원의 길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기 전에 먼저 성령님께 그 진리에 대해 가르쳐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요한복음 3장을 연구한다면, 단지 세례만 받아도 중생하게 된다는 세례중생설을 주장하는 이단은 금세 교회의 강단에서 자취를 감추고 이 땅에서 사라지게 되지 않겠는가! 이런 사악하고도 치명적인 오류 위에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밝히 임하도록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성례식에서 물을 어떤 형태로 사용하든지, 그 물 자체는 인간에게 이 엄청난 변화를 일으킬 만한 효험이 전혀 없다. 물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엡 2:1) 인간의 영혼에 그 어떤 영적 생명도 줄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새 출생에 대해 기록하면서 매우 강하고 분명한 표현들을 사용한다.

"거듭나다", "성령으로 거듭나다",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벧전 3:18),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

영적 생각이 깊은 영혼이라면, 신성한 예식에서 물을 뿌리는 것이 위에 언급된 구절이 의미하는 엄청난 변화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견해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성령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기 위하여 세례라는 예식을 수단으로 사용하신다고 하는 것도 역시 비성경적이고 위험한 생각이다. 세례는 우리가 은혜의 수단으로 여기며 의지할 만한 것이 아니다. 만약 세례 예식을 행하기 전에 중생되지 않았다면, 단지 세례라는 외적 예식을 통하여 그 사람에게 영적 생명이 주어질 수는 없다. 그런 말씀은 진리의 성경,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세례식과 성찬식이라는 이 두 예식은, 전능하신 성령님께서 일으키시는 효과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그 예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이미 심어진 은혜가 더 자라날 수 있도록 영적 자양분과 격려를 제공하는 공급원 정도로만 여겨져야 한다. 특히 세례식은 이미 존재하는 은혜에 대한 증거로 여겨지는 것이 더 옳고, 성찬식은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증가시키고자 제정하신 예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행해지는 이 두 예식을 영적 생명의 원인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 비성경적이고 바람직하지 않다면, 이 두 가지 예식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현재 필연적으로 실제로 중생을 경험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런 세례중생설이 맞다면, 공적으로 고백만 했을 뿐 실제로는 믿지 않는 사람의 영원한 처지를 생각해 볼 때, 그가 죽는 날이 결국 그가 불멸하는 영광스러운 세상에서 태어나는 날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토록 끔찍한 오류가 우리가 방금 말한 그들의 주장에서 정당하게 추론하여 얻은 결론이 아니고 무엇인가? 세례중생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이런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이 전제하고 있는 사실에서 추론할 수 있는 정당하고도 논리적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이 그 예식을 통해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받게 된다면, 결국 현재 수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있지 않아야 할 절망의 땅에 갇혀 있는 셈이다. 여러 기록들이 증언하듯이, 세례를 받았더라도 하나님께 공개적으로 대항하는 삶을 살다가 죽은 사람들은 죽을 때에 그들의 양심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공포로 인해 떨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반대로, 만약 세례가 구원을 얻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면, 세례를 받지 못했는데도 영광 가운데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세례라는 외적인 예식 말고 다른 길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를 증명하는 많은 사례 중에서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성경 그 어느 곳에도 그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그는 이방인이었으므로 어린 시절에도 세례를 받았을 리가 없고, 죽던 순간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우리의 눈앞에 놀라운 장면이 펼쳐진다. 한 이방인 범죄자가 가장 비참한 순간에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생명으로 옮겨진 것이다. 그는 세례에 사용되는 물 대야에서 씻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매달려 있던 그 십자가에서 왕국과 왕관을 부여받았다. 그렇다면 물세례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강도가 겪은 놀라운 회심과 승리의 죽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이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유아기에 세례를 받았든 장성에서 받았든, 여러분이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라면 그 세례는 여러분에게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다. 세례를 받은 사람도 불신자일 수 있다. 또는 재료를 받지 않은 사람도 구원받았을 수 있다. 다음의 말씀은 세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갈 6:15).

여러분은 세례를 통해서 그 어떤 생명의 원리도 주입받지 않는다. 세례는 여러분에게 구원의 은혜를 줄 수 없다. 여러분은 반드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나야 한다.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이 씻겨야 한다. 이 땅에서 은혜의 왕국에 들어가거나 하늘에서 영광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어야 한다.


옥타비우스의 '성령님의 구원사역' 중에서(54-57p)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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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심어 주시는 열망]

이 책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넘어서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나님의 임재를 더 많이 맛보고 경험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앞서 신약 성경을 인용한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다. 신약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더 많이 경험하도록 기록되었다.

서신서를 예로 들어 보자. 서신의 수신자들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이지만, 저자들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갖기 원하는 것이 아니라(물론 그 서신서들에는 그와 같은 지식이 가득 차고 넘치지만) 하나님의 더 깊은 임재를 경험하기 원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빌 1:9).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골 4:12).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살전 5:2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4).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딛 1:1).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몬 6절).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 5:10).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요이 8절).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유 20절).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


당신은 하나님의 더 큰 임재에 목마른가? 그렇다면 그 갈망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R.T. 켄달의 '하나님을 열망하다'에서..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방언의 은사에 마음 열기

이것은 오늘날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더욱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오늘날 교회마다 말씀과 성령 사이에 조용한 이혼이 진행되고 있다. 이혼을 하면 그 부모 슬하 자녀 가운데 어떤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 살고, 어떤 아이들은 아빠와 산다. 이 이혼에서 말씀 사역의 편에 서는 이들은 성경 강해와 복음, 건전한 신학(이신칭의와 하나님의 주권 등)을 마땅히 강조한다. 그들은 “우리는 견고한 교리가 필요하다”고 말하곤 한다. 성령 사역의 편에 서는 이들은 사도행전과 이적과 기사, 기적, 살아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사들을 강조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능력이다”라고 말하곤 한다.

나는 두 가지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둘이 연합할 때 폭발적인 결과를 거둘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 말씀 사역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를 강조한다. 성령 사역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고린도전서 12장 8-10절에 나오는 성령의 은사를 강조한다. 우리에게는 그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

말씀 편에 선 사람들이 흔히 부딪치는 문제가 있다. 바로 방언으로 말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방언의 은사가 아니었더라면 은사 중지론자들의 가르침도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쓸 때가 있다. 은사 중지론은 사도들의 시대 이후로 기적이 ‘중지되었다’고 주장하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런 말씀이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고집스럽게도 그 주장을 고수하며 그들의 편견을 신조로 바꾸어서 하나님이 오래전에 직접 은사 중지를 결정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아무도 지혜나, 예언, 기적의 은사는 부인하지 않는다. 바울이 “방언”의 은사를 목록에 집어넣으면서 모두가 불편해진 것이다.

말씀 편에 선 사람들은 “그러나 바울은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셨는데, 더 큰 은사란 사랑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재빨리 “방언은 은사의 목록 중에 가장 저급한 것으로,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라고 덧붙이곤 한다.

그렇다 할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고 싶다면 바닥부터 시작하라!”고 말하고 싶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방언의 은사보다 더 큰 오명을 안겨 주는 문제는 없다. 만약 사람들에게서 비난받고 오명을 얻더라도 그래서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는가?

슬프지만 어떤 사람들은 방언의 은사를 끝까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결국 끝까지 저항할 것이다. 말씀 편에 선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방언을 하지 않는 것을 합리화시켜 줄 수 있는 성경 주석이나 교리를 찾아서 그 뒤에 숨으려 한다. 여기 해결점이 있다. ☆방언의 은사는 당신의 교만한 마음에 유일하게 도전하는 성령의 은사다. 여기서 진정한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당신도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으면 한다.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물론 아니다; 고전 12:30)라는 말씀에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먼저 방언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자신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고 말하며 너무 서둘러 도망가지 말고, 먼저 그분 앞에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기 바란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는 데에 가장 큰 방해가 되었을 수도 있다. 브루스 메츠거 박사 밑에서 공부했던 한 친구가 그에게 이렇게 질문했다고 한다(메츠거는 아마도 21세기가 낳은 가장 탁월한 헬라어 학자일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 8장 26-27절에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한다’고 쓴 것은 방언으로 기도한다는 뜻이었습니까?“ 그러자 메츠거는 ”물론이지, 바울이 그런 뜻으로 한 말이 맞다“라고 했다. 메츠거는 장로교인이고 아마도 은사 중지론자였을 테지만, 이 사실을 내 친구에게 인정할 정도로 학자적 양심과 객관성을 갖춘 사람이었다.

R.T. 켄달의 '하나님을 열망하다'에서..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성경적 두 요소(수동적.능동적)의 결합]


그리스도와 성령 없이는 승리가 불가능함은 참말이다. 그분들이 우리 마음 안에 거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전 성경은 우리 자신이 우리 편에서 행하기를 촉구(促求)한다. 그렇다고 성령의 일이 우리의 활동을 불필요하게 하지 않는다.

중생에서 신자는 수동적일 뿐이다. 그가 하는 바가 아무것도 없다. 그는 다만 태어나는 것뿐이요, 출생에 있어 협력하지 않는다. 아기와 꼭 같이 아무것도 보태는 것이 없다. 그러나 성화에서는 추가된 일면이 있다. 사람은 수동적이며 동시에 능동적이다. 확실히 사람의 생명 내에서 잠재의식의 영역, 그 마음에서 주권적으로 역사(役事)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므로 사람은 이 일에서 절대적으로 수동적이다. 사람이 성령이나 그리스도를 주관하지 못하며, 그들(성령과 그리스도)의 생명은 사람의 활동과는 상관없이 자신에게서 흘러나온다. 사람은 성화의 측면에서는 완전히 수동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은 매우 능동적이다. 신령한 생명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그 생명을 이뤄 나간다. 우리가 시계를 감아서 책상 위에 놓으면 제대로 똑딱거리며 가는 것같이 취급되지 않는다. 사람은 시계와 달리 의지와 감정, 지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사람을 성화시킬 때는 이런 기능들을 인정하여 사용하며 그들로 활동케 하신다. 따라서 성화는 수동적인 동시에 능동적이다. 그것은 은혜임과 동시에 의무이다. 성령께서 수동적으로 자기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주권적으로 내리시는 은혜요, 일단 성령을 받았으면 그 받은 자들이 행동에 옮겨야 하는 의무이다.

확실히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행치 않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행할 힘과 능력을 은혜로 주시는 한에서만 행한다. 이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반만 역사하여 우리를 발동만 시키고 나머지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100퍼센트 일하시고, 우리는 우리의 하는 모든 일에 100퍼센트 일한다 하겠다. 우리가 일할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시험을 물리치는 일이나, 적극적 선을 행하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나, 우리가 하는 윤리적인 행위 하나하나마다 성령께서 그것을 하도록 능하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것뿐이다. 또한 이것이 참이지만 우리가 최대한으로 노력하는 것은 우리의 엄숙한 의무이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 있거나" "그로 모두 다 하시게 하거나" "노력 없는 승리"를 구하여서는 안 된다. 성령은 가르친다. "열심히 하는 것 아니면 선하지 않다."고.

승리가 오직 성령과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얻어질지라도 성경은 우리를 항상 격려하여 죄와 마귀로 더불어 싸우라고 한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 6:12)",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요(엡 6:11,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1,2),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이러므로 모든 무거운 것과...벗어버리고...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히 12:1)”,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신자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하도록(마 5:48) 힘쓰라고 권고하는 이상과 같은 성경을 인용하자면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이 모든 성경 구절들은 신자가 행해야만 되고 무엇을 해야만 될 것을 지시한다. 다른 말로 하면 성화에는 매우 능동적인 면이 있다.

아마 빌립보 2:12,13과 같이 능동적이며 수동적인 관계를 더 잘 표현하는 구절은 없으리라. 여기서 바울은 가만히 앉아 있으라, 토기장이의 손에 있는 진흙같이 수동적이어라, 아무것도 하지 말라, 노력하지 말라, 단지 성령께서 모두 하시게 하라고 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강조하여 명확히 말한다. “일하라”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는 성화에서 능동적인 면, 사람의 의무와 책임에 대하여 말함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거룩히 되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노력을 발휘하라고 권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맡기라, 그가 다 하시리라, 우리는 힘쓰지 않으리라 하지 않고 바울은 그들이 그것을 성취하라고 명한다.

그러나 수동적인 면이 직후에 따른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그렇다 이루라! 네 가진 모든 것, 네 안에 있는 모든 것으로 이루라. 그것이 네 의무다. 그러나 잊지 말라!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심을.

거기에 성경적인 두 요소의 결합이 있고 성공의 비결이 있다. 만일 타 부분이 없이 한 부분만 시도되면 실패가 올 것이다. 성령 없이 힘쓰면 우리는 좌절하리라. 반면 모두 다 성령께 맡기고 힘쓰지 않으면 또한 우리는 실패로 마치리라. 그러나 성령에 힘쓰는 것을 합하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리라. 거룩한 생활의 비결은 이 결합에 있다. 이로써 신자는 성공을 얻을 수 있다.

에드윈 H. 파머의 ‘감동적인 성경적 성령론’에서(162-166p)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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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중생]

1. 그 필요성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보려면 성령의 중생의 역사를 체험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못한다. 그는 완전히 타락했고, 그의 지능과 의지와 정서는 철저히 부패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지능으로 말하면, 하나님과 그 나라를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는 죄가 그의 이해력을 어둡게 하여 영적으로 완전한 소경이 되게 했기 때문이다. 또 그의 의지로 말하면 그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다. 이는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요 8:34)이기 때문이다. 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는 말씀대로이기 때문이다. 그의 정서로 말하면 그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으니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롬 8:7)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듭나지 않은 자는 전혀 하나님께 돌아올 수도 없으니 선한 일을 할 수도 없다. ”구스 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뇨?“(렘 13:23) 물론 할 수 없다(렘 13:23, 롬 3:10-12). 그것은 물리적으로나 자연 법칙상으로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악에 익숙한“ 그도 선을 행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인(육에 속한 자)이 영적으로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되려면 반드시 그의 생명 안에 성령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다만 성령만이 사람의 영혼을 감동시킬 수 있고 영적으로 살릴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들은 인간에게 있어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가 매우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이것이 새 피조물을 낳을 수 있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영적으로 죽은 자를 살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2. 그 방법

이제 방향을 돌려 성령께서 어떻게 사람을 살리는지, 어떻게 거듭나게 하는지 살피기로 하자. 첫째로 우리가 강조해야 할 것은 성경은 성령의 중생시키는 방법에 관해서 조금도 우리에게 말해 주지 않고 있는 사실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드러내지 않기로 작정한 일이다. 바울이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 3:3)고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신비하게 신도들과 연합되는가 하는 것은 비밀이다. 이 연합은 그 형적을 찾아낼 수도 분석할 수도 없다. 사람들은 그것이 거기 있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 어떻게 발생했는지는 말하지 못한다. 그건 마치 원자의 에너지와 같아서 그의 파괴력에 관해선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원자의 힘의 궁극의 기원은 인간으로선 설명할 수 없고, 다만 그 결과를 관찰할 수 있을 뿐이다....

성령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의 중생의 역사에 있어서도 그 결과는 분명하고 놀라우며 뚜렷하게 볼 수 있으나 인간의 영혼 안에서의 그의 작용을 정의하기란 인간의 능력으로는 당할 수 없다. 물론 그 이유의 하나는 인간의 영혼이나 성령은 다 영적인 것이고 물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신의 눈으로는 그것들을 분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의 방법을 설명하는 데 다소 도움이 될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을 그의 중생의 역사에 관하여 얘기할 수 있다.

(1) 중생은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식물의 성장처럼 몇 달이나 몇 해에 거쳐 서서히 점차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거듭난 사람이거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거나 그 어느 한쪽이다. 성경적 비유는 흔히 그리스도인은 찰나적으로 새 사람이 된다는 말로써 중생을 기술하고 있다. 예를 들면, 창조는 한순간에 일어난다. 어떤 물건이 존재하든가 아니면 존재치 않든가 이다. 거기 점진적 중간 단계라는 것은 없다. 한 죽은 사람이 깜짝할 사이에 부활 되며, 그는 죽은 사람이든가 아니면 산 사람인 것이다. 그 중간 단계란 없다. 한 아기는 순간적으로 잉태된다. 생명이 있든가 아니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생도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2) 성령은 사람의 영혼에 와서 무엇인가를 행하신다

그는 다만 그 마음에 기독교의 진리를 제공하기만 하고 그의 선택 여부를 사람에게 내맡겨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만 온갖 논리와 추론으로써 설복하려 드는 한낱 외적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깊은 속, 그의 영혼, 심령 또는 마음속(다 같은 뜻임)으로 침투한다. 중생이란 단지 행위의 변화, 생활의 개혁, 사상이나 언어, 행동의 혁신만이 아니다. 중생 시 성령은 이 모든 행위의 근원 바로 그것인 사람의 심령에 작용한다. 그는 문제의 심장 곧 모든 인간 행동의 중심이고 최저 동기인 사람의 심장, 내심(內心)에 작용한다....

(3) 성령 사역은 무엇을 더하거나 새 기능 부여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령이 사람의 마음에 어느 새로운 것을 부가하거나 생각하고 믿는 더 많은 영이나 새 기능을 부여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의 성향을, 죄에 대한 사랑에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변화시킨다. 나사로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았을 때 그는 새로운 눈이나 귀나 손이 더 생긴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것들이 이미 있었다. 오직 그는 그것들을 사용할 수 있는 생명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를 다시 소생시킨 것이다.

비슷한 모양으로 하나님은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의 영적 생명에 새로운 지성이나 의지나 감정을 주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그의 타락에 상관없이 이러한 기능들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그는 영혼 없는 동물이 된 것이 아니다. 오직 그릇된 것은 이 기능들이 그릇된 목표 – 하나님을 위하는 대신 사단을 위하여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하시는 바는 사람에게 지성이나 의지와 감정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대신 그를 위하여 쓰이도록 작용하는 것이다. 그는 이것들의 용도(用途)의 방향을 변경시키신다.

(4) 사람의 중생 시에 성령께서 절대적으로 주권적이시다

성령은 꼭 그가 원하시는 바를 행하신다. 인간은 성령의 뜻을 좌절시키거나 중생을 어떤 방법으로 조정할 수 없다. 중생이 자기 손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성령은 바람과 같아서 ”...임의로 분다“(요 3:8). 아무도 바람을 명하지 못한다. 아무도 서인도 제도의 태풍을 플로리다 주로 부는 대신 바다로 불도록 명할 수 없으며 또 그 속도를 조금도 늦출 수 없다. 예수의 말씀대로 바람은 임의로 분다. 그와 같이 성령도 임의로 중생시키신다....

만일 중생이 신앙의 선행(先行)치 않고 그 뒤에 오며 그에 의존한다면 구원은 로마서 9:7 말씀과는 정반대로 달음박질하는 자나 원하는 자로 말미암는다....

성경에 의하면 신앙이 중생에 선행하고 그 원인이 된다. 사람이 영적으로 선한 일을 단 한 가지라도 행하기 전에 중생이 필요하다. 중생에서 사람은 100퍼센트 수동적이고 성령은 100퍼센트 능동적이다.

이와 같이 성령이 중생시키는 방법에 관하여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이 매우 적지만 이만큼은 우리가 안다. 중생은 눈 깜짝할 사이에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바로 사람의 영혼(심령)에 어떤 일을 행하시고 이것은 또한 마음이나 행위 간에 그의 모든 행동을 변화시키신다. 그러나 성령은 사람에게 어느새 실체나 새 기능을 주는 것이 아니고 그가 이미 가진 영혼을 소성시킨다. 그는 또한 사람이 전적으로 수동적인 데 반하여 주권적으로, 그리고 불가항력적으로 행하신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안다 할지라도 그 전 과정은 여전히 우리에게 매우 신비일 따름이다. 우리는 바람을 못 보듯이 성령을 볼 수 없다.

3. 그 결과

우리는 바람을 볼 수 없으나 그의 결과는 볼 수 있다. 폭풍이 나무를 뿌리째 뽑고 집을 떠밀어 버릴 때 우리는 바람이 발휘하는 능력을 본다. 마찬가지로 중생에 있어서도, 우리는 성령의 작용하는 방법을 모르지만 예수께서 예시(例示)한 바, 그 결과는 볼 수 있다.

그 결과는 옛 죄는 벗겨지고 새 덕행이 대치될 것이다. 이전에는 죄를 이기지 못하며 하나님을 미워하던 것이 이제는 온통 변했으니 이는 성령께서 새로운 성향과 새 욕망을 심은 때문이다. 쓰디쓴 샘이 달디단 샘으로 변하여 그 흘러나오는 물이 이제는 달다. 가시밭이 포도원으로 변하여 찔레 대신 포도가 자라며(눅 6:43-45), 돌 같은 마음이 생명 있는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된다. 한 인간이 출생되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어떤 새것이 창조된 것이다. 옛사람은 원칙상 벗겨졌고 새 사람이 입혀졌다. 예수께서 이를 요약하여, 거듭난 자는 하나님 나라를 본다고 말씀하셨다. 거듭난 자는 이젠 어두움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옮겨졌다.

성령의 중생의 역사는 잃어버린 자에 대하여 관심 있는 모든 사람에게 놀라운 위안이 아닐 수 없다. 왜냐면 성령이 아니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한때 역경에 처했을 때 고국에 편지하기를 ”우리는 이곳에 아주 개척하기 어려운 밭을 가지고 있습니다....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역사하시고 또 앞으로도 하실 것을 믿지 않는다면 나는 절망하여 포기할 뻔했습니다.“라고 썼다. 표범이 그 반점(斑點)을, 이디오피아 인이 그 피부를 바꾸지 못하나 하나님이 그의 영을 보내시면 그 백성들은 저항할 수 없이 회개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함에 활발치 못한 이유의 하나는 그들이 여러 번 아무 결과를 보지 못하는 때문이다. 그들이 반드시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아니나 흔히 그들은 낙망하게 된다. 표면상의 결과가 없으면 그들은 그것이 가치가 있는지 의아하게 된다. 우리가 이것을 극복하려면 우리는 성령의 중생하는 일을 위하여 더욱더 기도해야 한다. 그가 없이는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에 앞서 말씀하셨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7,8) 성령의 책망하는 역사를 인하여 그를 찬양하라! 그 책망은 사람을 몹시 불안하게 하고 그의 양심은 그를 번민케 하여 안절부절못하게 한다. 모든 것이 자기를 적대하는 것 같고 그의 죄가 그 앞에 크게 떠오른다. 양심이 그를 괴롭히어 그는 부르짖게 된다. 그는 성령이 오순절에 임했던 삼천 명과 같이 마음에 찔리어 그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 한 것같이 부르짖게 된다. 그리하여 이 책망을 통하여 그는 죄의 대속자인 그리스도에게 이끌리게 된다. 그는 회개하고 믿고 그리하여 구원을 받게 된다. 책망의 고통을 통하여 그는 기쁨을 얻고 심령의 괴로움을 통하여 평강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아름다움은 인간이 성령의 역사를 제지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성령께서 책망하실 때 그가 아무리 잔인하였건, 아무리 괴팍스런 죄인이었건 그의 과거를 불문하고 성령 앞에서 그가 녹아서 눈물 흘리며 그의 마음이 변하여 그리스도를 그의 구주로 받아들이게 된다. 죄 가운데 죽은 극히 냉담한 죄인도 성령에 의한 출생을 지극히 작은 규모로도 거역할 수 없다. 그는 믿고야 만다. 하나님은 찬양을 받으실지로다!

만일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이다. 우리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을 누리려면 또한 영혼들을 그리스도에게 이끄는 데 성공하기 위하여는 성령께서 영적으로 죽은 자들 안에 오셔야 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성령의 중생시키는 감화력(感化力)을 위하여 기도하라.



에드윈 H. 파머의 ‘감동적인 성경적 성령론’에서(129-145p)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앞 장에서 우리는 성령께서 중생을 통하여 죽은 사람 곧 싸움터에 한 주일 동안이나 쓰러져 누워 있는 병사의 시체처럼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부활시킴을 보았다. 성령께서는 죽은 사람들이 죽은 상태로서는 도저히 행할 수 없던 선행을 할 수 있도록 영적 생명을 부여한다. 이것은 커다란 기적이다.

이 영적 생명과 그전에 있은 죽음 간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생명이 흔히 병약(病弱)하다는 것은 너무도 부인할 수 없는 뻔한 사실이다. 그리스도인도 여전히 죄짓는다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가 너무 죄를 짓기 때문에 새 생명이 그를 완전히 떠나고 그가 다시 죽어 버린 듯 보일 지경이다. 그러나 그가 죽은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그의 연약함은 죽음에는 이르지 않으며 또 불치(不治)도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점차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그가 정말로 병들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중생한 자도 범죄한다는 것은, 성경으로 또 자신의 경험으로 분명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마다 너무도 쓰리게 자신의 생활에서 죄악적인 실패를 맛보았을 것이다. 때로는 자기 생애 가운데 죄가 득세해 보이기 때문에 낙담하고 회개한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라고 부르짖을지도 모른다. 그는 겸손하게 그리스도께서 구원받은 자에게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가르쳐 주신 기도의 필요를 느낀다. 요한은 만일 누구든지 거듭난 사람을 포함하여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진리가 그 안에 있지 않으며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라(요일 1:8,10) 말하여 이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좀 더 거룩하고 좀 더 성별되면 그만큼 더 자기 죄에 대한 인식이 크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있을수록 죄에 대한 그의 감각은 더욱 민감하다. 그의 현저한 죄가 그를 슬프게 할 뿐 아니라 전에는 외견상 대수롭지 않게 여겨져서 마음을 괴롭히지 않던 죄들이 이제는 그의 마음에 크게 떠오르게 된다.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부르짖은 것은 그가 그토록 고수준(高水準)의 성화의 단계에 도달해서 죄에 대하여 민감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사야가 거룩한 여호와의 환상을 보고, 스랍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하고 창화(唱和)할 그때 그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사 6:3,5)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누구든지, 아니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성도도, 이 세상에서는 완전히 거룩한 사람은 없다. 중생한 자도 여전히 범죄한다. 그는 생명을 가졌으나 병든 생명이다.

이제 이 사실은 우리에게 “우리는 이 죄에 어떻게 승리하느냐” 하는 문제를 제시한다. 분노, 성냄, 증오, 시기, 음욕 그리고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다른 악한 것들을 어떻게 정복할 것인가?


1. 성화에 대한 비성경적 해결책

영원하신 하나님의 성령이 성화의 근원(根源)이시다. 이것을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밝히기 위하여는 먼저 죄에 대한 이 문제에 항용 주어지는 두 가지 해답을 고찰함이 필요하다. 그 하나는 총력을 다해 죄와 싸우라는 요지요, 다른 하나는 정반대로 죄와 싸울 것 없다는 것인데 이 두 해결책은 다 그릇된 것이다.

(1) 자력(自力)에 의하여

첫째 번 해결책은 우리로 스스로의 힘에 의지하도록 명한다. 성화를 전적으로 우리에게 맡긴다. 우리의 죄악된 욕망을 이성으로 제어하라고 한다. 덕행의 유익과 복음의 약속을 가리키며 하나님께 대한 우리 의무의 합리함을 보여 준다. 죄가 우리 자신의 몸과 영혼에 현세와 내세에서 미치는 결과를 들며 선함과 거룩함이 무엇임을 알았으니 이제 네 생명을 주장하라고 한다. 모든 악성을 정복하라. 내 안에 있는 모든 규율, 결의, 자제력들을 발휘하라. 벤자민 프랭클린 같은 사람의 모범을 좇으라. 그는 자서전에 기록하기를, 자기의 악습 목록을 작성함으로써 자신을 개선하였다고 한다. 만일 우리가 무엇이 옳은가를 알고 우리의 이성과 결의를 사용하면 우리는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죄를 정복할 수 있다 한다.

(2) 타력에 의하여

둘째 번 해결책은 첫째 번과는 정반대이나 꼭 같이 그릇되다. 첫째 것이 우리가 자력으로 죄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이것이 그릇됐다면, 이번엔 우리가 조금도 죄와 싸워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 위해 싸우게 하라는 신앙이므로 그릇되다. “전부를 하라,”와 “아무것도 하지 말라,” 하는 표어 간의 차이다.

예를 들면, 케즈윅 지도자들은 주장하되 “구원은 (죄에서) 분투나 고통스러운 노력으로 얻어지지 않으며 진지한 결의나 극기로 되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이 만일 죄를 이기려고 무엇을 한다면 죄가 그를 이길 것이다. 사람은 “단지 하나님으로 그 인격을 붙잡으시도록 그에게 기회를 드리기만 하면 된다. 성령께서는 그 인격을 자유롭게 해방시키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시도록 하기까지는 할 수 없다.

한나 휘톨 스미스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생활의 비결]에서, 신자는 주께 완전히 내맡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기의 생명을 마치 토기장이 손안의 진흙과 같이 창조주의 손안에 맡기고 수동적이어야 한다고 한다. “토기장이가 일을 다 해야 한다.” “우리의 처지를 주의 손에 맡겼으니 우리는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이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곧 만약 우리가 스스로 짐을 지면 주께서는 져 주시지 않는다.”

트럼불은 그의 승리의 생활 운동에서 “가만 두라, 하나님이 하시도록” 하는 표어를 강조했다. 또한 “쉽지 않으면 좋지 않다.” “무릇 내가 얻기를 노력함으로 얻어야만 한다면 그것은 참 값진 은혜가 아니다.” “우리는 죄를 안 지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노력은 “그러한 승리를 못 거두게 할 수 있고 또 실제로 못 거둔다.” 승리가 얻어질 때는 “전투에 의한 승리라기보다 자유에 의할 것이며” 모든 “죄악된 충동”으로부터 “노력 없는 자유”다. “그러므로 노력을 그치라. 그가 모두 하시도록.”

이러한 운동에서는 종종 이차적 축복이 강조된다. 사람이 아무 행위 없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稱義)에 그리스도를 받는 것처럼 성화 시에 그가 칭의를 받는 믿음과 구별되는 별개의 믿음의 행위로 재차 그리스도를 받는다고 가르친다. 칭의 시에 신자는 순간적으로 완전히 그리스도를 받는 것과 같이 성화에서도 점차로 되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눈 깜박일 새에 그리스도를 받는다고 그들은 믿는다. 차이는 처음엔 그가 그리스도를 자기 구주로 받으나 둘째 번엔 모든 알고 있는 죄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주시는 주(主)로서 받는다. 이것이 소위 이차적 축복에 의한 즉각적인 무죄 – 완전이란 것이다. 그러나 죄에 대한 승리를 위해서 제시된 이 방안은 둘 다 비성경적이다.


2. 성공적인 성경적 해답

이제 우리는 유일하고 성공적인 해결책 곧 성경적 해답이 무엇인지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자력으로 전심 분투하는 것으로만은 거룩함을 결코 찾지 못한다. 그 외의 어떤 것이 필요하다. 곧 초자연적 도움이다. 또한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으로 분투함이 없이 초자연적 도움에 의지하는 것만으로도 승리를 얻을 수는 없다. 그러나 죄에 대한 승리는 피상적으로 이 둘의 결합인 듯이 보이는 것에 의하여 얻어질 것이며 그럴 수 있다. 성경에 의하면 거룩의 비결은 두 겹의 활동 곧 우리 안에서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우리의 일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길이다.

(1) 성령의 중생의 역사(役事)

우리의 생활에서 죄의 세력을 정복하는 데 우선적으로도 필요한 것은 성령의 중생의 역사다. 성령께서 우리 생명 안에서 일하시고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오사 거처를 정하신다. 우리는 신비한 방법으로 그와 연합된 것이다. 이것은 두 친구 간에 있을 수 있는 기억이나 감정 혹은 사랑으로 연합된 것이 아니고 존재론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생명 안에 오사 거하시며 우리와 연합된 것이다. 이 연합은 포도나무에 가지들(요 15장)이나 삼위에 있어 아버지에 아들(요 17:21)이나 몸에 머리의 연합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만큼 사실이다.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할 만큼 실제적인 일이다.

이처럼 성령께서 중생시키어 그리스도와 연합이 이뤄지면 그때 죄에 대한 승리 곧 점진적이 아닌 즉각적 승리가 따른다. 분명히 지상에 있는 신자 내에 죄의 완전한 근절은 없으나 순간에 얻은 승리가 있다. 그래서 요한은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요일 5:4)”라고 쓸 수 있었다. 또한 바울은 강하게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롬 6:14)”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 죄는 정복되었다. 죄인이 승리한다. 물론 그가 범죄할 것이나(요일 1:8) 그의 의지에 반(反)하여 그리할 것이다.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7) 때로는 그가 아무 소망도 없고 죄에 대한 승리자이기보다 패배자인 듯 보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성령으로 나서 그리스도께 연합된 자는 자신을 죄에 내맡길 수 없다. 왜냐면 그는 죄에 대하여 죽었고 죄가 그를 주장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죄가 어느 기간 여러 모양으로 승리할는지 모르나 종국에는 어떻게 해서라도 죄를 완전히 멸할 것이다. 사단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그의 운명은 결정적이다. 그러나 그동안 그는 싸우며 떨어져 가는 것이다.

그 승리는 1945년 일본에 대한 연합군의 승리에 비교할 수 있으리라. 승리는 얻었다. 일본은 항복했고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평화 조약이 조인되고 일본군의 태반이 항복한 뒤에도 미군이 섬들을 점령하려고 했을 때 전투를 계속하고 있던 군인들이 있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을 한 자의 생명에서 승리는 이미 얻어졌다. 사단과 죄는 패배했다. 그러나 아직도 게릴라 전투가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때로는 대규모적으로 일어나나 승리는 조인되어 반항(조)의 마지막 잔재가 청산되기까지는 시간 문제일 뿐이다. 이런 성경적인 뜻에서 승리의 생활은 가능하다(요일 5:4).

성령의 성화하는 일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중생과 꼭 같이 신비다. 다만 몇 가지를 말할 수 있다.

(2) 성령의 성화의 역사

성화는 주로 성령의 일이다. 전에 말한 것같이 영적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결합하는 데서 오며,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령뿐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도 신자 안에 거하신다 하셨으며(요 14:23) 삼위의 역사를 나눌 수 없음을 아는 바이나 성경은 성화가 주로 제삼위의 일이라고 표시한다. 그는 중생시키시는 분이며(요 3장), 새롭게 하며(딛 3:5), 거룩하게 하며(살후 2:13; 벧전 1:2), 인도하며(롬 8:14), 사람 속에 거하며(요 14:17; 롬 8:9; 고전 3:16), 사람의 마음에 편지를 쓰신다(고후 3:3). 그리고 바울은 분명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고 한다. 이 구절들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승리의 생활을 하려면 성령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가리킨다. 성령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는다. 즉, 그의 생명을 나눠 갖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사람 안에 거하여 그를 거룩히 하려면 성령을 통하여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나 성부께서 내재(內在)하여 직접 매개 없이 성화시키지 않고 성령의 내재를 통하여 하신다. 성화는 주로 제삼위의 일이다.

(3) 성령의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 역사

이 성화의 특성은 중생에서와 꼭 같이 성령께서 사람의 바로 중심 혹은 영혼을 움직인다. 그는 도덕이나 합리적 설복을 사용하고 성화는 사람으로 하든지 말든지 그에게 맡겨 두는 것이 아니요 그의 기본 성질을 움직여 사람이 협동할 수도 항거할 수도 없는 잠재의식, 영혼의 깊은 곳에 작용한다. 결과는 선행이 따른다. 나무의 열매는 그 성질에 좌우되며 마음에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 나기 때문이다(잠 4:23). 성화에 있어 성령께서 우리가 저항할 수도 없는 영혼의 잠재의식의 영역에서 일하시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항상 저항함으로 우리는 결코 성화되지 못할 뻔하였을 것이다.

(4) 전인적(全人的) 성화의 역사

성화에 있어 성령께서는 사람의 전체가 변화받게 하신다. 예를 들면, 의지만을 거룩케 하여 선행을 결심케 하되 선을 깨닫지 못하거나 선을 사랑하지 않게 하는 법이 없다. 사람의 전부 곧 그의 의지와 감정과 이해력을 다 거룩하게 한다. 신생(新生)에 있어 완전한 성화를 주시지는 않지만 사람의 전체를 변화시켜서 전 존재로써 거룩한 길을 출발시키는 성화를 주신다. 완전하게 창조된 아기의 출생 및 성정과 유사하다. 아기는 비록 작기는 하지만 마음과 몸의 전 기능을 가졌다. 그의 손톱은 자그마할지 모르나 완전하게 만들어졌다. 손가락, 발가락, 귀, 눈썹, 또 내부 기관이 충분히 발육되지 않았어도 있어야 할 수(數)는 다 갖춘 것이다. 같은 모양으로 성령께서는 사람의 전체를 중생시키고 성화시키신다. 겨우 시작에 불과할지라도 사람의 각 부분이 변화받는다. 영적 이해력이 의지를 무시하고 자라지도 않고 그의 의지가 감정을 저해하고 발달치도 않는다. 각 부분에서 자란다. 그는 각 부분에서 완전하다. 단지 정도에서 불완전할 뿐이다.

이 성령의 일의 포괄성은 마음이 사람의 전 활동을 지배한다고 말하는 잠언 4:23이나 예수께서 마음에서 나온다는 모든 악을 마가복음 7:20-23의 구절에서 추론할 수 있다. 사람의 가장 심층부 곧 그의 심장 혹은 영혼이 변하면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것도 역시 변할 것이다. 이는 성경에서 의지와 지식과 감정이 각각 거룩해졌다고 말함은 여러 곳에서도 볼 수 있다.

(5) 성화의 점진성

성화에 있어서 성령의 일의 특성은 그 과정의 점진성(漸進性)이다. 사람은 결코 땅 위에서 즉각적이며 죄 없는 완전을 얻을 수 없다. 자기의 죄 많음에 맞추어 하나님의 수준을 낮추는 사람만 자기가 완전하다고 그릇 생각한다. 성경은 사람이 죄의 세력으로부터 갑자기 벗어나는 것이 아니고 오랜 싸움 끝에 구원이 온다고 증거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 과정이 느리고 때론 빨라지지만 아무튼 일정한 기간을 요하는 일이다. 이미 고찰한 바와 같이 요한은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라고 하였다. 바울은 계속적으로 신자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죄와 사단과의 끊임없는 싸움에 대하여 말한다. 그리고 배드로도 “은혜와 지식으로 뛰어들어 가라.” 하지 않고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고 하였다. 이는 분명히 성화가 점진적 과정임을 보여준다.

(6) 성화의 과정이 완성되는 순간

그러나 이 점진적 과정은 죽는 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완성될 것이다. 하늘나라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는 죄가 없으며, 죄가 완전히 폐하여질 것이기 때문이다(계21:27). 그러므로 신자가 죽어 바로 하늘나라로 갈 때 성경에서 명시하는 대로 성화의 과정은 순간에 완성되고 일초도 못되어 죄없이 완전케 된다[눅 23:43; 히 12:23-개혁주의 신행협회 출간, [소교리 문답 강해](184쪽, 제 37문답)와 [불멸의 생명] 참조:편집자 주].

이와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께 연합되는 성령의 계속적인 일이 죄에 대한 승리, 비록 그것이 쉽지는 않으나 그 승리를 위해 불가결의 조건이다. 우리가 성령과 그리스도 안에 거함이 필수요 근본이다. 다른 방도가 없다. 그렇지 않고는 부분적인 승리일지라도 얻을 수 없다. 굳은 결의, 결심, 고통스러운 노력도 성령과 그리스도 없이는 쓸데없다. 그 같은 방법으로 승리를 거두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마치 씨나 작은 사과를 어느 나무에 붙여 놓고 아름답고 붉고 즙 나는 사과를 내려고 하며 그것들이 자라기를 바라는 사람과 같다. 그런 외부적인 노력은 성공하지 못한다. 차라리 바른 성질, 사과나무의 성질을 가진 나무를 골라야 할 것이다. 그리고서 적당히 재배하면 그 나무는 자연스럽게, 그리고 쉽게 좋은 사과를 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하신 대로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서 그로부터 생명과 생명력을 받아 자라 포도를 맺는 것과 같이 신자도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 그와 성령으로부터 내적 힘과 생명과 선행을 할 힘을 얻는다. 그래서 절대로 묵고 마르고 죽음 막대기로부터 포도를 낼 수 없듯이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셔 생명을 주지 않으시면 거룩하게 되기는 불능하다. 우리는 그리스로부터 죄를 이기는 힘, 우리 안에 없는 이 힘을 받는다.

그렇지 않고 외적인 수단 곧 금욕이나 단련이나 도덕적 훈계나 벤자민 프랭클린의 반성 목록 등, 성령 없이 자력으로 하는 수단으로 죄를 정복하려고 함은 마치 묘목(苗木)의 껍질을 늘리고, 가지를 잡아당기고, 줄기를 들어 올림으로 큰 나무로 만들려 함과 같다. 그런 외부적 방법으로 강제될 수 없다.

봄철에 나무들을 보면 성경적 방법을 알 수 있다. 죽고 마르고 바삭바삭하며, 갈색이 된 잎사귀들이 아직 가지들에 붙어 있다가도 생명이 내부로부터 발현하자, 그 묵은 잎사귀는 자연히 떨어지고 새롭고 파릇한 새싹이 나타나 시초엔 작으나 점점 완전하게 모양을 갖추어 성숙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성령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거하실 때 우리에게 능력과 생명을 주심으로 옛 죄는 하나씩 떨어지고 대신 비록 새싹과 같이 작지만 주님을 닮은 새 덕(德)들이 생겨 점점, 그러나 확실히 자라간다.


이와 같이 성화는 큰 결심이나 의지력으로써 내적 능력의 근원과 별도의 외적 수단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오직 우리 안에서 다스리시는 성령과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신자 아닌 자들이 갖지 못한 바로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케 되는 것이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8)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여기에 능력과 승리의 비결 곧 성공의 길이 있다.

이제는 범하기 쉬운 다음과 같은 비성경적인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하자. 승리가 성령에 의해서만 얻어진다면 우리는 전적으로 그에게 맡겨야 한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죄를 극복하기 위해 최대한으로 힘써 일하여선 안 된다.” 우리는 “그(성령)로 다 하시게 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격을 맡으시게 하고 우리 자신은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한다. “우리는 죄짓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지고 말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수동적인, 노력 없는 승리를 얻어야만 한다.”


3. 성경적 두 요소(수동적.능동적)의 결합

그리스도와 성령 없이는 승리가 불가능함은 참말이다. 그분들이 우리 마음 안에 거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전 성경은 우리 자신이 우리 편에서 행하기를 촉구(促求)한다. 그렇다고 성령의 일이 우리의 활동을 불필요하게 하지 않는다.

중생에서 신자는 수동적일 뿐이다. 그가 하는 바가 아무것도 없다. 그는 다만 태어나는 것뿐이요, 출생에 있어 협력하지 않는다. 아기와 꼭 같이 아무것도 보태는 것이 없다. 그러나 성화에서는 추가된 일면이 있다. 사람은 수동적이며 동시에 능동적이다. 확실히 사람의 생명 내에서 잠재의식의 영역, 그 마음에서 주권적으로 역사(役事)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므로 사람은 이 일에서 절대적으로 수동적이다. 사람이 성령이나 그리스도를 주관하지 못하며, 그들(성령과 그리스도)의 생명은 사람의 활동과는 상관없이 자신에게서 흘러나온다. 사람은 성화의 측면에서는 완전히 수동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은 매우 능동적이다. 신령한 생명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그 생명을 이뤄 나간다. 우리가 시계를 감아서 책상 위에 놓으면 제대로 똑딱거리며 가는 것같이 취급되지 않는다. 사람은 시계와 달리 의지와 감정, 지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사람을 성화시킬 때는 이런 기능들을 인정하여 사용하며 그들로 활동케 하신다. 따라서 성화는 수동적인 동시에 능동적이다. 그것은 은혜임과 동시에 의무이다. 성령께서 수동적으로 자기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주권적으로 내리시는 은혜요, 일단 성령을 받았으면 그 받은 자들이 행동에 옮겨야 하는 의무이다.

확실히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행치 않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행할 힘과 능력을 은혜로 주시는 한에서만 행한다. 이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반만 역사하여 우리를 발동만 시키고 나머지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100퍼센트 일하시고, 우리는 우리의 하는 모든 일에 100퍼센트 일한다 하겠다. 우리가 일할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시험을 물리치는 일이나, 적극적 선을 행하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나, 우리가 하는 윤리적인 행위 하나하나마다 성령께서 그것을 하도록 능하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것뿐이다. 또한 이것이 참이지만 우리가 최대한으로 노력하는 것은 우리의 엄숙한 의무이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 있거나" "그로 모두 다 하시게 하거나" "노력 없는 승리"를 구하여서는 안 된다. 성령은 가르친다. "열심히 하는 것 아니면 선하지 않다."고.

승리가 오직 성령과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얻어질지라도 성경은 우리를 항상 격려하여 죄와 마귀로 더불어 싸우라고 한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 6:12)",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요(엡 6:11,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1,2),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이러므로 모든 무거운 것과...벗어버리고...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히 12:1)”,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신자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하도록(마 5:48) 힘쓰라고 권고하는 이상과 같은 성경을 인용하자면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이 모든 성경 구절들은 신자가 행해야만 되고 무엇을 해야만 될 것을 지시한다. 다른 말로 하면 성화에는 매우 능동적인 면이 있다.

아마 빌립보 2:12,13과 같이 능동적이며 수동적인 관계를 더 잘 표현하는 구절은 없으리라. 여기서 바울은 가만히 앉아 있으라, 토기장이의 손에 있는 진흙같이 수동적이어라, 아무것도 하지 말라, 노력하지 말라, 단지 성령께서 모두 하시게 하라고 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강조하여 명확히 말한다. “일하라”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는 성화에서 능동적인 면, 사람의 의무와 책임에 대하여 말함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거룩히 되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노력을 발휘하라고 권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맡기라, 그가 다 하시리라, 우리는 힘쓰지 않으리라 하지 않고 바울은 그들이 그것을 성취하라고 명한다.

그러나 수동적인 면이 직후에 따른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그렇다 이루라! 네 가진 모든 것, 네 안에 있는 모든 것으로 이루라. 그것이 네 의무다. 그러나 잊지 말라!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심을.

거기에 성경적인 두 요소의 결합이 있고 성공의 비결이 있다. 만일 타 부분이 없이 한 부분만 시도되면 실패가 올 것이다. 성령 없이 힘쓰면 우리는 좌절하리라. 반면 모두 다 성령께 맡기고 힘쓰지 않으면 또한 우리는 실패로 마치리라. 그러나 성령에 힘쓰는 것을 합하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리라. 거룩한 생활의 비결은 이 결합에 있다. 이로써 신자는 성공을 얻을 수 있다.


4. 최후 승리를 위한 3대 촉진제

완전무결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신자가 취하여(물론 순전히 성령의 은혜로) 마지막 승리를 촉진시키는 데 도울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중요한 방법 셋을 제시하고 싶다.

(1) 기도

자기 생명 안에 성령과 그리스도의 충만한 임재를 위하여 기도할 일이다. 성령께서 우리로 성령과 그리스를 구하여 믿음으로 기도하도록 하심이 사실이나 우리가 그의 내적 임재를 믿음으로 구하면 구할수록 우리의 생명 가운데 더 오시는 것이 성경의 원리다. 왜냐하면 믿음은 성령과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 손이 우리 몸을 위하여 양식을 취하는 도구이듯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의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7:38,39) 하셨다. 바울은 에베소 인들을 위하여 기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엡 3:17) 하였고 갈라디아 인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거하시며 자기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생명을 누린다(갈 2:20)고 선언했다. 이와 같이 믿음은 성령과 그리스도가 충만히 거하시는 열쇠요 따라서 죄를 이길 능력을 얻는 열쇠다. 우리의 생명에 성령께서 충만히 거하시도록 믿음으로 기도하자. 그러면 받으리라.

기도는 단순히 하나님께 대한 경건한 충성이나 감사의 표시만이 아니라 능력의 수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르게 기도하는 것이 항상 필요하다. 예를 들자면, 한 요구를 가지고 다시금 하나님께 나가는 꾸준한 태도가 필요하다. 또한 대답을 원하나,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허락지 않은 시리라고 생각하면서 하는 것이 아닌, 그가 우리 기도를 들으시라고 믿고 기대하면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히 11:6). 그렇지 않으면 믿음이 아니다. 믿음에는 지식과 아울러 신뢰하는 요소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과 그리스도의 충만을 주실 수 있다고 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가 그렇게 하시리라고 신뢰해야 한다. 우리가 이 기대와 신뢰를 가지고 갈  때에 자기의 선하고 거룩한 은사를 주시기를 좋아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충만을 주심을 볼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최대하여 대승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이기기 위하여 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안에 거하시기 위하여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첫째로 긴요한 일이요 중요한 방법이다.

(2) 말씀 묵상

하나님의 말씀을 홀로 묵상하는 일이다. 어린아이의 경우 외에는,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별도로 일하시지 않는다. 그 말씀을 통하여 일하신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로 온 은혜의 방도를 소홀히 하고 우리에게 무엇이 거룩한 것인지 보여 주는 유일한 책을 별로 읽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거룩해지고 하나님의 뜻을 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성경에서 우리는 우리의 거룩한 모범, 예수 그리스도를 본다. 우리 자신의 생명을 위해 씌어진 교훈이 밝히 혹은 내포(內包)되어 나타나 있다. 만일 우리가 아들의 형상을 닮을 것이면 우리는 성경에서 그와 친숙해져야 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교훈을 성경 매장에 기록된 대로 지키려면 먼저 읽어야 한다. 우리는 게으르게 성령께서 기적적으로 계시를 또 보여 주리라고 바랄 수 없다. 아니다. 우리는 그 말씀으로 가득 차야 한다. 성령께서 그 말씀을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씀을 먹을 때 성령께선 우리 안에서 역사하사 우리로 더욱더 성화되게 하신다. 예수께서 분명히 진리로 우리가 거룩하게 된다고 하셨다(요 17:17,19). 베드로는 이것을 확증하여 “순전하고 신령한 젖(말씀)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하였다. 그러면 우리로 우리 하냐 남아 있는 죄를 이길 수 있게 하는 둘째 번 구체적인 일은 철저하고 개인적인 말씀의 묵상이다.

(3) 공중 예배 생활 충실

거룩한 생활을 추구하는 신자는 공중 예배에 충실할 것이다. 말씀의 진실한 전파를 통하여 성령은 말하며 죄를 책망하여 거룩함에 인도할 것이다. 성례에서 또한 그의 믿음이 굳게 됨을 발견할 것이다.

예를 들면, 목사가 성화에 대하여 설교하였는데 어떤 죄와 싸우고 있던 신도 중 몇이 교회에 나오지 않고 집에 머물렀다고 생각하자. 그렇다면 그들은 바로 자기들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의 공적인 선언을 듣지 못하게 되면 그만큼 성장이 뒤지게 된다. 성령께서는 말씀의 공적인 해명을 통하여 일하신다. 그래서 거룩히 되고자 하는 신자는 모든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부지런할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길을 따라가면 죄에 대한 승리가 있다고 가르친다. 우리 생활상 어느 죄든지  - 가령 분노, 참지 못함, 미움, 시기, 음욕, 술 취함,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것, 그 외 어떤 죄든지 이긴다. 성화는 이중(二重)의 역사다. 첫째로 100퍼센트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는 그의 주권적인 은혜를 통하여 성령의 내주를 체험해야 한다. 그가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실패하기 마련이다. 그가 함께하시면 우리는 모두 할 수 있다. 우리는 죄를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의 근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성화는 사람이 결심하여 꾸준히 추구하는 일로 이뤄진다. 하나님의 은혜로 완전을 향해 최선을 다해 싸워야 한다.

이 두 요소-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를 묶으라. 그러면 결과는 죄에 대한 승리다. 분명히 죽음 이편에선 죄는 근절되지 않는다. 그러나 완전한 거룩을 향해 달려가면 현저하고 분명한 진보가 있을 것이며 죽음 건너편에서 완성될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더 높은 생활”의 비결이요 이것이 “승리의 생활”이다.


에드윈 H. 파머의 ‘감동적인 성경적 성령론’에서(149-170p)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이와 같이 오늘날 성령에 가장 엄청난 역사의 하나는 버림받은 자들 중에서 그들의 악행을 제지하여 인생을 살 만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육에 속한 자는 겉으로는 하나님 법에 맞는 일을 할 수 있으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공경치 않고, 또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순수한 동기에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듭나지 않은 자의 모든 행위는 죄인 것이다....

보편 은혜의 영역에서 성부, 성자의 역사와는 구별되는 성령의 삼중의 역사가 있다. 그는 거듭나지 않은 자를 죄에서 억제하고, 그로 선행하도록 권장하며, 위대한 문화적 성취를 위한 자질을 구비시키신다....

죄인에게는 구원을 받기 위하여 보편 은혜뿐 아니라, 특수 은혜가 필요하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독생자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 그러므로, 성령의 보편 은혜 안에서의 역사에 감사하되 단 한 사람도 그것으로 인하여 구원받은 줄로 잘못 생각하지 말 일이다. 오직 구원은 자기 죄를 고백하고 그의 옛 길에서 돌이켜 예수께 구속하여 주시기를 구하는 자만이 얻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에드윈 H. 파머의 '성령과 보편 은혜' 출 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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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의미, 부활의 의미>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 함이니이다 하시더라. (누가복음 23장 34절)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 일곱 개를 흔히 ‘가상칠언’이라고 하며 그 중 누가복음 23장 34절을 맨 먼저 하신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저희’는 누구를 뜻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내어준 빌라도와 또 예수님을 처형하는 군병들일까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치고 둘러서서 조롱하며 비방하는 자들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다만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랬다면 예수님은 다만 그 자리에 있던 악한 자들만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자신의 몸을 드린 꼴이 될 것입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떠난 모든 죄인들,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저희 죄를 깨닫지 못 하고 갈 바를 알지 못 하고 제 갈 길로 가는 모든 무리들, 온 세상 모든 죄인들을 사해 달라고 간구하신 것입니다. ‘저희’ 속에는 저와 또 여러분, 모든 인류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오셨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이 세상 모든 죄인들을 위한 화목제물로 하나님께 드린 제사였습니다. 그것은 구약성경이 예언해 온 마지막 완전한 제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의 피값이 온 세상 죄인들, 온 인류의 값 보다 가치가 못 하였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제물을 받지 않으셨을 것이고 오히려 예수님께 진노하셨을 것이고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지 못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곧 성자 하나님이시므로 그 값어치를 온 세상 죄인들, 온 인류의 값어치와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은 그 제사를 받지 않으실 수가 없었고, 그 제사를 받으시는 이상 온 세상 죄인들, 온 인류의 죄를 사해 주시지 않으실 수 없었고, 예수님께서 짊어지신 인류의 모든 죄가 사해졌으므로 또한 죄와 사망이 예수님을 죽음 가운데 묶어 잡아둘 수가 없었고,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시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제사를 받으셨다는 것과 모든 죄인들, 온 인류의 죄가,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짊어지고 죽으셨던 인류의 죄가 사해지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면 또 그렇습니다. 사함 받은 인류의 죄가 또한 우리를 사망 가운데 묶어둘 수가 없을 것이며, 따라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크리스천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지만 다시금 논리와 순서로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우리 죄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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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상기(上記)한 말씀은 하나님의 논리 중 한 가지를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전제에 대한 결론이다. 그 전제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위해 그리스도를 내어주셨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논리를 보여 주는 말씀들이 많이 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마 6:3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롬 5:10)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그러므로 여기 이러한 성경 말씀 속에 있는 이와 같은 논리는 너무나도 확실하여 우리의 머리와 가슴을 압도해 온다.

성경 말씀은,, 사랑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성품을 말할 때, 자기 아들까지 내어주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우리의 머리를 깨우치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위로와 확신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자기 백성들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은혜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보증인 것이다. 큰 것을 주셨으면 작은 것은 얼마든지 주실 수 있다. 그분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신령한 은사를 주시겠다는 사실은, 앞으로 그때 그때 필요한 모든 은혜를 베풀어 주시겠다는 것을 보장하는 것이다.

ㅡ아더 핑크의 '그리스도인을 위한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에서ㅡ 

출처: 생명나무 쉼터 / 한아름 발췌

 

 

 

 

영광의 불꽃
             최송연

태초부터 약속되신 분,
약속대로 성육신 하시어
몸으로 그 약속 성취하셨네

양발 양손에 대못
머리에 가시관
옆구리에 날카로운 창
메마른 입술
'다 이루었다' 선포하시고

삼 일 삼 야,
어둡고 긴 죽음의 터널을 지나
영광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신 주(主 )!

찬란한 부활의 아침
죄의 쇠사슬
끊어내는 승리의 노래
죽었던 영혼 다시 살리셨네

핏빛으로 불타는 주님 사랑
영광의 불꽃 되어
내 가슴 속에 피소서, 영원토록

 

  
출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

 

 

Happy Easter, friends~!!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블로그 식구님들,

여러분들의 끊임없는 성원과 기도에늘 

감사한 마음 전해드려요, ^^*

 

가정과 개인에게 부활의 주님께서

풍성한 복으로 함께 하시기를!!

모두 모두 행복하세요. ^^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하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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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얼룩진 그 길, 비아돌로로사/ 최송연

 

 

 

캄캄한 하늘이 찢어질 듯

흑암을 갈라

번득이며 달리는 번갯불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소리는...

 

희생제물로 내어준 

사랑하는 외아들에게서

고개를 돌려야만 하는

성부 하나님의 신음소리요,

피맺힌 절규임을 아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어라

 

"포기하겠노라."

선언하시면 한순간에라도

그 치욕의 십자가를 박살내고

성자 하나님을 구해 내고파

하늘에서는 열두 영 더 되는

충성스러운 천군과 천사들

눈물 흘리며 대기하고 있었네

 

험한 갈보리산 그 십자가에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벌거벗기운 채

양손과 양발에 박힌 대못이

부드러운 살점을 찢으며

뼈속 깊이 쪼개었는데...

 

상처에서 나온 검붉은 핏덩이엔

사막의 파리떼가 

윙윙대며 들러붙는 괴로움

"네가 그리스도여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도 구하고 우리도 구하라"(눅 23: 39)

 

비루한 행악자들의 조롱과 야유

유대인들의 침밷음과 멸시도 

참아내셔야만 하셨네

 

이글거리는 불볕 태양과

사정없이 몰아치는 사막의 모랫바람은

갈증을 더욱 부채질하는데...

"목마르다!" 절규하시는 메마른 입술에는

쓰디쓴 신 포도주가 물을 대신하였고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가시관 사이로 흐르는 선혈은 피눈물 되어

창백한 두 뺨을 적셔흐르는데

 

많은 황소들과 바산의 힘센 소들과(시 22: 12)

개들이 둘러 진 쳤으며(시 22: 16)

악한 무리가 수족을 찌르고

그분의 겉옷과 속옷마저

찢어 나누며 낄낄거리는구나(시 22: 18)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어린 양,

영혼과 육의 분리되는 고통보다

십자가에서 갈기갈기 찢기는 그 고통보다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는 그 순간이

가장 큰 고통의 순간이요,

모진 형벌의 순간이었음을 그 누가 알랴

 

"다 이루었다!"

그리스도의 마지막 그 한 마디는

사탄의 머리를 박살내 버리는 표효,

사탄에게 속박되어 끌려가는 너와 나의 죄

억겁의 쇠사슬을 끊어내고

죽음의 형벌에서 해방시켜주시는 
승리의 노래였으라

 

피로 얼룩진 그 길 비아돌로로사

그 눈물의 길을 걸으신 

나의 주여,

 

당신의 그 거룩한 희생을...

당신의 그 아픔을...

당신의 그 수난을...

당신의 그 큰 사랑을..

성령님께서 내 가슴에

깊이 각인시켜주시는 이 밤

나는 울며 통곡하며 ...

온 밤을 눈물로 하얗게 지새웁니다

 

 

 

==========================================================================================

 

후기: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도록

메시야의 고난 예언, 성취,

성부, 성자 , 성령님의 사역까지..

보이지는 않으나 영의 세계 저 너머

천군천사들의 충성심과 눈물까지...

 

부족하지만 저로서는 일생일대의 대작을 꿈꾸며

기도하며 밤을 지새우며 

눈물로 정리해 본 것입니다

벌레보다 뫃산 인간, 나의 구원을 위해서

성삼위 하나님께서 람께 일하고 계심을 감사드리며 찬양합니다!

주께서 영광받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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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사람이 되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을 조금이라도 가지셨더라면, 일부라도 감춰 두었다가 꼭 필요할 때 쓰셨더라면, 예수님의 생애나 십자가의 고통은 한결 가볍고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도 아니고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시는 대속(代贖, Redemption)도 아니고 일종의 쇼였을 것입니다.
세상 모든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람이 되신 배고프셨고 힘드셨고 시험을 받으셨고 마귀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연약한 인간이 되신 예수님은 늘 기도하시며 성령님의 도우심에 의존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그렇게 이 땅에 보내실 때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만일 연약한 인간이 된 하나님의 아들이 구원사역에 실패한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셔야 하는 것일까요?
마지막 날에 죄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아들도 함께 심판하셔야 할까요? 아니면 심판을 포기하고 구원도 포기하고 하나님의 주권도 포기하고 사단마귀가 영원히 세상을 다스리도록 헌납해야 할까요?
“아들을 심판해? 그렇게는 할 수 없어. 차라리 하나님의 지위를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그것은 절체절명의 모험이었고 결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두루마리 책을 일곱 인으로 인봉하셨습니다.
아들이 구원사역에 성공하고 돌아온 다음 그 아들이 인봉을 떼도록 말입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어린양만이 그 두루마리 책의 인을 떼도록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
사도요한은 크게 소리쳐 울었습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 심판의 두루마리 책의 인봉을 뗄 자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두루마리책의 인봉을 떼기에 합당한 자가 없다면 심판은 없을 것이며 사단마귀의 권세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 장로 중 하나가 사도요한에게 말하였습니다. “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 이기신 어린양이 떼시리라.”
어린양 예수님이 나아가 두루마리 책을 받아 들었습니다.
이제 그 일곱 인을 뗄 때마다 재앙이 쏟아지고 무서운 심판이 시작될 것입니다.
이제 사단 마귀는, 죄와 악은 영원히 징벌 받고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세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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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맞이 꽃 연정/ 최송연

 

어스름 밤이

스르르 깊어갈 제면

가슴에 서린

그리움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네

 

긴긴 낮 동안

얼마나 애탔으면

그리운 임과 하나 되고파

달빛으로 샛노랗게 옷 입었나

 

사랑이란 그런 것

사랑하면 하나 되고 싶고

하나가 되려면

同 색으로 바꿔야만 하지

 

고난도 사랑도

모두 같은 색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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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기다리는 마음/최송연

 

 

아직은 살얼음판인 개울을 따라
하이얀 안개구름을 타고 오십시오,

 

나는 한 마리의 꿈꾸는 새가 되어
힘차게 날갯짓하며
하늘 높이 날아오를 수 있리이다.

 

모질고 가파른 언덕 너머
살랑이는 봄바람이 되어 오십시오,

 

나는 살포시 돋아나는 새싹 되어
찌들은 헌 옷일랑 훌훌 벗어 던지고
당신의 숨결을 따라 힘차게
돋아날 수 있으리이다.

 

얼어붙은 온 누리,
아직도 캄캄한 들녘 사이로
새벽이슬 되어 사르르 내려오십시오,

 

나는 촉촉한 보리밭 이랑 사이로

깊이깊이 뿌리를 내리고
오늘보다 근사한 내일을
일구어 낼 수 있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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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해 아침의 기도 /최송연

 

주님,

새해에는

주님 뜻보다

내 감정이 먼저 앞서지 않도록

지켜 주소서

 

고난의 폭풍우 앞에서

뒤로 물러가지 않고

도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강한 용기와

주님만을 의지할 수 있는

굳건한 믿음을 더 하시옵소서

 

주님,

새해에는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이

내 마음속에 결코,

자리잡지 못하게 하시옵고

가난한 자의 눈물을

외면하지 않도록 항상 

열려진 마음이게 하시고

 

이웃에게 상처주는 말들은

나의 입술에서 온전히

제거하여 주시며

 

괴로워 우는 자들을 사랑하되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사랑할 수있는 참사랑이

샘물처럼 솟아나게 하옵시고

  

내게 상처를 주는 사람마저

보듬어 안을 수 있는

주님 닮은 넓고 큰 가슴,

재창조된 生으로 나를 이끄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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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이 오신 12월이면/

                             최 송연

                                                                                
                                     
주님이 오신 12월이면 
 
난 생각하게 되네...

못다한 충성                            
베풀지 못한 사랑
                   
좁은 마음
                               
외면해 버린 충고

이  모든 것들이                     
그냥 지나쳐버리기엔...
         
하늘을 향해
너무 부끄럽지 않으냐고...

주님이 오신 12월이면           
난 기도하게 되네...

충성은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는 것임을...
     
                   
가난한 이웃은 항상 
               
내 곁에 있는 것이 아님을

내게 아픔을 주는 이의 껍질 속엔                                    
크나큰 상처가 있음을...

비록 힘이드는 말씀일지라도 
모두 나를 살리기 위한
충고임을
 깨닫게 해 달라고...

주님이 오신 12월이면           
난 간절히 소원하네...

자신을 값없이 내어주신         
주님을 닮고 싶노라고....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

     *오래전 극동방송에서 채택된 기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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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충고/최송연

가을이 그대를 찾거든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가을 숲 속에서 들리는

노랫소리도 있으니까요

 

비록 저 찬란함이 잠시

보이는 것이긴 하여도
오늘을 위해 그대가

흘린 땀이 얼마던가요

 

길가에
떨어져 뒹구는 낙엽도
열매를 위한 몸부림
차디찬 겨울이 오면
그 모습마저도 사라지리니


산을 태우는 붉은빛 
그 화사함을 주신 분께 감사하고
종국엔 떠나야 할 인생임을

기억하세요
이 가을이 다 지나기 전...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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